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미학산책13-벤야민의 알레고리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3-벤야민의 알레고리론

 

1)

헤겔은 상징적 예술형식을 다루면서 마지막 3절에서 비유법을 다룬다. 1절과 2절에서 다룬 상징, 숭고의 개념은 이념이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시대에서 출현한 예술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3절에서 다루는 비유법은 상징적 예술형식이 해체되어서 다른 시대의 예술형식에서 종속적인 형태로 사용되는 것을 다룬다.  

상징이나 숭고의 경우, 예술작품의 의미는 이념, 절대정신이었다. 여기서 기호 즉 작품과 그 의미 즉 이념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작가는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니, 마치 기호와 의미 사이에는 신비한 연관이 있어 작품은 마치 직접적으로 그 의미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 연관은 대체로 수수께끼적인 특성을 지닌다. 본격적 상징에 이르러 양자 사이에 매개가 유사성이 되기는 하지만, 아직 그 매개를 작가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비유법에서 이제 이념 즉 절대정신이 아니라 작가가 표현하려는 개인적인 의미일 뿐이다.  그 의미는 작품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하며 그 연관은 작가 개인의 주관적 파악에 의존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체계화를 좋아하는 헤겔은 이런 비유법조차 체계화한다. 그는 먼저 비유만 제시되고 그 의미는 간접적인 추론에 의존하게 만드는 형태로서 우화, 비유담, 교훈담, 속담, 변신담을 거론하며 이어서 비유와 더불어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형태로서, 은유와 이미지(풍유) 그리고 직유를 구분한다. 전자나 후자는 비유와 그 의미 사이에 유사성과 같은 합리적 연관이 매개가 된다. 마지막으로 헤겔은 작가가 억지로 또는 자의적으로 양자는 연관시키는 형태로서 교훈시나 서술시(전원시)에서와 같은 비유법을 들고 있다. 이 마지막 형태에서 처음 상징에서 감추어져 있던 기호와 그 의미 사이의 무차별성이 마침내 폭로되면서 상징적 예술형식은 해체되고 만다.

비유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목적이라면 헤겔이 제시하는 비유법 설명을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헤겔은 친절하게도 풍부한 예까지 소개하고 있으니, 비유법을 학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설명은 좀 개념적이지만, 그 내용은 요즈음 문학 교과서에서 소개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만 말해 두자.

 

2)

비유법의 종류를 구분하는 자체는 철학적으로는 별로 흥미롭지 못하지만, 비유법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는 그냥 지나갈 수 없으니 즉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관한 논쟁이다. 논쟁의 출발은 괴테였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괴테 이전에 상징은 헤겔에서 보듯이 기호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상징은 의미를 지시하지만 그 지시 연관이 무매개적이어서 신비하고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반면 괴테는 초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이탈리아 여행 이후 1800년 전후로 고전주의로 전향하면서[1], 상징이라는 개념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즉 상징은 그 의미인 이념을 직접 표현하는 형상을 말한다. 상징은 이념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념과 구체적 형상은 진정한 통일을 이룬다. 괴테를 이를 “감각적 현상과 초감각적 의미의 합일”[2]로 표현했다. 또는 “인간 정신이 가장 내밀하게 자연과 결합되어 온전한 형상으로 창조한 대상”이라고 말한다.[3]

괴테는 상징을 고전적 예술의 대표적인 도구로 파악하면서, 그의 이전 바로크 시대 예술의 도구인 알레고리[4]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괴테는 알레고리를 개념에 대해 외면적인 관계를 갖는 것으로 파악한다. 상징이 이념의 무한한 풍부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알레고리는 개념의 외면적인 한 측면만 파악하는 단편적인 것에 그친다. 그러므로 괴테는 진정한 예술에 이르는 길은 알레고리가 아닌 상징이라고 하였다.

“시인이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특수한 것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특수한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가 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에서 알레고리가 생겨나는데, 그 경우 특수한 것은 단지 보편적인 것을 예시하는 사례나 표본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가 본래 시문학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시문학은 그 본성상 보편적인 것을 염두에 두거나 가리키지 않은 채 특수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5]

 

3) 벤야민과 알레고리

괴테는 알레고리와 상징, 바로크 예술과 고전주의를 예술적 가치의 측면에서 비교했다. 그에 반해서 벤야민은 예술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알레고리의 개념을 자본주의 시대 예술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파악한다.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은 그의 실패한 교수자격취득 논문 『독일 비애극의 기원』에서 설명된다.

벤야민의 이런 시도는 각 시대 예술의 형식을 기호의 형태를 통해 파악하려는 헤겔의 시도를 닮았다. 그런데 헤겔은 알레고리를 한 시대의 특별한 예술 형식으로 말한 적이 없고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 형식은 가상이라는 개념에서 발견하므로, 벤야민의 시도는 특별한 흥미를 끈다.

  우선 벤야민은 알레고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알레고리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사회적 관습이나 자의적 연관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라고 보면서 거기에 고유한 객관적인 토대가 있다고 본다. 즉 알레고리는 서로 분열된 두 개의 개념 체계 즉 구조가 중첩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구조 속의 어떤 요소가 다른 구조 속에서 등장하여 다른 구조로부터 의미를 얻게 되면 알레고리가 된다.

벤야민은 17세기 바로크 시대 예술의 특징이 바로 이런 알레고리의 사용에 있다고 한다. 그는 바로크 시대 대표적인 예술로서 비애극-그는 이를 고대 비극과 구분하여 비애극이라 하는데-을 거론하면서 고대 비극과 구분되는 근대 비애극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이런 알레고리의 형식을 발견하려 한다.

이 비애극[6]의 표면적 구조는-상세한 것은 나중에 고대 비극을 논할 때, 소개할 예정인데- 일종의 궁중암투이다. 여기서 서로 투쟁하는 두 세력 예를 들과 왕과 신하가 서로 야심을 부리는 가운데 몰락하고 만다. 표면적인 이런 구조의 배후에는 죽음과 부활 또는 구원이라는 기독교 신학적 구조가 매개되어 있다. 즉 왕과 신하의 상호 몰락은 곧 신이 세상을 구원하는 섭리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의 필연적인 몰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애극은 멜랑콜리의 정신을 보여준다. 이런 멜랑콜리는 단순한 우울이 아니며 구원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애극의 기본 구조는 세속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의 이원적인 중첩이며 그 때문에 벤야민은 세속적인 사건 각각은 신적인 사건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용한다고 본다.

 

4) 멜랑콜리의 정신

이런 이원적 구조의 중첩은 비단 바로크 시대 비애극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7]. 바로크 시대는 역사적으로는 절대주의 시대이며 근대 자본주의가 출현할 무렵이다. 이 시대 예술 대표적인 예술은 회화와 건축에서도 발견된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뒤러의 작품 멜랑콜리아를 보자.

 

과학이 발전하고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세속적 행복이 증가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멜랑콜리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계의 분열이었다. 현실 세계는 배후의 어떤 세계에 의해 지배되지만, 인간은 그 힘을 알지 못하고 다가오는 몰락의 운명 앞에 두려워한다.

이렇게 분열된 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역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분열되어 있다. 전자는 표면적인 경쟁의 질서이다. 여기는 개인의 자의가 지배한다. 후자는 시장 및 가치법칙의 질서이다. 이것은 심층적이면서 표면의 질서를 배후에서 지배하는 필연적인 법칙이다. 벤야민은 바로크 시대 예술을 지배하는 알레고리의 형식은 곧바로 자본주의 시대 즉 소외된 시대예술의 일반 형식으로 간주한다.  

벤야민은 이런 알레고리 형식과 멜랑콜리의 정신을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절정기에 등장한 보드레르의 도시 산책에서도 발견하며, 나아가서 20세기 등장한 대중 예술인 영화 예술 속에서도 발견한다. 벤야민의 이런 주장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주제로부터 너무 벗어나니 생략하기로 하자.

 

5) 알레고리와 가상

벤야민은 알레고리를 자본주의 시대 예술 형식으로 보았는데, 이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필자가 보기에 벤야민이 알레고리의 형식을 자본주의 시대와 연관시킨 점은 문제가 있다.

알레고리가 두 개의 세계가 중첩되면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접속하는 시기나 장소에는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자본주의 역시 표면과 배후가 중첩된다는 점에서 알레고리가 사용될 수 있기는 하지만, 알레고리는 그 외의 다른 시기나 지역에서도 충분히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질적 문화가 충돌하는 헬레니즘 시대에 다양한 곳에서 이런 알레고리적 형식이 출현했다.

자본주의적 알레고리는 멜링콜리의 감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 알레고리는 그런 감각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레고리는 자본주의 시대 일반적 예술 형식으로 규정하려면, 멜랑콜리적 알레고리로 제한해야 한다.

헤겔은 중세 이후 발전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낭만주의 시대라 이름 붙였는데 이 시대 고유한 예술형식으로서 가상이라는 형식을 제시한다. 헤겔이 말한 가상이라는 형식과 벤야민이 말한 알레고리의 형식은 구분된다.

헤겔의 경우 가상은 단순히 중첩되는 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죽음처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념적인 것을 지시하는 기호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상호 작용의 관계에서 개별자는 몰락하며 그런 몰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 가치 법칙의 지배를 입증하니, 헤겔이 말한 대로 가상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이 시대 절대정신 즉 이념을 적절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1] 임홍배에 따르면 괴테의 상징 개념은 1797년 8월 16일 <쉴러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1797년 쓴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잘 보여준다고 한다. 임홍배, <괴테의 상징과 알레고리 개념에 대하여>, 비교문화 45집, 2008. 6 참고.

[2] 가다머, 진리와 방법, 튀빙엔, 1990, 임홍배, 위의 논문, 100쪽에서 재인용

[3] 괴테,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 1797, 임홍배, 위의 논문, 100쪽에서 재인용

[4] 우선 알레고리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알레고리란 그리스어로 ‘다른 것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말이 표면적인 의미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할 때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비유법이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므로 알레고리이지만 보통은 좁은 의미에서 사용된다.

알레고리란 관습적인 차원에서 어떤 것이 다른 것을 지시할 때 성립하는데, 그런 점에서 알레고리는 유사성에 기초한 은유{도상}나 인접성에 기초한 환유(지표)와 구분된다. 유사성이든 인접성이든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반면 알레고리와 그 의미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간접적인 관련만 존재한다.

