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김성수 박사 지음,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서평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김성수 박사 지음,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서평 – 이병창

 

이병창(한철연 회원)

 

1)

2023년 1월 28일(토) 오후 2시, 천도교 본당에서 김성수 박사님의 저서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박사님은 출판에 즈음하여 소회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노래를 하나 하겠다고 하면서 가고파를 부르셨다. 박사님은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셨겠는가, 나 역시 박사님의 노래를 들으며 속으로 함께 울었다. 지금도 박사님이 부르던 ‘가고파’ 노래가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다.

박사님은 1936년 태어나셨으니, 지금 86세, 거의 아흔에 가깝다. 연대 철학과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유학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으니, 보통은 한국에 돌아와 어느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시다가 이제 은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과 박정희 독재 체제는 박사님의 인생을 한꺼번에 바꾸어 버렸다. 1973년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와 관련된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3년부터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역만리 독일에서 망명 아닌 망명자의 신세가 되어 외로이 떠돌게 되었다.

박사님은 그 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창립하면서 90년대 김대중 정권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가 일어나기까지 유럽 전역에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한 생을 바치셨다. 80년대 초 일부 회원들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박사님에게 그런 길은 열리지 않았다. 박사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동경대전』을 독일어로 번역하셔서 유럽에 한국의 사상을 전하는 데 진력하였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2003년 9월 마침내 국내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으나, 정권이 바뀌면 다시 귀국이 금지되었다가 문재인 정부 시절 다시 귀국이 허용되었다. 그 사이 이미 유럽에 삶의 지반이 펼쳐져 있는지라, 박사님은 가끔 귀국할 수 있었을 뿐이니, 그러다 이번에 저서를 국내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얼마나 크셨겠는가.

박사님을 아는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출판기념회는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내에서 박사님과 같이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후배들이 박사님의 출판을 마음으로 후원하였으니, 박사님도 무척 고맙게 여기시는 듯했다. 이제 박사님의 책을 미리 읽어본 후학으로서 박사님의 저서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 김성수 박사 / 출처: 도서출판 바람꽃 https://blog.naver.com/windflower_books/222992521925

2)

이번에 발간한 철학서 <서양철학의 역설>이라는 책은 제목에서 밝혀진 대로 서양철학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질적으로 사로잡혔던 역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역설이란 무슨 문제인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역설이라고 한다면, 영어로는 ‘paradox’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주장이 서로 평행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A를 주장하게 되면 그것과 대립하는 주장인 B가 A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그것은 거꾸로 B라는 주장 역시 필연적으로 A라는 주장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사님은 이를 상호전환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뜻은 대립하는 두 주장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paradox’는 한자어로 역설[逆說] 즉 대립하는 주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박사님은 이런 역설의 형태로 딜레마, 이율배반[Antinomie], 자가당착, 무한 진행, 순환론과 같은 다양한 형태를 거론하고 있다.

이 역설의 문제는 근대 철학에서 고전주의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 변증론에서 다루었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이전해 버리고 말았던 문제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역설의 문제를 철학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 때문이라고 보고 역설을 해결할 명확한 철학적 언어를 끝내 찾지 못하였다.

칸트와 러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남겨놓은 역설의 문제를 박사님이 자신의 책에서 포괄적이고도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학문의 길에서 어디서나 그렇듯이 문제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은 문제를 극복하는 가장 지름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자리에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역설의 종류나 형태를 일일이 열거하고 소개하는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서양철학에 대한 약간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던 것일 것이다.

 

3)

박사님의 책 가운데서도 이채로운 것은 문학에서 역설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사님은 다양한 서양 문학 작품 속에 이런 인간론적 역설이 어떻게 등장하는가를 보여준다. 박사님은 이것을 통해 철학적 역설이 단순히 철학자만의 고답적인 고민에 그치지 않고 사실은 인간 자신의 삶 속에서 그때마다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박사님은 여기서 괴테의 <파우스트>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소개한다. 철학적 역설의 문제는 철학자의 소관이니 일단 그들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문학 작품에서 나타나는 역설의 문제는 철학적 고민이 삶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이 자리에서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파우스트>에 관해서 약간 상세하게 소개하였으면 한다.

박사님에 의하면 파우스트는 이성과 회의(성찰)을 상징하는 파우스트와 악과 행동을 상징하는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의 대립을 그 기본 구도로 한다. 행동 없는 성찰에 지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감각적 자연 충동을 부여받게 된다. 파우스트는 이성과 감각적 자연 사이의 통일을 확신하면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 1부에서 파우스트는 감각적 충동에 의한 행동으로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충동으로 살아가는 그레첸을 사랑하게 되고 이를 통해 쾌락을 얻다. 하지만 감각적 자연 충동은 자연 자체의 자기모순으로 파괴되고 만다. 파우스트는 사랑을 방해하는 그레첸의 오빠를 살해하고 순진한 그레첸은 자기의 죄 없는 아이를 살해하면서 파국에 이른다. 순진한 자연 충동에 의한 삶은 자기모순을 통해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파괴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감성과 이성의 통일은 여기서 불가능하게 된다.

» 2부에서 파우스트는 고전적 미(美)의 이상인 그리스로 시간 여행을 한다. 그는 고전 그리스에 이르러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다. 헬레나는 고전적 미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마침내 이성과 감성적 미의 통일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의 미는 이성적 질서인 자유의 이념을 직접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며, 여기서 개인의 자각적인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폴리스만이 자유롭고 개인은 어디까지나 폴리스를 대신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모순이 해결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아들인 오이포리온이 하늘을 날려다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통해 상징된다.

