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 이병태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1. 슈티르너는 우리에게 오로지 맑스를 경유하여 알려진 철학자다. 바쿠닌, 바우어, 푸르동이 그러했듯이 슈티르너란 철학자는 맑스의 조롱과 비판 ‘덕분’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슈티르너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확인하기에 앞서, 혹은 그럴 필요도 없이 그의 이름은 확고한 ‘악명’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악명은 구체적으로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를 통해 형성된다. 주지하다시피 맑스의 신랄한 비판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제로 맑스의 주저 가운데 상당수는 특정한 이론, 사상, 실천적 노선 또는 그 주창자를 향한 ‘비판서’들이다. 『독일이데올로기』, 『신성가족』, 『철학의 빈곤』, 『헤겔법철학비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심지어 『자본』도 ‘정치경제학비판’이란 부제를 달고 있을 뿐 아니라, 속류경제학 및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전투적 글쓰기를 감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비판은 『독일이데올로기』(이병창 번역)의 슈티르너 비판이다. 단순히 비판을 위해 한 사람에게 할애한 원고량도 놀랍지만, 글쓰기의 스타일도 전무후무하다. 우선, 늘 그렇듯 날카로운 비판이 전개되긴 하지만, 혼란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문장 및 구성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나아가, 저술 전체가 마치 ‘악플’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슈티르너를 조롱하며 심지어 그의 연인까지 들먹일 정도다. 어쨌든, 국역본 기준으로 700여쪽에 달하는 이 장대한 비아냥거림 덕분에 슈티르너는 악명이나마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맑스의 공이 크다고 해야 할까. 궁금한 것은 이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이 왜 하필 슈티르너를 향했는가 하는 점이다. 맑스의 인성부터 『독일이데올로기』 저술시점이 지닌 역사적·개인사적 긴박함까지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맑스의 비판, 그리고 그 강도는 논적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를 향한 맑스의 과도한 비판은 어쩌면 슈티르너의 사유가 지닌 영향력 또는 잠재력을 맑스가 간파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2.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 첫머리부터 이미 가장 적극적인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저 위대한 자기중심적 사람을 섬기지 말고, 오히려 자기중심적 사람 자체가 되라고 제안한다.” 신과 신성, 위대한 인류애, 왕 또는 국가가 끊임 없이 설득해 온 자기 희생, 그리고 이 희생의 열매인 다른 이들의 안녕 및 행복이란 그가 보기에 명백한 기만이다. 진정 신과 인류를 생각한다면, 이들이 드러내는 타협 불가능한 자기중심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신은 오로지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인 나”만을 자기 행위의 근거로 삼는다. 세속의 ‘선량한 도리’란 신에 근거하든 인류에 근거하든 ‘나’에겐 부질없으니, 진리와 선, 정의와 자유 따위는 신이나 인류의 관심사일 따름이다. 나는 ‘나의 것’, 나만의 것, 따라서 ‘유일한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나에게, 나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맑스가 말한 해방이 ‘현실’적인 것인 한, ‘이념’, ‘가치’, 이를 체화한 제도 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를 통한 ‘통제’ 역시 불가피하다. 슈티르너는 신, 철학, 과학, 혁명 그 어떤 미명을 내걸든 ‘나’를 강박하는 외부를 완전히 거부하며, ‘나’의 유일무이함, ‘나’의 근원성을 일깨우고자 한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순전히 ‘나’의 권역에 속하는 문제다. 해방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또 혁명이 모든 억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 21세기 민주주의의 현실, 과학을 비롯한 학문들의 현재, 현대인의 삶 등을 되돌아 보면 슈티르너의 이같은 목소리는 지금도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나아가 슈티르너의 사유는 헤겔이나 낭만주의의 기풍이 역력하긴 하지만, 영향력 있는 여러 현대 사상가들과 유사한 궤적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다양한 외적 강제와 그로 인한 ‘나’의 침몰을 치열하게 사유했기에 어떤 점에선 푸코의 권력 이론에 맞닿고, 소크라테스 이후 인류가 고대의 생기를 상실한 채 ‘정신’과 ‘진리’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에 대한 니체의 사유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맑스는 아마도 슈티르너의 이같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했기에, 그리고 그의 사유가 혁명의 길을 흐트릴 정도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구석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자의 목소리는 엇나가는 이들에 대한 규제를 함축하지만, 길끝의 영광을 선취하는 이는 도정의 고난을 잠시나마 잊게 하기에 훨씬 달콤하다. 아마도 슈티르너는 후자였고, 맑스는 압도적으로 매혹적인 후자의 힘을 간파했던 전자였을 듯하다. 맑스의 일갈에 묻힌 철학자를 우리말로 꺼내 21세기 한국의 철학도들에게 소개한 박종성의 노고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이병창(한철연 회원, 동아대 명예교수)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연인 가네코후미코가 감옥(법정)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가네코후미코가 들고 있는 책이 있다. 아마 슈트리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아닐까 한다. 1844년 작성된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국내에 무려 180년 만에 박종성 교수에 의해 번역(2023)되었다. 원문 자체에 풍자가 섞여 있어 번역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박 교수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극정성으로 마침내 번역되었느니, 감개가 무량하다.

법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자)

필자는 이 책과 악연이 있다. 이 책이 발간되자, 1846-47년에 걸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슈티르너의 글을 풍자하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작성했다. 이 책은 아마도 슈티르너의 원본보다 부피가 더 큰 약 500페이지에 걸친 비판서인데, 필자는 2019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르크스 엥겔스가 토막토막 동시에 풍자를 섞어서 인용한 슈티르너의 글을 읽었는데, 필자는 풍자한 슈티르너의 원본을 알 수 없어서 마르크스 엥겔스의 글 가운데 어느 만큼이 풍자이고 어느 만큼이 본래 슈티르너의 글인지 알 수 없어, 번역이 말 그대로 고통스러웠다. 필자는 속으로 정말 많이 욕을 했다. 이 욕은 원문을 쓴 슈티르너와 그를 풍자한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어느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필자의 무능력에 대한 동시적인 욕이었다.

슈티르너의 원본이 먼저 번역되었더라면 필자도 고통어린 수고를 덜었을 것이고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뒤늦게야 번역한 박종성 교수에게 약간 원망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 독자는 원본과 비교하여 마르크스 엥겔스가 비판한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니, 번역자 박종성 교수에게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슈티르너의 책이 번역된 마당에 슈티르너가 마르크스 엥겔스에 미친 영향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마르크스 엥겔스를 이해하는 데서는 물론하고, 슈티르너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간단하게 이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엥겔스가 말 그대로 공역한 것이다. 한 사람이 작성하면 함께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교정하면서 전개되었다. 슈티르너 부분은 먼저 마르크스가 작성하고 엥겔스가 교정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사실 슈티르너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 약간의 편차가 있다는 사실이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슈티르너와 엥겔스는 베를린 히펠 바(맥주집인지 와인바인지 모호)에서 열리는 자유인들의 모임에 함께 참석하여 서로 잘 알고 있었으나 마르크스는 이 모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이런 거부감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슈티르너와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인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평지를 보면, 슈티르너의 책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엥겔스는 처음 슈티르너의 책을 접하게 되었을 때 긍정적인 점이 있다고 평가하면서 마르크스에게 이를 소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마르크스는 아마도(?)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이 브뤼셀의 아지트에서 함께 히히덕거리며(마르크스 부인 예니의 표현을 따르면) 토론한 결과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보듯이 철저한 풍자인데, 마르크스 엥겔스는 슈티르너를 성 막스라고 하거나 돈키호테의 시종인 산초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뜻에 굴복한 것인지, 엥겔스 역시 처음부터 그런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기 힘들다.

아무튼 슈티르너의 책은 이렇게 풍자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두 사람에게 긍정적인 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엥겔스가 말년에 언급한 글에서 드러난다. 알다시피, 독일 이데올로기는 모제스 헤스가 출판을 위한 협조를 거부한 결과 출판되지 않았다. 나중에 엥겔스의 말(『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서문에서)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를 쥐들의 비판에 넘겨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엥겔스는 이 수고를 작성하는 가운데 그들은 진짜 목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그 진짜 목적은 곧 그들의 사상인 역사적 유물론의 탄생이었다.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슈티르너의 대담하고도 확고한 비판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포이에르바흐식의 유적 본질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슈티르너의 철저한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관점을 통해 비로소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빛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이 지닌 혁명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으로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의 아포리아로 알려진 두 가지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홉스의 아포리아가 있다. 즉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절대왕권을 정당화한다는 문제다. 또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아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교환 관계를 통해서 여전히 불평등이 불생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마르크스는 개인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했는데, 유일자의 절대적 자유와 그의 힘에 의한 소유를 타당으로 하는 슈티르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고민했는지 궁금하다. 만일 슈티르너식의 해결책이 있다면 굳이 우리는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사에서 슈티르너의 영향은 광범위하며, 20세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사상에 끼친 공적은 말할 것도 없이 잘 알려져 왔다. 특히 20세기 말 데리다나 들뢰즈의 철학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티르너의 사상에 대한 데리다나 들뢰즈의 평가도 흥미롭지만, 평자로서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니체에 대한 슈티르너의 영향이라는 문제이다. 19세기 말에는 슈티르너의 영향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었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오히려 그 영향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문제는 사실 니체의 사상적 발전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니체 연구자의 관심에 속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슈티르너의 유일자나 소유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흔히 유일자의 자유, 힘이라는 개념을 니체의 권력의지라는 개념과 비교되는데, 양자는 표면적으로 보면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니체의 경우 권력의지는 자기를 초월하는 힘, 즉 위버멘쉬의 힘이다. 그러나 유일자의 힘이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힘이니,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닐까?

문제야 어떻든 간에 사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슈티르너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이 일종의 풍자인지 아니면 솔직한 자기주장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풍자로 말한 것을 그의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독이 될 텐데, 마침 박종성 교수가 이 책을 번역했으니, 슈티르너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가 본격적으로 연구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한번 박종성 교수의 노고를 치하한다. 벤야민은 책은 자신의 삶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에 번역된 책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1.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1) 영혼의 세 부분(434c-441c)

 

[435b-439d]

* 소크라테스는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즉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라는 특성εἶδος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로운 나라를 닮았다면 개인의 경우도 자신의 영혼 안에 이와 동일한 부류εἶδος의 것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영혼 안에도 과연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를 살피기 시작한다.(435c)

*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처음에 사소한φαῦλος 문제라고 말을 했다가 글라우콘이 ‘아름다운 것들은 어렵다’χαλεπὰ τὰ καλά라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의 말에 수긍한다.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앞서 고찰했던 것 정도만큼의 방법으로 그 문제를 다루겠다고 말한다.(435d)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이 부분의 논의는 다소 장황할 정도로 441c까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의의 전개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에 있는 것과 똑같은 특성εἶδος과 성품ἦθος이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 각 나라는 서로 다른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의 특성과 성품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우리 지역의 경우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특성이 있고(435e) 페니키아 사람들과 이집트 지역 사람들의 경우에는 재물을 사랑하는 특성이 있다.

2) 하지만 우리가 이것들 각각을 동일한 것으로 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 가지가 있어서 각기 다른 것으로 각기 다른 것을 행하는지 어려운 문제이다.(436a)

3)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ὅτι ταὐτὸν τἀναντία ποιεῖν ἢ πάσχειν κατὰ ταὐτόν γε καὶ πρὸς ταὐτὸν οὐκ ἐθελήσει ἅμα 혹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다.(436b) 동일한 것이 동일한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436c) 팽이στρόβιλος가 동일한 곳에 그 끝을 고정하고 회전할 때, 전체가 정지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운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436d)그것들은 자신 속에 수직축과 원둘레를 가지고 있어서, 수직인 측면에서는 정지해 있는 것이고 원둘레의 측면에서는 둥글게 움직이는 것이다. 동일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436e)

4)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무언가를 얻기를 갈망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끌어당기는 것과 밀쳐내는 것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서로 반대되는ἐναντίος 것들이듯이, 욕구 일반ὅλως τὰς ἐπιθυμίας과 욕구하지 않음, 원함τὸ ἐθέλειν과 원치 않음, 바람τὸ βούλεσθαι과 바라지 않음, 영혼의 갈망과 밀쳐냄, 영혼의 끌어당김과 몰아냄 등 모두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437b-c)

5) 욕구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하나는 마실 것에 대한τὴν ποτοῦ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한τὴν ἐδωδῆς 욕구이다. 목마름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마실 것에 대한 욕구가 아니다. 목말라함 그 자체 αὐτὸ τὸ διψῆν는 그것의 본래 대상인 마실 거리 자체 αὐτοῦ πώματος 외의 다른 것에 대한 욕구가 결코 아니며, 배고파함τὸ πεινῆν과 먹을거리 βρώματος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욕구 자체는 그것의 본래 대상만을 대상으로 하고αὐτή γε ἡ ἐπιθυμία ἑκάστη αὐτοῦ μόνον ἑκάστου οὗ πέφυκεν, 특정한 종류의 이러저러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는 추가된 것들이 있을 때이다.(437d-e)

6)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τὰ μὲν ποιὰ ἄττα ποιοῦ τινός ἐστιν 반면,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τὰ δ᾽ αὐτὰ ἕκαστα αὐτοῦ ἑκάστου μόνον” (438a-b)

7) 앎ἐπιστήμη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다. 어떤 앎, 즉 어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앎이 집 짓는 일에 관련되었을 때, 그것은 건축술이라고 불린다.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것 역시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다.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이다. (438c-d)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것들의 경우에,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은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과 관련된 것이고 αὐτὰ μὲν μόνα αὐτῶν μόνων ἐστίν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것들과 관련된 것τῶν δὲ ποιῶν τινων ποιὰ ἄττα.이다. 예컨대 건강한 것과 병든 것과 관련되는 경우에 그 앎도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 되어 더 이상 단순히 앎이라고 부르지 않고 특정한 종류의 어떤 대상이 추가되어 의술이라고 부른다.(438e)

8) 목마름 자체는 많거나 적은, 좋거나 나쁜, 한마디로 말해 특정한 종류의 어떤 마실 거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439a) 그러므로 목말라하는 사람의 영혼은 그가 목말라 하는 한에서, 마시는 일 말고는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만약 무엇인가가 목말라 하는 영혼을 반대 방향으로 당긴다면, 목말라 하며 짐승처럼 그것을 마시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영혼 안에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439b)

9) 그런데 사람들이 목말라하면서도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들의 영혼 안에는 마시라고 시키는 것ὁ κελεύοντος도 있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τὸ κωλῦον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막는 것은 계산λογισμός으로부터 일어나고 반면에 데려가고 끌고 가는 것들은 그가 겪고 있는 일과 질병들에 의해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으로 계산하는 것’ τὸ ᾧ λογίζεται은 영혼 안에 있는 이성적인 것λογιστικόν이라 부르고, ‘그것으로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들뜨는 것’은 일종의 채워짐과 즐거움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것ἐπιθυμητικόν이라 부른다. 이것들은 영혼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유형εἶδος이다.(439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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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사소한paulos 문제라고 했다가 글라우콘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 말에 수긍한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504a-b에도 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다시 언급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길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수준의 길이 아니라 최대한 실재에 다가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적절한’(metriōs) 길임을 밝히고 있다. 즉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사소한’으로 번역된 paulos는 ‘쉽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이 말한 ‘어렵다’chalepa라는 말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그 문제를 사소하다고 한 까닭은 현재 논의 단계에서는 아직 실재에 관한 적절한 접근 방법으로서 변증술이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기존의 논의 방식과 수준에 따라 쉽게 다루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생각을 모른 채 자신의 수준에서 그 문제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원래 그 문제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그의 말에 수긍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선택한 기존의 논의 방법은 통상 소크라테스가 ‘그것이 무엇이냐?’ti esti의 문제를 다룰 때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대중들이 갖는 일상의 특수한 사례들이나 관념들이 갖는 한계들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도 논의는 욕구의 특정한 종류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욕구 자체로 다가간다.

* 1)에서 특성eidos : eidos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서 ‘형상’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곳의 eidos를 형상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이전이고 실제로 플라톤도 지금까지 이 말을 철학적인 전문 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사전적 의미(부류, 특성, 종류, 형태)로 사용해왔다는 점에서(부류-357c, 358a, 363e, 392a, 402c, 435c. 특성-432b,d, 435d. 종류-376e, 400a, 406c, 427a. 형태-397c, 433a) 여기서도 일단 ‘특성’으로 옮긴 것이다. 플라톤은 5권 476a에 가서 비로소 이 eidos를 그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용어로서 ‘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2)에서 ‘이것들’ : 사본에 따라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이 다르거나 애매하다. 스토바이오스의 수정제안을 받아들인 아담의 텍스트를 따르는 경우 ‘이것들’은 앞 문장에서 각 지역 사람들의 특성에 따른 행위들을 가리키거나 뒤에 나오는 ‘배우고 화내고 영양 섭취 등을 하는 행위들’을 가리킨다.(J. Adam 436a note 참고)

* 3)에서 ‘어려운 문제’ : 신체의 기능들은 서로 다른 신체의 부위들이 있어 그것들이 각기 고유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기능들은 과연 영혼 전체로 그 기능들을 수행하는 것인지 영혼도 신체의 부위처럼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 그 부분별로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립의 원리’를 토대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영혼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부분들 각기 서로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다.

* 3)에서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 : 소크라테스의 이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확립한 사고의 모순율(<형이상학> 1005b19)의 선구적인 언급으로서 무모순의 원리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언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언급 자체를 모순율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명제로 표명된 진술들에 적용되는 원리이지만 여기서 ‘반대되는 것들’로 언급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면 명제라기보다는 행위나 실재(entity)를 가리키고 모순 관계는 물론 반대 관계에 있는 것들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이 원리를 모순율(principle of contradiction)과 구분하여 ‘대립의 원리’(principle of opposition)라고 부른다.

