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②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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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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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2012 여름 85호에 실었던 논문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 탐색」의 제목을 변경하고 문장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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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래,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 잉여노동을 자본가가 취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에서 수행되는 경제활동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제한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순수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대안적 시장이나 비시장적 거래가 존재하며, 대안적 지급이나 미지급으로 노동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대안적 기업이나 비자본주의적 기업 등과 같은 비자본주의적 기업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아래 두 칸에 나열된 다양하고 풍부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보라. 깁슨-그래함에 의하면 시장거래가 아닌 윤리적 공정 거래나 협동조합 방식의 교환, 개인적 선물이나 국가적 배분과 같은 비-시장적 유통은 비자본주의적 경제이다. 화폐교환이나 임노동과 관계없는 품앗이나 자원봉사 혹은 대안적 지불 형태도 자본주의 경제를 벗어난 경제적 활동이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나 공동체 사업 그리고 자영업 역시 생산된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어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칙을 갖는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기업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 봉건적, 노예적, 독립적 혹은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며 이 원리는 또한 성, 인종, 제도 여타의 규범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경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경제형식들일 뿐이다,
깁슨-그래함의 모델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분석해 보면 그녀가 다층적인 차원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은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들로 점철되어 있다. 봉건적 가족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의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는 비지불 노동이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그녀는 봉건적 가족 관계 내에서만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학교에 봉사활동을 하며, 아이 돌봐준 이웃의 아이들에게 과외지도를 한다. 이러한 봉사활동, 품앗이, 호혜적 노동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다. 그녀는 사적인 관계 내에서 순수 비자본주의적인 경제활동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하는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화폐를 통해 매개되는 임금노동이라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노동이 순수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하시장에서 노동하며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잉여노동을 자신에게 배분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에도 연루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해 지는 것은 조씨가 경제와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 활동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의 본질적 경제체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형식들과 다층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풀어야할 문제는 그녀가 수행하는 경제적 활동이 어떻게 대안적 잠재성을 갖는가이다. 만약 우리가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비자본주의를 나약한 경제형식으로 간주한다면,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언젠가 자본주의에 의해 침투되고 식민화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깁슨-그래함은 어떤 전략에 따라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긍정적 가능성을 주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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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적 차이의 담론과 중층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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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이 사용하는 전략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녀들은 비자본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함으로써 본질로서의 자본주의가 가졌던 막강한 힘을 탈각시킨다. 이것이 바로 본질주의에서 경제적 차이로의 전회이다. 다른 한 편으로 그녀들은 이러한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바탕으로 중층결정론을 주장한다. 다양한 경제 형식들 중 어떤 하나가 본질로 설정될 수 없으므로 이제 경제는 다양한 형식들이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중층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의 전략부터 살펴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깁슨-그래함은 기존의 이론과 달리 우리 사회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이것은 전체 경제형식의 50%이상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양식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은 이에서 머물지 않는다. 깁슨-그래함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재소환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시킨다. 그녀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한 발 더 밀고나가 여성 정체성이 다양하다면 남성 정체성 역시 다양하게 이해될 때 대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경제 형식 역시 다양하다고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깁슨-그래함은 자본주의 역시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형태학으로 파악될 수 있는 통일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들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금융부문도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가령 개인투자관리사와 같은 자영업자는 자신의 잉여노동을 스스로 전유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인 특성과 절합되어 있고, 자유로운 사업대출 분야의 성장은 많은 비자본주의적 기업 특히 자영업 활동의 신장에 기여했다. 그녀들에 따르면 주어진 정의를 매끈하게 따르는 그런 순수한 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생각보다 적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말해왔던 것처럼 매끈하거나 통일적이지 않다.
이렇게 자본주의마저 복수화하는 전략은 깁슨-그래함의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급진화시킨다. 이제 그녀들의 정치 경제학 내에서 모든 요소들을 관통하거나 지배하는 통일된 단일자로서의 본질은 없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모든 사건은 그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깁슨-그래함의 두 번째 전략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본질로서의 위상을 잃게 됨에 따라 그 강력한 힘도 잃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제형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로써 경제 영역은 다양한 경제 형식들이 절합하고 혼종되는 장소가 되며, 여기서 다양한 차이들의 성격과 방향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중심은 없다. 새로운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강력하거나 통일적인 영웅 혹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경제적 차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의 절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하나의 경제형식일 뿐이다.
반대로 비자본주의는 더 이상 무력한 경제형식이 아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비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고유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고 탈구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정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혹은 낡은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이상으로 존재해 왔으며, 유령처럼 늘 자본주의의 주변을 맴도는, 결코 제거되지 않는 힘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기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겁을 먹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늘 우리 곁에 있었던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힘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껏 말해왔던 방식의” 자본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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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대안적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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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의 차이의 경제학 속에서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사소하지 않다. 그녀의 가부장적, 공동체적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적 경제에 의해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앞에 떨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는 이제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절합되는 하나의 경제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깁슨-그래함의 청사진은 객관주의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곤 하였다. 정치경제학이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며, 강력한 자본주의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객관주의자들은 담론을 달리한다고 해서 객관적 세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깁슨-그래함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한 편으로는 그녀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사례들을 발굴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확장시키려는 실천을 통해 담론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령 깁슨-그래함은 호주 탄광촌의 광부 부인들의 사례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가부장적 착취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사례에 따르면 탄광회사는 광부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조건으로 불규칙적인 교대근무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광부의 부인들은 그러한 조건이 가내의 착취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가내의 생산적 노동자로서 광부의 부인들은 자신의 봉건적 착취에 대항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대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깁슨-그래함은 잉여의 공동 분배를 지향하는 협동조합 활동이나 상호 호혜적 노동이 만들어 내는 공동체 경제의 형성에도 주목하면서 이러한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깁슨-그래함이 제시하는 사례들이 발견될 수 있는가? 오래 동안 우리는 사회의 전체 영역에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다는 각본에 매달려 왔다. 많은 비판이론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데 열중해왔다. 그러나 비판이 강하게 고조될수록 자본주의는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드러냈으며 그 괴물은 어떤 저항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침범되고 강간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으로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 깁슨-그래함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다시 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우리 역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가진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해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던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족들의 밥상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확산에 저항했다. 그들의 저항은 가족 내에서의 그녀의 생산적 경제활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품앗이의 사례들도 주목할 만하다. 과천에서 만들어진 지역 공동체에서 수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품앗이 활동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한 시간 단위로 자신의 노동을 책정하고 서로의 노동을 교환한다. 내 아이를 한 시간 맡기는 대신 머리 염색을 한 시간 해주거나 과외지도를 한 시간 해 주는 식이다. 여기서 노동의 가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가치체계에 따르지 않는다. 모든 노동은 공평하며 돈이 없어도 일상의 많은 생활이 가능하다.
이렇듯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채택하게 되면 여성의 경제활동은 나약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앞서 제시했던 조씨의 경제활동은 봉건적 혹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무력한 부정적 활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는 공동체적 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 자본주의를 경제의 유일하고도 막강한 형식으로 보면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폄하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 비자본주의적 경제의 실천을 의식적으로 감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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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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