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이종철 철학박사(연세대학교)의 허락을 얻어 언론에 쓴 칼럼과 여러 글들을 연계하여 게재합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7회|3. 광주항쟁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일곱 번째 글

3. 광주항쟁(4)

 

예나 지금이나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침 우리의 거사 날짜는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수걸은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토요일로 잡은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왼쪽으로 지하도가 있었고, 바로 앞에는 유명한 빵집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 맡은 분량의 전단지를 뿌렸다. 동시에 우리는 외쳤다.

 

“계엄을 철폐하라, 광주의 진실을 밝혀라. 학살 원흉 전두환은 물러나라!”

 

비상계엄이 여전했고,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현실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런 엄청난 구호를 외친 것이다. 도로 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깍깍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광주 사태 이후 더욱 강화된 계엄상황에서 이런 데모를 벌이는 것 자체를 두렵게 보았을 것이다. 전단을 여기저기 뿌렸다. 뿌렸다기보다는 처음 해보는 일에 당황해서 그냥 뭉터기로 내 던졌는지 모른다. 지하도 안으로도 던졌고, 거리에도 던졌다. 손에 더 이상 전단이 없자 수걸과 나는 주먹을 쥔 오른손을 번쩍 들고 명동 방향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걸었다. 사람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우리 앞길을 열어 주었다. 단 5분도 안 걸린 시간이었을 텐데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목이 쉬어 버렸다. 그 이후로 내가 여러 차례 경험해봤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영원과 접속되는 경험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 같았다. 그 사이 누군가가 우리를 신고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 몇 명이 나타났다. 계엄군이 출동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만약 군인이 출동했다면 그 자리에서 그냥 반죽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로 수갑찬 채 명동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에 도착하니 비로소 상황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파출소의 한 젊은 순경은 우리가 다소 안쓰러운지 담배를 권했다. 담배 한 모금을 빨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깥은 우리의 시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토요일 오후 인파들로 덮여 있었다. 우리의 시위는 찻잔 속에 잠시 미풍이 분 것 정도도 안 되었다. 그런 일을 도대체 왜 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타인이나 사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키호테식 행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실제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우리 뒷선을 아무리 캐도 나오지 않자 ‘이거 미친놈들 아냐. 완전 동키호테구먼.”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우리의 시위는 일종의 자기 확신에 기초한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고,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채무 이행이었는지 모른다. 훗날 이 사건을 반추하면서 나는 다시 새로운 다짐을 했다. 다시는 이런 동키호테식 자기 고백은 하지 않겠다고.

명동 파출소에서는 별다른 조사 없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부서로 이첩됐다. 우리가 도착하니 큰 상황판에 방사선 형태의 그림이 그려졌다. 일단 형사 앞으로 가서 심문받고 조서를 써야 했다. 우리가 앉자마자 다짜고짜 한 형사가 뺨을 때린다.

 

“이런 미친놈들, 지금 시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이런 폭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놈들,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배후가 누구야?” 다른 형사가 큰 목소리로 추궁했다.

“배후는 없습니다. 우리 둘이 다 결정한 것입니다.” 친구가 대답했다.

 

한참을 캐도 드러난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냥 보호실 철창으로 집어넣으라는 말이 들렸다. 바지의 혁띠를 푸르고, 내가 차고 다니던 보조기도 풀어야 했다. 당장 걷는 데 지장이 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잡범들과 함께 보호실에서 보냈다. 낯선 철창, 평소 범죄자들로 백안시했던 사람들과 한방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잠은 잘 잤다. 이제 나에게 익숙한 세상은 사라지고, 낯설고 새로운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거사 당일 밤 수걸과 나의 집으로 형사대들이 급파돼서 증거물이 될 법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 그날 밤 가족들이 크게 놀랬다고 한다. 아닌 밤중에 형사들이 조사를 위해 왔다고 하니까 가뜩이나 걱정이 많은 어머니가 많이 놀랬다. 수걸의 집을 조사했던 한 형사는 수걸의 집 책장의 수많은 장서들을 보고 놀랬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의 집에는 아버지와 형이 보던 책, 그리고 수걸이 보던 책들이 빼곡히 꼿혀 있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주범은 지수걸이고, 종범은 나로 확정됐다. 때문에 수걸은 수시로 불려 나갔다. 전단지를 인쇄한 곳이 어디냐는 추궁을 받았지만 그는 잘 둘러쳤다. 적어도 그를 믿고 일을 해준 사람들이 곤욕 치르지 않도록 처리했다. 그의 일처리는 생각보다 꼼꼼했다. 그가 한참 후에 한국형 레스트랑을 창업해서 크게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의 일솜씨가 바탕이 됐을 것이다.

처음 시작한 경찰서 보호실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때가 때인 지라 정치범들이 여럿 잡혀 있었다. 이곳에는 이미 김대중 산하 청년 조직인 연청 관련 인사가 들어와 있었고, 근처 동국대의 핵심 간부들과 선후배들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 씨 연설한 것들을 녹음해서 배포한 음반 업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지사형 정치인도 있었다. 그리고 이 보호실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들어온 사람들 외에도 일반 잡범들도 많았다. 계엄 상황에서 나중에 삼청교육대로 보내진 수많은 잡범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치범에 대한 예우 때문인지 우리는 비교적 좋은 자리에 있었지만, 더운 여름날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는 상태로 칼 잠을 자는건 참으로 고역이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할 때 알게 된 “타인은 지옥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몸으로 체감했다.

내가 광주 학살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곳은 바로 경찰서 보호실 안에 들어와 있던 한 잡범을 통해서였다. 보호실 안은 끊임없이 소란스럽고, 온갖 소리들이 난무했다. 특히 밤에는 입담 좋은 친구들 주변으로 삼삼오오 몰려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담당 경찰관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냥 묵인했다. 하루는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했고, 자신은 사선을 넘다시피 해서 그곳을 탈출했다고 했다. 그가 그날 밤 구구절절이 광주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을 때 다들 할 말을 잊은 듯 침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리얼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도 사투리로 떨리는 듯 말했다.

 

“정말 이제 못 보겠습디다. 공수 부대 안 있소? 완전히 무장해 갔고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빡부터 뚜드려 패버리는 거예요. 그러먼 그 자리에서 자빠져불죠. 그렁께 여기저기 사람들이 막 쓰러져 있는 거예요.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옷부터 배께 갖고 팬티만 남기고 도로에 무릎 꿀레서 일렬로 안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개머리판으로 사정 없이 패 부었어요. 길 가던 시민들은 놀래갖고 ‘오매 저러다 사람 죽이겄다’고 하면서도 군인들이 워낙 살기가 등등하니까 어쩌지도 못하고라. 최루탄을 쏴나서 눈도 못 뜨고 숨도 못 쉬고요. 멀리서 보고 오다가 도망가는 젊은이가 있으면 끝까지 쫒차가서 같은 방식으로 패버리는 거예요. 나는 너무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어요.”

 

그날 밤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올 때 일반 잡범들도 조용히 침묵했다. 어떤 이들은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도저히 국민의 군대라고 할 수 없다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동국대 운동권 출신의 한 사람이 질문했다.

“직접 당신이 확인한 건가요?”

“그러문 요오. 신문에 안 나니까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3일째 되는 날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께 무서워서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화순 쪽으로 빠져서 어떻게 기차를 겨우 타고 서울로 도망을 온 거예요. 물론 오면서 양심의 가책도 들었어요. 내가 아는 친구들도 저렇게 무자비허게 당하고 있을 텐디 나만 도망을 가는구나 하고요.”

 

그가 광주의 현장에서 도망간 것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1차적인 보호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로 한반도의 남녁은 깊은 침묵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과연 하늘에 신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주여!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날 그에게 끔찍한 광주의 학살 현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솔직히 분노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렸는가, 그리고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 것인가, 감방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여파가 밀려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등등으로 밤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경찰서 유치장에서의 삶은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민생 사범들을 대거 잡아들이면서 보호실의 인구 밀도가 극도로 높아져서 지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6회|3. 광주항쟁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여섯 번째 글

3. 광주항쟁(3)

 

“그 당시 나는 교회에서 알게 된 미정에 대해 연애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도 회사에서 틈만 나면 나에게 전화했고, 전화를 시작하면 꽤 오랜 시간 전화기를 붙잡고 있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서로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감방에 들어간다면 그녀와의 만남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에 미치면 괴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거사를 하기 전날 나는 그녀의 집을 먼저 찾아갔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어야만 했다. 나중에 제3 자를 통해서 나의 거사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나에 대해 실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내가 써 왔던 일기장을 그녀에게 준다는 것도 나 자신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나의 생각과 행동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밤늦게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가서 그녀를 불러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사선을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왜 불러냈느냐는 식의 심드렁한 표정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예요? 이 늦은 시각에.” 아주 뜬금없다는 태도다.

