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이종철 철학박사(연세대학교)의 허락을 얻어 언론에 쓴 칼럼과 여러 글들을 연계하여 게재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2월 23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를 허락한 필자와 <내외 신문> 측에 감사드립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이종철(연세대)

 

  •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이 맞고, 기쁨과 슬픈 히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갈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사랑은 아무나 하나”

 

오래전 유행하던 노래가 하나 있다. 가수 태진아가 간드러지게 몸을 흔들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두 사람이 만드는 걸

 

어느 세월에 너와 내가 만나

점 하나를 찍을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이 맞고, 기쁨과 슬픈 히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갈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들 간의 사랑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일국의 지도자를 어중이 떠중이가 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그만한 역량과 노력이 있어야 하고, 국민에 대한 애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덕을 쌓고서도 대권을 앞에 두고서 좌절한 정치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일은 훨씬 그렇다. 그런데 그런 노력 없이, 그리고 역량에 대한 검증도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유력한 야당의 대선 후보로 등장을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것도 행정이나 정치에 문외한으로 일방통행을 일삼는 특수부 검사에서 평생 경력을 쌓은 사람이 마른 하늘에 번개치듯 대권 후보로 등장하는 현실이 과연 정상일까? 조선 시대도 아닌데, 어리벙벙한 강화도령을 데려다가 임금이라고 앉혀 놓을 수 있을까? 정치가 코메디인가, 가수왕을 선발하는 것인가? 대통령 자리는 경험을 쌓고 역량에 대한 테스트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쌓은 역량을 최고로 발휘해서 국리민복을 위해 봉사하는 최고 지도자의 자리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의 능력과 역량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국정은 대혼란에 빠질 수 있다.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철학자 왕을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일국의 지도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문에서 무수한 훈련을 거친 다음, 최종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변증법(Dialectic)도 공부를 해야 한다. 그만큼 이론과 실천에 대한 경험과 학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도자는 누구보다 공을 앞세우고 사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처자 공유제’까지 주장을 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도 너무나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져서 플라톤 자신도 후기에는 포기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제왕학을 필수적으로 학습하고 엄격한 수련을 거치는 것은 왕의 비중과 역할이 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데 크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경우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지위를 세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만한 경험을 쌓고 그만한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은 이러한 일반적 기준에 미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첫째 앞서도 지적했듯, 그는 정치나 행정과는 전혀 무관한 특수부 검사에서 경력을 쌓았고, 그런 경력으로 인해 고속 승진을 해왔으며, 마침내 조국 일가를 도륙하는 고도의 편파적 수사로 일약 스타가 된 인물이다.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스타가 되는 경우는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정치에서는 없지는 않아도 힘든 경우다. 게다가 검사는 대화 상대가 있는 변호사나 사건 전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판사와도 다르게 자신들이 세운 수사 기획에 따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집단이다. 물론 그들이 법정에서 변호사와 공방을 벌인다할지라도 그들이 유명세를 타는 것은 법정이 아니라 수사 현장과 그 과정에서 일 뿐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국정을 처리한다면 과거 유신 독재나 군사 독재와 비슷한 검찰 독재가 가능할 때와 비슷해질 것이다. 윤석열의 정치에 대해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검찰 공화국’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한낱 우려일지 몰라도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것은 재앙으로 판명될 것이다. 때문에 일시적인 인기에 편승해서 정치인 행세하는 것이나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인물에 환호하는 것은 전형적인 파퓰리즘의 형태나 다름없다.

