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1) 영혼의 세 부분(434c-441c)
[435b-439d]
* 소크라테스는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즉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라는 특성εἶδος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로운 나라를 닮았다면 개인의 경우도 자신의 영혼 안에 이와 동일한 부류εἶδος의 것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영혼 안에도 과연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를 살피기 시작한다.(435c)
*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처음에 사소한φαῦλος 문제라고 말을 했다가 글라우콘이 ‘아름다운 것들은 어렵다’χαλεπὰ τὰ καλά라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의 말에 수긍한다.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앞서 고찰했던 것 정도만큼의 방법으로 그 문제를 다루겠다고 말한다.(435d)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이 부분의 논의는 다소 장황할 정도로 441c까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의의 전개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에 있는 것과 똑같은 특성εἶδος과 성품ἦθος이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 각 나라는 서로 다른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의 특성과 성품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우리 지역의 경우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특성이 있고(435e) 페니키아 사람들과 이집트 지역 사람들의 경우에는 재물을 사랑하는 특성이 있다.
2) 하지만 우리가 이것들 각각을 동일한 것으로 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 가지가 있어서 각기 다른 것으로 각기 다른 것을 행하는지 어려운 문제이다.(436a)
3)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ὅτι ταὐτὸν τἀναντία ποιεῖν ἢ πάσχειν κατὰ ταὐτόν γε καὶ πρὸς ταὐτὸν οὐκ ἐθελήσει ἅμα 혹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다.(436b) 동일한 것이 동일한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436c) 팽이στρόβιλος가 동일한 곳에 그 끝을 고정하고 회전할 때, 전체가 정지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운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436d)그것들은 자신 속에 수직축과 원둘레를 가지고 있어서, 수직인 측면에서는 정지해 있는 것이고 원둘레의 측면에서는 둥글게 움직이는 것이다. 동일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436e)
4)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무언가를 얻기를 갈망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끌어당기는 것과 밀쳐내는 것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서로 반대되는ἐναντίος 것들이듯이, 욕구 일반ὅλως τὰς ἐπιθυμίας과 욕구하지 않음, 원함τὸ ἐθέλειν과 원치 않음, 바람τὸ βούλεσθαι과 바라지 않음, 영혼의 갈망과 밀쳐냄, 영혼의 끌어당김과 몰아냄 등 모두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437b-c)
5) 욕구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하나는 마실 것에 대한τὴν ποτοῦ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한τὴν ἐδωδῆς 욕구이다. 목마름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마실 것에 대한 욕구가 아니다. 목말라함 그 자체 αὐτὸ τὸ διψῆν는 그것의 본래 대상인 마실 거리 자체 αὐτοῦ πώματος 외의 다른 것에 대한 욕구가 결코 아니며, 배고파함τὸ πεινῆν과 먹을거리 βρώματος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욕구 자체는 그것의 본래 대상만을 대상으로 하고αὐτή γε ἡ ἐπιθυμία ἑκάστη αὐτοῦ μόνον ἑκάστου οὗ πέφυκεν, 특정한 종류의 이러저러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는 추가된 것들이 있을 때이다.(437d-e)
6)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τὰ μὲν ποιὰ ἄττα ποιοῦ τινός ἐστιν 반면,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τὰ δ᾽ αὐτὰ ἕκαστα αὐτοῦ ἑκάστου μόνον” (438a-b)
7) 앎ἐπιστήμη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다. 어떤 앎, 즉 어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앎이 집 짓는 일에 관련되었을 때, 그것은 건축술이라고 불린다.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것 역시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다.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이다. (438c-d)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것들의 경우에,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은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과 관련된 것이고 αὐτὰ μὲν μόνα αὐτῶν μόνων ἐστίν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것들과 관련된 것τῶν δὲ ποιῶν τινων ποιὰ ἄττα.이다. 예컨대 건강한 것과 병든 것과 관련되는 경우에 그 앎도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 되어 더 이상 단순히 앎이라고 부르지 않고 특정한 종류의 어떤 대상이 추가되어 의술이라고 부른다.(438e)
