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와 코스모스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조광제의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생각정원, 2012) 

 

철학, 80개의 기초개념들

1. 철학 개념들의 탄생

오늘 첫 강의에는 고대 철학에서부터 지금까지 힘을 발휘하는 중요 개념들을 살피고자 한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개체 발생은 수정란에서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계통 발생은 원시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 과정을 말한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대철학의 개념들로부터 오늘날 철학의 개념들로 발전해 온 것은 계통 발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낮은 수준에서 익힌 개념들로부터 높은 수준에서 익히게 되는 개념으로 발달은 개체 발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대철학에서부터 오늘날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순서에 따라 앞으로 80개의 철학의 기초 개념들을 살피고자 하는데, 오늘이 그 첫 시간이다. 오늘 강의의 큰 제목은 ‘철학 개념들의 탄생’이다.

 

 

1.1. 카오스

다들 알다시피, 카오스(chaos)는 코스모스(cosmos)와 대립된다. 그런데 카오스는 코스모스에 비해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카오스’는 헤시오도스(Hesiodos, 기원전 8-7세기 활동)의 <신통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카오스는 모든 신들이 태어나는 모태이다. 땅과 하늘, 어둠과 밝음, 낮과 밤 등 올림포스 이전의 시원적인 신들이 카오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카오스가 철학적으로 전이된 것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546)의 ‘무한자’(apeiron <아페이론>)라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무한자에서 모든 것들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apeiron’은 ‘peras’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한계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 근본 요인이다. 카오스를 흔히 ‘혼돈’이라고 하지만, 그 특성은 바로 무정형(無定型, formlessness)이다. 형태가 없다는 것은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식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형상’(形相, eidos, form)에 대한 설명을 통해 더욱 세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카오스가 혼돈된 것이기 때문에 무정형한 것이 아니라, 무정형하기 때문에 혼돈된 것이다.

무정형하다는 것은 그 속에 도대체 통일성을 갖춘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 구분되면서 그 나름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는 것이다. 카오스에서 통일성을 갖춘 것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카오스에서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에 따른 목적 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상상 가능한 모든 인격적인 존재(예컨대, 신들이나 천사 및 악마 등)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인들이다.

따라서 카오스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에서 빚어지는 모든 인격적인 존재들을 넘어선 ‘그 너머의 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을 전혀 허용치 않는 가장 최초의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바탕에 근본적인 것으로 깔려 있는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래서 카오스는 존재론에서 가장 심층의 깊이를 지닌 심연으로서 작동한다. 인간을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을 비롯해 모든 존재들을 안팎으로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론의 출발이다. 하지만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을 넘어선 곳에서 존재론이 출발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자신을 형성한 근원적인 바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 충동은 바로 존재론적인 근본 충동이다.

현대에 와서 이 충동은 사회역사적인 코드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 발가벗은 사물 자체 혹은 실재 자체의 영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카오스는 플라톤의 게네시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의 순수 질료,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물 자체,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순수 지속, 사르트르의 순수 즉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살,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의 일리야,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실재,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의 기관들 없는 몸 등의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그 원형의 역할을 한다. 그런 만큼 카오스는 존재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근본 개념이자,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을 부채질하는 근본 개념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술에서의 예를 들자면,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 중에 생겨난 ‘앵포르멜’ 유파를 들 수 있다. ‘앵포르멜’은 ‘inforemel’이라는 프랑스 말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형태 혹은 형식이 없는 예술 양식을 일컫는다. 1950년대 말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크게 융성한 것이 앵포르멜 회화 양식인데, 이는 대체로 물감 자체의 원형적인 질감 자체에 의존해서 우발성에 의존해서 그려내는 그림이다. 회화에서 앵포르멜은 도대체 그 어떤 질서잡힌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느끼는 막연함을 그 자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 바탕은 카오스가 아닐 수 없다. 카오스를 향한 존재론적인 욕망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앵포르멜 미술 양식인 것이다.

