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철학자의 서재3>출간 안내[ⓔ시대와철학 알림]

신간소개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부제 <철학자의 서재 3: 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책 천국>

 

 

 

우리 시대의 명저, 숨어 있는 책, 저주받은 걸작들을 통해 쏟아내는
철학자들의 쓴 소리 / 흰소리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의 세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5년 동안의 연재, 206명의 필자, 217편에 달하는 서평들이 세 권의 책에 오롯이 담겼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3권에서 철학자들은 현실과 일상, 정치와 경제, 안과 밖에 대해 사유하고, 글쓰기와 책읽기와 사유하기에 관한 통합적 안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는 63편의 “철학자들의 쓴 소리/흰소리”가 담겨 있다. 모두 책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실용적 독자들로서는 이 책만 대충 읽어도 63권의 책을 읽은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른바 “읽은 척 매뉴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주기로는 최적이다. 또, 철학자들은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 알 수 있는, “훔쳐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책의 운명이 ‘실용적 차원’에 머물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저자들은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의 현재적 삶의 운명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운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인 철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명저나, 숨어 있는 책,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 동서양 고전들을 선정하여 서평을 쓴 것을 모은 책으로, 지난 5년간(2008년 9월~2014년 현재)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칼럼들이다. 서평이기도 하며, 철학 칼럼이기도 하며, 에세이이기도 한 이 코너는, “서평 문화의 장”의 한 획을 그었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오고 있다. <철학자의 서재>는 서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일상의 삶에서도 찾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도들이다. 이론과 활자들의 말잔치가 아니라,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방대한 양의 서평 모음집에 그치지 않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철학자의 서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맹의 사상 등에서 시작하여 조르주 아감벤, 지그문트 바우만 등 2500년 지성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 무려 200여 권에 달하는 책들 중에 우리 시대 지성들이 읽어야 할 교양이 망라돼 있는 것이다.

또, <철학자의 서재>는 책의 선정과 집필을 최소 한 달 이전에 시작하기 때문에, 사유하고 글을 쓰는 데에 충분한 시간과 분량이 주어진다. 그럼으로써, 글의 완성도와 주제의 선명성이 높게 나타난다.

<철학자의 서재>는 대안적 상상력, 내일을 지시하려는 몸짓과 울림을 강조한다. 학문은 현실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 서적에만 국한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대중문화 등 거의 전 분야를 다룬다. 철학적 사고는 대안적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깊어진다는 점이다. 철학 본연의 텍스트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 보도자료 중 일부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시대와철학 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
?<큰 것을 생각하라 2014>
세속의 철학자, 경제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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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디자인하기 위한 공존의 경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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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은,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기획하는 것이다.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이후,
그리고 9·11 이후 체제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방향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한다.
일상과 주거에서, 마을과 공동체에서,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의 의미를 재구성해보자.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자본,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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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커리큘럼

2월 13일 1강 :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2월 20일 2강 : 노동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 박영균(건국대 HK교수)
2월 27일 3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1 – 한길석(한신대 외래교수)
3월?? 6일 4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2 – 박민미(대진대 외래교수)
3월 13일 5강 :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3월 20일 6강 :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3월 27일 7강 :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한다
??????????????????????-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4월?? 3일 8강 : homo cooperatus 협동성 경제의 실현 – 최종덕(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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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2014년 2월 13일~4월 3일(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 총 8강)

● 장?????? 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302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신청문의 : 02) 332-4301 /?kophil@daum.net?(주로 메일을 이용해 주세요.)

● 수?강?료 :

① 전 강좌 15만원
② 각 강좌당 2만원
③ 한철연 회원(정회원, 준회원, 후원 회원 등) 무료
마감 인원 : 35명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번 주부터는 1부와 2부를 순차적으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좋음과 나쁨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이게 라틴어죠. 무슨 말입니까? 혹시라도 배운 분?”

“프리뭄 비베레, 데인데 필로소파리.”

“예, 무슨 뜻이죠?”

“생이 먼저고, 철학은 나중이다.”

“그렇죠! 우선 살고 볼 일이고 철학을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일동 웃음.)

뭘 해야 살지, 우리 한번 골 싸매고 덤벼봅시다. 저도 혼자는 못 사니까 살려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혼자 잘 살 수 없는 세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벌이나 개미처럼 여럿이 힘을 합해야 제 앞가림도 할 수 있게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이것을 뭐라고 부르죠?”

“사회요. 그렇죠. 사회! 더 흔한 말로 시골 노인들은 ‘세상’이라 그러죠. 조금 교육받은 분들, 초등학교 문턱이라도 가본 사람은 사회라고 그러고, 그것도 안 배운 분들은 다 세상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데 제대로 살 수 있으려면,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팔뚝에다가 문신 새겨서 ‘착하게 살자’고 결심해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요즘에는 또 ‘바르게 살자’는 말도 나옵디다. 우리가 매사에 참되고 정직해라 이런 얘기를 듣게 되는데 참되고 정직해서 뭐해요? 여러분들 안데르센의읽으셨죠? 그 동화에서 임금이 옷을 벗고 나다니는데, ‘정말 옷 멋있습니다.’ 하고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죠. 임금한테 잘못 보이면 당장 가는 목숨이니까,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좋은 세상은 거짓이 발붙이기 힘든 세상,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그래도 살 수 있는 세상,에 나오는 국민들처럼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권력자에게 옷이 멋있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좋은 세상이겠죠. 실천하고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또 여러분들에게 한마디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건강, 생명 등에 부합하면 쾌로 느껴지고 그것이 좋은 것인 거 같고요. 죽음, 질병 등에 부합하면 불쾌이고 자기 생명이 단축되는 거니까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나쁨이 되는…….”

“좋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편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서 대화에 참여한 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의사 선생님이 한 대답과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그 옆에 계시는 남자 분,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하고, 어떤 때 우리는 나쁘다고 그러죠?”

“내 마음에 들면 좋고, 마음에 안 들면 나쁘고…….”

“그렇죠? 주관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말도 맞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벙거지 쓰신 분, 어떤 때 좋다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본인의 개인감정을 객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솔직하게 느끼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

아, 인간이 왜 이렇게 퇴화하는지 모르겠어요. 점점 머리가 나빠지는 게 무슨 법칙인 거 같아. 우리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적어도 그렇게 대답은 안 합니다. 제가 연모하는 연상의 여인이 있습니다. 저보다 9살밖에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칠십대 중반이신데 그 풍천 아주머니한테 제가 묻습니다. “아짐, 어떤 때 우린 좋다 그러고 어떤 때 우린 나쁘다고 그래요?” 하면 그 풍천 아주머니는 저한테 “철학 교수까지 했다는 게 그것도 몰라? 에이,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고, 없을 것이 있고 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것이제.”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합니다. 이 말 맞아요? 이제 구체적으로 질병을 예로 들었으니까 이야기할게요.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질병은 있을 거예요 없을 거예요?”

“없을 거요.”

“‘없을 것’이죠? 있으면 나쁜 것이죠? 그죠? 지금 제가 배가 고픈데 그릇에 밥이 하나도 없다, 텅 비어 있다 그럴 때는 어때요? 나쁘죠? 있을 것이 없어서 그런 거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 평등, 평화, 우애, 관용, 이런 것들은 있어야 할 것입니까 없어야 할 것입니까?”

“있어야 해요.”

“그렇죠? 이런 것들이 고루 있어야 좋은 세상이죠? 그 다음에 억압, 착취, 전쟁, 이기심, 탐욕,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없어야 할 것이요.”

“없어야 할 것이죠? 있으면 나쁜 세상이죠. 우리가 좋은 세상을 앞당기려면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하고 그래야겠죠? 여기에서 말의 생김새를 눈여겨봅시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예민한 민족이고 철학하는 데 선천적으로 좋은 머리를 타고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 좋은 머리로 이야기를 잘 하는데 갑자기 쉬운 질문을 하면 얼어붙어가지고 온갖 어려운 낱말 다 꾸며내서 대답을 어렵게 합니다. 자기 확신도 없으면서.(일동 웃음.)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 → 좋다.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다 → 나쁘다.

동의하십니까?”

“예.”

“여러분들 전부 나중에 속았다고 투덜대지 마세요. 이 강의 내용은 전부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는 좋다는 말이고,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다’는 ‘나쁘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세요. 참말과 거짓말을 가리는 말에서 딱 한마디가 달라지니까 좋고 나쁜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을.”

