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7-실재성과 반성적 사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실재성과 반성적 사유

1)

앞에서 헤겔의 논리학 현존 장의 전개가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에서 지각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평행한다고 말했다. 현존 일반은 질로 규정되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감각적 규정을 말한다. 이 감각적 규정은 존재하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타자 존재이기에 여기에 명멸하는 세계가 출현한다.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의 결론은 감각적 규정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각 장의 출발점이 되는 감각적 성질이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헤겔은 감각적 규정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이중성을 지닌 것으로 발전하는데, 헤겔은 이것을 실재성이라고 규정한다.(1 절은 현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실재성이라는 순서로 전개된다) 이 실재성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성질에 대응한다.

그런데 헤겔은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초판에서는 사용하지만, 재판에서는 제거해 버렸다. 재판에서는 규정성([Bestimmtheit] 뒤에 나올 규정[Bestimmung]과 구별된 의미를 지닌다)이라는 범주로 대체되다. 초판과 재판의 차이점 가운데 용어만 가지고 본다면,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¹

주1: 질이라는 표현도 차이가 있는데, 초판에서는 목차만 보더라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재판에서는 1절 감각 규정에 한정해 사용한다.

왜, 재판에서 헤겔은 이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지워버렸을까? 실재성은 긍정성을 의미하며, 이는 부정성에 대립한다. 실재성 즉 긍정성과 부정성은 반성 개념에 속하며, 이는 반성 규정을 다루는 본질론에서 다시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초판에서는 이런 점을 헤겔이 스스로 간과하고 앞에서 다루었던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통일성으로서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이용했는데, 재판에서 이를 깨닫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실재성이라는 표현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석에서 이미 실재성에 관해 많은 설명을 했는데, 재판에서도 이걸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은 이런 점에서 독자를 의아하게 한다. 왜 현존을 다루는 주석에서 실재성에 관하여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말이다. 사실은 초판에서 실재성 범주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헤겔이 초판에서 규정성 대신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하고 재판에서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것은 흔히 철학에서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헤겔은 이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소개한 다음 상당히 긴 주석을 달아 철학사에서 실재성이 다루어지는 맥락을 소개한다. 이 맥락은 헤겔 철학과 여타 철학과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므로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2)

우선 헤겔이 실재성을 어떻게 규정했는가 보자.

“현존은 오직 그 자신을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로 규정하는 한에서 또한 현존의 계기를 이루는 두 존재의 통일인 한에서 현존이다. 반성적 현존이라는 점에서 현존은 실재성이 된다.”(논리학, 1판, GW12, 63)

감각적 성질 예를 들어서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대타 존재를 지닌다. 이 빨간색은 사과, 양귀비 등에 공통된 성질이므로, 그 점에서 그 자체 존재다. 그런데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므로, ‘파란색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규정되면, 이것이 곧 실재성이다.

‘파란색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의 반성 관계를 전제로 한다. 즉 빨간색은 자신의 타자를 통해서 또는 자신의 타자에 비추어서 규정된 것이다. 그 때문에 헤겔은 이를 ‘반성적 현존’이라고 말한다.

실재성 개념에 반성 관계가 전제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부정성은 실재성에 직접 대립한다. 반성 규정의 본래 영역에서 부정성은 긍정적인 것에 대립한다.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부딪혀[AUC] 반성한 실재성이다. 이 실재성에서 부정적인 것이 비추어지지만[scheint], 이 부정적인 것은 실재성 속에서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논리학, 2판, GW21, 101)

이 구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실재성이 자신의 타자인 부정성에 대해 반성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사실이 언급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런데 앞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타 존재를 통해 타자와 구별되었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며, 단맛이나 3도 음과 같은 다른 모든 감각적 성질과도 구별된다. 그런데 실재성에 이르게 되면,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는 데로 한정된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감각적 성질의 그 자체 존재 즉 일반성인데, 빨간색이 사과, 양귀비 등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면서 동시에 빨간색은 파란색과 대립하는 차원에서 한정되어서 논의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빨간색은 파란색과 대립되는 한에서 실재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빨간색이 파란색과 대립하는 것이기에 이 빨간색은 감각적으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으로 된다. 즉 구체적으로 본다면 개별자가 지닌 불그스레 한 색, 짙붉은 색, 연분홍 색 등이 모두 파란색과 대립하면서 빨간색으로 포괄되는 것이다.

3)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은 철학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철학자 가운데 대표적으로 들뢰즈와 아도르노는 이런 주장을 반대한다. 실재하는 세계의 어디에도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디에서 부정성은 없으며, 어떤 것의 부정성은 다만 우리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자주 우리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부정성으로 즉 결여태로 파악한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의 결여태며, 여자는 남자의 결여태다. 등등.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왼손잡이는 그 나름대로 긍정적인 실재이며, 여자 역시 그 나름대로 긍정적 실재가 아닌가? 왼손잡이나 여자를 결여태로 보는 것은 사유가 개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결여태라는 개념은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대표적으로 스피노자는 실재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하려 했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즉 “Ommnis determination est negation”(모든 규정성은 부정성이다) 헤겔도 마찬가지로 실재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 구조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빨간색은 항상 다른 색깔들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순수하게 빨간색만을 알 수는 없다. 빨간색은 무지개색의 구조나나 삼원색의 구조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빨간색은 이미 그것과 구조 속에 있는 다른 색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조적 연관은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다. 주관적 구조와 객관적 구조를 가려내는 일은 논리학에서나 인식론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을 다루는 것은 나중에 반성 규정을 다루는 본질론에서 등장하니, 뒤로 미루기로 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실재성은 이처럼 구조적 연관 속에서 다른 실재성을 부정하는 부정성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4)

스피노자나 헤겔처럼 실재성을 이처럼 부정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와 연관된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하나 즉 일자라고 말했다. 즉 데카르트에서처럼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유 실체나 연장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실재성이라고 본다면, 세계는 “자체 내 아무 모순을 포함하지 않으며 하나의 실재는 다른 실재를 지양하지 않는” 세계가 된다. 여기서 사유나 연장도 각기 하나의 실재성이니, 독립적 실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성이 곧 부정성이라면, 실재성의 총합인 신은 위와 같은 무차별한 실재성의 세계가 아니다. 여기서는 실재성의 총합은 서로 대립하는 것의 통일이므로, 더는 규정성이 없는 무규정적 일자가 된다. 그러니 사유와 연장의 통일체로서 실체는 사유도 아니고 연장도 아닌 일자인 것이다.

실재성에 관한 주석을 끝내면서 헤겔은 독일어 ‘(in)Qualierung’이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사실 사전에 이 표현은 없고, ‘quaelen’이라는 표현은 있는데, 그 뜻은 ‘고통을 가하다’라는 뜻이다. 헤겔은 신비주의 철학자 야콥 뵈메가 이 표현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질[qualitaet]의 운동’을 의미한다고 한다.

헤겔에 따르면 질은 (규정성, 실재성으로 본다면) 부정성을 지니며 그런 한 ‘자기 자신에서 자기 자신의 불안[Unruhe ihrer an ihr selbst]’을 내포하고 “자기를 투쟁 속에서 출현하게 하니”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어떤 규정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규정성을 지니면서 실재하며 실재한다는 것은 곧 고통에 빠진다. 즉 인생은 고[苦]다, 세계는 고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통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

1)

지난 글에서 헤겔이 존재론 2장에서 전개한 현존 개념을 살펴보았다. 현존은 가장 직접적으로 인식된 감각적 확신의 세계다. 이 세계는 가장 직접적이기에 가장 완전한 진리의 세계이며 가장 풍요로운 세계로 간주되어 왔다. 비트겐슈타인이 원초적 명제로 보여주려는 세계, 아도르노가 미메시스를 통해 그려낸 세계가 바로 이 세계다.

그러나 반성적 사유를 무기로 삼고 있는 헤겔이 보기에 이 세계는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존재의 세계다. 즉 플라톤이 말한 토 헤테론의 세계다. 여기서 어떤 규정은 잠시도 멈춤 없이 다른 규정으로 전환하니, 간단히 말해 명멸하는 세계다. 이 세계는 아마도 우리가 악몽 속에서 만나는 세계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아름다운 직접 진리의 세계가 다른 한편으로 악몽과 같은 명멸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헤겔의 반성적 사유가 지닌 특징이다. 어떤 것은 항상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2)

이제 본격적으로 이 현존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있다. 1권 존재론 2장 현존 장은 헤겔이 재판에서 초판의 내용을 엄청나게 수정해, 언뜻 보면 헤겔이 초판과 재판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간단하게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현존

재판 현존

A

현존 그 자체

현존 그 자체

1

현존 일반

현존 일반

2

실재성

a

타자 존재

b

대타 존재와 즉자 존재

c

실재성

3

어떤 것

어떤 것

B

규정성

유한성

1

한계

어떤 것과 다른 것

2

규정성

특정성 상태 한계

a

규정

b

상태

c

3

변화

유한성

a

상태의 변화

직접적 유한성

b

당위와 한계

한계와 당위

c

부정

유한의 무한으로 이행

c

무한성

무한성

1

유한성과 무한성

유한성과 무한성

2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3

무한의 자기 내 복귀

긍정적 직접성

위의 표면 보면 도저히 초판과 재판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초판과 재판 사이의 상응하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초판에서 A절에서 다룬 ‘현존과 타자 존재’, ‘대타 존재와 그 자체[즉자] 존재’가 재판에서는 B절 1항에서 ‘어떤 것과 다른 것’이라는 제목 속에 함께 다루어진다.

초판에서 B절에서 다룬 ‘규정과 상태’, ‘내재 존재와 한계’는 재판에서도 B절 2항에서 다루어진다. 제목은 ‘규정, 상태, 한계’다. B절 3항은 초판이나 재판에서 모두 ‘당위와 한계[제한]’을 다루고 있어서 공통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헤겔은 초판에서 산만하게 전개한 내용을 재판에서 한 데로 집중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초판에서는 B절에서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보다 앞에 나온다. 반면 재판에서는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 다음에 나온다.

아마 헤겔이 재판에서 결정적으로 수정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헤겔이 수정한 것이 옳다고 받아들인다면, 재판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서 현존 장을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각 개념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것에서 점차 구체적이고 복잡한 것으로 나가니, 그리고 실제로 ‘규정’이라는 개념보다는 ‘내재 존재’라는 개념이 더 복잡하니, 재판의 순서가 헤겔 논리학의 개념에 비추어서도 정당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재판의 순서에 따라서 헤겔의 현존 장을 설명해 나가고자 한다.

3)

재판의 전개 방식에 따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절

a. 현존[질]과 타자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대타 존재

b.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실재성[Realitaet: 어떤 것etwas] 또는 규정성[Bestimmtheit]

B 절

c. 규정[Bestimmung]과 상태[Beschaffenheit], 양자의 통일로서 한계[Grenze]

d. 내재 존재[In Sich Sein]와 한계, 양자의 통일로서 제한

e. 당위와 제한[Schranke], 양자의 통일로서 유한성

C 절

f. 무한성과 유한성, 양자의 통일로서 대자 존재

이상과 같이 정리하면, 어떤 리듬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대립하는 X항과 -X항이 나타나서 양자가 통일되면, 그 통일된 Y항이 새로운 대립에서 -Y가 되고 그것에 대립하는 X항이 다시 출현하는 식이다.

