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에서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는 오디오북을 제작했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을 쉽게 풀어낸 책의 주옥같은 구절들을 귀로 듣고 읽어보니,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한 발짝 더 깊이 생각하면서 철학적으로 풀어내기를 제안하는 [아주 일상적인 철학]의 내용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10월 말까지 꽃축제가 이어진다는 철원 고석정 꽃밭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풀어내길 제안하는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차분한 마음으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래 목차를 참고하여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1:05 인트로
2:37 내가 이런 건 다 부모 탓이라는 생각
6:46 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게 될까?
13:06 부모와 나의 관계는?
15:57 남 탓하지 말고 제3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W_QSEy5nPBQ?si=hxPJ6lpMD2npRmzq


» 다음 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3)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도입부(449a-451c)

 

* 제4권의 끝은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지만, 그 논의는 제5권이 아니라 제8권에 가서 이어진다. 대화 상대자들이 논의 진행을 끊고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고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5권에서 7권까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펼쳐진 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만 형식상의 일탈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나름의 문학적 플롯에 따라 플라톤이 주도면밀하게 사전 계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는 말로 나라를 수립하는 차원에서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 계급으로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기본 틀과 그들의 기본 덕목을 논의했다. 그러나 정작 이상 국가를 다스리는 핵심적인 중추로서 통치자 계급과 관련해서는 그 선발 과정 이외에 그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역할과 위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을 통해 담보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미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국가가 다름 아닌 철학 위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나라의 통치자 또한 최고 수준의 훈련과 교육을 받은 철학자들로 구성되어야 이상국가의 이상과 목표가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그런데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철학과 철학자들의 위상이란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를 신을 모독하고 청년들을 오도한다는 이유로 사형에 내몰 정도로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지식인 사회의 중심은 전통적인 시인들과 신흥 소피스트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시인들이 기반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과 소피스트들의 궤변적 수사술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시대와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객관적 인식과 논리에 기반한 철학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아테네가 직면한 정치적 현실 또한 철학과 철학자들의 정의로운 통치와 참여를 통해 극복되어야 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러한 구상은 당대의 지적 풍토에서 결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으로서는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기본 틀 이상의 정치 체제의 기본 위상과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애초 설정한 논의 계획을 일시 유보하고 철학의 위상은 물론 철학자들이 어떤 교육 과정을 통해 어떤 능력을 갖추었기에 통치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를 근본적으로 먼저 밝힐 필요가 있었다.

*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논의 구도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제5권을 시작하면서 앞서 소크라테스가 건국신화에서 제시한 처자공유 및 양육과 교육에 관한 내용에 대해 대화 상대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형식으로 계획된 논의 전개를 중단시키고 양성평등과 처자공유, 철인정치의 가능성 등의 파격적인 주제로 앞으로 다루어질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들에 불을 당긴 후, 논의 방향을 아예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의로 완전히 틀어 버린다. 이러한 논의 구도의 전환은 형식적으로는 논의의 일탈로 보이지만 플라톤이 염두에 둔 이상 국가가 다름 아닌 철학 통치자들에 의해 그 온전함이 구현되는 나라임이 확인되면서, 내용적으로는 기본 틀만을 다룬 지금까지의 이상 국가론을 더욱 심화하고 확장하는 획기적인 전기가 된다. 게다가 논의의 목적상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이 심도 있게 다루어지면서 그 부분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는 물론 주제적으로도 형이상학과 인식론, 윤리학과 정치철학 등 철학적 탐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플라톤 연구자들은 형식상 일탈로 보이는 제5-7권을 오히려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자 철학적 논쟁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철학사를 통해 <국가>와 관련한 의미 있는 수많은 철학적 논쟁들이 이곳에 담긴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테면 양성의 평등, 좋음의 이데아,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철학의 위상, 수학 및 기하학과 천문학의 기초, 변증술 등 플라톤 철학의 핵심 주제가 모두 이곳에 담겨 있다.

 

*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갖는 이러한 성격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5권 도입부의 논의 내용을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449a-451b]

1) 소크라테스는 논의 계획에 따라 이제 나라경영διοίκησις과 관련해서나 개인들의 영혼의 성격 형성τρόπου κατασκευή과 관련해서 네 가지 나쁜 유형εἶδος의 정치체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449a) 그러나 이때 아데이만토스는 폴레마르코스가 그의 겉옷ἱμάτιον을 잡아당기며 건네는 말을 듣고 이내 목소리를 높여 소크라테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가 결코 작지 않은 주제 즉, 여인들이나 아이들과 관련해서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κοινὰ τὰ φίλων이 되리라는 게 누구에게나 명백하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424a)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ἐκκλέπτειν는 것이다.(449b-c) 그러니 나쁜 정치체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처자공유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말한 그 공유의 방식ὁ τρόπος τῆς κοινωνίας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야기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글라우콘과 트라쉬마코스 등 대화자 전원이 그에 동의를 표한다.(449c-450a)

2)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는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는데 자네들이 지금 얼마나 큰 논의의 벌집을 건드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당황해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가 이 사람들이 논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황금을 캐려고χρυσοχοήσοντας 여기에 온 것으로 생각하냐고 반문하고 그것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적정한μέτριος 정도의 논의를 언급하자 다시 또 글라우콘이 나서 그러한 종류의 논의를 듣는 데 적정한 정도란, 지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평생 전부가 될 것임을 내세워 제기된 처자공유와 아이들의 양육τροφή 및 교육에 관한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말씀해 줄 것을 재차 촉구한다.(450a-c)

3)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한 설명이 실현 가능성은 물론 그것이 최선인지도 의심스러운데다 설명할 경우 그것이 소원이나 비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며 다시 한번 그 문제를 다루길 주저한다.ὄκνος 이에 글라우콘은 재차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진리ἀληθεία를 알고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자신감을 가지고 할 만한 안전한 일이지만 확신이 없는 채로 찾고 있는 중ζητοῦντα에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섭고 위험한φοβερόν καὶ σφαλερόν 일이라고 말한다.(450c-451a)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본의 아니게 훌륭하고 좋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의 아니게 살인자φονεύς가 되는 것이 더 작은 죄ἁμάρτημα라고 생각함에도 ‘글라우콘이 잘도 나를 북돋는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된다 해도 방면해드릴 테니 용기를 내서 말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한다.(451b)

—————————————————

* 450b 트라쉬마코스 : 트라쉬마코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후에도 두 번 정도(498c-d, 590d)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을 펼친 후에 직접 대화에 끼어든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 450b ‘황금을 캔다’ : 이 말은 아테네인들에게 전해지는 고사에 기초하여 생긴 격언에서 따온 말로 의미상으로는 ‘제 할 일은 게을리한 채 어리석게도 별 이익도 가망도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을 빗댄 말이다. (J. Adam note 참고)

—————————————————

*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애초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마치 제1권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그렇게 해석되듯이 제5권-제7권의 내용도 별도의 목적으로 작성되었다가 이곳에 삽입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제5권 서두를 읽다가 앞서 그려진 424a의 장면을 잘 음미해보면 제5권 서두의 논의 전환이 훗날 삽입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플라톤에 의해 하나로 계획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424a로 되돌아가면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양육을 훌륭하게 받아 절도 있는 수호자가 되면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이라는 속담대로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는 것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간파하게 될 것이라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대화 참여자들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파격적인 언급에 아무런 이의 없이 순순히 동의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제5권 서두에 와서야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의아하게 여긴 그대로 제5권에 가서 대화 참여자들 역시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하도록 만들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었다. 즉 플라톤은 424a에서 미리 그와 같은 의아한 장면을 복선으로 깔아 독자들에게 의아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대화 참여자들로 하여금 내내 궁금증을 간직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게 만드는 배경으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 제5-7권의 핵심 주제가 철학과 철학자 왕이라는 점도 이 부분이 나중 <국가>에 삽입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국가>의 주제인 개인과 나라의 행복과 정의와 관련해서 그 행복과 정의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철학과 철학자 왕이고 그 내용이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 또한 제5-7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5-7권은 플라톤이 처음부터 <국가>의 전체 구도 안에서 따로 집중해서 다루려 하는 의도에서 편제된 <국가>의 핵심 부분인 것이다.

* 그럼에도 아데이만토스 등 대화 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와 요청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나칠 정도로 방어적이고 신중하다. 자신의 대답이 진리가 아니라 소원이나 비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는 말도 하고 하물며 그 자신 확신도 없는 말로 본의 아니게 좋은 사람들을 속이느니 차라리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되는 것이 더 작은 죄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곧이 들일 필요는 없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내놓을 답변들은 모두 <국가>의 핵심을 차지할 정도로 오랫동안 플라톤 스스로 숙고와 성찰을 거듭해서 내놓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후 본격적으로 토해내는 주장 또한 놀랄 만큼 확신에 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왜 여기 시작 단계에서 소크라테스를 그토록 조심스러워하고 주저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 내용들이 <국가>의 중심 주제이자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양성평등과 처자공유 및 정치체제에서 철학과 철학자 왕의 위상에 관한 문제는 당대 아테네의 지적 풍토에서는 감히 꺼내 들기도, 설득력을 지니기도 힘든 주제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에서 양성평등이란 입에 꺼내기조차 힘든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당대 아테네에서는 지식인 세계에서 위세를 떨쳤던 전통적인 신화와 시인들과 달리 철학과 철학자란 크게 주목을 끌거나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제들을 자신의 핵심 주장으로 제기하려는 플라톤으로서는 다각적으로 저작 기법상의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자신이 불쑥 그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주변 대화 참여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태도 또한 시종일관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장면 또한 플라톤의 치밀한 의도 아래에서 그려진 것으로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대답을 극력 촉구하는 글라우콘을 향해 농담조로 ‘잘도 나를 북돋는다’(451b)고 반문하는 것 역시 이 국면이 플라톤의 의중을 담아내기 위한 아이러니임을 잘 보여준다.