둘째, 윤석열에 대한 이런 우려는 실제로 그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보여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더욱 설득력 있게 드러나고 있다. 여러 공개적인 장소에서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개를 흔드는 동작을 반복하는 행위는 차라리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윤석열의 캠프 안에서도 이에 대한 지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바꾸라는 충고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타인의 충고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선적 성격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좁은 식견이나 시야에 대해 별로 반성하지 않는 소아병 환자일 가능성도 높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고 문제가 있을 경우 기꺼이 고치려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처럼 독선과 아집에 빠진 자가 최고 권력자로 독주한다면 그다음은 상상하기도 두려울 정도다. 이미 그는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를 할 때 거의 편집병 환자처럼 이 잡듯 수사를 단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사를 보고 ‘도륙’이라는 표현까지 쓴 것은 검찰 수사가 한 가정을 파탄낼만큼 편파적이고 참혹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아, 저런 식의 수사가 나에게도 닥칠 수 있겠구나”라는 두려움과 공감 때문에 서초동 검찰 청사 앞에 몰려와 ‘조국수호’를 외친 것이다. 왜 이런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려 하는가? 이것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인륜의 파괴이고 심각한 정의의 손상인 것이다. 이것을 정당한 수사권 행사 운운하는 작자들은 지옥의 사자나 다름없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요구하는 지도자는 외골수 편집증 환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과 소통하면서 대화와 설득을 시도하고 타협을 하고자 하는 건전한 이성의 소유자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나 얼마 전 물러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다.

셋째, 정치 지도자로서 윤석열의 경험이나 경륜, 그리고 자질이 부족한 현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 관계의 위험에 대해 일반인 정도의 상식도 없이 ‘선제 타격’을 말했다. 그는 과거 한국 정치의 쓰라린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음 정권하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정치 보복’을 시사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는 민주적 훈련을 받지 못한 그는 대중 앞에서 카메라를 받고서 수 분 동안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함으로써 그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주기도 했다. 그는 이해관계가 다양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토론을 부정하는 투의 말을 하면서 외면하기도 했고, 실제로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기본조차 의심될 만큼 무지를 거침없이 드러냈고, 이를 안하무인 격으로 오만하게 치부하는 태도도 보여주었다.

도대체 이처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일시적인 인기 하나로 대통령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21세기에 가능할 법한가? 이것은 여와 야를 떠나서 세계 10대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호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은 한낱 우려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대재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전의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분노했던 심정을 벌써 다 잊었는가?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두 번의 실수를 거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841&fbclid=IwAR1VQ9170rHHuz5yyex_vBhuOgPk6g2UgxGaaG2XadjeMNi1NPCNIQhvAoQ)

여우가 무서워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나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2월 20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를 허락한 필자와 <내외 신문> 측에 감사드립니다.

 

여우가 무서워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나다

 

이종철(연세대)

 