* 3)에서 ‘동일한 것에 따라’kata tauton라는 말과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pros tauton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 논란이 있다. 모순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에는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라는 표현은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 말을 ‘동일한 것에 따라’와 중복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담은 ‘동일한 것에 따라’는 대립자의 원리가 적용되는 대상의 부분들과 관련된 기준이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는 적용되는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과 관계되는 기준이라고 주장한다.(J. Adam. note 참고)

* 6)에서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반면에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은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여러 사례를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말이다. 이를테면 ‘목마름’의 경우 특정 종류의 것들은 ‘뜨거운 것에 대한 목마름’, ‘많이 목마름’ 등 특정 정도나 특정 종류의 목마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차가운 것에 대한 목마름’, ‘적게 목마름’ 등으로 추가될 수 있다. 특정 종류의 목마름이 다양한 만큼 그 목마름의 대상으로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목마름’은 모든 사람의 욕구가 하나같이 ‘이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으로 똑같다는 점에서 결단코 다양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로운 것’ 역시 ‘더 큰 이로운 것’ ‘보다 작게 이로운 것’ 등으로 정도에 따라 다르게 추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목마름의 고유한 본래 대상은 이러 저러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이 아니라 ‘마실 거리 자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요컨대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되어 있다. ‘배고파함’과 ‘먹을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욕구를 특정 종류들이 아닌 ‘그 자체’로만 규정하려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대립의 원리’를 통해 또 다른 ‘그 자체’로서 반대의 욕구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비로소 영혼 안에 그 욕구와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7)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라고 말한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 종류의 대상에 대한 앎으로서 특정 기술이다. 그렇다면 특정 앎의 대상이 아닌 앎 자체의 고유한 대상으로서 그 대상 자체는 무엇일까? 아직까지 그것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나중에 그 대상 자체는 특정한 종류의 앎들을 앎으로서 규정해 주는 총체적인 앎의 본질로서 ‘형상’으로 드러난다.

* 8)에서 드디어 앞서 언급한 ‘대립의 원리’가 ‘목마름 자체가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적용되고 그것은 영혼의 부류들과 관련하여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지는가가 드러난다. 즉 영혼의 한 부류로서 목마름이라는 욕구는 그 욕구 이외에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영혼 안에 무엇인가가 짐승처럼 끌고 가는 그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우리들 모두는 비록 목이 말라 무엇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가득해도 만약에 그것을 마셨을 때 병이 나거나 죽는다면 분명 그것을 마시기를 주저하고 거부한다. 이것은 마시라고 시키는 것, 즉 목마름이라는 욕구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 즉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이 우리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자신의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혼 안에는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란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하는 영혼의 또 다른 어떤 부류로서 이른바 ‘이성적인 것’이다. 결국, 영혼 안에는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 이외에 그것과 구분되는 ‘이성적인 것’ 이 하나의 유형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439e-441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제3의 유형으로서 ‘기개적인 것’이 영혼 안에 따로 있음을 논증하고 그 특성에 관해 논의한다.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그런데 기개θύμος와 관련되며 ‘그것으로 우리가 분노하는 것’τὸ ᾧ θυμούμεθα이 있다. 이것은 앞의 것들 중 어느 한 유형과 본성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다른 세 번째 유형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분노의 예로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의 경우를 든다. 레온티오스는 사형집행인 옆에 있는 시체들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동시에 그러는 자신을 역겨워하면서 갈등하다(439e) 욕구에 지배된 자신에 대해 분노를 터트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 분노는 욕구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이고, 때때로 욕구적인 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πολεμεῖ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440a)

2)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λοιδοροῦντά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θυμούμενον,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이기라도 하듯 그의 기개는 이성의 동맹군이 된다.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는데도 그에 반대하여 기개가 욕구들과 결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440b)

3) 자신이 부정의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로 인해 굶주림이나 추위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품위 있는γενναῖος 사람일수록 분노는 덜하다. 반대로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부아가 끓고ζεῖ 사나워져서χαλεπαίνει 그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편과 동맹을 맺고συμμαχεῖ 갖은 힘든 일을 겪어도 그런 일들을 견디면서 이겨낼 것이고, 뜻을 이루거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아니면 목동νομεύς에 의해 개κύων들이 진정되듯 자신 곁에 있는 이성λόγος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정될 때까지 고귀하게γενναῖος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개들이 양치기ποιμήν에게 순종하듯이 보조자ἐπίκουρος들이 나라의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다. (440c-d)

4) 기개적인 것θυμοειδής과 관련해서 좀 전에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욕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영혼 안에 내분στάσις이 일어났을 때, 이성적인 것을 편들어 무기를 든다. 이것은 이성적인 것과도 다르고 욕구적인 것인 것과도 다른 제 삼의 것τρίτος이다. 나라가 돈벌이하는 집단χρηματιστικόν, 보조하는 집단 ἐπικουρητικόν, 숙고하는 집단βουλευτικόν, 이렇게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듯이 영혼에서도 이 기개적인 것이 나쁜 양육으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 한, 본래 이성적인 것을 보조하는 것으로 따로 있다. 이것은 욕구적인 것과도 이성 부분과도 다른 어떤 것이다. 그건 아이들παίδιον과 짐승들θηρίον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날 때부터 화θύμος로 가득 차 있지만, 계산 능력λογισμός은 제가 보기에 어떤 아이들은 결코 갖추지 못하고 대개의 아이들은 늦게서야 어느 땐가 갖추게 된다. 호메로스(<오뒷세이아> 20.17)도 서로 다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꾸짖는 상황, 즉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에 대해 계산을 한 부분이 비이성적으로 분노하는 부분을 꾸짖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440e-441b)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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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분노하는 것’ : 영혼의 부분에는 욕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이외에 제삼의 유형으로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 또한 대립의 원리에 의해 발견된다. 즉 기개적인 것은 레온티오스의 경우가 보여주듯 욕구적인 것의 발생을 막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욕구적인 것들에 분노하여 그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점에서 욕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욕구적인 것은 반성이나 주저함이 없이 그대로 그 욕구를 표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이성적이지만 기개적인 것은 비록 계산능력은 없어도 그러한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들과 싸우고 분노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의 동맹군이 된다.

* 레온티오스의 경우 그가 시체에서 성기를 보고 싶은 자신의 욕구에 분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레온티오스의 경우이건 호메로스가 묘사하고 있는 경우이건 그것들 모두는 기개적인 것이 인간의 본원적 자존심 내지 나름의 명예 의식과 깊숙이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들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지적 수준이나 성격적 특성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름의 자존심과 명예 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손상될 경우 예외 없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만큼 그것은 개인의 행위 동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2)에서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다’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인 것, 즉 영혼의 이성 부분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기개와 욕구는 이성의 통제를 받아들인다. 물론 기개와 욕구에 이성이 끌려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조차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함에도 기개와 욕구가 그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성 자체가 교육과 양육의 잘못으로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결코 기개가 욕구에 결탁하거나 욕구의 힘에 이성이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일시적인 내분, 즉 심리적 갈등은 있어도 이내 조절 통제된다.

* 3)에서 ‘분노는 덜하다’ ; 사람들은 때때로 부정의한 짓을 하다가 고통을 치른다. 그러나 품위 있는 사람일수록 그 고통을 정당하다 여겨 덜 분노한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누구나 하나같이 분노를 터트리며 정의로운 편과 동맹을 이루어 어떠한 고통도 잘 견디며 이겨낸다.

* 4)에서 ‘그건 아이들과 짐승들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 아이들과 짐승들의 경우에도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들과 동물들의 경우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빼앗기는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내거나 크게 울부짖는다.

*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은 이곳뿐만 아니라 581a-b에서 추가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그곳에서 기개적인 부분은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으로 언급된다. 이와 관련한 기개적인 것에 대한 추가적인 해설은 그 부분을 다룰 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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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서 살핀 영혼의 세 부분과 관련하여 종합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1) 인간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었다. 호메로스도 이미 노오스(noos)와 튀모스(thmos)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조차 그 마음의 작용을 이른바 영혼psychē으로 부르진 않았다. 호메로스 시절에 psychē라는 말은 다만 사람이 죽었을 때 몸에서 빠져나가 저승에서 그림자 비슷한 것으로 머무는 것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일리아스> 22.362) 물론 그때도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프쉬케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노오스, 튀모스, 메노스(menos) 등이 사용되었고 마음의 작용을 담당하는 주체도 횡경막이나 허파를 의미하는 phrenes이나 심장을 뜻하는 ker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이전 시절에는 인간의 마음 작용 자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침내 이전까지 단편적으로 논의되었던 인간의 마음 작용 일체에 대한 논의가 플라톤에 의해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져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성찰되기 시작했고 이후 영혼의 문제는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서양의 정신사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2) 그런데 플라톤이 마음의 작용 일체를 영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천착해 들어갔지만,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의한 것은 <국가>가 처음이다. 초기 대화편들에서도 영혼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그것의 부분들에 대한 논의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파이돈>에 와서 <국가>와 비슷한 종류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영혼과 신체의 대립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신체를 ‘신체적 욕구’로 표현하기도 한다.(66c) 플라톤이 당시 신체 자체도 욕구를 지닌다고 여겨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와 그곳의 논의를 함께 비교해보면 이 신체적 욕구는 내용상 <국가>에 나오는 영혼의 욕구 부분과 크게 차이가 없다. <국가>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혼의 세 부분이 최소한 영혼에 관한 이전 논의들의 발전적 결과들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플라톤 자신 사상적 원숙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다양한 마음 작용과 욕구의 특성들 일체를 신체가 아닌 영혼의 작용들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

3) 영혼의 세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최종적인 영혼의 상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영혼은 그러한 부분들의 유기적 복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영혼의 작용은 오늘날 뇌의 물질적 생리화학적인 작용의 종합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최소한 서로 다른 마음의 작용과 특성들이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플라톤의 발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 이곳에서 영혼의 부분들은 각기 계산하고 사유하는 기능, 화를 내는 기능, 욕구하는 기능 등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플라톤에게 영혼의 기능으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지각과 인식의 기능이다. 이러한 지각과 인식이 영혼 안에서 어떤 부분들의 어떤 상호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는 추후 살피게 되겠지만, 영혼의 이성 부분은 단순히 어떤 주어진 것에 대한 계산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사유와 인식 기능 전반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중에 가면 그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 욕구임이 밝혀진다.

5) 플라톤은 9권 580d에서 실제로 다음에 다룰 ‘기개적인 것’까지 모두를 욕구에 포함하여 욕구 또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목말라하며 마시라고 욕구를 부추기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시 그러한 욕구를 막으려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다. 그러니까 욕구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의 한 부류로서 ‘욕구적인 것’으로서 욕구가 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 안에는 각기 고유한 어떤 것을 바라고 원하는 ‘이성적인 것’으로서 욕구와 ‘기개적인 것’으로서 욕구도 함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곳에서 플라톤은 그것들 각각이 욕구인 한, 각각은 자신만의 특유한 즐거움도 하나씩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이성적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철학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욕구인 것이다. 이성은 단순히 주어진 것을 계산하고 지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는 이념이 있는 것이다.(580d-581e)

6)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인다.’는 말을 뜯어보면 영혼의 계산하는 부분과 화를 내는 부분, 욕구하는 부분이 서로 갈등도 하면서 행동의 동기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혼의 각 부분은 인간의 행위 동기의 원천이 된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인간의 행위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신체는 행위 동기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감각 자료를 제공하지만, 그것을 지각하고 행위의 동기로 촉발케 하는 것은 영혼이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영혼의 욕구 부분이나 기개 부분의 경우 분명 행위의 동기를 촉발하지만, 그곳에서 촉발된 동기들 자체가 곧바로 특정 행위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영혼의 부분들이 촉발한 동기들을 이성 부분이 모두 종합하여 자신의 욕구를 기준으로 계산한 연후에야 비로소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요컨대 영혼은 인간 행위 동기의 원천이되 그 동기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건강하면 아무런 흔들림 없이 다른 영혼의 부분에서 촉발된 동기들을 자기 주도로 통제하여 행위로써 표출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다른 동기들에 압도되어 이끌려가거나 반대로 그 동기들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7) 이점에서도 흔히들 ‘욕구적인 것’이 부도덕한 행위의 근본 동기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욕구적인 것’은 먹는 것, 마시는 것, 돈벌이 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 아니듯이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생산자 집단을 돈벌이 하는 집단으로 부르는 것 역시 폄하가 아니라 다만 생산자들이 고유하게 욕구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대부분 돈을 통해서 충족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581a 참고) 이렇듯 ‘욕구적인 것’은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맹목적으로 직진하듯 제 욕구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것은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할 경우 나라를 이롭게 하거나 도덕적인 행위를 생산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이성적인 것’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도구적 이성, 즉 도구적 계산능력으로 전락하여 욕구적인 것의 무분별한 표출을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더욱 악화시키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행위가 도덕과 부도덕이냐 하는 것은 ‘욕구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영혼의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8) 플라톤 철학에서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는 한, 욕구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거스르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이성을 정념이나 욕망의 노예로 파악하는 흄(D. Hume)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은 플라톤이 보기에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구조로 변질된 상태를 욕망의 자연적 상태로 착각하고 있는 단견일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플라톤 철학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다. 이렇듯 플라톤은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이성적 자아를 확립한 최초의 사상가이자 가장 강력한 주창자로 꼽힌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우주적 이성을 본질로 한 플라톤의 이성적 자아는 데카르트 이후 선한 우주의 소멸과 함께 오늘날 무도한 자본의 이성으로 전락하여 이른바 도구적 이성이 인간과 우주를 난도질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우주적 연대를 복원하는 길이 현대 사회의 뿌리 깊은 비참성을 극복하는 길이라면, 개인주의적 미시담론과 욕망론에 갇혀 플라톤을 고루하고도 순진한 이성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현대인들의 관념 속에 마치 진실인 양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간 욕망구조의 등질적 획일성을 감연히 깨부수는 것에 미래 철학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선한 우주와 인간 본성의 근원적 다양성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공동체적 연대와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위한 토대이자 동시에 플라톤 정치철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9) 플라톤에게 영혼의 세 부분의 기능은 나라의 세 부류의 역할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그 관점에서 앞의 경우는 나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 나라를 부정의하게 만드는 것은 생산자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교육과 양육에 실패한 통치자들의 잘못 때문이다.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제대로 역할을 하므로 설사 생산자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은 교정 할 수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이상 국가에서 생산자는 정치 역할을 모두 통치자에게 절제라는 믿음으로 위임했기 때문에 설사 교정 사항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돌아가며 통치를 맡는 통치자들의 몫이다. 물론 플라톤에 따르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면 이상 국가도 타락할 수 있다. 그런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이 금전욕으로 변질되어 생산자 욕구를 침해하게 되고 그에 따라 생산자들 역시 통치자와 수호자들에 대한 의심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물질적 금전욕으로 획일화되면서 배타적 이기심을 기초로 한 민주정이 출범하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정이 되면 생산자들 즉 대중들도 정치에 대한 욕구를 갖고 참여하게 되고 대중들의 뜻대로 그것이 선동에 의해서건 아니건 그들이 원하는 통치 권력이 세워지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분석한다.2

10) 현대인들은 이렇게 맞이한 민주정을 최선의 정체로 여기지만 플라톤은 민주정이 초래한 물질적 욕망의 획일화 자체가 또다시 기득권자들의 이권 증대의 토대로 이용되면서 종국적으로 민주정을 참주정체로 전락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당대 민주정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근본 이유는 민중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욕망의 획일화가 참주정의 모태인지도 모른 채 물질적 욕망을 모두의 자연적 본성인 양 부추겨 온 민주정의 선동가들과 시인들, 즉 당대 지식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물질적 욕망은 원래부터 대중들, 즉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대중들도 이제 생존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서 본래의 다원적 욕망구조는 이렇게 지배 엘리트들과 기득권자들의 타락을 기점으로 획일화된 물질적 욕망구조로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분석하고 천착한 당대의 정치적 현실상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의 분석과 성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최소한 우리는 플라톤이 평생에 걸쳐 비판하고 공격했던 핵심적인 대상이 왜 대중이 아니라 타락한 지식인들 즉 타락한 지배 엘리트들이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1) 정치적 책임은 정치적 권한을 가진 자의 몫이다. 그런데 이제 민주정체에서는 대중이 정치적 권한을 가졌으므로 책임 또한 대중이 가져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정의 타락 원인도 대중에게 돌려져야 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민주정 하에서 대중들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는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래서 플라톤도 당연히 민주정 아래 대중들의 무지를 비판한다. 그러나 대화편을 보면 아테네인들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공격은 기본적으로 대중보다는 지배 엘리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민주정에서조차 실제로 그 체제를 이끄는 주체가 대중이 아니라 선동정치가로 대표되는 지식인들과 기득권자들이라는 것을 궤 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대중들의 정치적 역할과 능력을 원천적으로 폄하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가 지니는 현실적 한계라는 점에서 플라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현실을 돌아보면 플라톤의 진단이 설득력을 얻는 징후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플라톤으로서는, 당대 아테네 민주정이 선동정치가들에게 장악되어있는 한, 정치체제 중 가장 참혹하고 폭력적인 참주정으로 전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통해 실천적인 정치인을 배출함과 동시에 당대 현실을 극복하는 장기적인 정치철학적 프로젝트로 당대의 시대적 조건에서 현실적으로 철학 교육의 수용에 가장 빠르고 유효한 소수 뛰어난 자들을 뽑아 오랜 기간 혹독한 수준의 철학 교육을 통해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담보하는 철인왕정을 꿈꾼 것이다. 그는 격동의 시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결국 고도의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갖춘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한,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평생의 사색을 담아 이상국가론을 펼치게 된 것이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오늘날의 시대 조건에서 보면 극히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의 정치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정치의 지성화와 자연의 본성으로서 욕망구조의 이질적 다양화라는 이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정치철학적 화두이자 푯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번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이 다시 태어나 오늘날 민주주의 현실에서는 철학자왕은 가히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대신 시민 대중들의 지성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대중에 대한 철학 교육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일로매진했을 것이다. 이미 기득권으로 찌들대로 찌든 지배 엘리트들을 각성시키기보다는 대중을 철학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 내지 변혁에 이르는 훨씬 더 가까운 지름길인 것이다.