—————————————————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 양성에서 동일한 직무와 동일한 교육 451c-457b)

 

[451c-457b]

1)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대화 참가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남성 공연δρᾶμα을 완전히 다 마치고 나서 여성 공연을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남성들을 무리의 수호자로 세우려 했던 앞서의 과정과 상응하는 방식으로 처자공유 방식을 논의하되 우선 여성들과 아이들을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451c) 우선 소크라테스는 수컷 경비견φυλάκων κυνῶν들과 암컷 경비견들의 비유를 들어 암컷들이 새끼를 낳고 기르는 것 때문에 경비나 사냥 같은 일은 수컷이 하고 암컷은 집을 지켜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단지 힘 차이를 빼면 두 경비견이 하는 일은 동일하므로 하는 일 모두를 공동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비유에 기초하여 그러한 동물을 동일한 일’ἐπὶ τὰ αὐτὰ에 쓰려면 그 동물에게 ‘동일한 양육과 교육을’τὴν αὐτὴν τροφήν τε καὶ παιδείαν 부여해야 하듯이 여성γυνή들도 남성ἀνήρ들과 같이 동일한 일에 쓰려고 한다면 여성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가르쳐야διδακτέον 하고 시가와 신체단련 기술은 물론 전쟁 임무도 부여하는 등 동일한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51d-e)

2) 이를테면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레슬링 도장παλαίστρα에서 ‘옷을 벗고 신체단련을 하는’γυμναζομένας 것이 관습상 우스울지라도 그리고 하다못해 몸에 주름이 잡혀서 보기 좋지 않은 노인네들이 신체 단련장에서 볼 수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두고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농담σκῶμμα을 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452a-c) 그리스인들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크레타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벗고 신체 단련하는 것을 보고 희화화했지만 막상 신체단련을 해보니까 벗어버리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았듯이 논변λόγος을 통해 가장 좋은 것이 밝혀지면 눈ὀφθαλμός으로 우습다고 여겨진 것은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쁜 것τὸ κακόν이 아닌 다른 어떤 것ἄλλην τινὰ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좋은 것 말고 다른 것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진지해하는 사람은 다 멍청하다.(452d-e)

3)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성φύσις상 여성이 남성과 모든 일을 공동으로 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대쪽 사람들 편에 서서 우리 자신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토론해 볼 것을 제안하고 우선 그쪽 편에 서서 이렇게 반론을 제시한다. 즉 i) 각 사람이 본성에 맞는 자기의 일 한 가지를 해야 한다‘δεῖν κατὰ φύσιν ἕκαστον ἕνα ἓν τὸ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고 당신들 자신이 동의했다. ii) 그런데 여성과 남성의 본성이 완전히 차이 난다. iii) 그렇다면 일도 자신의 본성에 따라 각자에게 다른 일을 맡기는 것이 적절하다. vi) 그러므로 그들이 동일한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가당착τἀναντία이다.(453a-b)

4)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반박에 대한 탈출구를 요구하는 글라우톤 등에게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즉 그렇게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화διάλεκτος가 아닌 쟁론ἔρις을 벌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의 대상을 종류εἶδος에 따라 나누어 고찰하지는 못하고 표현 자체αὐτὸ τὸ ὄνομα에 매달려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이러한 반박술에 휘말릴 경우 우리는 표현에 얽매여서 동일한 본성이 동일한 일의 수행을 맡아야 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용맹스럽고 쟁론적으로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대머리인 사람들φαλακροὶ과 머리가 긴 사람들κομῆται이 반대되는 본성이 아니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냐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서 그들의 본성이 반대된다는 데 우리가 동의하면, 대머리인 사람들이 구두장이σκυτοτόμος 일을 하면 머리가 긴 사람들은 못하게 하고 역으로 머리가 긴 사람들이 구두장이 일을 하면 대머리인 사람들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라는 것이다.(453c-454b) 요컨대 동일한 본성과 다른 본성을 모든 측면에다 다 갖다 붙여서 적용하면 안 되며 다만 수행할 일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본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란 이를테면 의사ἰατρός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의사 일에 적성이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을 서로 연관시키는 경우이다. 이 경우 의사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 목수τέκτων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연관시킬 경우 그것은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진 것끼리 연결 짓는 것이다.(454c-d)

5) 남성들과 여성들의 경우도 어떤 기술이나 다른 어떤 수행할 일과 관련해서 한쪽이 더 뛰어난 것으로 드러나면 본성상 양자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단지 여성은 아이를 낳고 남성은 아이를 배게 한다는 차이만으로는 어떤 기술이나 수행하는 일과 관련한 논의에서 여성과 남성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수호자들과 그들의 여성들이 동일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반박되지 않는다.(454e) 나라 경영διοίκησις과 관련해서 여성이 고유하게 수행할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455a) 어떤 것에 적성τὸν εὐφυῆ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적성이 없다고 할 때 기준이란 i) 한 사람은 그것을 쉽게 배우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경우 ii) 한 사람은 조금 배워도 그 배운 것으로부터 스스로 아주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은 많이 배우고 익히고 나서도 배운 바를 유지하지도 못하는 경우 iii) 한 사람에게서는 몸에 속한 것들이 생각을 충분히 잘 섬기는데μελέτης, 다른 사람에게서는 그것들이 생각에 저항하는ἐναντιοῖτο 경우이다.(455b-c)

6) 물론 사람들이 익히는 일들 중에 여성이 잘 한다고 여겨지고 그래서 거기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못하면 정말로 웃기는 일들 이를테면, 뜨개질이나 빵 굽는 일, 채소 삶는 일 따위가 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을 훨씬 능가κρατεῖται하긴 하지만 많은 여성이 많은 남성보다 더 뛰어난βελτίων 영역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일 중 어떤 것도 따로 여성에 속한 것도 따로 남성에게 속한 것도 없으며 그와 관련한 본성들은 양성 모두에 비슷한 방식으로 흩어져 있어서, 비록 모든 일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긴ἀσθενής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수행할 일들 모두에 본성에 따라서 공히 참여할 수 있다.(455d)

7) 다만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본성상 의사 일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으며, 또 시가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듯이 신체단련과 전쟁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전쟁과 어울리지 않고 신체단련을 좋아하지 않는 여성이 있다.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여성과 지혜를 싫어하는 여성이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성이 있고 기개가 없는 여성이 있다.(455e-456a) 이렇듯 수호라는 목적에 비추어볼 때도 더 약하거나 더 강하다는 점만 빼면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성들도 선발해서 그러한 남성들과 함께 거주하고 함께 수호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하고 본성상 그런 남성들과 동류συγγενής이기 때문이다.(456a-b)

8) 결국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여성 수호자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부여하는 것이 본성에 어긋나지 않다는 데에 우리가 동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세운 것도 아니고 단순한 소원εὐχή 같은 것을 법으로 세운 것도 아니며 본성에 맞게 법을 세운 것이다.

9)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동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남성 수호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수호자로 두는 경우도 과연 최선일지가 동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즉 우리가 수립한 나라에서 앞서 말한 양육과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구두장이 기술을 교육받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나은 사람이듯이 여성의 경우도 같은 양육과 교육을 받은 여성이 여성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ς 나은ἀμείνων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수호자가 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렇듯 가능한 한 뛰어난 여성들과 남성들이 생기는 것보다 나라에 더 나은 일이 없으며 시가와 신체단련이 우리가 설명한 대로 이루어지는 한 그 일은 성취될 수가 있다.(456c-e) 요컨대 우리는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것’οὐ μόνον ἄρα δυνατὸν ἀλλὰ καὶ ἄριστον을 나라의 법으로 정한 것이다.

10) 그러므로 여성 수호자들은 의복 대신에 덕ἀρετὴ을 몸에 두른 것이므로 옷은 벗어야 하고 전쟁과 그 밖의 나라 수호 일을 함께해야 하며 다른 일은 하지 말아야 하되, 다만 여성이 더 약하니까 그런 일 중에 더 가벼운 일을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부과해야 한다. 최선βέλτιστος의 것을 위해서 옷을 벗고 신체단련을 하는 여성들에 대해 웃는 남성은 자신이 무엇을 두고 웃는 것인지도 또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전혀 모르는 자이다. 실로 ‘이로운 것은 아름답고 해로운 것은 추하다’τὸ μὲν ὠφέλιμον καλόν, τὸ δὲ βλαβερὸν αἰσχρόν.

11)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수호자φύλαξ들과 여성수호자φυλακίς들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 과정을 우리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κῦμα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맞이할 파도들 중 첫 번째 파도를 이제 넘어선 것이다.

——————————————

* 1)에서 451c 남성 공연과 여성 공연의 비유는 이후에 언급되는 여성 수호자에 관한 내용이 앞서 언급한 남성 수호자에 관한 내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표현된 ‘처자의 공유’라는 말 또한 남녀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수호자 계급에서 ‘배우자와 아이들의 공유’가 될 것이다.

* 2)에서 452d-e : 이 부분에서 노인들의 경우는 스파르타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나이 들어서까지 전사로서 레슬링 훈련을 계속했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편견에 기초한 관습들은 객관적인 경험들과 이치에 맞는 논변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좋고 나쁨은 오직 이치에 기초해서만 판정되어야 한다. 눈으로 보면 여성 수호자들 역시 옷을 벗고 있지만, 이치에 기초해보면 그들은 다만 덕을 두르고 있는 것이다.

