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㊶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㊶
<알림>
2018년 8월 사단법인 정암학당의 상설 강좌로 개설했다가 코로나 때문에 2020년 3월 40강을 끝으로 중단되었던 ‘이정호 교수와 함께 하는 플라톤의 <국가> 강해’를 2023년 2월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다만, 코로나의 위협이 여전히 상존해 있어 직접 강의는 피하고 이곳 웹진에 강의록을 매달 2회 게재하는 방식으로만 강좌가 진행됩니다. 본 강좌는 지금까지 40강을 진행하는 동안 플라톤의 <국가> 전체 10권 중 3권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국가> 텍스트를 한 줄 한 줄 자세하게 읽어가며 아주 장기간 진행되는 일종의 <국가> 정독을 위한 주해서 성격의 강좌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강좌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독서 과정 중 안내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만 중간 중간 따로 참고해도 좋을 것입니다.
- 본론 1 : 정의의 수립- 이상국가의 건설(제2권 – 제4권, 357a-445e)
-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국가의 기원(357a-374a)
-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403d-404e]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 이어 신체단련 교육 즉 체육γυμναστικῇ에 관해 논의를 시작하면서 체육이 목적으로 하는 몸σῶμα의 좋은 상태가 기본적으로 영혼의 탁월함ἀρετῇ에 기초해있음을 밝힌다. 즉 몸이 자신의 탁월함을 통해 영혼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좋은βέλτιστον 영혼이 자신의 탁월함을 통해 몸을 가능한 한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생각(마음,διάνοια,dianoia)을 충분히 보살피고 몸과 관련된 일들을 세세하게 살피는 일은 그것(dianoia)에 맡기고 여기서는 체육의 개요만 간략히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403d) 우선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를 위한 체육 교육에서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사항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즉 술에 취하는 일은 삼가야 하고(403e) 음식과 관련해서도 한결 정교한κομψός 훈련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오직 체력만을 위해 잠만 자고 짜인 식단대로만 먹고 지내는 운동선수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다. 되레 그들은 식단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심각한 중병에 걸리기 쉽다. 수호자들은 전쟁이라는 가장 큰 시합의 선수들이므로 늘 개κύων들처럼 깨어 있어야 하고 최대한 예리하게 보고 들어야 하며(404a) 원정 중에 물과 음식들이 자주 바뀌고 기후가 급격히 변화하더라도 건강이 쉽게 나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최선의 체육은 시가와 자매ἀδελφή간이다. 즉 단순하면서도ἁπλός 맞춤한ἐπιεικής 특히 전쟁과 관련된 체육이어야 한다. 그런 것들은 호메로스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영웅들이 원정 중에 잔치를 하는 경우에 생선, 삶은 고기 말고 오로지 구운 고기만 나온다.(404b) 그릇을 가지고 다니기보다는 불만 사용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을 잘 간수할 사람 양념 들 그런 모든 것을 멀리해야 한다. 쉬라쿠사의 식탁과 시켈리아의 다채로운 요리, 코린토스의 아가씨들과 친하게 지내서도 안 되며 아티카의 과자들도 멀리해야 한다.(404d) 그런 식생활과 생활방식 전체는 온갖 화음과 장단이 있는 음악과 노래에 비교된다. 다채로움ποικιλία은 방종ἀκολασία과 질병을 낳은 반면, 시가의 단순함ἁπλότης은 영혼 안에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낳고, 신체단련 즉 체육의 단순함은 몸 안에 건강ὑγίεια을 낳는다.(40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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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이 영혼 즉 정신 교육과 관련 되어 있다면 체육γυμναστικῇ은 신체 즉 몸의 단련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몸이 좋아지는 것은 영혼의 탁월함에 기초해 있다. 영혼의 분별력, 즉 제대로 된 생각dianoia을 갖고 있는 한, 몸을 좋게 만드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그 역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체육 교육의 목적은 신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력이 영혼에 대한 신체의 영향력을 능히 압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영혼의 교육과 관련한 시가 교육이 자세하게 다루어진 만큼 체육 교육은 개요만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 개요에서도 시가 교육의 요체인 단순함과 절제, 조화가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기초로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고 반대로 그에 상반하는 다채로움과 방종, 부조화는 몸을 병들게 만드는 근본 원인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시가 교육과 체육은 원리상 자매간이다.
* 오늘날 씨름 선수들이 그러하듯이 당시에도 레슬링 시합을 전문으로 하는 운동선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선수의 훈련 방식과 수호자의 훈련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이곳에서도 잠만 자는 운동선수와 늘 깨어 있는 수호자가 대비되고 있고 쉬라쿠사의 식단과 코린토스의 아가씨, 아테네의 과자 또한 원정 중의 영웅들에게 체화된 단순 식단과 절제력에 대비되고 있다.