 

* 441c에서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는 말은 나라에 있는 덕들 즉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개인의 영혼에서도 그에 상응하여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동일하게 있으며 그 세 부분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는 한,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 모두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에 상관없이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 또한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이상 국가 수립의 마지막 주제로서 마침내 개인의 주요 덕목들을 다루면서 정의로운 개인이 부정의한 개인보다 행복한지 다시 또 한 번 따져 묻는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5월 월례발표회 “고대 중국의 비극적 세계관과 인간의 조건 -맹자의 명론을 중심으로-” 영상(발표:오주연)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도 한철연 월례발표회는 학문후속세대 발표로 진행합니다.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오주연 회원의 발표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5월 월례발표회

주제 : 고대 중국의 비극적 세계관과 인간의 조건- 맹자의 명론을 중심으로 –
발표자 : 오주연(건국대학교)
토론자 : 박영미(한양대학교)
일시 : 2023년 6월 15일 오후 7시 – 9시
방식 : 온라인 줌(zoom)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gnZlWP-Z-N4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㊿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2) 절제, 정의(430d-434c)

 

[430d-432a]

* 나라에서 알아보아야 할 덕으로서 절제σωφροσύνη와 모든 탐구의 목적이 되는 정의δικαιοσύνη가 남아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는 우선 절제부터 살피기로 한다.(430d) 소크라테스가 절제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순서대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절제는 앞의 것들보다는 일종의 화합συμφωνίᾳ과 조화ἁρμονίᾳ를 더 닮았다. 절제는 일종의 질서κόσμος이며 어떤 즐거움ἡδονή과 욕구ἐπιθυμία들의 제어ἐγκράτεια이다.

2) 사람들은 이 제어를 ‘자신보다 강하다’κρείττω αὑτοῦ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보다 강한 내가 보다 약한 나를 이기는 것으로 (430e)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τὸ βέλτιον이 ‘더 못한 부분’τὸ χεῖρον을 제어하는 것이다.

3) ‘자기 자신보다 약하다’ἥττω ἑαυτοῦ라는 표현은 나쁜 양육과 어떤 교제ὁμιλία 때문에 ‘더 못한 다수’χείρονος πλῆθος에 의해 ‘더 나은 소수’σμικρότερον τὸ βέλτιον의 부분이 지배되는κρατηθῇ 경우이며(431a)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방탕하다고ἀκόλαστος 부른다.

4) 요컨대 새로운 나라가 절제 있고 자신보다 강한 나라라면 그 나라는 나라에서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다스리는 나라이다.(431b)

5) 나라에는 자신들에게서 다종다양한 많은 욕구들과 쾌락ἡδονή과 고통λύπη들이 발견되는 사람들로서 아이들παισί과 여자γυνή와 가내 노예οἰκέτης 그리고 자유인ὁ ἐλεύθερος들 중 다수의 평범한φαῦλος 사람들이 있다.(431b)

6) 그리고 나라에는 또 지성νόος과 올바른 믿음ὀρθῆ δόξα을 동반하고 추론λογισμός에 의해 인도되는 단순하고도ἁπλός 균형 잡힌μέτριος 욕구들을,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431c)

7) 절제 있는 나라는 전자에 해당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들이 상대적으로 더 적은 수의 더 훌륭한ἐπιεικής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들과 그들의 현명함φρόνησις에 의해서 지배되는 나라이다.(431d)

8) 이처럼 절제 있는 나라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다스리는ἄρχουσ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ἀρχομένοις 자들이 똑같은 믿음δόξα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431e)

9) 그러므로 절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양쪽에 다 있다.(431e) 용기와 지혜는 제각기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 있지만, 절제는 나라 전체에 걸쳐 있으면서 현명함을 기준으로하든 완력ἰσχυρός을 기준으로 하든, 수πλῆθος든 재물χρῆμα이든 그밖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하든,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가장 강한 자들, 그리고 중간이 되는 자들이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하므로 일종의 조화와 닮았다.(432a)

10) 그러므로 절제는 ‘생각의 일치’ὁμόνοι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옮다. 즉 나라에서든 한 사람에서든 더 못한 것과 더 나은 것 중 어느 쪽이 다스려야 하는가를 두고 양쪽이 ‘본성에 맞는 화합을’κατὰ φύσιν συμφωνίαν 이루는 것이 절제이다(43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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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3)에서 ‘자기 자신보다 강하다’는 표현은 <법률> 626e에서도 여기와 같은 방식으로 나라에 비슷하게 적용되어 있다.

* 위의 글 5)에서 여자γυνή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나중에 여성도 수호자로서 철학적 지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견해와 상충된다. 이것도 다만 그러한 주장이 워낙에 파격적인 주장인데다 아직 제기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일단 여기서는 시대 통념에 따라 언급된 것이라 하겠다.

* 위의 글 6)에서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이라는 표현이 비로소 나오는데 이전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용기가 믿음이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은 바로 이 올바른 믿음을 가리킨다.

* 위의 글 7)에서 보듯 소크라테스는 현명함(phronēsis)을 지혜(sophia)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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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제로 옮긴 그리스어 sōphrosynē는 앞서 언급한 대로 지혜, 용기, 정의와 더불어 4주덕의 하나로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에서 분별과 사려를 갖춘 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 모종의 겸양과 염치, 자기 절제를 표현할 때 사용되어온 개념이다. 그리고 그 말이 군사용어로 쓰일 때는 중갑보병들이 방패와 창을 들고 전투 대형을 이룰 때 대오를 무너트리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하지 않도록 자신의 자리를 부단히 살펴 가며 지켜내려는 정신 상태 즉 자신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치열한 자기 인식과 실천을 의미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카르미데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도 그리고 여기에서 절제를 일종의 질서이자 즐거움과 욕구에 대한 제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절제에 대한 그러한 전통적인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389d 포함) 그러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절제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에서 출발하되 절제를 그가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에 걸맞은 덕목으로 새롭게 정립하려 한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자기 제어로서 절제를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것’으로 정립한 후 그것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즉 절제 있는 나라란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듣는 순간 벌써 거북함부터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 말은 지적 수준이 낮은 다수의 대중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서 그 분수에 맞게 지적 수준이 높은 소수의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인 양 들리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분수를 알라는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절제의 의미와 매우 상통하는 말이다. 다만 그 우리말이 통상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꾸짖거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책망할 때 쓴다는 점에서 거북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사회적 계층 어느 한쪽의 덕이 아니라 나라 구성원 모두의 덕이라고 말한다. 절제 있는 나라는 일방의 순종이 아니라 쌍방의 덕에 기초한 쌍방의 일치된 생각에 따라 세워진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우리말로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은 다수 대중뿐만이 아니라 소수 통치자에게도 함께 요구되는 덕목이다. 소수 통치자들도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통치자는 나랏일 전체를 잘 아는 능력은 있으나 여느 장인들처럼 집도 구두도 못 만들고 농사도 지을 줄 몰라 스스로 먹을 것, 입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통치자는 어떤 재산도 가질 수 없어 언감생심 시민의 재산을 탐하거나 빼앗아도 안 되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도 연애나 결혼조차 참아야 하고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꾸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역시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나랏일 전체를 알기 힘들고 외적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능력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나랏일 전체를 알고 외적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고 공익에만 힘쓰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지배를 맡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통치자나 시민들은 서로 자기의 분수를 아는 한,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사실을 똑같이 알아차린다. 절제를 일치된 생각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 그리고 ‘보다 낫다’와 ‘보다 높다’라는 우열의 차이도 모든 분야 어느 일방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열의 차이들은 지적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완력과 수, 재물, 일반 기술 등 모든 기준에 적용되어 경우에 따라 나은 자와 못한 자가 다르게 나타난다. 지적 능력과 완력은 소수 지배자들이 우월하지만 수와 재물에서는 시민 대중이 통치자들보다 우월하고 일반 기술 또한 뛰어나다. 그리고 그것들은 두 집단 상호간의 시기와 침탈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부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가장 강한 자들, 그리고 중간이 되는 자들이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조화와 닮았다. 물론 소수 통치자들의 권력이 갖는 막강한 위력을 고려하면 분명 이들의 관계는 위계적이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계적 구조를 불평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그러한 위계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면 정의로운 나라에서 위계는 다만 역할의 차이일 뿐 위계가 곧 차별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역할 상 중요한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소수의 통치자이건 다수의 평범한 시민이건 자신의 천성과 욕구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면서 그 역할의 성취를 통해 모두가 각자 행복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그들 모두는 차별 없이 동등하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는 서로 자기의 분수를 알고 충분히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만한 이유를 가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 좋다는 것에 합의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치된 생각으로 순전히 역할 분담의 차원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화합이자 조화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 요컨대 자기 제어로서 절제는 개인의 경우에는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것’이고 절제 있는 나라란 ‘나라 각 계층이 자기 제어를 통해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서로 일치된 견해 즉 똑같은 믿음을 지니는 나라’이다. 그리고 절제는 나라의 계층 내지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 제어를 통해 갖게 되는 똑같은 믿음이자 일치된 견해라는 점에서 특정 계층이나 개인에게 속한 덕이 아니라 모든 계층 모든 개인에 다 걸쳐있는 덕이다.

* 이처럼 정의로운 나라는 절제라는 앎을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나라이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근대 이후의 확고한 경험과 그러한 경험에 기초해서 확립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의 나라 사람들의 절제에 대한 믿음은 가히 무지할 정도로 소박하고 낙관적이다. 오늘날 권력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다. 20세기 이래 플라톤에게 가해진 수많은 비난에 여전히 설득력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절제 있는 나라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기 그지없다. 그 나라는 나라의 구성원들을 좀 더 나은 사람과 그보다 못한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차별하고 있으며 그것을 근거로 다수 평범한 대중들에 대한 소수 엘리트의 정치적 지배와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하고 있다. 모두가 절제를 통해 같은 믿음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정작 이곳에서는 지배자의 절제 내용은 거론되지 않고 반대로 다수 평범한 피지배자들인 대중에게 이성적 능력이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배자에 대한 의존과 존경을 절제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특히 통치자와 보조자로 구성되는 수호자 계층이 기본적으로 전사라는 점에서 보면 절제 있는 나라란 소수 엘리트 통치자들과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대중의 욕구가 강제로 통제되는 일종의 군사 독재국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배타적 이기심을 가진 개인들이 상호간의 안전과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성립된 사회계약론적 국가론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얼마나 무망(無望)하고 참담한 것인지에 대한 뼈저린 체험에서 비롯된 일종의 개인들의 배타적 이기심과 의심에 기초해서 성립된 체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지배자 계급과 피지배자 계급의 화합과 조화는 사회관계 자체가 개인적 이해관계의 총화인 한, 터무니없는 공상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형이상학적인 괴물에 불과하다.

* 플라톤의 나라뿐만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부와 권력 및 교육 수준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 두 나라 모두 그러한 차이들이 어떤 형태로건 불합리한 차별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나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플라톤은 우선 문제 영역마다 뛰어난 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정치 영역에서도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랏일이 갖는 규모의 크기와 중대성 그리고 공적인 특성상 그 정치 전문가는 고도의 전문성과 더불어 높은 도덕성이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일반 시민 대중들은 원천적으로 그 전문가에 포함될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뛰어난 자질과 소양을 갖춘 자들만이 정치가 즉 정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러한 정치가를 길러내기 위한 최소 30년 이상 장기간의 교육과 훈련, 공동생활 및 사적 소유의 금지 프로그램을 제도적으로 구축하고 그 혹독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만을 통치자로 선발하여 그들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층과 신분에 따라 부와 권력 및 교육 수준의 차이가 존재하고 영역과 사람에 따라 전문적인 문제 해결 능력도 분명 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정치적 문제 영역에서는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평가할만한 전문가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신분이나 출신, 학력과 경력을 내세워 능력 있는 정치 전문가로 자처하는 자들이 더 큰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경험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는 부와 권력 및 교육 그리고 전문 영역에 상관없이 모두의 참여가 보장된 선거를 통해 다수가 선택한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들을 통해 제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각성을 통해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발전과 진보를 이룩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다수 시민 대중들의 선택으로 정치적으로 참담하고 어두운 격변의 세월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선한 권력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시행착오를 통한 확실한 개선을 믿었으나 착오가 초래한 비극의 크기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나치 정권을 선택하고 광기 어린 지지를 보내며 유태인 학살에 침묵했던 사람들도 20세기 초 서구 유럽 민주주의 시대를 살던 시민 대중들이었고, 오늘날 소수 지배 엘리트들과 자본이 생산한 가치와 담론들을 마치 자신들의 가치 및 정치의식의 반영인 양 무비판으로 환호하며 반대 세력을 무차별 혐오하는 사람들도 현대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 대중들이다. 하물며 서구 유럽은 물론 선진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에서조차 인종주의와 배타적 국수주의로 무장한 극우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류 세력으로 나날이 득세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에는 그 수정을 위한 견제와 비판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촛불 혁명을 통한 정치적 변혁이 그것도 역사상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공적인 무혈혁명의 형태로 구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그러한 수정과 비판의 체계가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나라의 2016년 촛불 혁명도 그렇고 10여 년 전 튀니지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이른바 재스민 혁명 등 수많은 시민 저항 운동들 역시 얼마 안 돼 다시 반동화 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정치·사회적 변화를 담보하는 토대로서 교육조차 소수 기득권자에 의해 견고한 신분 재생산의 기지로 장악되어 있어 전망은 더욱 어둡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자본이 지배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자 형식 민주주의로 비판하는 까닭도 그곳에 있다. 소수 지배 권력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선택한 비판과 의심의 체계로서 민주주의 또한 전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절망감 이상으로 오늘날 큰 난관에 봉착해 있다. 게다가 그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황금처럼 보일 정도로 21세기 대명천지를 사는 오늘날에조차 플라톤 시대 참주정체처럼 정치적 의사결정 자체를 독점하고 시민들의 비판을 폭력으로 억누르며 폭압적인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들도 여전히 허다하다.

* 21세기가 당면한 이 모든 한계가 원천적으로 근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잉태한 왜곡된 국제질서와 냉전적 패권주의 그리고 그 이후 세계 경제를 주도해온 서구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이념의 하나로서 플라톤의 공동체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정치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플라톤은 당대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아테네의 제국주의 및 패권주의를 시종일관 비판하면서,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으로 획일화된 인간의 욕망 구조 자체가 변화되지 않는 한, 인간적 삶의 구현과 나라 간 평화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결국 좌절하고 마는 것임을 이미 2,500년 전부터 경고해왔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오늘날 다시 태어나 철학자 왕들의 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신 이른바 집단지성을 통한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연대를 목도한다면, 당연히 그는 변혁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교육을 통한 철학자 시민 계급의 등장과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일지도 모른다. 희망은 여전히 지성에 있다. 문명적 위기에 둘러싸인 혼돈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진보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망을 끊임없이 불태우는 일군의 깨어있는 시민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날 플라톤 정치철학의 의의는 다름 아니라 인간적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대중의 반성적 자기 인식을 통한 정치의 지성화’에 있다할 것이다.

 

 

[432b-434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정의를 살핀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정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우리 자신이 어떤 식으론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발 앞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그걸 보지 않고 어디 먼 데를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이다.(432b-432e)

*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처음에 나라를 세웠을 때부터 시종일관 관철해야 하는 것으로 정했으며 정의는 ‘그것 아니면 그것의 한 형태’ἤτοι τούτου τι εἶδος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εἰς ὃ αὐτοῦ ἡ φύσις ἐπιτηδειοτάτη πεφυκυῖα εἴη에 전념해야 한다.ἐπιτηδεύειν는 것이었음을 환기케 한 후에(433a) 정의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정의는 다른 많은 사람한테서 듣기도 했고, 우리 스스로도 자주 언급했듯이 정의는 ‘자신의 것을 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τὸ τὰ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 καὶ μὴ πολυπραγμονεῖν이다.(433a)

2) 정의는 지혜, 용기, 현명함이 나라에 생겨날 수 있게 하는 힘δύναμις이자 그것들이 보전σωτηρία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433b). ‘자신의 것을 함’τὸ τὰ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의 구현이 정의라고 함도 그 때문이다.(433b)

3)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가운데 어느 것이 나라를 좋게 만드는데 가장 기여하는 것인지는 가려내기 힘들다. 요컨대 정의는 나라의 덕과 관련하여 나라의 지혜와 절제와 용기에 필적한다.ἐνάμιλλος(433d)

4) 재판δίκη할 때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하는 것’ἕκαστοι μήτ᾽ ἔχωσι τἀλλότρια μήτε τῶν αὑτῶν στέρωνται이 재판의 목표이듯이 정의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행함’ἡ τοῦ οἰκείου τε καὶ ἑαυτοῦ ἕξις τε καὶ πρᾶξις이다(433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가 나라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을 경우 생기는 위험즉 부정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를테면 목수가 구두장이가 서로 도구와 지위를 바꾸거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한다면 그 정도는 나라에 큰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장인이거나 무슨 다른 돈벌이하는 사람이 어떤 것에 고무되어 다른 계층 내지 부류에 들어가려 들거나, 전사 중에 한 사람이 자격이 안 되는데도 숙고하는 수호자 부류에 들어가려 하거나 이들이 서로의 도구와 지위를 바꾸는 경우, 또는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는 경우 이들의 변화μεταβολὴ와 참견πολυπραγμοσύνη은 나라에 파멸ὄλεθρος을 가져온다.(434a-b) 요컨대 세 부류 상호간의 참견과 변화는 나라에 가장 큰 해악βλάβη이며, 아울러 그건 최대의 악행 κακουργία 즉 부정의ἀδικία이다.(434c) 그리고 반대로 돈벌이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부류, 보조하는ἐπικουρικός 부류, 수호하는φυλακικός 부류가 자신에게 속한 일을 하는 것, 즉 이들 각각이 나라에서 자신의 것을 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나라를 정의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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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우리 스스로도 자주 언급했듯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지금까지 정의를 그렇게 정의한 부분은 없다. ‘다른 많은 사람들한테서 듣기도 했다.’는 말도 433c에서 그렇듯이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의를 언급하는 것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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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소크라테스는 탐구의 최종 목적인 정의를 살핀다. 그런데 그는 정의가 처음에 나라를 세울 때 정했던 분업의 원칙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분업의 원칙은 여기서도 다시 언급되고 있듯이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이러한 분업의 원칙의 한 형태로서 규정한 후 우리가 이미 각 논의 단계에서 수차 언급한 대로 정의를 ‘자신의 것을 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지혜, 용기, 현명함이 나라에 생겨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그것이 온전하게 유지 보전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언급한다. 즉 정의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 일을 수행하는 것이 갖는 정당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줌으로써 통치자는 통치자답게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고, 수호자는 수호자답게 용기로써 나라를 수호할 수 있게 해주며, 통치자들과 수호자들 그리고 생산자들 모두 나라의 구성원들답게 절제로써 서로 화합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정의는 공동체로서 나라 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공적 책임감이자 동시에 영혼의 보살핌을 통해 개인들 각자가 누리는 자부심의 토대인 것이다. 이처럼 정의의 덕을 바탕으로 나라의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 역할에 맞게 지혜와 용기, 절제의 덕을 구현해 가는 나라 그 나라가 곧 정의로운 나라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이렇게 정의의 덕이 지혜, 용기, 절제를 각기 그것답게 뒷받침해주고 조화롭게 묶어주는 바탕이 되는 덕임에도 그러한 덕들 모두가 하나같이 나라 전체를 관통하고 결속하여 나라를 좋게 만드는 한, 어느 것이 선한 나라에 가장 기여하는 것인지 가려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 네 가지 덕들은 모두 서로에게 필적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통치자와 수호자 그리고 생산자 모두는 계층 차원에선 개인 차원에서건 자신의 덕과 영혼의 조화를 통해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경우 역할 상의 중요도는 있을지라도 그들 모두가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정의로운 사람임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비록 장수 한 사람이 병사 한 명보다 중요하고 통치자 한 사람이 장수 한 명보다 중요하지만, 그들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최선으로 수행하는 한, 그것이 결과하는 행복과 고통의 정도는 모두 동일하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개인들의 역량 차이에서 비롯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고유 역할의 일을 수행하는 한, 계층 간 개인 간 소질과 욕망의 차이 말고 그들 서로에 대한 차별이나 선망도 없으며 모두가 다 좋은 나라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하나같이 서로 평등하다.