이번 대선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탄핵하기 위해 추운 겨울 날 촛불을 들고 나섰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다시 현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드라이브가 아주 강력하기 때문이다. 아직 5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정으로 퇴진한 정부를 다시 지지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퇴진한 당이 그 사이 분골쇄신했다는 이야기도 없이 구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요상한 수수께끼라고 해도 이상하지가 않을 정도이다. 아마도 이렇게 된 데는 강력한 기대를 걸었던 문 정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 컸기 때문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국민의 기대에 미흡한 면이 있을지 몰라도 문 정권이 크게 실정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정권 교체를 강하게 원한다는 데는 아마 다른 이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중 하나는 조국 사태 거치면서 민주당 기득권 세력의 안하무인격 내로남불에 대한 실망과 함께 그 *이 그 * 아닌가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조국 사태가 키운 불씨지만, 헤성처럼 등장한 윤 석열을 영웅시하는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다 잘못 판단한 것으로 보고, 정권 교체라는 것도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 조국의 처가 자식을 위해 동양대 문서를 위조한 사실 관계는 이미 그로 인해 대법원 판결을 받아 4년 징역형을 받았으니까 그것 자체를 변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수사 당시부터 문제가 되었지만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한 것 까지는 인정해준다 해도. 별건 수사로 저인망 훑듯 표적 수사한 결과는 너무나 초라한 것이다. 대학의 입시 당국도 별로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표창장 하나로 기소를 한 것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이런 식의 수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이는 법을 앞세운 횡포나 다름없다. 요리를 하라고 칼을 쥐어 주었더니 뒷골목의 강도로 돌변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사정이 그렇다고 한다면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하고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처 김건희나 의료보험료를 부정 수급하고 통장 잔고를 위조한 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인 장모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관대할 수 있을까? 내로 남불이 따로 없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원칙은 근대 법치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하지만 법은 추상적인 원리와 원칙만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법 자체가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법을 다루는 수사기관들이나 법원은 다른 누구들보다 공정성을 위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형평의 저울을 사법부의 상징으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조국 일가를 도륙할 때의 검찰의 태도는 과잉을 넘어서 위법적 수준까지 넘나든 정도이다. 그래 놓고도 법을 앞세우니 국민들이 법에 대해, 그리고 사법 기관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갖는 것이다. 내로 남불이 따로 없고,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으로 법이 운용된다면 누가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국 가족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대표적인 공정성 파괴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 책임을 조국 전 장관에게만 미룬 것은 이른바 기득권 보수 신문들이 씌워 놓은 프레임일 뿐이다. 현명한 국민은 반드시 이런 진실을 올바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윤 석열 자신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듯 자신을 키운 것은 조국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검찰에서 수사 검사로 명망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름의 영향권은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조국 사건을 진행하면서 전국적 인물로 등장했고, 이제는 한 나라의 대권을 다투는 유력한 야당의 대표가 되었다. 이쯤 되면 “개천에서 용난다”는 정도를 넘어서 일약 스타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 신문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약삭빠르게 그를 대권 후보로 치켜 세웠고, 문 정권의 미지근한 태도에 실망한 국민들은 그를 난세를 구할 수 영웅으로 떠 받들기 시작했다. 이런 열풍이 마침내 “차기 대통령은 윤석열이다”는 신화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윤석열이 그만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그를 한 커풀만 벗겨 보아도 이런 신화가 허구적이고 기만적임을 알 수 있다.

앞서도 지적했듯, 검찰 수사를 지휘한 윤석열의 태도는 공정성을 크게 위반한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는 검찰을 바로 세워 달라는 문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린 채 엉뚱하게 조국 수사의 파문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물량과 인적 자원을 투입했다. 만일 이런 식으로 개별 수사를 진행한다면 검찰청이 백 개가 되어도 범죄 수사를 제대로 단행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수사 기관은 한정된 자원과 인력을 합당한 사건의 성격에 맞추어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치를 할 것 인지를 고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국 사태처럼 무대포식의 수사는 공정성의 위배이자 판단력의 부족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개입된 수상한 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일국의 대통령이 이렇게 공정성과 형평성을 상실하고 편벽된 통치를 한다면 그 나라의 미래가 불행하게 마감한 박근혜 정부 이상으로 파행을 거듭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대체로 이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의 유형이 있다. 경험이 작은 우물안 개구리일 수록 그저 자기가 믿는 세상이 세상 자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검찰의 특수부에서 활동해온 윤석열의 좁은 시야가 그렇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오래전 TV 드라마에서도 보여졌던 우직한 돌쇠 이상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일단 결정하면 ‘앞으로 돌격!’하는 돌쇠의 우직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공정성을 크게 위반한 수사를 단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사람이 일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앞날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윤석열은 이미 선거 과정에서도 위험한 발언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대표적으로 그가 말한 ‘선제 타격’은 한반도의 특수한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황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게다가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면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위험한 인물에게 나라의 명운을 맡기는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기로점에 서 있다.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과거에 발목 잡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 지금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지도자가 되는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과거 승승장구하던 대한민국 경제가 IMF를 당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경제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면서 앞으로 20년은 더 걸려야 IMF 체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새로 정부를 맡은 김대중은 대한민국을 이런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했을 뿐더러 미래 성장과 통일을 위한 발판도 마련했다. 덕분에 한국은 몇 년 지나지 않아 IMF 체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고 한국 경제도 새로운 도약 단계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독 후 독일이 유럽의 중심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메르켈이라는 걸출한 여성 지도자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의 한국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 혁명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점에 대해 충분히 실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국민들과의 약속을 수행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런 문재인 정부에 대해 실망을 했다고 해서 과거의 실정에 대한 반성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인으로 전혀 검증이 되지 않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은 그저 하기 좋은 표현이 아니다.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686&fbclid=IwAR0nnJ7mLI2WoRKUU73RjH8uMAwyZgVWUBEBdcYh8n_iBZUaekmtGqhhwNA)

