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본래적 자기로 회귀하는 실존적 결의[Q 선생의 閑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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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화의 하이데거론

 

이규성(웹진편집위원장, 이대교수)

 

최근(2013년 2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와 무의 관계에 대한 연구](서영화)가 나왔다. 이 논문은 학위논문의 성격이 요구하는 대로 국내외의 주요한 1, 2차 자료를 넓게 활용하여 연구자의 논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으며, 자신의 차후의 연구 과제를 언급하고 있다. 학위 논문의 성격상 자신의 과감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 것 또한 후일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평자(評者)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이데거의 주제이자 서영화의 주제인 존재와 무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저자가 잠시 미루고 있는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적 해명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1945년 해방 이전부터 특히 박종홍, 고형곤, 신남철, 박치우, 조가경과 같은 초창기 철학 연구자들의 논의의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박종홍은 존재의 문제를 역사철학적으로 발전시킨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운(歷運) 개념을 ‘우리의 철학’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천명(天命) 개념과 연관하여 재해석하고자 했다. 박종홍은 존재의 극치에서 만나는 무(無)를 이학의 무극(無極) 개념 그리고 불가와 도가의 공(空)과 무(無)의 개념과 연관하여 해석하고자 했다. 이 맥락에서 박종홍은 ‘무의 형이상학’을 20세기 주요 철학적 과제로 간주하고, <무>를 통과해서 존재의 역운에 동참하고자 했다. 한편 박종홍은 전통적 선비의 현실참여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요구를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빈곤을 극복하는 강력한 국가의 형성을 위한 실천적 개입으로 보았기 때문에 야스퍼스의 존재(포괄자) 개념을 포함하여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말하는 인간론을 무기력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신남철, 박치우는 현실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상적 주제를 주요 과제로 설정했기 때문에 하이데거를 매력 있고 심오한 철학으로 보면서도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도 존재론이 갖고 있는 초탈적인 비역사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고형곤은 구체적인 사회적 연관들을 제거하고 존재론을 선불교의 마음의 현전(現前, 현전은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앞에 드러난다는 선종의 용어)과 연관하여 현상학적 해명을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서양의 현상학적 운동이 과학기술적 객관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극복하고자하는 활력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긴장을 상실한 도인의 수양론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나 동아시아의 선종을 고립된 실체로 다루는 정태적 태도에 빠져 있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그 후 하이데거 연구자들 가운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는 고통스러운 생명 현실의 존재[有]와 이에 대한 부정인 무(無)의 엄중한 차이를 관찰하라는 붓다의 단호한 태도([아함경],[가전연경])를 무색하게 하고, 고난과 참회가 갖는 수양론적 의의를 무시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영화의 [하이데거론]은 하이데거에 입문하거나 평가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논제들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대학시절 실존주의라는 이름 아래 알려진 하이데거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으나, 대체 존재론적 차이가 무엇이며, 전기와 후기의 차이는 무엇이고, 해석학적 해명이란 무엇인지가 애매모호한 채로 군사독재 시절을 보냈다. 그 후 나이가 먹어가면서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인간의 이상적 모습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궁극적으로는 자유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동양철학, 가톨릭 신비주의나 카발라철학, 셀링을 비롯한 사변철학적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도교의 연금술적 자기변형의 기술, 심지어 도교와 불교에 바탕한 안토냉 아르또(Antonin Artaud)의 연극론에서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도 새로이 변형된 신체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주와의 일치에서 오는 자유 즉 신체 내 각 기관들의 속박에서 벗어난 연금술적 해방이다. 