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철학자의 서재]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철학자의 서재]
현남숙 (가톨릭대 초빙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상처받은 삶, 철학으로 치유하기
삶은 원래 상처를 포함하지만 그 상처는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외적으로 삶은 풍요로워지고 개인의 권리도 그 어느 시기보다 커졌지만 내실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의 경쟁과 시장원리는 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내면을 그 어느 때보다 동요시킨다.
경쟁에서 도태하면 가차 없이 모욕을 주는 이 낯선 문화에서 힐링 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다. 하지만 자신과의 근본적 대면 없이는 근본적 치유도 불가능하다. 나는 누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힐링은 일시적 효과에 그치고 만다.
자신과의 근본적 대면은 철학, 특히 실존철학의 근본 주제였다.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박은미 지음, 소울메이트 펴냄)은 각종 힐링 산업의 시대에 철학의 정공법으로 자기치유의 방법을 제시한다. 실존철학을 전공하고 철학 카운슬링을 연구한 저자가 철학 상담의 목적과 방법을 염두에 두고 이 에세이를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에피소드들을 저자 자신의 경험과 철학으로 풀어낸다. 공감할만한 이야기들과 함께 왜 우리는 ‘진짜 나’로 살지 못하는지, 그것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진짜 나’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해 준다.
누구에게나 삶은 억울한 것
책의 소제목 중에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는 대목이 있다. 한겨울에 꽁꽁 언 음식물 수거함을 뒤지는 고양이에게도, 등록금을 위해 시험기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에게도, 불철주야 고생했지만 어느 날 조기퇴직당한 직장인에게도, 삶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기초적인 분배부터 인정욕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억울함을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렇고, 저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어느 정도는 되어주었으면 좋겠는데 항상 기대치에 못 미친다. 그 ‘어느 정도’가 사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내 인생은 그 정도도 되어주지 않는다.” (32쪽)
저자는 세상에 문제없이 사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이 겪는 일 중에서 가장 덜 좋은 일을 불행으로 규정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누구라도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다. 욕망의 상대성 때문에 행/불행을 느끼는 것은 공평하다는 저자의 통찰에 수긍이 간다.
저자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졌지만 그럼에도 내 의지로 나를,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각자가 처한 한계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좀 더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있는 힘을 다해 그 상황을 수용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태클 없는 인생은 없다. 누구나 태클 없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비합리적 전제다. 남들은 다 겪는 태클을 나만은 겪지 않기를 바라다니! 그러나 태클 자체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에게는 그 태클을 어떤 방식으로 대결해내서 나의 삶을 진짜 나의 삶으로, 정말 내가 주인이 되는 진짜 나의 삶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만 남는다.” (228쪽)
태클을 끌어안고 나아가라는 저자의 이 말은 니체의 운명애를 연상시킨다. 저자 자신도 니체를 인용하면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인간을 강한 인간으로 보고, 그 운명을 자신의 발전의 기회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핑계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므로, 운명에 대면하여 초월이나 포기가 아닌 변화를 유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 삶의 방향키를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에 두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
하지만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변화를 꾀해 보려 해도, 왜 우리는 ‘진짜 나’로 사는 것에 자주 실패하는가? 왜 우리는 살던 대로 사는 것에 익숙하여 자신의 경향성도 세상의 문제들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가? 저자는 이처럼 우리를 고통에 머물게 하는 삶의 차원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는데, 그 중 자신의 편향적 시선과 세상의 일률적 시선에 대한 통찰에 대해 알아보자.
편향적 시각이란 사태를 특정한 각도에서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만사를 자신에게 익숙한 한 가지 각도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를 편향적으로 인식하면 심리적, 지성적 노력이 덜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편향적 시각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왜곡할뿐더러 자신과 연관된 타인과의 관계도 왜곡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자기의 문제는 모자람으로 보면서 타인의 문제는 나쁨으로 보는 우를 범하고는 한다. 하지만 거꾸로 자신의 문제는 나쁨의 문제로 보면서 반성하고, 타인의 문제는 모자람의 문제로 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노력하지 않으면 타인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기 쉽다. 누군가를 호의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심리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170쪽)
또한 일률적 시선이란 세계를 세상 사람들이 정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부, 성공, 권력 등이 좋은 것의 지표가 된다. 부, 성공, 권력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부과한 기준에 맹목적으로 나를 맞추려 하면, 자신을 왜곡할뿐더러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도 병들게 한다고 본다.
