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조은평(건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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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과?‘힐링’!?곳곳에서 상처받고 삶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유혹하는 말들입니다.?게다가 인생의?‘멘토’를 자처하는 온갖 전문가들이?‘멘붕’에 빠진 우리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돼주겠다고 외쳐댑니다.?물론 이 복잡하고 유동적이며 불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노력들은 어쩌면 절망적인 삶에서 헤쳐 나오려는 나름의 노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인생의 멘토가 될 수 있을까요??대체 누가 어떤 권리로 내 삶의 나침반을 자처하며 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사실 우리는 너무나 힘든 삶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로 이런 전문가들에게 기대려 합니다.?그럼에도 이처럼 전문가들에게 기대려는 충동은 결국 스스로 삶을 반성할 수 있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인문학,?특히 철학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어쩌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주변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더구나 그런 자신의 고민들을 주변 지인들과 나누며 치열하게 토론한다면,?누구나 우리 삶을 억누르며 방해하는 요인들과 사회 환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아마도 철학은 이런 스스로의 노력들이 만나 소통하는 공간이자 함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서로 소통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철학이란? : ‘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로부터 출발하는 철학함

“스스로의 철학함(Philosophieren)?없는 철학은,?다시 말해 자신의 철학적 체험이 없는 철학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1)?일상에서 솟아나는 철학

-?철학이란??과연 인간이 생각하는 이유는? ‘철학이란 결국 비-철학,?철학의 외부’?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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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럼에도 일상에 거리두기를 하는 철학(비판/반성/낯설게 보기)

-?일상에서 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하지만 동시에 일상에 매몰되는 우리들.

-?말하자면?‘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는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면에서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철학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처럼 일상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즉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출발하지 않는 철학적 물음을 당연히 공허하다.?하지만 반대로 일상에서의 삶에만 매몰되고,?그 속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들과 대답들 속에만 갇혀 있게 될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철학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동시에?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고 고민한다.

-?바로 플라톤의?‘동굴의 비유’는?‘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일상???철학?(일상에서 솟아나는 동시에,?일상에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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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늘의 주제이자?‘일상에서 솟아나는 사소한 질문’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

-?나는 왜 쇼핑몰을 갈까??또 쇼핑을 하면 왜 즐거운 걸까??특히 기분이 우울하거나 짜증날 때,?대형 쇼핑몰에 가면 왜 갑자기 즐거워지는 걸까??뭐 여러 가지 질문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듯.

-?그럼 왜 쇼핑몰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당연히 내가 그 공간에서 만큼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소비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

-?그러면 일단 우리 삶에서 쇼핑이 이루어지는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1)?쇼핑할 때 느끼는 자유와 해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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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느끼는 자유와 해방의 상황은 아마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말하자면 다른 일상에서의 삶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누릴 수 없더라도, 쇼핑을 하는 순간만큼은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쇼핑몰을 산책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듯.

– 이런 측면에서 쇼핑의 공간은 마치 ‘약국’과도 같은 곳.(아래 바우만 참조). 다시 말해 모든 일상의 괴로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 (물론 나의 구매력이 허락하는 한!)

2) 쇼핑몰이라는 동굴의 비밀(?)

– 하지만, 사실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즐기는 쇼핑의 순간은 그저 잠깐일 뿐이고 그때 느끼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해방의 감정도 결국에는 나의 구매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 이렇듯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쇼핑을 할 때, 또 쇼핑몰을 구경할 때 우리는 그럼에도 자유롭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율성이라는 환상 : 독립적인 소비자. 합리적인 소비자. 주체적인 소비자) 말하자면 그 무엇에 의해(광고든, 마케팅이든 간에) 영향을 받아 소비를 한다고 하더라고(그렇다고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나의 결정이니까 나의 자유라고. 그렇기에 난 자유롭고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뭐 이런 식으로 우린 스스로의 자율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후적으로 정당화한다.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 이데올로기적인 원환성)

–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공간에서는 너무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일터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고, 정치 영역에서는 늘 전문 정치인들에게 지겹게 끌려 다녀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일상의 부자유 공간에서 벗어나 쇼핑할 때만큼은 나의 자유를 누린다고도 할 수 있을 듯.

– 하지만 쇼핑의 공간과 쇼핑의 상황은 어쩌면 ‘플라톤의 동굴’과도 흡사하다. 마치 동굴 속 죄수들이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상상하듯이, 현대의 소비자들도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 ‘동굴’ 벽면에 펼쳐지는 이미지 세계 =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

–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푸코가 ‘현실에 감옥이 왜 존재하는지 아는가? 현실이 감옥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기 감옥이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쇼핑몰이 우리 주변에 멋지게 펼쳐져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쇼핑몰과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라고’.

– 말하자면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이미 소비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소비지상주의 사회’라는 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몰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를 하며 살고 있다고 믿게 하는 사회는 어떤 식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일까?