8) 목마름 자체는 많거나 적은, 좋거나 나쁜, 한마디로 말해 특정한 종류의 어떤 마실 거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439a) 그러므로 목말라하는 사람의 영혼은 그가 목말라 하는 한에서, 마시는 일 말고는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만약 무엇인가가 목말라 하는 영혼을 반대 방향으로 당긴다면, 목말라 하며 짐승처럼 그것을 마시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영혼 안에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439b)
9) 그런데 사람들이 목말라하면서도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들의 영혼 안에는 마시라고 시키는 것ὁ κελεύοντος도 있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τὸ κωλῦον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막는 것은 계산λογισμός으로부터 일어나고 반면에 데려가고 끌고 가는 것들은 그가 겪고 있는 일과 질병들에 의해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으로 계산하는 것’ τὸ ᾧ λογίζεται은 영혼 안에 있는 이성적인 것λογιστικόν이라 부르고, ‘그것으로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들뜨는 것’은 일종의 채워짐과 즐거움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것ἐπιθυμητικόν이라 부른다. 이것들은 영혼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유형εἶδος이다.(439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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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사소한paulos 문제라고 했다가 글라우콘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 말에 수긍한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504a-b에도 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다시 언급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길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수준의 길이 아니라 최대한 실재에 다가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적절한’(metriōs) 길임을 밝히고 있다. 즉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사소한’으로 번역된 paulos는 ‘쉽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이 말한 ‘어렵다’chalepa라는 말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그 문제를 사소하다고 한 까닭은 현재 논의 단계에서는 아직 실재에 관한 적절한 접근 방법으로서 변증술이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기존의 논의 방식과 수준에 따라 쉽게 다루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생각을 모른 채 자신의 수준에서 그 문제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원래 그 문제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그의 말에 수긍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선택한 기존의 논의 방법은 통상 소크라테스가 ‘그것이 무엇이냐?’ti esti의 문제를 다룰 때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대중들이 갖는 일상의 특수한 사례들이나 관념들이 갖는 한계들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도 논의는 욕구의 특정한 종류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욕구 자체로 다가간다.
* 1)에서 특성eidos : eidos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서 ‘형상’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곳의 eidos를 형상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이전이고 실제로 플라톤도 지금까지 이 말을 철학적인 전문 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사전적 의미(부류, 특성, 종류, 형태)로 사용해왔다는 점에서(부류-357c, 358a, 363e, 392a, 402c, 435c. 특성-432b,d, 435d. 종류-376e, 400a, 406c, 427a. 형태-397c, 433a) 여기서도 일단 ‘특성’으로 옮긴 것이다. 플라톤은 5권 476a에 가서 비로소 이 eidos를 그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용어로서 ‘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2)에서 ‘이것들’ : 사본에 따라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이 다르거나 애매하다. 스토바이오스의 수정제안을 받아들인 아담의 텍스트를 따르는 경우 ‘이것들’은 앞 문장에서 각 지역 사람들의 특성에 따른 행위들을 가리키거나 뒤에 나오는 ‘배우고 화내고 영양 섭취 등을 하는 행위들’을 가리킨다.(J. Adam 436a note 참고)
* 3)에서 ‘어려운 문제’ : 신체의 기능들은 서로 다른 신체의 부위들이 있어 그것들이 각기 고유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기능들은 과연 영혼 전체로 그 기능들을 수행하는 것인지 영혼도 신체의 부위처럼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 그 부분별로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립의 원리’를 토대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영혼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부분들 각기 서로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다.
