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 간의 경쟁, 어떻게 볼 것인가?[고전은 숨쉰다]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대한 두 번째 소개글입니다. 수많은 서양 고전학자들의 이름을 따로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의 논쟁을 배경으로 접근했습니다.(필자)
우리 시대의 화두, ‘경쟁’
‘경쟁’은 한국 사회의 화두이다. 입시 경쟁, 취업 경쟁, 하다못해 유치원 입학 경쟁까지. 아니 한국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분유를 먹느냐를 가지고 경쟁해야 하며 죽고 나서는 어떤 식의 장례를 치루고 어느 곳에 묻히느냐까지도 경쟁해야 한다. (죽고 나서도 경쟁해야 한다니 이처럼 어이없는 일이 또 있겠는가!) 그리고 이 같은 경쟁문화 속에서 한국인들이 극심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단이다. 며칠 전 이런 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씁쓸한 기사가 떴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7월 9일자 아시아판에서 ‘한국인들은 경쟁심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같은 경쟁심이 한국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경쟁심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는 것이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이다. 이 기사는 故 박용하 씨의 자살을 다루고 있는데, 기사 제목은 ‘한국의 자살: 출구 전략’이었다. 이 제목은 삶의 출구 전략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인의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최고이다.)
한국 ‘사회’의 자살율이 높다는 것에 대해 흔히 이루어지는 분석은 이렇다. ‘한국은 극심한 생존 경쟁 사회이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로 몰아가게 하고 있다.’ 뭔가 꽤나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가장 안 좋은 형태의 사회학적 설명이다.(실질적으로는 자유로운 개인의 동기가 배제된 ‘추상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요즘 자살하는 한국인들이 생존 경쟁에 졌기 때문에 자살한 것일까? 이런 설명이 타당하려면 자살자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오로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을 예비적인 실마리로 삼아 『일리아스』와 관련된 논란을 다루어보도록 하자.
제로-섬 게임인가?
알다시피 생존 경쟁 사회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설명 논리 가운데 하나가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다. 게임 참여자들의 이익과 손실은 정확히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누군가가 이익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꽤 이름 있는 서양 고전학자들이 호메로스 사회를 제로-섬 모델로 설명하려 한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애드킨스(Adkins)이다.
애드킨스의 접근은 좀 더 거시적인 시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호메로스 사회에서는 경쟁적(competitive) 가치가 연합적(co-operative) 가치를 압도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흔히 고대 희랍을 ‘경쟁(ag?n) 문화’로 간주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런 해석은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쨌든 호메로스 영웅들은 명예(tim?)를 두고 경쟁하는데(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제로-섬 모델을 적용하면, 자기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경우는 타인을 모욕(불명예)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명예는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배타적이다. 이런 점에서 애드킨스가 왜 호메로스 사회를 경쟁적 가치 체계가 지배했다고 보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일리아스』I권에서 아가멤논은 원래 아킬레우스에게 ‘명예의 선물’(geras)로 주어진 어여쁜 색시 브리세이스를 빼앗음으로써 아킬레우스를 모욕한다. 사실 『일리아스』에서 명예에는 대개의 경우 물질적 보상(geras)이 주어진다. 애드킨스는 이 점에 주목해서 호메로스적 영웅들이 추구한 명예가 근본적으로 소유지향적(possessive)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 사회를 ‘결과 문화’(result-culture)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여기에 제로-섬 모델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은 설명 구도가 된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물질적 보상으로 주어지는 명예를 소유하려고 배타적인 경쟁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영웅들에게는 행위의 의도와 방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과만이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이런 애드킨스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를 긁어라. 그러면 아가멤논 왕을 볼 수 있을 것이다.”(Adkins,A.W.H.,Merit and Responsibility,1960.)
