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10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이번에는 절판된 책 한 권을 소개 합니다)

자평(자기 책 서평) : 최종덕 지음,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휴머니스트, 2003

 

이번 서평은 오래 된 저의 책을 소개합니다. 제 책을 소개하는 것이 정말 겸연쩍습니다.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책인데, 15년 전에 잠깐 세상에 나왔다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사라진 책입니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서 과감히 자뻑 수준의 자평을 올려 봅니다. 책의 마지막 10장 부분을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장 제목은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입니다. 과학과 철학, 동양학과 서양학, 고전과 현대를 방황하던 저의 젊은 시절을 회고한 글이기도 합니다. 헤아려주세요

 

1. 그때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을 썼는데,

“요즘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뾰족이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협궤를 과감히 벗어나서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통합과학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2. 연속성을 찾아서

 어릴 적에 멋모르고 천주교 성당을 나가게 되었다. 사춘기의 고민을 풀 수 있는 빛을 교회로부터 받게 되었다. 선과 악의 경직된 기준을 심사하는 일보다 사랑과 용서를 교회로부터 배우게 된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하나의 문제에 부딪혔다. 기독교의 구원이었다. 기독교 구원의 기준은 아주 분명했다. 복잡한 교리 밑바닥에서 공통된 구원의 기준을 찾을 수 있었다.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바울 이후 ‘양심’이라는 보조준거가 나왔지만, 그래도 구원의 기준은 깨질 수 없는 성곽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고민 하나가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과 지금도 문명과 단절된 아마존 정글 속의 원주민들이 구원을 받기란 애당초 그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기준의 무차별 적용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그 구원은 2000년 전의 구체적인 존재자로서 예수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는 신이 이룬 최초의 창조에 대한 믿음의 성격이 더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를 믿느냐?”라는 물음보다는 “당신은 최초를 인정하느냐?”라는 물음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보았다.

 

최초에 대한 의구심은 조금이라도 철학적 반성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의 특권이다. 나의 존재를 묻다보면 어느새 최초의 할머니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듯이 시간적 최초성은 아주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이다. 나 역시 이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으며, 이제 대학선생이 되어 철학 강의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한 답 같지 않은 적당한 답을 떠들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도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있다. 그 뒤에 와서야 최초는 최후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내가 하도록 해 준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한 분은 인도철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전직 천주교 수사이셨던 할아버지이다. 교수님에게서는 시간적 최초만 따지지 말고 공간적 최초와 함께 보아야 하며, 인식의 최초가 존재의 최초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전직 수사님에게서 [대학]과 [중용]을 배우면서 최초는 최후의 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학문으로 접했던 고전물리학과 분석철학은 나에게 이 세계를 모두 산수算數와 조립의 대상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유럽철학을 접하면서 내가 공부한 산수와 조립방식은 존재에 접근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양자역학 공부는 존재와 인식이 서로 얽매어진 실재 세계의 가능성들을 나의 가슴 안에 담아 주었다. 이 때부터 나의 철학적 화두는 연속성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철학 공부의 대상은 인간이 만나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자연의 근원은 연속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공부한 생물학적 자연과 초미시의 물리적 자연의 모습은 적어도 연속성 자체였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자연과학적 대상이 아니라도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자연의 운동과 현상이 바로 연속성임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연속성의 모습을 인간의 한계인 인식의 차원에서 밝힐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서양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학문은 사이언스이어야 한다. 사이언스 연구 대상의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비연속적이거나, 혹은 대상이 비록 연속적이더라도 그 연속성이 비연속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연속적이 아니면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민은 이미 칸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칸트는 그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자나 자연철학자와 달리 연속성의 세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연속성의 세계를 인간의 언어적 담론으로 다루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오성의 성곽 안으로 비연속성의 세계만 편입시키고 연속성의 세계는 제외하였다. 이러한 구분이 서구 근대철학의 중요한 지위를 얻으면서, 서구에서 비약적인 학문발전이 있게 되었다. 칸트의 이러한 구분은 먼저 인식의 오차를 현저히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혼란을 없앨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상의 과학과 마음의 형이상학 양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매스컴에서 ‘디지털 혁명’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디지털과 대비되는 아날로그는 비연속성과 연속성의 대비와 유사하다. 흐르는 강물을 떠서 정확한 양을 누구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 우리는 잔을 이용하여 한잔, 두 잔 또는 세 잔을 떠서 전달한다. 강물이 잔물로 바뀌면서 아날로그의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정확한 정보 전달은 반드시 계량 가능한 단위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해진다. 단위화 되지 않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은 오차와 노이즈를 일으키면서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다. 반면에 디지털의 정보 전달은 한 개, 두 개, 세 개처럼 대상을 단위화 하고 나누어 셀 수 있어서 그 전달 효과가 매우 크다. 우선 단위와 단위 사이에 있는 어떤 존재의 양상은 이쪽 혹은 저쪽의 한 단위에 편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놓칠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정보 단위의 구분이 확실해지므로 노이즈 발생율을 현격하게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디지털 전환은 자연의 연속적인 아날로그 상태의 많은 것을 디지털 단위로 이전하고 변환하거나 혹은 왜곡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디지털 혁명은 “무엇인가 있으며,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서구의 전통적인 인식의 난제를 자연과학적으로 완성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나의 연속성의 화두란 이제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바꾸어 자연의 원래 모습으로 이전되고 변환되거나 혹은 왜곡되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노이즈가 가득 찬 아날로그라면 굳이 다시 아날로그의 패러다임으로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나의 철학적 화두란 노이즈가 없는(상대적으로 적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자연과학의 성과로 이어지게 하고, 인문학의 주요 담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 동양의 지리부도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우선 생물학적인 운동과 현상이 전통 물리학적인 인과율의 범주와 차이나는 것을 조망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서로 만나야만 해결되는 천체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대상계를 관찰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고대 자연철학의 진화론적 사유와 19세기 진화론의 발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또한 인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티의 흐름과 역사주의 철학의 조류를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지성의 철학이 아니고 시간이 유입되어 역사화된 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모든 관심의 테두리를 나는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며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양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존재의 연속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선 나는 동양철학에서 인식과 존재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인식의 유형은 존재의 양상에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 존재의 양상을 지배하는 존재의 원초성은 모든 존재에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초월의 존재라는 말 대신에 역사적 존재 혹은 진화존재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싶다. 동양적 의미의 존재는 서양적 의미의 실체론적 존재와 달리 시간을 머금은 역사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역사 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나는 역사 존재 자체의 자화상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양론이다. 물론 두 가지 방식도 자연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언어 가운데 한번 핀 꽃은 지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을 인간 행태의 도리에 비유하여 말할 때 그 논거는 전적으로 자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주의는 자연의 운동과 인간의 운동의 동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동양학의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결국 동양의 자연주의는 역사 존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태도,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행태의 방식이 서로 연속적임을 말하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대학원 시절 주렴계나 장횡거를 배우면서 대단한 우주 해석이 그들의 주제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장횡거에게서 개별자의 뜻을 파악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려운 것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개별자의 정체성을 따지는 일에 익숙한 라이프니츠의 시각으로 볼 때 장횡거는 하나의 정서적 반란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적 순서를 무시하고 그 뒤에 장자를 만나고 보니 참으로 주렴계 이상의 대우주가 그려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 반란은 주자학을 풍월하면서 다시 차분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대부분의 도학 풍의 논의가 광대하게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우주의 책을 쓰고 있어서 무척 난해하지만, 반면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엄청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냉철한 학문의 칼을 들이대면서 조금씩 정리하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벌써 학문과 수양의 이중적 갈등이 드러난 셈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실상 동양철학을 수양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학문의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을 풀어줄 만한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동양철학의 학문은 수양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서양과학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나로서는 절실하게 다가오지를 않았다. 수양을 빙자하여 학문의 엄밀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동양학의 문외한이자 초보자의 의심어린 어설픈 생각 때문이었다. 이는 공손룡을 만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하게 나왔다. 오래 전 논리철학에 심취해 있던 중에 동양에서 서양의 논리와 비슷한 장르를 찾다가 문자적 차원의 유사성에 끌려 명가名家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가를 비판한 장자처럼 혜시 역시 논리학이 아니라 광대한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곡절을 겪으면서 유가나 도가, 또는 불가의 이야기 안에는 연속성의 주제가 분명하게 들어있음을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循環無端 故所在爲始也”라는 말은 대학원 시절에 공부의 주제를 잡게 해준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과연 최초를 인정해야 만 존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문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나는 최초와 최후를 상정한 서양과학의 선형적 사유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역사적 상황의식은 분명한 것 같다. 일종의 사회 구원을 찾는 길이라고 본다. 당시는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를 않았고 사회적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개혁의 기치를 높이 세운 것 같았다. 서민이 학문에 접근할 수 없었던 사회적 상황에서 물론 그러한 노력은 관리 주도로 이루어 진 것 같았다. 그리고 관리의 개념은 현직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민가에 흩어져 있는 무명의 학자인 잠재적 관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민의 생활태도뿐만이 아니라 임금의 도리와 임금과 서민간의 관계까지 다루면서, 삶에 녹아드는 실질적인 지표를 의도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지표는 추상적이거나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대 유럽사회라면 다른 상황을 낳았을 것으로 본다. 유럽이라면 이러한 혼란상황에 직면해서 나올 수 있는 담론은 아마도 종교적 교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인은 철저하게 구체적인 사람의 덕목을 제시하는 사회화 형성에 관심을 기울인 것 같았으며, 내세를 따지는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에 보면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상반시켜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말했다. 그러나 유가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조차도 이를 구하듯 실용적 적극성을 발현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였다. 물론 도가는 그것조차도 부정하였다.

