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배기호

 

좋은 이름 없을까? 지방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던 필자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른들이 지나가듯이 이종사촌동생의 이름을 생각해보라는 말에, 정작 학업은 뒷전으로 하고 말이다(솔직히 노상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낸 이름이 ‘나라’였다. 당시 우리말 이름이 유행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냥 부르기 쉽고 하늘을 나는 새처럼 동생이 자유롭게 꿈을 향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진심을 담은 결과였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 동생의 이름은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나라’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필자가 직접 이름을 붙인 아이니(아, 지금은 엄연한 어른이다) 이상할 것은 없다.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은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노래했던가. 그리고 그 노래는 끝없는 돌림노래 형식을 취했는지,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불리기도 하고 우리 주위에 울리기도 한다. 그런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을지라도 그것의 표현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맹점은 간혹 우리를 헛갈리게 만든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의 정몽주와 정도전은 우국충정의 대명사다. 다만 어떠한 ‘나라’에 대한 충정이었느냐에 따라 그 구체적 내용이 달라졌고, 그에 대한 평가가 나뉠 뿐이다. 그렇게 40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우국충정의 노래는 아주 강렬하게 울렸다. 열강들의 간섭과 침략으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각각의 창법과 가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이른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개화파(開化派), 동도서기(東道西器), 서도서기(西道西器), 동도변용(東道變容) 등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되었다.

 

당시는 어찌할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음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상대적으로 그들의 부강함이 당시 이 땅의 현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정적으로 이 땅을 유린한 것은 서양이 아닌, 동양의 한 섬나라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300여 년 전에도 그랬듯이 서양의 세(勢)를 앞서 배우고 익혀 이 땅을 넘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들로 인해 짓밟힌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여실히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 반민족행위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 중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2009년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문신, 고위관료, 정치가, 외교관, 언론인, 독립협회 회장, 민족운동가, 종교운동가, 교육운동가 등으로 다양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에 대한 평가는 개화를 주장하며 민족의 실력양성을 주도했다는 공과 친일행위를 했다는 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연구에 국한했을 때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67% 이상이 윤치호를 모른다고 한다(최훈, 「윤치호 연구」, 『慶州史學』 第39·40合輯, 85쪽 참조). 이는 그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이력과 행태를 세세하게 알리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이른바 당대를 주름잡던 지식인이라고 소개할 정도의 인물임을 감안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또한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일기로 남겼다. 그리고 그 일기는 그에 대한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그를 알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현재 그 일기의 몇몇 내용이 어록이라는 미명아래 인터넷을 떠돌고, 나아가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칭송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럽다.

 

 

윤치호는 일찍이 일본과 청, 미국 등에서 유학했다. 그러면서 서양이 발전하고 일본이 열강의 반열에 오른 건 모두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종교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땅도 개화하여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 중심의 사회진화론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그런 생각 저변에는 힘의 논리와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부강한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이 땅은 부강하지도 않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에 부강한 자에게 의탁해야 한다고 여겼다. 심지어 이 땅이 일본의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 축복이라고까지 말했다. 일본을 같은 황인종이며, 동양이면서도 서구 열강에 버금가는 부강한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땅은 아직 아이이기 때문에 일본에 의탁해 배우고 익혀 어른이 된 후에 독립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12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3년 만에 출감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을 거치며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노골적으로 변했다.

 

배우고 익힘의 결과는 무섭다. 교육의 힘을 누구보다 믿고 실천한 윤치호 자신이 더욱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인 차원이라면 무서움을 넘어 재앙에 가깝다. 이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지금과 가까운 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기대어 이 땅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의 믿음이라면 모를까, 교육운동가나 지식인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보기에는 순진하다 못해 가볍고 어설프다.

 

애국계몽운동가. 윤치호를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그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익혀 근대적 사고를 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 든다. 그가 사랑한 ‘나라’는 무엇이고, 새로움은 무엇이며, 근대는 무엇인가?

 

 

지금도 애국, 곧 ‘나라’ 사랑의 노래는 곳곳에서 여러 사람의 입에서 독창, 합창, 제창 등의 형태로 흘러나오고 있다. 어쨌든 ‘나라’를 사랑한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겉으로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관심을 갖고 ‘나라’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럼으로써 이 땅이 다시는 윤치호 같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월감을 가진 이중인격자가 나오지 않는 곳이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몇 해 전, ‘나라’의 하나 뿐인 언니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이모의 SNS에는 ‘우리나라 사랑해’라는 문구가 항상 적혀 있다. 밝히기 쑥스럽지만, 필자 역시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그리고 더불어 드는 생각… 동생들은 자기 이름의 무거움과 무서움을 알까? 괜히 미안한 생각에 ‘우리’·‘나라’가 보고 싶다.

 

기고자: 배기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순자의 철학사상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기를 좋아한다. 잡기에 능하며 가끔 공부도 한다. 사람의 일, 정치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유현상

 

‘길 위의 우리 철학’에 걸 맞는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강변북로를 따라 덕소를 지나 6번 도로로 들어서서 양수리를 지나 신원역 옆길로 600미터 언덕길을 오르면 몽양 여운형(1886년~1947년)의 생가와 기념관이 나타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약간 돌아가기는 하지만 글쓴이가 사는 곳 역시 양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을 나서기는 했으나 그리 먼 길도 낯선 길도 아니었다. 하지만 몽양 여운형은 여전히 낯선 느낌이다. 일차적으로야 나 자신의 무식과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몽양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불행과도 연관되어 있다.

