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3[청춘의 서재]
윤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오웰이 이 책을 쓰기까지
영국인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6.25~1950.1.21)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 2010. 이하 『위건 부두』)에서 자신이 ‘상류 중산층 가운데 하급’, ‘특권 계급 출신이지만 돈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론상으로는 상류층의 에티켓과 관습, 문화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삶을 영위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부류로서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피곤한 신분’이었다. 또 자신을 ‘부르주아의 완충재 같은 계급’이라고도 표현했다.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스쿨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입학했다.
에릭이 이튼스쿨을 다니던 때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이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에릭에 따르면 영국에서도 유례없이 혁명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위험한 진보 작가의 책이라 분류되었던 것들을 모두 읽고 자신을 막연히 사회주의자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고 노동계급이 인간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책을 통해서나 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할 뿐이었지 실제로 그들 가까이 갈 때는 여전히 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고 고백한다.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 나는 시간의 절반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데 쓰고 그 나머지는 버스 차장의 무례함에 분을 터뜨리느라 허비한 것 같다”(『위건 부두』, 191쪽)
이튼을 졸업했지만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성적이 되지 않았던 그는 1922년 미얀마(구(舊) 버마)로 건너가 5년 동안 ‘인도 제국 경찰의 일원’으로 일했다.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이튼 시절, 젊은이들에게 1차 대전 참여를 부추기기만 한 기성세대의 비겁함과 또 전쟁을 무능하게 지휘했던 노년층에 코웃음을 치며 기성세대가 내세우는 정통성과 권위에 반항을 했다지만 이튼에서 전수받은 대영제국의 국민이라는 교육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진 못했나 보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도 식민지의 관료였다. 그러나 에릭은 – 수입이 많고 안정된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권층 노릇하기 쉬운 – 식민지의 경찰직을 선택하고 나서야 제국주의의 실상과 마주친다.
1927년, 휴가를 받고 영국에 도착한 에릭은 제국의 경찰 노릇을 그만하겠다고 결정한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찰직을 떨쳐낸 에릭은 희망했던 작가가 되기 위해 1928년 친척이 살고 있는 파리로 옮겨와 습작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미얀마에서 보냈던 시간들로 인해 괴로웠다.
“나는 5년 동안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컸다. 잊히지 않는 숱한 얼굴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법정에 선 피고들, 사형수 감방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죄수들, 나에게 윽박질당하던 부하와 냉대당하던 늙은 농부들……내가 느낀 죄책감은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위건 부두』, 200쪽)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위건 부두』, 201쪽)
“그렇지만 나는 노동 계급의 처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실업에 관한 통계를 본 적은 있었으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부끄러울 것 없는’ 빈곤도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위건 부두』, 202쪽)
“그들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였으며 그런 그들이야말로 내가 접촉하고 싶었던 부류였다. 그때 내가 진심으로 원한 것은 번듯한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길을 찾는 것이었다…… 일단 그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일 테고 그러면 죄책감을 얼마간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것이 불합리한 생각인 줄은 당시에도 알았다.”(『위건 부두』, 203쪽)
파리의 접시닦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하 『밑바닥 생활』)은 바로 그 속죄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는 파리와 런던에서 경험했던 밑바닥 생활을 가족과 친지들이 알고 당황할까봐 필명을 만들어 1933년 1월 9일 책으로 엮어낸다. 전체주의를 철저히 거부했던 ‘조지 오웰’이란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유럽의 두 도시의 하층민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르포르타주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작품의 전반부는 1929년 늦가을의 파리 생활을 주로 반영했고 후반부 영국생활은 1928년 겨울에서 1931년 여름 사이에 그가 직접 체험하거나 간접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재구성했다.”(『밑바닥 생활』, 286쪽)고 한다. 오웰도 이렇게 말한다. “거기 적은 일들은 재구성되긴 했어도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위건 부두』, 205쪽)
1929년 10월 뉴욕 증권 시장의 폭락 여파가 유럽에도 번져나갔다. 1931년, 영국에서도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4명 중 1명이 실직자로 전락한다. 약 300만 명 정도가 실직했으며 실업수당으로 겨우 기아와 노숙을 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더불어 기아와 노숙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빈곤은 이웃의 일로 번져갔다. 암울하고 불안정한 시기였다.