* 다채로움의 원어 ποικιλία은 일차적으로 자수에서 온갖 색깔로 화려하게 수놓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여기서 그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가짓수의 요리를 가리키고 반대로 단순함ἁπλότης은 검박한 소식을 가리키지만 단순함에는 질적인 조화의 의미도 있다. 플라톤에게 조화를 갖춘 여럿은 단순함과 통한다.
[405a- 406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이 지켜지지 않아 나라에 방종과 질병이 만연할 경우 ‘법정 연설술’δικανική과 의술ἰατρικὴ이 떠받들어진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하층민들과 수공예가들뿐만 아니라 자유인마저 최고의 의사들과 재판관δικαστής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나라의 교육이 잘못되고 부끄럽게 되었다는 증거이다.(405a) 남들을 주인δεσπότης이자 판정관κριτής으로 삼아 남들에게서 가져온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추한αἰσχρός 것이자 무식함ἀπαιδευσία의 큰 증거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피고나 원고로서 일생의 대부분을 법정에서 허비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모르는 탓에 바로 그 일이 자랑스럽다고 믿는 것보다 부끄러운 것은 없다.(405b) 왜냐하면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불의를 저지르는 데 능란하고, 온갖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빠져나가고 몸을 구부려 온갖 탈출구를 통해 달아나는 데 능숙하고 그것도 사소하고 전혀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졸고 있는νυστάζοντος 재판관이 전혀 필요 없도록 자신의 삶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좋은 일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405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의술이 필요한 이유는 상처나 어떤 계절적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지 게으름ἀργία과 생활방식δίαιτα 때문에 생긴 이른바 똑똑한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Ἀσκληπιάδης들이 이름 붙인 복부팽만증이니 점막염증Ἀσκληπιὸς같은 것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405d) 그에 따르면, 실제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시대에는 그런 염증 정도의 병들은 병으로 여겨지지도 않아(405e) 하물며 트로이에서 부상당한 에우뤼퓔로스에게 염증을 일으키는 음식 같은 것을 먹여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체육교사였던 헤로디코스가 자신이 병약해지자 체육을 의술과 섞어 만사 제쳐놓고 오직 자기 병 수발에 전념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까지 진 빠지게 하면서(406a) 노년에까지 그저 목숨만을 부지한 이래 어처구니없이 그런 ‘질병 간호술’παιδαγωγικῇ τῶν νοσημάτων까지 오늘날 의술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406b) 아스클레피오스가 이런 종류의 의술을 후손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런 의술에 대해 모르거나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각자에게 해야 할 일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음에도 평생을 그저 병 치료에만 매달리는 한가로움σχολ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06c-408b]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우습게도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장인들의 경우에는 간파해 내면서도 부유하고 행복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406c) 예를 들어 어떤 목수가 자기가 병에 걸렸을 경우 그는 의술의 처방을 받아 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장기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섭생δίαιτα만 하며 병치레하라고 처방한다면, 그는 그렇게 질병에나 신경 쓰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홀히 하며 사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고 당장 말하고(406d) 그런 처방을 하는 의사와 작별하고 평소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다 건강해지면 자신의 것을 하면서 살 것이고, 육신을 지탱하기에 무리가 되면, 삶을 마침으로써 성가신 일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한다.(406e)
* 그러나 반면에 부자ὁ πλούσιος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즉 어쩔 수 없이 못하게 되면 살 수 없는 일 그런 일은 없지만 포퀼리데스Φωκυλίδες의 말 대로 부자는 덕ἀρετὴ을 익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407a) 그런데 한편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ῆ을 넘어서는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ἡ περιττὴ ἐπιμέλεια τοῦ σώματος은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407b)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그러한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은 배움μάθησις이나 숙고ἐννόησις 등과 관련한 훈련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증세마저 철학 때문이라고 탓을 하게 만들어 이런 종류의 덕(탁월함)을 닦는 일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늘 아프다는 생각을 하게하고, 몸과 관련해서 한시도 근심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어, 장인들이 기술에 전념하는 데도 걸림돌이 되지만 부자가 덕을 익히는 일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407c)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 역시 이 점을 알고서 건강한 몸과 건강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특정 부위에 국한된 어떤 질병을 가진 경우 이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세상에 알려 그들에게서 질병을 몰아내고는 나랏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그들과 달리 몸속이 속속들이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섭생법에 매달려 ‘길고도 나쁜 삶을’μακρὸν καὶ κακὸν βίον 살면서 자신들과 유사한 또 다른 자손들을 낳는 일도 없도록 조치했다는 것이다.(407d) 정해진 일과를 지키며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μὴ δεῖν θεραπεύειν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정치가πολιτικός로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수긍하면서(407e) 아스클레피오스의 자식들 또한 트로이에서 그들이 전쟁에 능했을 뿐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방식으로 의술을 사용하여 판다로스의 화살에 부상당한 메넬라오스를 구해주었음을 전해준다. 