“잠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야.”

“그냥 전화로 하던지, 아니면 밝은 낮에 하면 안 되나요?”

 

그 말을 듣자 그녀와 나 사이에 넘기 힘든 벽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간에 감정이 완전히 불통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물론 내 생각이 너무 앞서 간 면이 있었지만 달리 어떻게 할 시간도 없었다.

 

“알았어. 그런데 이 노트를 잘 좀 보관해줘. 내가 오랫동안 써 왔던 일기야. 그리고 나 내일쯤 당분간 멀리 떠나게 될 거야.”

“아니, 그걸 왜 나한테 줘요. 도대체 어디를 가는데 그래요?”

 

내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일기장을 건네자마자 바로 그녀를 뒤로 하고 떠났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내 마음이 전혀 전달되지 않았고, 나의 절실한 감정에 대해 무신경한 그녀의 태도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녀와는 비슷한 경험을 나중에 다시 하게 되었다.

 

다음 날 나는 수걸의 집으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섰다. 이날 벌어질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1980년 6월 27일은 평생 가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는 봉천동에서 금호동 까지는 한참 먼 거리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집은 금호동 로타리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간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나의 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예수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문을 두드리자 나온 수걸은 나를 보자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야?” 뻔히 알면서 묻는다.

“너 때문에 내가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놈아.”

“왜 네가?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지.”

“너라면 그게 편하게 받아들여지냐?”

“내가 너를 만나러 간 것은 뒤처리 좀 부탁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니까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냥 뒤처리나 할 사람으로 보였나?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다. 내가 너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면 너 역시 나의 마음을 꺽을 수는 없을 거다. 내가 며칠 동안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만 말할게. 네가 하려는 거사에 내가 함께 하겠다.”

“뭐라고? 그건 안돼. 내가 너를 끌어들인 셈이 되잖아.”

“너는 나를 뒤처리용으로 생각한다고 했지만 사실 너도 내가 함께 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툭 하니 말을 내뱉는다.

“알았다. 그렇게 하자.”

 

이 말을 시점으로 함께 하기 위한 거사 준비를 일사분란하게 진척시켰다. 이미 거사 일에 현장에서 뿌릴 전단은 수걸이 다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각자 주소가 확인되는 친구들 한테 전단지를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 주소를 적었다. 나중에 친구들이 놀랠 수도 있어서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편물을 보내는 과정에서 내가 친구의 이름을 잘못 적어 보낸 것이 있다. 나중에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해줬다. 그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나온 실수였다.

다음으로 우리는 몸을 단정히 하기 위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깍고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도 했다. 이제 마음의 준비도 다 됐다. 우리는 함께 거사 장소인 퇴계로 명동 입구의 지하도로 향했다. 묵직한 전단지를 들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 승객들이 다 우리를 주목하는 것만 같았다. 온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떨리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내가 지금 큰일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 곳곳에는 무장한 계엄군이 보였다. 잠깐 순간이었지만 나의 미래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불투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5회|3. 광주항쟁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다섯 번째 글

3. 광주항쟁 (2)

 

내가 광주 학살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사회에서가 아니라 중부서 보호실에서였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보도 통제된 일간지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을 통해 간간히 광주 학살에 관한 이야기들을 접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진상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지수걸을 통해 계엄 철폐 데모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은 초여름의 햇살이 밝게 비추던 일요일이었다. 나는 그때 새로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 있었다.

 

“뭐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시우야, 조용히 해. 잠깐 내 말 좀 들어줘. 내가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한 게 아니야.”

“아니, 지금 시국이 어떤 상황인데 그런 생각을 해? 너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 줄 알아? 그 행동 하나로 인해 너의 인생이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 봤어. 어떻게 이기적으로 네 생각만 하냐? 너의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그래, 나도 그 점을 충분히 생각했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위해 몇 날 며칠을 하나님에게 울면서 기도했어. ‘주여, 이 잔을 내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주소서’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간절한 기도 끝에 내가 얻은 대답은 가라, 네가 선택한 길을! 이었어.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니까 오히려 내 마음이 아주 차분해졌어. 그러니 나의 이런 심정을 친구인 네가 이해를 해줬으면 해.”

 

친구 수걸하고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가페’라는 서클에서 만났다. 그 후 우리는 그 써클을 탈퇴했지만 그와 나는 서로 죽이 잘 맞아 계속 만났다. 나는 그가 다니던 K동 교회 청년회 사람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때마침 1977년에 아동 급식 빵으로 인해 대규모 식중독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됐었다. 나는 이 사건을 풍자한 사회극 시나리오를 써서 교회의 연극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당시 나는 카뮈의 『이방인』이란 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시나리오는 그 작품에 등장하는 검사의 논고를 흉내내 기성인들의 부패를 고발한 작품이다. 수걸과는 자주 어울려서 서울역 앞에 있는 고아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광주 사태 이후 갑자기 찾아와서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데모해야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정적으로 그에게 동조는 해도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설득하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일단 결심한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달걀을 가지고 바위에 내리친다고 하면서 이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큰 바위도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거사 1주일을 앞두고 나에게 일방적인 통보 비슷하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가 폭탄선언을 하고 간 뒤로 내 머리가 아주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그 당시 교회에서 만난 한 여성과 막 사랑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친구가 기름통을 메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하니까 더 대책이 서지 않았다. 이제 공은 나에게 넘어왔고, 내가 결정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이 사실을 친구 가족들에게 알려서 그의 거사를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외롭게 역사의 짐을 지고 가는 친구의 거사에 동참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이미 마음이 굳어진 친구의 결심을 더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 같이 다녀 보지 않은 새벽 기도를 나가서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이런 신심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그저 열심히 기도를 통해 물었다. 그때는 잠도 하루에 서너 시간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여전히 나에게는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도 할 수 없었고, 저렇게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철학을 공부할 때 배운 딜레마(Dillema)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닷새쯤 되었을 때다 새벽에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데 갑자기 눈앞에 떡이 보였다. 그것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냥 사라져 버렸다. 일종의 헛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간절한 기도 속에서 접한 현상이라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당시 만나던 여성에게 이야기하니까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해준다.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하나로 5천 명의 사람을 먹였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다. 꿈보다 해몽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마음을 굳혔다. 친구의 거사에 동참하리라.

일단 나의 마음을 굳혔지만 생각할 일이 적지 않다. 지금과 같이 살벌한 계엄 상황에서 데모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고시를 보겠다는 나의 생각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것이다. 감방에 들어가면 몇 년이 될지 알 수가 없다. 결국 고시를 포기하는 것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너무 무모한 것은 아닐까? 두려움도 생기고 번민도 많았다. 이런 나는 나의 문제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닐까? 무엇보다 나의 이런 결정에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먹고 살기도 힘든 가정에서 대학을 보내 주었는데, 자기 인생을 말아 먹을 지도 모를 불섶으로 뛰어 들어가는 나의 행동을 가족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이해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런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4회|3. 광주항쟁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네 번째 글

  1. 광주항쟁 (1)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10.26 사태 이후 정국은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박정희만 죽으면 유신이 몰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키운 군부 내 ‘하나회’ 세력은 호시탐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 12.12 사태틀 통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하를 전격 체포하면서 하나회 수장 전두환이 보안사와 계엄사를 동시에 장악했다. 사실 군사 반란에 버금할 이 사건은 향후 정국 전개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지만, 당시 계엄 치하의 언론에는 짤막하게 보도되었을 뿐 야권에서도 크게 이슈화하지를 못했다.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만큼 야당과 재야 세력은 정보에 무지했다고 밖에 할 수가 없는데, 이것이 <서울의 봄>이 무산된 결정적 원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민주화에 대한 의욕은 컸지만 그것을 실현할만한 실력이 없었다. 재야의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자 연일 민주 세력의 단합을 이야기하면서 활동 공간을 넓히고 있었고, 김영삼을 위시한 야권도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1980년도 신학기가 들어서자 대학가도 이에 발맞춰 불투명한 정국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연일 데모했다. 단과 대별로 성토 회의가 열리고 총학은 나름대로 비상 정국을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개 정국은 새봄이 와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질 수 없었다. 다만 모를 뿐이었다.

나는 당시 고시 공부하겠다고 법대 기숙사에 들어왔지만 시끄러운 대학 분위기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고시생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주구장창 육법전서를 차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처럼 대학의 분위기를 의식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하루는 고시원 총무를 맡고 있던 한 선배가 식사 시간에 일장 훈계했다.