오웰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의 생활을 파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침부터 욕설이 들리는 여관에 거처하면서 밑바닥 사람들의 언어와 일상들을 빠짐없이 체험한다. 겨우 연명할 일거리인 영어 교습이 끊기고 난 뒤부터는 그야말로 진짜 밑바닥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곳에서 사귄 친구(보리스)의 도움으로 호텔의 접시닦이가 된다. ‘노예의 노예’라는 접시닦이 일은 부르주아의 완충재 역할을 하는 ‘하급 상류중산층’ 오웰의 계급적 이중성을 무너뜨렸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끊임없이 서두르고, 장시간 노동과 탁한 공기를 견디는 것이다. 그들은 이 생활을 탈출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급료로는 한 푼도 모을 수 없고, 일주일에 60시간에서 100시간의 노동이 다른 일에 훈련할 시간을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밑바닥 생활』, 102쪽) “그들의 생활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놓는다.”(『밑바닥 생활』, 152쪽)
오웰은 밑바닥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살아있는 글들로 20세기 초반의 빈민층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하급 상류층으로 살았던 그가 최하류층을 겪으며 쏟아내는 빈민층의 생활과 노동 강도에 대한 비유들도 당시 노동 현장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오웰의 글은 무겁게 흐르다가도 번뜩이는 재치를 보인다. 오웰의 묘사에 흠뻑 빠져들어 마치 내가 호텔 지하 일터에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껄껄 웃게 하는 풍자와 해학들을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과장스럽거나 요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해학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도 어느새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이것이 오웰 글의 묘미인 것 같다. 노동자들의 고단한 생활과 환경이 곧 나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 진실들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썰’>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와 같은 수준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내 이웃에 있기 때문이다. 생계를 꾸려가야 할 노동자이든,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대학생이든 아직도 궂은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을 넘어서기 위해 첫차를 타고 막차를 기다린다. ‘언젠가는 나도 돈을 모으면……’
런던의 부랑인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런던에 있는 친구에게 직장을 부탁했던 오웰은 선천성 정신박약자를 돌보는 일이 생겼다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프랑스를 떠나지만 런던에 도착해서야 그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지금처럼 그때도 휴대폰이 있었다면 부랑인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위건 부두』에 따르면 오웰은 이미 부랑인 생활에 뛰어들기 위한 준비 기간을 거쳤다.
오웰은 부랑인들과 일상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방치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앞서 부랑인들과 섞이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묘사한다. 오웰은 자신의 상류층 언어 습관에 신경을 쓰면서 첫눈에 신분이 들통이 나 염탐자로 오해 받고 부랑인들에게 거부당할까봐 긴장했지만 그저 그들과 같은 차림새 하나만으로도 부랑인의 무리에 낄 수 있었다고 한다. “옷은 즉시 나를 새로운 세상에 들여놓았다.”(『밑바닥 생활』, 168쪽)
그렇게 즉시 부랑인이 된 오웰은 그들을 따라 구세군 구호소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최악의 구호소는 있지만 완전한 구호소는 어느 곳에도 없을 뿐더러 최소한을 갖춘 구호소도 없다는 사실을 영국민에게 알린다. 외부와 단절된 구호소 안의 참담한 환경들이, 일다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부랑인들의 허기진 현실이, 그에 따른 무기력함이 오웰의 ‘기록’을 통해 밝혀진다.
부랑인들은 부랑하도록 법률로 강제되어 있다. 구호소에는 하루밖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부랑인은 당시의 법률 상황에서는 부랑하든지 굶어죽든지 해야 하므로 부랑인이 된다. 오웰은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악폐들뿐만 아니라 해결책도 제시한다. 런던에서 사용하는 속어와 욕설들을 따로 정리한 장도 있다. 또한 당시 파리와 런던의 물가까지도 잘 기록해 놓았다.
영국 사회의 한 면을 기록한 오웰의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구호소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도 일조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오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웰의 선택
지금 우리 사회는 창의성을 강조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과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지 않은 채 떠올린 상상력과 창의력은 허술할 뿐이다. 편견과 획일성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만일 오웰이 밑바닥 생활에 관해 글을 쓸 때 귀동냥에만 의지했다면 그렇게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현장 체험은 상상력과 글재주를 더욱 빛나게 했다. 호텔 작업장과 구호소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 이유도 오웰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리스’를 친구로 사귀지 못했다면 속죄 행위의 하나로 여긴 접시닦이 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오웰이 속죄만 하고 그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허울뿐인 공리주의(최대다수의 최대행복)를 낳은 나라의 극빈자 상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 혹은 보고 문학이라고 하는 ‘르포르타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과 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이다. 오웰은 ‘하류 중에서도 최하류’란 주제를 선택하였고 노동환경과 노동자 의식의 관계, 상류층과 하류층의 의식 등을 관찰하고 비교하면서 당시의 사건과 사실들을 충실히 묘사한다. 오웰의 밑바닥 생활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만 집중하지 않고 최하류층의 열악한 상황과 그들의 환경에서 비롯되는 비열함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를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경비들도 꼼꼼히 적고 있다.
르포계에서는 ‘취재력이 곧 표현력’이란 말을 한다. 이것은 현실의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심층적으로 포착해야 한다는 것으로, 상상력만으로는 창의성을 키울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열정이다. 언제나 그릇된 압제자에 저항하고, 언제나 옳은 피압제자와 연대하려는 열정. 그 열정은 르포를 완성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마치 그것은 열정이 준비한 선물과도 같다.
오웰은‘실패만이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성공과는 거리가 먼 밑바닥으로 간다. 그러나 끼니를 며칠씩 거르고, 접시를 닦고, 부랑인과 함께 떠돌면서도 상류층의 징표인 ‘h’발음을 없애지는 못한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최하층민에 대한 편견은 오웰에게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하류층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열심히 일하지만 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삶의 질곡을 이해하게 된다.
진정한 르포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를 변화하게 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두 번 다시 모든 부랑인이 불량배 주정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고, 내가 1페니를 주면 걸인이 고마워하리라 기대하지 않겠으며, 실직한 사람들이 기력이 없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고, 구세군에는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옷가지를 전당 잡히지도 않겠으며,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않겠고, 고급 음식점의 식사를 즐기지도 않으련다. 이것이 시작이다.”(『밑바닥 생활』, 284쪽)
나는 오웰이 이후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파리와 런던에서 있었던 최하류의 생활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읽게 되면 속죄로 시작했던 그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런데 혹시 “왜 최하류층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 사회, 한 국가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의 의식주 상태를 보면 그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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