“‘는’에서 ‘을’로 바뀌었다. 그러면 ‘을’은 뭡니까?”

“당위.”

“왜 당위가 미래의 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독일어로는 졸렌(sollen) 이라고 그러죠. 왜 이 ‘당위’가, ‘해야 할 일’이 미래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과거시제나 현재시제로 표현이 되지 않고 왜 미래시제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우리는 왜 미래를 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왈가왈부해야 하죠?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과거는 이미 없는 거고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곧 올 거니까.”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아요?”(일동 웃음.)

“현재가 나빠서…….”

“나쁘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도 질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고요, 그러니까 함부로 말해선 안 되고. ‘당위가 미래시제로 표현되는 까닭을 200자 원고지로 100매로 써내시오.’ 이러면 이 수강 신청한 분들 가운데서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냥 농담입니다.”(일동 웃음.)

 

앙리 베르그송/ 출처: www.artnstudy.com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돼 있고요. 거기에서 나온 말을 들뢰즈가 인용합니다. 우리의 기억(기억, 몽상, 회상, 추억 다 연결이 되는 말이죠.)과 그리고 응집, 삶의 에너지가 응집되는 문제, 시간 속에서 우리의 기억, 상상, 추억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공간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 그리고 그것이 응집되어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과거가 하나로, 현재로 모여 미래로 집중되는가를 검토합니다. 들뢰즈가 예를 들면서 한 말 가운데서 이런 게 있습니다.

원뿔을 거꾸로 세워놓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면 한 면은 확산이 되면 어디에서는 몽상이 펼쳐지고 어디에서는 추억, 어디에서는 기억, 이렇게 전개되는 단면들이 주루룩 나오는데, 현실에서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렇게, 저렇게 펼쳐졌던 그 모든 역사성들이 모두 어떻게 하나로 응집이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가 간단히 여러분 사고 시험을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원뿔이 땅에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원뿔을 횡단면으로 나란히 자른다고 칩시다.

“수학 선생님! 이 도형은 눈에 익으시죠? 이 도형의 단면을 가로로 잘랐을 때 위쪽과 아래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횡단면을 잘랐으니까 연속된 걸 잘랐는데 아래쪽과 위쪽이 크기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아요.”

“그러면 아래와 위가 같은 것들이 연속이 되면 주욱 자라서 원기둥이 되는데요?”

“맞아요.”

“그런데 이게 원뿔이잖아요.”

“미분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요, ‘미분’, ‘적분’ 하지 말고요. 다 얼버무리는 소리거든요.”

“차이가 있어야 맞는데요. 거의 없어지는…….”

“차이가 없으면 원기둥이 될 것이오. 차이가 있으면 계단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우둘투둘 할 것 아닙니까? 아래 것이 크고 위에 것이 작으면 우둘투둘 계단식이 될 거 아닙니까? 무한을 둘러싸고 토막 내서 답을 찾자는 게 미분/ 적분이잖아요. 무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면, 무한이 뭐예요? 셀 수 없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헤아릴 수 없는 게 무한이죠. 누가 니 속셈이 뭐냐, 하고 물어봤을 때 우리가 머리 굴려가지고 딱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도 무한의 한 속성입니다. 규정할 수 없는 것, ‘무규정성’ 이것도 ‘무한’이라고 하니까요. 한정지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수학 선생님, 아까 이야기했던 것 빼놓고, 무한에는 수학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무한 어떤 무한이 있습니까?”

“수렴, 발산.”

“수렴이란 말도 사실은 이상한 말이기는 합니다. 발산도 수렴도 다 우스운 말인데, 어쨌든 내적 무한, 수렴을 내적인 무한이라고 그러고, 발산을 외적인 무한이라고 그러죠. 그렇죠? 이것을 베르그송은 거꾸로 뒤집어엎습니다. 공간 축에 놓지 않고 시간 축으로 봅니다. 베르그송에 의지해서 들뢰즈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온갖 개념들을 그럴싸하게 쫘악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형을 놓고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꼭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단면을 자르게 될 때 그것이 같다고 하면 원기둥이 될 것이고 다르다고 하면 울퉁불퉁한 계단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단면으로 자른 원뿔의 윗면하고 아랫면은 어떻다고 해야 돼요?”

“미세하게 다르다.”

“다르다고 하면 미세하게 다르거나 정밀하게 다르거나 다 계단이 되어버린다니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지 바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다면 뭐 이지도 않고 아니지도 않고, 이것을 한 단계 더 추상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그랬죠?”

귤은 사과와 다르다. 왜? 귤은 사과가 아니니까. 왜? 귤에 있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없고 귤에 없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있으니까. 그렇게 전부 ‘있다/ 없다’로 수렴이 되죠. 그래서 말하자면 원뿔을 단면으로 잘라놨을 때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원은, 동그라미는 크기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말은 크기로 볼 때 아래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실제로 그렇게 아니라고만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무규정성이라고 그랬죠. 이렇게 말해도 틀리고 저렇게 말해도 틀린다,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용수, 나가르주나의. ‘아닐 비’(非)자를 무한히 읊조리는 그런 이상한 이론이 나타납니다.

‘뭘 할까’ 하는 데서 우리가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지점. 그게 실제로 우리의 존재 조건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똑같은 거리에 건초더미 두 개가 있고 반대쪽에 굶주린 당나귀가 있다고 칩시다. 건초더미가 색깔도 같고 모양도 같고 다 똑같은데, 이 당나귀가 어떤 것을 고를 것이냐……. 이것은 유명한 딜레마 문제 중 하나인데, 안 좋은 결말이 있습니다. 끝이 안 좋은 이야기. ‘굶어죽었다.’(일동 웃음.)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눈만 굴리다가 죽었다.”

“설마요.”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아무거나 고르죠.”

“그렇지! 일단 저지르고 본다. 그렇죠? 머리 굴리지 않고 저지르고 본다.”

도시 사람들은 서로 늘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비슷해지죠. 그리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떼거리를 짓죠. 생각이 다르면 실제로 같은 형제라도 천리만리 거리가 느껴지고 등을 돌리면 딱 돌아보지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면 이 사람 어떤 사람이다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촌사람들은 뭐가 닮는지 아세요? 손이 닮습니다. 시골에서는 거짓말 안 통하거든요. 24시간 늘 한마을에서 같이 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달라져버리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같아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어때요? 말로 살죠. 이런 문제를 내는 부류의 인간들이 전부 말로 먹고 사는 인간들이에요. 손은 무언가 하는 연장이죠. 손은 도구죠.

“제가 하고 있는 게 뭡니까? 놀리는 거죠? 손을 놀리는 거죠? 손발을 놀린다. 손, 발을 열심히 놀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부지런히 일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천적인 삶에서는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는 어떻게 해요?”

“굴려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상한 사이비 교주라든지 조직운동가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도시에서 우글우글 많이 생겨납니다. 왜 그러냐면 도시라는 삶의 공간 자체가 사람으로만 이루어졌고, 사람끼리 모이면 머리 굴려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그러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니까.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머리 굴리는 것보다 빨리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먹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그러는데 주먹이 더 반사적이고 더 파괴적이어서 폭력을 쓰는데, 그 형태는 뭐죠? 칼을 든다, 총을 든다……. 우리가 나중에 무엇을 하려면 맨몸으로만 하기 힘드니까 연장을 써서 하게 되죠. 그런데 연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고,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장은 칼이고 총이고 대포고 원자탄이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 연장으로 빨리 효율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낫이나 호미나 괭이 같은 것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장간에 가서 같은 ‘연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것을 벼리더라도 농사꾼이 대장간에서 찾는 거하고 장군이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을 지닌 통치자가 대장간을 찾는 거 하고는 다릅니다. 실제로 그리스 사회에서 대장간은 굉장히 큰 역할을 합니다. 대장간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무엇이냐면, 전쟁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역사 시대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이렇게 나누는 것은 사실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의 발달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기의 역사입니다. 무기 재료로 역사 시대를 가르는 겁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양식이 나타나는 사회 경제적인 배경과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이루는 저마다 다른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기원과 의미-한철연 신년회 기념 강연회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기원과 의미-한철연 신년회 기념 강연회

강연 : 이정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정리 : 강지은(ⓔ시대와철학 편집주간)

 

 

1월 9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정식 신년회 행사에 앞서 우리 학회 이정호 선생님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2시간여 걸쳐 진행된 이날 강연은 새로 단장한 학회의 강연장에서 개최되었으며 3시 시작부터 강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열기가 신년회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이정호 선생님의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핵심은 ‘다의 공존과 조화의 추구’이다. 정치를 바라보는 이러한 입장은 놀랍게도 현대의 정치철학이 추구하는 이상과 일치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더욱 우리에게 다가온다. 강연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를 통해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을 비롯한 환경적 조건에 대한 그리스인의 운명의식이다. 신들조차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바다(水)는 포세이돈의 것이고 하데스에게는 그가 주재하는 사자(使者)들이 일몰지를 넘어가서 서쪽의 어두움 속에 거주하느냐 또는 지하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안개 짙은 어둠’ 즉 대기(風)나 대지(地)가 배당된다. 이 모든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자 그들 자신의 몫이다. 이와 같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건 신이건 모든 개체의 능력과 실존을 한계 짓는 운명에 대한 심원한 믿음을 발견한다.