트라쉬마코스라는 인물이 플라톤의『국가』I권에서 이기주의적 결과주의자로 제시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애드킨스도 호메로스 영웅들을 어느 정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호메로스 영웅들은 트라쉬마코스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꽤 복잡하긴 했지만, 애드킨스의 설명을 듣다보면 홉스가 연상되지 않는가? 영웅들 간의 관계는 배타적이다. 그들은 공유할 수 없는 명예를 서로 빼앗아서 자기가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때의 명예에는 ‘언제나’ 물질적 보상이 주어진다. 이에 따르면 호메로스 영웅들은 명예라는 결과를 얻으려고 배타적으로 경쟁하는 이기적 존재이다. (애드킨스가 명시적으로 ‘이기적 존재’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때의 명예는 소유되는 물건과 같은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최근에 여러 학자들이 밝혔듯이 『일리아스』는 이런 설명에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선 호메로스 영웅들에게 명예는 소유되는 물건과 같은 것이 아님에 틀림이 없다. IX권에서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빼앗았던 브리세이스를 포함해 엄청한 보상과 함께 자기 딸까지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아킬레우스는 “모래나 먼지만큼 많은 선물을 준다 해도 마음 아프게 하는 모욕의 대가를 다 치르기 전에는 아가멤논은 결코 내 마음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IX.385-387) 만일 아킬레우스가 소유지향적인 존재였다면 그 많은 보상을 거부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못 이기는 척하면서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아킬레우스가 왜 거부하는가는 역설적으로 아가멤논이 선물을 제시하는 연설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IX.157-161) 그는 자신의 선물 증여를 아킬레우스의 양보 및 굴복과 연관 짓고 있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선물을 줌으로써 ‘그만큼 더 위대한 왕’이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아가멤논의 발언을 보면 그 또한 소유지향적 인물이 아니다.
일찍이 모스(Mauss)가 해명했듯이 호메로스 사회는 선물-경제(gift-economy)가 지배하던 사회였다.(마르셀 모스(이상률 옮김),『증여론』,2002) 달리 말하면 소유 사회가 아니라 소비 사회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선물을 준 사람에게 모종의 부담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선물은 소유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선물을 교환함으로써 성립되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아가멤논의 경우는 선물을 줌으로써 왕으로서의 자기 권위를 확립하려 하고, 아킬레우스는 그것을 알기에 선물을 거부한다.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 영웅들은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다.
명예, 그리고 영웅들 간의 경쟁
애드킨스의 다른 견해는 틀렸다 해도 영웅들이 명예를 놓고 경쟁한다는 지적만큼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웅사회의 명예란 도대체 어떤 가치로 봐야 할까? 우선 주목할 만한 건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다툼 속에서 ‘분노, 모욕’ 등의 심리적 용어가 수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킬레우스에게는 물건을 빼앗겼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신이 깎이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자존심이 손상 받은 것에 대해 상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를테면 개같이 파렴치한 자!)
다른 한편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분노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소.”(IX.318-319) 이 대목을 보면 아킬레우스는 명예(tim?)를 소유 차원이 아니라 분배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 같은 분배란 공동체의 터전을 전제하지 않고는 논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의 다툼을 개인적 다툼으로 환원하지 않고 공동체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건 다음을 통해서 훨씬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아무런 명예도 없는 재류외인(在留外人)인 양 아트레우스의 아들[=아가멤논]이 아르고스인들 앞에서 내게 무례하게 대하던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민다오.”(IX.646-8)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불명예를 안은 것을 재류외인 취급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재류외인은 실질적으로는 공동체 밖의 존재이다. 이것은 역으로 명예가 공동체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달리 말해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음에도 그에 적합한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했음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메로스 영웅들 간의 다툼은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공동체 속에서 벌이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인 것이다!
경쟁의 파국에 대한 시인의 답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영웅들 간의 경쟁은 배타적인 생존 경쟁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한 동안 모욕감에 치를 떨며 전쟁터에 아예 안 나간다. 그 결과 희랍연합군은 연전연패하게 된다. 『일리아스』는 왜곡된 인정투쟁이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후대의 희랍에서 클레이스테네스나 알키비아데스 같은 이들은 공동체에서 자신들이 인정을 받지 못하자 조국을 배반하고 적국의 품에 안기기까지 하는데, 이런 사례들은 영웅주의적 가치가 가지는 위험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드러내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리아스』의 시인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까지 답변을 제시해놓고 있는 것 같다. 『일리아스』는 인정투쟁 맥락에서 영웅들 간의 다툼을 드러내며 그것이 분노(m?nis)를 통해 파국을 향해 치닫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전장으로 돌아와 헥토르를 죽이지만, 다툼의 근원적 문제가 그로써 해결되는 것도 아니며 분노 역시 해소되지 않는다.
