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33-진무한(眞無限)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33-진무한(眞無限)

1)

앞에서 무한성에 관한 두 가지 개념을 살펴보았다. 즉 악무한(惡無限)과 무한진행이다. 무한진행이 무한을 이행하는 운동 중에서 파악한 것이라면, 악무한은 이런 운동의 끝에 도달하는 결과로서 무한자를 말한다.

이런 악무한과 무한진행은 형식적으로 보면 동일하다. 그것을 판단 형식으로 표현하면, 소위 부정적 무한 판단이다. 즉 “이것은 -p & -q & -r … 등”이다. 여기서 p, q, r… 은 어떤 것의 속성을 표현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런 부정적 무한 판단 형식은 단순한 성질을 가지고도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노랑도 아니며 … 등” 그러나 헤겔에서 악무한과 무한진행은 어디까지나 어떤 것의 속성과 관계해서만 이루어진다. 즉 “소금은 짠맛도 아니고 입방체도 아니고 … 등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성질로 이루어진 무한 판단에서는 어떤 성질이 그 자체에서 자기를 넘어가는 무한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흰색이라는 색깔은 사물 즉 소금에 대해 외적인 성질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성질의 부정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일어난다. 소금이 흰색에서 자색으로 변하더라도, 이런 변화는 소금의 규정과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속성의 경우에서는 다르다. 하나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 그 자체에서 관계한다. 왜나하면, 한 사물에 두 속성은 그 사물에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속성이 하나의 사물에 필연적으로 속하려면 그것은 서로 교차하고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어떤 속성은 이미 그 자체에서 자기의 부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유한한 것으로 규정되고 그 자체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무한성을 지니면서 무한진행과 악무한이 발생한다.

2)

악무한, 무한진행을 넘어서 헤겔은 긍정적 무한성 즉 진무한(眞無限)으로 발전한다. 헤겔은 진 무한의 개념을 무한진행의 개념에서 끌어내고 있다. 무한진행은 사실 이미 유한성과 무한성의 통일이다. 즉 유한성은 이미 자기 부정성을 지니고 있어 자기를 넘어가니 무한성을 내포한다. 거꾸로 무한성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니 자기 관계하는 것 즉 하나의 유한자다.

그러나 무한진행에서 이런 통일은 동시에 유한자와 무한자의 직접적인 대립 속에 들어있다. 유한자는 직접 존재하는 것이며 무한자는 직접 존재하는 것과 구별된 또 하나의 직접 존재하는 것이니 서로 대립한다. 서로 내적으로 통일된 것이 외적으로 서로 대립하므로 여기서 통일과 대립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이 곧 미끄러지는 방식이다. 즉 “어떤 것은 p이었다가 p가 아니게 되며, (-p는 q므로) q이었다고 다시 q가 아니게 되고 (-q는 곧 r이므로) r이었다가 다시 r이 아니게 된다… 등이다.”

헤겔은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이렇게 미끄러지는 방식으로 또는 교체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때 이것을 개념의 외적 실현이라 한다. 무한진행은 통일이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출현하는 것이지만, 이미 이런 무한진행 속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침내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왜곡된 모습을 제치고 자기의 모습을 진정하게 드러내게 되면 그것이 곧 진정한 무한성이 된다.

“무한진행 속에서 처음에 양자 즉 무한자나 유한자는 부정된다. 양자는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를 넘어간다. 두 번째로 양자는 또한 구별된 것으로서 차례로 각자 구별된 것으로 독자적으로 그정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규정을 비교하면서 파악하니, 이 비교 속에서 즉 외적인 비교 속에서 두 가지 고찰방식을 분리한 채로 파악한다. 즉 유한자와 무한자를 양자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이는 동시에 양자를 각자 독자적으로 받아들인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유한자와 무한자의 부정은 무한진행 속에 정립되는 한 단순하며 따라서 서로 분리되어 다만 차례로 뒤따르는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지양은 부분적으로는 다만 외적인 사건이며 계기의 교체로서만 존재하며 부분적으로는 통일로서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3)

그렇다면,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무한진행에서와 달리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헤겔은 무한진행이 ‘계기의 교체’라면 이 진정한 통일성은 ‘자기 완결적 운동’이라고 한다. 헤겔은 자기 완결적 운동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완전한 자기 완결적 운동이다. 즉 출발점이었던 것에 도착하는 운동이다. 출발점이었던 것과 동일한 것이 발생하니, 유한자가 반복된다. 그와 같은 것은 자기 자신과 합일한 것이며 다만 자기를 자기의 피안을 통해서 다시 발견한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양자는 즉 유한자와 무한자는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로 되돌아오는 운동이다. 양자는 다만 자기 내에서 매개로서 존재하며 양자의 긍정은 양자의 부정을 포함하니 부정의 부정이다.”(논리학 재판, GW 21, 135)

“양자는 다만 자기의 대립물과의 매개를 통해서 그러나 본질적으로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의 지양을 매개로 해서 출현한다는 사실이다.”(논리학 재판, GW 21, 135)

형식상으로 보면 이 운동은 유한자가 무한자를 매개로 해서 다시 유한자로 돌아오는 것이다. 사실 무한진행에서도 유한자는 무한자를 매개로 해서 다시 유한자로 돌아오니, 이미 무한진행도 진무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진무한을 이런 무한진행과 구별한다. 무한진행은 진정한 통일이 왜곡된 표현이고 진무한만이 진정한 모습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는 말이다.헤겔은 이 차이를 설명하면서 무한진행이 직선으로 표상할 수 있다면 진무한은 원으로 표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4)

지금까지 미끄러지는 직선 운동이 갑자기 자기로 되돌아오는 원운동으로 전환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다시 처음에 제시했던 무한 판단의 형식을 상기해 보자. 무한 판단 형식은 다음과 같다.

① 부정적 무한 판단: S=-p & -q & -r

② 모순 판단: S=-p & -(-p) = -p & p

③ 긍정적 무한 판단: S가 p or -p라면, S=비x

이 세 가지 무한 판단 가운데 ①이 무한진행을 표현한다면, ②가 곧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으로서 무한성을 의미한다. 소금은 짠 것도 아니고 짠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여기서 ‘짠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는 표현은 헤겔이 말한 자기의 부정(대립물)을 매개로 자기로 돌아온 것이니, 자기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무한 판단 형식이 ①에서 ②로 바뀌는 것은 단순히 형식인 변환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q,r …등’이 ‘-p’로 총괄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한정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적어도 경험을 통해 새로운 발전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사물은 무한히 많은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대립적인 속성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험이다. 전자가 속성의 상이성에 관한 경험이라면 후자는 속성 모순에 관한 경험이다.

사물의 모순에 관한 경험은 정신현상학에서 하나의 인식 범주가 다른 인식 범주로 이행하는 매개가 된다. 그 점에 관해서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에 대한 그 자체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어떤 의식은 이미 하나의 범주를 지니면서 대상을 선험적으로 구성한다. 그런 구성에서 의식은 불가피하게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되는데, 헤겔은 이런 물 자체를 의식에 대한 물 자체라 하였다. 그것은 기존의 인식 범주로는 더 이상 규정되지 않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식에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모순적 경험에 부딪힘으로써 인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여 새로운 인식 범주를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논리학에서 하나의 범주는 마침내 모순적인 경험에 부딪히면서 자기 내로 반성하여 새로운 범주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험의 발전을 통해 인식 범주가 변화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마침내 질적 범주에서 모순에 부딪히면서 새로운 범주로 나가는데, 그 범주가 무엇인가?

“실재성과 관념성의 관계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대립이 파악되는 방식을 보자면 유한자는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무한자는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 21, 137)

“관념성은 무한성의 질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관념성은 본질적으로 생성의 과정이며 따라서 현존으로의 생성과 같은 이행이다.” (논리학 재판, GW 21, 137)

헤겔은 이런 진무한의 판단 형식에 대응하는 범주를 우선 관념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생성 그리고 대자 존재라는 개념으로 전개한다. 그러면 모순의 경험을 통해 마침내 출현한 진 무한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 진 무한을 관념적인 것, 생성, 대자 존재로 규정하는지를 살펴보자. 헤겔이 말하는 대자 존재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개념과 일치하는데, 헤겔이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영에 서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헤겔 형이상학산책32-악 무한과 무한 진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산책32-악 무한과 무한 진행

1)

앞에서 헤겔의 질적 무한성 개념에 관해 설명했다. 그것은 부정 판단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판단 즉 부정적 무한 판단의 형식을 취한다. 헤겔은 부정적 무한 판단의 형식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 번째가 악 무한이고 두 번째가 무한 진행이다. 이 부정적 무한 판단을 극복하여 긍정적 무한 판단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곧 진 무한이다. 우선 부정적 무한 판단의 두 형식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어떤 것[etwas]는 여러 성질을 지닐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어떤 성질은 소금의 일반적 속성이다. 그런 속성은 그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이를 헤겔은 규정[Bestimmung]이라 한다. 이 규정은 그것을 넘어서면 어떤 것 자신이 부정되는 한계[Grenze]가 된다.

그런데 경험이 발전하여 하나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떤 것의 규정은 어떤 것의 고유한 규정이 되지 못하니,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이렇게 그 자체에서 부정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어떤 것은 유한한 존재다. 헤겔은 어떤 규정이 그 자체에서 부정성을 지닌다는 것을 제한성[Schranke]라는 범주로 규정한다.

예를 들어 짠맛은 흔히 소금의 규정으로 여겨지지만, 짠맛을 지닌 소금은 그 자체에서 부정된다. 즉 짠맛을 지니더라도 소금이 아닌 것도 있기 때문이다. 나트륨이 아니면서 짠맛을 내는 대체재를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짠맛은 소금의 고유한 규정이 아니며, 주관적 규정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짠맛으로서 소금은 유한한 존재다.

어떤 것에 여러 속성은 있다. 예를 들어 소금에는 짠맛 외에도 입방체(나트륨 분자의 형태)라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입방체도 짠맛과 마찬가지로 소금의 고유한 속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어떤 것이 지닌 속성 가운데 어느 속성도 고유한 규정이 되지 못한다면 어떤 것은 고유한 규정이 없는 것 즉 질적으로 무한한 존재가 된다. 이 경우 어떤 것의 규정은 하나의 규정에서 다른 규정으로 끊임없이 교체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한적[schranke]인 유한자에 단적으로 대립하여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을 헤겔은 악 무한이라 한다.

“무한한 것은 이성의 개념이며 우리는 이성을 통해 시간적인 것을 넘어서 고양한다고 말할 때와 같이 사람들은 이런 일이 유한한 것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고양하는 것은 그런 유한한 것에 외면적으로 머무르며 그것과 무관하다고 본다.”(논리학 재판, GW21, 125)

이 구절에서 말하듯이 사람들이 말하는 무한자는(헤겔로서는 이것이 악 무한인데) ‘유한한 것에 외면적인 것’, ‘그것과 무관한 것’을 말한다.

2)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악 무한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사한 개념을 구별해 보아야 한다. 가장 뒤섞이기 쉬운 개념이 현존과 짝을 이루었던 ‘타자 존재’라는 개념이다. 현존은 개별적 성질을 지닌 존재이며 이 현존에 대립하는 타자 존재는 개별적 성질이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것이다.

반면 이제 유한자에 대립하는 무한자는 하나의 규정이 다른 규정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말하니 타자 존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타자 존재에서는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로 교체되면서 명멸하는 것이라면, 악 무한은 하나의 규정이 다른 규정으로 교체되면서 명멸하는 것을 말한다.

고유한 규정이 없다는 것은 규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규정이 교차하면서 이렇게도 규정될 수 있고 저렇게도 규정될 수 있다는 말이며 그 어느 규정도 그 어떤 것을 고유하게 규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비본질주의는 사물의 고유한 규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물의 규정은 구조에 따라 달라지며 하나의 사물을 지배하는 구조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조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사물은 이렇게도 규정되고 저렇게도 규정되니, 이런 것이 헤겔이 말한 악 무한의 개념의 예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근은 약일 수도 있고 독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고 그런 약이라 해도 안 되며 독이라 해도 안 된다. 바로 당근과 같은 것이 곧 헤겔의 무한자가 될 것이다. 데리다가 이런 당근과 같은 개념을 차연이라고 규정했는데, 헤겔의 악 무한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차연이 아닐까 한다.

무한자는 고유한 규정이 없는 것일 뿐 사실 이미 여러 규정을 지닌 한에서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 세계 안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든 실재는 고유한 규정을 지니고 있고 고유한 규정이 없는 무한자는 이 실재 세계 속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무한자는 실재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실재가 차안의 현존이라면 무한자는 “모호한, 도달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피안”(논리학 재판, GW21, 127)으로 여긴다. 이렇게 무한자가 실재 세계 밖에 현존한다고 보므로 그것이 곧 악 무한이라 불린다.