말(로고스)로 다하는 그리스적 전통의 예술이 아닌 동양의 연극이 보여주듯 행위의 상징을 통한 새로운 인간성의 형성이 예술의 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이데거의 철학도 비록 그가 가치론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비본래적 단계에 처해 있는 전락한 삶의 양식으로부터 본래적 실존을 통과하여 생성의 유희로서의 존재를 향유하는 삶 즉 자유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혹은 신들이 있었던 태고적에 나타났다가 상실된 과거의 사상이면서도 결단을 통해 접근해야하는 미래적 가치이다. 이 점에서 결단의 순간은 신약성서의 구도처럼 결정적 시간(chronos)이며, 이 시간을 통해 선구적 삶을 살게 된다. 자유와 시간, 존재와 시간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 존재와의 합치를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하려는 문맥에서 하이데거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즉 존재 그 자체를 상실해 간 과정으로서의 서양 철학사를 비판하게 되었다. 존재자의 근거인 존재를 마치 존재자의 원인인 것처럼 보는 전통 형이상학, 특히 유대 기독교 전통과도 연관된 제일 원인으로서의 신의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철학, 심지어 유물론적 아르케(원인)를 근원으로 제시하는 자연철학도 어느 특정한 존재자를 존재로 오해하는 존재 망각의 사유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가 저녁의 나라(Abendsland) 서양의 자연과학을 전통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보고, 존재자를 물리적 객관으로 환원하여 객관성을 존재로 생각하는 습관을 비판적으로 본 것은 흥미로운 과학론으로 보인다. 형이상학의 완성태인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는 철학의 종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영화가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전 후기를 일관되게 바라보는 시야를 갖고자 하고, 헤겔, 니체, 들뢰즈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생성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 것은 하이데거의 중심 논제에 육박해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생성을 생과 죽음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아 생만을 강조하고 죽음이 없는 생명성에 집착하는 니체나 들뢰즈를 극복하려는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무(無)에 접근하려는 태도는 인상적이다. 평자의 관점에서는 하이데거 철학의 이러한 측면은 영국 학자 매기(Bryan Magee)의 언급처럼 쇼펜하우어의 관점과 공통된 것이다(The Philosophy of Schopenhauer, 1983). 개별적 존재자의 죽음을 수용하고,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무에 대한 긍정을 통해 존재와 무의 통일성을 사유한다는 사상은 존재와 무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적 사고나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영화에 의하면 이러한 통일에서 존재와 존재자가 원인과 결과라는 신학적 혹은 과학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존재자에게 줌(Didonai, Lassen) 혹은 허여(Zugeben)의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는 하이데거의 견해가 고대 그리스적 연원을 갖는다하더라도 그래서 신학적 구도를 떠나있다 하더라도, 그가 결정적 결단의 시간을 중시한 것과 함께 줌이라는 말 자체는 쉽게 또 다시 신학적 은총의 관계와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운은 인간 현존재의 능력의 범위를 무한히 넘어서기에 인간은 단지 동경과 기다림의 상태에 있게 되는 기독교 종말론적 구원사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와 연관하여 데리다의 연구(Jacqes Derrida, [정신에 대하여], 박찬국 옮김, 동문선, 2005)가 보여주듯 서양 역사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헤겔처럼 하이데거도 기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정신’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주저에서 사용함으로써 사고의 불일치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서영화는 여러 군데에서 암시적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와 해석에 치중한 저자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또한 저자는 존재론적 (차이) 문제가 전 후기를 관통하는 하이데거의 관심임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세계와 인간이 맺는 관계의 현실적 국면을 해명하려는 데에 관심을 보이는 전기와 본격적으로 존재론적 문제에 개입하는 후기의 차이를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해명하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의 발전사적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존재와 연관하여 세계의 문제를 둘러싼 여러 전문 연구가들의 입장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간략한 비판을 통해 (전기의 인간관이 근대적 주체성이 아닌 현존재의 유한한 실존의 무력성과 절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슐츠와 헤르만의 입장을 지지하면서)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려는 저자의 자기의식적 태도는 연구자의 기본을 준수한 것으로 보인다.