 

사진 : 강지은
새단장한 한철연 강연장에서

신화와 철학에서 발견되는 고대 그리스인의 정치사상적 단초

 

이와 같은 우주 탄생과 관련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는 단순히 우주생성의 비밀 이상의 사회적 역사적 삶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대응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대응의식은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이르러 점차 정교하게 되면서 마침내 신화적 단계를 넘어서 우주, 자연의 근본 구조를 그 자체로서 탐구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정호 선생님은 신화적 세계관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인들의 근본 의식은 철학사가들에 의해 최초의 철학자로서 재평가되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계승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주생성의 근원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따뜻함과 차가움, 메마름과 습함(온냉건습)이라는 대립적인 원시 질료적 요소들이 생겨나고 그 요소들의 대립적 성질로 인한 상호침식과 운동 및 변화에 의해 가시적 세계만물이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주생성에 관한 신화적 서술을 철저히 질료적 힘에 의한 우주론적 논의로 치환하고 있을 뿐,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전통 그리스의 정신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에 나타난 자연철학적 세계관 역시 신화적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운명의식과 연관되면서 자연학적 탐구의 윤리학적, 사회적 연관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운명의식이란 신화에서 운명의 신 모이라가 각 신에게 할당된 고유의 영역, 경계, 지위, 역할 및 권한의 분배를 표상하듯이, 사회공동체적인 측면에서도 분할, 영역, 할당된 몫의 불가침적 보존 내지 질서에 대한 의식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운명’의식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할당된 몫이란 오늘날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 간의 이해관계에서 성립하는 배타적 소유 내지 권리라기보다는 환경세계 속에서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삶의 보존을 위한 역할과 능력의 분담과 그 분담된 다양한 역할의 상호존중과 수행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그것은 고대적 삶의 기초로서 농업생산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협동적 질서(taxis)와 절제(sophrosyn?)의 구현 다시 말해 공동체에서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맞추어 할당된 역할의 적극적인 실현과 그것을 통한 공동체적 자치와 자기 보존 구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폴리스적 시민이 권리이자 의무로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명예와 자유의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자유는 근대가 지향하는 소극적 자유와 거리가 멀다. 이정호 선생님은 이런 관점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운명의식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종교적 또는 역사적, 시간적 좌표 상에서 필연으로 묶여진 운명론적 개념이 아닌 가능성의 영역에서 능력을 다해 지켜야할 한계를 표시하고 당위를 견인하는 공간적 개념이자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개념이라고 정리한다.

 

대규모 농업생산과 순수한 사유의 관계

 

사진 : 강지은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으로 대표되는 엘레아학파는 우리가 그동안 상식적으로 당연시되어온 운동과 여럿을 부정하고 자연세계를 그 자체로 정지된 하나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자연세계를 운동과 변화과정의 총체로 여기던 기존의 자연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기초에는 순수한 사유에 의한 논리주의가 자리잡고 있었고 기존의 자연학과 자연철학적 성과는 논리주의 앞에서 모두 부정되었다.

이미 질료에서 분리된 순수사유는 오직 공간적 성격만 갖는 것이어서 시간성과 결합된 일체의 질료적 운동성과 변화는 그 자체로 순수 사유로 해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사유로 해명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의 설명방식에 입각해 있는 한 토끼가 거북이를 따라잡거나, 화살이 날아가는 현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사유가 곧 존재’인 순수사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플라톤에 의해 운동이 공간적 사유로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 이러한 논리주의의 위세는 상식적으로 경험적인 자연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지적 열등감과 무력감을 안겨주면서 그리스의 지적 풍토를 한 동안 지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적 사유의 배경은 농업생산에 있다. 엘레아학파가 태동한 크로톤 지방은 그리스 본토와는 달리 대평원지역에다 지중해 교통의 요지여서 대규모 관계농업이 발달했다. 이러한 농업생산량의 확대는 관리계층 및 상업계층을 발달시켰고 그 핵심에 속한 엘리트들은 소규모 농업생산사회의 엘리트보다 훨씬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유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토끼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적 사유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서자 아테네 지식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엘레아학파에 의해 파기된 질료적 자연 사물들과 그것들이 운동변화에 대한 해명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서 대두된 대표적인 고전기 아테네 사상이 곧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주창된 원자론이다. 원자론자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엘레아의 비판에 의해 운동도 변화도 없이 정지해버린 세계를 끊임없이 운동하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현실로 구제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엘레아적 논박을 피하기 위해 엘레아학파가 주장한 일자의 성격과 똑같은 분할자체가 불가능한 원자를 우선 상정하되, 동시에 엘레아학파들에 의해 파기된 다자성과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의 수를 무한하게 상정하고 그것들이 움직일 허공(kenon)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그 허공마저 비존재라는 논박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주저 없이 엘레아 기준으로 이른바 ‘없는 것(to m? on)’인 허공 또한 물체 못지 않게 모두 실제로 있는 것(ousia)이라고 선언하였다.

요컨대 운동과 질적 변화의 현실적 실재를 부정할 수 없었던 그들은 원자와 허공의 존재를 통해 다와 운동을 구제하였고 이미 엘레아 근본주의 앞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린 성질의 실재성은 포기하되 그 성질을 원자들의 부대현상으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운동의 원인을 해명하기보다는, 허공의 도입을 통해 운동을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던 전통적 확신을 복원하였던 것이다.

 

일자성과 다자성, 조화와 공존의 문제

 

신화적 세계관에서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의 자연적인 것(physis)과 인위적인 것(nomos) 내지 자연학적 관심과 윤리학적 관심을 정치철학적으로 추적해 볼 때 거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우선 자연학적 논의의 측면에서 보면 자연의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으로서 일관되게 일자성과 다자성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그리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도시국가들 간의 공존과 질서 또는 하나의 도시국가 내에서 각기 다른 계층 내지 사람들 간의 조화와 공존에 관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형이상학과 존재론은 ‘생존의 존재론’이고 본질적으로 정치철학적 윤리학적 성격을 갖는다. 일과 다의 문제, 정지와 운동의 문제는 우주론과 자연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이미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상이한 세력들 간의 갈등과 조화, 분열과 통일이라는 정치 사회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자연학과 윤리학을 통일하는 하나의 원리로서 제시된 다의 공존과 조화의 원리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기원전 5세기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상적 삶의 원리이자 사회적 관계형성의 근본 원리였던 것이다.

강연이 끝난 후 40여분간 진행된 질문과 응답 시간이 이어졌으며 예정된 시간을 넘겨서도 마치지 못하여 아쉬움이 많았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 시범강좌[ⓔ시대와철학 알림]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 시범강좌

 

안녕하세요,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입니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은 분과학문으로 파편화되고 기업화된 낡은 대학의 틀을 벗어 던지고, 학문 간 통섭이라는 원리를 통하여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서로 평등하게 마주하는 새로운 대안대학의 플랫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2014년 새해를 맞이하여,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이 앞으로 펼쳐나갈 교육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시범강좌를 개최합니다. 이번 시범 강좌의 열쇠말은 [카오스와 비전 Chaos and Vision]입니다. 총 9강으로 이루어진 이번 시범강좌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들에 주목하였습니다. 위세를 떨쳤던 신자유주의가 저물어가고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는 이행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나비효과를 통한 새로운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의 시작을 알리는 시범강좌에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강좌 소개]

 

[3/11 후쿠시마, 끝에서 시작으로]

1/13(월) 19:00~22:00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 하승수(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익중(『한국탈핵』 저자, 동국대 의대 교수)

 

[인류의 위기와 대안에 대한 원효와 맑스의 대화]

1/14(화) 19:00~22:00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교수)

 