* 어떤 주석가들(G. Ferrari 등)은 정의가 분업의 원칙의 한 형태라는 말에 주목하여 정의가 분업의 원칙과 달리 위계의 구조를 갖는다고 주장한다.(김영균(2008), <국가, 훌륭한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 149-150쪽 참고) 정의로운 나라를 성립시키는 역할 가운데 통치자의 역할이 갖는 중대성과 강제성을 고려하면 그들과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단순히 횡적인 분업적 동반자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라는 통치자를 정점으로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력적 위계구조를 유지할 때 단순한 분업적 상호 협동체를 넘어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맥을 정확히 들여다보면 정의는 ‘그것(분업의 원칙)이거나 그것의 한 형태(ētoi toutou ti eidos)’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정의와 분업의 원칙간의 차이보다는 동일함에 방점이 있는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의로운 나라에서 통치 역할의 중요도와 강제성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역할들 간의 차이를 위계적 차이로까지 차별해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배와 피지배라는 말 자체는 위계와 강제의 의미를 분명 포함하지만, 실제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보면 그들은 똑같이 정의의 덕을 통해 위계적 명령일지라도 자발적으로 그것을 수용하여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기초한 분업의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수행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은 위계적 권위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니는 정의의 덕을 토대로 상호 동등한 합의에 따라 지배자는 지배자답게 피지배자는 피지배자답게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자발적으로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지배와 피지배는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구분되어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이론적으로는 단지 통치 구조상 지시와 수행이 지니는 역할 상의 차이일 뿐 그 과정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누리는 자부심과 행복감의 차별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차별이 난무한 오늘날 사회 현실에서 보면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은 그야말로 환상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고 어떻게든 그러한 방향으로 변혁이 이끌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가히 그 희망을 견인하는 이상적인 푯대이자 꺼지지 않는 횃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상주의는 그렇게 난관의 벽 앞에서조차 변혁의 열망을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개입을 추동하면서 그 시행착오를 통해 실천적 변혁의 방안을 끊임없이 천착하게 만든다.

* 우리는 통상 정의를 논할 때 재판정에서 정의를 떠올린다. 재판정에서 정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재판정에서 정의는 개인의 권리 및 경제적인 소유의 배타적 보장 즉 기본적으로 소유권과 관련한 정의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소유권의 방어적 보장에 더해 자신의 내적 소신과 고유한 역할에 대한 적극적 실천을 추가한다. 즉 정의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그것의 행함’인 것이다(433e) 이것은 플라톤의 정의가 소유권의 배타적 보장을 넘어 타인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위한 영혼의 자기 돌봄이자 적극적인 도덕적 실천임을 의미한다.

* 절제가 ‘자기에게 속한 것을 행함’(<카르미데스> 161b)이자 자기 제어를 통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즉 자기 자신이 해야 할 바에 대한 앎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기서 ‘각자 자신의 것을 함’,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행함’으로 언급된 정의의 뜻과 거의 유사하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절제와 정의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J. Adam 430d note 참고) 그러나 절제가 자제와 신중함 등 다소 반성적인 앎의 성격을 지니는 것에 비해 정의는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인지하고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적극적인 앎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정의는 재판 등의 영역에서 법률적 기준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지만, 절제는 다분히 내면적 반성과 염치 등에 연관되어 있다. <카르미데스>에서 소년 카르미데스가 절제를 부끄러움(aidōs)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그것을 보여준다.(160e) 게다가 정의는 절제의 덕을 포괄하지만, 절제가 정의를 포괄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 소크라테스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서로 필적한 것임을 설명하는 국면에서(433c) 지금까지 다루어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1) 지혜 : 다스리는 자들의 현명함과 수호의 능력 2) 용기 : 어떤 것들이 무서운 것이고 어떤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적법한 믿음의 보전 3) 절제 :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사이의 ‘일치된 믿음’ὁμοδοξία 4) 정의 : 각자가 자신의 것을 행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 이 중 지혜는 통치자의 덕목이고 용기는 수호자의 덕목이고 절제는 생산자는 물론 통치자, 수호자 모두가 공히 갖고 있어야 할 덕목이다. 그런데 통치자는 수호자 가운데에서 뽑힌 자들이므로 당연히 용기를 덕목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지혜, 용기, 절제의 덕목 모두를 지니는 사람이고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를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당 논의 단계에서 각 계층이 갖는 주요 덕목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실제로 각 계층은 통치자들의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일정 정도 지혜, 용기, 절제를 모두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개인의 영혼을 다룰 때 누구를 막론하고 개인들은 영혼의 세 부분 즉 ‘이성’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을 갖고 있다고 언급하면서(영혼 3분설)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441c)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의 덕들이 개인의 영혼 부분들에도 있고 수적으로도 같다는 것은 나라의 세 계층 역시 개인의 세 영혼 부분처럼 지혜, 용기, 절제를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나라를 다루면서 지혜와 용기의 덕을 통치자와 수호자에 한정한 것은 논의 단계상 철학자로서 통치자와 수호자의 전모가 아직 드러나기 이전에 그냥 나랏일 전체를 다루는 정치가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데 따른 것이다. 용기의 경우는 시민적 용기로서 절제와 더불어 시민들도 갖고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으나 지혜의 경우 역시, 나랏일 전체에 대한 지혜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 일과 관련한 전체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 시민들도 일정 정도 지니는 것이다.

* 정의와 더불어 간단하나마 부정의에 대한 언급도 주어진다. 부정의는 부나 자기들의 수나 완력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에 고무되어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저버리고 다른 부류의 역할에 참견하거나 그 부류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나라에 가장 큰 해악을 미치는 행태는 통치자들이 자연적 성향을 거슬러 다른 부류 특히 돈을 좋아하는 부류의 욕망으로 변질되어 권력을 그들 부류의 재산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정의로운 나라의 기초인 서로 다른 욕망의 조화와 공존을 무너뜨려 서로에 대한 침탈과 배타적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종국에는 나라의 구성원 모두의 욕망을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으로 변질시켜 나라의 파멸을 초래한다. 이 파멸의 종착지가 곧 참주가 지배하는 가장 부정의하고 참담한 정치체제인 참주정이다. 플라톤은 제8권에 가서 이러한 부정의한 행태가 어떤 변질의 과정을 거쳐 참주정에 이르는가를 마치 현실의 정치사를 추적하듯 아주 실감 나도록 구체적으로 분석해 들어간다. 이것은 플라톤의 국가론이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라 치열하고도 냉철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이루어진 일종의 비판적 이념임을 보여준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 정의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어서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또 맞지 않으면 다시 나라로 돌아가 살펴보고 그렇게 서로 그 둘을 번갈아 살펴보고 서로 문지르다 보면 나무들을 문질러 불씨를 얻듯이 마침내 정의가 환히 드러나 우리 자신들 사이에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434e-435a) 이렇듯 정의에 관한 종합적이고도 최종적인 정의(定義)는 우리가 이어서 다루게 될 개인의 정의에 대한 논의까지 마무리된 다음에야 가능하다.  -끝-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다음에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㊾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지혜와 용기

 

[427d-428b]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네의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한 후에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고 행복하게 될 사람은 그중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427d-e)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가 올바르게ὀρθῶς 세워진다면, 완벽하게τελέως 좋은ἀγαθός 나라이며 그에 따라 그 나라는 지혜롭고σοφός 용감하며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정의로운δικαία 나라라고 말한다.(428a) 그리고 이 가운데 무엇을 찾아내면ἐζητοῦμεν 나머지는 아직 못 찾은 것이지만 맨 먼저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알아보았을ἔγνωμεν 경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ἐγνωρίσαμεν 그것 또한 우리가 찾고 있던 것τό ζητούμενον을 알아본ἐγνώριστο 셈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정의를 찾는 방법은 바로 정의를 찾아서 알아보거나 나머지 셋을 찾아서 알아보면 된다는 것이다. 아데이만토스가 이 말들 각각에 다 동의를 표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후자의 방법을 택해 나머지 셋 가운데 하나인 지혜σοφία를 찾아 알아보기 시작한다.(42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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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과정(375a-434c)에서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 통치자의 생활 방식과 임무 등 나라의 기본 틀을 언급한 다음에 이제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과연 정의로운 나라인지 그리고 그러한 나라야말로 행복한 나라인지를 살핀다. 그것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지금까지 세워진 정의로운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자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정의를 찾는 방식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J. Annas(1981) An intriduction to Plato’s Republic. p.109-111 참고) 우선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지면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왜 그 나라가 완벽한지 따로 설명이 없다. 둘째 그 나라가 완벽하게 좋은 나라임을 근거로 바로 그 나라가 우리가 이제 찾고자 하는 정의를 포함 지혜, 용기, 절제 등 4가지 덕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의아스럽다. 왜냐하면, 이 말은 완벽하게 좋은 나라는 당연히 4가지 덕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그 전제의 근거 또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소크라테스는 그 4가지 덕 중 정의를 바로 찾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나머지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 정의를 알아본 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세 가지 덕을 아는 것만으로 정의라는 덕까지 알 수 있는 것인지 그 근거 또한 불분명하다. 정의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세 가지 덕을 찾아 알면 당연히 알 수 있다는 것일까?

*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당연하듯 동의하고 있다. 물론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수준에서 동의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아데이만토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앞서 다루어진 내용에서건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에서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첫째 의문과 관련해서는 앞서 다룬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 보인다. 앞서 이 나라는 자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기의 소질과 적성에 따라 서로 분업적으로 의존하여 자족을 실현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애초 의도대로 올바르게 나라가 잘 세워지면 애초 목적대로 모두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족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 애초 자족할 수 없는 결핍된 삶에서 상호 협동적 공동체를 통해 자족적인 삶이 가능해졌다면 소크라테스로선 그 나라를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문제와 관련해서도 앞선 설명들에 의지해서 일정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 앞서 논의에서(412d-414b) 우리는 이곳의 덕목들과 그 특징들이 일종의 총론적 서론의 형식으로 예비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살핀 바 있다.(강해45 참고) 소크라테스는 그곳에서(412d) 이미 현명(phronimos)함을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서 제시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를 갖추고 있다.(433b) 그리고 그곳에서(413b-e)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서, 강제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갖추어진 능력과 어떤 환락의 상황에서도 홀리지 않고 의젓함을 유지하는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력들이 각기 용기와 절제의 덕임을 간취하는 것은 전후 문맥상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위와 같이 앞에서 논의된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이유를 아예 다른 곳에서 끌어와 설명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플라톤이 국가의 덕으로 새로 발견한 덕목들이 아니라, 그리스 사회에서 좋은 삶의 토대로서 4가지 기본 덕목들, 이른바 4주덕(四柱德, the cardinal virtues)으로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들은 사주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별다른 이의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 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로 플라톤 대화편은 물론 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와 핀다르(Pindar)의 네 가지 덕(tessares aretai), 크세노파네스의 <회상>(III 9 1-15, IV 6 1-12), 아이스퀼로스의 <9월> 등 여러 곳을 제시한다.(J. Adam note 참고) 실제로 플라톤은 여러 대화편을 통해 비록 이곳과 그대로 일치하지 않지만 이러한 덕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프로타고라스> 329c, <라케스> 199c, <메넥세노스> 78d, <고르기아스> 507b, <파이돈> 69c, <법률> Laws 631c에서 절제, 정의, 용기 및 슬기로움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데 앞서 인용했듯이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이다. 다만 경건(hosioēs)은 포함되지 않거나 정의와 같은 것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미 사주덕이 대화자들 모두에게 따로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친숙한 덕목들이었음을 보여준다.(J. Adam. note 참고) 다시 말해 그들 모두에게는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한다면 그 사주덕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덕목들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이곳에서 사주덕과 관련하여 일단 전통적인 관념에서 출발하되 이제 새롭게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기존의 관념과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사주덕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셋째 의문에 대한 이해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혜, 용기, 절제의 의미를 찾아 안다고 해서 아직 살피지도 않은 정의까지 그 내용적 의미를 찾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과 하나가 포함된 4개의 과일 중 3개의 다른 과일을 찾는 것으로 사과를 찾는 단순 귀류법과도 거리가 있다. 찾는 것은 정의의 정재(Dasein)가 아니라 상재(Sosein) 즉 내포이다. 이렇듯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판단해도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했을까? 여러 주석가들이 이에 대한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J. Adam note 참고) 사실 그리 신통치는 않다. 굳이 앞서 논의된 내용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아래와 같은 설명 정도이다.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미 제2권(370b – 374c)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은 각자 나라와 관련된 일 중에서 자기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고 그 천성과 소질에 따라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를 임명한 바 있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란 다름 아니라 구성원들 모두 자신의 고유한 덕을 기초로 각기 자신의 역할을 하는 나라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의 고유한 덕들로부터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라는 정의의 덕을 추론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433a에서 정의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앞서 제2권의 내용을 정의를 규정하는 바탕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다만 문제는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중대한 덕목임에도 그것이 정의로 규정되는 것은 이후의 논의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에 바로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논의에 대한 혜안을 가졌으면 모를까 여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428c-429a]

* 소크라테스는 우선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κατάδηλος 것은 지혜이고 그 지혜는 이상한ἄτοπον 뭔가가 있다고 말한다. 아데이만토스가 그 이유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한다. 먼저 그는 이 나라는 진정으로τῷ ὄντι 지혜로운 나라인데 그 까닭은 숙고εὔβουλος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숙고를 잘하는 것은 무지ἀμαθίᾳ 때문이 아니라 앎 때문이므로 숙고를 잘함은 일종의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앎은 목수τέκτων나 농부들이 아는 앎들이 아니다. 그런 앎은 목공이나 농사에 대한 최선의 상태를 숙고하는 것이지만 그 숙고로 인해 나라가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에 능하다고만 불릴 뿐이다.(428c) 요컨대 지혜는 일종의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ὁμιλοῖ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이다. 그리고 그 앎은 수호하는 앎이고 완벽한τέλειος 수호자로서 통치자들에게 있는 앎이다. 그리고 통치자들의 그러한 앎을 통해 나라는 숙고를 잘하는 나라, 진정으로 지혜로운 나라라고 불린다.(428d) 그리고 그러한 앎을 가지고 있는 수호자들은 자연적 성향에 따라 수가 가장 작은σμικροτάτῳ 집단ἔθνος이자 가장 작은 부분μέρος이고 그 집단에 있는 앎 때문에 전체가 지혜롭다.(429a) 요컨대 이 앎은 앎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지혜라 불러 마땅한 앎이고 본성상κατά φύσιν 가장 수가 적은 통치자들이 그 앎에 참여하기에 적합한 이 부류γένος들이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넷 중에서 하나를 찾아냈고 그것이 나라의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찾아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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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지혜(sophia)를 ‘숙고를 잘하는 앎’으로 규정한다. ‘숙고’로 옮긴 그리스어 εὔβουλος(euboulos)는 ‘take counsel, deliberate, determine or resolve after deliberation’의 뜻을 가진 동사 βουλεύω(bouleuō)에서 나온 말로서 ‘뭔가를 결정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 나랏일 전체에 관한 최고 의결기구인 평의회(boulē βουλή)도 이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목공이나 농부도 숙고한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자처럼 나라 전체에 관한 것을 숙고하지 않고 자기 일에 한정해 숙고하므로 지혜라고 하지 않는다. 지혜는 ‘숙고를 잘하는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인 것이다. 요컨대 이곳에서 지혜는 나랏일 전체를 숙고하는 정치적 통치 능력으로서 총체적 앎이다. 그리고 유념할 것은 이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인 까닭은 이 나라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로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지혜로운 자가 통치하지 않는 한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에게 있어 숙고를 통한 총체적인 앎으로서 지혜는 여기에서처럼 나랏일 즉 통치 영역에만 한정된 앎이 아니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지혜는 원천적으로 총체적 앎의 극치로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앎에 이르기까지 사물과 사태에 관한 총체적인 앎 그 자체를 의미한다.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으로 불리는 것도 이미 철학적 앎의 기저에 총체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곳에서는 논의 계획과 순서에서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를 논하기 이전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일단 지혜를 나랏일과 관련한 통치자의 총체적인 숙고 능력, 즉 통치자만 유일하게 갖는 덕으로 한정하여 말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에서 통치자는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아니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제6권과 7권에서 다룬다.

