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의 민주화 운동과 민중 미술의 탄생과 전개[한국현대미술사 개관]
이전 호의 ‘민중 미술의 발흥과 전개’와 연결되는 글입니다.(편집자)
이런 와중에 미술계라고 해서 전적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미술가들이야말로 이런 억압적인 정치 ? 사회 상황에서 가장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이들이야말로 본래 자유와 그에 따른 상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 부류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선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룹이 ‘현실동인’과 ‘현실과 발언’이다. 그 외 1980년대에 들면서 너무나도 많은 미술인들이 저항과 투쟁의 기치를 내걸고서 조직을 만들어 싸웠기 때문에 그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1) 현실동인
1970년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1969년, ‘현실동인’ 창립전이 선언문만 남긴 채 강력한 억압에 의해 좌초되고 만다. ‘현실동인’은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윤(1946-1986), 임세택, 오경환 등에 의해 현실을 반영한 사실주의적 회화를 추구하려는 그룹이었다. 이들이 그룹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이들보다 4-5년 선배인 김지하 시인(1941- )과 김지하 시인이 선배로 모시던 미술 평론가 김윤수(1936- )의 자극이 컸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실동인’의 창립선언문을 기초한 인물이 김지하였고, 교열을 맡은 인물이 김윤수였다. 이 선언문에 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그 핵심만 따 내어 보기로 한다. 선언문은 현실, 현실의식, 현실주의 등에 관해 정의를 내리고, 현실주의의 의의는 물론 그 구체적인 기법과 방안까지 다소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요약을 하자면, 사물과 생과 상황 속에서 대립하고 충돌하고 발전하는 모순의 작용에 의해 현실은 힘과 힘의 운동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역학은 현실주의의 기본 기법이며, 갈등은 이러한 현실 모순의 공간적 반영 형식인 동시에 시각적 구성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지하가 추구하는 미술과 김윤수가 추구하는 미술이 다소 방향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김지하는 대체로 민족주의적인 미술을 강조하는 반면, 김윤수는 리얼리즘 미학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지하는 대중적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통해 미술에서 현실을 반영하되 서구 미술을 무비판적으로 모방을 해서는 안 되며 전통을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윤수는 현대인이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의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소외 현상이 예술에도 반영됨으로써 예술과 대중이 분리되는 부작용을 낳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반인간적 ? 반대중적 ? 반사회적인 태도를 버리고 사회와 개인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안점이 다소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민중 주체의 민족 문화운동’이라고 하는 대의에 뜻을 같이 한 것은 19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용기를 북돋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현실과 발언
‘현실동인’이 처참하게 당한 뒤 이어진 유신말기의 엄혹한 정치 ? 사회 상황은 현실의 반영을 주장하는 미술 운동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1979년 기존 미술계의 내적인 문제점은 물론이고 미술의 사회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개혁하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운동이 준비되었다.
이른바 ‘현실과 발언’이라는 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이 그룹은 ‘현실동인’의 정신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그 사이 10년이라는 제법 긴 세월이 흐른 탓에 많은 인물들이 창립에 참여했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 창립에 미술 이론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어지는 모든 민중 미술 계열의 그룹들에 공통된 특징으로 자리 매김 된다.
‘현실과 발언’의 창립에 참가한 미술 이론가는 성완경, 최민, 원동석, 윤범모 등이었고, 작가로는 임옥상, 오윤, 김정헌, 김용태, 노원희, 민정기, 심정수, 신경호 등이었다. 이들은 1980년 10월 정부 산하의 미술관인 문예진흥원에서 창립전을 열기로 했고,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신군부의 서슬이 퍼런 시절이었다. 문제가 어찌 없었겠는가. 미술관측이 이들의 작품을 두고 미술이 아니라느니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있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어 전시장 문을 폐쇄했다. 작가들은 게릴라 작전으로 개막행사를 시도하였고 미술관측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시장의 전원을 꺼버렸다. 전시장은 촛불로 조명을 대신했으나 그 역사적인 전시는 30분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내용이 어떠하건, 적어도 이미 결정된 예술 전시회를 신군부가 이렇게 탄압한 것 자체만 보더라도 ‘현실과 발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해야 한다. 결국 이들은 작업보다 수색과 도주, 구금, 그리고 고문과 투옥이라는 가혹한 탄압을 감수하면서 행동하는 미술가로 거리에 나서야 했다.