 

이렇게 제자백가 시대의 관심에 대하여 아마도 어떤 이는 사회 구원에 앞서 개인 해방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어떤 이는 사회구성체 조직을 위한 개인의 역할에 관심을 두어 판단하기도 한다. 어쨌든 도가든지 유가든지 그것이 사회철학의 범주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큰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호감은 조선시대 정도전의 삼봉집을 읽으면서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도전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 필요성에 의해 불교는 단지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어 척단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에 새로운 유교가 신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학적 상상을 하였다.

 

이제 이쯤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일이 생겼다. 동양철학이 개인의 수양론인가, 아니면 우주론적 본체론인가, 아니면 사회․정치철학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수신제가를 한 뒤에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다는 권력 유지의 차원에서 보는 수직적 해석이 아니라, 수신제가를 하면서 동시에 치국평천하도 할 수 있다는 수평적 입장을 취한다면 위의 논의 구조가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미아리 고개나 계룡산 계곡에 있는 많은 점집에서 ‘동양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주역을 내세우며 장사를 하는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주역은 인간의 대소사를 점치는 책이 아니라 원래 하늘의 운행 이치를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동양철학의 기저에는 하늘의 운행방식과 인간의 운행방식이 동형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 하늘의 운행방식을 그린 주역을 가지고 그 운행방식을 따르는 인간의 대소사를 점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점치는 집에서의 주역의 구실을 너그러이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국인이 본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를 알아야 한다. 서양의 하늘은 땅을 낳고 법칙을 생산한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머나먼 곳이다. 이에 비하면 동양의 하늘은 땅으로부터 귀납된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양의 하늘은 땅의 모든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서양의 하늘은 2500년 전부터 인위성이 가미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하늘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동양의 하늘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하늘이다. 맹자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하늘이 내 몸 안에 들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의미를 통해서 맹자 이후 이천년이나 지났는데도 맹자와 불교가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양명학의 역사적 배경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쨌든 하늘이 내 몸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땅의 숨겨진 유전자를 갖고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아니라 장자가 말한 ‘물극필반(物極必反)’하여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 것이 땅인지를 모르게, 그리고 먹고 마시고 부부의 잠자리를 하면서 어느덧 하늘이 땅 속에 들어있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중용의 지적처럼 그러하다.

 

오래 전 돌아가신 동양철학계의 큰 스승, 배종호 선생님이 미국 여행을 다녀오신 이후였다. 그 때 나는 대학원생이었는데, 배종호 선생님께 이상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다. 우리의 풍수지리 해석이 그랜드케년 지역에도 들어맞는지를 여쭈었다. 선생님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역시 지리적인 풍토의 차이가 고유의 사상을 유발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땅의 생산자가 아니라, 오히려 땅이 하늘의 생산자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서양철학이나 서양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동양철학에 대한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공부를 더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뿐이다.

 

4. 서양이 이름붙인 동양

이후 나는 독일에 유학 가서 동양철학을 잊고 지냈다. 동양철학에 관한 책을 읽기보다는 힘든 유학생활을 달래기 위하여 틈틈이 붓글씨를 쓰곤 하였다. 재활 포장용 종이에 ‘인(仁)’자를 수백 번이나 썼을 것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뜻도 잘 모르면서 부지런히 암송하였다. 이때 나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동양철학이 갖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우리의 현실은 동양철학이 제시하는 수양론과 엄청난 괴리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원래 알고 있었지만 새삼 느낀 것이라고 해야 옳다. 제일 먼저는 동양인 우리가 서양보다 더 서양적이라고 느꼈고, 역설적이지만 많은 동양적이라고 하는 것들의 표제어는 서양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 많다고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동양학에 대한 열기가 크게 일어났지만 그 열기의 실상은 비동양적인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첫째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왜곡된 동양학 연구태도라고 본다. 둘째 서구문화가 여과 없이 직수입되면서 생긴 학문의 시녀현상을 든다. 셋째 서구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 내는 국수주의로 인하여 고전문헌에만 매달려 훈고학만 하면서 발전적 비교해석과 전통의 창조를 두려워하는 잘못된 관행을 든다. 넷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실천의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아래서 잘못된 선비의식을 정당화시키는 편의주의적 상아탑의 가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둘째 문제와 연관을 갖는 것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대비시켜 이를 무턱대고 이성과 반이성으로 대치시켰던 과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이분법적 태도가 횡행하고 있는 듯하다.

