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48-셈법과 수의 종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8-셈법과 수의 종류

1)

앞에서 여러 번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정량의 화폐라고 말했다. 이 수를 세는[Zaehlen] 것을 셈법[Rechenschaft]이라 한다. 셈법은 초등학교 들어가서 배우는 제일의 기법이다. 누구나 셈법 하면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하기 빼기는 그 가운데 더 초보적이고 곱하기에 숙달하려면, 외우는 것이 요구된다. 구구단을 얼마나 외웠는지, 이 나이 들어 자기 전화번호는 종종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구구단은 잘 외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구구단이라 하는 데 독일 사람들은 일일단[Einmaleins]이라 한다. 이왕 농담하는 김에,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발간한 수학에 관한 소개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옛날 그러니까 중세 독일의 한 상인이 자식을 상인으로 키우기 위해 셈법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독일 대학교수(아마 수학 교수는 없었고 철학 교수였을 것이다)에게 자식을 데리고 가서 후하게 해 줄 테니 자식에게 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때 독일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 더하기 빼기까지는 저희가 가르칠 수 있지만, 곱하기 나누기를 배우려면, 이탈리아 유학을 가야 합니다.”

이 농담의 전거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고, 로마자로 수를 표현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솔직히 지금 필자는 로마자로 된 숫자조차 제대로 읽기 힘들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셈법이 이처럼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단순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이 셈법에 관한 철학을 제시했으니 말이다. 좀, 웃길 것 같은데, 사실은 헤겔의 논리학에서 정량에서 무한량 개념으로 이행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서 결정적인 것이다. 이 부분에는 전거를 밝힐 필요가 있겠다.

헤겔 논리학 재판에서 대체로 주석에 관한 한, 초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주석조차 초판을 대폭 확장한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이 바로 정량과 무한량을 다루는 절에 속한 주석이다. 무한량을 다룬 주석에서는 거의 100쪽에 가까운 광대한 주석을 달아서 소위 해석기하학의 근본원리 즉 무한계산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다룬다. 그에 앞서서 정량의 1절(제목 수)에 덧붙인 주석 1에서는 초판의 주석에 덧붙여 바로 이 셈법을 철학적으로 다룬다.

2)

헤겔은 이 셈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다만 동일한 것을 다루면서도 외면적으로 산출하는 셈법의 상이성은 셈해지는 수들의 상호 차이에 놓여 있다. 그런 구별은 어디 다른 곳에서 외면적인 규정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 셈법의 차이가 곧 수들의 차이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셈이란 동일한 수를 다루는 것이 아닐까? 더하기와 곱하기, 나누기에서 셈하기 전의 수와 셈한 이후의 수는 동일한 수다. 이런 수들은 소위 자연수 가운데 어느 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니, 셈법의 차이와 수의 차이는 무관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헤겔은 수의 차이에서 셈법의 차이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셈법에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우선 더하기와 빼기를 생각해 보자. 이건 어렵지 않다. 3 더하기 4는, 3개까지 개수를 세고, 더해서 4개의 개수를 더 센 것이다. 이것은 손가락으로 세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개수가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이다. 즉 7개의 개수가 아니라 8개나 6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분석적이라 본다. 하지만 이 분석적 명제를 아는 데는 경험적으로 즉 손가락으로 세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12개의 개수라는 사실은 분석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떤 총수로 표현하는가를 알려면, 손가락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빼기는 더하기로 환원된다. 3 빼기 2은 3 더하기 -2이다. 즉 3에서 거꾸로 세워가면 된다. 빼기가 더하기로 환원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여기서는 -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 수는 앞으로 가는 것이라면, -수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수가 등장하면서 수가 하나의 벡터 즉 운동하는 방향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의 시야가 공간의 좌우로 뻗어 나간 것이다.

3)

이제 곱하기를 생각해 보자. 더하기는 1이라는 단위를 개수만큼 반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 곱하기 4에서, 곱하기는 3이라는 총수가 이제 기본 단위가 된다. 그래서 이런 기본 단위를 4번 반복하는 것이다. 즉 3+3+3+3이다. 3은 1+1+1이니, 위의 곱하기는 (1+1+1)+(1+1+1)…로 환원할 수 있어서, 곱하기는 더하기와 다름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의 기본 계기를 단위, 개수, 총수로 볼 때, 여기서 단위는 총수와 일치한다. 즉 총수가 기본 단위가 된 것이다. 더구나 3 곱하기 4는 4 곱하기 3이나 마찬가지다. 즉 3이라는 총수를 단위로 보고 4를 개수로 보든, 4를 단위로 보고, 3을 개수로 보든, 마찬가지다.

나누기는 곱하기를 변형한 것이다. 3 곱하기 4는 12라는 명제는 12를 4 또는 3으로 나누면 3 또는 4가 된다. 이는 얼마나 여러 번 기본 단위 3이나 4가 주어진 총수 속에 포함돼 있는가를 의미한다. 그 답이 곧 개수다. 또는 나누기는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어떤 총수를 주어진 개수(3이나 4)에 도달하도록 나누려면 기본 단위를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떻든 곱하기와 나누기는 총수를 원하느냐, 개수를 원하느냐, 단위를 원하느냐 하는 요구에 따라 달라지는 표현일 뿐이다. 일정한 과자를 자기 아이들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주려면 단위가 필요하며, 일정한 과자를 한 아이가 먹을 만큼 나누어주면 몇 명이나 먹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려면 개수가 필요하다. 나가서 자기 아이가 먹을 만큼 과자를 사려면 얼마나 사야 하는지, 그 총수를 알려면 곱하기가 필요하다.

더하기는 양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빼기에 이르면 수는 정수로 확장한다. 곱하기는 여전히 정수에 머무르는 것 같지만, 나누기에 이르면 이제 수는 분수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곱하기에는 여전히 자연수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것을 변형한 나누기에 이르면, 자연수를 넘어선 분수가 출현하게 된다.

곱하기는 다시 거듭제곱으로 발전한다. 거듭제곱 예를 들어 3³은 3*3*3이다. 이것은 처음 3이라는 총수가 단위로 되어 3의 개수만큼 반복한다. 그 결과는 9인데 이제 9가 단위가 되어 다시 3의 개수만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 거듭제곱은 곱하기로 환원되고, 다시 더하기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단순한 곱하기는 반복적이지만 여기서 곱하기는 누적적으로 일어난다. 누적하는 운동이 들어간다.

나아가서 거듭제곱은 새로운 수를 발생한다. 이는 그것에 대립하는 운동인 근의 운동에서 드러난다. 제곱근은 4의 제곱근은 +/-2이어서 지만, 5의 제곱근은 루트로 표현된다. 즉 무리수다. 나가서 삼제곱이나 삼제곱근에 이르면 허수가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셈법의 상이한 방식은 수의 종류와 연관된다. 한편으로 셈법이 발전하면서 수의 종류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분수나, 무리수, 허수 등이 인간 사유의 산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헤겔은 오히려 거꾸로 설명한다. 즉 수의 종류는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하는 정량의 운동과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 운동과 관계를 우리가 인식 또는 파악하면서 셈법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헤겔은 앞에서 말했듯이 셈법의 기원은 수의 차이에 있다고 한 것이다.

4)

그렇다면, 수의 종류는 정량의 어떤 관계를 표현하는 것일까? 헤겔은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하는데, 분수와 무리수다. 무리수는 나중에 무한량(미분양)과 관계되는 데, 우선 정량을 다루는 데서는 분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분수를 보자. 그런데 분수란 무엇인가? 헤겔은 이 분수를 단순한 수의 관계가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두 가지 정량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비중은 질량과 부피의 관계다. 가속도는 힘과 질량의 관계다. 분수는 이런 두 개의 정량이 갖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자연 속에 정량은 하나의 양이다. 이 정량은 동일한 일자의 반복적 관계이며, 이 정량은 외연량과 내포량으로 구분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외연량은 자기의 한 부분으로 자기를 측정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 관계다. 헤겔에서 단순하다는 것은 추상적이라는 말이며, 개별적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길이나, 무게 등등 각각은 이런 추상적인 개별적 정량이다.

그런데 내포량에 이르면 이 내포량은 이런 추상적인 단순한 자기 관계를 벗어난다. 내포량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만 측정되며, 즉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어떤 점에서 더 많고 더 강한 것이다. 헤겔은 이런 내포량은 타자를 매개로 해서 자기 관계하는 정량이라고 규정한다.

내포량에서는 아직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에 대한 관계가 출현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과 비교되지만, 그러나 비교되는 것 자체는 동일하다. 즉 다이어몬드의 강도와 유리의 강도가 강도라는 하나의 정량에서 비교된다.

그러나 이제 내포량을 넘어서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출현하는 정량이 등장한다. 그게 바로 앞에서 예로 든 비중이나 가속도와 같은 것인데, 수로 보면 이런 관계는 분수 즉 비례나 관계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수가 분수가 된다는 것은 사유의 유희가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두 정량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분수가 고안된 것이다. 헤겔은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하면 이 관계를 통해 질적인 정량이 등장한다고 본다. 양에서 다시 질이 되돌아온 것이다. 비중이나 가속도는 양적인 것이지만, 이미 질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다.

앞에서 질을 설명하면서 두 성질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대자 존재가 출현하고, 이로부터 양적인 것이 출현했다고 했다. 이제 거꾸로 양이 서로 관계 맺으면서 질을 발전시킨다. 이 질은 단순한 감각적 성질이 아니라 질적 성격을 지닌 양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양이 질로 발전한다는 사실은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을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심지어 양적인 것을 자연에서 제거하려는 철학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주장이 될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49-외연량, 내포량, 비례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9-외연량, 내포량, 비례량

1)

앞에서 정량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외연량과 내포량이다. 외연랑은 자기의 한 부분을 단위로 해서 자기를 잴 수 있다. 외연량은 이 단위가 몇 배인가[Vielheit]로 표시된다. 수적으로 표현하자면 외연량은 기수로 표시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물체의 길이나 무게와 같은 정량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헤겔은 이런 외연량은 “자기 내에서 개수”, “자기 관계하는 다수라는 규정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내포량은 이런 몇 배라는 방식으로 표시할 수 없다. 한마디로 여기서는 기본 단위가 발견되지 않는다. 어떤 것의 내포량은 다른 것의 내포량과 비교를 통해 더 많거나 더 적거나 하는 방식으로만[Mehrheit] 표시된다. 수적으로 말하자면 내포량은 다만 서수로만 표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경도에서 스무 번째라 할 때 그런 점에서 경도가 첫 번째 되는 사물보다 다이아몬드의 경도가 스무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여러 사물의 경도를 서로 비교해 볼 때 스무 번째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내포량은 이처럼 타자와 비교를 통해 나오지만, 여전히 여기서 비교되는 정량은 하나의 정량이며 이는 비교되는 타자와 공유하는 정량일 뿐이다. 즉 물질의 경도나 강도나 감각적 뜨거움이나 가벼움 등과 같은 특정 정량이 비교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내포량은 “자기 밖에 있는 것으로서 개수,” “자기에게 외면적인 것으로서 규정성”을 갖는다고 한다.

