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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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4. 아테네 몰락기 민주정의 타락과 공포정치화

 

확실히 옛날의 위대한 말들은 그 후에도 울림이 있다. 안도키데스(Andokides)는 여전히 대담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사사로운 일에 몰두하는 자들에 의해서 폴리스가 보다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폴리스는 공공의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대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알키비아테스 논박(adv. Alkib.)] 2)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당시 주로 누가 공공의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셈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즉 대단한 애국심이 있는 양 보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들에 대한 불신이 크게 환기되었다고는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나랏 것을 훔쳐(klepptein ta d?mosia) 부자가 되려 한다는 험담을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담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마저도 종종 연단에 오르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분명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한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공직을 맡으면서 거액의 재산을 빼돌렸는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자신을 언제라도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정 하에서 연설가들 내지 선동가들은 변론을 해주거나 반대로 입 다물고 침묵해주는 방식으로 큰돈을 벌어 들였다. 말하자면 연단에는 황금이 묻혀 있었다.(chrysoun theros to b?ma)(아리스토파네스의 [복을 주는 신(plut.)] 377ff) 그들은 연설을 통해 손에 넣은 공직이나 군사 혹은 외교상의 직책을 이용하여 특히 아테네의 패권이 강대했던 시절에는 여러 동맹국들로부터 수많은 선물들을, 재판 당사자로부터는 뇌물을 받아 챙겼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국고에 까지 직접 손을 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무능력하고 수입은 없지만 욕심은 유별난 보통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이러한 소득은 그저 현란한 것으로만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랏돈을 가로 채 부를 축적한 자, 신전과 무덤 그리고 친구마저도 탈취하는 그 자들이란 모반과 위증을 일삼고 거짓선서를 해대는 재판관들이고, 뇌물에 놀아나는 관리들’이었다.(플루타르코스의 [계율집-정치편(rei publ. ger. praec.)] 26) 어쨌든 온갖 종류의 부패가 아테네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재무관으로 있으면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재무관이자 연설가였던 뤼쿠르고스(Lykourgos)도 그 한 사례이다. 아테네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당파가 있었는데 그 당파가 이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에 의해서 매수된 상태였다고 하니 당시 아테네의 부패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4-480년)

 

그리고 소송에서도 원고든 피고든 그 권력과 재력이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판결이 내려졌다. 하물며 이피크라테스(Iphikrates)라는 자는 사형 죄에 해당하는 고소를 당했음에도 젊고 건장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 재판정을 둘러싸게 한 후 단검을 슬쩍 내보이는 방식으로 재판관을 위협하여 무죄를 언도받기도 하였다.(Polyainos III, 9, 15) 그런데 이러한 횡포는 정치적 강자들끼리의 다툼에서 특히 더 기승을 부렸다. 이를테면 이름난 연설가가 선동적이고도 위협적인 연설로 정적을 고발하면 민중들은 그 연설에 압도되어 그 연설가를 진정한 애국자, 정치가로 여기기 십상이었고 또 연설가들은 민중들에게 상대 정적들에 대한 분노를 불러 일으켜 자신들이 저지른 부패를 은폐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안전한 방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찍이 니키아스(Nikias)는 시칠리아 해전에서 병사들 전체가 몰사의 위기를 맞았음에도 적시의 후퇴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그가 아테네로 돌아가 철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기소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동포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의 손에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의 최정예 부대가 궤멸당한 것이다. 연설가들과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놀아나는 시민들의 이러한 무분별과 광기는 이처럼 수많은 장군들과 책임 있는 자들의 결의를 무디게 하고 결단을 주저하게 하였다. 전쟁 대신 평화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한 정황에서조차 나라가 혼란스러워야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보다 더 잘 누릴 수 있다고 여긴 일부 아테네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계속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중상모략과 정당한 고소가 구분되기 힘들게 되자 아테네인들 서로의 불신은 극에 달해 급기야 고소는 또 다른 고소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소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건강의 표시로까지 여겨졌다. 그 과정에서 규정을 바르게 적용하여 제대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공직자 전체가 끊임없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재무관의 직책에 맡으면서 어떤 비리도 저지르지 않았던 뤼쿠르고스조차 고소를 당하자 노환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자신을 소명하고자 마차에 실려 평의회당에 출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소인은 메네사이크모스(Menesaichmos)라는 자 한 명뿐이었다. 결국 뤼쿠르고스는 이 자의 고소를 논박한 후 빈사의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도 메네사이크모스가 다시 그를 고소하자, 시민들은 그들 스스로 화환과 상을 수여했던 뤼쿠르고스였음에도 그 대신 그의 아들들을 감옥에 쳐 넣었다. 그 후 그들에 대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진지한 경고가 있고서야 아들들은 간신히 석방되었다.

