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꿀 청춘에게 ‘구라’ 치지 말자![철학자의 서재]
존 홀러웨이의 <크랙 캐피털리즘>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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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체제의 균열을 이해하고, 탐구하고, 넓혀 나가기
지난 5년의 삶이 너무나도 신산했기 때문인지 좌절감, 상실감, 분노, 환멸, 체념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마음속에서 시커먼 우물이 되어 고여 가는 것 같다. 48퍼센트의 국민들이 지지했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사실 세계의 지배 권력이 우리들의 삶과 노동과 생각을 움직이는 방식은 달라질 게 없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정계에서 은퇴한 유시민의 다시 회자되는 말처럼 “군부 세력과 피 흘리도록 싸워서 투표권 찾아왔더니 국민들은 그 투표권으로 노태우를 뽑”았는데, 25년이 지나서도 51퍼센트의 사람들은 금방 깨어날 환각제 주사를 다시 맞으려고 했다.
시민과 다중이 활동할 정치 영역의 ‘틈’은 안개 속에 더 가려졌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지만, 여전히 대의 민주제에 대한 의존은 심하고 국민 주권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다. 그렇다. 이 세계의 ‘지배 원리’는 절대로 쉽게 안 변하는데, 사람들의 상상력은 침체되고 행동력은 세월에 못 이겨 쇠락해 간다. ‘멘붕’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위안이나 새로운 상품이 된 ‘힐링’이 아니라 다시 토론하고 행위하고 연대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랴만, 사람 노릇하려고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도시에서 발버둥 치다 보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대선 이후 나 자신과 진보 진영의 지리멸렬과 무기력함이 혐오스러워질 때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의 저자 존 홀러웨이의 신작, <크랙 캐피털리즘>(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을 꺼내 들었다.
홀러웨이는 지금과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자고 설득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에 끊임없이 ‘균열’을 가하자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신중하면서도 명쾌하며, 토론을 부추기는 그의 이론은 힘차고 논쟁적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강력한 논거들은 학자들의 이론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반자본의 실험, 조직, 행동에서 산출된다. 저자가 말하는 ‘체제의 균열’이다.
홀러웨이가 보는 지금의 세계는 “이 매우 불공정하고 파괴적인 사회 조직의 변화를 상상하는 것보다 인류의 완전한 절멸을 생각하는 것이 더 쉬운 단계에 도달”한 곳이다. 숨 막히는 자본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원한다면 기존의 것을 부수어야 한다. 그 부수는 행위보다 더 평범한 것도, 더 분명한 것도, 더 단순한 것도, 더 어려운 것도 없을 만큼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벽을 그 견고함이나 강력함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위기, 모순, 취약함, 균열에서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그 모순들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이 여행은 어디로 갈지 잘 알고 있고 손에 지도가 들려 있을 때만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멈춰 서 있지 않고 그릇된 방향이더라도 계속 걸으면서 질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또한 거의 식별할 수 없을 것 같은 터널 밖의 풍경과 소리를 보다 잘 보고 듣기 위해 우리 안의 공포와 의심을 깨뜨리는 것이다. 매일 떠날 수 있는 이 여행은 “균열들로부터, 갈라진 틈들로부터, 찢어진 곳들로부터, 반란적 부정-과-창조의 공간들로부터, 총체성으로부터가 아니라 특수한 것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동시에 창조하는 존엄의 反-정치
그렇다면 그 균열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균열은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다른 유형의 행위를 천명하는, 어떤 공간 혹은 순간의 아주 일상적인 창출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불복종이지 미래를 위한 기투가 아니”며, 우리의 활동과 삶을 자본의 지배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뭔가 다른 것을 할 수 있고 또 할 것이고 할 수 있다”는 현재적인 기획이다. 그래서 그 균열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면서 존재하며 마치 ‘발 빠른 춤’처럼 우리들과 만난다.
그런데 자본에 대항하는 그 기획은 새로운 사회 관계를 창출하고 그 관계망 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동료애, 존엄, 연정, 사랑, 연대, 우애, 우정, 윤리, 이 모든 이름들은 자본주의의 상품화되고 화폐화된 관계들과 대립”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예상하고 창조하는 것에 기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들이 어떻게 조직화로 번역되는가인데, 일반적으로 주요한 강조점은 관계의 ‘수평성’이다. 그것은 자신을 타인의 의사 결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수직적 구조와 명령 사슬에 대한 거부이며, 특정한 지도자가 없이 모두가 평등한 기반 위에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평의회 형식의 조직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 맺음이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관철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수평성을 절대적 규칙으로서가 아니라 수직성에 대한 부단한 투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존엄의 반-정치는 이제 ‘자본주의의 사회적 종합’, 즉 “자본주의 사회의 매우 단단한 사회적 응집의 논리”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이나 정의롭지 못한 권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내면화되어 반자본적 활동들 가운데서도 재생산되려고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이다. 그래서 점차 벌어지는 ‘균열’은 자본주의가 규정한 우선적인 가치들의 지배와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라는 권력, 싼 상품의 매력, 화폐의 오만함, 이윤이 남는다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욕망, 가난하면 불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대항 정치는 비국가적이고 틈새적인 지평에서 자유롭게 활동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존엄의 확산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은 도시에서 딱딱한 마음으로 더 많은 지지자를 등록시키는 문제나 설교나 연설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감화, 모방, 공명 같은 단어들이 주는 느낌을 떠올려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했던 지난날의 ‘투쟁’들이 쇠파이프 대 곤봉, 스크럼 대 방패, 화염병 대 최루탄, 구호 외치기 대 체포의 싸움이었다면, 균열들을 벌려가는 새로운 반란에서는 연극과 시와 춤과 유머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 그런 것들은 과거엔 운동의 도구였지만 이제는 운동 자체의 중심적 요소가 되었다.