헤겔은 외연량과 내포량을 넘어서 새로운 정량의 형태로 이행한다. 이 새로운 정량의 형태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중과 같은 것인데, 이는 두 개의 정량(부피와 무게)의 관계 또는 비례를 통해 형성되는 정량이다. 이제 단순한 정량에서 관계 속에 있는 정량 즉 비례량으로의 이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자연에는 이처럼 두 개 정량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정량이 많다. 비중을 예로 들었지만, 비중 외에도 등속도 운동을 보자. 속도는 시간에 비례한다. 등속 운동은 분수로 표현된다. 즉 p=V/t이다. 또 뉴턴의 힘의 법칙에서 힘은 질량이나 가속도에 비례한다.(즉 F=am)

앞에서 수의 종류가 발전하는 가운데 분수가 출현한다고 했다. 분수는 더하기, 곱하기를 거쳐 셈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런 셈법은 단순히 사유의 유희는 아니다. 이런 분수가 곧 두 개의 정량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면, 이 분수는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정량 즉 두 개의 정량 사이의 관계 또는 비례를 통해 만들어지는 정량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분수를 통해 표현되는 정량은 외연량과 내포량보다 더 발전된 정량이다. 외연량이 자기를 단위로 하는 것이라면, 내포량은 타자와 비교하되 결국 동일한 단순한 정량의 측면에서 서로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포량은 자기 관계를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이 등장하는 비중과 같은 비례량은 더는 단순한 정량에 머무르지 않으니, 여기서 비교되는 정량은 비교하는 정량과 전혀 다른 정량이다. 즉 하나의 정량이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비교의 대상을 단위로 측정된다.

어떤 것이 단순히 자기 관계하지 않고 타자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면, 그것은 질적인 것이 된다. 헤겔에서 질이란 타자의 부정성을 기본 성격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타자는 그 질과 대립하는 타자이며, 이때 두 가지는 반성 관계에 있게 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헤겔에서 빨강은 항상 빨강이 아닌 색과 대립해서만 빨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량이 단순한 자기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대립하는 다른 정량을 통해서 규정된다면 그때 이 정량은 질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외연량과 내포량은 단순한 정량이다. 그 정량의 한계를 규정하는 방식 즉 몇 배수[Vielheit]냐 아니면 크고작음[Mehrheit]이냐 방식의 차이다. 그런데 외연량과 내포량을 측정할 때 다른 정량과 관계하는 방식으로 측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외연량이나 내포량은 서로 환원될 수 있다.

외연적 크기는 내포량을 지닌 정량과 관계하면, 내포적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무게를 보자. 무게는 외연량이지만, 만일 피부에 가해지는 압박감을 통해 규정된다면 내포량으로 규정된다. 무거운 것은 강하게 압박하고, 가벼운 것은 약하게 압박한다.

“외연적 크기는 내포적 크기로 이행한다. 왜냐하면, 그 다수의 개수[Vieles]는 그 자체로 그리고 대자적으로 총수 즉 다수의 개수 바깥에 등장하는 총수로 몰락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거꾸로 내포량도 외연량을 지닌 다른 정량을 통해서 규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각적 내포량인 뜨거움을 보자. 이 뜨거움은 수은주를 확장하는 효과를 지니는데, 그런 수은주의 확장은 외연량으로 측정된다. 그러므로 뜨거움도 외연량으로 규정될 수 있다.

“다르게 규정된 내포성에 무차별한 것으로서 이 단순한 것은 외면적인 개수를 그 자체에서 가지며, 따라서 내포적 크기는 본질적으로 외연적 크기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외연량과 내포량은 사실 단순한 정량이므로 실제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이 필요에 따라 측정하기 위해 추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모든 정량은 항상 다른 정량과 관계 속에 있으므로, 이런 관계의 방식에 따라서 외연량은 내포량으로, 내포량은 외연량으로 전환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된 새로운 정량 즉 비례량은 외연량인 동시에 내포량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례량이라는 개념을 통해 헤겔은 외연량과 내포량을 통일한다. 앞에서 두 정량의 관계 즉 비례량을 통해 양적인 것에서 질적인 것이 출현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양자[내포량과 외연량]의 동일성으로부터 질적인 어떤 것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 동일성은 자기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에 관계하는 총수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4)

정량에는 수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있다. 수가 분수로 발전하면서 단순한 정량은 관계를 지닌 비례량으로 발전한다.

분수는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유리수에 머무르는 것과 무리수가 되는 것이다. 유리수적 분수가 자연수의 비례 관계로 표현한 것이라면 무리수에서는 제곱의 비례 관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등속도 운동 S=vT 와 가속도 운동 S=1/2aT² 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일 분수에서 허수가 개입하게 된다면, 이는 원운동과 같은 것으로 출현할 것이다.

양자는 마찬가지로 분수로 표현되지만, 그 의미는 달라진다. 등속도 운동, 가속도 운동, 원운동은 서로 다른 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들의 관계를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즉 등속도 운동도 하나의 가속도 운동이지만 가속도 운동의 가장 낮은 단계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가속도 운동도 원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원운동의 가장 낮은 극한에서 등장한 한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헤겔적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등속도 운동에서는 개념이 아직 숨어 있고 마침내 원운동에 이르러 비로소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외연량, 내포량, 비례량을 서로 다른 자연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외연량은 내포량의 가장 낮은 극한이며, 내포량은 비례량의 가장 낮은 극한으로 볼 수 있다. 즉 비례량에서 표면에 드러나게 될 개념이 외연량에서는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감추어진 개념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숨어 있는 개념이 표면에 드러나는 과정은 어떻게 일어날까? 헤겔은 바로 그것을 부정의 작용으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정의 부정이라는 이중 부정인데, 이런 이중 부정을 통해 정량에 감추어진 개념이 드러난다.

이 정량에 감추어진 개념이 곧 무한 개념이다. 헤겔에서 이 무한 개념은 곧 자연의 운동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어서 헤겔은 2편 2장 3절에서 ‘양적 무한’ 개념을 다루는데, 여기서 헤겔은 비례량에서 드러날 무한 개념을 그 출발점에서부터 추적해 나간다. 무한 개념은 외연량과 내포량, 비례량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앞에서 나타난 무한 모습(무한소나 무한대/ 그리고 무한 진행)은 최종적인 비례량에서 나타나는 무한의 모습즉 진 무한을 암시하며 선취하는 것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무한 개념의 발전 밑에는 정량의 종류에서 발전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47-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7-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가?

 

1)

논리학은 정량을 다루는 가운데, 수 개념을 제시한다. 이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것 즉 상품을 대표하는 화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가 지닌 모든 속성은 정량에서부터 유래한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수학에 관한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에 개입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한 주장 즉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다’라는 주장이다. 헤겔은 이를 주석에서 다루는데, 그의 주장에는 우리의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있어 여기 소개한다.

알다시피 칸트는 아주 기초적인 수학적 명제를 예로 든다. 즉 ‘7+5는 12라는 명제’다. 칸트는 여기서 ‘더하기’라는 개념을 분석하더라도, 그 더해진 수가 ‘12’라는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 12라는 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손가락을 이용해 7개를 세고, 더 나가서 5개를 더 세어야 한다. 이렇게 세어진 결과 구부려진 손가락을 직관하면서, ‘12’라는 수를 떠올린다. 그러므로 칸트는 개념을 넘어서 경험적 직관의 도움 없이는 위의 명제를 알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

헤겔은 칸트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면서, 위의 수학적 명제는 분석적 명제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직관의 도움이 없어도 위의 명제가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에서 ‘더하기’란 가장 외면적인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적인 일자들 사이에 서로 외면적인 관계, 서로 동등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관계를 다룬다고 했다. 양자의 서로 동등한 관계가 곧 물질적 관계며, 양자의 서로 구분되는 관계가 공간적 관계다. 물질적인 관계와 공간적 관계는 상호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양적인 것의 관계는 가장 외면적인 관계다. 여기서 서로 관계하는 일자들 사이에 어떤 내적인 연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외면성은 기하학적 공간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하학적 공간은(일단 여기서는 유크리트적 공간을 말한다) 텅 비고 동질적이어서 그 속에서 도형을 아무리 이리저리 이동하더라도 그 도형은 서로 합동이며 즉 도형의 내적 성질은 그런 공간적 이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양적인 것은 가장 외면적 공간이어서 그 속에서 정량들이 맺는 관계는 그 정량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7개에 5개를 더하더라도, 전자의 개수가 7개인 것에는 변함이 없고 후자에 개수 5개 역시 그대로 남아 있으니, 12개의 개수가 보존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12개의 개수가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직관이나 경험의 도움이 없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며 이는 분석적인 사실이다.

칸트는 12개의 개수가 있을 때 이를 ‘12’라는 총수로 표현하기 위해서 경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이것은 언어적 표현의 문제이다. 12개의 개수를 ‘12’라는 수로 표현하는 것은 12라는 수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언어로 표현할 것이다. 만일 12개의 개수를 표현하는 언어가 ‘12’라는 수가 아니라, ‘한 다스’라는 언어이어서 그 결과를 ‘한 다스’로 표현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는 언어적 문제이지 ‘더하기’라는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2)

칸트가 수학이 선천적 종합 명제라는 주장의 예로 또 하나 끌어들인 것이 기하학의 명제다. 그것은 곧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다’라는 명제다. 이 명제가 선천적 종합 명제라는 주장에 대한 칸트의 논증은 간단하다. 직선이라는 개념은 질적인 개념이다. 직선은 ‘곧바른’, ‘단순한’ 선이라는 말이니 말이다. 반면 ‘최단은 양적인 개념이다. 즉 길이가 가장 짧은 것이라는 의미다. 질적인 개념에서 양적인 개념이 나오지 않으니, 위의 명제는 분석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명제다.

헤겔은 여기서 칸트가 직선 개념을 오해했다고 한다. 직선은 단순히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선에는 이미 양적인 개념이 들어 있다. 즉 직선은 그저 ‘곧바른 것[Gerade]’ 가 아니라 ’곧바른 선[Gerade Linie]’이므로 위의 기하학적 명제는 양적인 개념에서 양적인 개념을 끌어낸 것일 뿐이다.

이렇게 칸트를 반박한 다음, 헤겔은 직선 개념에서 최단 개념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끌어낸다. 직선은 가장 ‘단순한’ 선이니 ‘자기 관계하는’ 선이고, 이런 ‘자기 관계’는 “어떤 종류이든 규정의 상이성이나 그 바깥의 점이나 선에 대한 관계도 정립되지 않은 것”이니, 따라서 ‘최단’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 논증의 핵심은 곧 직선은 두 점 사이에 놓인 축에서 벗어난 제3의 점을 거치지 않으므로, 즉 우회를 거치지 않으므로 최단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직선이라는 규정은 사실 다름 아니라 단적으로 단순한 선이다는 즉 그 탈자화(점의 운동) 가운데 단적으로 자기 관계하며, 그 확장 속에서 어떤 종류의 상이한 규정이나 자기 바깥의 점이나 선에 대한 어떤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 단적으로 자체 내 단순한 벡터[Richtung]라는 의미다.”(논리학 재판, GW21, S. 200)

헤겔의 논증은 겉으로 보기에도 좀 억지 또는 궤변처럼 보인다. 기하학적 명제에 관한 한, 칸트가 말한 것처럼 경험적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면서 기하학적 논증이 일정한 특수한 공간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서문에 보면, 거기서 헤겔은 기하학적 명제의 증명이 작도에 의존하며, 그런 작도는 경험을 통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기하학적 명제가 순수하게 개념적이며 분석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여기서 비록 칸트가 예로 들기는 했더라도, 굳이 기하학적 명제를 끌어들여, 수학이 분석적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기하학은 해석기하학을 통해 수학으로 환원됐으며 해석기하학은 특수한 공간에 적용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달리 순수한 양적인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학적 명제의 성격에 관해서 이미 다분히 경험적인 기하학적 명제를 끌어들이지 않고 수의 관계를 통해서 분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3)

알다시피 칸트는 이런 수학적 명제는 경험적이면서도 필연적(보편적)이어서, 그 때문에 선천적 종합 명제라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학적 명제가 경험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수학적 명제가 필연적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수학적 명제가 분석적이라고 했다. 분석적이라면 필연적이 아닌가? 적어도 칸트의 용법에서는 그렇다. 그런데도 헤겔은 그 필연성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헤겔의 필연성 개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헤겔에서 필연성은 사태가 내적으로 연관돼서. 연관된 하나의 사태에서 다른 사태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고도 충분한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수학적 명제가 토대를 두고 있는 양적인 것의 관계는 서로 외면적인 것이다. 동일한 일자가 반복되면서 맺는 양적인 관계는 같은 것의 반복(물질적 측면)이어서 연속적이며 그런 한에서는 전적으로 동어반복적인 필연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관계는 서로 단적으로 다른 것의 관계(공간적 측면)이어서 불연속적이며 그런 한에서는 서로 무차별하다. 이런 무차별한 측면에서는 그 관계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수의 관계를 보면, 같은 것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분석적이다. 그러나 다른 것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체적 사물을 일자라는 것으로 추상화해서, 즉 단순한 물질이나 공간으로 볼 때, 이 사물의 수적 관계는 분석적이다. 그러나 어떤 일자를 구체적인 것으로 본다면, 이것들의 관계는 비록 수학적으로 표현되더라도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다.

