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에 본 따뜻한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송종서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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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기]

엄동설한에 본 따뜻한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

글: 송종서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시와 자전거

 

2009년 5월 8일 건설기계를 만드는 중장비 회사 팀장 박동하(정우성)는 청두(成都)행 비행기를 타고 쓰촨(四川) 지역으로 출장을 간다. 신혼여행을 떠난 담당자 대신이지만 기내에서 동하가 손에 들고 있는 책갈피 속에는 언젠가 중국 친구 메이(까오 위안위안)에게서 받은 엽서가 꽂혀 있다. 쓰촨 청두는 메이가 태어나서 자란 고장이다.

메이와 동하는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나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품었지만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동하는 메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준 기억이 있고, 메이는 미국에 있을 때 동하가 써서 보여준 영시들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시와 자전거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함께 가진 영화 『호우시절』(2009, 허진호)의 영상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씨줄과 날줄이다. 그러나 두 남녀가 지닌 이런 낭만적인 기억들은 동하가 시내 관광을 하러 잠시 두보초당(杜甫草堂)에 들른 출장 첫날, 오후의 햇살 아래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드리운 긴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날 저녁 둘이 만나 맥주를 연거푸 마시고 또 고량주를 마시러 포장마차로 2차를 가면 두 사람의 미국시절 기억은 서로 엇갈린다.

▲ 영화 호우시절

말하자면 현재와 무관한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와 밀접하게 관련된 과거로 옮겨간다. 동하는 미국 유학시절에 메이에게 키스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하지만 메이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동하는 짐짓 자신이 메이의 남자 친구였다고 주장해 보지만 메이는 둘이 연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심지어 메이는 동하에게 자전거를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현대 영화의 오랜 주제인 진술(기억)의 문제를 던져놓는다. 물론 이것은 멜로드라마의 흥미와 감동을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그는 다림(심은하)과 정원(한석규)의 연애담을 각자의 시선과 기억으로 나누어 보여줌으로써 애틋한 감동의 느낌을 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 열쇠는 진술자의 기억 또는 시선 속에 숨겨진 욕망일 것이다. 욕망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진술자의 적극적인 의지를 통해 드러날 수도 있고, 진술자가 처한 무기력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차이는 있어도 결국 모두가 진술자의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다. 동하와 메이는 예전과 다름없이 매력적인 서로에게 이끌리고 서로를 원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처한 현실상황은 사뭇 다르다.

돼지곱창쌀국수

 

“메이, 너 그거 알아? 네가 김치를 좋아했더라면 우린 그때 완벽한 커플이 되었을 거야.”

“아니지. 네가 중국 음식을 잘 먹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결혼을 했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중국 음식을 얼마나 잘 먹는데……”

『호우시절』은 남녀의 사랑에 관한 심각한 주제를 다룬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대화는 적당히 우스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멜로 주인공들의 연애감정을 더욱 진전시키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페이창펀’이라는 사실적인 소재와 연결되어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연애 무드를 무르익게 한다.

동하가 처음 청두에 도착한 날 공항으로 마중 나온 능청맞은 지사장(김상호)은 그를 데리고 노천 식당에 가서 유명한 쓰촨의 국수를 맛보게 한다. 딴딴미엔(擔擔麵)으로 보이는 국수를 마주한 동하에게 지사장은 자꾸 자신의 페이창펀(肥腸粉)을 맛보라고 권한다. 동하는 어쩔 수 없이 한 젓가락 입에 가져가지만 비릿한 돼지창자와 혀를 마비시키는 아리고 매운 향신료에 숨이 막힌다. 쓰촨의 맛은 그렇게 강렬하고 이질적이다. 한국인의 ‘중화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김치와 중국음식으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끝에 메이는 배가 부르다는 동하에게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있다고 말한다. 동하는 손사래를 쳤지만 꽤 진지한 메이의 태도에 더 이상 만류를 할 수가 없다. 에누리 없이 그것은 페이창펀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돼지곱창 쌀국수’ 쯤 된다. 메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동하. 나는 페이창펀을 잘 먹는 남자가 좋아.”

여기서 동하의 기호나 선택은 무의미하다. 메이와 어렵게 다시 만나 이번에는 잘해보리라 마음먹은 동하는 컥, 컥 하면서도 페이창펀을 열심히 먹는다. 돼지창자를 삶다가 또 삼각형, 팔각형의 울긋불긋한 향신료들을 넣고 끓인 국물에 그 곱창을 썰어 넣고 쌀국수를 말아서 낸 붉고 느끼한 외계인의 음식을, 먹게 만드는 힘은 연애다. 하지만 이런 단순명쾌한 연애감정은 주로 박동하의 것이다. 메이는 동하와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가 기쁘지만 그녀가 처한 현실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메이에게 페이창펀은 단순한 고향 음식일 뿐만이 아니다. 물론 이 음식은 청두에서 나고 자란 메이의 삶과 기억의 상징이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안고 있는 상처와 관계가 깊다.

요즘 유행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뜻하는 ‘트라우마’라는 의학 용어를 빌려 말하면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페이창펀을 분리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다. 다시 말해 페이창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 나오지만 메이는 1년 전에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했다. 메이의 남편은 페이창펀을 좋아했고 사망 1주기가 되는 날 메이는 동하와 함께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한스럽게 오열하며 페이창펀을 끓여서 남편의 영정 앞으로 가져간다.