* 2) 452d ‘나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 모든 것들이 좋은 것 나쁜 것들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소피스트들은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늘 중간의 것들 무규정적인 것들이 있다. 무규정적인 것들은 다만 정도 차이만 가질 뿐 서로 다른 것들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고 나쁜 것으로 여기거나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 3)의 i)- iv)는 대화가 아닌 쟁론에 기초한 반박이다. 이러한 반박술은 논의 대상을 종류에 따라 나누어 고찰하지 않고 종류상 서로 다른 본성의 것임에도 표현 자체에 매달려 그것을 동일한 본성으로 여겨 모든 측면에다 다 갖다 붙여서 적용하는 경우이다. 오늘날 오류론에 입각해서 보면 생물학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논점 일탈의 오류 내지 유추의 오류이자 특정한 사례를 기준으로 모든 사례가 그렇다고 일반화하는 부당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오류들은 쟁론을 일삼던 당대 소피스트들의 궤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오류들이다. 이곳 논의에서 쟁론이 아닌 대화로 평가될 수 있는 경우는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는 쟁론과 대화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 6)에서 뜨개질이나 빵 굽는 일, 채소 삶는 일은 소크라테스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나누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다만 우연적 요소에 불과하다. 플라톤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 짓는 본질적인 요소는 적성이다. 그리고 적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5)의 i) – iii)에 기초해야 하며 그 기준에 기초하는 한 남성과 여성의 적성은 동일하다.

* 9)에서 456c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것’ : 남녀의 평등과 차이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는 전혀 경직되어 있지 않고 유연하다. 양성의 역할을 비교하면서 예외적인 경우가 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의 진리에 부합하는 본질적인 경우인지 우연적인 경우인지를 가려,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흔들림 없이 견지한다. 여성 수호자가 가능한 것도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세우는 법과 기준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kata physin) ‘가능한 것들이자 최선의 것들’이다. 이것은 인류 지성사를 통해 양성평등의 자연법적 기초가 플라톤에 의해 처음으로 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끝>

* 다음 회 : 2.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 451c-457b)에 대한 세부 해설


 

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철학자의 서재]

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오상현(한철연 회원)

 

박은미 선생님의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은 “마음을 힘들게 하는 생각 습관 벗어나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 속에서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가, 또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해 철학자의 시선에서 고르고 담았다. 화가 많은 나로서는 일종의 처방전이었다고 해야겠다.

“논리적 결론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때 인간은 그 논리적 결론을 수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이끌어갑니다. 즉 논리적 결론이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논리적 결론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그러니 논리적 결론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그 결론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자기 보존을 원활하게 만드는 결론, 즉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결론을 참이라고 믿습니다.”(38쪽)

철학을 전공하면서 ‘논리’를 무기로, 토론을 빙자한 말다툼에 열을 올리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은 일상에서 논리적이지 못하다. 행동경제학이 전통경제학보다 재미있는 이유도 마찬가지. 다만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면 다행이겠지.

“반성 능력이 좋은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 입힐 가능성을 생각하고, 반성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 가능성을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즉 후자는 자신의 잘못을 못 보기에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거죠.”(214쪽)

‘정신승리’가 자기 보존에 유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요즘 유독 ‘책임’을 지겠다는 권력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답답하고 아쉬웠는데, 반성 능력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태풍도 폭염도 곧 지나간다 하였다.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박은미 #아주일상적인철학 #마음을힘들게하는생각습관 #반성 #논리 #철학 #정신승리 #태풍 #폭염 #곧지나간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5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2)

 

  1.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441c-444a]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정의를 마무리하면서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τὰ αὐτὰ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ἴσα τὸν ἀριθμόν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그가 말하는 개인의 정의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가 지혜로웠던 방식으로 나라를 지혜롭게 했던 것에 의해서, 개인ἰδιώτης 역시 지혜롭다σοφός.(441c) 그리고 개개인을 용기 있게 하는 그것에 의해서, 그리고 개개인이 용기 있는 방식으로, 나라 역시 용기 있다. 절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개인 또한 나라가 정의로웠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의롭다.(441d)

2) 나라의 세 부류들 각 부류가 자기 것을 함으로써 나라가 정의롭듯이 개인도 ‘자기 안에 있는 것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게 되면’ἕκαστον τῶν ἐν αὐτῷ πράττῃ, 그런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자 자신의 것을 하는 사람이다.(441d) 그러므로 이성 부분λογιστικόν이 다스리고 기개 부분θυμοειδής은 그 부분에 순종하고 그것의 동맹군σύμμαχος이 되는 것이 적절하다ἐπιθυμητικόν.(441e)

3)우리가 말했던 대로(411e-412a)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ῆ의 혼합κρᾶσις이 그것들을 조화롭게σύμφωνος 만든다. 그 한 부분은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배움으로 고조시키며ἐπιτείνουσα 키우고, 다른 하나는 화음ἁρμονίᾳ과 장단ῥυθμός으로 풀어주고ἀνιεῖσα 달래서παραμυθουμένη 길들인다ἡμεροῦσα.(441e-442a)

4) 이성적 부분은 본성적으로 돈에 대해 가장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 부분ἐπιθυμητικόν을 제어하고,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져 자신의 것을 하지 않고 부적절하게도 다른 둘을 노예로 삼아 다스리고καταδουλώσα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는 일ἀνάτρεψις이 없도록 감시한다τηρήσετον.(442a)

5) 이성 부분은 숙고를 하고 기개 부분은 다스리는 부분을 따르며 숙고된 바를 용기를 가지고 이행하며 싸운다. 개인을 용기 있다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부분μέρος 때문이다(442b). 이성이 지시한 대로 기개 부분은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한다.(442c)

6) 개인의 경우 지혜롭다는 것은 이성 부분이 세 부분 각각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ὅλῳ τῷ κοινῷ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441c)

7) 개인이 절제 있다고 부르는 것은 영혼 각 부분들의 우애φιλίᾳ와 화합 συμφωνίᾳ 즉 이성 부분이 다스려야 한다는 데 대해 다스림을 받는 두 부분과 다스리는 부분이 믿음을 같이 하고 그것을 거슬러 내분στάσις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이다.(442c-d)

8) 개인이 정의로운 것도 나라가 정의로운 것과 같은 방식이다.(442d) 아래와 같은 일상의 사례들을 적용해보더라도 그렇다. 나라와 본성이 유사하게 태어나고 유사하도록 양육된 사람은 재화를 떼어먹거나 신전 약탈ἱεροσυλία이나 도둑질κλοπή, 또는 사적으로는ἰδίᾳ 동료들을 공적으로는δημοσίᾳ 나라를 배신하는 것 같은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442e-a) 게다가 그것은 간통μοιχεία이나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442a)

9)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그의 안에 있는 부분들 각각이 다스림과 다스림을 받음과 관련하여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이와 같은 사람들과 나라들을 만들어내는 힘δύναμις이다. (443b) 이로써 정의의 어떤 단초ἀρχή와 원형τύπος에 발을 들여 놓은 것ἐμβεβηκέναι 같다는 꿈(433a)이 완전히 이루어졌다κινδυνεύομεν.

10) 그런데 그것은 사실 정의의 어떤 영상εἴδωλόν이었다. 본성상 신발 만드는 것이 적성인 사람은 신발 만드는 일σκυτοτομική을 목수인 자는 목수 일τεκτονικἡ을 하는 것 그런 어떤 것이 정의이기는 하지만, 사실 정의는 외적인 행위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된 것πρᾶξις τῶν αὑτοῦ περὶ τὴν ἐντός이다.(443c-d)

11) 이처럼 개인의 정의는 영혼 안에 있는 부류들이 서로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가다듬고θέμενον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ἄρξαντα 조율하여συναρμόσαντα 자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것, 즉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νεάτη, 상현음ὑπάτη, 중현음μέση들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 조화ἁρμονία를 이루는 것이다.(443c)

12) 그리고 설사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들ἄλλα ἄττα μεταξὺ이 있더라도, 정의로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한 데 묶고 여럿으로부터 전적으로 하나를 이루어 절제와 조화를 이룬다.(443e)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어떤 행동을 할 때이든 이 모든 경우에 이 상태를 보존하고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다.(443e) 이 행위를 관장하는ἐπιστατοῦσαν 앎ἐπιστήμη이 지혜σοφία인 반면, 이 상태를 그때그때 와해λύη시킬 수도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이 행위를 관장하는 믿음δόξα은 무지ἀμαθία이다.(443e-444a) 이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로운 나라,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ηὑρηκέναι.(444a)

——————————–

* 위의 글 1)과 2)(441c-442a)와 앞서의 논의(434c-441c)에 한정해서 나라의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에 상응하는 개인 영혼의 이성적 부분, 기개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성격을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이성적 부분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한다.(439c-d)

영혼을 다스린다.(441e) 숙고를 한다.(442b) 욕구 부분을 제어하고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져 다른 둘을 노예로 삼아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지 못하도록 감시한다.(442a)

2) 기개적 부분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낸다.(440b)

이성 부분에 순종하며 숙고된 바를 용기를 가지고 이행하며 싸운다.(442b)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에 대한 이성의 지시를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전한다.(442c)

3) 욕구적 부분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하는 것, 일종의 만족과 쾌락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다.(439c-d)

욕구들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 즉 마실 것에 대한 욕구와 먹을 것에 대한 욕구이다.(437d-e)

본성적으로 돈에 대해 가장 만족할 줄 모른다.(442a)

* 나라에 있는 덕들과 동일한 덕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고 수적으로도 같다는 언급(441c)과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덕을 갖고 있다는 이곳 1)과 2)의 언급만(441c-442a)을 토대로 나라와 개인 간의 유비적 관계를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a) 나라의 덕목과 상응하는 개인의 덕목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가 되면 그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영혼을 다스리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441d)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가 되면 그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이 이성적 부분을 보조하고 순종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441d)