즉 손가락을 추상화하며 동일한 일자로서 볼 때 여기서 더하기는 분석적이다. 그러나 손가락을 구체적 사물로 볼 때(수자는 본래 손가락을 지시하는 명사였다는 것을 기억하라), 즉 손가락 두 개로 보지 않고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 중지로 보면, 이런 구체적 사물의 관계에서 더하기라는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엄지와 검지를 더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이를 통해 중지가 나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는 그때그때 구체적인 관계이며, 수적인 필연성을 지닌 관계는 아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칸트는 수학적 명제를 선천적 종합 명제라 했다. 헤겔은 수학적 명제는 분석적 우연의 명제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최근 언어철학자 크립케는 고정지시어를 경험적이며 필연적 명제라 했는데, 그의 주장은 칸트에 가깝다기 보다 헤겔에 더 가깝다.

4)

수학적 명제가 이처럼 추상적인 일자의 관계 즉 추상적인 물질이나 공간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헤겔은 수학의 한계를 본다. 근대에 들어와 수학은 자연과학의 도구로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때문에 철학자들은 수학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세계의 모든 관계를 표현하려 시도했다. 즉 수학을 철학의 방법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헤겔은 자연과학에서 수학이 놓아준 성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역학적 물체를 다루는 영역은 전적으로 양적인 영역이니, 여기서 수학을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라 한다.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를 충분히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수학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자연 전체를 즉 생물학이나 심지어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할 때 이런 철학적 시도에 관해서는 비판적이다. 생물이나 인간의 경우에는 이미 더 복잡한 물질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여기에 수학적 관계를 적용한다는 것은 생물이나 인간을 역학적 물체로 환원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진정한 사상, 가장 생동적이며 가장 운동적이고 단지 관계 속에서만 개념화되는 것이 이같은 탈자의 지반[즉 수] 속으로 옮겨지면서 죽은 운동이 없는 규정으로 변한다. 따라서 사상의 규정과 관계가 풍부할수록 수와 같은 형식으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더욱 황량하고 자의적인 것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205-6)

물론, 헤겔은 수학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과 사상의 가운데 있는 추상적인 일자의 영역 즉 양적인 영역이므로 수학적인 것은 사유를 통해 사상에 다가가는 예비적 단계로서 사유를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가 수학을 배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상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수를 사용한다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기호이란 표면적인 유사성(도상)이나 단편적 흔적(지표), 관습적 관계(상징)만으로도 상징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삼위일체와 같은 수학적 상징이 그러하다.

그러나 헤겔은 ‘삼위일체’라는 수학적 상징은 개념의 발전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 사이의 내적 필연적 연관을 성자, 성부, 성령과 같은 자연적인 가족적 관계로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런 수학적 상징은 수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개념의 내적 발전이나 연관을 은폐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는 한계가 있다. 다음과 같은 헤겔의 한탄을 들어보라.

“고대인은 사상규정을 위한 수적 형식의 불충분성을 매우 올바르게 통찰하고 있었으며 사상을 위한 임시변통 대신에 사상에 본래적인 표현을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요구했다. 고대인들은 숙고의 측면에서 오늘날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나았는가,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다시 수 자체와 수적 규정을 … 사상 규정 대신에 정립하면서 무능력한 유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떤 가상할 만한 것이며 근본적이며 심원한 것으로 여긴다.”(논리학 재판, GW21, S. 205)

헤겔 형이상학 산책 46-내포량과 외연량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46-내포량과 외연량

1)

앞에서 수에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다. 단위[Eins]와 개수 그리고 총수[Einheit]¹이다. 정량에서 단위는 그 정량에 외면적인 것이지만, 정량은 이 단위의 반복을 통해 규정되므로,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개수는 단위가 모인 집합이므로 불연속적이다. 총수는 이런 단위를 전체로 총괄하는 것이므로, 연속적이다.

주1: Eins, Eeinheit와 같은 표현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대체로 Eins는 일자 즉 정량을 이루는 단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때로는 문맥상 어떤 수가 고유한 개별자로 존재할 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7은 하나의 일자이다. 또 Einhiet도 대체로 총수를 의미하는데 어떤 때는 차라리 단위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더 적합할 때도 있다. 혼란이 있지만,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헤겔에서 개수도 연속성의 측면이 있으며 총수도 불연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개수가 불연속적인 것의 집합이라 할 때, 세어지는 각 일자는 서로 같은 것이므로,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 같은 것들끼리는 연속적이니, 그 점에서 개수도 연속적이다. 마찬가지로 총수가 내적으로는 연속적인 것이지만, 다른 수와 비교해 보면 단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것이니, 이런 점에서 총수는 불연속적인 것이기도 하다.

2)

앞에서 말했듯이 질의 범주에서는 질이 서로 관계하여 통일되면서 대자 존재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 대자 존재는 양적인 것의 출발점이 된다. 양의 범주에서는 그 반대다. 여기 양에서 양적인 것이 서로 관계하면서 질적인 것이 다시 출현하는 과정이 다루어진다. 이처럼 질적인 것이 다시 출현하는 데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 내포량의 개념이다.

헤겔에서 내포량은 외연량과 비교된다. 양자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양적인 것을 규정하는 일자 즉 양적인 것의 원리이며 그 자체 규정성의 원리인 단위다. 외연량에서 단위는 자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이다. 어떤 것의 크기는 자기의 한 부분을 떼어내서 그것을 거듭 반복하면서 재어질 수 있다.

그 단위가 자기 자신이므로 여기서 규정성은 자기 관계에 머무른다. 이런 자기 관계는 아직 타자를 통해서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 아니며 추상적인 자기 관계다. 여기서는 어떤 크기는 그 단위가 몇 번 반복된 것인지가 확정된다. 이것을 통해 개수와 총수가 주어진다.

그런데 내포량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말해지는 대로 감각의 정도를 말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사물은 경도나 강도에 따라 비교될 수 있다. 이런 경도나 강도는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떼어내서 비교될 수는 없다. 이것은 자기와 다른 것과 비교돼서 더 크고 더 작은 정도를 지닐 뿐이다. 철기는 청동기보다 더 강하다. 서로 부딪히면 청동기가 깨어지기 때문이다. 유리보다 다이아몬드는 더 큰 경도를 지닌다. 다이아몬드로 유리를 자를 수 있다.

이처럼 내포량은 오직 다른 것과 비교된 크기므로, 더 강하고 더 약하다는 비교를 통해서 서열을 매길 수는 있지만, 과연 그 정도가 몇 배나 더 큰가를 말할 수는 없다. 다이아몬드 이런 비교를 통해 서열상 20번째라고 한다면, 여기서도 개수와 총수가 나오니 이것도 하나의 정량이기는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서열상 첫 번째 사물(예를 들어 유리라고 하자)의 20배나 더 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헤겔은 외연량은 배중성[Vielheit]을 가진다고 말하며 내포량은 가중성[Mehrheit]을 가진다고 한다. 즉 전자는 몇 배인지를 알 수 있지만, 후자에서는 더 많은 것인가 많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외연량에서 개수는 ‘자기 내에서의 개수’이고 내포량에서 개수는 ‘자기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개수’라고 한다.

“외연량과 내포량은 정량의 동일한 규정이다. 그 구별은 외연량은 개수를 자기 안에 가지며, 내포량은 이를 자기 바깥에 가진다는 데 있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3)

여기서 ‘자기 바깥에’라는 말은 타자와 비교된다는 말일 것이다.

“정도는 특정한 크기지만, 집합이거나 단지 자기 내에 머무르는 더 많은 것[Mehreres]은 아니다. 정도는 더 많음[Mehrheit]인데 더 많은 것은 단순한 규정 속으로 복귀한 더 많은 것[Mehere]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0)

여기서 ‘자기 내에 머무르는 더 많은 것’과 ‘단순한 규정 속으로 복귀한 더 많은 것’이 비교된다. 그 의미를 새겨 보면, 전자는 많고 적음이 세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후자는 많고 적음이 세어질 수 없다는 의미다. 외연량은 세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내포량은 그저 비교될 뿐이다.

3)

어떻게 본다면, 내포량은 양적인 것에 아직 불완전하게 도달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처음에 단순히 다른 것과 비교를 통해 측정된 것들도 엄밀하게 자기 관계하면서 몇 배나 되는지가 측정되고 외연량으로 규정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체온은 처음에는 감각의 정도였다. 손으로 재면서 내 체온보다 높으면 뜨겁고 내 체온보다 낮으면 차갑다. 그러나 이제 체온계를 통해서 재어지면서 얼마나 높은지, 몇 배나 되는지가 수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거꾸로다. 즉 내포량은 외연량보다 한 단계 발전된 것이다. 왜냐하면, 외연량은 추상적인 자기 관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지만, 내포량은 이제 타자와 관계하면서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 질적인 것이 지닌 의미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외연량은 타자와 비교되는 것이지만, 사실 이 타자는 자기와 같은 것이다. 즉 타자는 예를 들어 경도나 강도와 같은 일정한 측면에서 비교되는데, 자기와 타자는 공통으로 이 경도나 강도를 가지고 있다. 결국, 이 타자와의 관계는 제한적인 의미를 지니며, 여전히 자기 관계라는 추상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자기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이제 정량은 다른 정량과 관계해야 한다. 즉 서로 다른 정량인 길이와 무게가 서로 관계하면서 비중이 출현한다. 관계한다는 것[Verhaltniss]은 곧 비율[Verhaltniss] 또는 비례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비중의 정도는 두 개의 정량이 관계 또는 비율이다.

최근 과학에 대한 실망에서 과학적 사고를 비판한다. 현상학적 철학의 계열에서는 과학적 사고는 양적인 것을 토대로 한다. 과학적 사고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양적인 것을 통해 개별적이여 구체적인 질적인 차이를 제거한다. 양적인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하는 사유가 만들어 낸 것이므로, 자연을 왜곡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과학적 사유는 자연을 파괴한다. 나아가 오늘날 시장 사회에서는 개인이 지닌 개성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직 개인의 양적인 가치만이 중요하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은 소외되며, 평범하고 진부한 존재로 격하되고 만다.

이런 관점에서는 질적인 감각의 정도로 규정된 내포량(흔히 감각량)은 질적인 것이 여전히 보존된 것으로서 추상적 자연과학을 극복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감각의 정도를 측정하는 예술가는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과학자가 된다.

