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10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이번에는 절판된 책 한 권을 소개 합니다)
자평(자기 책 서평) : 최종덕 지음,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휴머니스트, 2003
이번 서평은 오래 된 저의 책을 소개합니다. 제 책을 소개하는 것이 정말 겸연쩍습니다.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책인데, 15년 전에 잠깐 세상에 나왔다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사라진 책입니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서 과감히 자뻑 수준의 자평을 올려 봅니다. 책의 마지막 10장 부분을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장 제목은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입니다. 과학과 철학, 동양학과 서양학, 고전과 현대를 방황하던 저의 젊은 시절을 회고한 글이기도 합니다. 헤아려주세요
1. 그때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을 썼는데,
“요즘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뾰족이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협궤를 과감히 벗어나서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통합과학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2. 연속성을 찾아서
어릴 적에 멋모르고 천주교 성당을 나가게 되었다. 사춘기의 고민을 풀 수 있는 빛을 교회로부터 받게 되었다. 선과 악의 경직된 기준을 심사하는 일보다 사랑과 용서를 교회로부터 배우게 된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하나의 문제에 부딪혔다. 기독교의 구원이었다. 기독교 구원의 기준은 아주 분명했다. 복잡한 교리 밑바닥에서 공통된 구원의 기준을 찾을 수 있었다.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바울 이후 ‘양심’이라는 보조준거가 나왔지만, 그래도 구원의 기준은 깨질 수 없는 성곽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고민 하나가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과 지금도 문명과 단절된 아마존 정글 속의 원주민들이 구원을 받기란 애당초 그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기준의 무차별 적용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그 구원은 2000년 전의 구체적인 존재자로서 예수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는 신이 이룬 최초의 창조에 대한 믿음의 성격이 더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를 믿느냐?”라는 물음보다는 “당신은 최초를 인정하느냐?”라는 물음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보았다.
최초에 대한 의구심은 조금이라도 철학적 반성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의 특권이다. 나의 존재를 묻다보면 어느새 최초의 할머니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듯이 시간적 최초성은 아주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이다. 나 역시 이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으며, 이제 대학선생이 되어 철학 강의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한 답 같지 않은 적당한 답을 떠들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도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있다. 그 뒤에 와서야 최초는 최후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내가 하도록 해 준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한 분은 인도철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전직 천주교 수사이셨던 할아버지이다. 교수님에게서는 시간적 최초만 따지지 말고 공간적 최초와 함께 보아야 하며, 인식의 최초가 존재의 최초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전직 수사님에게서 [대학]과 [중용]을 배우면서 최초는 최후의 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학문으로 접했던 고전물리학과 분석철학은 나에게 이 세계를 모두 산수算數와 조립의 대상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유럽철학을 접하면서 내가 공부한 산수와 조립방식은 존재에 접근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양자역학 공부는 존재와 인식이 서로 얽매어진 실재 세계의 가능성들을 나의 가슴 안에 담아 주었다. 이 때부터 나의 철학적 화두는 연속성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철학 공부의 대상은 인간이 만나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자연의 근원은 연속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공부한 생물학적 자연과 초미시의 물리적 자연의 모습은 적어도 연속성 자체였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자연과학적 대상이 아니라도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자연의 운동과 현상이 바로 연속성임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연속성의 모습을 인간의 한계인 인식의 차원에서 밝힐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서양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학문은 사이언스이어야 한다. 사이언스 연구 대상의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비연속적이거나, 혹은 대상이 비록 연속적이더라도 그 연속성이 비연속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연속적이 아니면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민은 이미 칸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칸트는 그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자나 자연철학자와 달리 연속성의 세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연속성의 세계를 인간의 언어적 담론으로 다루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오성의 성곽 안으로 비연속성의 세계만 편입시키고 연속성의 세계는 제외하였다. 이러한 구분이 서구 근대철학의 중요한 지위를 얻으면서, 서구에서 비약적인 학문발전이 있게 되었다. 칸트의 이러한 구분은 먼저 인식의 오차를 현저히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혼란을 없앨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상의 과학과 마음의 형이상학 양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매스컴에서 ‘디지털 혁명’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디지털과 대비되는 아날로그는 비연속성과 연속성의 대비와 유사하다. 흐르는 강물을 떠서 정확한 양을 누구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 우리는 잔을 이용하여 한잔, 두 잔 또는 세 잔을 떠서 전달한다. 강물이 잔물로 바뀌면서 아날로그의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정확한 정보 전달은 반드시 계량 가능한 단위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해진다. 단위화 되지 않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은 오차와 노이즈를 일으키면서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다. 반면에 디지털의 정보 전달은 한 개, 두 개, 세 개처럼 대상을 단위화 하고 나누어 셀 수 있어서 그 전달 효과가 매우 크다. 