* 3)에서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 : 소크라테스의 이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확립한 사고의 모순율(<형이상학> 1005b19)의 선구적인 언급으로서 무모순의 원리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언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언급 자체를 모순율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명제로 표명된 진술들에 적용되는 원리이지만 여기서 ‘반대되는 것들’로 언급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면 명제라기보다는 행위나 실재(entity)를 가리키고 모순 관계는 물론 반대 관계에 있는 것들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이 원리를 모순율(principle of contradiction)과 구분하여 ‘대립의 원리’(principle of opposition)라고 부른다.
* 3)에서 ‘동일한 것에 따라’kata tauton라는 말과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pros tauton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 논란이 있다. 모순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에는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라는 표현은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 말을 ‘동일한 것에 따라’와 중복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담은 ‘동일한 것에 따라’는 대립자의 원리가 적용되는 대상의 부분들과 관련된 기준이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는 적용되는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과 관계되는 기준이라고 주장한다.(J. Adam. note 참고)
* 6)에서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반면에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은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여러 사례를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말이다. 이를테면 ‘목마름’의 경우 특정 종류의 것들은 ‘뜨거운 것에 대한 목마름’, ‘많이 목마름’ 등 특정 정도나 특정 종류의 목마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차가운 것에 대한 목마름’, ‘적게 목마름’ 등으로 추가될 수 있다. 특정 종류의 목마름이 다양한 만큼 그 목마름의 대상으로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목마름’은 모든 사람의 욕구가 하나같이 ‘이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으로 똑같다는 점에서 결단코 다양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로운 것’ 역시 ‘더 큰 이로운 것’ ‘보다 작게 이로운 것’ 등으로 정도에 따라 다르게 추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목마름의 고유한 본래 대상은 이러 저러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이 아니라 ‘마실 거리 자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요컨대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되어 있다. ‘배고파함’과 ‘먹을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욕구를 특정 종류들이 아닌 ‘그 자체’로만 규정하려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대립의 원리’를 통해 또 다른 ‘그 자체’로서 반대의 욕구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비로소 영혼 안에 그 욕구와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7)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라고 말한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 종류의 대상에 대한 앎으로서 특정 기술이다. 그렇다면 특정 앎의 대상이 아닌 앎 자체의 고유한 대상으로서 그 대상 자체는 무엇일까? 아직까지 그것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나중에 그 대상 자체는 특정한 종류의 앎들을 앎으로서 규정해 주는 총체적인 앎의 본질로서 ‘형상’으로 드러난다.
* 8)에서 드디어 앞서 언급한 ‘대립의 원리’가 ‘목마름 자체가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적용되고 그것은 영혼의 부류들과 관련하여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지는가가 드러난다. 즉 영혼의 한 부류로서 목마름이라는 욕구는 그 욕구 이외에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영혼 안에 무엇인가가 짐승처럼 끌고 가는 그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우리들 모두는 비록 목이 말라 무엇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가득해도 만약에 그것을 마셨을 때 병이 나거나 죽는다면 분명 그것을 마시기를 주저하고 거부한다. 이것은 마시라고 시키는 것, 즉 목마름이라는 욕구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 즉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이 우리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자신의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혼 안에는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란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하는 영혼의 또 다른 어떤 부류로서 이른바 ‘이성적인 것’이다. 결국, 영혼 안에는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 이외에 그것과 구분되는 ‘이성적인 것’ 이 하나의 유형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439e-441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제3의 유형으로서 ‘기개적인 것’이 영혼 안에 따로 있음을 논증하고 그 특성에 관해 논의한다.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그런데 기개θύμος와 관련되며 ‘그것으로 우리가 분노하는 것’τὸ ᾧ θυμούμεθα이 있다. 이것은 앞의 것들 중 어느 한 유형과 본성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다른 세 번째 유형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분노의 예로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의 경우를 든다. 레온티오스는 사형집행인 옆에 있는 시체들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동시에 그러는 자신을 역겨워하면서 갈등하다(439e) 욕구에 지배된 자신에 대해 분노를 터트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 분노는 욕구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이고, 때때로 욕구적인 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πολεμεῖ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440a)