– 바로 이런 논의가 ‘소비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철학적, 사회적 논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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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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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구태환(상지대 강사)

 

이 글은 5월 20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세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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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그리고 공자와?『논어』

우리나라의 성인들 대부분은 『논어』라는 책을 한 번은 접해봤을 것이다.그래서인지 『논어』의 첫 구절인?“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대부분 알고 있다.?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다는 것은 맞아.?하지만 공부가 얼마나 지겨운데.?배우고 익히는 게 기쁘다는 것이 말이 돼?’라고 말이다.?물론 멀리 있는 벗이 나를 보고자 찾아왔는데,?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그런데 배우고 익히는 것,?즉 학습(學習)은 진정으로 기쁘지 않은 것일까??여기에서 우리는『논어』 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여기에서‘배우고 익히는 것’은 반드시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읽기 싫은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다.?영어,?수학을 배우는 것도 배우는 것이지만,?수영,?오락,?기타,스케이트보드,?스키,?춤,?노래,?축구,?심지어는 화투를 배우는 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그것이 재미있고 기쁘지 않다는 말인가??실제로 공자는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서 그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석 달간 고기 맛을 모를 정도로 심취했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논어』에는 언뜻 봐서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 제법 있다.?물론 『논어』에 담긴 모든 말을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와 재전(再傳)?제자들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다.?공자(이름은 구丘)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경제적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대였다.?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가 붕괴되고 힘을 상실한 천자를 대신해서 각국의 제후들이 중국 천하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다투던 혼란기이다.?공자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종법적 질서가 회복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이러한 공자의 노력은 각국을 돌아다니던 공자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그는?56세부터?68세까지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나름의 천하를 평정할 방도를 역설한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고,?공자는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오죽하면?‘도가 실행되지 않는 세상을 떠나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다니고 싶다’고까지 한다.?그리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임금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조나라의 필힐이 부르자 그를 만나려 하고,?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당시에 국정을 좌우하는 여인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위나라 군주의 아내인 남자(南子)를 만나기도 한다.?그리고 이런 행동 때문에 제자 자로(子路)로부터 욕을 먹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공자는 이처럼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노력했지만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결국?68세의 나이에 조국 노나라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쓰다.

 

학습의 내용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의 내용은 무엇일까??사마천의『사기』?에 의하면,?공자의 제자는 약?3,000명이고 그 가운데?‘육예(六藝)’에 통달한(通)이가?72명이었다고 한다.?그렇다면 공자의 학습 내용은?‘육예’였던 셈인데, ‘육예’는 예(禮,?예의범절),?악(樂,?음악),?사(射,?활쏘기),?어(御,?말이나 수레 몰기),?서(書,?글쓰기),?수(數,?셈하기)를 말한다.?이 여섯 가지는 당시의 지배층이 습득해야 교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육예에?‘통달했다’는 것이다.

통달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것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의 원리까지 체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즉 학습의 궁극의 경지이다.?예컨대 조상에 대한 제사나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예의 중요한 항목이다.?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례나 상례를 치룰 때 그러한 의식을 왜 거행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답습한 대로 실행할 뿐이다.?하지만 공자는 제례나 상례가 조상과 부모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의식임을 밝히고 있다.?어떤 의식에 통달했다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연원이 무엇인지를 궁구하여 밝히고 이해하는 것이다.?그리고 겉모습으로서의 예의만이 아니라 그 예를 실행할 때의 마음가짐까지 갖추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그리고 이러한 교양은 지배층이 습득해야 할 것이다.

 

배움의 목적,?군자

DSC09035-1사실 공자가 개창한 유가 사상은 일반 백성들을 위한 사상이 아니다.?지금과는 달리 신분제 사회였던 과거에 일반 백성은 그 사회의 주인이 아니었다.그 사회의 주인은 임금을 비롯한 소수의 지배층이었던 것이다.?그리고 유가 사상은 사회의 주인인 이들 지배층이 어떻게 하면 일반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공자가 보기에는 이들 지배층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했다.?그리고 배움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들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군자(君子)’이다.?우리는 흔히?‘군자’라고 하면, ‘도덕군자’, ‘성인군자’를 연상하며,?도덕적 인격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하지만?‘군자’는 글자 그대로 임금(君)의 아들(子),?즉 지배층이다.?그런데 공자는 이 용어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말 그대로 지배층이다.?계강자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선해지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해질 것입니다.?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으니,?풀 위에 바람이 불면(풀은)?반드시 눕게 됩니다.”?지배층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면,?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이,?백성들도 그를 모델로 하여 선해질 것이라는 말이다.?이처럼 군자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공자 이전에는 당연한 것이었다.?그런데 공자는 이 개념을 변용한다.

공자는 지배층을 가리키는?‘군자’를 군자다운 덕목을 가진 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그는 군자를 이야기할 때 원래는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인?‘소인(小人)’과 대비해서 말하고 있는데,?그 중 하나가?“군자는 옳음에 밝고,?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말이다.?이것을 현대어로 바꾸면, ‘지배층은 무엇이 옳은가에 관심을 갖고,?피지배층은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가 된다.

그런데 공자의 이러한 언명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위를 말하고 있다. ‘착한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가 실제로는?‘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는 의미를 갖는 것처럼 말이다.?위의 언명도?“군자(지배층)는 옳음에 밝고,?소인(피지배층)은 이익에 밝다”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지배층은 옳음에 밝아야 하고,?피지배층은 이익에 밝아야 한다”로 읽힐 수 있다.?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옳음에 밝아야 지배층 자격이 있고,?이익에 밝은 이는 피지배층일 뿐이다”?라는 말이 된다.?이는 옳음,?사회적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지배층에 대한 공자의 질타이다.

