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풍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3

풍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바람에 달이 있어 저 구름인 양 시월도 오고 가는 데

시의 시원한 바람은 잡히지 않은 양을 타고 간다.

흔들리고 떨리는 눈동자에 찬 시가 열리어 가는 데

거울의 아침은 보리밭 알알이 타는 까만 속이 열리고 있다

향기는 시큰하게 찬 밤하늘의 별빛으로 속삭이는 데

바람의 달이 송이송이 빛나고 있다.

 

2017.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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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유리의 성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2

유리의 성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깨어질 듯, 깨어지는 틈새로

작은 꽃이 스스럼없이 피어난다.

한 때는 흙이었고

한 때는 바람이었고

한 때는 길이었다.

차갑고 단단했던 유리는

타인의 길에 의지할 때 깨어진다.

스스로 자라는 길에는

작은 씨앗이 보송보송 피어나고

옹기종기 모인 자갈들은

오늘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는다.

나는 곧 타인의 끝에 서있다.

나는 다시 타인의 시작에 서있다.

 

2017.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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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담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의 균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가 스스로 알을 깨지 못하면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유리처럼 단단했던 그 벽이 투명해집니다. 우주를 이해하면서 작은 꽃이 피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해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시원함도 느낄 수 있는 자갈도 만납니다. 작은 씨앗들이 모이고 옹기종기 모인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은 변화의 길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단단하고 두꺼웠던 벽은 흐려지고 타인을 통해 나를 만날 수 있는 유리의 성을 깨고 우주를 항해합니다.

섦 – 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1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꽃이 아니라서 꽃이라 부를 수 있고

 

알 수 없는 향기라서 머무를 수 있고

 

그 안의 기억이라서 푸르게 자랄 수 있고

 

물음의 저편에 별 하나의 꿈이 있어서

 

아름다울 수 있다.

 

2017.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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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노래 위에 상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0

노래 위에 상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퍼석퍼석 모래 위로 나는 새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구름 위에 핀 꽃을 노래하는 슬픔의 변명이 놀라워

그들은 꽃을 멀리하였다.

기억에 없는 기억을 떠올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붉은 입술로 노래를 하고

익지 않은 푸른 사과는 아쉬워 바람에 춤을 춘다.

 

아직 낯선 사과에 겨울바람이 차곡차곡 쌓인다.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은 너무 낯설고 익지 않아 항상 거칠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황무지에

노랗게 피어나는 나비의 향기가 그립고

아직 익지 않은 밤, 푸르게 익어가는

한 여름 밤의 녹색 바람이 그립다.

부슬부슬 알 수 없는 비를 그리며

갓 구은 듯 한 초승달 한 마리가 반짝반짝

창밖으로 떨어지는 밤을 그리워한다.

그는 수많은 밤을 모아 곧 시장을 열 것이다.

그 추억의 밤을 누군가는 곧 사서 모을 것이다.

 

2017.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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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딱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덜 익고 푸릇한 사과처럼 모든 것이 그 크기만큼 낯설고 그 크기만큼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푸른 사과가 낯설지 않고 익숙해지는 것은 수많은 밤을 그 안에 담기 때문입니다.

 

익지 않은 열매는 많은 밤을 담을 것입니다. 푸르른 여름밤 풀냄새가 하늘에 가득하고 달빛에 반짝이는 빵 냄새가 나는 초승달과 수많은 별들과 뜨겁고 시원한 여름밤과 꽃이 피는 봄밤도 같이 담고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는 낯익은 가을밤도, 모든 것을 세상에 내던져 준 하얀 겨울밤을 차곡차곡 쌓은 사과의 낯설었던 밤은 누군가에게 달콤한 꿈이 됩니다. 상인은 수많은 밤을 팝니다. 작은 샘에 동그랗게 뜬 달을 떠서 누군가의 마음에 담는 것처럼 수많은 추억이 담긴 작은 우주를 경험하게 해주는 그 밤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삶들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보다 멀리 바라보는 삶을 때로는 갈망하며 삶은 항상 그리운 날이기도 합니다. 늘 꽉 찬 듯 부족한 것이 그리움입니다.