[케이팝의 흉내내기는 어떻게 문화자본이 되었나]

1/15(수) 19:00~22:00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어린왕자’에서 보편종교성을 읽다]

1/16(목) 19:00~22:00

박규현(부산동래생협)

 

[대안세계는 적녹보라 연대로부터 온다]

1/17(금) 19:00~22:00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박이은실(한신대 연구교수, 기본소득네트워크)

 

 

[21세기 변혁 존재론을 위하여]

1/20(월) 19:00~22:00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서영화(한국철학사상연구회)

 

[위기의 청년들에게 ‘자본’이 일용한 양식인 이유]

1/21(화) 19:00~22:00

임승수(경희대학교 강사)

 

[기억하라 1980년대 : 칠수와 만수의 시대극장]

1/22(수) 19:00~22:00

김종길(미술평론가)+한홍구(역사학자, 성공회대 교수)

 

[혼돈 속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

1/24(금) 19:00~22:00

대안적 지식생산자들의 파티 (홍세화, 조희연, 이명원 등)

 

 

 

일시 : 2014.1.13(월) ~ 2014.1.24(금), 저녁 7시 ~ 10시

(총 9회, 1/23(금) 및 토, 일요일 강의 없음)

장소 :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충정로역 4번 출구에서 도보 3분)

수강료 : 강의 당 5,000원

신청(링크) : http://www.freeuniv.net

https://freeuniv.typeform.com/to/iQHPyI

문의 : kcunion2013@gmail.com / www.freeuniv.net / 010-4721-5757(사무국장 강정석)

 

 

 

 

 

 

주체성과 자율성[철학을다시 쓴다]-⑮

주체성과 자율성[철학을다시 쓴다]-⑮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제가 ‘자유’를 이야기하면 ‘사회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자유주의자네?’ 이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자유에는 결이 여럿입니다. 노예소유주의 자유 개념이 있고, 부르주아 자유 개념이 있고, 지주들의 자유 개념이 있고, 자본가의 자유 개념이 있고… 저마다 내세우는 자유들이 서로 결이 달라요. 무엇을 ‘자유민주주의’라고 그러죠? 자본주의를 자본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유’가 하도 좋으니까, 저마다 자기 체제, 자기가 신봉하는 이념에 ‘민주’도 끌어다 놓고 ‘자유’도 끌어다 쓰고 그래요.

우리 헌법에 보장된 자유가 뭐죠? 신체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죠? 추상적인 것 말고 거주이전의 자유, 신체의 자유, 여행의 자유, 이런 소박한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사람은 아무 자유도 없어요. 돈이 없으면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헌법에 보장된 자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자유예요.

여러분들, 추석이나 설 때마다 도시에 붙들려 있는 아들딸이 ‘어머니, 미안해요.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이번에는 못 내려가요.’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들어보셨죠? 그러고 철야하죠? 고향에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 여행의 자유도 없고 고향 찾아 갈 자유도 없어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종만 있습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아주 명쾌하게 갈라지죠.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쓴 유명한 찰스 램이 한 이야기입니다. 흑인, 백인, 황인, 이런 인종구별 없다, ‘있는 놈’과 ‘없는 놈’, 딱 두 종류로 구별이 된다. 있는 놈은 다 있고, 없는 놈은 아무것도 없고… 오죽하면 ‘없는 놈’이라 그래요? 재산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존재’조차 없는 거예요.

‘스탠포드 엑스페리먼트’(Stanford Experiment) 이야기를 잠깐 떠올려 보지요.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으니까 따로 긴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홉 명이 죄수 역할을 맡고, 열두 명이 간수 역할을 맡은 가상 감옥에서 벌어지는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 실험에 자원한 20대 젊은이 가운데 12명은 네 명씩 삼교대로 간수 역을 맡게 됩니다. 간수가 되는 사람은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이 지닌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상식적이고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없애야 하고, 등질적인 죄수 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침을 받습니다. 죄수가 된 사람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없애서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간수의 임무예요. 감옥 체제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수록 죄수들을 비인간화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정체성을 없앨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서 죄수들에게서 심각한 시간 왜곡 현상이 나타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이 우리 몸에 그대로 작동을 합니다.

 

영화 ‘The Stanford Prison Experiment’ 출처: http://folksonomy.co/?keyword=15274

 

쥐들에게 실험을 해봤는데, 같은 용량의 인슐린 주사를 시간을 바꾸어서 투여하면 어느 시간대에서는 백퍼센트 죽고, 똑같은 양인데도 어느 시간에 투여하면 한 마리도 죽지 않습니다. 우리 몸 안에 저항이 커지고 줄어드는 생명의 주기들이 있는 거예요. 시계로 측정되는 인간의 시간에는 이런 게 하나도 없는데,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선 생명체가 지닌 자연의 시간, 곧 생명의 시간을 등질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은 사람은 교대시간에 무조건 호루라기를 불어서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을 일으키고 팔굽혀펴기 등 체제에 순응하고 권위에 순종하도록 온갖 종류의 벌들을 부과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제부터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개성이 없다, 감옥 안에서 일률적으로 밥은 몇 분 안에 먹고 소변보는 시간은 몇 분 만에 끝내라, 이렇게 모든 것을 통제하게 된단 말이죠.

이 상황 속에서 죄수로 자원했던 선량한 중산층 대학생이(처음에는 모두 죄수로 자원하겠다고 하고 간수하기 싫다고 했던 사람들인데), 자기가 돈을 받고 계약을 해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진짜 감옥에 갇혀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말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데, 못 나와요. 그리고 간수 역을 맡은 사람들은 점점 잔인해지고, 나중에는 취미 삼아서 성적인 학대까지 하게 됩니다.

이라크에서 자기들의 전리품으로 생각해서 붙잡힌 사람들 목에다 줄을 매서 끌고 다니고 성적인 모욕을 주고 그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서 자랑스럽게 공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성적인 모욕이라는 것은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목숨은 내놓을망정 그런 짓을 당하지는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그런 반응이 가장 큰 약점이니까 그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려고 그 잔혹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릅니다.

그 미군들이 ‘스탠포드 실험’에서 나오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과 똑같은 사람이죠.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시스템’이, ‘매트릭스’가 작동하는 데 따라 그런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거죠. 그러니까 자유 박탈은 인간에게 비인간화, 몰개성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 박탈 가운데 가장 광범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도 등질적인 공간으로 바꾸고 시간도 등질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을 죄다 없애버리고 모두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 전체 우주 체계, 아주 작은 소립자 단계에서부터 아주 큰 우주까지 전부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바꿔서,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형성되고 합의되는 세계, 수학공식을 통해서 확정된 세계를 진짜 우주로 감쪽같이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천체물리학이나 수학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 덫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휜 공간이 됐든, 무한히 확산되는 공간이 됐든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달라지든,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이든,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시간이든, 사람의 의식 속에서 가공되는 시간은 잘라내는 기준에 상관없이 내용을 채우는 것들은 다 빼버립니다. 그래야 계산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화 된 세계, 이어진 연속체는 늘 무규정성이 들어가 있어서, 이게 이렇다, 저게 저렇다 딱 잘라서 수치화되지 않아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측정 가능한 것, 수치화된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시사회에서 삶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도시사회에서는 저마다의 삶을 인간끼리 통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통제하는 세계에서는 맨 밑바닥에서 맨 위까지 위계질서가 반드시 성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맨 위에는 ‘빅브라더’가 있고 맨 아래에는 ‘노바디’(아무것도 아닌 사람)로 위계질서가 생기는데 이런 위계질서를 세우는 작업을 우리 왼쪽 뇌가 맡습니다. 분석하고 조직하는 것은 왼쪽 뇌에서 하는데, 인간 수컷들이 ‘반편이’들이거든요, 언어와 추론의 중추가 왼쪽 뇌에만 몰려있어요. 여자들은 이야기할 때 양쪽 뇌가 작동하지만 남자들은 한쪽 뇌밖에 작동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수컷들은 조직하면 주욱 늘어서고, 정치 이야기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어쨌거나 자율성이란 것은 생명의 시간 속에서만 싹트고 꽃 피고 열매 맺습니다. 생명의 시간은 자연계의 여러 생명체와 함께 살아갈 때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됩니다.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되는 강아지풀도 누가 언제 싹터라, 꽃 피워라, 열매 맺어라 이렇게 명령하고, 간섭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싹트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죽을 때는 알아서 죽고 또 땅에 묻힙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경계했었던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스(hybris), ‘오만’이라는 뜻이죠. 현대 도시에서 ‘디지탈’화한 시간, 시 단위로, 분 단위로, 초 단위로 끊어낸 인간의 시간, 공간화된 시간은 인간의 오만이 극대화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하느님 흉내를 내죠? 생명체를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믿고, 사기도 치죠? 돼지 장기로 사람 장기를 대신해서 프랑켄슈타인처럼 몸 전체를 잘라내고, 잇고, 기워도 끄떡없다고 여깁니다. 돼지 장기를 사람 몸에 꿰맞추면 사람이 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몰라요. 물질체계에서는 상호교환이 가능하고 가역성이 성립이 되지만, 생명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물질과학에 기초를 둔 생명공학자들은 생체조직과 물질조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 못합니다. 장기이식이라든지 유전자 조작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서 지켜봐야 합니다.