» 3부에서 파우스트는 근대 세계로 돌아와 제후가 되어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려 한다. 파우스트는 황폐한 자연의 개간을 통해 이성적 질서인 자유와 물질적인 행복이 함께 하는 사회에 이르려 한다. 자연의 개간이 끝나자, 마침내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지금 멈추어라’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 마지막 부분은 파우스트가 바라던 이성과 행복의 통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런 자연의 개간 과정에서 파우스트가 자연 속에 살아가는 노부부를 살해하는 데 주목한다. 노부부는 아마도 자연 자체 곧 신적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님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곧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니 여기서도 이성과 감성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4)

이상에서 박사님은 서양철학사에 등장한 다양한 역설을 소개한 다음, 서양철학이 이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발버둥을 쳐 왔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발버둥은 그만큼 역설의 문제가 서양철학을 괴롭혀 왔기 때문인데 박사님은 전반적으로 이런 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박사님은 이런 시도를 세 분야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 번째 사변론 분야에서는 사변적인 사유를 통해 역설을 극복하려는 시도인데, 여기에는 초월주의와 에소테릭(비의), 알레테이아(계시)가 속해 있는데, 그 가운데 에소테릭과 알레테이아는 종교적인 차원이니 생략하고 철학적으로는 초월주의가 주목할 만하다. 초월주의란 곧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역설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박사님이 자신의 저서에서 주목한 것은 화이트헤드, 하르트만, 하이데거와 같은 20세기 형이상학자이다. 유기체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부분과 전체의 대립을 해소하여 부분이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박사님에 의하면 화이트헤드의 유기적 철학은 다시 비유기적인 철학에 대립하면서 역설을 극복하기보다 역설을 다시 새로운 영역으로 이전했을 뿐이라 한다.

하르트만은 다양한 존재자를 인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수, 문화 등과 같은 제3의 존재자를 인정하면서 관념적 존재자를 물질적 존재의 반영으로 보는 유물론과 관념적 존재자를 초월적 존재로 보는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려 했으나, 박사님은 이런 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라 한다. 왜냐하면, 제3의 존재 내에 다시 관념적인 수와 같은 것과 물질적인 문화와 같은 것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는 명제의 진리 이전에 존재의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명제가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면서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서양철학은 오랫동안 존재 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하이데거는 이제 존재를 이르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이르는 길은 이미 존재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존재[Da-Sein] 즉 실존[Ex-Sistenz]을 거쳐 나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박사님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시 역설을 근본적으로 극복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이데거 역시 언어의 이분법적 성격을 철학의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님은 첫 번째 초월주의 분야에 이어서 협동론 분야에서 등장한 시도를 소개한다. 박사님은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통섭론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론이며, 세 번째는 삼분법론이다. 여기서 통섭론이나 통합론은 다양한 과학의 결합을 통해 전체 자연을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자연과학에서 등장한 주장이니 생략하고 세 번째 삼분법론은 철학에서 등장한 이론이니 주목할 만하다.

이는 관념과 물질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시도인데 스피노자는 물질 실체와 관념 실체를 넘어 무한 존재라는 세 번째 실체를 도입하였고 포퍼는 앞에서 소개한 하르트만처럼 문화의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가정했고, 프레게는 의미의 세계를 상정하면서 기호나 지시체와 달리 의미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세 번째 분야는 반이성주의이다. 여기서는 비합리주의와 반합리주의적 경향이 거론되고 있다. 쇼펜하우어, 니체 등 직관주의적 철학이 그 예이며 비판이론 역시 아도르노에서 보듯이 직관주의를 광범위하게 도입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해체론과 같이 아예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인정하려는 시도를 들어볼 수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분야에서 전개된 역설 극복의 방식과 그 한계에 대해 박사님은 상세하게 분석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이상 다양한 주장은 서양철학이 역설을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를 보여주는 주장이지만 전체적으로 박사님은 이런 모든 시도 역시 근본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5)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서양철학을 괴롭혀온 역설의 문제를 박사님 자신은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제1부 3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박사님은 서양철학에서 역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단지 인간의 사유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박사님은 이런 역설을 유럽의 삶과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서양철학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역설의 문제에 사로잡혔지만, 특히 근대에 들어오면서 역설은 광범위하게 모든 분야에서 펼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박사님에 의하면 근대의 서양은 한편으로 산업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계를 식민지화하게 되었다. 상세한 과정이야 다 알고 계실 것이니 여기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런 과정에서 서양은 자연과 비서구를 지배하는 가운데 유럽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가 등장하면서 자연과 감성을 인위와 이성을 통해 지배하려 했고 그 결과 자연과 감성이 인위와 이성에 대립하는 이분법적 사유, 역설적 사유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박사님은 역설은 이런 유럽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극복될 수는 없다고 한다.

박사님은 이런 점에서 거꾸로 서구의 지배를 극복하려는 동양의 사회 속에서 이런 이원론적 역설을 극복할 싹, 단초가 놓여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박사님은 먼저 우파니샤드의 ‘여여[如如]’ 사상에 주목한다.

이런 여여 사상은 범아[凡我 ]일치 사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든 분별을 부정하는 이론이다. 박사님은 스와미시바난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아는 것과 알려진 것은 하나다. 신과 나는 앎 속에 하나다. 시바와 브라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고양이와 쥐의 영혼은 하나이다. 해와 달의 본질은 하나다. 오래된 형식 속에 하나의 동질적인 본질만 있을 뿐이다. 이 본질은 절대적이며 사멸되지 않는다. 이 본질이 아트만, 브라만, 무한한 것이다.”

박사님에 의하면 이런 여여 사상은 유럽의 이원론적 사유와 대조되는 것이며 후일 불교의 근본사상이 되었다고 한다. 흔히 불교에서 돌에도 부처가 있다고 하는데, 여여 사상이란 무차별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님은 또한 도가의 무위 사상에도 관심 가진다. 도가에 따르면 도의 인식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수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도의 이식은 이분법적 사유를 좌망[坐忘]을 통해 극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도의 내용은 비이분적인 무위의 성격을 가졌다.”(137쪽)

좌망이란 곧 <장자, 대종사> 편에 나오는 심재좌망[心齋坐忘]을 말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신체나 손발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눈이나 귀의 움직임을 멈추고, 형체가 있는 육체를 떠나 마음의 지각을 버리며 모든 차별을 넘어서 대도에 동화하는 것“을 뜻한다.