즉 그들은 생활방식이 단정한κοσμίος 그런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치료를 하고 설사 다소 회복에 방해가 되는 음료를 마시더라도 그의 건강이 그것을 이겨내리라 믿고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408a) 반면 체질이 병약하고 무절제한ἀκόλαστος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하물며 그들이 미다스 보다 부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치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40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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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컨대 몸을 돌보는 체육은 영혼을 돌보는 시가 교육과 마찬가지로 공히 단순함과 절제를 토대로 한다. 플라톤은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단순함과 절제라는 기본적인 사항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경우의 폐해를 예시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때 플라톤은 그 단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니라 당대 아테네에서 크게 발달했던 법정 연설술과 의술이다. 한 마디로 법정 연설술과 의술의 발달은 바람직한 시가교육과 체육교육의 기본 원리, 즉 단순함과 절제가 갖추어지지 못했거나 결여되었기 때문에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당대 아테네 현실에 대한 플라톤의 적나라한 비판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즉 법정 연설술이 발달했다는 것은 건강한 영혼으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옳고 그름을 판별해내야 함에도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사사건건 분쟁을 일으켜 남들을 재판관으로 삼아 어떻게 하면 벌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것인가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의술의 발달 역시 당대 많은 아테네인들이 무절제하고 게으른 생활이 몸에 배어 스스로 절제하고 돌보는 능력이 떨어져 사소한 몸의 불편함까지 의술에 의존하다 보니 별의별 의술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술의 발달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예기치 않은 다양한 형태의 중병이나 부상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발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여기서 비난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의술의 발달이 아니다. 플라톤이 여기서 비판하는 의술이란, 절제를 갖춘 사람이라면 능히 자신의 건강체로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음에도 사소한 몸의 불편함까지 의술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발달하게 된 그러한 종류의 의술을 말한다. 실제로 아스클레오피스 시절에는 이런 류의 불편함은 질병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 의술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테네 말기에 들어 그러한 풍토가 만연하다 보니 사람들이 질병에 대한 극복 능력이 점점 떨어져 조그마한 병에도 지레 걱정이 앞서고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이 크게 늘어나 그저 자기 몸을 추스르는 데만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에 따라 온갖 종류의 섭생법들이 의술의 하나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헤로디코스가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몸에 집착해 자신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부지하려고 만사 제쳐놓고 오직 자기 병 수발에 매달리는 일종의 연명술 즉 ‘질병 간호술’까지 의술의 이름으로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술의 처방 역시 경비가 필요한 만큼 이러한 풍토는 부자일수록 더 큰 관심사가 되어 그만큼 덕을 쌓는데 소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고된 생산 노동에서 비켜서 있을 정도로 부를 갖추거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시간적 여유를 공동체를 위한 공력과 덕을 쌓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당대 크게 발달한 비정상적인 몸에 대한 관심은 부자들로 하여금 조그마한 몸의 불편함도 참지 못하게 만들어 철학을 공부하면서 생길 수 있는 머리 아픈 일조차 몸의 불편함으로 여기고 그 탓을 철학으로 돌려 덕을 쌓는 일을 더욱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플라톤은 개탄한다.
* 소위 단순 연명 기술로서 의술이 크게 발달하는 것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오늘날 국가 간 또는 계층 간 의료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의미 있는 반성적 과제를 던져 준다. 사실 생명권은 개인이 누려야 할 인권 관련 기본권이라는 인식 때문에 근대 개인주의 사상이 확립된 이후 상당한 기간 이른바 사회 복지 차원에서 의료 서비스의 분배 영역에서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영국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후 공공 의료 서비스 체계의 후퇴를 가져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생명권이라는 기본권의 영역에서조차 시장주의의 미명아래 의료 서비스의 불공정한 분배가 나날이 심화하는 추세이다. 게다가 오늘날 더욱 심화한 국가 간 또는 계층 간 빈부의 격차는 의료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하여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부유한 국가나 계층은 이른바 질병 간호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단순 연명의 욕구마저 채울 수 있지만 가난한 국가나 계층은 그러한 질병 간호술은 고사하고 일상적인 질병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간단한 치료를 통해 충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고 마는 일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발달과 융성은 인류사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플라톤이 체육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이처럼 법정 연설술과 의술을 끌어들이는 것은 다소 뜬금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곳 논의 역시 그러한 비교를 통해 몸을 돌보는 일과 영혼을 돌보는 일이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바람직한 체육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 그 논의의 본질을 음미해보면 결국은 체육이건 의술이건 몸을 돌보는 것 일체는 궁극적으로 영혼을 돌보는 일과 결코 떨어져 있을 수 없고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는 일관된 신념이 밑에 깔려 있다.
