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거울-형이상학의 근거에 관해
1)
형이상학이 무엇을 다루는가에 관해 논란이 많다. 누구는 신을 다루는 것이라 하고 누구는 세계의 가장 근본적 원리를 다루는 것이라 하며 또 누구는 실재나 본질, 실체와 같은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arche]을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이 무엇이든, 그것은 형이상학의 근거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형이상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사유의 나래를 펼쳐나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형이상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단순한 공상과 매한가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형이상학이 형이상학이 되려면, 적어도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형이상학이란 말이 어떤 ‘형’을 넘어서는[meta] 것이라는 말인데, 이때 사유를 통해 그 형을 넘어서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형이 전제되는 한에서 넘어서는 것이니, 바로 그 형이 형이상학의 근거가 될 것이다.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넘어가는 대상인 자연학[physics]이다. 그 때문에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에 근거해야 한다는 오해가 지배했다. 하지만, 이 ‘physis’가 꼭 자연과학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형이상학’이란 말에서는 ‘형’은 구체적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구체적 형태라면 어느 것이나 형이상학의 근거로 가능하다.
여기서 근거라는 말이 모호하다. 근거는 형이상학은 사유의 전제가 된다는 말이지 그 근거가 형이상학의 올바름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근거는 넘어서라고 있는 것이지, 형이상학을 규제하고 진리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넘어섬’을 사유에서는 연역적인 사유와 구별되는 귀추법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연역적 사유가 근거에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귀추법은 설명되는 현상에서 거꾸로 설명하는 근거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다.
2)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근거로 가장 널리 이용된 것은 수학이다. 피타고라스학파가 음을 수적 비율로 환원한 이래 수학적 원리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의 근거로 격상되었다.
‘원’은 완전성을 의미하고 ‘삼각형’은 안정성을 의미한다는 일종의 상상적 사유는 제쳐 놓자. 중요한 것은 수의 원리이다. 일자와 공허,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것이 수의 원리나 기하학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가 세계의 근본 원리로 고양되면서, 모든 세계가 이런 기하학적 공간과 같다거나 수적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이상학이 등장한다.
그러나 수의 원리는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원리가 된다 하더라도 이 일반적 형식은 세계의 가장 외면적인 것에 해당할 수는 있으니, 세계 속의 모든 존재가 외면적으로는 이 수의 원리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이 지닌 가장 외면적인 측면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 아닐까? 이런 외면적인 것을 곧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인간의 가장 외면적인 측면은 단순한 공간적 존재나 물질적 질량이다. 공간이나 질량은 수적인 원리에 따라 전개된다. 이 공간이나 물질적 질량 없이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지만, 이것은 가장 외면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형이상학의 근거는 자주 자연과학 특히 물리화학이라고 알려진다. 사실 ‘형이상학’이라는 말 자체가 ‘자연학을 뒤에 또는 넘어서’라는 뜻이니, 자연에 관해 알려진 법칙, 그것도 가장 일반적인 법칙은 자주 형이상학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뉴턴의 법칙은 근대 유물론의 근거가 되었으며, 오늘날 양자 역학이나 파동설은 최근 논의되는 많은 신유물론적 형이상학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자연과학의 세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물의 세계나 인간의 역사도 하나의 세계이니, 자연과학의 영역 즉 물리화학의 세계만을 형이상학의 근거로 보면, 생물의 세계나 인간 정신의 세계는 그로부터 설명되지 못하거나, 이를 자연과학의 세계로 환원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3)
형이상학의 또 한 가지 중요한 근거는 우리의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존재’니 ‘운동’이니, ‘원인’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자주 사용되는 언어는 원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원초적인 의미야말로 형이상학의 세계를 드러내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작업이 자주 형이상학의 모범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가장 잘 알려진 ‘현존재’라는 개념을 보자. 즉 인간은 현존재[Dasein]인데, 이는 ‘Da’에 ‘Sein’이 현현한 것이며, 인간은 존재가 자기를 현현한 존재자이니, 거꾸로 인간의 현존재를 이해하면 마침내 존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원초적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작업이 아닐까 한다. 추상적 개념이 형성될 때는 구체적 감각적 개념을 비유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 의미가 생생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것이 항상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것은 여러 의미가 뒤섞인 것으로 볼 수 있으니, 한편으로 이 감각적 구체적 개념을 매개로 해서 추상적 개념이 지닌 일상적 의미에서 감추어진 다른 의미로 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이런 도약 자체가 비유에 기초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주 철학강의에서 어려운 말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면, 처음에는 아주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뒤에는 도대체 더 모르겠다고 한다. 구체적 예가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또, 철학 용어를 우리말화하려는 시도도 우리말 속에 우리 민족의 원초적 사유가 들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말이 반드시 그런 원초적 사유라고 볼 이유도 없다.
