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적 주체는 어디로? [평이의 궁시렁]

온 나라가 최순실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인물로 들썩이고 있다. 최순실이 연극 대본처럼 써준 연설문을 열심히 따라 낭독하던 우리의 최고 권력자 박근혜 대통령도 단순한 지지율 추락이 아니라 탄핵과 하야를 외치는 민중들의 성난 분노에 직면해 있다.

대통령을 한때는 그리도 열심히 보필하던 새누리당과 조중동 언론마저 이제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듯 싶다. 아마 삼성을 중심으로 한 경제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순한 레임덕 상황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새로운 권력의 쟁취를 두고 이합집산하며 새판짜기에 골몰하는 모양새다.

지금은 아마  ‘공위시대interregnum'(주1)가 다가오고 있는 시기일 것이다.  그람시가 지적한 대로 “위기란 바로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러한 공위시대에는 매우 다양한 병적인 징후들이 출현한다.”(주2)  그렇기에 이런 시대의 방향성은 함부로 예견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지점은 기존의 체제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세력과 새로운 체제를 원하는 세력 간의 투쟁이 , 다시 말해 계급투쟁이 전면화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패닉상태이고 앞으로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매우 불안하다고들 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때 대통령을 그리도 열심히 원하고 보필했던 사람들과 언론들, 심지어 새로운 정권 창출에 몰두해 온 야당을 중심으로 이런 불안의 심리가 전시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대체 뭐가 불안한 것일까? 그 불안에 대한 심리는 어쩌면 계급투쟁이 진행되고 사회가 혼란 속에 들어갈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예견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급투쟁의 두 전선 사이에는 명백한 간극이 존재한다. 체제가 뒤흔들려 기존의 안정성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진영이 있다면, 이와달리 이 공위시대가 새로운 체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존 체제의 새판짜기로 전락할까봐 걱정하는 진영이 있을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말한, 민주주의적인 주체의 시대!

우리는 이제 대통령에 대해서도 진정 평등하게 욕을하고 우리의 원하는 목소리를 그 어디에서든 내뱉게된 상황을 목도한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그 언어적 소통 가능성이, 그럼에도 어떻게 그 힘을 발휘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 분노의 목소리들은 기존 체체가 내뱉는 스펙타클적인 언어적 소통을 통해 오히려 기존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새판짜기 전략에 포획될지도 모른다. 또 반대로 그 분노의 목소리들이 동일한 스펙타클적인 언어적 소통을 통해 오히려 기존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체제를 탄생시키는 길을 열어놓을지도 모른다.

과연 지금 2016년 10월의, 우리 민주주의적 주체들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나는 불안하다. 또 다시 기존체제 권력의 새판짜기 전략으로 이 공위시대가 마무리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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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공위시대란 보통 국가나 조직 등에서 신임 지도자가 취임하기 전, 최고 지도자가 부재하는 기간을 뜻한다. 물론 역사상 신성 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던 1254(또는 1256년)~1273년까지의 기간을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Interregnum)라고 규정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일반적으로 과거 국왕의 부재하던 기간이나 급격한 정치적 변혁 시기에 최고 지도자나 최고 권력이 비어있는 기간을 의미한다.

주2) In Quaderni del carcere; here quoted after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ed. and trans. Quintin Hoare and Geoffrey Nowell-Smith (Lawrence and Wishart, 1971), p. 276.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2. 254쪽 재인용.

우리 모두의 삶과 플라톤의 ‘동굴’ [평이의 궁시렁]

‘우리 모두는 스스로 세상과 이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똑같은 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모두의 지적인 능력도 때론 망각되거나 왜곡되면서, 그 어떤 외부의 상황과 조건에 눌려 변형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 [국가] 7권에서 제시하는 ‘동굴’ 이야기는 바로 이런 외부의 조건에 대한 재미난 비유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동굴에 갇혀 동굴의 벽면에 비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를 보며 자라온 죄수들에 대한 이야기. 그 동굴 속에서 죄수들은 동굴 밖의 세계에 찬란히 진리의 태양(플라톤에게는 ‘좋음의 이데아’)이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동굴 입구에서 타오르는 횃불에 의해 생겨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과 사회, 세계에 대해 판단하고 토론하며 산다.

아마 이 비유를 들으면, 당연히 여러 영화의 이미지들이 떠오를 것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주입받으며 알처럼 매달려 사육되는 미래세계를 다룬 영화 <매트릭스>부터, 생방송 세트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방송을 위해 사육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트루먼 쇼>까지.