저한테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합니다. 장기기증 하지 않을 거냐고, 제가 착해 보이는 모양이에요. (일동 웃음.) 저는 자신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못 믿는데 안구를 기증해서 눈을 번쩍 뜨게 만들면,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누구에게 갑자기 심한 증오심을 느끼게 될 때 칼로 푹 쑤셔 살인죄를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요?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이 꼭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착하게만 살라는 법 없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기증된 장기를 나쁘게 쓰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전 세계가 장기이식 시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있는 나라 있는 사람들은 없는 나라 없는 사람 눈알도 빼고 콩팥도 빼는데 혈안이 돼 있는 세상입니다. 죽을 때 기증한 장기가 꼭 성냥팔이 소녀한테 가라는 법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죽어서 장기 기증하겠다고 하면 착하단 말 들을 줄 알고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착하다는 칭찬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안식교 사람들은 수혈과 헌혈을 안 하잖아요. 그것을 이기적인 동기와 종교적인 편견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전엔 저도 걸핏하면 수혈하고 헌혈하고 그랬지만 나중에 B형 간염을 걸려서 자꾸 간염 걸린 흔적이 복제되는 게 있어서 헌혈해도 그 피 버리게 된다고 적십자병원에서 하지 말라고 연락이 와서 그 뒤로 그만두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사회가 전부 그것이 옳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사회가 전부 그르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말 내가 이 일을 받아들이는데 내적인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자율적으로 이용하고, 상황과 체제에 맞서서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어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시간을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치기 하려는 모든 통제에 대해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물읍시다.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미래가 없는 도시문명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떨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냐입니다.

도시에서 봉기해서 혁명이 성공한 예는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의회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아옌데 정권을 들 수 있는데 결국엔 미국이 뒷받침한 군부 쿠테타에 의해서 무너졌죠? 지금까지 인류 혁명의 거점은 늘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산과 혁명의 거점이던 농촌이 다 무너져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변산에서 십여 년 이상 농사를 짓다 보니까, 이상하게 나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물고기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들에 나가서 볍씨들이 수군거리는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제가 사는 변산은 소나무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변산 기후도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소나무가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참나무가 자라는데, 가을이 오면 많은 도토리 알을 떨굽니다. 한 해에도 수천 알의 도토리를 땅으로 떨구는데, 제가 참나무에게 물어봤습니다. ‘우리 나라 산지가 70%인데 거기에 모두 네 씨만 뿌리내리게 하려고 그래?’ 그랬더니 아니랍니다. ‘그러면 해마다 뭐하러 그렇게 많이 떨어뜨려?’ 물었더니 자기가 죽을 때쯤 떨어뜨린 씨앗 가운데 한두 그루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를 대신해 종이 유지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요.

 

?한겨레

 

볍씨도 마찬가지죠, 한번 심을 때 두 알 세 알 심으면 스무 포기로 늘어나는데 한 포기당 백 알 넘게 달리고 해서 풍년에는 볍씨 하나가 때로는 천 단위로, 때로는 만 단위로 열매를 맺죠. 그래서 볍씨한테 ‘야 들판 전부를 니 종자로 덮으려 그래?’ 물으니 아니라 그래요. 쥐도 먹고, 새도 먹고, 당신도 먹고 씨앗으로 남긴 것으로 우리 종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다에 사는 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억 개의 알을 낳아서 태평양, 대서양까지 온 바다를 전부 니 새끼로 덮을 생각이냐?’ 했더니 아니라 그러죠. ‘그중에 한두 마리만 남아서 자기 종을 유지시켜 주면 그만이다’ 해요. ‘그럼 나머지는 뭐하려고 그렇게 많은 알이 필요하니?’ 물으면 자기 몸을 던져 다른 생명체를 살리고, 자기 새끼들이 그 생명체에 기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알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반찬들이 전부 다른 생명체가 밥상에 올리는 ‘생체보시’입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생산력이라는 건 없어요.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신화죠. 씨 하나 뿌리면 수천수만 알을 얻을 수 있는 유기물의 세계에서도 무한이라는 건 없어요. 도시에서는 5%의 생산력만 늘어나도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이런 소리를 하는데 유기물은 무한축적이 안 돼요. 곡식의 씨앗을 이년만 묵혀버리면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버려서 곡식 구실을 거의 못 합니다. 유기물이라 오래 두면 썩어버리니까 싫든 좋든 나눠야 해요.
그런데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과 ‘생산물의 무한한 축적’에는 썩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무한축적’이 가능한 것도 무기물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부 ‘부동산’, ‘동산’으로, 화폐나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되면서 종이쪽지 하나에 수억, 수십억의 자산도 축적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손만대를 물려줄 ‘사유재산’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아요. 폭력적인 국가기구가 이 사유재산을 보호해 주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도시 사람들은 답변할 길이 없어요. 도시공간에서는 사람들만 모여 사니까 ‘착취하고 살거나 착취당하면서 살지 뭐~’, ‘주인이나 노예로 살지 뭐~’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어요. 전체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도와 그물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갈 길이 없어서 도시사람들은 덫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리고 환상 속의 세계를 실제 세계라고 자기최면을 겁니다. 정신적인 유목민들이 우글거리면서 ‘가상의 초원’, ‘의식의 평원’을 질주하고 있어요. 실재하는 평원이 아니라 등질화된 의식 공간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금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고 상상을 해요. 어쨌든 밥상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올라오는 것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이다, 살아있는 몸을 나에게 제공하는 거니까 이것을 먹고 뭘 ‘해야 할지’ 성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하면 된다’는 능동성은 사라지고, ‘되면 한다’는 수동적인 반응만 남아요.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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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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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다. 자연철학의 등장

그런데 그리스적 사고가 완전한 독립에 이르렀음을 선언해야할 시대가 도래하였다. 자연학과 윤리학 그리고 토론술(Dialektik)의 시기로 불리어지는 철학의 시대가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들은 모두 하나의 지속적인 발전과정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연학의 시대는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과 함께 모든 저항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화의 시대와 결별하였다. 그리스인들 모두가 이 분야에 대한 지식에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 그만큼 일반적 추리력도 발전하여 그로부터 윤리학과 토론술도 나타났다. 철학의 가능성은 이렇듯 자연학에서 그 발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만물의 근원과 성질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민족의 경우 그들의 종교에 이미 일정한 교리로 확립되어 있었지만, 마침내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와 구전으로 전승된 자신들의 우주창조설화를 깨고 사물의 근원(archai)에로 육박하기에 충분한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탈레스(기원전 640-550년)는 물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apeiron)를 물질의 근원으로 주장하고 그 중앙에 대지가 구(球)로서 떠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물질의 근원으로 여겼고, 별들이 대지 위의 천정처럼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 안에 있으면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밀레토스 학파에 이어서 이 영역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현저히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곧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의 저작은 고대에서조차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단편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실로 여러 가지 해석과 생각들을 낳는 모태이기도 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 만물을 생성 과정으로 파악하기 위해 영원한 새로움의 상징으로서 한 순간의 휴식조차 없는 불을 필요로 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끊임없는 유동과 영원한 개조의 한 가운데 있으며 싸움이 만물의 아버지이다. 그 귀결 안에서 그는 주기적인 반복의 세계를 불태우고 있는 영겁의 불을 상정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들 중에는 그가 최초로 말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것들 중에는 감각으로 확인하기 힘든 것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서 호메로스와 그 신들의 세계에 대한 공공연한 증오와 철학자가 폴리스에 대해 행한 것으로서는 가장 최초의 격렬한 이반을 발견한다. 그의 관심사는 매우 크고 넓어 개개의 폴리스 차원의 문제들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벌써 세계 시민이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제논 등 엘레아학파의 사람들은 모든 것은 하나이고 그 하나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이오니아학파에 대립한다. 그들은 범신론의 길을 걸으면서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이 민족 종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적 존재를 그 순수성 속에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오니아학파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탐구와 다함없는 정진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사상은 그 자신의 필요로부터 학설로 발전하였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 충분한 부 또는 간소한 생활을 바탕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 시대에도 이미 철학자들 서로에 대한 경쟁이 지배하게 되었다.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3-445)