[5] 괴테,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 1797, 임홍배, 위의 논문, 102쪽에서 재인용

[6] 당시 비애극의 대표적인 예로서 안드레아스 그뤼피우스의 『레오 아르메니우스』를 보라. 드라마는 성탄절 하루 전 정오에 시작하며 작품 소재는 비잔틴의 최고 군사령관 미하엘 발부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황제 레오(AD 813-820 까지 통치)의 살해이다. 또한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 극작가 라신느의 희곡 『파에드라』에서도 유사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7]

호퍼와 정신분석 12-언어의 회복[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12-언어의 회복

 

1)

호퍼는 40년대 들어 마침내 실재계의 세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 바탕에는 뒤늦게 그에게 다가온 원초적 장면의 체험이다. 이를 통해 그는 실재로부터 단절하고 상징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이 상징의 세계에서 맨 처음 그가 만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세계이다.

 

호퍼의 욕망 구조에서 새로운 전환의 시기였던 1940년 그는 아래와 같은 그림 <밤의 사무실>을 그려낸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실에서 밤 늦게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남자이며 사무용 책상에 서류에 몰두하고 있다. 호퍼는 그를 상당히 위에서의 시각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그의 오른 편에는 창문이 열려 있지만, 호퍼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림의 외편에는 여성이 있다. 그림 왼 편 아래쪽에 타이프라이터가 있는 걸로 보아, 비서로 보인다. 그녀는 온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엷은 푸른 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서류함을 뒤지는 중 갑자기 남자를 향하여 고개를 돌린다. 호퍼는 그녀를 거의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어서, 타이라이터 책상과 남자의 테이블, 그리고 남자와 시각적으로 어긋나고 있다.

 

실내는 실내 전등과 책상 위의 등의 빛이 교차하면서 상당히 밝고 전체적으로 밤의 아늑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바닥의 녹색과 책상의 짙은 고동색이 그런 분위기에 어울린다. 언뜻 상당히 섹슈얼할 수도 있는 분위기인데, 더구나 여성의 몸의 윤곽이 선명하고 육감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오히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차가운 느낌이 든다. 아마도 남자는 서류에 몰두하여 그런 분위기에 전혀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순간, 여자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다. 그저 딱딱한 사무적인 이야기일까? 아니면 무관심한 남자의 시선을 끌어내기 위한 도발적 언어일까? 아니면 무관심한 남자에게 터뜨리는 파일까?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이 던져 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말이 없고 창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자기의 내면에 잠겨 있다. 이 그림의 남자는 그런 연속 선상의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여성은 아니다. 여성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말을 건네고 있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2)

이어지는 그림은 호퍼가 1947년 그린 <여름 저녁>이라는 그림이다. 얼핏 보면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집은 무슨 무대의 세트처럼 보인다. 이 집의 테라스에 두 남녀가 걸쳐 앉아 있는 측면이 너무 옆으로 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법은 호퍼의 그림에서 자주 나온다. 그 결과 정면과 측면이 마치 몽타쥬된 듯하며, 집의 분위기보다는 연극 세트처럼 보이게 만든다.

 

두 남녀의 등 뒤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짙은 여름 밤이다. 풀들이 무성하고 하늘은 검푸르며, 숲은 좀 으스스하게 느껴진다. 그 으스스함은 두 남녀를 덮칠 것도 같은데, 마치 벽에 붙여 놓은 그림처럼 보이면서 두 남녀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테라스에는 밝은 등이 켜있고 그 아래서 두 남녀가 있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어린 듯 보인다. 여자는 브래지어와 짧은 치마만 입었지만 더구나 색깔이 붉은 색이지만,  섹슈얼한 모습은 아니다. 아마 호퍼가 긴장된 다리의 근육을 가감 없이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손을 써 가면서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이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경우 대개 남자는 앞으로 두 사람의 미래를 그려내면서 여자를 설득한다. 여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하다. 여자의 인상이 심각한 듯 하니 남자는 아마 상당히 진지한 약속을 던지는 모양이다.

 

그 내용은 독자가 짐작할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호퍼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그림에서는 여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서류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 이 그림에서 남자의 말에 여자는 귀 기울이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곧 대화가 오갈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3)

이 그림은 1949년 그려진 <밤의 회의>라는 그림이다. 우리가 미국 호퍼의 시대 살지 않은 한 이 그림은 배경을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세 사람이 회의를 하는 방의 천정에 시멘트 대들보가 보인다. 그림 왼쪽에는 기둥이 보이는데 그 옆에 창문이 달린 문이 보인다. 이 문이 마치 허공에 세워진 듯하다. 방의 좌우에는 나무로 된 긴 탁자(또는 군 내부반 침상)가 놓여 있으며, 세 사람은 그 사이에 있다. 과연 이런 공간이 실제할 수 있는 것일까 의심스러운데, 그 가운데 서 있는 세 사람은 매우 실제적인 모습이다.

 

두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앉아 있다. 앉아 있는 나이든 사람이 책임자로 보인다. 서 있는 여성은 나이든 여성인데, 아마 비서로 보이고, 모자를 쓴 젊은 남자는 책임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그는 아마 그 말을 실행할 직원으로 보인다.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는데, 분위기상 업무와 연관된 일에 관해 대화한다. 그들의 대화하는 장면 오른쪽에서 아주 밝은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낮이라면 햇빛이겠지만, 제목에서 밤이라고 밝혀 놓았으니 햇빛은 아닐 것이다. 가로등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환한 빛이다. 아마 작가인 호퍼가 임의로 집어넣은 빛일 것이다.

 

호퍼는 왜 아마도 업무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대화를 하는 그들을 이렇게 강한 빛으로 비추어 주었을까? 일상적으로 업무를 하는 사람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호퍼가 어둠과 침묵으로 표현되는 실재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호퍼로서는 일상적 대화가 오히려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헤겔미학산책12-숭고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2-숭고에 관해

 

1) 상징에서 숭고로

헤겔은 상징적 예술 형식을 다루면서 1절에서 그 핵심적 개념인 상징의 개념을 다루지만 이어 2절에서는 숭고 개념을 다룬다. 3절은 비유론 일반을 전개한다.

 

헤겔의 미학강의에서 어느 장이든 항상 1절은 개념을 다루고 2절이 본론에 해당하며 3절은 그 영향을 다루니, 헤겔이 숭고 개념을 상징적 예술 형식 2절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숭고가 상징적 예술 형식에 핵심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상징 개념은 필연적으로 숭고의 개념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 점을 다루기 전에 숭고 개념에 관한 논의의 차원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는 것은 헤겔의 숭고 개념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으로 보인다. 

 

2) 칸트에서 숭고의 감정

미학에서 숭고의 개념은 칸트에 의해 종합된 이후 쉴러로 전개되었으나 그 후 논의에서 사라졌다.그 후 20세기 들어 모더니즘 예술이 등장하면서 숭고 개념이 다시금 관심의 대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료타르는 아방가르드 예술에 나타나는 숭고미에 기초하여 포스트모던 시대의 숭고 개념을 전개하였다.

 

숭고 개념에 관한 논의의 차원은 주로 숭고의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숭고의 감정은 고통과 쾌감이 혼합된 감정으로 간주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감정을 공포와 연민의 혼합으로 규정한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숭고의 미학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비극의 미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선 버크는 근대에 들어와 숭고 개념을 탐구한 출발점에 해당한다. 그는 숭고를 감정의 차원에서 다루면서 칸트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인간은 어떤 위험에 처해 고통을 겪다가 그것을 벗어나게 되면 쾌감을 느끼면서 숭고의 감정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숭고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룬 철학자는 칸트이다. 그는 심미적 감정과 숭고의 감정을 구분했는데 양자는 모두 미적 판단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에게서 미적 판단은 이중적인 판단이다. 미적 판단은 한편으로 구성적 판단과 대립하는 반성적 판단이라는 인식적 과정을 전제하며 그 위에서 어떤 감정이 출현하는 감정적 판단을 내린다. .

 

심미적 감정의 경우 미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반성판단은 대상에 대한 상상력의 작용(즉 수동적, 재생적 상상력)을 통해 주어진 대상이 오성의 개념 속에 귀속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상력의 작용이 자유로울수록 이로부터 욕망의 쾌감과 구분되는 순수한 쾌감이 출현한다. 이 쾌감이 곧 심미적 감정이다.

 

그에 반해서 숭고 감정의 경우, 그 전제가 되는 반성적 판단 자체가 이중적이다. 먼저 대상에 대해 상상력이 작용하더라도, 적절한 개념을 찾을 수 없다. 대체로 양적 크기가 무한하거나(수학적 무한) 질적인 규정이 무규정적인 경우(역학적 무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아무리 상상력이 거듭 발동하더라도 상상력이 개념을 찾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감정은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에 그칠 것이다[1].

 

칸트는 상상력이 주어진 대상에서 신과 같은 이성적 이념을 발견하는 순간이 여기서 출현한다고 한다. 즉 어떤 것이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어떤 것이 규정되지 않는 것을 지시한다는 생각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2] 이 점을 칸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구상력[종합적 상상력]에 대하여 초월적인 것은(직관의 포섭에서 구상력은 이 초월적인 것에까지 추진된다) 말하자면 구상력이 그 속에 빠져버릴까 두려워하는 심연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이성의 이념에 대해서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합법칙적이요, 구상력의 그러한 노력을 일으키는 것이다.”[3]

 

이 순간 판단하는 주관은 쾌감을 느끼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고통과 새로운 쾌감이 뒤섞인 숭고라는 감정이 출현한다.

 

칸트의 숭고 개념은 쉴러에게 전달된다. 쉴러는 숭고의 개념을 칸트와 마찬가지로 설정하는데 다만 마지막에서 칸트가 이념이라고 한 것을 도덕법칙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쉴러에서 숭고의 감정은 도덕법칙이 주어진 대상에서 실현되는 도덕적 감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쉴러는 이를 격정적 숭고라 규정하면서 이를 그리스 비극와 현대 비극을 포괄하는 비극론의 토대로 삼았다.

 

3) 료타르에서 숭고

숭고의 개념이 미학에서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료타르에 와서이다 그는 칸트의 숭고 개념에 기초해서 20세기 중반 아방가르드 예술을 해석했다. 그가 그 대표적 작품으로 들고 있는 것이 바넷 뉴먼의 작품들이다.

 

그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리얼리즘적인 예술이 지닌 재현의 체계를 해체했다고 한다. 리얼리즘은 재현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재현은 이미 어떤 사유의 구조를 전제로 하여 나오므로, 재현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여줄 수 없다. 재현은 구조적 제약 때문에 그 구조 밖의 대상을 시야에서 배제하며 진리를 왜곡한다.

 

재현의 근저에 놓인 사유 구조는 은폐되어 있으므로, 재현이 마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자아낸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대상의 재현 속에서 대상을 재현하는 과정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재현의 한계를 폭로하고 재현 자체를 해체했다.

