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공동체 운동[철학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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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공동체 운동[철학의 유언]

유언을 위한 시대의 통찰, 그리고 소명-
서유석(호원대교수)

 

정작 지역(local)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광역이든 기초든 단체장과 의회 모두 같은 당 일색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한두 곳 예외가 생겼지만 크게 보면 전국이 비슷하다. 지방권력에 대한 제대로 된 견제가 이루어질 리 없다. 설상가상, 자치단체장과 의원의 눈은 중앙을 향해 있다. 후보 선출의 실질적 권한이 당 중앙과 국회의원에게 있기 때문이다. 중앙 정치에 기대어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는 점에서는 지역 주민도 마찬가지다. 지방자치가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현실에서는 지방분권도 주민자치도 형식적이다. 그뿐인가. 정작 지역 정치에서는 진보도 없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넘어서는 진보정치의 구현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여야 모두 대기업 본사와 공장, 그리고 외자 유치에 한 목소리고, 전국적으로 반대여론이 높은 4대강 사업이건 새만금 물막이공사건 돈이 풀리는 일이라면 내심 오케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호남만이 아니다. 경상도가 그렇고 충청도와 강원도, 경기도와 서울이 크게 다를 게 없다. 지역정치의 현주소다. 지역의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소위 ‘진보의 집권’은 먼 나라 이야기다.

진보대통합(연합) 논의가 한창이다. 과연 2012년 대선/총선에서 진보가 정권을 잡을 수 있을까.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런 야무진 꿈은 버리더라도, 최소한 제2 견제세력으로서의 의석수라도 차지할 수 있을까. 진보 대통합(연합)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진보 정치 운동에 새로운 생명력이 솟구쳐 대(大)변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진보의 집권이나 중심적 정치세력으로의 부상은 쉽지 않아 보인다. 2012년 이후에도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다. 사회는 병들어 가는데 ‘그 때’는 과연 언제일까. 아니, 그때까지 우리는 무얼 해야 하나. 좀 더 적극적으로,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눈을 돌려 어떤 일을 도모해야 하나.

민주당 중심의 민주대통합은 설득력이 없다. 대책 없이 신자유주의와 한미FTA를 수용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 정리가 선행되지 않는 한,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줄 세력이 못된다. 그러면 진보정치세력은 어떤가. 사회적 양극화, 공공영역 파괴, 복지 후퇴 등 진보적 대응이 절실한 필요한 사회적 난제는 쌓여 가는데 막상 이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가야 할 진보 정치세력은 날로 왜소해지고 있다. 통합과 연합을 거론하지만 일종의 편집증과 조급증에 걸려 지척거릴 뿐이다. 우선 자기 세력이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는 편집증에 빠져 있다. 여기에 상처뿐인 구연(舊緣)과 정치적 이해관계 갈등이 더해져 좀처럼 논의에 진전이 없다. 또 한 가지, 진보 정치권 전체가 중앙 정치 진출에 목을 매고 있다. 일종의 조급증이다. 겉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내심 2012년 중앙 정치 진출이 최대 과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안 되면 또다시 4년 후에 목을 맬 태세다. 집권은 중요하다. 정치세력이라면 당연히 꿈꾸는 일이다. 중앙 정치 진출도 마찬가지다.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적극적 동의와 지지를 받아낼 만한 사회적 비전과 정책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기 십상이다.

