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22- 존재와 일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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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22- 존재와 일자

1)

앞에서 헤겔은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했다. 존재자의 개념에 관해서, 헤겔은 존재자를 ‘어디에 있는 것[Dasein]’으로 규정한다. 존재자가 있는 곳 즉 ‘Da’는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와 관계하는 곳이며 바로 시공간이다. 이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어떤 존재자는 어떤 규정성을 가지며, 그런 존재자가 있는가 없는가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제 우리는 초점을 ‘존재자’ 또는 ‘비존재자’에서 ‘존재’ 또는 ‘무’의 개념으로 이동해 보자. 한자나 독일어, 영어로 말하면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두 말이 같은 단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있음[존재자]’과 ‘임[존재]’는 그 용법이 분명하게 구분되니,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헤겔의 논리학을 다루니, 그냥 존재자[Seindes]와 존재[Sein]으로 계속 말하기로 하다. 그렇다면 헤겔의 존재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2)

헤겔은 존재를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존재, 순수 존재- 이것은 아무런 다른 규정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 존재는 이러한 그의 무규정적 직접성 속에서는 오직 자기자신과 동등할 뿐이며 또한 타자에 대해서 부등한 것이 아니다.”(논리학, GW21, 68-69)

여기서 헤겔은 존재의 ‘무규정성’에서 곧 ‘자기 관계’라는 말로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무심히 읽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과연 이런 개념적 이행이 가능한 것일까, 의심스럽다.

이런 이행에는 어떤 전제가 있다. 그것은 곧 앞에서 말했듯이 헤겔에서 규정성은 타자에 대한 부정성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타자에 대한 부정은 존재자가 타자에 대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¹, 이 점이 존재자를 고립된 실재성을 파악하는 다른 사유와 헤겔의 사유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다. 규정성이 곧 부정성을 포함한다는 전제를 놓고 보면, 순수 존재에서는 규정성이 없으니, 여기서 타자에 대한 관계가 없다는 개념적 이행은 이해된다.

주1 헤겔은 이것과 연관해 스피노자가 처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 즉 모든 규정된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3)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보자. 자기 관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어지는 헤겔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자기 관계하므로] 결국 이것은 자기 내부에서 있어서나 또는 외부에 대해서도 아무런 상이성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논리학, GW21, 69)

상이성은 곧 차이를 말하며 구별을 말한다. 이런 상이성이 없으므로 자기 관계하는 것은 바로 하나 즉 일자이다. 헤겔에서 존재는 최종적으로 일자로 규정된다. 이렇게 하여 헤겔의 존재에 관한 논의는 급기야 일자에 관한 논의로 전환한다.

일자란 무엇인가? 거슬러 올라가면 아낙시만드로스가 만물의 근본 원인이 무규정성[apeiron]이라고 말한 것에서 이미 일자라는 개념이 암시된다. 그는 탈레스가 만물의 원인이 물이라고 한 데 대하여 만일 그렇다면 그것과 대립하는 불이 물이라는 원인에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되는 사물로 가득 차 있는 만물이 나오는 원인이 되려면 모든 대립하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즉 무규정성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자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인데, 파르메니데스에서 일자는 아낙시만드로서의 무규정자와 같은 만물의 아르케로 제시된 것이다. 헤겔은 그의 저서 <철학사>에서 파르메니데스에서 일자라는 개념의 연원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발생은 사라지고 몰락은 믿을 수 없다. 존재는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디에선가 존재가 더 많을 수도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연관되지 않는다. 또한, 어디에선가 더 적지도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은 존재자로 충만하다. 모든 것은 연관이다. 왜냐하면, 존재자는 존재자와 합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변하며, 자기 내에 머무르고 자기 내에 확고하다. 강력한 필연성의 확고한 결속의 한계 내에서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끝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비존재함을 결여한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에 비존재자가 있으면 분리가 있지만, 비존재자는 없으므로 분리되지 않는 존재자는 내적으로 자기 관계하는 일자라고 한다. 일자가 되는 이유는 존재자와 존재자를 서로 비교하여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존재자는 추상적 존재자이며 서로 같으니, 여기서 일자가 나온다.

무규정자는 모든 규정이 뒤엉킨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자체는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허한 것을 뒤집어 보면 일자가 나온다. 모든 것이 뒤엉킨 것은 곧 순수한 연속성을 지닌 것이니 일자가 된다.

이 아르케로서 무규정자와 일자는 모두 존재자들의 ‘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나온 것이다. 무규정자와 일자는 관계의 양 측면이며 서로 동전의 양면이다. 무규정적이기 때문에 일자이며, 거꾸로 일자이기 때문에 무규정적인 것이다.