 

아방가르드는 재현을 해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아방가르드는 재현의 체계 속에서 억압되고 드러나지 않았던 순수한 대상 즉 사건이 재현을 해체하면서 드러나게 될 것으로 믿었다. 그 순수한 대상은 칸트의 물 자체처럼 다만 있을 뿐이며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이지만 동시에 진리를 암시하는 빛이 된다. 이런 점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은 해체의 고통과 동시에 진리가 암시되는 쾌감을 혼합하는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료타르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발전 선상에서 등장한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배태되는 것으로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와 마찬가지로 재현의 체계를 해체하는 데 다만 아방가르드가 그 해체를 통해 진리를 암시하는 빛을 발견하려 했던 것과 달리 재현의 체계를 해체하는 것 자체로 머무른다.

 

료타르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방가드르처럼 진리의 빛을 찾아 현시할 수 없는 것을 현시하려는 엘리트적인 예술을 추구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재현을 해체하면서 그 너머 무엇을 현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예술을 다만 해체에 머무르게 하려는 것, 그런 고통을 즐겨 인수하려는 삶을 료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숭고라고 명명한다.

 

4) 헤겔에서 숭고의 개념

칸트에서 료타르에 이르기까지 숭고의 개념은 감정의 차원에서 규정되었다. 숭고는 두 가지 감정 즉 불쾌와 쾌감의 혼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쾌의 감정은 대상의 무한성, 해체를 전제로 하며 쾌는 이념과 초월적 진리에서 나온다.

 

헤겔의 경우 숭고의 개념은 감정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는 숭고를 기호로서 예술작품이 그 의미에 해당하는 이념과의 상징적 관계에서 찾는다. 이런 상징적 관계는 본질적으로는 단절되어 있으며, 이런 단절은 수수께끼적인 힘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이런 단절을 넘어서려는 가운데 유사성을 통한 매개를 찾아 본래적 상징이 출현하지만, 본래적 상징을 통해서도 의미와 상징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상징이 표현하려는 의미는 추상적이며 무규정적인 이념인 한에서, 상징을 통해서 그 이념에 도달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상징적 예술이 발전하면서 의식적으로 양자를 일치시키려는 필사적인 시도가 등장하게 되니, 이것을 헤겔은 곧 숭고라 한다.

 

칸트나 료타르처럼 숭고를 감정의 차원에서 찾는다면, 숭고의 예술은 어느 시대나 가능하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현대의 비극도, 18세기 낭만주의나 20세기 모더니즘도 숭고의 감정이라는 차원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숭고를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기호와 그 의미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 의미가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이념인 한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하므로,  헤겔은 숭고의 예술을 역사적으로 상징주의 시대로 한정한다. 물론 고전주의 시대나 낭만주의 시대에도 감정적으로는 쾌와 불쾌가 뒤섞인 감정이 있지만 이런 예술형식에서 기호와 그 의미 사이의 관계(현상이나 가상으로서 예술)는 상징주의 시대(상징적 예술)와 다르므로, 이런 예술은 숭고의 예술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에서 고대 비극이나 근대 비극은 비록 감정적으로는 숭고감을 주지만 이런 예술이 숭고의 예술은 아니다.

 

칸트의 숭고 개념과 헤겔의 숭고 개념이 이처럼 구별되지만, 칸트에서 숭고감의 전제가 되는 반성판단은 헤겔에서처럼 기호적 관계로 재해석할 수 있다. 즉 어떤 무규정적인 것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신)를 지시하는 것으로 된다면, 여기서 무규정적 대상과 규정할 수 없는 존재 사이의 관계는 상징적 기호의 관계가 된다. 그렇게 본다면, 헤겔의 숭고 개념이 나오니, 칸트와 헤겔의 차이가 멀지는 않다고 하겠다. 헤겔은 감정적 차원을 부차적으로 보는 반면, 칸트는 감정적 차원을 본질적으로 본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5) 숭고의 두 가지 방식

칸트나 료타르에서 숭고의 감정이 출현하는 대상은 무규정성을 지니거나 해체적인 것에 한정된다. 그러나 헤겔은 기호와 이념 사이의 관계 속에서 숭고의 개념을 찾으려는 가운데, 숭고의 개념을 이원화한다.

 

헤겔은 숭고의 예술을 긍정적 숭고와 부정적 숭고로 이원화한다. 전자는 곧 범신론적 상징인데, 여기서 신은 자연의 감각적 형상을 통해 표현되지만, 이 형상이 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유사한 감각적 형상을 반복하거나 감각적 형상을 과장한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나는 흐르는 물속의 맛이며, 태양과 달 속의 광채이며, 성전 속의 신비로운 낱말이며, 남성 속의 남성성이며, 대지 속의 순수향이며, 불꽃 속의 광채이며, 모든 존재 속의 생병이며, 고행자 안의 고행이며, 생명체 안의 생명력이며, 현자 안의 지혜이며, 광명체 안의 광채이니라.”[4]

 

헤겔은 이런 숭고한 상징의 정점에서 유대교와 마호메트교의 종교적 문학예술이 출현한다고 본다. 유대교와 마호메트교는 신은 초월적이며, 추상적 무규정적이므로 구체적 형상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도 지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유대교와 마호메트교는 신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신은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 있으니, 그것은 언어적 표상을 통해서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유대교나 마호메트 교에서 신은 구체적 형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나이다.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베인 바가 되어 시들고 마나이다. 우리가 그처럼 빨리 소멸되니 주께서 노하시어 우리가 그처럼 갑자기 사라지니 주께서 근심하나이다.”[5]

 

헤겔의 긍정적, 범신론적 숭고와 부정적 초월적 숭고는 칸트가 구분했던 두 가지 숭고 즉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와 비교될 수 있다. 긍정적 숭고는 감각적 형상을 무한히 반복하는데,수적 무한성 역시 동일한 크기의 반복이니, 같은 의미를 지닌다. 또한 칸트의 역학적 숭고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신에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도달하려는 헤겔의 부정적 숭고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1] 버크는 실재하는 위협에서 고통을 느낀다고 했지만 칸트는 이런 위협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의 발동을 통해 합리적으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위협으로 생각했다. 

[2] 전자는 상상력의 포섭[apprehension]의 운동이며 후자는 상상력의 총괄[comprehension]의 운동이며 달리 말하자면 전자는 전진의 운동이라면 후자는 역진의 운동이다.

[3] 칸트, 판단력 비판, 이석윤 역, 박영사,1974, 125쪽

[4] Krischna, Bhagawadgita56, Lect. VII, Sl. 4 ff. 헤겔 미학강의 1, 496쪽 재인용

[5] 시편, 104편, 5-7절. 헤겔 미학 강의1, 508-509쪽

 

헤겔미학산책11- 상징적 예술 형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1- 상징적 예술 형식

 

1) 고대 제국의 역사

헤겔은 예술의 형식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누었다. 상징적 예술형식과 고전적 예술형식, 낭만적 예술형식이다. 각자에는 고유한 표현적 기호가 존재한다. 즉 상징과 현상 그리고 가상이다. 헤겔이 처음 미학을 강의했던 하이델베르그 시절 그는 예술의 역사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구분했을 뿐이다. 후일 베를린 시절에 이르러 그는 상징적 예술을 추가하여 예술의 역사를 세 가지 단계로 구분했다.  

 

헤겔이 상징적 예술형식의 시대로 잡은 시대는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등 초기 도시국가에 기초하여 발전한 제국이다. 이 시대 사회는 자연적인 혈연 관계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다. 오늘날 보면 이런 발전 과정은 엥겔스가 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엥겔스에 따르면 이 시대 사적 소유가 발전하면서 부족이 해체되고 도시국가가 출현했다. 도시국가 내에서 부족은 지역으로 새로이 편성되었는데, 사적 소유가 더욱 발전하면서 상당히 평등했던 성원들은 분화하면서 왕과 귀족, 평민의 위계 질서가 출현했다.

 

도시국가 사이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노예가 생산을 담당하며, 부유한 귀족의 잉여를 바탕으로 사치품을 위한 원격지 무역이 출현하면서 다른 도시 국가에서 이주민이 들어왔다. 이주민은 처음에 비록 노예는 아니지만 아무 정치적 권리가 없었으나 점차 정치적 권리를 획득했다.

 

도시국가 사이에는 쟁패가 일어나 한편으로 연합이 이루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화가 발생한다. 도시국가 사이의 연합조차도 상당히 불평등한 종속관계에 있었다. 그것이 곧 고대 제국이었다.

 

물론 헤겔이 엥겔스가 설명한 도시국가의 역사적 발전을 알았을 리가 없다. <역사철학강의>에서 헤겔은 이 시대 역사를 서술하지만, 실제 역사는 거의 없고 오히려 종교에 관한 설명이 위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헤겔이 실제 역사를 탐구하여 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대 종교에 대한 해석을 통해 거꾸로 짐작한 역사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헤겔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베다,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앙 등을 해석하면서 이 시대고대 제국의 역사를 드러내는데, 심지어 그 가운데 페르시아와 인도, 이집트 사이에 일정한 발전 단계조차 설정한다. 그의 기준은 모호하지만 대체로 본다면 도시 내부에서 시민의 자유와 도시 사이의 평등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기준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제국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도시 내부에서는 강제적 억압 관계가 지배적이며 도시 사이에는 불평등한 종속 관계가 있었다. 강제성과 불평등성이 이 시대 국가의 기본적 원리 즉 이념을 이룬다. 헤겔은 강제적이며 불평등한 이념을 ‘무규정적 추상적 통일성’으로 규정한다.[1]

 

이 시대 이념은 절대정신의 세 형태인 예술, 종교, 철학 가운데 우선적으로 종교적 형태로 출현하니, 이 시대 신은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거대하고 무한한 힘을 지닌 존재로만 인식되며, 개인은 그 앞에서 공포심을 느끼며 복종한다.  

 

2) 수수께끼적 상징

이 시대 예술은 종교에 비해서 보면 부차적이지만 나름대로 이념을 독자적으로 표현하니, 그 표현의 방식이 곧 상징[2]이다. 헤겔은 상징 속에 들어 있는 두 가지 계기를 구분한다. 상징에서 감각적 형상(기호)은 자기를 넘어선 어떤 이념(의미)을 지시하는데, 양자가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될 때 양자의 관계는 상징[3]으로 규정된다.  

 

처음에 양자의 일치는 전적으로 우연적으로 일치한다. 이런 우연적 일치는 외면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치를 말하는데 주로 문화적, 관습과 같은 자의적인 힘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 이런 우연적 외면적 일치인데도 불구하고 상징은 일정한 문화 관습 내에 있는 사람에게 마치 직접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에게 그 의미는 너무나 당연하여 마치 자연적으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누구나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런 직접적 관계로부터 상징이 지닌 마술적, 신비적 성격이 출현한다.

