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1)[대안도덕교과서]-9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1)[대안도덕교과서]-9
오상현(숭실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무조건 어른 말씀이 옳다고?
평생 공부만 하라고?
제사 지내는 형식에 정답이 있다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게 나쁘다고?
이것 하나만 기억하고 살자.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흔히들 세계 4대 성인으로 공자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와 마호메트를 꼽습니다. 이때 ‘성인’이란 평가는 모순투성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의 역사 속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분들에게 붙여진 일종의 별칭입니다. 그래서 어쩐지 같은 인간이지만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우리와는 결이 다른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덕망도 있고 나이도 지긋하신 지도교수님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율곡 이이를 기리는 학술단체가 마련한 강의였는데 저는 이 강의를 듣고 작지만 중요하고 흥미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같은 분들을 성인이나 현자로 부르지 말자. 그냥 형이나 아저씨라고 부르자.” 강의 초반 힘주어 말씀하신 이 대목에서 실은 무척 놀랐습니다. ‘한평생 유가를 비롯한 동아시아 철학을 공부해오신 분께서 어떻게 저런 불경스러운 말씀을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게다가 그 자리는 청중의 대부분이 그 지역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내 그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자신의 비관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성공을 이룬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무엇인가 그들에겐 특별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결국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니까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도무지 따라잡기 어렵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 강의의 핵심은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요인이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성인’이나 ‘현자’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실제 과학의 역사 속에서 2000년 전의 인류가 유전학적으로 혹은 지능이나 능력으로도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인’이 살던 시절의 사람들과 별다른 능력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공자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들로 꾸며진 『논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다보면 공자는 우리가 우러르는 ‘성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화도 내고 농담도 했습니다. 심지어 삐지기도 했으며 어떤 제자의 경우에는 뒷조사까지 했습니다. 자리를 떠난 제자의 흉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가 성인의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고 삶을 통해 배운 깨달음을 담담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에게 제안을 하나 하렵니다. 공자를 그냥 동네 할아버지라고 부릅시다. 그도 결국 사람이었으니까요.
생애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은 외국인 여행객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숙소에 도착한 그는 짐을 풀자마자 근처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처음 만나는 한국음식에 대한 소감을 담아낼 스마트폰도 챙겼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가 처음 맛을 본 한국음식에 대한 느낌을 SNS를 통해 친구들에게 소개를 한다고 상상해볼까요? 자, 만약 그가 김치찌개나 순두부를 먹었다면 아마도 “한국 음식은 매운 국물이 기본이야.”라고 올렸을 것입니다. 파전이나 빈대떡을 먹었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한국 음식은 기름지고 소박한 맛”이라고 했겠지요. 불고기를 먹었다면 이랬겠죠. “한국 음식은 단맛과 짠맛의 환상적인 조화”라고요.
우리가 흔히 쓰는 유가(儒家)라는 말에도 이런 함정이 있습니다. 공자 시대의 유가와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위진시대의 유가와 ‘주희’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정리된 송나라 시대의 유가와 조선시대 양반들의 유가는 모두 ‘유가’라는 이름으로 묶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많이 다릅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나쁜 책입니다. 2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뒤틀리고 변모되는 유가의 궤적에서 나쁜 점만 모아서 열거하고 이게 죄다 공자 탓이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몹시 억울하시겠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아마도 공자가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면 이런 생각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함. 한 번 느끼게 되면 무지 분하고 답답해서 잠도 오지 않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온전히 동생이나 형이 저지른 잘못인데 내가 혼날 때, 짝이 말을 걸었는데 떠들었다고 혼날 때, 왼쪽 콧구멍을 후볐는데 오른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터질 때. 뭐 그럴 때 있잖아요. 공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이 글의 목표입니다.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오른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터질 것만 같습니다.
무조건 어른 말씀이 옳다고?