2)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λοιδοροῦντά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θυμούμενον,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이기라도 하듯 그의 기개는 이성의 동맹군이 된다.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는데도 그에 반대하여 기개가 욕구들과 결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440b)
3) 자신이 부정의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로 인해 굶주림이나 추위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품위 있는γενναῖος 사람일수록 분노는 덜하다. 반대로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부아가 끓고ζεῖ 사나워져서χαλεπαίνει 그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편과 동맹을 맺고συμμαχεῖ 갖은 힘든 일을 겪어도 그런 일들을 견디면서 이겨낼 것이고, 뜻을 이루거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아니면 목동νομεύς에 의해 개κύων들이 진정되듯 자신 곁에 있는 이성λόγος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정될 때까지 고귀하게γενναῖος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개들이 양치기ποιμήν에게 순종하듯이 보조자ἐπίκουρος들이 나라의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다. (440c-d)
4) 기개적인 것θυμοειδής과 관련해서 좀 전에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욕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영혼 안에 내분στάσις이 일어났을 때, 이성적인 것을 편들어 무기를 든다. 이것은 이성적인 것과도 다르고 욕구적인 것인 것과도 다른 제 삼의 것τρίτος이다. 나라가 돈벌이하는 집단χρηματιστικόν, 보조하는 집단 ἐπικουρητικόν, 숙고하는 집단βουλευτικόν, 이렇게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듯이 영혼에서도 이 기개적인 것이 나쁜 양육으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 한, 본래 이성적인 것을 보조하는 것으로 따로 있다. 이것은 욕구적인 것과도 이성 부분과도 다른 어떤 것이다. 그건 아이들παίδιον과 짐승들θηρίον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날 때부터 화θύμος로 가득 차 있지만, 계산 능력λογισμός은 제가 보기에 어떤 아이들은 결코 갖추지 못하고 대개의 아이들은 늦게서야 어느 땐가 갖추게 된다. 호메로스(<오뒷세이아> 20.17)도 서로 다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꾸짖는 상황, 즉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에 대해 계산을 한 부분이 비이성적으로 분노하는 부분을 꾸짖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440e-441b)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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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분노하는 것’ : 영혼의 부분에는 욕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이외에 제삼의 유형으로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 또한 대립의 원리에 의해 발견된다. 즉 기개적인 것은 레온티오스의 경우가 보여주듯 욕구적인 것의 발생을 막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욕구적인 것들에 분노하여 그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점에서 욕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욕구적인 것은 반성이나 주저함이 없이 그대로 그 욕구를 표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이성적이지만 기개적인 것은 비록 계산능력은 없어도 그러한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들과 싸우고 분노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의 동맹군이 된다.
* 레온티오스의 경우 그가 시체에서 성기를 보고 싶은 자신의 욕구에 분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레온티오스의 경우이건 호메로스가 묘사하고 있는 경우이건 그것들 모두는 기개적인 것이 인간의 본원적 자존심 내지 나름의 명예 의식과 깊숙이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들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지적 수준이나 성격적 특성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름의 자존심과 명예 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손상될 경우 예외 없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만큼 그것은 개인의 행위 동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2)에서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다’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인 것, 즉 영혼의 이성 부분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기개와 욕구는 이성의 통제를 받아들인다. 물론 기개와 욕구에 이성이 끌려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조차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함에도 기개와 욕구가 그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성 자체가 교육과 양육의 잘못으로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결코 기개가 욕구에 결탁하거나 욕구의 힘에 이성이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일시적인 내분, 즉 심리적 갈등은 있어도 이내 조절 통제된다.
* 3)에서 ‘분노는 덜하다’ ; 사람들은 때때로 부정의한 짓을 하다가 고통을 치른다. 그러나 품위 있는 사람일수록 그 고통을 정당하다 여겨 덜 분노한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누구나 하나같이 분노를 터트리며 정의로운 편과 동맹을 이루어 어떠한 고통도 잘 견디며 이겨낸다.