과연 이런 전개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식의 리듬만 보면 마치 신비한 변증법을 보는 듯하니, 마치 신이 자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이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다양한 단계를 거쳐나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단순하게 최종적인 결과인 종적 물질을 산출하면 되지 않았을까?

더구나 당혹스러운 것은 헤겔이 현존 장을 전개하면서 구별한 개념들 즉 질, 실재성, 규정성, 규정, 내재 존재, 당위, 유한성 등 어떻게 보면 유사한 개념들이 어떤 구별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재판의 경우 헤겔은 이 개념들을 순서에 따라 사용하지만, 초판의 경우 이 개념들이 마구 뒤섞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목차에서 보듯 초판에서 질이라는 개념은 세 번이나 반복된다.

더구나 ‘타자 존재’나 ‘대타 존재’, ‘규정성’과 ‘규정’은 단어도 유사하고 ‘실재성’, ‘규정성’, ‘유한성’이나 ‘한계’와 ‘제한’은 모두 유사한 개념이고 ‘그 자체 존재’나 ‘내재 존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런 혼란을 뚫고 헤겔의 현존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필요하다. 이미 앞에서 필자는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전개 과정과 논리학에서 개념의 전개 과정이 평행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앞의 글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현존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면서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에 나오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이 전개되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 경험이 축적되면서 개별자에서 일반자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 장에서 위와 같은 논리적 개념이 전개되는 것도 그런 경험의 발전에 비추어 본다면, 이해되지 않을까? 즉 논리적 개념이 위와 같이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무슨 신비한 조화가 아니라, 경험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일어나는 전환이라는 것이다.

4)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장을 보면, 최초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규정[질: Qualitaet]은 곧 이런저런 대상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이라는 사실 밝혀진다. 예를 들어 감각적 규정인 빨강은 처음에는 가장 개별적인 규정이었으나, 사과 양귀비 입술 등에 공통으로 속한다. 이 경우 이제 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질[Eigenschaft]이라고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현존, 즉 단 일 회만, 한순간 나타나는 개별적인 질은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지니, 붙잡을 도리가 없다. 명멸하는 이 세계가 앞에서 말한 현존과 타자 존재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경험이 조금 발전하면, 이제 일반적 성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빨강’이나 ‘단맛’ 등의 감각적 성질이다.

이 감각적 성질은 반성적 사유에서 볼 때 이미 다른 감각적 성질과 구별된다. 현존의 질 역시 타자와 구별되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니, 대체 서로 구별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일회적 현존 세계는 무차별하다고 한다.

“일회적이니 구별될 수 없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구별이란 항상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적 사유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오직 차이만 있다면 그 차이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현존의 세계가 무차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감각적 성질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일정한 사유의 틀을 전제로 한다. 빨강은 파랑과 구별되는 차이를 지닌다. 여기서 빨강이나 파랑은 색깔이라는 틀 안에서 차이이고, 빨강은 파랑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빨강이고 그것은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은 이미 구조주의를 통해 널리 확산한 주장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 것으로서 어떤 것 즉 반성적인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 헤겔이 말하는 대타 존재다.

“현존을 비존재를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본질적으로 규정된 존재, 부정된 존재 즉 타자이다. 그러나 현존은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동시에 자기를 유지하니, 이런 것을 다만 대타 존재라 한다.”(논리학, 1판, GW12, 62)

다만 부정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타자 존재다. 그러나 부정당하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기에 대타 존재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일반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5)

이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이므로 헤겔은 이것이 ‘그 자체 존재’를 갖는다고 한다. 즉 그것은 “타자에 의해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부정당하는 측면만 보면 대타 존재다. 그러나 대타 존재는 그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일반성을 갖는데, 이 일반성이 곧 대타 존재의 이면인 그 자체 존재다.

“현존은 그 자신의 비현존 속에서조차 자기를 유지하니, 곧 존재다. 그러나 현존은 존재 일반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비현존과 대립한 상태에 있으니 타자에 대한 자기의 관계와는 대립하는 자기 관계로서 존재이며 자기의 부등성에 대립하는 자기 동등성으로서의 존재이다.”(논리학, 1판, GW21, 62)

동등성과 부등성, 타자와 대립하는 관계와 자기와 동일한 관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일 때 그것이 바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다.

여기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서로 구별되는 성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성질이 그 자체 존재이면서 동시에 대타 존재다. 대타 존재가 없으면 그 자체 존재가 될 수도 없고, 그 자체 존재가 없으면 대타 존재가 될 수도 없다.

헤겔에 따르면 그 자체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립한다. 그러나 그 자체 존재는 “비존재마저도 그 자체에서 간직하니 왜냐하면 그 자체 존재 자체는 곧 대타 존재의 비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또한 대타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해 있는 것이며, 이 대타 존재는 “오직 그 자체 존재를 지시하는 비현존이니 이것은 마치 역으로 그 자체 존재가 대타 존재를 지시하는 것과 같다.”(논리학, 1판, GW21, 62)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동일한 것의 양면이라는 주장은 재판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두 계기는 동일한 것 즉 어떤 것의 규정이다. 어떤 것은 대타 존재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한에서 그 자체적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하나의 규정 또는 상황을 그 자체에서 가지니 이 상황이 그 자체에서 외적인 것 즉 대타 존재인 한에서 그렇다.”(논리학, 2판, GW21, 108)

“어떤 것은 그 자체 존재인 것과 동일한 것을 또한 자신의 표면에서 가지며 거꾸로 대타적인 것 역시 그 자체에서 가진다. 어떤 것은 두 계기의 동일성이며 양자는 그 속에서 불가분리적이라는 규정에 따라서 볼 때 이것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동일성이다.”(논리학, 2판, GW21, 108)

6)

헤겔에게 양자의 통일은 실재성이다. 이런 것이 감각적 성질이다. 이런 감각적 성질 즉 대타 존재와 그 자체 존재의 통일인 실재성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사유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이전 현존의 세계는 사유할 수도 언어화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인 것이니 언어로 규정되고, 사유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표현된다면, 질적 개별 명제로 표현된다. 즉 ‘이것은 빨강이다’라는 명제다.

하나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은 반성적 사유에서는 그와 다른 실재성이 있다는 말이 되고, 그러면 둘 이상의 실재성이 서로 관계하면서 어떤 것이 된다. 어떤 것[etwas]이 등장하면서 논리적 개념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개념 쌍은 ‘규정과 상태’라는 개념 쌍으로 변화한다. 이런 변화가 있으려면 우리의 인식 경험이 감각을 넘어 지각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강소

헤겔 형이상학 산책25-현존과 ‘to heteron’[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5-현존과 ‘to heteron’

1)

논리학 1부 1권은 존재론은 3편으로 나누어진다. 그 가운데 1편은 1장 존재, 2장 현존, 3장 대자 존재로 이루어진다. 1편 전체는 질을 다루고 2편으로 넘어가면서 양으로 이행한다.

앞에서 서술한 1장 존재론은 생성이라는 운동을 다룬다. 이 운동은 발생과 소멸의 끊임없는 상호 이행이며, 그런 이행이 일시적으로 균형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곧 현존이다. 필자는 이런 존재의 운동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들었던 촛불의 비유로 설명한 바 있다.

필자는 논리학과 인식론은 서로 평행을 이룬다고 본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인식의 이행은 시간상에서 일어나며, 이런 이행이 내면화(Erinnerung: 기억)되어 논리가 전개된다고 했다. 전자는 형태의 운동이며 후자는 계기의 운동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이다. 논리학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논리 규정을 찾자면 1편 2장에서 다루어지는 ‘현존’에 해당한다. 만일 논리학과 인식론이 평행을 이룬다는 가정을 유지한다면,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운동은 인식론에서 어떤 인식에 해당하는 것일까를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평행이라는 가정이 무너지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필자는 1권 존재론의 1편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생성 운동은 존재론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운동 즉 상호 이행의 운동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은 2권의 1편 1장(가상)과 3권의 1편 1장(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상은 2권 본질의 운동 즉 반성 운동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며 개념은 3권 개념의 운동 즉 발전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 권이 1편 1장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대체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한 인식의 전개 과정과 평행을 이룬다. 이점은 앞으로 논리학 산책을 통해 논리학의 각 규정이 인식론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밝히면 대체로 인정될 수 있는 가정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전개 과정 밑바닥에는 헤겔이 칸트로부터 받아들인 범주표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12개의 판단형식으로 이루어진 범주표가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기본 설계도라고 볼 수 있다.

2)

이미 설명했지만, 존재의 운동은 이행 운동이다. 이런 이행의 운동은 존재자가 전개하는 운동 가운데 즉 본질의 반성 운동이나 개념의 발전 운동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추상적인 운동이며, 그러기에 가장 일반적으로 즉 모든 존재자에 적용되는 운동이다. 여기서 운동은 매개 과정도 없으며 발전적 연관도 없다. 다만 하나의 규정에 다른 규정으로 직접 이행하니, 그 모습이 곧 존재가 무로, 무가 존재로 단적으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합물이나 생명체와 같은 것도 이런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즉 하나의 역학적 물체로 보는 가운데서는 마찬가지로 이런 존재의 이행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거꾸로 추상적 존재자에 적용되는 이런 운동을 화합물의 화학적 작용 과정이나 생명체의 생명 운동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는 더 구체적인 운동 방식이 즉 반성이나 발전과 같은 운동 방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의 생성 운동 즉 발생과 소멸이 일시적 균형을 이루면서, 헤겔은 현존이 출현한다고 한다. 이 주장은 앞의 1장 끝에 헤겔이 제시한 내용이며 2장 현존을 시작하면서 다시 되풀이된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현존은 존재와 무가 단순하게 하나로 되는 것이다. 현존은 이러한 단순성 때문에 직접적인 것의 형식을 지닌다.”(논리학, 2판, GW 21, 97)

이런 서술을 보면 마치 순수 존재나 순수 무가 있어서 그것의 상호 운동을 통해서 현존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순수 존재나 순수 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처음 가장 직접 발견하는 것은 사실 현존이다. 현존은 그냥 독립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이 현존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주관이 설정한 개념 틀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이다. 여기서 개념 틀은 순수 존재라든가 순수 무와 같이 따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관계 즉 생성하는 관계이다.

사유 속에서 보자면,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통일되어 현존이 생성한다. 그러나 인식의 과정에서 본다면 최초의 인식 즉 감각적 확신에서 나타나는 현존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틀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이행 운동이다.

그것은 마치 공리와 정리 사이의 관계와 같다. 사실 우리가 인식 상 먼저 발견한 것은 정리이다. 이 정리들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공리가 추출되며, 이 공리를 구성하면서 정리가 서술된다. 이 점은 후일 마르크스가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을 대비한 것과 같다. 연구 과정에서는 구체적인 현실이 먼저다. 연구를 통해 이로부터 추상적인 원리가 발견된다. 서술에서는 추상적 원리가 먼저이고 이것을 구성하면서 구체적 현실이 설명된다.

헤겔도 이 점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체[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현존]는 우리의 반성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며 아직 자기 자신에서 그렇게 정립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 자체의 규정성이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은 현존이라는 표현이 말해준다.”(논리학, 2판, GW 21, 97)

‘반성 속에서 그렇게 규정된 것’이라는 말은 현존이 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규정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규정은 ‘반성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헤겔은 이제 현존의 모습 속에서 그런 운동이 즉 존재와 무의 통일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서’ 그렇게 ‘정립될’ 것이다.