“낡은 혁명적 확실성들은 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승리가 필연적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불확실성과 혼돈의 세계에 산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불확실성과 혼돈을 이해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역사에 확실성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균열들의 증식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노동에 대한 행위의 반란
먹고살기 위해 타율적으로 수행하는 소외된 노동과, 필요하다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구체적 행위를 향한 노력-저자가 ‘의식적인 삶-활동’이라고 말한 것-사이의 대립은 삶의 지형도를 은폐하는 노동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용 가치와 유용한 사물들을 생산하는 구체 노동과 구별되는, 우리에게 타율적으로 주어진 추상 노동을 뒤흔드는 구체적 행위가 관건이다. 추상 노동 내부에 존재하면서 그것을 넘어 자본주의적 노동 바깥에 서 보는 것이다.
“나는 교사이고 시장에서 팔 노동력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사회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나의 학생을 가르친다. 나는 민간 병원의 간호사이며 내 고용주를 위해 이윤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나의 환자들이 그들 삶의 가장 어려운 어떤 순간들을 살아내도록 도우려 한다. 나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일한다. 하지만 내 손가락이 자유로울 때에는 언제나 오늘밤 밴드에서 기타로 연주할 코드를 연습하느라 바쁘다. 나는 청바지를 만드는 바느질 기계에서 일한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언제나, 나 자신과 나의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방을 만들면서, 딴 곳에 있다. 나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공부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그리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것으로 전환시킬 방법을 찾길 원한다.”
우리는 추상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만든다. 저자가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이라고 말하는 그 과정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울타리 치고, 노동 착취를 낳고 노동 계급을 형성시켰으며, 자연을 객체로서 구성했으며, 우리가 다른 생각과 ‘딴 짓’을 못하도록 우리의 역량을 외부화해 시민, 정치, 국가라는 총체성의 구조를 창출했다. 또 추상 노동의 지배 과정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규격화했으며 시간을 동질화시켰으며, 반자본주의 운동의 발목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노동 운동은 추상 노동의 운동으로 전락했다.
저자는 이제 추상 노동에 대적하고 그것을 넘어 구체적인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을 요청한다. 그것은 곧 추상 노동의 위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적대와 갈등과 모순이 미끄러지며 나는 소리들은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못나고 약하고 ‘빽’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벌여내는 ‘행위’의 멜로디가 될 것이다. 이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존적으로 일어나는 행위와 노동 사이의 더 깊은 갈등이 있다. “이 모순은 살아 있는, 고동치는 사회적 적대이며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항상적이고 필연적인 투쟁이다.” 그 모순의 틈을 벌리는 행위의 연대는 총체성, 종합, 가치를 해체하는 숨어 있는 여성의 움직임이며, 근대적인 시간의 동질화를 해체하여 각자가 누릴 수 있는 각각의 순간을 열어젖힐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만들기를 중지하고 지연시키는 우리의 무기이자 행위의 원리가 존엄이라면,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시간, 관계, 가치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힘은 행위의 힘이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 앞에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을 세우는 것이다.” 거부하고 창조하여 자본주의를 균열시켜라! 이 미쳐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의 작동을 멈추게 만들자!
이 책의 옮긴이인 조정환의 말처럼 국가, 화폐, 자본에 의한 우리 삶의 모든 소외는 삶의 생생한 가치들과 생동력을 추상화시켜서 통제하고 통합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욕망 체계의 산물이다. 이 시대의 ‘꼰대’들이여! ‘멈춰서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속삭이며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젊은이의 눈을 가리지 말자. ‘아파야 청춘’이라고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은 세상 올 거라고 ‘구라’치지 말자.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해 당신들의 낡은 가치와 경험으로 함부로 추상화시켜 말하지 말자. 그들은 공동체의 정치와 자신들 삶의 구경꾼이 아니라 각각의 주인공이니까. 우리 시대를 바꾸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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