 

그러나 양자가 지닌 자의적이며 우연적 관계는 그런 문화 관습 외부에 있는 사람에게 바로 드러난다. 그는 그 상징이 지시하는 의미를 찾기 힘들다. 그에게 상징은 그 의미가 감추어진 채 있으며, 그것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기호이다. 헤겔은 수수께끼 같은 상징의 대표적 예를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상징으로 본다. 페르시아에서 신의 상징은 곧 빛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통일성 즉 어떤 물질 중의 하나가 보편성 통일성을 지닌 것에 머무르고 있다.

 

헤겔은 인도에서 등장한 상징은 환상적인 상징인데, 이는 페르시아의 상징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본다. 여기서 페르시아에서 마치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였던 상징의 내부에서 기호와 의미가 분리되면서, 환상을 통해 두 가지를 다시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여기서 결합은 아직 종잡을 수 없는 혼동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형상의 규정성은 갑자기 반대의 것으로 변하기도 하고 혹은 턱없이 커졌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마계에 사는 것과 진배없다.”[4]     

 

이런 환상의 유희를 <역사철학강의>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꿈꾸는 인도인은 우리가 유한한 개체라고 부르는 어떠한 것도 되고 동시에 무한하고 무제한적인 보편자로 승화하여 신이 되기도 한다. 인도의 세계관은 극히 일반적인 범신론이고 더욱이 사고에 바탕한 범신론이 아니라 상상력에 바탕한 범신론이다.”[5]

 

3) 신의 죽음

상징주의 예술 형식이 발전하면서 의미와 상징의 우연적이고 외면적인 일치는 점차 본질적이고 내적인 일치로 발전하게 된다. 예술가는 의미와 형상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을 찾으려 한다. 즉 자신이 지시하는 의미와 유사한 어떤 성질을 가진 형상을 상징으로 선택한다. 이렇게 되면서 감각적 형상과 그 의미 사이에는 어떤 친연성[Verwandtschaft]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친연성의 발견을 통해 상징은 ‘본래적 의미에서 상징’으로 발전하게 된다.

 

수수께끼로서 상징에서 본격적 상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흥미롭게도 헤겔은 신의 죽음이라는 상징을 거론한다. 이집트 신화에서 등장하는 오시리스의 죽음이나, 시리아의 아도니스의 죽음이라는 신화, 프리기아에서 출현해 나중 그리스 및 로마로 건너가는 대지의 여신 키벨레의 죽음과 같은 신화가 여기서 다루어진다.

 

헤겔은 처음 공포의 신이 인간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신의 죽음이라는 신화가 등장했다고 한다. 여기서 죽음은 신이 지닌 자연적 요소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종교적으로는 신의 죽음과 더불어 마침내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지닌 신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신으로 발전하고, 예술적으로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본격적인 상징으로 바뀐다고 한다.  

 

본래적 의미에서 상징은 이집트에서 본격적으로 출현한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는 자연 속에서 정신이 출현하려는 충동이 솟구쳐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충동이 여전한 자연의 힘에 갇혀 있어 이를 뚫고 나오지 못한다.

 

 “우리가 이집트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를 객관화하려는 무한한 충동을 갖는 아프리카적인 과단성이다. 그러나 정신 주위에는 철로 된 고리가 휘감겨 있어, 정신은 사상 안에서 자기 본질을 자유로이 자각하지 못하고, 정신의 본질은 단지 과제 또는 수수께끼로 내세워져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6]

 

헤겔은 이집트에서 본래적 상징의 출발점으로서 피라미드를 들고 있다. 피라미드는 곧 사자의 거처인데, 그것은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영혼이 자연과 구별되는 독자적 실재임을 자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혼은 육체를 벗어나지 못하니, 육체는 미이라가 되어 영원히 보존된다.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상징이 인간의 육체와 동물의 얼굴을 한 동물 신인데 헤겔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동물은 생기가 있고 합목적적으로 움직이지만 인간과 달리 자각을 결여한 채 자기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바로 이런 동물을 숭배한다는 것은 곧 이집트의 정신 즉 육체로부터 정신이 솟아나오지만 아직 육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집트에서 대표적 상징 중의 하나인 스핑크스는 동물의 몸을 하지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 동물신의 단계보다 발전된 상징을 보여준다. 그만큼 인간의 자기 이해가 발전했으며 이를 통해 자유가 확산되고, 도시국가가 평등이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결론

이집트의 예술 형식을 상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후기 신왕국 시대 예술 작품은 상징적 요소가 거의 사라지고 인체의 리얼한 모습이 출현한다. 물론 양식화되어 있으며, 생동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며, 재현적이라기보다는 구성된 것에 머무르지만 이미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예술의 초기 형태와 닮아간다.

그렇다면 이집트 예술을 상징적 예술 형식 내에 가두어 놓는 헤겔의 관점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헤겔의 시대 구분을 엄격하게 볼 필요는 없다. 헤겔은 상징적 예술 형식의 예로서 이집트 초기 예술작품을 들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헤겔은 낭만주의 시대에 해당하는 기독교나 마호메트 교의 작품 가운데서도 상징적 예술을 발견한다. 다만 상징적 예술 형식은 고대 제국 시절 그 정신을 표현하니 그 시대 가장 많이 발견된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만일 이집트 후기에 등장하는 리얼한 작품을 본다면 헤겔 역시 이를 고전주의 초기 정도로 해석했을 것이다. 역사철학강의를 보면 헤겔은 이집트 역사에서 정신의 충동이 솟구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니, 이집트 후기 예술은 이런 정신의 충동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 <역사철학강의>에서 고대 역사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이집트의 순서로 서술된다. 중국의 경우 황제가 출현했음에도 혈연적 가족 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인도 역사에 대한 파악은 독특하다. 인도의 경우 자연적 부족은 해체되고 시민이 직업과 계급 즉 카스트제도로 재분배되었지만, 이런 카스트 제도가 자연 필연적인 것으로 고정되면서, 인도에서는

추상적인 통일, 정신적 통일이 결여되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다만 분화의 차이가 자연적이어서 유기적인 공동생활에서 하나의 영혼을 움직이거나 자유로이 만들어 내거나 하지 않고 영혼을 돌처럼 굳어지게 하고 그 경직성 덕분에..”(역사철학강의, 권기철 역, 동서문화사, 1978, 146쪽)

페르시아는 최초의 세계 제국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이 점이 조로아스터의 신인 빛이라는 상징으로 출현한다고 한다. 헤겔은 페르시아는 추상적 통일에 머무른다고 규정한다.

이집트는 추상적인 통일(정신)과 구체적 구별(자연)이 모순을 이룬다고 할 정도로 구체적 구별의 발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헤겔이 이집트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집트에서 각 개인이 위계적 질서에 복종하면서도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법적인 권리를 들고 있다. 양자가 직접적인 통일을 이룰 때 고전주의 시대 즉 그리스 로마의 역사가 시작하니, 이집트는 그 직전의 사회이다.

“[스핑크스의 모습은] 정신이 자연 위로 나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서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질곡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진 것은 아님을 나타낸다.”(역사철학강의, 197쪽)

[2] 괴테는 상징이라는 개념을 알레고리와 구분하면서, 알레고리가 이념과 그 기호 즉 감각적 형상 사이에 관습적인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면, 상징은 이념과 기호 사이에 직접적인 일치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상징에 대한 괴테의 용법은 20세기초 상징주의에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상징은 오히려 괴테가 말한 알레고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념과 기호는 관습적으로 일치하는데, 헤겔이 상징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런 일반적 용법에 가깝다.

[3] 미학강의에서 헤겔은 상징의 발전을 역사철학강의에서 순서와 달리,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의 순서로 서술한다. 헤겔은 각 제국에서 지배적인 상징의 유형을 구분한다.

[4] 미학강의 1, 456쪽

[5] 역사철학강의, 143쪽

[6] 역사철학강의, 204쪽

 

헤겔미학산책10-예술과 정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0-예술과 정치

 

1) 예술 형식

앞에서 이념과 예술적 작품 사이의 표현적 관계에 대해 일반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부분은 헤겔 미학강의 1권의 핵심적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한 것이다. 이제 미학강의 2권의 내용을 살펴볼 차례이다.

 

2권에서 헤겔은 예술의 시대적 발전을 다루고 있다. 헤겔은 이런 발전을 3 단계로 나누는데, 상징주의, 고전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이다. 상징주의는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등의 예술을 다루며, 고전주의는 그리스 로마 시대 예술을 다룬다. 낭만주의는 기독교가 출현한 중세 이후 근대까지 예술을 포괄한다.

 

헤겔은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를 예술의 일반적 형식이라고 말하는데, 이 형식은 이념을 표현하는 기호의 구체적 방식을 규정한다. 상징주의의 기호는 상징이며, 고전주의의 기호는 현상이고, 낭만주의의 기호는 가상이다.

 

각 기호의 구체적 규정은 앞으로 제시되겠지만, 여기서 간략하게 말하자면, 상징은 기호와 의미 사이에 수수께끼적인 관계가 지배적인 것을 말하며, 현상은 기호와 의미 사이에 유사성이 지배적인 경우를 말한다. 현상은 기호가 의미를 이중화하는 것으로서 표현에 가까운 개념이 된다. 마지막 가상은 자체 내에 자기를 부정하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스스로 자기를 넘어가는 기호이다.

 

2) 정신의 발전

헤겔의 예술론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이 이념을 어떤 형식으로 표현하는가는 작가의 주관적 선택에 달려 있지 않으며 곧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예술론은 아놀드 하우저와 같은 예술사론과 비교될 수 있다.

 

하우저는 예술의 역사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는 예술을 다각도에서 살펴보는데, 예술은 그 시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심, 특히 예술의 주요 수요층의 관심, 그 시대 예술적 노동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기술적인 발전, 그 시대 출현한 종교 철학 등 이데올로기 등의 영향을 받는다.

 

그에 반해서 헤겔은 특히 예술의 표현 형식에 주목하며, 이런 예술 형식의 발전은 이념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규정성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여기서 헤겔은 예술이 표현하려는 이념이 역사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다시 말하자면 이념은 곧 절대정신이다. 각 시대 사회에는 그 시대의 사회적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정의가 있다. 헤겔은 이를 ‘실체’라고 말한다. 이런 실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적 의지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 공동체적 의지가 곧 국가이다. 이 국가가 곧 헤겔에서 ‘정신’이다.