3)

그렇다면 현존의 모습이 어떠하길래 헤겔이 이를 ‘존재와 무의 통일’로 규정하게 된 것일까? 현존이란 우리의 의식에 처음 가장 직접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정신현상학에서는 감각적 확신의 대상이다.

헤겔은 이 현존의 모습을 ‘질[Qualitae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분석철학에서는 이 질을 더 확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감각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의식이 우리 밖의 외계와 가장 직접 부딪힐 때 나타나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처음에는 이 감각질이 가장 풍요하고 가장 진리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의 의식이 외부의 대상과 직접 부딪히는 순간, 그 순간은 인식과 대상은 합일에 이르며, 그 순간은 어떤 비교할 수 없는 순간 즉 개별적 순간이며 그런 순간순간의 전체는 대상의 가장 풍요한 모습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므로 인식론에서는 항상 모든 인식의 토대를 이런 감각질에서 찾으려 했다. 대표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원초적 명제 속에서 이런 감각질의 인식을 찾으려 했으며, 아도르노가 양화하고 일반화하는 계몽적 인식을 거부하면서 미메시스를 통해 얻어지는 인식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도 이런 기대가 감추어져 있었다.

4)

그러나 헤겔은 이런 현존이 지닌 질은 의식이 대상과 순간적인 부딪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런 부딪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한, 매 순간 그 질은 사라지고 새로운 다른 질이 출현한다. 소위 ‘명멸[明滅]’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현존의 모습이야말로 이런 명멸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현존을 규정하면서 현존은 동시에 ‘타자 존재[Anderssein]’라고 말한다. 이 타자 존재란 현존 옆에 있는 또 하나의 현존이라는 의미라기보다 그 자신이 이미 자기와 다른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타자 존재를 ‘자기 자신의 타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즉 질이 명멸하는 모습을 헤겔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 자체는 본질적으로 타자 존재이며 이 타자 존재 속으로 이행한 것이다. 타자는 그와 같이 직접적이며 그의 외부에서 발견되는 것과 관계하지 않고 다만 본래적으로나 현상적으로 타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하여 타자는 곧 자기 자신의 타자이다.”(논리학, 1판, GW 12, 61))

“왜냐하면, 현존은 이에 못지 않게 비현존이고 즉 비현존으로서 현존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자기 자신의 무로서의 현존이므로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의 무는 마찬가지로 현존이기도 하다.”(논리학, 1판, GW 12, 60)

여기서 현존과 비현존의 상호 이행이 등장하는데, 이 기초 전제가 된 것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통일이다. 즉 현존의 명멸하는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헤겔은 존재와 무라는 두 개념 틀을 사용한다. 이 명멸하는 모습이 곧 생성 운동 즉 발생과 소멸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런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생성을 통해서 현존을 보자면, 현존은 양자의 통일을 존재의 측면에서 본 것 즉 “존재로서의 통일”이며 타자 존재는 양자의 통일을 무의 측면에서 본 통일 즉 “비존재로서의 통일”이다.

만일 가정해서 우리가 우리 밖의 세계에 일정한 순간에 동시에 부딪힐 수 있다면 또는 이전의 것을 기억해서 새로운 것과 함께 떠올린다면(아직 우리는 이런 단계까지도 넘어가지 않았으나), 이 경우 우리는 하나의 현존 옆에 또 하나의 현존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의 현존과 그 옆에 있는 다른 현존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의 현존도 타자 존재로 이행하고, 다른 현존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타자 존재로 이행하니, 어떤 현존도 머무름이 없이 타자 존재로 변화하는 마당에 여기에 어떤 비교도 가능하지 않으니,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계는 무차별적 세계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러므로 양자는 어떤 것으로 규정될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 규정된다. 따라서 양자는 동일한 것이며 양자 사이에 어떤 구별도 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의 규정의 동일성은 다만 외적 반성 즉 양자의 비교에 속한다. 그러나 타자는 일단 정립된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이 동일한 타자는 자기 나름대로 사실 어떤 것과 관계 속에 있으나 또한 자기 나름대로 그 어떤 것 밖에 있다.”(논리학, 2판, GW 21, 106)

5)

헤겔은 플라톤이 그려낸 ‘토 헤테론[to heteron]’은 바로 이런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현존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자신의 타자로 되는 명멸하는 세계를 (또는 좀 더 발전하면 서로 무차별적인 세계를)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데, 아이가 어머니 자궁을 나와서 처음 보게 되는 세상이 있다면 다름 아닌 이런 세상이 아닐까? 또는 악몽 속에서 어떤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불쑥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할 수있을까?

언젠가 가을날 어느 산 정상에서 약간 기울어져 가는 햇빛에 반사된 억새꽃이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뒤로 수없이 산에 가고 또 억새를 보았으나 결코 다시 그 억새꽃의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 세상에 단 일회만 존재하고 곧 사라져 버린 그 모습은 심지어 기억 속에서도 남아 있지 않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기억해 낼 수는 없다. 헤겔이 말하는 현존의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이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이런 질로 이루어진 현존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이것’이라는(또는 ‘여기’, ‘지금’과 같은) 지시 대명사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은 그 순간 이미 자기와 다른 타자 존재가 되니(예를 들어 지금은 낮인데, 바로 밤이 되고 등), 이것으로 포착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무엇이나 지시하는 것 즉 어떤 ‘일반적인 이것’에 이를 뿐이다.

같은 이야기를 헤겔은 논리학에서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말로 어떤 완전히 규정된 것을 표현한다 한다. 여기서 언어 즉 지성의 작품이 다만 일반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사실 즉 이는 어떤 개별적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과 다르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러나 개별적 이름은 일반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없는 것이다.”(논리학, 2판, GW 21, 105)

이강소

헤겔 형이상학 산책24- 촛불의 비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4- 촛불의 비유

1)

존재와 무는 관계 즉 시공간의 양 측면이다. 존재는 존재자의 통일을 말하며 무는 존재자의 상호 분열을 말한다. 이런 존재와 무는 상호 이행한다. 존재자들이 통일적인 관계를 맺다가 이 관계가 해체되는 것이 소멸이며, 관계가 없던 상태에서 관계를 맺어 통일로 가는 것이 발생이다.

그러므로 관계로서 시공간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것으로 생각되거나 부정적인 물체 즉 빈 그릇과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시공간은 발생과 소멸이 끊임없이 상호 전환하는 운동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발생과 소멸이라는 생성하는 운동은 다시 힘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발생은 분열된 존재자를 통일하는 것이니 이는 통일하는 힘을 의미한다. 소멸은 통일된 존재가 분열하게 되니 이는 해체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제 이 관계 즉 시공간을 어떤 물체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공간은 사실 힘으로 이루어진다. 시공간은 한편으로 관계를 맺는 힘 즉 통일 또는 수축하는 힘과 다른 한편으로 관계를 해체하는 힘 또는 펼치는 힘이 전개하는 상호작용일 뿐이다.

공간이 힘이라는 헤겔의 생각은 역학에서 장[場]의 이론을 생각하게 한다. 이 경우 어떤 중심점이 있어서 그로부터 힘이 마치 파도처럼 펼쳐나간다. 가까울수록 장은 강한 힘을 발휘하며 멀리 떨어질수록 힘은 약화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시공간이 장이라 할 때 힘 자체가 그것도 두 대립적인 힘의 상호 작용하는 관계이다. 그것은 마치 밀물과 썰물이 교대하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조각배와 같은 모습을 취한다. 바다가 시공간 즉 존재라면 조각배는 존재자다.

2)

존재와 무가 동전의 양면이듯 발생과 소멸도 동전의 양면이니, 수축하는 힘과 펼치는 힘 역시 동전의 양면이다. 두 힘은 서로 따로 떨어진 힘이 아니며 두 힘의 관계는 각자 독립적으로 그리고 서로 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정신현상학 지성 장에서 물체의 두 속성 사이에는 법칙 관계가 존재하는데, 이 법칙은 두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고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힘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운동의 한 가지 계기 즉 자립적인 물질들이 펼쳐져서 제각기 존재하게 되는 운동은 힘의 표출이며 반대의 계기 즉 이 자립적인 계기들이 지양되어 사라지게 하는 운동은 표출에서 자기 내로 수축하는 힘이거나 또는 본래적인 힘이다.”

(정신현상학, GW9, 84)

통일하는 힘과 분열하는 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침투하여 통일한다. 그 결과 각자가 타자를 촉발하며 각자가 타자로 이행한다. 두 가지 힘의 관계는 마치 음양의 동정이 끝없이 전개되는 태극의 모습과 닮았다.

3)

이상에서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에 관한 헤겔 사유의 대강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양자를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구별된 양자를 관계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존재는 시공간적 관계다. 이 관계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의 존재자 즉 현존[Dasein]이 출현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마치 허공에서 불쑥 손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헤겔은 논리학 존재론에서 존재와 무에서 생성, 그리고 힘의 상호작용으로 사유를 발전시켰다. 이제 마지막으로 헤겔은 생성에서 다시 현존재로 이행한다. 이로써 질적 규정을 다루는 1부에서 1장 존재론이 끝나고 2장 규정성 또는 현존재로 넘어간다.

이 마지막 부분은 곧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인데, 이 부분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무척이나 불친절하다. 헤겔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헤겔은 생성이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중적 규정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방향이 상호 침투하면서 서로가 상살[相殺]되기에 이른다. 그 한 쪽 방향은 소멸이다. 존재는 곧 무로 이행하기는 하지만 무는 못지않게 자기 자신의 반대물로 됨으로써 오히려 존재로 이행하니 이것이 즉 발생이다. 발생은 다른 또 하나의 방향이다. 여기서 무가 존재로 이행하되 존재는 못지않게 자기를 지양하는 가운데 오히려 무로 이행하니, 이것이 소멸이다.”(논리학, GW 21, 93)

4)

이것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힘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발생이나 소멸, 통일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은 상호작용한다. 통일하면서 수축하고 수축하면서 통일한다. 이어서 이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발생과 소멸은 균형 속에서 서로를 정립하는 데 이런 균형이 일단 생성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생성은 마찬가지로 평온한 통일 속으로 함몰하고 만다. 즉 존재와 무가 생성 속에서 다만 소멸적인 것으로 존재하지만 생성 그 자체는 역시 이 존재와 무의 구별성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와 무의 소멸은 곧 생성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소멸하는 것이 소멸하는 것을 뜻한다. 생성은 이리저리 나부끼는 동요와 같은 것이지만 이런 동요는 모두 몰락하면서 하나의 평온한 결과가 된다.”(논리학, GW 21, 93쪽)

여기서 헤겔은 생성을 설명한 다음, 이 생성 자체가 다시 소멸한다고 말한다. 생성에서는 존재와 무가 각자 자기를 소멸하고 타자로 이행하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그게 발생과 소멸이며 양자를 통합하여 생성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소멸한다고 할 때는 다름 아닌 생성 자신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즉 존재와 무의 상호 소멸 자체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소멸하는 것이 소멸한다”고 말한다. 생성은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으로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것이다.