 

[2011년에 복원된 몽양 여운형의 생가(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 위치)]

 

몽양은 1886년 4월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명문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백사 이항복의 11대 손녀였다. 어린 시절 여운형은 아버지보다는 조부인 여규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본래 소론파의 야인이었던 여규신은 갑오년(1894)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가를 이끌고 모두 동학에 가담하여 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벗들을 사귀었던 몽양에게 인간 평등을 핵심적인 가치 중 하나로 삼는 동학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의 상을 치른 후인 1908년 몽양이 집안의 종들을 모아 놓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해방시켜 준 일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몽양의 근대적인 인간관은 단지 동학의 영향에 의한 결과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구적인 근대식 교육을 받았고, 1907년에는 기독교에 정식으로 입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자신의 생가 인근에 근대적 신학문을 가르치는 광동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비록 동학과 기독교의 뿌리는 다르지만 몽양은 두 종교 모두에 내재한 보편적 가치를 수용하여 근대적 세계관을 가슴에 품게 된 것이다. 종교와 사상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은 몽양의 삶은 이후로도 평생 이어져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거리낌 없이 넘나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는 한결같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삶을 살았으며, 실질적인 목표를 성취하려는 정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독립을 위해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919년 당시 몽양은 김규식(1881~1950)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비록 일본 대표단의 집요한 방해로 파리 강화회의 본회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국내의 독립 운동 열기를 자극해 3.1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세력들은 임시정부라도 서둘러 세워 국권회복을 위한 중심을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몽양은 정부 형태보다는 운영에 부담이 적은 당조직을 중심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는 이상적인 방법보다는 현실적인 방법을 먼저 고민하는 몽양의 실리추구의 면모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국호에 ‘대한’을 붙이거나 황실을 우대하는 임시 정부 수립과 연관된 원칙들에 의견을 달리한 몽양은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임시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주로는 교포 사회인 거류민단을 중심으로 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몽양이 임시정부의 황실 우대의 원칙에 반대한 것도 봉건적 체제를 거부하는 근대적 정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3.1 운동의 실질적 배후가 몽양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제의 하라 내각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일본으로 초청하였다. 일제는 당시 독립운동을 자치운동으로 유도하는 모양새를 취해 독립운동의 열기를 가라 앉히려는 계획에 몽양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몽양은 당시 일본 유학생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은 자치를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며 독립을 위한 담판을 짓기 위해 왔노라고 말한다. 당시 34세의 몽양은 실제로 일본의 고관들과 만나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굽힘없이 주장하였고, 동경 제국호텔에서는 500여명의 전 세계 기자들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강력히 규탄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상해에 머물던 시절의 가족사진(몽양 여운형 생가에 전시)]

 

1920년에 몽양은 공산당이 조선 독립 운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여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의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이후 주로 상해에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다 1929년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넘겨져 국내로 송환된다. 일제에 의해 3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몽양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길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1936년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발간하는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 빌미가 되어 신문사 사장에서 물러난다.

 

1940년대 초에는 몇 차례의 동경 방문 경험을 통해 일본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에 이미 광복 이후를 대비한 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건국동맹의 결성은 당시 여운형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이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건국동맹은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로 이어졌으나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말았다. 해방 정국에서의 몽양은 그 누구보다도 견실하게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좌우의 극한 대립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의 갈등 사이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청년기 시절부터의 이력이 보여 주듯이 몽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종교나 세계관에 구애받지 않고 연대하려는 태도를 유지했다. 조선 독립이라는 대의에 비하면 사상이나 종교 이념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모양새다. 달리 말하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균형 감각을 잘 유지한 정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몽양은 정신의 개발 못지않게 신체의 단련도 매우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몽양의 균형은 정적들에게는 공격의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요소가 되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여운형의 모습]

 

오랜 시절 동지였던 김규식과 더불어 여운형은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또한 1946년에는 북한의 김일성과도 총 6차례의 회담을 하면서 남북 합작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으로 인해 여운형은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위기 상황일수록 극단적인 정치적 목소리가 온건한 주장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 정치 노선은 정치적으로 더 선명하고 원칙에 충실한 입장처럼 비춰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진보적 민족주의자임을 자처했던 몽양의 정치적 입장은 사회적 갈등이 강하게 부각되지 않을 경우에는 원만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립의 결과가 생사를 결정할 정도의 치열한 상황이라면 중도는 양쪽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때 고려 공산당원이었던 이력을 고려했을 때 강경 사회주의자들에게 여운형은 회색 지대에 서 있는 변절자라는 공격을 받기 십상이다. 또한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한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고려하면 우파들에게도 여운형은 사회주의로 전향한 변절의 아이콘으로 삼기 좋은 먹이감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식민 통치 후반기에 국내에서의 활동 역시 그를 더욱 고립시키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1942년 몽양을 다시 체포한 일제는 그를 풀어주면서 억지로 전향서를 쓰게 하고 친일성명서를 작성한 것처럼 날조해 그에게 오욕의 상처를 새기고 말았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몽양을 변절자로 몰아가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몽양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기반으로 1945년 11월에는 조선 인민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모색하게 된다. 또한 1945년 9월에 출범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부주석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비록 미군정은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시기 여운형은 사회주의 인사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6년 1월에 좌익계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내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입장에 협조하기로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몽양의 입지는 찬탁을 주도한 박헌영에게 밀려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박헌영이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고 이북 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반면 반탁 입장을 고수한 여운형은 좌파로부터도 외면당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우파로부터도 고립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몽양은 이에 그치지 않고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 김일성과 담판을 지으려고 시도하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통일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는 의견에 서로 동의한 바 있다. 하지만 여운형은 남한에서의 박헌영의 활동에 비판적이었고 좌파 중심의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대의는 유사했으나 방법론적 차이가 결국은 회담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46년 2월의 박헌영과 여운형(사진출처-Naver)]

 

결국 몽양은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전선 구축이라고 하는 목표 역시 김일성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인해 좌우합작의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지게 되었고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몽양은 좌우로부터 모두 소외당한 채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7월 18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2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하고 만다.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박민철

1

한반도 분단은 ‘분단체제’라 규정될 정도의 자기재생산 매커니즘을 갖는다. 한반도 차원에서 발생하는 적대적인 상호의존 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는 ‘반공주의(반미주의)’,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반복된다. 이렇듯 반공주의, 국가주의 모두는 강력한 상호 결합을 통해 결국 분단을 지속시키는 이념적 공모자들이다. 이때 우리는 이것과 관련되어 한국현대철학의 여러 인물들 중에서 안호상을 만나게 된다.

 

분단 이후 남북은 상대에 대한 배타적 우월성을 획득하려는 노력과 함께, 분단국가의 ‘국민 만들기’에 열중했다. 당시 집권세력은 1948년 말 ‘여순사건’ 이후 증폭된 해방정국의 혼란을 공산주의 사상의 배타적 극복과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이중 과제의 달성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일민주의(一民主義)’는 바로 그 시기에 등장했다. 1949년은 이승만의 「일민주의란 무엇?-헤치면 죽고, 뭉치면 산다」, 「일민주의와 민족 운동」 그리고 양우정의 『일민주의의 개술』이라는 글이 출간된 해이다. 그리고 안호상의 『민족의 소리』 역시 이 해에 출간되었다.