뤼쿠르고스(Lykurgos 기원전 338-326년)의독어역본 표지

그런데 국가는 오히려 이러한 제도의 개선은커녕 전면적인 운용을 위해 중상모략가 내지 무고자((sykophant?s : 소송을 직업적으로 일삼는 자)의 위세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대집단의 역할을 자임했다. 즉 밀고가 정식 직업으로서 승인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이 국가도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스파이에 의존한 것만큼이나 이러한 보조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 이 폴리스는 스페인의 왕위와 같이 어느 신격화 된 것, 즉 일탈을 막는 것이라면 어떠한 과감한 수단도 불사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탈 상태가 계속 될 경우 그러한 수단을 통한 통치가 불가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테네 위주의 이 국가주의적 이념은 정상적인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뚤어져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 의해 조장된 이러한 공포정치는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제반 사회적 병폐를 공공연히 용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공포정치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기원전 431년) 후 100년 동안 아테네에서 하나같이 그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게다가 이 공포정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후계자 시대에는 로마인들에게까지 만연되어있었다. 밀고와 무고를 일삼는 직업이 어떠한 부끄러움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임을 한 국가가 인정한다면, 어떠한 시대, 어떠한 민족에서도 이런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국가는 그들을 찾아내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중세를 걸쳐 이러한 일을 명백하게 직업으로 인정하고 시민 모두를 그 감시 하에 둔 것은 그리스 민주정뿐이었고 게다가 그것이 완전한 상태로까지 나타난 것 또한 오직 아테네 민주정뿐이었다. 그러나 아테네 하층민들로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할 것까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처지와 사정은 물론 기분에도 부합하는 것이어서 이미 마음속으로 모두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섬의 소송의 증인이야. 밀고자이자 염탐꾼이지. 쥐구멍 파는 것은 사양해. 나는 이미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밀고로 살아오고 있으니까.” 이렇게 아리스토파네스의 [새(Aves)](1423행 이하)의 등장인물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쨌든 희극 작가들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밀고자라고 하는 인물을 마음껏 희화화해 주려는 유혹과 즐거움을 그들은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무고를 일삼는 자들은 모두 애국자처럼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폴리스와 “현행법”을 보위하는 자로 여겼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 무리가 주로 염탐하고 있었던 것은 일단 명분상 시민들이 국가의 요구에 충분히 응하고 있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횡포를 재제할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무고자가 자기가 고소한 소송에서 적어도 배심원의 5분의 1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경우 그는 1000 드라크마를 벌금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그가 제기한 소송건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경우에도 1000 드라크마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배심원 재판에서 5분의 1의 찬동자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 무고자는 벌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경우에도 통상 지불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버티었다. 뤼시아스(Lysias)의 시대에 그러한 미납액이 연체되어 1만 드라크마나 되었던 자(아고라토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배심원으로서 출석하고, 민회에도 얼굴을 내밀면서 여전히 모든 종류의 나랏일과 관련한 소송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끊임없이 이런 무고자들의 포위공격을 받고 있었다. 니키아스는 일생동안 무고자를 두려워해 늘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와 그가 이끈 군대의 운명에 얼마나 중대한 결정을 미쳤는가는 이미 말한 바가 있다. 크세노폰(Xenophon)의 저작에 나타나는 훌륭한 남자의 모범인 이스코마코스(Ischomachos) 또한 종종 밀고당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배울만한 것은 소크라테스(Sokrates)가 이스코마코스처럼 박해받고 있던 크리톤(Kriton)에게 던진 아래와 같은 근사한 충고이다. “무고자를 막아 줄 사람을 돈으로 끌어들여라.”(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Memor.)] II, 9, 1) 다행히도 크리톤은 무고자를 막아줄 사람으로서 아르케다모스(Archedamos)라고 하는 인물을 찾아냈다. 이 남자는 무고자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무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크리톤과 그의 친구들은 다 그를 의지하고 존경하였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이 아르케다모스 같은 유용한 무뢰한을 자신들의 식탁에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주정을 뒤엎고 권력을 잡은 30인 참주들은 다수의 무고자를 잡아 사형에 처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이내 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첩보자들을 이용해 의도된 목적을 완전하게 달성했는데 그것은 이 첩보자들이 이 기관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세뇌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아테네에서 무고에 의한 소송건은 그 성격과 목적이 달랐다. 즉, 무고자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송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소송 당사자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금품을 대가로 상호협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테오크리네스(Theokrines)는 친 형제의 살해자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소송을 철회하고 있다.(데모스테네스의 [테오크라테스 논박(in Theocrin.)] p. 1331) 그러니까 폴리스가 달성한 것은 일종의 악취 즉 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 죄를 범한 사람들 내지 선동정치가들과 그 배후에 있는 무고자들과의 거래와 타협 같은 것들이었다. 이 악취 가득한 행태들은 공공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가장 뛰어난 상당수의 시민들로 하여금 공공 생활로부터 남몰래 혹은 공공연하게 등을 돌리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안전책이었지만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추첨으로 어떤 직무에 선택된 사람이 최종 합격을 위한 심사(dokimasia)를 받아야할 경우 무고자는 즉시 그 개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권이 생기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무엇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 그런 짓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그래서 이 무고자 집단은 끊임없이 사람들 곁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고에 대해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착실한 사람들은 무고를 당하면 어떻게든 힘을 다해 소송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무고자들 또한 소송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막상 소송에 말려 들어갔을 경우 소송 경비에서 기소인의 몫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적절히 사전에 타협을 해 소송을 중도에 취하하게 했을 경우에는 별도의 금품을 뜯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소송이 진행된 후 무고자가 그것을 철회했을 경우에는 1000 드라크마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 돈 또한 그 희생자에 의해서 몰래 충분히 벌충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무고자는 소송을 계속했다. 고령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신을 모독하였다는 협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 또한 아마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낼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에우보이아)로 피해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그는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보낸 편지에다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알키노오스(Alkinoos)의 정원과 같이 무화과(sykon)가 우거진 마을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발음의 유사성을 토대로 무화과(sykon)로 무고자(sykophant?s)를 비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년)