 

 

1.2. 코스모스

 우주 발생론에 의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생겨난다. 하지만 카오스가 따로 있고 코스모스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 것이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다는 것은 무정형의 상태에서 정형의 상태로 된다는 것이다. 정형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카오스 전체가 그 자체로 단 하나의 정형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의 카오스가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로 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코스모스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의 전체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일정한 본성(nature)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돌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돌의 본성을, 식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식물의 본성을, 동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동물의 본성을,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본성이라고 번역되는 ‘nature’는 자연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nature’는 라틴어 ‘natura’(나투라)에서 온 것이고, 라틴어 ‘natura’는 그리스어 ‘physis’(퓌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퓌시스는 본래 뭔가를 성장시키는 힘을 말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카오스가 퓌시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nature’ 즉 본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다른 것이 되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면서, 그 속에서 일정한 형태와 본성을 갖춘 각각의 것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각각의 것들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것들이 각기 나름의 퓌시스를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것들과의 작용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가까이 하고, 자신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멀리 함으로써 각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화와 상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조화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극마저도 크게 보면 조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일체의 것들의 조화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코스모스는 각각의 것들이 어떻게든 조화롭게 다 같이 유지되고 생장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정하게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카오스의 무정형은 달리 말하면 무질서이다. 코스모스에서의 정형의 조화는 달리 말하면 질서이다. 코스모스 속에서 각기 나름의 본성을 지니고서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이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그 모든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관계가 바로 질서의 총체인 코스모스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한편으로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체계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코스모스는 자연(본성, nature)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코스모스를 이루는 존재의 바탕(原質, arche)은 카오스이다. 꼭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원질의 내용이고, 코스모스는 카오스를 색다르게 구성하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다른 것이면서 같은 것이다. 원질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것이고, 그 형식에 있어서만 다른 것이다. 카오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고, 코스모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도대체 코스모스를 이루는 질서, 즉 형태 혹은 본성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형태 혹은 본성이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 즉 이데아들이 바로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카오스에 주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카오스 자체에서 발휘되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입장을 취한 인물이 바로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다. 그는 그래서 ‘카오스모스’(chaosmos)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카오스모스’는 들뢰즈가 우주론에 있어서 어떻게 반플라톤주의를 정립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되는 과정이 카오스 외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카오스 자체의 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 과정을 일컬어 카오스모스라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통치자들은 사회적인 코스모스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회적인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사회적 코스모스를 지향하게 되면 자칫 파시즘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개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카오스가 바로 혁명이다. 그러고 보면, 자유와 혁명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불행한 것은 혁명 이후 혁명의 주동자들이 오히려 강력한 코스모스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일반 대중들이 혁명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혁명에 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적절한 카오스적인 측면을 허용하는 사회적인 코스모스야말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코너를 새로 시작하려 합니다.  먼저 흔쾌히 출판책의 원고 사용을 허락해 주신 저자 조광제 선생님과 ‘생각정원’ 출판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 조광제 선생님의 원고를 바탕으로 한철연 회원 필자분들과 함께 공동 프로젝트 형태로 코너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한 개념어에 대한 원본을 바탕으로 여러 회원분들의 추가글 또는 논쟁, 토론을 함께 담아내는 나름 리좀 같은 개념어 코너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우선 아래는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생각정원, 2012)의 서문에 해당하는 조광제 선생님의 글입니다.

8996792926_1

 