4)

존재가 곧 일자라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와 헤겔은 일치한다. 그런데 존재론에서 헤겔의 주장과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단적으로 대립한다. 헤겔에서 존재는 곧 무, 무는 곧 존재인 데 반해서 파르메니데스에서는 존재는 존재이며, 무는 무이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상반된 주장으로 나가게 된 것일까?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주석3에서 플라톤이 지은 파르메니데스 편을 언급한다. 헤겔은 여기서 파르메니데스의 한계를 지적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확고하게 지키면서 가장 일관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동시에 무에 관해 무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만이 존재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무규정적인 것이므로 타자에 대해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시원으로부터 즉 존재 자체로부터 더 나갈 수 없으니 만약 전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만 외부로부터 어떤 낯선 것이 그것과 결합되는 것을 통해서만 일어날 것이다.”(논리학, GW21, 81)

파르메니데스에서 존재는 타자에 대한 관계가 없으니, “존재 자체로부터 더 나갈 수 없으며” 즉 영원히 존재할 뿐, 무가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이런 사유에 빠져버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헤겔은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앞에서 말했듯이 일자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는 이 일자 개념에 충실하지 못했다. 파르메니데스는 다른 한편 존재를 주로 ‘일반적 존재자’라는 의미에서 사용하한다. 예를 들어 역시 헤겔 <철학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보자.

“사유와 사상이 그 때문에 존재하는 것[존재자]은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 없이는 사유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존재자가 없는 경우] 사유는 무이며, 사유는 존재자 밖에는 무로 된다.”(헤겔, 철학사)

이 자리에서 존재는 사유의 대상으로 즉 존재자로 규정된다. 여기서 존재는 존재자가 지닌 일반적 속성을 의미한다. 존재자가 ‘어디에 있는 것’이라면, 그 모든 존재자가 가진 일반적 속성으로서 존재는 ‘-에 있음’이 된다. 그러므로 이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헤겔은 앞에서 존재자에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차이가 있다는 인정했다. 그러므로 만일 존재가 존재자 또는 존재자의 일반적 속성이라면, 이런 의미에서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다를 것은 틀림없다. 헤겔은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일반적 존재자라는 의미에서 사용하였기에 결국 존재하고 무 즉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헤겔은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에 관하여 일자라는 개념과 일반적 존재자라는 개념을 뒤섞어 사용하면서 사유의 혼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미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편에서 밝히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이용한 변증법은 차라리 마찬가지로 외적 반성의 변증법으로 여겨질 수 있다. 존재와 일자는 모두 엘레아적인 형식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와 일자는 구분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에서 이 양자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논리학, GW21, 87)

“플라톤은 일자로부터 여러 가지 규정들을 분리시킨다. 예를 들면 전체와 부분, 자기 내의 존재와 타자 속의 존재, 형태나 시간 등의 규정이다. 그 결과 일자는 존재가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앞에서와 같은 방식으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21, 87)

여기서 헤겔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의 입을 통해 일자는 전체도 아니고 부분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 형태나 시간도 갖지 않는다는 등을 변증했는데, 그런 변증은 파르메니데스가 자기 입으로 자기의 주장인 “일자는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수법이었다는 것이다.

5)

헤겔은 ‘일자’, ‘무규정자[apeiron]’라는 말 대신 ‘존재’와 ‘무[Nuchts]’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때문에 존재자와 존재, 무와 비존재자가 혼동되면서 혼란을 자아냈다. 그 때문에 그는 주석에서 누누히 정말 지루할 정도로 존재자와 존재, 무와 비존재자가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르지만, 존재와 무 자체는 동일하다고 말한다.

헤겔은 자기의 곤란한 처지를 충분히 짐작했을 텐데도, 여전히 일자나 무규정자라는 말 대신에 존재나 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헤겔의 ‘존재’라는 말의 연원을 고민하게 된다.

이제 헤겔 논리학에서 시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했던 생각으로 되돌아가 보자. 헤겔의 논리학은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나왔다. 칸트는 판단의 형식 즉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본다. 판단 형식이란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말하는데, 이 관계가 바로 계사 ‘이다’이다. 판단형식은 12개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추상적인 계사 ‘이다’가 구체화된 변형태이다.

구체적인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계사가 대상을 구성한다는 말과 같다.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곧 관계시킨다는 것이니, 범주가 대상들의 구체적 관계 예를 들어서 인과 관계 등을 통해 나타난다면 추상적 계사는 대상의 일반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겔은 대상이 지닌 가장 일반적인 관계를 계사 ‘이다’ 즉 존재라고 규정한 것이다. 우리 말로 하자면, 헤겔에서 존재는 ‘있음’ 즉 현존[Dasein]이 아니라 ‘임’ 즉 계사 ‘이다[Sein]’이다.

헤겔은 이처럼 대상의 관계가 계사의 현상태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혼란을 무릅쓰고 굳이 일자를 일자로 표현하지 않고 존재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 때문에 헤겔의 존재론을 읽는 우리조차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의 존재를 존재자로 보면서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 말이라면 그런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독일어나 영어, 한자는 ‘이다’와 ‘있음’을 같은 단어[sein, be, 存在]로 표현하기에 그런 혼란이 일어난다. 실제 파르메니데스가 그 때문에 혼란에 빠졌고 존재론에서 헤겔의 의도를 우리가 오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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