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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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의 글(서평, 1부)에서 이 책에서 저자는 조던이 과학자로서 불굴을 의지를 갖추고 자연 속에 질서를 세워 나갔던 힘의 원천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여기서 저자의 서술은 비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애가에 가깝다.

이 책에서 조던에 대한 애가는 갑작스럽게 분노로 전환한다. 이것은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의심스러운 구석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이다.

첫 번째 의심은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해 1905년 스탠포드 학장으로 근무할 당시이다. 스탠포드 대학 이사장인 제인 스탠포드가 사망했는데 여러 증거로 볼 때 독살의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조던은 학장으로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제인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만다.

최근 이 사건은 다시 조사되었는데 저자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조던이 제인을 독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이런 의심보다 더 결정적으로 저자의 평가를 전환한 것은 조던이 1920년대 전개했던 우생학 운동이었다.

우생학은 다윈의 사촌이었던 프랜시스 골턴이 1883년 제시했다. 조던은 이런 우생학을 미국으로 전파했으며 1920년대에는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우생학의 온상이 되었다. 조던의 영향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924년 버지니아 수용소나 1928 인종 개선 재단은 모두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우생학의 결과는 사회 부적응자를 강제로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후일 독일에서는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미국에서는 강제 불임 시술을 통해 유전적 영향을 제거하려 했다.

2)

여기서 강제 불임의 대상이 된 것은 단순히 간질환자나 정신지체인에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도덕적 타락으로 지목된 창녀, 동성애자 등도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근거가 된 이론이 도덕적 타락이 유전된다는 주장이다.

버지니아 수용소장이었던 프리디 박사는 캐리 벅이란 여성을 조사했다. 그녀는 고아로 자라났으나, 강간당해서 양부모가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에는 애마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프리디 박사는 애마가 캐리의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애마 역시 창녀로 이 수용소에 끌려왔다. 프리디 박사는 캐리가 수용소에서 출산한 아이 비비엔에게서도 정신적 퇴화의 징조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이 캐리 벅의 예를 도덕적 타락이 3대에 걸쳐 유전한 예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 버지니아 수용소에 수용되어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던 두 여인 애나와 메리를 만난다. 저자는 과연 그들이 그와 같이 처리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를 되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우생학이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저자는 마침내 이 책의 근본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엄격한 절차를 따르는 탁월한 과학자 조던이 이런 우생학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물음이 아니다. 나치즘 역시 우생학에 기초하여 인종 청소를 하였으니, 이런 물음은 곧 나치즘의 원천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다.

3)

저자는 조던의 저서를 연구하면서 그 단서를 찾으려 한다. 저자는 마침내 조던을 과학자로 이끌었던 그의 스승 루이 아가시의 사상에 부딪힌다. 루이 아가시는 조던이 스탠포드 대학의 표본실 건물 앞에 동상으로 세워놓은 인물이다.

저자는 조던이 나중에 다윈의 영향을 받아 탁월한 과학자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아가시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지배되었다고 본다.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밑바닥에 있는 개념은 자연 속의 신의 계획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거슬러 올라가서, 조던이 아가시를 자연관찰 캠프에서 처음 만난 날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때 저자는 아가시의 말을 같은 캠프에 참가했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의 시 속에서 발견한다.

스승이 젊은이들에게 말했지

우리는 진실을 찾으러 온 것이라네.

불확실한 열쇠로 신비의 문을 하나하나 열려고 시도하지.

우리는 그분의 법칙에 따라

원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다네

그 무한한 존재, 시작된 적이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그분,

이름 붙일 수 없는 유일자,

우리의 모든 빛의 빛, 그 빛의 근원,

생명의 근원, 그리고 힘의 힘을

맹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듯,

우리는 이곳에서 더듬으며 찾고 있다네.

그 상형문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보이는 것에 담긴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자연 속에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아가시의 사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진화론의 태두라고 할 라마르크의 학설과 닮았다. 이 학설은 다윈의 맹목적 진화론과 구별되며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서 이제 진화의 단계는 동시에 탁월함의 단계이며 도덕적 완성의 단계가 된다. 그 단계의 최종 끝에는 인간이 있으며 이 인간의 끝에는 다시 이성적이며 기독교도인 백인종이 있다.

