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이진섭(자유기고가)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오빠께.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서울에 사는 초등학생이에요.
얼마 전 숙제를 하다가 오빠의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스크린도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2016. 6. 2. 당신의 희생을 슬퍼하는 평범한 초등학생 올림.
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당한 참담한 일입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2016. 5. 30. 국회의원 안철수 트위터 중.
놀랍게도, 같은 나라에 사는 두 사람이 같은 사고를 접한 후 보인 반응이다.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넘나들며 생명을 돌보는 의사였던 안철수가 지금은 의료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나를 포함한 국민 전체의 생명과 안녕을 다루는 한 나라의 공직자가 된 것을 더 큰 불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헷갈린다.
묻고 싶다. 우리 사회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에 왜 초등학생이 미안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해야 하는지. 반면 공공의 업무를 보살펴야 하는, 나아가 대권을 꿈꾸고 있는 공직자는 왜 저 모양인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라는 안철수 의원이 말이 맞긴 맞다.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그렇다. 흙수저로 태어나면 금수저 밑에 들어가서 위험한 일도 척척 해내야 컵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논리에 맞게 땅콩 서빙도 눈치껏 잘 해야 한다. 여유가 없는 집에서 태어나면 위험수당을 받기 위해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해외 근무를 자진해야 하며, 제대 후에는 고객님께 따끈따끈한 치킨을 전해드리기 위해 오토바이 위에서 목숨 걸고 총알 배달을 해야 한다. 질환이나 장애가 있어 더 이상 식당 일도 못 나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집에서 번개탄 피워놓고 마지막 숨을 쉬어야 한다. 그간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보며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지 않아도 되며 자살을 시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맞는 말을 한 안씨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냐고? 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안씨가 비난을 받는, 또 받아야 하는 이유는 공직자로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이다. 화장실 갈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컵라면 먹을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위험한 업무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 바로 이 지점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라고 했으면 그 다음엔 “이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합니다 또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안씨는 뭐라고 했는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선택했을 거란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금번과 같은 사고로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승인한다는 내용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헐~, 생활을 위해 일하면서 그 일 때문에 생활 이전에 생존부터 위협받는 아이러니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공직자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의 말은 ‘억울하면 너도 출세해’ 또는 ‘세상은 그냥 요지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건 무력한 세인들 간에나 하는 말이지, 정치인이 세인들에게 할 말은 아니다. 오히려 세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저러한 냉소와 조롱의 정서가 사그라지도록 하는 역할이 정치이고 정치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그토록 위험한 일들을 덜 위험하도록 만들어 가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이 공직자다. 그러기에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며 밥도 거를 정도로 바쁘고 위험한 일을 자연발생적인 전제로 두고 이는 그 개인이 선택한 것이니 그 결과도 고스란히 개인이 안고 가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정치인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당연하다.(미주*) 고대 그리스 시절보다 세상이 좋아져서 비난 정도로 끝난 것이지 제대로라면 이런 자들은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맞다(잠재적 대권 주자? 어이가 없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추구하는 효율성과 수익성의 원리로 조직된 사회의 그물망에 숨통이 조인 한 생명을 떠나보낸 일반 시민들조차 이번 사고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터에서의 참사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공직자가 저 따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걸 공직자 이전에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여당의 태도 또한 기가 막히다. 새누리당은 금번 구의역 사고를 끌어들여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 구의역 사고는 파견이 아닌 ‘원청-하청’ 구조와 그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지 파견법이 개정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파견법 개정안이 친(親)기업 입장에서 파견 노동자 양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파견 역시 전형적인 간접 고용 방식으로 ‘원청-하청’ 방식 이상으로 심각한 ‘책임지지 않음’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그러니 구의역 사고와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해 파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말은 어불성설이며 기만 중의 기만이다. 