3)

그러나 헤겔은 실재 세계 밖에 존재하는 악 무한 개념을 곧바로 부정하고 만다. 왜냐하면, 이미 암시됐듯이 유한자와 무한자는 그렇게 단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어떤 것은 여러 속성이 교차하고 있어서 그 중의 어떤 속성을 고유한 규정으로 삼았을 때 곧바로 이 규정은 그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이런 유한적인 것을 넘어가면 이는 어떤 공허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는 이미 이 규정과 다른 규정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규정 역시 유한성을 드러내면서 자기를 넘어간다.

헤겔은 유한자가 그 자체에서 부정성을 지닌 것이라면 이런 유한자가 실제로 자기를 부정하게 되면, 이런 부정성 뒤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부정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유한성을 넘어가는 것 즉 무한성이다. 이런 무한자는 부정의 부정이니 즉 자기를 긍정하는 것 또는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무한성의 개념에서 처음 밝혀지는 것은 현존은 그 자체 존재를 통해 자신을 유한한 것으로 규정하며 제한을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유한한 것의 본성은 자기를 넘어서 나가는 것이며 그의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고 무한하게 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5)

이처럼 이 이행의 과정을 곧 무한성이라고 할 때, 이 무한성은 유한자의 진정한 그 자체적인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이렇게 유한자가 그 자체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가니 이렇게 넘어가는 것은 낯선 폭력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운동 과정으로서 무한성을 ‘무한 진행’으로서의 무한성이라 한다.

“그러나 유한한 것은 스스로 무한성으로 고양하는 한에서 유한한 것에 이런 일을 가하는 것은 낯선 폭력이 아니며 제한으로서 자기 즉 제한 자체일 뿐만 아니라 당위기도 한 제한으로서 자기에 관계하며 이를 넘어 나가거나 자기 관계하는 것으로서 이 제한을 부정하고 그 제한을 넘어 나가는 것은 그 자신의 본성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5)

어떤 것이 지닌 하나의 규정이 그 자체에서 부정된다는 점에서 그 규정은 헤겔은 제한[schranke]이라 했다. 어떤 것은 스스로 그런 제한을 넘어서므로 이렇게 스스로 넘어선다는 점에서 어떤 것은 그 자체 존재 또는 당위(Sollen)이다. 이 당위는 유한자 내부에 있는 넘어서려는 것을 말한다. 이 당위가 곧 유한자 내부에 있는 무한성이다.

당위는 유한성을 넘어서는 것이며 모든 유한성을 이미 넘어선 것 그 결과가 곧 무한자니 헤겔은 무한자는 ‘수행된 당위’ 또는 ‘자기 내로 반성한 그 자체 존재 또는 당위’(논리학 재판, GW21, 126)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수행된 당위는 다시 자기를 넘어서가야 하는 당위이니 헤겔은 이를 ‘영속적인 당위’(논리학 재판, GW21, 129)라고 말한다.

“무한성 속에서는 만족스럽게도 모든 규정성, 변화, 모든 제한과 더불어 당위 자체도 사라지고 지양된 것으로서 유한성의 무로 정립된다. 그 자체 존재는 유한성의 부정으로서 정립되며 그러므로 부정의 부정으로서 자체 내 긍정적으로 된다. 그러나 이 긍정은 질적으로 직접 자기 관계하는 것 즉 존재다.”(논리학 재판, GW21, 126)

4)

이제 무한 진행의 구체적 모습을 살펴보자. 우선 무한 진행에서 유한자와 무한자 서로 동전의 이면이다. 유한자는 어떤 것이 자신의 규정을 넘어가는 것을 말하며, 무한자는 이렇게 넘어간 후 다시 새로운 규정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유한자는 무한자에 관계해서만 유한자며, 무한자는 유한자에 관계해서만 무한적이다. 각자는 자기의 타자를 그 자신에서 갖는다. 각자는 자신과 자기의 타자의 통일이다.

“유한자로부터 무한자로 이행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유한자의 규정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유한자는 자기의 그 자체 존재로서 무한자로까지 고양된다는 사실은 쉽게 인정된다. 왜냐하면, 유한자는 사실 존립하는 현존으로서 규정되지만, 동시에 그 자신에서 무적인 거승로서 따라서 자신의 규정에 따라서 자신을 해소하는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반면 무한자는 부정과 한계를 동반하는 것으로 규정되지만, 동시에 또한 그 자체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되니, 이 추상적으로 자기 관계하는 긍정이 무한자의 규정을 이루며 이 규정에 따르면 유한한 현존은 그 규정 속에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8)

유한성과 무한성을 이렇게 이행의 양 측면으로 보면, 양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이미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렇게 통일과 대립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직접 결합하니 이런 결합은 무한히 미끄러지는 운동 즉 무한 진행이라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곧 유한자와 무한자의 상호 전환하는 모습이다.

“각자는 그 자체에서 자신의 규정으로부터 타자를 정립하니 양자는 불가분적이다. 그러나 이런 통일은 양자의 질적 타재성 때문에 은닉되니 이 통일은 내적이며 다만 근저에 놓여 있는 통일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128)

유한자의 이행이 또 하나의 유한자가 되는 것은 사실 내적 필연성이지만, 그 결합이 외면적인 것이므로 마치 외적인 발생으로 보인다. 즉 유한자가 부정되면, 새로이 출현하는 유한자는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된다.

“유한자가 등장하는 것은 무한자에 외적인 발생으로서 나타난다. 새로운 한계 자체는 무한자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미리 발견된다.”(논리학 재판, GW21, 128-9)

이 무한 진행은 유한자 속에서 무한자가 불러내어 지고 무한자 속에서 유한자가 다시 불러내 지는 운동이다. 즉 “영속적으로 반복하는 동일한 교체”(논리학 재판, GW21, 130)다. 이런 무한 진행은 결코 이전의 유한자가 자기로 다시 복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한자에서 어떤 새로운 유한자로 나가는 것이다. 무한히 미끄러지는 운동이기에 헤겔은 이런 무한 진행은 “넘어감 자체를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논리학 재판, GW21, 129)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무한자는 아직 진정한 무한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무한자는 악 무한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한자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무한자이기 때문이다.

“유한자는 그 부정에서 다시 그 부정의 타자로서 출현하니 왜냐하면 무한자는 다만 자신의 타자인 유한자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 진행은 다만 자기를 단조롭게 반복하며 유한자와 무한자의 동일하게 일어나는 지루한 교체다.”(논리학 재판, GW21, 129)

“공허한 불안 속에서 한계를 넘어서 무한성에 이르고 이런 무한자 속에서 새로운 한계를 발견하면서 무한성을 고수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한계에 정착하지도 못하는 운동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9)

5)

앞에서 악 무한은 모든 규정이 부정된 다음 고유한 규정은 하나도 없다는 결과를 말한다. 그런 결과는 흔히 실재 세계 너머 피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등장하는 무한성은 유한자가 자기를 넘어서 새로운 규정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하며, 그것은 유한자 내부에 있는 무한성이며, 이런 이행의 운동 과정으로서 무한성이다.

무한 진행과 악 무한도 서로의 이면이다. 무한 진행은 이행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고 악 무한은 이렇게 이행하여 도달하는 최종 결과를 말한다. 다만 어떤 것의 악 무한 즉 어떤 고유한 규정도 없다는 것에 도달하는 것은 모든 규정을 거쳐 나가봐야 하며, 그런 규정은 끝없으므로, 무한 진행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 무한 진행의 끝에 도달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악 무한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31-무한 판단에 대해[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31-무한 판단에 대해

1)

존재론 2장 현존 2절 C 항의 제목은 ‘무한성’이다. 실제로 헤겔의 진정한 무한 개념 즉 ‘대자 존재’는 2장 3절에서 다루어지니, 그 앞의 2절 C 항은 사실 진정한 무한 개념에 이르는 과정에서 등장한 무한 개념을 다룬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은 ‘악 무한’과 ‘무한 진행’이라는 개념이다.

무한성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양적 범주에 속하는 무한성 개념이며, 다른 하나는 질적 범주에 속하는 무한성 개념이다. 전자는 구체적 예를 들자면, ‘무한대’ ‘무한소’와 같은 개념을 다루며, 후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 등을 말한다.¹

주1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수학적 무한성과 역학적 무한성을 구별했는데, 그 가운데 역학적 무한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도록 엄청난 위력을 지닌 자연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솟아오른 절벽이나 엄청난 화산의 폭발과 같은 것이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도 양적인 무한성에 속한다. 칸트에서는 질적 무한성은 선험적 분석론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감각의 정도에서 제한적인 것을 말한다.

칸트는 양적 무한성 개념 다음에 질적 무한성을 다루었으나,² 헤겔은 질적 무한성 개념을 양적 무한성 개념보다 먼저 다루었다는 차이가 있다. 헤겔 논리학 존재론 2장은 질적 범주를 다루므로, 여기서 무한성 개념은 질적 무한성 개념이라 하겠다. ‘악 무한’이니, ‘무한 진행’ 또는 ‘진 무한’ 등의 개념은 모두 질적 무한성 개념과 관련된다.

주2 칸트에서 12 범주, 판단 형식은 먼저 양 범주가 나오고 다음에 질 범주가 나온다. 그러나 헤겔에서 12 판단 형식은 먼저 질 범주가 나오고 양 범주가 나온다. 칸트와 달리 헤겔에서 각 범주는 내적으로 다른 범주로 이행하므로 이런 이행 연관에서 볼 때 양 범주는 질 범주 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2)

헤겔 논리학의 전개 과정이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 또는 12 범주를 바탕에 깔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에 비추어본다면, 여기서 무한성 개념을 통해 다루어지는 것은 소위 질적 범주의 무한 판단 형식이다. 이제 헤겔의 무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이 무한 판단 형식을 사유의 실마리로 삼아서 시작해 보자.

알다시피 형식논리학에서는 무한 판단 형식이란 독자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무한 판단은 부정의 부정이니, 긍정 판단과 같다. 형식논리학의 가장 기본적 법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중 부정의 법칙 즉 ‘-(-p)=p’이다. 형식논리학에서 무한 판단 형식을 굳이 따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칸트는 선험 논리학의 차원에서 무한 판단 형식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보면서 이를 독자적 판단 형식으로 격상했다. 칸트는 질적 범주는 그 의미가 시간의 내용과 관련된다고 보면서, 질적 무한성의 판단 형식 또는 무한성 범주는 ‘제한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참고로 질적 범주에서 긍정 판단 형식은 실재성을, 부정 판단 형식은 부정성을 의미한다.

칸트가 무한 판단 형식을 독자적인 것으로 승인했을 때, 여기에는 무한 판단 형식에 관한 칸트 나름의 고유한 생각이 들어 있다. 보통 무한 판단 형식은 긍정적 무한 판단 형식과 부정적 무한 판단 형식으로 구분된다. 부정적 무한 판단은 계사는 부정이고 여기서 그 유에 속하는 모든 술어가 부정된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빨갛지 않고, 파랗지도 않으며, 노랗지도 않다 등”이다. 긍정적 무한 판단은 계사가 긍정이며, 여기서 술어는 그 유에 속하는 모든 술어 전체를 부정하는 술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것은 불멸적 존재다”와 같다.³

주3 부정적 무한 판단은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다. ‘이것은 P가 아니며, -P인 것도 아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빨갛지 않고 빨갛지 않은 것도 아니다”와 같은 판단이다. 이 식은 긍정 판단과 부정 판단이라는 모순적인 것이 결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식은 부정적 무한 판단과 긍정적 무한 판단의 중간적 형태다. 사실 긍정적 무한 판단과 부정적 무한 판단 그리고 모순 판단은 차이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만 다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판단 형식으로 집어넣은 것은 긍정적 무한 판단의 형식이다. 그런데 긍정적 무한 판단에 관한 위의 예에서 술어 ‘불멸적 존재’란 ‘어떤 가사적 존재도 아닌 것’인데, 형식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런 ‘불멸적 존재’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것에 도달하려면 모든 가사적 존재를 부정해야 하므로 그런 불멸적 존재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불멸적 존재가 어떤 구체적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한자를 지시하는 술어가 되는데, 무한자는 경험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므로 시간적 내용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칸트가 무한 판단 형식을 12 범주에 집어넣은 것은 무한자에 대한 어떤 경험적 단서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서 칸트는 그 무한적 술어가 적용되는 경험적 단서 즉 시간적 내용을 ‘제한성’이라고 했는데, 긍정 판단 형식의 의미인 ‘실재성’도 아니고 부정 판단 형식의 의미인 ‘부정성’도 아닌 제한성이란 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칸트는 선험적 분석론에서 지성 개념의 도식성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각은 각기 도나 양을 자기며 이것에 의해서 감각은 동일한 시간을 즉 한 대상의 동일한 표상에 관한 내감을, 감각이 없음-영 또는 부정-에 이르러 끝날 때까지 다소간에 메꿀 수 있다.”(칸트, 순수이성 비판, 최재희 역, 박영사, 1972, 170쪽)

이어서 칸트는 지성 개념의 원칙을 다루는 가운데 ‘지각의 예료’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적 직관에서 감각에 대응하는 것이 실재성이요, 실재성의 결여에 대응하는 것이 부정성 즉 영이다. 모든 감각은 줄어들 수 있고 따라서 감각을 없애서 점차로 소멸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에서는 실재성과 부정성 사이에 많은 가능적인 중간적 감각들의 연속적 연관이 있다.”(칸트, 순수이성 비판, 최재희 역, 박영사, 1972, 185쪽)

여기서 말하는 ‘중간적 감각들’이 말하자면 감각의 내포량에서 제한적인 것과 관련된다. 무한 판단 형식은 이런 시간적으로 주어지는 중간적 감각 내용에 상응하는 판단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무한 판단 형식에 관한 칸트의 설명은 감각의 정도 즉 내포량과 관련되는데, 내포량의 제한성이 왜 무한성의 범주와 관련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짐작하건대 제한성은 긍정성과 부정성의 가운데 있으며, 그런 한 긍정과 부정의 결합이다. 앞에서 주3에서 설명했듯이 무한 판단은 긍정적 무한 판단이든 부정적 무한 판단이든 모순 판단으로 환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제한성을 무한 판단의 의미로 본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한성은 내포량의 측면을 말한다. 그런데 질적 판단 범주에서 내포량을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나중에 보듯 헤겔은 외연량과 내포량이라는 개념을 양적 범주와 관련해서 다룬다.

