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은 왜 미끼없이 낚시를 했을까[고전은 숨쉰다]
산이란 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千山鳥飛絶)
길이란 길, 사람 자취마저 끊겼는데(萬徑人?滅)
외로운 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孤舟蓑笠翁)
홀로 낚시질, 차디찬 강에 눈만 내리고(獨釣寒江雪)
당나라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강설’(江雪)이다. 이 시의 정경은 수많은 화가들이 묘사했던 화제(畵題)이다. 남송 시대 마원(馬遠, 1160~1225)의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최북(崔北, 1712~1786))의 ‘한강독조도’도 있다.
고전을 두루두루 꿰뚫으신 어른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기대를 한껏 했지만 어르신은 그저 간단히 코멘트만 하시고 수업을 진행하셨다. 어느 날 수업 중 당시의 백미라던 ‘강설’이 나왔을 때도 난 짐짓 딴청을 피우며 듣고 있었는데 어르신께서 이 시를 볼 때마다 복괘(復卦)가 떠오른다고 단 한마디 하셨다. 순간 엉? 하고서 왜? 했다가 아! 했다.
난 자신의 섹스 경력을 자랑인양 떠벌리는 사람이 느끼는 섹스의 쾌락을 신뢰하지 않는다. 포르노를, 그렇다, 오해하지는 말자, 아주 가끔 본다. 가만히 생각해 본 일이 있다. 어떨 때 난 흥분했고 어떨 때 짜증을 냈던가.
자연스러움이 답이었다. 리얼한 자연스러움, 위선적이지도 위악적이지도 않으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움. 그 자연스러움을 상대에게 요구하거나 강제하지도 않으면서도 서로 몰입되는 도취의 순간. 나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시선을 의식하면서 쾌락의 쇼를 부리는 모습은 얼마나 짜증이 나는가.) 오직 몰려오는 흥분에 도취한 몸의 모든 미세한 떨림을 느낄 때, 나는 그 리얼한 몰입에 함께 도취되는 합일을 잠깐, 그래 오해하지는 말자, 잠깐 느끼고, 아! 했다.
‘강설’의 시에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늙은이의 시선과 나의 시선. 그러나 늙은이는 나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산과 사람 자취마저 끊긴 길을 배경으로 한겨울의 한없이 내리는 눈 속 외로운 배 위에서 생명력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낚는 즐거움에 몰입해 있다. 입질과 손맛을 즐기는 늙은이의 눈빛이 번득인다.
보이지는 않지만 물속에 있는 물고기란 『장자』의 ‘호수가 다리 위의 물고기’(濠梁之樂)나 『중용』의 ‘물고기는 연못에서 즐겁다’(魚躍于淵)는 『시경』 구절이 상징하듯이 ‘즐거움’을 상징한다. 리얼한 자연스러움이다. 시를 읽고 늙은이의 자연스런 몰입을 몰래 훔쳐보며 나도 모르게, 다시 말하건대 오해하지는 말자, 그 즐거움에 합일되는 순간, 아! 했다.
즐거움과 낚시질
‘강설’을 복괘와 함께 읽을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즐거움’과 ‘낚시질’이다. 복괘는 자연스러움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복괘는 『주역』의 괘 가운데 여러 학자들이 칭송하고 놀라워했던 괘이다. 왜일까. 복괘는 동지(冬至)에 해당한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양(陽)의 기운이 비로소 차가운 땅에서 올라오려는 순간으로 생명이 막 소생하려는 때이다. 생명력의 회복이 복괘다. 복괘의 괘사는 이렇다.
“회복은 형통하니, 나아가고 들어옴에 막힘이 없다. 친구가 와야 허물이 없다.(復, 亨, 出入無疾, 朋來, 無咎.)”
간단하다. ‘출입무질’(出入無疾)과 ‘붕래무구’(朋來無咎). 먼저 ‘출입무질’이란 무슨 말인가. 생명의 힘이 정치권 안으로 들어왔으니 ‘입’이고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니 ‘출’이다. ‘무질’이란 억지로 강제하지 않고 막힘이 없이 자연스럽다는 의미다. ‘붕래무구’란 동지(同志)들이 즐거움을 함께 하려고 모여들어 연대해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본다고 한다.