반면 생성의 소멸은 동요 자체가 소멸하면서 정지와 평온을 되찾는다. 이제 존재와 무는 서로 이행하지 않고 존재는 존재, 무는 무로 구별되어 존재할 뿐이다. 존재와 무, 통일과 분열은 서로 긴장된 대립 가운데 고요하게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이 생성하는 운동이 정지하는 것은 한순간일 뿐이며 곧 이어지는 순간 다시 생성하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생성과 생성의 소멸 자신이 다시 통일되어 있다.

이 평온은 곧 존재와 무, 통일성과 분열이 한순간 운동을 멈추고 통일성과 분열이 일정한 관계로 멈추어서 있는 것이니, 여기서 존재자와 존재자는 일정한 관계 속에 그러면서 일정한 분열 속에 있다. 관계 즉 존재와 분열 즉 무는 고정된 채 머무른다.

“그것은 곧 존재와 무의 통일[즉 생성하는 운동]이 고요한 단순태로 된 것이다.”(논리학, GW 21, 94)

5)

여기서 존재와 무가 구별된 채 머무르는 ‘생성의 소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런 문제 앞에서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변증법적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촛불을 비유로 삼았다. 촛불은 타오르는 것과 꺼져가는 것이 즉 발생과 소멸이 끊임없이 교체하는 운동이다. 그런 운동 가운데 발생과 소멸이 균형을 이루면서 고요하게 머무르니, 그것이 바로 로고스라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동요와 운동이 사라지고 고요한 안정이 회복되니, 바로 그 안정이 곧 어떤 규정성이다. 그것이 바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다.

“생성은 존재와 무가 통일로 이행하는 것으로 존재하며, 이런 통일은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며, 두 계기의 일면적 직접적 통일이라는 형태이니 곧 현존재다.”(논리학, GW 21, 94쪽)

5)

생성과 로고스, 운동과 규정성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있다. 헤겔의 사유는 근대에 출현한 미적분학의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이 존재의 무의 통일을 설명하면서 주석4에서 수학적 무한소 개념을 끌어들인 것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헤겔은 무한소는 아무리 작더라도 여전히 일정한 크기를 지닌 것이며, 따라서 무는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즉 “크기란 어떤 것이거나 아니면 무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주장을 반박하며 무한소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존재이면서 동시에 무인 것이라 한다.

“존재와 무의 중간 상태가 아닌 것은 없다. 수학은 지성이 반대하는 그런 규정 덕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논리학, GW 21, 91-92쪽)

헤겔은 무한소를 “존재와 무의 중간 상태”로 표현했지만, 사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무한소는 두 개의 대립하는 힘이 서로 통일된 한순간이다. 예를 들어 낙하법칙을 설명하는 이차 함수를 생각해 보자. 그 이차 함수의 어떤 한 점은 지금까지 운동의 결과 위에 그 한순간의 운동량을 더한 것이다. 그것을 미분적 차이라고 한다.

그 한순간의 운동량 즉 미분적 차이는 무한소의 시간에 무한소의 거리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무한소의 시간과 무한소의 거리가 비례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 비례적 관계를 두 대리하는 힘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한다. 즉 발성과 소멸, 통일하는 힘과 분열하는 힘의 상호작용이다.

이런 미분적 차이의 작용에 의해 어떤 순간의 점 바로 다음의 점이 결정된다. 이런 생각을 일반화한다면, 낙하법칙의 모든 점은 다름 아닌 미분적 차이의 결과일 수 있다. 이런 예를 들어본다면 헤겔이 존재가 존재자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헤겔 형이상학 산책23- 생성과 태극[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3- 생성과 태극

1)

헤겔 사유의 가장 근본적 특징은 바로 반성적 사유이다. 이 반성적 사유는 어떤 것을 그것과 대립하는 것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반성적 사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곧 어떤 규정성은 부정성이라는 주장이다.

대립적 관계란 곧 차이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곧 어떤 것을 변별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구조주의적 사유와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구조주의 사유나 헤겔이나 다 칸트에서 흘러나오니 헤겔과 구조주의 사이에 이런 공통성을 발견한다고 해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대립적 관계 즉 차이를 중심으로 하는 반성적 사유에서 보면, 존재자와 존재는 아주 간단하게 구분된다. 지금까지 거듭 말해 왔지만, 존재자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존재는 다름 아닌 그런 존재자들이 맺는 관계다.

존재자의 관계는 구체적 관계에서 추상적 관계로 전개된다. 그 관계 가운데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외면적인 관계가 그러니까 가장 추상적인 관계가 곧 시공간적 관계이다. 헤겔이 말한 순수 존재란 이런 추상적인 시공간성을 말한다.

존재자가 위치하는 시공간 즉 그 관계를 헤겔은 ‘Da’로 표현했다. 존재자 즉 현존[Dasein]은 그런 Da에 위치해서 어떤 규정을 갖는 것이다. 바로 이 ‘Da’ 곧 존재자의 관계가 존재이다.

‘Da’라는 표현을 하이데거와 헤겔이 상반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 흥미로울 것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는 존재[Sein]가 어떤 시공간[Da]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반면 헤겔에서는 존재자가 들어서 있는 시공간 ‘Da’가 곧 존재다.

2)

여기서 시공간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 시공간은 공허한 것으로 구체적인 존재자와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구체적 존재자는 마치 공허 속에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헤겔에서 시공간은 한편으로 공허한 무규정자 즉 apeiron이다. 여기서 공허한 무규정자라는 것은 결코 텅 비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들이 관계하지 못하고 서로 분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공간은 자기 관계하면서 연속적이고 충만된 것 즉 일자가 된다. 자기 관계한다는 것은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다.

존재자의 관계로서 시공간은 관계하면서도 관계하지 않는 이중성을 지닌다. 관계하는 일자적 측면과 관계하지 않는 무규정적 측면은 서로 대립하면서 단적으로 결합해 있다. 시공간에서 양자는 마치 동전의 이면과 같이 결합한다.

공허한 시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듯이 충만한 시공간도 따로 있을 수 없다. 시공간은 공허하면서도 충만한 것이기에 헤겔은 존재와 무는 통일되어 있다고 말한다.

3)

헤겔의 존재란 곧 시공간을 말한다. 시공간이 두 측면 즉 충만성과 공허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을 표상적으로도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런 표상을 통해 보면 존재와 무의 통일이라는 헤겔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존재와 무의 대립적 통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헤겔은 생성하는 운동의 개념으로 나간다. 헤겔은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말한 다음, 생성이라는 개념으로 나간다. 이 생성은 운동하는 것이다. 즉 존재에서 무로 또는 무에서 존재로 이행한다.

“그러므로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한 것이다. 진리일 수 있는 것은 존재도 무도 아니며 오히려 존재가 무로 또는 무가 존재로 단지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이행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진리는 이 양자의 무구별성이 아니라 이들이 동일한 것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구별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구별되지 않고 구별할 수 없고 각자가 자기의 반대물 속에서 직접적으로 소멸되는 데 있다.”(논리학, GW21, 69-70)

헤겔은 이 구절에서 ‘이행’이라는 말만 언급하지 않고 이미 ‘이행된 것’이라는 말도 언급하는데, 전자가 곧 생성의 운동이다. 후자는 생성 이후 출현하는 ‘현존재’를 의미한다. 생성이 다시 현존재로 이행하는 측면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는 우선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으로서 생성 운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 운동을 존재자가 비존재자가 되거나 비존재자가 존재자가 되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내 앞에 누가 있다가 사라지거나 누군가가 내 앞으로 출현하는 것과 같은 것은 존재자와 비존재자의 상호 이행이다. 그러나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은 이런 개별적 존재자의 이행과는 다른 의미이다. 이는 일정한 시공간 즉 존재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자의 운동이다.

4)

존재는 일자이며 무는 무규정성 즉 아페이론이다. 전자는 통일적 관계이며 후자는 그 관계의 해체 즉 분열이다.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은 존재자들 사이의 통일과 분열의 양 측면을 말한다. 존재자들은 통일 속에서 분열하며 분열 속에서 통일되어 있다. 이 통일로 나가는 측면이 발생이며 분산으로 나가는 측면이 소멸이다. 양자의 통일이 생성이다.

“생성은 이런 방식으로 이중적인 규정을 지닌다. 생성의 한 규정에서 무가 직접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즉 생성 규정은 무로부터 시작하여 이 무가 존재와 관계하므로 존재로 이행한다. 다른 생성 규정에서는 존재가 직접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즉 이 생성 규정은 존재로부터 시작하며 이 존재가 무로 이행한다. 이것이 곧 발생과 소멸이다.”(논리학, GW93, 93)

존재와 무는 개별 존재자의 관계이다. 이 존재와 무가 다시 상호 이행하면서 발생과 소멸 즉 생성이 나오니, 개별 존재자와 존재와 무, 그리고 발생과 소멸은 서로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이다. 존재자가 일차원에 속한다면 존재와 무는 이차원에 속하고, 발생과 소멸은 다시 삼차원에 속한다.

5)

지금까지 존재와 무를 시공간의 두 측면으로 이해하여 왔는데, 여기서 다시 생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니 약간 혼란스럽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존재 즉 시공간이라는 표상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가장 외면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시공간이니 그것에 가장 가까운 표상은 유클리트 기하학적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런 유클리트적 시공간은 마치 그릇과 같은 것이어서 그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시공간은 거기에 담겨 있는 것과 전적으로 무관하며 그 자신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시공간이 존재자가 맺는 관계라는 헤겔의 생각과는 멀어진다.

시공간을 존재자의 관계로 본다면, 이 관계란 곧 움직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존재자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통일되고 다른 한편으로 관계를 맺는 존재자들은 분열하면서 그 관계는 해체된다.

관계가 존재이고 분열이 무라면, 관계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곧 무에서 존재로 그리고 존재에서 무로 이행하는 운동이다. 즉 관계는 다름 아닌 발생하고 소멸하는 운동이다.

이제 관계는 고요하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는 가운데 성립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관계가 곧 시공간이라면 시공간은 이렇게 발생하고 소멸하는 가운데 있으니, 시공간 자체가 무언가 꿈틀거린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처럼 무언가 꿈틀거리는 시공간을 표상하기 위해 배를 타고 있을 때 그 배가 일렁이는 파도에 휩쓸려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이 배와 함께 흔들리는 것을 생각해 보라. 헤겔의 존재 즉 시공간은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2- 존재와 일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2- 존재와 일자

1)

앞에서 헤겔은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했다. 존재자의 개념에 관해서, 헤겔은 존재자를 ‘어디에 있는 것[Dasein]’으로 규정한다. 존재자가 있는 곳 즉 ‘Da’는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와 관계하는 곳이며 바로 시공간이다. 이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어떤 존재자는 어떤 규정성을 가지며, 그런 존재자가 있는가 없는가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제 우리는 초점을 ‘존재자’ 또는 ‘비존재자’에서 ‘존재’ 또는 ‘무’의 개념으로 이동해 보자. 한자나 독일어, 영어로 말하면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두 말이 같은 단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있음[존재자]’과 ‘임[존재]’는 그 용법이 분명하게 구분되니,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헤겔의 논리학을 다루니, 그냥 존재자[Seindes]와 존재[Sein]으로 계속 말하기로 하다. 그렇다면 헤겔의 존재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2)

헤겔은 존재를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존재, 순수 존재- 이것은 아무런 다른 규정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 존재는 이러한 그의 무규정적 직접성 속에서는 오직 자기자신과 동등할 뿐이며 또한 타자에 대해서 부등한 것이 아니다.”(논리학, GW21, 68-69)

여기서 헤겔은 존재의 ‘무규정성’에서 곧 ‘자기 관계’라는 말로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무심히 읽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과연 이런 개념적 이행이 가능한 것일까, 의심스럽다.

