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삶을 치유하다[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시를 만나다
봄바람이라고 하지만 올 봄은 유난히 바람이 많다. 봄바람 속에서 나는 연일 기침을 하고 있다. 쉰 살, 천명을 아는 나이다. 윤동주는 ‘시를 쓰는 것은 슬픈 천명’이라고 노래했다. 나의 천명은 무엇인가? 천명을 알지 못하기에 나는 언제나 희망한다. 지금 내가 희망을 가지고 몰입하고 있는 분야는 시 치유이다.
문학치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 전이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의술로도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과 떨어져 병원에서 매일 울고만 있을 때 외국인 간호사가 가져다 준 책이 <백설공주>였다. 글을 읽을 줄 몰라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그림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지속되는 입원 생활에 지쳐 생기를 잃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과 갑자기 닥친 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기술적인 치료 외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시 치유를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6년 전이다. 석사 과정에서 비평을 공부하고 박사 과정에서 시를 전공하게 되면서 시에는 마음 치유의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고요함속에서 나를 마주 보면 나 자신이 가여워져서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체험을 통해 마음속의 슬픔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마음 한 쪽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를 통해 누군가와 고통의 경험들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러한 것처럼 그 누군가도 시를 읽거나 쓰면서 고통의 기억들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고통을 나누는 그 길에 내가 동행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 공부는 험난했다. 시치유의 뜻을 밝혔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시는커녕 문학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무슨 시치유냐 하며 시를 먼저 공부하든지 정녕 시치유를 공부하고 싶으면 다른 선생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 날 이후 6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에 출근해서 아무도 없는 어두운 교정을 걸어 내려오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어두운 교정에서 나무를 보며 묻는다. ‘너는 아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걸까?’ 아직까지 나무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밤보다 더 어두운 불확실성만 나를 속박해오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시를 공부한 지 이제 겨우 6년째다. 시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공부를 하며 확실하게 느낀 것은 인문학은 삶과 관련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은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와 녹아들 때 생명력을 지닌다. 시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여기서 나왔다.
몸은 마음이다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삶 속에서 욕망은 서로 충돌하며 갈등하는데, 여기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우리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예정되어 있으며,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병듦을 피할 수 없고, 영원토록 젊고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지만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보편사적인 관점에서 보고 인간의 의식과 심리가 훼손되었을 때, 즉 살아 있는 경험이 상실되었을 때 고통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몸은 곧 마음이며 신체의 건강이 마음의 건강인 것이다.
몸에도 감정이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인 이상 증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의료사의 관점에서 보면, 16, 17세기의 서구에서는 정신 질환을 신체나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한 독소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심리적인 기능과 생리적인 기능을 구별하지 않고 과도한 감정이 질병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붓다는 집착과 욕망을 버릴 때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룬다고 설파했다. 붓다는 마음이 지닌 치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몸의 질병을 주술사의 주문에 의지해 극복하고자 했다. 한국 고대 사회의 제의를 살펴보면, 시와 노래를 통하여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했다. ‘제주도 영감놀이’나 ‘처용가’에서 놀이를 통하여 희극적으로 병을 치유하고자 한 고대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시가 마음과 몸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의학은 병을 치료한다. 의학에서 고통은 하나의 증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치료가 끝났다고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며, 의학이 모든 고통을 치료하지도 못한다. 치료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몸의 변형이나 치료의 흔적은 한 사람의 삶을 고통 속으로 끌고 간다.
따라서 이때의 고통은 치료보다 치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치료는 진단하고 의학의 기술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지만, 치유는 돌보는 것, 안아주는 것에 가까운 개념이다. 즉 의학은 기술로 병을 낫게 하지만 문학은 상처받은 내면을 돌보고 안아줌으로써 상실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게 한다.
고통의 경험은 분명히 개인적이며 다른 어떤 경험으로 대체하여 설명할 수 없으며 타자와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같은 고통의 경험일지라도 개인에 따라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고통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즐거움과 달리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세계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다.
고통도 느끼고 아는 것이므로 의식에 주어진 것이지만 고통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고통에 의해 성찰의 기회를 가지게 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때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시는 치유 의례이다
시의 언어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사유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시를 읽으면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감정의 변화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기억이 작용하여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체험을 떠 올리게 된다. 이 체험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봄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수용하게 되고, 조화로운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성해 내고, 일상적인 삶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축적된 기억과 경험을 쓰기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므로 시는 주관성과 내면성의 표현인 것이다. 시를 쓰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을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읽거나 쓰는 행위에서 현재 나의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가 자기만의 치유 의례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고통받는 개인의 모습을 어릿광대로 나타낸다. 루오는 삶의 고통을 어릿광대로 묘사했고, 시인 김춘수는 “내가 비칠할 때 여러분은 날 붙잡아야 해요. 비칠하는 건 언제나 여러분이니까요” “너무 우스워서 한 가지도 우습지가 않아요” 라는 어릿광대의 말을 통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함에서 오는 고통을 노래했다.
여기에서 어릿광대는 고통 받는 개인의 은유이다. 시는 은유를 통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미지는 개인의 체험에 의해 다양한 감정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은 억압된 감정은 고통이 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해온 것이다.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 안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의해 세계와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인간은 언제나 전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쪽의 ‘나’와 저쪽의 ‘그’가 ‘있다’라는 것이다.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거리가 있겠지만, 좀더 용기 있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손의 역할을 시가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닫힌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릴 때 시는 창이 될 것이다.
시치유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과 용기,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센인들의 집단촌을 찾아갈 때,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분들을 찾아가고 있는가’라는 데에 생각이 멈추자 고요한 침묵이 나를 엄습했다. 그때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이 나의 기억과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그림으로만 보았던 백설공주는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다주었고, 상상력은 내가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올 때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았다. 어른이 되어 만난 시는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슬픔의 모습들을 비추어주며 홀로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희망을 찾아서
정기 검진을 나온 보건소와 병원의 관계자들과 함께 마을 회관에 들어섰을 때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외부인일 뿐이었다. 거의 한 나절을 기다려 진료가 끝났을 때 어렵게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 나의 체면, 자존심 심지어 부끄러움까지 다 버렸다. 모두 무심했다. 잔뜩 경계하고 의심하는 분위기뿐이었다.
‘이미 다른 마을에서 한 번 실패했지 않았는가. 이 마을에서도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눈만 보였다.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건만 아무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손으로 적는 대신 기억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발걸음을 돌려 할머니를 만났다. 지금부터 7개월 동안 있었던 할머니와의 만남을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매주 2시간씩 얼굴을 맞대거나, 한 이불 밑에 앉아서 할머니는 60년 동안의 삶을 이야기 하고 나는 들었다. 한 사람은 이야기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을 시로 구술했고, 한 사람은 옆에서 받아 적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이 분은 무척 절박했지만, 내가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실패한 이 만남도 이야기 할 것이다. 실패를 통하여 시가 모든 사람들, 모든 고통을 다 나누어 가질 수 없음을 배웠다. 실패의 경험은 시치유 외의 다른 인문학적 치유가 필요함을 알게 해 주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그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나는 시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꽃잎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바람에 실려 간다. 내일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다면 천명을 알아서 천명에 순응하겠다는 나의 희망 자체가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고 죽는 삶의 과정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고, 내가 경험한 것들을 쌓아 두는 마음과 몸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몸과 마음이 있어 희망이 있고 희망에 의해 삶은 변화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고통이고 불완전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내적인 성찰을 통해 희망의 씨앗을 품어야 한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항상 의미를 추구하는 지향을 지니는데, 희망의 씨앗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별빛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