헤겔은 다른 의미에서 이 감각량 즉 내포량에 주목하는데 이를 통해서 추상적인 양으로부터 감각적인 질적 차이가 다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관점은 다르지만, 동일하게 양적인 것의 극복을 내포량에서 찾는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내포량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 관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관계하는 것이면서 그 자기 관계가 타자를 통해 측정될 뿐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내포량을 유사한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외연적인 타자 존재를 더는 자체 내에서 갖지 않고 이를 그 밖에서 가지며, 그 자차 존재에 자기규정으로서 관계한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1)

“일자로서 수는 개수의 무차별성과 외면성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외면적인 것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자기에 관계한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1)

“무차별한 규정성이 정량의 질을 이루며 즉 그 자체에서 자기에 외면적인 규정성으로 존재하는 규정성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1)

“정도는 그러한 내포성이 더 많음이라는 것 아래 있는 단순한 크기 규정이다. 이 크기 규정은 각각이 단지 자기 관계하며 동시에 서로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상이한 규정이다. 그러므로 각각은 다른 것과의 연속성 속에서 자기규정을 갖는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1)

“이 자기 외면성이 내포량이고 단순한 규정성이다. 다시 말해 자기 관계하면서도 동시에 그 규정성을 타자 속에 갖는 것이며 그 규정성은 그 자체에서 자기에 외면적인 규정성이다.”(논리학 초판, GW 11, S. 133)

“정도의 각각은 자기 관계하는 크기 규정으로서 다른 크기 규정에 무차별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서 이 외면성에 관계하며 다만 이 외면성과 매개해서만 그 자신의 본질로 된다.”(논리학 재판, GW 11, S. 134)

헤겔 형이상학 산책45-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5-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

1)

헤겔 논리학을 다루면서 논리학의 구조가 판단 형식 즉 범주가 전개되는 방식과 상응한다고 말했다. 그런 상응에 비추어 보면, 정량은 양적 판단 형식 가운데 첫 번째 단칭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은 질을 다룰 때도, 존재와 무의 상관관계를 통해 현존을 끌어냈다. 존재와 무는 현존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관계 즉 ‘관계있음(존재)’과 ‘관계없음(무)’를 말한 것일 뿐이고, 실제 질적 판단 형식은 현존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현존이 질적 긍정 판단에 해당한다.

이런 전개 방식은 양을 다루는 때도 마찬가지다. 바로 앞에서 다루었던 양적인 것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정량의 일반적인 상호 관계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양적 판단 형식이 처음 시작하는 것은 정량에서부터다. 질적 판단 형식에서 현존에 해당하는 것이 양적 판단 형식에서는 정량이다.

2)

정량과 수의 관계는 앞에서 말했다. 정량 속에 이미 수적 관계가 들어있다. 수는 나름대로 하나의 정량이며, 다만 다른 정량을 표현하는 기호로 사용될 뿐이다. 즉 이 정량에서 이미 존재하는 수적 관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량과 수의 관계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명한 상품과 화폐의 관계와 같다. 상품 속에 이미 교환가치의 관계가 들어있다. 화폐도 하나의 상품이지만, 다른 상품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즉 화폐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수에 관한 심리주의자는 수를 인간의 셈이라는 주관적 활동으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그것에 대해 논리주의자는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수는 알다시피 초월성 또는 객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플라톤은 수를 이데아로 여겼다. 양적인 존재 즉 정량은 이런 이데아가 분유 되어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러나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의 객관성은 마치 화폐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마르크스는 금의 자연적 속성에서부터 화폐의 본성이 나오는 것을 일종의 물신화로 여겼는데, 마찬가지다. 수의 객관성을 수가 지닌 고유한 속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면 이는 물신화에 해당한다. 상품에서 화폐가 나오듯이 수의 객관성은 정량에서 나온다.

3)

정량은 수로 대변되므로 헤겔은 정량을 논하면서 자주 수를 끌어들인다. 정량을 다루는 2편 2장 A 절은 아예 ‘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A 절에서 헤겔은 수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이 바로 외연량과 내포량이다.

흔히 수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연속적 수와 불연속적 수다. 연속적 수 또는 크기(정량)¹를 다루는 학문이 기하학이다. 불연속적 수 또는 크기(정량)를 다루는 것이 산술학이다. 고대에 기하학과 산술학은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기하학은 주로 이집트 그리스에서 측량술로부터 발전했다. 산술학은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에서 발전했다. 인도가 수 0을 발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주1: 헤겔은 양적인 것[Quantität]을 크기[Größe]와 구분한다. 크기는 규정성을 지니므로 정량[Quantum]에 해당한다.

그런데 수가 자연수에서나 분수에서처럼 불연속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일찍 발견됐다.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비밀로 여긴 무리수의 발견이 여기에 속한다. 무리수는 수이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연속적 수다. 이 수가 서로 분리된 유리수 사이에 끼어들면서 수는 단순히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임이 알려졌다. 수를 불연속적인 것으로만 여겼던 피타고라스학파가 무리수를 숨기려 했던 것은 이 발견이 고대에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기하학은 공간적 크기를 다루고, 여기에는 수가 개입하지 않는다. 기하학은 변이나 각, 길이의 같음과 다름을 다룰 뿐이다. 물론 기하학에서도 삼각형이라든가, 사각형 등에서 보듯이 수가 부분적으로 개입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다루는 대상에 관한 것이지, 기하학이 다루는 것은 여전히 같음과 다름일 뿐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기하학적 방식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대수학이 발전하면서 피타고라스 정리가 대수학적으로 증명됐고 나아가서 근대 해석기하학에서 대수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기하학적 크기 역시 불연속적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정되기에 이른다.

대수학의 발전은 기하학의 연속적 크기가 불연속적 크기를 가지며, 거꾸로 산수적 불연속적 크기가 연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수를 이렇게 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로 나누는 것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량을 다루면서 당시 흔히 다루었던 방식대로 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로 나누지 않고, 외연량과 내포량으로 나누었다.

4)

이제 외연량과 내포량, 외연적 크기와 내포적 크기의 관계를 다루기 전에, 이 두 가지 크기의 공동 지반이 되는 정량을 살펴보자. 정량은 개념적으로는 양적인 것이 규정성 또는 한계를 지니면서 출현한다.

이런 정량은 구성하는 요소는 우선 일자다. 이 일자[Eins]는 정량의 수를 셀 때 출발점이 되는 것 즉 기본 단위다. 이 단위를 무엇으로 하는가는 자의적이다. 물의 양을 재기 위해 우리는 부엌에서처럼 바가지로 잴 수도 있고 실험실에서처럼 비커로 잴 수도 있다. 전통적 단위인 ‘냥’으로 잴 수도 있고 국제 표준 단위인 그램을 사용할 수도 있다. 어느 단위를 사용하든 자의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에 고유한 객관적 단위는 없다. 헤겔은 어떤 정량을 재기 위한 단위를 그저 ‘일자’라고 한다.

정량을 단위로 재면, 두 가지 계기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를 개수[Anzahl]와 총수[Einheit]라고 한다. 이 두 계기가 수를 설명하는데 아마도 헤겔만이 제시한 독특한 개념이다. 우선 개수는 어떤 단위가 얼마나 여러 번 반복됐는가를 말한다. 20의 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이 스무 번 반복돼야 한다. 즉 20에는 1이 스무 개 들어있다.

20개 속에 들어있는 1 즉 일자는 서로 동일하다. 그 중 어느 것도 1일뿐이다. 또한, 이들은 서로 동등하다. 세 번째 1과 네 번째 1은 세기 나름이지, 달리 세어서 세 번째를 네 번째로 세고 네 번째를 세 번째로 세더라도 무방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20개 속에 있는 일자는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자는 아무리 빨리 세더라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어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총수[Einheit]를 보자. 이것은 1을 스무 번 반복해서 나온 ‘20’이라는 수가 다른 수 예컨대 ‘9’라든가 ‘21’과 같은 수와 비교해서 가지는 의미다. 이 20은 개수로 보면 스무 번 반복한 것이지만, 총수로 보면, 다른 수처럼 고유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는 개수로 보면 1과 2지만, 총수로 보면 각자 고유한 것 즉 엄지와 검지다. 엄지는 머리를 누르는 것이고 검지는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다. 스무 개라는 개수가 고유한 스물이 되는 게 바로 수다.

20이 스무 개라는 점에서는 불연속적인 것의 집합이다. 그러나 20을 총수로서 고유한 크기로 보면, 그 속에 모여 있는 20개라는 분리된 것들은 의미가 사라지고 전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 것 즉 연속적인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이름이 총수[Einheit: 통일성]이다.

“수는 그 계기로 총수와 개수를 가지며 그 자체에서 양자의 통일이다. 총수는 연속성의 계기며, 개수는 분리의 계기를 이룬다. 양자는 정량 속에서 수로서 존재한다.”(논리학 초판, GW11, S. 126)

5)

정량에서 개수와 총수가 이처럼 두 계기를 이루므로, 헤겔은 정량의 규정성과 질적 현존의 규정성을 비교한다. 질적 현존에서 규정성 즉 감각적 성질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이고 외면적일 뿐이다. 그것은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된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파란색에 대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정량에서 규정성 즉 한계는 다른 규정성과 구별되는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다른 규정성과 연결되고 있으니, 4는 3과 5와 다른 것이지만, 동시에 단위인 일자를 셋에서 한 번 더 더한 것이며 한 번 더 더하면 다섯이 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되지만, 후자의 측면에서는 자기 관계해서 규정된 것이다.

어떤 사물의 정량이 20이라고 할 때, 이 개수로서 20이든 총수로서 20이든, 그 기본 단위가 자의적이므로, 그 정량은 자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나이가 스무 살 된 대학생보고 팔십 먹은 노인네라 해도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이를 셀 때 1년을 단위로 하지 않고 계절별로 세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량이라는 크기는 어떤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고 그 사물의 본성과 무관한 무차별성을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정한 단위가 전제된다면, 그때 정량은 그 사물을 규정하는 고유한 한계, 규정성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군에 가는 나이는 20살이다. 누구도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스무 살에는 군에 가야 한다.

정량을 재는 단위가 이처럼 자의적이라는 점에서 정량은 타자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정량을 재는 단위가 일단 정해진다면, 정량은 그 단위의 반복을 통해 규정되는데, 그런 점에서 정량은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된 것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헤겔은 정량은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가운데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머무른다”라고 말한다.

6)

정량의 규정성이 자의적인 규정성이라는 점에서 이 정량의 규정성은 질적 현존에서 현존의 규정성과 유사하다. 현존의 규정성 즉 감각적 성질은 주관이 파악한 우연성이며, 그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다. 질적 범주에서 운동은 인식하는 주관이 이 외면성을 극복해서 사물에 고유한 성질을 찾아 나가는 운동이었다. 그 운동 끝에 마침내 대자 존재 즉 그 사물의 형상에 이르렀다.