 

한때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의 연구 자세와 우리를 비교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너그러이 용서해준다면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소한 논문을 쓰려면 남이 해놓은 소주제 전개와 주장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남이 해놓은 연구결과를 관심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혹은 기존의 연구결과에 일목연한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최근의 학계풍토로 보아서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글들이 우리 자신이 쓴 글보다 동양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안내구실을 더 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마음 구석 한편에는 아직도 ‘서양 사람이 하면 얼마나 할까’라는 조소 어린 생각을 해보지만 실제로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책을 접하다 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풍선이었나를 깨닫게 된다. 나 같이 비전문가나 일반인 혹은 동양학 입문자에게 과연 한국의 기존 동양학 연구자는 과연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서양의 동양학자의 강점이 있는 듯하다. 나무를 보는 대신에 멀리서 숲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절대로 서구의 동양학 연구자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래 전에 동양철학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다. 독일에서 초청된 독일 한국학자가 발표를 하는데 내가 독일어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연구발표의 논평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한국어 구사를 했기 때문에 나의 필요성은 별로 없게 되었다. 어쨌든 그의 남명 관련 연구논문은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하나 중요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그의 남명 관련 논문의 주제는 한국의 학자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분야였다. 그리고 논문의 전개 방법론이 매우 창의적이었음을 느꼈다.

 

5. 동서고금의 시선 –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요즘(15년 전) 나는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되어 있다.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학문 외적 문제이기 때문에 더 심각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 중에서 다섯 번째 문제와 연관되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은 서양철학 그것도 과학철학하는 사람이 왜 갑자기 한의학이나 동양철학을 건드리고 있냐는 비난 어린 질문들이다. 한문이나 제대로 하느냐하는 보이지 않는 비난일 것이다. 약간은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나는 한문을 읽는 수준이 미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동양철학 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주 전공은 자연철학이고 자연철학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동양의 자연문제를 건드릴 뿐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비난은 동양과 서양을 획일적으로 갈라놓는 이분법적 사고라고 본다.

 

나는 동양과 서양이 반드시 만나야만 우리가 안고 있는 역사적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먼저 반드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차이의 부각에만 그치면 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 아류에 머물고 만다. 차이의 정립은 종합을 위한 과정적 단계일 뿐이다. 과정을 거처 우리는 방법론과 문제의식까지를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서양의 자연철학과 동양의 자연철학을 종합하는 듯이 보이는 작업은 거창한 학제간 연구이기보다는 한 논문의 작은 구성요소로서 인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동양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은 서양철학의 역사적 흐름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철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도 동양철학을 다른 전공으로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현상학 수업을 수강한 후에 하버마스 수업을 수강하는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본다. 1998년쯤인가 동서양 철학하는 소장학자들이 모여서 더불어 공부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방이지(方以智)의 『물리소지』(物理小識)를 이현구, 김교빈, 박석준 선생님 등과 같이 읽은 적이 있었다. 동식물의 생태학적 자연학을 담아 낸 책인데, 동양철학의 시선을 넓게 해준 정말 고마운 독서모임이었다. 동양에도 서양이, 서양에도 동양이 내재해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

 

요즘(15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뽀족히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이름을 과감히 벗어나서 대화의 글쓰기에 나서야 한다. 나아가 서양철학자들도 동양학에 대하여 철학적 성찰과 과학적 방법론이 결핍되어 있다는 비판도 중요하지만, 이제 우위비교가 아닌 동양의 철학적 소재나 방법론에 도전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공부하는 사람, 그 개인에게만 부과될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관심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풀이를 찾기보다는 학자군의 만남, 학문간의 협동이 절실하다. 그래서 동서양의 경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묶이지 않으며,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그런 공부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2003년 나온 책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서)

소소하지만 자유롭게 살자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 8

 최종덕(한철연, 자연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8

 

 

소소하지만 자유롭게 살자 : 마르크스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1841)를 읽고

오늘의 책 : 칼 마르크스/고병권 옮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맑스 박사 학위 논문, 그린비출판사, 2001

 

 

 

 

 1. 동역학적 원자론

 이 책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는 마르크스의 박사학위논문(1841)을 번역한 것이다. 그때 마르크스의 나이는 23살 이었다. 마르크스는 한창 헤겔을 몰두했을 때였지만 헤겔을 통해서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기초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고대 희랍의 원자론자 루크레티우스를 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소위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를 읽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를 통해서 고전 원자론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원자론뿐만이 아니라 선험적 형이상학의 허구를 꿰뚫어 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 계기는 데모크리토스와의 비교를 통해 드러났다.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했다. 간단히 말해서 데모크리토스를 형이상학적 원자론으로 본다면 에피쿠로스를 실존적이면서도 동역학적인 원자론으로 마르크스는 파악했다. 그런 마르크스의 원자론 공부는 그의 전 철학에 깔리게 되었다.

 

 에피쿠로스의 진짜 의미를 이 책을 읽어가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원자론의 철학사적 의미를 ‘기계론’, ‘환원주의’, ‘결정론’, ‘요소주의’라는 딱딱한 인식론의 존재론적 배경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이 서평자의 평소 수준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한 단계 겨우 넘어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내가 알고 있었던 기존의 원자론과 달랐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데모크리토스의 그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보통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산업혁명 이후 오늘에 이르는 미국 중심의 물질주의 혹은 물질만능주의를 일컫는 상업화된 유물론이 있고, 세계존재의 물질적 기초인 존재론적 유물론도 있을 것이다. 서평자는 이런 유형의 유물론을 꼭 구분하려 한다. 이런 구분은 실은 매우 통속적 분류여서 마르크스 전문가들을 이런 구분을 싫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전공자 그룹과 다르게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여전히 오해되거나 일부러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어서, 우리들은 그런 통속적 구분을 더 떠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 전공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것도 실은 존재론적 유물론의 토대 위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물론이라는 말 대신에 원자론이라는 말을 쓸려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로서 존재론적 혹은 철학적 원자론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 토대는 데모크리토스의 존재론적 원자론이 아니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임을 인지한 것이 마르크스였음을 잘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겉으로나 유물론이지 존재의 내재성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i)운동하지만 운동의 양식은 불변이며 ii)원자 외의 진공상태를 갖지만(원자는 허공을 떠다니지만) 원자 자체는 독립적이며 iii)원자끼리 충돌하지만 여전히 결정론적이며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존재의 겉보기 인식론적 양상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플라톤의 이데아가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 사이의 존재의 존재론적 양상은 질적으로 동등하다고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말하는 원자는 물질적이지만, 그 물질성은 경험적 물질성이기보다는 선험적 물질성에 가깝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근대과학 혁명 이후 기계론과 결정론 그리고 환원주의에서 말하는 세계의 기초단위 역할로 고착되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마르크스 전반에 깔려 있는 <변동의 철학>과 어울릴 수 없었다. 다행히 마르크스는 젊은 나이에 일찍 에피쿠로스를 만났다. 에피쿠로스를 통해서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유지하면서도 미소의 비감각적 대상에 대한 경험주의와 동력학적 변동성의 철학, 그리고 일탈과 자유의 윤리학을 더 깊이 배울 수 있었다. 마르크스에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기계론적 유물론의 제약을 벗어나 변증법적 유물론을 잉태시킬 수 있었던 철학적 원천이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논거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변증법적 역사의 종착지를 설정한 목적론의 철학으로서 마르크스의 철학은 서양고전철학의 존재론적 맥과 같이 한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의 에피쿠로스 공부를 접한다면 결코 비판의 정당한 논거로 될 수 없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를 공부한 초기 마르크스의 철학은 그런 목적론과 정반대의 세계관을 말한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결정론과 기계론 그리고 유토피아론과 목적론을 타파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에피쿠로스를 강렬히 독서한 것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Democrite_Leon-Alexandre_Delhomme_MBA_Lyon