도대체 이 나라 정치인들은 제 정신인가? 유가족의 통곡과 분노, 초등학생의 눈물이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제 정신이라면 구의역 사고 이후 파견법 등을 비롯해 노동 환경 전반을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하는 것이 지극히 옳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는,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의 가사를 되풀이하고 재확인하는 일은 공직자의 업무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은 요지경>은 대중이 정치인들을 향해 겨누는 조롱의 화살이지, 정치인이 대중에게 감히 내뱉을 말이 아니다. 정치인은 그저 말없이 조용히 행동하면 된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는 어린 소녀의 얼굴에 이와 같은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말이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두 볼에 흐른 눈물이 이번만은 아닐 터.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조현병 환자인 공직자를 둔 우리 사회에 눈물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있으며 그 눈물이 마른 곳은 있을까. 눈물은 세월호 침몰과 메르스 방역 실패에 따른 무고한 죽음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한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동안(아니 훨씬 이전부터) 독성 가습기 살균제는 확인된 통계로만 266명의 숨통을 끊어 놓았고, 울산-거제 벨트에서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는 한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의 칼부림에 손쓸 틈도 없이 비명에 갔고, 구의역에서는 한 청년이 자신의 몸과 시민의 안전을 맞바꾸며 기득권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온 몸으로 피를 쏟았고 그의 어머니는 온 몸으로 눈물을 토했다. 매일 전쟁을 치러내야 하는 이 삶과 죽음의 매트릭스를 아비규환 외에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은 지옥불반도 헬조선이 맞다. 사회가 그야말로 작살이 나고 있는 와중에도 이 나라 최고의 공직자라는 사람은 해외로 나가는 것도 모자라 그 곳에서 빼놓지 않고 K-Pop 공연을 관람한다. 심지어 손을 흔들며 환한 표정을 짓는 여유를 보인다.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의 환한 미소 앞에 평범한 초등학생의 궂긴 표정이 겹쳐 보인다.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그렇다. 초등학생조차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속한 이 사회가 나에게 850원 어치 컵라면조차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이 돈벌이 논리에 신음하는 자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천박한 헬조선임을. 나아가 ‘지금 초등학생인 나도 몇 년 후엔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근거 있는 상상과 우려를 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2016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키워가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 언제 짓밟힐지 모르는 불안한 꿈이기에 꿈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져 간다. 애초부터 꿈을 꾸고 희망을 갖는 삶이 결국엔 공허하다는 걸 깨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였을까,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이미 꿈꿀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의 많은 초등학생들은 과도한 학업 부담으로 밤 12시까지 공부한다는 내용의 인터뷰가 방송을 통해 소개되더라.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이라고 운을 띄우며 시작한 저 편지의 주인공 역시 밤늦게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서울의 초등학생은 아닐지 문득 궁금해진다.
초등학생도 글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사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공직자가 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충격을 넘어 이들이 공직자 중에서도 소위 ‘별 중의 별’이라는 사실이 공포를 더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누가 더 밝은 빛을 발하는지 경쟁하느라 바쁘다. 지상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하늘의 별’이 되도록 방치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늘 같은 별’이 되어 시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 그사이 지상에선 누군가는 끊임없이 죽어 나가고 지하에 묻힌다. 이들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하늘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오히려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라고 연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이러니 우리 사회의 공직자들이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공직자는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멈춰 서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부조리와 몰상식으로 인한 사건/사고를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할 의무와 권한이 있다. 공직자는 수시로 지상으로 내려와서 필요하다면 지하까지 강림하시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저 평범한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아래 편지 내용에 잘 드러난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나는 단지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안철수 너는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을 넘어 공직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새누리당의 파견법 개정 시도를 꼭 본 것 마냥 평범한 초등학생의 깊은 우려와 따끔한 충고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이 살고 있는 사실상 두 개의 나라인 이곳에서 만 2살짜리 아이가 초등학생으로 살아갈 미래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와 할머니 손을 잡고 이비인후과 문을 열고 들어온 만 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좁은 공간에서 잘도 뛰어 논다. 