섦 – 가보는 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9

가보는 것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유리알처럼 투명해지기를 바라지만

보석처럼 빛나기도 전에 흔들릴 때가 있지만

그런대로 흔들리지 않고 싶지만

기울어가는 해처럼 기울어지지만

바스락거리는 해를 잡아보고도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상념을 붙잡고 싶지만

그렇게 살아지지만

다시 본래의 세계로 물들어가지만

시작의 습관을 붙잡고 싶지만

잠을 청하는 마을의 언덕위에 부는 바람을 잡아보고 싶지만

가을 빛 고스란히 어깨위에 웃음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그림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로 보내지만

경험하지 못한 공간으로 인도하지만

끝까지 쌓아 가보는 것이다.

 

2017.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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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도레미파솔라시도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8

도레미파솔라시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공기를 통통통

바람을 송송송

아침을 하하하

햇살을 봉봉봉

우주의 공기를

동글동글 둥글둥글

노래하는 비둘기 합창단

 

노란향기 뿅뿅뿅

분홍색깔 붕붕붕

하얀바람 팡팡팡

우주의 향기에

붕붕이가 날아온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신나게 노래하는

비둘기 합창단

 

 2017-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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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우리에게도 봄이 옵니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노란 희망이 하늘 위로 떠오르고 어둡게 떠있던 부정의한 정의도 잠수함을 타고 하얀 바람을 맞이하러 갑니다. 노란 향기, 분홍 색깔, 하얀 바람 가득담은 우주를 가슴에 담아 희망을 봅니다. 오선지에 앉아 있는 비둘기들이 우주를 향해 신나게 노래합니다. 하하하 허허허 호호호 후후후 바람 바람 바람을 가슴에 담아 떼를 지어 합창을 합니다.

<ⓔ시대와철학>의 간판작가 김설미향 출간 기념 인터뷰

<시대와철학>의 간판작가 김설미향  출간 기념 인터뷰

[그림자 박물관] 전격 출간

 

글쓴이 :  전임 편집주간 강지은

 아래 링크로 연결하시거나  [그림자 박물관]으로 검색하시면 이전에 연재도 작가의 작품도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http://ephilosophy.kr/han/7367/

 

유난히 꽃샘추위가 심술을 부리던 3월 7일 연남동에서 김설미향 작가를 만났다. 본인이 <ⓔ시대와철학>의 편집주간을 하는 내내 교류를 했던 작가가 웹진에 실었던 원고를 책으로 묶어냈다는 소식은 작가만큼 나에게도 기쁨이었다.  [그림자 박물관]은 웹진에 2013년 7월 2일 처음 연재를 시작하여 2014년 9월 28일까지 매달 한 번씩 연재된 그림동화다. 섬세한 그림과 상상력 풍부한 이야기는 행간에 더 많은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어른 혼자 읽어도 좋고 어른이 아이와 함께 대화하며 읽어도 좋을 철학동화다.

또 한 가지 축하할 일이 있다. [그림자 박물관]이 인천 문화재단의 예술지원사업 출판분야에 선정되어 출판지원을 받아 출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겹경사가 아닐 수 없다.

연남동 어느 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난 김설미향 작가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동화의 몇 가지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제 친구가 사실 동화작가예요. 그 친구의 작품과 비교해서 그림자박물관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어요. 제 친구의 동화는 전래동화를 해석하면서 친절하게 모든 걸 이야기해주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작가님의 동화는 한 번 읽으면 다 이해가 가는 듯 싶으면서도 다시 읽으면 또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메타포가 가득 든 보물상자 같습니다. 이제 질문을 해볼게요. 나루는 마을 사람들은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숨겨진 꼬리를 보고 그림자를 팔지 않습니다. 나루는 어떤 눈, 어떤 심성을 가진 아이일까요?”