* 그런데 나라에 필요한 부분적 역할을 나름의 수준에서 숙고하여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을 수 있어도 나라라는 공동체 전체의 선을 숙고하고 그에 필요한 역할과 기능을 총체적으로 숙고하는 앎으로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나라 안에서 소수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가장 작은 집단(ethnos), 부분(meros), 부류(genos)라고 부른다. 물론 이들의 수를 정확히 계산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지난 강해(강해 46)에서도 살폈듯이 아무리 수호자까지 포함하여 크게 잡아도 1.5%에서 3% 정도로 추정될 만큼 극히 소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혜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말(428c)은 이렇듯 소수의 지혜 있는 자가 나머지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 누누이 살폈듯이 통치자들은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소수의 특권 계급과 전혀 거리가 멀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여느 특권 계급처럼 사유 재산은커녕 가족도 꾸리지 못하고 통치권력 또한 여럿이 돌아가며 수행하며 기간 또한 한시적이다. 그에 비해 나머지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있고 결혼으로 가족도 꾸릴 수 있고 평생을 자기 일에 종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통치자 혼자 전제 권력을 종신토록 휘두르고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도 가족도 가질 수 없는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권력자들은 시민들과 달리 어떠한 재산도 주택도 가질 수 없으며, 일정한 지역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고된 훈련을 수행해야 하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자기 가족으로 여기면서, 오직 시민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서로 돌아가며 한시적으로 나랏일을 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을 특권층이라고 선망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의 대화자들마저도 이미 그런 사람들이 어찌 행복할 수 있냐고 반문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 권력자들의 횡포와 부정부패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그들 권력자에게 선망이 아닌 연민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나라에서는 권력자들이 그렇게 갇혀 지내면서 아예 재산조차 가질 수가 없네!’라고.

*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설명하면서 숙고의 대상에 이 나라와 이 나라 시민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현대의 정치적 현실에 적용할 때 일단 2000년이라는 시대적 격차가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지만, 일반적인 주제에서조차 그 어려움이 뒤따르는데 그 대표적인 영역이 곧 국제관계에 대한 정치철학적 이해 영역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관심사의 경우 비록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내전을 막는 게 근본 목표로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대책의 대부분은 국내 문제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대화편 전체에서 타국과 관련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교역 문제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현대의 대부분 국가에서 이른바 세계화와 지구화가 국민국가 차원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정치철학 영역에서도 가히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문제에 대한 접근은커녕 해결을 위해 어떠한 방책도 구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분명 플라톤 정치철학의 현대적 적용은 여러모로 근본적인 제한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구체적으로 국제문제를 다루는 부분들은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통치의 중대사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듯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보여주고 있는 국제관계의 기본 원칙만은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다.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가 국가 간 갈등과 나라 간 빈부의 차이, 그로 인한 전쟁 발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 플라톤은 이미 그에 대한 원칙적인 대답을 대화편 전체 내용을 통해 내놓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나 <법률>을 통해 서로 다른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정치철학의 근본 목표이자 원칙임을 하나같이 견지하고 있고 그에 따라 타자와의 차별과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서 물질적 욕망에로의 획일화를 극력 비판하고 있다. 특히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연설을 다루는 <메넥세노스>는 전쟁을 해야 한다면 오로지 방어 전쟁에 국한할 것을 강조하면서 타국에 대한 침략적 지배를 통해 관철된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메넥세노스>(2021) 이정호 옮김, 아카넷 참고. 이 점에서도 알렉산더의 등장은 고대 그리스의 종말을 상징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기본적으로 나라 안은 물론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반패권주의 및 반제국주의에 기초한 평화와 공존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나라에서 가난을 가장 나쁜 최대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한 나라에서건 여러 많은 나라에서건 빈부의 양극화를 없애는 것이 정치가들이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역할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국제적 현실은 어떠할까?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대부분 나라는 하나같이 무한경쟁과 노동의 유연성을 내세워 분배와 복지보다 나라 전체의 총량적 경제 성장에 매달리고 있다. 특히 강대국들의 경우,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AI, 챗 GPT 등 첨단 지식정보산업에 마치 미래의 사활이 걸린 듯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 그들은 모두 그것들이 초래할 수 있는 인간 지성의 왜곡과 노동의 소외, 환경의 파괴, 빈부의 세계적 양극화에는 눈을 감은 채, 오직 효율지상주의를 통한 패권주의적 우위를 달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그러한 문명적 위기에 대한 총체적 비판은커녕 누가 먼저 그러한 전환에 발맞추어 살아남을 것인가 각론적 해결 방안에 대해서만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각자도생하여 살아남을 것인가가 지적 성찰의 주제가 된 세상이다. 2000년 전 삶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숙고 능력으로서 플라톤의 지혜와 현실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429b-430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같은 방식으로 용기ἀνδρεῖα와 그 용기가 나라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찾아서 알아본다. 우선 용기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에 복무하는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에게 있다. 즉 나라가 비겁한 나라인지 용기 있는 나라인지는 순전히 그들에 의해 결정된다.(429b)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입법가가 교육을 통해 알려 준 그런 류의 무서운δεῖνος 것들에 대한 믿음δόξα(doxa)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할σώσει 수 있는 힘δύναμις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29c)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힘을 용기라고 부르고 그런 의미에서 용기는 일종의 보전σωτηρία이라고 말한다. 즉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λύπη이나 즐거움ἡδονή, 또는 욕구ἐπιθυμία나 공포φόβος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429d)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보전을 염색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염색공βαφεύς은 염색하고βάπτω 싶을 때면, 먼저 그 다양한 색깔의 모직 중에서 본래 흰색만을 가진 모직을 고르고, 그다음에는 최대한도로 색깔을 받아들이도록 적지 않은 공을 들여 미리 준비하고 나서, 그런 상태가 되어야 염색을 한다는 것이다.(429e) 그래야만 모직이 단단히 착색되어 세제를 쓰든 안 쓰든 세탁을 해도 광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을 뽑아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ῇ으로 교육하는 것도 염색의 예에서 보듯 그들이 우리의 설득을 가장 훌륭하게 받아들여, 적합한 자연적 성향과 양육을 갖춤으로써 무서운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다른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단단히 갖게 하여 강력한 세척력을 지닌 어떤 쾌락이나 고통과 두려움, 욕망도 그들에게서 그 믿음을 씻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용기는 무서운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올바르고 적법한 믿음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전하는 힘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른 믿음일지라도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긴 믿음을 짐승들과 노예들의 믿음에 비유하며 소크라테스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430a-b)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용기를 다만 시민적πολιτικός 용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원할 경우 나중에 다시 더 잘 살펴보겠지만 여기에서는 정의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43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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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덕으로 지혜에 이어 용기(andreia)를 찾아 살핀다. 그에 의하면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앞서(413b-e) 통치자들의 선발 조건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이곳에서 말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이나 즐거움 또는 욕구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무서운 것들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δόξα(doxa)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신앙이나 신뢰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어떤 ‘생각(a notion, true or false)’ 내지 ‘견해(opinion) 즉 넓은 의미에서 모종의 앎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앎은 고도의 철학적 인지 단계에서 획득되는 참된 앎으로서 앎(epistēme)이 아니라 다만 그보다 낮은 인지 단계, 이를테면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서건 혹은 일정 수준의 추론을 통해서건 인지자 스스로 참이라고 믿고 있는 일종의 자기 확신으로서 앎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믿음은 진정한 앎과 비교하여 어떤 경우 그에 근접하여 올바른 믿음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못된 확신 즉 거짓된 믿음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플라톤이 말하는 믿음(doxa)의 정확한 의미와 인식론적 위계는 선분의 비유(509c-513e)를 다룰 때 따로 자세히 다룬다] 그런데 이곳에서 용기와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는 믿음은 오랜 기간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비록 고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앎에는 미치지 못하나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바른 믿음’(orthē doxa)으로서 건강한 앎이자 능력인 것이다.(J. Adam note 참고)

* 소크라테스도 언급하고 있듯이 무지한 노예도 용감하고 오늘날 깡패들이나 조폭들도 싸울 때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다. 이들 모두도 그럴 수 있는 믿음 즉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주인이나 두목으로부터 생계도 보장받고 지위와 금전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모두 신분적 예속이나 조건에 기초해 있으므로 신분이 달라지거나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뒤바뀌거나 배반할 수 있는 조건부 생각이자 유동적인 믿음이다. 동물도 살기 위해 본능으로 용감하지만, 더 강한 것 앞에서는 바로 꼬리를 내리거나 도주한다. 충성스러운 개조차 먹이를 주는 주인이 바뀌면 바뀐 주인을 따른다. 그 믿음을 보전하는 힘은 일시적이고 본능적이어서 강렬한 듯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용기는 이와 달리 오랫동안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올바른 믿음이자 그 믿음 자체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보전하는 일관된 힘이자 능력으로서 덕이다. 특히 시가 교육과 신체단련 교육은 어떠한 경우도 탈색이 되지 않는 잘 염색된 모직물처럼 그러한 믿음을 자신에게 적합한 자연적 성향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다.

* 그리고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일 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나라의 수호자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로 나서지 않거나 그런 사람을 수호자로 임명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코 용기 있는 나라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수호자로 나서지 않는 그 개인 역시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앎은 곧 실천인 것이다.

* 이렇듯 용기는 단순히 용맹한 행위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의미 이전에 그 행위를 가능케 하는 굳세고 올바른 믿음 즉 내적인 앎이다. 현명한 사람은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의연하게 거짓과 탐욕을 멀리하지만, 어리석고 무지한 자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의 용기와 무지한 자의 만용을 가르는 것은 진정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즉 ‘진정한 가치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능력 곧 힘이자 덕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용기를 덕이자 믿음으로 말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용기를 힘이자 능력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 용기는 ‘올바른 믿음의 보전’이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은 올바르다는 점에서 앎에 근접해있지만 믿음인 한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epistēme)에는 못 미친다.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의 용기를 ‘시민적 용기’(politikē andreia)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중에(500d) 언급되는 시민적 덕(politikē aretē), 평민적 덕(dēmotikē aretē)도 이곳에서 언급되는 시민적 용기 수준의 덕을 가리킨다. 요컨대 시민적 용기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에는 못 미치지만(<라케스> 195a, 196e ff., <프로타고라스> 349d)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관여되어 있으므로(제6권 506a 참조) 믿음이되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훈련을 통해서 생길 수 있는 것’(<파이돈> 82a-b) 즉 오랜 기간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신념이자 확신이다. 요컨대 수호자들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올바른 믿음을 확고하게 내면화하고 있어서 어떠한 상황에도 그 믿음을 흔들리지 않고 보전한다. 그리고 이 올바른 믿음은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통해 진정한 앎으로서 상승할 수 있다. 다만 현 단계 수호자의 경우 믿음을 앎으로 상승시키는 철학적 성찰의 능력은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수호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군인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시민적 용기는 수호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앎으로서, 시민들에게는 최선의 교육 목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덕으로서 용기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시민적 용기로 불렀을 것이다. 시민들은 최선의 시민적 용기를 갖고 수호자를 따르고 견고하고 올바른 믿음을 지니는 수호자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를 지닌 통치자를 따라 나라를 지킨다. 종국적으로 지혜는 물론 용기와 절제의 덕 모두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마친 수호자 중의 수호자 즉 철학자 왕을 통해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이자 덕으로서 구현된다.

* 플라톤이 <국가>에서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청소년기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거론하고 20세에 이르면 수호자를 선발 임명하고 그 후 고도의 철학 교육과 현장 실습 단계를 거쳐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이 되는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발생론적인 단계와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지혜에 관한 논의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통치자의 덕과 앎을 논의하기는 하되 좋음의 이데아를 본 ‘철학자 왕으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단계까지는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시민적 용기로 제한하면서 여기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430c) 앞에서 언급된 교육과 양육의 목표는 나라의 덕을 다루는 현 단계로서는 ‘올바른 믿음’ 정도 수준의 앎이다. 그러나 나중에(6권-7권) 철학자로서 통치자가 다루어질 즈음에 이르면 지혜, 용기는 물론 절제, 정의 모두 통치자가 갖추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앎이자 덕임이 밝혀진다. <국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맞이하는 난관의 대부분이 ‘철학자 왕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을 다루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끝-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427d-434c) (2) 절제와 정의. 다음에 계속)


 

2023년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한철연 세션-한국현대철학분과 발표 “한국현대철학사의 몇 가지 지평들: 전통과 근대, 종교사상, 서구와 식민”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한철연 세션

 

○ 세션 주제: “한국현대철학사의 몇 가지 지평들: 전통과 근대, 종교사상, 서구와 식민”

○ 세션 주체: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현대철학분과

○ 일시 : 5월 13일(토) 15:00-18:00

○ 장소: 서울시립대 미래관 33-B111

– 전체 사회: 김정철(한국국학진흥원)

 

【제1부】

▶개회사: 박정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1발표. (15:00~15:35)

주제: 근대이행기 민(民)에 대한 이해 – 최제우와 나카에 조민 사상을 중심으로

발표자: 이지(이화여대) 토론자: 송인재(한림대 한림과학원)

▶2발표. (15:35~16:10)

주제: 동학의 연대적 공동체 의식과 근대의 길

발표자: 진보성(방송대) 토론자: 구태환(한철연)

-휴식 10분 (16:10~16:20)-

【제2부】

▶3발표. (16:20~16:55)

주제: 일제강점기 신문·잡지 속 윤리·도덕 담론 연구

발표자: 윤태양(성균관대) 토론자: 배기호(중원대)

▶4발표. (16:55~17:30)

주제: ‘한국현대철학사’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이해의 가능성: 그 시론적 검토

발표자: 박민철(건국대) 토론자: 유현상(숭실대)

【제3부】

▶종합토론 (17:30~18:00) 좌장: 김정철(한국국학진흥원)

▶폐회사: 현남숙(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C1YAKBk1lPg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㊽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3 수호자들의 임무 3(423d- 427c)

 

[423d-427c]

* 소크라테스는 앞서 말한 임무들이 쉽고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의 크고 충분한ἱκανόν 하나가 있다고 말한 후 그것이 다름 아니라 교육παιδεία과 양육τροφή임을 밝힌다. 만약 수호자들이 교육과 양육을 잘 받아 균형 잡힌μέτριος 사람들이 되면 앞서 말한 정도의 임무들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미뤄두고 있는 문제 즉 부인을 취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문제들까지도 쉽게 간파할διόψονται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423d-e)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최대한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κοινά τά φίλων’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에 동의를 표한다. 게다가 그는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일단 잘 출발하면 발전적인 순환κύκλος을 이룬다고 말한다. 즉, 유용한χρηστός 양육과 교육이 보존되면σῳζομένη 그것이 좋은 본성φύσις을 만들어 내고 자손의 출산과 관련해서도 한층 더 낫게 된다는 것이다. (424a)

* 요컨대 나라를 돌보는 자ἐπιμελητής들은 교육과 양육을 고수하여ἀνθεκτέον 어떤 경우에도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ή과 시가μουσική에 급진적인 변화νεωτερίζειν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424b) 노래ᾆσμα가 아니라 노래 방식τρόπος만 새로 고쳤다고 칭송해서도 안 된다. 시가의 형식εἶδος이나 방식τρόπος의 변화는 가장 중대한 나라의 법νόμος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불법이 쉽게 끼어들지 않도록 시가에 수호자들의 초소φυλακτήριον를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424c) 그것은 조금씩 성품ἦθος과 행실ἐπιτήδευμα에서 계약συμβόλαιον으로, 법률과 정치 체제로 이행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기τελευτῶσα 때문이다.(424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이들이 준법적인ἔννομος 놀이를 잘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시가를 통해 훌륭한 법질서εὐνομία를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경우 그들 자신의 성장은 물론 나라에서 잘못된 것도 바로잡고 이전 사람들이 망쳐놓았던 사소해 보이는 일상 예법들도 모두 찾아낸다는 것이다.(424e-425a)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것들을 법제화νομοθετεῖν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아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잡게 되면 닮은 것τό ὅμοιον은 언제나 닮은 것을 불러내어 좋은 것이 됐든 그 반대되는 것이 됐든 하나의 전적이고도τέλειος 강력한νεανικός 어떤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25c) 시장과 관련한 세칙들 이를테면 계약 폭언과 폭행과 서면고소αἰκία, 재판관들의 임명과 관련한 일들, 세금의 징수나 납부 등 시장이나 도시를 감독하거나 항구세와 관련된 일들도 굳이 법제화 할 필요가 없다.(425d) 아데이만토스가 말한 대로 아름답고 뛰어난 사람들은 법제화해야 하는 것들 대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425e) 이에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에게 신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법을 보전σωτηρία해 주는 경우 그렇다고 말해준다.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렇지 못한 경우 그들은 마치 최선의 것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평생 이런 유의 많은 법규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고쳐가며 산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그런 사람들은 병이 들었으면서도 무절제ἀκολασία한 탓에 몹쓸 생활습관δίαιτα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 거라고 말한다.(426a)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병을 더 키우면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치료약φάρμακον을 조언해 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번번이 그것으로 건강해지리라는 기대를 지니는 멋진χαρίεις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래와 같은 진실 즉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성적 쾌락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그만두기 전에는 그 어떤 처방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오히려 누구보다도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26b)