모든 나라 구성원들이 절제로써 믿음을 같이 하면 절제 있는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각 부분이 절제로써 이성 부분을 믿고 따르면 그 사람들은 다 절제 있는 사람이 된다.(441d)

모든 나라 구성원들이 통치자의 지배에 따라 각자 자신의 것, 자신에 속한 것을 할 때 정의로운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각 부분이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각각 자신의 것을 할 때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441e)

  1. b) 지혜로운 개인

개인의 경우 지혜롭다는 것은 이성 부분이 세 부분 각각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441c)

c). 용기 있는 개인

개인을 용기 있다고 부르는 것은 이성이 지시한 대로 기개 부분은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하기 때문이다.(442c-d)

  1. d) 절제 있는 절제

개인이 절제 있다고 부르는 것은 영혼 각 부분들의 우애와 화합 즉 이성 부분이 다스려야 한다는 데 대해 다스림을 받는 부분과 다스리는 부분이 믿음을 같이 하고 그 믿음을 거슬러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이다.(442c-d)

  1. e) 정의로운 개인

외적인 행위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 그것은 사실 정의의 어떤 영상eidōlon이다. 정의는 그렇게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443c-d)

영혼 안에 있는 부류들이 서로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가다듬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조율하여 자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것, 즉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 상현음, 중현음들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443d)

  1. f) 정의로운 행위

정의로운 행위들의 원인은 영혼의 부분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나라의 계층 내지 영혼의 부분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게 만드는 힘dynamis이다.(443b)

어떤 행동을 할 때 영혼의 절제와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며 그 행위를 관장하는 앎이 지혜인 반면 이 상태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이 행위를 관장하는 믿음은 무지이다.(444a)

* 위의 글 3)(441e-442a)에서 ‘그 한 부분’과 ‘다른 하나’는 각기 시가와 신체단련을 가리키는데 실제 이어지는 그 역할에 대한 설명은 모두 시가의 역할이라는 지적이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러나 신체 단련도 결국 ‘영혼을 위해 있는 것’(410c)이고 ‘시가와 신체 단련의 혼합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영혼에 적용된 상태’가 ‘가장 시가에 능한’ 상태(412a)임을 고려하면 신체 단련도 마치 율동처럼 화음과 장단이라는 시가적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글 4)는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질 경우 나머지 부분들을 노예로 삼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욕구 부분은 능동적으로 지배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이성 부분이 병이 들었어도 욕구 부분은 이성 부분에 따른다. 다만 그때 이성 부분은 병이 든 상태이므로 욕구 부분을 제어하는 쪽이 아니라 반대로 그 욕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상태는 곧 이어서(444b) 언급되듯이 부정의한 영혼의 상태이다.

* 위의 글 8)은 당대 아테네에서 정의롭지 못한 행위들의 대표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부모 봉양 등 동양의 전통 윤리와도 별 차이가 없다는 것도 흥미롭다.

* 위의 글 9) : 플라톤에서 정의를 비롯한 지혜, 용기, 절제 등 제반 덕들은 앎인 동시에 실천을 담보하는 힘 즉 실행 능력이다.

* 위의 글 10)에서 플라톤은 외적인 정의로운 행위들을 정의의 어떤 영상eidōlon으로 언급한다. 이 영상이 의미하는 것은 통상 플라톤의 보편적인 정의(定義)가 통상 구체적 사례들이 아니라 본질 차원에서 규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상과 그림자라는 관계에서 그림자 내지 구체적 사례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언급의 초점은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라기보다는 개인의 정의를 외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규정하지 않고 영혼의 내적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로 보자면 전자 즉 외적 행위는 정의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후자 즉 영혼의 내적 상태가 정의의 실상이라 하겠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 윤리학의 고유성이 드러난다. 개인에게 있어 정의와 선은 외적인 행위 이전에 내면의 영혼 상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플라톤의 입장은 도덕 심리학의 혁명적 선구이자 오늘날 덕의 윤리학의 뿌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글 11)에서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 상현음, 중현음 : 그리스 음악의 화음체계에서 음계의 구성은 4개음으로 이루어져 완전4도가 되는 테트라코드(tetrqachord) 2개가 이어져 만들어진다. 이중 가운데 위치한 음을 중현음(mesē), 가장 낮은 음을 하현음(hypatē), 가장 높은 음을 상현음(neatē 또는 nētē)이라고 불렀다.

* 위의 글 12)에서 ‘설사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들이 있더라도’ : 세 가지 기본음을 나라와 영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경우, 이 표현은 나라와 개인 영혼의 세 계층들 사이에도 어떤 다른 계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기본음은 화음의 기본음이고 하나의 음악에 그 밖의 음들도 수없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똑같이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 표현의 강조점은 정의는 어떠한 다양성의 경우라도 하나를 이루어 절제와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 위의 글 12)에서 앎epistēmē과 믿음doxa, 지혜sophia와 무지amathia가 대비되고 있는데 특히 <국가>에서 앎과 믿음이 동시에 대비되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

* 이곳에서 플라톤은 덕들과 관련하여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숫자로 유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언급은 앞서 언급한 내용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명 상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우선 앞서 나라의 덕을 논하던 부분에서는(427d-445c) 분명 지혜의 덕은 통치자의 고유한 덕으로, 용기의 덕은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 절제의 덕은 모든 계층 공통의 덕으로 그리고 그러한 덕들을 서로 조화롭게 만드는 덕은 정의로 각기 언급되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통치자는 지혜, 용기, 절제의 덕 모두를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의 덕을,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갖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곳 개인의 덕을 논하는 부분에 와서는 나라가 갖고 있는 덕들과 동일한 것이 같은 수로 개인에게도 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개인 역시 나라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4개 덕을 갖고 있듯이 개인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4개 덕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르게 언급하고 있을까? 그것은 앞서 통치자의 덕들에 대한 논의 부분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발생적인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다. 즉, 플라톤은 통치자의 출현에 맞추어 통치자의 덕을 언급하면서 논의 순서에서 통치자가 아직 철학자라는 점이 살펴지기 이전임을 고려하여 일단 그렇게 한정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라의 부분들과 개인 영혼의 부분들이 어떻게 유비적으로 상응하는지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일단 나라의 세 계층과 영혼의 세 부분이 서로 상응하는 것이라면 통치자 계층은 이성 부분, 수호자 계층은 기개 부분, 생산자 계층은 욕구 부분에 서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상응한다고 해서 통치자 계층의 영혼은 이성 부분만 있고, 수호자 계층의 영혼은 기개 부분만 있으며, 생산자 계층의 영혼은 욕구 부분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 자신 모든 사람의 영혼은 누구나 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영혼 3분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그 누구든 그들의 영혼은 모두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똑같이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와 개인 간의 유비는 실제로 어떤 관계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일까?

* 설명을 위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경우를 살펴보자. 플라톤에 따르면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모두 그들 자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장 잘 발휘했을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들 자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장 잘 발휘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 내부의 영혼들이 그들 고유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도록 최상의 조건으로 조직화되었다는 것 즉 서로 최상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통치자의 영혼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 최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이성 부분의 주도하에 통치에 관한 지혜가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고, 수호자의 영혼은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수호에 관한 용기가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며, 생산자의 영혼은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각자 욕구와 소질에 맞는 생산 기술 능력이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모두는 각각 가장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를 이루되 통치자는 이성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수호자는 기개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생산자는 생산력으로서 욕구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나머지 부분들과 조화를 구현하면서 각기 정의로운 개인이 되고 그러한 개인들이 정의로운 나라의 정의로운 시민이 되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의 상태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내적 능력 즉 덕을 최대한 발휘하여 구현한 상태라면 그들 계층 각각은 그리고 그들의 내적 영혼의 부분들 각각은 공히 지혜와 용기와 절제 그리고 정의의 덕을 구유한 것이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영혼을 간직한 개인 역시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라는 4개 덕을 갖춘 개인이 되는 것이다. 다만 서로 간에 차이가 있다면 통치자는 나랏일 전체를 다스리는 지혜의 덕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고, 수호자는 통치자를 도와 나라를 수호하는 용기의 덕이 통치자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사람이며, 생산자는 통치자와 수호자와 더불어 공히 뛰어난 절제의 덕을 바탕으로 최소한 각자의 기술 영역에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은 모두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을 갖추고 있고 또 모두가 정의의 덕을 통해 각자의 일을 최선으로 수행하면서 계층 간 영혼의 부분들 간의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과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최고의 클래식 성악가와 트로트 가수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각자 자기가 가장 잘하는 영역에서 최상의 조화로운 음악을 구현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음과 소리의 성격 내지 그것들의 조화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 이렇듯 정의로운 나라의 개인들은 모두 자신의 고유한 역할 수행을 통해 정의로운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두 정의로운 사람이고 나아가 각자 나름대로 최상의 영혼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행복하며 그 행복감의 크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적성과 소질에 따라 구현된 최상의 조화인 한, 서로의 역할에 대한 질투나 선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랏일을 기준해서 보면 그들의 역할이 갖는 중요도의 차이만큼 그들의 조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 질 수 있다. 이를테면 통치자이자 철학자의 경우 오랜 동안의 철학 교육을 이수해온 데다가 나랏일에서 가장 중차대하다고 여겨지는 통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인 만큼, 그들의 영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을 동반한 가장 고매하고 품격 있는 수준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의 앎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정의로운 나라는 분업에 기초한 협동적 공동체로서, 통치자의 앎뿐만이 아니라 수호자, 생산자 모두의 앎이 최소한 각기 자기 기술 영역에서 만큼은 최고의 앎의 상태로 조화롭게 결합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인간 본성의 다양성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른 적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인간 본성론과 관련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국가>에서도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랏일과 관련한 역할을 기준으로 크게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구분한 것도 그러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론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장이 그러하다 해도 생산자 계층을 제외한 통치자, 수호자 계층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을 고려하면, 본성을 세 그룹 정도로 구분하는 것만으로 과연 자신이 내세우는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까 의심이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세 그룹 중 생산자 계층이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이 정작 인간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적성과 소질들을 거론할 때 인용하는 사례들을 보면 통치 기술과 전투 기술뿐만이 아니라 농사기술, 제화술, 의술, 조타술, 목공술 등 생산자들이 갖는 다종다양한 기술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각기 다른 자연적 본성에 따라 사회 계층을 크게 세 계층으로 구분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세부적으로는 이상 국가 구성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들 또한 내적으로 서로 다른 본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플라톤은 생산자들 각자의 실질적인 욕망 또한 비록 그들 욕망이 대부분 돈으로 충족된다.(442a)는 점에서 돈을 좋아 하는 부류로 단순화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질적 욕구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종다양한 적성들과 소질들 즉 각기 다른 다양한 욕망들을 갖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오늘날 어린 시절 우리들 모두 장래 희망하는 직업이 다종다양하게 서로 달랐다가 성장하면서 당대의 외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거의가 비슷한 직군들을 선망하게 됨을 되돌아보면 플라톤의 견해가 오히려 자연적 본성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들의 이와 같은 다양하고 고유한 욕망에 기초하여 분업적 사회 공동체에서 각자 그에 걸맞는 고유한 역할을 최선으로 수행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 각자의 적성과 소질에 합당한 양육과 교육을 설계하고 그것의 이행을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국가는 말 그대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이상적인 나라인 것이다.