 

군자의 모습

공자가 말하는 배움이 진정

DSC09029-1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그러한 군자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비교적 잘 알려진 구절로는?“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는 못한다)를 들 수 있다.?여기에서
의?‘화’는 조화나 화합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이러한 조화나 화합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들 사이에 가능하다.마치 오케스트라의 여러 다른 악기들이 각각의 음을 내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듯이,?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타인과 조화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낸다.?이처럼 서로 화합하고 조화하는 그들이지만,?결코 권력과 이익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힘 있는 이의 견해에 무조건 동조하는 소인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을 갖는 이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커다란 원칙이 필요할 것이다.?즉 이들도 서로간에 다름 속에서도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그 안에서 조화할 수 있을 것이다.?공자의 사상에서 그러한 원칙은 인(仁)과 예(禮)라고 할 수 있다.?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랑을 표현해내는 수단(예)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을 공자는 꾸밈과 바탕의 적절한 조화라고 한다. “子曰,?質勝文則野,?文

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공자가 말했다.바탕이 꾸밈을 넘어서면 야만인이고,?꾸밈이 바탕을 넘어서면 문서를 다루는 관료이다.?꾸밈과 바탕이 아름답게 조화된 다음에야 군자가 된다)”는 문장에서 바탕(질)이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즉 인이고,?꾸밈(문)이란 사랑의 표현,?즉 예이다.?이처럼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군자인 것이다.

이러한 군자,?즉 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이 현실에서 지배층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린다면,?우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그리고 그 사랑을 적절히 표현할 제도를 마련할 것이다.?만약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것을 제도로써 표현해야 할 것이다.?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제도만 내놓는다면,?그 제도는 아마도 백성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얻기 위한 것이거나 눈앞에 닥친 정치적 곤경을 순간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하지만 그러한 제도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될 리는 만무하다.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은 바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공자는 그러한 군자가 세상을 다스리기를 바랐으며,?그러한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은 평화롭고 도덕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군자는 누구인가??우리 시대는 신분제를 거부한다.모든 사람이 평등하며,?헌법에도 나와 있듯이?‘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즉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주인인 사회를 지향한다.?신분상으로 봤을 때 우리 사회의 모든 성원이 군자,?즉 이 사회의 지배층인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군자들은 누구를 다스리는가?바로 우리다.?우리는 각자가 군자이면서 소인이다.?이제는 신분상의 군자,소인은 무의미해졌다.?다만 각자의 관심에 따라,?즉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에 따라 소인과 군자가 나뉠 뿐이다.어찌 보면 공자가 생각했던 것이 실현된 사회이다.

자기들을 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지배에 따라 사는 소인이 될 것인지,?스스로가 군자인 지배층이 되어 소수의 관료들을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살 것인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시대이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 6월 17일 주인으로 살아가기-맹자의 『호통』?:?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노동소외-왜 아침에 출근하기 싫은 걸까?<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2

노동소외-왜 아침에 출근하기 싫은 걸까?<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2

이재유(건국대)

 

 

1.?나는 월요병에 걸려 있다!

2강1-1우리의 노래 중에?<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라는 노래가 있다.?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아쉬움이 쌓이는 소리/?내 마음 무거워지는 소리…….?우리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홀가분해지고,?일요일 저녁이 되면 뭔가 불안하고 마음이 찝찝하다.이것은 평일에도 비슷하다.?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가 참으로 힘들다.?그렇지만 저녁 퇴근 무렵이면 생기가 난다.?학생들일 경우에 수업시간만 되면 졸리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얼굴에 생기가 돋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원시시대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아니다.?이런 삶의 모습은 다름 아닌 현대인들의 모습이다.?우리는 왜 일이나 공부하러 갈 때는 불안하고 끔찍하다고 생각하고,?쉬거나 노는 시간에는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끼는 것일까??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시인 엘리엇(T. S. Eliot)의 시‘텅 빈 인간(The Hollow Me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텅 빈 인간

우리는 짚으로 채워진 인간

서로 기대고 있지만

아!?머리통은 짚으로 가득 차 있네

우리가 모여 수근대면

메마른 목소리가

소리 없고 의미 없다

마치 마른 풀섶 지나는 바람

또는 메마른 지하창고에서

깨어진 유리 위를 밟는 쥐 소리

형체 없는 모양,?빛 없는 그늘

마비된 힘,?동작 없는 몸짓.

곧장 바라보고 죽음의 다른 왕국으로

바다 건너간 자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 한들

지옥에 떨어진 맹렬한 혼으로서가 아니라,?다만

텅 빈 인간으로서

짚으로 채워진 인간으로서.