4)

헤겔 역시 논리학에서 무한 판단 형식을 끌어들여 독자적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칸트가 그러했듯이 무한 판단 형식이 독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 역시 무한성 개념을 ‘제한성’에서 끌어냈다는 것이다. 물론 헤겔은 제한성을 감각의 정도 즉 내포량의 정도로 파악하지 않는다. 제한성 개념은 앞에서 설명했는데, 기억을 위해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이미 앞에서 유한성의 범주를 다룰 때, 규정성[Bestimmtheit]과 규정[Bestimmung]을 구분하였다. 규정성이 감각적 성질과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규정은 일반적인 속성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인식적 경험이 일반적 속성을 발견하기에 이름에 따라서 논리적 범주도 규정성에서 규정으로 발전했다.

어떤 것은 일반적 규정을 지니지만, 동시에 외적이 여러 규정성을 지닌다. 이 규정성은 어떤 것에 대해 무차별한 외적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소금에서 짠맛이 규정이라면, 흰색은 무차별한 규정성이며, 이런 규정성은 외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다. 소금은 흰색이기도 하며, 보라색이기도 한데, 여하튼 짠맛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것에서 우리의 경험이 더 발전하면 어떤 것에서 여러 속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다양한 속성들은 한편으로 독립적인 성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물의 속성인 한에서 동일한 어떤 사물에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즉 시공간적으로 공존한다는 말이 아니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동시에 있어야 한다. 이를 비유적으로 교차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5)

어떤 사물에 대해 이렇게 교차하는 속성들이 발견될 때 이런 인식적 경험을 기초로 해서 어떤 속성은 ‘그 자체에서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속성은 다른 속성이 있으므로 해서 더는 어떤 사물의 고유한 규정 즉 그 자체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규정 즉 속성이 다른 규정에 대립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에서 자기를 부정하는데, 이 규정이 부정된다는 점에서는 제한성이다. 그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당위다. 그 사물의 당위는 제한을 넘어선다. 예를 들어 소금의 속성인 짠맛은 소금의 다른 속성인 입방체와 대립한다. 그런 점에서 짠맛은 제한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런 제한성을 스스로 넘어선다는 점에서 짠맛은 동시에 당위다.

여기서 보듯 헤겔은 제한성을 칸트에게서처럼 감각의 정도와 관련시키지 않고 어떤 속성이 지닌 제한성과 관련시킨다. 즉 어떤 속성이 그 자체에서 자기를 부정한다는 측면 때문에 그것은 제한적인 것이다.

그 자체에서 자기를 부정하면, 외적인 부정에서처럼 그것 외 다른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금의 ‘짠맛’을 그 자체에서 부정하면, ‘수3’이 되거나 ‘코끼리’가 되거나 ‘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짠맛’과 다른 속성 즉 ‘입방체’가 된다. 즉 그 부정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일어나는 부정이며, 그러므로 그 부정은 ‘특정한 부정[bestimmte Negation]’이다.

이러한 그 자체에서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외부에서 부정된다는 것과 구분된다. 소금이 ‘흰색’이었다고 ‘보라색’으로 바뀌면, 즉 규정성이 변화하면(양상 변화) 이는 외적인 양태에서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는 소금의 ‘흰색’이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부정은 아니며, 외적인 방식으로 일어나게 된 부정이다.

6)

어떤 속성 즉 규정이 제한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당위와의 관계는 앞에서 설명했다. 어떤 것이 제한적이므로 그 자체에서 부정이 일어나면서 부정 판단 형식이 출현한다. 그런데 이런 하나의 속성은 다른 많은 속성과 교차하고 있으므로 이런 자기 부정성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헤겔은 이런 계속되는 부정성을 통해 무한 판단 형식이 출현한다고 본다.

칸트에서 무한 판단 형식이 긍정적 무한 판단이었다면 헤겔에서 무한 판단 형식은 일단 부정적 형식을 취한다. 구체적 예를 들면 “소금은 짠맛도 아니고, 입방체도 아니며, 또 …도 아니다 등.

“그러나 무한한 것은 단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서 규정되며, 따라서 무한한 것 속에서는 명백하게 제한성과의 관계는 제거되고 그런 제한성은 무한한 것에서는 부정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4쪽)

그러나 이런 무한 판단 형식은 사실 부정 판단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반복되는 것일 뿐 제한성의 수준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런 무한성을 악무한이라고 하며, 이런 악무한의 단계를 다시 벗어나게 될 때 진정한 무한 개념이 출현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제한성의 부정을 통해서 무한한 것은 사실상 이미 제한성과 유한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요한 것은 무한성의 진정한 개념은 악무한으로부터 구별되며, 이성의 무한한 것은 지성의 무한한 것과 구별하는 것이다. 후자는 유한화된 무한한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124쪽)

헤겔 형이상학 산책30-당위와 제한, 세계의 유한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9-당위와 한정성

1)

앞에서 내재 존재와 한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어떤 것의 속성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내재 존재다. 그러나 그 속성은 동시에 어떤 것을 어떤 것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한계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짠맛은 소금을 소금으로 만들며, 짠맛이 없으면 소금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의 경험이 또 발전한다. 우리는 소금이 짠맛만이 아니라 소독제라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소금은 짠맛을 지닌 것으로만 알았으나 경험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소금이 짠맛이 아니더라도 소금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짠맛은 소금에 공통적인 필연성 즉 속성이지만, 소금을 소금으로 만드는 진정한 고유성은 아니다. 짠맛을 소금의 내재 존재인 동시에 한계로 보았던 판단은 이제 자기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통해 새로운 판단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당위와 제한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통해 규정되는 판단이다.

내재 존재와 한계라는 범주나 당위와 제한이라는 범주는 동일한 속성(예를 들어 소금의 짠맛)을 규정하는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이다. 다만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범주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어떤 것의 속성이 아직 하나만 드러나서, 그것이 곧 어떤 것의 고유성으로 여겨지면, 여기서 한계나 내재 존재라는 범주가 사용된다. 그런데 어떤 것의 속성이 여러 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속성 사이의 관계 때문에 새로운 범주 즉 당위와 제한이라는 범주가 사용된다.

2)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하자. 소금은 그 속성으로 짠맛만 지니는 줄 알았는데, 입방체¹라는 속성까지도 지닌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자. 양자가 서로 무차별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소금에 동시에 존재한다.

주1 입방체는 소금의 분자 결합체(Nacl)의 구조를 말한다.

여기서 짠맛과 흰색의 관계와 짠맛과 입방체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짠맛은 흰색이 아니지만, 흰색과 짠맛은 서로 무차별하다. 소금에서 흰색은 우연적 성질이기 때문이다. 짠 소금에서 흰색은 보라색으로 변하더라도, 그 변화는 소금과 무관하다.

반면 소금에서 짠맛과 입방체는 둘 다 소금에 내재하는 속성이니 짠맛과 입방체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관계가 짠맛과 입방체의 관계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양자를 반성적으로 관계하게 한다. 소금에 속하는 두 속성 짠맛과 입방체는 서로 대립하는 타자다. 짠맛은 입방체가 아니며 입방체는 짠맛이 아니다.

입방체는 짠맛과 대립하지만, 짠맛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짠맛 그 자체에[an ihm selbst] 존재한다. 그 자체에 존재한다는 것은 내재하면서도 외재적이라는 뜻이다.²

주2 고대에서는 속성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다공성 개념을 끌어들였다. 즉 각자에 구멍이 있어서 다른 것이 그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다공성이라는 개념에는 각자가 공간 속에 따로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제거되지 않았다. 헤겔은 두 속성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통일되는 관계를 ‘그 자체에서[an ihm selbst]’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이 관계는 개념적으로 ‘부정적 통일’로 규정되기도 한다.

속성들 사이에서 내재적 부정, 그 자체에서 부정이라는 이 관계에 관해 헤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규정은 타자 존재를 어떤 것의 그 자체 존재에 속하는 것으로 포함할 것이며, 타자 존재의 외면성은 한편으로는 어떤 것의 고유한 내면에 들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외면적인 것으로서 그 내면성으로부터 구분된 채 머무른다.”(논리학 재판, GW21, 118)

“나아가 [내재적] 타자 존재는 한계로서 부정[외부적 타자존재]의 부정으로서 규정되는 가운데 어떤 것에 내재하는 타자 존재는 두 측면의 관계로서 정립된다. 어떤 것의 자기와의 통일성은 … 자기 자신에 대립하는 관계이니, 다시 말하자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이 자신에 내재하는 한계를 자기 속에서 부정하면서 자신의 한계에 관계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9)

3)

어떤 것은 자신의 한계가 그 자체에서 타자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갈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타자가 이미 자기 안에 침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계는 해체되니 어떤 것은 한계를 넘어가게 된다.

한계는 한계이면서 동시에 내재 존재다. 그러므로 한계가 해체되면 그것은 곧 자기를 부정한다는 말이 되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자기를 넘어선다는 말이 된다. 그런 자기 부정 때문에 이제 한계는 단순한 경계선이 아니라 그것을 몰락하게 하는 것 즉 제한하는 것[Schranke]]임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제한한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 나가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제한한다는 것은 곧 외부의 침투를 막는 울타리를 해체함으로써 더는 그것이 되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그것을 몰락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몰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몰락은 외부에서 어떤 힘이 가해지면서 시작되더라도 이미 자신 속에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기에 몰락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모든 것은 스스로 몰락한다. 즉 모든 존재자는 몰락하는 존재 즉 제한된 존재, 즉 유한한 존재다.

“어떤 것에[an] 있는 한계가 제한이라 불리려면, 어떤 것이 자기 내에서 동시에 자기를 넘어가는 것이어야 하며, 그 자체에서 비존재자로서 한계에 관계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어떤 것의 현존은 그의 한계 옆에 한계와 무차별하게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은 사실 자신의 한계를 다만 넘어갈 뿐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한계가 지양된 존재 즉 한계에 대해 부정적인 그 자체 존재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9)

이 구절에서 “한계가 지양되어 있다”라는 말은 한계 안에 머물러 자기를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계가 사실 그 자신의 내재 존재인 한에서 그 말은 자기를 넘어선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한계는 동시에 내재 존재 즉 어떤 것의 고유성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어떤 것은 자기의 한계를 넘어가는 한, 지금까지 그의 고유성으로 규정된 것은 이제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소금은 짠 것이었으나, 이제 더는 짠맛이 소금의 고유성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관적 고유성을 헤겔은 ‘당위[Sollen]’라 한다. 독일어 ‘Sollen’은 흔히 당위로 번역된다. 그러나 존재자를 논하는 존재론에 갑자기 윤리학적 개념이 튀어나와 혼란스럽다. 독일어 ‘Sollen’은 ‘가정된다’ 또는 ‘흔히 그렇게 여겨진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Sollen’이라는 말은 가정적으로 그렇게 여겨지는 것 또는 요청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적 당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³

주3: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을 보자. “Es soll morgen schneien.” 이 문장은 “내일 눈이 와야 한다”라는 말이 아니고 “내일 눈이 올 것 같다, 또는 내일 눈이 온다고 한다”라는 추측 또는 가정의 뜻이다. 도덕적 당위라고 할 때 그것은 객관적인 법이 아니라 요청된 것, 요구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4)

소금은 짠맛이 아니더라도 소금이 될 수 있으니, 짠맛은 소금의 주관적인 고유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금의 짠맛은 흔히 그렇게 여겨지는 가정이나 주관적 요청일 뿐이다. 그것이 당위라면 이미 그 말 속에 그것은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함축된다. 소금의 짠맛은 동시에 소금은 이미 짠맛이 아니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당위는 이중적 규정이 있다. 하나의 규정으로 보면, 가정은 부정에 대립하는 그 자체 존재하는 규정이다. 다른 규정에서 보면, 가정은 제한성으로서 비존재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과 구분되지만 동시에 그 스스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인 비존재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9)

소금을 예로 들어 볼 때 소금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 즉 짠맛과 ‘구분되지만, 동시에 그 스스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은 소금에서 나름대로 하나의 속성(예를 들어 소독제라는 규정)이다. 그것이 소금의 짠맛 자체에서 이미 존재하는 ‘비존재’다. 이 비존재 때문에 짠맛으로서 소금은 주관적 요청인 당위에 불과하다.