*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게 성을 내는 것은 멋진 게 아니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런 아데이만토스의 생각을 받아 주면서도 짓궂게도 한술 더 떠서 그런 일을 저지르는 나라와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과연 그들이 앞의 사람들과 같은지 그리고 과연 그들은 칭송받을 만한 사람들인지를 묻는다.(426b) 즉,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를 흔들면κινεῖν 사형에 처해질 터이니ἀποθανουμένους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πολίταις 공표하는 나라들이 있다면 그 나라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인지를 물은 후에, 그렇게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도 시민들이 즐거워하도록 보살피고θεραπεύῃ, 아첨하며 환심을 사는 것은 물론 그들의 의향을 미리 알아 만족시키는 데 능란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자 큰일에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고 힐난한다.(426c)

* 이에 대해서도 아데이만토스는 정색을 하고 그런 사람들 모두 앞서 말한 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는 자들로 어떤 식으로도 칭송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다시 힐난하는 말투로 그런 나라들을 보살필 의향과 열의를 지닌πρόθυμος 자들의 용기와 너그러움εὐχέρεια이 가상하다고 말하고 측정할 줄μετρεῖν 모르는 자가 마찬가지로 측정할 줄 모르는 자에게 키를 알려주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426d)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또다시 반대를 표명하자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은 짓들을 하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멋진 사람들χαριέστατοι이라고 다시 비아냥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휘드라의 목을 자르고 있는 꼴인지 모른 채 계약상의 사기κακούργημα 등 이러저러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매번 뭔가 끝πέρας을 볼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세세한 것까지 모두 법으로 제정하고 또 고친다는 것이다.(426e)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입법가는 세세한 규범이나 규칙 등에 골몰할πραγματεύεσθαι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것이 무용지물ἀνωφελής이며 아무것도 이루는 게 없고πλέον οὐδέν,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것 중 일부는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일부는 이전의 관행ἐπιτήδευμα들에서 저절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427a)

* 이후 소크라테스는 다만 나머지 입법사항으로서 법령νομοθέτημα들 중에서도 가장 중대하고도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으뜸가는 법령으로서 신전 건립과 제의θυσία를 비롯한 신들과 신령δαίμων들과 영웅ἥρως들 및 저승에 있는 이들 관련한 법령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에 관한 해석은 전적으로 대지의 중심에 있는 배꼽ὀμφαλός에 앉아 이런 것들에 대해 해석해 주는 조상 전래의 해석자ἐξηγητής에게 맡긴다. 이로써 말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이 일단 마무리 된다. (42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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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4a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koina ta philōn은 그리스의 속담으로 <국가>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소유와 결혼 그리고 자식들 문제까지 이 말을 적용해서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도 그 말에 찬성을 표한다. 그렇다고 아데이만토스가 여기서부터 벌써 처자 공유를 동의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차마 그것까지 공유한다는 말씀일까 긴가민가하면서 단지 그 속담에만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449c에 가서야 아데이만토스는 이 말이 처자와 자식까지 공유하는 것임을 알고 이의를 제기한다. 이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이자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까지 표현하려는 플라톤 나름의 문학적 장치이다.

* 425b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예법들’은 구체적으로 연장자 앞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적절하게 말을 삼가는 것, 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부모를 모시는 것θεραπεία, 머리와 옷과 신발을 단정히 하는 것을 비롯한 전체적인 몸가짐과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것들 등이다. 흥미롭게도 이것들 모두는 동양의 전통 예법들과도 별 차이가 없다.

* 425d ‘법제화할 것이 없다.’ : 여기 나오는 사안들 대부분은 플라톤의 <법률>에서 다시 언급된다. 계약에 대한 것은 913a 이하와 920d 이하, 폭언에 대한 것은 934e 이하, 폭행에 대한 것은 879b 이하, 서면 고소에 대한 것은 949c 이하, 재판관의 선임에 대한 것은 767a 이하와 956b 이하, 도시감독관과 시장감독관에 대한 것은 763c 이하 참고. 한편 항구세와 관련해서는 <법률>에서 수출품이나 수입품에는 세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다.(847b) <국가>에서는 이러한 세칙은 법제화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가 <법률>에 가서 법제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법률>의 국가가 <국가>의 국가와 비교하여 실천적 현실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가 나라의 본을 다루고 <법률>이 나라의 실물을 다루는 한 그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 426c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를 흔들면κινεῖν 사형에 처해질 테니ἀποθανουμένους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πολίταις 공표하는 나라들’ : ‘흔들면’으로 옮긴 κινεῖν은 의미 상 비판을 물론 체제를 변동하려는 시도까지 포함한다. 이 나라들은 426b에서 비유한 대로 시민들의 근본적인 개혁 요구와 비판을 거부하고 오히려 과도한 탄압을 일삼는 정치체제들을 가리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목도했던 당대 아테네 민주정과 30인 과두정 그리고 시칠리아의 참주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정체들 모두 반대파는 물론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다. 아테네 민주정은 실정에 대한 개혁 없이 반대파에 과도하게 예민하여 소크라테스마저 반체제로 몰아 사형에 처했고 30인 과두정도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는 사람들조차 사형에 처했다. 제1권에 등장하는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도 30인 참주들에 의해 처형 되었다.

* 426d ‘그런 나라들을 보살필θεραπεύειν 의향과 열의를 지닌 자들의 용기와 너그러움εὐχέρεια’ : 이 말은 잘못된 나라에서 어리석은 정치가들이 갖는 만용에 가까운 권력욕과 그들의 섣부르고 무모한 태도를 의미한다. ‘너그러움’의 원어 εὐχέρεια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의미한다. 좋은 의미로는 대범함의 의미도 가지지만 여기에서는 경계해야 할 일임에도 제 욕심에 못 이겨 섣불리 나서는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무모함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엄격해야 함에도 무작정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자들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 부분에서 아데이만토스와 주거니 받거니 그야말로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치자와 대중들의 잘못된 양태에 관해 물을 때마다 아데이만토스가 시종일관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음에도 마치 못 믿겠다는 듯이 힐난조로 계속 되물어 본다. 이것은 아데이만토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몰아 놓은 당대 아테네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행태들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분노를 아데이만토스를 상대로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드러내 보이려는 플라톤 나름의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를 제자나 동료가 아니라 당대 아테네 지식인이자 시민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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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호자들의 임무로서 나라의 규모와 영토 관련 업무는 물론, 적성과 소질에 따라 구성원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임무 또한 절대 쉽지 않은 임무들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임무 모두를 쉬운 임무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임무보다도 교육과 양육 관련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음이 여기서 밝혀진다.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양육을 큰 것 하나 정도가 아니라 충분한 것 하나로 표현할 정도이다.

*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375a-434c)을 크게 나누면 (I) 그 나라의 중추로서 수호자와 통치자들이 어떤 성향으로(375a-376c) 어떻게 교육되고(376c-412b) 임명되며(412b-415d) 어떤 생활방식(415d-421c)과 임무(421c-427c)가 부여되는지 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틀과 직무 등에 관한 주제가 먼저 다루어지고(375a-427c) (II) 그 후 그러한 기본 틀과 직무를 갖춘 나라가 어떻게 정의로운 나라일 수밖에 없는지 그 나라의 내적 특성과 덕목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427d-434c) 이 가운데 이 나라의 기본 틀과 직무를 다루는 부분(I)이 스테파누스 쪽 수 분량으로 총 42쪽 분량인데 흥미롭게도 이 가운데 교육이 차지하는 부분이 36쪽에 이른다. 게다가 <국가>의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6권과 7권에서도 변증술 등 보다 진전된 수준의 교육 과정이 근 40쪽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교육의 문제를 얼마나 중대한 과제로 여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플라톤 주석가들이 <국가>를 주제 구분상 정치론이라기보다는 교육론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 플라톤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이데아론을 떠올릴 것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최상의 위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이 기본적으로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철학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데아는 존재론의 위계상 최상의 가치이자 목표일 수는 있어도 정작 플라톤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그러한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인간 능력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였다. 플라톤 철학의 주제가 내용상 영혼론이자 교육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인간적 삶의 본질인 양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 비참성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우주적 본성에 의지하여 반드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우주적 본성은 교육을 통해 고양된 영혼으로 각성되면서 비로소 삶의 근원적 비참성을 극복하는 적극적 능력으로 현전한다. 사회 또한 고양된 영혼의 지배를 관철하는 정치를 통해 해체의 위기에서 벗어나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로 진보한다.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정치 체제가 일단 출발을 잘 하게 되면 교육과 양육이 보존되고 그것이 보존되면 좋은 본성을 낳고 그것은 또 자손의 출산도 낫게 만들어 선순환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의 전망과 관련하여 플라톤 자신 나름의 확신과 낙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확신과 낙관 역시 교육과 양육이 견고하게 잘 자리 잡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만큼 교육과 양육의 제도적 정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교육과 양육의 방책을 온전하게 수립하고 잘 보전하는 것은 수호자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수호자들은 그 보전의 과정에서 교육과 양육을 그르치는 것이 있다면 마치 돌다리도 두드려가듯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일상에서 시민들이 부르는 노래 방식의 변화마저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초가 되어 노래도 바뀌고 그에 따라 시가에도 변화가 생기면 시가 교육 자체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실 노래 방식의 변화가 시가 교육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는 생각 정도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노래의 변화가 시가 교육의 변화는 물론 결국에 가면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를 감시하는 초소를 세우겠다는 언급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자행된 문화 검열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과장과 기우의 수준을 넘어 가히 신경증적 반응으로까지 비추어진다. 요즘 시절로 보자면 어떤 인기 가수가 아리랑 정도의 국민가요를 나름 편곡해서 다르게 부르는 경우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꼴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음악 또는 대중문화의 변화 및 발전에 대한 플라톤의 신경증적 거부 의식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 자신의 수구적 경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비난한다.

* 그러나 시가 교육을 다룬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에서 시가가 차지하는 위상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 이러한 의구심은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시가 교육을 다루면서(376e-403c) 시가 즉 mousikē가 단순히 음악이나 특정 문화 양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뮤즈(mousa) 여신이 관장하는 제반 지적, 예술적 행위 및 성과 일반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리스인들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신화적 세계관 그리고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것임을 확인한 바 있다. 문맥에 따라 mousikē를 학예(學藝)라고 번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컨대 시가 교육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와 공동체가 추구해온 가치관과 세계관은 물론 일상의 생활 방식의 요체들을 전수하고 준법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일종의 시민 교육이자 종교 교육인 것이다. 이에 따라 시가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시민 모두에게 예외 없이 의무적으로 부여되며 이후에도 연극과 예술 공연을 비롯한 정례적인 행사들을 통해 늘 마음에 되새기고 학습해야 할 이른바 평생 교육의 과제로 주어진다. 사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노래는 시가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노래 방식은 또 노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그 노래 방식의 변화에조차 민감함은 시가 자체가 갖는 중요성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노래는 아테네 시민들의 일상 영역인 연극 공연 등을 통해 감각에 직접적이고도 빈번하게 작용하는 것인 만큼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여파가 작지 않았을 것이다. 노래가 가져다주는 이러한 여파에 대한 우려는 <법률> 700c-701d에서도 구체적으로 다시 피력된다. 노래는 이러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개인의 성품과 행실에도 영향을 미치고 법률과 정치 체제까지 뒤집어 버린다는 것이다.

* 아무려나 시가에 대해 플라톤이 왜 그토록 예민하게 여기는지 일정 부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 체제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의 면모로 비추어진다. 물론 보수주의 자체가 비난거리는 아니다. 플라톤 생각대로 가장 바람직한 정치 체제가 있다면 그것은 굳이 바꿀 필요도 없고 굳이 새로운 것을 찾을 이유도 없다. 그것이 그 자체로 늘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아무리 걱정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변화는 작건 크건 늘 일어나고 변화의 욕구가 크게 쌓이면 어떤 경우 정반대의 방향으로 급격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 만큼 반대로 우리는 플라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만약 플라톤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정의로운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하거나 또 그래서 결국 부정의한 정치 체제로 바뀌었을 경우 플라톤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여기에도 있다. 이곳에서(426c)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민들이 잘못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의 질서와 체제를 바꾸려 하는 경우 사형에 처하겠다고 포고하는 나라들을 단호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플라톤 역시 최소한,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는 경우 시민들이 그것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필연지사이자 마땅한 일이며 권력자들은 그것을 폭압적인 방식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편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황이 나온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온의 친척들에게 잘못된 권력자들에 대해 용기 있게 쓴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승 소크라테스마저 죽음에 몰아넣은 자들의 폭력성과 어리석음이 떠올랐을까? 다만 그랬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거나 아예 공염불일 게 분명하다면 조언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편지> 330d-331d 참고) 사실 <국가>는 이런 나라들에 대해 철저히 절망한 나머지 그러한 나라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구상 하에서 기획된 것이다. 플라톤은 백지상태에서 이상적이기 만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타락해버린 돼지들의 나라를 정화하는 변혁의 차원에서 나라를 세우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임무에 관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수호자들이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까지 법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세세한 관습까지 법제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425b)이다. 왜냐하면, 닮은 것은 언제나 닮은 것을 불러내므로 굳이 그에 따른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하자면, 뛰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경우 법제화 이전에 잘못될 만한 일을 쉽게 간파하여 미연에 방지할 것이기 때문에 법제화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고, 또 반대로 어리석은 자가 나라를 잘못 다스릴 경우에는 아무리 법제화를 해 봐야 자신은 물론 누구도 온갖 법 기술을 동원하여 탈법을 도모할 것이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것이다. 전자는 그야말로 입법의 궁극 목적은 법이 필요 없게 하는 것이라는 금언에 일치하는 경우라 할 것이고 후자는 아무리 법률이 세분되어도 입법자가 무도한 자인 한 또 다른 법 제정과 법 기술만 양산할 뿐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라 할 것이다. 이른바 전자의 나라는 그야말로 치자의 뛰어난 능력에 기초한 이상적인 덕치의 나라이고, 후자의 나라는 참주와 같은 치자의 폭압적 강제력에 기초한 극단적인 법치의 나라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427a) 진정한 입법가는 어떤 것을 법제화하고 어떤 것은 관행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지 잘 분별해낼 수 있으므로 세세한 규범이나 규칙 등에 골몰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치자들은 마치 온갖 것을 법으로 다 다스릴 수 있다고 믿고 온갖 세세한 것까지 다 법으로 제정하고 또 수정하는 것에 기를 쓰고 매달린다.

* 이곳에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는 어리석은 나라의 여러 사례는 제8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타락한 민주정과 참주정의 나라의 양태들과도 일치된다는 점에서 이곳 또한 그에 대한 예비적 서론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법 제정의 원칙으로서 나라의 최대선과 최대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462a)이 없이 무작정 법률에만 의지하는 어리석은 치자들의 행태들에 대한 플라톤의 힐난은 그야말로 적나라하고 단호하다. 병이 들었으면서도 무절제한 탓에 몹쓸 생활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성적 쾌락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 이들 모두는 아예 근본을 치유할 능력(덕과 원칙에 기초한 통치 능력)도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아 마치 휘드라의 목을 자르듯이 그저 끝없이 그때그때 즉물적인 대증치료를 반복하면서(법률 제정과 수정의 악순환) 자신의 병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여기서 반체제 인사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협박을 하면서도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 능란하고 그런 역할에 열의를 가진 정치가들과 그런 자들을 뛰어난 사람이자 큰일에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는 대중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이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무도한 참주들과 선동정치가들 그리고 그에 환호하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참주와 선동정치가들은 진실과 자신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는 자들이어서 대중들의 갈채에 눈이 멀어 마치 자기들 생각과 의견이 옳은 양 맹목적인 확신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홀려 갈채를 보내는 대중들 또한 진실과 자신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이들의 양태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사적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반정부 민주화 세력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른바 3S 정책(Sports, Screen, Sex 정책 : 프로 스포츠의 출범, 컬러 티브이의 확대. 통금해제, 심야 주점과 성매매, 성인 영화와 황색 잡지의 보급, 올림픽의 유치 등)을 수립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최대한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유도하였고 하물며 국민 위무책이라는 명분으로 5·18 광주 학살 희생자 1주기 즈음해 연예인을 총동원하여 국풍 81이라는 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비감하게도 어처구니없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플라톤의 말마따나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아무 통치 능력도 없는 자가 기득권자들의 부추김에 눈이 돌아 권력을 잡은 후 강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는 한없이 아첨하면서 반대파들과 약자들에 대해서는 갖은 공권력과 법적 수단을 동원해 탄압하는 작태를 우리는 지난 1년 내내 목도하고 있다.

* 그런데 이곳 정의로운 나라의 법제화 수준은 위의 대비 차원에서 언급한 극단적인 두 나라 중 순수할 정도의 덕치의 나라와 비교하여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이곳 수호자들은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때마다 법제화를 시도하고 있는 데다(380c, 383c, 403b, 409e, 410a, 417b) 나중에 가서도(484b-c) 법률 및 관행들의 수호를 아예 수호자들의 임명 조건으로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실물을 염두에 두고 본(本)으로서 그려진 최선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상 국가는 올바른 정치에 의해 정의로운 삶이 담보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인치와 법치가 균형을 이루되 가능한 한, 법제화를 최소화하는 경우라 할 것이고, 반대로 참주들과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잘못 다스려지는 참주정이나 민주정의 국가는 권력가들이나 시민이나 가릴 것 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다툼을 일삼는다는 점에서 나날이 법적 강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법률도 더욱 세분화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다른 정체의 나라 간 차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근대 이후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들을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수차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정치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 본성이나 욕망구조의 근원적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모든 정치적 구상마다 그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나 욕망구조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르고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어떤 개인도 혼자 자족(autokratia)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근본 전제로 두고 출발한다. 그러므로 자족을 이루기 위해서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서로 자기가 잘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아 서로 분업적으로 협동하고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나라의 기원이며 이러한 나라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며 자족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다. 즉 정치가의 기본 역할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협동적 공동체를 수호하고 유지 보전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어떤 사회적 역할이 특별하거나 다른 것에 우월하지 않다. 그 역할들 모두 고유한 적성과 소질에 따라 정해지고 그에 따라 추구하고 좋아하는 가치들 또한 고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타자에 대한 질투나 경쟁 없이 자기 소질에 따라 분업적인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으며, 나라의 관리 역할을 맡는 통치자 또한 본성상 물욕이 없는데다 제도적으로도 사적 소유가 아예 금지되어 있어 그들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 또한 자연스럽다. 요컨대 나라 구성원들은 서로 욕망구조가 이질적이고 다양함에 따라 상호 의존적 협동적 사회관계를 통해 자족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의 역할은 시민들 각자 자신의 다양한 소질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잘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보살핌(epimeleia)의 영역으로 규정된다.