이 시는?‘텅 빈 인간’의?Ⅰ부의 내용이다.?시인이며 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자아를 모르는 현대인들을?‘텅 빈 인간’이라 부르고 그들의 모습을 읊었다. ‘이렇게 세계가 끝나는구나’로 결말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이 시는 세계가 총이 아니라 인간의 흐느낌으로 멸망한다고 끝을 맺는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즉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디에서건 발견할 수 없음을,?우리가 아무 생각 없는 기계나 좀비가 된 것은 아닌가를 의심해 본다.?이제 우리는 아침에 일하러 가기 싫은 이유를 이렇게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싶다.?즉 우리가 일하러 갈 때 불안감과 끔찍함을 느끼는 이유가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갈 수밖에 없는 강요를 당하는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2.?노동과 자유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일을 할 때 인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이 상실된다는 것은 일,?즉 노동이 인간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할 수 있다.?근대 이후 인간다움의 기초는 바로?‘자유’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권은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일을 할 때,?즉 노동을 할 때,?현대인들은?‘자유’를 상실한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다.?이때?‘자유’란 동물처럼 자연법칙이라는 타자의 압력이나 강제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러므로 자유를 상실한다는 것은 이른바 동물적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유는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과연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까??인간도 동물처럼 자연법칙의 영향을 받으며,?자연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이에 대해 철학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란 자연법칙으로부터 공상적인 독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이 법칙을 인식하고?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그러므로 자유는 자연의 필연성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우리 자신과 외부 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다(엥겔스,?『반뒤링론』).”

결국 자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법칙을?‘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리고 자연법칙을 계획적으로 작동시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활동 또는 행위가 바로?‘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이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인간화시키는 것’이며,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3.?자본주의 사회에서 왜,?어떻게 소외가 발생하는가?

1)?자본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이다.?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자본주의 사회는 봉건사회 등 이전의 사회와는 달리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판매되는 사회이다.?그리고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생산되는 사회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상품들과 구별되는,?상품을 만들어 낸 창조주이자 주체이다.?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인간의 주요 특성이 바로?‘노동’?자체이고,?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 노동 자체를 다른 모든 상품처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으며,?다만 이러한 노동의 구현체로서의 노동력(다른 모든 상품들도 노동의 구현체이다)이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다.

그러므로?<노동>과?<노동력>의 가치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인데,?왜냐하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이 노동력은 이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주체로서의 인간과 현실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이다.?다시 말하자면 시장에서 판매되긴 하였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가능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노동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즉 노동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노동을 마르크스는?‘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라 하는데,?노동력과 기계,?원료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이는 종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이 새로운 가치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이다.?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는 바로 인간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이다.

또한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시장의 경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아래의 도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이재유 그립파일

C(불변자본, Constant capital):기계,?공장부지,?원료 등을 뜻하는데,?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본을 뜻한다.

V(가변자본, Variable capital):노동자의 노동력을 뜻하는데,?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을 뜻한다.

S(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 Surplus)

C+V+S:단순가격으로서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을 뜻하는데,?시장에 나오기 전의 그 상품의 가치를 나타낸다.

P(이윤, Profit):시장에서 그 상품이 팔렸을 때 실제 남는 이윤을 뜻한다.

C+V+P:생산가격으로서 단순가격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통해 현실화된 가격이다.

표에서 자본가Ⅰ,Ⅱ,Ⅲ?모두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총100원(C+V)을 투자하고,?잉여가치율(S`=V/S)이 모두?100%라고 가정한다.?이때 상품은 단순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경쟁에 따라 단순가격들의 평균으로?120원에 팔리게 된다.?그러면 자본가?Ⅰ,Ⅱ,Ⅲ?중 자본가Ⅰ이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다.?즉 단순가격에?10원의 이득이 더 붙는다는 것이다.?그 다음에는 자본가Ⅱ이고,?그 다음에는 자본가Ⅲ이다.?자본가Ⅱ는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같고,?자본가Ⅲ은 단순가격에서?-10원을 손해보고 있다.?가격경쟁에서 자본가Ⅰ이 우위를 점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런데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요인이 무엇일까??그것은 자본가Ⅰ이 자본가Ⅱ,Ⅲ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C/V)가 높다는 것이다.?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높다는 것은 가변자본이 적어진다는 것,?즉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적어지고,?불변자본이 많아진다는 것,?다시 말해 사람이 일하던 것을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이며,?그 기계의 효율을 최대한 높여서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구조조정’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가변자본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가변자본에 의하여 생겨난 잉여가치(S)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잉여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은 이윤율(S/C+V)이 줄어든다는 것이다.?이 이윤율은 경제성장률 지수의 척도이다.?위 표에서 보다시피 자본Ⅲ의 이윤율은?30/100인데 자본Ⅰ의 이윤율은?10/100이다.?서구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1~2%대에 머무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이며,?이는 곧 노동력을 감소시킨다.?그리고 이 노동력의 감소는 다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가져와서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하게 되며,?다시 노동력을 감소시킨다.?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순환과정은?<이윤율의 저하 경향?→?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노동력의 감소?→?이윤율의 저하 경향?→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노동력의 감소?→?이윤율의 저하 경향?→ ……>이다.?노동력의 감소는 노동자의 임금 전체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며,?비정규직과 실직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이러한 순화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

2) <노동의 소외>는?<노동력의 가치>로 나타난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노동>과?<노동력>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소외가 발생하는 것은?<노동>이 아니라 물적인 형태로서의?<노동력>으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이란 자연과의 관계,?나아가 사회적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활동 일반이 아니라,?자본가와 관계 맺는,?즉 자본에게 종속되고 착취되는 관계로서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실체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노동은 자연과의 관계,?나아가 사회적 관계,?즉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활동이다.