 

[(왼쪽부터) 이승만, 양우정, 안호상]

 

1949년 「민족의 소리」에서 “우리에게 독특하고도 위대한 사상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던 안호상의 주장은, 1950년 「일민주의의 본바탕」에서는 그러한 사상적 무장이 “모든 반민족 사상을 여지없이 격파”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혈연적 동일성과 통일성에서 비롯되는 ‘일민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로 구체화되었다. 분명 안호상은 일민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그리고 그러한 만큼 안호상의 철학은 분명 국가주의 철학과 일치했다. 오늘날 학문영역 중 역사학과 정치학에서도, 심지어 그가 몸담았던 철학에서도 안호상을 국가주의 철학자로 평가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입장이 아니다. ‘서양철학수용1세대’ 혹은 ‘한국철학1세대’로 평가되는 이들 중에서 안호상만큼 극적인 자기변화를 보이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 철학의 지향점에 대한 ‘이론 대 실천’의 구도 속에서 항상 이론의 측면에서 서 있었던 인물도, 독일과 일본의 유학경험에서도 매우 극단적인 내용과 방법으로 ‘민족적인 것’에 침잠했던 인물도, 또한 역설적이게도 반공과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그였지만 훗날 반공법 위반을 스스로 선택한 인물도 찾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어떤 연구자는 안호상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안호상의 ‘철학함’은 ‘오늘, 우리들’에게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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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호상(1902-1999)는 1902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항일운동가인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 신학문을 접했으며 그 인연으로 청소년 시기 대종교에까지 입교했다. 1922년 상해로 가 당대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 후 독립을 위해 보다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함을 느끼고 독일 유학을 떠났다. 1929년 독일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1931년 다시 일본 경도제국대학으로 건너가 연구했으며, 1933년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안호상은 동시대의 한국철학1세대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조선의 독립을 위한 실천철학적 관점을 강하게 표명했던 당대의 지적 분위기와 달리, 실천보단 순수한 이론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해방 후엔 이승만 정권의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단군사상에 기초하여 민족계몽운동에 투신하고 대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민족사상’의 확립이라는 목적이 곧 철학에 입문한 계기였다. 하지만 그 목적은 곧 민족사상으로서 ‘일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하고 홍익인간이념을 교육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국가철학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를 이끌었다. 1947년 『우리의 부르짖음』, 1948년 「민족교육을 외치노라」, 1949년 「민주적 민족교육의 이념」 등에서 이미 전체로서의 ‘우리’ 그리고 우리의 존재 근거로서 ‘국가공동체의 강조’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서구 근대의 정치적 지향이 민족국가의 건설이듯, 유년시대와 독일 유학의 경험 속에서 그러한 이념적 지향을 강하게 흡수한 안호상의 철학 역시 민족과 국가의 강한 일치화로 전개된다. 특히 반공주의는 근대적 정치주체로의 자기성장 과정을 겪지 못했던 한반도에서 민족과 국가를 맹목적으로 일치시키도록 돕는 이념적 접착제였다. 「민주적 민족교육의 이념」에 등장하는 ‘빨갱이 개아들’이라는 용어는 그래서 섬뜩하다.

 

실제로 일민주의에서 민족주의는 반공주의와 결합해 더욱 배타적으로 변모한다. 안호상은 혈연성에 기초한 민족과 일민의 구분, 즉 동일한 혈통은 ‘일민’의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 없으며, 이 충분조건은 일민주의라는 단일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개인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총선거와 남북협상」). 즉 동일한 혈통을 갖는 같은 민족일지라도 반공의 의식이 없으면 그러한 일민에 포함될 수 없는 적대적인 타자인 것이다. 또한 안호상은 1950년 『일민주의의 본바탕』에서는 이승만을 최고 영도자로 명명했으며, 반공이라는 의지 속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이들만이 국민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안호상은 일민주의의 핵심이 동일혈통과 동일운명에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했으며, 그 강조는 결국 ‘국가’로 수렴되었다. “일민에는 일국가, 한민족에는 한국, 곧 한 백성에는 한 나라를 있게 함이 일민주의의 민족철학이요 국가철학이다.”(『일민주의의 본바탕』)

 

안호상의 철학 속에서 민족, 국가, 반공의 ‘신성한 삼위일체’가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승만의 시선 속에서 분명 안호상은 매력적인 국가주의 이데올로그였으며, 안호상의 입장에서 이승만은 삼위일체의 현실적 대리자였다. 이 둘의 결합은 1949년 안호상이 문교부장관의 직무 아래 전국의 교원 5만 여명을 대상으로 한 사상경향의 조사를 하고 그 중 ‘불순분자’를 파면한 결과로 이어졌다. 오늘날 지난 정권과 지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는 어찌 보면 ‘애교의 수준’이랄까.

 

[일민주의 체계표 – 출처: 한국의 지식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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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단일성에 대한 수사학적 강조 그리고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이어진다. 그리고 안호상의 여정은 이승만 정권의 초대 문교부 장관에서부터 박정희 정권의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및 재건국민운동중앙회장에 이르기까지 독재권력 아래에서 그들과 함께 했다. 물론 여러 연구들을 살펴볼 때, 일민주의는 누구의 것이라는 규정할 수 없으며 해방과 분단의 과정 속에서 일군의 이데올로그가 공동으로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고 보급했던, 즉 한반도 분단의 파생적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호상이 분명 그 일민주의의 철학적 정당화에 몰두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승만 정권 이후 안호상은 주로 대종교의 보편성이나 단군왕검의 역사적 위상을 설파한 계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상고(上古)시대와 단군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민족뿌리찾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속에서 안호상은 1964년 배달문화연구원장, 1968년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1974년 국사찾기협회 회장, 1992년 대종교 총전교를 역임했다. 이러한 대종교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 속에서 안호상의 철학은 국가주의 철학과 조금씩 거리감을 갖기 시작한다. 물론 안호상이 일민주의라는 국가철학을 자신이 속해 있는 단군사상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작업에 주력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대종교의 총전교로 선임된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단군을 크게 존숭하자 정부의 불허가 방침을 위반하고 단군릉 참관을 위한 방북을 강행할 정도로 그의 신심은 확고했다.