 

6)

역설과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려는 박사님의 고투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박사님은 결국 동양사상에서 역설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길을 발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아쉬움을 느낀다. 헤겔과 같은 변증법적 사유도 역설과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하는 한 길이 되지 않을까 보는데, 박사님은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박사님은 우리 후학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긴박하고 절실한 요구라는 사실을 박사님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박사님의 문제 제기에 따라 철학하는 후학들도 이런 역설과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적 지배를 끝장내는 길에 나서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㊶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알림>

2018년 8월 사단법인 정암학당의 상설 강좌로 개설했다가 코로나 때문에 2020년 3월 40강을 끝으로 중단되었던 ‘이정호 교수와 함께 하는 플라톤의 <국가> 강해’를 2023년 2월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다만, 코로나의 위협이 여전히 상존해 있어 직접 강의는 피하고 이곳 웹진에 강의록을 매달 2회 게재하는 방식으로만 강좌가 진행됩니다. 본 강좌는 지금까지 40강을 진행하는 동안 플라톤의 <국가> 전체 10권 중 3권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국가> 텍스트를 한 줄 한 줄 자세하게 읽어가며 아주 장기간 진행되는 일종의 <국가> 정독을 위한 주해서 성격의 강좌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강좌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독서 과정 중 안내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만 중간 중간 따로 참고해도 좋을 것입니다.

 

  1. 본론 1 : 정의의 수립- 이상국가의 건설(제2권 – 제4권, 357a-445e)
  2.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국가의 기원(357a-374a)
  3.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4.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403d-404e]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 이어 신체단련 교육 즉 체육γυμναστικῇ에 관해 논의를 시작하면서 체육이 목적으로 하는 몸σῶμα의 좋은 상태가 기본적으로 영혼의 탁월함ἀρετῇ에 기초해있음을 밝힌다. 즉 몸이 자신의 탁월함을 통해 영혼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좋은βέλτιστον 영혼이 자신의 탁월함을 통해 몸을 가능한 한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생각(마음,διάνοια,dianoia)을 충분히 보살피고 몸과 관련된 일들을 세세하게 살피는 일은 그것(dianoia)에 맡기고 여기서는 체육의 개요만 간략히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403d) 우선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를 위한 체육 교육에서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사항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즉 술에 취하는 일은 삼가야 하고(403e) 음식과 관련해서도 한결 정교한κομψός 훈련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오직 체력만을 위해 잠만 자고 짜인 식단대로만 먹고 지내는 운동선수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다. 되레 그들은 식단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심각한 중병에 걸리기 쉽다. 수호자들은 전쟁이라는 가장 큰 시합의 선수들이므로 늘 개κύων들처럼 깨어 있어야 하고 최대한 예리하게 보고 들어야 하며(404a) 원정 중에 물과 음식들이 자주 바뀌고 기후가 급격히 변화하더라도 건강이 쉽게 나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최선의 체육은 시가와 자매ἀδελφή간이다. 즉 단순하면서도ἁπλός 맞춤한ἐπιεικής 특히 전쟁과 관련된 체육이어야 한다. 그런 것들은 호메로스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영웅들이 원정 중에 잔치를 하는 경우에 생선, 삶은 고기 말고 오로지 구운 고기만 나온다.(404b) 그릇을 가지고 다니기보다는 불만 사용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을 잘 간수할 사람 양념 들 그런 모든 것을 멀리해야 한다. 쉬라쿠사의 식탁과 시켈리아의 다채로운 요리, 코린토스의 아가씨들과 친하게 지내서도 안 되며 아티카의 과자들도 멀리해야 한다.(404d) 그런 식생활과 생활방식 전체는 온갖 화음과 장단이 있는 음악과 노래에 비교된다. 다채로움ποικιλία은 방종ἀκολασία과 질병을 낳은 반면, 시가의 단순함ἁπλότης은 영혼 안에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낳고, 신체단련 즉 체육의 단순함은 몸 안에 건강ὑγίεια을 낳는다.(404e)

———————————

* 시가 교육이 영혼 즉 정신 교육과 관련 되어 있다면 체육γυμναστικῇ은 신체 즉 몸의 단련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몸이 좋아지는 것은 영혼의 탁월함에 기초해 있다. 영혼의 분별력, 즉 제대로 된 생각dianoia을 갖고 있는 한, 몸을 좋게 만드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그 역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체육 교육의 목적은 신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력이 영혼에 대한 신체의 영향력을 능히 압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영혼의 교육과 관련한 시가 교육이 자세하게 다루어진 만큼 체육 교육은 개요만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 개요에서도 시가 교육의 요체인 단순함과 절제, 조화가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기초로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고 반대로 그에 상반하는 다채로움과 방종, 부조화는 몸을 병들게 만드는 근본 원인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시가 교육과 체육은 원리상 자매간이다.

* 오늘날 씨름 선수들이 그러하듯이 당시에도 레슬링 시합을 전문으로 하는 운동선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선수의 훈련 방식과 수호자의 훈련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이곳에서도 잠만 자는 운동선수와 늘 깨어 있는 수호자가 대비되고 있고 쉬라쿠사의 식단과 코린토스의 아가씨, 아테네의 과자 또한 원정 중의 영웅들에게 체화된 단순 식단과 절제력에 대비되고 있다.

* 다채로움의 원어 ποικιλία은 일차적으로 자수에서 온갖 색깔로 화려하게 수놓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여기서 그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가짓수의 요리를 가리키고 반대로 단순함ἁπλότης은 검박한 소식을 가리키지만 단순함에는 질적인 조화의 의미도 있다. 플라톤에게 조화를 갖춘 여럿은 단순함과 통한다.