가치란 자본주의 하에서의 역사적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변환시키는 척도이다.?그리고 이때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노동력>의 가치이다.?이 노동력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인간 노동의 소외 형태이다.?왜냐하면 인간 삶의 목적이 이 가치에 종속당하게 되며,?결과적으로 이 가치로서는 인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노동력 가치의 현상 형태가 가격인데,?가격은 구체적으로 임금의 형태로서 우리 눈에 나타나게 된다.?가격 또는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나는데,?그 이유는 경쟁 개념이 도입되기 때문이다.?또한 임금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도 동일 부문의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자면 최저임금제는 바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에 근거해 책정된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노동력의 가치의 현상 형태인 가격 또는 임금은 인간 노동이 소외된 형태이다.?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매달리거나 생산성을 담보로 하는 임금인상은 인간 노동 소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마르크스는?『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노동 소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실로 노동 자체는 노동자가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가장 변칙적인 범죄를 저질러야 비로소 자기 것으로 차지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자유로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를 계발하지 못하고,?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며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 탈아감(脫我感, ausser sich)을 느낀다.?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 편안한 느낌을 갖고,?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한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소외된 노동은 자기 활동 곧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類的)?생활을 인간의 신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소외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 맞서 있는 상태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맞서 있는 상태 속에서 비로소 현실화되고 분명히 표현된다.

 

2강-1

 

4.?인간 노동 소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각자의 필요에 따라”,?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교환,?소통되는 방식이다.?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친구들과의 관계,?가족과의 관계,?연인,?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서로에게 격려와 희망,?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교환,?소통하는 방식이다.?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교환,?소통하는 방식이다.?쿠바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베네수엘라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밀을,?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베네수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결국 중요한 것은?<생산양식>이 문제이다.?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생산양식,?즉 계획 생산 양식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 양식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스마트폰에 몰두하는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1

사람들은 왜 스마트폰에 몰두하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1

박영욱(숙명여대 교수)

 

1.?스마트폰은 그저 흥미로운 첨단 기계이다?

1강-1스마트폰이 처음 상용화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진화된 휴대폰이 등장하였다고 환호하였다.?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기존의 휴대폰과 달리 엄청난 기능을 지닌 기계로 인식되었지만 여전히 진화된 휴대폰으로 여겨졌다.?그러나 아이폰을 소개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기계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알리는 메시지임을 강조하였다.?그에게 새로운 기계란 단지 새로운 물건이 아닌 그 이상의 것,?즉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였다.

이는 캐나다 매체이론가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말을 빌자면“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이 명제는 미디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미디어 자체가 곧 메시지라는 말을 의미한다.?한 예를 들어보자.?영화라는 미디어를 예로 들자면,?가령 헝가리의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인 벨라 발라즈(Bela Balazs)는 사라진 인간의 얼굴 표정을 되찾아주었고 말하였다.?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나오기 이전의 대표적인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인쇄매체와 비교해보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grammaphone, 1877)도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명제를 잘 설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이전에는 소리를 정신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였다.?인간의 언어나 음성은 어떤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었다.?소리를 정신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한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헬름홀츠의 경우처럼 소리를 단순히 진동으로 파악함으로써 소리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말하자면 축음기는 소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음을 암시한다.?소리가 단순히 진동으로 간주되면서 이제 소음과 음의 구분은 급격하게 소멸되며,?음악 자체도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미술이론가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은 서양 근대회화와 전통적인 동아시아 회화의 차이를 매체의 차이에서 찾는다.?그에 따르면 유화는 소거적인 매체로서 매체 자체의 흔적을 지우는 투명한 매체임에 반해,?동아시아 회화는 매체 자체의 흔적을 드러내는 지시적 매체이다.?그는 매체의 차이가 두 그림의 세계관이나 양식적 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2.?디지털 세계는 가짜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은 세상의 거의 모든 복제가 가능한 복제기술이므로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가짜를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물론 이러한 경고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사진만 하더라도 그러하다.?우리는 자연적인 것(natural)이 아닌 인위적인 것을 표현할 때?‘합성’(synthesis)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이때 합성이란 인위적으로 어떤 것들을 화학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결합한 것을 의미하는데,?오늘날 디지털 시대에는 간혹 가짜라는 말의 대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가령 디지털 사진이 나오기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진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진정성 등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미디어였지만,?오늘날 사진은 가짜나 변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증명사진 또한?‘증명’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이러한 현실은 디지털 세계가 가짜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의 메시지일까?

1강2-1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사진의 예를 좀더 꼼꼼하게 살펴보자. 1839년 다게르에 의해서 발명된 것으로 공식화된 사진은?19세기 말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일부 사람들에게 사진은 회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매체로 각광받았지만,?결코 사진이 회화를 대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사진과 회화가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하였으며,이때부터 오히려 회화는 사진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으면서 예술은 어떤 정신적인 것의 표현이라는 전통적인 예술관마저도 위협받게 되었다.?벤야민은 이러한 사실을‘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논문형태의 글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사진이 회화와 다른 점은 회화가 아무리 현실과 똑같은 이미지를 만들려고 해도 작가의 관점에 의해서 코드화되는 특성이 있는 반면,?사진은 작가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모두 통제하려 해도 셔터만 누르면 자동적으로 현실세계를 복제한다는 점에서 코드화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이 점이 바로 사진을 진실한 미디어로 만드는 특성인 것이다.?말하자면 사진가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통제,?즉 조작하거나 합성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디지털 사진의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디지털 사진은 얼마든지 합성될(synthesized)?수 있다.?그런 탓에 디지털 사진은 사진에서 진실성이라는 권위를 박탈시켰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과연 디지털 사진은 사진이 지닌 이 위대한 권위를 박탈시킴으로서 사진의 몰락을 가져온 것일까?

