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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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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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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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다. 자연철학의 등장

그런데 그리스적 사고가 완전한 독립에 이르렀음을 선언해야할 시대가 도래하였다. 자연학과 윤리학 그리고 토론술(Dialektik)의 시기로 불리어지는 철학의 시대가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들은 모두 하나의 지속적인 발전과정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연학의 시대는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과 함께 모든 저항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화의 시대와 결별하였다. 그리스인들 모두가 이 분야에 대한 지식에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 그만큼 일반적 추리력도 발전하여 그로부터 윤리학과 토론술도 나타났다. 철학의 가능성은 이렇듯 자연학에서 그 발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만물의 근원과 성질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민족의 경우 그들의 종교에 이미 일정한 교리로 확립되어 있었지만, 마침내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와 구전으로 전승된 자신들의 우주창조설화를 깨고 사물의 근원(archai)에로 육박하기에 충분한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탈레스(기원전 640-550년)는 물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apeiron)를 물질의 근원으로 주장하고 그 중앙에 대지가 구(球)로서 떠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물질의 근원으로 여겼고, 별들이 대지 위의 천정처럼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 안에 있으면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밀레토스 학파에 이어서 이 영역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현저히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곧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의 저작은 고대에서조차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단편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실로 여러 가지 해석과 생각들을 낳는 모태이기도 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 만물을 생성 과정으로 파악하기 위해 영원한 새로움의 상징으로서 한 순간의 휴식조차 없는 불을 필요로 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끊임없는 유동과 영원한 개조의 한 가운데 있으며 싸움이 만물의 아버지이다. 그 귀결 안에서 그는 주기적인 반복의 세계를 불태우고 있는 영겁의 불을 상정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들 중에는 그가 최초로 말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것들 중에는 감각으로 확인하기 힘든 것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서 호메로스와 그 신들의 세계에 대한 공공연한 증오와 철학자가 폴리스에 대해 행한 것으로서는 가장 최초의 격렬한 이반을 발견한다. 그의 관심사는 매우 크고 넓어 개개의 폴리스 차원의 문제들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벌써 세계 시민이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제논 등 엘레아학파의 사람들은 모든 것은 하나이고 그 하나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이오니아학파에 대립한다. 그들은 범신론의 길을 걸으면서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이 민족 종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적 존재를 그 순수성 속에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오니아학파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탐구와 다함없는 정진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사상은 그 자신의 필요로부터 학설로 발전하였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 충분한 부 또는 간소한 생활을 바탕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 시대에도 이미 철학자들 서로에 대한 경쟁이 지배하게 되었다.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3-445)

 