이런 이행에는 어떤 전제가 있다. 그것은 곧 앞에서 말했듯이 헤겔에서 규정성은 타자에 대한 부정성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타자에 대한 부정은 존재자가 타자에 대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¹, 이 점이 존재자를 고립된 실재성을 파악하는 다른 사유와 헤겔의 사유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다. 규정성이 곧 부정성을 포함한다는 전제를 놓고 보면, 순수 존재에서는 규정성이 없으니, 여기서 타자에 대한 관계가 없다는 개념적 이행은 이해된다.

주1 헤겔은 이것과 연관해 스피노자가 처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 즉 모든 규정된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3)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보자. 자기 관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어지는 헤겔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자기 관계하므로] 결국 이것은 자기 내부에서 있어서나 또는 외부에 대해서도 아무런 상이성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논리학, GW21, 69)

상이성은 곧 차이를 말하며 구별을 말한다. 이런 상이성이 없으므로 자기 관계하는 것은 바로 하나 즉 일자이다. 헤겔에서 존재는 최종적으로 일자로 규정된다. 이렇게 하여 헤겔의 존재에 관한 논의는 급기야 일자에 관한 논의로 전환한다.

일자란 무엇인가? 거슬러 올라가면 아낙시만드로스가 만물의 근본 원인이 무규정성[apeiron]이라고 말한 것에서 이미 일자라는 개념이 암시된다. 그는 탈레스가 만물의 원인이 물이라고 한 데 대하여 만일 그렇다면 그것과 대립하는 불이 물이라는 원인에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되는 사물로 가득 차 있는 만물이 나오는 원인이 되려면 모든 대립하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즉 무규정성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자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인데, 파르메니데스에서 일자는 아낙시만드로서의 무규정자와 같은 만물의 아르케로 제시된 것이다. 헤겔은 그의 저서 <철학사>에서 파르메니데스에서 일자라는 개념의 연원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발생은 사라지고 몰락은 믿을 수 없다. 존재는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디에선가 존재가 더 많을 수도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연관되지 않는다. 또한, 어디에선가 더 적지도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은 존재자로 충만하다. 모든 것은 연관이다. 왜냐하면, 존재자는 존재자와 합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변하며, 자기 내에 머무르고 자기 내에 확고하다. 강력한 필연성의 확고한 결속의 한계 내에서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끝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비존재함을 결여한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에 비존재자가 있으면 분리가 있지만, 비존재자는 없으므로 분리되지 않는 존재자는 내적으로 자기 관계하는 일자라고 한다. 일자가 되는 이유는 존재자와 존재자를 서로 비교하여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존재자는 추상적 존재자이며 서로 같으니, 여기서 일자가 나온다.

무규정자는 모든 규정이 뒤엉킨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자체는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허한 것을 뒤집어 보면 일자가 나온다. 모든 것이 뒤엉킨 것은 곧 순수한 연속성을 지닌 것이니 일자가 된다.

이 아르케로서 무규정자와 일자는 모두 존재자들의 ‘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나온 것이다. 무규정자와 일자는 관계의 양 측면이며 서로 동전의 양면이다. 무규정적이기 때문에 일자이며, 거꾸로 일자이기 때문에 무규정적인 것이다.

4)

존재가 곧 일자라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와 헤겔은 일치한다. 그런데 존재론에서 헤겔의 주장과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단적으로 대립한다. 헤겔에서 존재는 곧 무, 무는 곧 존재인 데 반해서 파르메니데스에서는 존재는 존재이며, 무는 무이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상반된 주장으로 나가게 된 것일까?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주석3에서 플라톤이 지은 파르메니데스 편을 언급한다. 헤겔은 여기서 파르메니데스의 한계를 지적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확고하게 지키면서 가장 일관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동시에 무에 관해 무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만이 존재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무규정적인 것이므로 타자에 대해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시원으로부터 즉 존재 자체로부터 더 나갈 수 없으니 만약 전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만 외부로부터 어떤 낯선 것이 그것과 결합되는 것을 통해서만 일어날 것이다.”(논리학, GW21, 81)

파르메니데스에서 존재는 타자에 대한 관계가 없으니, “존재 자체로부터 더 나갈 수 없으며” 즉 영원히 존재할 뿐, 무가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이런 사유에 빠져버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헤겔은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앞에서 말했듯이 일자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는 이 일자 개념에 충실하지 못했다. 파르메니데스는 다른 한편 존재를 주로 ‘일반적 존재자’라는 의미에서 사용하한다. 예를 들어 역시 헤겔 <철학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보자.

“사유와 사상이 그 때문에 존재하는 것[존재자]은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 없이는 사유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존재자가 없는 경우] 사유는 무이며, 사유는 존재자 밖에는 무로 된다.”(헤겔, 철학사)

이 자리에서 존재는 사유의 대상으로 즉 존재자로 규정된다. 여기서 존재는 존재자가 지닌 일반적 속성을 의미한다. 존재자가 ‘어디에 있는 것’이라면, 그 모든 존재자가 가진 일반적 속성으로서 존재는 ‘-에 있음’이 된다. 그러므로 이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헤겔은 앞에서 존재자에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차이가 있다는 인정했다. 그러므로 만일 존재가 존재자 또는 존재자의 일반적 속성이라면, 이런 의미에서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다를 것은 틀림없다. 헤겔은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일반적 존재자라는 의미에서 사용하였기에 결국 존재하고 무 즉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헤겔은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에 관하여 일자라는 개념과 일반적 존재자라는 개념을 뒤섞어 사용하면서 사유의 혼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미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편에서 밝히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이용한 변증법은 차라리 마찬가지로 외적 반성의 변증법으로 여겨질 수 있다. 존재와 일자는 모두 엘레아적인 형식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와 일자는 구분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에서 이 양자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논리학, GW21, 87)

“플라톤은 일자로부터 여러 가지 규정들을 분리시킨다. 예를 들면 전체와 부분, 자기 내의 존재와 타자 속의 존재, 형태나 시간 등의 규정이다. 그 결과 일자는 존재가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앞에서와 같은 방식으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21, 87)

여기서 헤겔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의 입을 통해 일자는 전체도 아니고 부분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 형태나 시간도 갖지 않는다는 등을 변증했는데, 그런 변증은 파르메니데스가 자기 입으로 자기의 주장인 “일자는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수법이었다는 것이다.

5)

헤겔은 ‘일자’, ‘무규정자[apeiron]’라는 말 대신 ‘존재’와 ‘무[Nuchts]’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때문에 존재자와 존재, 무와 비존재자가 혼동되면서 혼란을 자아냈다. 그 때문에 그는 주석에서 누누히 정말 지루할 정도로 존재자와 존재, 무와 비존재자가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르지만, 존재와 무 자체는 동일하다고 말한다.

헤겔은 자기의 곤란한 처지를 충분히 짐작했을 텐데도, 여전히 일자나 무규정자라는 말 대신에 존재나 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헤겔의 ‘존재’라는 말의 연원을 고민하게 된다.

이제 헤겔 논리학에서 시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했던 생각으로 되돌아가 보자. 헤겔의 논리학은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나왔다. 칸트는 판단의 형식 즉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본다. 판단 형식이란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말하는데, 이 관계가 바로 계사 ‘이다’이다. 판단형식은 12개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추상적인 계사 ‘이다’가 구체화된 변형태이다.

구체적인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계사가 대상을 구성한다는 말과 같다.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은 곧 관계시킨다는 것이니, 범주가 대상들의 구체적 관계 예를 들어서 인과 관계 등을 통해 나타난다면 추상적 계사는 대상의 일반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겔은 대상이 지닌 가장 일반적인 관계를 계사 ‘이다’ 즉 존재라고 규정한 것이다. 우리 말로 하자면, 헤겔에서 존재는 ‘있음’ 즉 현존[Dasein]이 아니라 ‘임’ 즉 계사 ‘이다[Sein]’이다.

헤겔은 이처럼 대상의 관계가 계사의 현상태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혼란을 무릅쓰고 굳이 일자를 일자로 표현하지 않고 존재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 때문에 헤겔의 존재론을 읽는 우리조차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의 존재를 존재자로 보면서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 말이라면 그런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독일어나 영어, 한자는 ‘이다’와 ‘있음’을 같은 단어[sein, be, 存在]로 표현하기에 그런 혼란이 일어난다. 실제 파르메니데스가 그 때문에 혼란에 빠졌고 존재론에서 헤겔의 의도를 우리가 오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21-존재와 존재자의 구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21-존재와 존재자의 구분

1)

1부 1편 1장 존재론에서 헤겔의 주장은 단순하다. 즉 존재와 무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상식으로는 누구나 쉽게 인정하듯이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내가 존재하는 것과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헤겔은 이런 상식을 주석 1에서 비판하면서, 여기서 두 가지가 혼동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즉 존재와 무, 더 분명하게 말하자며 순수 존재와 순수 무와 어떤 존재자와 그 존재자의 부정으로서 비존재[자]는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하지만, 어떤 존재자와 어떤 비존재자는 서로 다르다.

헤겔은 주석1에서, 존재와 존재자(또는 무의 비존재자)의 구별을 설명하면서 그 유명한 칸트의 백 탈러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칸트는 백 탈러가 내 주머니에 실제로 있는지 아니면 다만 마음속에 가능적으로 있는지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이 비유는 너무나 적실하게 가슴에 와닿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주머니에서 동전이 달랑거리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적실성 때문에 이 비유는 유명해졌는데 칸트가 이 비유를 끄집어낸 데에는 사정이 있다.

그 출발점은 신 존재 증명이다. 이 증명은 신적 존재의 본질은 무한하고 그 속에는 현존이라는 성질도 들어 있으니, 신은 현존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칸트는 현존은 성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본질 즉 성질은 사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현존은 직관(시공간)의 형식에 속하는 것이라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의 본질을 아무리 분석해보아도 현존을 끌어낼 수 없으며, 현존은 다만 경험에서 주어질 뿐이다.

칸트는 이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소위 가능적 백 탈러와 현실적 백 탈러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가능적이든, 현실적이든 그 현존은 경험에 의해 주어진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백 탈러라는 내용은 줄어들지도 커지지도 않는다.

신 존재 증명에서 제기된 성질과 현존의 구분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할 때도 제기되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사물은 서로 성질이 동일하면 서로 동일한 것’이라는 동일성 테제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칸트는 두 나뭇잎의 예를 들면서, 두 나뭇잎은 모든 성질이 동일하지만, 그 현존은 서로 다르며 또 앞에서 말한 백 탈러 예를 들면서, 가능적 백 탈러와 현실적 백 탈러는 모든 성질이 동일하지만, 그 현존은 서로 다르다고 했다.

2)

헤겔이 칸트의 현존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칸트처럼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하거나 라이프니츠의 동일성 테제를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은 칸트의 현존 개념을 존재와 무의 동일성과 비동일성에 관한 논쟁으로 끌어들인다.