물론 아니다.?디지털 사진의 변형은 주로 레이어들을 중첩함으로서 이루어진다.?이른바 합성과정을 거치는 것이다.?이러한 합성이 그럴듯한 가짜 현실을 만들고 이를 현실처럼 착각하게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일까??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디지털 사진은 합성을 통해서 진짜같은 가짜를 만들어 속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이를 칸트의 철학을 빗대서 표현하자면 디지털 사진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도식(scheme)을 창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3.?진리란 변형가능한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가장 큰 특성은 변형가능성이다.?계속 예술의 경우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디지털 이미지와 전통적인 회화 이미지의 가장 큰 차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정보화된 이미지라는 점이다.?이는 타자기나 손으로 쓴 글씨와 디지털 워드프로세서로 쓴 글씨가 전적으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컴퓨터 모니터에 비친 글자는 손으로 쓴 글씨나 혹은 타자기로 찍은 글씨와 형태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글씨는 정보화된(궁극적으로는?0과1로 이루어진 비트 단위로 기록된 데이터이다)?데이터이므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누군가가 컴퓨터 파일로 유서를 작성하였다면 그 진위는 매우 의심스러울 것이다.?필체를 흉내 내지 않고도 조작이 가능할테니까.

이렇게 변형이 용이하다는 것은 어떤 항구성이나 진실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의 소통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소통이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 경고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은 아닐까??물론 변형이 용이하다는 말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이 들어보았겠지만,?백남준의 티브이 예술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수동적인 미디어로 생각하였다.?대중매체나 예술이 사람들을 획일화시키고 천박하게 만든다는 믿음처럼 이러한 생각은 광범위하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백남준의 텔레비전 예술은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저항이다.?매체이론가 엔첸스버거는 매우 간단한 조작을 통해서 수신기인 라디오는 송신기로 개조될 수 있다고 보았다.?수신장치나 송신장치는 원리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소통의 형태를 정보전달에서 의사소통이라는 급진적 전환을 이루었다.?기존의 미디어(인쇄매체,?그리고 텔레비전과 같은 전기매체 등)에서 정보는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으나,?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는 대화자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특성을 지닌다.?이와 맞물려 진리론 또한 대상이나 현실에 대한 참된 명제가 진리라는 대응설(correspondence)의 입장에서 소통과 합의에 의한 대화적 모델로 변경되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매체 예술가이자 이론가인 바이벨(Peter Weibel)은 이러한 변화를 디지털 예술에 적용하여,?변형가능성을 전제한 디지털 이미지는 어떤 정태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를 거부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로 묘사한다.?흔히 디지털 예술에서 강조하는?‘상호작용’은 이러한 특성이 잘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디지털 예술에서 작품은 예술가가 완벽하게 미리 완성하여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보가 아니다.?디지털 예술작품은 관객이 작품에 참여하고 자신의 몸을 개입시키고 작품을 변형시킴으로써 실현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인 셈이다.?이는 마치 머드게임이 유저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2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2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이 글은 4월 22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두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참혹한 마음에 바치는 서(序)

오호라!?지금 이 순간에도 불행에 빠진 동료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지극히 황당한 인재로 인해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삼가 애도를 표합니다.?이 강연을 마음 상처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받칩니다.

이 참사와 연관된 사람들 중에서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된 선장과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칭찬과 비난,?명예와 불명예,?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사람됨,?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이런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이제이북스, 2006)입니다.?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이강서 옮김,?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김성우 사진2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좋은 삶’이 주제입니다.?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그에 따르면?“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우리는?(인간에게만)?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입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로고스’라고 한다.?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에 겨냥합니다.?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각 사람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입니다.?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아닙니다.?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거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들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즉,?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어야 하기에 법률이 필요합니다.?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그에 따르면?“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동물입니다.?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이런 점에서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그리고?<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이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플라톤의 대화편인?<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이라고 불렀습니다.?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에게?“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즉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완전하게’(성숙하게)?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지성적인 관조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도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무엇보다도 지성이?‘인간’인 한에서,?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지혜에 대한 사랑,?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잘 양육을 받고,?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5월?20일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 말하는?『논어』?:?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어느 염세주의자의 충고-쇼펜하우어의『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1

어느 염세주의자의 충고-쇼펜하우어의『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1

박지용 (경희대 객원교수)

 

이 글은 3월18일 7시에 열린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첫 강연 원고입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 2. 22 ~ 1860. 9. 21

 

염세주의 철학의 의미

 

B.?러셀은?<서양 철학사>에서 쇼펜하우어를?“특이한 사람”으로 보고,?그 이유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서 찾는다.?쇼펜하우어에서처럼 지독한 염세주의는 철학의 역사에서 어떤 유별난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다.?철학자는 대체로 삶의 의미를 낙관하는 근거를 설명하고자 한다.?무엇을 낙관하고 또 그 낙관의 기초가 무엇인가는 각기 다를지언정 삶과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 보통 철학자들의 생각이라면,?삶이 철저하게 의미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 점에서 특이하다는 것이다.