 

[444a-445d]

* 소크라테스는 이상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에 대한 논의의 대장정을 모두 마무리 한다. 그러나 애초 논의 목적으로 상정된 부정의한 나라 및 개인들과 비교해보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그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우선 부정의ἀδικία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살펴보려 한다.(444a) 이에 관해 이곳에서 그가 펼친 논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부정의란 이 세 부분들의 내분στασις이며 참견πολυπραγμοσύνη이고, 남의 일에 대한 간섭ἀλλοτριοπραγμοσύνη이며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ἐπανάστασις이다.(444b)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하는 것δουλεύειν이 적합한 그런 성향φύσις의 부분이 영혼 안에서 벌이는 반란이다. 부정의는 영혼 안의 부분들의 혼란ταραχή과 방황πλάνη이며 방종ἀκολασία이고 비겁δειλία이며 무지ἀμαθία 즉 일체의 악덕κακία이다.(444b)

2) 그렇다면 부정의한 행위와 정의로운 행위가 무엇인지도 명확하다. 이것들이 영혼 안에서 하는 작용은 건강한 것들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이 몸 안에서 하는 작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 건강한 것들은 건강ὑγίεια을 생기게 하고,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병νόσος을 생기게 한다.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 역시 정의를 생기게 하고, 부정의한 일은 하는 것은 부정의를 생기게 한다.(444c)

3) 건강을 생기게 함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본성에 맞게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도록 확립하는 것인 반면, 병을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확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의를 생기게 함은 영혼 안에 있는 것들을 본성에 맞게κατὰ φύσιν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게 확립하는 것인 반면, 부정의를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παρὰ φύσιν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445d)

4) 덕ἀρετὴ은 일종의 영혼의 건강이고 아름다움이며 좋은 상태’ἀρετὴ ὑγίειά τέ τις ἂν εἴη καὶκάλλος καὶ εὐεξία ψυχῆς인 반면, ‘악덕은 질병이며 추함이고 허약함’κακία νόσος τε καὶ αἶσχος καὶ ἀσθένεια이다. 아름다운 활동τὰ καλ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은 또한 덕ἀρετῆ의 획득κτῆσις으로 이끌고 추한 활동τὰ αἰσχρὰ은 악덕 κακία의 획득으로 이끈다.(444e)

5)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의롭게 행하는 것, 아름다운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인 것이 이득이 되는지λυσιτελεῖ 아니면 부정의한 사람인 것이 이득이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445a)

6) 글라우콘은 그 두 가지 각각이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왔던 그런 것들임이 드러난 마당에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더라도 우리가 여기까지 왔으니 기운을 잃지 말고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445b)

7) 덕은 한 가지ἓν 유형이지만 악덕은 무한하며 ἄπειρα 그중 기억해 둘 만한 것들(악덕)은 네 유형이다.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몇 종류τρόπος이든 영혼의 종류도 그만큼이 있다.(445c) 이에 따라 정치체제가 다섯πέντε 종류이듯, 영혼도 다섯 종류이다.(445d)”

8)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왔던 정치체제는 한 종류이지만 이름은 둘이 붙을 수 있다. 다스리는 사람들 사이에 특출한 사람이 한 사람이면 왕정βασιλεία이라 부르고 여러 사람인 경우에는 최선자(最善者)정체ἀριστοκρατία라 부른다. 이것은 모두 한 유형ἓν εἶδος이다. 다스리는 사람이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온 양육τροφῇ과 교육τροφῇ을 실행하는 경우에는 나라의 중요한 법을 흔드는 일은 없다.(445d)

—————————————

1) 위의 글 1)에서 ‘부정의란 ..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 : 부정의에 대한 이곳에서의 언급은 앞서 (442a) ‘욕구 부분이 다른 부분들을 노예로 삼는다.’는 말과 하나로 연관된다. 이곳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러한 상태를 ‘종노릇하기에 적합한 그런 성향의 부분이 영혼 안에서 벌이는 반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내용상 이성이 욕구의 도구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행위와 동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쨌거나 이성이다. 인간 행위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욕구의 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병이 들어 본래 모습을 상실하고 스스로 잘못된 방향인지도 모른 채 아니 그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 양 착각하고 능동적으로 욕구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 이른바 도구적 이성, 계산적 이성으로 전락한 것이다. 욕구의 측면에서 보면 욕구에 이성이 지배된 것으로 보이지만 애당초 욕구는 지배라는 의도적 목적을 가질 수 없는 그 자체로 맹목적인 힘이다. 플라톤에게서 구조상 영혼과 동일한 나라의 경우에도 반란은 생산자 계층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자 계층을 이용한 선동적 정치가들 내지 타락한 통치계층에 의해 저질러진다. 요컨대 부정의는 이렇게 이성이 병이 들었을 때 그 병든 이성이 능동적으로 초래하는 결과들 즉, 영혼 안의 부분들의 혼란과 방황이며 방종이고 비겁이며 무지, 즉 일체의 악덕이다. 20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재현되고 있다. 이성이 폭압적 권력을 비판하기는커녕 반대로 권력을 정당화하는 능동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이다. 일례로 나치 권력에 빌붙어 플라톤의 이름으로 나치즘을 극력 정당화한 프리데만(H. Friedemann)과 싱게르(K, Singer)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게오르그(S. Georg) 학파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플라톤을 폭압적 전체주의의 이론적 배후로 낙인찍히게 만든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이정호, ‘플라톤의 정치철학’,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 2017 참고)

* 위의 글 3), 4)에서 플라톤은 덕으로서 정의를 자연적 본성에 따른 영혼의 건강이자 좋은 상태로, 악덕으로서 부정의는 자연적 본성에 거스르는 질병으로 규정한다. 플라톤은 제2권 서두에서(357b-c) ‘좋은 것’을 아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i) 그 자체로 좋은 것 ii) 그 자체로도 좋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에서도 좋은 것 iii)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번째 것의 대표적인 경우로 건강을 들고 있다. 여기서 플라톤이 정의를 ‘건강’과 ‘아름다움’ 이자 ‘좋은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정의를 그 자체 때문에도 좋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즉 완전하고 영원한 조화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에 뿌리를 둔 객관적 원리이자 본성적 선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몸이 건강하면 편하고 몸이 질병에 걸렸을 경우 직각적으로 아프고 불편하다는 것을 안다. 플라톤이 보기에 부정의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질병에 걸리거나 몸이 다쳤음에도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미 그 자체로 터무니도 없고 가당치도 않은 것, 즉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한, 어떤 경우에서든 영혼의 조화 즉 마음의 평화를 이루어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건강이 그러하듯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서 사람들의 견해에 의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규정될 수 있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아직 증명된 것은 아니다. 제2권 서두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개의 논의 단계를 상정하였다. 우선 그것을 보다 잘 살핀다는 명분으로 대문자 비유를 통해 사람을 나라로 확대시켰고 그런 연후 정의로운 나라를 세워 그 나라가 어떤 덕들을 갖추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원래 논의 목적대로 나라에 대한 논의에서 개인 영혼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 개인에서도 나라와 같이 정의가 성립하고 나라의 덕과 동일한 덕이 개인의 영혼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함을 논증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그러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부정의한 나라와 부정의한 개인과 비교하여 그 중 어떤 나라와 개인이 그 자체로 좋고 결과에서도 이득이 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미 기본적인 결론을 내놓은 상태일지라도 글라우콘에게 그 둘을 비교하는 논의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이미 지금까지의 논의만 보더라도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다 드러난 마당에 그 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대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그러한 논의를 이어가려한다. 그리고 그 첫 단계로 정의로운 사람을 살필 때 사람을 나라로 확대해서 고찰했듯이 이곳에서도 부정의한 사람을 살핌에 앞서 우선 부정의한 나라 즉 부정의한 정치체제들부터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체제와 상반된 네 가지 유형의 부정의한 정치체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에 착수하게 된다.