대통령의 악수와 소통의 문제[이종철의 세상보기철학]

대통령의 악수와 소통의 문제 [이종철의 세상보기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데 거부하는 나라..어이가 없네. 사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보통 사람도 악수를 청했는데 거절 당하면 불쾌한데,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이쯤되면 막나가자는 것이 아닌가? 이걸 그냥 둬, 말어. 권위주의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잘 못 건드리면 또 벌떼 처럼 달려붙을 텐데…사실 이 부분만 따로 떼어 놓고 비난할 일도 아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를 얼마나 희화화했는가? 현 권력의 핵심 실세는 아예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싸이코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배우 분장을 하고 그런 싸이코적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아랫것들이라고 배우지 말란 법이 있는가? 모 눈에는 모만 보인다고, 서로 막말이나 막가는 태도로 상대를 깍아 내리다 보니 이제 막 돼먹은 집의 망나니같은 아이들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모 그런 것을 정색하듯 따지나…그래도 대한 민국의 미래를 해서 탈 권위주의 시대의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박 근혜 정부를 ‘불통정부’라 부르는 이가 많다. 국민과의 소통이 적고 권위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굳이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많은 리더들이 이런 비판에 대하면서 억울해 할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아랫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노력했고, 또 그들보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노력을 했어도 아래 사람들이 별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말 해, 얼마든지, 다 들어 줄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왠지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말 잘못하면 경을 칠 일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자리 깔아줬다고 함부로 입을 나블대다 가는 신세 조질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느냐를 먼저 판단할 일이다. 종종 TV를 통해 청와대에서 고위 공직자들을 모아다 놓고 회의하는 장면을 보면 가관이다. 수첩 공주 흉내를 내느라고 다들 열심히 펜을 들고 받아쓰기 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회의 참석 전에 관련 문건들을 검토도 하고 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웬만한 기업이면 다들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모든 문건들을 등급별로 공유하고 있다. 청와대의 내부 시스템은 다른 어떤 기업들보다 최상급일 텐데 그들은 여전히 종이와 연필을 들고 대통령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데 정신이 없다. 이쯤 되면 대통령의 목소리는 가신들의 영혼에 각인되는 아버지 남성의 목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2012년 대선 시 연세대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가 박근혜 후보보고 “생식기만 여성”이라는 말을 했다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고위 공직자들도 제 말을 못하는 분위기에서 국민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말로는 연일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야말로 꽉 막혀 있다. 불통이 되다 보면 오해도 심해지고 갈등도 많아진다.