유가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바로 ‘윗사람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충(忠)’이나 ‘효(孝)’와 같은 덕목입니다. 자식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조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심지어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나보다 어른이면 무조건 먼저 인사를 하라고요. 또한 백성들은 임금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요.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들은 무조건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라고요. 하지만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계강자가 공자 할아버지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만약에 나쁜 놈을 죽이고 착한 놈에게 잘해주면 어떨까요?” 할아버지가 답하시길, “선생님께서는 정치를 하시면서 왜 살인의 방법을 쓰려고 하십니까? 선생님께서 착하게 사신다면 백성들도 (자동으로) 착해집니다. 윗사람의 도덕은 바람이고 아랫사람의 도덕은 풀입니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그 바람결에 따라 눕게 됩니다.” 『논어』 「안연」
계강자는 공자가 살았던 당시 사회에 꽤 영향력이 있었던 권력층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를 물었던 대목입니다. 공자가 비유로 들었던 풀과 바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윗사람이 바람이고 아랫사람은 풀이라는 것이지요. 풀이 바람결에 따라 이리 누웠다가 저리 누웠다가 합니다. 윗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하면 아랫사람도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생각해보세요. 윗물이 더러운데 자꾸만 아랫물에게 깨끗해지라고 한다면 어처구니가 없겠지요. 이런 더러운 윗물에게 굳이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사하러 갈 필요가 있을까요? 공자는 다른 곳에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 할아버지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가 답하시길,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만 합니다.” 『논어』 「안연」
공자가 경공에게 말한 정치의 핵심은 임금이건 신하건 모두가 자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어려운 말로 바꾸면 ‘정명(正名)’이라고 합니다. 올바르다는 의미의 ‘정(正)’과 이름이나 지위를 의미하는 ‘명(名)’이 만나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각자가 그 지위(名)에 어울리도록 행동하는 것이 정치라는 말입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행동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행동하며, 부모는 부모답게 행동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공자는 왜 ‘임금’과 ‘아버지’를 앞에 두고 ‘신하’와 ‘자식’을 뒤에 두었을까요?
앞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바람’과 ‘풀’에 비유했습니다. 임금과 아버지가 윗사람이니까 그들은 바람입니다. 신하와 자식은 ‘아랫사람’입니다. 그래서 풀입니다. 풀은 바람이 어떻게 부느냐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린다고 했습니다. 결국 윗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랫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대목을 다시 해석하겠습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만 신하가 신하다울 수 있고,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울 수 있다”라고요. 단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선배와 후배, 선생님과 학생, 형(언니)과 동생간의 문제도 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장관의 잘못을 탓하는 장면을 떠올려봅시다. 공자의 생각에는 대통령이 대통령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장관도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이지요. 따져보면 문제를 일으킨 장관을 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대통령입니다. 자기가 임명한 사람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런 사람인지 몰랐던 자신을 먼저 탓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너는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 모양이냐?”고 윽박지르는 부모가 있다고 해봅시다. 생물학적으로 그 자식이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바로 부모입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더러 누굴 닮아서 그러냐는 질문이라니,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모님들은 모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라고 종용하면서 급할 때는 무단횡단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를.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어떤 교육학자가 그런 말을 했답니다. “내가 몸으로 너무 크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내 제자들은 내가 입으로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 입으로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가르치면서 수업 준비도 성의가 없고 시간만 때우려는 선생님이라면 정말 ‘노답’입니다. 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공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증삼아!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로 꿰어 있단다.” (제자인) 증삼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공자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시자 다른 제자들이 (증삼에게) 캐물었다. “도대체 무슨 뜻이야?” 증삼이 답하길, “우리 선생님께서 삶을 살아가시는 방식은 오직 충서(忠恕)일 뿐입니다.” 『논어』 「리인」
‘충(忠)’과 ‘서(恕)’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유가에 대한 첫 번째 오해를 풀어줄 실마리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우리가 보통 충(忠)을 ‘충성’으로, 서(恕)를 ‘용서’라고 외우고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의미가 좀 다릅니다. 우선 두 글자 모두 마음을 의미하는 심(心)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충(忠)은 마음(心)과 가운데(中)가 만난 글자이기에 ‘마음 한가운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사랑에 빠졌다고 해봅시다. 온종일 다른 일을 하는데도 자꾸만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갈 때도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내 마음 속 한가운데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충(忠)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오직 그 일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웠을 때에 우리는 ‘충(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마음속에서는 아이유의 노래가 떠나지 않는다면 공부에 충(忠)하지 못하고 아이유에게 충(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충(忠)을 ‘진정성’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서(恕)는 어떨까요?
‘서(恕)’는 마음(心)과 같음(如)이 만난 글자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서(恕)’입니다. 흔히 용서라고 풀이하는 것은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면 당신은 완전 똑똑할뿐더러 지금 제 이야기에 충(忠)하고 있음을 의미하겠지요. 서(恕)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충서(忠)을 삶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생각한 것일까요? 충(忠)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할 때, 여행을 갈 때, 심지어 똥을 쌀 때에도 나는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내 마음 한 가운데에 ‘공부’만을, 혹은 ‘여행’만을, 혹은 ‘똥’만을 떠올렸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성’이고 ‘성실함’이 곧 ‘충(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충(忠)을 충성으로 이해해야 할 때는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윗사람이 내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올바르고 적절하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윗사람이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과 행동으로 어른의 역할을 잘 하시는 분께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혹시 주위의 철없는 어른들이 자기가 어른이니까 말 좀 들으라고 꾸중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을 보여주세요.
동네 할아버지의 말씀을 정리해볼까요? 어른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라고 공자는 말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어른다운 말과 행동으로 나를 대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법입니다. 충(忠)도 역시 무조건 윗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운 진정성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가에 대한 첫 번째 오해가 풀렸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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