 

[405a- 406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이 지켜지지 않아 나라에 방종과 질병이 만연할 경우 ‘법정 연설술’δικανική과 의술ἰατρικὴ이 떠받들어진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하층민들과 수공예가들뿐만 아니라 자유인마저 최고의 의사들과 재판관δικαστής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나라의 교육이 잘못되고 부끄럽게 되었다는 증거이다.(405a) 남들을 주인δεσπότης이자 판정관κριτής으로 삼아 남들에게서 가져온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추한αἰσχρός 것이자 무식함ἀπαιδευσία의 큰 증거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피고나 원고로서 일생의 대부분을 법정에서 허비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모르는 탓에 바로 그 일이 자랑스럽다고 믿는 것보다 부끄러운 것은 없다.(405b) 왜냐하면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불의를 저지르는 데 능란하고, 온갖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빠져나가고 몸을 구부려 온갖 탈출구를 통해 달아나는 데 능숙하고 그것도 사소하고 전혀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졸고 있는νυστάζοντος 재판관이 전혀 필요 없도록 자신의 삶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좋은 일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405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의술이 필요한 이유는 상처나 어떤 계절적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지 게으름ἀργία과 생활방식δίαιτα 때문에 생긴 이른바 똑똑한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Ἀσκληπιάδης들이 이름 붙인 복부팽만증이니 점막염증Ἀσκληπιὸς같은 것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405d) 그에 따르면, 실제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시대에는 그런 염증 정도의 병들은 병으로 여겨지지도 않아(405e) 하물며 트로이에서 부상당한 에우뤼퓔로스에게 염증을 일으키는 음식 같은 것을 먹여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체육교사였던 헤로디코스가 자신이 병약해지자 체육을 의술과 섞어 만사 제쳐놓고 오직 자기 병 수발에 전념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까지 진 빠지게 하면서(406a) 노년에까지 그저 목숨만을 부지한 이래 어처구니없이 그런 ‘질병 간호술’παιδαγωγικῇ τῶν νοσημάτων까지 오늘날 의술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406b) 아스클레피오스가 이런 종류의 의술을 후손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런 의술에 대해 모르거나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각자에게 해야 할 일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음에도 평생을 그저 병 치료에만 매달리는 한가로움σχολ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06c-408b]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우습게도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장인들의 경우에는 간파해 내면서도 부유하고 행복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406c) 예를 들어 어떤 목수가 자기가 병에 걸렸을 경우 그는 의술의 처방을 받아 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장기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섭생δίαιτα만 하며 병치레하라고 처방한다면, 그는 그렇게 질병에나 신경 쓰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홀히 하며 사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고 당장 말하고(406d) 그런 처방을 하는 의사와 작별하고 평소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다 건강해지면 자신의 것을 하면서 살 것이고, 육신을 지탱하기에 무리가 되면, 삶을 마침으로써 성가신 일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한다.(406e)

* 그러나 반면에 부자ὁ πλούσιος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즉 어쩔 수 없이 못하게 되면 살 수 없는 일 그런 일은 없지만 포퀼리데스Φωκυλίδες의 말 대로 부자는 덕ἀρετὴ을 익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407a) 그런데 한편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ῆ을 넘어서는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ἡ περιττὴ ἐπιμέλεια τοῦ σώματος은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407b)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그러한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은 배움μάθησις이나 숙고ἐννόησις 등과 관련한 훈련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증세마저 철학 때문이라고 탓을 하게 만들어 이런 종류의 덕(탁월함)을 닦는 일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늘 아프다는 생각을 하게하고, 몸과 관련해서 한시도 근심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어, 장인들이 기술에 전념하는 데도 걸림돌이 되지만 부자가 덕을 익히는 일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407c)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 역시 이 점을 알고서 건강한 몸과 건강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특정 부위에 국한된 어떤 질병을 가진 경우 이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세상에 알려 그들에게서 질병을 몰아내고는 나랏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그들과 달리 몸속이 속속들이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섭생법에 매달려 ‘길고도 나쁜 삶을’μακρὸν καὶ κακὸν βίον 살면서 자신들과 유사한 또 다른 자손들을 낳는 일도 없도록 조치했다는 것이다.(407d) 정해진 일과를 지키며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μὴ δεῖν θεραπεύειν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정치가πολιτικός로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수긍하면서(407e) 아스클레피오스의 자식들 또한 트로이에서 그들이 전쟁에 능했을 뿐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방식으로 의술을 사용하여 판다로스의 화살에 부상당한 메넬라오스를 구해주었음을 전해준다. 즉 그들은 생활방식이 단정한κοσμίος 그런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치료를 하고 설사 다소 회복에 방해가 되는 음료를 마시더라도 그의 건강이 그것을 이겨내리라 믿고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408a) 반면 체질이 병약하고 무절제한ἀκόλαστος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하물며 그들이 미다스 보다 부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치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408b)