 

2. 에피쿠로스 철학의 구조: 원자론에서 자족적 자유로움으로

에피쿠로스 철학은 크게 인식론과 자연학 그리고 윤리학으로 나뉜다.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은 지각경험과 감각의 인식을 다룬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자연학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전혀 다른 관점에서 천체와 사물 존재론을 다루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윤리학은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부문으로 소위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행복론을 말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2천 년 이후 에피쿠로스 행복론 철학의 결합구조를 한 눈에 알아본 철학자가 바로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 원자론과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차이를 공부하면서 에피쿠로스 자연학이 데모크리토스의 결정론과 선험론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자유론과 행복론으로 연결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이나 원자론을 알려면 이 세 영역이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수학적 위치를 알려주는 점의 존재와 이동거리를 알려주는 선분적 존재를 지시한다. 이런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양상은 정역학적 원자로 표현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에서 정적인 원자는 경험으로 인식되는 지각 범위를 초월해 있다. 반면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동력학적 존재이며, 이는 수학적 위치만 알려주는 점의 존재도 아니고 이동거리만 알려주는 선분적 존재가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크기’와 ‘모양’ 외에 ‘무게’를 갖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원자의 지각적 성질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이다. 에피쿠로스의 인식론to kanonikon은 데모크리토스와 다르게 감각에 기반한 경험주의의 기초이다.

Epicurus

 

에피쿠로스 원자가 데모크리토스 원자와 다른 핵심적인 양상의 하나가 바로 무게를 갖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원자의 질량성은 원자가 속도를 가질 경우에만 의미를 지닌다. 속도는 변화하는 원자운동, 즉 운동변화량을 통해서만 인식가능하다. 여기서 인식가능하다는 것은 에피쿠로스 인식론의 요지이다. 원자의 지각적 변동은 원자의 정해진 운동궤도를 탈선(clinamen; Deklination) 할 때 생긴다. 데모크리토스와 다른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핵심은 원자의 일탈성에 있다. 클리나멘clinamen의 일탈성이야말로 데모크리토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기반 자연학과 경험주의 기반 인식론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한다. 클리나멘의 일탈적 운동성은 에피쿠로스 철학으로 가장 잘 알려진 쾌락주의의 존재론적 토대이다.

에피쿠로스 철학 전반

         

인식론

to kanonikon

 

자연학

to physikon

 

윤리학

to ětikon

         
  ♦ 감각주의

  ♦ 선험주의 부정

  ♦ 직선에서 일탈한 원자 편위

♦ 결정론과 목적론이 배제된 원자운동

  ♦ 자유의지

♦ 자족함autarkeia이 가장 큰 선이며, 자족의 결과가 자유

 

 에피쿠로스에서 원자의 일탈은 데모크리토스 원자의 결정론적 운동방식을 깨는 주요인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핵심을 간파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운동은 그것이 비록 운동성에 놓여있지만 외부의 절대적 존재자에 의해 통제되는 일종의 결정론적 운동성으로 파악되었다. 이 점은 상대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원자운동이 결정론 범주에서 벗어난 것, 즉 자유운동이 개입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일탈성은 절대적 외부존재자의 통제를 벗어난 변동의 운동이다. 그런 일탈의 운동은 외부자의 존재를 설정하지 않고 원자 자체의 자족성autarkeia에 기인한다고 마르크스는 추론하였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필연성의 원자운동은 존재의 외부적 근거를 전제하며 이는 필연성의 세계를 낳으며, 이로부터 윤리적 절대배후를 필요로 한다. 우연성Zufall은 외부적 근거를 전제하지 않으며, 단지 자기주체성과 내부적 자기동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마르크스의 추론결과는 서평자로 하여금 마음 설레게 하였다. 선험성 부정에서 일탈의 자유로, 나아가 신이건 이데아건 간에 관계없이 외부 존재자를 굳이 설정하지 않아도 되는 윤리적 주장으로 이어지는 철학적 논증은 서평자로 하여금 청년 마르크스를 새롭게 조우했다는 뜻이다. 유물론의 자연철학이 행복한 삶의 윤리학을 열어주는 결정적 계기라고 생각들었다.

 

행복하기 위하여 신까지 거들먹거릴 필요 없다. 행복하기 위하여 결정적 운명을 숨겨놓을 필요도 없다. 에피쿠로스 윤리학을 쾌락주의로 부르는데, 이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즐거움을 최대로 하자는 최대행복의 원리로서의 근대 공리주의 명제와는 다르다. 에피쿠로스의 행복은 일시적 행복감이나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삶의 지속적인 자유로움에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이런 지속적 자유의 향유를 통한 행복은 헤도네hedoně로 표현된다.

 

 헤도네는 공허한 선험주의를 벗어나서 구체성의 행복한 삶을 중시한다. 헤도네는 정적인 불변의 세계가 아니라 변화의 원자를 파악하는 변동의 시선으로부터 생겨난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시선을 성찰이라고 말했다. 성찰은 신을 마주하는 신비주의적 체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의 현실을 마주하는 경험주의적 인식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헤도네는 무작정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인식(지혜)을 통해 얻어진다는 뜻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인식을 실천적 지혜, 프로네시시pronesis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프로네시시를 통해 헤도네에 이른다고 한다.

 

프로네시시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개인능력과는 전혀 다르다. 프로네시시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꾸준히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가만있으면 우리 생각 안에 망상이 조작되고 기만이 들어차며 당장의 욕망에 허우적거린다. 이런 바닥감정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다. 한편 우리는 이런 바닥감정을 조심하고 조절하려는 수치심도 가지고 있다. 바닥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남에게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마음이 바로 수치심이다. 바닥감정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공유하는 것이 우리들의 또 다른 잠재성이다. 그런 수치심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풀어진 쾌락을 수치심이라는 필터를 거쳐 조절해가는 연습을 우리는 할 수 있다. 이런 사유훈련과 연습과정을 에피쿠로스는 nephone logismos라고 한다. 즉 기만적 욕구충족이 아니라, 망상의 공허한 의식을 제거하여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삶을 말한다. 이렇게 세계는 나를 자극하며 나는 연습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를 수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의 자유이다. 자유는 세계와 자아의 상호성에서 나온다.