정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량은 외면적인 규정성이다. 어떤 사물에 고유한 정량을 발견하는 것이 양적 판단 형식에서 운동의 기본 목표다. 예를 들어 도라는 음은 현의 길이를 통해 그 본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현의 길이는 도라는 음의 본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단순한 우연적 정량이 아니다. 헤겔은 척도라는 개념에 이르면 비로소 고유한 정량이 출현한다고 본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가 지양된 것이므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리고 대자적으로 그 한계에 대해 무차별하다. 그러나 동시에 양적인 것에서 그 한계 또는 정량이라는 사실은 무차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양적인 것은 일자를 즉 절대적으로 규정된 존재를 자체 내에 그 자신의 고유한 계기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일자는 그 자신의 연속성 또는 총수에 이르러 정립되면 양적인 것의 한계가 된다. 이 한계는 양적인 것이 자기를 생성해 마침내 도달한 하나의 독자적 존재[Eins]로서 머무른다.”(논리학, 재판, GW21, S. 193)

헤겔 형이상학 산책44-정량과 수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4-정량과 수

1)

형이상학은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를 다룬다. 칸트의 선험철학을 원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더욱 발전하겠다고 확고하게 선언했던 헤겔은 세계의 일반 원리를 사유의 근본 범주(또는 판단 형식)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문제는 양적 범주다. 양적 판단 형식 즉 양적 범주가 세계를 일반적으로 구성하는 원리가 될 수 있는지, 요즈음 철학은 많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원초적인 세계는 질적 개별자의 세계가 아닌가? 양적 범주란, 세계 밖에서 사유하는 인간의 주관적 산물이 아닐까?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개별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지속적이어야 한다. 명멸하는 우연적인 것에는 이런 개별성조차 없고 그저 있었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찰나생 찰나멸, 이런 세계에서는 사유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속하는 것이 있는 한, 이 지속성은 서로 대립하는 두 성질이 자기 관계하는 것 즉 대자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럴 때 대자 존재자들의 상호 관계는 양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양적인 세계의 존재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에서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원자론자의 원자와 공간의 개념을 기초로 한다. 원자와 원자의 관계가 곧 양적인 관계이며, 이 양적인 관계에서는 오직 연속성과 분산성이라는 두 가지 관계밖에 없다. 원자와 원자는 동일한 대자 존재의 관계이니 연속적이며 그러면서도 이 관계 맺는 것이 서로 독자적인[fuer sich] 것이니 분산적이다. 연속적이라는 점에서 물질적인 것이며, 분산적이라는 점에서 공허로서 공간적인 것이다. 물질과 공간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지만, 서로의 이면에 떼어낼 수 없이 붙어있다.

2)

양적인 관계야말로 수학적 관계의 토대가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이 양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피타고라스의 수의 세계도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양적인 것과 수적인 것은 다르지 않을까?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정량이 나오고 정량에서 다시 수가 나온다고 한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의 연속과 분리라는 관계를 말할 뿐이다. 그것은 얼마나 큰가 하는 크기 규정을 갖지 않는다. 정량은 이런 양적인 것이 일정한 크기 규정을 지니게 된 것을 말한다.

이미 양적인 것은 크기 규정을 지닐 수 있다. 그것은 동일한 대자 존재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대자 존재는 반복하는 만큼의 크기를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양적인 것에서 크기 규정은 다만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특정한 크기를 지니려면 다른 것과 비교되어야 한다. 즉 잣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길이는 미터를 잣대로 하고, 무게는 그램을 잣대로 한다. 그러나 미터나 그램과 같은 잣대는 주관적으로 선택된 임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든 임의적으로 선택된 잣대를 기준으로 반복을 통해 일정한 크기가 규정된다. 이렇게 규정된 특정한 크기가 곧 정량이다.

정량은 반복되면서 이미 수적인 체계를 갖지만, 아직 수는 아니다. 그것은 가능적인 수적 체계다. 이 정량이 수가 되려면, 일정한 잣대가 지닌 수적 관계가 추상돼야 한다. 그렇게 추상된 수적 관계가 곧 수를 이룬다.

“정량은 일단 규정성이나 한계 일반을 지닌 양적인 것인데, 그것이 완전하게 규정되면 수다.”(논리학 재판, GW21, S. 193)

정량과 수의 관계는 마치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과 화폐의 관계와 같다. 화폐는 상품의 하나다. 어느 상품이 화폐인가 하는 것은 주관적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을 통해 어떤 상품이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화폐로 선택되면서 화폐가 출현한다. 이 화폐는 상품이 지닌 교환가치의 비례 관계라는 수적 체계를 의미할 뿐이다.

정량과 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정량을 측정하는 잣대는 주관이 임의로 선택한 것이다.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선택된 대표적인 잣대가 곧 수다. 이 수는 정량의 비례 관계를 언표하는 수단이 된다.

3)

이제 수 개념에 관한 플라톤이나 러셀의 주장을 헤겔의 사유와 비교하여 살펴보자. 19세기 심리주의는 수를 더하거나 빼는 것과 같은 사유의 활동에서부터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런 사유의 심리적 활동은 경험적이고 우연적이지만, 수적 질서는 객관적이고 필연적이니, 이런 심리주의는 수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수를 플라톤적인 이데아에서 끌어내거나, 수를 논리로 환원하려는 논리주의가 등장했다.

우선 수에 관한 플라톤적 설명은 문제가 있다. 수는 자주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 존재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기하학적 크기도 일종의 수라고 할 수 있는데, 기하학적 질서야말로 플라톤이 이데아의 표본으로 설명해 왔던 것이 아닌가? 수가 이처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자연의 질서 속에 수를 적용한다는 것은 이 자연이 수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데아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창조주 신은 일단 제쳐 두자. 창조주는 굳이 이데아의 모범에 따라 세계를 창조할 필요는 없다), 자연이 초월적 이데아를 따르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데미우르고스를 인정할 수 없다면, 자연 속에 수적인 질서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만큼 자연적인 것에서부터 수적인 질서가 발생하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헤겔의 생각은 그런 점에서 수가 자연에서 발생하는 과정을 잘 이해시켜 준다. 헤겔에서 수적인 것은 양적인 것에서 나온다. 양적인 것은 일정한 크기를 지닌 정량으로, 정량에서 다시 정량을 대표하는 수로 전개된다. 정량이 이미 수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만 수일 뿐이다. 수도 하나의 정량으로서 다른 정량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택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에서 상품에서 화폐가 나오는 과정과 같다.

4)

이번에는 현대 수 이론을 대표하는 러셀의 주장을 살펴보자. 러셀은 수를 집합의 집합으로 정의했다. 쌍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 예를 들어 {신발, 손, 발, 귀 등등}.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두 번째 손가락(검지, 둘)이다. 셋으로 이루어진 집합도 있다. {솥의 다리, 삼원색 등등.}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 세 번째 손가락(중지, 셋)이다. 이처럼 어떤 집합을 대표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집합 즉 {둘, 셋, 넷… 등등}이 곧 수이다.

러셀의 수 개념은 간명하기는 하지만, 이 집합의 집합을 통해 수의 진정한 개념이 정립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러셀의 주장은 헤겔이 이미 말한 것처럼 수가 정량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는 수로 사용되는 언어가 어떻게 해서 수적 질서를 의미하게 됐는지를 말할 뿐이다. 이를 통해 수가 지닌 기본적인 속성 즉 수의 연속성과 분산성은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집합의 집합으로서 수 개념은 정의 속에 이미 수를 전제로 한다. 즉 ‘쌍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나 ‘셋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라는 개념이 이미 쌍이나 셋이라는 수 개념을 포함하니, 정의될 것을 정의 속에 전제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더구나 이런 수 개념으로서는 수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연속성과 분산성이라는 속성을 끌어낼 수 없다. 쌍을 대표하는 수 검지(둘)와 다섯 개짜리를 대표하는 수 즉 약지(다섯) 가운데 어느 것이 큰가 또는 둘과 셋을 더하면 다섯이 나온다는 수적인 질서가 나오지는 않는다. 검지가 약지보다 작은가? 또는 검지로 찌르고 다시 중지로 찌른다고 해서 약지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러셀의 수 개념은 집합 개념에 기초하는 것인데 집합 개념은 그 자체 모순을 포함한다는 사실이 이른바 러셀의 역설을 통해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사실 잘 살펴보면, 러셀의 수 이론은 수의 개념을 설명한다기보다 수로 사용되는 언어가 어떻게 선택된 것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5)

플라톤이나 러셀은 수 개념을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부터 수 개념을 끌어냈는데, 양적인 것을 규정한 정량은 다양한 것들로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정량적 존재자들을 대표하는 것이 곧 수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43-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 논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43-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 논증

1)

양은 대자 존재의 관계다. 대자 존재는 동일한 것이 여럿으로 존재하니, 예를 들어 나뭇잎이나 물발울과 같은 것이다.

이들의 관계 속에서 관계 맺는 것이 동일한 일자므로, 이들은 서로 견인하면서 연속적인 것으로 되고, 동시에 여기서 관계 맺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자므로 이들은 서로 반발하면서 이 관계는 분산된 관계다.

“연속성 속에는 다의 병열이 여전히 내포되어 있으며 그러나 동시에 구별되지 않은 것, 중단되지 않은 것으로 포함되어 있다. 다는 연속성 속에 본래 그대로 정립되어 있다. 다는 다른 것과 같은 일자이며 각자는 다른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다는 단순한 구별이 없는 동등성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76)

대자 존재의 견인과 반발은 상호 작용적이니, 반발하는 가운데 견인이 일어나고 견인하는 가운데 반발하게 된다. 반발 가운데 견인하면서 연속하고 견인하는 가운데 반발하므로 분리된다. 헤겔은 이런 분리와 연속성이 동시에 존재할 때 한편으로 자기를 넘어 연장(지속)하는 것 즉 생산적인 지속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벗어나 분리되는 것 즉 영속적인 탈자태가 있다.

“양은 그 규정상 자기에 대한 지양하는 관계이며 영속적인 탈자화[Aussersichkommen]이다. 그러나 반발된 것은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반발은 자기 자신의 생산적인 지속[Fortfliessen]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77)

생산적인 지속이 양적인 것이며 영속적인 탈자태가 공허다. 물질은 양적이며 시공간은 공허다. 그러나 물질도 배후에는 탈자성이 있으며, 시공간도 배후에는 하나의 양적인 연속체다.

2)

헤겔은 이런 관계 개념들 즉 ‘대자 존재와 일자’/ ‘견인과 반발’/ ‘연속과 분리’/ ‘지속과 탈자’라는 개념을 통해 양적인 것을 규정한다. 이런 ‘양적인 것[Quantitaet]’은 아직 ‘정량[Quantum]’ 또는 ‘크기[Groesse]’는 아니다.

양적인 것은 지속과 탈자라는 관계만을 말한다. 여기서는 아직 어떤 한계가 주어져 있지 않다. 단순히 물질 또는 시공간을 말할 때 우리는 그 크기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정한 크기가 규정되지 않고 다만 지속과 분리만 말할 때, 즉 무규정적인 크기가 양적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시공간이 그렇다. 시공간에 관해서 또는 물질에 대해 누가 그것은 얼마나 큰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로소 정량 또는 크기는 일정한 크기를 통해 규정된 것을 말한다. 그런 어떤 것이 정량이 되려면 일정한 크기 즉 한계를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물방울은 일정한 폭을 지닌 크기를 가진다. 그것을 우리는 분자 단위나 원자 단위로 세지 않는다. 물 분자의 일정한 집합체를 하나의 물방울로 보고, 비로소 물방울의 수를 센다. 물 분자가 물방울의 크기를 이루지 못하면, 물 분자는 그대로 있지만, 물방울을 사라진다고 말한다. 물방울이 더욱 뭉쳐서 물줄기가 되면, 이제 물줄기라 하지 이를 물방울로 보지 않는다. 이처럼 일정한의 크기를 지닌 어떤 것이 곧 정량이다.

3)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정량, 크기로 넘어가면서 긴 주석을 통해 양의 연속성과 가분성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소개한다. 원자론자는 가분성을 주장하는 대표자다. 스피노자는 연속성을 주장하는 대표자로 소개된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 독자적으로 관심을 지닌 것이 아니라, 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언급될 뿐으로 보인다.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연속성과 분리를 동시에 인정하므로 양에 관해 칸트가 주장한 이율 배반이 특별히 흥미로웠을 것이다.