* 4)에서 ‘그건 아이들과 짐승들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 아이들과 짐승들의 경우에도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들과 동물들의 경우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빼앗기는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내거나 크게 울부짖는다.
*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은 이곳뿐만 아니라 581a-b에서 추가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그곳에서 기개적인 부분은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으로 언급된다. 이와 관련한 기개적인 것에 대한 추가적인 해설은 그 부분을 다룰 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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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서 살핀 영혼의 세 부분과 관련하여 종합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1) 인간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었다. 호메로스도 이미 노오스(noos)와 튀모스(thmos)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조차 그 마음의 작용을 이른바 영혼psychē으로 부르진 않았다. 호메로스 시절에 psychē라는 말은 다만 사람이 죽었을 때 몸에서 빠져나가 저승에서 그림자 비슷한 것으로 머무는 것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일리아스> 22.362) 물론 그때도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프쉬케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노오스, 튀모스, 메노스(menos) 등이 사용되었고 마음의 작용을 담당하는 주체도 횡경막이나 허파를 의미하는 phrenes이나 심장을 뜻하는 ker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이전 시절에는 인간의 마음 작용 자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침내 이전까지 단편적으로 논의되었던 인간의 마음 작용 일체에 대한 논의가 플라톤에 의해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져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성찰되기 시작했고 이후 영혼의 문제는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서양의 정신사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2) 그런데 플라톤이 마음의 작용 일체를 영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천착해 들어갔지만,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의한 것은 <국가>가 처음이다. 초기 대화편들에서도 영혼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그것의 부분들에 대한 논의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파이돈>에 와서 <국가>와 비슷한 종류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영혼과 신체의 대립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신체를 ‘신체적 욕구’로 표현하기도 한다.(66c) 플라톤이 당시 신체 자체도 욕구를 지닌다고 여겨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와 그곳의 논의를 함께 비교해보면 이 신체적 욕구는 내용상 <국가>에 나오는 영혼의 욕구 부분과 크게 차이가 없다. <국가>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혼의 세 부분이 최소한 영혼에 관한 이전 논의들의 발전적 결과들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플라톤 자신 사상적 원숙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다양한 마음 작용과 욕구의 특성들 일체를 신체가 아닌 영혼의 작용들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영혼의 세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최종적인 영혼의 상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영혼은 그러한 부분들의 유기적 복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영혼의 작용은 오늘날 뇌의 물질적 생리화학적인 작용의 종합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최소한 서로 다른 마음의 작용과 특성들이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플라톤의 발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 이곳에서 영혼의 부분들은 각기 계산하고 사유하는 기능, 화를 내는 기능, 욕구하는 기능 등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플라톤에게 영혼의 기능으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지각과 인식의 기능이다. 이러한 지각과 인식이 영혼 안에서 어떤 부분들의 어떤 상호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는 추후 살피게 되겠지만, 영혼의 이성 부분은 단순히 어떤 주어진 것에 대한 계산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사유와 인식 기능 전반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중에 가면 그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 욕구임이 밝혀진다.