진보 정치의 실현이 계속 지연되고, 변혁의 그날이 무한히 연기되는 그 사이에 보수의 물결은 장강을 이루고 끊임없이 넘쳐댄다. 전(全)세계적 현상이다.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차곡차곡 사회의 공적 부문을 잠식해가고 있다. 개방과 규제완화, 민영화와 노동유연성 확대의 미명 아래,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의 심연으로 빠지고 있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연대’의 삶은 문화에서도 일상의 삶에서도 경쟁과 서열, 우승열패의 강력한 기제 앞에 사라지고 있다. 지역 이기주의, 사회적 무임승차 심리마저 확산되고 있다. 시민의식의 상실, 유권자의 보수화마저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지역의 작은 공동체 운동들이 있다. 마포 성미산의 대안 공동체 운동, 대안학교 운동, 생협운동, 지역과 농촌이 함께 하는 학교 급식운동, 지역 농산물 소비운동(local food), 동네 환경을 함께 고민하는 운동, 비정규직과 노숙자의 자활공동체 운동 등, 다양한 주민참여형 연대 공동체 운동들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거대한 사회문제에 비해 미미한 운동이고 성향도 각색이다. 때로는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라는 한계, 때로는 지역 이기주의에서 출발한 운동이라는 한계,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논리에 잠식될 우려가 있다는 한계 등이 있다. 하지만 정치와 민주주의의 본질이 주민이 참여하여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 있는 한, 이 운동들은 매우 중요한 운동이요 희망의 싹이다. 참여하는 주민을 ‘시민’이라 부를 수 있다. ‘참여자치시민연대’, 지역 시민단체의 이름이지만 어찌 보면 민주주의와 진보의 키워드들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지역의 주민참여운동, 연대 공동체 운동은 크게 보면 아나키즘 운동의 후예다. 아나키즘, 특히 공산적 아나키즘의 특징이 바로 중앙권력의 거부(de-centralization), 연대적 삶(공동체적 삶)의 구현, 그리고 이 공동체들의 느슨한 연합(federation)에 있기 때문이다. 68운동, 소수자운동, 친환경공동체 운동 모두 마찬가지다. 진보 주류는 이런 운동을 백안시해왔다. 반(反)자본의 아나키즘조차도 변혁 운동의 방해물, 심지어 척결 대상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운동의 초점(혁명, 노동자당)을 흐리게 하고 중앙정치를 거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진보정치는 점점 삶의 현장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결국 유럽 공산당도 일본 공산당도 몰락하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의 진보정치운동이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생활 현장, 노동의 현장, 지역의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중앙권력의 논리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진보세력은 ‘작아 보이는’ 지역의 자치공동체 운동, 현장의 운동으로 내려가야 한다. 편집과 조급증을 털어버리고, 아래로부터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운동은 비록 작지만, 시장만능을 거부하는 운동, 신자유주의를 틀을 넘고자 애쓰는 운동이다. 변혁의 그날이 무한히 지연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연대적 삶을 실험하고 구현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또 처음에는 주민의 이해관계, 지역과 집단의 작은 이해관계에서 시작되더라도 주민의 참여와 조직적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공적 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운동이고 이미 그런 사례들이 많다. 일본 전공투 세대의 운동가들이 생활 현장으로 들어가 주민참여의 공동체 운동을 구현하는 노익장을 보이고 있다. 중앙정치의 미련을 버린 공산당이 지역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지역정치, 생활정치가 일본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흔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발상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중앙으로부터가 아니라 지역과 바닥에서 시작하여 점차 중앙을 포위해 가는 전략 말이다. 우리의 진보정치세력, 그리고 운동권 세대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지역운동, 공동체운동의 한계로 변혁 전략의 부재를 든다. 하지만 장기적 소강국면에서는 다양한 진지전이 우선이고, 이들이 연대를 이루어내면 변혁의 주요 동력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이제는 이 길뿐이다. 소강국면의 장기화는 시민의식의 왜곡도 초래한다. 박정희 신드롬, 보수와 단견(myopia)의 만연된 무임승차 심리가 그것이다. 진보의 집권이 난망이지만, 설령 집권한다 해도 이 문제, 그리고 지역 민주주의의 부재, 지역 진보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주민참여의 공동체 운동은 허위의식이 참여와 토론을 통해 극복되는 민주주의의 유일한 훈련장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지역은 중앙에 비해 진보적 삶에 대한 논의가 미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교육감 선거는 훌륭한 경험이었다. 공교육 정상화를 목표로 다양한 조직과 세력, 크고 작은 연대체들이 참여하여 토론하고 힘을 모았던 것이다. 생활 현장, 지역의 현장에서는 중앙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소위 민노당/진보신당 간의 악연(惡緣)이나 정치적 이해관계 갈등도 미미하고, 당면 연대 노력의 방해물이 되지 못 했다. 이런 가능성에 불을 지펴, 지역의 진보 운동과 현장의 목소리가 중앙 정치의 조급증과 편집을 깨 나가야 한다.

「철학의 유언」에 웬 정치 이야긴가. 쓰고 보니까 좀 그렇다. 하지만 이런 운동의 저변을 흐르는 사상이 있지 않은가. 그 동안 ‘자유주의’의 그늘에 가려 아무도 거들어 보지 않았던 ‘연대’(solidarity) 사상의 역사가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도킨스(R. Dorkins)에 가려진 굴드(S. Gould)가 있고, 제도권 학계에서 배제되어 온 북친(M. Bookchin) 같은 이의 코뮨 사상이 있다. 마르쿠제(H. Marcuse)를 비롯한 소수자/아웃사이더 사상의 후예가 있고 소수자 운동의 사상적 뒷받침이 될 ‘인정’(recognition) 논의가 있다. 무엇보다 아나키즘의 사상사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다. 거대 담론과 주류 담론에 치우쳐 온 철학이 이제 눈을 돌려 잘 살펴보고 공부해 발전시켜야 할 사상들이다. 「철학의 유언」을 하기엔 아직 철학적 내공도 부족하고 나이도 젊다. 그래서 앞으로 함께 이런 공부, 진보 사상의 큰 그림 속에 빈 부분, 하지만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서 공부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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