착각과 추측

 

미국 유학 시절에 동하는 메이에게 미국인 남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고, 메이는 동하에게 일본인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모두 착각이었다. 어쩌면 그들 자신의 자기보호본능이 만들어낸 두려움 때문에 갖게 된 착각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만 서로의 주변에 있는 다른 이성을 핑계로 자신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메이가 겨우 용기를 내서 고백했을 때에는 동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그날 동하가 말한 대로 두 사람은 키스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동하는 메이에게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주었다. 그러나 메이는 동하가 떠난 후 자전거를 팔아버렸고 1년 뒤 청두로 돌아왔다. 메이는 중국인답지 않게 자전거를 무서워했지만 동하의 자전거를 팔아버린 진짜 이유가 자전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동하가 없는 시?공간에서 자전거는 무의미한, 죽은 사물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하는 메이를 알면서 시적 영감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시들은 메이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귀국한 뒤에 메이는 동하에게 안부를 묻는 엽서를 보냈지만 동하의 답장을 받지 못했다. 갓 취직을 했을 때에는 너무도 바빴고, 좀 여유가 생겼을 때에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동하는 대답한다. 사실 몇 통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여러 번 답장을 쓰고도 보내지 못한 동하였다. 처음에는 메이를 그리워했을 것이고, 그럴수록 메이가 멀리 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메이는 고향에 돌아와 대학에서 일하면서 두보초당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영어 가이드를 했다. 선후는 불분명하지만 두 가지 일을 모두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메이는 동하를 잊지 못하고 엽서를 보냈고 기다리던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메이는 두보초당에서 만나 함께 일하던 다른 사람과 사랑하게 되었으며 결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메이는 동하와 다시 만난 며칠 동안 예전 미국 유학시절로 돌아가 다시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을 꿈꾸었다. 그 시절 동하와 메이는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설레임과 기쁨이 클수록 현실은 더욱 무겁고 절망적이다. 메이는 결국 동하에게 자신이 결혼한 여자임을 털어놓지만 남편을 잃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그녀는 이제 동하를 그만 놓아야 할 때라고 느낀다. 그리고 좀 더 가볍고 강해지려고 애쓰지만 혼자 감당하기 힘든 괴리에 부딪혀 넘어진다. 메이를 쓰러지게 한 것은 교통사고가 아니다.

동하가 쓰촨으로 출장을 온 목적은 ‘사천 현장 장비 조사 및 딜러 방문’이다. 여기서 ‘사천 현장’은 무거운 언어다. 박동하가 출장을 오기 1년 전인 2008년 5월 12일에 중국 쓰촨성 원촨(汶川)에서 리히터 8.0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쓰촨 전역에서 죽고 행방불명이 된 사람이 9만명이었다. 청두에서만 4,276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메이의 남편도 그들 중 한명이다. 무너져 내린 집과 건물은 21만 6천동이다. 지금도 쓰촨성 각지에서는 복구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동하와 지사장의 기업에서 생산하는 중장비가 호황을 누리는 것은 중국의 일반적인 건설경기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쓰촨 대지진 때문이다. 죽은 자와 산 자, 메이 남편과 박동하.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가

 

동하의 출장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청두 시내에는 촉촉하게 밤비가 내린다.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길가에 서 있다. 메이는 비에 젖은 얼굴로 동하를 보면서 묻는다. “옛날에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걸 기억하니?”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객관적인 ‘사실’이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할 때가 있다. 동하와 메이가 미국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국적의 차이, 민족의 차이, 문화의 차이, 또 그보다 유서 깊은 양국 사이의 오랜 선입견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만고불변의 차별의식이, 두 사람 사이에도 왜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현실’은 그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도 있고 거역하는 사람도 있다.

슬픈 얼굴로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동하,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 말은 시(詩)의 성인(聖人) 두보(杜甫)의 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보는 전란과 당쟁 속에서 심한 굴곡을 겪었지만 청두에서 초가집을 짓고 5~6년 동안 살았던 그 시절이 그의 인생에서 그나마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봄날 밤의 반가운 비」
두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니
봄에 내려 생명을 피어나게 하네
바람을 따라 밤중에 살며시 들어와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고 있구나
들길에는 먹구름 드리워 컴컴한데
강 위에 저 조각배 홀로 불을 밝혔네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청두는 온통 꽃으로 덮여 있구나
「春夜喜雨(춘야희우)」
杜甫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
江船火獨明 (강선화독명)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

 

두보의 이 시구에서는 해가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 시를 읽으면 마치 따사로운 봄 햇살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는 두보의 시가 이 영화의 따스한 이미지와 어우러지면서 생겨난 착각일 것이다. 『호우시절』은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과 운명적인 이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희망이 쓰촨 청두의 햇살과 촉촉한 봄비, 그리고 자전거와 잘 어우러져 아름답고 슬픈 감흥을 주는 영화다. 특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실적이지만 추악하지 않은 사물들은 이 영화가 지닌 서정시의 느낌을 더한다. 허진호 감독은 이전 영화들에서도 주인공들의 삶, 주변 인물, 사물의 리얼리티를 음으로 양으로 균형감 있게 보존하면서 꺼져가는 생명이나 지켜지지 못하는 약속들, 변해가는 사물의 속절없는 운명들을 조용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허진호의 영화는 시적 정서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본다면 마지막으로 갈수록 드러나는 메이의 아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햇살이 내리쬐고 물이 흘러가는 듯한 자연스러운 시나리오가 한 몫을 했다. 또 결이 섬세하면서도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까오 위안위안의 연기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우성의 연기도 이전과 사뭇 다르게 새로운 인물 전형의 가능성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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