5) 플라톤은 9권 580d에서 실제로 다음에 다룰 ‘기개적인 것’까지 모두를 욕구에 포함하여 욕구 또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목말라하며 마시라고 욕구를 부추기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시 그러한 욕구를 막으려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다. 그러니까 욕구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의 한 부류로서 ‘욕구적인 것’으로서 욕구가 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 안에는 각기 고유한 어떤 것을 바라고 원하는 ‘이성적인 것’으로서 욕구와 ‘기개적인 것’으로서 욕구도 함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곳에서 플라톤은 그것들 각각이 욕구인 한, 각각은 자신만의 특유한 즐거움도 하나씩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이성적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철학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욕구인 것이다. 이성은 단순히 주어진 것을 계산하고 지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는 이념이 있는 것이다.(580d-581e)
6)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인다.’는 말을 뜯어보면 영혼의 계산하는 부분과 화를 내는 부분, 욕구하는 부분이 서로 갈등도 하면서 행동의 동기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혼의 각 부분은 인간의 행위 동기의 원천이 된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인간의 행위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신체는 행위 동기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감각 자료를 제공하지만, 그것을 지각하고 행위의 동기로 촉발케 하는 것은 영혼이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영혼의 욕구 부분이나 기개 부분의 경우 분명 행위의 동기를 촉발하지만, 그곳에서 촉발된 동기들 자체가 곧바로 특정 행위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영혼의 부분들이 촉발한 동기들을 이성 부분이 모두 종합하여 자신의 욕구를 기준으로 계산한 연후에야 비로소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요컨대 영혼은 인간 행위 동기의 원천이되 그 동기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건강하면 아무런 흔들림 없이 다른 영혼의 부분에서 촉발된 동기들을 자기 주도로 통제하여 행위로써 표출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다른 동기들에 압도되어 이끌려가거나 반대로 그 동기들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7) 이점에서도 흔히들 ‘욕구적인 것’이 부도덕한 행위의 근본 동기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욕구적인 것’은 먹는 것, 마시는 것, 돈벌이 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 아니듯이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생산자 집단을 돈벌이 하는 집단으로 부르는 것 역시 폄하가 아니라 다만 생산자들이 고유하게 욕구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대부분 돈을 통해서 충족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581a 참고) 이렇듯 ‘욕구적인 것’은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맹목적으로 직진하듯 제 욕구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것은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할 경우 나라를 이롭게 하거나 도덕적인 행위를 생산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이성적인 것’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도구적 이성, 즉 도구적 계산능력으로 전락하여 욕구적인 것의 무분별한 표출을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더욱 악화시키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행위가 도덕과 부도덕이냐 하는 것은 ‘욕구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영혼의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8) 플라톤 철학에서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는 한, 욕구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거스르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이성을 정념이나 욕망의 노예로 파악하는 흄(D. Hume)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은 플라톤이 보기에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구조로 변질된 상태를 욕망의 자연적 상태로 착각하고 있는 단견일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플라톤 철학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다. 이렇듯 플라톤은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이성적 자아를 확립한 최초의 사상가이자 가장 강력한 주창자로 꼽힌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우주적 이성을 본질로 한 플라톤의 이성적 자아는 데카르트 이후 선한 우주의 소멸과 함께 오늘날 무도한 자본의 이성으로 전락하여 이른바 도구적 이성이 인간과 우주를 난도질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우주적 연대를 복원하는 길이 현대 사회의 뿌리 깊은 비참성을 극복하는 길이라면, 개인주의적 미시담론과 욕망론에 갇혀 플라톤을 고루하고도 순진한 이성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현대인들의 관념 속에 마치 진실인 양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간 욕망구조의 등질적 획일성을 감연히 깨부수는 것에 미래 철학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선한 우주와 인간 본성의 근원적 다양성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공동체적 연대와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위한 토대이자 동시에 플라톤 정치철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9) 플라톤에게 영혼의 세 부분의 기능은 나라의 세 부류의 역할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그 관점에서 앞의 경우는 나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 나라를 부정의하게 만드는 것은 생산자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교육과 양육에 실패한 통치자들의 잘못 때문이다.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제대로 역할을 하므로 설사 생산자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은 교정 할 수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이상 국가에서 생산자는 정치 역할을 모두 통치자에게 절제라는 믿음으로 위임했기 때문에 설사 교정 사항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돌아가며 통치를 맡는 통치자들의 몫이다. 물론 플라톤에 따르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면 이상 국가도 타락할 수 있다. 그런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이 금전욕으로 변질되어 생산자 욕구를 침해하게 되고 그에 따라 생산자들 역시 통치자와 수호자들에 대한 의심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물질적 금전욕으로 획일화되면서 배타적 이기심을 기초로 한 민주정이 출범하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정이 되면 생산자들 즉 대중들도 정치에 대한 욕구를 갖고 참여하게 되고 대중들의 뜻대로 그것이 선동에 의해서건 아니건 그들이 원하는 통치 권력이 세워지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분석한다.
