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14-엥겔스 자연변증법에 관해[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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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 14-엥겔스 자연변증법에 관해

1)

헤겔은 정신현상학 끝에 순수지에 이르러서, 마침내 학문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 학문인 논리학이 시작된다고 한다.(실제적 학문은 자연철학과 정신철학-법, 예술 종교- 등이 속한다) 앞에서 정신현상학의 구별은 역사적으로 전개된 형태이고, 반면 논리학의 구분은 사유 순수지, 또는 논리의 영역 내에서의 구별이라고 했다.

이는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다시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헤겔이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에서 다루고 있으니 잠시 미루어 두기로 하고, 우선 논리학의 구분 문제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자.

헤겔은 논리학의 구분은 자의적, 역사적 구분이 아니며, 오히려 ‘개념’ 자체가 전개하는 고유한 구분이라고 한다. 즉 ‘개념’은 정신현상학의 최종 결과인 순수지를 말하니, 그것은 곧 사유와 존재의 통일을 말한다. 이런 통일이 다시 전개되면서 한편에는 존재로 다른 한편에는 사유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에 따라 전자는 객체 논리학이 되고 후자는 주관 논리학이 된다.

물론 이 구분은 인식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정신현상학에서처럼 더이상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형태가 아니며, 다만 순수지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계기의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체 논리학이라고 하더라도 존재자 자체를 직접 다루는 형이상학은 아니다. 그것은 순수지의 형식 내에서 존재자와 관련된 형식일 뿐이니, 객체 논리학은 존재자에 관련된 하나의 판단형식이나 범주를 다룰 뿐이다.

마찬가지로 주관 논리학은 사유를 다루는 순수지의 형태, 즉 판단형식인데, 이때 사유는 정신철학에서 사유를 하나의 대상으로 다룰 때처럼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오직 사유를 다루는 판단형식이나 범주를 다룬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본다면, 논리학은 전체적으로 판단형식, 범주를 다룬다고 보겠으며, 그러므로 논리학의 지반은 다만 순수지, 또는 판단형식이다. 순수지의 형식이 전개되는 과정이 곧 논리학이다.

2)

헤겔은 객체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 발전하는 이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따라서 전체 개념은 한번은 존재하는 개념이며 다른 한번은 개념으로 고찰될 수 있다. 전자에서 개념은 다만 그 자체적인 것으로 개념일 뿐이며 그러므로 실재하고 존재하는 것으로서 개념이다. 반면 후자에서 개념은 개념 자체 또는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헤겔은 논리학의 지반인 순수지 즉 개념이 자기를 전개하면서 처음[객체 논리학]에는 순수지가 “그 자체적인 것으로” 또는 잠재적으로[an sich] 자기를 드러낼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순수지는 존재자의 운동 속에 가려져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순수지의 운동이 아니라 마치 존재자가 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논리학인데도 이것은 마치 형이상학처럼 보이다.

그러나 순수지 즉 개념이 마지막[주관 논리학]에 이르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실현해서 실현된 자기로부터 자기를 자각하면서 “대자적[fuer sich]으로” 된다.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라 순수지가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순수지 자신의 운동이 존재자를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논리학은 논리학답게 판단형식으로 출현한다.

3)

알다시피 1부 객체 논리학은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론으로 나누어진다. 존재론은 직접 우리 눈 앞에 존재하는 존재자를 다룬다.

반면 본질론은 이중적이다. 헤겔에서 본질은 아직 “자기 내에 머무르고 있는 개념[In Sich Sein des Begriffs]”이다. 즉 자기를 구체적으로 전개하지는 못하면서 추상적으로 사물의 내부에 머무르고 있는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런 개념을 헤겔은 본질이라 한다.

본질론에서는 직접적 존재와 이런 내적인 본질 사이의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침투하는 모습이 다루어진다. 이 경우 헤겔은 본질이 “외적 존재에 들러붙어 있다”라고 표현한다.

“이 개념은 이런 방식[본질론]에서는 아직 그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정립되지 않고 그것에 외적인 존재인 직접적 존재가 동시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본질론이며 이 본질론은 존재론과 개념론 사이에 있다.”(2판, 46쪽)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논리학이 다루는 대상은 직접적인 존재에서 존재와 본질의 상호 관계로 마지막으로는 자기 전개하는 개념으로 나가니 점차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물론 논리학은 대상 자체가 발전하는 운동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논리학은 대상의 발전을 매개로 하여 자기를 전개하는 순수지, 개념, 판단형식, 범주를 다룰 뿐이다.

4)

이것과 관련하여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이라는 책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미완성된 이 책에서 엥겔스는 자연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세 가지로 서술했다.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그 하나는 질, 양 전환의 법칙이다. 두 번째는 상호 침투의 관계이다. 세 번째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법칙이다.

엥겔스는 자연의 세 가지 변증법적인 전개 과정을 어디서 발견했을까? 그의 저서 자연 변증법에서 보듯이 그가 물론 자연과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는 이처럼 자연을 연구하여 이런 법칙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보기에는 그의 자연 연구는 1870년대라는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법칙은 헤겔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하듯이 바로 그의 논리학에서 흘러나오는 법칙이다.

질량 전환의 법칙을 헤겔은 존재론에서 제시한다. 본질론의 영역에서 존재와 본질의 반성 관계는 근본적으로 상호 침투의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개념론에서 개념의 발전을 서술하면서 헤겔은 이중 부정, 자기 부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엥겔스의 이 세 가지 법칙은 잘못 알려진 대로 자연의 모든 영역에 동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질량 전환의 법칙은 물리학의 영역에, 상호 침투의 법칙은 화학의 영역에 그리고 생물학, 역사학에는 이중 부정을 통한 발전의 법칙이 적용된다. 이런 차이를 간과하면 소박 유물론자처럼 역사 속에 질량 법칙을 적용하든가, 역사에는 변증법이 있지만, 자연에는 변증법이 없다는 루카치와 같은 오해가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엥겔스는 이런 법칙을 자연의 일반 원리로 보았으니, 말하자면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은 형이상학적이라고 하겠다. 그런 가정 아래 그는 자연과학의 연구를 통해서 그런 법칙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엥겔스는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헤겔이 판단형식의 발전으로 규정한 논리학의 법칙을 존재자의 일반적 운동 원리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후일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에너지와 물질의 전환법칙이 발전되기 이전 1870년대라는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변증법을 자연의 원리로 확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자연의 원리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서로 독립적인 질량과 에너지라는 뉴톤적 원리가 극복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엥겔스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모두 포기하고, 그의 연구를 비발표 논고로 남기고 말았다.)

5)

여기서 마침내 헤겔이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을 제쳐두고 논리학이라는 표현을 이용한 이유가 드러난다. 헤겔의 논리학은 순수지를 지반으로 전개된다. 사유의 판단형식 즉 범주가 자기를 전개하는 과정이 곧 논리학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형식이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매개로 전개되기에,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이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그것은 형이상학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사유, 판단형식, 범주를 다루는 것이니, 헤겔의 말대로 논리학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다만, 논리학이 형식적 학문이 아니라, 존재자에 대한 경험을 매개로 하여 발전한다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로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헤겔 논리학을 서술하지만, 서두에 밝힌 대로 헤겔의 이 책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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