[월례발표회 참관기] 박지용 선생의『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하여
?[2011년 4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
발표자: 신승철 (동국대)
박지용 선생의『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1.
철학자들에게는 야릇한 흥분을 주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철학토론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런 결론도 없이 끝나고, 생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철학적 토론에 저렇게 흥분하는 사람들을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에게 결론이 없다거나, 생산성이 없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학자들에게 철학적인 토론은 그 자체로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준다. 그것은 마치 투우장에 나간 투우사의 야릇한 흥분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야 그런 투우를 직접 본 적은 없고 그저 영화에서나 보고 짐작하는 것이지만, 뒷다리로 버티고서 커다란 눈으로 노려보는 소 앞에서 칼을 빼들고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투우사의 긴장된 몸에는 리비도가 파릇파릇하게 돋아난다. 그런 리비도가 철학토론에 나선 철학자들의 몸에서 느껴진다 해서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철학자라는 인종은 독특한 유전자를 타고 난 것이 아닐까 한다. 무슨 철학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크로포트킨은 우애 협력의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하고 더구나 요즈음은 별별 유전자가 다 신문지상을 장식한다. 일본인에게는 가미가제 유전자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번 원전 사건을 보면 그들은 모든 대안들을 굳이 다 물리치고 가미가제식 특공대를 조직해서 스파르타 300인 전사의 흉내를 낸다. 그건 가미가제 식의 행동이 그들의 유전적 본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학자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해서 뭐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나 역시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수많은 다른 길이 있었는데, 실제로 상당히 오래 그쪽으로 걸어가 본 적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그저 철학토론회나 심포지엄에 참여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니, 철학 유전자의 힘이 아니라 할 수 없다.
2.
그런데 자칭 한국 최대의 철학자 조직인 한철연의 월례 발표회에 참가했는데 도무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발표자와 사회자 그리고 회장, 딸랑 세 명이 나와서 이젠 아예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참여하니 이 사람들이 오히려 당황해 하니, 내가 오히려 민망할 정도이다. 혹이나 이 사람들이 내가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참가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사실은 바쁜 일이 있지만 오늘 발표 주제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억지로 시간 내서 참가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그것도 은근하게 풍기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들 철학자들은 서로 말은 안 해도 아니 서로의 변명을 짐짓 이해하는 철하면서도 다 알고 있다. 즉 우리들은 유전적 본성에 이끌리거나 아니면 강박증에 끌려서 철학토론회에 참가한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미 세 명이라면 충분히 많은 수인데, 나까지 참가했으니, 철학토론은 봄을 맞아 푸른 리비도처럼 생기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이 금방 퍼진다. 철학토론의 장이 섰다는 소문 때문인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정말 창피하게도 당구를 치러갔던 일단의 철학자들이 부끄러운 듯 당구대를 던지고 몰려들어 갑자기 좁은 월례발표회 장은 꽉 찬 느낌을 주었다.
3.
드디어 박지용 선생이 논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속으로 옛날에는 굳이 논문을 다 읽지 않아도 누가 논평을 통해 정리해 주었는데, 토론을 하기에 정말 모자라는 이 아까운 시간을 논문 낭독으로 다 보내다니 하고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눈으로 따라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이라는 논문 제목이 알려 주듯이 아무리 당대의 뛰어난 철학자라도 이런 철학논문을 한 번 읽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칸트라면 나도 약간 공부했고 더구나 숭고라는 개념은 여간 흥미로운 개념이 아니어서 여러 번 그 개념에 부딪힌 적이 있었기에 간신히 따라가기는 했지만 솔직히 중간에 맥을 놓치고 갑자기 졸음이 닥쳐와 꼬박 졸기도 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칸트나 숭고의 개념에 무관심했다면 읽는 도중 내내 졸았을 게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내 앞에 앉아있던 서유석 선생도 졸았다고 고백한다. 여하튼 읽기를 마친 다음 드디어 토론의 시간이 다가왔다.
4.
논문의 요지는 칸트의 숭고의 개념과 관련된다. 철학자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칸트는 숭고의 개념을 미감 판단과 구분했다. 그런데 칸트는 미감 판단은 예술을 대상으로 하지만, 숭고의 개념은 주로 자연에서 발견된다. 논자의 주장은 칸트의 숭고 개념을 예술적인 대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여기서 칸트의 숭고 개념이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이것이 자연의 몰형식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런 자연의 ‘몰형식’은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키는데, 이런 마비가 숭고라는 감정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순한 판단 마비가 아니라 판단 마비가 주관에게 일으킨 심정이 곧 숭고이다. 논자는 이런 측면에서 칸트에서 숭고의 대상이 객관적인 어떤 성질이라는 해석도 비판하면서 또한 숭고가 객관적인 전제 없이 일어나는 주관의 어떤 감정이라는 해석도 비판한다.
이어서 논자는 이 두 가지 전제가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논자는 칸트가 사용한 치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 두 전제 즉 자연의 몰형식과 주관의 감정 사이의 관련을 찾아보려 한다.
논자는 이 지점에서 료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특히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을 이런 숭고한 예술로 규정했다는 데 도움을 얻는다. 논자는 여기서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 속에 시간의 발생이 표현되며, 이것이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이런 시간의 발생은 칸트의 몰형식 개념과 연결되므로, 그렇다면 이를 통해 숭고가 예술적 대상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칸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
논자가 발표를 마친 이후 다들 한숨을 쉰다. 그 한숨은 승리자의 한숨이다. 그것은 졸린 것을 간신히 참고 견디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 아닐까? 드디어 투우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졸린 것을 참고 견딘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토론에 임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은 웬 일인가? 아차, 투우장에 들어가기 위해 칼과 망토와 소를 홀리는 베일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필자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칸트의 숭고라는 개념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말하자면 선무당이 칼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뒤 끔찍한 학살극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자.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했던 철학자들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니 양해를 바란다.