그런데 어느 물질적인 원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운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다(多)의 통일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또는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과 같이, 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아니면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원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간에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 체계들은 모두 종교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고 오히려 독립된 창조물이었다. 신관에 의한 강제나 유인 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자연학적 발견이나 예측은 본질적으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개인들에 의해 수행된 최초의 연구 활동이다. 이러한 지식은 종교적 의식이나 신화의 옷을 걸칠 필요가 없었다(엠페도클레스(Empedokles)의 학설에서 보이는 증오(neikos)와 사랑(philia)과 같은 추상적 힘은 여전히 신화의 파편이라고는 해도). 물론 이오니아학파의 자연학(peri physe?s)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시대적 조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가 식민지로서의 걸음을 시작할 즈음에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지기 마련인 데다가 본토의 다른 땅보다 훨씬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사고와 행동을 저해하는 모든 종교적 편견으로부터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00?-428)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탈레스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고는 하지만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민간 종교에의 예속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은 운동의 원인을 그 원소와 전혀 구별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그 ‘정신(nous)’을 여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있었을 지라도 세계에 질서와 운동을 부여하는 원리로 삼을 정도로 위대한 혁신을 이룩했다. 최대한 기존의 아무런 전제도 염두에 두지 않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dros)의 개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 또한 그들이 그 다양한 추측을 행하는 데에 얼마나 독립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그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서서히 진화해온 것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307?)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의 주장이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학파의 독립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세 명의 밀레토스 학파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에 의한 지각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배척하고 있는데 그것은 보는 주체도 객체도 끊임없이 흐름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철학자를 어떠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유로 파멸 시키려할 경우, 통상 신에 대한 불경을 빌미로 삼곤 했는데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이 아낙사고라스에 대해서 제기한 소송은 그러한 중상들의 첫 번째 사례이다. 그가 호메로스의 신화를 도덕적으로, 신들의 이름을 우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태양을 한 개의 돌 또는 뜨거운 금속 덩어리로, 달을 일종의 지면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옥고를 치렀고 석방된 후에도 아테네를 떠나 람프사코스(Lampsakos ; 헬레스폰토스 동쪽 해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또한 자신의 책을 통해 “신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아테네의 사람들에 의해서 추방되었고(기원전 411년) 그가 쓴 책들 모두가 그의 집과 뤼케이온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회수되어 몽땅 불태워졌다. 디아고라스(Diagoras) 역시 엘레우시스(Eleusis)의 비의를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고 더 심한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망을 친 그의 목에 1달란톤의 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언젠가 완전히 말라버릴 것”이라고 말한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도 결국 도망을 가서 생명을 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생각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신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희극에서는 제멋대로 다루어도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지만 철학에서만은 유독 보수적이었다. 특히 기원전 432년에 디오페이테스(Diopeithes)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자연현상을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 모두를 고소해야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진 이래, 자연에 대한 학적 탐구는 아테네에서 비밀리에 행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상으로는 더 이상 철학을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미 크세노파네스는 다신교적인, 또 의인적인 민간 종교에 대항하여 그 특유의 새로운 신의 개념인 하나이자 전체(hen kai pan)를 다음과 같은 말로 변호하고 있다. “사자로 하여금 만약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면, 신들도 사자를 닮은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 데모크리토스는 민간의 신을 부정하고, 모든 사건을 필연성으로부터 도출하여 인생의 목표를 공포나 미신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평정(euthymia, euest?)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를 시조로 하는 원자론 학파는 회의론자들과 에피쿠로스가 출현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가에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묘사하고 있듯이 그러한 움직임을 비웃는 일이 아테네에 만연해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철학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모두 철학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무고자(sykophantes)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랜 전란기를 보내면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익숙해져서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 소송을 당한다 해도 예전만큼 그렇게 무서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가능한 한 회피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에피쿠로스는 신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들의 세계 지배는 부정한다는 교묘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 철학은 민간 종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해나가면서(대체적으로 봐서 그렇다) 그렇다고 무신론은 아닌 일신론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 순환의 끝인 신플라톤주의에서 종교가 될 운명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향한 공격,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적 생존과 교양의 위대한 전제를 향한 공격은 전통적 신들을 향한 공격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 적대 행위는 벌써 피타고라스 때로부터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보다 큰 외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 대해 엄격한 신앙심으로 헌신하고 있었다. 실제 그들의 윤리학은 종교적 토대 위에서 성립한 것이었고, 게다가 종래의 신화들을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지하세계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도 “호메로스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처럼 시인들의 경시대회에서 추방당하고 채찍으로 맞아도 좋다”고 말했다. 게다가 또 신화를 거의 범신론적 개념상의 이름들로 극복하려한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공격하는 엘레게이아(Elegeia)와 이암보스(Iambos)율(풍자에 적합한 운율)의 시를 써서 신들에 관한 그들의 언급을 비난하였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플라톤이 국가에 대한 저작에서 행한 시인들에 대한 비판이다. 후대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러한 그의 태도가 소크라테스가 조각을 단념한 것처럼 그 자신 비극 문학을 단념하게 된 데에서 비롯된 호메로스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사색하는 사람들의 신화와의 결별은 이미 모든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윤리학과 토론술 또한 순전히 철학을 통해서 자연학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현상으로서 소피스트 철학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소피스트 철학은 사회 현상으로서 나중에 고찰하게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리스적 사고와 지식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소피스트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두기로 한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자들로서는 아주 만만한 경쟁 상대였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말만 들으면 소피스트들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도 높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해져온 선입견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소피스트들은 모두 외지로부터 아테네로 온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출신이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레온티노이, 힙피아스(Hippias)는 앨리스, 프로디코스(Prodikos)는 케오스 출신이다.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어 축제가 있을 때면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존경도 크게 받아 고액의 사례를 받았다. 그들이 돈까지 받았는데도 대중들이 그들에게 갈채까지 보냈다는 것은 분명 철학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라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만으로도 수긍이 갈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의 경우, 정말 도움이 되는 처방전이라면 공짜로 그것을 받는 것보다 사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을 더 좋게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라든지 투퀴디데스(Thukydides)와 같은 사람들 또한 그들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인이 있고 그로부터 생긴 필연적 결과들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된 것이 단지 소피스트들의 윤리적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선이고 그자체로 악인 것은 없다고 주장했고, 모든 것이 그 나름의 견해와 약정에 의해서(doks? kai nom?)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또 모든 일에는 찬반양론(duo logous)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또 종교와 관련해서도 그들은 단순한 회의론을 넘어서서 바야흐로 부정론을 내세워 아테네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갖 이상한 행위로 그들을 내몰았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이러한 생각들을 그토록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서 만들어 내고 유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었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이 되살아날 수 있는 일정한 방식을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그들에 의해서 개발된 연설기술(Redekunst)은 모든 인식이 주관적이라고 하는 학설과 일체의 것이 설득력에 달렸다는 학설과 결합되면서 더욱 고취되고 크게 육성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참된 인식은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철학적 문제들 전반에 대해 정통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엘레아학파로부터 차용해온 허위 추론방법을 그들의 토론술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마 정신적인 체력훈련(Gymnastik)이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의 교육에는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사람들을 ‘보다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요구에는 부응할 수 없었을 지라도, 그들은 세상사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과 기능을 가르쳤던 까닭에 대중들은 그들에 대해 대단한 사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힙피아스는 올림피아에서 석조 인장 등 자신의 손으로 만든 온갖 종류의 치장물을 몸에 붙이고 나타나 스스로 일종의 백과사전적 만능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많은 실제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서적 또한 얼마 되지 않는 지적 풍토에서 대단한 지식욕에 불타고 있었던 시대적 요구에 영합했던 것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굳이 만일을 빌어 이야기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가 그들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가 이룬 것 같은 효과를 그 시대에 미쳤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idea tou kosmou)과 천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하학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용해 지도를 작성하는 방법까지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인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음악을 가르쳤으며 문법에도 정통해 있었다. 힙피아스는 기억술과 관련한 학문도 취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논의영역에는 역사와 고고학, 폴리스의 종류에 대한 학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의 예비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비교정치학, 식민지학, 법률학, 가정 및 국가 행정에 관한 이론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다 물어보라”(das proballete)고 말한 고르기아스의 그 유명한 재촉이 논리학상의 조작에 관한 것에 불과하고 모든 학문 영역에 걸친 모든 질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그 말은 소피스트들의 지식이 그 만큼 풍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을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유포함으로써 그리스 사회에서 하나의 은혜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생활에서 필요한 요소였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사회에서 그렇게 하찮은 취급을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3. 연설기술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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