 

마르크스는 세계와 의식이 서로를 반영한다는 방법론을 통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를 보았다. 마르크스는 세계와 자아의 상호성의 창문을 나중에 반성형식Reflexionsform이라고 불렀다. 반성형식에는 의식과 실재간의 상호성, 사유와 존재와의 상호성이 포함된다.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운 헤도네”를 어떻게 해야 누릴 수 있나? 간단한다. 두 단계를 거치면 된다. 첫번째로 권력과 명예를 개인의 욕망 안에 가두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된다. 권력과 명예를 무조건 버리라는 말과 다르다. 더 간단히 말해보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남에게 의존하는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그 대신 나 자신이 자신에 자족하는 권력과 자신을 존중하는 명예를 찾아가면 된다. 남에게는 소소한 듯 보이지만 나에게 소중한 그런 행복한 삶을 에피쿠로스는 강조한다. 그런 행복을 헤도네라고 했다. 헤도네에 이르는 두 번 째 단계로서 i)주술적 신비주의와 ii)미신적 종교의 그림자, 그리고 iii)결정론적 운명론과 iv)조금만 참으면 다 잘될 것이라는 정치권력의 막연한 유토피아론 나아가 v)현실을 기만하고 사실을 도피하는 사회적 목적론, 이런 류의 개인적 현혹을 냉철한 눈으로 거부하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르크스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의미를 소중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 에피쿠로스를 새롭게 조명했던 170년 전의 마르크스의 공부법은 고전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도덕적 몰락과 공공성 파괴를 훨씬 초월하여 기만과 분열, 망상과 집착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고전에서 끄집어내어 현실에 맞춰 당장 실천해야 할 것이라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책 내용 중에 땅기는 부분만이라도 한 번 읽어 보실 것을 강하게 추천한다. <끝>

마르크스와 엥겔스

꼰대가 꼰대인 이유, 그리고 신나는 새해를 위하여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 7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7

 

오늘의 책 : 심의용 지음, <마흔의 단어들>, 도서출판 동녁, 2016 에 대한 서평

 

이 서평은 서평 없는 서평이다. 그냥 저자가 말하는 책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어서 정리된 표와 그림으로 만들었다. 독자께서도 알아서 이해해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글씨가 잘 안 보이면 손가락으로 주욱 늘려 크게 보시기를 권유합니다.)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표와 그림들을 나열했는데, 글쓰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나의 속내를 보이기 싫어서 이렇게 만들었다. 그래도 두 세 마디 추가로 붙여보고 싶은 꼰대의 충동이 있다. 그 하나는 만약 이 책의 부제를 내 맘대로 다시 붙일 수 있다면 <외로움을 이기려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그냥 안고 가기> 로 하고 싶다. 두 번째로 마흔의 의미가 좀 넓어졌다는 점이다. 요즘 기대수명이 벌써 80이 훌쩍 넘었는데, 그 뜻을 다시 풀어본다면 공자맹자 시대의 60이 요즘 90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기 나이에서 2/3 비례로 줄인 숫자로 살아가도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보자. 같은 마흔(40살)이라도 결혼을 못해 결혼을 애절히 원하는 노총각은 스스로 2/3로 축소된 27살로 생각하면 좀 더 느긋해 질 수 있다.(계산법: 40*2/3=27). 쉰 고개에 접어든 49세의 당신이 더 젊었을 때 못해보고 지나온 시절을 안타까워한다면, 그런 당신도 32살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 느긋해 질 수 있다.(계산법: 49*2/3=32). 계산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 심의용은 책의 본문에선 언급한 적이 없지만 유독 책날개에서 강조한 말이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왔다. 즉 “심입천출”深入淺出이라는 말이다. 나도 이 말을 평생 안고 사는데, 나는 이 말을 ‘깊이 공부를 하지만 공부한 것을 드러낼 때는 쉽게 하라’는 뜻으로 새기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공부가 깊음을 직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쓰기는 쉬우면서도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포스를 갖고 있다.

이 책 <마흔의 단어들>, ‘섹스’, ‘우월감’, ‘진실’, ‘자기기만’, ‘정직함’, ‘죽음’, ‘음흉함’, ‘무관심’, ‘자책감’, ‘냉소’, ‘사랑’, ‘즐거움’, ‘나르시시즘’, ‘행복’, ‘미각’, ‘무감각’, ‘균형감’, ‘애증’, ‘싸움’, ‘몰락’이라는 단어 하나하나가 실은 단어가 아니라 저자의 신체기관 하나하나였다. 그의 신체기관마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근접거리에서 나는 이 세상의 존재살이를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 폼나는 위선의 권위를 끝까지 부여안고 살려는 이들은 이 책을 읽을 필요 없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 또한 이 책은 박근혜 재앙의 동물행동학적 원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수효과를 제공한다. (e)시철의 독자와 함께 신나는 2017년을 한번 누려보자. <끝>

리제 마이트너, 여자가 과학을 한다구?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2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2

오늘의 서평 책
: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이필렬 옮김), 리제 마이트너, 한 번도 인간적 면모를 잃은 적이 없는 여성 물리학자, 양문출판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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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리제 마이트너인가

여성 최초의 핵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1878-1968의 삶을 새롭게 조명한 국내 번역서를 보았다. 애당초 나는 몇 년 전부터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리제 마이트너라는 여성 과학자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그의(주1) 자서전 등을 읽고 메모해 두곤 했다. 그런데 마이트너의 자서전을 읽던 중 유럽에서조차 마이트너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 나는 놀랐다. 그에 관한 몇 권의 자서전과 인터넷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놀란 것이 있는데, 마이트너의 저서전 중 한 책이 과학사가이신 이필렬 교수에 의해 <한번도 인간적 면모를 잃은 적이 없는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라는 제목으로 이미 6년 전에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꼼꼼히 읽을 수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1)  ‘그’라는 3인칭 지시어를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합니다. 원래 우리말에서 ‘그녀’라는 3인칭 지시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리제 마이트너

리제 마이트너

2. 여성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볼츠만을 만나다.

마이트너는 1878년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 양쪽 혈통으로 내려온 전형적인 유대인이다. 그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유대 전통의 삶의 방식을 요구하지 않고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로 자식들을 키웠다. 8남매 중 셋째인 리제는 언니들의 말을 잘 들으면서도 동생들을 잘 돌보는 깊은 우애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오지리 비인은 다른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는 초등학교만 허락되고, 김나지움 등의 고등교육 입학은 불가능하였다. 그 이후 프랑스어 교사학교에서 공부도 하였지만 결국 그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수학에 큰 자질을 보인 리제에게 개인교육을 시켜가면서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다행히도 그 와중에 비인 황제대학 입학이 여성에게도 최초로 허락된 큰 변화가 있었다.(1899년, 독일의 경우 1900년) 대학에 합격한(1901년) 마이트너는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1906년) 마이트너는 볼츠만 교수로부터 물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한자신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여정의 방향을 얻기도 했다.