좋다고 할머니 품에도 안긴다. 아프긴 해도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다. 나에게도 관심을 보인다. 문득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명을 달리한 19살 청년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한다. 그 청년도 저렇게 즐거워하며 또 귀여움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엄마랑 할머니랑 살을 부대끼며. 유가족이 된 그의 어머니 말에 따르면 다 자란 지금까지도 어머니 볼에 뽀뽀를 하는 살가운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끈끈했던 그래서 단단해보였던 20년의 시간은 단 한 순간에 파편화되었다. 자본의 냉정한 논리 하에 그동안의 뜨거웠던 살점들은 무참히 뜯겨져 나갔다. 그 곳에 더 이상 사람의 살‘정(情)’과 ‘오감(五感)’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차가운 공구들과 아직 뜯지 않은 컵라면, 나무젓가락, 그리고 라면 국물을 떠먹기 위한 스테인리스 숟가락만이 쓸쓸히 그리고 온전히 돌아왔다. 나를 보고 웃는 그 2살짜리 아이가 우연히 그리고 다행히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여전히 반복되는 어이없는 언니/오빠/형/누나들의 죽음을 보며 위와 같은 편지를 계속 쓰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밤 12시에 학원 숙제를 하던 와중에 말이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저 편지를 쓴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은 여전히 평범한 젊은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제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2살 아이든 초등학생이든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넓은 의미에서 사람 살만한 사회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를 위해 공직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여유가 있든 없든 이미 우리의 죽음은 그것과 무관하다. 여유가 있으면 있어서 죽고, 없으면 없어서 죽는다. 컵라면도 먹을 여유 없이 죽어라 일만 하다 실제로 죽기도 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는 여유를 보이다 죽음을 당하기도 하며 좋은 공기를 마시려다 되레 살균제를 흡입하여 죽기도 한다. 그러니 안씨가 흙수저의 처지를 모르고 금수저만 옹호한다고 비난하지는 말자. 안씨는 금수저 흙수저를 떠나 자연인(사람)에겐 관심 없다. 오직 법인(자본)의 성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노조가 생기면 회사 문 닫아야 한다고 말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람의 입 구멍과 콧구멍은 닫혀도 회사 문은 절대로 닫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안씨다. 구의역 사고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뒤에는 연대하지 못하는 무력한 노동을 강요한 폭압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트윗글에서도 보듯 안씨는 이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소수의 탐욕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수의 희생이라는 비인간적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심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4·13 총선 직후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로 등장한 안철수 정당(국민의당)이 적극적으로 처리하려 한 법안 중의 하나가 새누리당이 만든 파견법 개정안임을 아시는지. 노동하는 사람이 다 죽어 나가면 결국 회사도 문 닫지 않겠냐고 물어보면 그땐 입 구멍 콧구멍 걱정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는 로봇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라고 대답할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오감에 공감하지 못하고 저 따위 트윗글이나 날리는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에게 우리가 표를 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눈꼽만큼도 없다. 정치인이 할 일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몸과 살을 가진 존재로서 ‘쓰레기가 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실업/빈곤/질병/재난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오는 인생 리스크를 줄여주는 일이다. 이를 ‘사회안전망’이라고 하는데 ‘회사안전망’에만 주력해 온 안씨가 들어나 봤을지…
하긴 자신의 인생 리스크를 관리할 줄도 모르고 정치판에 뛰어든 철없는 안씨에게 무슨 기대를 하랴. 장차 정치판에서 죽게 될 안씨에게 미리 조문을 해본다.
“안씨, 당신도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미주*) 2014년 서울 지하철 1~4호선의 스크린도어 장애 신고 건수는 1만 2천여 건으로, 일 평균 30건이 넘는다고 한다. 서울 강북 49개 지하철 역사의 스크린도어 전체를 4명의 직원이 담당하고, 수리 시작 전에 다른 곳으로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수리하지 못할 경우 해당 직원이 불이익까지 감당해야 했다고 하니 2인 1조는 언감생심. 혼자 작업을 해도 항상 초과근무를 했고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다는데 이런 업무를 개인이 원해서 선택했다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공구 가방 들고 이 역사 저 역사로 불려 다니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850원 짜리 컵라면 하나 겨우 먹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정치인이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그런 자가 정치인으로서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며 그 정치인이 바이러스인지 백신인지도 분간 못하는 유권자들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치명적 결함이다. 안씨는 공직자로서 사회 전반적으로 병리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사회적 백신’을 만들어 보급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 스스로 바이러스가 되어 가고 있다. 아니, 애초부터 백신의 탈을 쓴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