* 위의 글 8), 9)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정치체제의 종류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체제로서 왕정 내지 최선자 정체를 포함하여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 등 다섯 가지 정치체제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여기서 이른바 왕정과 최선자 정체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사실 지난 강해(44)에서 플라톤의 철인왕정이 1인왕의 지배체제인가 다수 왕들에 대한 지배체제인가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철인왕의 숫자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핵심은 그 왕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몇 사람이건 어떤 양육과 교육을 받았는가 즉 그들이 과연 진정한 철학자인가 아닌 가에 있다. 다만 지난 번 강해에서 플라톤의 철인왕 정치체제를 일인 왕정이 아니라 실제로는 다수 철인왕의 정치체제 즉 최선자 정체라고 집중해서 강조한 것은 오늘날 플라톤의 철인왕정에 대한 인식이 이른바 일인 독재체제로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설사 통치자의 수를 문제 삼는다고 해도 <국가>나 <법률> 모두 통치 행위 주체를 표현할 경우 하나같이 복수의 통치자들로 표현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어쨌거나 핵심은 통치자의 수가 아니라 그가 철학자인가 아닌가 이다. <정치가>에서 한 사람의 철인왕정을 최상의 정치체제로 설정한 것 역시 정치가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통치자의 숫자를 정치체제 분류의 한 기준으로 삼은데 따라 제시된 것일 뿐 그곳에서도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올바른 정치가 즉 왕은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 최선자 정체의 그리스 원어 ‘aristokratia’는 보통 ‘귀족정’을 나타낸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은 철인왕정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정치체제를 내세우면서도 기존의 정치체제와 비교했을 때 그나마 자신의 정치체제가 일종의 ‘복수의 뛰어난 귀족 엘리트들에 의한 정치체제’에 가깝다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aristokratia’는 플라톤도 알고 있었을 통상의 귀족정과는 전혀 다른 그가 고유하게 제창한 정체제제 즉 말 그대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치체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통상의 귀족정과 구분하고 플라톤의 취지도 살려 그것을 원어의 말뜻 그대로 ‘최선자 정체’로 번역한 것이다.

—————————-

* 이로써 <국가> 제4권의 논의가 끝을 맺는다. 이른바 이상 국가의 기본적인 얼개가 소개된 것이다. 그리고 분량 면에서도 <국가>가 크게 다섯 부분 즉 제1권, 제2권에서 제4권, 제5권에서 제7권, 제8권에서 9권, 제10권으로 구분된다면 전체 내용 중 5분의 2를 살핀 셈이다. 그런데 제4권의 끝부분이 보여주듯이 우리 모두 제5권에서는 당연히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논의가 다루어질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그 논의는 제5권이 아니라 제8권에 가서 이어진다. 대화상대자들이 논의 진행을 끊고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원래의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제5,6,7권에서 펼쳐진 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형식만 일탈일 뿐 실제로는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문학적 플롯에 따라 이상국가론을 철학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뒷받침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통상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난해한 철학적 주제로 평가되는 좋음의 이데아나 변증술의 문제를 비롯해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의 철학적 기초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곳이다. 더욱 힘을 내서 새로운 기운으로 제5권의 논의를 이어가기로 하자. – 제4권 끝-

* 다음 주제 :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실현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필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후 강해는 대략 한 달 간격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 이병태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1. 슈티르너는 우리에게 오로지 맑스를 경유하여 알려진 철학자다. 바쿠닌, 바우어, 푸르동이 그러했듯이 슈티르너란 철학자는 맑스의 조롱과 비판 ‘덕분’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슈티르너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확인하기에 앞서, 혹은 그럴 필요도 없이 그의 이름은 확고한 ‘악명’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악명은 구체적으로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를 통해 형성된다. 주지하다시피 맑스의 신랄한 비판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제로 맑스의 주저 가운데 상당수는 특정한 이론, 사상, 실천적 노선 또는 그 주창자를 향한 ‘비판서’들이다. 『독일이데올로기』, 『신성가족』, 『철학의 빈곤』, 『헤겔법철학비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심지어 『자본』도 ‘정치경제학비판’이란 부제를 달고 있을 뿐 아니라, 속류경제학 및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전투적 글쓰기를 감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비판은 『독일이데올로기』(이병창 번역)의 슈티르너 비판이다. 단순히 비판을 위해 한 사람에게 할애한 원고량도 놀랍지만, 글쓰기의 스타일도 전무후무하다. 우선, 늘 그렇듯 날카로운 비판이 전개되긴 하지만, 혼란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문장 및 구성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나아가, 저술 전체가 마치 ‘악플’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슈티르너를 조롱하며 심지어 그의 연인까지 들먹일 정도다. 어쨌든, 국역본 기준으로 700여쪽에 달하는 이 장대한 비아냥거림 덕분에 슈티르너는 악명이나마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맑스의 공이 크다고 해야 할까. 궁금한 것은 이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이 왜 하필 슈티르너를 향했는가 하는 점이다. 맑스의 인성부터 『독일이데올로기』 저술시점이 지닌 역사적·개인사적 긴박함까지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맑스의 비판, 그리고 그 강도는 논적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를 향한 맑스의 과도한 비판은 어쩌면 슈티르너의 사유가 지닌 영향력 또는 잠재력을 맑스가 간파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2.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 첫머리부터 이미 가장 적극적인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저 위대한 자기중심적 사람을 섬기지 말고, 오히려 자기중심적 사람 자체가 되라고 제안한다.” 신과 신성, 위대한 인류애, 왕 또는 국가가 끊임 없이 설득해 온 자기 희생, 그리고 이 희생의 열매인 다른 이들의 안녕 및 행복이란 그가 보기에 명백한 기만이다. 진정 신과 인류를 생각한다면, 이들이 드러내는 타협 불가능한 자기중심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신은 오로지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인 나”만을 자기 행위의 근거로 삼는다. 세속의 ‘선량한 도리’란 신에 근거하든 인류에 근거하든 ‘나’에겐 부질없으니, 진리와 선, 정의와 자유 따위는 신이나 인류의 관심사일 따름이다. 나는 ‘나의 것’, 나만의 것, 따라서 ‘유일한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나에게, 나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맑스가 말한 해방이 ‘현실’적인 것인 한, ‘이념’, ‘가치’, 이를 체화한 제도 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를 통한 ‘통제’ 역시 불가피하다. 슈티르너는 신, 철학, 과학, 혁명 그 어떤 미명을 내걸든 ‘나’를 강박하는 외부를 완전히 거부하며, ‘나’의 유일무이함, ‘나’의 근원성을 일깨우고자 한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순전히 ‘나’의 권역에 속하는 문제다. 해방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또 혁명이 모든 억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 21세기 민주주의의 현실, 과학을 비롯한 학문들의 현재, 현대인의 삶 등을 되돌아 보면 슈티르너의 이같은 목소리는 지금도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나아가 슈티르너의 사유는 헤겔이나 낭만주의의 기풍이 역력하긴 하지만, 영향력 있는 여러 현대 사상가들과 유사한 궤적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다양한 외적 강제와 그로 인한 ‘나’의 침몰을 치열하게 사유했기에 어떤 점에선 푸코의 권력 이론에 맞닿고, 소크라테스 이후 인류가 고대의 생기를 상실한 채 ‘정신’과 ‘진리’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에 대한 니체의 사유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맑스는 아마도 슈티르너의 이같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했기에, 그리고 그의 사유가 혁명의 길을 흐트릴 정도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구석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자의 목소리는 엇나가는 이들에 대한 규제를 함축하지만, 길끝의 영광을 선취하는 이는 도정의 고난을 잠시나마 잊게 하기에 훨씬 달콤하다. 아마도 슈티르너는 후자였고, 맑스는 압도적으로 매혹적인 후자의 힘을 간파했던 전자였을 듯하다. 맑스의 일갈에 묻힌 철학자를 우리말로 꺼내 21세기 한국의 철학도들에게 소개한 박종성의 노고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이병창(한철연 회원, 동아대 명예교수)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연인 가네코후미코가 감옥(법정)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가네코후미코가 들고 있는 책이 있다. 아마 슈트리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아닐까 한다. 1844년 작성된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국내에 무려 180년 만에 박종성 교수에 의해 번역(2023)되었다. 원문 자체에 풍자가 섞여 있어 번역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박 교수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극정성으로 마침내 번역되었느니, 감개가 무량하다.

법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자)

필자는 이 책과 악연이 있다. 이 책이 발간되자, 1846-47년에 걸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슈티르너의 글을 풍자하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작성했다. 이 책은 아마도 슈티르너의 원본보다 부피가 더 큰 약 500페이지에 걸친 비판서인데, 필자는 2019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르크스 엥겔스가 토막토막 동시에 풍자를 섞어서 인용한 슈티르너의 글을 읽었는데, 필자는 풍자한 슈티르너의 원본을 알 수 없어서 마르크스 엥겔스의 글 가운데 어느 만큼이 풍자이고 어느 만큼이 본래 슈티르너의 글인지 알 수 없어, 번역이 말 그대로 고통스러웠다. 필자는 속으로 정말 많이 욕을 했다. 이 욕은 원문을 쓴 슈티르너와 그를 풍자한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어느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필자의 무능력에 대한 동시적인 욕이었다.