 

각 시대 정신은 최종적으로는 절대 정신으로 발전한다. 최종적 절대정신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인 삼위 일체의 체계이다. 이것은 헤겔이 법철학에서 묘사한 이상 국가이다. 정신은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세 단계를 거쳐간다.

 

첫 번째 단계가 전체가 추상적으로 통일을 이룬 국가이니,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에서 출현한 전제 국가가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계가 그리스, 로마에서 출현한 국가이다. 이 국가는 인륜성과 시민이 균형을 이룬 민족국가이다. 세 번째 단계는 로마 황제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어 근대에 이르러 완성된 국가 즉 시장에서 보듯이 인격의 자유로운 상호 관계 위에서 출현한 소외된 국가이다.

 

3) 국가의 원리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국가의 단계적 발전을 매개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헤겔에서 그 원리는 관념론적으로 규정되는데, 곧 의지의 자유가 발전하는 단계이다. 자유의지의 자각이란 곧 개인이 자연적 의지 즉 욕망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적 정의를 자신의 의지의 목표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실천적 의지의 내적 자각에 해당한다.

 

이런 자유의지가 사회적으로 펼쳐지면 국가의 원리가 된다. 즉 욕망 상태에서 사회는 거꾸로 억압적인 질서가 출현하며,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회는 그만큼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이런 자유의지의 자각은 세 단계에 걸쳐 일어난다.

 

아직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대한 자각이 출현하지 않던 시대, 국가는 전제적으로 지배되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 개인은 출현하지만 관습적으로 국가에 복종한다. 이런 습속에 기초한 국가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 또는 민족국가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인격 즉 개인의 자유의지가 출현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 때, 이 보이지 않는 손이 곧 소외된 국가이다.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개인의 자유의지가 발전하는 단계가 곧 각 시대 정신을 규정하는 것이니, 각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의 형식 역시 이런 자유의지의 발전 단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겠다.[1] 이상의 이야기를 알기 싶게 다음과 같이 표로 만들어 보았다.

 

예술형식 기호 정신 국가의 원리
상징주의 상징 전제국가 강제적 지배-개인의 자각 결여
고전주의 현상 민족국가 개인의 출현, 그러나 관습적 복종
낭만주의 가상 소외국가 자유의지, 인격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

 

4) 자유의지와 표현 기호

그런데 헤겔이 그 시대 국가의 원리 즉 자유의지의 자각 정도가 예술의 표현 형식인 기호의 방식을 결정한다고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얼핏 생각하면 자유의지의 자각은 예술의 표현적 기호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과연 양자 사이에 연관이 가능할까?

 

그런 연관은 실제 예술사에서 나오는 구체적 예를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에 앞서서 헤겔에게서 양자의 연관성을 개념적인 차원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유의지에 대한 내적 자각이란 곧 실천적 의지에서 개인과 전체(사회적 정의)의 관계이다. 예술적 기호 즉 작품과 이념 즉 국가 사이의 관계는 실천적 의지에서 개인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상동적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실천적 의지의 양상은 표현 즉 타인에게 전달하는 양상과 상동적이다. 실천적 의지의 차원과 표현적 전달의 차원은 서로 다른 차원이지만 마치 자극과 전기 사이의 동조관계와 같이 서로 동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각 상태는 수수께끼적인 상징의 관계와, 개인의 관습적 복종은 곧 유사성에 의한 현상적 관계와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개인의 상호 관계 뒤에 보이지 않는 지배는 곧 가상의 관계와 상동적이다.

 

국가의 원리와 예술의 원리 사이의 상동성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예술은 그 시대 일반화되어 있는 자유의지의 내적 자각 상태에 의존한다. 예술가와 대중은 이런 일반적인 자유의지의 자각 상태를 통해 서로 관계한다. 동일한 자유의지의 상태가 예술가와 대중의 내면 속에 잠재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가의 표현은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가 시대에 뒤지거나 시대를 뒤지거나 또는 초월한 표현방식을 선택할 경우, 대중은 자신의 시대 표현방식에 따라 해석할 뿐이니,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 어떤 예술가가 종교화를 그렸을 때, 누구도 감동받지 못할 것이다. 또 그리스 시대 대중에게 14세기 고딕 시대 성화를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어떤 끔찍함을 느낄 뿐이다.

 

5)

이 점에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술과 정치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의지의 자각 정도가 한편으로 국가의 원리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 예술의 형식과 상동적이니, 예술은 직접 간접적으로 국가의 원리 즉 정치적 관계와 연관된다.

 

그 관계는 일단 간접적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원리와 예술의 형식은 자유의지의 자각 정도를 매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전혀 무관한 예술조차도 내면적으로는 국가의 원리와 동일한 원리를 표현한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비록 정치적 관계로부터 무관하지만, 그러나 이 시대 예술 역시 자본주의적 정치적 관계를 예술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관계는 더 직접적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의 사회에서 예술은 곧 국가적 원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상징주의 예술이나 고대 그리스 고전적 예술이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예술은 국가와 동일한 원리에서 있으니, 정치와 얽혀 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양자가 서로 다른 독립적 차원이지만, 그럼에도 서로 동조한다는 것은 부정할 길이 없다. 예술은 구시대 국가에 얽혀 있기 때문에 욕을 먹지만 또는 발전된 자유의지를 전파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배태시기기도 한다.

[1] 물론 예술형식은 국가의 역사적 발전과 단순하게 대응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술의 특정한 형식은 특정한 이념이 지배하는 시대에 가장 번성하며 전형적으로 출현한다. 그렇다고 그 이전 시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이전 시대에는 다만 미숙한 형식으로 출현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시대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때는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는 일반 원리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종속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상징주의 시대에서 이미 고전적 형식과 낭만적 형식이 주변에 출현하여 장차 핵심으로 부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상징주의는 이집트 인도에서 가장 번성했지만, 고전주의 시대나 낭만주의 시대에서도 출현했다. 고전주의 시대에서는 의식적 상징 표현으로, 낭만주의 시대에는 문학적 비유로서 등장했다.

호퍼와 정신분석 11-원초적 장면[흐림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11-원초적 장면

 

1)

앞에서도 말했듯이 호퍼는 1930년대 이르러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 시기가 결혼 전반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특이하다 할 수 있는데, 여러 해석자는 그의 정신적 고통을 그 시대 상황과 관련한다. 그 시대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세계경제공황의 시기였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시기, 호퍼의 정신적 고통은 그런 시대적 상황보다는 오히려 호퍼의 심적 욕망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상하게도 1940년대로 들어가면서 호퍼의 정신적 고통은 치유되고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 시기 미국에서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으로 경제적 상황이 상당히 나아진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호퍼의 예술적 소재가 사회적 상황과는 별 관련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게 해석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호퍼의 정신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그의 치유와 회복 역시 그의 심적 욕망 구조에서 원인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 시기 호퍼가 그린 그림들을 살펴보자. 가장 눈에 뜨이는 그림은 원초적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대표적으로는 1939년 그려진 뉴욕 극장과 1942년 그려진 밤을 지새우는 사람[Nighthawks] 1943년 그려진 호텔 로비라는 그림이다.

 

필자가 이 세 가지 그림을 주목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세 인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두 인물은 남녀인데, 젊기도 하고 늙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 무심관심하게 보이지만 서로 가까이 있어 심지어 약간의 신체적 접촉조차 존재한다. 특징적인 것은 또 하나의 인물이다. 이 인물은 여성이기도 하며 남성이기도 한데, 그는 자기 속에 몰두하고 있어서 자기 앞에 보이는 두 사람에 대해 애써 무관심하게 보이지만, 어쩌면 마치 곁 눈짓으로 감시하는 듯하다.

 

2)

우선 1939년 그려진 뉴욕 극장이라는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편은 관객석이고, 화면의 절반이 함께 보인다. 관객석에서 나이든 남녀의 뒷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머리가 희끗하며 여자는 모자와 외투를 보아서 젊은 여성은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열에 앉아 남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객석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 왠지 두 사람이 가까운, 심지어 부부인 것처럼 보인다.(호퍼가 그린 스케치에서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부부라 하기에 무리가 없다.)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진 채로 산과 하늘이 보이는 영화 화면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어두우며,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명멸하고 있을 뿐이다. 왼쪽 화면의 지배적 색조는 녹색이다.

 

반면 오른쪽에는 금발의 젊은 여자가 있다. 아마도 객석 안내원으로 보인다. 입고 있는 푸른 제복이 이를 암시하다. 그녀는 턱을 팔에 괸 채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벽에 기댄 그녀를 향해 머리 위에서 밝은 조명이 비치고 있다. 복도에서 금발의 여자 이상으로 시선을 끄는 것은 계단을 가리는 붉은 휘장이다. 

 

이 장면은 객석의 장면과 대조적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영화관에서 관객석과 안내원이 있는 복도는 같이 붙어 있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왜곡되어 있어 두 장면이 서로 통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보면 자기 속에 침잠해 있는 안내원은 어쩌면 관객석의 나이든 두 남녀를 보고 있는 듯하다. 객석은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명멸하고, 복도는 실내등으로 환하다. 후자가 현실과 의식 속의 장면이라면 전자는 기억 속의 무의식의 장면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 그림을 기억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을 함께 그려낸 장면이라 본다면,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것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흔히 정신분석학에서 원초적 장면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원초적 장면은 아이가 목격한 또는 목격했다고 믿는 부모의 성관계 장면이다.

 

3)

이번에는 1942년 그려진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호퍼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길 모퉁이 주변의 어둠에 대조되어 더욱 환하게 빛나는 카페에 네 사람이 있다. 정면에 검은 양복의 입고 모자를 쓴 남자와 붉은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은 입은 옷 매무새로 보아 호퍼가 자주 그린 도시 오피스 사무원으로 보인다. 그들은 서로 나란히 앉아 있고 심지어 남자의 왼쪽 손과 여자의 오른쪽 팔꿈치가 서로 부딪힐 정도로 가깝지만 서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남자는 무슨 상념에 빠져 있고 여자는 무료한 여성이 자주 그렇듯이 자신의 손톱을 바라보고 있다.

 

흰 옷을 입고 수병 모자를 쓴 남자는 그들을 쳐다보는데, 무슨 말인가를 하는 듯하지만, 두 남녀는 그 말에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반면 카페의 왼쪽에 그려진, 오피스 사무원의 복장인 검은 양복과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 우리로서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또는 생각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의 자세는 한편으로는 자기 앞의 두 남녀를 바라보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스스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주변의 어둠과 녹색의 색조 속에서 네 명의 인물은 모두 고립되어 있는 듯하지만 또한 조명 등의 빛을 받아 붉은 색으로 빛나는 카페의 탁자는 이들을 서로 연결해 주고 있는 듯하다.