이들은 “미술가에게 있어서 현실은 예술 내부적인 수렴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예술 외부적 충전의 절실함으로 확대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미술가의 의식과 사회현실의 만남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현실 인식의 각도와 비판의식의 심화, 자기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에 대한 통찰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회복 및 미래의 긍정적 현실에 대한 희망을 추구할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미술인들에게 사회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인식과 그에 따른 실천을 요구했다.
아울러 “누가 발언자이며 무엇을 향한 발언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작가와 관람객 간의 주객 문제를 반성할 것을 촉구했고, “기존의 표현 및 수용 방식의 비판적인 극복”을 주문함으로써 사회 현실을 사는 관람 수용자와 발언자로서의 작가 간의 상호작용을 촉구했다.
3) 민족미술협의회
‘현실과 발언’에 이어 ‘임술년’, ‘두렁’, ‘삶의 미전’ 등이 1980년대 초반을 달궜고, 이들 외에 각 지방마다 일정하게 대학이나 지역문화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민중 미술의 열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봇물 터지듯 전문미술가 조직들이 곳곳에서 형성되었고, 전체적으로는 민중 미술 혹은 민족 미술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에 가장 먼저 중심 역할을 한 큰 조직이 바로 1985년에 11월 22일에 창립총회를 해서 결성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이었다.
민미협이 결성되는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있었던 ‘힘전’ 사건을 살펴보아야 한다. 1985년 7월 13일부터 35명의 작가가 출품한 ‘힘전’이 많은 관람객을 동원하면서 8일째 되던 날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5명이 들이닥쳐 전시중인 그림을 바닥에 내팽개치다가 결국 전시장을 폐쇄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에 ‘힘전탄압대책위원회’를 당장 꾸리고, 곧이어 이를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로 바꾸어 전국적인 운동 단체의 지원 하에 전례 없는 대대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결국 구금된 5명의 작가들은 즉심에서 풀려났다.
참고로 이때 당국이 문제 삼았던 작가와 작품명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 같다. 손기환의 ‘타! 타타타타!’, 박영률의 ‘비극의 역사, 80. 5. 광주’, 장명규의 ‘X도 못하냐’, 박불똥의 ‘1980. 5. 17. 생’, ‘핫라인’, ‘경찰의 보호감시 아래 서울 목동주민들 이른 아침 일터로 향하다’, 김우선의 ‘이불을 꿰매면서’, ‘김의기 열사 신장도’, 두렁의 공동작품들인 ‘사랑’, ‘산자여 따르라’, ‘구속된 내 친우를 생각하며’, ‘노동자의 힘’, ‘대우 어패럴 해산’, ‘연대투쟁’, ‘이렇게 슬기롭게’, ‘당신은 당국의 노동대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모두 26점이었다고 한다.
이 ‘힘전’ 사건을 바탕으로 결성된 것이 바로 ‘민미협’이다. 이는 미술계에 민족미술진영이 정식으로 규합하여 힘을 모은 첫 모임이라 할 것이다. 대표에 손장섭, 대의원으로는 지역과 단체의 대표성을 고려해 16명(강요배, 김방죽, 김영동, 김우선, 박건, 박불똥, 박상대, 박진화, 박충금, 손기환, 송만규, 이종구, 이홍원, 박흥순, 황재형, 홍성담)을 선출하고, 대위원회의는 운영위원 11명(강대철, 강행원, 김정헌, 문영태, 박석규, 성완경, 신학철, 여운, 유홍준, 주재환, 황효창)을 추천하여 총회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운영위는 박용숙, 김윤수, 원동석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민미협’은 이른바 민중미술의 초대 결집체이기 때문에 그 선언문이 중요하다. 내용은 이렇다.