프롤로그 :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안내서 

단 한 번 주어진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살려고 하다 보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육하원칙이라고 해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라는 의문사들을 앞세운 질문 형식들이 정착된 것은 이러한 궁금증이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근본적인가를 말해 준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북한의 수령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특히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누가 그러한 평가를 하는 것일까? 그러한 평가에서 핵심은 무엇일까? 언제부터 그런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디에서부터 그러한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떻게 해서 그러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을까? 왜 그러한 평가를 하게 되었을까? 특히 한반도 분단 상태를 견디고 있는 당사자인 우리 남한 주민들로서는 향후 이 사건으로 인해 생겨날 일들에 대해 첨예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사건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미칠, 군사 ‧ 외교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의 변화에 대해 과연 우리가 주도적인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건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런데 과연 ‘현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이 사건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말을 제대로 피력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건’이라는 말조차 엄격하게 파고들면 무엇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 사건의 향방에 대해 한반도 주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주체적’ 혹은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에 관해 정확하고 면밀한 논의를 할 수 있을까? 주체와 대립되는 ‘객체’ 혹은 ‘대상’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인데도, 이 사건이 미치는 국제적인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할 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국제적인 파장은 다시 한반도를 향해 영향을 미친다. 사건을 둘러싸고서 확산과 수렴이 순환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면서 동시에 다시 되돌아와 사건의 진원지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에 대해, 그 구조와 성격을 알지 못하고서 이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국제적인 정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구조’는 무엇이며,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수렴’은 무엇이며, ‘확산’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의 사건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일어났던 관련 사건들과 또 앞으로 일어날 관련 사건들에 의거해서 의미를 갖는다. 이때 ‘……에 의거해서’라는 말은 ‘……을 지평으로 해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즉 “하나의 사건은 여러 다른 관련 사건들을 지평으로 해서 의미를 갖는다.”라는 바꿀 수 있다. 이때 ‘지평’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이런 말을 피력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지평’(예컨대 한반도에서 동북아, 동북아에서 세계 전체)은 항상 그 속에서 문제가 되면서 의미를 갖는 ‘주제화된 대상’(예컨대 김정일의 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주제화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대상이 됨’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제화된 대상과 지평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을 모르고서는 이러한 말을 제대로 피력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피력하고 이해한다 할지라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다들 피상적인 설명과 이해를 통해 제대로 소통을 이루었다고 착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설명과 이해가 혼돈된 상태에서 제대로 질서를 갖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관련되는 기초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흔히 혼돈은 ‘카오스’이고, 질서를 갖춘 것은 ‘코스모스’라고 한다. 과연 ‘카오스’는 무엇이며, ‘코스모스’는 무엇인가? 이를 근본에서부터 파악하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그뿐만 아니라, 흔히들 말을 하고 그 말을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된 말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말을 한다고 할 때, 그 말이 제대로 기능하고 정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하고 이해하는 당사자들이 거기에서 활용되는 기초 개념들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고, 올바른 소통을 통해서 바람직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은 ‘설명’이 무엇인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바람직함’이 무엇인지, ‘효과’가 무엇인지, 또 ‘행동’이 무엇인지 등을 근본에서부터 알고자 한다. 심지어 ‘앎’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하나의 대대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된다. 비단 대대적인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사건도 제대로 깊이 있게 알고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굳이 나비 효과와 같은 사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대대적인 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본적인 법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인생은 결코 나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져 있으면서 계속 새롭게 다변화해 나가는 사회역사적인 전체의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영위된다. 나와 나 아닌 것들 간의 부단한 상호작용이 곧 삶의 역정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 즉 ‘자아’는 무엇이며, 나 아닌 것 즉 ‘타자’ 무엇이며,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어쩌면 인생을 논할 때 가장 근본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나이고자 하는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확대시킬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자기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이고자 할 때, 항상 자기가 아닌 것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기임을 전문적으로 ‘자성’(自性)이라고 하고, 자기가 아닌 것들을 ‘타자’(他者)라 하고, 타자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대타적’(對他的)이라 하고, 그러한 대타적인 관계를 통해 자기에게 형성된 것을 ‘대타성’(對他性)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자성과 대타성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기초적으로 작동하는 주요 개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 개념들 역시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나름의 존재, 즉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대타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할 때, 다른 개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여러 다른 개념들로써 하나의 개념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개념은 완전하게 설명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을 설명해 주는 개념들(설명항) 역시 다시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들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대략 설명했지만,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알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모든 사태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들을 통해서이고, 특히 그 인간들의 말을 통해서다.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바탕에 깔지 않고서는 그러한 말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폭넓게 이해하고 있으면 인류가 형성 ‧ 축적해 온 온갖 예술 문화적인 보고(寶庫)들을 나의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여러 장르의 문헌들에서 예사로 쓰이는 것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닌가. 그 문헌들의 맥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살지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은 인간 사유의 기초적인 뼈대를 형성하고 있기에, 어떤 사유를 하건 더욱 논리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힌다는 것은 모든 사유를 위한 기초적이면서 근본적인 두뇌 체조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혀 나의 개인적인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삶을, 나아가 전 인류적인 공동체의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하는 데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삶이 없이는 나의 삶이 없고, 나의 삶이 없이는 공동체의 삶이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바로 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소략한 이 책은 저자가 일해 온 <철학아카데미>의 2011년 봄 학기에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책의 문장들 중 실제 강의 상황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나오더라도 괘념치 마시길 바란다. 당시 강의에 참여한 많은 수강생들에게 특별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를 알고서 책으로 출판하고자 제안을 하고, 또 솔선수범해서 애써 멋진 책을 만들어 준 출판사 <생각정원>의 대표 박재호 선생께 마찬가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1년 12월 21일, 녹번동에서
저자 조광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