 

네 명의 인물이 모두 비슷한 나이의 장년이어서 이 그림을 원초적 장면에 등장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비추어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관계 자체는 서로 가깝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남녀와 이를 흠모하듯 또는 질시하듯 훔쳐보는 사람이라는 관계의 성격은 원초적 장면과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 역시 원초적 장면의 변형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4)

원초적 장면에 대한 유사한 변형은 1943년 그려진 호텔 로비라는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두 남녀가 나이든 부부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붉은 옷을 입은 여자는(위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여자는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늙은 자신의 남편을 쳐다보고 있다. 반면 단정한 차림으로 코트를 손에 걸친 나이든 남자는 상의 주머니에 왼손을 넣은 채 무언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듯하다. 가방이 없는 것을 보아 그들은 이미 호텔에 투숙한 것 같다. 아마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부른 택시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이다.

 

오른 편에는 금발의 젊은 여성이 다리를 꼬아 쇼파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햇빛이 비추어지고 있으며 햇빛은 펼쳐진 책 위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반면 그녀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 우울해 보인다. 그녀는 책에 몰두해 있지만 뉴욕 극장의 안내원에 마찬가지로 자기 앞에 있는 노 부부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일어나는 이유는 호퍼가 이 그림에서 두 장면을 몽타주 했기 때문이다. 그림의 왼 편과 오른 편은 시각적으로 상이하다. 왼 편의 경우의 시각은 정면에 가깝다면 오른 편 시각은 상당히 위쪽에 있다. 사실은 서로 부딪힐 일이 없는 두 장면이 몽타주 됨으로써 서로 부딪히게 되고 그 결과 마치 두 장면의 인물들이 서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그림 역시 앞의 두 그림과 마찬가지로 원초적 장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5)

프로이트에 따르면 원초적 장면은 아이에게 깊은 정신적 외상을 주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거세라고 했다. 이를 통해 아이는 남근기에서 성기기로 결정적으로 이행하게 된다.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신을 대타자의 욕망 대상이라고 보는 실재계로부터 벗어나 대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자신도 욕망하는 상징계로 들어가게 된다.  

 

호퍼의 경우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상상적 동일화를 거쳐 실재계로 발전했다. 그 밑바닥에는 실재 즉 어머니와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거세 공포가 있었다. 이제 뒤늦게 이르러 마침내 호퍼에게서 거세 즉 단절이 일어나게 된다. 호퍼는 원초적 장면을 통해 마침내 자신의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호퍼는 이제 독립된 자아로서 이 험난한 세상에 던져져서 스스로의 힘으로 견뎌나갈 수밖에 없다.

 

 

헤겔미학산책9-예술과 시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9-예술과 시대

 

1)

예술과 관련해 흥미로운 문제는 예술과 시대 사이의 관계이다. 필자는 역사를 좋아해 TV 사극은 대체로 빼놓지 않고 보는데, 요즈음 사극은 시간과 장소는 과거이지만 인물의 생각과 행위는 현대인의 모습이라서, 가끔 웃음을 자아낸다. 주인공이 조선 시대 옷을 입고 말을 쓰면서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사랑을 전개하는 것 같아서이다. 이런 팩션[faction] 사극이 발전해서 요즈음엔 인물이 옛날과 현대를 타임머신을 타고 오가는 표전[fusion] 사극이 등장했다.

필자가 좋아하는 사극은 그 시대 인물의 정신적 고투와 삶의 결단을 그 시대로 돌아가 보여주는 말하자면 정통 사극이다. 그런 정통 사극으로서 필자가 아직도 기억하는 사극으로는 지금 이름도 잊었지만 한명회가 나와서 ‘내 손안에 있소이다’하고 호방하게 웃던 사극이다. 거기서 주인공 수양대군은 조카에 대한 의리와 권력에 대한 야심 사이에 오랫동안 흔들리는 데, 필자는 그것이 수양대군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가족적 의리와 권력에 대한 야심 사이의 충돌이 조선 시대 한 영웅의 정신적 고투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인가 의심스럽다. 그런 충돌은 그리스 시대 비극 예를 들어 안티고네 등에서 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안티고네에서는 가족의 의리를 지키려는 안티고네와 국가의 법을 지키려는 클레온이 충돌한다.

그런데 조선시대를 그리스 시대와 같이 볼 수 있을까? 조선 시대는 이미 고대 민족국가가 아니라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던 중세 국가가 아닌가? 왕은 예를 들어 형제의 난에서 승리한 태종에게서 보듯이 더 이상 가족적 의리 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는다. 수양대군의 진짜 모습은 어쩌면 가족적 의리는 그저 입에 발린 말이고 권력에 대한 야심만이 온통 지배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필자가 정통 사극이라고 본 것도 엄밀하게는 현대화된 팩션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대체 정통 사극이란 게 가능한가 자체가 의심스럽다. 설혹 그런 정통 사극이 있어 과거의 인물이 과거의 정신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모습 또한 우리 현대인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수 있을 것이 아닐까?

 

2)

이 점과 관련하여 헤겔은 세계 상태를 논하면서 시대와 예술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 헤겔은 먼저 작품의 구체적 구조(즉 이상의 규정성)를 이루는 요소를 탐구하는데 그는 그 구조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 요소는 세 가지 즉 세계 상태, 상황, 행위이다.

세계 상태란 예술 작품이 그 속에서 작성되고 전달되는 세계 즉 그 시대를 의미한다. 헤겔에서 모든 작품은 자기가 속한 세계 상태 속에 내재하는 고유한 정신(이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어서 헤겔은 상황을 다루는데, 세계 상태가 전체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상황은 작품의 소재가 전개되는 특수한 장소를 말한다. 세계 상태 속에는 이념의 내적 통일성의 측면이 부각된다면 상황에 이르면, 이념의 분열이 출현한다. 여기서 특수한 상황과 보편적 세계 상황의 대립은 그 상황 속에 처한 인물과 인물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충돌[1]로 나가게 된다. 마지막은 곧 행동이다. 인물의 행동은 상황에서 출현한 분열과 대립을 촉발하여 충돌로 나가게 하는 계기를 말한다..[2]

 

3)

이 가운데 헤겔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세계 상태와 작품의 관계이다. 많은 경우 예술은 그 시대에서 소재를 끌어내지만 자주 예술은 역사 속에서 소재를 끌어낸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헤겔은 그것이 예술의 필연적 속성 때문이라고 본다.

즉 예술은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 감각적 형상을 순화해야 한다. 현실 속에서 소재를 택하는 경우 작가나 독자의 마음에 실제의 구체적 모습이 사라지지 않아, 오히려 그 속에 표현된 이념을 방해한다. 반면 역사 속의 주제에서는 오랜 시간의 망각작용으로 구체적인 실제 모습이 이미 사라지고 중요한 특징적인 모습만이 남아서 이념을 뚜렷하게 표현할 수 있다.[3]

과거 속에서 소재를 끌어내면, 여기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헤겔은 이런 충돌을 덕에 관한 두 가지 개념 ‘탁월성[arête]’과 ‘도덕[virtue]’의 구별이나, 고대인의 책임과 근대인의 책임 개념을 비교하면서 잘 보여준다.

고대 영웅 시대의 덕 탁월성[arête]은 경향성과 도덕의 직접적인 통일성이다. 여기서 개인의 욕망은 직접적으로 인륜적 법칙과 결합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아직 개인은 자기를 자각하여 인륜적 법칙을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고대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에게 나타나는 덕이 바로 이런 덕이다.

반면 인격이 출현한 중세 사법 시대 도덕[virtue]은 경향성을 억압하면서 추상적인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추상적 도덕법칙은 황제에 의해 결정되어 개인에게 강요된 것이니, 개인의 인격적 존재는 자신의 자의를 전적으로 희생하고 이 도덕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는 자신이 모시는 군주로부터 이탈하여 다른 군주의 지배 아래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엘 시드라는 중세 서사시에서 등장하는 영웅의 모습이 그와 같다.

헤겔은 덕의 개념 외에 죄의식과 책임의 개념도 거론한다. 근대인의 경우 그의 책임은 자신이 직접 행위 한 결과에 제한된다. 그러므로 무지로 인해 일어난 행위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인의 경우, 예를 들어 비극 오이디푸스에서 나오듯이 자신이 모르고 행위 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죄의식을 느끼고 책임을 지게 된다. 왜냐하면 근대인은 개인으로 자각하면서 자신을 사회와 구분하는 반면 고대인의 경우, 아직 개인적 자각이 없어 개인은 사회 즉 인륜적 실체와 직접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그가 직접 행위 한 것이 아니더라도 인륜적 실체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4)

이렇게 세계 상태, 시대에 따라 작품 속 인물의 행위를 규정하는 정신적 태도가 달라지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가가 과거 속에서 소재를 구하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곤란에 부딪힌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인물을 현재적으로 해석하거나 다른 편에는 과거의 인물을 과거적으로 해석할 결과 현재의 독자에게 이해되지 않게 된다.

헤겔은 관객, 독자의 역할을 논의하면서, 과거 속의 소재를 현재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주관적 작가와 이를 오히려 과거의 관점에 충실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객관적 작가 사이의 논쟁을 소개한다.

전자의 대표적 예는 라신느이다. 헤겔은 예를 들어 <타울리스의 이피게니아>에서 보듯이 라신느가 역사적 인물을 당대 프랑스의 인물로 그려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슐레겔은 과거에 가능한 한 충실하게 묘사하기를 요구했다.

그렇다고 과거에서 소재를 구하는 것이 주는 장점도 있으니 쉽게 포기할 것도 아니다. 이런 어려움에 부딪혀 헤겔은 그 시대를 주객관적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본다. 헤겔의 말 자체는 약간 얼버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기본 개념을 이해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시대 즉 세계 상태는 이념이 드러난 것이다. 각 시대에는 고유한 이념이 있지만, 이미 그 이전 시대에도 다가오는 시대의 이념이 내재하며, 또 그 이후의 시대에도 과거 시대 이념이 한 계기로 보존되어 있다. 예를 들어 헤겔 <법철학>에 나오는 가족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보자. 가족 속에 출현한 자식 세대는 가족적 공동체를 벗어나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으로 발전한다. 또한 오늘날 국가 속에는 국가를 구성하는 하나의 계기로 포함되어 있다.