그러고 보면 소금의 짠맛은 여러 가지 논리적 범주가 된다. 그것은 한계이며, 내재 존재고 제한성이며 당위다. 동일한 짠맛이 이처럼 맥락에 따라서 다양한 범주로 서술된다. 동일한 것이 이처럼 서로 다른 논리적 범주로 서술되는 것은 그만큼 경험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짠맛이 소금의 고유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경험을 통해 짠맛이 아니더라도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경험의 과정을 거꾸로 설명한다. 즉 짠맛은 이미 자기 내에 타자성을 포함하므로 소금은 짠맛을 넘어가며, 짠맛은 소금의 요청이나 가정 즉 당위에 불과하니 진정한 고유성은 아니다는 것이다.

5)

어떤 것의 한계가 곧 어떤 것의 제한성이라는 것 즉 어떤 것은 자체 내에서 자기의 부정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부정적인 판단 형식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어떤 질적 긍정 판단 ‘이것은 빨갛다’를 부정하는 판단이 곧 ‘이것은 빨갛지 않다’라는 질적 부정 판단이다. 여기서 부정은 형식논리학에서는 판단 내용에 대해 외면적으로 일어나며, 판단이 현실에 관한 것이라면, 그 부정은 사유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헤겔 논리학에서 질적 부정 판단은 형식논리학에서와 다른 의미다. 헤겔에서 질적 긍정 판단은 ‘이것이 희다’이지만, 질적 부정 판단은 ‘이것은 짜지 않다’이다. 그게 그것처럼 보이지만, 두 판단 사이에는 엄청난 경험의 발전이 전제된다.

‘이것은 짜지 않다’는 판단은 ‘이것은 희다’에서 ‘이것은 짜다’라는 판단으로의 발전이 전제된다. 전자는 우연적 감각적 성질의 판단이며 실재성의 논리적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후자는 사물의 필연적 속성에 관한 판단이다. 더 나가서 ‘이것은 짜지 않’다는 판단은 단순히 사유에서 ‘이것은 짜다’라는 판단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짜지 않다’라는 판단이 나오려면 우리의 경험이 더 발전해서 어떤 것은 짜지 않더라도 어떤 것이 될 수 있으며 즉 짜다와 대립하는 다른 속성이 그것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경험되어야 한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이것은 짜다’라는 판단 그 자체에서 ‘이것은 짜지 않다’라는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이행은 판단 내용인 사태와 대립하는 사유에서 일어나는 부정이 아니며 판단 자체에서 일어나는 부정이다. 판단 형식이 무슨 조화를 부려서 새로운 판단으로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경험을 토대로 그런 이행이 일어난 것이지 단지 사유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사유가 부정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유는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유가 현실에 따라가야 하는 한에서는 경험이 토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런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6)

모든 것은 몰락한다. 우리는 자주 역사가 남긴 앙상한 유해를 보면서 비애에 젖어 그렇게 말한다. 세계가 유한하다고 할 때, 양적인 의미에서 그럴 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모든 존재자가 몰락하고 사라진다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유한한 세계 앞에서 비애에 젖어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 역시 언제가 끝나고 말 것이 아닌가?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가 유한하다는 생각은 일면에서는 옳고 일면에서는 그르다. 세계가 유한한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 우리가 주관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의 고유성을 나름대로 규정해 놓는다. 이런 규정은 사실 주관적이며 그렇기에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계가 유한하다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주관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서 불가피한 결론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세계의 유한성은 영원하다고 한다. 헤겔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유한성은 사물이 지닌 불변적 성질 즉 그 타자 다시 말해 긍정적인 것으로 이행하지 않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유한성은 영원하다.”(논리학 재판, GW21, 117)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세계가 유한하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어떤 것이 한계를 지닌다는 것은 어떤 것은 그 한계적 속성이 아니라 다른 속성도 지닌다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것은 그 한계 넘어 지속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소금은 짠 것이라면 이미 그 속에 소금에는 짠맛과 대립하는 다른 속성이 있다는 말이며, 따라서 소금이 짜지 않더라도 여전히 소금이라는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세계의 유한성 자체자 스스로 소멸하는 규정이라고 말한다.

“유한성의 주장에는 오히려 명백히 그 반대가 출현한다. 유한성[Das Endliche]은 제한된 존재이며 소멸적인 것이다. 유한성은 다만 유한자지, 비소멸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유한성의 규정이나 표현 속에 직접 들어 있다.”(논리학 재판, GW21, 117)

역서 “유한성이 제한된 존재”라는 말은 언뜻 보면 유한한 존재가 한정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유한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한된 것이라는 뜻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9-내재 존재와 한계, 무용지용[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9-내재 존재와 한계, 무용지용

1)

두 가지 이상의 ‘규정성[Bestimmtheit]’이 상호 교차할 때, ‘어떤 것[etwas]’이 나온다. 예를 들어 소금은 희고, 짜며, 입방체다. 여러 규정성 가운데 필연적인 것(일반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개별적인 것)이 구별되니, 필연성이 ‘규정[Bestimmung]’이고 우연성이 ‘양상[Beschaffenheit: 모습]’이다. 소금에서 입방체이거나 짠맛은 규정이며, 흰색은 양상이다.

존재론 2장 현존 장의 2절은 규정과 양상이라는 쌍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관계는 곧 이어서 ‘내재 존재[Insichsein]’와 ‘한계[Grenze]’라는 쌍 개념으로 나간다. 앞에서 헤겔 논리학이 의식 경험의 전진에 따라 평행하게 나간다는 것을 헤겔 논리학 해석의 대강으로 삼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양상과 규정은 서로 무차별하다. 그러므로 규정이 변화함이 없이 양상은 변화할 수 있다. 소금의 성질은 흰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화하더라도 소금의 짠맛과 입방체라는 성질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이 좀 더 발전하게 되면 우리는 규정에 속하는 속성도 사실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¹

주1: 참고로 말하자면, 성질이니 속성이니 하는 용어는 인식론상의 용어다. 규정성이니 규정이니 하는 용어는 논리적 범주 즉 서로 다른 판단형식에 속하는 용어다.

2)

소금의 짠맛을 보자. 소금은 짠맛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면 더는 소금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금의 규정은 짠맛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소금의 규정을 짠맛으로 정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며 또는 일상적인 맥락에서다. 앞에서 소금은 락스로도 쓰인다고 했는데 소금의 규정을 소독제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일단 소금의 규정을 주관적으로 짠맛으로 했을 때 이를 경계로 소금과 소금이 아닌 것이 구별된다.

양상 역시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해 주지만, 이 구별은 외면적인 구별이다. 흰 소금이나 보라색 소금은 서로 다르지만, 소금이라는 사실을 변화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짠맛은 다르다. 짠맛은 어떤 것의 규정에 속하므로, 짠맛이 없으면 소금은 이제 더는 소금이 아니다.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해 주는 것을 헤겔은 한계[Grenze]라 한다.

‘규정’이란 논리적 범주가 ‘한계’라는 논리적 범주가 되면서 서로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똑같은 속성 예를 들어 짠맛이 한편에는 규정으로 다른 한편에는 한계가 된다. 헤겔이 이렇게 같은 것을 지칭하면서 논리적 범주를 달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규정은 양상에 대하여 사용되며 이 경우 하나의 사물 내에서 규정성 사이의 관계가 논의된다. 그러나 이것을 한계라고 할 때는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 사이의 관계가 논의된다. 짠맛은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외적으로 반성하는) 가운데 어떤 것을 구별해 주는 것이다.

3)

헤겔은 양상의 변화를 ‘대타적 존재(우연성, 양상)에 따른 변화’라고 하면서 이것과 구별하여 이 한계를 통한 변화를 ‘어떤 것에 정립된 변화’라고 한다. 이 부정은 “그 자신에 내재적인 것으로 정립되기”(논리학 재판, GW21, 112) 때문이다.

양상에서 어떤 것의 다른 것과의 관계는 무차별하다. 그러나 한계에서 어떤 것의 다른 것에 대한 관계는 자기 자신에서 나오며, 타자 존재는 어떤 것에 자신의 고유한 계기로 정립된다.

“어떤 것은 자기 자신에서 타자에 대해 관계한다. 왜냐하면, 타자 존재는 그 어떤 것에서 그것의 고유한 계기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3)

한계를 넘어서면 어떤 것은 어떤 것이 아니게 되지만, 거꾸로 이 한계가 있기에, 어떤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것은 짜기에 소금이 된다. 이처럼 어떤 것이 한계 안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면 이를 헤겔은 내재 존재[Insichsein]라 한다.

앞에서 ‘규정’과 ‘한계’라는 논리적 범주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는데, ‘한계’와 ‘내재 존재’는 논리적 범주로서 똑같은 필연성 즉 속성을 지칭하지만, 쓰이는 맥락에서 달리 쓰인다. 예를 들어 어떤 소금이 소금이 아닌 어떤 것(예를 들어 설탕)과 구별되면, 그 구별은 짠맛이라는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다른 것(예를 들어 죽염)이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소금이라면 그것은 짠맛이라는 내재 존재 때문이다. 한계라는 범주와 내재 존재라는 범주는 동전의 양면이 된다.

한계는 그것을 넘어서면 어떤 것이 더는 그것이 아니므로, 어떤 것의 부정이 된다. 내재 존재는 그 한계 안에서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부정의 부정’이다.

“ 이제 내재 존재가 타자 존재의 비존재이며, 이 타자 존재는 존재하는 것으로서는 어떤 것과 구별되면서도 이 어떤 것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런 한에서 어떤 것은 부정이며, 그 자체에서 타자를 지양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이 타자에 대해 스스로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113)

4)

한계는 그것을 넘어가면 더는 그것이 아니므로 한계는 어떤 것의 자기 부정성이다. 동시에 이 한계는 그것과 다른 것을 부정하는 타자의 부정성이다. 한계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의 경계선에 있으며 즉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계선에 있다는 것은 그 한계가 어떤 것 안에 있기도 하며 어떤 것 밖에 있다는 뜻이 된다. 어떤 것 밖에 있다는 점에서 한계는 어떤 것의 부정성인데, 어떤 것 안에 있다는 점에서 이 부정성은 어떤 것 내부의 부정성이다.

어떤 것의 부정성이 그것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어떤 것 내부에 있는 부정성은 어떤 것 내부에 자기와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한계는 내 속에 있는 나의 타자다. 내 속에 나의 타자가 있으니 나는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계로부터 자기가 부정되는 운동이 일어난다. 나는 나의 한계 때문에 무너진다.

“또 다른 측면은 어떤 것이 그 속에 내재하는 한계 내에서 어떤 것이 지니는 동요다. 이 동요는 곧 어떤 것을 자기 자신을 넘어서 나가게 만드는 모순이다.”(논리학 재판, GW21, 115)

거꾸로 생각해 보자. 한계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는 다른 것을 배제함으로써 어떤 것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다. 나는 나에게 고유한 한계가 있으므로 나는 다른 것을 물리치고 스스로 존속할 수 있다. 나에게 한계가 없다면 다른 것의 침범에 의해 나는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 자신의 한계가 나를 살린다.