헤겔은 칸트의 양에 관한 이율 배반론을 살피기 전에, 칸트의 이율 배반론 전반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서술한다.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론의 공적을 인정하면서 칸트의 이율 배반론은 “이전의 형이상학이 전복이며 새로운 철학으로 이행의 주요 계기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율 배반론은 “유한성의 범주를 내용의 측면으로부터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즉 이전의 형이상학은 지성의 개념 즉 판단 범주를 실체화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는 긍정하고 그것에 대립하는 것은 반박하였는데, 칸트는 두 가지 모두가 자기 모순적인 것을 밝힘으로써 어느 개념도 실체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론이 지닌 한계를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칸트는 이율 배반에 속하는 네 가지 개념쌍을 네 가지 판단 범주에서 끌어내 “완전성이라는 가상을” 주려 했으나, 사실 지성의 모든 범주가 “이런 대립된 계기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칸트는 지성의 개념을 물 자체에 적용하는 가운데서 이율 배반이 나온다고 보았으나, 이런 관점은 이율 배반이 개념 자체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물 자체에 적용되면서 구체화되는 가운데(즉 구체적 개념) 출현하는 것인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은 지성 개념은 현상에 적용하면 문제가 없고 다만 물 자체에 적용함으로써 이율 배반이 생긴다고 했는데, 이는 이율 배반을 주관에 귀속시킴으로써 “모순을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니” 현상 자체에서도 마찬가지 이율 배반이 생긴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4)

이상 관점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면서 헤겔은 이제 양적인 것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하는 데로 들어간다. 이제 양적인 것에 관한 이율 배반은 두 대립하는 정립과 반정립을 모두 긍정하는 이율 배반이다. 모순이 존재할 수는 없으니, 두 주장 다 배척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헤겔은 칸트가 논증했다고 믿는 것은 사실은 진정으로 논증한 것이 아니라 전제 속에 감추어놓고 이것을 마치 논증한 결과처럼 떠벌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칸트는 논박 요술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 고찰된 증명은 요술은 아니지만, 증명이라는 외적인 형태를 갖고 있어서 결론으로 출현해야 하는 것이 괄호 속에 증명의 축이 된다는 것을 투시하지 못하게 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184)

정립부터 보자. 이 정립은 “세계 속의 모든 합성된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즉 더는 나누어지지 않는 단순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가 ‘합성된 실체’인데, 정립에서 칸트는 이 주어를 실체보다는 합성된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칸트는 이 주장을 논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합성된 것을 구성하는 단순한 것이 없다고 해 보자.

-그러면 합성된 것을 구성하는 것은 다시 합성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무한히 이어가면, 마지막으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남는다.

-합성된 것이 무로 구성될 수는 없으니, 단순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런 논증에 대해 헤겔은 불필요한 우회를 해서 증명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구성 또는 합성된 것이라는 말 속에 이미 단순한 것의 합성이라는 의미가 깔려있다. 이것은 합성된 것은 합성된 것이라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합성된 실체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합성은 사유 속에서 지양될 수 있으니, 어떤 합성된 부분도 남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단순한 부분도 없으므로 어떤 단순한 것도 따라서 어떤 것도 결과적으로 어떤 실체도 있을 수 없다.”(논리학 재판, GW21, S. 182)

“다음 사실이 밝혀진다…. 즉 증명으로 제시된 근거는 직접 추론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합성은 단순히 실체의 우연적 관계이며, 이 관계는 실체들에 외적이어서 실체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3)

5)

이제 반정립을 보자. “세계 속에 어떤 합성된 사물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계 속에 어떤 단순한 것도 현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칸트는 정립과 다른 주어를 사용한다. 즉 ‘합성된 사물’이다. 흔히 그렇게 하듯이 ‘사물’을 ‘실체’와 같은 말로 보면, 정립과 같은 주어가 된다. 그런데 이 반정립된 합성된 실체(사물) 가운데 칸트가 초점을 두는 것은 정립에서와 달리 ‘합성체’가 아니라 실체 즉 ‘단순한 것’에 있다.

칸트는 이 반정립 역시 타당한데 그것의 논증은 이러하다.

-실체가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진다면

-모든 실체의 합성은 공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부분들은 각기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떤 공간도 부분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합성된 것을 이루는 부분도 공간을 차지하는 공간은 다시 부분으로 나누어지니, 단순한 것은 합성된 것이 된다. 이는 자기모순이다.

-결론적으로 실체는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칸트가 이 논증에서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단순한 실체가 연속적인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는데, 헤겔은 칸트의 이런 논증 역시 잘못이라 한다. 여기서 이미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전제된다. (칸트는 공간은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단순한 전체라고 본다.),

칸트는 반정립의 논증에서 사물을 공간 속에 집어넣었는데, 이는 곧 사물이 이미 공간적인 것 즉 연속적이어서,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정립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제에 몰래 집어넣은 것을 추론이라면서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가정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의 직접적인 근거로 되었다.”(논리학 재판, GW21, S. 185)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된다. 그러므로 단순한 것을 이런 공간이라는 지반으로 옮겨놓는 것은 근거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지반은 단순한 것이라는 규정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86)

6)

이 논증은 칸트가 공간을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므로 발생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공간 속에서 합성이라는 외면적 관계가 성립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칸트는 물체를 공간 속에 집어넣고 물체의 합성을 공간적 관계로 설정했는데, 이것은 그 자신 공간을 다시 부분으로 합성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헤겔은 칸트의 혼란을 이렇게 지적한다.

“여기서 특히 공간에 대해 연속성이 매우 올바르게 부분의 합성과 대립하여 제시되었다. 반면 논증에서는 실체가 공간 속에 옮겨져 서로에 대해 외적으로 발견되는 관계가 즉 합성된 것이라는 관계가 동반된다고 가정된다. 그런 논증과 달리 공간 속에서 다양성이 발견되는 방식은 명백히 합성과 선행하는 부분들의 합일을 배제해야 한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6)

사실 헤겔에서 물질과 공간은 양적인 것이면서도 서로 대립한다. 물질은 연속적인 것이면서 그 이면이 분리된 것이다. 공간은 분리된 것이면서 그 이면이 연속된 것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물질은 공간에 들어있고 공간은 물질을 수용할 수 있다..

칸트는 정립에서 처음에 주어는 ‘합성체’라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만일 정립의 주어를 ‘실체에 맞추어 보면 즉 단순한 실체라고 본다면, 단순한 실체가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진다( 즉 합성된다)는 말은 모순이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반정립에서 주어의 초점이 단순한 ‘실체(사물)’에 있었는데, 만일 이 초점이 ‘합성체’에 있다고 한다면, 반정립은 합성체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연속체라고 주장하니 그 자체로 모순이다.

결국, 정립과 반정립에서 칸트는 주어를 모호하게 했다. 정립의 주어는 ‘합성된 실체’고 반정립에서는 ‘합성된 사물’이다. (사물과 실체를 같은 것으로 보더라도)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각기 그 의미가 달리 해석된다. 칸트는 정립과 반정립 자체에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면서 논증했으니, 철저한 논증이라 할 수 없다.

7)

헤겔의 입장은 ‘이율 배반이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아니다. 모호한 주어를 명확하게 하더라도, 정립과 반정립은 동어반복이든 아니면 자기모순이니 두 가지 주장이 동시에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헤겔은 칸트의 주장을 통해 대립하는 것의 통일, 모순이라는 그의 변증법적 원리를 확인할 뿐이다.

헤겔의 비판은 칸트의 의도를 비판하는 데 있다. 칸트는 정립과 반정립을 동시에 긍정하면서 이런 서로 대립된 것이 동시에 긍정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율 배반을 발견했다. 칸트는 그러므로 단순성과 합성된 것, 연속성과 분리라는 범주는 어디까지나 경험적 현상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즉 물 자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이율 배반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은 모든 양적인 것이 지닌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성질이라고 보았으며, 이것이 우리가 양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들 물질, 시간, 공간 등의 본질적 특성이라 하였다.

“연속성 자체 내에 원자의 계기가 있다. 연속성은 단적인 분할의 가능성[즉 무한 분할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분리는 모든 구별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일자는 다른 것과 같은 일자이기 때문이다. …. 각각은 다른 측면을 그 자체에서 가지므로 다른 것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 규정의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니다.”(논리학 재판, GW21, S. 187)

헤겔은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높이 평가한다.

“그는[아리스토텔레스] 무한 가분성을 연속성에 대립해서 무한한 추상적 다를 그 자체에서 또는 가능성에서 연속성 속에 포함시켰다. 현실적인 것은 추상적 다수성에 대립하는 동시에 추상적 연속성에 대립하는 것이니 구체적인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8)

헤겔 형이상학 산책42-제논의 오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2-제논의 오류

1)

양적인 것의 개념은 우리를 항상 혼란에 빠지게 한다. 왜냐하면, 그 양적인 개념은 일자와 원자 그리고 공허라는 개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철학과에 처음 들어와 그리스 철학사를 배울 때,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라는 개념까지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개념에서 ‘존재는 있고 무가 없다’라는 주장이나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이고, 여럿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부동하고 운동이란 없다’는 주장은 의외에도 쉽게 이해됐다. 논리적으로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1년생이었던 당시 상식과 전혀 다른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듣고 황홀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당혹했던 것은 원자론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원자론자가 주장하는 원자라든가 공허라는 개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서 무수한 여럿이 존재하고 부단히 운동하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나 공허를 도입했다는 것까지도 이해됐는데, 이런 것은 논리적으로는 후퇴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황홀감을 느꼈던 필자로서는 현실을 위해 논리를 후퇴시킨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철학자가 논리에 관해 타협한다니, 그것은 아직 어렸던 필자의 가슴에서는 마치 정조를 잃는 듯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 뒤 대학에서 시간 강사가 되어 처음으로 그리스 철학사를 가르치면서 원자론자를 설명할 때마다 무언가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 때문에, 강의하면서도 스스로 의혹에 빠져들었다. 강의의 톤이 떨어지고 왠지 학생들이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나를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뒤 늘 머리에 떠나지 않는 의문이 이것이다. 왜, 우리는 원자론자의 타협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2)

다와 운동의 문제는 그 뒤 필자를 자주 괴롭혔던 문제다. 이 자리에서는 일단 운동에 관한 논의는 제쳐 두자. 여기서는 주로 다의 문제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다의 문제가 다시 필자를 괴롭히게 된 것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언급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에 관한 언급 때문이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동일률을 제시하면서, 하나의 성질이라도 다르면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원리에 따라서 동일한 성질을 지닌 것은 여럿으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하나만이 존재할 뿐이라 했다. 모든 것은 고유한 모나드(일자)며 이 모나드는 서로 성질이 다르므로 이 세상에는 서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원자론자를 계승한다.

칸트가 라이프니츠의 이 주장을 반박하면서 물방울을 예로 들면서 어떤 동일한 것이 시공간에서 차이 때문에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일한 것이 여럿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칸트가 여기서 다루었던 반성 개념은 물론 ‘동일성과 차이’라는 대립 개념만은 아니다. 그는 그 외에도 세 가지 반성 개념을 추가했는데-일치와 모순, 형식과 질료라는 대립 개념이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나머지는 제쳐 놓고 여기서는 동일성과 차이만을 논하자.) 그에게서 핵심은 여럿은 주관적 차이에 불과하고 실상 같은 것이라 존재한다는 주장이 된다. 그는 다시 파르메니데스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시공간이 사물의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공간은 칸트에서는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공간을 칸트처럼 주관의 형식으로 받아들인다면,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가 제시될 것이다. 칸트처럼 하면 시공간은 등질적인 하나의 시공간이어야 하는데, 실제 세상에는 질적으로 차이 있는 다양한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당혹하게 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원자론자과 닮았다. 다만 원자론자가 원자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오직 질적 차이만 존재한다. 칸트는 같은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같은 것은 하나로 합쳐지니 파르메니데스적 입장에 가깝다. 물론 그에게 같은 것은 이미 특정한 어떤 것 즉 물방울이나 나뭇잎인 한에서다. 그들의 이론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와 원자론자라는 두 흐름에 닿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러 물방울이 있고 여러 나뭇잎이 있는데 라이프니츠처럼 하나의 존재를 부정하기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칸트처럼 여럿의 차이를 단순히 주관적 차이로만 여길 수도 없다.