 

[대종교 총본사,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중앙로 3길 89 – 출처: 통일뉴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가면 여전히 우리들에게 계승되고 있는 대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삼고 단군정신을 통해 일제에 대한 항거, 민족의 단결과 부흥 및 국권을 회복해야한다고 주장하는 한반도의 자생적 종교이다. 나철, 김교헌,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항일운동을 설명하긴 힘들다. 그리고 지금 그 위세는 예전보다 줄었지만, 단군과 홍익인간은 여전히 한반도의 결속을 가져오는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호상 역시 변화했다. 그는 1985년 「무력재침은 민족의 자멸행위」라는 글에서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를 주장한다. “‘고려 연방제’도 서로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얘기할 정도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한다. 최근 들어 안호상 철학의 의의와 한계를 세심히 살펴보자는 문제제기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국가주의 철학의 정립이라는 ‘과(過)’가 있으나 서구사상의 수용과 변용을 통해 주체적인 한국의 철학사상을 정립했던 ‘공(功)’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과연 그 공을 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체적인 한국철학사상의 정립이 향한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안호상의 철학이 오늘,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어쩌면 ‘국가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필요성일지도 모른다. 한국철학의 여러 인물들 중 1950년대와 60년대에 활동한 이들 중에서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을 찾기는 힘들다. 박종홍이 그러했고, 김계숙과 최재희 역시 그러했다. 다시 질문이 주어진다. ‘오늘 우리들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기고자: 박민철(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헤겔철학을 중심으로 한 서양철학수용사와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여러 동학들과 함께 한국(근)현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현대철학사, 한반도사상사 및 지성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김세리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

 

평생 어린이를 마음에 품고 불꽃같은 열정으로 살았던 그. 33세 짧은 삶을 마감하는 방정환 선생의 유언이다. 생의 끝자락에서도 그의 생각은 오직 어린이에 대한 염려와 걱정뿐. 과연 그에게 어린이는 어떤 의미인가.

 

조선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린 사람들은 어른의 예속물 또는 부속물 정도로 간주되어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인간이기 보다는 하나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별되고 무시당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어린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불평등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하나의 존재로 이끌어내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몸소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 선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개념이 탄생하고 완성된 것은 1920년대 방정환에 의해서였으며, 그 이전에는 ‘소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어린이’라는 말이 근대성을 갖기 시작한 것을 1914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청춘』 창간호에 ‘어린이의 꿈’을 게재하는 것에 기원을 두나 용어가 근대적 개념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20년대 들어와서이다.

 

 

 

 

 

 

 

 

 

[방정환 사진 – 출처:네이버백과]
[색동회 회원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뒷줄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 출처:한국잡지백년2]

 

방정환을 떠올리면 다양한 수식어가 함께 따라간다.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선구자, 아동교육가이자 아동문화운동가, 소년운동가, 언론·출판인, 천도교 청년운동가, 동화 구연가, 민족운동가 등 그가 살았던 짧은 인생속에서 어떻게 그 수많은 일들을 해내었는지 참으로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들은 결국 ‘어린이’를 위한 운동으로 귀결된다. 독립운동가인 그는 나라운명이 미래어른인 어린이에 의해 좌우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는 여러 강연에서도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당장의 현상이 아닌 미래를 예측하는 눈으로 어린이를 대할 것을 강설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를 대함에 상당히 주체적인 인격으로 분리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의 천도교적 정신이 투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방정환 동상 – 출처:네이버]

 

[소파 방정환 망우산 연보비]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소년회의 중심일원이었다. 그리고 이미 어린이 시절부터 천도교의 소년입지회 등의 활동을 통해서 천도교 사상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대 교주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교리, 2대 교주 최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 3대 교주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천도교의 만민평등사상, 인간존중 사상은 방정환의 사회문화운동, 어린이 운동의 바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어린이를 하나의 존중의 대상, 인격으로 보고자 하는 바탕에는 그들이 차별에서 벗어난 존재론적 동등성을 부여 받을 수 있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파의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끝없는 사랑과 존중 이면에는 동학의 정신과 나라의 살리고자 하는 구국정신이 동시에 내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선생의 정신적 배경은 잊혀지고, 그저 어린이의 아버지로만 불리고 있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소파 방정환의 동상을 남산에서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기던 날(1987년), 윤석중 선생 – 출처:네이버]

 

 

‘어린이날의 노래’의 시를 지은 윤석중 선생이 회고하는 방정환을 대표하는 두가지는 말은, “정성스러워라”와 “나를 버리라”였다고 한다. 이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한울님의 한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천도교의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의 이기심을 버려 비움의 나를 만드는 것이고, 세상을 정성스럽게 맞이한다는 것은 비워진 나를 그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통해서 그러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이기적인 것들을 버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 어린이가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도 그러할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배우는 새로운 어린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성장할 것임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방정환. 그는 짧았던 인생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소외되었던 어린이의 존엄과 격(格)을 찾아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나아가 어린이를 통해 건설적인 국가 미래를 꿈꾸고자 하였다.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그는 1931년 7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투병하게 되고 33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다. 타계 직전까지 어린이를 위한 동화 집필과 구연에 몰두하였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뒷날에 큰 물결, 대파(大波)가 되어 출렁일 터이니
오래오래 살아 그 물결을 꼭 지켜봐 주시오.”

 

기고자: 김세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다산 정약용의 소통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다도(茶道)철학과 오감(五感)을 통한 인간미감(人間美感)을 연구 중에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이병태

 

‘대학로’는 정확하게는 종로 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로 이어지는 길을 일컫는다. 글쓴이에겐 이래 저래 인연이 많은 곳이다. 장장 두 세기(世紀)에 걸쳐 인근의 학교를 다녔을 뿐 아니라, 원천징수가 이뤄지는 첫 직장도 같은 동네였다. 필자가 대학을 다닌 곳임을 기려 ‘대학로’란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강변하고 싶지만, 탄핵 당한 대통령은 자신을 희생하여 기면(嗜眠)에 빠진 우리의 역사 의식을 일깨운 큰 스승이라 지껄이는 것만큼이나 공분(公憤)을 살 일이니 자제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 동네에는 여러 대학들이 몰려 있고 문화·예술 관련 기관이나 공연장도 많아 대학생들이나 청년층 유동인구가 압도적이다. 그러니 ‘대학로’는 꽤 어울리는 명칭이다. 하지만 ‘대학로’의 ‘대학’은 그 뿌리를 더듬을 때 사실 ‘경성제국대’다. 1960년대 지역명이 결정될 무렵엔 이 지역에 서울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 학교의 이미지가 ‘대학로’란 명칭에 가장 강하게 녹아 있긴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터와 건물을 비롯하여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고스란히 경성제국대학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민족 지사들의 민립대학 건립운동을 단번에 좌절시키면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이렇듯 일개 지명 속에서도 여전히 유령처럼 떠돈다.