칸트에서 현존은 헤겔에서 존재자를 말한다. 성질이 동일하면서도, 서로 현존은 다를 수 있다면, 그리고 가능적 현존과 실제적 현존이 다른 것이라면, 존재자와 비존재자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과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르며, 내 주머니에 백만 원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겪어본 누구나 인정하듯이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헤겔의 논점은 상식이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자와 비존재자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존재와 무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상식에서 존재와 무는 서로 다르다고 할 때, 그들이 ‘존재’와 ‘무’라고 말한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존재자’와 ‘비존재자’를 말한다. 이렇게 존재자와 비존재라는 측면은 현존을 포함하는 개념인데, 그럴 경우라면 상식이 말한 것처럼 존재자와 비존재자는 다르다. 그런데 상식은 이런 존재자의 예를 들면서도 여기서 끌어내는 것은 존재와 무, 즉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가 다르다는 주장을 끌어내니, 상식은 여기서 범주의 혼동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헤겔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백 탈러를 갖는지 아닌지 하는 구별을 단순히 존재와 비존재로 귀결시킨다는 것은 기만이다. 이런 기만은 이미 제시되었듯이 일면적인 추상(존재와 무의 고립화)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 추상은 그런 예들에서 출현하는 특정한 현존을 제거하고 단순히 존재와 비존재만을 확립하며 바대로 추상적인 존재와 무가 파악되어야 함에도 이런 추상적 존재와 무를 특정한 존재와 무로 즉 현존으로 전환한다.”(논리학, GW21, 75)

헤겔은 여기서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면서 존재자의 경우는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경우는 존재와 무,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논증이 충분한 것일까? 누구나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헤겔의 논증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존재자와 존재를 왜 구별해야 하는가가 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상식이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했더라도, 아직 존재의 경우 존재와 무가 같다는 것이 직접 논증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헤겔의 논증 가운데 감추어진 일면이 있다. 사실 그 때문에 헤겔은 칸트의 현존 개념을 끌어왔던 것인데, 실제 헤겔의 논증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현존이라는 칸트의 개념이다. 이 현존이라는 개념을 이해해 보면, 헤겔이 왜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했는지가 이해된다.

3)

현존[Dasein]은 칸트에서 시공간적 직관에 속하는 것이다. 칸트가 시공간적인 규정을 선천적 감성의 형식이라 보았다. 그 때문에 마치 시공간적 규정이 사물에는 없는데, 감성이 부여한 것으로 간주된다.

칸트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당장 엄청난 문제가 등장한다. 그런 시공간성이 주관적 감성이 부여하는 것이라면 굳이 그게 직관형식이라고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관적 감성이 부여하는 것이라면 왜 어떤 사물에는 이 시공간성이 부여되고 다른 사물에는 저 시공간성이 부여되는가? 우리는 자주 몽롱한 상태에서 사물이 실제와 다른 시공간성을 가지는 경험을 한다. 감성을 통해 부여된 시공간성이 이런 몽롱한 상태에서 부여된 것과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칸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는가를 여기서 탐구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시공간성에 관한 이런 딜레마 앞에서 헤겔이 나갔던 길로 바로 들어가 보자.

헤겔의 경우 이미 사물 자체가 그런 시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즉 시공간성 자체가 사물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공간성을 사물의 다른 성질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인가? 헤겔이 만일 그렇게 보았다면, 칸트의 신 존재 증명 비판이나 동일성 테제 비판에서와 같은 비판에 걸려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헤겔은 시공간성을 사물의 성질로 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물에 속한 시공간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오히려 헤겔에서 시공간성은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사물은 이 관계 속에 들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공간성이 사물의 관계이므로 시공간성은 사물 밖에 있다. 그러나 시공간성은 사물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다. 즉 시공간성은 사물이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시공간이 사물의 관계이므로, 시공간은 구체성을 띠고 있다. 관계 맺는 사물의 종류에 따라서 그 시공간은 서로 다르다. 이로부터 다양한 시공간이 나올 수 있다. 가성적 세계도 하나의 시공간을 지니며, 현실이 아닌 피안의 세계도 하나의 시공간을 지닌다. 역학이 다루는 일반적 추상적 시공간성 외에도 더 구체적 개별적 시공간성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사랑하는 남녀가 다방에 앉아서 만드는 시공간은 다른 시공간과 구별되는 독자적 시공간이다.

4)

시공간을 이처럼 사물의 관계라고 할 때, 모든 사물은 이 관계 속에 들어 있다. 이런 관계를 확장하여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구체적 성질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존재하는 한에서 맺는 관계 즉 가장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실제의 시공간을 넘어서 가상적인 시공간까지 포함하는 총체적인 시공간이다.

이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할 때 즉 존재자는 이런 총체적 시공간 안에 있다는 말이 된다. 어떤 것이 이 총체적 시공간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시공간 밖에 있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시공간적 차이 때문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구별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공간의 특정한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위치에 존재하지만 다른 위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모순되지 않으니,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위치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이며 성립할 수 없다.

나는 도처에 존재한다는 말도 말이 되며, 또는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도 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도처’나, 그 ‘어디’는 어떤 시공간을 전제로 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런 시공간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말이 된다. 예를 어떤 구체적 시공간을 생각해 보자. 특정 소설적 시공간이다. 그런 소설적 시공간에서 특정 주인공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은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런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 공간 밖에 실제 시공간에서 존재하는가 않는가를 묻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물음일 뿐이다.

가장 추상적인 시공간을 생각해 볼 때, 여기서 그런 시공간 밖에 존재자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것은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발언일 뿐이다. 모든 존재자란 아무리 추상적 존재자라도 가장 추상적인 시공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5)

시공간이란 이처럼 어떤 것들이 관계를 맺는 곳이다. 이렇게 존재자는 시공간 속에 있으므로 이 존재자는 항상 타자와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 시공간 자체가 이런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자와 관계하면서 어떤 현존은 규정성을 지니게 된다. 이 규정성은 곧 타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 나온다. 예를 들어 ‘빨강’은 그것에 대한 타자인 ‘파랑’을 부정하면서 ‘빨강’이 된다. 물론 이 부정은 색깔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는 색깔이 만나는 시공간이다. 그러므로 ‘빨강’은 ‘수 3’이나 ‘코끼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으며 이들은 서로 부딪히는 시공간이 없다.

어떤 규정성이 이처럼 시공간에서 타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 성립한다는 생각 즉 규정성은 부정성이다는 생각은 비판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빨강’이나 ‘파랑’이나 각자 실재하는 것이지 이것이 서로 대립하거나 서로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자연에는 부정성이 없으며 다만 실재성만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의 규정성을 이런 특정한 시공간에서 타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 보는 것, 이것은 그 밑바닥에 반성적 사유를 깔고 있는 것이며 헤겔 논리학 또는 형이상학의 가장 근본적 전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일정한 시공간에 타자와 관계 속에 있으므로 이제 존재한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헤겔은 만일 어떤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와 전혀 어떤 관계를 맺지 않고 고립된 세계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런 세계라면, 전체 우주의 티끌만 한 존재인 내가 존재하거나 말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내가 타자와 관계 맺는 이 시공간과 어떤 소설가가 쓴 소설의 시공간은 전혀 관계없는 세계다. 그러니 그 소설 속에서 누가 죽든 말든, 거기서 홍수가 나든 말든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나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내가 소설 독자로서 그 소설의 시공간에 일종의 참여자로 들어가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주인공의 죽음에 관해 슬퍼하며 또는 기뻐한다.

이런 생각을 해보면 결국 존재자와 비존재자의 차이는 그 존재자가 타자와 관계하고 그런 존재자의 존재 여부는 타자의 관계를 변화시키므로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무차별한 일일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그것의 존재와 비존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의 규정성과 또한 그것을 다른 것과 관련하게 만드는 그것이 지닌 내용 때문이다.”(논리학, GW11, 46)

만일 모든 것이 상호 필연적으로 연관된 세계라면, 여기서 티끌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도 전체 연관이 바뀌게 되니, 티끌 하나의 존재와 비존재는 세계 자체를 바꾸게 하는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20 -형이상학의 매력[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20 -형이상학의 매력

1)

계엄이다, 탄핵이다. 등 세상은 어수선하다. 옛날 같으면 이런 시기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지 못했다. 워낙 황당한 일이라 그런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잔혹한 꿈이 현실이라니, 마음은 자꾸 형이상학의 세계로 기울어진다. 

헤겔은 논리학 서문에서 형이상학이 없는 독일 민족을 한탄했다. 한때 세계사를 이끌었던 민족치고 형이상학이 없는 민족은 없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민족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헤겔의 한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한다. 형이상학은 시대를 극복하는 창끝이라고. 그런 창끝이 있었기에 각 민족은 그 시대 세계사의 앞을 가로막는 바위 덩어리를 부수고 세계사를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위안하면서 다시 형이상학의 책상 앞에 앉았다.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어떤 선배님은 고대철학을 하였다. 그러면서 존재와 무라는 개념을 평생 규명하려 고투에 고투를 거듭하였다. 그는 대학교수를 일찍 그만두고 변산반도에서 자연학교를 열고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필자도 그의 활동에 관심이 있어서 부산에 변산반도로 한국을 가로질러 몇몇 후배들과 더불어 찾아뵌 적이 있었다.

하도 오래전이라 그때 누구와 갔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두 가지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하나는 피 이야기이다. 선배님이 가꾸는 논인지 밭인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곳에는 벼인지 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자라났다. 선배님은 그것을 가리켜 보이면서 동네 사람들이 나보고 맨날 게으르다고 하며 웃지만, 피도 생명이고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 것이기에 자기는 이 피를 제거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지다. 선배님의 자연주의적 인생관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보다 충격적인 기억은 그 날 밤의 일이었다. 한 두잔 술잔이 돌고, 이런저런 세상사를 간단하게(마치 플라톤의 대화편 앞부분에서 나오는 쓸데없는 말 정도의 분량에 그친다) 말한 다음, 대뜸 정말 오래간만에 말하는 것처럼 존재와 무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칠 줄 모르고 몇 시간에 걸쳐 존재와 무에 관한 알쏭달쏭한 궤변(?)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저 말이 하고 싶었으면 저렇게 미친 듯 이야기하는 것일까? 역시 철학자는 그 피를 속이지 못하는 걸까. 더구나 변산이라는 그 시골구석에서, 밤새 풀벌레 울음이 그치지 않고 오줌을 누러 문밖으로 나가면 하늘의 별이 맑게 빛나는데, 방안에서 존재는 존재고 무는 무라는 말을 들으니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십여 년 더 지난 다음, 선배님이 그동안 쓴 책을 가운데 두고 몇 회에 걸쳐서 후배들과 대화의 장을 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선배님이 쓴 글을 전체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는데, 도처에 내가 옛날에 들었던 존재와 무에 관한 소위 궤변이 흩어져 있었다. 그게 그렇게도 재미있는 것일까?

궤변이라니, 선배님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남들이 보면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말이다. 선배님이나 우리는 이를 궤변이라 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게 형이상학이다. 하긴 나도 사람들과 더불어 철학에 관해 떠들 때는 이상한 행복감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제 어느덧 형이상학에 빠지는 것 같다. 이 어수선한 시국에 형이상학적인 글을 쓰고 앉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은 정말 해보지 않은 사람이면 모를 것이다.

2)

오래간만에 다시 형이상학 산책을 쓰면서 변명이 길어졌다. 헤겔 논리학은 독특하게 구성된 책이다. 1부는 객관 논리학과 2부 주관 논리학이 구분되는 것도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아는 논리학은 2부에서 주로 서술된다. 1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논리학이라기보다 오히려 존재론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 같다. 1부는 다시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론이 구분된다.