토론을 통해 논자의 논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려고 애썼으나 다들 숭고라는 개념 앞에서 판단 마비가 생겨난 듯 했다. 토론 도중 송석현 선생이 숭고 예술의 예가 된다고 하는 바넷 뉴먼의 그림과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의 뗏목을 프린트 해 와서 토론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토론이 어떤 결실을 얻기에는 다들 숭고 개념에 대한 가방끈이 짧은 것 같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집에서 초연하게 앉아서 정리해본 의문을 이 자리에서 박지용 선생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논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6.
우선 논자의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얼까? 아무래도 숭고의 전제가 되는 자연의 몰형식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그런데 자연에 몰형식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자연의 몰형식이란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선험적 인식형식에 기초한다. 이런 선험적 인식 형식을 넘어선 세계가 곧 물자체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불가능하며 만일 판단한다면 이율배반이 생긴다. 이런 물자체의 세계가 곧 자연의 몰형식이다.
우리가 자연세계 속에 이런 물자체의 세계는 직접 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자연 속에 몰형식이 출현한다면 이것은 논리적인 차원이 아니고 현실적인 차원이다. 예를 들어 우리 소시민은 돈을 셀 때 일억까지는 계산이 가능하지만 일조가 되면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런 일조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사유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유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사유불가능이 논리적 사유불가능성을 대신하는 경우가 칸트에게서 숭고의 전제가 되는 몰형식의 의미이다.
논자는 이런 대신의 관계를 치환(subreption)이라고 이름 붙였다. 논자는 이 관계를 설명하면서 ‘부정적인 현시’라고 규정한다. 즉 물자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나 부정적으로 표시해 줄 수는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칸트가 이런 치환의 구체적인 예로서 우상숭배 금지의 규칙과 이시스 신전의 비명에서 발견한다고 본다.
7.
몰형식에 관한 논자의 주장의 핵심이 제대로 정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을 전제하고 박지용 선생에게 몇 가지 물어보자. 기회가 되면 한철연 웹진을 이용해서 답변해 주기를 기대한다.
우선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이 왜 숭고하다는 것인지? 토론자 중에 이 그림을 보고 숭고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뿐일까? 다행히 송석현 선생이 프린트 해온 데에는 박영욱 선생의 설명이 붙어 있었다. 즉 이 그림에는 어떤 형식이 없는 그래서 자기 지시적인 질료만이 존재하므로 숭고하다는 것이다. 몰형식이라는 측면이 숭고와 연관된다는 것은 짐작가능하다. 하지만 그런데 왜 바넷 뉴먼의 그림에 있는 붉음이나, 사각형, 그리고 중간의 노란 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형식이 아닌가? 의문이다. 뭐 이런 의문에 대해서 내가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논자는 이왕 료타르를 끌어 들였으니,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둘째로 이런 의문이 든다. 칸트의 숭고 개념이 바넷 뉴먼의 숭고 개념과 연결시키는 수단은 소위 시간의 발생이라는 개념이다. 그것이 논자에 따르면 료타르가 그 그림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개념이 칸트의 역학적 숭고 개념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바넷 뉴먼의 그림에서 시간의 발생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의문의 초점을 이제 논자의 핵심 주장으로 옮겨가 보자. 사유불가능하다는 것은 대상과 개념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마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칸트에게서 미감 판단은 상상력을 강화하면서 생겨나는 쾌감이다. 그것은 인식의 쾌감이나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쾌감과 구분되는 미적인 쾌감이다. 그런데 만일 상상력이 마비된다면, 거기서는 오히려 불쾌감이 발생한다. 그것은 현기증, 구토, 역겨움, 고통에 가까운 심정이다.
그런데 숭고의 감정은 단순한 구토나 고통과는 구분된다. 거기에는 어떤 쾌감이 흐른다. 그런 쾌감은 어떤 속성을 지니는 것인가? 이 쾌감은 단순한 구토나 역겨움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8.
숭고의 개념은 자주 자유의지의 실현을 통해 얻는 쾌감과 연결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욕망의 만족이 만족감(pleasure)을 야기한다면 자유의지의 실현은 리비도적인 쾌감을 준다. (칸트에게서 자유의지의 이런 리비도적 성격 때문에 칸트와 사드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숭고의 경우가 물자체가 출현하는 부정적인 현상이라면 자유의지는 물자체(이 경우는 이념이라 한다)가 실현되는 긍정적인 경우이다.
물자체의 직접적인 출현은 칸트에게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자유의지는 요청에 불과하다. 그렇게 본다면 숭고는 칸트에서 부정적인 현상으로 그친다. 그것은 역겨움과 고통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숭고의 감정에 들어있는 어떤 쾌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헤겔이나 그 이후 프로이트 라캉 등에 이르면 물자체(또는 실재계)의 부정적인 출현은 곧 긍정적인 출현인 이념(이드)의 실현과 동전의 이면이다. 그러므로 숭고에서의 역겨움은 이념의 리비도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숭고의 심정이 더 적절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 숭고 개념과 관련하여 헤겔이나 프로이트와의 연관성을 논자가 좀 더 설명해 줄 수는 없을까?
9.
필자가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닐까? 굳이 박지용 선생이 아니더라도 필자의 이런 의문에 대하여 누군가 한 수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
토론이 끝난 후 오랜 만에 중국집에서 군만두와 배갈을 먹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물 밀려오듯 다가온다. 오래 전에 사라진 세계여, 이제 늙은이가 되어 밤이면 기억나지 않는 꿈에 사로 잡혀 아침이 되면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소년은 이미 늙었고,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밖에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의 감정 속에서 마시는 배갈은 정말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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