첫째, 민족분단의 현실과 삶을 갈라놓는 제도적 억압 장치와 방해공작으로부터 벗어나서 냉엄한 통찰과 행동을 통하여 공동체적 삶, 통일의 삶으로 가는 길을 다 같이 모색하는 일이며
둘째, 민족미술의 창조적 발전을 향한 다양하고 통일적인 이론과 실천을 통하여 참신한 참미술인들을 발굴하고 여러 장르의 풍성한 작품의 수확을 거두는 일이며
셋째, 창조나 수용이 조화롭게 만나지며 함께 나누는 통로로써 민중적 삶을 함께 하는 수용의 운동과 교육의 실천방법을 다각적으로 확대하는 일이며 넷째로, 본 협의회의 회원 상호간의 친목도모, 권익옹호, 복지향상 등 제반 사업 활동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홍보하고 실천할 것이다.
선언문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민족분단을 극복한 통일의 삶을 강조한 것과 민중적 삶을 함께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명칭이 ‘민중미술협의회’라 하지 않고 ‘민족미술협의회’라고 한 것은 미술인들이 지닐 수 있는 계급의식이란 것이 그다지 강할 수 없는 데 반해, 창조성을 생명으로 하는 미술인으로서는 우리 스스로의 민족 미술에 대한 의식은 쉽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민미협’이 결성되기 이전에는 막연하게 통칭 민중 미술이라고 이야기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물론 ‘민중’이란 말을 통해 ‘계급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쪽이 나름대로 득세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민중’이냐 ‘민족’이냐, 아니면 ‘민중으로서의 민족’이냐 하는 등의 입장 차이가 내부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활동에 있어서는 민중미술 계열과 민족미술 계열이 나뉜 것으로 보인다. 민중미술 쪽은 노동현장을 지원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예술변혁 운동보다는 사회변혁 예술운동에 치중하게 된다. 이 진영의 논객으로는 라원식, 이태호, 심광현, 이영철, 박신의, 최석태, 장해솔 등이 있다. 이들은『시각매체론』(우리마당)을 통해 그들 나름의 비평적 시각과 이론을 모아 발표한다.
한편 1988년에 이르러 민족미술 진영이 힘을 발휘하면서 ‘민족민주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건준위)를 발족하게 된다. 이들은 평양축전 참가투쟁과 ‘평축 축하그림’ 사건 등을 통해 일부 작가가 구속되기도 하는 등 해서 서서히 ‘민미협’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아 간다. ‘민미련’의 기관지는 『미술운동』이었다.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민미협’과 ‘민미련건준위’라고 하는 두 거대 단체가 이른바 민중미술계 내에서 내부 투쟁을 한 셈이다.
두 조직은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1990년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는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들 운동권 미술인 조직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3. 주요 작가들
1) 오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오윤은 특히 칼 맛을 잘 드러내는 목판화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판화는 평범한 대중의 일상적 삶의 모습을 단순화하여 힘찬 윤곽선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나무의 풍부한 재질감과 고도로 숙달된 칼놀림으로 여백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오윤의 작업 방식은 사회적으로 힘없는 자로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자들의 모습을 결코 수동적이거나 비관적인 방식의 모습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희망적이며 내면에서부터 몸 전체로 드러나는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게 된다. 인민 대중의 고통을 그리되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고 그 내면에서부터 강렬한 자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1970년대 초반, 경주나 지리산에 심취하고 민족의 전통 종교인 증산교에 빠져들어 토속적인 것이나 대중적인 삶의 뿌리, 기에 대한 정열 등을 심화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오윤의 개인적인 편력은 김지하의 민족예술론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 것이었고, 결국에는 김지하가 주장하는 바, 민중을 주체로 하는 민족미술의 실현으로서 현실주의(사실주의 내지는 리얼리즘이라 달리 부를 수도 있음)를 지향한다.
오윤은 1970-80년대 많은 저항 지식인들의 시집이나 저작의 표지 그림을 많이 그려주었다. 특히 그가 그린 ‘칼노래'(1985)는 각종 사회를 더럽히는 악이나 부정적인 것들을 혁파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부패, 사악, 오염, 가난, 요괴 등을 민중의 날카롭고 강력한 칼로 다 베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윤의 ‘원귀'(1980년대 초반)는 분명 광주민주화항쟁의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면서 그 살인자들을 고발하는 그림임에 틀림없다.