———————————

* 요컨대 몸을 돌보는 체육은 영혼을 돌보는 시가 교육과 마찬가지로 공히 단순함과 절제를 토대로 한다. 플라톤은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단순함과 절제라는 기본적인 사항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경우의 폐해를 예시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때 플라톤은 그 단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니라 당대 아테네에서 크게 발달했던 법정 연설술과 의술이다. 한 마디로 법정 연설술과 의술의 발달은 바람직한 시가교육과 체육교육의 기본 원리, 즉 단순함과 절제가 갖추어지지 못했거나 결여되었기 때문에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당대 아테네 현실에 대한 플라톤의 적나라한 비판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즉 법정 연설술이 발달했다는 것은 건강한 영혼으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옳고 그름을 판별해내야 함에도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사사건건 분쟁을 일으켜 남들을 재판관으로 삼아 어떻게 하면 벌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것인가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의술의 발달 역시 당대 많은 아테네인들이 무절제하고 게으른 생활이 몸에 배어 스스로 절제하고 돌보는 능력이 떨어져 사소한 몸의 불편함까지 의술에 의존하다 보니 별의별 의술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술의 발달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예기치 않은 다양한 형태의 중병이나 부상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발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여기서 비난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의술의 발달이 아니다. 플라톤이 여기서 비판하는 의술이란, 절제를 갖춘 사람이라면 능히 자신의 건강체로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음에도 사소한 몸의 불편함까지 의술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발달하게 된 그러한 종류의 의술을 말한다. 실제로 아스클레오피스 시절에는 이런 류의 불편함은 질병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 의술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테네 말기에 들어 그러한 풍토가 만연하다 보니 사람들이 질병에 대한 극복 능력이 점점 떨어져 조그마한 병에도 지레 걱정이 앞서고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이 크게 늘어나 그저 자기 몸을 추스르는 데만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에 따라 온갖 종류의 섭생법들이 의술의 하나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헤로디코스가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몸에 집착해 자신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부지하려고 만사 제쳐놓고 오직 자기 병 수발에 매달리는 일종의 연명술 즉 ‘질병 간호술’까지 의술의 이름으로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술의 처방 역시 경비가 필요한 만큼 이러한 풍토는 부자일수록 더 큰 관심사가 되어 그만큼 덕을 쌓는데 소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고된 생산 노동에서 비켜서 있을 정도로 부를 갖추거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시간적 여유를 공동체를 위한 공력과 덕을 쌓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당대 크게 발달한 비정상적인 몸에 대한 관심은 부자들로 하여금 조그마한 몸의 불편함도 참지 못하게 만들어 철학을 공부하면서 생길 수 있는 머리 아픈 일조차 몸의 불편함으로 여기고 그 탓을 철학으로 돌려 덕을 쌓는 일을 더욱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플라톤은 개탄한다.

* 소위 단순 연명 기술로서 의술이 크게 발달하는 것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오늘날 국가 간 또는 계층 간 의료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의미 있는 반성적 과제를 던져 준다. 사실 생명권은 개인이 누려야 할 인권 관련 기본권이라는 인식 때문에 근대 개인주의 사상이 확립된 이후 상당한 기간 이른바 사회 복지 차원에서 의료 서비스의 분배 영역에서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영국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후 공공 의료 서비스 체계의 후퇴를 가져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생명권이라는 기본권의 영역에서조차 시장주의의 미명아래 의료 서비스의 불공정한 분배가 나날이 심화하는 추세이다. 게다가 오늘날 더욱 심화한 국가 간 또는 계층 간 빈부의 격차는 의료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하여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부유한 국가나 계층은 이른바 질병 간호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단순 연명의 욕구마저 채울 수 있지만 가난한 국가나 계층은 그러한 질병 간호술은 고사하고 일상적인 질병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간단한 치료를 통해 충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고 마는 일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발달과 융성은 인류사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플라톤이 체육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이처럼 법정 연설술과 의술을 끌어들이는 것은 다소 뜬금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곳 논의 역시 그러한 비교를 통해 몸을 돌보는 일과 영혼을 돌보는 일이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바람직한 체육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 그 논의의 본질을 음미해보면 결국은 체육이건 의술이건 몸을 돌보는 것 일체는 궁극적으로 영혼을 돌보는 일과 결코 떨어져 있을 수 없고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는 일관된 신념이 밑에 깔려 있다.

* 그러나 그 논의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의술의 성격과 목적 등에 관한 플라톤의 관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술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하고 있는 생명 자체의 존엄성과 불가침해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치료와 처방을 요구할 수 있는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스클레오피스를 통해 표명한 다음의 명제 즉 “몸속이 속속들이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섭생법에 매달려 ‘길고도 나쁜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되며, 정해진 일과를 지키며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 역시 어떤 병에 걸린 어떤 목수가 만약 의사로부터 이제 생업은 접고 앞으로 그저 생명만 보전하는 섭생법을 처방받는다면 그 목수는 그것은 거부하고 평소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다 건강해지면 자기의 일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가신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의술은 어떤 종류의 질병이건 그가 하던 일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하는 일을 목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단순히 목숨만 연명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요컨대 플라톤에게 연명 치료는 의술이 수행해야 할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받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당연히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 따른 시민적 삶 즉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일익을 담당할 때만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시민적 삶이 아닌 삶은 이미 삶이 아니다. 회복 불능의 병에 걸려 시민으로서 아무런 자기 역할을 못하고 그저 목숨만 부지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치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노후에 생업을 접고 최소한의 건강을 보전하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삶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도 그 유유자적한 생활이 단순히 몸만을 돌보는 삶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삶이어야 한다. 케팔로스 노인처럼 그저 부에 의존해 자신의 개인적 복락만 추구하는 삶은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요컨대 생명의 존엄성이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보존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스스로 시민적 삶을 담보할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지 그럴 능력이나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까지 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라 의술 또한 오직 회복을 위한 의술이어야 하고 의술의 발달 역시 그러한 의술의 발달이어야 한다.

* 그러나 위와 같은 플라톤의 관점은 생명권이 채 확립되지 않았던 당대의 의식 수준(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인과 장애인을 유기하는 관습이 오랫동안 용인되었다. 테아이테토스 160e 참고)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생명과 관련한 개인들의 자기결정권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아무리 마땅히 지켜야 할 바람직한 당위가 있더라도 그 당위를 위해 누구도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특히 근대 이후 개인의 생명이, 개인이 누려야 할 불가침의 자연법적인 권리로 확립된 오늘날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설령 죽을죄를 지었어도 죽음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이 아무리 격변하는 전란의 시대에 공동체의 보존과 관련하여 기능들의 내적 유기성과 능력에 입각한 분업주의의 관점에 크게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일지라도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자의적이며 강압적이다.