그런데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지 영화 속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우리도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속하게 된 수많은 외부적인 조건에 휘말려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 심지어 욕망까지도 좌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때로는 ‘한국’이나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 강한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국가가 제공한 다양한 감정과 자부심에 휘둘려 한때 우리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들의 젊음을 그 자랑스럽다 여긴 국가에 헌신하지 않았던가? 또한 지금도 ‘남성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 맞춰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동시에 비슷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태어나 엇비슷한 상황 속에 휘말려 나름의 시대적인 동굴 속에서 세상과 사회에 대해 판단하며 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결코 세상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며 살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생각이나 관념 더 나아가 그런 제도들’까지도 지칭하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지적인 능력을 늘 그렇게 굴절시킨다. 누구보다도, 어느 시대보다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사실상 여전히 우리 외부의 그 어떤 동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노예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 외부의 미디어 환경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이 조금이라도 왜곡되고 굴절된다면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일부 보수 언론 매체에 사로잡힌 보수적인 어른들, 또 매순간 자극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러한 영향력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진리의 태양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사실 그렇다. 오늘날 현대 철학의 지형은 더 이상 그 어떤 명확한 진리의 세계도 확인할 수 없고, 때로는 그런 진리를 내세우는 일이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 진리를 내세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은 마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우리 현대인들이 이런 진리 추구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지금의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기만 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희망은 그저 헛된 이데올로기였기에,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체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늘 자신의 시대에서, 스스로가 갇혀 있는 시대의 ‘동굴’을 감지하면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을 꿈꾸려는 지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갇혀 있는 ‘동굴’의 실상을 몸소 경험하며 나름의 괴로움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인 괴로움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시작해 ‘동굴’로부터 탈출하려는 우리들의 지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우리가 함께 속해 있는 ‘동굴’의 상황을 몸소 느끼며 경험한다. 때때로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외로움, 삶의 고통과 고뇌, 물질적인 고민과 절망 때문에 늘 혼자 안으로만 썩어 문드러지는 내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이런 나의 모든 괴로움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꺼라 생각하며 다시 딛고 일어선다. 아마도 이런 우리의 모습이 서로 만남과 실천을 이루어낼 때, 조금이나 동굴이라는 상황은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사진출처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멋진 학생.

사진출처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멋진 학생.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 플라톤의 동굴과 연결한 발표문 중 캡쳐.

‘그들만의 철학’이 아닌 ‘우리 모두의 철학’을 위하여! [평이의 궁시렁]

[블로그진 안내] 본 지면은 회원들이 매달 약간의 후원회비를 납부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코너 제목을 개설하고 스스로 글을 업로드 하는 곳인 만큼, 본 코너의 저작권과 글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글쓴이 본인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었네.

왜 나는 나이고 너가 아닌 거지? 왜 나는 여기에 있고 거기에는 없는 거지?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공간의 끝은 어디에 있는 거지?

태양 아래서의 삶이란 단순한 꿈에 불과한 건 아닐까?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은 것은 단지 이 세계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다른 세계에 대한 환영에 불과한 건 아닐까?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그리고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 있기나 한 걸까?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내가 생기기 전에는 나라고 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지?

또 어떻게 나라고 하는 사람이 그 언젠가는 더 이상 그러한 나일 수 없다는 게 있을 수 있지?

– 빔 벤더스의 영화, <욕망의 날개Wings of Desire(1987)>, 한국 개봉이름 <베를린 천사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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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어린아이였을 때, 다들 철학자였다. 온통 새롭고 낯선 주변의 세계를 접하면서 끊임없이 물음을 쏟아내던 그 시절을 회상해 낼 수 있다면, 아마도 한번쯤은 저런 질문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모국어라는 그 어렵고 낯선 장애물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비로소 깨치게 된 언어의 힘으로 우리는 모두 세상에 대해 질문하던 철학자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철학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어렵고 낯선 단어들, 추상적이고 일상의 삶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그 수많은 언어의 유희들. 나와는 그저 상관없는 전문 철학자들의 말잔치. 물론 때론 그들의 말잔치가 가끔은 흥미를 끈다. 철학교수들이 쉽게 풀어내는 인문학 강좌 열풍에 이끌려 열심히 그들의 말씀(?)에도 귀 기울여 본다. 그럼에도 어렵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내 삶의 문제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사실 인문학, 특히 철학은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강의와 말씀에만 기대려 할 때, 역설적으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가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품게 된 수많은 질문들, 또 그 질문들을 던졌던 자신의 지적인 능력 자체를 망각한다면, 철학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전문가에 기대어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해법만을 기대하는 무기력하고 자신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는 그런 대중으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가 지적으로 평등하며 다만 그 동등한 지적 능력을 어떻게 발현시키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당연히 머릿속에 반론이 떠오를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지적으로 평등하냐고. 사람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른 특성과 능력을 부여받기에 똑똑한 사람도 있고 멍청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그렇기에 좀 더 똑똑한 지식인들이 멍청한 대중들을 계몽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말 우리는 똑똑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으로 구별되어 태어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똑똑한 사람들이 우리 같은 다소 멍청한 대중들을 이끌고 지배하면 되는 게 아닐까? 똑똑한 전문 정치인이 우리의 삶과 정치를 좌우하고, 똑똑한 전문가들이 이 사회를 잘 꾸려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바로 이런 생각이 모든 위계의 원천이다.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전문 정치인과 대중, 전문 철학자와 대중으로 끊임없이 사회적인 위계를 생산하고, 그런 위계에 따라 사회적 삶과 정치가 좌우되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잘 안다. 우리 스스로 지적인 능력을 발현하며 모국어를 터득했고, 또 그런 자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배워왔다는 사실을. 단지 치열한 생존의 무게에 갇혀 다른 곳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을 뿐,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해 왔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우리가 발현시킨 그 능력들을 좀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시킨다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도 말이다.

정치가 그들만의 일이 아니듯, 철학도 일부 전문가들만의 영역은 아니다. 물론 철학자로서, 연구자로서 평생을 바치는 소수는 늘 필요하고 소중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세상을 계몽하는 선구자일 수는 없다. 이제는 누군가의 계몽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해방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철학 역시도 이제는 단순히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우리 대중 모두가 스스로 철학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들만의 철학이 아닌 우리 모두의 철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