2) 신학철
신학철(1943- )은 1970년대 ‘AG’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미술 양식들, 예컨대 초현실주의, 오브제, 꼴라주, 단색회화 등, 이른바 전위적인 작품 양식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이렇게 이른바 민중미술 쪽으로 선회했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유명한 미술 작품들이 전해오는 위대함을 동경했고, 그러한 예술의 위대함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위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서는 그런 위대함에 다다르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1974-5년경부터 ‘나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고, 자신의 신체를 통한 직접적인 체험의 중요성과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여러 초현실주의적인 오브제나 꼴라주를 하게 된다.
그는 회화적인 묘사 능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런데 1979-80년 쯤에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본 한국 100년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 사진들에 들어 있는 한민족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근대사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에 ‘한국근대사’ 시리즈를 그리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신학철은 평론가 김윤수의 눈에 띄게 되고, 김윤수가 추구하는 사실주의 미학의 현대적인 변용을 충족시키는 작가로 평가받게 된다. 김윤수는 적극적으로 신학철을 평가했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민중미술을 통해 중요한 활약을 하게 된다.
신학철의 ‘한국근대사-3’을 보면, 사진을 그대로 붙여 활용한 것 아닌가 할 정도로 그 정교함이 대단하다. 그보다도 은유와 상징의 처리 기법이 너무나 기기묘묘해 설명할 거리가 많다.
특기할 것은 그의 ‘모내기'(1987)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내기’의 초가집이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라는 혐의로 1989년 8월 17일 구속되어 1989년 11월 15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검찰의 대법원의 항소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지방법원으로 환송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방법원 환송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았으나 본인은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그러나 1999년 11월 26일 상고를 기각 당했다. 그러나 다시 불복하여 유엔인권위원회에 재소했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한국의 법무부에 사건을 심의하고 있는 동안 ‘모내기’ 작품을 파기하지 말 것을 통보하였다. 결국 2000년 8월 15일 법무부는 사면을 했다.
3) 임옥상
“더 나아지기 위해 어둡고, 칙칙하고, 질척이는 곳을 더듬어 넘어지고 꺼져야 한다. 인습의 굴레, 역사의 층, 철학의 늪, 예술의 허위, 문명의 우상, 그 모두를 헤쳐 맞서자. 이 세계에 한 인간으로 부딪쳐보자.”
1979년 임옥상(1950- )이 그의 작업노트에서 한 말이다. 임옥상은 역사 인식에 의거해 사회 현실을 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 그의 ‘보리밭II'(1983)에서 잘 나타나듯, 그의 그림은 일종의 초현실주의적인 구축을 한다. 그러면서도 붓질 등의 표현 기법은 철저히 사실주의적이다. 그의 초현실적인 측면은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예기치 않게 통념을 확 찌르고 들어오는 힘을 갖도록 한다. 그 힘은 우리네들이 흔히 잊고자 하는 힘들고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결코 외면할 수 없도록 하는 힘이다.
4) 박불똥
비판적 리얼리즘을 위한 포토콜라주의 완전한 대가이다. 본명은 박상모인데, 불꽃이 탁탁 하고 소리를 내면서 튈 때 일으켜지는 불똥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 자신이 붙인 이름이 발불똥이라고 한다.
가장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1988년의 ‘코화카염콜병라’라는 오브제 작품이다. 코카콜라병에 미국 국기를 찢어 입구를 쑤셔 막아 만든 화염병이다. 가히 패러디와 풍자의 최고 일인자라 할 수 있다.
5) 홍성담
1989년 7월 평양에서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의 여대생 임수경의 방북으로 떠들썩했던 당시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의 슬라이드가 북한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명박 정권 하의 지금도 그랬으면 하고 바라고 이명박 정권에서 언필칭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지난 두 정권의 시절이라면 그 그림 내용에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비록 1987년의 대 격변을 거쳤다고는 하나 여전히 군사 정권의 연장이었던 그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건의 중심에는 홍성담(1955- )이 있었다. 그는 광주 5·18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금남로를 뛰어다녔고, 광주시내버스에 페인트로 일련번호를 매기며 5·18에 미술로 ‘복무’했던 화가이다. 공안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는 이제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이적표현물’을 제작 배포한 불순분자가 된 것이다.