 

그런데 어느 물질적인 원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운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다(多)의 통일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또는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과 같이, 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아니면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원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간에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 체계들은 모두 종교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고 오히려 독립된 창조물이었다. 신관에 의한 강제나 유인 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자연학적 발견이나 예측은 본질적으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개인들에 의해 수행된 최초의 연구 활동이다. 이러한 지식은 종교적 의식이나 신화의 옷을 걸칠 필요가 없었다(엠페도클레스(Empedokles)의 학설에서 보이는 증오(neikos)와 사랑(philia)과 같은 추상적 힘은 여전히 신화의 파편이라고는 해도). 물론 이오니아학파의 자연학(peri physe?s)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시대적 조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가 식민지로서의 걸음을 시작할 즈음에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지기 마련인 데다가 본토의 다른 땅보다 훨씬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사고와 행동을 저해하는 모든 종교적 편견으로부터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00?-428)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탈레스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고는 하지만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민간 종교에의 예속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은 운동의 원인을 그 원소와 전혀 구별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그 ‘정신(nous)’을 여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있었을 지라도 세계에 질서와 운동을 부여하는 원리로 삼을 정도로 위대한 혁신을 이룩했다. 최대한 기존의 아무런 전제도 염두에 두지 않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dros)의 개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 또한 그들이 그 다양한 추측을 행하는 데에 얼마나 독립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그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서서히 진화해온 것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307?)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의 주장이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학파의 독립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세 명의 밀레토스 학파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에 의한 지각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배척하고 있는데 그것은 보는 주체도 객체도 끊임없이 흐름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철학자를 어떠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유로 파멸 시키려할 경우, 통상 신에 대한 불경을 빌미로 삼곤 했는데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이 아낙사고라스에 대해서 제기한 소송은 그러한 중상들의 첫 번째 사례이다. 그가 호메로스의 신화를 도덕적으로, 신들의 이름을 우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태양을 한 개의 돌 또는 뜨거운 금속 덩어리로, 달을 일종의 지면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옥고를 치렀고 석방된 후에도 아테네를 떠나 람프사코스(Lampsakos ; 헬레스폰토스 동쪽 해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또한 자신의 책을 통해 “신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아테네의 사람들에 의해서 추방되었고(기원전 411년) 그가 쓴 책들 모두가 그의 집과 뤼케이온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회수되어 몽땅 불태워졌다. 디아고라스(Diagoras) 역시 엘레우시스(Eleusis)의 비의를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고 더 심한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망을 친 그의 목에 1달란톤의 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언젠가 완전히 말라버릴 것”이라고 말한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도 결국 도망을 가서 생명을 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생각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신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희극에서는 제멋대로 다루어도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지만 철학에서만은 유독 보수적이었다. 특히 기원전 432년에 디오페이테스(Diopeithes)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자연현상을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 모두를 고소해야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진 이래, 자연에 대한 학적 탐구는 아테네에서 비밀리에 행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상으로는 더 이상 철학을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미 크세노파네스는 다신교적인, 또 의인적인 민간 종교에 대항하여 그 특유의 새로운 신의 개념인 하나이자 전체(hen kai pan)를 다음과 같은 말로 변호하고 있다. “사자로 하여금 만약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면, 신들도 사자를 닮은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 데모크리토스는 민간의 신을 부정하고, 모든 사건을 필연성으로부터 도출하여 인생의 목표를 공포나 미신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평정(euthymia, euest?)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를 시조로 하는 원자론 학파는 회의론자들과 에피쿠로스가 출현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가에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묘사하고 있듯이 그러한 움직임을 비웃는 일이 아테네에 만연해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철학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모두 철학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무고자(sykophantes)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랜 전란기를 보내면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익숙해져서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 소송을 당한다 해도 예전만큼 그렇게 무서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가능한 한 회피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에피쿠로스는 신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들의 세계 지배는 부정한다는 교묘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 철학은 민간 종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해나가면서(대체적으로 봐서 그렇다) 그렇다고 무신론은 아닌 일신론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 순환의 끝인 신플라톤주의에서 종교가 될 운명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향한 공격,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적 생존과 교양의 위대한 전제를 향한 공격은 전통적 신들을 향한 공격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 적대 행위는 벌써 피타고라스 때로부터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보다 큰 외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 대해 엄격한 신앙심으로 헌신하고 있었다. 실제 그들의 윤리학은 종교적 토대 위에서 성립한 것이었고, 게다가 종래의 신화들을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지하세계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도 “호메로스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처럼 시인들의 경시대회에서 추방당하고 채찍으로 맞아도 좋다”고 말했다. 게다가 또 신화를 거의 범신론적 개념상의 이름들로 극복하려한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공격하는 엘레게이아(Elegeia)와 이암보스(Iambos)율(풍자에 적합한 운율)의 시를 써서 신들에 관한 그들의 언급을 비난하였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플라톤이 국가에 대한 저작에서 행한 시인들에 대한 비판이다. 후대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러한 그의 태도가 소크라테스가 조각을 단념한 것처럼 그 자신 비극 문학을 단념하게 된 데에서 비롯된 호메로스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사색하는 사람들의 신화와의 결별은 이미 모든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윤리학과 토론술 또한 순전히 철학을 통해서 자연학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현상으로서 소피스트 철학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소피스트 철학은 사회 현상으로서 나중에 고찰하게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리스적 사고와 지식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소피스트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두기로 한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자들로서는 아주 만만한 경쟁 상대였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말만 들으면 소피스트들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도 높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해져온 선입견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소피스트들은 모두 외지로부터 아테네로 온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출신이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레온티노이, 힙피아스(Hippias)는 앨리스, 프로디코스(Prodikos)는 케오스 출신이다.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어 축제가 있을 때면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존경도 크게 받아 고액의 사례를 받았다. 그들이 돈까지 받았는데도 대중들이 그들에게 갈채까지 보냈다는 것은 분명 철학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라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만으로도 수긍이 갈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의 경우, 정말 도움이 되는 처방전이라면 공짜로 그것을 받는 것보다 사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을 더 좋게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라든지 투퀴디데스(Thukydides)와 같은 사람들 또한 그들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인이 있고 그로부터 생긴 필연적 결과들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된 것이 단지 소피스트들의 윤리적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선이고 그자체로 악인 것은 없다고 주장했고, 모든 것이 그 나름의 견해와 약정에 의해서(doks? kai nom?)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또 모든 일에는 찬반양론(duo logous)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또 종교와 관련해서도 그들은 단순한 회의론을 넘어서서 바야흐로 부정론을 내세워 아테네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갖 이상한 행위로 그들을 내몰았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이러한 생각들을 그토록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서 만들어 내고 유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었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이 되살아날 수 있는 일정한 방식을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그들에 의해서 개발된 연설기술(Redekunst)은 모든 인식이 주관적이라고 하는 학설과 일체의 것이 설득력에 달렸다는 학설과 결합되면서 더욱 고취되고 크게 육성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참된 인식은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철학적 문제들 전반에 대해 정통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엘레아학파로부터 차용해온 허위 추론방법을 그들의 토론술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마 정신적인 체력훈련(Gymnastik)이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의 교육에는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사람들을 ‘보다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요구에는 부응할 수 없었을 지라도, 그들은 세상사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과 기능을 가르쳤던 까닭에 대중들은 그들에 대해 대단한 사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힙피아스는 올림피아에서 석조 인장 등 자신의 손으로 만든 온갖 종류의 치장물을 몸에 붙이고 나타나 스스로 일종의 백과사전적 만능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많은 실제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서적 또한 얼마 되지 않는 지적 풍토에서 대단한 지식욕에 불타고 있었던 시대적 요구에 영합했던 것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굳이 만일을 빌어 이야기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가 그들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가 이룬 것 같은 효과를 그 시대에 미쳤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idea tou kosmou)과 천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하학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용해 지도를 작성하는 방법까지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인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음악을 가르쳤으며 문법에도 정통해 있었다. 힙피아스는 기억술과 관련한 학문도 취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논의영역에는 역사와 고고학, 폴리스의 종류에 대한 학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의 예비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비교정치학, 식민지학, 법률학, 가정 및 국가 행정에 관한 이론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다 물어보라”(das proballete)고 말한 고르기아스의 그 유명한 재촉이 논리학상의 조작에 관한 것에 불과하고 모든 학문 영역에 걸친 모든 질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그 말은 소피스트들의 지식이 그 만큼 풍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을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유포함으로써 그리스 사회에서 하나의 은혜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생활에서 필요한 요소였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사회에서 그렇게 하찮은 취급을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3. 연설기술 -다음에 계속)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철학을다시 쓴다]-⑬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철학을다시 쓴다]-⑬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때려 부수는 일은 삽시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을 제시하는 것, 이렇게 때려 부수고 나서 여기다 무엇을 쌓아올릴 것이냐를 의논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없을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고 누구든지 민감하게 대응을 하고 없애야 한다고 뜻을 모읍니다.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해도 없애야 할 것이라는 의식은 분명히 갖습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편안하게 살자, 서로 우애하면서 살자, 전쟁은 안 돼, 이런 빛 좋은 말로 때우는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실천과 연관 지어서 이건 없는데 우리가 빚어내야겠어, 길러내야겠어, 만들자고 뜻을 모으고 힘을 길러내는 데에는 창조적 지성의 결집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주 애 터지고 지루하고 힘든 건설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건설은 우리가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머리를 쓰는 일도 필요하지만 건설은 손과 발, 몸을 놀려서 합니다. 손발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이 튼튼해야 건설 사업에 동원이 되죠.