“한계는 본질상 타자의 비존재이므로, 어떤 것은 동시에 그의 한계를 통해 존재한다. … 어떤 것의 존재는 그 한계를 통해 그 어떤 것의 본래 모습으로 되며,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의 질을 갖는다.”(논리학 재판, GW21, 114)

헤겔은 한계와 내재 존재에 관해 흥미로운 예를 제시한다. 즉 점과 선(또는 선과 면)의 관계다. 선의 한계는 점이다. 선은 점에서 중지하며, 선은 점의 안에서 존재한다.(이쪽에서 보면 점의 안에 있다는 것은 반대쪽에서 보면 점 밖에 있다는 것이니, 선은 점 밖에 있다.) 점의 안에서 선이 존재하므로, 점은 선이 시작하는 출발점이며, 이 점에서 선으로 이행한다. 즉 선은 점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점과 선은 사실 양적인 규정이어서 정확한 비유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는 질적인 규정이 문제가 되므로 짠맛과 소금의 관계로 다시 설명하자면, 짠맛은 소금의 한계다. 소금은 짠맛이 있기에 소금이 되지만, 짠맛 때문에 소금은 소금이 아닌 것으로 된다.²

주2: 소금의 짠맛은 특정한 분자결합 때문에 나온다. 분자구조는 같으면서도 분자 사이의 특정한 결합은 언제라도 다른 방식의 결합으로 바뀔 수 있다. 소금이 락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은 그 분자결합 때문이다.

한계가 지닌 이중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는 예를 가지고 말해보자. 어떤 사람의 장점은 그 사람의 본분, 규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가 지닌 이 장점 때문에 몰락한다. 마음이 따뜻한 남자는 대체로 무기력하고 무능하다.

이번에는 거꾸로 보자. 어떤 사람의 한계 즉 단점이 그 사람의 감추어진 능력을 의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장자가 말한 ‘無用之用’이 그런 뜻일 것이다.

“장인(匠人) 석(石)이 돌아왔는데 사(社)의 상수리나무가 꿈속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 또한 나는 쓸 데가 없어지기를 추구해 온 지 오래되었는데, 거의 죽을 뻔했다가 비로소 지금 그것을 얻었으니, 그것이 나의 큰 쓸모이다. 가령 내가 만약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큰 나무가 될 수 있었겠는가?”(장자, 내편, 인간세, 무용지용)


헤겔 형이상학 산책28 -규정과 양상, 소금과 락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8 -규정과 양상, 소금과 락스

1)

논리학 2장 현존 장은 세 절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그리고 양자의 통일성으로 실재성은 그 가운데 1절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들의 핵심에는 감각적 성질이 있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빨간색이나 단맛 등이다.

1절의 내용은 단일한 감각적 성질이 지닌 논리적 범주의 분석이다. 2절에 이르면 새로운 논리적 범주가 등장한다. ‘규정’과 ‘양상’, ‘내재존재’와 ‘한계’, ‘당위’와 ‘제한’ 등의 범주다. 3절에 이르면 질적인 무한성의 범주가 등장한다. 앞에서 1절의 내용을 파악하였으니 이제 2절로 들어가기로 하자.

2절에 이르면 너무나 유사한 범주가 난무하여 그것들을 가려내는 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더구나 1판과 2판의 내용이 상당히 달라 그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다.¹이 미로에 들어가려면 아드리아네의 실꾸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현상학에서 경험적 인식의 발전이다.

주1: 앞에서도 말했듯이 1판에서는 내재 존재와 한계가 먼저, 규정과 양상이 나중에 나온다. 2판에서는 규정과 양상이 먼저, 내재 존재와 한계가 나중에 나온다. 필자가 보기에 2판은 헤겔 자신이 수정한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2판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1절과 2절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1절의 마지막은 ‘실재성’인데, 2절의 출발점은 ‘어떤 것’이다. 그게 그거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결정적 단절, 또는 비약이 있다. ‘실재성’은 단일한 감각적 성질이다. ‘어떤 것’은 앞으로 개별적 사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인데, 그 핵심은 여러 감각적 성질의 교차적 관계에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사용한 예를 끌어들이자면 소금과 같은 것이다. 소금은 짜고, 희며, 입방체다. 소금은 이 세 가지 감각적 성질이 교차하여 이루어진다.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성질의 교차는 지각의 단계에서 출발점이 되니, 논리학에서 1절에서 2절로 나가는 것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에서 지각으로 이행하는 것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실재성에서 어떤 것으로 나가는 데 인식 경험의 발전이 매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구체적 예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 소금에서 짜고, 희며, 입방체라는 감각적 성질은 처음 보면 서로 동등하다. 경험이 발전하면, 여기서 우연성과 필연성이 구분된다. 흰색은 소금의 우연성이지만 짠맛이나 입방체는 소금의 필연성이다. 그러나 인식 경험에 있어서 일단 처음에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소금에서 발견되는 감각적 성질이며, 이것들은 소금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소금은 이 세 가지 성질이 서로 교차하는 것이니, 바로 이처럼 하나의 성질이 아니라 여러 성질이 교차하여 성립하는 것이 어떤 것이다.

아직 이 어떤 것 즉 소금은 감각적 성질이 그 속에서 단순히 공존하는 것인지(그 경우 소금은 그릇과 같은 매체가 될 것이다) 아니면 이 감각적 성질이 서로 부정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개별자로서 소금(이 경우 헤겔은 사물이라 한다)을 이루는 것인지는 판단되지 않았다. 어떤 것에서 처음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 속에 여러 감각적 성질을 발견한다는 사실뿐이다.

이처럼 여러 감각적 성질이 교차하는 어떤 것이 출현하면서, 이제 하나의 판단 형식이 출현한다. 그게 바로 ‘이것은 흰색이고’, ‘이것은 짠맛이며’, ‘이것은 입방체’라는 개별 판단들이다. 이는 질적 판단에 속하며, 긍정 판단에 속한다. 그 이전에 실재성 즉 ‘감각적 성질’은 그저 술어일 뿐이며, 아직 구체적인 판단 형식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술어가 주어에 대해 정립되고, 이를 통해 판단 형식이 출현한다.

이렇게 어떤 것 속에서 아직 서로 동등하게 발견되는 감각적 성질을 논리적 범주로서 ‘규정성[Bestimmtheit]’이라 한다. 규정성은 실재성과 다르지 않지만, 사용되는 맥락에서 다를 뿐이다. 실재성은 어떤 감각적 성질을 하나의 술어로서만 볼 때를 지칭한다. 반면 규정성은 이미 다른 여러 규정과 함께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감각적 성질을 규정성이라 한 것이다.

하나의 규정성은 혼자 있는 법이 없다. 여러 규정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공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규정성[Bestimmtheit]은 다른 규정성 때문에 규정된[bestimmt] 것이다. 즉 흰색은 짠맛이 아니며 입방체가 아니다.

굳이 규정성을 타자에 비추어서 보지 않고, 추상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실재성이라는 범주에 해당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재성 역시 부정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실재성은 이미 어떤 개념 틀 안에서 다른 것에 대립하는 부정성이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색깔의 틀 내에서 파란색이 아니다. 그러나 규정성은 이런 개념 틀 밖에서 다른 규정성과 대립하는 부정성을 갖는다. 여기서는 어떤 것을 전제로 한다. 그 어떤 것이 지닌 다른 성질에 비추어 그런 성질이 아닌 것이 규정성이다.

앞에서 현존[질]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이 대타 존재는 다른 감각적 질과의 차이를 의미한다고 했다. 즉 빨간색은 단맛과 다르며, 둥근 것과 다르다. 그러면 규정성은 질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여기서 차이가 있다. 규정성이라고 할 때는 어떤 것 안에서 다른 규정성과 구별된 것을 말한다. 즉 소금에서 흰색은 짠맛이나 입방체와 구별되는 것이다. 반면 현존[질]에서 대타 존재는 어떤 것이 아직 출현하기 이전 상태이므로 모든 다른 성질과 구별되는 성질이라는 의미이다.

3)

‘질(대타 존재)’, ‘실재성’, ‘규정성’은 모두 동일한 감각적 성질을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다. 이런 맥락의 차이를 헤겔은 몰라도 우리 일반 사람은 구별하기 힘들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유사한 개념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규정성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즉 규정[Bestimmung]과 양상[Beschaffenheit]이다.

규정성[Bestimmtheit]나 규정[Bestimmung]은 용어 자체가 비슷하니 헷갈리기에 십상이다. 규정성에는 수동성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리고 규정은 일상적으로 어떤 것의 본질, 본분, 사명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차이가 짐작될 것이다. “철학자로서 나의 사명, 본분은?” 할 때는 ‘규정성’이 아니라 ‘규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식론에서는 규정 대신에 속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같은 것을 지칭하지만, 전자는 논리적 범주고 후자는 인식론적 개념이라는 차이가 있다.

양상[Beschaffenheit]은 어떤 모습을 지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라틴어로는 ‘modus’, 즉 언어에서 형용사나 부사 등에 해당하는 용어가 지닌 의미를 말한다. 보통 ‘양태’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우리 말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모습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딱 좋은데, 왠지 어감이 안 맞는다. 양태라는 말보다 양상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도 많이 쓰므로 앞으로 양상이라는 말로 번역하겠다.

경험이 발전하게 되면 이렇게 서로 교차하는 감각적 성질 가운데 우연성과 필연성이 구분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금에 있어서 짠맛은 필연성이고 흰색은 우연성이다. 어떤 것이 지닌 필연성은 어떤 것의 규정이 되며, 반면 우연성은 그것의 양상이 된다. 이렇게 구분해 보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는 구분이다.

규정과 양상이라는 논리적 범주는 어떤 것 속에서 여러 규정성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처음에 그것들 사이에 자격의 차이가 없으면 모두 다 똑같은 규정성인데, 어떤 것과 관련되는 자격에서 필연성과 우연성의 차이가 나타나면, 그 차이를 고려하여 어떤 규정성은 규정이 되고 어떤 규정성은 양상이 된다. 그러면 헤겔은 규정과 양상이라는 논리적 범주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보도록 하자.

“질이 단순한 어떤 것[etwas]에서 그 자체적인 것을 그 본질에서 어떤 것의 다른 계기인 ‘그 자신의 표면에 존재하는 것[an ihm sein]’과 합일하는 것일 때, 이러한 질은 그 어떤 것의 규정이라 불릴 수 있다.”(논리학 2판, GW21, 110)

“규정은 그 자체적 존재로서 긍정적인 규정성을 말한다. 이때 어떤 것은 현존하는 가운데 타자 즉 자기를 규정하게 될 타자와 뒤얽혀 있는 것에 대립하여 그 자체 존재에 적합하게 머무르며, 자기를 자기와의 동일성 속에서 유지하며, 이 동일성을 자신의 대타 존재 속에서 성립하도록 만든다.”(논리학 2판, GW21, 110-111)

“어떤 것은 외적 영향을 받아서 외적 관계에 사로잡히면 이런저런 양상[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외적인 관계에 양상이 의존하고 있으며,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은 어떤 우연한 것으로 나타난다. 어떤 것의 질은 이 외면성에 희생되면서 양상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논리학 2판, GW21, 111)

위의 구절에서 어떤 것이 가진 규정성 가운데 어떤 것의 자기 동일성, 또는 그 자체 존재에 속하는 것이 규정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즉 예를 들어 소금이라면 모두 지닌 일반성 즉 짠맛이 소금의 규정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소금이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소금의 본분, 사명이 곧 짠맛이라는 말이다.

반면 이 어떤 것에는 또 다른 규정성이 있는데, 그것은 이 어떤 것의 표면에[an ihm sein] 존재하는 것이다. 독일어 전치사 ‘an’은 어떤 것의 표면을 말한다. 표면에 있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이니 곧 그것이 지닌 양상이다. 표면에 있는 것은 다른 것과 부딪히면서 다른 것과 관계하여 구별되는 것이니 곧 대타 존재다.

이 대타 존재는 외면적인 것이기에 외적인 영향 아래서 늘 변화하는 것이니 우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상은 예를 들어 소금에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소금에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 않기도 하는 성질을 말한다.

4)

사실 필연성과 우연성 즉 규정과 양상의 구별은 상대적이다. 규정이든 양상이든 독자적으로 보면 감각적 성질로서 한편으로는 그 자체 존재와 다른 한편에는 대타 존재를 가지고 있다. 즉 일반성이면서 다른 성질과 구별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든 규정이 될 수도 있고, 양상이 될 수도 있다. 그 점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와 같이 타자를 자기 내에서 포괄하는 규정성은 그 자체 존재와 통합되면서, 타자 존재를 그 자체 존재 또는 규정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를 통해 규정은 양상으로 격하된다. 거꾸로 양상으로서 대타 존재는 고립되고 독자적으로 정립된다면, 타자 자체이며 그 자신에서 타자이며 자기 자신의 타자인 것으로 그 자체에서 된다. 그 결과 대타 존재는 자기 관계하는 현존이며 어떤 규정성을 지닌 그 자체 존재 즉 규정이다.”(논리학 2판, GW21, 112)

그러나 이는 가능성일 뿐이며 실제로 어떤 규정성이 규정이 되는가 아니면 양상이 되는가는 비교하는 맥락에 달려 있다. 앞에서 소금을 보자. 소금은 요리라는 관계에서는 소금의 일반성은 짠맛이다. 짠맛을 내는 소금 대체재 역시 짠맛 때문에 흔히 소금이라 한다. 이런 경우 짠맛은 소금의 규정이며, 소금의 성분은 우연적이다.

