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0회|4. 선택과 탐색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0회
4. 선택과 탐색 (2)
1981년 여름 나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앞으로의 진로도 확정해야 하고, 현재 하고 있는 공부도 확실히 해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지지부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한 달 정도 외가 근처에 있는 암자에 가 있기로 했다. 그 당시 나의 관심사였던 책들을 한 보따리 들고 가 그냥 산속에서 책에만 파묻히고 싶었다. 외가가 있는 전라북도에 위치한 Y읍 까지의 동행은 친구 이은성 군이 해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 내내 내 곁을 지켜주었다. 나중에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갔을 때는 자신의 신형 소나타를 끌고서 무려 4박 5일 동안 동해안으로 함께 다니기도 했다. 절에서 공부하는 비용은 당시 모 신문사의 주필을 맡고 있던 최 모 집사가 대 주었다. 그는 나의 결심을 말하자 선뜻 10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내주었다.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갚으라고 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던 그는 비교적 많지 않은 나이에 간암으로 죽었다. 빚을 갚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두고두고 부담을 느꼈다.
Y읍에 위치한 외가에 도착해서 먼저 큰 외숙부댁과 작은 외숙부댁에 들러 인사를 드렸다. 양가 외숙댁에는 내 또래의 사촌 둘이 있어서 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Y읍은 비교적 조용한 동네였다. 근처에 Y 초등학교도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숲이 울창하고 아름답게 조성된 초등학교를 본 적이 없었다. 암자에 있을 때는 가끔씩 그 초등학교를 산책하면서 머리를 식히곤 했다. 암자는 외가의 뒤편 산에 위치해 있었다. 나이 든 스님이 운영을 하고 있었고, 젊은 보살이 여러 가지 수발을 했다. 한여름의 산속은 나무들이 울창해서 한낮에도 서늘했다. 조용히 공부를 하기에는 딱 좋았다. 암자에는 나 말고도 고시 공부한다는 젊은 친구가 한 명 있었고, 떠돌이 중도 한 명 있었다. 아침에 식사할 때 흰죽 같은 수프가 먼저 나왔는데 다들 맛있게 그걸 먹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수행하는 데 잡념이 들지 않도록 하는 정력 감퇴제가 들어 있다고 해서 그 이후로는 먹지 않았다.
의탁할 데가 없는 나이 많은 중들은 절에서도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암자에 함께 기숙하던 나이 많은 스님은 식사할 때 반은 눈칫밥을 먹었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서 그런 일을 보아도 나는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스님이 어디 가서 술을 걸쭉하게 먹고 오더니 그동안 받았던 설움을 큰 소리로 푸는 것이다. 소리도 꽥꽥 지르고 발에 걸리는 물건들도 막 차고 그랬다. 그러더니 걸망을 메고 가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다. ‘내가 땡중인가비…’ 암자에 있는데 하루는 아주머니 두 분이 오더니 사주팔자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부엌에서 일하던 보살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털고 나왔다. 보살은 생년월일과 난 시(時) 등을 묻고서 사주팔자를 보는 책자를 뒤적이면서 아주머니들의 사주를 봐주었다. 그 앞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한 인간의 사주팔자 보는 게 너무 쉽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간의 운명이 그렇게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루는 소나기가 종일 내렸다.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 억지로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내 가슴 위로 무언가 지나다니는 느낌에 잠을 깼다. 큰 쥐 한 마리가 내 배 위에 올라와 있다가 내가 깨는 바람에 놀라서 달아난 것이다. 쥐는 내가 워낙 싫어하는 동물이다. 그 쥐가 다시 나타날까 봐 그날 밤 꼬박 새울 수밖에 없었다. 불빛 하나 없는 산중에는 소나기가 주룩주룩 내리고, 시커먼 쥐가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글을 썼다. 내가 사랑하고 싶었지만 더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여인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이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연상시키는 이 편지는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철학에 대한 나의 아주 원초적인 생각을 담고 있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