3)

여기서 제논의 역설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논은 역설을 통해 여럿의 존재를 부정하고 파르메니데스의 유일한 하나를 옹호했다. 제논은 일 여럿을 전제로 한다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르지 못한다는 역설이 나온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여럿은 없고 오직 하나만 있다고 했다.

제논의 논증은 많은 관점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논증을 그가 사용한 트로포스(논증의 형식)에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트로포스는 가설이 경험과 배치된다는 데에 있다. 즉 그에게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른다는 경험은 이미 진지로 전제돼 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역설이 하나와 연속성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미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와 연속성만이 존재한다면, 실제로 이 세상에 여럿이 존재한다는 경험 즉 여러 물발울이 존재하고 여러 나뭇잎이 존재한다는 경험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원자론자가 먼저 그런 트로포스를 사용해 여럿의 존재를 주장하지 않았던가?

경험과 배치된다는 것을 트로포스로 삼는다면, 모순된 주장이 동시에 입증되니, 이 트로포스는 증명의 원리가 되지 못한다. 제논이나 원자론자는 동시에 잘못된 증명 원리에 기초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원자론자가 틀렸다면 마찬가지로 제논도 틀렸다.

4)

철학사에서 부딪히는 하나와 여럿의 문제에 관해 당혹한 경험을 했던 필자로서는 헤겔의 제시하는 양적인 것의 개념에서 이런 여럿의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헤겔의 논리학이 가지는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헤겔에게서 양적인 것의 토대는 대자 존재다. 이 대자 존재는 어디까지나 두 개 이상의 일반적 성질이 관계하면서 일정한 지속성을 지니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또는 세계의 종말에 이르러) 개별적 성질이 무차별적으로 존재하면서 명멸할 때는 양적인 것은 없었다.

이 세상에 두 개 이상의 성질이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 이때 대자 존재가 출현한다. 이 대자 존재는 통일된 것이니 하나다. 대자 존재는 통일성 즉 관계를 의미한다. 그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매번 존재하는 관계는 개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 존재는 동시에 개별자다. 대자 존재는 하나이면서 개별자이니, 곧 원자가 된다. 또는 라이프니츠처럼 모나드(단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자 존재가 개별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자 존재가 여럿이라는 말을 함축한다. 개별자가 개별자만 있는 것은 우연일 뿐이다. 개별자는 이미 내적으로 여럿임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남녀가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요즘 혼자지만, 혼자인 것은 우연이고 아이가 여럿인 것은 필연적이다. 그 필연성은 우연 때문에 실현되지 않더라도 혼자인 것이 필연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개별자는 여럿이라는 것은 개별자의 본성에 내재하는 필연성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경우 파르메니데스의 ‘유일한 하나’ 개념을 부정하고 ‘여러 하나’라는 원자론자의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5)

대자 존재 자체는 양적인 것이 아니다. 대자 존재가 다른 대자 존재와 관계하게 되면서 양적인 것이 출현한다. 대자 존재는 서로 동일한 것이니 이것이 서로 관계한다면 연속적이어서 어떤 구분이 없다. 그러나 이런 연속 속에서도 각 대자 존재는 개별자니,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각 대자 존재는 서로 반발한다.

대자 존재가 다른 대자 존재에 대해 이처럼 연속과 반발이라는 이중적 관계, 서로 동일하면서도 다른 개별자라는 이중성 때문에 양적인 것이 출현한다. 양적인 것이 출현하면 동시에 공허가 출현하게 된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 사이의 연속성의 측면을 말한다. 그 이면은 서로의 반발이다. 반면 공허는 대자 존재 사이의 상호 반발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런 공허의 이면이 대자 존재 사이의 연속성이다. 양적인 것과 공허는 항상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결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원자론자가 원자를 상정한 이상, 그것들 사이에 연속성과 반발이라는 관계가 성립할 수밖에 없으니, 원자로부터 양적인 것이 출현하며 그와 동시에 공간이 출현한다. 이렇게 ‘하나(일자)’, ‘원자’, ‘공간’라는 개념은 상호 공속하는 개념이다.

세상에는 파르메니데스처럼 유일한 하나 또는 연속성만 있다고 볼 수도 없고 원자론자 처럼 여러 하나가 있고, 그들에 단절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여럿, 연속성과 단절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헤겔 형이상학 산책41 -양적인 것에 관해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1) -양적인 것에 관해

1)

헤겔 논리학 1부 1권 존재론 1편은 1장은 존재와 무, 생성이라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운동의 형식을 서술한 일반론에 해당한다. 존재론 2장 즉 현존 장은 사물의 질을 다루었고 여기서 현존, 유한성, 무한성이 다루어지고, 존재론 3장에서는 대자 존재를 다루면서 이 대자 존재의 견인과 반발이라는 운동을 설명했다.

2장 마지막 부분에서 헤겔은 양적인 것으로 이행을 소개하면서 마침내 1편을 마치고 2편 크기 또는 양적인 것을 다루기 시작한다. 2편에서 다룰 내용은 양적인 것(1장), 정량(2장), 비례(3장)이니, 판단 형식에서 보면 양적 범주에 속하는 형식들이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식 논리학은 판단 형식을 거론할 때 양적 범주를 먼저 언급하고 질적 범주를 나중에 거론한다. 이것은 칸트가 판단 형식에서 인식의 선험적 범주를 끌어낼 때도 따랐던 원칙이었다. 그런데 헤겔은 질적 범주 다음에 양적 범주를 언급한다.

사실 서구 형이상학에서 가장 핵심적 개념은 이 양의 개념에 있다. 이 양의 개념이 형이상학적으로 전개되면서 서구의 자연과학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자연과학은 양의 현상을 발견하면서 형이상학을 발전시키는 매개가 됐다. 형이상학과 과학 사이에 전개된 논의의 축은 항상 수의 개념과 비례의 개념이었다. 서구 형이상학이 본래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곧 이 양의 개념에 있다.

2)

형식 논리학에서 볼 때 양적인 것은 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성질이다. 양적인 것의 대표는 공간적 크기나 형태인데, 인간은 공간적 크기나 형태를 직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자주 지각에 관한 형태학적인 이론이 제시된다.

그러나 과연 이런 양적인 것이 질적인 것과 동일한 직접 지각 가능한 성질인가? 흄은 양적인 크기의 지각은 감각적 성질의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니, 양적인 것은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때문에 양적인 것이 추상적인 성질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감각적 성질로부터 추상하여 양적인 성질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장 반박이 제기될 수 있다. 감각적 성질은 직접적이니, 그 자체로 진리가 된다.(물론, 이 직접성을 확보하기 위해 감각 너머 원초적 감각을 상정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감각은 직접적인 것으로 본다) 반면, 양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을 추상하는 사유를 통해 형성된 것이니, 과연 이것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워진다.

후설이 양적인 것을 비판한 이후로 이처럼 양적인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관점은 도처에 흩어져 있다. 현대에 와서 아도르노나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가 양적인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철학자가 될 것이다. 양적인 것을 넘어서 원초적 감각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은 오늘날 철학에서 만연한 구호라고 하겠다. 이런 관점은 양적인 것에 기초하는 자연과학을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3)

헤겔은 양적인 것이 감각적 성질처럼 사물에 속한 성질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유의 추상을 통해서 형성되는 관념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감각적 성질조차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려 했는데, 양적인 것이야말로 이런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양적인 것이 어떻게 출현하는지, 헤겔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앞에서 헤겔은 질적 범주를 다루는 마지막에 이르러 대자 존재를 다루었는데, 대자 존재란 철학상 파르메니데스에서 시작하는 일자를 말한다. 일자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내적인 통일성을 지닌 존재로 규정된다. 두 개의 대립하는 성질이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가 지속할 때, 즉 통일성이 유지될 때 대자 존재가 된다.

헤겔은 이런 대자 존재는 일자지만, 파르메니데스처럼 수적으로 하나는 아니고 다수의 개별자일 수밖에 없다고 보며, 그런 점에서 오히려 헤겔의 대자 존재는 데모크리투스적 원자라는 개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런 통일적 관계가 한순간 존재할 때는 개별자기 때문이다.

이런 개별자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데, 그 각각은 우연한 조건에 따라서 출현하므로 그것들의 차이는 우연적 차이일 뿐이며 그 속에 어떤 동일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개별자는 동일한 것이 된다. 헤겔의 대자 존재를 대표하는 예를 들자면 하나하나의 소금 알갱이거나 하나하나의 나뭇잎일 것이다.

나뭇잎과 소금 알갱이들은 서로 동일하면서도 차이를 지닌다. 이런 것들의 관계는 서로 동일한 것들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견인이며 서로 차이를 갖는 점에서는 반발이다. 이를 통해 두 가지 관계가 출현한다. 견인을 통해 본질상로 연속적인 것인 양적인 것이 출현하며 반발을 통해 본질상 차이에 속하는 공간이 출현한다.

마치 원자론자가 원자의 이면에 공허를 상정했듯이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면서도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양적인 것이 없이 공간도 없으며 공간도 없이 양적인 것도 없다. 양적인 것의 이면은 이미 차이며, 공간적인 것의 이면은 이미 양적인 것이다.

4)

그러므로 헤겔은 질은 최초의 직접적 규정성이지만, 양은 “존재(질)에 무차별하게 된 규정성”이며, “대타 존재와 단적으로 합일한 대자 존재”라고 한다. 여기서 대자 존재는 통일성, 일자의 측면이며 대타 존재는 현존, 개별자의 측면이다. 즉 대자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저에서 서로 차이를 지니지만, 대자 존재라는 점에서 본질상 동일한 것을 말한다.

여기까지는 대자 존재에 관한 규정인데, 양적인 것으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규정이 덧붙여진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와 대자 존재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여러 일자의 반발이며 동시에 직접 서로 반발하지 않는 것, 즉 여러 일자의 연속성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173)

이렇게 덧붙여진 규정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 대자 존재 사이에 연속과 차이를 동시에 갖는 관계가 곧 양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양적인 것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대자 존재자가 이제 그의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타자 속에 자기를 긍정적으로 지속하도록 정립되었으므로 대자 존재자는 현존이 이 연속성 옆에서 다시 출현하는 한, 타자 존재다. 대자 존재자의 규정성은 동시에 더 이상 단순한 자기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또는 현존하는 어떤 것의 직접적인 규정성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자기로부터 반발하면서 규정성으로서 자기 관계를 다른 현존 속에서 갖도록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173)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지만, 현존의 경우 타자 존재와 대립해서 존재한다. 유한성은 타자 존재를 그 자체에서 갖는다.(그것이 대타 존재다) 그러나 양적인 것에서 하나의 대자 존재는 다른 대자 존재에 대립하지만, 이 다른 대자 존재도 역시 그 자신과 같은 대자 존재다. 그러므로 대자 존재는 연속적인 것 즉 “타자 속에서 자기를 긍정적으로 지속하는 것” 또는 “자기 관계를 다른 현존 속에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 옆의 대자 존재는 사실 자신과 다른 또 하나의 대자 존재니, 이 타자 존재는 하나의 현존이며, 이 현존성은 “연속성(자기) 옆에서 다시 출현한” 현존이다. 타자 존재와 대자 존재는 이처럼 연속과 차이라는 이중적 관계를 통해 관계하는 것이다.