그러나 다른 관계에서 보자. 필자는 언젠가 소독제로 쓰는 락스의 성분이 소금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소독제라는 관계에서 본다면 소금의 짠맛은 우연적일 뿐이다. 락스를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짜지는 않을 거다. 소금 말고도 유사한 성분이 락스 재료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은 어떤 관계에서(주로 실용적 관계에서 그리고 주관적으로) 규정되는데 이 경우 개연적인 정도의 필연성이면 충분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런 필연성은 우연성에 속한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규정과 양상은 그 비교의 관계에 따라 서로 전복되는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 규정은 다른 관계에서 양상이 되고 어떤 관계에서 양상은 다른 관계에서는 규정이 된다.

“단순한 중심은 규정성 자체다. 규정이나 양상은 공통으로 그 중심의 동일성에 속한다. 그러나 규정은 독자적으로 양상으로 이행하고 양상 역시 규정으로 이행한다.”(논리학 2판, GW21, 112)

헤겔 형이상학 산책27-실재성과 반성적 사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실재성과 반성적 사유

1)

앞에서 헤겔의 논리학 현존 장의 전개가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에서 지각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평행한다고 말했다. 현존 일반은 질로 규정되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감각적 규정을 말한다. 이 감각적 규정은 존재하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타자 존재이기에 여기에 명멸하는 세계가 출현한다.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의 결론은 감각적 규정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각 장의 출발점이 되는 감각적 성질이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헤겔은 감각적 규정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이중성을 지닌 것으로 발전하는데, 헤겔은 이것을 실재성이라고 규정한다.(1 절은 현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실재성이라는 순서로 전개된다) 이 실재성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성질에 대응한다.

그런데 헤겔은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초판에서는 사용하지만, 재판에서는 제거해 버렸다. 재판에서는 규정성([Bestimmtheit] 뒤에 나올 규정[Bestimmung]과 구별된 의미를 지닌다)이라는 범주로 대체되다. 초판과 재판의 차이점 가운데 용어만 가지고 본다면,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¹

주1: 질이라는 표현도 차이가 있는데, 초판에서는 목차만 보더라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재판에서는 1절 감각 규정에 한정해 사용한다.

왜, 재판에서 헤겔은 이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지워버렸을까? 실재성은 긍정성을 의미하며, 이는 부정성에 대립한다. 실재성 즉 긍정성과 부정성은 반성 개념에 속하며, 이는 반성 규정을 다루는 본질론에서 다시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초판에서는 이런 점을 헤겔이 스스로 간과하고 앞에서 다루었던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통일성으로서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이용했는데, 재판에서 이를 깨닫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실재성이라는 표현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석에서 이미 실재성에 관해 많은 설명을 했는데, 재판에서도 이걸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은 이런 점에서 독자를 의아하게 한다. 왜 현존을 다루는 주석에서 실재성에 관하여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말이다. 사실은 초판에서 실재성 범주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헤겔이 초판에서 규정성 대신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하고 재판에서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것은 흔히 철학에서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헤겔은 이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소개한 다음 상당히 긴 주석을 달아 철학사에서 실재성이 다루어지는 맥락을 소개한다. 이 맥락은 헤겔 철학과 여타 철학과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므로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2)

우선 헤겔이 실재성을 어떻게 규정했는가 보자.

“현존은 오직 그 자신을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로 규정하는 한에서 또한 현존의 계기를 이루는 두 존재의 통일인 한에서 현존이다. 반성적 현존이라는 점에서 현존은 실재성이 된다.”(논리학, 1판, GW12, 63)

감각적 성질 예를 들어서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대타 존재를 지닌다. 이 빨간색은 사과, 양귀비 등에 공통된 성질이므로, 그 점에서 그 자체 존재다. 그런데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므로, ‘파란색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규정되면, 이것이 곧 실재성이다.

‘파란색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의 반성 관계를 전제로 한다. 즉 빨간색은 자신의 타자를 통해서 또는 자신의 타자에 비추어서 규정된 것이다. 그 때문에 헤겔은 이를 ‘반성적 현존’이라고 말한다.

실재성 개념에 반성 관계가 전제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부정성은 실재성에 직접 대립한다. 반성 규정의 본래 영역에서 부정성은 긍정적인 것에 대립한다.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부딪혀[AUC] 반성한 실재성이다. 이 실재성에서 부정적인 것이 비추어지지만[scheint], 이 부정적인 것은 실재성 속에서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논리학, 2판, GW21, 101)

이 구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실재성이 자신의 타자인 부정성에 대해 반성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사실이 언급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런데 앞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타 존재를 통해 타자와 구별되었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며, 단맛이나 3도 음과 같은 다른 모든 감각적 성질과도 구별된다. 그런데 실재성에 이르게 되면,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는 데로 한정된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감각적 성질의 그 자체 존재 즉 일반성인데, 빨간색이 사과, 양귀비 등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면서 동시에 빨간색은 파란색과 대립하는 차원에서 한정되어서 논의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빨간색은 파란색과 대립되는 한에서 실재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빨간색이 파란색과 대립하는 것이기에 이 빨간색은 감각적으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으로 된다. 즉 구체적으로 본다면 개별자가 지닌 불그스레 한 색, 짙붉은 색, 연분홍 색 등이 모두 파란색과 대립하면서 빨간색으로 포괄되는 것이다.

3)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은 철학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철학자 가운데 대표적으로 들뢰즈와 아도르노는 이런 주장을 반대한다. 실재하는 세계의 어디에도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디에서 부정성은 없으며, 어떤 것의 부정성은 다만 우리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자주 우리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부정성으로 즉 결여태로 파악한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의 결여태며, 여자는 남자의 결여태다. 등등.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왼손잡이는 그 나름대로 긍정적인 실재이며, 여자 역시 그 나름대로 긍정적 실재가 아닌가? 왼손잡이나 여자를 결여태로 보는 것은 사유가 개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결여태라는 개념은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대표적으로 스피노자는 실재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하려 했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즉 “Ommnis determination est negation”(모든 규정성은 부정성이다) 헤겔도 마찬가지로 실재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 구조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빨간색은 항상 다른 색깔들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순수하게 빨간색만을 알 수는 없다. 빨간색은 무지개색의 구조나나 삼원색의 구조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빨간색은 이미 그것과 구조 속에 있는 다른 색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조적 연관은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다. 주관적 구조와 객관적 구조를 가려내는 일은 논리학에서나 인식론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을 다루는 것은 나중에 반성 규정을 다루는 본질론에서 등장하니, 뒤로 미루기로 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실재성은 이처럼 구조적 연관 속에서 다른 실재성을 부정하는 부정성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4)

스피노자나 헤겔처럼 실재성을 이처럼 부정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와 연관된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하나 즉 일자라고 말했다. 즉 데카르트에서처럼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유 실체나 연장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실재성이라고 본다면, 세계는 “자체 내 아무 모순을 포함하지 않으며 하나의 실재는 다른 실재를 지양하지 않는” 세계가 된다. 여기서 사유나 연장도 각기 하나의 실재성이니, 독립적 실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성이 곧 부정성이라면, 실재성의 총합인 신은 위와 같은 무차별한 실재성의 세계가 아니다. 여기서는 실재성의 총합은 서로 대립하는 것의 통일이므로, 더는 규정성이 없는 무규정적 일자가 된다. 그러니 사유와 연장의 통일체로서 실체는 사유도 아니고 연장도 아닌 일자인 것이다.

실재성에 관한 주석을 끝내면서 헤겔은 독일어 ‘(in)Qualierung’이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사실 사전에 이 표현은 없고, ‘quaelen’이라는 표현은 있는데, 그 뜻은 ‘고통을 가하다’라는 뜻이다. 헤겔은 신비주의 철학자 야콥 뵈메가 이 표현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질[qualitaet]의 운동’을 의미한다고 한다.

헤겔에 따르면 질은 (규정성, 실재성으로 본다면) 부정성을 지니며 그런 한 ‘자기 자신에서 자기 자신의 불안[Unruhe ihrer an ihr selbst]’을 내포하고 “자기를 투쟁 속에서 출현하게 하니”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어떤 규정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규정성을 지니면서 실재하며 실재한다는 것은 곧 고통에 빠진다. 즉 인생은 고[苦]다, 세계는 고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통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

1)

지난 글에서 헤겔이 존재론 2장에서 전개한 현존 개념을 살펴보았다. 현존은 가장 직접적으로 인식된 감각적 확신의 세계다. 이 세계는 가장 직접적이기에 가장 완전한 진리의 세계이며 가장 풍요로운 세계로 간주되어 왔다. 비트겐슈타인이 원초적 명제로 보여주려는 세계, 아도르노가 미메시스를 통해 그려낸 세계가 바로 이 세계다.

그러나 반성적 사유를 무기로 삼고 있는 헤겔이 보기에 이 세계는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존재의 세계다. 즉 플라톤이 말한 토 헤테론의 세계다. 여기서 어떤 규정은 잠시도 멈춤 없이 다른 규정으로 전환하니, 간단히 말해 명멸하는 세계다. 이 세계는 아마도 우리가 악몽 속에서 만나는 세계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아름다운 직접 진리의 세계가 다른 한편으로 악몽과 같은 명멸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헤겔의 반성적 사유가 지닌 특징이다. 어떤 것은 항상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2)

이제 본격적으로 이 현존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있다. 1권 존재론 2장 현존 장은 헤겔이 재판에서 초판의 내용을 엄청나게 수정해, 언뜻 보면 헤겔이 초판과 재판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간단하게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현존

재판 현존

A

현존 그 자체

현존 그 자체

1

현존 일반

현존 일반

2

실재성

a

타자 존재

b

대타 존재와 즉자 존재

c

실재성

3

어떤 것

어떤 것

B

규정성

유한성

1

한계

어떤 것과 다른 것

2

규정성

특정성 상태 한계

a

규정

b

상태

c

3

변화

유한성

a

상태의 변화

직접적 유한성

b

당위와 한계

한계와 당위

c

부정

유한의 무한으로 이행

c

무한성

무한성

1

유한성과 무한성

유한성과 무한성

2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3

무한의 자기 내 복귀

긍정적 직접성

위의 표면 보면 도저히 초판과 재판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초판과 재판 사이의 상응하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초판에서 A절에서 다룬 ‘현존과 타자 존재’, ‘대타 존재와 그 자체[즉자] 존재’가 재판에서는 B절 1항에서 ‘어떤 것과 다른 것’이라는 제목 속에 함께 다루어진다.

초판에서 B절에서 다룬 ‘규정과 상태’, ‘내재 존재와 한계’는 재판에서도 B절 2항에서 다루어진다. 제목은 ‘규정, 상태, 한계’다. B절 3항은 초판이나 재판에서 모두 ‘당위와 한계[제한]’을 다루고 있어서 공통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헤겔은 초판에서 산만하게 전개한 내용을 재판에서 한 데로 집중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초판에서는 B절에서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보다 앞에 나온다. 반면 재판에서는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 다음에 나온다.

아마 헤겔이 재판에서 결정적으로 수정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헤겔이 수정한 것이 옳다고 받아들인다면, 재판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서 현존 장을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각 개념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것에서 점차 구체적이고 복잡한 것으로 나가니, 그리고 실제로 ‘규정’이라는 개념보다는 ‘내재 존재’라는 개념이 더 복잡하니, 재판의 순서가 헤겔 논리학의 개념에 비추어서도 정당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재판의 순서에 따라서 헤겔의 현존 장을 설명해 나가고자 한다.

3)

재판의 전개 방식에 따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절

a. 현존[질]과 타자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대타 존재

b.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실재성[Realitaet: 어떤 것etwas] 또는 규정성[Bestimmtheit]

B 절

c. 규정[Bestimmung]과 상태[Beschaffenheit], 양자의 통일로서 한계[Grenze]

d. 내재 존재[In Sich Sein]와 한계, 양자의 통일로서 제한

e. 당위와 제한[Schranke], 양자의 통일로서 유한성

C 절

f. 무한성과 유한성, 양자의 통일로서 대자 존재

이상과 같이 정리하면, 어떤 리듬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대립하는 X항과 -X항이 나타나서 양자가 통일되면, 그 통일된 Y항이 새로운 대립에서 -Y가 되고 그것에 대립하는 X항이 다시 출현하는 식이다.

과연 이런 전개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식의 리듬만 보면 마치 신비한 변증법을 보는 듯하니, 마치 신이 자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이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다양한 단계를 거쳐나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단순하게 최종적인 결과인 종적 물질을 산출하면 되지 않았을까?

