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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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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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도 변화하게 된다. 작가는 원망감을 지니면서 냉소했던 아버지에게서 어릴 때 친밀했던 아버지를 되찾게 된다. 이런 태도의 변화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곧 작은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이다.

작품 속에 너무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이 등장하여 잘못하면 지리멸렬할 수도 있었던 소설을 구해준 것은 바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와 아버지의 작은 아버지의 관계가 서로 뒤얽히면서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일 것이다.

작은아버지의 에피소드는 이야기 초반, 중반, 결말에 흩어져 등장하면서 상승하는 곡선을 그리고 있다. 처음 등장하면서 작은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아버지를 원망하는 고주망태였다. 작품 중반에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어린 작은아버지는 면 당 위원장인 아버지를 토벌군에게 자랑하면서 오히려 할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 그런 죄책감이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원망감으로 변한 것이다.

작품의 끝에 작은아버지가 다시 등장하여 아버지의 유골을 껴안고 울면서 마침내 둘은 화해하게 된다. 그런데 작은아버지와의 관계의 발전은 딸인 작가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매개하고 있다. 이 매개가 소설의 2/3 부분에서 출현하면서 소설적 갈등의 전환점을 이룬다. 그 매개는 곧 작가의 가출사건이다.

작가 역시 아버지에 대해 원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원망감은 아버지 때문에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되는 데, 작가는 그 때문에 공부를 폐기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나날을 보낸다. 아버지가 계곡 너럭바위에서 작가가 읽던 소설책을 낫으로 베어버리자 작가는 그 길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길을 끝없이 걸어간다.

이때 작은아버지가 어떻게 안 것인지(아마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지 않았을까?) 자전거를 타고 작가를 따라와 돌아갈 것을 종용하지만 작가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때 작은아버지는 작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족 또는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길은 끝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으로서 삶의 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아버지도 이미 그런 탈출을 모색했지만 그래서 끝내 버리지 못했고, 아버지도 다른 빨치산과 달리 구박받을 줄 알면서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작가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 가족이라는 뿌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이런 뿌리를 운명애처럼 인수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다시 되돌아선다.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작은아버지의 등에서 쉰내를 맡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쉰내 같은 게 혈육인가 싶었다. 나를 데리러 오가느라 밴 그 쉰내가 정겨운 듯도 역겨운 듯도 했다.”

정겹기도 하고 역겹기도 한 것이 곧 사람으로서 삶이다.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자신의 결혼식이 취소된 사건을 다루는데, 남편 될 사람이 부모의 강압으로 가족이냐 여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작가는 자신이 결단을 내려 결혼을 취소함으로써 담담하게 모든 운명을 인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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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집을 나서려다 돌아선 것이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정점이다. 이 정점 이후 작가는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친밀한 어린 시절의 모습을 되살리게 된다. 작가는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모습을 회상한다. 어느 날 밤에는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리키면서 아버지는 그곳이 응암동 외삼촌 집이라며 거기 외삼촌이 보인다고 한다.

작가는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아버지가 말한 외삼촌을 찾는다. 작가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멀리 아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응암동 외삼촌의 모습을 찾으려는 딸의 모습을 그려낸다. 딸이 아버지 등 위에서 까치발을 하고 엉덩이를 들어 고개를 내밀어 “어디, 어디”하고 찾는 모습이 무척이나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그 응암동이란 곧 아버지의 말을 통해 작가에게 전해진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 유토피아는 이제 사상적인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그 유토피아는 사람으로서 삶이 살아가는 구례와 같은 유토피아가 아닐까? 이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았으나 작가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이 유토피아의 대강을 그려내고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곧 클레멘타인의 노래이다. 딸을 홀로 남겨두고 금을 캐러 갔던 아버지는 금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 딸은 이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회한을 담은 이 노래는 작품 속에 반어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 의미는 곧 자기를 버려 두고 금을 캐러 떠난 아버지에 대한 딸의 원망[怨望]과 금은 없더라도 아버지가 자기 옆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딸의 원망[願望]이다.

이 노래는 아버지를 통해 새로운 세대인 노랑머리를 한 소녀에게 전해진다. 작가는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 이제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아버지가 약속한대로 미용사 시험에 합격하면 술을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 구례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아버지가 필요하다. 딸을 결코 홀로 버려 두지 않는 아버지 말이다. 그런 규범은 거꾸로 자식에게도 요구된다. 자식 역시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인 충직함이 요구된다.

이런 충직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윤학수의 에피소드이다. 윤학수는 지역사회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아버지가 겪은 빨치산의 투쟁사를 연구한다. 그런 학수가 어느 날 아버지의 뺨에 손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동네 경로당으로 쫓아간다. 그러면서 작가의 표현대로 불학무식한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손댄 사람을 찾아 혼내려 한다. 아버지는 이 사건 이후 처음으로 학수를 집에 불러 술잔을 내려준다. 학수는 이제 자식으로서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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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아버지의 위장 자수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산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새벽 불빛이 켜진 동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위장 자수를 하기 위해 산을 내려 갔을 때 “세상은 환한 불빛으로 아버지를 맞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환한 불빛은 곧 작가가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보았던 응암동의 아른거리는 불빛일 것이다. 이 불빛은 곧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인 구례를 의미한다. 거기에는 혈육의 쉰내가 정겹기도 하고 역겹기도 하게 피어나는 곳일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 즉 사람으로서 모습을 발견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삶을 그동안 무겁게 뒤덮고 있던 원망감을 벗어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을 괴롭힌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야 한다는” 작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한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7)

많은 독자가 작가의 작품에서 감동하는 것은 작가가 제시하는 사상으로서 삶에 대립하는 사람으로서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사상과 사람은 대립하는 것일까? 사상이 사람을 떠나서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게릴라가 민중에서 고립되어서는 한 시라도 존재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사상을 떠난다면, 그런 삶이란 어쩌면 고여서 서서히 썩어가는 연못과 같은 곳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딸을 혼자 두지 않는 아버지나, 불학무식하게 충직한 아들의 이면을 작가는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상의 통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적어도 작가가 우리에게 그런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훌륭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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