(사진 1: 경성제국대학의 모습. 본관 등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도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은 한국지성사의 지평에서 되돌아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유구한 지적 전통을 삽시간에 뒤흔들어 무너뜨린 까닭이다. 제국 권력의 공식적인 학문·교육 기관이 탄생하면서 한국지성사는 그 정향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던 지적 전통은 순식간에 시대착오적이며 구태의연한 것으로 위축되었으며, 일본을 경유한 서구발(-發) 전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식민화의 쐐기랄 수 있는 이 사건에는 피한방울 튀지 않았지만, 참혹하기가 포연 자욱한 전장 못지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인재들은 이제 경전을 덮고 사각모를 쓰기 위해 앞 다퉈 제국의 대학에 입학하려 했지만, 그곳에는 이들을 자기부정으로 이끌 기만의 논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새롭고도 휘황찬란해 보이는 과학·기술·이론들 이면에는 ‘굴욕’을 ‘영광’으로 여기게 하거나 억압과 굴종의 심화를 ‘진보’와 ‘계몽’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숙명이라 강변하는 목소리가 항상 함께 했다. 더욱이 제국이 저작(咀嚼)하여 다시 내뱉은 설익은 서구의 이론들을, 녹녹찮은 지적 전통 위에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좇던 인재들이 속속 받아 삼키고 있었다.

탕건 자국이 문신처럼 남아있을 정도로 한학을 깊이 공부한 학생들이 많아 당시 한문 교수였던 다카다 신지(高田眞治)의 실수를 바로잡아준 일화나, 또 다른 한문 교수 다다 세이지(多田正知)가 성균관 후신인 경학원의 대제학 정봉시(鄭鳳時)에게 몰래 과외를 받다 정봉시의 친척이었던 학생에게 들켰던 일 등은 제국대학 설립 이전 조선의 지적 전통이 그 공과를 차치하고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당시 경성제대 입학생 가운데 조선인 학생의 비율은 1/3~1/2 정도였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이론에 젖어들면서도 제국의 논리에 완전히 공감하거나 동화되지는 않았다. 물론 학문권력의 중심지에 몰려든 이들이 대체로 영달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서구적 지성사에서 현실의 질곡에 맞서도록 이끌 단초를 애타게 찾았으며 이는 당연히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겠지만 일정 정도는 옛 지적 전통의 잔향(殘響)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신남철은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이였다. 그의 삶 전체에서 특별히 전통적인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고 여길만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의 조선인 동학(同學)들 일부에게 공통적이었던 시대적 정향은 그에게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외려 더 뚜렷했다. 그가 가장 집요하게 매달린 학문적 주제는 ‘역사’였고, 그의 주저 역시 ‘『역사철학』’임은 우연한 사실이 아닌 셈이다. 그는 현실의 억압을 딛고서는 인류의 시간을 집요하게 응시했던 것이다.

(사진 2 : 동아일보 1939년 1월 1일자 ‘新建(신건)할 朝鮮文學(조선문학)의 性格(성격)’이란 기사에 실린 신남철의 사진)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는 그와 같은 신남철의 시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서구 사조였다. 당시 그가 받아들여 체화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모국 또는 대국들이 정식화한 역사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하는 실천적 노선과 다르다는 점에서 ‘수정주의적’이라거나 ‘자유주의적’이라는 수사(修辭)를 받곤 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는 교조적 이론의 기계적 수용과 적용보다 현실을 고려한 창조적 수용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같은 변용은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고뇌의 무게나 상상력의 깊이 없이 불가능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마르크스주의는 신남철 사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고 이 무기를 평생 갈고 닦았던 것인데, 그에게 처음 이 무기를 손에 쥐어준 이는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또는 미야케 로쿠지죠, 三宅鹿之助)라는 인물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남철은 반(反)‘제국’적 사유의 토대를 ‘제국’ 대학에서 처음 접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미야케는 1928년 4월 18일부터 1934년까지 법학부에서 재정학 강좌를 담당했다. 하지만 미야케는 이 수업을 통해 주로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미야케의 영향력은 적지 않아서 신남철은 물론 유진오를 비롯하여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등 해방정국의 굵직한 인사들이 모두 그의 수업을 들었으며, 경성트로이카의 핵심 인물 인 이재유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 당시 이재유가 탈옥했을 때 미야케는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발각되어 급기야 이 일로 파면된다. 미야케의 진심, 그리고 그와 인연이 있던 모든 이들의 열정은 차치하고, 이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은 제국을 향한 이론적 무기가 ‘제국’의 대학을 통해 전달되는 이 ‘어긋남’이 신남철은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진 3 : 동아일보 1935년 8월 24일자 이재유 탈옥 및 은닉 사건 기사에 실린 미야케의 사진)

 

신남철은 우리에게 주로 ‘철학’의 권역에 속하는 이로 기억된다. 팔이 안으로 굽기도 하거니와 어쨌거나 ‘철학’과 졸업생인 까닭에 이 특출한 지식인을 ‘철학사’ 또는 ‘철학’의 경계 밖으로 내보내기란 철학도로서 일단은 마뜩잖다. 하지만 신남철을 철학의 영역에만 배타적으로 귀속시키는 일이 개운치 않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대단히 ‘문학’적인 인물이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신남철의 글은 현재 『역사철학』(김재현 해제, 2010)과 『신남철 문장선집』 I, II(정종현 엮음, 2013)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역사철학』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신남철 문장선집』’은 한 지식인의 글모음집 치고는 제목이 좀 어색하지 않은가? 조선시대 지식인도 아니고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후까지 활동했던 이의 글을 모아 놓고 ‘문장선집’이라 했으니 말이다.

엮은이의 말로는 『역사철학』의 경우 해제도 그렇고 완성도가 높은 판본이 김재현에 의해 이미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한 모든 글을 수록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집’이라 하기는 어려우니 『신남철 선집』 정도면 무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문장선집’이라 이름 한 까닭을 엮은이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신남철은 철학, 역사, 문학의 인문학과 마르크시즘을 위시한 당대의 사회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지식을 형성하고 실천하고자 한 종합지식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종합적인 인문지식과 실천을 추구했던 동아시아의 지식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의 제목을 ‘문장’ 선집이라 명명했다.”