“여러분들, 고시원에 공부하러 왔습니까 아니면 데모하러 왔습니까? 공부하러 왔으면 공부에 열중해야지 왜 바깥세상 분위기에 휩쓸립니까? 그렇게 궁금하면 보따리 싸들고 나가세요. 아니면 옆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다른 원생들에게 최소한 방해를 하지 말아야지요. 우리가 고시를 공부하는 것은 먼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인데 왜 자그마한 일에 촐랑댑니까? 앞으로 이런 모습이 보이면 법대 고시원 차원에서 단호하게 대처할 겁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선전 포고다. 데모에 참가하면 가차없이 퇴출시키겠다는 엄포다. 하지만 이에 기죽을 내가 아니다.

“선배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먼 미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리고 지금 학생들 데모하는 것이 아이들 촐랑대는 정도로 뿐이 보이지 않습니까?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내 말이 불쾌했는지 얼굴을 붉힌 그 선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는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위반하는 원생들이 있다면 책임질 것도 생각하세요. 이만!”

고시원 선배 총무와의 이런 논쟁도 어쩌면 부질없는 것인지 모른다. 연일 민주화를 요구하고 전두환 물러나라는 데모 열기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10만여 명의 대규모 데모대가 서울역을 눈앞에 두고 회군했다. 지도부가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 당시 반대도 많았다. 왜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는가 하면서 아쉬운 표정들을 많이 지었다. 하지만 데모대가 탈취한 경찰 버스에 시민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고, 연일 이어지는 데모 대에 대해 언론과 여론의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회군한 총학 지도부는 16일 토요일 이대에 집결해서 향후 정국 대비 전국 총학 연석회의를 열었다.

고시원에서 내가 거주하던 방은 2층 맨 끝방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9시쯤 돼서 갑자기 내 방으로 평소 알던 선배가 뛰어 들었다. 그의 첫 마디는 ‘당했다!’ 였다. 그는 법대 학생회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선배였다. 군대를 다녀온 그는 대중 연설과 선동에 탁월했다. 단과대 학장을 맡고 있었을 때 나 보고 법학과 과 대표를 맡아서 정법대 분위기를 잡는 데 일조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고시 핑계로 그 제안을 물리쳤다.

“도대체 당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선배는 E여대에서 열린 전국 총학생회에 참석했었다.

“총학생장들이 회의하던 E여대에 경찰이 덮쳤어. 대부분 현장에서 붙잡혔고.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아 도망칠 수 있었지. 나는 E여대 후문 쪽 담장을 넘어서 바로 여기 법대 고시원으로 도피한 것이야” Y대 동문 쪽 후문에 있는 법대 고시원은 E여대 후문과 멀지 않았다. 이곳 지리에 밝은 그는 길 건너 바로 이 고시원으로 올 수 있었다. 그가 맨끝의 방으로 온 것은 만약의 경우 바로 튈 수 있기 위해서라고 했다.

선배의 ‘당했다’는 표현은 당시 상황을 아주 잘 드러냈다. 사실 하나회가 이끄는 군부는 학생들 데모를 거리로 유도해서 호시탐탐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하나회 실권 세력의 이런 계략을 알만한 사람들은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신군부는 학생들이 서울역 회군을 단행하면서 휴지기에 들어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은 E여대에 모인 학생 지도부들을 일거에 검거하면서 뜨겁던 데모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훨씬 더 큰 규모의 희생을 제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1980년 5.17일 9시 너머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단 20분 만에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전격적으로 계획된 수순(手順) 이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3회|2. 서울의 봄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세 번째 글.

2. 서울의 봄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유신 독재에 다들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TV에서 늘 반복하는 대통령의 뻔한 시정 연설이 나오면 사람들은 대부분 채널을 돌려 버렸다. 1979년 10월 박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반정부 시위가 지방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전에 동일 방직 사건이 있었고, 8월에는 YH 무역의 여공들 190여명이 신민 당사로 진입한 사건 등으로 여야가 날카롭게 대치했었다. 그럴 때 부산에서 대거 학생들이 유신 독재 반대 명분으로 들고 일어난 시위가 이웃 도시 마산으로 번지고 있었다.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 박정희와 안기부장 김재규 그리고 경호실장 차지철 등이 모인 것은 부산 데모에 대처하기 위한 회의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에서 자기를 따르는 정보부의 핵심 부하들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박정희의 마음을 떠보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심한 면책과 새카만 후배인 경호 실장 차지철의 모욕적인 발언뿐이었다. 그는 즉시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했다. 유신의 심장에서 벌어진 핵분열이라 할 수 있다.

통상 10.26 사건으로 지칭되던 이 사건은 사회와 역사를 생각하는 나의 삶의 방식에 변화를 많이 주었다. 시해 사건을 접했을 때 나는 그래도 한편으로 박정희가 없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를 걱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그의 배려를 받아 대학을 입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소 슬픔도 느꼈다. 다음 날 일찍 조문을 위해 양복을 걸쳐 입고 늘 친구들을 만나던 J 회관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 앞으로 전개될 대한민국호의 미래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국장은 며칠 동안 진행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18년 박정희 통치를 기억하며 애도했다. 그렇게 국장 일정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유신이 마감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유신 독재도 종말을 고(告)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정치적 해빙기를 맞으면서 고시 공부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유신 독재 체제하에서 고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생각과 이제 독재 체제가 끝나가기 때문에 고시 공부해도 된다는 생각이 컸던 것같다. 내가 그해 겨울 집 근처에 있는 교회의 문을 두드린 것은 신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고시 공부를 위한 다짐의 의미도 컸다.

내가 문을 두드린 교회는 동네 교회지만 근방의 다른 교회들보다는 비교적 컸다. 이 교회는 P 시장 앞 국회 단지 언덕 위에 위치 해있다. 이 교회로 올라가는 길은 2가지다. 하나는 내가 사는 집 뒤쪽으로 골목을 통해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P 시장 앞 정류장에서 국회 단지 쪽으로 올라가는 큰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교회로 가는 길이 나오고, 그쪽으로 한 100여 메타 올라가면 교회가 나온다. 교회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눈에 띈다. 왼쪽에는 청년회와 청소년회가 이용하는 회의실 건물이 있다. 교회 마당은 썩 넓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좁은 것도 아니다.

이 교회의 장점은 무엇보다 청년회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점에 있다. 내가 이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갔을 때도 여러 청년이 나를 반겨주면서 주일 예배 외에 청년회 모임에도 꼭 참석하라고 인도해 주었다. 이 모임에서 따로 성경 공부를 주로 하고 기타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개발해서 나누기도 했다. 성경에 대해서는 나 역시 관심이 있어서 나는 등록 즉시 청년회 모임에 참석했다. 내가 참석한 두 번째 모임인가였다. 성경 공부를 무사히 마친 다음에 공부를 주도하던 이가 기도를 끝으로 마감했다. 그 다음으로 친교 시간이 이어졌다. 친교부장을 맺고 있는 20대 초반의 앳된 여성이 말을 잇는다.

“자, 지금부터 친교의 시간입니다. 각자 자기가 마음에 드는 분 앞으로 자리를 옮겨 보세요. 오늘은 새로 들어 온 분도 있으니까 반갑게 맞아주세요.” 그녀는 미리 준비한 초를 각자에게 나눠 준다. 각자 그 촛불을 켠다.

나는 아직 사람들을 모르는 상태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랬더니 아까 그 여성이 내 앞으로 온다.

“각자 눈을 감고 자기 앞에 있는 분을 위해 기도해보세요.”

이것도 나에게는 생소하다. 나는 그냥 눈만 감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미정이예요. 이 교회는 어렸을 적부터 다녀서 잘 알고 있어요. 지금은 청년회 친교부장을 맡고 있어요. 새로 오셔서 반갑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까딱하면서 인사했다. 생각보다 인상이 서글서글해 보인다. 내가 원래 낯선 사람에게는 얼굴을 가리는 편이지만, 호감 가는 상대 여성이 친절을 베푸니까 내 마음도 열리는 느낌이다.

“저는 이시우입니다. 새로 뜻한 바가 있어서 교회 문을 두드리게 됐습니다.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괜찮아요.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서 교회 문을 두드린 것은 대단한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선교를 해도 외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시우님은 주님이 특별히 은혜를 베푼 것 같아요.”

처음 청년회 모임에 온 것 치고는 비교적 무난한 편이다. 내가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Y대와 E여대생이 함께 운영하는 ‘아가페’라는 서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서클이 이름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이 안 돼 나온 경험이 있다. 아마도 내 속에는 종교적 체험에 대한 근원적 열망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늘 실망하곤 하는지 모른다. 이런 열망이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지만 종교는 그 이후로도 나의 젊은 시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4회에 계속.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회|1. 다시 찾은 길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두 번째 글.