슈티르너의 원본이 먼저 번역되었더라면 필자도 고통어린 수고를 덜었을 것이고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뒤늦게야 번역한 박종성 교수에게 약간 원망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 독자는 원본과 비교하여 마르크스 엥겔스가 비판한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니, 번역자 박종성 교수에게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슈티르너의 책이 번역된 마당에 슈티르너가 마르크스 엥겔스에 미친 영향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마르크스 엥겔스를 이해하는 데서는 물론하고, 슈티르너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간단하게 이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엥겔스가 말 그대로 공역한 것이다. 한 사람이 작성하면 함께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교정하면서 전개되었다. 슈티르너 부분은 먼저 마르크스가 작성하고 엥겔스가 교정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사실 슈티르너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 약간의 편차가 있다는 사실이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슈티르너와 엥겔스는 베를린 히펠 바(맥주집인지 와인바인지 모호)에서 열리는 자유인들의 모임에 함께 참석하여 서로 잘 알고 있었으나 마르크스는 이 모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이런 거부감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슈티르너와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인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평지를 보면, 슈티르너의 책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엥겔스는 처음 슈티르너의 책을 접하게 되었을 때 긍정적인 점이 있다고 평가하면서 마르크스에게 이를 소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마르크스는 아마도(?)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이 브뤼셀의 아지트에서 함께 히히덕거리며(마르크스 부인 예니의 표현을 따르면) 토론한 결과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보듯이 철저한 풍자인데, 마르크스 엥겔스는 슈티르너를 성 막스라고 하거나 돈키호테의 시종인 산초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뜻에 굴복한 것인지, 엥겔스 역시 처음부터 그런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기 힘들다.

아무튼 슈티르너의 책은 이렇게 풍자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두 사람에게 긍정적인 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엥겔스가 말년에 언급한 글에서 드러난다. 알다시피, 독일 이데올로기는 모제스 헤스가 출판을 위한 협조를 거부한 결과 출판되지 않았다. 나중에 엥겔스의 말(『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서문에서)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를 쥐들의 비판에 넘겨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엥겔스는 이 수고를 작성하는 가운데 그들은 진짜 목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그 진짜 목적은 곧 그들의 사상인 역사적 유물론의 탄생이었다.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슈티르너의 대담하고도 확고한 비판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포이에르바흐식의 유적 본질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슈티르너의 철저한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관점을 통해 비로소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빛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이 지닌 혁명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으로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의 아포리아로 알려진 두 가지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홉스의 아포리아가 있다. 즉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절대왕권을 정당화한다는 문제다. 또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아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교환 관계를 통해서 여전히 불평등이 불생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마르크스는 개인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했는데, 유일자의 절대적 자유와 그의 힘에 의한 소유를 타당으로 하는 슈티르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고민했는지 궁금하다. 만일 슈티르너식의 해결책이 있다면 굳이 우리는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사에서 슈티르너의 영향은 광범위하며, 20세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사상에 끼친 공적은 말할 것도 없이 잘 알려져 왔다. 특히 20세기 말 데리다나 들뢰즈의 철학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티르너의 사상에 대한 데리다나 들뢰즈의 평가도 흥미롭지만, 평자로서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니체에 대한 슈티르너의 영향이라는 문제이다. 19세기 말에는 슈티르너의 영향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었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오히려 그 영향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문제는 사실 니체의 사상적 발전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니체 연구자의 관심에 속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슈티르너의 유일자나 소유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흔히 유일자의 자유, 힘이라는 개념을 니체의 권력의지라는 개념과 비교되는데, 양자는 표면적으로 보면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니체의 경우 권력의지는 자기를 초월하는 힘, 즉 위버멘쉬의 힘이다. 그러나 유일자의 힘이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힘이니,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닐까?

문제야 어떻든 간에 사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슈티르너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이 일종의 풍자인지 아니면 솔직한 자기주장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풍자로 말한 것을 그의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독이 될 텐데, 마침 박종성 교수가 이 책을 번역했으니, 슈티르너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가 본격적으로 연구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한번 박종성 교수의 노고를 치하한다. 벤야민은 책은 자신의 삶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에 번역된 책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1.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1) 영혼의 세 부분(434c-441c)

 

[435b-439d]

* 소크라테스는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즉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라는 특성εἶδος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로운 나라를 닮았다면 개인의 경우도 자신의 영혼 안에 이와 동일한 부류εἶδος의 것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영혼 안에도 과연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를 살피기 시작한다.(435c)

*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처음에 사소한φαῦλος 문제라고 말을 했다가 글라우콘이 ‘아름다운 것들은 어렵다’χαλεπὰ τὰ καλά라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의 말에 수긍한다.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앞서 고찰했던 것 정도만큼의 방법으로 그 문제를 다루겠다고 말한다.(435d)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이 부분의 논의는 다소 장황할 정도로 441c까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의의 전개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에 있는 것과 똑같은 특성εἶδος과 성품ἦθος이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 각 나라는 서로 다른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의 특성과 성품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우리 지역의 경우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특성이 있고(435e) 페니키아 사람들과 이집트 지역 사람들의 경우에는 재물을 사랑하는 특성이 있다.

2) 하지만 우리가 이것들 각각을 동일한 것으로 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 가지가 있어서 각기 다른 것으로 각기 다른 것을 행하는지 어려운 문제이다.(436a)

3)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ὅτι ταὐτὸν τἀναντία ποιεῖν ἢ πάσχειν κατὰ ταὐτόν γε καὶ πρὸς ταὐτὸν οὐκ ἐθελήσει ἅμα 혹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다.(436b) 동일한 것이 동일한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436c) 팽이στρόβιλος가 동일한 곳에 그 끝을 고정하고 회전할 때, 전체가 정지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운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436d)그것들은 자신 속에 수직축과 원둘레를 가지고 있어서, 수직인 측면에서는 정지해 있는 것이고 원둘레의 측면에서는 둥글게 움직이는 것이다. 동일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436e)

4)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무언가를 얻기를 갈망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끌어당기는 것과 밀쳐내는 것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서로 반대되는ἐναντίος 것들이듯이, 욕구 일반ὅλως τὰς ἐπιθυμίας과 욕구하지 않음, 원함τὸ ἐθέλειν과 원치 않음, 바람τὸ βούλεσθαι과 바라지 않음, 영혼의 갈망과 밀쳐냄, 영혼의 끌어당김과 몰아냄 등 모두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437b-c)

5) 욕구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하나는 마실 것에 대한τὴν ποτοῦ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한τὴν ἐδωδῆς 욕구이다. 목마름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마실 것에 대한 욕구가 아니다. 목말라함 그 자체 αὐτὸ τὸ διψῆν는 그것의 본래 대상인 마실 거리 자체 αὐτοῦ πώματος 외의 다른 것에 대한 욕구가 결코 아니며, 배고파함τὸ πεινῆν과 먹을거리 βρώματος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욕구 자체는 그것의 본래 대상만을 대상으로 하고αὐτή γε ἡ ἐπιθυμία ἑκάστη αὐτοῦ μόνον ἑκάστου οὗ πέφυκεν, 특정한 종류의 이러저러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는 추가된 것들이 있을 때이다.(437d-e)

6)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τὰ μὲν ποιὰ ἄττα ποιοῦ τινός ἐστιν 반면,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τὰ δ᾽ αὐτὰ ἕκαστα αὐτοῦ ἑκάστου μόνον” (438a-b)

7) 앎ἐπιστήμη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다. 어떤 앎, 즉 어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앎이 집 짓는 일에 관련되었을 때, 그것은 건축술이라고 불린다.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것 역시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다.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이다. (438c-d)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것들의 경우에,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은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과 관련된 것이고 αὐτὰ μὲν μόνα αὐτῶν μόνων ἐστίν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것들과 관련된 것τῶν δὲ ποιῶν τινων ποιὰ ἄττα.이다. 예컨대 건강한 것과 병든 것과 관련되는 경우에 그 앎도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 되어 더 이상 단순히 앎이라고 부르지 않고 특정한 종류의 어떤 대상이 추가되어 의술이라고 부른다.(438e)

8) 목마름 자체는 많거나 적은, 좋거나 나쁜, 한마디로 말해 특정한 종류의 어떤 마실 거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439a) 그러므로 목말라하는 사람의 영혼은 그가 목말라 하는 한에서, 마시는 일 말고는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만약 무엇인가가 목말라 하는 영혼을 반대 방향으로 당긴다면, 목말라 하며 짐승처럼 그것을 마시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영혼 안에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439b)

9) 그런데 사람들이 목말라하면서도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들의 영혼 안에는 마시라고 시키는 것ὁ κελεύοντος도 있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τὸ κωλῦον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막는 것은 계산λογισμός으로부터 일어나고 반면에 데려가고 끌고 가는 것들은 그가 겪고 있는 일과 질병들에 의해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으로 계산하는 것’ τὸ ᾧ λογίζεται은 영혼 안에 있는 이성적인 것λογιστικόν이라 부르고, ‘그것으로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들뜨는 것’은 일종의 채워짐과 즐거움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것ἐπιθυμητικόν이라 부른다. 이것들은 영혼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유형εἶδος이다.(439c-d)

———————

* 소크라테스는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사소한paulos 문제라고 했다가 글라우콘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 말에 수긍한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504a-b에도 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다시 언급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길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수준의 길이 아니라 최대한 실재에 다가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적절한’(metriōs) 길임을 밝히고 있다. 즉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사소한’으로 번역된 paulos는 ‘쉽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이 말한 ‘어렵다’chalepa라는 말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그 문제를 사소하다고 한 까닭은 현재 논의 단계에서는 아직 실재에 관한 적절한 접근 방법으로서 변증술이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기존의 논의 방식과 수준에 따라 쉽게 다루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생각을 모른 채 자신의 수준에서 그 문제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원래 그 문제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그의 말에 수긍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선택한 기존의 논의 방법은 통상 소크라테스가 ‘그것이 무엇이냐?’ti esti의 문제를 다룰 때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대중들이 갖는 일상의 특수한 사례들이나 관념들이 갖는 한계들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도 논의는 욕구의 특정한 종류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욕구 자체로 다가간다.