“우리가 공허에 시달리는 이유인 즉, 남들의 기준이나 사회적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게 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면 타인의 시선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데, 자신이 충분히 자신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인정을 획득하는 데 지나치게 종속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현하면서 살면, 즉 자아실현을 하면 타인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264쪽)
저자의 말처럼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내 안에도, 밖에도 있다. 우리 자신이 만든 편향적 시선이든, 세상이 만들어놓은 고정된 시선이든,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으면 자기다운 삶을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따라서 이것들을 넘어서서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진짜 나’로 사는가의 판별기준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 던진다, 지금 내겐 확신만 있을 뿐”
한 뮤지컬의 삽입곡을 들으면서 그런 순간을 살고 있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진짜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진짜 나’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또한 그 상황에서의 내가 ‘진짜 나’인지 어떻게 확신한다는 말인가?
저자는 ‘진짜 나’는 어떤 고정된 자아는 아니라 과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진짜 나’는 그때그때 나 자신으로 살려는 노력 속에서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짜 나’로 존재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한다.
“이것이 진짜 나다운 일인가, 지금 나의 삶이 진짜 삶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내일 죽어도 이 일을 하고 싶은가? 내일 죽어도 오늘처럼 살고 싶은가? 입니다.” (332쪽)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왜 자기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가? 저자는 하이데거를 따라 시간의 유한성이라는 한계상황을 자기다움을 가장 잘 성찰하게 하는 존재론적 조건으로 간주한다. 지금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어도 그러하겠는가라는 실존의 물음은 삶의 방향을 ‘진짜 나’로 향하도록 바꾸어준다는 것이다. 즉,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진짜 나’로 살기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나’로 살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온전히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진짜 나’로 살아가려 해도 가까운 사람이 이해해 주지 않거나, 그 반대 상황이면 이러한 과정을 지속하기 힘들지 않은가? 가족이나 연인이 그런 삶을 반대해도 ‘진짜 나’를 쫒아 살아갈 수 있을까? 또한 가족이나 연인의 ‘진짜 나’에는 무심하면서 나만 그렇게 살아도 될까?
저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진짜 나’로 살려면 나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존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와 네가 서로 ‘진짜 나’의 너, ‘진짜 너’의 나가 되도록 그러한 삶을 인정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본다. 저자는 야스퍼스의 철학에 근거해 일방적 ‘희생’이나 자신의 편향성에 치우친 ‘투쟁’이 아닌 두 주체간의 ‘사랑하면서의 투쟁’을 역설한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사랑의 과정은 우리 각자를 ‘진짜 나’가 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그래서 충분히 네가 아닌데 너와 소통하는 내가 충분히 나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사랑하면서의 투쟁 속에서 동시적으로만 나와 네가 함께 실존이 될 수 있다.” (315~316쪽)
실제로 부부나 연인이 서로 자신의 삶을 인정해 달라고 하면 갈등이 생기고 다투게 될 것이다. 나를 포기하고 너를 사랑하면 ‘진짜 나’를 희생하게 되고, 너를 포기해서라도 나를 사랑하겠다고 하면 ‘진짜 너’를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계는 적어도 관계의 측면에서는 행복한 삶이 되지 못한다. ‘진짜 나’로 살기위해서는 타자도 그러한 본래적 삶을 사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진짜 나’로 사는 것은 유아론을 넘어 사회적 차원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기
누구에게나 자기 마음 하나 챙기기 어려운 날이 있다. 오늘 하루의 삶이 나답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거나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내일 아침이 기대되지 않을 때가 있다. 자기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겠냐고들 하지만, 당사자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면 자신을 상처내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저자는 “나는 나를 들고 다녔구나”라는 황지우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나를 들고 다니지 말고 놓아주라고 말한다. 나 자신의 편향적 인식이나 세상의 인식에 맞추어진 ‘가짜 나’는 놓아주고,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와의 화해 속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의 마음을 가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해지려면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것은 한 번에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마음을 가누는 법을 배우는 것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과제라 말한다.
마음에 관한 연구나 산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가 보다. 하지만 내 마음 하나 챙기자고 열 일 제치고 템플스테이로, 상담소로 달려가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서로 ‘철학 카운슬링’을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적절한 상황에서 읽는 책은 가뭄의 단비처럼 마음을 평화롭고 쾌청하게 해 준다. 손에 가까이 두고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들춰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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