신남철은 우리 역사에서 ‘철학’을 ‘전공’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상술했듯이 일정하게 옛 지적 전통의 간접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의분에 찬 역사 인식과 실천 외에,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전공의 벽에 갇혀 있지도 않았거니와 그러기에는 문학적 감수성과 지적 호기심 또한 깊고 또 폭넓었던 까닭이다. 개인적 성향과 지성사적 특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그는 창조적인 상상과 자유로운 글쓰기를 거침없이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삶 속에 삽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러한 기질은 그를 북으로 이끌었고 다시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급진의 붉은 빛이 선명했음에도 그의 사유와 삶은 구와 신, 남과 북, 식민지와 제국, 이론과 실천, 정통과 이단, 타협과 저항 사이에 가로 놓여 동요했고, 이 떨림은 다시 ‘전공’과 ‘강단’의 병속에 갇힌 이 시대의 학문과 지성에게 출구를 가리키는 애절한 손가락임에 틀림없다.

(사진 4 : 경성제국대학 예과학생들이 발행한 문학잡지 『文友』 5호. 신남철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출처 : 아단문고 웹사이트)

 

 

블로그분과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3

구태환

 

1.

최시형 기념비
(사진출처: 구태환)

 

원주역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호저면 송곡의 길가에는 기념비가 하나 서있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기리는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의 마음이 표현된 기념비이다. 여기에서 해월 최시형이라는 사상가에 관한 글을 시작한다.

 

기념비의 검은 돌에 희게 음각한 상단의 글은 “모든 이웃의 벗 崔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이다. 여기에서 ‘최보따리 선생님’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가리킨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많이 배우지도 못해 품팔이로 생활해나가던 도중 나이 서른 다섯에 동학에 입도한다. 최시형이 입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학의 교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된다. 모든 인간이 ‘천주를 모시고 있으며(侍天主 시천주)’, 기존의 질서가 전복되고 ‘다시 개벽(開闢)’되는 새 세상이 도래했음을 선포한 최제우를 조선의 기득권 세력은 ‘좌도난정(左道亂正. 사이비 도로 올바른 유학을 어지럽힘)’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한 것이다.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하여 세상에 동학사상을 전파할 임무를 띤 최시형은 ‘이단’으로 규정된 동학에 대한 탄압을 피해 각지를 떠돌 수밖에 없었고, 그때 언제나 등에 보따리 하나를 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성인 ‘최’에 ‘보따리’가 합쳐진 ‘최보따리’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 글귀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모든 이웃의 벗’이라는 표현이다. 이 간단한 표현은 최시형의 사상과 행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기념비 하단의 글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해보겠다. 흰 돌에 검게 음각한 하단의 글은 “天地卽父母요 父母卽天地니 天地父母는 一體也니라 海月先生님 法說에서(천지는 곧 부모이고 부모는 곧 천지이니, 천지와 부모는 한 몸이니라. 해월선생님 법설에서).”로, 최시형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최시형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발전시킨다. 여기에서 ‘천주’는 한울님으로서 우주 만물의 근원, 시원, 출발을 가리킨다. 모든 것의 근원을 궁구해보면 거기에는 한울님이 있으며, 인간 개개인들도 자신의 근원을 따져보면, 부모→조부모→시조…→한울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울님을 뜻하는 천지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나의 근원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이 근원으로서의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한울님이며, 따라서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人是天 事人如天. 인시천 사인여천).” 모든 이웃은 나와 같은 근원을 가진 존재요, 나의 벗이요. 나의 한울님이다.

 

처형당하기 직전의 최시형
(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ky1002027/6582293)

 

최시형의 인간에 대한 존중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베 짜는 한울님’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가 청주의 서택순이라는 동학교도 집에 갔을 때 베를 짜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서택순에게 누가 베를 짜는 것인가를 물었는데, 최시형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서택순은 자기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최시형에게 그 베 짜는 소리는 며느리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사람이고, 사람은 한울이니,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리는 한울님이 베 짜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어린아이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특히 아이를 때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아이를 때리면 아이에 깃든 한울님이 다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사회의 약자들에게도 한울님이 깃들어 있음을 설파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

나아가 산에서 우는 새 소리를 듣고 ‘시천주’의 울음소리라고도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에도 우주의 근원인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대상을 대할 때 한울님을 대하듯 해야 한다. 그 대상에는 음식도 포함된다.

 

2

우리는 밥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밥은 그야말로 하늘과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한때 한국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했던 시인 김지하의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시구는 어떤 해설도 필요없이 우리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 시구의 연원을 따져보면, 김지하의 스승 장일순 그리고 최시형에게 닿게 된다. 우주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있다는 최시형의 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주 만물에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면, 우리가 접하는 밥, 먹을거리에도 한울님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한울님이기에, 최시형은 “곡식은 천지의 젖이다”고 한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으로 살아가듯이 우리는 천지가 주는 곡식을 먹고 살아간다.

 

장일순의 제자 부부가 운영하는 원주 한 식당에 걸려있는 장일순의 글씨
(사진출처: 구태환)

 

이처럼 우리가 먹는 곡식, 즉 밥이 한울이므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한울님을 접하는 행위이다. 최시형은 이를 한울님으로써 한울님을 먹이는 행위, 즉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주린 뱃속을 채우는 행위를 넘어 한울님을 접하는 행위이다. 한울님은 우주의 근원이고, 우주의 진리이다. 따라서 최시형은 “모든 일을 아는 것은 밥 한 사발을 먹는 것에 달려있다(萬事知, 食一碗. 만사지, 식일완).”고 한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장일순의 글 “일완지식 함천지인(一碗之食 含天地人. 한 사발의 밥에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담겨 있다)”은 최시형의 이 말을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사발의 밥에 우주의 근원, 진리가 담겨 있으니, 밥 먹는 행위는 진리에 접근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흔히들 우주의 근원,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학문 등 수행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수행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결국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인해 시간과 여력이 부족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학문과 수련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시형이 제시하는 수련은 아주 단순하다. 밥에 담긴 한울님을 접하면 된다. 물론 밥을 짓는 과정, 밥 먹기 전에 한울님께 고하는 행위 등 몇 가지 격식을 갖출 것을 요구하여, 한편으로는 번거롭게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기는 한다. 하지만 “밥이 한울이다”라고 입으로 떠들지 않더라도,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수많은 땀을 흘린 노동하는 민중들에게 이미 밥은 한울과 같은 존재이며, 그러한 밥을 대할 때 요구되는 약간의 격식은 결코 번거로운 것이 아니리라. 밥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땀 흘리지 않고 밥을 얻는 이들의 그것과는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다. 최시형은 그러한 태도에 격식을 더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노동하는 인민들이 진리에 접근할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해월이 관군에 체포된 곳(해월피체지), 원진녀의 생가
(사진출처: 구태환)