1. 다시 찾은 길 (2)

 

첫 시간을 비교적 무난하게 끝내고 나서 다시 강사실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이미 강의를 끝낸 후배 학자들 몇몇의 얼굴이 보인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이다.

“형! 점심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호칭이다. 사회에서는 항상 그 사람의 명함에 적힌 직급이나 성을 가지고 부른다. 하지만 대학은 그냥 형 동생이나 선 후배로 지칭한다.

“그래, 오랜만에 함께 식사하자.”

그 사이 바로 2명이 더 붙어서 4명이 함께 식사하러 밖을 나섰다. 따로 교수 식당이 없는 이곳에서 점심 때 학생들 틈에 끼여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우리는 한 후배의 차를 타고 대학 바깥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 소도시는 시내를 벗어나면 다 촌이고, 한가롭다. 곳곳에 맛있는 음식점들도 많아서 맛집 여행하듯 찾아 다닐 수 있어서 좋다. 다들 새벽같이 나와서 이때쯤이면 약간은 허기가 들 때도 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상태라 날씨가 쌀쌀했다. 우리는 추어탕이 어떤 가라는 말에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했다. 마침 대학에서 몇 킬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추어탕을 잘한다는 집이 있어서 그리로 갔다.

학자들끼리 식사를 하다 보니 많은 경우 이야기 주제도 학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형! 지난달 <학술 진흥 재단>의 연구 프로젝트 신청했어요?”

“그래,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보니 나도 억지로 하나 신청했어.”

“요즘은 그것도 신청자가 많아서 경쟁이 심하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3월 말이 되면 전국 대학의 수많은 강사들이 이 프로젝트 신청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래전 대학 다닐 때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이 하나 있고, 그 앞쪽으로 이른바 방석집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등록금 철이 되면 주방 아줌마들도 화장 이쁘게 하고 손님 받느라 바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 프로젝트 신청이 공지되면 한국의 대학가들 역시 그와 비슷한 형국이다. 이 프로젝트라도 따야 그나마 쥐꼬리 같은 강사료를 벌충할 수 있고 품위 유지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점심을 마치자 바로 오후 수업에 들어가는 강사들도 있지만, 나처럼 오전 수업만 마친 강사들도 있다. 휴게실은 강사들을 위해 대학에서 배려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강의 준비를 할 수 있고, 프린터와 인터넷도 활용할 수 있다. 봉지 커피나 각종 1회용 차들도 구비되어 있어서 강의 중간에 마실 수 있어서 좋다. 사실 모교의 강사들이기 때문에 이런 배려를 해주지만, 출강하는 대부분의 대학들에는 이런 서비스가 거의 없다. 그래서 교정에 차를 세워 놓고 강의 준비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4시 반에 서울 본교로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소파에서 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참으로 편안한 기분이다. 이럴 때는 이상하게 내 생각이 과거로 돌아간다. 내가 대학에 들어온 지 벌써 30년이 가까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모험심, 도전 의식 등으로 좌충우돌 많이 헤매고 다녔다. 내가 법대를 졸업한 다음에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을 한 것도 아마 이런 지적 호기심의 연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법학이 주는 미래의 안정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법학은 자유 분망하고 비판적인 나의 사고를 담기에는 너무나 고루한 느낌이 들었다. 대학 4년 동안 지녀왔던 이런 나의 생각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에도 하나의 전기가 된 10.26 사태가 발생한 것은 1979년 가을이었다.

3회에 계속.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회|1. 다시 찾은 길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연재의 변

 

앞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필자가 쓴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이 책은 격동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2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이고, 2부는 1990년대 후반부부터 2020년대 전반부에 걸쳐 있다. 현재 1부는 완성되어 있고, 2부는 쓰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을 정리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겪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반성해보려는 것이다. 다들 알고 있듯, 한국의 1970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들은 유신 독재와 광주 항쟁, 민주화 투쟁과 1987년의 민주주의의 쟁취 등으로 점철된 의미 있는 역사적 경험을 겪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사회과학의 전성시대이자 온갖 이론과 사상이 난무하던 지적 르네상스이기도 했다. 필자는 이 시기를 프랑스의 6.8 혁명 못지 않은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6.8 혁명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이론과 사상을 정립해서 세계인들에게 내 보였던 반면, 한국인들은 그런 귀중한 역사적 체험을 그저 그런 과거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우리가 겪은 이 시대의 체험을 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의미화하고 싶은 욕구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구성해본 것이다.

한국철학의 고질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구성하기 보다는 여전히 바깥의 수입 철학에 의존하고 2천년도 넘은 공맹과 노장 사상을 주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있다. 이런 지적 식민성과 사대주의가 한국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겪은 위대한 경험을 과거로 묻어 버린 채 그저 바깥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론과 사상 혹은 오래된 사상에 목을 매달고 있을 뿐이다. <조선사상사>를 쓴 교토대 철학과 교수 오구라 기조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외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재구성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바꿔치기 하는 전면적 개변(改變)에만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다. 한 사상이 물밀듯 들어와서 한 시대를 지배하다가 시효가 되어 사라지고 다른 사상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개변의 일반적 형태이다. 과거 불교와 유교가 그랬고, 근대에 들어서는 유교와 맑스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 그랬다. 손바닥 뒤집듯 일어나는 개변의 가장 큰 단점은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 있다. 외래 사상만을 끊임없이 찾다 보니까 그런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더욱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철학계가 부닥친 커다란 딜레마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이런 생각과 틀을 바꿔야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필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시대 체험과 생각, 자신들의 언어를 살려서 자신들의 철학을 정립해보자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격동의 한국 사회를 한 개인의 지적 모험을 통해 재구성해보자는 데 있지만, 사실 이런 시도는 잘못하면 죽도 밥도 되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필자의 시도는 철학적 소설을 겨냥했지만 철학도 되지 못하고 소설이라는 면에서도 실패할 수 있다. 최대한 이러한 실패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 판단은 필자의 손을 떠나 읽는 독자들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문제 의식에 대한 공유를 통해 우리 철학을 정립하는데 하나의 초석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필자 이종철


첫 번째 글.

  1. 다시 찾은 길

 

사위는 아직 컴컴했다. 대학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시각은 5시 45분이다. 개강을 막 시작한 3월 초니까 겨울의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다. 나는 외투 깃을 약간 올리고 천천히 정문 쪽으로 걸었다. 정류장에서 대학 정문은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희뿌연 등이 정문에 밝혀져 있고, 그 옆 수위실도 불이 밝혀 있다. 내가 타려는 학교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별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지방의 소도시의 분교로 출퇴근하는 교원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는 정확히 6시 5분 전에 도착한다.

  나는 늘 그렇듯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타고 담배 연기가 목젖을 파고들어 왔다. 순간 아직 잠에서 덜깬 몸처럼 목젖이 따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런 짜릿하면서도 약간은 고통스러운 쾌감 때문에 담배를 끊지 못하나 보다. 버스를 탈 시간이 되어 가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굴이 익숙한 후배 하나가 인사를 건냈지만 다들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는 원주에 전임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간강사들이다. 나도 그런 자격으로 오늘 이 버스를 타는 것이다.

  6시 정각이 되자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는 정문에서 신촌 로타리 쪽으로 난 도로를 타고 나가다가 로타리를 돌아 서강대 쪽으로 향한다. 서강대를 지나서 마포대교를 향해 꺽자 마자 우체국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태운 다음 바로 강변도로로 진입한다. 이 때 쯤이면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어둠이 걷히면서 한강 변 양쪽으로 빌딩들이 뿌연 형체를 드러내고, 강변을 따라 차들이 바쁘게 달리고 있다. 내가 탄 버스도 그 무리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거대한 자동차 물결에 휩쓸려 내 몸도 함께 달리고 있다. 버스가 한강 다리를 달릴 즈음에는 이미 해가 떠올라서 강변의 빌딩들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은 참으로 신기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햇살을 받아서 위용을 드러낼 때는 마치 새로운 존재들이 탄생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런 생각들이 일어나자 순간 지금의 내 삶도 어둠을 뚫고서 새로운 공간 속으로 태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의 저편과 밝은 햇볕 속에 드러난 이편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나? 지금 나는 다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나는 남들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만 열심히 파지 않았는가? 왜 나는 끊임없이 방황을 하는가? 방랑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방랑자가 나의 참모습인가?

 내가 한곳에 머물지 못하리라는 운명을 나는 일찍부터 가졌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당시였을 것이다. 그때 사주 관상을 본다고 하던 엄마의 친구가 우리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내 사주를 보면서 하던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큰 별이 두 개가 있어. 그런데 이 아이는 어느 별에도 속하지 않아. 아마도 이 아이 사주는 떠도는 사주일 듯해.”