* 그러나 그 논의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의술의 성격과 목적 등에 관한 플라톤의 관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술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하고 있는 생명 자체의 존엄성과 불가침해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치료와 처방을 요구할 수 있는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스클레오피스를 통해 표명한 다음의 명제 즉 “몸속이 속속들이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섭생법에 매달려 ‘길고도 나쁜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되며, 정해진 일과를 지키며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 역시 어떤 병에 걸린 어떤 목수가 만약 의사로부터 이제 생업은 접고 앞으로 그저 생명만 보전하는 섭생법을 처방받는다면 그 목수는 그것은 거부하고 평소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다 건강해지면 자기의 일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가신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의술은 어떤 종류의 질병이건 그가 하던 일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하는 일을 목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단순히 목숨만 연명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요컨대 플라톤에게 연명 치료는 의술이 수행해야 할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받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당연히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 따른 시민적 삶 즉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일익을 담당할 때만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시민적 삶이 아닌 삶은 이미 삶이 아니다. 회복 불능의 병에 걸려 시민으로서 아무런 자기 역할을 못하고 그저 목숨만 부지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치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노후에 생업을 접고 최소한의 건강을 보전하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삶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도 그 유유자적한 생활이 단순히 몸만을 돌보는 삶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삶이어야 한다. 케팔로스 노인처럼 그저 부에 의존해 자신의 개인적 복락만 추구하는 삶은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요컨대 생명의 존엄성이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보존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스스로 시민적 삶을 담보할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지 그럴 능력이나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까지 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라 의술 또한 오직 회복을 위한 의술이어야 하고 의술의 발달 역시 그러한 의술의 발달이어야 한다.
* 그러나 위와 같은 플라톤의 관점은 생명권이 채 확립되지 않았던 당대의 의식 수준(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인과 장애인을 유기하는 관습이 오랫동안 용인되었다. 테아이테토스 160e 참고)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생명과 관련한 개인들의 자기결정권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아무리 마땅히 지켜야 할 바람직한 당위가 있더라도 그 당위를 위해 누구도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특히 근대 이후 개인의 생명이, 개인이 누려야 할 불가침의 자연법적인 권리로 확립된 오늘날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설령 죽을죄를 지었어도 죽음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이 아무리 격변하는 전란의 시대에 공동체의 보존과 관련하여 기능들의 내적 유기성과 능력에 입각한 분업주의의 관점에 크게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일지라도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자의적이며 강압적이다.
* 플라톤 그 자신의 주장과도 부딪친다. 그의 생각대로 사회 또는 개인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상호 유기체와도 같은 의존 관계를 형성한다면, 유기체인 생명체가 항상 건강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듯이 사회나 개인 모두 언제든 질병 상태를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유기체는 또 그것까지 감안하여 그것을 치유 극복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건강 상태가 아닌 질병과 같은 문제 상태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기능도 유기체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화나 장애의 문제는 유기체로서 개인에게 현존하는 결핍이고 그에 따라 그 실재하는 결핍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것 또한 유기체로서 개인이 갖는 당연한 욕구이듯이, 사회 또한 상호 의존적 유기체로서 그러한 사회적 결핍들을 현존하는 결핍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한 책무이다. 그런 점에서 노인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이 인간적·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위를 내세워 생명의 자기 결정권까지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플라톤의 방식은 그 자신의 유기체적 기능론의 입장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 다만 사회적 약자들이 당면하는 위와 같은 문제 상황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연명 이외에 어떤 것도 욕구하지 않거나 욕구조차 할 수 없는 개인들에 대한 단순 연명을 위한 치료, 특히 그러한 치료를 욕구하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크게 발달한 연명 치료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논쟁적 시사를 던진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식물인간, 안락사의 문제는 물론 노령화 사회를 맞이하여 심각한 수준의 노인 의료비의 증가와 부양의 한계 나아가 연명치료와 존엄사의 문제 등 의료윤리와 관련한 사회문제에 직면해있다. 전통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그 문제 해결의 기본 방향은 제법 분명해 보이기는 하나 오늘날 대체적인 추세는 오히려 안락사와 존엄사를 인정하는 쪽으로 논의의 중심축이 옮겨 가고 있다. 그만큼 시대적 현실 여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의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와 관련하여 근대 이후의 관점과 플라톤의 주장과는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개인들의 의사를 넘어서 단순 연명이 갖는 사회적 삶의 무의미성을 근거로 연명치료 제한의 공적인 제도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생명가치의 존엄성과 개인주의가 확립된 오늘날에는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 자체를 금지하고 있거나 설사 인정하더라도 그것의 결정은 철저히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겨져 있다.
