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메를로-퐁티⑧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메를로-퐁티⑧
강사 : 조광제( (사)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화가의 시선과 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와 함께 20세기 새로운 철학의 지평을 열었던 사람이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이다. 메를로-퐁티 철학의 핵심 키워드는 ‘몸’이다. 그의 철학은 이른바 ‘몸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몸철학’을 가장 정교하게 잘 제시한 것이 메를로-퐁티이다.
1990년대 들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페미니즘 운동 등이 활발해지면서 이즈음 ‘몸’이라는 화두가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 후반에는 ‘몸’이 인문ㆍ사회과학적인 담론에 있어 핵심 키워드로 작용했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보통 ‘정신과 이성‘은 남성적인 것과 관계하지만 몸을 바탕으로 한 ‘감각‘은 여성성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전반적인 구도에서 봤을 때 이성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충분히 가정할 수 있고 몸을 통해 이성을 근본적으로 한계 지을 수 있다는 사유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평가 된다.
이 배경에 메를로-퐁티의 ‘몸철학’이 있다.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사유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고 몸의 ‘감각’을 중요시 했다는 점은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 욕망을 통해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코기토(cogito)’ 중심의 철학적 사유를 전환시켰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몸철학의 관점에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바탕은 몸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 아래 물에 잠긴 큰 얼음덩이와 같다. 메를로-퐁티는 정신과 의식 보다는 몸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여덟 번째 시간에는 ‘몸과 살, 그리고 세계’라는 제목 아래 메를로-퐁티가 얘기했던 몸철학의 세계를 경험했다. 메를로-퐁티의 특징 중 하나는 사유의 출발점을 과학적 합리성을 담보한 이론이나 철학적 반성으로 보지 않고 구체적으로 주어져 있는 삶의 현장이라고 했던 점이다. 메를로-퐁티의 몸철학을 전공한 조광제 교수는 “수업이 진행되는 지금 이 공간이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는 장이면서 동시에 앞에서 말하는 자와 앉아서 듣는 자가 서로 감각적 소통이 가능함을 몸소 느끼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메를로-퐁티 사유의 출발점
메를로-퐁티가 『행동의 구조』에서 밝히고 있는 ‘현상의 장’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그는 ‘실재적인 빛(lumi?re r?elle)’과 ‘현상적인 빛(lumi?re ph?nom?nale)’의 구분을 통해 객관적인 과학 세계와 현상세계 간의 대립을 이해시키고 있다. 가령 벽에 둥근 광점(光點, spotlight)이 나타나 여기저기 위치를 바꿔 옮긴다면 그것을 보고 있는 ‘나’는 광점이 주위를 끄는 대로 그것을 향해 시선의 방향을 돌릴 것이다. 이 때 광점의 움직임은 나의 행동(시선의 움직임)을 유발한다. 이런 설명은 현상 그대로를 설명하는 것이다.
과학은 이런 특징을 외현으로 취급하고 그 아래 다른 종류의 실재가 있어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재적인 빛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광점을 비추고 다시 반사되어 내 눈의 망막과 시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된 대상을 보게 만드는 실재적인 빛은 나(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극은 실재적인 빛이고 이 자극이 주어지면 반응(결과로서 행동)을 한다.[자극→반응;행동(결과)] 하지만 실제로는 이 반응이 자극이 되어 다시 우리의 반응을 촉구하는 것이다.[반응→자극(반응)]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현상의 장’에서 볼 때 과학적인 실재의 빛이 되는 순수한 자극은 없다. 자극이 이미 반응이다.
과학은 ‘실재적인 빛’을 연구하는 것이고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들은 과학의 실재적 빛이 아니라 ‘현상적인 빛’을 얘기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빛이란 실재적인 빛이 아니라 현상적인 빛이다. 실제 우리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장은 과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순수한 ‘물리적 사태(事態)’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현상의 장’ 속에 들어온 후에 과학을 연구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사유의 출발점은 배후의 어떤 객관적 실재가 아니고 직접 보고 만지는 현상의 장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현상학적 태도이다. 과학주의적 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량, 속도, 힘, 가속도 등의 개념을 다룬다. 물리학적 세계에서는 색과 소리, 밝고 어둡다는 개념도 없다. 이런 것은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감각을 쏙 빼버린 순수 이론적인 세계를 진짜 세계(진리의 세계)라고 배워 왔지만 이런 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의 생각이 현실을 떠나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과학적 태도가 아닌, 현상에서 출발해보자는 입장이 메를로-퐁티 사유의 시작이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그리고 ‘반성철학’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이 ‘현상의 장’은 과학에서 말하는 객관적 실재도 아니고 의식철학에서 말하는 순수 의식의 세계도 아니다. 흔히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현상에서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
메를로-퐁티는 기존의 ‘반성(反省)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코기토’ 명제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가 반성철학의 모습이다. ‘반성’은 근대철학을 규정하는 기초인데, 이 때 ‘명석 판별함’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반성이고 이 반성을 통해 진리를 알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반성을 통해 명석 판별함을 찾고 명석 판별함을 통해 반성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성주의’라고 규정했다.