우선 단위와 단위 사이에 있는 어떤 존재의 양상은 이쪽 혹은 저쪽의 한 단위에 편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놓칠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정보 단위의 구분이 확실해지므로 노이즈 발생율을 현격하게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디지털 전환은 자연의 연속적인 아날로그 상태의 많은 것을 디지털 단위로 이전하고 변환하거나 혹은 왜곡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디지털 혁명은 “무엇인가 있으며,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서구의 전통적인 인식의 난제를 자연과학적으로 완성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나의 연속성의 화두란 이제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바꾸어 자연의 원래 모습으로 이전되고 변환되거나 혹은 왜곡되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노이즈가 가득 찬 아날로그라면 굳이 다시 아날로그의 패러다임으로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나의 철학적 화두란 노이즈가 없는(상대적으로 적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자연과학의 성과로 이어지게 하고, 인문학의 주요 담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 동양의 지리부도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우선 생물학적인 운동과 현상이 전통 물리학적인 인과율의 범주와 차이나는 것을 조망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서로 만나야만 해결되는 천체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대상계를 관찰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고대 자연철학의 진화론적 사유와 19세기 진화론의 발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또한 인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티의 흐름과 역사주의 철학의 조류를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지성의 철학이 아니고 시간이 유입되어 역사화된 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모든 관심의 테두리를 나는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며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양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존재의 연속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선 나는 동양철학에서 인식과 존재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인식의 유형은 존재의 양상에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 존재의 양상을 지배하는 존재의 원초성은 모든 존재에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초월의 존재라는 말 대신에 역사적 존재 혹은 진화존재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싶다. 동양적 의미의 존재는 서양적 의미의 실체론적 존재와 달리 시간을 머금은 역사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역사 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나는 역사 존재 자체의 자화상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양론이다. 물론 두 가지 방식도 자연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언어 가운데 한번 핀 꽃은 지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을 인간 행태의 도리에 비유하여 말할 때 그 논거는 전적으로 자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주의는 자연의 운동과 인간의 운동의 동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동양학의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결국 동양의 자연주의는 역사 존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태도,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행태의 방식이 서로 연속적임을 말하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대학원 시절 주렴계나 장횡거를 배우면서 대단한 우주 해석이 그들의 주제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장횡거에게서 개별자의 뜻을 파악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려운 것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개별자의 정체성을 따지는 일에 익숙한 라이프니츠의 시각으로 볼 때 장횡거는 하나의 정서적 반란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적 순서를 무시하고 그 뒤에 장자를 만나고 보니 참으로 주렴계 이상의 대우주가 그려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 반란은 주자학을 풍월하면서 다시 차분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대부분의 도학 풍의 논의가 광대하게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우주의 책을 쓰고 있어서 무척 난해하지만, 반면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엄청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냉철한 학문의 칼을 들이대면서 조금씩 정리하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벌써 학문과 수양의 이중적 갈등이 드러난 셈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실상 동양철학을 수양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학문의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을 풀어줄 만한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동양철학의 학문은 수양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서양과학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나로서는 절실하게 다가오지를 않았다. 수양을 빙자하여 학문의 엄밀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동양학의 문외한이자 초보자의 의심어린 어설픈 생각 때문이었다. 이는 공손룡을 만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하게 나왔다. 오래 전 논리철학에 심취해 있던 중에 동양에서 서양의 논리와 비슷한 장르를 찾다가 문자적 차원의 유사성에 끌려 명가名家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가를 비판한 장자처럼 혜시 역시 논리학이 아니라 광대한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곡절을 겪으면서 유가나 도가, 또는 불가의 이야기 안에는 연속성의 주제가 분명하게 들어있음을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循環無端 故所在爲始也”라는 말은 대학원 시절에 공부의 주제를 잡게 해준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과연 최초를 인정해야 만 존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문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나는 최초와 최후를 상정한 서양과학의 선형적 사유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역사적 상황의식은 분명한 것 같다. 일종의 사회 구원을 찾는 길이라고 본다. 당시는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를 않았고 사회적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개혁의 기치를 높이 세운 것 같았다. 서민이 학문에 접근할 수 없었던 사회적 상황에서 물론 그러한 노력은 관리 주도로 이루어 진 것 같았다. 그리고 관리의 개념은 현직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민가에 흩어져 있는 무명의 학자인 잠재적 관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민의 생활태도뿐만이 아니라 임금의 도리와 임금과 서민간의 관계까지 다루면서, 삶에 녹아드는 실질적인 지표를 의도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지표는 추상적이거나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대 유럽사회라면 다른 상황을 낳았을 것으로 본다. 유럽이라면 이러한 혼란상황에 직면해서 나올 수 있는 담론은 아마도 종교적 교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인은 철저하게 구체적인 사람의 덕목을 제시하는 사회화 형성에 관심을 기울인 것 같았으며, 내세를 따지는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에 보면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상반시켜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말했다. 그러나 유가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조차도 이를 구하듯 실용적 적극성을 발현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였다. 물론 도가는 그것조차도 부정하였다.