 

최제우가 열고 최시형이 넓힌 이 길을 그때까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독점했던 조선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좋아했을 리가 없다. 진리에 대한 접근권은 세상을 해석하고 운영할 권리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득권자들의 탄압은 이어졌고, 최시형은 탄압을 피해 조선 각지의 길을 떠돌았다. 그 결과 동학사상을 널리 전파했고,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모든 이웃들과 벗하여 ‘다시 개벽’된 세상을 맞이하려는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위 사진 속 원진녀의 집에서 인생행로를 끝마친다. 이곳은 최시형 당시 동학교도인 원진녀라는 사람의 집으로서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곳(이곳을 ‘해월피체지’라고 한다)이다. 이 생가는 1990년 원주의 ‘치악고 미술동우회’에서 복원한 것으로, 첫 사진의 기념비는 바로 이곳 초입에 세워진 것이다. 최시형이 꿈꾸던 ‘다시 개벽’된 세상에 대한 꿈은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피체지를 복원하고, 그의 말을 실천해나가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시 꿈꿔지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원래는 해월 최시형과 함께 무위당 장일순도 다룰 예정이었다. 장일순은 ‘걸어다니는 동학’(전호근, 한국철학사, 메멘토)이라고 불릴 정도로 동학적인 삶을 살았으며, 앞에서의 해월 기념비 건립, 원진녀 생가 복원, 글씨 등에서 보이듯이 최시형에 대한 그의 애정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상가를 한꺼번에 다루기에는 지면이 부족했다. 이번에는 먼저 해월 최시형에 대해 이야기 하고, 무위당 장일순은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기고자: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 다음에는 “신남철(이병태)”의 글이 이어집니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이지

 

1.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결정을 선고하였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부여된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였고 헌정질서를 유린하였기 때문이다. 선고를 하였던 재판관이 모두발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는 헌법에 있고, 그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은 바로 국민이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파행적인 정치체제와 국정운영이 낳은 폐단을 버텨내는 것은 국민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고단한 일상에 함몰되지 않았다. 자기 삶에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는 의식은 시민의 촛불이 되어 광장을 조용히 밝혔고 강하게 연대하였다. 이를 두고 촛불혁명이라고도 하고 시민혁명이라고도 하며 민주주의의 승리를 감격해한다. 충분히 감격할 일이다. 그러나 혁명은 무혈이건 유혈이건 파괴를 본질로 한다. 이제 무너뜨린 그 자리에 건설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감격에 취해있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숙제가 너무 많다.

 

탄핵심판선고 / 광화문촛불
(사진출처: 연합뉴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의 탄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탄핵된 대통령은 또 있었다. 바로 이.승.만. 우리는 대부분 그를 ‘초대대통령’으로 기억한다.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60년 4월까지 3대에 걸쳐 연임한다. 그리고 4.19 혁명 직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 때 이승만은 탄핵된 것이 아니라 하야(下野) 형식을 취했다. 그렇다면 그가 대통령으로서 탄핵되었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이가 3명 있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손병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이와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이 기획되었다(<조선독립신문>제2호, 1919년 3월 3일자 보도). 그리고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정부가 가장 먼저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1919. 3. 21). 이 곳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 외에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던 임시정부가 3곳이 더 있다. (당시 여러 임시정부 중 한성정부(1919. 4. 23)에서는 대통령격인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후 국내외에 다수로 분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하나의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상해에 두게 된다(1919. 9. 6). 통합되기 전 다수의 임정 가운데 한 곳이었던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수립하면서(4월 13일 언론에 공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10개조)를 제정하여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처음에는 내각책임제였는데, 이후 통합하면서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전문을 포함한 8장 57개조의 민주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다(1919. 9. 6).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는데, 이 헌법이 보장하는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손병희 다음에 대통령으로 불린 두 번째 인물이라면, 세 번째가 박은식이다. 1920년경 박은식은 독립운동가로서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임정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롯한 갖가지 문제를 두고 내부 분열이 심화되어 있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박은식을 차기 지도자로 추대하였고, 박은식은 ‘임시대통령 불신임안’, ‘임시대통령 유고안’, ‘임시대통령 탄핵안’ 등이 걸려 있던 이승만 문제를 일단락지은 후 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추대된다(1925. 3). 그러나 박은식은 곧바로 개헌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신설해 내각책임제로 바꾼 후 5개월간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우리 정부에서 대통령으로 불린 인물은 없었다.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을 두 번 역임한 셈이다. 통합임시정부 초대대통령과 대한민국정부 초대대통령.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초대대통령으로서는 탄핵당했고, 대한민국초대대통령으로서는 하야 후 망명하였다.

 

손병희 / 이승만 / 박은식
(사진출처: 네이버)

 

3.