지성주의 관점에서는 진리를 구현하는 체계 바깥의 세계를 도저히 입증해낼 길이 없다. 여기서 ‘반성=의식’이 되고, ‘의식=자기의식’이 된다. 결국 ‘반성=자기의식’이다. 지성주의는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모든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데카르트다. 그리고 자기의식을 최대로 발달시켜 절대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 사람이 헤겔(Hegel, 1770~1831)이고, 자기의식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를 중요하게 여겨서 온 세계를 구성하는 총론적 의식을 중시한 것이 칸트(Kant, 1724~1804)이다.
이런 것들을 고전주의시대의 지식 형태라고 보는 인물이 푸코(Foucault, 1926~1984)이다. 푸코는 17~18세기를 ‘고전주의시대’라고 했다. 푸코는 고전주의의 근본형태는 ‘재현(representation)’에 있다고 했고 재현은 ‘표상’이며 표상은 ‘의식의 표상’이다. ‘의식’과 ‘반성’ 중심으로 일체의 모든 지식을 말하던 시대가 바로 고전주의시대이다. 고전주의시대의 ‘에피스테메(?pist?m?)’가 표상이고 재현이다. 푸코에 의하면 그러다가 19세기 초중반부터 근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지식에 있어 의식과 반성이라는 구도가 깨지게 된다.
조광제 교수는 푸코의 이런 구분에는 반(反)지성주의ㆍ의식주의ㆍ반성주의ㆍ재현주의가 들어있다고 하면서 비(非)반성적 영역, 혹은 선(先)반성적 영역을 앞에서도 언급했던 빙산에 비유한다. “빙산의 일각 밑의 몸체가 되는 바탕이 있다. 빙산의 일각은 반성의 영역이다. 빙산의 일각=’의식(정신)’이고, 몸체가 되는 바탕=’몸’이다. 헤겔은 ‘감각적 확실성(무엇인지는 모르고 그냥 확실히 보이는 것)’에서부터 절대적인 상태에 이르는 체계적 단계를 말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이런 반성적 과정 이전에 사유와 철학은 바탕이 되는 몸에서 출발함을 주장한다.”
몸과 지각의 근원성
‘현상의 장’은 행동이 중심이다. 그리고 ‘지각’과 ‘현상’의 관계에서 보면 현상의 장이 곧 ‘지각의 장’이 된다. 모든 철학은 몸의 지각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우리는 ‘몸’이라고 하면 정신보다 하찮은 존재, 혹은 그 아래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정신을 주체로, 몸을 대상이나 그 다음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몸은 나에게 ‘저항적인 존재’이다. 앞에서 말한 반성은 정신으로 생각한다. 정신으로 생각만 한다면 순간 에베레스트 정상에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정신적 자유이다. 인간은 정신은 자유로운데 몸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저항이 있어야 자유가 있는 법이다. 맘대로 아무렇게나 자유로움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참된 자유인가? 주체와 대상을 의미하는 영어 ‘subject’와 ‘object’를 보자. 먼저 ‘object’는 ‘대상’이란 뜻이지만 동사로는 ‘반대하다’, ‘이의를 제기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subject’는 ‘주체’를 뜻하지만 원 뜻은 ‘신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이라는 것은 저항적인 존재가 될 수 있고 주체는 대상의 아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주체는 대상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길거리를 걷다가 장애물 있으면 피해 간다. 장애물이 우리를 피할 수는 없다. 장애물이 걷는 주체의 행동을 유발시킨다. 그렇다면 실제에서는 주체가 대상을 만들지 않고 대상이 주체를 만들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철학에서 이것이 전도되었다. 철학에서는 주체가 온갖 대상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관념론이다. 주체는 대상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실제적인 것을 무시하면 현실감각이 없어진다. 관념론이 그렇지 않은가? 관념론은 대상을 무시한다. 사회적인 힘을 무시하면 현실에서 떠나게 된다. 그리고 황당한 생각이 시작된다. 예를 들어 염력, 초능력에 대한 상상력과 집착은 ‘황당한 주체에 대한 신화‘이다. 현실을 보면 주체는 사회적 힘에 의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대상들인 자동차, 전화기, 세탁기, 스마트폰까지, 대상이 주체(인간)를 만들어 가는 것을 우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면서 항상 주체와 대상(객체)이라는 존재적 위치를 부여했다. 조광제 교수는 보통 강의실에서 강사를 주체, 학생들은 대상이라고 여기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관점으로는 도저히 접근해서 분석할 수 없는 것이 몸이라는 존재라고 한다. 