이렇게 제자백가 시대의 관심에 대하여 아마도 어떤 이는 사회 구원에 앞서 개인 해방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어떤 이는 사회구성체 조직을 위한 개인의 역할에 관심을 두어 판단하기도 한다. 어쨌든 도가든지 유가든지 그것이 사회철학의 범주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큰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호감은 조선시대 정도전의 삼봉집을 읽으면서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도전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 필요성에 의해 불교는 단지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어 척단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에 새로운 유교가 신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학적 상상을 하였다.
이제 이쯤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일이 생겼다. 동양철학이 개인의 수양론인가, 아니면 우주론적 본체론인가, 아니면 사회․정치철학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수신제가를 한 뒤에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다는 권력 유지의 차원에서 보는 수직적 해석이 아니라, 수신제가를 하면서 동시에 치국평천하도 할 수 있다는 수평적 입장을 취한다면 위의 논의 구조가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미아리 고개나 계룡산 계곡에 있는 많은 점집에서 ‘동양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주역을 내세우며 장사를 하는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주역은 인간의 대소사를 점치는 책이 아니라 원래 하늘의 운행 이치를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동양철학의 기저에는 하늘의 운행방식과 인간의 운행방식이 동형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 하늘의 운행방식을 그린 주역을 가지고 그 운행방식을 따르는 인간의 대소사를 점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점치는 집에서의 주역의 구실을 너그러이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국인이 본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를 알아야 한다. 서양의 하늘은 땅을 낳고 법칙을 생산한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머나먼 곳이다. 이에 비하면 동양의 하늘은 땅으로부터 귀납된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양의 하늘은 땅의 모든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서양의 하늘은 2500년 전부터 인위성이 가미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하늘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동양의 하늘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하늘이다. 맹자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하늘이 내 몸 안에 들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의미를 통해서 맹자 이후 이천년이나 지났는데도 맹자와 불교가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양명학의 역사적 배경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쨌든 하늘이 내 몸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땅의 숨겨진 유전자를 갖고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아니라 장자가 말한 ‘물극필반(物極必反)’하여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 것이 땅인지를 모르게, 그리고 먹고 마시고 부부의 잠자리를 하면서 어느덧 하늘이 땅 속에 들어있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중용의 지적처럼 그러하다.
오래 전 돌아가신 동양철학계의 큰 스승, 배종호 선생님이 미국 여행을 다녀오신 이후였다. 그 때 나는 대학원생이었는데, 배종호 선생님께 이상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다. 우리의 풍수지리 해석이 그랜드케년 지역에도 들어맞는지를 여쭈었다. 선생님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역시 지리적인 풍토의 차이가 고유의 사상을 유발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땅의 생산자가 아니라, 오히려 땅이 하늘의 생산자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서양철학이나 서양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동양철학에 대한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공부를 더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뿐이다.
4. 서양이 이름붙인 동양
이후 나는 독일에 유학 가서 동양철학을 잊고 지냈다. 동양철학에 관한 책을 읽기보다는 힘든 유학생활을 달래기 위하여 틈틈이 붓글씨를 쓰곤 하였다. 재활 포장용 종이에 ‘인(仁)’자를 수백 번이나 썼을 것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뜻도 잘 모르면서 부지런히 암송하였다. 이때 나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동양철학이 갖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우리의 현실은 동양철학이 제시하는 수양론과 엄청난 괴리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원래 알고 있었지만 새삼 느낀 것이라고 해야 옳다. 제일 먼저는 동양인 우리가 서양보다 더 서양적이라고 느꼈고, 역설적이지만 많은 동양적이라고 하는 것들의 표제어는 서양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 많다고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동양학에 대한 열기가 크게 일어났지만 그 열기의 실상은 비동양적인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첫째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왜곡된 동양학 연구태도라고 본다. 둘째 서구문화가 여과 없이 직수입되면서 생긴 학문의 시녀현상을 든다. 셋째 서구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 내는 국수주의로 인하여 고전문헌에만 매달려 훈고학만 하면서 발전적 비교해석과 전통의 창조를 두려워하는 잘못된 관행을 든다. 넷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실천의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아래서 잘못된 선비의식을 정당화시키는 편의주의적 상아탑의 가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둘째 문제와 연관을 갖는 것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대비시켜 이를 무턱대고 이성과 반이성으로 대치시켰던 과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이분법적 태도가 횡행하고 있는 듯하다.