“책에는 사실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부분이 많아요. 이야기의 개연성 때문에 처음 웹진에 실렸던 부분과 다르게 조금 스토리 조정도 했구요. 하지만 설정에서 나루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할아버지의 나쁜 꼬리를 볼 줄 아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입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욕심장이잖아요. 그렇다면 착한 심성의 나루가 세상을 구하는 구원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데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 이 세상에 한 사람 두 사람의 구원자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의 본보기 정도의 모습으로 작품에서 구현해 본거예요. 현실세계에선 힘들지만 작업 안에선 가능할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인 질문이기도 한데요, 작가가 원하는 인간상과 나루와 통하는 부분이 있나요? 다시 말해서 나루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으셨으면 좋으시겠어요, 아니면 그저 작품 속의 인물일 뿐인가요?”

“저는 나루같은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아직은 악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이 움직이는 세계가 더 크기 때문에 좋은 방향으로 변하지 않을까요. 또 작업 안에서도 그런 생각이 많이 표현된 것 같습니다. 또 저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고요. 제가 가지고 있는 힘은 많지 않지만 제 작품을 통해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작가님 말씀 들으니까 촛불 시민 안에도 나루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깊이 들어가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타인을 위한 것이고 타인을 위한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의 결말이 그다지 비극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화의 결말은 권선징악이잖아요. 나쁜 놈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비록 추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행복한 꿈을 꾸며 끝나요. 새로운 도덕성의 창조인가요 아니면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해야 하나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저는 가학적인 결말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추한 모습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또 열린 결말도 생각하고 작업했구요.”

“마지막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림자를 전시하는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장치예요. 그림을 전시하면 멋지잖아요. 할아버지가 자기 이익을 취하고 나쁘게 쓰기 위한 곳이죠.”

“자본주의의 시장같은 곳인가요?

“네, 그렇죠.”

“자본주의의 메타포로 읽어도 참 좋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욕망이 결국 무로 돌아간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가 아닌가 싶은 재미있는 동화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저만 잘하면 잘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더라구요.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세상에서 저만 잘산다고 행복한 건 아니더라구요. 함께 행복한 방향으로 가야 한 사회가 행복한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게 개개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게 함께 가야지 행복한 세상이 될 것 같고 책처럼 따듯한 세상이 되려면 모두 조금씩 노력하는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아래에 인터뷰 동영상도 함께 올립니다. 커피 가는 소리, 옆에서 대화하는 소리 등 잡음이 좀 있지만

그만큼 현장감도 느껴지실 겁니다. ㅋㅋ

 

 

섦 – 가면 쓴 우주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7

가면 쓴 우주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때

나의 세상 밖으로 나가서

가면 쓴 우주인을 벗고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비운 것처럼 슬퍼하는

가면 쓴 우주인을 벗고

노랑 날개를 펄럭이는

나비를 따라 향기를 맡으러 가보리.

그 곳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하늘도

내가 본적 없는 꽃도

내가 느껴 본 적 없는 나무도

내가 그려보지 못한 냄새의

향기로 가득할거야.

 

2017-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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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언제나 틀을 없애려는 그 시도조차 어느 틀에 갇히는 수고로움을 갖게 됩니다. 진정으로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것처럼 결국에 그것 또한 욕망의 한 형태로 자리합니다. 수 없이 어떤 것에 규정되거나 정해진 사각형, 삼각형의 형태로 갇히길 원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또 다른 형태의 틀로 가기도 합니다. 살아온 환경, 살아온 경험, 살아온 관계는 그 사람을 규정하고 타인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성립하여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럽고 때로는 슬픔과 마주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타인으로 성립되는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나로서 내가 성립하는 나는 무엇인지 그 둘 간의 간극에서 벌어진 틈을 보면 마주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 자체로도 행복할 수 없는 나를 마주하는 나의 현실에서 타인에게서 나라는 존재를 성립하고 자신을 타인에게 성립하려는 자신의 가면 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가본 적이 없는 아주 먼 나라를 동경하고 직접 경험한 적 없는 우주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끝도 없이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걸어갈 수 없는 타인의 길에 가끔은 함께 그 길을 걷고 싶기도 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나의 길을 온전하게 걸어갈 수 있는 노력을 하는 삶이고 싶습니다. 공간을 유유히 흐르는 향기로운 나비처럼, 삶의 이상향을 찾아가는 노랑나비처럼, 삶을 유유히 흘러가는 나비가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는 익살스러운 가면 쓴 우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섦 -빈집 II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6

