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장미 향기를 맡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구보씨는 오월의 태양 아래 막 피어난 붉은 장미 몇 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건 구보씨가 본 적도 없는 오래 전의 연극 제목이었는데, 웬일인지 버릇처럼 입에 붙어 예기치 않은 순간에 튀어나오곤 했다.
장미의 향은 강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코를 흠흠 거려야 간신히 약한 자극이 올 정도다. 요즘 꽃들은 냄새가 이전만 못하다. 보기 위한 꽃들로 개량한 탓일 거다. 그래도 이렇게 울타리에 심어진 꽃들은 나은 편이다. 대개는 아예 향이 없다시피 하다.
어떻든 장미가 피었다. 바야흐로 장미가 피는 계절이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장미를 큰 마당에 가득 심어놓은 곳을 일부러 찾아갔다. 구보씨가 사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그런 공원이 있어서다. 각양각색의 장미들이 이제 막 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일을 쉬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와 공원은 한참 북적였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세상, 하지만 잠시 짬을 내어 화창한 오월의 한때를 즐기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호외가 날라들었다. 거기에는 굵고 큰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그게 벌써 일 년 전이다. 이제 다시 핀 장미를 보면서 구보씨는 그 때 일을 떠올린다. 뜬금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장미와 노무현 사이에 특별한 연관이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노란 장미라면 몰라도 붉은 장미라니… 하지만 구보씨에게 노무현과 함께 연상되는 장미는 붉은 색이다. 붉은 장미, 햇살을 받아 더 붉은, 동백꽃처럼 붉은 빛의 장미…
영화 ‘시’의 한 장면
이건 어쩌면 이미지의 간섭 현상일지도 모른다. 동백은 꽃 밑동까지 송이채 떨어진다. 미련을 남기지 않고 지는 꽃이 동백이다. 마치 목이 꺾이고 잘린 듯 툭툭 땅에 떨어진다.
우연일까. 이창동 감독의 최근 영화 ‘시’에도 장미가 나오고 동백이 나온다. 영화에서 윤정희가 분(扮)한 양미자는 장미의 꽃말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구보씨가 알기론 장미에 그런 꽃말은 없지만, 그래도 양미자의 말을 믿고 싶다.
영화 ‘시’에 나오는 동백은 목이 꺾이듯 떨어지지 않는다. 그 동백은 조화(造花)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동백꽃을 화면에 담기에는 계절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감독은 동백꽃을 등장시키고 양미자가 그 꽃을 너무 좋아한다고 말하게 한다.
영화에서 동백 대신 꺾여 떨어지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강물에 떨어져 죽은 여중생 희진이가 한 떨기 동백인 셈이다. 그 동백을 품고 강물은 흐른다. 영화는 꺾인 꽃망울에 무심한 세상을, 악할 것조차 없이 제 살기에 바쁜 뻔뻔한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비추고 다시 강물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죽은 희진이를 위해 미자가 쓴 시가 흐른다. ‘아네스의 노래’다. 미자는 뒤늦게 왜 시를 쓰고 싶어 했을까. ‘시가 죽어버린 시대’에, 꽃을 좋아할 뿐 세상살이에는 서툴고 말투마저 어색한 미자가, 삶의 아름다움으로 끝내 붙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자의 노래,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의 노래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구보씨 시(詩)를 생각하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꽃을 한 동안 들여다보던 구보씨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럼, 물론이지.” Y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말이야, 스스로도 변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걸 애써 부정하고 싶어서라구. 자신의 말을 반사물로 삼아서 그런 바람을 증폭시켜 보는 거지. 뭐, 나쁠 건 없어. 때로 효과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 구보씨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을 때, Y는 이렇게 이죽거리듯 참견을 했다.