이 말을 동시에 이해하기 위해 ‘안연’(顔淵)과 ‘강태공’(姜太公)을 함께 겹쳐 보아야 한다. 정이천은 복괘를 안연과 비교한다. 안연은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유명하다. 그는 도를 즐거워했다. 진정으로 도를 즐겼던 인물로 삶의 모든 순간을 도의 즐거움으로 채우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이런 말을 보았다. “철학자에게서 검소함은 도덕적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철학 그 자체의 ‘결과’이다.” 이 말을 패러디 해보자. “철학자에게서 즐거움은 도덕적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철학함 그 자체의 결과이다.”
‘안빈낙도’란 가난을 칭송하는 말이 아니다. 진정한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다. ‘안빈낙도’를 외치며 자신의 가난함을 정당화하는 것은 위선이다. ‘낙도’하기 위하여 가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낙도’의 결과일 뿐이지 가난하다고 ‘낙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낙도’하기 위해 가난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도’를 즐겼다고 스스로 의식하면 그것은 도를 즐긴 것이 아니다. 시선이 개입되지 않는 완전한 몰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낙도’하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않는 몰입이어야 한다. 제자가 정이천에게 안연의 즐거움을 물었을 때 정이천은 “안연으로 하여금 도를 즐기게 한 것은 안연이 아니다.”(使顔子而樂道, 不爲顔子矣)라고 대답했다.
곱씹어 볼 말이다. 안연은 도를 즐겨야 한다고 의지를 발휘하지도 않았고 도를 즐기고 있다고 스스로 의식하지 않고서 단지 수동적으로 몰입 당했을 뿐이다. 포르노에 나온 사람의 리얼한 자연스러움과 동일하다.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연은 단지 스스로의 즐거움에만 몰입하는 쾌락주의자였을까. 복괘에서 “친구가 와야 허물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친구들이 오지 않는다면 그 즐거움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즐거움과 더불어 ‘낚시질’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낚시질이란 말은 흔히 사용된다. 나도 인터넷에서 얄궂은 말에 낚시질을 많이 당했다. 허탈하게 낚인 것이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유혹할 때도 낚시질한다고 표현한다. 이 낚시질이란 말에는 분명 족보가 있다.
중국 문화에서 낚시질은 상당히 중요한 상징이다. 낚시질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강태공’이다. ‘강태공’은 바로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로서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던 태공망으로 잘 알려진 여상(呂尙)이다. 하루는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인재를 찾던 주나라 문왕이 그를 보고 재상으로 등용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무엇을 낚고 있었을까? 군주의 마음을 낚시질했던 것이다.
『귀곡자』에는 재미난 표현이 있다. 『귀곡자』는 유세술(遊說術)과 모략에 관한 책인데 군주에게 유세를 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귀곡자는 상징과 비유를 통해 상대방의 속내와 의도를 떠보는 방식을 ‘사람을 낚는 것’(釣人之網也.)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도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는 행위를 낚시질로 말하지 않는가.
유세란 그리스 시대의 수사학과 비슷하다.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다. 귀곡자는 “유세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지만 상대를 기쁘게 해야 한다”(說者, 說之也)고 말한다. ‘유세’(說)는 ‘설(說)명’하고 ‘설(說)득’하여 상대를 기쁘게 ‘열(悅)광’하게 해야 한다. 설(說)이라는 한자는 유세, 설명, 설득, 기쁨의 뜻이 들어있다. 주목해 보자. 공통적으로 들어간 한자가 있다. 바로 태(兌)라는 글자이다.
유혹하지 않는 유혹
『주역』에 바로 ‘태괘(兌卦)’가 있다. 태괘는 연못을 상징하는데 물이 만물을 윤택하게 해서 기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주역』 ?설괘전?에서는 이 태괘가 입(口)를 상징한다고 되어있는데 입이란 말재주를 상징한다. 물이 만물을 윤택하게 하듯이 말로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유세를 통해서 상대를 감동시켜 설득한다는 말이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낚을 때 ‘뻐꾸기’, 즉 ‘말빨’이 전부는 아니지만,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말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다가 아첨과 기만에 빠지기 쉽다. 말이란 진정성이 없다면 허울일 뿐이다. 진정한 뜻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태괘의 ?단전(彖傳)?에서 “속으로는 강직한 뜻을 가지고서 겉으로는 부드럽게 상대를 기쁘게 한다”(剛中而柔外)고 말한다. 정이천은 “마음을 감동시켜서 기쁘게 설복하게 만든다.”고 설명하는데 왕필의 주석이 재미있다.