20세기 우리의 독립운동은 두 가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하나는 외세의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자주독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일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체제를 건립하는 일이었다.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왕조체제와 신분질서체계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물론 군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에 저항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모든 백성들이 이른바 시민의식을 고취할 만한 확장된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외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데에 요구되는 이념과 체제는 밖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주어졌다. 백성들은 여전히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타고난 신분적 제약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통치체제에는 군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민주의 개념과 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정부형태의 수장도 왕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중계몽과 교육운동에 헌신했었던 사람들이 많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역시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학교 설립과 교사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일제의 침략위협이 강하게 압박해올수록 그는 개혁론을 주창했었다. 제도와 형식의 개혁 이전에 국민 개개인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사회에서 책임 있게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는, 일종의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을 도모한 것이다. 군주제 몰락 이후 민주공화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였기에, 국민 개개인의 의식의 개화가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새로운 사회를 감당할 수 있는 의식이 자생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교육은 수단으로서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배계층이 전유하다시피 하였던 교육의 대상을 확대하고 어려운 한문이 아닌 국문을 사용하여 속도감 있는 교육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그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통적 유가지식인들이 스스로 개혁할 것을 촉구한다. 본래 유학의 정신은 군권을 존중[尊君權]하는 데에 있지 않고 백성을 중요시하는[民爲重]하는 데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전통성리학자들이 갖는 제왕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고 “공자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하고 이 학문의 공덕을 발휘하여 백성에게 행복을 주고자 한다면, 이것을 개량해 맹자의 학문을 넓혀서 인민사회에 널리 미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제안한다. 전통적 사고방식의 본래성을 회복하여 민주공화적 의식으로의 개혁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의 바탕에는 양명학이 있다. 그의 개혁론은 양지가 주체가 되는 실천적 변혁이다. 더불어 그는 의식의 개혁과 성장이 선행되지 않은 채 제도와 형식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새로운 제도와 형식은 구체제 의존적인 의식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될 것임을 예상하고 그 위험을 경계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후에 박은식은 역사서 집필에 주력하며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쟁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가 저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1915)는 1864년부터 1911년까지 한국의 애통한 역사, 그러니까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는 최근의 우리 역사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읽고 제대로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 책은 국내외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켰고 일제는 이에 당황하여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게 된다. 1920년에 저술한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나라 평민의 혁명’으로 평가하고, 의병을 자세히 다루면서 민중의 역할과 민권의 중요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처럼 혁명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3.1운동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에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신한청년단의 기관지를 맡았고,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있는 상해거류민단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득이 대통령직을 받아들였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는 통합된 민족의 독립과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민주와 공화의 정신을 민중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고민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박은식이 작성하고 한국 민족대표 26인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서.  
(출처. 네이버)

 

4.

탄핵된 대통령들은 대통령을 왕의 다른 이름쯤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통령의 이름으로 군림하던 군주를 끌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한 독재자를 처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주공화의 정신을 실현하는 일이다. 본래적으로 평등한 이들이 자유롭게 연대하여 본래의 평등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려는 것이다. 신분제적 질서를 바탕으로 군주가 통치하는 왕조체제는 이미 종식되었다. 그러나 체제는 변하였어도 의식이 여전하다면 유사왕조체제가 운영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은 끈질기게 고민하였다. 독립이후 건설해야 하는 민주공화적인 대한민국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해방 후에도 오랜 시간동안 변형된 유사왕조체제가 거듭되었다. 또한 역시 자주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끈질기게 분투해왔다. 그리고 지금 오랜 왕조의 종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이 했던 민주와 공화의 고민은 지금 우리의 고민이다. 

 

기고자: 이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화여대)

왕양명 철학과 최한기 철학을 연구하여 석박사를 받았다. 철학은 역사와 더불어 생성되고 철학 연구도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화여대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 다음에는 “최시형과 장일순”(구태환) 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 박영미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 1

 

박영미

 

1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중에서)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함께 분노를 외치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들의 분노와 희망은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현재로부터 미래를 여는 것이었으며 또한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광장의 촛불 속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 길을 기억했고, 현재에서 미래로 열릴 길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광장은 그렇게 ‘길’이 되었다.

 

(국민일보)

 

2

광화문 광장에는 두 개의 동상이 일렬로 서 있다. 하나는 이순신, 다른 하나는 세종대왕. 나는 촛불 광장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었던 이순신 동상을 보면 오늘의 박근혜와 어제의 박정희가 오버랩 된다. 광장의 동상이 오늘의 박근혜가 곧 어제의 박정희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 집권한 박정희는 1968년 광화문 앞 세종로에 6미터가 넘는 이순신 동상을 세운다. 정권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하는 박정희에게는 뛰어난 무장이자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해 12월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된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 독립에 힘쓰고, 밖으로는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1994년에 폐지될 때까지 누구나 반드시 읽고 외어야 하는 주문(?)이었다. 박정희는 이 주문을 공포하고 관련 교육을 강화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고 통제한다는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순신 동상의 건립과 <국민교육헌장>의 공포는 이미 계획된 ‘10월 유신’을 위한 포석이었다.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 금지를 내용을 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직선제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한다. 바로 이 시기 <국민교육헌장>의 초안을 기초하고,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5년간 수행하면서 10월 유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박종홍(1903~1976)이었다.

 

박종홍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활동했던 서양철학 1세대로, 서양철학 1세대 중에서 드물게 전통철학의 현대적 계승이 필요함을 인식했으며, 서양철학과 전통철학이 결합된 ‘우리철학’을 모색한 철학자였다. 또한 경성제대부터 서울대학교까지 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한국 강단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박종홍이 학문 생애 전체를 통해 노력한 ‘우리철학’의 모색은 의도의 선의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국가권력과 결탁되며 일그러졌다.

 

그가 주장한 ‘부정성-주체의 자각-창조’의 논리는 전통철학과 결합하여 ‘천명-주체의 자각-참여’로 해석되었고, 다시 <국민교육현장>에서 ‘역사적 사명-민족적 자각-민족중흥’으로 구체화되었다. 더 나아가 천명과 역사적 사명은 ‘국가’로, 주체와 민족적 자각은 ‘국민정신’으로, 참여와 민족중흥은 ‘근대화’로 바꿔도 무방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정성’은 역사적 사명이 된 절대적인 국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주체의 자각’은 교육과 지도로 내면화된 국민의 정신으로 전락하였으며, ‘창조’는 개발 반공 민주 애국 애족을 내용으로 하는 편협한 근대화로 축소되었다.(『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300쪽)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이 보여줬던 국가의 모습은 이렇게 박정희가 꿈꾸고 계획했던 국가의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을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 부녀의 불온한 꿈을 저지했다는 의미에서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30년이 지나 다시 박근혜가 선택(?)되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성급한 희망일 수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 개인의 권력욕과 이를 도운 철학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절대 국가가 아닌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갖춘 국가, 복종하는 국민이 아닌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 국가의 강요된 목표가 아닌 개인들의 바람과 꿈을 사회의 목표로 만들기 위한 쉼 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3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열려진 길 위에서 시선을 미래보다는 과거에 두고자 한다. 우리철학, 한국근현대철학은 역사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때로는 열려 있지 않은 길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바꾸기도 했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분투했던 우리철학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고 이제는 이에 대한 정리와 성찰이 필요하다. 그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잘못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없다면 철학에서의 ‘종언’은 요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 걸음은 한국근현대철학을 소개한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동녘, 2015)의 출간이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고은의 「길」 중에서)

 

기고자: 박영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양대) 

중국 청대 대진의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7세기이후 동아시아 철학의 변화와 교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는 한국현대철학과 중국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 다음에는 “박은식”(이지)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