하긴 사람이 안 변할 수는 없지,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날씨에 민감한 건 나쁜 게 아니야. 다만, 뭐가 어떻게 변하느냐는 거지. 그런데 시를 쓴다는 건 아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변하는 날씨와 변하는 세월을 바라보는 변하지 않는 심정 한 자리, 그런 게 있어야 시구(詩句)가 맺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기억은 그리움이 되고 또 기다림과 희망이 되는 걸 거야. 과거와 미래가 지금 이 순간에 한 몸이 되는 어떤 절절함 같은 것으로 말이지. 시(詩)라… 그래, 이 부박(浮薄)한 현실 속에서도 시가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는가. 그건 지금 이 시절에도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그건 어쩌면 해마다 피어나는 이 꽃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정작 시를 쓰고 읽는 사람은 얼마나 되지? 이창동의 영화 ‘시’도 외국 영화제의 힘을 입어 간신히 관객 동원을 하고 있는 꼴이잖아. 구보씨는 하루에 단 한 번뿐이었던 그 영화의 상영 시간을 떠올렸다. 개봉 후 며칠 안 돼 영화관을 찾았는데도 그랬다. 이제 시는 꽃 자체가 아니라 점점 옅어져 가는 꽃향기와 같은 것일지도 몰라. 가까이 가서 맡으려고 애를 써야 간신히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것 말이야…
누가 그랬었지? 현대의 대표적인 시는 광고 카피라고… 한편으론 그게 맞는 말이겠지. 압축적이고 세련된 표현으로 범람하는 언어가 바로 광고 카피일 테니까 말이야. 또, 그걸 만들어내려고 쥐어짜는 노력의 양과 강도를 생각해 봐. 카피스트의 고생은 아마 시인들 못지않을 거야. 그렇더라도 그게 시야? 디자인된 언어, 향기 없이 흩날리는 꽃잎들처럼 사방에서 현란하게 명멸(明滅)하며 흩어지는 어구들…
시란 모름지기 살아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살아 있다는 게 뭘까. 죽음에 바치는 헌사(獻辭)에서도 살아 숨 쉬는 것,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나 움직이면서도 죽음 너머의 한 지점을 끝까지 겨누는 것, 그래서 죽음의 세력들과 죽음의 상인들이 몰고 오는 온갖 유혹과 치장을 이겨내는 것, 삶을 죽음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조차 삶을 찾아내고 움켜잡는 것, 그리하여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꿈꾸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기꺼이 매혹되는 것…
“구보야, 넌 너무 유약해. 사내애가 허구한 날 꽃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말이지. 그렇다고 꽃을 가꾸기라도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잖아. 그저 남이 가꾼 꽃에 코나 들이대고 있으면 거기서 철학이 나오니?”
Y의 질책이다. 그녀는 어디 있다가 또 이렇게 바람처럼 나타난 걸까.
“Y야, 나는 지금 꽃만 보고 있는 게 아니고, 꽃 너머를 보고 있는 거야. 향기만 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향기 너머를 더듬고 있는 거고… 말하자면, 장미가 품고 있는 시(詩)에 귀 기울이고 있는 중이라구.”
“얼씨구. 참 시시한 소리 하고 있다. 지금이 그럴 때냐?”
“왜, 무슨 일이 있어?”
“무슨 일? 너 참 속 편하다. 다들 신경 곤두서 있는 판에. 자칫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잖아. 막상 어렵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중국 관계 꿍꿍이만 정리되면 혹 모르는 일이라는 얘기도 있어. 그게 아니더라도, 전교조 교사들 130여명을 교과부가 해임하겠다고 결정하고 나선 건 알지? 오늘은 천안함 발표를 못 믿겠다고 한 김용옥씨를 우익단체들이 국보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는 뉴스가 떴어. 김용옥은 니들과 같은 철학자 아니니?”
“허, 그런 일이…. 정말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모양이네. 하지만, Y야,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우린 박정희 시절도, 전두환 시절도 견디고 헤쳐 왔잖아. 때로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잠시거든.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시심(詩心)을 잃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시심? 그렇게 장미나 들여다보면서 말이지? 네가 해직 통보를 받는 심정을 알기나 해?”
“아, 미안해, Y야. 그렇게 화내지 마. 나도 답답하다구. 어떻게 안 그렇겠어? 실은 나도 장미를 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던 중이었어. 그러다 보니까 며칠 전에 본 영화 ‘시’가 떠오르고, 그래서 해 본 소리야. 꽃이나 시 같은 게 유약한 것 같지만, 어려울 때 우리의 마음을 받쳐 주는 건 의외로 그런 것 아닐까. 변하는 세태에도 믿고 기다리고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를테면 싸움터의 병사들이 품 안에 접어 간직하는 어머니의 편지 같은 것 말이지. 날씨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굳게 잡아주는 어떤 닻줄 같은 것… 잠깐, Y야, 그렇게 가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봐.”
그러나 Y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구보씨는 멀어져가는 Y의 뒷모습를 향해 그녀에게 막 들려주려던 시구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밤, 우리가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던 그 밤,
그리고 그 날, 그 황혼녘, 두드려 맞은 누군가의 심장이
죽음을 준비하던 그 부서진 골목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파블로 네루다, ?로르카를 위한 송가? 중에서)
문성원(부산대학교,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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