“상대를 기쁘게만 하고 자신의 강직한 뜻을 어긴다면 아첨이고, 강직한 뜻만 지키려다가 상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폭력이다.”(說而違剛則諂, 剛而違說則暴)”
상대 기분만 맞춰 아첨하다가는 자신의 뜻을 잃게 되고 자기의 뜻만을 상대에게 강제하는 폭력은 상대를 저항하게 만들어 설득시키기 어렵게 한다. 아첨하지도 않고 폭력적이지도 않게 상대를 설득하는 유세의 방식은 무엇일까.
강태공은 미끼를 쓰지 않고 곧은 바늘로 낚시를 했다고 한다. 세월을 낚기 위해서였을까? 곧은 낚시 바늘이란 미끼를 낄 수가 없다. 미끼란 무엇일까. 낚아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유혹하려는 속임의 수단이다. 미끼를 던진다는 것은 물고기를 속여서 미끼를 물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일상 언어에서도 미끼를 던진다는 말을 사기 치기 위한 술수를 말한다. 맹자는 미끼 던지는 낚시질을 증오했다.
“선비가 말할 만한 때가 아닌데 말을 하면 이는 말로써 미끼를 던져 낚는 사기술이고 말할 만한 때인데 말하지 않으면 이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미끼를 던져 낚는 사기술이다. 이는 담을 뚫고 넘는 좀도둑질이다.”(士未可以言而言, 是以言?之也, 可以言而不言, 是以不言?之也, 是皆穿踰之類也.)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맹자는 말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말할 만한 때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말할 만한 때 말을 해야만 한다. 낚시질하되 미끼를 던져 사기 치지 말라는 것이다. 강태공도 낚시질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미끼를 쓰지 않고 곧은 바늘로 낚시하며 사람을 낚으려고 했을 뿐이다. 강태공은 『육도(六韜)』라는 병법서를 쓴 유세가였고 전략가였다.
다시 ‘강설’의 장면을 복괘와 함께 생각해보자. 한겨울 새조차 없는 산속 강가 차디찬 얼음 위에서 늙은이는 생명력이 넘쳐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낚으려 한다. 안연처럼 그 즐거움에 몰입되어 있으면서도 강태공처럼 미끼를 던져 사기 치지 않고 미끼 없이 군주의 마음을 설득시켜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세월을 낚는다는 말은 곧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연과 같은 ‘낙도(樂道)’가 강태공의 낚시질처럼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낚이게 한다.
몰입의 즐거움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변화를 가져온다. 다시 한번 들뢰즈의 말을 패러디해보자. “철학자에게서 타인의 변화는 도덕적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철학함 그 자체의 결과이다.” 혹은, “철학자에게서 사회의 변혁은 도덕적 목적이나 수단이 아니라 철학함 그 자체의 결과이다.”
상대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면 자신이 어떤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진짜 즐거워서 즐겁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몰입해야 한다. 유세란 자신의 즐거움이 발휘하는 감동의 효과이다. 즐거워야 한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 그러나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 라고 말하며 어금니 꽉 깨무는 순간, 지고 만 것이다. 말했다는 것은 이미 부러워함을 스스로 인지했다는 증거이므로.
즐거운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공자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그런데도 사계절은 운행되고 만물은 생겨난다.”고 하면서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정말 침묵을 지키겠다는 뜻이었을까. 왜 말을 하지 않으려 했을까. 하늘은 말이 없이도 영향력을 미치고 만물을 복종시킨다. 말없음의 말의 효과이다.
성인(聖人)은 말이 없다. 타인에게 말하려고 한다는 것은 인정과 복종을 구하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의 즐거움을 타인에게 자랑하지 않으며 강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말없음의 즐거움이 상대를 감동시켜 변화를 일으킨다.
결국 성인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쾌락에 도취된 사람, 이 우주 한 가운데 오직 자신만이 홀로 서서 쾌락에 흠뻑 취하는 사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하는 ‘변태’(變態)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쾌락에의 도취는 주변 사람들을 유혹하고 전염시켜 열광을 불러일으킬 때 완성된다. “친구들이 모여들어야 한다.”
타인에게 말하지도 않고 즐거움을 전염시켜야만 하는 모순, 유혹하려 하지 않고 유혹해야 하는 모순을 실천해야만 하는 사람, 이것이 성인의 위대한 기상이다. 그러나 유혹하지 않는 ‘척’하면서 유혹한다면? 사기꾼일까? 오해하지는 말자, 그러나, 문제는? 전략 없음의 정치 전략이다. 전략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전략적 효과를 내는 이중 전략이다.
심의용(서울예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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