더구나 당혹스러운 것은 헤겔이 현존 장을 전개하면서 구별한 개념들 즉 질, 실재성, 규정성, 규정, 내재 존재, 당위, 유한성 등 어떻게 보면 유사한 개념들이 어떤 구별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재판의 경우 헤겔은 이 개념들을 순서에 따라 사용하지만, 초판의 경우 이 개념들이 마구 뒤섞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목차에서 보듯 초판에서 질이라는 개념은 세 번이나 반복된다.

더구나 ‘타자 존재’나 ‘대타 존재’, ‘규정성’과 ‘규정’은 단어도 유사하고 ‘실재성’, ‘규정성’, ‘유한성’이나 ‘한계’와 ‘제한’은 모두 유사한 개념이고 ‘그 자체 존재’나 ‘내재 존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런 혼란을 뚫고 헤겔의 현존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필요하다. 이미 앞에서 필자는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전개 과정과 논리학에서 개념의 전개 과정이 평행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앞의 글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현존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면서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에 나오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이 전개되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 경험이 축적되면서 개별자에서 일반자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 장에서 위와 같은 논리적 개념이 전개되는 것도 그런 경험의 발전에 비추어 본다면, 이해되지 않을까? 즉 논리적 개념이 위와 같이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무슨 신비한 조화가 아니라, 경험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일어나는 전환이라는 것이다.

4)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장을 보면, 최초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규정[질: Qualitaet]은 곧 이런저런 대상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이라는 사실 밝혀진다. 예를 들어 감각적 규정인 빨강은 처음에는 가장 개별적인 규정이었으나, 사과 양귀비 입술 등에 공통으로 속한다. 이 경우 이제 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질[Eigenschaft]이라고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현존, 즉 단 일 회만, 한순간 나타나는 개별적인 질은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지니, 붙잡을 도리가 없다. 명멸하는 이 세계가 앞에서 말한 현존과 타자 존재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경험이 조금 발전하면, 이제 일반적 성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빨강’이나 ‘단맛’ 등의 감각적 성질이다.

이 감각적 성질은 반성적 사유에서 볼 때 이미 다른 감각적 성질과 구별된다. 현존의 질 역시 타자와 구별되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니, 대체 서로 구별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일회적 현존 세계는 무차별하다고 한다.

“일회적이니 구별될 수 없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구별이란 항상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적 사유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오직 차이만 있다면 그 차이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현존의 세계가 무차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감각적 성질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일정한 사유의 틀을 전제로 한다. 빨강은 파랑과 구별되는 차이를 지닌다. 여기서 빨강이나 파랑은 색깔이라는 틀 안에서 차이이고, 빨강은 파랑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빨강이고 그것은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은 이미 구조주의를 통해 널리 확산한 주장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 것으로서 어떤 것 즉 반성적인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 헤겔이 말하는 대타 존재다.

“현존을 비존재를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본질적으로 규정된 존재, 부정된 존재 즉 타자이다. 그러나 현존은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동시에 자기를 유지하니, 이런 것을 다만 대타 존재라 한다.”(논리학, 1판, GW12, 62)

다만 부정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타자 존재다. 그러나 부정당하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기에 대타 존재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일반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5)

이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이므로 헤겔은 이것이 ‘그 자체 존재’를 갖는다고 한다. 즉 그것은 “타자에 의해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부정당하는 측면만 보면 대타 존재다. 그러나 대타 존재는 그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일반성을 갖는데, 이 일반성이 곧 대타 존재의 이면인 그 자체 존재다.

“현존은 그 자신의 비현존 속에서조차 자기를 유지하니, 곧 존재다. 그러나 현존은 존재 일반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비현존과 대립한 상태에 있으니 타자에 대한 자기의 관계와는 대립하는 자기 관계로서 존재이며 자기의 부등성에 대립하는 자기 동등성으로서의 존재이다.”(논리학, 1판, GW21, 62)

동등성과 부등성, 타자와 대립하는 관계와 자기와 동일한 관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일 때 그것이 바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다.

여기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서로 구별되는 성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성질이 그 자체 존재이면서 동시에 대타 존재다. 대타 존재가 없으면 그 자체 존재가 될 수도 없고, 그 자체 존재가 없으면 대타 존재가 될 수도 없다.

헤겔에 따르면 그 자체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립한다. 그러나 그 자체 존재는 “비존재마저도 그 자체에서 간직하니 왜냐하면 그 자체 존재 자체는 곧 대타 존재의 비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또한 대타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해 있는 것이며, 이 대타 존재는 “오직 그 자체 존재를 지시하는 비현존이니 이것은 마치 역으로 그 자체 존재가 대타 존재를 지시하는 것과 같다.”(논리학, 1판, GW21, 62)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동일한 것의 양면이라는 주장은 재판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두 계기는 동일한 것 즉 어떤 것의 규정이다. 어떤 것은 대타 존재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한에서 그 자체적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하나의 규정 또는 상황을 그 자체에서 가지니 이 상황이 그 자체에서 외적인 것 즉 대타 존재인 한에서 그렇다.”(논리학, 2판, GW21, 108)

“어떤 것은 그 자체 존재인 것과 동일한 것을 또한 자신의 표면에서 가지며 거꾸로 대타적인 것 역시 그 자체에서 가진다. 어떤 것은 두 계기의 동일성이며 양자는 그 속에서 불가분리적이라는 규정에 따라서 볼 때 이것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동일성이다.”(논리학, 2판, GW21, 108)

6)

헤겔에게 양자의 통일은 실재성이다. 이런 것이 감각적 성질이다. 이런 감각적 성질 즉 대타 존재와 그 자체 존재의 통일인 실재성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사유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이전 현존의 세계는 사유할 수도 언어화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인 것이니 언어로 규정되고, 사유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표현된다면, 질적 개별 명제로 표현된다. 즉 ‘이것은 빨강이다’라는 명제다.

하나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은 반성적 사유에서는 그와 다른 실재성이 있다는 말이 되고, 그러면 둘 이상의 실재성이 서로 관계하면서 어떤 것이 된다. 어떤 것[etwas]이 등장하면서 논리적 개념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개념 쌍은 ‘규정과 상태’라는 개념 쌍으로 변화한다. 이런 변화가 있으려면 우리의 인식 경험이 감각을 넘어 지각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강소

헤겔 형이상학 산책25-현존과 ‘to heteron’[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5-현존과 ‘to heteron’

1)

논리학 1부 1권은 존재론은 3편으로 나누어진다. 그 가운데 1편은 1장 존재, 2장 현존, 3장 대자 존재로 이루어진다. 1편 전체는 질을 다루고 2편으로 넘어가면서 양으로 이행한다.

앞에서 서술한 1장 존재론은 생성이라는 운동을 다룬다. 이 운동은 발생과 소멸의 끊임없는 상호 이행이며, 그런 이행이 일시적으로 균형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곧 현존이다. 필자는 이런 존재의 운동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들었던 촛불의 비유로 설명한 바 있다.

필자는 논리학과 인식론은 서로 평행을 이룬다고 본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인식의 이행은 시간상에서 일어나며, 이런 이행이 내면화(Erinnerung: 기억)되어 논리가 전개된다고 했다. 전자는 형태의 운동이며 후자는 계기의 운동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이다. 논리학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논리 규정을 찾자면 1편 2장에서 다루어지는 ‘현존’에 해당한다. 만일 논리학과 인식론이 평행을 이룬다는 가정을 유지한다면,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운동은 인식론에서 어떤 인식에 해당하는 것일까를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평행이라는 가정이 무너지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필자는 1권 존재론의 1편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생성 운동은 존재론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운동 즉 상호 이행의 운동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은 2권의 1편 1장(가상)과 3권의 1편 1장(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가상은 2권 본질의 운동 즉 반성 운동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며 개념은 3권 개념의 운동 즉 발전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 권이 1편 1장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대체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한 인식의 전개 과정과 평행을 이룬다. 이점은 앞으로 논리학 산책을 통해 논리학의 각 규정이 인식론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밝히면 대체로 인정될 수 있는 가정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전개 과정 밑바닥에는 헤겔이 칸트로부터 받아들인 범주표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12개의 판단형식으로 이루어진 범주표가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기본 설계도라고 볼 수 있다.

2)

이미 설명했지만, 존재의 운동은 이행 운동이다. 이런 이행의 운동은 존재자가 전개하는 운동 가운데 즉 본질의 반성 운동이나 개념의 발전 운동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추상적인 운동이며, 그러기에 가장 일반적으로 즉 모든 존재자에 적용되는 운동이다. 여기서 운동은 매개 과정도 없으며 발전적 연관도 없다. 다만 하나의 규정에 다른 규정으로 직접 이행하니, 그 모습이 곧 존재가 무로, 무가 존재로 단적으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합물이나 생명체와 같은 것도 이런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즉 하나의 역학적 물체로 보는 가운데서는 마찬가지로 이런 존재의 이행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거꾸로 추상적 존재자에 적용되는 이런 운동을 화합물의 화학적 작용 과정이나 생명체의 생명 운동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는 더 구체적인 운동 방식이 즉 반성이나 발전과 같은 운동 방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의 생성 운동 즉 발생과 소멸이 일시적 균형을 이루면서, 헤겔은 현존이 출현한다고 한다. 이 주장은 앞의 1장 끝에 헤겔이 제시한 내용이며 2장 현존을 시작하면서 다시 되풀이된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현존은 존재와 무가 단순하게 하나로 되는 것이다. 현존은 이러한 단순성 때문에 직접적인 것의 형식을 지닌다.”(논리학, 2판, GW 21, 97)

이런 서술을 보면 마치 순수 존재나 순수 무가 있어서 그것의 상호 운동을 통해서 현존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순수 존재나 순수 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처음 가장 직접 발견하는 것은 사실 현존이다. 현존은 그냥 독립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이 현존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주관이 설정한 개념 틀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이다. 여기서 개념 틀은 순수 존재라든가 순수 무와 같이 따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관계 즉 생성하는 관계이다.

사유 속에서 보자면,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통일되어 현존이 생성한다. 그러나 인식의 과정에서 본다면 최초의 인식 즉 감각적 확신에서 나타나는 현존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틀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이행 운동이다.

그것은 마치 공리와 정리 사이의 관계와 같다. 사실 우리가 인식 상 먼저 발견한 것은 정리이다. 이 정리들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공리가 추출되며, 이 공리를 구성하면서 정리가 서술된다. 이 점은 후일 마르크스가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을 대비한 것과 같다. 연구 과정에서는 구체적인 현실이 먼저다. 연구를 통해 이로부터 추상적인 원리가 발견된다. 서술에서는 추상적 원리가 먼저이고 이것을 구성하면서 구체적 현실이 설명된다.

헤겔도 이 점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체[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현존]는 우리의 반성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며 아직 자기 자신에서 그렇게 정립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 자체의 규정성이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은 현존이라는 표현이 말해준다.”(논리학, 2판, GW 21, 97)

‘반성 속에서 그렇게 규정된 것’이라는 말은 현존이 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규정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규정은 ‘반성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헤겔은 이제 현존의 모습 속에서 그런 운동이 즉 존재와 무의 통일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서’ 그렇게 ‘정립될’ 것이다.

3)

그렇다면 현존의 모습이 어떠하길래 헤겔이 이를 ‘존재와 무의 통일’로 규정하게 된 것일까? 현존이란 우리의 의식에 처음 가장 직접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정신현상학에서는 감각적 확신의 대상이다.

헤겔은 이 현존의 모습을 ‘질[Qualitae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분석철학에서는 이 질을 더 확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감각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의식이 우리 밖의 외계와 가장 직접 부딪힐 때 나타나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처음에는 이 감각질이 가장 풍요하고 가장 진리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의 의식이 외부의 대상과 직접 부딪히는 순간, 그 순간은 인식과 대상은 합일에 이르며, 그 순간은 어떤 비교할 수 없는 순간 즉 개별적 순간이며 그런 순간순간의 전체는 대상의 가장 풍요한 모습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므로 인식론에서는 항상 모든 인식의 토대를 이런 감각질에서 찾으려 했다. 대표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원초적 명제 속에서 이런 감각질의 인식을 찾으려 했으며, 아도르노가 양화하고 일반화하는 계몽적 인식을 거부하면서 미메시스를 통해 얻어지는 인식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도 이런 기대가 감추어져 있었다.