 

나는 그 당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말은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 아주머니의 말과 달리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쑥맥에다가 범생이나 다름없었다. 집과 학교, 그리고 기껏해야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나의 삶이었다. 나는 불편한 몸 탓에 친구들과 함께 가는 소풍을 거의 가본 적이 없고, 중학교를 들어갈 때까지 버스를 타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 내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방랑자라니, 남들은 물론 나 자신도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차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전날 자지 못한 잠을 보충하고 있는 듯 조용했다. 간혹 오전 강의를 준비하는 듯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부스럭거렸다. 차는 이미 중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 영동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고, 창밖의 고속도로 풍경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가 사라진다. 무료하게 그런 모습을 보다가 이내 나도 첫 교시 수업에 생각이 미쳤다.

첫 교시는 내 전공과 관련된 독일관념론의 칸트 철학이다. 서울에서 강의를 할 때는 대부분 교양강의에 머무는 경우가 많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강의하는 이 수업은 전공 강의이다. 교양강의는 강의 준비는 쉬워도 막상 강의를 할 때는 그렇지가 않다. 학생들 전공 분포도 다양하고, 이해 수준도 편차가 크기 때문에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가 늘 신경이 쓰인다. 반면 전공 강의는 강의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도 수업 자체의 집중도가 높고 학생들의 수업 열의도 크기 때문에 강의 자체가 즐거운 경우가 많다. 그만큼 학생들과의 유대도 많다. 강의는 각기 장단점이 있다. 교양 인문 강의를 하다 보면 단순히 글쓰기 강좌에서부터 ‘논증과 비판’ 같은 토론 수업, 문화 현상들에 관한 수업, 환경과 4차 산업 혁명 등 다양한 주제들을 섭렵해서 그야말로 백과사전적 지식을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지식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소모품 형태로 강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학기가 끝나면 그대로 잊히는 경우도 많다.

반면 전공 강의는 심화 학습을 할 수 있고, 논문과 연계시켜 원전 강독을 병행할 수도 있다.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도 있고, 수업의 영향과 효과를 확인할 수가 있어서 좋다. 지난 첫 시간은 오리엔테이션을 겸해서 독일관념론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강의했다. 학기 초라 그런지 다들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굴리면서 집중력을 높이고 있다.

독일관념론의 전체적인 흐름을 잡기 위해 내가 질문을 먼저 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해가 언제이지요?” 학생들은 약간 당혹스러운듯 눈동자만 굴린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답한다.

“1781년이요.” 바로 맞혔다.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 학생은 이미 칸트 책을 읽어보고 들어온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헤겔의 『법철학』이 나온 해는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른 학생이 구글을 검색했는지. “1821년이요.”라고 답한다.

“예, 맞습니다. 우리가 보통 ‘독일관념론’이라고 한다면 칸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1781년으로부터 헤겔의 『법철학』이 출간된 1821년까지 40년간을 지칭합니다. 한 세대하고 1/3을 약간 넘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 철학의 전성기가 전개되었지요. 역사적으로 이렇게 짧은 시간에 기라성 같은 천재 사상가들이 등장한 것은 서양철학의 경우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지는 시기나 근대에 들어 데카르트 이후의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의 철학이 박진감 있게 전개된 것에 버금할 것이지요.”

“여러분들, 혹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해가 언제인지는 아나요?” 학생들이 철학 수업 시간에 생뚱맞게 연도 알아맞히기 게임하는 것 아닌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문제는 비교적 잘 알려진 사건이라 바로 답변이 나온다. “1789년이요.”

“그러면 영국의 산업 혁명이 일어난 해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요?”

이 문제는 다소 애매한지 학생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

 

이러한 숫자는 강렬한 의미를 줄 수 있고, 상징적 효과도 크다. 기억하기도 좋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발명한 1760년을 꼽는 경우가 많다. 이때부터 영국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서구의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 빠르게 자본주의에 진입한다.

대충 여기 나온 숫자들 만으로 17-8세기 당대 유럽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1760년의 영국은 경제 혁명이 시작되는 해이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의 정치 혁명이 시작된 해이다. 1781년과 1821년은 칸트와 헤겔의 대표적인 저작인 『순수이성비판』과 『법철학 강의』가 출간된 해이다. 독일은 이웃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와 같은 현실적 혁명을 구경하고 열광했을 뿐 자신들이 이런 혁명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대신 이 시대 독일에서는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이 완성되고, 괴테와 쉴러와 같은 대문호들이 활약하고, 모짜르트와 베토벤같이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한 세기에 한 명 나오기도 힘든 데 40년 정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이런 천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독일인이 이룩한 ‘정신혁명’이라고 기술한다.

2회에 계속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재미 사학자 이혜옥 선생의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글을 읽다, 2021)를 읽고 [이종철 선생의 에세에 철학]

재미 사학자 이혜옥 선생의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글을 읽다, 2021)를 하루 만에 단숨에 읽었다. 2년 전인 2022년 4월경 나는 저자가 의왕시에 위치한 한 출판사에서 출판 기념회를 할 때 우연한 기회로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가정집을 개조해 출판사로 운영하는 곳에서 자그마한 몸집의 저자가 2시간 넘게 책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질의응답을 할 때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 그때 저자가 사인한 책도 선사를 받았고, 내 차로 전철역까지 모셔 드리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 사이 무슨 바쁜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잊고 있다가 이제야 읽은 것을 보면 책도 아마 인연이 따르는 듯싶다.

이혜옥 선생은 미국의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사서를 하다가 뒤늦게 본격적인 학위 과정 공부를 시작해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이 책을 완성했다. 저자는 1904년 <강철 군화>의 저자로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잭 런던(Jack London)이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의 러-일 전쟁 종군 기자로 대한 제국에 5개월간 파견되어 쓴 신문기사와 여행기 그리고 많은 사진에 관해서 쓴 영문 논문 <History of Early-modern Korea Through the Eyes and Pen of Jack London, 1904>에 기반해 썼다고 밝힌다. 저자는 이 논문에서 일본의 속국이 되기 삼십여 년 전에 한국인들이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그 당시의 여러 신문기사와 한국, 미국, 러시아, 일본 정부의 국가 공문서에서 찾아낸 기록들에 발로 뛰어다니면서 찾아냈다. 아울러 한국인들은 러시아군에도 전투 병력 또는 정탐 군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한국인들은 6.25 전쟁에서 동족 상잔을 겪기 훨씬 전에 이미 러-일 전쟁에서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된 배경에는 조선의 몰락과 함께 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생존을 위해 일본의 앞잡이 노릇한 조선인들이 있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대표적으로 유대인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한인들 역시 유대인 다음으로 전 세계에 걸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매 장을 여러 버전의 아리랑으로 시작한다. 아리랑은 한인들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노래라 한인들이라면 어디에 있든 잊지 않고 부르는 노래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 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에는 어쩔 수 없이 처자를 데리고 고향 땅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던 한인들의 애절한 한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한인들의 디아스포라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19세기 중반 이후 초근 목피로 연명하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나 그 밖의 땅으로 이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이유로 조선을 떠난 것이다.

경제적 이유로 조선 땅을 떠난 최초의 기록에 따르면 임란 전에도 있었다. 그 당시에도 가난과 학정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월경하다가 목숨을 잃은 기록들이 있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1860-70년대에 극동 러시아와 만주로 대거 이주했던 주원인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반-상 차별의 봉건적 신분관계와 억압적인 관료주의, 과도한 세제-백골징포-의 문제에 있었다. 조선이 후기로 내려올수록 민란이 잦았던 것도 삼정문란에 따른 과도한 세금 포탈 때문이었다. 죽어서 백골이 된 사람이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태중의 아기에까지 세금을 매겨서 수탈하니 가뜩이나 어려운 소작인들이 생존을 이어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런 사정을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의 이야기에 잘 나와 있다.