XXIII권은 파트로클로스의 추모경기를 다루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전차 경주를 아킬레우스가 주도한다. 아가멤논은 뒷전으로 물러나 나타나지를 못한다. (세부적인 논란거리는 생략하고 말하자면) 이때의 경기는 배타적인 경쟁이 아니다. 일종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의해 주도되는 경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경쟁자들은 상대자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이길 수 있는 생존 경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경기는 페어플레이 규칙을 통해 일종의 정의(dik?)의 정신을 실현하고 있다. (자본화된 현대 스포츠는 이 범주 밖에 놓여 있다.) 이 모델은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적 인정 방식을 보여주는 모델이다. 1등, 2등, 3등의 순위는 나뉘지만 서로 피를 튀기며 죽이는 관계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들은 경기가 끝난 뒤 공동체적 우애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플라톤의 경우는 ‘경쟁’(ag?n)을 두 가지로 구별한다. 적대적 경쟁은 ‘mach?’라고 하고 경쟁자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경쟁(contest)은 ‘hamilla’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사가 규칙(과 같은 제도)의 차원에서 전부 해결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이 사람을 인정하는 관계는 실질적으로는 인격적 관계에 의해 맺어질 때만 구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소개글에서 이야기했듯이, XXIV권에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와 화해한다. 화해의 근원은 연민(eleos)의 정서이다. 『일리아스』의 시인은 인간의 인격적 관계가 인간에게 근원적인 고통을 보듬을 때 가능하다고 본 것이 아닐까.
되새김해보는 우리의 삶
지금까지의 설명을 고려할 때 서양 고전학자들이 같은 텍스트를 보고도 어떻게 그렇게 달리 볼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사태를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가 사태를 밝히느냐 은폐하느냐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자본주의자들은 생존경쟁의 논리를 가지고 세상을 설명한다. 그런데 역으로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를 지적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진단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모두 다 그렇다는 건 결코 아니다.) 한쪽은 경쟁을 무조건 좋게 보고, 한쪽은 경쟁을 무조건 나쁘게 볼 뿐이다. 그렇지만 시장주의적 경쟁 논리가 현실을 지배하는 실질적 메카니즘이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시각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앞에서 물었듯이 우리 모두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경쟁하고 있는가? 내 판단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생존에서 도태되었기에 자살했다는 식의 사회학적 설명은 영혼을 가지고 고민하는 개개인을 모욕한다. 겉으로 보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자살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따지고 보면 복잡한 동기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는 먹고 살 수 없어서가 아니라 더는 살아갈 영혼의 힘을 잃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자기를 유지할 힘, 자존의 힘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자존의 힘을 파괴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까닭은 우리네 공동체가 사람의 영혼을 모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양상은 시장주의적 경쟁 논리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모욕 사회이다. 국가가 시민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서로를 너무나 쉽게 모욕하는 경향이 있다. 모욕하는 행위는 자기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부정적으로 발출된 것이다. 그만큼 자기를 지키기 어려운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시장주의는 배타적인 경쟁 관계가 인간의 모든 영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맞다면 경제주의자들의 시장논리는 허구이다. 시장주의자에 따르면 교환 속에서 궁극적인 기준은 상품이란 물건이다. 그런데 상품이 교환의 기준이라면 교환을 하는 자들은 서로 타산적 관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에게 타산적 갈등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하고 그래서 때로는 타인을 모욕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존재론적 고통이 아닐까. 왜냐하면 나의 영혼은 타인과 대화하고 타인과 사랑하며 또 서로 인정받기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 삶의 그 같은 실질적 차원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은폐시키는 것, 그 원인 중의 원인은 시장주의 논리 아닐까.
결국 물건에 종속되는 물화(物化)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상호간의 인격적 인정이 공동체 차원으로 확대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각박한 현실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마 ‘인정’은 제도의 문제와 교차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는 영역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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