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불안한 시대의 단상 [썩은 뿌리 자르기]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그야말로 불안의 시대이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모두 열심히 일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삼키며 덩치를 키워왔다. 신자유주의는 그 결정판이라 할 만 하다. 서점에 널린 자기개발서에는 저마다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장밋빛 미래가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그들이 말하는 승리의 방정식 뒤에는 ‘경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다른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속에, 패배자들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다. 목표를 이루더라도 당장 승리한 현실을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당연히 승리자도 불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한 편에는 패배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공을 위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만큼 실패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간다. 경쟁률 증가를 멈출 줄 모르는 공무원 입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불안’의 시대에 ‘안정’은 점점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꿈을 좇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완전히 빠져서 당장의 생활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을 열심히 만들고 좋아하는 글을 써도 힘겨운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은 분명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꿈’ 역시 ‘돈’에 따라 줄을 세운다. 사람들은 꿈을 좇는 그들이 얼마나 행복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돈 안 되는 일에 미쳐 있는 철없는 사람들로 취급할 뿐이다.
이는 TV의 드라마만 봐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상위 몇%에 해당하는 재벌과 그들의 가족은 이미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지 오래이다. 행복의 열쇠를 ‘돈’이 쥐고 있는 한, 드라마 속의 재벌가 주인공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활수준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불안을 단숨에 제거할 사람은 재벌가의 사람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보통사람들이 재벌을 만날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 불안의 원인
불안은 불확실한 요인에서 비롯된다. 알랭 드 보통은 이 불확실한 요인들을 변덕스런 재능과 운, 고용주와 그들의 이익, 세계경제 등으로 나누어 말한다. 재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운도 마찬가지다. 운은 찾아올 수도 있고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개인의 생계는 고용주가 지급하는 소득에 달려 있다. 그러나 고용주는 이익을 추구하려 하고, 이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개인의 생계는 불안해진다. 고용주도 불안하기는 똑같다. 세계 경제의 불안이 주요 원인이다. 그러니 불안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불안의 해결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시장 기능에 의존하여 복지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다. 이미 사회는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가정은 구성원을 보살피는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무조건적인 경제 성장의 추구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현 정권의 대선 홍보문구였던 747 공약은 이미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되어버렸다. 상당수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군 가파른 성장이 영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무엇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인지 고민할 때가 온 것이다. 세계 경제 위기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최근의 복지국가 담론의 열풍은 이렇게 불안이 팽배한 사회에서 보편적인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담겨있다.
– 사회복지의 개념과 고대 동아시아 세계
복지란 무엇일까? 글자만 살펴보면 그냥 ‘행복’이고, 사전에서도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한다. 복지제도의 대상은 누구일까? 당연히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가치이지만,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들이 있다. 이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이다. 위켄덴(E.Wickenden)의 정의를 보면 더 명확하다. “사회복지는 주민들의 안녕에 기본적이라고 생각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사회질서가 더 잘 기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보조 조치들을 확실하게 해주거나 강화시켜주는 법들, 제도들, 혜택들과 서비스를 포괄한다.”
정치의 근본이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충족이라는 견해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도 존재했다. 제나라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창고가 가득차면 예절을 알게 되고, 입고 먹는 것이 족하면 영욕을 알게 된다. 백성들이란 근심과 고생을 싫어하니, 나는(군주는) 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란 가난과 비천함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란 위험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한다. 백성들이란 자신이 죽고 후대가 끊기는 것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이 수명을 누리고 후대를 잇도록 화육해야 한다.”(“倉?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民惡憂勞, 我佚樂之. 民惡貧賤, 我富貴之. 民惡危墜, 我存安之. 民惡滅絶, 我生育之.” 『管子』 「牧民」) 정치의 주체가 군주로 한정되어 있던 춘추 시대 인물의 말이지만 현대의 복지국가론에 비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예절이나 명예도 우선 기본적인 삶을 충족되고 나서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최소 조건은 먹고 사는 문제의 충족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예기』에서 공자는 유학의 이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큰 도(道)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를 공(公)으로 여긴다. 현인을 뽑고 능력자에게 일을 주어, 믿음을 키우고 화목을 닦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부모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말년을 잘 마칠 수 있게 하고 젊은이는 잘 쓰일 수 있게 하며,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무자식 노인과 장애인은 모두 부양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남자는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게 한다… 이것을 대동이라고 한다.” (“大道之行也, 與三代之英, 丘未之逮也, 而有志焉.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是謂大同.” 『禮記』「禮運」)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이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소외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학의 이상향은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관이나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행복도 이 세상에 있고, 불행도 이 세상에 있다. 대동의 세계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