“모든 문화와 기술의 진보로 인간이 더 행복해졌을까요? 이것은 사실 까다로운 질문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행복은 각자 자신의 가슴 속에서 찾고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28쪽)

라이프치히 대학 초빙교수를 마치고 다시 비인으로 돌아와서 행한 인사말 중에서 행복에 대한 볼츠만의 언명은 마이트너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때부터 이미 마이트너는 과학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볼츠만 교수는 힘들게 대학에 입학한 두 명의 여학생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성적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볼츠만 교수는 마이트너의 수학적 재질을 인정하면서 물리적 세계의 근원에 대해 호기심을 갖도록 마이트너를 독려하였다. 볼츠만은 통계역학을 정립하였다. 독립적인 기본 입자들 간의 운동 역학은 원리적으로 설명가능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통계적으로 해명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볼츠만의 통계역학은 물리학 발전의 급진적 계기였다. 통계역학은 물질의 기본입자가 독립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본입자란 물질의 원자를 말한다. 원자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를 뜻했다. 원자의 세계까지 파고들어가는 이유는 물질의 특성을 밝히기 위한 환원주의적 방법을 찾으려 함이다. 물질의 특성은 그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특성을 밝힘으로써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론은 철저히 환원주의를 논증하고 검증하기 위한 근거가 된다. 여기서 환원은 대상의 특성을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방법론적 태도이다. 즉 원자들의 합은 대상 물질 전체가 되고 대상 물질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물질을 분해하면 원자들의 존재로 다시 분해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Weizaecker, S.43-47) 그런데 통계의 기본 설명방식인 확률은 환원과 반대로 부분과 전제의 환원론적 설명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어떻게 환원주의와 확률론이 만나는지를 반드시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열역학은 통계역학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볼츠만의 가장 큰 과학적 성과 중의 하나는 열역학적 평형을 향해서 모든 물질에너지가 이동한다는 사실에 착안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도 부른다. 아시다시피 근대 열역학의 전환은 열 개념을 물질 입자들이 충돌에너지의 통계적 합으로 정의하는데 있었다. 통계적 합이란 개별의 입자 즉 분가 덩어리가 분자끼리 혹은 벽에 충돌할 때 동일한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볼츠만의 탁월한 재능이 드러나는데, 이는 곧 물질의 원자론적 사유방식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 여기서 원자론적 환원주의와 1023개 수 이상의 무한에 가까운 물질입자들의 충돌에 의한 통계역학적 에너지 총합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물리세계의 원자론적 형식은 철학적 선험존재의 사유구조와 밀접 되어 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확률에 대한 사유는 경험과학적 실험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이트너는 볼츠만 교수에게 4년 이상 수업을 듣는 과정에서 이러한 양 날개의 사유구조를 심도있게 배우게 되었다. 이후 마이트너는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자신의 장래를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스승 볼츠만 교수가 죽었다. 마이트너도 잘 몰랐던 오랜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이다. 마이트너는 갑자기 방황하게 되었다. 놀라기도 했지만 인생과 지식이 삶의 바다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현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마이트너는 좀 더 강해지기로 했다. 속으로는 학문적 냉정함과 인생의 주관성이 뒤섞여지는 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이제 비인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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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별의 강함을 이긴 성실함의 부드러움

지금까지 오스트리아에서의 마이트너는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지장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로 이전하면서 마이트너는 스스로 마음에 드는 지적 탐구는 수행했지만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눈에 띄게 느꼈다. 먼저 마이트너가 존경했던 퀴리 박사에게도 연구 수행 신청을 위한 편지를 썼으나 거절되었다. 여자로서는 너무 힘든 실험실 일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화학과 물리학이라는 학문의 경계에서 퀴리 박사가 마이트너의 전문분야를 보기에 자신과 같은 화학 분야가 아닌 물리학 분야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 있다. 마이트너는 독일의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막스 프랑크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당시 이름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전신이었던 대학 실험실로 연구원 자리를 찾아갔다. 그는 막스 플랑크 교수를 직접 찾아가서 그의 수업을 참가하고 싶다고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내가 아는 막스 플랑크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질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막스 플랑크는 마이트너를 여자라는 이유하나로 거절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로서 진보적 성향의 플랑크 같은 사람도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이트너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이트너는 자신의 강한 학문적 열정과 전문분야에 대한 경력을 막스 플랑크에게 전달했다. 플랑크는 마이트너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마이트너는 30년 가까운 베를린의 학문적 역사를 갖게 되었다. 마이트너가 보기에 플랑크는 비인의 스승 볼츠만과 다른 성격을 지녔다.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그의 품성은 오히려 지적 신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지로 여겨졌다. 플랑크는 상대적으로 마이트너에게 큰 장벽이 아니었다. 베를린 대학 실험물리 연구실로 소개받으면서 성적 차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마이트너와 운명적인 만남이었던 오토 한 박사와의 공동 실험실이 지하목공소에 겨우 임시로 차려졌다.(1907년) 본 실험실에 여자 연구원을 절대로 들여놔서는 안 된다는 피셔Emil H. Fischer 연구소장의 엄명 때문이었다. 일년 반 만에 피셔 소장은 그 임시 실험실에 여자 화장실을 짓게 해주었을 정도다. 그제서야 남학생 전용 실험실에 마이트너의 출입을 허가해 주었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피셔 소장이 변했을까? 여성에 대한 편견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초라한 지하 공간에도 불구하고 마이트너의 조잡한 지하 실험실에서 더 많은 연구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이미 마이트너는 원자 붕괴 시의 원자핵 분열을 예언한 방사선 붕괴물질을 찾아내었을 정도로 마이트너의 연구진척은 상당했다. 빈약한 실험실 여건이었지만 이러한 마이트너 연구논문의 질적 수준 역시 탁월했다. 피셔 소장은 갑자기 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자 화장실을 짓게 되었다는 말이다.

1912년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개소하면서 좀 더 안정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소위 1차세계 대전이었다. 마이트너는 연구실에만 있는 냉동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위해서 방사선 담당 간호사로 자원했다. 뢴트겐 검사원으로 일했다. 2년 가까이 전쟁터에서 일하면서 그는 독일의 독가스 사용의 현장을 목격했다. 독일은 이미 1차 대전 때부터 프랑스와의 접전에서 독가스를 사용했다. 마이트너는 독가스 사용에 대하여 비판적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의 비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제는 마이트너가 일했던 빌헬름 화학 연구소가 독가스 연구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마이트너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학자의 연구성과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변할 수 있다는 점에 몸서리를 쳤다.

