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선택하는 바보는 없다[생각vs생각]
행복전도와 자살의 역설-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의 자살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혼란을 넘어 “행복하라는 말은 모두 거짓이었나”, “당신의 책을 모두 버렸다”, “행복전도사 자격이 없다”는 등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의 자살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심지어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살라”고 말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일치를 느끼는 이유는 남에게는 행복한 삶을 살라고 말하고서는 정작 자신은 불행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불행을 선택한다는 생각은 외부관찰자의 판단일 뿐이다. 당혹스러움은 당사자의 관점과 외부관찰자의 관점을 혼동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통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는 메저키스트의 행동을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행위로 보는 것은 외부관찰자의 관점일 뿐이며 당사자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그것 또한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도 스스로 행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다.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위와 불행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행복을 얻는 소극적 행위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바보의 행복 또한 마찬가지다. 작은 다이아몬드보다 커다란 빵을 선택하고 행복해하는 바보를 외부관찰자는 불쌍하다고 동정한다. 당사자는 마냥 행복한데 말이다. 작은 다이아몬드보다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선택한 강아지는 어떨까? 외부관찰자로서 우리는 그 강아지도 불쌍하다고 동정할까? 노무현이 야합적인 3당 합당을 비판하고 꼬마민주당을 고집했을 때, 낙선이 불 보듯 뻔한 출마를 스스로 선택했을 때, 살아서 당당하게 결백을 밝히는 대신 부엉이 바위를 선택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바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바보는 없다. 행복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인지생물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H. Maturana)에 따르면, 외부관찰자는 관찰자 스스로 설정한 특정한 맥락 속에서 효과적인 행동으로 관찰되는 행동을 인지적이거나 지능적인 행동으로 간주한다. 행동의 긍정적 효과를 행복이라고 본다면, 바보는 관찰자가 스스로 설정한 교환가치라는 맥락에서 볼 때 효과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으므로 그 행동은 불행을 스스로 선택한 어리석은 것이다. 반면에 강아지는 관찰자가 스스로 설정한 사용가치라는 맥락에서 볼 때 효과적인 행동을 했으므로 이는 행복을 스스로 선택한 똑똑한 행동이다.
노무현은 관찰자가 스스로 설정한 권력의 가치라는 맥락에서 볼 때 효과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으므로 그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관점에서 보면, 강아지뿐만 아니라 바보도 스스로 설정한 사용가치라는 맥락 속에서 효과적인 행동을 했고, 노무현도 스스로 설정한 정의의 가치라는 맥락 속에서 효과적인 행동을 했다. 모두들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여전히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녀가 “불행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초연하게 맞서라”고 말한 데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해놓고 스스로는 불행으로부터 도망갔으니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게다. 그런데 그녀는 불행으로부터 단지 벗어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불행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한 것일까? 이 두 가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앞의 것은 불행을 단지 불편해하는 경우이며, 뒤의 것은 불행을 무서워하는 경우다. 그녀는 어떤 경우였을까? “불행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초연하게 맞서라”라는 그녀의 말이 진실이었다면 그녀는 불행을 무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몹시 불편했을 뿐이다. 그녀가 유서에서 “죄송하다”고 말한 이유는 불행으로부터 도망가서가 아니라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벗어나려 한 데 있을 것이다.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죽음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것을 실존적 결단이라고 한다. 물론 하이데거의 이 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죽음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면 공포를 느끼지만 죽음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맞서면 불안을 느낀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삶에 집착하여 종교인이나 의사를 찾아가 살려달라고 애걸하지만,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삶의 무반성적인 태도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실존적 의미를 찾게 된다. 삶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에도 집착하지 않는 초연한 실존적 삶을 살게 된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모든 불행으로부터 벗어난 행복한 삶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최윤희씨가 전도한 행복의 비밀이 아닐까? 바보가 마냥 행복한 이유는 삶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우리가 바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가 권력에, 아니 삶과 죽음에조차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최윤희씨의 자살은 그녀가 전도하며 다닌 “모든 불행은 집착으로부터 온다.”는 깨달음을 몸소 실천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당혹감이나 배신감 또는 분노를 느끼는 것은 그 행복의 비밀을 아직 몸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최윤희씨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인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어요?”
김광식(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