게다가 이런 경우 소위 말장난이 벌어진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가 그렇다. 이를 하이데거처럼 풀이하는 것은 일상적 의미와는 다르다. 일상적 의미에서 현존재는 영어로 ‘There is’라는 의미이니,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것, 즉 거의 모든 사물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헤겔은 현존을 바로 이런 존재자 즉 실재성, 경험적 대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4)
형이상학은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을 찾아 나선다. 지금까지는 주로 밖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면, 이제 자기 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칸트는 이런 형이상학의 길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칸트는 우리가 직관을 통해 경험을 받아들이고 이런 관념을 사유를 통해 추상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즉 우리는 세계를 논리적 범주를 통해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이다.
논리적 범주는 판단의 형식이며, 칸트는 이런 범주에 12가지가 있다고 했다. 세계는 이런 12가지의 범주를 통해 인식된다. 여기서 판단을 보는 중대한 관점의 변화가 출현했다. 그 이전 형식(일반) 논리학에서 판단(또는 명제)은 사유를 구성하는 단위일 뿐이다. 판단은 그 자체로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 판단에 대응하는 것은 사태이며, 판단이 독립적인 불가분적 원자를 이루듯 이 사태 역시 하나의 원자로 세계를 구성한다.
형식 논리학은 판단을 단위로 해서 이 판단이 사유의 공간에 움직이는 법칙을 찾는다. 그 법칙은 곧 동일성이고 모순율이니, 사유 속에서 이런 법칙에 따른 어떤 운동을 통해서도 판단의 내용, 그것의 진위는 변함이 없다. 그 결과 모든 사유는 동어반복이며, 사유의 공간은 마치 유크리트 기하학에서의 공간처럼 추상적이고 단순한 공간이다.
이 사유 공간은 사유의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사유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사유의 핵심은 판단 작용에 있는 형식 논리학은 사유의 내적 구조 즉 판단의 형식에 관해서는 파고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칸트가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고 하면서 판단을 그 자체로 사유의 단위로 보는 관점이 무너졌다. 칸트로부터 판단의 내적 구조, 그 형식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세계의 근본 구조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판단은 가장 단순하게 보면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판단의 형식에 따라서 여러 유형, 방식이 존재한다. 판단의 형식 즉 논리적 범주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세계를 어떤 경우에는 이런 방식의 범주로, 다른 경우에는 다른 방식의 범주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세계가 지닌 다양한 모습이 이런 판단의 유형과 방식에 따라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는 여러 영역 즉 물리학적 세계나 생물학적 세계, 인간 사회의 세계 등은 모두 이런 범주의 차이로 환원될 수 있다.
칸트에서 세계의 모습은 다양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 칸트에서 형이상학은 논리적 범주를 근거로 한다. 칸트의 선험철학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형이상학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그러나 칸트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논리적 범주를 통해 구성된 세계를 현상계로 규정한다. 칸트가 말한 12개 범주로 구성된 세계는 수학이나 자연과학과는 무관하다. 수학이나 자연과학은 칸트의 현상 세계를 근거 지을 수 없다.
칸트는 자기의 형이상학적 세계가 자연과학이나 수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이 자연과학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뉴턴의 법칙을 끌어낸 것이 아니며 수학의 법칙을 설명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논리적 범주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넘어 찾아 들어간 형이상학의 세계다. 칸트는 형이상학 앞에서 그것이 일반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것은 현상계이며 과학의 세계이고, 그 너머 또 다른 어디에 형이상학이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가 이 또 다른 어디에 있는 형이상학을 찾아 나선 것은 자기 자신의 논리적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논리적 범주 넘어서 직접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범주는 12개로 제한되는데, 왜 하필이면 12개인지를 확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논리적 범주라는 개념을 일반 논리학에서 이를 끌어냈지만, 일반 논리학은 경험적인 방식으로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을 4개로 제한했다. 칸트는 질, 양에서 무한 판단 형식을 추가하고 기존에 복합판단으로 여겨지는 관계 판단이나 양상 판단을 판단의 기본 형식으로 끌어들여 12개 판단 형식을 만들기는 했으나, 그 근거는 확립하지 못하고, 이를 기존 논리학에서 그러하듯이 경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 결과 그 자신 12개의 판단 형식이 자의적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12개의 판단 형식 넘어 세계를 가정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물 자체의 세계에 부딪혔으며, 이런 물 자체의 세계는 판단 형식 넘어 세계라고 보았고 이 물 자체의 세계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형이상학이라 했다. 물 자체는 알 수 없는 세계이므로 그 개념상 그런 세계는 알 수 없으니, 형이상학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의 논리상 불가피했다.