10) 현대인들은 이렇게 맞이한 민주정을 최선의 정체로 여기지만 플라톤은 민주정이 초래한 물질적 욕망의 획일화 자체가 또다시 기득권자들의 이권 증대의 토대로 이용되면서 종국적으로 민주정을 참주정체로 전락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당대 민주정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근본 이유는 민중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욕망의 획일화가 참주정의 모태인지도 모른 채 물질적 욕망을 모두의 자연적 본성인 양 부추겨 온 민주정의 선동가들과 시인들, 즉 당대 지식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물질적 욕망은 원래부터 대중들, 즉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대중들도 이제 생존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서 본래의 다원적 욕망구조는 이렇게 지배 엘리트들과 기득권자들의 타락을 기점으로 획일화된 물질적 욕망구조로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분석하고 천착한 당대의 정치적 현실상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의 분석과 성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최소한 우리는 플라톤이 평생에 걸쳐 비판하고 공격했던 핵심적인 대상이 왜 대중이 아니라 타락한 지식인들 즉 타락한 지배 엘리트들이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1) 정치적 책임은 정치적 권한을 가진 자의 몫이다. 그런데 이제 민주정체에서는 대중이 정치적 권한을 가졌으므로 책임 또한 대중이 가져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정의 타락 원인도 대중에게 돌려져야 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민주정 하에서 대중들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는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래서 플라톤도 당연히 민주정 아래 대중들의 무지를 비판한다. 그러나 대화편을 보면 아테네인들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공격은 기본적으로 대중보다는 지배 엘리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민주정에서조차 실제로 그 체제를 이끄는 주체가 대중이 아니라 선동정치가로 대표되는 지식인들과 기득권자들이라는 것을 궤 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대중들의 정치적 역할과 능력을 원천적으로 폄하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가 지니는 현실적 한계라는 점에서 플라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현실을 돌아보면 플라톤의 진단이 설득력을 얻는 징후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플라톤으로서는, 당대 아테네 민주정이 선동정치가들에게 장악되어있는 한, 정치체제 중 가장 참혹하고 폭력적인 참주정으로 전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통해 실천적인 정치인을 배출함과 동시에 당대 현실을 극복하는 장기적인 정치철학적 프로젝트로 당대의 시대적 조건에서 현실적으로 철학 교육의 수용에 가장 빠르고 유효한 소수 뛰어난 자들을 뽑아 오랜 기간 혹독한 수준의 철학 교육을 통해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담보하는 철인왕정을 꿈꾼 것이다. 그는 격동의 시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결국 고도의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갖춘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한,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평생의 사색을 담아 이상국가론을 펼치게 된 것이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오늘날의 시대 조건에서 보면 극히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의 정치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정치의 지성화와 자연의 본성으로서 욕망구조의 이질적 다양화라는 이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정치철학적 화두이자 푯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번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이 다시 태어나 오늘날 민주주의 현실에서는 철학자왕은 가히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대신 시민 대중들의 지성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대중에 대한 철학 교육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일로매진했을 것이다. 이미 기득권으로 찌들대로 찌든 지배 엘리트들을 각성시키기보다는 대중을 철학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 내지 변혁에 이르는 훨씬 더 가까운 지름길인 것이다.
* 441c에서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는 말은 나라에 있는 덕들 즉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개인의 영혼에서도 그에 상응하여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동일하게 있으며 그 세 부분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는 한,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 모두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에 상관없이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 또한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이상 국가 수립의 마지막 주제로서 마침내 개인의 주요 덕목들을 다루면서 정의로운 개인이 부정의한 개인보다 행복한지 다시 또 한 번 따져 묻는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