* 플라톤 그 자신의 주장과도 부딪친다. 그의 생각대로 사회 또는 개인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상호 유기체와도 같은 의존 관계를 형성한다면, 유기체인 생명체가 항상 건강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듯이 사회나 개인 모두 언제든 질병 상태를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유기체는 또 그것까지 감안하여 그것을 치유 극복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건강 상태가 아닌 질병과 같은 문제 상태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기능도 유기체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화나 장애의 문제는 유기체로서 개인에게 현존하는 결핍이고 그에 따라 그 실재하는 결핍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것 또한 유기체로서 개인이 갖는 당연한 욕구이듯이, 사회 또한 상호 의존적 유기체로서 그러한 사회적 결핍들을 현존하는 결핍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한 책무이다. 그런 점에서 노인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이 인간적·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위를 내세워 생명의 자기 결정권까지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플라톤의 방식은 그 자신의 유기체적 기능론의 입장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 다만 사회적 약자들이 당면하는 위와 같은 문제 상황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연명 이외에 어떤 것도 욕구하지 않거나 욕구조차 할 수 없는 개인들에 대한 단순 연명을 위한 치료, 특히 그러한 치료를 욕구하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크게 발달한 연명 치료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논쟁적 시사를 던진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식물인간, 안락사의 문제는 물론 노령화 사회를 맞이하여 심각한 수준의 노인 의료비의 증가와 부양의 한계 나아가 연명치료와 존엄사의 문제 등 의료윤리와 관련한 사회문제에 직면해있다. 전통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그 문제 해결의 기본 방향은 제법 분명해 보이기는 하나 오늘날 대체적인 추세는 오히려 안락사와 존엄사를 인정하는 쪽으로 논의의 중심축이 옮겨 가고 있다. 그만큼 시대적 현실 여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의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와 관련하여 근대 이후의 관점과 플라톤의 주장과는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개인들의 의사를 넘어서 단순 연명이 갖는 사회적 삶의 무의미성을 근거로 연명치료 제한의 공적인 제도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생명가치의 존엄성과 개인주의가 확립된 오늘날에는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 자체를 금지하고 있거나 설사 인정하더라도 그것의 결정은 철저히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겨져 있다.

*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일정 조건 아래에서 연명치료에 대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거부 행위가 나날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추세이고 나아가 그러한 개인의 선택을 바람직한 행위로까지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이 오히려 인권 친화적이라는 주장까지도 함께 제시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람다운 삶을 규정하는 기준에 경제적 조건이 가히 절대적인 수준에까지 이른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삶의 현실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개인과 가족 관계 등과 관련한 사적인 차원이나 의료 제도와 관련한 문제에서조차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 배분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고려의 요소가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개인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근원적 비참성이 개인의 생명권이 구조적으로 도외시되거나 생명가치의 절대성이 무력화되는 가히 전쟁터나 다름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2020년 코로나-19사태가 보여주듯이 이미 현대사회는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 분배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심각한 팬데믹 사회로 진입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 그렇다면 플라톤의 생명과 의료윤리에 대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그와 관련한 논쟁점을 구성하는 하나의 유의미한 논거가 될 수 있다. 플라톤의 관점은 온건하게는 양극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생명권의 보장과 의료 서비스의 배분과 관련하여 균형 있는 공적 해결책의 합리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극단적으로는 개인의 생명권의 문제에 대한 결정과 관련하여 개인들의 사회경제적 부담과 공적 안녕의 명분하에 국가 권력의 자의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될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인권 차원에서 존엄사가 거론되는 비교적 사회복지가 잘 구비된 나라들과 질병과 가난으로 사회 복지 제도가 크게 미비한 나라들이 전혀 다른 이유로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에 대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찬성 비율이 높은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에 대한 찬성 비율이 근래 들어 80%를 넘어섰는데 그 찬성 근거들의 하나로 존엄사 및 인권에 대한 증대된 관심도 자리하고 있지만, 치료 및 부양과 관련한 가족들의 고통과 부담 또한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인권과 생존 문제가 갖는 심각한 양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아무려나 플라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최소한 연명치료의 제한은 물론 그에 따른 안락사와 존엄사의 공적 제도화와 관련해서 쌍수를 들고 찬성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체육교육과 시가교육이 건강하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한 형성의 방책이라면 앞서 거론된 의술과 재판술은 몸과 혼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제거하여 늘 몸과 혼의 건강을 유지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배제 방책이다. 가장 이상적으로는 형성의 방책이 완전할 정도로 성공하여 몸과 혼의 질병이 발생하지 않아 의술과 재판술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 몸과 혼의 질병은 늘 상존하고 그에 따라 의술과 재판술은 한 사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기술들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앞서 보았듯이 몸과 혼의 질병이라고 해서 그 일체가 의술과 재판술의 대상은 아니다. 플라톤은 질병 가운데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준으로 회복 가능한 질병만을 의술과 재판술의 대상으로 제한한다. 부유층들이 생명만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의 의술을 동원하고 그러한 필요에 따라 그것을 위한 온갖 종류의 치료 기술이 개발되는 것은 의술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의술의 왜곡 또는 퇴보이다. 재판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재판술을 통해 정의가 관철되어야 함에도 법망을 피해 가는 영리한 법기술이 되레 크게 발달하고 그 수혜 또한 부에 비례하는 것은 재판술의 발전이 아니라 악용이자 타락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덕과 영혼이 아닌 감각적 욕망과 이기심에 매몰되어 있는 당대 아테네 현실을 고발한 것이지만, 이미 교육 분야에서조차 빈부의 양극화가 고착화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일례로 유독 의사와 법률가가 소수의 최상위권 우등생들이 가장 선호하고 또 그들만이 진입 가능한 최고 최상의 직업군으로 꼽히고 있다는 점은 의술과 재판술의 수요 증대와 발전이라는 표피적 현상 이면에 의료 및 사법 서비스 영역에서의 특권화는 물론 우리 사회의 혼과 몸의 질병 수준 또한 그만큼 악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좌라 할 것이다. (체육교육 2, 다음 강에 계속)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3회 정기학술대회 영상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세션2 한국근현대사상의 심화와 확장: ‘동학운동’에서 ‘신생철학’까지