?그림을 한 번 보자. 유명한 Matisse의 그림이다. 그림 속의 남자는 고압적으로 서서 여자를 내려다 보고 있다. 반면 여자는 의자에 앉아서 남자를 올려다 보고 있다. 이런 눈높이의 차이는 권력 관계를 반영하기도 한다. 시선으로 제압할 때는 대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때이다. 그래서 팽팽한 기 싸움 할 때 상대방 보고 눈 내리까라고 겁준다. 게다가 남자의 손은 주머니 속에 꽂혀 있다. 여자에게 다가 가려는 태도가 아니다.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서 그만큼 여자의 감정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보인다. 그렇길래 여자는 의자에 갇혀서 남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 같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그림의 제목은 대화(Conversation)이다. 대화라면 당연히 서로의 눈높이도 맞추고, 거리도 줄이고, 주머니에서 손도 빼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이 그림은 역설적으로 ‘대화의 부재’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여자는 그런 고압적인 분위기에서 남자의 일방통행 식의 하명을 거부할 도리가 없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침묵하는 것뿐이다. 이런 여자의 마음은 분위기로, 즉 그들 간의 마음이 교류되는 창의 창살로 표현된다. 창살에는 non이 표시되어 있다. 당신이 아무리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내 마음은 ‘아니예요’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역설적인 그림을 통해 대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대화는 소통이다.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불통인 상황에서 갑자기 고압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무조건 말하자고, 네 말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만 하지 말고 말을 할 수 있는 눈높이, 거리, 자세를 먼저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이 그림이 주제에 충실하려면 남자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여자의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제스처를 취하기 힘들면 적어도 다른 의자를 가져와 무릎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맞추면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종종 강한 자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그렇게 하면 밑에서 올려다 보는 사람은 더 감동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릇 소통은 되먹임이고 순환이다. 순환이란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올라가는 것, 혹은 외부가 내부로, 내부가 외부로의 전환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정체는 이런 입출력의 균형이 깨어질 때 나타난다. 맛있는 것을 죽도록 많이 먹어도 변비로 배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을 맛이리라. 로마의 귀족들은 아래로 배설이 안되니까 어거지로 구토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성찬을 즐기면서 바로 옆에다가 그것을 토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하지만 입출력의 자연스러운 균형이 파괴되면 신체의 건강도 깨진다. 현대인의 비만은 대개는 좋은 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서 너무 적게 배설하는 데서 나온다. 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늙은 생명의 죽음도 그렇게 이해한다. 이런 입출력의 균형이 깨어지면 사회 생태계도 깨질 수밖에 없다. 오래 사는 것이 능사일 수는 없다고 본다. 좋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삶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이다. 그것이 반드시 오래 사는 것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2. 동양의 오랜 철학서인 <주역>에도 이런 소통에 관한 괘가 있다. <주역>은 점서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중국인들의 오랜 경험이 녹아진 자연관, 우주관을 특별히 괘(卦)라는 일종의 이미지(象)를 통해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는 마구잡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이 음양으로부터 4상이 나오고 하는 식의 ‘이치 논리’의 일정한 규칙을 띠고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총 64가지의 괘가 만들어지고, 이 괘를 통해 인간사와 우주 자연사를 설명한다. 이 중에 ‘천지비'(天地否)(왼쪽 그림)와 ‘지천태'(地天泰)(오른 쪽 그림)라고 하는 두 가지 괘가 있다. 이 두 괘는 모두 하늘과 땅이 중첩된 형상을 하고 있다. 천은 하늘이고, 남자이고, 왕이고 하는 것이다. 반면 곤은 땅(地)이고, 여자이고, 백성이고 한다. 만일 우리가 자연의 질서를 고려한다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남자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식이다. 왕은 위에서 다스리고? 백성은 아래서 다스림을 받는다. 그래서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괘가 천지비이다. 그런데 이 괘를 설명한 것을 보면 象曰 天地不交이다. 천지가 불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괘를 얻으면 아주 좋지 않다. 불통이라 함으로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폐색되어 있다는 의미다. 장 폐색 때문에 장이 썩는 질병을 생각하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입출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오히려 불통해서 폐색한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이 괘를 뒤집어 놓은 것이 지천태이다. 이것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습이다. 오히려 이것은 자연의 질서, 사물의 질서, 사회의 질서 등이 전도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이 괘의 설명을 보면 이렇다. 象曰 天地交泰 상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태평하다. 전도된 형태가 오히려 화합과 교류가 잘 이루어져 태평하고 번성한다는 의미다. 이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천지의 관계, 임금과 백성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오히려 정상적 형태의 관계 보다는 전도되고 역전된 관계에 있을 때 더 소통이 잘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 원리는 아주 단순하다. 양기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아래로 가라 앉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을 상징하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음을 상징하는 땅이 위에 있다면, 양기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아래로 내려와서 서로 소통할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을 위시한 우주 만물의 모든 건강은 이런 자연스런 소통에 기초해 있다.