*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는 위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뿐만이 아니라 부정의한 현실 국가들까지 모두 살피고 들여다본다. 제8권에서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가 타락할 경우 어떠한 과정을 밟는지 치밀하게 분석한다. 이상 국가는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는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구조가 변질되고 권력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치를 불신하고 마침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된다. 각자도생과 배타적 의심과 경쟁이 마치 자연의 본성에서 기원한 것인 양 당연한 일상의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치 체제의 변동과 관련한 이러한 플라톤의 분석은 역사적 현실, 특히 근대 이후 사회적 현실을 설명하는데도 상당 부분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마침내 신자유주의의 지배로 전일화된 현대 사회는 무한 경쟁 속에서 국가 간 계층 간 부익부 빈익빈을 고착 수준으로 심화시키고 있고 그에 따라 가난과 불평등, 부당한 차별을 불가피한 사회적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자는 강자대로 약자는 약자대로 무한결핍에 시달리면서 정치의 목적으로서 자족적 삶은 단지 개인의 심리적 자기만족이나 종교적 믿음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정치·사회적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이미 나라는 수없이 많은 나라와 개인들로 분열되고 그러한 개인들의 내적 영혼까지 분열된 것이다.

* 사실 플라톤도 비록 이상 국가를 가장 이상적 정체로 내세우기는 했으나 욕망이 이기적으로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다수결이 최선이며 그에 따라 그러한 상태에서는 민주정이 최선의 정치적 선택임을 인정하고 있다. 당대 아테네 민주정을 붕괴시키고 그 대신 급진적 과두정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던 30인 참주들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처럼 보였다고 플라톤이 말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구성원들의 욕망구조가 우주적 자연의 본성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바뀌기 전에는 그 어떤 종류의 제도적 변혁도 성공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길은 어디에서 주어질까? 단순히 이상 국가만을 들여다보면 그 길은 하염없이 멀고 방책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 8권에서 탁월하게 진단하고 성찰한 이상 국가의 타락 과정과 <법률>의 방책들을 함께 들여다보면 그 회복의 단서가 발견될 수 있다. 앞으로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은 정치 권력의 부패와 그로 인한 빈부의 양극화의 근원을 시종일관 교육의 부재에 따른 욕망구조의 왜곡, 즉 본성의 물질적 획일화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극복의 출발 또한 근본적으로 획일화된 욕망구조를 바꾸는 데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 또한 그러한 변혁을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플라톤이 변혁의 주체로 내세운 철학자 왕은 정치철학적으로 다만 권력과 지성의 결합에 기초한 정치의 지성화의 다른 말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기획을 우리의 변혁 열망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정치가와 시민들의 지적 각성에 기초한 교육체제의 개혁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과제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욕망구조와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을 향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중간 목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빈부의 격차 없이 모두가 자신들 고유의 욕망을 구현하면서 행복하게 공존하는 하나의 나라가 최종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 모두 각성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와 조직적인 저항 그리고 진지하고도 뜨거운 연대가 없으면 어떠한 진전도 담보할 수 없다.

*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틀을 만드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나머지 입법사항으로서 신전 건립과 제의를 비롯한 신들과 신령들, 영웅들 및 저승에 있는 이들 관련한 법령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 또한 적성과 소질에 따른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이고 수호자들이 적극적으로 챙겨야 할 고유 업무는 아니다. 이로써 말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은 일단 마무리되고 어떻게 그런 나라가 왜 정의로운 나라이자 행복한 나라인지 그 나라가 포함하고 있는 덕목들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에 대한 논의가 다음 주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㊼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㊼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 427c)

 

4권 [419b-421c]

* 소크라테스가 사유재산 금지를 비롯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한 언급을 마치자 아데이만토스가 끼어들어 누군가가 그런 생활 방식이 수호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뭐라고 변론할ἀπολογήσῃ 것인가를 묻는다. 그들은 나라가 자신의 것인데 이 나라 덕택에 누리는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처럼 땅과 집, 살림살이, 금화 은화도 소유하지 못하고 신들에게 제물도 못 드리고 손님 대접도 못해 마치 용병으로 고용된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ι μισθωτοὶ같다는 것이다.(419a)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한술 더 떠 수호자들은 끼니 정도만 제공되고 여행도 못하며 애첩ἑταίραa들에게 선물도 못 주며 돈도 제대로 못 쓴다고 말하면서 그런 고발 거리로 말하자면 그밖에도 허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τὸν αὐτὸν οἶμον πορευόμενοι 위의 의구심들과 달리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하다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ι해도 전혀 놀랄θαυμαστός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하면서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 취지가 우리 안의 어떤 한 집단ἔθνος이 특별히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나라 전체 ὅλη ἡ πόλις가 최대한 행복해지는 데 있음을 환기 시킨다.(420a-b)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정의가 가장 잘 발견될 수 있고 가장 나쁘게 세워진 나라에서는 부정의가 가장 잘 발견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가 오랫동안 탐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판정을 내릴 수 있음이 재확인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은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빚어내는 중이고 그 반대되는 나라도 이어서 살펴볼 것이라 말한다.(420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앞에서와 같은 고발 거리는 마치 생명체ζῷον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눈ὀφθαλμός을 검정으로 칠했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각 부분에 적합한 것들τὰ προσήκοντα을 배당해서 전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요컨대 그런 비난들은 수호자에게 부적합한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을 수호자들에게 부여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420c-d) 우리도 농부γεωργός들에게 금장식을 두르고 즐거움 삼아 땅을 갈게 하거나 도공κεραμεύς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며 진수성찬을 즐기면서 만들고 싶은 만큼만 도자기를 만들 줄 알지만(420d) 그러한 경우 농부는 농부가 아니고 도공은 도공이 아니듯 나라 구성원들 그 누구도 제 역할σχῆμα을 못한다.(420e)

*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구두 수선공이 아니면서 그런 체하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만, 수호자들인 체하는 사람들의 경우라면 그들은 나라 전체를 철저히 파괴한다. 나라를 잘 경영οἰκεῖν하고 행복하게 할 기회 역시 수호자들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421a)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 나라에 해를 가장 안 끼치는 진정한 수호자들φύλακας ὡς ἀληθῶς을 만들고 있음에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나라가 아닌 다른 걸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수호자들을 임명할 때는 수호자들 사이가 아니라 나라 전체에 행복이 생길지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로 하여 자신들의 일에 대해 가능한 한 최고의 장인δημιουργός들일 수 있도록 강제하고ἀναγκαστέον 설득해야πειστέον 한다.(421b) 다른 모든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라가 모두 다 함께 성장하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히면 그때 가서 각 집단이 자연적 성향 ἡ φύσις에 맞는 행복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놔두어도 될지 살펴봐야 한다.(42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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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파누스 쪽수가 419a에서 420a로 건너뛴 것은 스테파누스 플라톤 전집 원본 체제로 419쪽 b-e부분은 4권과 관련한 주석 등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본문은 다음 쪽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쪽수의 건너뜀은 권이 달라질 때마다 나타난다.

* 애첩ἑταίραa(420a) : 뷔데판 불어 역본에서는 ἑταίρα를 여행 동반자로 번역하고 주석에다 부유한 아테네인들이 여행 중에 애첩을 동반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 419a에서 ‘다른 사람들’οἱ ἄλλοι이 가리키는 대상을 이상 국가 내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권력자들로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있다.(J. Adam 등) 물론 이상국가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테이만토스가 그냥 당대 아테네 부유층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제1권에서 아테네 거류 외인이자 부유층 노인 케팔로스는 손님도 대접하고 집안에 제단도 갖추고 제물도 바칠 정도로 풍족하다.

*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τὸν αὐτὸν οἶμον πορευόμενοι(420a)에서 같은 노선이란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선 또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노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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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권은 사유재산 금지를 비롯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제5권에서도 4권 말미에 제기된 소크라테스의 과격한 제안들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다. 제4권 말미에 제기된 제안들이 남녀평등 및 처자 공유 등 훨씬 과격한 제안들임을 고려하면 제4권의 서두 역시 제5권 서두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될 의구심과 반론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의 성격을 갖는다.

* 아데이만토스의 의구심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 의구심들과 달리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하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며 나라를 세우는 취지는 어떤 한 집단이 아닌 나라 전체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의구심에 대한 변론 대신 그와 정반대의 결론부터 내놓는다. 다만 변론의 단서가 하나 있다.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 노선이 다름 아니라 애초 논의의 출발점이 그랬듯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은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과 달리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선임을 환기시킨다. 그에 따라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고찰도 이어질 것이라고 예고한다.(420c)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 가서 가장 부정의하고 불행한 나라와 개인들의 경우를 끌어들여 실제 현실에서 우리들이 부딪치는 현실적 정의와 행복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 검토하고 그것을 토대로 최종적인 판정을 내린다.

* 수호자들이 남들 보기에 가혹한 생활 여건 속에서도 왜 행복한 사람들인지 그리고 수호자들은 왜 나라를 지키는 힘든 임무들을 기꺼이 감당해야 하고 또 감당하는지는 <국가>의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면서 앞으로 보다 자세하게 논의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예비적 서론의 성격을 갖는 이 부분에서도 비유를 통해서나마 그 기본 원칙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즉 인간은 생명체로서 여러 신체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신체 기관들은 각기 고유하고도 다른 기능들을 가진다. 각기 고유하고도 다른 기능들이 있다 함은 각기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걸맞은 고유한 특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고유성과 무관한 어떤 것을 그저 남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에 획일적으로 적용할 경우 오히려 그 고유성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나라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개인들은 태어날 때 각기 서로 다른 천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나므로 사람들 모두 각기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정의롭고 좋은 나라가 되려면 구성원들 모두가 행복해야 하므로 각기 자신의 천성과 소질에 맞는 역할이 부여되어야 하고 그 역할을 보다 잘 해낼 수 있도록 나라는 그들에게 그에 걸맞은 교육과 양육을 끊임없이 베풀어야 하고 그러한 역할의 부여와 교육과 양육의 과정들이 과연 적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천성 또한 가능성이지 필연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요컨대 이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태생적인 요인과 그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욕망의 구조가 서로 상이하다. 어떤 이들은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나라 지키는 일을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뭔가를 만들기를 좋아하며 어떤 이들은 장사를 좋아한다. 사실 이러한 플라톤의 본성론은 사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태생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오늘날 획일적인 인간관이 훨씬 낯설고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적성과 소질보다는 부와 출세 욕망에 기울도록 순치되면서 오늘날 인간의 욕망은 이기적인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어 마치 그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한 시대의 사회적 변화가 초래한 획일화된 욕망을 마치 태생적인 본성인 양 고착시킨 근대인들과 다르게 아테네의 물질적 이기주의를 다만 당대의 사회적 격변이 초래한 자연적 본성의 왜곡과 타락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전복하는 사회적 변혁과 일관된 교육을 통해 인간 본래의 자연적 본성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획일적인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며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고 갈등하는 사회적 현실에 저항하며 그와 전혀 다른 우주적 자연에 걸맞은 정치 사회적 변혁 즉 태생적으로 서로 다른 욕망들의 조화와 공존이 관철되는 사회적 변혁을 꿈꾸었고 그에 따른 기본 원칙과 실천적 전략으로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어쨌거나 정의와 행복이 일치하는 나라를 보다 완전하게 뒷받침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논의 노선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런데 미리 유념해두어야 할 것은 종국에 가서 정의와 행복이 일치하는 나라와 개인이 확립되고 논증되었다고 하더라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다만 본(本, paradeigma)으로서 확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472c-d) 즉 그러한 정의로운 나라의 구현이 수호자들의 목표로 설정되어도 본이 반드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구현 능력으로서 영혼의 수준이 늘 변수로 개입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도 완벽한 수준의 교육이 담보되지 않는 한, 수호자들이 실제 현실에서 자기들의 책무를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수행하기를 힘들어하고 언제든지 그것을 거부하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플라톤이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로 하여 자신들의 일에 대해 가능한 한 최고의 장인(dēmiourgos)들일 수 있도록 강제하고 설득해야 한다.’(421c)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제와 설득은 자발성의 한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되 그 자체로는 대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섞여 있다. 교육과 훈련이 최상의 단계로 이루어져 최고의 장인이 되면 거의 자발적인 수준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늘 교육과 훈련의 방향과 반대로 될 가능성이 늘 함께 있다. 강제는 나쁘게 될 가능성에 대한 대처 방안이고 설득은 더 좋게 될 가능성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함께 공존한다. 이렇듯 플라톤에게 나라와 개인에 있어 지적 훈련은 존재론적으로 늘 가변적인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그 자체로 긴장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모두 다 함께 성장하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혀도 각 집단이 과연 자연적 성향에 맞는 행복에 참여하는지 늘 지켜보아야 한다.(421c) 이점에서도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존재론 그리고 교육론은 하나로 만난다.

 

[421c-423d]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문제 제기에 답한 후 그 문제와 형제가 되는 문제를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후 다른 장인들을 망치고 나쁘게 만드는 것들로서 부πλοῦτος와 가난πενία을 제시한다.(421d) 왜냐하면 부는 장인들로 하여 기술에 관심을 덜 기울이게 하여 게으르고 나태하게 만들고, 가난은 기술에 필요한 장비나 다른 어떤 것을 갖출 수가 없게 하여 일도 더 형편없게πονηρός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이나 그가 가르치는 다른 사람들을 더 나쁜 장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421e) 즉 가난과 부는 기술의 결과물τά ἔργα은 물론 그 자신도 더 나빠지게χείρων 만든다. 결국 수호자들 몰래 나라로 기어서 들어가지 않도록 어떻게든 지켜야 할 것들 즉 부와 가난이 찾아진 셈이다. 부는 사치τρυφή와 게으름ἀργία과 변혁νεωτερισμός을 불러일으키고 가난은 변혁은 물론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기량저하κακουργία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422a)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나라가 재물χρήματα을 갖지 않고 크고 부유한 나라를 상대로 어떻게 전쟁을 치를 수 있는지를 묻는다.(422b)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나라 하나를 상대로는 더 어렵지만, 두 나라를 상대로는 더 쉬울 것이라고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는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은 전쟁의 선수ἀθλητής로서 가장 훌륭하게 훈련된 한 명의 권투선수πύκτης가 권투를 모르는 부유하고 살찐 두 명을 이길 수 있듯이 아무리 수가 더 많다고 하더라고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한다.(422c) 게다가 설사 부자들이 권투기술에 대한 앎ἐπιστήμῃ과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 수호자들보다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전투 기술은 갖고 있지 못하므로 수호자들은 자신들보다 두세 배 많은 사람과도 쉽게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422c-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두 나라 가운데 한 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이 나라에서는 소유가 금지되어 소용이 없는 금화와 은화를 주는 조건으로 연합 전쟁을 제안할 경우 그 나라는 다부지고 날렵한 개들과 싸우기보다 개들과 한편이 되어 허약한 양떼와 싸우기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422d)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게 해서 만약 다른 나라들의 재물이 한 나라에 집결된다면 그로 인해 부유하지 않은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 되진 않을까 재차 의문을 표한다.(422d)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나라도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니 속 편한 사람이라고 힐난하고 그런 나라들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 말처럼 각기 ‘수많은 나라들’πάμπολλαι이지 ‘나라’πόλις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나라들은 어떤 경우이든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나라 즉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를 가지고 있고(423e) 이 두 나라 각각 안에도 아주 많은 나라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라들을 하나μία로 보지 말고 여럿으로 보고 대응하여 한쪽 편에 다른 편의 재물과 권력을 주거나 그 사람들 자체까지 주면 언제나 동맹군은 많이, 적은 적게 갖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식으로 절제 있게 나라가 운영될 경우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οἱ προπολεμοῦντες이 천χίλιο명만 있더라도 그 나라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하나인 나라이며(423a) 이런 나라는 그리스 사람Ἕλλην들 사이에서도 이민족βάρβαρος들 사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영토와 관련한 가장 훌륭한 기준ὅρος을 제시한다. 즉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선까지만 키워야 하며 이에 따라 수호자들에게도(423b)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작은 나라 또는 큰 나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다만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게 되게끔 수호하라고 임무πρόσταγμα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임무는 그들에게 쉬운 임무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쉽기로 말하면 앞서 말한 임무 즉 수호자들의 태생과 계층 이동과 관련한 임무(415b)가 그보다 훨씬 쉬운φαῦλος ἴσως 임무라고 말한 후 그 말의 취지가 다른 시민들도 ‘각자가 저마다 자신이 타고난 본성에 맞게 한 가지 일을 맡아야 한다.’πρὸς ὅ τις πέφυκεν, πρὸς τοῦτο ἕνα πρὸς ἓν ἕκαστον ἔργον δεῖ κομίζειν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다시 또 환기한다. 즉 시민들이 자기의 일 하나에 전념함으로써ἐπιτηδεύων 각자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온 나라가 여럿이 아니라 한 나라ἡ πόλις μία로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423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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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혁νεωτερισμός(422a)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급진적 변혁의 시도(to attempt anything new, make a violent change) 즉 혁명에 준하는 일종의 정치·사회적 변혁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부와 가난은 나라와 기술의 결과물은 물론 자기 자신도 나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 말은 부와 가난은 개인 차원에서도 영혼의 변화 그것도 변혁에 가까운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적도(適度) 이상의 부와 가난은 사람을 돌게 만든다.