 

“남편이 병들어 죽은 지 이미 3년이 되었는데도 대정을 하지 못하여 아직도 배골의 신포를 바치고 있는데 지난해 일곱 살 난 아이가 세초에 들어갔고 등에 있는 네 살 난 아이도 올해 세초에 들었습니다. 종리 기필코 보존하고 있으려 했던 것은 남편의 외로운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감당할 수 있는 형세가 없어졌습니다.”(71-72쪽)

 

사농공상에 기반한 조선은 그야말로 힘없는 백성들을 마른 걸레 짜듯 수탈하면서 유지되던 국가였다. 오늘날 북한 사회를 보면 조선의 옛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이처럼 극한 상황에 처한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야반도주해서 국경을 넘었다. 이들이 못나고 게을러서 가난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한인들은 체격상 일본인보다 뛰어났고, 이들이 이주한 만주나 러시아에서 한인들은 근면한 노력과 현지인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농사기술’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국에 있었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조선이라는 국가에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그런 나라를 떠나왔지만,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현지에 동화되지 않고 한인들의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대원군이 조선을 개혁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그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중창하는 일에 막대한 인력과 세금을 쏟아붓고, 국제 정세의 변화를 외면한 채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조선을 더욱 고립 정체시키고, 세도 정치를 막기 위해 간택한 왕비 윤 씨와 정치적 갈등을 빚으면서 조선은 마지막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반면 일본은 1854년에 미국과 굴욕적인 통상 조약을 맺은 이래 1868년 메이지 유신의 개혁 정책에 따라 빠른 속도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화의 발길을 재촉했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제적으로 강화도 조약을 맺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조선 땅에서 청일 전쟁에 승리를 한다. 이후 일본의 정한론자들은 노골적으로 조선의 왕실을 장악해서 서서히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조선의 외교와 재정을 장악하면서 식민지화를 강행한다.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강제 합병은 예정된 수순에 불과했다.

한인들의 2차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조선이 정치적으로 무력해지면서 나타났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는 1860-70년대의 경제적 이유로 이주한 것과 달리 양반 출신의 식자층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모색한 개혁 측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만주에 수많은 학교들을 세워 인재들을 양성했다. 이들은 만주와 러시아 그리고 몽골 등을 중심으로 활동 기반을 만들었다. 이들은 전 세대의 디아스포라가 현지의 토착화에 관심을 갖는 것과 달리 언제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조선의 언어와 풍습 그리고 문화 등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끌어들인 이동휘, 단지회를 결성해서 조선의 무장 투쟁을 부추겨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그리고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주력한 북간도의 이상설과 신민회 등 여러 갈래들이 있었다.

이혜옥 선생은 1937년에 있었던 고려인의 강제 이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스탈린이 다민족 디아스포라인들을 ‘반역자’로 의심했고, 외국인들은 거의 병적으로 불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스탈린은 “비 러시아 민족을 대상으로 대숙청과 강제 이주를 시행했는데, 이런 방법으로 적의 세력을 소탕하고, 소비에트 사회를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전쟁에 대비하려는 심산이었다. 그 정책의 첫 번째가 엄청난 수의 고려인들을 극동 러시아로부터 남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랄해와 발카쉬 호수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300쪽)이다. 화장실도 숙식 시설도 없는 열차 여행길은 30일 내지 45일이 걸렸는데, 이 긴 여행 과정에서 고려인들은 질병과 부상으로 무려 16.3 퍼센트가 사망했다. 나머지 60퍼센트도 다음 해 봄에 또 다른 미지의 고향으로 실려갔다. 수십 년 전에 가난과 차별 대우를 못 이겨 국경을 넘어갔던 불쌍한 조선의 농민들이 또다시 알지도 못하는 멀고 먼 고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대규모로 이루어진 다국적 한인 디아스포라는 그야말로 애환과 고통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그럼에도 한인 디아스포라는 중국계 역사가 매들린 슈가 말한 것처럼 ‘모국을 향해 지속하는 충성심으로 단합’해서, 어디에 살고 있던 언젠가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환향을 믿고 그날을 위해 살고자 했다(313쪽). 이러한 전통은 끊이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디아스포라가 조선이라는 국가의 흥망성쇠에서 발생한 것을 미루어본다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국가의 책임과 역할은 지대하다. 오늘날 전 세계를 강타하는 한류의 바람도 대한민국의 국력 신장과 한인들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애국심 등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이혜옥 선생의 방대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선생은 뒤늦게 시작한 학술 연구지만 이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당시의 신문 기사와 서양인들의 조선 여행기, 일본과 미국의 내쇼날 아카이브, 러시아와 한국의 일차 자료뿐만 아니라, 미국 내 도서관에 소장된 수많은 기록과 출판물을 추적하여 발췌한 역사적 사실들을 서술한 것”(8쪽)이다. 선생의 이러한 노고는 책 뒤편에 실린 방대한 참고문헌(Bibliography) 목록으로 확인된다. 이것들만으로도 이 책의 연구사적 가치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저 책상에 앉아서 문헌들만 뒤적거리면서 쓴 것이 아니라 발로 뛰어다니면서 문헌들을 찾고, 오랜 도서관 사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사료들을 정리하고 해석한 노고의 산물이다. 이런 연구는 민족 사학이니 식민 사학이니 하면서 추상적인 개념만을 둘러싸고 갑론을박하는 한국의 역사학계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에세이 철학 서론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 서론

 

이 땅에서 흔히 하는 철학 활동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남의 철학을 소개하고 해설하고 해석하는 것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양철학의 경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근대의 데카르트를 거쳐 영국의 경험론이나 독일의 관념론, 그리고 20세기 들어 후설이나 하이데거, 프랑스의 구조주의나 해체주의 계열들을 포함해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들을 학습하기도 쉽지 않은데 어찌 독자적으로 해석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이런 철학들을 연구하면서 자기 이야기나 철학을 이야기하기는 더 어렵다. 마찬가지로 동양철학의 경우도 공맹과 노장사상, 전국시대의 법가로부터 시작해서 송나라의 주희를 비롯한 신유학자들을 연구하는 것도 벅찬데 어떻게 자기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정은 한국의 사상과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경험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의 불교 철학으로부터 고려의 의천과 지눌, 그리고 조선의 뛰어난 유학자인 퇴계와 율곡의 철학, 또 다산과 같은 실학자의 사상들을 평생 연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나의 철학과 사상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철학이야말로 가장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학문인데 이렇게 허구한 날 고래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의 철학만 한다면 내가 하는 철학을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오늘날 이 땅에서 철학을 하는 연구자들이 부닥치는 공통된 딜레마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철학을 오로지 이론으로 학습을 하려 하고, 철학 공부를 특정한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 세운 문제들을 탐구하면서 철학을 하지 않다 보니 그들 거의 대부분 다른 철학자들이나 사상에 의존해서만 철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임마누엘 칸트도 자기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보면서 “요즘 학생들이 철학은 많이 알고 있지만 자기 스스로 철학을 하지는 못한다(nicht philosophieren)”고 지적한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철학을 연구하고 해석하기만 할 뿐 자기 스스로 철학적 사유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G.W.F 헤겔은 “철학은 사유 속에 포착한 그 시대”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저기서 말하는 사유와 시대에 과연 나의 사유가 있고, 우리의 시대가 있을까? 영국의 경험론은 17-8세기의 영국의 시대를 포착한 것이고, 독일 관념론은 18-9세기의 독일의 현실을 반성하면서 나온 철학이다.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는 이차 세계 대전 후 공고해진 자본주의 질서와 냉전, 그리고 6.8 혁명에 대한 반성에서 싹튼 철학이다. 이에 반해 식민지와 전쟁, 유신 독재와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기를 산 한국의 어떤 철학자들도 자신들의 시대와 현실을 제대로 반성한 적도 없고, 또 그것을 자신의 언어와 사유로 표현한 적도 없다. 그저 열심히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을 이야기하고, 영국 철학과 미국 철학을 이야기할 뿐이다. 서양철학을 예로 들었지만, 사정은 동양철학이나 한국 철학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시대와 우리 삶을 반성하지 못하고 개념적으로 포착하지도 못하다 보니 과연 한국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공허한 물음만 던질 뿐이다. 에세이 철학은 이런 딜레마적 상황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세이 철학 이란 무엇인가? 나는 아주 단순화시켜 이 물음에 대해 답변해 보고자 한다. 내가 말하는 에세이 철학 은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우리의 삶과 현실을 우리의 생각과 언어로 기술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이런 답변에 대해 누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철학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물어보자. 과연 한국의 철학자들이 하는 일상적인 철학 속에 지금 여기의 우리 시대와 삶이 들어있는가? 한국의 철학자들이 하는 철학은 엄밀히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언어를 걸러서 나온 것인가? 왜 한국의 철학자들은 자기가 하는 철학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가? 과연 지금 시대 이 땅에 한국 철학이라 할만한 것이 있는가? 이런 원론적인 물음은 이제는 너무나 흔해서 진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철학 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에세이 철학의 정체성과 관련해 분명히 정리해 둘 부분이 있다. 하나는 수필도 에세이 철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무엇보다 나의 에세이 철학 은 기존의 에세이 철학과 다르고 철학적 에세이와도 다르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다. 과거 60-70년 대 안병욱, 김형석, 김태길이 장안의 지가를 높인 에세이 책들이 있었다. 이들은 맛깔스러운 문장으로 신변잡기를 대상으로 에세이를 썼다. 이 세 사람 모두 대학의 현직 철학 교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의 에세이를 철학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철학교수가 썼다 하더라도 신변잡기에 관한 에세이를 철학에 포함 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음으로 철학적 에세이를 표방하는 글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에세이 글은 대부분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고민들, 이를테면 갈등과 고통 슬픔과 기쁨 등을 대상으로 정서적인 공감이나 역지사지 등의 에세이를 쓴 글이다. 이런 에세이는 철학보다는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정대현 선생과 나눈 이야기를 잠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일전에 정대현 선생님이 개인 카톡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수필 철학’과 ‘ 에세이 철학 ‘의 두 용어는 일상 언어철학의 정체성의 문맥에서 대립이나 경쟁을 발생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 에세이 철학 ‘ 은 ‘논문 철학’과도 경쟁적일 필요가 없이, 그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호성과 개방성이 보다 일상 언어적이 아닐까요? ‘수필 철학’도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의 외연을 확장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상 언어의 글은 철학적이다]라는 지향을 보다 선명하게 함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적은 피천득 선생 같은 ‘반 철학론’입니다. 선생은 [수필은 난삽한 개념으로 무장할 필요가 없다]라는 단순한 명제로 해도 될 말을 구태여 ‘반 철학론’으로 깃발을 잘 못 드신 것입니다. 당신이 만난 철학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셨을지를 묻게 하는 대목입니다. 시중의 많은 두 필 반들이 (저의 누이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피천득 수필론>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상황이 대세가 되기 전에, 더 악화되기 전에,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상 언어의 아름다움과 힘이 왜곡되지 않도록 선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1. 먼저 피천득 선생의 번 철학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선생님이 제시하는 “글은 철학이다”라는 명제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글은 철학이다”라는 명제는 너무나 외연이 넓어 모호하다는 생각입니다. 주역의 계사 전도 글은 생각보다 정확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선생님 말씀처럼 “글은 반성적이고, 비판적이며, 대안적 해석을 제안한다”라고 해도 모든 글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이 글들에는 다양한 편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철학에도 그런 편차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철학의 외연을 확장해 놓으면 어떤 실익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모든 것을 ‘철학’의 테두리 안으로 포괄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폭력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각기 그 기능과 역할 존재 방식에 따라 다르게 지칭되듯, 언어로 표현하는 다양한 활동들도 대상 영역에 따라 달리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수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시와 소설, 시나리오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뭉텅 걸려서 ‘철학’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요. 오히려 각기 고유한 존재 방식과 표현 방식에 따라 영역과 기능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다르게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차이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논리로 이용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고, 또 모더니즘과의 차이를 절대화한다면 그것 자체가 모더니즘적 사고에 갇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뉴턴의 역학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각자의 대상 영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수필은 철학이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모든 철학은 수필이다.”라는 명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수필은 철학적”이고, 또 “어떤 철학은 수필이다”라는 할 수 있지만요.