세션2
1부 13:00~15:00
◎ 1부 사회: 이병태(경희대)
● 발표 1: 13:00~13:40
– 발표: 김정철(한국국학진흥원) ‘대종교의 역사적 주체에 관한 연구 – 한얼과 아(我) 개념을 중심으로’
– 토론: 박병훈(서울대)
● 발표 2: 13:40~14:20
– 발표: 박영미(한양대) ‘최시형 동학에서 ‘民’ – 깨뜨림 같음 다름의 근대 읽기’
– 토론: 유현상(상지대)
● 발표 3: 14:20~15:00
– 발표: 윤태양(성균관대) ‘근대 전환기 신지식인들의 복고적 탐색의 한 경로에 대한 연구’
– 토론: 김우형(연세대)
2부, 3부(종합토론) 15:15~17:40
◎ 2부 사회: 이병태(동아대)
● 발표 4: 15:15~15:55
– 발표: 송인재(한림대) ‘『사상계』 정치담론의 지형’
– 토론: 진보성(방송대)
● 발표 5: 15:55~16:35
– 발표: 조배준(경희대) ‘윤노빈의 『신생철학』과 한울의 관계론 : 고통으로서의 분단과 행위로서의 삶’
– 토론: 배기호(중원대)
◎ 3부 사회: 이병창(동아대)
● 종합토론: 16:50~17:40
————————————————-
○ 주제: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 시간: 2022년 12월 3일(토) 12:30~18:00
○ 장소:
– 세션1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7
– 세션2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8
○ 주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 후원: 한국연구재단

1부 동영상 링크 주소: https://youtu.be/WQroWb-1eiI

2부, 3부 동영상 링크 주소: https://youtu.be/AupgjEAb0NQ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3회 정기 학술대회 영상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세션1 한국근현대사상의 방법론 탐색: ‘전통’과 ‘근대’ 그리고 서양사상의 주체적 수용

세션 1
1부 13:00~15:00
◎ 1부 사회: 연효숙(연세대)
● 1 발표: 13:00~13:40
– 발표: 김문용(고려대) ‘신채호 상고사학의 사상성격에 대한 비판적 검토’
– 토론: 송호전(한국교원대)
● 2 발표: 13:40~14:20
– 발표: 이종란(조선대) ‘최남선의 근대 지향에 따른 전통사상 재구성의 방법론 고찰’
– 토론: 류시현(광주교육대)
● 3 발표: 14:20~15:00
– 발표: 김제란(고려대) ‘한용운 서양사상 수용 방법론에 대한 재검토’
– 토론: 유흔우(동국대)
2부, 3부(종합토론) 15:15~17:40
◎ 2부 사회: 김재현(경남대)
● 4 발표: 15:15~15:55
– 발표: 김교빈(성균관대) ‘정인보의 감통의 철학과 그 근대적 의미’
– 토론: 한정길(한림대)
● 5 발표: 15:55~16:35
– 발표: 이종철(연세대) ‘류영모의 인간관과 근대의 문제’
– 토론: 전호근(경희대)
◎ 3부 사회: 김재현(경남대)
● 종합토론: 16:50~17:40
————————————————-
○ 주제: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 시간: 2022년 12월 3일(토) 12:30~18:00
○ 장소:
– 세션1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7
– 세션2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8
○ 주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 후원: 한국연구재단

1부 동영상 주소: https://youtu.be/gIZUaXR9Zi8

2부, 3부 동영상 주소: https://youtu.be/ohC67ZHeSFw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가을 제63회 정기 학술대회(12월 3일)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스케치영상 및 개회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가을 제63회 정기 학술대회 개회식(12:50~13:00)
– 개회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박정하)
– 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김교빈)

○ 주제: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 시간: 2022년 12월 3일(토) 12:30~18:00
○ 장소:
– 세션1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7
– 세션2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8
○ 주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 후원: 한국연구재단

동영상 링크 주소: https://youtu.be/Dt4fMfk444Y

동영상 링크 주소: https://youtu.be/A3IBbQumeT8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2년 12월 제3차 정기세미나 영상 “이규성의 程朱學 이해와 쇼펜하우어의 生철학 (1)” 2022.12.16.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 연구회] 세 번째 정기 세미나입니다.

(이번 세미나는 사정상 동영상이 아닌, 음성파일로 올립니다.)

이번 세미나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2016)의 ‘Ⅶ. 아시아 철학과 선험적 구성론’에서 ‘1. 주희朱熹와 쇼펜하우어’의 내용을 중심으로 저자 이규성의 程子와 주희에 대한 연구논문의 일부를 참조하여 정리한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합니다.

다음 세미나는 2023년 2월 16일(목) 16시 잠정 시행 예정으로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선생님의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자세한 평론(가제: 쇼펜하우어로 본 이규성의 소통과 혼융의 철학)으로 진행합니다.

주    제 : 이규성의 程朱學 이해와 쇼펜하우어의 生철학 (1)
발표자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    시 : 2022년 12월 16일(금) 오후 4시~6시
장    소 : 서소문로 45 소재, 이병창 교수 ‘정치학교’ 연구강의실
방    식 : 대면+비대면 zoom 회의

♦ 동영상 출처 : https://youtu.be/mqXvRjLUvrg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1월 월례발표회 영상 “더 좋은 것을 보고 인정하면서 더 나쁜 것을 따른다” -스피노자에게 아크라시아의 문제- [월례발표회·세미나]

11월 월례발표회는 9월부터 시작한 2인 토론자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11월 월례발표회 개최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1월 월례발표회

주 제 : “더 좋은 것을 보고 인정하면서 더 나쁜 것을 따른다” – 스피노자에게 아크라시아의 문제 –

발표자 : 정선우(연세대학교)

토론자 : 이지영(이화여자대학교), 유민석(서울시립대학교)

일 시 : 2022년 11월 25일 오후 7시 – 9시 방 식 : zoom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RY_S9vM57vc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정신현상학』으로 『볼데마르』 읽기”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0월 월례발표회