다시 연구소로 돌아와 그는 원자번호 91번이며 방사선 원소인 프로탁티늄protactinium 원소를 발견하였다.(1918년) 이제 마이트너는 과학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인정받았으며 교수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1922년) 여자가 교수Dozent로 될 수 있었던 일은 독일 프로이센 사회의 혁명을 일으킨 것 이상이었다.(Rife, p.87) 오토 한을 비롯하여 그의 남자 동료들은 이미 10여년 전 이상부터 교수였었다.(1907년) 마이트너의 교수취임 강연(1922년)을 취재한 어느 기자의 표현은 더 웃기는 일이었다. “여성이 우주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우주적kosmisch 과정’이라는 단어를 ‘화장술kosmetisch 과정’ 으로 간단히 바꾸어 버렸다.”(78쪽) 알고 보니 마이트너의 교수직도 요즘 말로 하면 비정규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1926년) 이때부터 조교수 자격과 소위 교수자격시험에서 “venia legendi ”를 취득하여 10년 교수 계약을 하게 된다. 마이트너는 베를린 대학의 실질적인 교수가 된다.(주2)  마이트너는 학과장 막스 플랑크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자신을 신뢰하여 패컬티로 되게 한 데 대하여 책임감있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내용이었다.(Rife, p.87; letter thanking Planck) 그의 뛰어난 학문적 능력은 이미 다 알려진 상태여서 어느 누구도 외형적으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은 여전했다.

프로탁티늄의 발견을 통해 마이트너는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면서 그 이후 1920-30년대 마이트너의 과학적 성과가 빛을 발하게 된다. 방사선 붕괴 시 베타선이 감마선보다 먼저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그를 ‘독일의 퀴리부인’이라고 부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닐즈보어와 마이트너는 유럽 최고의 과학자 그룹에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마이트너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불평등함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불편해 했다. 여전히 많은 남성 과학자들은 마이트너의 논문을 제대로 읽지 않거나 책장 속에 파묻어 두었다. “나의 남성 동료가 이 보고서를 제출했다면 벌써 인정했을 것입니다. 단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채드웍은 나를 멸시하는 것이죠. 이런 일이 나를 정말 우울하게 만듭니다.(84쪽; 오토한에게 보낸 편지, 1922년5월17일) 그 다음해 1923년 마이트너는 채드웍의 명성에 휘말리지 않고 냉정한 시각으로 채드웍의 베타선 붕괴에 관한 실험결과에 대하여 비판을 한다.(Simm, p.89) 마이트너에게 있어서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에서 오류를 지적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이트너는 1928년 캠브리지 학술대회에서 채드웍을 만나면서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표현한다.(Simm, p.105) 마이트너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매우 서툴렀다. 아니면 남자들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수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줍음을 잘 타는 마이트너의 천성 때문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갈등을 스트레스로 갖느니 실험실에 몰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런 자신의 성격이 여성의 평등 권리를 찾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마이트너가 여자인줄 모르고 독일 브로크하우스Brockhaus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편집장은 마이트너의 논문을 적극 게재하려고 시도하다가 그가 여자인 것을 알게 되자마자 게재 거부를 했다. 그러나 마이트너가 그렇게 유명한 줄 알고서는 다시 마이트너의 논문을 게재하려고 편지를 냈다. 이런 일들은 마이트너에게 흔했다. 이제 상할 마음도 없었다.

이런 일이 지나치면서 그는 결혼할 생각을 접었다. 실제로는 왜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주변 사람들의 추리가 많았지만 마이트너는 결혼을 안 하겠다는 철저한 원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실험실 연구를 하느라 결혼에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실험실 연구 과정에서 그는 남성 동료 연구원들이 밤을 새가며 실험하는 현장을 일상적으로 보아왔다. 그러면서 그 반대급부로 그의 부인이 얼마나 힘든 결혼생활을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마이트너도 결혼해서 그의 남편이 실험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아 질 경우 분명 자신도 그런 일상을 싫어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남성에 대한 반감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힘을 쓴 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성의 평등한 지위를 찾는 일이 개인적인 차원보다는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당시 여성운동 그룹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욱 현장에서 어렵게 활동하는 실천적 여성운동가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로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종적, 성적, 계급적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과학적 시도가 꽤 있었다. 아리안 인종의 유전적 우수성을 과학으로 정당화하는 독일 계열의 사이비 과학자들이 있었다. 지식을 배우거나 습득한 여자는 일반 여자와 달리 일종의 유전적 변종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 선풍적으로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이런 극단의 우생학적 주장은 여자를 남성과 아이의 중간 수준의 특별 인종으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아가서는 귀족과 노예 사이의 차이도 단순한 사회적 차이가 아니라 유전적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우생학이 널리 번져 있었다.(Max Planck Gesellschaft, S.116-118) 이렇게 사회에 만연한 성적 편견에 대하여 마이트너는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마이트너도 이제 50대의 중년이며 인정받는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1933년 솔베이 학술대회에 참석한 마이트너는 국제적으로 실력있는 핵물리학자 대열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맞추기라도 하듯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다.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극복하는 듯싶었는데, 이제 유대인으로서의 차별의 시절이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했다.

나치 집권 이후에도 마이트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가졌다.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시민권자이면서 국제적으로 알려진 과학자라는 점 때문에 나치는 마이트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하루 밤 사이에 마이트너는 오스트리아 시민에서 독일 시민으로 바뀌어졌다. 이에 나치는 외국 지역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본격적으로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인 마이트너는 이제 독일을 떠나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주2) 한국사회에서 통용하는 “교수”라는 표현이다. 당시 독일 학과에서 교수는 한 사람뿐이다. 독일 개념으로는 막스 플랑크만이 교수라는 뜻이다.

4. 노벨상과 여성

1938년 덴마아크를 거쳐 스웨덴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의 학문적 능력을 가장 많이 인정해주는 닐즈 보어는 마이트너의 탈출이 성공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여권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비자를 발급받는 일 등, 여객선 등의 교통편을 주선하는 일에까지 거의 영화 <미션임퍼서블>에 맞먹는 비밀조직의 도움으로 덴마아크에 도착했다. 비밀조직에는 네덜란드 그로닝겐 대학 물리학과 교수인 코스테르Dirk Coster가 있었다. 코스테르는 독일의 지식인 망명자의 탈출을 돕는 결사대 비슷한 조직의 행동대원이기도 했다. 코스테르는 마이트너와 동행하기 위하여 일부러 베를린까지 왔다. 네덜란드 영사 등을 통해 오스트리아 여권으로 네덜란드까지 검문을 받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다. 이후 7월초 덴마아크에 도착하여 닐즈 보어를 만나고 곧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연구소로 이동했다. 단지 15마르크가 들은 손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서, 그의 인생은 새로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은 거의 영화 스토리가 되어도 충분할 정도다.