4)

그러나 헤겔은 이런 현존이 지닌 질은 의식이 대상과 순간적인 부딪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런 부딪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한, 매 순간 그 질은 사라지고 새로운 다른 질이 출현한다. 소위 ‘명멸[明滅]’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현존의 모습이야말로 이런 명멸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현존을 규정하면서 현존은 동시에 ‘타자 존재[Anderssein]’라고 말한다. 이 타자 존재란 현존 옆에 있는 또 하나의 현존이라는 의미라기보다 그 자신이 이미 자기와 다른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타자 존재를 ‘자기 자신의 타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즉 질이 명멸하는 모습을 헤겔이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 자체는 본질적으로 타자 존재이며 이 타자 존재 속으로 이행한 것이다. 타자는 그와 같이 직접적이며 그의 외부에서 발견되는 것과 관계하지 않고 다만 본래적으로나 현상적으로 타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하여 타자는 곧 자기 자신의 타자이다.”(논리학, 1판, GW 12, 61))

“왜냐하면, 현존은 이에 못지 않게 비현존이고 즉 비현존으로서 현존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자기 자신의 무로서의 현존이므로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의 무는 마찬가지로 현존이기도 하다.”(논리학, 1판, GW 12, 60)

여기서 현존과 비현존의 상호 이행이 등장하는데, 이 기초 전제가 된 것이 곧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통일이다. 즉 현존의 명멸하는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헤겔은 존재와 무라는 두 개념 틀을 사용한다. 이 명멸하는 모습이 곧 생성 운동 즉 발생과 소멸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런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생성을 통해서 현존을 보자면, 현존은 양자의 통일을 존재의 측면에서 본 것 즉 “존재로서의 통일”이며 타자 존재는 양자의 통일을 무의 측면에서 본 통일 즉 “비존재로서의 통일”이다.

만일 가정해서 우리가 우리 밖의 세계에 일정한 순간에 동시에 부딪힐 수 있다면 또는 이전의 것을 기억해서 새로운 것과 함께 떠올린다면(아직 우리는 이런 단계까지도 넘어가지 않았으나), 이 경우 우리는 하나의 현존 옆에 또 하나의 현존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의 현존과 그 옆에 있는 다른 현존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의 현존도 타자 존재로 이행하고, 다른 현존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타자 존재로 이행하니, 어떤 현존도 머무름이 없이 타자 존재로 변화하는 마당에 여기에 어떤 비교도 가능하지 않으니,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계는 무차별적 세계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러므로 양자는 어떤 것으로 규정될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 규정된다. 따라서 양자는 동일한 것이며 양자 사이에 어떤 구별도 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의 규정의 동일성은 다만 외적 반성 즉 양자의 비교에 속한다. 그러나 타자는 일단 정립된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이 동일한 타자는 자기 나름대로 사실 어떤 것과 관계 속에 있으나 또한 자기 나름대로 그 어떤 것 밖에 있다.”(논리학, 2판, GW 21, 106)

5)

헤겔은 플라톤이 그려낸 ‘토 헤테론[to heteron]’은 바로 이런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현존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자신의 타자로 되는 명멸하는 세계를 (또는 좀 더 발전하면 서로 무차별적인 세계를)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데, 아이가 어머니 자궁을 나와서 처음 보게 되는 세상이 있다면 다름 아닌 이런 세상이 아닐까? 또는 악몽 속에서 어떤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불쑥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할 수있을까?

언젠가 가을날 어느 산 정상에서 약간 기울어져 가는 햇빛에 반사된 억새꽃이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뒤로 수없이 산에 가고 또 억새를 보았으나 결코 다시 그 억새꽃의 빛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 세상에 단 일회만 존재하고 곧 사라져 버린 그 모습은 심지어 기억 속에서도 남아 있지 않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기억해 낼 수는 없다. 헤겔이 말하는 현존의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이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이런 질로 이루어진 현존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이것’이라는(또는 ‘여기’, ‘지금’과 같은) 지시 대명사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은 그 순간 이미 자기와 다른 타자 존재가 되니(예를 들어 지금은 낮인데, 바로 밤이 되고 등), 이것으로 포착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무엇이나 지시하는 것 즉 어떤 ‘일반적인 이것’에 이를 뿐이다.

같은 이야기를 헤겔은 논리학에서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말로 어떤 완전히 규정된 것을 표현한다 한다. 여기서 언어 즉 지성의 작품이 다만 일반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사실 즉 이는 어떤 개별적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과 다르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러나 개별적 이름은 일반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없는 것이다.”(논리학, 2판, GW 21, 105)

이강소

헤겔 형이상학 산책24- 촛불의 비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4- 촛불의 비유

1)

존재와 무는 관계 즉 시공간의 양 측면이다. 존재는 존재자의 통일을 말하며 무는 존재자의 상호 분열을 말한다. 이런 존재와 무는 상호 이행한다. 존재자들이 통일적인 관계를 맺다가 이 관계가 해체되는 것이 소멸이며, 관계가 없던 상태에서 관계를 맺어 통일로 가는 것이 발생이다.

그러므로 관계로서 시공간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것으로 생각되거나 부정적인 물체 즉 빈 그릇과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시공간은 발생과 소멸이 끊임없이 상호 전환하는 운동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발생과 소멸이라는 생성하는 운동은 다시 힘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발생은 분열된 존재자를 통일하는 것이니 이는 통일하는 힘을 의미한다. 소멸은 통일된 존재가 분열하게 되니 이는 해체하는 힘을 의미한다.

이제 이 관계 즉 시공간을 어떤 물체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공간은 사실 힘으로 이루어진다. 시공간은 한편으로 관계를 맺는 힘 즉 통일 또는 수축하는 힘과 다른 한편으로 관계를 해체하는 힘 또는 펼치는 힘이 전개하는 상호작용일 뿐이다.

공간이 힘이라는 헤겔의 생각은 역학에서 장[場]의 이론을 생각하게 한다. 이 경우 어떤 중심점이 있어서 그로부터 힘이 마치 파도처럼 펼쳐나간다. 가까울수록 장은 강한 힘을 발휘하며 멀리 떨어질수록 힘은 약화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시공간이 장이라 할 때 힘 자체가 그것도 두 대립적인 힘의 상호 작용하는 관계이다. 그것은 마치 밀물과 썰물이 교대하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조각배와 같은 모습을 취한다. 바다가 시공간 즉 존재라면 조각배는 존재자다.

2)

존재와 무가 동전의 양면이듯 발생과 소멸도 동전의 양면이니, 수축하는 힘과 펼치는 힘 역시 동전의 양면이다. 두 힘은 서로 따로 떨어진 힘이 아니며 두 힘의 관계는 각자 독립적으로 그리고 서로 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정신현상학 지성 장에서 물체의 두 속성 사이에는 법칙 관계가 존재하는데, 이 법칙은 두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고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힘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운동의 한 가지 계기 즉 자립적인 물질들이 펼쳐져서 제각기 존재하게 되는 운동은 힘의 표출이며 반대의 계기 즉 이 자립적인 계기들이 지양되어 사라지게 하는 운동은 표출에서 자기 내로 수축하는 힘이거나 또는 본래적인 힘이다.”

(정신현상학, GW9, 84)

통일하는 힘과 분열하는 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침투하여 통일한다. 그 결과 각자가 타자를 촉발하며 각자가 타자로 이행한다. 두 가지 힘의 관계는 마치 음양의 동정이 끝없이 전개되는 태극의 모습과 닮았다.

3)

이상에서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에 관한 헤겔 사유의 대강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양자를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구별된 양자를 관계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존재는 시공간적 관계다. 이 관계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의 존재자 즉 현존[Dasein]이 출현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마치 허공에서 불쑥 손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헤겔은 논리학 존재론에서 존재와 무에서 생성, 그리고 힘의 상호작용으로 사유를 발전시켰다. 이제 마지막으로 헤겔은 생성에서 다시 현존재로 이행한다. 이로써 질적 규정을 다루는 1부에서 1장 존재론이 끝나고 2장 규정성 또는 현존재로 넘어간다.

이 마지막 부분은 곧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인데, 이 부분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무척이나 불친절하다. 헤겔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헤겔은 생성이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중적 규정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방향이 상호 침투하면서 서로가 상살[相殺]되기에 이른다. 그 한 쪽 방향은 소멸이다. 존재는 곧 무로 이행하기는 하지만 무는 못지않게 자기 자신의 반대물로 됨으로써 오히려 존재로 이행하니 이것이 즉 발생이다. 발생은 다른 또 하나의 방향이다. 여기서 무가 존재로 이행하되 존재는 못지않게 자기를 지양하는 가운데 오히려 무로 이행하니, 이것이 소멸이다.”(논리학, GW 21, 93)

4)

이것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힘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발생이나 소멸, 통일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은 상호작용한다. 통일하면서 수축하고 수축하면서 통일한다. 이어서 이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발생과 소멸은 균형 속에서 서로를 정립하는 데 이런 균형이 일단 생성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생성은 마찬가지로 평온한 통일 속으로 함몰하고 만다. 즉 존재와 무가 생성 속에서 다만 소멸적인 것으로 존재하지만 생성 그 자체는 역시 이 존재와 무의 구별성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와 무의 소멸은 곧 생성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소멸하는 것이 소멸하는 것을 뜻한다. 생성은 이리저리 나부끼는 동요와 같은 것이지만 이런 동요는 모두 몰락하면서 하나의 평온한 결과가 된다.”(논리학, GW 21, 93쪽)

여기서 헤겔은 생성을 설명한 다음, 이 생성 자체가 다시 소멸한다고 말한다. 생성에서는 존재와 무가 각자 자기를 소멸하고 타자로 이행하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그게 발생과 소멸이며 양자를 통합하여 생성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소멸한다고 할 때는 다름 아닌 생성 자신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즉 존재와 무의 상호 소멸 자체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소멸하는 것이 소멸한다”고 말한다. 생성은 존재와 무의 상호 이행으로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것이다.

반면 생성의 소멸은 동요 자체가 소멸하면서 정지와 평온을 되찾는다. 이제 존재와 무는 서로 이행하지 않고 존재는 존재, 무는 무로 구별되어 존재할 뿐이다. 존재와 무, 통일과 분열은 서로 긴장된 대립 가운데 고요하게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이 생성하는 운동이 정지하는 것은 한순간일 뿐이며 곧 이어지는 순간 다시 생성하는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생성과 생성의 소멸 자신이 다시 통일되어 있다.

이 평온은 곧 존재와 무, 통일성과 분열이 한순간 운동을 멈추고 통일성과 분열이 일정한 관계로 멈추어서 있는 것이니, 여기서 존재자와 존재자는 일정한 관계 속에 그러면서 일정한 분열 속에 있다. 관계 즉 존재와 분열 즉 무는 고정된 채 머무른다.

“그것은 곧 존재와 무의 통일[즉 생성하는 운동]이 고요한 단순태로 된 것이다.”(논리학, GW 21, 94)

5)

여기서 존재와 무가 구별된 채 머무르는 ‘생성의 소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런 문제 앞에서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변증법적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촛불을 비유로 삼았다. 촛불은 타오르는 것과 꺼져가는 것이 즉 발생과 소멸이 끊임없이 교체하는 운동이다. 그런 운동 가운데 발생과 소멸이 균형을 이루면서 고요하게 머무르니, 그것이 바로 로고스라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동요와 운동이 사라지고 고요한 안정이 회복되니, 바로 그 안정이 곧 어떤 규정성이다. 그것이 바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로고스다.

“생성은 존재와 무가 통일로 이행하는 것으로 존재하며, 이런 통일은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며, 두 계기의 일면적 직접적 통일이라는 형태이니 곧 현존재다.”(논리학, GW 21, 94쪽)

5)

생성과 로고스, 운동과 규정성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있다. 헤겔의 사유는 근대에 출현한 미적분학의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이 존재의 무의 통일을 설명하면서 주석4에서 수학적 무한소 개념을 끌어들인 것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헤겔은 무한소는 아무리 작더라도 여전히 일정한 크기를 지닌 것이며, 따라서 무는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즉 “크기란 어떤 것이거나 아니면 무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주장을 반박하며 무한소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존재이면서 동시에 무인 것이라 한다.

“존재와 무의 중간 상태가 아닌 것은 없다. 수학은 지성이 반대하는 그런 규정 덕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논리학, GW 21, 91-92쪽)

헤겔은 무한소를 “존재와 무의 중간 상태”로 표현했지만, 사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무한소는 두 개의 대립하는 힘이 서로 통일된 한순간이다. 예를 들어 낙하법칙을 설명하는 이차 함수를 생각해 보자. 그 이차 함수의 어떤 한 점은 지금까지 운동의 결과 위에 그 한순간의 운동량을 더한 것이다. 그것을 미분적 차이라고 한다.

그 한순간의 운동량 즉 미분적 차이는 무한소의 시간에 무한소의 거리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무한소의 시간과 무한소의 거리가 비례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 비례적 관계를 두 대리하는 힘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한다. 즉 발성과 소멸, 통일하는 힘과 분열하는 힘의 상호작용이다.

이런 미분적 차이의 작용에 의해 어떤 순간의 점 바로 다음의 점이 결정된다. 이런 생각을 일반화한다면, 낙하법칙의 모든 점은 다름 아닌 미분적 차이의 결과일 수 있다. 이런 예를 들어본다면 헤겔이 존재가 존재자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