중국에 문화혁명이 있었죠?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십여 년 이상을 마오가 생존해 있었고, ‘사인방’이 전면에 나섰을 때는 세계가 온통 중국의 문화혁명에 열광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를 읽고 다니듯이 그 당시에는 마오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혁명지도자였습니다. 그 후로 사인방이 몰락하고, 급속도로 경제력이 떨어지게 되고, 세계열강의 대열에서 멀어지게 되면서, 또 문화혁명 기간에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비판의식과 창조의식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치르게 된 대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엔 등소평 체제가 등장해서 급속도로 시장경제 쪽으로 경제정책을 바꿔 오늘날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죠.

1966년 천안문 성루에서 신문을 읽는 마오쩌둥 – 출처: http://blog.hani.co.kr/blog_lib/contents_view.html?BLOG_ID=spider&log_no=26193

중국에서 부정부패는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온 사람에게 직접 들은 말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그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하면 나라가 거덜 났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괴물경제를 유지하면서도 아직 희망이 있는 까닭은 문화혁명 시절에 농촌이나 공작소로 하방되었던 많은 청소년들이 지금 중국 공산당의 중간 간부가 되어 국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희망입니다. 이 사람들이 문화혁명 때,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지원하고 어떤 사람은 강제로 끌려가서 농촌에서 몇 년, 공장에서 몇 년씩 몸으로 때운 신체적 기억이 방부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거의 모두 공산당 당원들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패가 널리 확산되지 않고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한 체제가 꾸려진 것입니다. 몸으로 겪고 때우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별로 믿을 게 못 됩니다.

체제와 상황이 사람을 규정하는 힘이 너무 커서, 책상머리에서는 혁명가이기도하고, 영웅이기도 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상황이나 체제의 압력에 짓눌리게 될 때 어떻게 망가지고 변하게 되는지는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득을 통해서나 토론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생산관계가 건강하게 바뀜에 따라서 생산력이 증가하고 그 증가한 생산력은 무한히 다양화되고, 무한히 커가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쪼는 질서’(pecking order)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페킹 오더(peking order)’는 먹이를 적게 주면 제일 힘 센 닭이 다른 닭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다 쪼아서 쫒아버리고 혼자만 먹이를 독차지해서 마음껏 먹다가 배가 차면 물러나고, 그 다음 힘이 센 놈이 쪼고, 배가 차고, 물러나고, 힘없는 놈은 나중에 비리비리 말라 죽는 힘센 놈 중심의 위계질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쪼는 질서’라고 합니다. 마르크스 레닌은 생산관계가 건강해져서 생산력이 무한히 발전하게 되면 쪼는 질서가 없어지고, 자연히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신화는 믿지 않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벌써 200년 전부터 그리고 덩달아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50년 사이에 온 세상이 도시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우선 지구라는 생태 환경 자체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무한한 탐욕에 길들여져 있는 도시인들이 물질 에너지를 펑펑 써서, 과거 삶의 자산, 미래 자손들이 물려받아야 할 생명 자산까지 짧은 시간에 전부 탕진해버리고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후손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물려줄 것이라곤 전쟁과 굶주림과 증오밖에 없는 상황이죠. 지구라는 한정된 행성에 생명자원이나, 물질자원이나 모두 한정되어 있는데, 이걸 펑펑 써버리면서 온 인류가 모두 무한히 증가하는 생산력에 따라서 무한히 증가하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킬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생명에너지, 생체 에너지를 써서 사는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200년이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인류의 삶의 양식이 급격히 바뀌어 이제 물질에너지에 기대지 않으면 너도나도 살길이 없는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물질 에너지는 확산에너지로, 폭발시켜서 얻는 에너지인데, 이 폭발 과정에서 80% 이상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그 낭비된 에너지는 모두 대기를 오염시키고 수질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오염시키는 산업쓰레기로 바뀝니다.

생체에너지는 응집에너지입니다. 여러분들 ‘확산’(divergent)과 ‘응집’(convergent)이란 말 알고 있죠? 응집 에너지가 사용되는 데는 낭비요소가 최소화되고, 산업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에너지가 순조롭게 순환하는 쪽으로 쓰이게 되는데, 현대 도시사회는 응집 에너지, 곧 생체에너지만 써서는 살길이 없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생체에너지가 응집되어 있는 정상 상태의 유기물은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만 생산되고 분배되고 소비됩니다. 그런데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도시내부에는 없습니다.

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1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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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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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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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더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증가, 그리고 그에 따른 사람들 사이의 경쟁과 다툼 이런 사회의 변화 때문에 정말 잘 사는 삶의 의미를 잊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원래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던 원형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 혼자 잘 살아보겠다는 개인주의라는 삶의 위세에 눌려 남들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은 어느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원시적인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현대라는 역사적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사람이 사람처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노력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자고 굳이 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경오염, 문명오염, 정치오염, 그리고 그보다 더 겁나는 개개인의 의식오염이 이미 퍼져있는 이 땅에서 과연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도 실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쓸려간 땅에도 그 다음 해에는 풀이 돋아난다. 이러한 풀의 기운을 되살려 풀죽어 가는 삶에 풀먹이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고” 또한 남에게 기대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그러면서도 더불어 “함께 하는” 자연(自然)을 생각하고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삶을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추상적인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문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오염된 틀에 너무 쉽게 면역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억지로” 그리고 “남에 기대는” 그리고 “혼자만 살려고 하는” 모순된 삶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모두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거나, 산업문명을 거부하여 원시생태로 돌아가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작은 희망이고 구체적인 실현가능의 삶을 추구하는 하나의 길일뿐입니다. 그래서 현실 안에서 “억지로” 그리고 “남이 시키고 남에 기대는” 모순된 삶의 벽을 하나 하나씩 깨트리고, 그래서 “함께 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같이 걷고 함께 마련하며 어울어 숨을 쉬는 그런 작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의 공간은 지리적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라고 하는 문화공간에 적응하는 새로운 방식의 삶의 패턴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연의 흐름대로 저절로 살고 스스로 사는 삶, 그리고 우리의 자연과 함께 또한 남과 함께 두고두고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실천의 지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적게 쓰면 된다. 그리고 둘째로 이왕 썼으면 그 쓴 것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한 논리를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은 한 개인 개인에게 있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공학적이거나 경제학적 접근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환경을 말하기 전에?자연을 죽어 있는 물질로만 보는 기존의 입장이 아니라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의 하나로서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환경은 인간학이 우선되어야 하고, 나아가 인간이 모여 잘 살 수 있기 위하여 철학의 중요한 숙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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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소외와 소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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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강조합니다. 획일화된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역사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주의의 양상은 조심해서 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대중매체서나 길거리에서 이제는 첨예화된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은 점점 뉴스 감으로 되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개인의 개성을 찾는 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매체에서 말하는 개성은 편협한 개인주의와 산업화의 한 단면이고, 상업주의의 농락에 빠진 개성이며 따라서 인간의 고립을 자초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산업사회 속의 인간은 이제 자기만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인간적 공격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공동체가 지니는 관계의 끈을 모조리 끊어 버리고 맙니다. 관계의 끈이 없어진 나는 생존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남을 헐뜯고, 남이 안볼 때 쓰레기를 대충 버리고 마는 무임승차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자아상실 혹은 편집광에 가까운 자만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새롭게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의 성곽 안에서 자기 자신만을 투영하는 주머니 속의 반사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의 그물망 속에서 내가 속한 위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객관적인 나의 모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그물망이란 상업주의나 개인주의의 맹목적인 희생물이 될 것을 거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그런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삶의 양식은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진 : http://laborhealth.or.kr/28730