대체 헤겔이 논리학의 구성을 왜 이렇게 했는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나름대로 이해해 보자. 일단 이 자리에서 2부 주관 논리학은 제쳐놓자. 이 부분에 관해서는 헤겔이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면서 2부 앞부분에서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을 서술해 주고 있으니, 그때 가서 논하기로 하자.

1부만 제한해서 논하자면, 1부의 구성은 칸트가 판단론에서 제시한 12개 범주표 즉 판단형식의 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권 존재론은 그 가운데 질의 범주와 양의 범주를 다룬다. 2부 본질론은 관계의 범주와 양상의 범주가 다루어진다는 것은 금방 눈에 뜨인다.

물론 칸트의 범주표는 헤겔 나름의 논리적 체계 속에 재구성된다. 여기서 그 가운데 1권만 우선 보자. 칸트는 양의 범주를 앞에서 내세웠으나 헤겔은 질의 범주를 우선시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헤겔 자신이 ‘존재론의 일반 구분에 관하여’라는 존재론 서문 격 글에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양은 “질이 부정된 것” 이니, 질의 범주가 양의 범주보다 우선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질의 범주와 양의 범주가 균형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1권의 1편은 질을 다룬다. 반면 2편은 양을 다루고, 3편은 척도(양적 무한성)를 다룬다. 칸트 판단표와 비교해 보자면, 질의 범주가 1편에 한정된다면, 양의 범주는 2-3편에 걸쳐서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이점은 차차 다루기로 하자. 여기서는 1편 1장에 집중하자. 여기서 1장은 존재를 다루고 2장은 현존을 다룬다. 3장은 대자 존재이다. 2장 현존을 다루는 부분이 실재성 개념을 다룬다는 것을 본다면, 이것이 칸트 범주표에서는 실재성의 범주 즉 긍정 판단형식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장 대자 존재라는 개념은 곧 질적 무한 판단형식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대자 존재는 ‘무한성의 자기 내 복귀’로 규정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2장 B절 끝에 부정성 개념이 나오니, 이게 부정 판단형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편 1장 존재론은 칸트 범주표에서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서 칸트 범주표에서 그런 판단형식은 없다. 대체 왜 헤겔은 현존이라는 범주 앞에 존재론을 따로 집어넣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게 헤겔의 존재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되지 않는가 한다. 필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제 설명하고자 한다.

3)

존재란 무엇인가? 필자에게 이 문제가 가슴으로 다가왔던 것은 대학 시절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들어가자마자 대뜸 내세웠던 말이다. 즉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이다. 그러면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를 묻기 위해서 존재 물음이 걸어지는 고리를 찾았는데, 그게 바로 현존재라고 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 속에서 존재는 의식의 시간성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이제 시간성의 개념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에서 현존재[Dasein]는 헤겔이 1권 2편에서 말하는 현존[Dasein] 일반과 단어는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하이데거에서 현존재는 존재[Sein]가 자기를 드러내는 장소[da]로서 인간 존재를 의미한다. 반면 헤겔에서 현존[Dasein]는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존재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규정성 예를 들어 ‘빨갛다’라든가 ‘둥글다’라는 것과 같은 규정성이다.)

존재와 존재자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존재는 ‘있음’이고, 존재자는 ‘있는 것’이니, 있음과 있는 것은 일반 명상과 개별 대상 정도의 차이 예를 들어 노랑과 노란 것들의 차이 정도이지, 그게 무슨 큰 차이인가? 설혹 플라톤적으로 생각해서 존재는 존재자의 이데아이고 존재자는 그런 이데아가 실현된 개별적 대상이라고 보더라도, 그 의미가 별로 다른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하이데거가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그토록 역설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막히니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데서 앞으로 더 나갈 수 없었다.

하이데거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필자는 헤겔의 논리학 1편 1장 존재론을 읽었을 때이다. 헤겔이 1장 존재론에서 전개한 핵심적인 주장, 어떻게 보면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주장했던 것이 바로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이다. 그러면서 그는 존재와 존재자를 왜 구분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헤겔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하이데거가 헤겔의 철학에 지고 있는 빚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하이데거나 존재자와 존재를 구별은 헤겔의 논리학에 나오는 착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4)

헤겔에게서 1장 존재론은 본문 내용만 본다면, 아주 짧아서 특별히 무엇을 소개할 말도 찾지 못할 정도다. 더구나 그 내용도 일종의 말장난처럼 보인다. 시원으로서 순수 존재는 아무 규정이 없으니, 무이다. 무 역시 사유에는 직관의 대상이 되니, 하나의 존재이다. 그러니 존재는 무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헤겔의 주장을 들어보라.

“존재는 이러한 무규정적인 직접성 속에서는 오직 자기 자신과 동등할 뿐이며, 또한 타자에 대해서 부등한 것이 아니므로 … 순수 존재는 무규정적인 직접적인 것으로서 존재는 사실상 무이며 무 이상도 그리고 그 이하도 아니다.”(논리학, GW21, 68-69)

“우리는 직관이나 사유 속에는 무가 있다고도 하겠으며, 또는 차라리 무는 순수 존재와 마찬가지로 공허한 직관이나 사유라고 하겠다.”(논리학, GW21, 69)

헤겔의 말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아주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저 말의 의미만 이해하면, 전체 의미가 이해된다. 너무 쉬워서 오히려 이상하다.

언제가 존재론을 이해하려면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대화편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영어본이지만 대화편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의 논변을 잃다가 마치 최면술 걸 때 보는 중첩된 동그라미를 보는 듯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결국 다시 책을 덮고 말았다.

누구라도 그 책을 읽어보면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헤겔의 말도 그런 말장난과 같게 들리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규정적이니까 무이고, 무는 이미 우리의 생각의 대상이니, 존재다. 여기에 존재나 무라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여 자기와 반대되는 것을 끌어내는 것 외에 다른 게 있는 것일까? 이런 식의 의미분석이라면 존재나 무라는 말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끌어내 수 있다. 이런 의미분석을 통해 헤겔적인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끌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존재는 존재고 무는 무다”라는 주장을 끌어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헤겔이 존재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하고자 하는 근본적 주장은 오히려 본문에서라기보다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주석을 중심으로 헤겔의 이야기를 설명해 보자. 그 설명의 한 가운데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이 들어 있다.

헤겔은 1812년 존재론을 1827년 대폭 수정했다. 특히 주석 부분이 많이 고쳐졌는데,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는 않다. 1판과 2판의 내용은 서로 대조하면 서로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하니, 1판과 2판을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참고로 임석진 교수의 번역본은 1판을 번역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2권 본질론과 3권 개념론은 헤겔이 수정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 결과 이 부분에 관한 2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9- 시원에 관한 기존 이론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9- 시원에 관한 기존 이론 비판

1)

이상과 같이 일단 헤겔은 왜 논리학의 시원이 순수 존재인지를 밝혔다. 이야기를 좀 정리해 보자.

①논리학의 운동은 순수지를 바탕으로 전개한다.

②순수지는 정신현상학 운동의 결과이다. 정신현상학의 운동은 개별로부터 일반으로 나가는 운동이다.(근거로의 복귀)

③순수지의 이면은 곧 순수 존재이다.

④논리학의 시원은 순수 존재이다. 왜냐하면, 논리학의 운동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자기 정립)

이상 서술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③‘순수지의 이면이 순수 존재다’라는 것으로 보인다. 지식이라는 주관이 존재라는 객체로 전환하는 것이 무언가 신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심층적인 근거로의 복귀가 곧 내면적 본질이 외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는 순수지가 곧 순수 존재임을 보여주는 확고한 논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헤겔은 다른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는데, 이번에는 그의 설명을 들어 보자. 우선 예비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알다시피 순수지는 의식과 대상의 통일, 즉 대상을 자기로 인식하는 자기의식으로부터 출현한다. 이런 자기의식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자기의식 즉 절대정신이 곧 순수지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의 구별이 철저하게 사라졌으므로, 자기의식이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순수한 통일 자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식은 객체와 합일하는 최정점에서 전면적으로 몰락하면서 통일성으로 들어가며 이 통일성이 다름 아닌 순수 존재이므로, 지식은 이런 통일성 안에서는 사라지고 말며, 이 통일성으로부터 전혀 구별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규정도 그런 통일성에 남아 있지 않다.”(논리학, S.59)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헤겔에서 순수 존재는 곧 판단 형식에서 주어와 술어의 통일로서 계사인 ‘이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순수 존재는 그런 계사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계사, 즉 주어와 술어가 무구별적인 통일 상태에 있는 것이다. 순수 존재 역시 통일 자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원으로서 간주된 것 즉 존재라는 규정조차도 제거될 수 있으니, 다만 요구되어야 할 것은 시원이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논리학, S. 59-60)

2)

순수지와 순수 존재의 의미를 이처럼 이해한다면, 순수지가 순수지인 이유가 금방 드러난다. 양자는 모두 ‘무구별적 통일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무구별적 통일은 인식의 운동에서 본다면 최후로 등장하지만, 논리학의 운동에서 본다면 처음에 전제된 것이다. 동일한 무구별적 통일이 정신현상학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순수지(의식과 대상의 통일로서)라고 표현한 것이며, 논리학의 운동에서 본다면 순수 존재(주어와 술어의 통일로서)로 표현된 것이다.

무구별적 통일 자체는 사실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다. 그러나 인식의 운동에서 본다면 그 무구별적 통일체는 순수지가 되며, 논리의 운동에서 본다면 그것은 순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순수지가 나타나면 그 이면에 순수 존재가 나타나고, 순수 존재가 나타나면 그 이면에 순수지가 나타나게 된다. 헤겔은 이 무구별적 통일을 순수지로 본다면, 이에 대립해서 순수 존재가 나타나는데, 전자는 형식에 해당하고 후자는 내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 순수 존재는 순수지가 되돌아간 통일성이며, 달리 말하자면 순수지 자체가 여전히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통일로부터 구별된 채 유지되어야 한다면, 순수 존재는 그런 순수지의 내용이기도 하다.”(논리학, S. 59)

3)

이어지는 부분에서 헤겔은 주로 다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비판적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우선 근대에 들어와서 철학 또는 학문(그 가운데 논리학도 포함한다)이 “가설적이고 개연적인 진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검토한다. 즉 어떤 학문의 대상에 관한 흔히 통용되는 진리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이런 진리를 비판하면서 진리에 다가간다는 것인데, 흔히 플라톤적 대화록이 취하고 있는 방법이 그러하다.

헤겔은 대표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철학자를 라인홀트로 들고 있는데, 라인홀트가 당대의 여러 철학자를 일종의 범신론으로 비판하면서 기독교의 인격신 개념을 옹호한 것을 잘 알려진 얘기다.

겉으로 보기에 변증법적인 전개를 옹호하는 헤겔로서는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주장이지만, 헤겔은 이런 주장이 갖는 맹점을 지적한다. 이런 주장은 학문이 일반적인 진리인 근거에 이르는 모색의 길이라는 점에서 주장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진리에 이르는 인식의 과정에서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철학이나 논리학의 길이 근거를 시원으로 삼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런 길에서 본다면, 개연적이고 가설적인 진리는 시원인 근거로부터 도출된 결과일 뿐이다.