2. 김형석 선생이나 김태길 선생 그리고 안병욱 선생 등의 수필 철학을 제가 말하는 ‘에세이 철학’과 구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에세이 철학’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에세이’와 ‘철학’을 붙여서 ‘에세이 철학’이라고 하고, 그것을 철학 에세이나 기존의 에세이 철학 혹은 수필 철학과 의도적으로 차별 짓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분들의 철학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유의 에세이 혹은 수필 철학의 역할이 지녔던 시대적 의의는 인정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 철학과 사무 조교를 할 때 김형석 선생의 에세이집을 읽고서 너무나 감동을 받아 철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하는 학생들을 여럿 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분들이 정서적으로 독자들에게 공감과 영향을 준 바가 크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부류의 철학의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나 수필의 일차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의미화’라고 생각합니다. 널리 암송되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저 그렇게 존재하던 것, 나와 무관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던 것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가 살아나는 경험이지요. 수필은 이런 ‘의미화’에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그 점에서 앞서 말한 세분들의 수필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수필에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분들의 수필 철학은 그것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론과 사상’의 차원에까지 끌어올리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보편성의 차원을 무시한다면 철학은 비트겐슈타인도 비판했던 ‘사적 언어’의 수준을 벗어나 기 힘들지 않을까요? 물론 선생님은 앞 서의 글에서 이론의 기반이 일상 언어이고 일상 언어가 이론을 규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지만, 그것이 반드시 일방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양자의 관계는 프로이트 식으로 표현하면 중층적이고, 차이와 다양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 사실 제가 그분들의 수필 철학과 차별하고자 하는 보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철학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을 ‘의미화'(signification)와 이론 외에도 ‘비판'(critic)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은 피천득 선생의 반철학론을 비판하시면서 수필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회와 역사를 담지 못한 채 기껏해야 ‘솔직함’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앞서 말한 세분들의 수필 철학에서도 사회와 역사가 들어오지 못하고, 기존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포괄적 수준에서 이야기는 해도 이론적 형태로 정형화되기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양철학의 역사는 칼만 들지 않았지’ 언어로 이루어진 ‘살부(殺父)의 역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런 치열한 논쟁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철학사를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철학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에세이 철학」’의 기본 정신은 “우리 사회와 우리 삶, 그리고 시대에 관한 우리 생각을 우리 언어로 표현하자!”는 데 있습니다. 저는 결코 배타적인 쇼비니스트도 아니고, 막무가내식 회의주의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의 기준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철학적 활동은 자기 언어, 자기 생각, 자기 시대가 없이 남의 생각과 남의 언어, 남의 시대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철학들과 부단히 싸우고 있고, 우리 언어를 우리 삶 속에서 찾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은 철학의 다른 어떤 속성보다 제가 중요하는 요소입니다.”

 

Ⅲ. 다음으로 「에세이 철학」의 뿌리 혹은 정신과 관련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비판’(critic)은 「에세이 철학」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비판’의 의미를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에서 찾지 않고 8세기 당나라 선(禪)의 정신에서 찾고 있다. 물론 「에세이 철학」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일상을 중요시하고 불교는 마음 심(心) 자를 중요시한다거나, 「에세이철학」은 철저히 문자에 기반한 철학을 전개하는 반면 선은 불립문자나 교외별전처럼 이 문자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에 양자의 친화성에 대해 쉽게 수긍하기 어려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낸다)는 금강경의 한 구절처럼 이 마음 심이 무심의 단계에 이르는 것은 일상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일상에서 밥 짓고 물깆는 일 자체를 불법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그만큼 일상은 선에서도 중요하다. 선이나 「에세이 철학」이나 똑같이 이 일상 바깥의 초월적인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당나라의 선불교는 잘 알다시피 스님들이 염불하는 법당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죽은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에서 불법을 찾는 중국 불교의 새로운 정신이다. 일자 무식인 6조 혜능은 홍인 선사의 금강경 강론을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깨달음에는 번거로운 절차도 없고, 온갖 언어 수식도 필요 없다. 오로지 행주좌와 일심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홀연히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자 하는 창조적 정신만이 중요하다. 임제 선사가 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살 불사조(殺佛殺祖)의 정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가 칼을 든 사무라이의 정신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때 그 어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들, 동과 서, 옛날과 지금의 수많은 철학자들에 올라타거나 그들의 사상을 빌려 오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지금 이 순간'(hic et nunc)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모든 대상들과 경험들을 철학적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철학적 통찰의 깊이를 드러내준다. 때문에 ‘「에세이 철학」’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선의 정신처럼 모든 권위와 우상의 파괴를 시도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4대 우상, 즉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언어의 우상’ 외에도 ‘권력과 국가의 우상’ 등 일체의 권위와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모든 가치를 부정한 니체의 ‘망치의 철학’을 구현하고자 할 뿐 실체화되고 화석화된 이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저 너머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추상개념들의 몰 주체성도 비판한다.