한때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의 연구 자세와 우리를 비교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너그러이 용서해준다면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소한 논문을 쓰려면 남이 해놓은 소주제 전개와 주장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남이 해놓은 연구결과를 관심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혹은 기존의 연구결과에 일목연한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최근의 학계풍토로 보아서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글들이 우리 자신이 쓴 글보다 동양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안내구실을 더 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마음 구석 한편에는 아직도 ‘서양 사람이 하면 얼마나 할까’라는 조소 어린 생각을 해보지만 실제로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책을 접하다 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풍선이었나를 깨닫게 된다. 나 같이 비전문가나 일반인 혹은 동양학 입문자에게 과연 한국의 기존 동양학 연구자는 과연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서양의 동양학자의 강점이 있는 듯하다. 나무를 보는 대신에 멀리서 숲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절대로 서구의 동양학 연구자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래 전에 동양철학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다. 독일에서 초청된 독일 한국학자가 발표를 하는데 내가 독일어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연구발표의 논평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한국어 구사를 했기 때문에 나의 필요성은 별로 없게 되었다. 어쨌든 그의 남명 관련 연구논문은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하나 중요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그의 남명 관련 논문의 주제는 한국의 학자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분야였다. 그리고 논문의 전개 방법론이 매우 창의적이었음을 느꼈다.
5. 동서고금의 시선 –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요즘(15년 전) 나는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되어 있다.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학문 외적 문제이기 때문에 더 심각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 중에서 다섯 번째 문제와 연관되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은 서양철학 그것도 과학철학하는 사람이 왜 갑자기 한의학이나 동양철학을 건드리고 있냐는 비난 어린 질문들이다. 한문이나 제대로 하느냐하는 보이지 않는 비난일 것이다. 약간은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나는 한문을 읽는 수준이 미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동양철학 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주 전공은 자연철학이고 자연철학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동양의 자연문제를 건드릴 뿐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비난은 동양과 서양을 획일적으로 갈라놓는 이분법적 사고라고 본다.
나는 동양과 서양이 반드시 만나야만 우리가 안고 있는 역사적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먼저 반드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차이의 부각에만 그치면 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 아류에 머물고 만다. 차이의 정립은 종합을 위한 과정적 단계일 뿐이다. 과정을 거처 우리는 방법론과 문제의식까지를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서양의 자연철학과 동양의 자연철학을 종합하는 듯이 보이는 작업은 거창한 학제간 연구이기보다는 한 논문의 작은 구성요소로서 인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동양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은 서양철학의 역사적 흐름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철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도 동양철학을 다른 전공으로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현상학 수업을 수강한 후에 하버마스 수업을 수강하는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본다. 1998년쯤인가 동서양 철학하는 소장학자들이 모여서 더불어 공부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방이지(方以智)의 『물리소지』(物理小識)를 이현구, 김교빈, 박석준 선생님 등과 같이 읽은 적이 있었다. 동식물의 생태학적 자연학을 담아 낸 책인데, 동양철학의 시선을 넓게 해준 정말 고마운 독서모임이었다. 동양에도 서양이, 서양에도 동양이 내재해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
요즘(15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뽀족히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이름을 과감히 벗어나서 대화의 글쓰기에 나서야 한다. 나아가 서양철학자들도 동양학에 대하여 철학적 성찰과 과학적 방법론이 결핍되어 있다는 비판도 중요하지만, 이제 우위비교가 아닌 동양의 철학적 소재나 방법론에 도전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공부하는 사람, 그 개인에게만 부과될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관심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풀이를 찾기보다는 학자군의 만남, 학문간의 협동이 절실하다. 그래서 동서양의 경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묶이지 않으며,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그런 공부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2003년 나온 책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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