이번 10월 월례발표회는 9월과 마찬가지로 두 명의 토론자가 참여합니다. 지난 발표와 마찬가지로 풍성한 발표회가 되었습니다. 1인 발표와 2인 토론(논평) 구도는 앞으로 한철연 월례발표회의 특장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월 월례발표회 개최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주    제 : 『정신현상학』으로 『볼데마르』 읽기
발표자 : 남기호(연세대학교)
토론자 : 박정훈(서울대학교), 이병창(한철연)
일    시 : 2022년 10월 28일(금) 오후 6시 – 8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동영상출처: https://youtu.be/_MYdkvjb45I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2년 10월 정기발표 영상 2022.10.14.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의 비판적 독해: 박치우 부분을 중심으로” [월례발표회·세미나]

지난 2021년 6월 13일(양) 작고하신 故 이규성 선생님(이화여대 철학과)의 학문을 기리고 학술을 연구하기 위해 한철연 후배와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작은 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시작(2022년 8월 17일 오후 4시, 이화여대 ECC B149)은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평”이라는 주제로 이병창 선생님(동아대 명예교수)의 발표가 있었고,
이번은 두 번째 발표회입니다.
앞으로 두 달에 한번씩 연구 모임을 진행합니다.

주 제: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의 비판적 독해: 박치우 부분을 중심으로
발표자 : 박민철(건국대학교)
일 시 : 2022년 10월 14일(금) 오후 4시~6시
장 소 : 이화여자대학교 ECC B150
방 식 : 대면+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2QnXGKiYwxU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배기호 지음, 『순자: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2022)를 읽고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배기호 지음, 『순자 –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읽고

 

윤태양(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예전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동양)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물어오기에, 발간 취기 뒤로 치기를 숨기며, ‘군자가 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자(君子).

원래 군자는 말 그대로 ‘임금의 자손’, 즉 혈통적 지배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공자(孔子)에 의해 ‘군자’라는 개념은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핏줄로 얻은 지배계층의 지위 (이것은 기존의 의미이지요), 다른 하나는 지배계층에 요구되는 능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들 (이것은 공자가 새로 부여한 의미입니다) 로 말이죠. 그리고 후자인 ‘군자다움’은 배움과 자기 수양을 통해 얼마든지 획득 가능한 것이라고, 공자는 설파했습니다.

 

‘군자’를 요샛말로 풀자면 어떨까요. 진지하고 단정한, 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게는 단호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정한, 행동은 예의에 알맞고 마음은 올바름을 좇는, 공평한 정신으로 공공선을 추구하고, 사사로운 이익 앞에서 의(義)를 실천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여덟 글자로 말하자면 ‘극기복례(克己復禮)’ 와 ‘수기안인(修己安人)’.

저는 이것이 『논어(論語)』의 핵심이고, 유학(儒學)의 중추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강하게 폭발했던 때를 꼽으라면,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꼽을 것입니다. 벌떼처럼 일어났던 것은 패자의 자리를 노리고 전쟁(戰爭)을 일삼았던 군웅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학의 창시자인 공자 이래로 온갖 ‘자(子)’들이 저마다의 논리로 치열하게 논쟁(論爭)을 벌였던 때 역시 바로 이때입니다. 그래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대략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3세기 초까지인 저 제자백가 시대를 장식했던 무수한 이름들은 무심한 세월 속에 먼지처럼 스러져 갔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孟子)의 이름만은 우뚝하게 ‘유학’의 근본으로 추앙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서울의 성균관과 각지에 있는 231개 향교의 대성전에 이들의 위패를 (물론 가짜이지만) 봉안하고, 아직까지도 매년 석전대제를 지낼 정도입니다. ‘공맹’의 병칭은 ‘유학’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순자(荀子)는 뭐랄까, 유학의 방계(傍系) 혹은 별종으로 취급을 받아온 터라 대성전에 없습니다. 널리 아시는 것처럼 ‘한유가 흠을 잡고, 주희가 낙인을 찍은’ 뒤로 이 한반도에서 순자는 일종의 터부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순자가 터부시 되었던 것은 적어도 고려 중기 이후입니다. 고려의 이규보와 이제현의 비판 뒤로, 특히 주자학이 들어와 조선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한 이후에는 순자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실패자’로 등한시 되었고, 정조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금씩 순자에 대한 재평가 혹은 취사의 시도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윤무학, 2009 참고)

 

순자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크게 그 논리를 둘로 갈래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진(秦)에 대한 매도의 역사관 위에서 진의 강성과 통일을 가능케 했던 이사(李斯)와 법가의 모체라는 비난이고, 다른 하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으로 박혀버린 미운털 탓입니다. 순자의 입장에서는 양자 모두 정정당당한 논리적 비판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순자에 대한 연구는 맹자-주자 계열의 연구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직하의 좨주이자 당대의 대학자 순자는 작금까지의 외면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어쩔 수 없지, 괜찮아.’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자가 존숭해 마지않던 공자의 언행이 기록된 논어 제일 첫 편 첫 장의 말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 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이역만리 한국의 젊은 연구자가, ‘멀리서 찾아온 벗’ 마냥 반갑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요.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반갑습니다. 평소 보아왔던 배기호 선배의 모습처럼 ‘지금의 눈으로 옛것을 읽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그의 고민이 장마다 물씬물씬 풍겨서 더 그런 것도 같습니다.

 

오랜만에 순자를 다시 읽다 보니 문두의 옛 감상이 다시금 차오릅니다. ‘나는 공부를 왜 하는가. 결국 더 나은 자신으로 스스로를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과 함께 말이죠.

 

저도 순자를 전공했습니다. 군자의 길을 따르기 위해 그토록 예의를 중시하고, 욕망의 힘을 인정하여 매우 경계했으며, 그래서 더욱 학문과 수양을 권장하고, 궁극적으로 공공선의 추구를 가장 앞에 두려 했던 순자의 사상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아주 논리적이고, 치밀하며, 매우 현대적입니다. 짧은 서평에서 다 말하려니 힘드네요. 배기호 선배가 이 책에서 너무나 잘 설명했는데 말이죠.


서평자 윤태양: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순자 도덕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K학술확산연구센터에서 일하고 있고, 유가 도덕론과 한국 근대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