특히 강사의 정신이 강의하는지 아니면 몸이 강의하는지에 대해 물으면서 앎에 대한 정의와 운동과 감각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① ‘~ 임을 안다'(지식, 이론, 표상)는 것과 ② ‘~ 할 줄 안다'(실천, 변형, 노동, 놀이 등)는 앎이다. ①의 경우에는 ‘주체=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②의 경우 ‘주체=몸’이다. 몸은 행동의 주체로서 행동은 감각+운동의 두 가지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운동에 따라 감각의 내용이 달라지지만 감각에 따라서도 운동이 달라진다. 대상의 움직임을 자기의 시선이 쫓기도 하고 차 경적 소리에 사람이 몸을 피하기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연주자는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쓴다. 인상을 쓴다는 것은 얼굴의 운동이다. 왜 운동할까? 최상의 소리를 지금 내고 있는데 그 감각을 조금이라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조금만 운동에 신경을 덜 쓰면 감각이 바뀌어 최상의 소리가 깨진다. 온몸이 운동을 해서 바이올린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감각’과 이에 대응하는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운동’, 이런 것이 행동을 설명하는데 같이 얘기되어야 할 것들이다.
‘인생을 사는 맛’이라는 말이 있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생을 사는 이유는 ‘감각’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그 사회는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춘 인간들을 사회적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그 사회는 다양하게 미세한 운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다양하게 모두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그래서 인생은 감각과 운동이고 이것은 ‘향유’이다.
몸의 감각과 운동을 통한 행동은 지각과 결합되어 있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지각 할 때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런 지각을 하지 않는 행동은 예를 들면, 등산할 때 절벽에서 조심조심 걷던 걸음을 평지에 내려와서도 똑같이 하는 것이다.
또 행동은 정신에 앞서 있다. 흔히 우리가 심리학을 말하는데 심리학은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심리(abnormal psychology)’ 즉 비정상 심리는 말 그대로 정신이 이상해서 연구하는 게 아니다. 행동이 이상해서 그렇다. 조광제 교수는 “만약 정신이 이상하다고 평가 받는 사람이 있는데 행동은 전혀 문제없다면 심리적으로 전혀 문제없는 거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하루에 5000번 웃는다고 치자. 이상하다. 이런 사람이 심리학에서 이상 심리의 연구대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행동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철학이다. 정신과 이론의 논리에 대해서만 얘기하다보면 행동에 대해서는 다 놓치게 된다. 행동에 따라 인간 존재가 달라지는 것을 잡아내야 철학이 시작된다.
‘몸틀’이라는 개념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예전에 느꼈던 감각 운동이 차곡차곡 축적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웬만한 감각이 들어와도 충격 받지 않는다. 행동이라는 것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차곡차곡 축적된다. 감각의 축적이다. 그러면 몸이 점점 바뀐다. 이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쌓이는데 메를로-퐁티는 이를 ‘몸틀(le schema corporel)’이라고 한다. 한자식으로 말하면 ‘신체도식(身體圖式)’이라고 하겠다.
메를로-퐁티식으로 말하면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은 ‘자전거를 탈 줄 아는 몸틀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과 같다. 몸틀은 한번 정해지면 오래간다. 그런데 이 몸틀은 처음에 한 동작을 할 때 온 몸이 그 동작에 집중해야 어떤 하나의 행위가 가능해진다. 자전거 배울 때도 그렇지만 글을 쓸 때는 글 쓰는 몸틀, 책을 읽을 때는 책 읽는 몸틀에 맞아야 한다. 그 행위의 몸틀이 만들어져야 가능하다. 온 몸이 그 몸틀에 따라서 집중되는 것이다. 이제 온 신경을 쓰던 정신의 집중이 몸으로 들어옴으로써 몸틀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체득(體得)’이라고 한다.