물론 이제 현대인은 기계화된 산업화 속에 매몰된 자아를 찾으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기계나 사회조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삶의 주체자로서 행동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회사의 과장으로서의 나, 두 아이의 아비로서의 나, 동창회 총무로서의 나, 교회 집사로서의 나 등으로서 답변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내가 진정한 나인지를 되물어야 합다. 어떤 역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나의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주체적인 나를 찾기 위하여 먼저 할 일은 내가 남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이란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도 포함합니다. 시간적으로 먼 남을 같이 생각하는 일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타인을 생각하는 일은 환경을 생각하는 출발점입니다. 그 역사적 타인은 나의 자손과 지구 저편 사람들의 자손까지도 포함합니다. 왜 나 하나 살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멀리 있는 남까지도 생각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나도 비로소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현대를 보통 정보사회라고 말합니다. 정보사회가 되면서 지구 구석구석이 더욱 가까워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는 분명히 과학의 산물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교통과 통신의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해 나와 남이 더욱 가까워졌습니. 이렇게 과학기술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서로 가까워졌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아성을 더 높게 쌓고 불필요한 소비만을 낳게 하는 거대한 상업주의를 거들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자기가 사는 지역만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 나는 세계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계관을 보통 신화적 자연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화의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로, 그리고 나아가 정보의 시대로 변화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언어로 우리의 자연을 전부 그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자연과학이 형성되었고 자연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모두 그려 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오만이 팽배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 이성의 오만함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자연을 갖고 자연을 정복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성은 근대과학을 낳고 산업화를 이루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업주의 전략에 빠져 이기적 개인주의를 마치 개성의 표현인 양,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주체성인 양,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남과 벽을 만드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의 흔적이 진화되어 사람들의 의식 안에 정착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현대에 이르러 인간위기와 더불어 전지구적인 환경위기를 초래해 가고 있다는 징후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의 환경위기는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 것이어서 우리가 총체적인 인간관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현재의 환경위기를 대처하는 일은 사실 눈감고 아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창하게 인간의 소외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성을 팽개치고 관계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끈을 쓸데없이 꼬거나 끊어버리고, 개인들의 경쟁과 탐욕으로 모인 어설픈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즘 경제문제, 사회문제가 하도 심각하니 환경문제는 도외시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각종의 매스컴 보도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진짜로 바꿔져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나도 그럴 뿐인데 뭘 야단이야’ 하는 생각이 환경문제에서 정말 심각합니다.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있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환경위기가 아니라, 오늘의 환경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위기인 것입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환경위기의 원인이 단순한 물질적 오염이 아니라 의식 오염으로부터 야기된 것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로부터 어떻게 헤쳐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과학기술을 통한 환경 개량주의도 그 해결의 작은 방도일 수 있지만 환경위기가 인간위기의 한 단편임을 깨닫기에는 모자랍니다. 결국 궁극적인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단초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의 문제, 사회민주화의 문제, 경제 정의의 문제 등을 올바르게 보고 그에 따른 실천의 생활관습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먼저 소비의 문제를 따져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왜 소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소비는 문제일 수도 없고 문제되어서도 안 됩니다. 소비는 더 나은 문화적 창조를 위한 것으로 연결시켜야 하며 이러한 연결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대한 철학과 반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산림을 무차별하게 깎아 먹는 골프장과 한강변이나 신도시 주변의 러브호텔들, 축사오염, 염색공장의 폐기물, 과대포장, 일회용품 사용을 반대하는 실천적 운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시설물이나 제품이 나와야 하는 모순된 사회경제구조를 반성적으로 질문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소비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문제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표피적 현상에 얽매어 있다면 결국 개발 최상주의라는 환상에 빠지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예를 다시 청소년 문화로 돌려봅시다. 소위 신세대 경향은 개인주의의 한 양상일 뿐입니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부분이고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구세대가 만들어 놓은 마취제 기능이 성공적으로 나타난 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과소비 행태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소비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소비성향의 사회적 풍조를 반성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물질적 풍요로움의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해서 소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어 소비한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 누군가라는 것은 고정된 정관사가 아니고 우리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왜곡되어 나타난 총체적인 부정관사의 모습입니다.?

소비 문제와 관련하여 에너지 생산과 절약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존자원 에너지를 계속 늘려가자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존자원을 영원히 그리고 무한정 늘려 갈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구호를 계속 외치는 일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에너지 생산의 한계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욕구이며 둘째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된 에너지이며 셋째는 그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된 물질의 오염과 의식의 오염이 그것입니다. 의식의 오염은 새로운 물질적 욕구를 낳게 되며 다시 끝없는 악순환을 반복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건립에 대하여 오로지 앞의 둘째 문제만을 말하면서 절대로 안전하다느니 발전소 건립의 충분한 경제성이 있다느니 하는 말만을 하는 개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발전소 건립 이후 야기되는 셋째 문제가 중요합니다. 순전하게 경제적 이유만을 따진다해도, 핵발전에서 생기는 저준위, 고준위 폐기물을 처리해야만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래의 처리비용을 계산한다면 핵발전의 경제적 타당성은 전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미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핵발전 시설계획을 전면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핵발전소 역시 콘크리트 구조물이기 때문에 구조물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핵발전소는 수명이 다한 후에 아파트처럼 재건축할 수도 없고 폐기해야 하는데, 이 때 건축 폐자재인 콘크리트 조각 하나하나 모두가 영구히 보존해야할 방사능 누출오염 폐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핵폐기물 처리에 드는 경제적 비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경제적 이유를 떠나서 원자력 발전소 건립으로 더 많은 물질적인 혜택이 예상되지만 그것은 초과된 소비이며, 그 소비를 향유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회범죄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파괴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단지 우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식의 오염은 핵 쓰레기 문제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에너지를 갖고 또 얼마나 많은 ‘문명의 잔해’를 만들어 낼 것인지 생각해 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개발주의자들은 지구의 미래를 장밋빛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싶겠지만 지금 같은 소비형태와 문화양상으로 비추어 볼 때 결코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에 이어서 계속되는 경제 불황의 근본 원인은 위기를 낳은 사회적 요인에 대하여 근원적인 치료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일은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총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의 경제위기를 단순히 경제 정책이나 단순이론으로만 풀려는 것은 진정한 문제해결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경제난국을 푸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경제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경제단위인 주체인 소비자의 맹목적인 소비 행태들을 스스로 반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소비의 맹목성을 부채질한 기업의 소비 유도논리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의식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의식오염을 정화하기 전에는 결코 정상적인 경제 정착이 어렵다는 것은 너무 뻔한 일입니다.?

환경문제는 총체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구조적 이해 없이 개인의 환경구호만을 강조하면 지하철과 공원과 길거리는 깨끗해질지라도 기업의 일회용 포장지와 화학적 제품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도쿄의 길거리는 정말로 깨끗하지만 1인당 일회용품 사용량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쓰레기 분류가 잘 되기는 하지만 사회의식이 결여됐다면, 지금의 검측기로 측정이 어려운 다이옥신은 소각로 굴뚝에서 더 많이 나올 것이며, 원자력 에너지가 청정에너지라는 정부의 홍보가 승리하여 여기저기 핵발전소가 들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님비현상을 단순한 지역이기주의라고 계속 몰아붙이면서 행정편의주의로 가거나 기업가의 손을 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폐기물 이동금지협약은 유명무실해져서 국가간 기술이전과 경제원조라는 명목 아래 힘의 논리와 경제논리가 우선한 특정폐기물의 보이지 않는 이동이 더할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시장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FTA 체제 국제경제의 흐름은 시장경제기준을 몇몇 힘 있는 선진국에 맞출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논리와 전체논리 사이의 괴리는 경쟁과 이기주의, 약육강식과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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