그런데 아테네는 이런 종류의 무고자들을 조력자로 이용하면서 어쨌든 국가 기구로서 존속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생명력의 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어떠한 범죄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위협, 국가의 안보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의심되었고 그에 따라 소송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으로 급변하는 경향이 자주 있었다. 또 국가는 그리스인 본래의 종교로까지 추켜세워졌던 터라 형벌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을 훼손한 대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형벌이 비정상적으로 엄중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벌금형과 시민권 박탈과 함께 형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사형이 전혀 중대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서마저 적용되는 일도 생겨났다. 이처럼 폴리스는 때때로 광분상태에서 판단력도 없이 형벌을 쓸데없이 휘둘렀다. 이런 까닭에 가끔 누가 보더라도 국가에 대한 명명백백한 범죄라고 인정될만한 사건이 생겼을 경우에는 재판의 엄정성에 대한 본때라도 보이려는 듯 그 범죄 혐의자에게 국가에 대한 모반죄를 씌워 가장 엄한 벌로 처벌하였다.

뤼쿠르고스의 레오크라테스(Leokrates)에 대한 논박 연설은 그와 같은 모반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대표적인 고소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신성모독에 대한 고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들을 모욕하고 또 신들의 존재를 의심한 것에 대한 폴리스의 보복과 실제로 그 신들의 윤리적, 신학적 용렬성 사이에 존재하는 우스꽝스러운 불균형은 아테네 이외에 일찍이 어디에서도 존재한 적이 없다. 이런 종류의 단죄 방식이 만일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환상(phantasia)’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 그것은 아테네의 재판관들이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판결만을 내리고 있었다거나 또 당시의 유력자들이 광분상태에서 제멋대로 내린 판단이 거의 없었다고 가정할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명심해야 할 것은 소송의 수단으로서 시민에 대한 잔인한 고문이 아테네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포키온(phokion)편 35) 이 고문은 노예를 고문하던 주인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 유사물이었으나 사실 그것은 페리클레스 이래 아테네 그 자체가 견지하고 있었던 이념 ? 즉 아테네 제국주의와 민주정의 결합 ? 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했다. 아테네는 일단 자신의 국가주의적 이해와 관련된 사안의 경우 그것을 혐의지우거나 적발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다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5.?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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