행동은 반드시 어떤 상황 속에서 하게 된다. 상황은 과제이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 과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상황에는 반드시 타인(타자)들이 있다. 과제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몸과 과제와 상황은 각각 구조가 있어서 그것이 일치가 되면 몸틀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몸틀을 미리 갖추지 못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이때 사람은 ‘생각’하게 된다. 생각은 더 효율적인 행동을 위해 하는 것이다.
몸은 항상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려 한다. 이것을 메를로-퐁티는 ‘세계에의 존재(l’?tre-au- monde)’라고 한다.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를 통해 하나가 되려는 과정에 있다는 것. 또 그 과정에서 벗어나길 거부한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상황 지어진 존재’라고 한다. 힘이 들면 숨이 가빠지는 것이 그 아주 쉬운 예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계속 역동적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복합적인 세계이다. 주어지는 상황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몸틀 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계속 새로운 몸틀을 만들어 간다. 한 인간에는 여러 몸틀이 만들어져 있고 또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다. 이것을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아주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늑대소년을 상기해보자.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의 몸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이다.
들뢰즈(Deleuze, 1925~1995)가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에게서 가져온 중요한 개념 중 ‘intensit?’라는 개념이 있다. ‘강도’, ‘강밀도’ 등으로 번역되는데 감각이 밀도가 높아지면 강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 강도는 어떤 몸틀을 갖추느냐에 따라 다르고 또 인간의 삶은 전혀 달라진다. 천재라고 소문난 예술가들은 그 방면으로 엄청난 몸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보다 인간들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조광제 교수는 몸틀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본주의는 한 인간을 특정한 몇 가지 몸틀 만을 가지고 살도록 만든다고 한다. 이런 것을 반영한 작품이 찰리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이다. TV프로에 나오는 달인(전문직)들을 보면 그 전문 분야에 대한 몸틀이 정말이지 대단하다. 하지만 10년 이상 그것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몸틀은 강도가 높아지지만 여러 몸틀이 결핍된다. 그러면 몸은 왜곡된 형태로 변하게 된다.
“나는 내 몸이다” : 습관과 체화
“나는 내 몸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이 때 내 몸은 계속해서 새롭게 몸틀을 갖추게 되고 새롭게 운동하는 그 몸이다. 몸틀은 자기 무의식적이다. 몸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내 몸은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자아이기 때문에 내 몸은 나의 의식에 다 체크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내 몸이 작동하면서 나를 형성한다. 이 때 자아는 정신적 차원의 자아가 아니다. 메를로-퐁티는 정신적 차원에서 말하는 자아를 ‘허공의 자아’라고 한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자아이다.
메를로-퐁티는 몸은 복합적이기에 근본적으로 ‘불투명(opacit?)’하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명석 판별함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의식으로 ‘투명(transparence)’하게 주어지는 것만 진리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불투명한 것이야말로 진리라고 했다. 낯낯이 밝혀지는 것이 진리가 아니다. 불투명한 것이 역량을 발휘한다. 불투명을 정신분석학에서는 트라우마, 무의식의 상태라고 설명할 것이다. 몸 철학적으로 트라우마를 설명하면, 삶의 과거 어떤 지점에서 특정하고 이상스럽게 강력한 감각이 와서 순식간에 몸틀을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잠복해 있다가 유사한 상황이 나오면 증상이 나타난다.
조광제 교수는 그래서 ‘습관‘이 중요하다고 한다. 세계 속에 살다보니까 몸이 바뀌는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세계와 몸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 세계는 몸을 구조화 한다. 그리고 ② 구조화된 몸이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 때 구조화 되었다는 것은 몸틀을 갖추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어떤 몸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지고 그 속에서 운동하는 것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요가나 국선도 수련을 해보니까 정말 좋다고 추천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사람에게는 요가나 국선도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들어왔고 그 몸에 요가와 국선도를 하는 몸틀이 갖추어지다 보니까 세계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시 상호교환’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공동체적 의미에서 ‘집단적 몸’이라고 한다. 만약 흔히 말하듯이 세계는 객관적이고 몸은 주관적이라고 해보자 이렇게 되면 상호교환이 안 된다.