이른바 ‘민해운사’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 평양에 보내진 것이었다. 걸개그림은 세로 2.5미터에 가로 7미터 그림 11폭이 이어진 즉, 가로 77미터의 초대형이었다. 동학혁명에서 일제강점기, 6·25, 5·18 광주민중항쟁 등 우리 근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사건 11개가 나누어 그려졌다. 1989년 6월 홍성담은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을 미국 L.A. ‘민족학교’를 통해 평양으로 보냈다. 작품은 이미 한양대학교에서 열렸던 집회에 내걸렸다가 경찰이 불태워 없앤 뒤였다.
당시 안기부와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민해운사’ 중 홍 화백이 직접 그린 광주민중항쟁 부분에 대해 “5월 광주민중항쟁이 반미, 반파쇼, 반봉건 투쟁의 시각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으로 형상화하여 제작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김선수 · 윤종현 변호사 등 홍 화백의 변호인단은 화가의 미술작품이 과연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변론 요지서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는 헌법에 의해 보장된 절대적 기본권”이라며 “국가형벌권이 화가의 작품 활동에까지 행사된다면 표현과 예술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침해”라고 반박했다.
안기부와 검찰은 홍성담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간첩죄), 회합통신, 금품수수 혐의 등 총 7개의 혐의를 적용, 기소했고 홍성담은 1심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홍성담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간첩죄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변호인 접견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이뤄진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호인 접견권 보장을 명시한 이 판결은 당시 공공연한 관행으로 자리 잡았던 수사기관의 위법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영장 발부 이전의 불법 구금과 수사기관에서의 고문과 가혹 행위 등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행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간첩죄 등 5개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혐의에 대해서는 그 죄를 인정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홍성담에 대한 상고심 주심대법관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다.
“우리들의 살과 피를 조국이 더 원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량과도 관계없이 출옥하는 그날까지 제가 이를 악물고 가슴에, 이 좁은 가슴이나마 시퍼런 정의 신념으로 건강하게 징역살이를 할 것입니다.”
1990년 1월 30일 1심 선고공판에서 7년 선고를 했을 때, 최후진술로 홍성담이 했던 말이다. 그는 최초로 남북의 문화예술 자주교류를 성사시킨 통일화가로 불린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 저서『오월에서 통일로』(청년사, 1990)와 작품집『해방의 칼꽃』(풀빛, 1990)을 냈다. 홍성담을 높이 평가하는 최열은 그를 1980년대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민중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남겼다고 말하면서 그의 인격적인 면모에 있어서도 개인주의나 행세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품성이 단호하고 야멸차면서도 매우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4. 대강 정리
민중미술은 1980년대 한국 미술이 낳은 가장 세계적인 자생적 미술 양식이다. 자생적이라 함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현실과 현장에서 빚어지는 여러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문제들을 스스로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 인식된 내용을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양식(良識)과 양심에 따라 진실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중미술에 대한 이러한 가치와 중요성을 어쩌면 짐짓 또 어쩌면 몰라서 그냥 무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 강의를 기화로 필자도 독자도 다 함께 민중미술의 탄생과 흐름을 통해 한국 미술의 비극적인 열정과 힘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민중미술에 힘을 쏟았던 여러 미술가들은 현재에도 대체로 오늘날 이슈가 되는 여러 문제의 현장을 찾아서 현실의 미술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그들의 자생적인 창조적인 상상력과 나름의 분명한 현실 인식이 결합된 결과 항상 그렇게 열심히 작업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더 깊이를 더하고자 한다.
* 다음번에는 ‘민중미술 담론 비판’을 연재할 것이다.(필자)
**저작권 문제로 작품들을 실을 수 없습니다. 참고할 작품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독자들의 양해와 저작권에 대한 깊은 분노의 공유를 바랍니다.(편집자)
홍성담, ‘대동세상’(1985, 목판화)
홍성담 관련, ‘민족해방운동사 중 광주민중항쟁도’(1989)
오윤, ‘칼노래’(1985, 목판화)
신학철, ‘모내기’(1987, 캔버스에 유채)
신학철, ‘한국근대사-3’(1981, 캔버스에 유채)
박불똥,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1990, 사진콜라주)
박불똥, ‘코화카염콜병라’(1988, 혼합매체)
두렁, ‘만상천하’(1982, 걸개그림)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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