과학이 자연의 종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의 종 속에 신이 숨겨놓은 이런 탁월성의 단계, 도덕적 완성의 단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가시는 이렇게 말한다.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며, 그 생각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분류학의 작업은 창조주의 생각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4)

저자에 의하면 조던 역시 끝내 아가시의 목적론적 진화론, 즉 자연의 층계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자연의 층계라는 개념은 우생학의 원천이 된다. 그 대문에 조던 역시 우생학 운동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생학은 퇴화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일정한 단계에 이른 생물은 퇴화하여 자신이 진화의 단계에서 발전시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생학은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해서는 퇴화가 일어난 종의 번식을 막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인종 청소나 강제 불임 시술의 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조던이 스위스의 아오스타라는 공간을 방문한 기록을 발견한다. 아오스타는 가톨릭교회가 장애인을 돌보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장애인이 서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며 어느덧 커다란 도시가 되었다. 조던은 이 아오스타를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 대립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높이 평가한다. 다윈에서 모든 생물은 각자 적응하고 있는 존재니, 여기서는 어떤 층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생물은 마찬가지로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이런 다윈으로서는 퇴화라는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퇴화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새로운 적응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물의 다양한 변종이 생물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기제이니, 이런 변종이 생명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5)

초기에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한 조던이 끝내 다시 아기시의 목적 진화론에 빠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관해 저자는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이 책의 전체 흐름을 통해서 볼 때 저자의 생각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조던이 은 우생학에 빠져든 것은 자연의 무질서 앞에 조던이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자는 자연이 혼돈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과학이 아무리 이 자연 속에 질서를 세우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대지진 앞에서 무너진 조던의 표본실과 마찬가지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혼돈의 세계 속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저자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버지니아 수용소에서 강제 불임 시술을 당한 채 살아남은 애나와 메리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그리고 자연에 어떤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을 곧 민들레 법칙이라 한다. 그것이 다윈이 독자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라고 한다.

조던의 삶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이런 법칙은 작가 자신의 삶도 바꾸어 놓았다. 작가는 이제 자신을 떠난 남편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제 직시하며 새로 만난 여성과 삶을 꾸리게 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제 약간 감상적으로 되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포한다.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을 해방시키는 것”

6)

마침내 저자는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어류의 세계에서 세웠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저자는 자기의 일이 조던이 애나와 메리에게 가했던 잔인한 불임시술에 대한 복수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저자의 결단 속에는 어떤 미묘한 즐거움이 흐른다.

저자는 분지학을 연구하는 캐럴 계숙 윤의 도움으로 물고기라는 존재 즉 어류라는 분류 항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산에 사는 생물을 모두 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또는 공중에 나는 생물을 모두 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물에 산다고 해서 모두 어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어류라고 말해지는 폐어, 송어, 멍게, 가자미 등은 동일한 과에 속하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면 실재한다는 생각은 관념론 철학의 근본 주장이다. 물고기라는 말이 있어서 사람들은 물고기가 마치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물고기라는 분류명을 제거해 버린다. 이로써 조던이 목숨을 걸고 확립하려면 물고기의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7)

글을 다 읽고 나서, 독자로서 나는 다시 회의에 빠진다. 우선 우생학에 대한 문제이다.

민들레 법칙, 아름다운 말이지만 저자가 기대한 만큼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가 그려 놓은 것처럼 자연의 혼돈 앞에 그런 그물망이 얼마나 버틸 것인가? 아마 그것은 대지진으로 파멸된 조던의 실험실 유리병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저자가 가정했듯이 우생학이 목적론적 진화론의 결과인가? 다윈의 저서 속에 인간이 가축을 개량한 것 역시 진화의 한 방식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 자체 내에 이미 그런 우생학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이런 생물의 진화론을 인간의 사회 속에 끌어들인 것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생물과 동일하다면, 우생학은 불가피하게 된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생물과 운동 법칙이 다르다는 전제 아래서만 우생학을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존재의 탁월성이나 도덕적 완성의 단계로 보는 것은 인간적 관점을 자연 속에 집어넣는 것이니 비판 받는다. 하지만 자연의 사다리를 자연 자체의 운동 법칙의 차이로 본다면, 이는 자연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되지 않을까?

두 번째는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연은 정말 혼돈에 불과한 것인가? 모든 질서는 인위적인 것인가?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결국 니체의 철학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란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존 의지는 영웅의 것이고 대부분 사람은 자연의 혼돈 앞에서 오히려 니체가 경멸하는 과학적 삶, 무리 지은 삶을 선택할 것이다.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저자가 반대하는 삶이 결론으로 도출되지 않을까? 역시 인간은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기 위한 투쟁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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