삶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의미 있기도 하고 무의미하기도 한 시간들이 지속적으로 교차하고 반복한다면 낙관도 비관도 아닌 중간적인 것일 수 있다.?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삶을 전체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보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긍정적인 태도다.?비관적인 삶의 태도는 삶과 세계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고 그 고통으로부터 인간이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한다.?그러므로 이 세 가지 각기 다른 삶의 태도들은 긍정,?부정,?그 중간 정도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좀 더 옹호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삶을 의미있게 보려는 낙관적인 노력이 일종의 철학적인 기만이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그러므로 쇼펜하우어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바는 삶은 원래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삶의 진리라는 것이다.?비참한 삶을 직시하고 그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철학이라는 말이다.?삶의 비참함을 애써 포장하여 마치 의미있는 것인냥 호도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된 철학이게 된다.?그러므로 쇼펜하우어의 태도는 비참하지 않은 삶을 비참하게 생각하는 삐딱한 태도가 아니라,?오히려 두려움 없이 삶의 허무를 인정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용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해 갖게 되는 거짓 희망,?삶이 전체로서 의미있다는 태도에 맞서 그 무의미성을 부르짖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우리는 삶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취할 수 있다.?동시에 우리가 갖는 낙관이 과도한 것이 아닌지,?혹은 삶의 무의미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우리는 삶의 무상성을 자각하게 된다.?무엇하러 우리는 아등바등 애쓰며 살았는가 생각하게 되며 삶은 본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한 바로 그 지점에 접근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일관념론의 철학과 예리한 대립각을 세웠다.?쇼펜하우어는 대표적으로 헤겔의 철학이 대중을 기만하는 철학이고 헤겔은 그 점에서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보았다.?그럼에도 현실에 있어서는 쇼펜하우어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쇼펜하우어는 대중들이 자신의 철학의 의미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 소망을 대중들이 저버린 것이다.?당대의 학계와 청중들은 쇼펜하우어보다는 헤겔의 철학에 더 많은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진실한 삶의 실체를 가리고 기만하는 거짓된 희망일지언정 삶을 낙관함에서 불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애쓴 대중들은 그러한 낙관을 보여준 헤겔에 열광했다.?마치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거짓 성공 신화를 자아내는 헐리웃 영화에 보이는 대중들의 반응과 비슷한 것이다.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만,?그러니 우리에게 희망이 필요한 것이야.?허무한 삶을 허무하다고 말하면 삶이 더 허무해지지 않겠어?”?이러한 대중들의 반응은 낙관이 정점에 이를 때,?다시 허무를 수용할 수 있는 탄력을 갖게 되고,?허무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지나친 낙관이 일종의 중간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요약하자면 삶의 대한 허무주의,?염세주의는 건강한 삶을 유지시키는 한 방식이지만,?낙관적인 태도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시대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2.?염세주의 철학의 근본토대들.?낙관주의에 입각한 환상 파괴

 

03-18@19-27-36-516-2영원한 진리가 어쩌면 찰나적인 인간의 삶에 의미의 빛을 선사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은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형이상학적인 초월의 욕망이며,?이 점에서 철학의 목표점은 종교와 같은 것이다.?이러한 진리와 진리를 향한 철학적인 태도를 통해서 삶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철학자들은 낙관적이다.?그러나 쇼펜하우어에 있어서,?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알면 알수록 더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어 보인다.?가령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철학(고대회의주의자,?흄,?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경우에도,?진리에 대한 회의는 진리에 대한 가상이 오히려 삶을 왜곡시키므로 삶을 위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일종의 삶에 대한 낙관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지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의 근본적인 원인 자체가 고통을 유발시키므로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고통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말한다.?쇼펜하우어가 생각한 세계는 왜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단순한 답변으로 삶이 원래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답을 생각해보자.?그 답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어떤 관점이기도 하다.?세상은 고통이다.?불교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응되는 철학적인 근본전제들과는 전혀 다른 전제에서 삶을 접근한다.?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세계와는 다르며 오히려 불교적인 세계와 유사하다.?구원을 약속하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반대:?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은 그저 기독교적인 세계관일 따름이다.?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하다면,?그것은 의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밖에는 없다.

의지란 무엇인가??쇼펜하우어 철학의 특이성은 의지 개념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에서 표상보다는 의지 개념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더 독창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쇼펜하우어는 현상과 물자체라는 칸트의 구분을 따름으로써 칸트 철학의 충실한 후계자임을 자처한다.?그러나 인식불가능한 것으로 남겨진 칸트의 물자체는 쇼펜하우어에 있어서는 의지 개념으로 변형된다.?세계는 한측면 현상으로서,?또다른 한측면 의지로서 이분화된다.?그러나 이분화된 두 세계의 경계,?마야의 장막으로 경계지워진 두 세계의 구분을 인간은 자신의 존재이해를 통해서 이해하고 또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인간에게서는 두 가지 방식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한다.?말하자면 인간은 외적으로 신체적 존재로서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내적으로는 자기자신 자체는 곧 의지라는 점을 단적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즉 의지는 물자체이다.?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통해 의지는 존재의 근본 원리가 된다.?인간,?생명체,?무기적 자연에 이르기까지 전체 존재는 맹목적인 의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이러한 개별적인 존재들의 연결망을 존재계 전체의 지속적인 상승화 충동을 낳고 목표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운동이며,?그것이 세계자체의 의지인 것이다.?그러나 그 끝은 개별적인 존재에게는 존재의 소멸,?죽음밖에는 없다.?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폭력이며,각 개별 존재에게 애쓰기의 최종적인 종결을 선언한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는 단지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의지의 봉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오직 자아에 의해 부과된 개인성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포기하는 행위를 통해서 개인은 해방에 도달할 수 있다.?해방은 적극적인 의지의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동정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친절한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성인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한 것,?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에 가깝게 가 있는 것이다.