양적인 것은 아직 정량이 아니다. 정량은 양적인 것이 특정한 규정성을 그 자신에서 지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체적인 양이다. 즉 일정한 단위를 지닌 양이다. 예를 들어 미터, 그램 등과 같은 것이다. 양적인 것 자체는 아직 규정성을 지니지 않은 것이니, 여기서는 연속과 차이라는 관계만이 다루어진다.

양적인 것과 정량의 차이는 질적인 것에 현존과 유한성의 차이에 대응한다. 현존은 질의 명멸하는 질들의 관계라면 유한성은 타자와 관계 속에 있는 어떤 것의 규정을 말하니, 이미 그 자체에서 규정된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양적인 것은 연속과 차이의 직접적 결합만을 말하며, 정량은 특정한 양 즉 그 자체에서 어떤 규정을 지닌 양을 말한다. 말하자면, 유한한 양이라 말할 수 있다.

존재론 1편은 헤겔이 개정하면서 초판과 재판이 너무나 달라서 과연 같은 내용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물론 양자는 비교해 보면, 서로 대응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으니, 그리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존재론 2편에서부터 초판과 재판은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평행해서 나간다. 그런 가운데 설명하는 용어나 구절에서 첨삭이 진행됐으나, 그 내용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론 2편 양적인 것을 설명하는 데서는 주로 재판을 인용하기로 하자.

헤겔 형이상학 산책40-견인력과 반발력의 동일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0-견인력과 반발력의 동일성

1)

견인력과 반발력은 일자들의 관계를 매개하는 힘이다. 이 힘은 대자 존재로서 일자와 그 일자가 관계 맺는 공허를 전제로 한다. 이 힘은 근대 초기 질량을 지닌 물체에 작용하는 힘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견인력은 중력을 통해 이해됐지만, 반발력은 쉽게 찾아내기 힘들었고, 결과적으로 근대 물리학에서 하나의 아포리아가 됐다. 라이프니츠가 활력(에너지) 개념을 제시하고 맥스웰이 에너지 보존 법칙을 수립하면서 견인력과 반발력의 균형이라는 변증법적 테제가 확립됐다. 만일 우주에 하나의 힘만이 존재한다면, 우주에서 운동은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견인력만 있으면 우주는 한 점으로 수축하고 말 것이며, 반발력만 있으면 우주는 무한히 확산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학적으로 이 테제가 과연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우주 전체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계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물리학자가 우주에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를 설정하는 것도 그런 테제를 전제로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일단 헤겔은 대자 존재 즉 내적인 통일성을 지닌 일자라는 개념으로부터 개념적으로 견인력과 반발력의 통일이라는 원리를 끌어내니, 이제 헤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견인력과 반발력의 통일이라는 원리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자.

2)

견인력과 반발력의 통일에 관한 헤겔의 테제는 대자 존재를 다루는 1권 2장 3절의 마지막 C-c 항에서 다루어지며(초판에서는 C-2항), 헤겔은 양자의 통일을 통해 양적인 것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현존을 다루는 2장을 마치고 양을 다루는 3장으로 넘어간다.

C-c 항에서 헤겔은 ‘견인력과 반발력의 관계’(초판에서는 제목이 ‘견인력과 반발력의 균형’이다)에서 양자를 자립적인 힘으로 보는 칸트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칸트는 물체의 침투 불가능성이라는 표상으로부터 반발력을 끌어내고 물체의 연장성(충만성)이라는 표상으로부터 견인력을 끌어냈다.

칸트는 양자를 물체를 이루는 두 표상으로부터 끌어내면서도 양자 사이에 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즉 “견인력이 없이 반발력만으로는 어떤 물체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견인력을 요구했다.”(칸트, 자연과학의 최초근거, 53쪽, 헤겔 논리학에서 재인용) 간단히 말해 반발력은 확산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므로 반발력만 있다면 물체는 확산해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반발력은 견인력을 전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은 반발력을 견인력의 전제로 삼았으나, 견인력을 반발력의 전제로 삼지 않았기에 일방적이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논리로부터 곧바로 견인력도 반발력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끌어냈다. 즉 견인력이 존재하려면 반발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헤겔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일 견인력만 있다면, 견인력은 수축하는 방향을 작용하므로 우주는 하나의 점으로 수축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 자신은 이 두 가지 힘은 서로 타자를 전제하고 타자를 요구하지만, 자립적이고 서로의 관계는 외면적이라 보았다. 그러나 헤겔은 서로 전제하고 요구되는 것들의 관계는 내적이고 각자는 타자를 매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3)

헤겔에서 견인력과 반발력은 이처럼 타자를 매개로 존재하지만, 헤겔은 결국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매개라고 한다.

“견인력은 반발력을 매개로 견인력이 되며, 반발력은 견인력을 매개로 반발력이 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타자를 통한 자기와 매개는 사실상 부정되며 이런 규정의 각자는 자기 자신과 그 자신의 매개가 된다.”(논리학 2판, GW21, S. 164)

여기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매개”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말을 설명하면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을 전제로 하는데, 즉 그 자신이 전제하는 것[타자]에서 다만 자기에 관계한다.”(논리학 2판, GW21, S. 164)

그것은 타자 속에 이미 자기 자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두 가지 규정이 각자 독자적이면서 이처럼 자기를 자기가 전제한다는 것은 각자가 타자를 자기 안에 계기로서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학 2판, GW21, S. 164)

따라서 “자신이 전제하는 것[타자]에서 다만 자기 자신과 관계하게”(논리학 2판, GW21, S. 164) 된다. 즉 타자와 매개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매개하는 것이다.

핵심은 곧 타자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반발력 속에 이미 견인력이 들어 있고, 견인력 속에 반발력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4)

여기서 일자와 다수의 일자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일자가 가능하다면, 다수의 일자도 가능하다. 어떤 일자는 그 자체가 우연적인 대자 존재니, 다른 우연적 대자 존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뭇잎이 대자 존재적인 일자인 한에서는 여러 나뭇잎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다수의 일자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다수가 일자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일 그것이 현존이라면 현존은 다른 현존으로 이행하는 것이지 공허 속에 공존하지 못하므로, 다수 일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일자인 경우에만 다수 일자가 생겨날 수 있다. 만일 다수의 동전이 있다면 이 동전은 단순히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 존재의 산물인 일자이어야 한다.

일자가 견인력에 의해 생겨나고 다수 일자가 반발력의 산물이라면, 일자와 다수 일자가 순환하니, 마찬가지로 견인력과 반발력도 순환한다. 반발력은 견인력을 통해, 견인력은 다시 반발력을 통해 생겨나니 견인력이 타자인 반발력에 의해 매개된다면, 더 나가서 자기 자신인 반발력에 의해 매개된다고 할 수 있다.

“반발력을 통해서 다수의 일자가 일자로서 자기를 드러내고 유지하며, 반발력을 통해서 다수의 일자 자신이 존재한다. 다수 일자가 존재하는 것이 반발력 자체다[반발력을 가능하게 한다]. 반발력은 다른 현존에 대립하는 상대적 현존이 아니라[현존과 현존의 관계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만 자기 자신에 관계한다.” (논리학 2판, GW21, S. 164)

다수의 일자를 정립하는 것이 반발력인데, 다수의 일자가 있어야 반발력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견인력은 반발력을 통해 이 반발력은 견인력을 통해 생겨나니, 견인력은 타자인 반발력에 의해 매개된다고 할 수 있고 더 나가서 자기 자신 즉 견인력 자신에 의해 매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견인력은 자신을 전제해서 다른 일자들의 규정 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한다. … 다수 일자는 관념성[일자라는 것]을 반발력 규정에 대립해서 견인력에 관계해서 비로소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견인력은 전제되고 있고, 다수 일자에서 본래 존재하는 관념성이다. 왜냐하면, 다수 일자는 일자인 한-견인력을 가진 것으로서 표상된 것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므로-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2판, GW21, S. 164)

즉 일자를 정립하는 것은 견인력인데, 일자가 있어야 견인력 자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5)

이제 각자가 타자와 대립한다는 점에서 보면, 각자가 타자를 매개로 하고 또는 자기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어서 타자에 대립하는 것은 곧 자기에 대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타자로 이행하며 그 자체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자신의 타자로 정립하는 것이다.”(논리학 2판, GW21, S. 164)

“여기서 ‘자기를 전제하는 것’(견인력)이 ‘자기를 자기의 부정태로서 정립하는 것이며’ 즉 반발력 즉 ‘그런 것 속에 전제된 것은 전제하는 것 즉 견인력과 동일한 것이다.”(논리학 2판, GW21, S. 164)

이제 헤겔은 견인력은 곧 반발력이 되고 반발력은 곧 견인력으로 되니, 양자는 서로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견인력과 반발력은 서로 불가 분리적이며 서로 동일하다. 이런 견인력과 반발력의 동일성을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일자 자체는 탈자화이며 자기를 타자로서 즉 다수 일자로 정립하며, 다수 일자는 동시에 자체 내로 함몰하여 자기를 타자로서 즉 일자로 정립한다.”(논리학 2판, GW21, S. 164)

그러므로 일자가 있다면(견인력), 동시에 그것과 구분되는 다른 일자도 있게 되며(반발력) 여러 일자가 있다면(반발력) 각 일자가 자기를 일자로 유지한다(견인력).

“다수 현존하는 일자를 견인력하는 것은 그 다수 일자의 관념성이며 일자를 정립한다. 그렇게 일자가 정립하는 가운데 다수 일자는 부정하면서 일자를 산출하는 것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지양하며, 일자를 정립하는 것으로서는 그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해서 반발력이 된다.”(논리학 2판, GW21, S. 164)

“따라서 탈자(반발)과 자신을 일자로 정립하는 것(견인)은 불가 분리적이다.”(논리학 2판, GW21, S. 164)

6)

이상 헤겔에서는 견인력과 반발력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우선 ‘양자를 자립적인 힘으로 가정’하는 칸트의 주장에서 출발하여 ‘각자는 타자를 매개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서 ‘다시 자기 매개를 통해 존재하는 것’으로, 마지막으로는 ‘양자의 동일성으로’ 설명했다. 헤겔의 논리 전개는 일반적으로 견인력과 반발력에 관한 표상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외부적으로 반발력하는 것은 그 물체의 내부에서 견인력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만일 견인력이 없다면 반발력 자체가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단단하지 못하면 외부 충격에 깨어지고 말지 반발력하지는 못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표면의 반발력만을 생각하지 그 내면의 견인력을 보지 못한다. 헤겔은 그 내면의 견인력이 없이는 표면의 반발력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거꾸로 하나의 물체가 외부적으로 다른 물체를 견인력하는 것은 거꾸로 그 물체 내부에서 반발력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주 끌어들이는 힘만을 보지만, 사실 자기 내부에서 반발력이 없다면, 외부의 물체를 끌어들이지도 못한다. 만일 타자를 끌어들이려 한다면,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며 고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견인력과 반발력이 사실 서로 대립하는 것이지만, 양자는 동일하다는 것으로부터 이제 질적인 존재는 자기를 넘어서 양적인 존재로 이행한다. 양적인 존재란 곧 여러 일자가 견인력과 반발력의 이중적 관계 속에서 결합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자들의 관계는 공허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다. 즉 양을 이루는 개념은 두 가지 축에 의존한다. 즉 일자와 공허, 그리고 견인력과 반발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