이전 시기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이후 시기에 포함되는 독특한 발전 과정은 이념의 역사에서도 적용된다. 그런 한 현재의 예술이 과거 시대에서 소재를 구하더라도 그 소재가 현재의 이념을 적어도 가능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없다. 또는 현재의 소재 속에서 과거 시대의 이념을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재 속에 과거는 한 계기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든 과거든 자신이 표현하는 이념에 적합한 소재를 찾아내는 것에 있다. 여기서 소재에서 표현되는 이념의 측면 말고 나머지 외면적인 측면에서는 그 시대의 외면적 특징을 제대로 살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면적 측면은 헤겔 말대로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측면이며, 중요한 것은 선택된 과거의 소재 속에 현재의 이념이 표현될 가능성이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4]

 

5)

헤겔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성공적인 작품으로서 괴테의 이피게니아를 들고 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타우리스의 바닷가 신전에서 어쩔 수 없이 머물고 있는 누이를 그리스로 데려오너라. 그러면 저주가 풀리리라”(헤겔, 미학강의 1, 311에서 재인용)

헤겔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원래 에우리피데스의 희극에서 이피게니아는 자신이 봉사하던 신전의 아르테미스 신상을 자신의 조국으로 가지고 돌아가서 저주에 걸린 조국을 구원한다. 그러나 괴테는 조국에서 희생된 이피게니아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저주를 푸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괴테는 이피게니아를 통해 자기 희생이라는 순수한 사랑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적 이념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1] 헤겔은 충돌의 구체적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그 자체로서 부정적인 것 예를 들어 역병이나 액운과 같은 것이다. 둘째는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인 것이 대립과 분열을 이끌어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형제나 인종의 차이가 일으키는 대립, 갈등이다.

셋째는 인륜적 실체, 즉 사회 내에 내재하는 대립과 갈등이 표현되는 경우이다. 비극 안티고네에서 혈연의 법칙과 국가의 법칙의 대립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2] 헤겔은 여기서 특히 파토스와 성격을 구분한다. 파토스는 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실체적 힘을 말한다. 반면 성격은 그런 인물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이다. 한 인물은 다양한 개별성을 지니며, 실체적 힘은 그 가운데 하나의 지배적 개별성에서 출현한다. 파토스는 동시에 다른 모든 개별성을 침투하면서 전체적인 통일성을 형성하여 하나의 성격을 이룬다. 따라서 성격은 다면성을 지니며, 그 내부에 서로 알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의 성격은 파토스를 통해 전체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성격은 “내적으로 완결된 주체”라고 하며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격의 특수성에서는 하나의 주요 측면이 지배적 측면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그 규성성 내부에는 가득한 생명성과 내실이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헤겔, 미학강의 1, 323쪽)

이런 점에서 헤겔은 “모든 힘들을 내면에 고요히 숨기는 강인한 중립성을 표현하는’”조각의 적막과 침묵”이 성격의 다면성과 통일성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예를 들어 호머의 아킬레스는 여러 성격적 요인을 지닌다. 청년으로서 열정과 활기,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애정, 적에 대한 복수심, 명예를 지키려는 분노,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 등이 복합되어 있다. 아킬레스의 파토스는 폴리스에 대한 충실성인데, 이는 주로 청년으로서의 열정과 활기에서 나타난다. 이 파토스는 아킬레스의 다른 성격적 요인을 침투하면서 아킬레스라는 성격을 이룬다.   

[3] 헤겔은 이점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과거는 오로지 기억에 속하며 기억은 그 스스로가 이미 성격, 사건, 그리고 행위들을 보편성이라는 예복으로 즉 특수하고 외적이며 우연적인 특칭성들을 내비치지 않는 예복으로 감싼다.”(헤겔, 미학강의 1, 258쪽)

[4] 헤겔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 주목하다. “역사적 외면은 인간적 보편적 요소에 견주어 대수롭지 않은 부수물로 치부되어 묘사에서 한 구석에 있어야만 한다. 이미 중세가 그런 식의 실례이니 중세는 소재를 고대에서 취하되 자신의 시대의 내용을 주입했다.”(헤겔, 미학강의 1, 371족)

또한 다음의 구절도 참조하라. ”동시에 예술가는 이러한 모습들[먼 지방, 지나간 시대 낯선 민족들로부터 얻거나 신화 관습 제도의 역사적 모습]을 다만 그의 그림의 틀로서만 이용해야 하며 반면 그 속은 그의 현재의 본질적이며 한층 깊은 의식에 맞추어야만 하니, 괴테의 이피게니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를 위한 매우 놀랄 만한 실례가 되고 있다.”(헤겔, 미학강의 1, 373쪽)

형이상학 산책 2- 구성 개념과 반성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형이상학 산책 2-  구성 개념과 반성 개념

 

1)

개념에는 다양한 차원의 개념이 있다. 우선 추상적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꽃이나 사람 등의 개념은 개별자에서 일반성을 추상하여 생겨난 개념이다. 이에 대해 너무 상식적이라 더 설명할 게 없다.

수적 개념에 관해 헤겔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헤겔에서 모든 추상적 개념은 양적인 것이다. 개별자는 이런 추상적 개념의 특정한 양에 속한다. 예를 들어 덥고 추운 것은 일정한 온도를 갖는다.

어떤 양을 다른 양으로 규정할 때, 이 다른 양이 곧 척도이다. 가장 일반적인 척도 즉 척도의 척도가 되는 것이 곧 수이다. 상품의 교환가치를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화폐인데, 수는 바로 이런 화폐와 같다.[1] 

 

2)

판단론에서 말하는 논리적 범주는 어떨까? 칸트는 12개의 판단표를 만들어 각각에 하나의 범주를 부여했다. 형식논리학에서 판단은 4개뿐인데, 칸트는 이를 12개로 확장했다. 그것은 칸트에게서 판단은 동시에 인식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2]

이렇게 확장한 이유야 어떻든, 범주도 꽃이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추상적 개념일까? 개별 긍정 판단의 범주니 특칭 부정 판단의 범주니 하는 것은 판단의 일반적 형식이라는 점에서는 추상적 개념일 수 있겠지만, 범주가 의미하는 것 자체는 추상 개념이 아니다.

범주는 칸트에서 경험을 구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서 구성되는 경험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경험이다. 범주가 여러 경험을 구성할 때 그것은 단순히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끌어내는 구성은 아니다. 범주가 구성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관계는 범주적 관계 외에도 많다. 우선 시공간적 관계를 들 수 있겠다. 칸트는 시공간적 관계 역시 경험을 구성한다고 보지만, 이는 범주와 달리 감각에 속하는 것이다. 반면 범주는 사유에 속한다. 칸트는 사유에 속하는 경험의 관계는 모두 주어와 술어의 관계 즉 판단의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판단의 형식 속에 집어넣을 수 없는 경험의 관계도 있을까? 그런 것이라면 물 자체 즉 인식 밖에 속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으로 보인다.

 

3)

칸트에 따라 헤겔 역시 범주를 판단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헤겔은 범주에는 고유한 내용(Gehalt)이 있다고 했다. 헤겔이 설명한 범주의 내용을 살펴 보면, 그것은 칸트가 각 범주에 부여한 도식과 동일한 것을 다르게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칸트는 인과 판단의 도식은 두 개의 관념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헤겔에서 가언 판단은 칸트의 인과 판단에 해당하는데 주어와 술어인 두 관념이 법칙적인(반복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계사(‘이다’ 즉 존재)로 표현된다. 헤겔에서 범주는 판단의 계사 ‘존재(이다)’가 각 판단 형식에서 가지는 구체적 의미에 해당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범주는 존재[계사]의 개별적 의미가 된다. 존재는 주어 술어의 관계인 범주를 추상적으로 지칭하는 범주의 일반 개념에 해당한다.

 

4)

그런데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흔히 반성 개념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칸트는 반성 개념의 모호성이라는 장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때 칸트는 라이프니츠로부터 네 가지 반성 개념을 끌어내는데, 구체적으로는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형식과 질료’를 들고 있다.

과연 이런 반성 개념도 추상적 개념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논리적 범주와 같은 경험을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 다른 추상적 개념은 독자적으로 성립한다. 그러나 반성 개념은 항상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동일성은 차이에 대해 규정되며 거꾸로 차이는 동일성에 대해 규정된다.

또한 이런 반성 개념은 칸트가 말한 12개 판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경험을 구성하는 구성적 개념 또는 존재의 의미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반성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고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5)

반성 개념의 특징은 상대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런 반성 개념은 좌우, 상하, 고저 등과 같은 상대적 개념에 속한다.

이런 상대적 개념과 칸트, 라이프니츠, 헤겔 등이 논의한 반성 개념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상대적 개념은 두 개념의 비교에서 나온다. 비교가 이루어지는 어떤 수준이 존재하며, 이를 우리는 개별 개념이 속하는 공간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좌우 상하 고저는 어떤 양(공간, 차원 등)에서 이루어지는 비교에서 나온다. 이때 비교의 대상은 개별 대상이다.

반면 앞에서 언급한 반성 개념은 어떨까? 위의 네 가지 반성 개념 가운데 우선 동일성과 차이를 보자. 여기서는 주로 판단에 사이의 관계가 논의된다.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강색이다’와 ‘이것은 노랑색이다’라는 두 판단을 보자.

여기에는 어떤 전제가 있다. 예를 들어 노랑색은 어떤 특정한 색깔의 체계 내에서 성립한다. 그것은 삼원색 속의 노랑색일 수도 있고 무지개 색 속의 노랑색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삼원색의 체계에서 노랑색은 빨강색의 부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이것은 노랑색이라’는 판단은 ‘이것은 빨강색이라’는 판단을 부정하면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삼원색의 체계에서 주황과 노랑은 동일한 색이며, 따라서 ‘이것은 노랗다’와 이것은 주황색이다라는 판단은 동일한 판단이 된다.

 

서로 부정적인 관계에 있는 두 술어로 이루어진 판단 사이에는 차이가 출현한다. 서로 동일성의 관계에 있는 두 술어 사이에 이루어진 판단 사이에 동일성이 성립한다. 동일성은 차이에 대해 성립하며 차이 역시 동일성에 대해 성립한다. 그러므로 동일성과 차이는 반성 개념이 된다.  

 

6)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은 질적 판단에서 긍정판단에서 부정판단으로 이행하는 사유의 기능 즉 부정의 기능에서 나온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부정의 관계가 곧 대당(對當) 관계라고 한다. 이런 대당 관계는 직접적인 추론에 속하는 것이니, 부정적 기능은 곧 추론의 기능이라고 하겠다.