맹자의 말은 한결 더 구체적이다. 그는 백성들에 대해 “일정한 수입(恒産)이 없으면 평상심(恒心)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관중의 말과도 유사하다. 선비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일정한 수입이 없어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지만, 평범한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 기본적인 삶이 충족되지 않으면 평상시의 마음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맹자는 누구나 같은 넓이의 농지를 분배받아 경작을 하고 세금을 내는 형식의 정전론(井田論)를 내세워 기본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균등 분배와 조세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맹자가 제시한 이상향은 모든 법도가 잘 이행되었던 주(周)나라를 내세워 한 말이다. 그러나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임무는 오늘날 복지국가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의 담당자가 군주에서 의회 정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최근 복지의 선별과 보편 논쟁은 가치보다는 재원 확보의 측면에 더 중심이 쏠려 있다. 선별과 보편은 다른 말로 풀어보면 차별과 평등 문제이다. ‘선별’이라는 말은 결국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 만든 제도라도 사각지대는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기준에 의한 ‘자격미달’은 상황에 따라 커다란 박탈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복지의 뜻이 행복이라면 행복을 누려야할 권리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서구의 복지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서구에서 ‘복지국가’라는 용어는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나치 독일의 ‘전쟁국가’ 또는 ‘권력국가’와 대비하여 연합국 측의 전후 재건 목표로 ‘복지국가’를 내세우면서 등장했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서 발생하는 빈곤문제 해결에 관한 논의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구빈법을 제정했고, 19세기 말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을 막고 중상층 노동자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결국 복지제도의 시작은 기존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보수언론들은 이 사실을 들어 복지의 원조가 보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지제도가 시작되는 시점만을 살폈을 뿐, 현대적인 의미의 복지국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현대 복지국가는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이하 사민주의)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민주의는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수정주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뒤 그 틀을 갖추었고,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결성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념적 좌표를 세웠다. 선거와 민주 등 기존 장치들을 사회주의 실현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혁명을 앞세우는 사회주의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민주의는 노동운동의 확대?발전과 더불어 발전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 한국의 복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국의 복지 상황은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 앞서 말한 서구의 사례와는 전혀 다르다. 한국의 복지정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는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노동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그 뒤 IMF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분배와 관련된 복지정책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OECD 가입국 가운데 GDP 대비 복지예산 비율은 여전히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복지는 장기적으로 보편복지 시스템을 지향할 필요가 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노동운동의 기반이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지 논쟁에서 어떤 정책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은 그들 각각의 지향과 방법을 살펴야 가능하다. 첫째 재정 확보 방법을 명확하게 살펴야 한다. 물론 현재 국가재정 구조를 개혁하는 것만으로도 복지 수준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보편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증세에 대한 부분이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똑같은 공약인데, 재정확보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면, 현재 보편 복지론을 공격하는 주요 근거인 일본과 남미의 복지병 사례를 극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우리는 겉으로는 ‘친서민’을 외치면서 실상은 전혀 다른 정권을 경험하고 있다. 진정한 포퓰리즘은 허울뿐인 복지다.
둘째 기존 경제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개혁에 대한 의지를 살펴야 한다. 현행 복지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바로 복지 전체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반드시 조세 개혁과 다른 구조적인 문제의 개선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증세도 기존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강행하게 되면 당장의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고 당장의 처지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늘어난 세금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제도의 개혁은 기존 시스템이 가진 맹점을 보완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맹자는 노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일과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넘는 일에 빗대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경우(不爲者)와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不能者)를 구분했다. 한국 정치는 해방 이후 줄곧 일부 편중된 정치세력의 주도 아래 역사를 거듭해왔고, 그래서 다른 형태의 정치 경험은 매우 부족하다. 게다가 당장 먹고살기 급급하기에, 정치판을 연예계 가십거리만도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맹자의 말은 당시 통치권자인 군주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 그의 말은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허망하게 앉아만 있는 한국 국민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의 경험만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현실에 체념하면서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결국 정치 주도 세력의 변화도 우리에게 달려 있고, 연대로 힘을 실어주는 일 역시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 북유럽 복지국가 건설의 원동력이 노동 운동의 결집과 세력화였다는 점을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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