‘체화(體化)’라는 개념이 있다. ‘체현’, ‘육화’라고도 한다. 우리가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하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면 생각을 한다. 생각이 올라왔다가 몸틀을 갖추면 올라왔던 생각은 다시 사라진다. 그런데 이때 그 생각은 어디로 갔을까? 바로 몸에 체화되었다. 몸1ㆍ2ㆍ3(…), 의식1ㆍ2ㆍ3(…)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몸1이 의식1을 바꾸고 의식1이 몸2로 체화된다. 몸2는 체화된 의식을 바탕으로 의식2를 바꾸고 몸3으로 체화된다. 이것이 반복된다. 결국 의식은 몸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이걸 설명할 때 메를로-퐁티는 아메바를 예로 든다고 한다. 아메바가 환경이 좋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상황이 바뀌면 몸을 옮기는데, 방식은 자기 몸을 한 쪽으로 쭉 늘어뜨려 몸을 옮기고 나면 다시 예전의 형태를 회복한다. 이때 늘어지는 아메바의 일부를 허족(虛足)ㆍ위족(僞足)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에게 정신과 의식은 허족ㆍ위족과 같다. 필요가 있을 때는 쭉 뻗어 발휘했다가 필요가 없으면 거둔다. 그래서 정신적 사유를 하거나 의식하고 있을 때에는 에너지가 분산되어 감각이 약해진다. 그러나 ‘몰입’ 상황은 대체적으로 감각적인 것에 몰두할 때다. 이때는 정신과 사유가 없는 상태이다. 예를 들어 섹스를 할 때, 이렇게 하면 좋을까, 저렇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면 사실 잘 안 된다. 그냥 미쳐버려야 잘되는 것이다. 가장 감각적인 상태가 되어 생각하지 않는 도취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 몰입은 순수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했지만 생각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각의 향유’이다. 조광제 교수는 내 몸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면서 또 어떤 감각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염두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은 재미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생각을 너무 오래하다 보니까 생각하기 위해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을 생각하기 위해 생각했던 것이 ‘근대’이다. 이렇게 되면 데카르트는 혹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인간이 늘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항상 새로운 감각, 운동, 상황에서 내 존재를 계속 역동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 존재는 갇혀 있지 않고 결정론적이지 않으며 변화의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향해 계속 나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몸틀은 어떤 특별한 중심이 되는 몸틀이 없다. 파시즘적인 전제적 형태의 피라미드 체계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서는 서로의 위치와 배치를 바꾸기도 한다. 몸은 그래서 탈중심적인 존재이다. 메를로-퐁티는 “각각의 나는 다른 모든 나의 교차점이다”라고 했다. 세상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ㆍ역사 등등의 복합적 영향을 받으며 내 몸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내 몸은 내가 의식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인간들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몸에서 살로 : ‘살존재론’
몸을 철학적 사유의 바탕으로 삼는다는 것은 몸 바깥에 있는 모든 세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세계와 항상 접촉한다는 것은 서로 감각적인 것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몸들은 감각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왜 하필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감각적으로 들어올까? 우리는 감각하면서도 감각되는 자이다. ‘본다는 것’과 ‘보인다는 것’, 악수처럼 ‘만진다는 것’과 ‘만져진다는 것’ ? ‘봄을 본다는 것’, ‘만짐을 만진다는 것’ 이런 것이 몸의 성격이다. 몸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다. 몸은 내 안의 개별적인 몸이 아니라 세계와 항상 소통하고 있는 것이고 소통은 감각을 통해서 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끼리 보고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인간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까?
이 부분에서 메를로-퐁티는 화가 폴 세잔(Paul C?zanne, 1839~1906)에게 영향을 받았다. 세잔은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Le paysage se pense en moi, et je suis sa conscience)”라고 했다. 세잔은 풍경을 한참 쳐다보다가 풍경이 자기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으면서 “풍경이 내 속에 자기를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일종의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감각적 세계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바탕으로 ‘몸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말했다.
조광제 교수는 “보이는 것이 보는 나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보는 나는 온데간데없고 보이는 대상이 꽉 나를 채우고 있다. 사실 보는 나도 그런 것을 원한다.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이 오히려 주체가 된다. 보이는 대상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내가 사물을 만질 대 만져지는 것은 사물이 오히려 나를 만지는 것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적인 감각의 소통이 어떻게 가능하냐면 메를로-퐁티는 모든 존재는 살로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메를로-퐁티는 ‘감각덩어리(masso du sensible)’라는 말을 했다. 덩어리는 사물이다. 사물이 감각으로 덩어리져 있다는 것인데, 색도 알고 보면 시각 중심의 색 덩어리이다. 색은 사물의 표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자르면 그 단면에도 색이 있다. 사물은 모두 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물을 인식적으로 규정하지만 감각적으로 만져서 단단하게, 혹 물렁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사물 그 자체’라고 한다. 일종의 감각적 유물론이다.