빈집 II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하얀 눈이 이 세상을 채우고

따뜻한 햇살에 세상이 비워지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빈집 지붕 위에는

따뜻한 공기가 채워지고

또 다시 빈집은 비워져 있는 공간을

과거의 기억으로, 찬란했던 빛으로 채워 놓고

햇살이 지나간 흔적을 어둠으로 비우고

때로는 혼자만의 어둠으로 상실을 채운다.

나의 곁에 항상 머무를 것 같은 빈집은

채우기 위한 준비를 한다.

어둠의 공기로 닦아내고

먼지로 추억을 닦아내고

무언가 비어있다는 것은 채울 수 있는 것이고

채우지 않아도 여백의 즐거움이 있다.

 

201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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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봄의 향기가 올 것 같으면서 느리게 겨울을 붙잡던 계절이 가고 새롭게 시작할 게으른 봄의 열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공간 속에 필요한 물질을, 그리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물질들을 채우는 것이 자주 습관적으로 반복됩니다. 겨울의 추위 속에 하얀 눈이 세상을 하얗게 채우고 따뜻한 햇살이 찾아와 하얗게 다시 비우고 북적북적 채워져 있는 집과 집 사이 어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빈집은 누군가의 추억, 과거의 흔적, 찬란했던 삶을 채웠다가 어둠의 공기로 닦아내고 먼지로 추억을 닦아내고 새로운 희망을 채워 가기 위해 낯선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득 채우지 않아도 비어있는 삶이 즐겁다는 것을 가끔 잊고 살기도 합니다.

섦 – 나무숲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5

 나무숲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나는 언제나 없고 여기에도 없으면서 있으며

저기에도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무는 소리 없이 그곳에 있으면서

뿌리를 내려 하얀 눈이 될 때까지 슬픔을 잃지 않는다.

인간이 가장 힘들 때는 그 슬픔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서로는 알지 못한다.

다르지만 같은 무언가를 향해 닮아가고 있다.

 2017-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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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저는 세상의 모든 존재에서 가장 인간을 닮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의 뿌리와 가지, 잎, 열매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담고 있고 365일 12개월인 1년의 주기로 나눈 우주의 운행의 삶을 나무가 자연스럽게 담고 자연으로 살아가듯 인간은 그 자연의 구성원으로 나무의 4계절을 고스란히 담고 닮아 자연을 그대로 담아 닮아갑니다.

닮아가는 것보다 물질적인 형태는 다르지만 본성이 같은 나무의 삶이 곧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의 시기 또한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지나, 푸름과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여름을 만나고, 그 열정이 알록달록 무지개처럼 풍성한 열매 맺는 가을을 만나서 온 열정을 다해 지나온 과정을 혹독한 차가움으로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고 끝과 시작을 알리는 겨울을 지나 새롭게 시작하는 나무의 일부가 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삶의 모든 관계는 함께 있지만 함께 없기도 하고 내가 이곳에 있지만 없기도 하고 나무와 인간이 서로를 알 수 없듯 닮은 듯 다른 듯 하며 서로를 담고 닮아있습니다.

각각의 나무 한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고 인간의 모습도 모여 사회가 되고 서로를 닮은 듯 다른 듯 살아가고 알 것도 같으면서 모르기도 하고 모를 것 같으면서 알 것 같지만 모르겠는 것, 그것이 나무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나무를 안다고 하지만 나무가 아닌 저는 나무를 사실 모릅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동산을 이루는 나무도 아름다운 것처럼 한 사람의 존재도 치열한 사회속의 사회도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