물론 문자에 기초한 「에세이 철학」과 참선과 문자 너머의 세계를 추구하는 선의 내용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은 부처의 생전에 가섭의 염화시중의 미소가 시사하는 것처럼 참다운 진리는 언어를 넘어서 있고, 언어를 통해 전수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강하다.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 같은 말은 언어를 넘어서려는 선의 정신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때문에 한국불교에서는 화두(話頭)를 참구(參究) 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일찍부터 전통을 이루고 있다. 동양의 학문은 순수 이론(theoria)만 추구하는 서양의 학문과 달리 실천적인 자각과 깨달음을 중시하고 그것을 위한 방편으로 수행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화두 참구를 깨달음의 중요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선도 동양의 일반적 전통과 궤를 같이 하는 셈이다. 알음알이로 얻는 이론은 원숭이가 흉내를 내는 것처럼 주변을 맴돌 뿐 그 핵심과 본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선의 주장이다. 지극한 깨달음은 이 언어와 이론을 넘어서 진정 마음 심(心)에서 전율을 느끼듯 대오각성한다는 의미다. 사실 서양철학을 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처럼 강렬한 정신적 체험(體驗)을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가 말한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나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한 “나의 세계의 한계는 나의 언어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를 초월한 세계는 무어라고 할 수 없는 X의 세계에 다름없다. 이 세계는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세계이고, 칸트의 이율배반(Antinomie) 이론에서 보듯, 그것을 언어적으로 기술하려 할 경우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인 모순율이 깨질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세계는 말할 수 없는 침묵의 대상이지 그것이 적극적으로 무엇인지 기술할 수가 없다. 노자(老子)가 『도덕경』 첫머리에서 적었듯, 도를 도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런 의미의 세계나 도는 긍정적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적 의미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화두를 참 구한다는 선은 언어가 끊어진 이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깨달음이란 면에서 다른 철학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불립문자를 추구하는 선은 언어의 끝, 문자의 종언을 주장하는 데 반해, ‘「에세이 철학」’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에세이 철학」’을 굳이 선으로 표현한다면 ‘문자 썬’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선불교의 정신을 21세기에 새롭게 각색하고 변형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자는 어떤 경우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문자를 버린다면 문자가 부재하는 그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니고 이 세계와 무관한 세계이다. 이 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이 소수에게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다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의 궁극 목적(상구보리)은 이 세상과 나누기 위함이고(하화중생),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함(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정신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깨달은 이, 모든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으로 나가 빛을 본 계몽된 인간은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동굴 속으로 귀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선의 문자화, 선의 일상화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진리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의 현실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의 의미에서 이성에 의해 걸러진 현실에 가깝다.

 

Ⅳ. 마지막으로 「에세이 철학」에는 진입 장벽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에세이 철학」은 누구누구의 철학처럼 특화되거나 어떠어떠한 철학처럼 독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누구나 쓸 수가 있다. 한 마디로 「에세이 철학」을 쓰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나 요건이 없다는 것이다. 「에세이 철학」은 기본적으로 삶과 시대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철학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언어로 쉽게 표현하는 데 있다. 어떤 전문화된 철학을 하는 데는 그에 따른 형식이나 조건이 있다. 예를 들어 칸트 전공자는 칸트 철학의 문제들을 정리하고 그에 따른 원전을 분석적으로 이해를 하고, 관련 연구나 논문들을 숙지해야 하고, 자신이 쓰는 논문이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단순히 기존의 해석들을 정리만 할 경우 그것은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전문 칸트 연구자로서의 기본적인 요건이 필요하다. 이런 요건들을 갖춘 후에 비로소 그는 칸트에 관한 논문을 쓸 수가 있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의 경우는 이런 형태의 진입장벽이 없다. 때문에 「에세이 철학」은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면 된다. 하지만 누구든지라고 했을 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세이 철학」은 특정한 철학자의 사상이나 특정한 철학적 주제에 관한 전문적 지식은 요구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요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의 사상을 올라타지 않으려면 자기 사상의 깊이와 통찰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글쓰기에서 요구되는 기본 요건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에세이 철학」을 쓰는 데는 다음의 몇 가지가 필요할 수 있다. 첫째는 글이 중언부언하지 않는 명확성(Clearity)이고, 둘째는 글이 피상적이지 않아야 하는 깊이(Depth)이고, 세 번째는 글이 남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생각과 언어라는 점에서 독창성(Originality)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글은 시류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글쓴이의 독립성(Independence)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본적 요건들이 갖추어질 때 그 글을 다른 글과 분명하게 차별 지을 수 있으며, 읽는 이들의 생각을 일깨워 줄 수 있다. 이런 정도의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글을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쓸 수 있으려면, 속된 말로 내공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결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에세이 철학」은 누구든지 쓸 수 있지만, 또한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세이 철학」은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에세이 철학」의 지향점은 지금 여기(hic et nunc)이고,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에세이 철학」을 통해 자신의 삶과 세계를 반성하고, 자신의 생각을 일깨우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에세이 철학」의 이러한 정신은 누구든 공유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 철학」은 철학 운동이 자 문화운동이고 글쓰기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내가 철학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는 한국 사회의 80년 대 분위기 때문에 주로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이 주도했다.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 들어왔고, 다음에는 시대와 현실을 담은 헤겔 철학이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변혁 철학의 심장과 브레인 역할을 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철학이 한 시대를 휘어 잡았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반 시대적이어서 특별히 관심 있는 학생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외면 당했다. 비판적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K. 포퍼의 철학 조차도 완전히 무시당했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서 내가 배운 철학은 프레게와 러셀과 논리실증주의자 그리고 전후기 비트겐슈타인 등이었다. 이들 철학은 일단 분석적이고 명쾌해서 접근하기가 쉬웠다. 덕분에 나도 석사 3학기 때 까지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을 가지고 논문을 쓸까 고민을 했었다.

분석 철학은 영미 철학의 전통에서 성장한 철학이다. 영국의 경험론은 대체로 반 형이상학적이고 반목적론적이었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니면 라이프니츠 처럼 수도 없이 많다고 하는 지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로크는 적어도 우리 정신 밖의 실체인 X를 인정했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 버클리는 그것을 지각적 표상으로 환원했다. 그의 유명한 “존재는 지각이다”는 명제가 그것을 말해준다. 데이비드 흄에 오면 이런 실체는 단순히 인상들의 다발로 간주된다. 불멸의 영혼이라는 실체는 감각의 다발이고, 뉴턴의 기계론적 인과법칙도 반복적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연상의 법칙으로 주관화된다. 이런 면에서 데이비드 흄은 근대 경험론이 갈 수 있는 막다른 골목까지 간 셈이다. 20 세기의 ‘논리 실증주의’는 흄의 20세기 버젼이나 다름 없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역할을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애매하고 모호한 말들로 인해 철학의 문제들이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추방한다면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정신을 추종한 비엔나 써클은 세상에는 단 두 가지의 명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의미있는 명제’와 ‘의미없는 명제’가 그렇다.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 그리고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명제들이 전자에 속하고, 가치 명제나 형이상학적 명제는 논리적인 명제도 아니고 경험적으로 검증이 되는 명제도 아니기 때문에 후자에 속한다. 비엔나 써클의 철학자들은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의 이러한 분석을 통해 철학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도발적인 주장들이 철학적 문제들을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끼친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엔나 써클의 일원인 루돌프 카르납은 그 당시 대단히 떠 받들어졌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모호하고 애매한 명제들을 하나 하나 까 뒤집으면서 분석 비판을 시도한 적이 있다. 철학을 형이상학의 모호한 구름 위에서 지상의 밝은 빛 한 가운데로 끌고 내려오려 한 것이다. 물론 형이상학의 전 체계를 낱낱의 명제들로 해체해서 명제 단위로 비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하지만 카르납의 작업은 적어도 비판적 언어 철학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셈이다. 이런 전통이 미국으로 건너가 분석 철학의 초석을 만들었다.

<트락타투스>(Logico-Tractatus)에 나타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은 언어와 세계의 대응을 통해 명제의 의미를 단순화 시켰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일상 언어의 문맥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쓰임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저항이 없으면 더 빨리 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진공 상태를 가정했는데, 오히려 더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들은 대륙의 철학자들처럼 사변의 전체로 얽혀 있지 않고, 일상 속에 살아 있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만큼 이해하기 쉽고 철학적 작업이 무엇인 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삶과 현실에서 유리된 추상 개념들을 현란하게 구사해야지만 철학을 하는 거라는 전통 철학의 모호한 환상을 확실하게 깨버린 것이다.

내가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을 할 때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무조건 백안시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일상 언어에 기초한 에세이 철학을 하면서 분석 철학의 정신, 그들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 삶에 기초한 철학 등과 같은 분석 철학의 정신이 에세이 철학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정신을 살려서 삶과 시대의 문제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굳이 대륙권 인가 영미권 인가의 구분도 무색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미권의 철학에서 헤겔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헤겔 철학에 대한 논문과 연구서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분석 철학의 한계를 대륙 철학의 정신을 받아들여 돌파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가 있다. 독일 철학 역시 하버마스 이래로 어중쩡한 포지션 때문에 새로운 철학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영미권의 철학에 대해 적극 관심을 보이는 철학자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고정된 하나의 길만 고집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한계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형이상학자들이 믿는 전통적인 명제 하나가 있다. 화엄의 인드라 망처럼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는 하나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리는 그것을 어떤 길로 어떻게 접근하느 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면 동과 서, 그리고 고금의 벽을 얼마든지 벗어 던지고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활하고, 화엄과 주역의 존재론이 양자역학과 대화하고, 분석적 정신과 종합적 정신이 동양의 음양의 관계처럼 대대 관계를 이루어 하나의 방법론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