 

머리를 차게 하고 발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도 이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동양의 모든 양생 수련법은 수승화강(水升火降)이 기초다. 즉 물의 기운인 음기는 위로 끌어 올리고, 불의 기운인 양기는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이런 소통이 잘 이루어질 때 신체의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 책을 많이 보거나 머리를 많이 쓰면 머리에 열이 많이 난다. 열이 나면 골도 아프고 잠도 잘 오지 않는다. 수행을 잘 못 하다 보면 이렇게 양기가 위로 뻗쳐 며칠씩 잠을 못 자서 나중에 머리가 도는 경우가 있다. 주화입마(走火入魔)나 상기증(上氣)이 그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미친 사람들을 몇 번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런건지 옛날 선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책을 한 권 마칠 때마다 반드시 책 걸이 행사를 한다. 이 책 걸이는 음주가무로 노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부 때문에 위로 뻗친 기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라 해도 좋다. 특히 이런 기가 머리로 뻗쳐서 통제가 안 될 때는 육체 노동을 강도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 문호 톨스토이는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양기(성욕)를 풀기 위해 생활공동체를 운영하면서 강도 높은 노동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종종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육체노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독서나 음악 감상 등 정신노동으로 푸는 것이 이상적이다. 정신과 육체의 통일의 원리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데 양과 음은 사물의 고정불변하는 속성이 아니다. 양과 음은 관계 속에서 주어지며, 이러한 속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리 태극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음이 커지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커지면 음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 논리 속에서 음과 양의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남자는 존엄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남존여비의 사상도 남과 여를 불변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오류이다. 동양의 전형적인 새옹지마의 논리가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천태의 좋은 괘도 방심하면 나빠질 수 있고, 천지비의 나쁜 괘도 대비를 하고 개혁을 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없다. 정치에서 여-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여이지 불변하는 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야가 될 수 있으며, 야 또한 불변하는 야가 아니다. 국민의 지지 여하에 따라 여야의 관계가 결정된다. 그런데 종종 정치인들은 이런 권력의 속성을 절대 불변하는 것으로 착각해서 자신의 지위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권력을 장악하면 일방 통행 식으로 행사하려 하고, 그 권력을 상실하면 한없이 조롱하고 희화화한다. 이런 형태로는 권력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만이 있을 뿐이다. 정작 국민의 지지로 탄생한 그 권력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생산적 권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 부를 가진 자가 국민과 법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먼저 하심하고, 낮은 데로 임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여야간의 소통, 국민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는 정치인들도 국민이라는 바탕 위에서 서로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 소통과 대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니까 직립 감읍해서 두 손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권위주의 시대의 관념이다. 그런 일방 통행 식의 권위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상당 부분 의미가 퇘색했을 뿐더러 희화화되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정치인들의 일방통행 식의 악수를 거절했다고 어이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요즘 세대에게는 더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다. 50대가 보수 꼴통이 되는 것은 이런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몸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남북 정상 회담할 때 김장수 국방장관이 김정일과 악수를 할 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고 꼿꼿장수로 칭송을 받은 적이 있다. 북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것도 어이상실이고 패륜이다. 제왕 같은 지도자 동지 앞에서 감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악수를 하다니. 하지만 우리 국민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탈 권위주의 시대에 중요한 선거관리 직무를 보는 사람들이 갑자기 직립 도열해서 악수를 해야 한다고 하는 모습이 더 이상할 수 있다. 물론 악수를 거절하는 모습을 무조건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맺힌 마음에 악수를 거절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기 보다는 먼저 그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그런 장면을 포착해서 이상한 시각으로 전달하는 언론이 더 문제이고, 별 생각 없이 그런 비난에 동조하는 태도도 문제인 것 같다. 그것은 언론의 공정성을 상실한 채, 선거의 효과를 노린 일종의 악마의 앵글이고 편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