6)
칸트의 선험철학은 판단의 형식, 주어와 술어의 다양한 결합 방식이 형이상학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판단 형식, 논리적 범주로부터 형이상학을 끌어낸 가능성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처음으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형이상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주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실체’라 했으며, 술어로 사용되는 것을 ‘속성’이라 했다. 이런 규정은 주어나 술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판단의 형식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는 이런 판단 형식에서 주어이며 술어는 이런 판단 형식에서 술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주어와 술어의 관계 방식 자체를 더는 문제 삼지는 않았다. 실체와 속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는 데 그쳤다. 반면 칸트는 논리적 범주를 통해 주어와 술어의 관계 즉 판단의 다양한 형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칸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단서에 따라서 나가는 형이상학의 길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이런 전환이 가지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이해한 것은 헤겔이었다. 하지만, 칸트가 부딪힌 물 자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논리적 범주가 자의적인 주관의 산물이 아니라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객관적인 범주라는 사실을 확립해야 했다.
헤겔이 했던 일은 칸트에 비하면 오히려 단순하다. 즉 칸트의 12개 범주를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즉 칸트에서 12개 범주는 마치 좌표축처럼 분포되어 있어서 경험이 이 가운데 어느 한 축에 있는 범주에 집어넣은 것과 달리, 헤겔은 12개의 범주를 논리적으로 하나가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물론, 하나의 범주가 그다음 범주로 이행하는 데는 경험에서 부딪히는 모순이 매개 된다. 이 모순은 칸트가 범주를 물 자체에 적용하면 생겨난다고 말한 모순인데, 헤겔은 각각의 범주마다 이런 모순에 부딪힌다고 보았다. 즉 기존의 범주를 통해 경험을 구성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런 범주로서 규정할 수 없는 경험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이율배반이나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험이다. 이 ‘이율배반’이나 ‘자가당착’은 새로운 경험 즉 기존 범주의 한계선상에서 출현한 경험에 기존의 범주를 적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모순적 경험에 부딪히면, 사유는 자기 내로 반성해서 기존의 범주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근원적인 범주로 이행한다. 이 새로운 범주에서는 기존의 범주에서 모순적인 경험이었던 것도 이 새로운 범주의 체계 내에 들어와서 규정된다. 모순은 해소되지만, 이 새로운 범주에 다시 또 한계선상의 경험이 출현하게 되면서 논리적 범주에서 계속된 전진이 일어나게 된다.
헤겔은 이 길을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서술한 바 있으나, 상세한 것은 생략하고, 헤겔에서는 이 의식 경험의 길이 곧 형이상학의 근거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런 의식 경험의 길은 칸트의 선험철학 즉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가 경험을 구성한다는 원리를 전제로 하니, 헤겔은 칸트가 제공한 단서에 따라서 칸트가 완성하지 못했던 길을 앞으로 달려나갔다.
헤겔은 <논리학> 판단론에서 구체적으로 이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분석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존의 형식 논리학은 명제를 하나의 사태에 대응하는 고립된 원자로 보고 판단의 내부 형식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헤겔은 판단론에서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이를 분석하려 했고, 이런 분석이 그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는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판단 형식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 것이니 생략하자. 인간의 사유의 독특함은 명제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침팬지도 언어를 사용하지만, 주어 술어로 분화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원숭이에게 명제는 형식 논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사태에 대응하는 것이다. 반면 인간의 사유를 기초로 하는 언어는 주어 술어로 굴절[articulate]되어 있으니, 이것이 인간 사유의 근본적 특징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문제는 이런 독특한 구조를 가진 세계가 주관의 사유 법칙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거꾸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근거가 되는가이다. 바로 이 형이상학의 근거를 제시한 것이 칸트의 철학이니, 칸트의 철학적 혁명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