 

3.?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

 

행복에 대한 많은 단상들은 쇼펜하우어의?〈소품과 단편집?Parerga und Paralipomena〉(1851)에서 주요한 주제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이 저작은 그의 주저?<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와 비교하자면,?비체계적인 단편들의 묶음이라는 특징을 갖는다.?일종의 에세이적 저작인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우리는 때로는 행복을 느끼고 때로는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갈증이 날 때 물을 마실 때 우리는 신체적인 만족감을 느낀다.?그러나 개체의 의지는 어떻게 해도 충족될 수 없어서 끝이 없다.?그저 하루하루를 생존할 뿐 인생은 참다운 행복에 한발짝씩 다가가지 못한다.?왜 그런 것인가??삶은 그저 살려는 맹목적인 의지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도데체 존재하지 않는다.?이루지 못한 욕구는 고통을 주고,?욕구의 성취는 싫증을 낳을 따름이다.?본능은 인간을 생식에로 몰아 세운다”삶에의 의지의 가장 완전한 현상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다.?삶은 허망한 것이다.?결국은 죽음을 향한 과정으로 삶이 드러나는 것이다.?인생을 환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다.?지상의 시간은 모든 행복과 삶의 허망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수단이다.?의지가 억제당하고 방해받을 때 고통이 생긴다.?인식의 정도에 따라 고통이 커진다.?세상에 부러워할 만한 사람은 없는 반면,매우 슬퍼해야 할 만한 사람은 무수히 많다.?세상을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그러한 고통이 산재해 있음을 느낀다.

삶은 마치 힘든 과제를 떠맡는 것과 같아서?“나는 인생을 견뎌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삶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합리적인 사고를 할 경우,?아이를 낳아 고통을 되물림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삶의 의미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설득하고 그러한 종교적인 교리를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철학자들은 모두 사기꾼들이다.

기독교 신은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모든 것이 매우 보기 좋다”고 자화자찬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교의 중에 가장 열등한 것이다.?인간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죄 많은 것,?불합리한 것,?원죄로 이해된 것,그 때문에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다.?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맹목적인 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라고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지만 의지 자체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허뿐이다.

악몽과 같은 삶에서 깨우나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이다.?자살은 다른 사람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비하면,?특별히 도덕적인 오류가 없다.?그러나 세계의 고통이 증대되므로 그리 옳은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생명을 소멸시킨다고 해서 의지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는다.?자살은 살려는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명을 버리는 것이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없다.?오히려 가능한 하나의 해결 방식으로서 쇼펜하우어는 미학적 이념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도덕의 형이상학적 이념보다는 미학적 이념이 마야의 베일 너머 세계의 실재를 인지하게 한다는 것이다.?고통 자체에 대한 순수한 인식은 예술가적인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현상을 벗어난 나를 현상을 넘어선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 그것은 예술이다.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삶으로부터의 구원.?현상적 삶으로부터 구원이다.?기독교적 정신은 금욕적인 정신이다.?금욕적 정신이 삶에의 의지의 부정인 것이다.?의지의 부정이야 말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신약의 성경 정신의 핵심은 바로 의지의 부정 금욕적 삶의 이상을 주장하고 있다.?의지의 긍정은 자의식을 자신의 개체에 한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우연에 의한 행운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결국 타자의 불행에 공감하는 것이 의지를 부정하는 것의 방법이다.?자기 의식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자기 부정을 이겨내려는 강박증이다.

칸트에서 의지란,?인간의 실천이성과 신이 조화된 세계,?목적으로서의 세계를 말한다.?그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근대 서구전통에서 최초의 반기독교적인 철학의 원류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의지라는 점에서 여전히 관념론적이다.?비합리주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한 관념론이다.?세계는 실재로 의지인 것이다.?서로 살려고 하는 아전투구의 현장이 바로 세계의 실재인 것이다.?허무한 세계를 마주 대할 수 있는 지적인 통찰과 용기를 갖는 것,?무의미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저력을 갖추는 것이 낮은 시선으로 세계를 통찰하는 철학적인 삶의 의미인 것이다.?즉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낙관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철학적인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구원은 없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예술은 사물의 현상적인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존재 자체의 본성(이념)을 드러냄으로써 현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현실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위안이다.?고통을 제거하는 윤리적인 대안으로써 고통에 대한 감수성,?연민과 동정을 들 수 있다.?금욕적 삶의 태도 또한 의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 할 수 있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4월 22일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행복론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소장)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