마르크스가 자유를 얘기할 때 기본으로 접근하는 것이 감각이다. 노동이라는 것은 감각적인 소통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존재론적인 ‘살’이라는 개념으로 심화시킨 것이 메를로-퐁티이다. 그래서 우주의 살, 세계의 살, 보는 자의 살, 보이는 것의 살 등의 얘기를 한다.
여기에 플라톤(Plato)의 이데아는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가지적[可知的, 가지적인 것(no?ton)]’으로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것이다. 이데아는 아이러니 하게도 색이 없다. 예를 들어 빨강의 이데아는 전혀 빨갛지 않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유를 끌어다 놓은 것이 과학적 세계이고 물리학적 세계인데 이것과 정반대로 보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살존재론’이다. 이것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핵심 내용이다. 살존재론은 예술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1943)에서 “애무는 몸을 살로 바꾼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몸은 노동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도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손을 이용해 도구를 잡는다. 그러나 애무는 노동과 다르다. 무엇을 도구적으로 잡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애무는 도구적인 몸이 도구성을 벗고 순수 감각적인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은 살이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살이 된다’는 것은 사르트르의 경우 ‘즉자(卽自)’와 하나가 된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인간이 완전한 살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아무리 다양한 많은 시도를 해도 완전한 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은 알았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내가 살이 되는 만큼 파트너를 살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는 살이라는 개념을 인간에게만 적용한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전 우주에 확대 적용시켜 온 우주가 애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살이라는 것은 늘 감각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모든 각 존재는 살의 상태에 있다.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존재의 상태는 살의 상태라는 것. 그래서 온 우주는 살로 되어있는데 이 살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 온 우주는 살이라는 단 하나의 원소로 되어있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살일원론’이라고 명명한다. 우주의 정신과 물질도 살의 변형태이고 몸도 살의 변형태이다.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신=자연=실체는 메를로-퐁티가 말한, 살이 다양한 양태로 변함을 언급한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메를로-퐁티가 살일원론을 다 말하지는 못하고 죽었지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직-교차’ 장에 보면 이에 대한 원론이 나오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말년에 쓴 『눈과 정신』에 메를로-퐁티의 회화론이 보인다고 한다. 회화는 살을 만나고 살을 접촉하면서 그 살을 그려내는 것이다. 순수 감각적인 상태를 회화라고 본다. 곧 존재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의 회화론은 ‘존재론적인 회화론’이다. 조광제 교수는 회화론적 존재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한다.
하늘의 별을 보고 바람을 맞으며 시적 감성을 느끼는 것은 온 우주가 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속에 빨려 들어가 나르시시즘을 느끼는 것이다. 온 우주가 나고, 내가 우주가 됨을 느낀다. 이것이 메를로-퐁티의 후기 살존재론이다. 유물론 치고는 매우 감각적이다. 감각적 유물론이라고 말할 만한데 유물론에서 물질은 순수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메를로-퐁티에게 순수 객관적인 것은 찾을 수 없다.
메를로-퐁티에게 순수 객관적인 것은 없다. 주관적인 것은 의식이나 정신이 아니고 몸이다. 이것이 들뢰즈에 가게 되면 감각론으로 나오는데 『감각의 논리』(1984)에 보면 신경체계에 대한 설명에서 따가움과 같은 신체적 고통의 순간, 신경을 통해 느끼는 감각이 진짜 감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 1992)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통해 극적으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살존재론을 들뢰즈는 극단적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다. 『감각의 논리』에서 감각은 세계의 존재라고 한다. 메를로-퐁티가 영향을 끼친 푸코나 들뢰즈는 이런 감각론에 기초하고 있다.
메를로-퐁티의 순수 감각적인 상태로서 세상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면 평소에는 별 느낌 없이 보던 예술 작품을 볼 때도 뭔가 느낌이 달라지고 길을 걷다가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들에서도 순수 감각적인 것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예술적인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의 살일원론에 입각한 살존재론은 예술존재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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