*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422a)은 자유ελευθερία라는 말에 부정어 ἀν이 붙은 것으로 말 그대로 자유민답지 못함, 노예근성, 옹색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 권투의 비유(422c)는 이중적이다. 선수의 비유는 전문성과 비전문성을 대립시킨 것이고 기술의 비유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과 여러 사람의 통솔과 관련된 기술을 대립시킨 것이다.

*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οἱ προπολεμοῦντες이 천χίλιο명만 있더라도’(423a) 이 구절은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으나 이상국가에서 수호자 집단의 머릿수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적정 규모의 인구를 <법률>의 신생 국가 마그네시아의 인구( 총5040세대 즉 가족이나 노예를 포함해서 약 최소 3-4만명 정도)로 추산해도 수호자들의 수는 전체 인구에서 4%를 넘지 않는다. 참고로 당대 아테네의 인구는 25-3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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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국가>에서 수호자들의 임무를 단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수호자의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수호는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막는 것과 내부에서 생기는 내분이나 내란을 막는 것으로 나뉜다. 그런데 플라톤에게 이 두 가지 임무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단 하나 즉 나라의 분열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자의 임무 즉 내분을 막으면 자연스럽게 외부로부터의 침입도 막을 수 있다. 분열은 나라를 수호하는 데 가장 나쁜 요인이다. 이것은 적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적군을 분열시키고 동맹군을 만드는 것이 나라 수호의 최선의 전략이 된다. 요컨대 나라를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수호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그런데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것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가 다름 아닌 부와 가난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평화 시에 수호자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전술과 전략의 개발과 전투력의 증강 이전에 나라 안에서 부의 편중과 그로 인하여 생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적대적 대립을 막는 것 즉 부와 가난의 양극화를 막는 것이다.

* 수호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분열을 막는 것이고 그 분열의 근본 원인이 부와 가난이라 함은 뒤집어 말해 플라톤 역시 그의 경험과 인식 속에서 나라의 존망을 해치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이 다름 아닌 경제적 모순이라는 사실을 이미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을 통해 생산 관계의 모순을 사회 변동의 근본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생각과 일정 부분 닿아 있다. 다만 플라톤은 그 모순을 미리 해소하려는 입장이고 마르크스는 그 모순을 역사 과정의 필연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변혁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정치체제 변동과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경제적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두 사람 간에 차이가 없다. 그만큼 플라톤에게도 경제적 문제는 정치의 지상과제였다.

* 다른 나라의 재물이 한 나라에 집결하였을 경우 그 부유한 나라를 적국으로 두었을 때 대처 방안도 결국 부와 가난의 문제가 답변의 관건을 구성한다. 한 마디로 플라톤은 다른 나라의 재물을 가져다 부유해진 나라는 ‘한 나라’(mia polis)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 또는 그 이상의 나라들로 분열된 ‘수많은 나라들’(panpollai)이므로 그 나라 역시 분열책에 의해 제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절제 있게 운영되는 나라야 말로 비록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이 천명만 있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하나인 나라이다.(423a)

* 여기서 다른 나라의 재물을 갖다가 부유해진 나라는 다름 아닌 당대 제국주의 아테네를 가리킬 것이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단합하여 부유한 나라 페르시아를 물리쳤지만, 그 후 아테네 동맹이란 이름으로 다른 폴리스들의 재물을 모아 강대한 제국으로서 부를 누렸다. 그러나 아테네는 같은 그리스 민족인 스파르타와 분열하여 오랜 기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빈부의 양극화가 초래한 내분에 시달리면서 결국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다른 나라를 상대로 싸울 때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대비책은 일종의 두 나라 사이를 분열시키는 대책으로 한 나라를 금과 은으로 유인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복잡한 국제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한 나라의 안보 관련 전략치고는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나라의 안보를 담보하는 가장 큰 방책의 하나가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고 그 동맹 여부를 결정하는 큰 요소가 경제적 이익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전략의 대원칙에서는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상 국가에서 동맹을 위한 경제적 유인책으로서 금과 은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금과 은이 이상 국가에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수호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소용 가치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상 국가에서 통치자나 개인 모두 금과 은의 소유가 금지될지언정 이상 국가 또한 국유재산으로서 금과 은의 축적을 중시하는 나라 즉 국부까지 소홀히 하지는 않는 나라라 할 것이다.

* 그러함에도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들에 대한 플라톤의 시선은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일단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가 아니라 부자의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어 있고 그 두 개의 나라는 또 더 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부유하면서도 분열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기본 관점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들의 경험 속에서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를테면 오늘날 북구 유럽 등 복지 국가들은 부유하면서도 나름 안정적인 통합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이 왜 그런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플라톤 견해의 배경에는 인간 본성과 욕망구조의 변화와 관련한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입장이 자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인간 본성론은 수차 언급했지만, 태생적으로 다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상 국가의 목표는 구성원들로 하여 그 다양한 소질과 욕망에 따라 역할을 수행케 하고 그에 따른 자신만의 고유한 성취와 행복감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은 제8권에서 그러한 본래의 자연적 욕망구조가 현실 국가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타락되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그 타락의 과정을 쉽게 요약하자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이기적 물질적 욕망에 물 들은 권력자들이 권력을 부의 축적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부의 부당한 착취와 편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애초 다양한 소질과 욕망을 갖고 서로 공존하던 사람들마저 각자도생하게 되고 결국 모든 사람의 욕망이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왜곡되고 획일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욕망으로 서로 다른 가치를 성취하며 각기 고유한 행복감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하면서 권력자들에 대한 의심은 물론 이웃들까지 부의 획득을 위한 경쟁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결국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조화와 공존 대신 구성원들 모두에 대한 구성원들 모두의 경쟁적 싸움과 배타적 의심의 체제로서 민주정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민주정 하에서 이기적 경쟁과 불신 그로 인한 누명과 소송이 일상화되면서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 부익부 빈익빈이 초래되고, 그에 따른 민중들의 변혁 욕구와 선동정치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참혹한 참주정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러한 분석의 배경에는 그가 겪은 당대 아테네 제국주의의 폐해가 자리 잡고 있지만 프롬(E. Fromm)도 시사하고 있듯이 오늘날 현대 파시즘의 등장 배경과 관련해서도 탁월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의 세계사적 현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형식 민주주의가 찰떡같이 결탁하여 견고하게 똬리를 튼 이래 나라와 개인들 모두 부의 축적을 지상의 가치인 양 목매고 있고 그 결과 나라들 사이는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극단적인 수준의 빈부 양극화가 이미 고착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북구의 복지국가마저 강대국들의 위협에 둘러싸여 분배보다는 총량적 성장을 위한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고 효율 지상주의와 거대 자본이 결합한 정보 산업의 급속한 발달은 그에 비례하여 기존의 국가 간 개인 간 양극화의 골을 가히 불가해의 수준으로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부유한 나라는 있어도 분열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는 플라톤의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면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빈부 양극화 문제를 플라톤은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 다시 말해 이상 국가의 수호자들은 자신들의 핵심 임무인 부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어떤 구체적인 임무들을 수행해야 할까? 우선 소크라테스는 분열되지 않은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영토와 관련하여 매우 절제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선까지만 키워야 하고 이에 따라 수호자들에게도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작은 나라 또는 큰 나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다만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가 되도록 수호하라고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423b) 요컨대 아테네 제국이 수행했던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을 중지하고 부국강병의 책무는 나라의 방어와 시민의 안정적 삶에 충분할 정도만 목표로 삼아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나라를 어찌 나치 제국과 연관시킬 수 있을까?) 아무려나 플라톤의 이러한 제안 역시 오늘날 패권주의가 판치는 현실에서 보면 순진할 수밖에 없으나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 그렇듯이 그것이 갖는 정치철학적 함의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어 앞으로 정치적 변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추동하는 정치적 대의로 시대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다.

* 참고로 빈부 격차의 해결 방안과 관련하여 <국가>가 이러한 대원칙을 표방했다면 <법률>은 빈부의 격차를 막기 위한 이보다 훨씬 더 세부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크레테 원주민과 이주민으로 세워지는 새 나라는 기존에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 때문에 재산들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 시민들은 재산에 따라 4개 등급으로 구분되지만 최초 집과 토지는 공평하게 분배되며 재산의 경우 또한 비록 최하위 등급일지라도 최소한 가난함의 한계로 설정된 기준 이상의 기본 재산이 할당된다. 물론 이 등급은 재산의 변화에 따라 바뀌지만 아무리 부를 늘리거나 이미 최상위 등급으로 있다 해도 최하위 등급에게 부여된 기본 할당 재산의 4배를 넘게 소유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행운에 의해 그 이상의 초과분을 획득했을 경우 초과분의 절반은 세금으로 나라에 바쳐야 하고 기타 세금은 모두 공적 장부에 등록된 소유 재산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부과된다.(<법률> 744c-745a)

* 이렇듯 오늘날 우연적 행운에 의해 발생한 이익 중 일부를 중과세 제도를 통해 우연적 불운에 의해 초래된 손실에 벌충해 주는 복지 제도 또한 플라톤에서 기원한 것이다. 오늘날 정례 수익이나 연봉에서 최하 등급과 최고 등급의 차이가 10배 정도도 아니고 100배를 넘는 경우도 허다하고 상류층 5%의 재산 총액이 나머지 계층 95% 사람들의 재산 총액과 맞먹는다는 것을 만약 플라톤이 안다면 크게 충격을 받을 것이고 게다가 그러함에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기절까지도 했을 것이다.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재산으로 환산하는 반인권적 작태가 이미 일상화된 오늘날이기는 하지만 특수한 경우의 상여도 아니고 평균적인 급여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100배가 넘는다는 것은 한 인간이 평균적인 능력에서 100배 이상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그 또한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이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기득권적 권력과 자본의 억압구조 또한 무서울 정도로 견고하다.

* 나라의 규모와 영토 관련 임무보다는 비교적 쉬운 임무이지만 그래도 수호자들이 수행할 가장 중대한 임무는 앞서 말한 대로 구성원들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소질과 적성에 맞게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맡아 일하게 하여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공리주의와도 크게 다르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토대로 다다익선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소수자의 희생과 불행을 불가피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자기 욕망을 구현하고 구현한 만큼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이곳 플라톤의 말 그대로 ‘시민들이 자기 일 하나에 전념함으로써 각자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온 나라가 여럿이 아니라 한 나라로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423c-d) 지장보살이 지옥에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극락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 결코 한 사람이라도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261a17~1261b15에서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 즉 ‘나라의 하나 됨’에 주목하여 플라톤이 나라가 갖는 개별적 다수성(plēthos) 내지 다양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총화단결을 외치는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으로는 타당하지만,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욕망과 소질을 가진 구성원들의 조화와 공존을 바탕으로 하나의 나라를 구축하려는 플라톤에 대한 비판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경험적으로 드러난 개별적 사회 현상들과 제도 및 체제에 크게 주목한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해석들은 개인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을 토대로 나라 구성원 전체의 조화를 해명하려는 플라톤의 영혼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끝- (1-3-3 수호자들의 임무(423e- 427c) 계속)


 

박선 지음, 『카메라 소메티카』(갈무리, 2023) 서평 – 박소연 [철학자의 서재]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영화 이미지의 시대 – 『카메라 소메티카』 (갈무리, 2023) 서평

 

박소연(영화연구자, 수원대/성신여대 강사)

 

영화가 회화의 세계에 접속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카메라 소메티카』의 분석 대상인 영화가 회화를 참조하는 방식은 조금 특별하다. 이 책은 분명 회화, 화가, 미술관 내/외부, 관람객을 소재로 한 영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만, 회화 작품이나 미술관을 단지 소재주의적 차원에서 주목하는 데서 그치거나, 영화와 회화의 상호 매체적 관계를 관습적인 방식으로 분석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세심하게 선별한 영화는 하나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회화 작품이나 이를 구성하는 회화 담론을 매개함으로써, 회화와 영화가 공존하는 접경지대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이고 정동적인 화학작용을 감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화학작용이란 영화 속의 관람객, 그리고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 주체의 인지적 경험을 말한다. 말하자면, 『카메라 소메티카』는 미술(관)의 관람성과 영화의 관객성을 중첩시킨 영화를 인지주의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포스트 시네마 관객성이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아님을 강조한다. 뉴미디어 시대의 수용자가 신체와 감각을 통해 체험하고 전유하는 정동은 과거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사진 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적 잔여물과 일맥상통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관객의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이른바 “복제 이미지의 신체화로서 카메라 소메티카”(17)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저자의 이러한 개념은 동시대 맥락에 적용되거나 재고된, 바쟁, 벤야민, 바르트의 개념이나 논의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카메라 소메티카』의 구성을 살펴보자.

 

회화를 생동하게 하는 영화의 활인화

1장과 2장에서 다루는 <풍차의 십자가>(2011)와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은 회화가 생산하는 고정된 의미를 해체하고 확장하는 영화 매체의 활인화 사례로서 등장한다. 브뤼헐의 <갈보리 가는 길>을 활인화 한 영화 <풍차의 십자가>는 회화 속 탈중심화된 인물들을 영화적 몽타주 형식으로 소개함으로써, 폭정의 희생양이 된 플랑드르 사람들의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고, 관객이 일방적인 해석이 아닌 개인적인 해석을 가능케 만든다. 저자는 <풍차의 십자가>가 취한 형식적 시도가 회화 작품의 고정성과 폐쇄성을 해체하는 작업이며 이는 바쟁이 제기했던 “재현의 탈인본성(58)”을 구현하고, 나아가서는 완전 영화를 추구하는 사례임을 주장한다.

또 다른 활인화의 사례인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의 회화 속 여성 인물들에 셜리라는 이름과 일관된 정서를 부여하고, 회화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의 배경에 배치하여 관객을 디제시스 세계로 초대한다. 이 같은 방식은 셜리의 내적 정서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연동시키고, 개인과 역사의 교직 속에서 호퍼 그림을 지배하는 고독감을 궁극적으로 에로스적 생명력으로 재탄생시켜 관객과의 교감을 꾀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재매개를 통해 경험을 추체험하기

3장과 4장에서 다루는 <잊혀진 꿈의 동굴>(2013)과 <유메지>(1991)는 각각 동굴 벽화를 남긴 구석기 인류와 화가 유메지의 경험을 영화의 재매개를 통해 추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저자는 유물로서 쇼베 동굴 벽화를 포착한 베르너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2013)을 분석하면서 이 영화가 기존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동굴벽화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 재현 방식의 인지적 효과”(124)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가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재매개하는 방식은 동굴을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구석기 인류와 현대 인류의 유사성을 인지하게 하고, 나아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인 숭고까지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때, 관객은 영화가 재매개하는 벽화동굴 방문자의 이중 숭고 체험을 통해 쇼베 동굴 벽화를 수용하게 된다.

<유메지>(1991)는 화가 유메지가 자신의 창작활동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모습을 줄곧 담는다는 점에서 화가의 전기를 담는 관습적인 화가영화와 구별된다. 더욱 특기할 점은 스즈키 세이준은 유메지가 겪는 창작 불능의 고통을 “현재와 과거, 현실과 몽상, 회화와 영화의 이종적 이미지를 공존”(167)시킴으로써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간극의 공존 속에서 관객은 분산적으로 유메지의 상태를 지각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이 봉건 이데올로기와 서구 지향적 모방 의식 사이(166)”에서 방향성을 잃고 창작 불능에 빠진 예술가로서 유메지가 드러나게 된다.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

5장과 6장은 미술관과 박물관의 새로운 관객성을 포착한 영화를 분석한다. <뮤지엄 아워스>는 관광지와 미술사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를 통해 지구화 시대의 근대성을 성찰하는 영화다. 특히 저자는 지구화를 근대성의 연장선으로 간주하고 벤야민이 근대성의 핵심으로 본 소요객의 이중적 정체성을 주인공 요한에게서 발견한다. 영화는 소요객이자 노동계급 도시인으로서의 요한을 통해 19세기 예술가 지식인과 구별되는, 근대성에 대한 시선과 자의식을 발견해낸다. 이는 “아우라가 대상에 귀속된 성질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간 정서”(234)로 보는 탈근대적 관점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6장은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과 영국 내셔널 갤러리를 무대로 삼은 두 편의 다큐멘터리 <프랑코포니아>와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과 예술 담론의 다층성”(249)과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281)을 드러내는 방식을 주목한다. <프랑코포니아>가 루브르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는 창작자, 권력자, 민중의 관계망을 영화적인 중첩 서사로 가시화한다면,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 속 예술작품이 독자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기보다 “현재적이고 관계적인 양상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구성”(270)되는 풍경을 관찰하고, 제도로서 미술관이 예술성과 대중성 그 사이 어딘가를 지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저자는 두 영화가 각각 미술관의 안과 밖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동시대의 관람객에 대한 해석은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대의 루브르 박물관은 예술품과 관람객의 거리감이 자아내는 아우라가 아니라 예술품과 관람객 사이 내밀한 접촉과 의식을 만나는 공간임을,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의 규율이 설명하지 못하는 관객의 “감각적이고 인지적인 교감”(275)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임을 강조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 소메티카』는 영화가 회화를 활인화하거나 재매개하는 관계 속에서 수용자와 내밀한 관계성을 추구하는 영화 매체의 이미지를 깊이있게 탐구한다. 시차와 논의의 층위가 조금씩 다르긴 하나, 저자의 시도는 전통적인 영화 양식 내에서 인지주의적 접근을 통해 분산적이고 주관적이며 정동적인 포스트-시네마의 관객성에 대한 사유를 이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이는 상대적으로 인지주의적 영화 연구가 미진한 국내의 상황으로 보건대 절대 작지 않은 성취다. 나아가, 영화 매체뿐만이 아니라 동시대 영상 매체를 향유하는 관객성을 사유하고 연구하는 데도 좋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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