논리적 범주가 주어 술어의 관계를 구성하는 판단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은 판단과 판단의 관계 즉 추론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수는 러셀이 ‘집합의 집합’ 개념으로 설명했다. 즉 2는 쌍으로 이루어진 것들 예를 들어 젓가락, 신발, 쌍둥이 등의 집합의 한 원소이며 그 집합의 대표이다. 3은 트리니티, 삼각형, 삼각대 등의 집합의 한 원소이며 그 집합의 대표이다. 수는 이런 대표자들의 집합이다. 러셀의 수 개념에서부터 수가 연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다. 반면 수를 척도로부터 도출하는 헤겔적 개념에서 수의 연속성이 올바르게 표현되지 않을까?

[2] 예를 들어 질적인 무한 판단은 부정의 부정 판단이니, 형식 논리학에서는 긍정 판단과 동일하다. 하지만 칸트는 무한 판단에 고유한 인식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를 독자적인 판단으로 인정한다.  또 긍정 판단, 개별 판단, 정언 판단, 가능 판단은 모두 형식 상 동일하다. 하지만 칸트는 각각에게 다른 인식적 의미를 부여한다. 관계 판단에서 선언 판단, 가언 판단 등의 경우 인식적으로 단일 판단으로 보는 칸트와 달리 형식 논리학에서 두 개의 복합 판단으로 인정된다. 양상 술어는 판단에 대한 술어이다. 그러므로 형식 논리학은 인식적 고유 의미를 부여하는 칸트와 달리 이미 추론으로 간주한다.

헤겔미학산책8-예술과 노동[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8-예술과 노동

 

1)

예술은 유사성을 매개로 하여 이념을 표현하므로, 예술은 물질적 자연의 모습을 이념을 통해 순화시킨다. 이념과 유사한 모습을 물질 속에 표현하는 가운데 물질이 지닌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측면이 사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겔은 호머가 아킬레우스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다만 높은 이마, 잘 생긴 코, 길고 강한 정강이만 언급하고 나머지는 일체 생략했다고 말한다. 또한 이 점과 관련해 헤겔은 흥미롭게도 고대 의상의 장점을 논한다.

 

현대 배우들이 입고 있는 신사복은 미리 재단되어 있어서 오히려 정신이 그것을 통해 이념을 표현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반면 통으로 이루어진 고대 의상은 정신에 따른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주름이 이루어지니, 오히려 이념을 표현할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2)

예술은 이념의 이중화인데, 이 점에서 노동의 산물과 유사성을 갖는다. 노동 역시 대상 속에 자기의 형식을 부여하는 형성화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기술[kunst: art]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예술과 노동 사이의 유사성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예술과 노동의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노동은 대상에 인간적인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연적 물질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적합한 산물로 변화된다. 이런 형식부여는 물질 자체를 구조적으로 개조하는 운동이다.

 

반면 예술은 비록 노동이지만 그것은 다만 이념의 어떤 성격을 대상에 외면적 형식으로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물질 자체는 이런 형식이 부여되는 지반으로서 역할만 담당한다. 이런 이중화는 마치 얼굴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얼굴의 찡그림이 고통을 표현한다고 할 때 신체 자체의 물질성이 개조될 필요는 없다. 다만 얼굴에 찡그림의 표정만을 외면적 형식으로 부가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신상을 나무에 표현할 때, 나무 자체를 신적인 것으로 개조할 필요는 없으며, 나무의 물질적 성격에 대해 외면적인 형식으로 신의 모습을 부가하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관념화하는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관념화하는 노동은 이념의 형식이 물질에 외면적으로 부여되므로, 여기서 예술은 물질 자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관념화된 물질을 수단으로 이용하게 된다. 특히 낭만주의 예술 장르에 속하는 미술이나 음악은 순수 색이나 절대 음과 같은 자연적 물질로부터 추상된 관념화된 물질을 사용하며, 이는 문학에 이르러 관념 자체가 예술적 수단이 되는 데서 정점에 이른다. 

 

3)

더구나 예술은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 독자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현실 자체의 모방이 아니라 다만 현실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실제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을 창조하는 방식이다. 백남준의 말대로 예술은 본질적으로 사기(환상)이다.

 

그런 환상을 창조하는 방식은 색채와 음과 같은 예술적 수단을 축조하는 방식이다. 그림이 포도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만들어낼 때, 헤겔은 이미 미술가가 색채의 대비를 통해 그런 반짝이는 모습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음악이 슬픔을 불러 일으킬 때 어느 작곡가도 인간이 우는 울음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는다. 음악은 슬픔을 음조를 통해 표현할 뿐이다.

  

예술적 노동은 관념화된 노동이므로 예술이 유사성에 의해 매개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유사성은 본질적인 유사성은 아니고 외면적 유사성에 머무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이 아무리 이념에 가까이 다가가더라도 근본적으로 기호적 성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예술은 이념의 이중화에도 불구하고 이념과 예술은 완전히 합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은 자립적인 물체로서 이념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4)

예술의 노동이 관념화하는 노동이라는 점에서 장점과 한계를 가진다. 한계라면 예술은 역시 이념을 표현하는 데서 관념적으로만 표현하므로 그것은 결국 환상에 머무른다. 미술이 아무리 맛있는 사과를 그리더라도, 그 사과를 우리가 먹을 수는 없다.

 

칸트는 심미적인 쾌감을 욕망의 쾌감으로부터 구분했다. 대상의 물질성이 아니라 대상의 형식에 관한 관심에서 즉 심미적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쾌감이 곧 미적인 쾌감이다. 헤겔 역시 예술작품에서 얻어지는 쾌감은 욕망의 쾌감과 구분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예술적 노동이 곧 관념적 노동에 머무르기 때문에 예술작품으로서는 욕망의 쾌감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점이라면 예술은 물질을 이용해 힘들이지 않고 쉽고 유순하게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도의 반짝이는 모습을 실제로 만들자고 한다면 아무도 자연을 따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미술가는 색채의 대비를 통해 아주 쉽게 그런 모습을 만들어낸다.

 

더구나 예술은 자연적으로는 곧 사라지고 마는 것조차 이런 관념적인 노동을 통해 영원히 보존한다. 헤겔에 따르면 “살짝 비치다만 미소, 입가에 스치는 비웃음, 시선, 언뜻 어리는 빛”[1]조차 예술은 영원히 보존한다.

[1] 헤겔, 미학강의 1, 225쪽

호퍼와 정신분석 10-문 닫힌 세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10-문 닫힌 세계

 

1)

1930년대 호퍼의 욕망 구조에서 실재계적인 특징은 여러 그림에서 드러난다. 앞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고독한 여성의 모습이나 덮쳐오는 숲의 모습에서도 이런 실재계적인 특징이 드러나지만 문 닫힌 일요일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이 그림은 1926년 그려진 일요일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앞에서 자동기계(1927)라는 그림과 대조된다. 둘 다 검게 칠해진 닫힌 문을 배경으로 한다. 자동기계의 경우 닫힌 문 앞에 여성이 의자에 앉아 있다. 반면 이 그림에서는 남자가 쭈그려 앉아 있다. 하지만 자기의 내면 속에 잠긴 모습 고독한 모습은 동일하다.

 

이런 고도한 모습을 지닌 인간조차 곧 호퍼의 그림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제 문이 닫힌 상점들이 나란히 서 있는 텅 빈 거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이전 남자나 여사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이제 이발소 표시등이 자리잡는다. 1930년 그려진 일요일 아침이라는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이나 앞의 그림이나 시간은 일요일이다. 일요일 그리고 아침이라면 한적하기는 하지만 고요하고 휴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어야 할 것이다. 보통 일요일 아침은 밝고 따스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두 그림에서 지배적인 정조는 이와 거리가 멀다. 여기서 지배적인 정조는 오히려 불안이다. 검게 칠해진 닫힌 문 때문일 것이다.

 

2)

이런 그림은 같은 시기 그려진 고독한 여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나 으스스한 숲의 덮칠 듯한 모습을 그린 그림과 같이 실재계적인 특징을 가진다는 사실은 아래에 나오는 데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스파이더의 한 장면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크로넨버그가 호퍼의 그림을 보고 이런 세트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두 장면은 닮았다. 여기서 주인공은 어릴 때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고 믿고 지금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시내 술집에서 만난 여급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든 사이에 가스관을 틀어 질식해 죽인다. 그 때문에 주인공은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이제 방금 병원에서 석방되어 작은 요양원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스파이더에 나오는 여러 장면은 주인공이 실재계적인 질환인 정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주 느린 발걸음, 어눌한 말, 아무도 알아 보지 못하는 글자로 무언가를 가득 적어놓은 노트, 무엇보다도 바지 앞 섶에 감추어 놓은 양말 주머니가 그런 정신증을 잘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닫힌 문이란 곧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에 대한 은유가 될 것이다. 여기서 닫힘이란 곧 현실에 대해 닫혀 있다는 뜻이고 거꾸로 과거의 회상 속에 갇혀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과거란 곧 자신이 어머니의 품 안에 있었던 시기로의 회귀이다. 그는 어머니 품 안에서 느꼈으나 이제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쾌락 속에 빠져 있다.

 

그는 과거를 드믄드믄 회상하게 된다. 자신의 진짜 어머니는 죽고 지금 있는 실제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주 가던 술집의 여자로 생각한다. 소년은 자시가 어머니의 머리를 빗겨주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려는 끈으로 거미줄처럼 자기의 방을 칭칭 동여맨다. 소년은 아버지가 다니던 술집의 여자가 자기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술집 여자를 무의식 속에서 치환해 버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접근할 수 없는 어머니를 술집 여자로 바꿈으로써 접근 가능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라는 의식이 남아 있어 그로서는 저항감을 느낀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술집 여자와 함께 자기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편집증적인 망상이다.

 

3)

아래는 호퍼의 그림 가운데 가장 이채를 띠는 그림이다. 1941년 ‘누드 쑈[girlie shaw]’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은 이 장면이 영화 스파이더의 주인공의 기억 속에 나오는 장면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한편으로 호퍼의 노골적 관음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노골적인 벌거벗은 여인은 누구나 바라보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 어렵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있다. 그림 왼편 하단에 나오는 남자이다.

 

다른 관객은 무대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 남자는 오히려 무대에 등을 돌리고 있다. 그의 옆에 악기가 보이는 것을 보아서 그는 반주를 맡은 악사 같은데, 무대에 등을 돌리고 반주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남자가 등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남자를 호퍼 자신으로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은 무대 위에 나오는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해준다. 무대 위의 여자는 바로 호퍼 자신의 어머니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쇼걸로 대체했다. 그것은 무의식적 환상이다. 이제 그의 욕망은 해방되지만 하지만 의식의 잔재는 그를 괴롭히니, 그 때문에 등을 돌린다. 아마 영화 스파이더에서처럼 이 남자의 마음 속에는 그를 박해하는 편집증적인 지배자가 출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