*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일정 조건 아래에서 연명치료에 대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거부 행위가 나날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추세이고 나아가 그러한 개인의 선택을 바람직한 행위로까지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이 오히려 인권 친화적이라는 주장까지도 함께 제시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람다운 삶을 규정하는 기준에 경제적 조건이 가히 절대적인 수준에까지 이른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삶의 현실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개인과 가족 관계 등과 관련한 사적인 차원이나 의료 제도와 관련한 문제에서조차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 배분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고려의 요소가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개인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근원적 비참성이 개인의 생명권이 구조적으로 도외시되거나 생명가치의 절대성이 무력화되는 가히 전쟁터나 다름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2020년 코로나-19사태가 보여주듯이 이미 현대사회는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 분배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심각한 팬데믹 사회로 진입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 그렇다면 플라톤의 생명과 의료윤리에 대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그와 관련한 논쟁점을 구성하는 하나의 유의미한 논거가 될 수 있다. 플라톤의 관점은 온건하게는 양극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생명권의 보장과 의료 서비스의 배분과 관련하여 균형 있는 공적 해결책의 합리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극단적으로는 개인의 생명권의 문제에 대한 결정과 관련하여 개인들의 사회경제적 부담과 공적 안녕의 명분하에 국가 권력의 자의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될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인권 차원에서 존엄사가 거론되는 비교적 사회복지가 잘 구비된 나라들과 질병과 가난으로 사회 복지 제도가 크게 미비한 나라들이 전혀 다른 이유로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에 대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찬성 비율이 높은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에 대한 찬성 비율이 근래 들어 80%를 넘어섰는데 그 찬성 근거들의 하나로 존엄사 및 인권에 대한 증대된 관심도 자리하고 있지만, 치료 및 부양과 관련한 가족들의 고통과 부담 또한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인권과 생존 문제가 갖는 심각한 양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아무려나 플라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최소한 연명치료의 제한은 물론 그에 따른 안락사와 존엄사의 공적 제도화와 관련해서 쌍수를 들고 찬성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체육교육과 시가교육이 건강하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한 형성의 방책이라면 앞서 거론된 의술과 재판술은 몸과 혼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제거하여 늘 몸과 혼의 건강을 유지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배제 방책이다. 가장 이상적으로는 형성의 방책이 완전할 정도로 성공하여 몸과 혼의 질병이 발생하지 않아 의술과 재판술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 몸과 혼의 질병은 늘 상존하고 그에 따라 의술과 재판술은 한 사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기술들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앞서 보았듯이 몸과 혼의 질병이라고 해서 그 일체가 의술과 재판술의 대상은 아니다. 플라톤은 질병 가운데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준으로 회복 가능한 질병만을 의술과 재판술의 대상으로 제한한다. 부유층들이 생명만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의 의술을 동원하고 그러한 필요에 따라 그것을 위한 온갖 종류의 치료 기술이 개발되는 것은 의술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의술의 왜곡 또는 퇴보이다. 재판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재판술을 통해 정의가 관철되어야 함에도 법망을 피해 가는 영리한 법기술이 되레 크게 발달하고 그 수혜 또한 부에 비례하는 것은 재판술의 발전이 아니라 악용이자 타락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덕과 영혼이 아닌 감각적 욕망과 이기심에 매몰되어 있는 당대 아테네 현실을 고발한 것이지만, 이미 교육 분야에서조차 빈부의 양극화가 고착화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일례로 유독 의사와 법률가가 소수의 최상위권 우등생들이 가장 선호하고 또 그들만이 진입 가능한 최고 최상의 직업군으로 꼽히고 있다는 점은 의술과 재판술의 수요 증대와 발전이라는 표피적 현상 이면에 의료 및 사법 서비스 영역에서의 특권화는 물론 우리 사회의 혼과 몸의 질병 수준 또한 그만큼 악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좌라 할 것이다. (체육교육 2, 다음 강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