평자가 서영화의 논문을 읽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관심을 일으킨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하이데거의 ‘양심(Gewissen)’ 개념이었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견디고’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스스로를 단독화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는 존재에 귀의하는 진정한 삶의 양식으로 살기로 결의하는 키에르케고르적인 독자적 의지일 것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견해가 ‘유아론적 세계’(한나 아렌트)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양심 개념이 시회적 소통성을 무시한 원자적 개인은 아니라고 한다. 양심은 세인(Das Man)의 관심(도구적 삶)을 초월하여 본래적 자기로 회귀하는 실존적 결의를 가진, 그래서 현존재 자신을 목적으로 결단하는 자기성이다. 진정한 가능성을 향한 자기가 양심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서영화는 변호하고 있다. 평자 역시 하이데거의 이 견해는 현대인이 상실한 최대의 가치라고 본다. 진정한 본래적 소통적 사회성은 고독한 자기 관심에의 열정을 통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초인들은 언제나 텅 빈 광야로부터 왔다.

그러나 저자도 주석에서 소개하듯이 한나 아렌트의 비판 즉 하이데거가 유아론적 관점에 빠짐으로써 동료와의 분리를 추구한 결과 전체주의적 국가 사회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이 문맥에서 평자는 양심의 정의를 칸트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평자는 하이데거와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shad) 철학을 비교하여 인도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하이데거는 데리다도 비판하듯 동물을 세계 개시성이 없는 본능적 충동에 의거해서 사는, 그래서 인간과는 단적으로 구분된다는 ‘인간 중심주의적’ 착상을 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동물학을 싫어하는 기독교적 습성을 가지고 당시의 동물학적 정보를 이용하여 나방과 같은 곤충들이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언급한다. 그러나 현대 동물학은 동물의 인지 구조에 대한 풍부한 전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동물도 환경 세계를 갖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주 중심주의적 사고를 중시하는 하이데거가 그러한 편견을 고집하고, 나아가 동물과의 연속적 유대성을 무시한 양심 개념을 자명한 전제처럼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다. 그리고 존재 중심의 역사철학은 절대정신처럼 역사에 대한 숨 막히는 지배력을 갖고 세계를 누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에 비해 우파니샤드 철학은 광물, 식물, 동물, 인간, 천상의 존재들은 전체로서의 우주와 하나임을 자각한 초인적 존재가 자신의 우주를 단계적으로 상실하여 가장 작은 세계를 갖게 된 존재가 광물과 같은 존재라는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동물은 인간 보다는 협소한 세계를 갖지만 세계를 인간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같을 뿐만 아니라 우주를 최대한 광대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초인의 관점을 근본적이고 무의식적인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유를 원한다. 이러한 관념은 태고적 영웅시대의 잔혹한 투쟁사를 겪고 만유의 우주적 유대를 최상의 진리로 깨닫게 된 전사 계급의 자각의 결과였다. 불교의 만유 불성론은 여기에 기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의거하여 ‘양심 불안(Gewissensangst)’([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V 1 ,65장, 1818)을 다른 생명체를 식용으로 삼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된 죄의식에 연원하는 것으로 본다. 이 죄의식이 우주와의 분리를 불안의 근거로 보는 철학을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우주적 불안의 극복은 우주와의 합치에서 오는 ‘평정(Gelassenheit, 방하放下)’에서 이루어진다. 우주적 연대성의 상실에 인간의 근본 불안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불안을 감지하고 다시 우주적 유대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양심이 아닐까. 그리고 이 양심을 사회 정치적 평등의 이념으로 전개는 것이 동서양의 신비가들의 희망이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그들의 언행에 관한 서적들이 증언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수도회 소속인 둔스 스코투스도 성인 프란시스코의 정신에 따라 고독과 우주적 유대를 결합하는 자각을 사랑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의 절박하고 강렬한 본래적 실존은 바로 이와 같은 평등의 유대와 결합했을 때 정치적 잔혹성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달달볶는 개신교적 내면성이 갖는 불건강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동양의 지혜를 정치사상적 문맥에서 발전시키려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이데거 철학의 절박한 성실성을 매력 있는 것으로 수용하면서도 그가 갖고 있는 어두운 측면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영화의 [하이데거론]을 유심히 읽었으며, 평자의 생각을 정돈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논문의 후반에서 무의 문제와도 연관된 생성의 문제를 후속 연구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로서 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윤리적 의미도 갖고 있다. 오늘 날 군산 복합체의 기술과학 권력과 정치가들과 결탁한 화폐 권력은 생사의 의미를 움켜쥐고 있으며, 자신을 호위하는 많은 과학적 철학과 언어규칙 철학을 생산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생사의 의미를 추구하고 양심에 의거하는 생성의 철학은 이러한 권력의 철학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동시에, 귀부인이 넘보는 돌쇠의 유혹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듯 고고한 자태를 유지할 것이다.

 

2013,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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