“사실 시원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그런 근원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런 것에 의해 사실상 산출된 것이다.”(논리학, S. 57)

4)

이어서 헤겔은 기하학적 작도와 같은 시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기하학에서는 증명을 위해 먼저 작도가 필요하다. 작도가 제대로 놓인다면 증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만일 작도가 잘못 놓인다면, 증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헤겔은 작도가 올바로 놓인다는 것은 증명이 실제로 성공한 다음에서야 확인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작도가 증명하는 과정에 외면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하학적 증명은 선배가 해 놓은 작업을 기억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그 스스로에게서는 독창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논리학은 외면적이고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나가지 않고 필연적이며 내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므로, 기하학에서 작도와 같은 것을 시원으로 삼을 수는 없다.

5)

학문에서 시원은 자주 ‘이미 널리 알려진 관념’을 말한다. 학문은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하여, 이 대상에 관해 누구나 동일한 관념을 가지며, 그런 관념은 이미 누구에게나 알려진 것이다. 학문은 그런 관념 속에서 “분석과 비교 또는 그 밖의 추론”을 통해 동일한 규정을 발견해 이것을 학문의 개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경우도 앞에서 말한 개연적인 진리를 시원으로 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미 알려진 것은 다양한 규정의 구체적 관계를 갖는데, 그런 관계는 그 자체로 직접적인 것이 아니며, 추상적인 어떤 것이 구체화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매개된 것이며, 진정한 시원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비판의 핵심은 오히려 분석과 비교, 추론이라는 방법에 있다. 학문이 이런 알려진 관념에서 분석과 비교, 추론을 통해 일반적 개념을 얻으려 할 때, 그런 방법은 주관적인 자의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얻은 학문의 개념은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런 관계에 관한 필연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된 것, 추상적인 것이 자기 자신을 통해서 정립된 것이 되어야 하니, 헤겔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구체적인 것 즉 종합적으로 통일된 것 속에 함축된 관계가 필연적이어야 한다면 이것은 이 관계가 미리 발견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계기가 자신의 통일로 되돌아가는 고유한 운동 가운데 산출된 관계인 경우에만 한정된다. 이런 운동은 분석적 경과 즉 사상 자체에 외적인 주관에 귀속되는 활동과 반대되는 운동이다.”(논리학, S. 61-62)

여기서 ‘자신의 통일로 되돌아간다’라는 말은 곧 구체적인 것이 지닌 모호한 통일이 다양한 규정이 명확한 관계를 맺는 통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명확한 관계는 필연적이고 내적인 생성을 통해 출현하는 것이다.

6)

시원에 관한 논의는 마침내 데카르트가 철학의 시원으로 삼은 에고 고키토의 문제로 나간다. 데카르트는 에고 고기토의 확실성이야 말로 철학의 시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명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에고 고기토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사유하는 자아이다. 그것은 순수한 자아인데, 이런 자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험적 자아를 벗어나는 운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경험적 자아로부터 순수한 자아에 이르는 운동은 곧 정신현상학의 운동이니 감각적 확신에서 순수지에 이르는 운동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철학적 시원으로서 에고 고기토는 이중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런 주장은 마치 경험적 자아가 그 자체로 자명하고 근원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순수한 자아에 대해 말한다면, 그런 주장은 사실 순수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순수지라고 하지 않고 순수한 자아로 규정한다면, 헤겔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순수한 자아로 규정한다면, 여전히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수 본질을 나로 규정하는 것은 애먹이는 모호성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또한 좀 더 상세하게 고찰해 볼 때 여전히 주관적 나로 머무른다.”(논리학, S. 64)

그러므로 헤겔은 데카르트의 시원은 차라리 순수지라고 말해야 옳다고 한다. 순수지는 이미 자아와 대상의 통일이니, 자아의 한계 자체를 벗어난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시원이 될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헤겔은 철학의 시원으로서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절대자’를 거론하는 주장을 비판한다. 이런 것은 헤겔이 논리학의 시원으로 삼은 가장 추상적인 순수 존재보다 구체적 내용 즉 영원, 신, 절대라는 내용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시원보다는 더 확실하게 시원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그런 것이 사유 속에 들어오고 또 언표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이들은 지적 직관을 들고 있다. 그러나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이 지적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잠 속에서 주어지는 꿈처럼 몽롱한 것이며, 명확하고 체계화된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절대자로 규정하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 없는 단순한 지칭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 속에 어떤 구체적 내용이 주어진다면, 이 구체적 내용은 그 자체가 시원적인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앞에서 말한 개연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 가운데서 출현한 매개된 것이니, 시원이 될 수 없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18-세계의 밤과 세계의 한낮[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18-세계의 밤과 세계의 한낮

1) 논리학의 시원 문제는 논리학이 전개되는 바탕과 논리학의 전개 과정을 이해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헤겔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결정적 요인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이다. 헤겔은 순수지에서 순수 존재로의 이행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순수지는 구별이 없는 것이며 구별이 없기에 지식이 되는 것조차 포기한다. 순수지는 단지 단순히 직접적인 것으로 눈앞에 등장한다.”

“단순히 직접적인 것 자체가 반성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표현이니, 그것은 매개된 것이라는 구별과 관계한다. 따라서 이 단순히 직접적인 것을 진정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순수한 존재라고 하겠다.”

순수지에서 순수 존재로의 이행 과정은 여기서 ‘매개’에서 ‘직접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행의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순수지는 의식과 대상의 통일이니, 이미 지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수한 존재가 된다. 이런 설명에서 순수지는 곧 순수 존재와 표면적 모습만 다를 뿐이며, 내용상 차이는 없다.

다른 하나는 매개와 직접성은 서로 반성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매개는 이미 직접성을 함축하며, 거꾸로 직접성은 매개를 함축한다. 양자는 상호 침투의 관계에 있다. 이런 상호 침투 때문에 순수지는 사실 순수 존재와 동일하다.

“순수 존재를 발생하게 하는 매개는 이미 자기를 지양한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유한한 지식과 의식의 결과로서 순수지를 전제로 한다.”

2)

그러나 이런 설명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순수지와 순수 존재가 같다고 한다면 논리학에서 그 출발점을 순수지라고 하면 되지, 왜 순수 존재로 전환시킨 것일까? 매개가 직접성으로 전환된다는 표현(또는 매개가 자기를 지양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은 좀 신비한 느낌이 든다. 마치 의식에서 대상이 나오는 신의 창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신의 창조라는 표현은 헤겔이 직접 사용하기도 한다.

“절대정신은 모든 존재의 구체적이고 최종적인 최고의 진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인데, 한 발자국 더 나가자면 발전의 끝에 이르러 자신을 자유롭게 외화하면서 직접적 존재의 형태로 자신을 내던져 놓은 것으로 인식된다.”(12)

이렇게 외화라는 말을 쓰는 것을 넘어서 곧이어 헤겔은 “절대정신은 세계의 창조를 향해 결단한다”라고도 말한다. 정신현상학의 끝에서 순수지가 존재를 창조한다니, 너무 신비한 표현이다.

헤겔은 왜 이런 신비한 표현을 쓰는 것일까? 여기에 합리적 핵심이 없을까? 생각해 보면 여기서 새로운 비밀이 하나 밝혀진다. 정신현상학은 개별적 지식(감각적 확신)에서 시작하여 가장 일반적인 지식 즉 순수지, 절대지에 도달한다. 순수지는 가장 일반적인 지식이기에 모든 지식의 근거가 되는 지식이다. 이 운동은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이 근거는 모든 존재자에 적용될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또한 모든 존재자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외면적 관계를 의미하는 순수 존재라는 판단 형식 또는 범주로 파악된다.

일반적 근거가 가장 외면적 관계라는 사실은 정신현상학 자체를 통해 이미 증명된다. 앞에서 정신현상학의 표면 운동 밑에는 이면 운동이 있다고 했다. 즉 개별적 지식에서 일반적 지식으로 이행하는 표면 운동은 동시에 가장 내적인 본질이 자기를 타자로 정립하는 즉 가장 외적으로 실현되는 ‘외화의 운동’이다. 헤겔 말로 하면 세계의 ‘창조 과정’이다. 그러므로 순수지는 가장 외화된 지식이니, 가장 외면적인 지식이다.

순수지가 순수 존재가 되는 것은 갑작스럽게 신비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순수지로 가는 운동이 곧 순수 존재로 가는 운동이다. 순수지의 이면이 곧 순수 존재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순수지와 순수존재는 서로 반성 관계에 있으며, 곧바로 전환된다고 했던 것이다.

3)

순수지가 순수 존재라는 사실은 거꾸로도 설명될 수 있다. 이번에는 논리학의 운동을 보자. 논리학의 운동은 앞에서 말했듯이 추상에서 구체로 가는 길이므로, 논리학의 시원은 곧 가장 추상적인 범주 즉 순수 존재라는 범주일 수밖에 없다. 순수 존재란 즉 모든 존재자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에 적용되는 판단 형식, 범주이다.

순수 존재가 그런 외면적인 범주가 되기 위해서는 순수 존재는 가장 일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모든 개별자의 근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즉 순수 존재는 곧 순수지다.

논리학의 표면 운동이 이렇듯 추상에서 구체로 가는 길이지만, 그 이면 운동은 곧 다시 근거에로 복귀하는 길이다. 논리학은 결국 외면적인 관계에서 다시 가장 내면적인 관계 즉 내적 본질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이 내적 본질은 곧 순수지이니, 논리학의 운동은 결국 자기를 자기가 자각하는 과정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하나의 도표를 그려놓기로 하자.

정신현상학

논리학

시원

감각적 확신(직접지)

순수 존재

표면 운동

개별지에서 일반적 근거로

추상에서 구체로

(감각에서 개념으로)

(단순한 규정의 복잡화)

이면 운동

추상에서 구체로

개별 범주에서 일반 범주로

(내적 본질의 외면적 정립, 타자화)

외적 관계(객체 논리)에서 내적 관계(주관 논리)로

단순한 규정의 복잡화=내적 본질의 외면적 정립(타자화)

감각에서 개념으로=객체 논리에서 주관 논리로

4)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의 근거라면 우리는 자주 사물의 가장 내적인 심층에 감추어져 있을 것으로 본다. 거의 대부분의 철학에서 근거는 곧 심층적인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서 사물의 가장 근거가 되는 일반적 지식은 동시에 사물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만을 보여주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근거가 곧 외면적인 것이라니, 헤겔의 말에서 우리가 받는 충격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헤겔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반헤겔적인 철학자 들뢰즈의 실체 개념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베이컨을 논하면서 그의 그림을 실체-속성-양상의 관계를 설명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 가운데 가장 외면적인 표면을 즉 단순한 색깔로 칠해진 표면을 곧 실체라고 규정했다. 반면 그 한 가운데 사물의 구체적 모습을 사물의 양상이라고 규정했다. 들뢰즈는 실체는 모든 것의 근거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장 표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헤겔의 주장과 일치하는 주장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 앞에 펼쳐진 가장 외면적인 공간, 흔히 철학에서 순수공간 즉 한낮의 외면적 공간이 사실은 그 속에서 모든 개별자들과 그 관계가 함축된 세계의 밤, 신비하고 응축된 만물의 고향이다. 거꾸로 밤의 피투성이의 불안은 곧 한낮의 평화로운 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