그해 11월 스톡홀름에 있던 마이트너는 오토 한과 서신왕래를 계속 했다. 그리고 덴마아크에서 그들의 비밀스런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 조카 프리쉬도 있었는데 이들에게 의미있는 토론 자리였다. 이 때 오토 한은 마이트너에게 핵 붕괴 이후의 과정에 대하여 질문을 했다. 마이트너는 새로운 입자 생성이 실험적으로도 가능하다는 점을 제시했다. 화학적인 시야에서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실험 예상치를 물리적인 시야로 볼 것을 마이트너는 오토 한에게 독려했고, 이에 오토 한은 무릎을 쳤다. 오토 한은 마이트너와의 토론에 결정적인 힌트를 얻어 독일로 돌아 간 후 슈트라스만과 함께 역사적인 실험결과를 얻어냈다. 우라늄 핵에 중성자를 쏘아서 분열을 시키고 소위 바륨이라는 원소가 탄생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마이트너가 오래 전에 밝혀낸 것이다. 1938년에서 1939년 사이에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 그리고 마이트너 공동의 작품으로 붕괴 이후의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에너지는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법칙에 딱 맞아떨어진 물리학의 역사적 전환점이었다.(Schirra, S.204) 마이트너는 조카 프리쉬의 제언대로 단순한 ‘쪼개짐’Zerplatzen 이라는 용어 대신에 영어로 ‘분열’fission 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새로운 용어만이 새로운 원소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발견은 망명 이전 3년 전부터 오토 한, 슈트라스만 그리고 마이트너 세 사람이 공동으로 연구해 오던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그 실험 성과 역시 세 사람 공동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오토 한은 마이트너가 스톡홀름으로 가고 없었던 사이에 발견한 우라늄 붕괴 결과를 자기만의 성과로 했다. 이 점은 나중 마이트너가 섭섭해 했던 점이며 추후 이 발견으로 노벨상을 단독으로 받게 된 오토 한에게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물론 슈트라스만의 이름도 빠졌기 때문에 슈트라스만도 섭섭해 했다.(박병소, 154-156쪽)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오토 한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45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노벨상 위원회는 그 공로로 오토 한의 단독 노벨화학상 수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상황분석은 다층적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성적 편견과 연관하여 몇 가지로 나누어 다음처럼 파악한다.
(1) 첫째 한 평생 실험실 동지였던 오토 한에게 묘한 배신감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오토 한의 노벨상 수상 이후 마이트너가 친구 에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판단이 타당하다. 이필렬 교수가 번역한 것을 그대로 따서 읽어본다.

“오토 한이 노벨화학상을 수상할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그러나 이와 관련된 부수적인 일에서 오토 로버트 프리쉬(조카)와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어. 스웨덴 신문 D.N.에서의 한 기사는 거의 모욕적이었단다. 내가 정말로 오토 한의 보조연구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 물리학자였고, 물리학 분야에서 몇 개의 제대로 된 연구를 했다고?”(139쪽)

이 문제에 대하여 오토 한의 해명은 없었기 때문에 한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여성 학자의 사회적 편견이 상존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2) 둘째 스톡홀름 노벨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마이트너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60살이 된 국제적인 물리학자였지만 노벨연구소에서는 조교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당시 노벨연구소 소장이었던 시그반 교수는 마이트너에게 아주 간단한 실험기기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급여를 받았지만 조교 수당만도 못했다. 독일에서 건너올 때 가지고 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불보 하나라도 새로 사야만 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이런 푸대접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노벨상 심사위원회의 편견에 비하면 말이다. 시그반 소장은 노벨상 심사위원회에도 속했는데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해마다 추천이 올라 온 마이트너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데 앞장서 있었다. 시그반 소장이 보기에 여성이 노벨상을 받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이트너가 노벨상 수상에서 빠진 이유는 이처럼 앞의 두 이유를 주로 들고 있다. 물론 이 두 사항 모두 추정일 뿐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그들 어느 누구도 마이트너를 배제한 이유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수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견은 역사적 풍토에 기인한다. 오늘날 양성평등 제도에 대한 사회적 실천이 가장 잘 되고 있다는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에서도 불과 70년전인 1934년도에 장애자나 정신박약자에 적용하는 극단의 우생학적 단종법이 가결되어 시행되었었다. 특히 스웨덴 정부는 1941년도 나치의 위협이 커지면서 오히려 특정 목적성 단종법을 추가로 가결시켰다. 선천성 장애자 혹은 불구자 정신박약자 등에게 출산을 제한했던 인종 악법이 겨우 없어진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여성 차별의 역사적 문제는 성적 우생학적 풍토와 깊이 연관한다는 입장이 나의 결론이다. 성적 우생학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조선시대 과거 역사도 아니고 30년대 스웨덴의 문제만도 아니다. 바로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나타나는 우리 안의 루저와 위너의 위계가 문제다. 성적 쇼비니즘이 아직도 우리 안에 내재해 있음을 파악해야만 비로소 나눠 살만한 평등사회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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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트너 생애>

1878 오스트리아 비엔나 탄생, 필립 마이트너와 헤드빅 사이 8남매 중 3녀. Phillip and Hedwig Meitner
1892 비엔나 시민학교 수료; 이미 어렸을 때부터 카톨릭 교육을 받았으나 정식으로 개종.
1896 프랑스어 교사학교 공부를 하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위해 개인교습을 받음.
1901 비엔나 대학 물리학과 입학, 미적분학 수업을 들으면서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왔던 수학보다는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함.
1902 볼츠만Ludwig Boltzmann 교수 수업 대부분을 들으면서 깊은 영향을 받음.
1906 최초의 여성 박사학위 수여 PhD in Physics from University of Vienna
1907 독일 베를린 대학 실험실 연구 시작, 화학자 오토 한과 만남
1909 막스플랑크, 폰라우에,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콜로키움 참석; 이후 베를린에 완전히 정착하기로 결심.
1912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입소
1915-16 전쟁에 참여
1915 오토 한 “Gas Pioneer” 참가를 적극 반대
1918 91번 원소 protactinium 발견(오토 한 공동)
1919 막스 플랑크 노벨물리학상 수상
1919 빌헬름 연구소와 장기계약 및 급여 상승
1920 닐즈보어 만남
1922 프러시아 여성 최초 조교수 Assistant Professor
1926-1933 베를린 대학 교수
1923 오토 한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 후보 추천
1924 오토한과 마이트너 노벨 화학상 공동 후보 추천 (이후 10차례 가까이 후보 추천됨)
1928 그의 조카이며 평생 조력자이고 한 오토 프리쉬Otto R. Frisch도 베를린으로 연구지를 옮김.
1933 나치, 연구소에서 유대인 마이트너 박사를 사임하도록 압력 시작, 델브릭과 원자핵 구조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 제시
1936 오토 한은 독일화학회에 마이트너와 다른 상급의 대우를 요구.
1937 막스 플랑크 사임
1938 독일 오스트리아 침공, 따라서 마이트너 연구소를 탈출하여 코스터 박사의 도움으로 닐즈보어가 있는 덴마아크로 피신, 그리고 곧 스웨덴으로 망명.
1939 조카 프리쉬와 원자핵 분열Nuclear fission 논문 게재.
1958 요양 차 조카가 있는 캠브리지로 이사함.
1968 (27 October) Lise Meitner died a few days short of her 90th birthday
<참고문헌>

박병소, 노벨상 이야기. 범한서적, 1998
Bankston, John, Lise Meitner and the Atomic Age.
Hamilton, Janet, Lise Meitner: Pioneer of Nuclear Fission.

Kerner(이필렬 옮김), 한번도 인간적 면모를 잃은 적이 없는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양문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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