* 1)에서 특성eidos : eidos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서 ‘형상’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곳의 eidos를 형상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이전이고 실제로 플라톤도 지금까지 이 말을 철학적인 전문 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사전적 의미(부류, 특성, 종류, 형태)로 사용해왔다는 점에서(부류-357c, 358a, 363e, 392a, 402c, 435c. 특성-432b,d, 435d. 종류-376e, 400a, 406c, 427a. 형태-397c, 433a) 여기서도 일단 ‘특성’으로 옮긴 것이다. 플라톤은 5권 476a에 가서 비로소 이 eidos를 그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용어로서 ‘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2)에서 ‘이것들’ : 사본에 따라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이 다르거나 애매하다. 스토바이오스의 수정제안을 받아들인 아담의 텍스트를 따르는 경우 ‘이것들’은 앞 문장에서 각 지역 사람들의 특성에 따른 행위들을 가리키거나 뒤에 나오는 ‘배우고 화내고 영양 섭취 등을 하는 행위들’을 가리킨다.(J. Adam 436a note 참고)

* 3)에서 ‘어려운 문제’ : 신체의 기능들은 서로 다른 신체의 부위들이 있어 그것들이 각기 고유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기능들은 과연 영혼 전체로 그 기능들을 수행하는 것인지 영혼도 신체의 부위처럼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 그 부분별로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립의 원리’를 토대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영혼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부분들 각기 서로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다.

* 3)에서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 : 소크라테스의 이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확립한 사고의 모순율(<형이상학> 1005b19)의 선구적인 언급으로서 무모순의 원리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언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언급 자체를 모순율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명제로 표명된 진술들에 적용되는 원리이지만 여기서 ‘반대되는 것들’로 언급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면 명제라기보다는 행위나 실재(entity)를 가리키고 모순 관계는 물론 반대 관계에 있는 것들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이 원리를 모순율(principle of contradiction)과 구분하여 ‘대립의 원리’(principle of opposition)라고 부른다.

* 3)에서 ‘동일한 것에 따라’kata tauton라는 말과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pros tauton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 논란이 있다. 모순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에는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라는 표현은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 말을 ‘동일한 것에 따라’와 중복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담은 ‘동일한 것에 따라’는 대립자의 원리가 적용되는 대상의 부분들과 관련된 기준이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는 적용되는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과 관계되는 기준이라고 주장한다.(J. Adam. note 참고)

* 6)에서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반면에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은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여러 사례를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말이다. 이를테면 ‘목마름’의 경우 특정 종류의 것들은 ‘뜨거운 것에 대한 목마름’, ‘많이 목마름’ 등 특정 정도나 특정 종류의 목마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차가운 것에 대한 목마름’, ‘적게 목마름’ 등으로 추가될 수 있다. 특정 종류의 목마름이 다양한 만큼 그 목마름의 대상으로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목마름’은 모든 사람의 욕구가 하나같이 ‘이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으로 똑같다는 점에서 결단코 다양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로운 것’ 역시 ‘더 큰 이로운 것’ ‘보다 작게 이로운 것’ 등으로 정도에 따라 다르게 추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목마름의 고유한 본래 대상은 이러 저러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이 아니라 ‘마실 거리 자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요컨대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되어 있다. ‘배고파함’과 ‘먹을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욕구를 특정 종류들이 아닌 ‘그 자체’로만 규정하려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대립의 원리’를 통해 또 다른 ‘그 자체’로서 반대의 욕구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비로소 영혼 안에 그 욕구와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7)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라고 말한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 종류의 대상에 대한 앎으로서 특정 기술이다. 그렇다면 특정 앎의 대상이 아닌 앎 자체의 고유한 대상으로서 그 대상 자체는 무엇일까? 아직까지 그것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나중에 그 대상 자체는 특정한 종류의 앎들을 앎으로서 규정해 주는 총체적인 앎의 본질로서 ‘형상’으로 드러난다.

* 8)에서 드디어 앞서 언급한 ‘대립의 원리’가 ‘목마름 자체가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적용되고 그것은 영혼의 부류들과 관련하여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지는가가 드러난다. 즉 영혼의 한 부류로서 목마름이라는 욕구는 그 욕구 이외에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영혼 안에 무엇인가가 짐승처럼 끌고 가는 그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우리들 모두는 비록 목이 말라 무엇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가득해도 만약에 그것을 마셨을 때 병이 나거나 죽는다면 분명 그것을 마시기를 주저하고 거부한다. 이것은 마시라고 시키는 것, 즉 목마름이라는 욕구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 즉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이 우리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자신의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혼 안에는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란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하는 영혼의 또 다른 어떤 부류로서 이른바 ‘이성적인 것’이다. 결국, 영혼 안에는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 이외에 그것과 구분되는 ‘이성적인 것’ 이 하나의 유형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439e-441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제3의 유형으로서 ‘기개적인 것’이 영혼 안에 따로 있음을 논증하고 그 특성에 관해 논의한다.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그런데 기개θύμος와 관련되며 ‘그것으로 우리가 분노하는 것’τὸ ᾧ θυμούμεθα이 있다. 이것은 앞의 것들 중 어느 한 유형과 본성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다른 세 번째 유형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분노의 예로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의 경우를 든다. 레온티오스는 사형집행인 옆에 있는 시체들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동시에 그러는 자신을 역겨워하면서 갈등하다(439e) 욕구에 지배된 자신에 대해 분노를 터트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 분노는 욕구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이고, 때때로 욕구적인 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πολεμεῖ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440a)

2)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λοιδοροῦντά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θυμούμενον,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이기라도 하듯 그의 기개는 이성의 동맹군이 된다.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는데도 그에 반대하여 기개가 욕구들과 결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440b)

3) 자신이 부정의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로 인해 굶주림이나 추위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품위 있는γενναῖος 사람일수록 분노는 덜하다. 반대로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부아가 끓고ζεῖ 사나워져서χαλεπαίνει 그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편과 동맹을 맺고συμμαχεῖ 갖은 힘든 일을 겪어도 그런 일들을 견디면서 이겨낼 것이고, 뜻을 이루거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아니면 목동νομεύς에 의해 개κύων들이 진정되듯 자신 곁에 있는 이성λόγος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정될 때까지 고귀하게γενναῖος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개들이 양치기ποιμήν에게 순종하듯이 보조자ἐπίκουρος들이 나라의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다. (440c-d)

4) 기개적인 것θυμοειδής과 관련해서 좀 전에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욕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영혼 안에 내분στάσις이 일어났을 때, 이성적인 것을 편들어 무기를 든다. 이것은 이성적인 것과도 다르고 욕구적인 것인 것과도 다른 제 삼의 것τρίτος이다. 나라가 돈벌이하는 집단χρηματιστικόν, 보조하는 집단 ἐπικουρητικόν, 숙고하는 집단βουλευτικόν, 이렇게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듯이 영혼에서도 이 기개적인 것이 나쁜 양육으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 한, 본래 이성적인 것을 보조하는 것으로 따로 있다. 이것은 욕구적인 것과도 이성 부분과도 다른 어떤 것이다. 그건 아이들παίδιον과 짐승들θηρίον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날 때부터 화θύμος로 가득 차 있지만, 계산 능력λογισμός은 제가 보기에 어떤 아이들은 결코 갖추지 못하고 대개의 아이들은 늦게서야 어느 땐가 갖추게 된다. 호메로스(<오뒷세이아> 20.17)도 서로 다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꾸짖는 상황, 즉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에 대해 계산을 한 부분이 비이성적으로 분노하는 부분을 꾸짖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440e-441b)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

————————————————-

* 1)에서 ‘분노하는 것’ : 영혼의 부분에는 욕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이외에 제삼의 유형으로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 또한 대립의 원리에 의해 발견된다. 즉 기개적인 것은 레온티오스의 경우가 보여주듯 욕구적인 것의 발생을 막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욕구적인 것들에 분노하여 그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점에서 욕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욕구적인 것은 반성이나 주저함이 없이 그대로 그 욕구를 표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이성적이지만 기개적인 것은 비록 계산능력은 없어도 그러한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들과 싸우고 분노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의 동맹군이 된다.

* 레온티오스의 경우 그가 시체에서 성기를 보고 싶은 자신의 욕구에 분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레온티오스의 경우이건 호메로스가 묘사하고 있는 경우이건 그것들 모두는 기개적인 것이 인간의 본원적 자존심 내지 나름의 명예 의식과 깊숙이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들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지적 수준이나 성격적 특성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름의 자존심과 명예 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손상될 경우 예외 없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만큼 그것은 개인의 행위 동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2)에서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다’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인 것, 즉 영혼의 이성 부분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기개와 욕구는 이성의 통제를 받아들인다. 물론 기개와 욕구에 이성이 끌려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조차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함에도 기개와 욕구가 그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성 자체가 교육과 양육의 잘못으로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결코 기개가 욕구에 결탁하거나 욕구의 힘에 이성이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일시적인 내분, 즉 심리적 갈등은 있어도 이내 조절 통제된다.

* 3)에서 ‘분노는 덜하다’ ; 사람들은 때때로 부정의한 짓을 하다가 고통을 치른다. 그러나 품위 있는 사람일수록 그 고통을 정당하다 여겨 덜 분노한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누구나 하나같이 분노를 터트리며 정의로운 편과 동맹을 이루어 어떠한 고통도 잘 견디며 이겨낸다.

* 4)에서 ‘그건 아이들과 짐승들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 아이들과 짐승들의 경우에도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들과 동물들의 경우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빼앗기는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내거나 크게 울부짖는다.

*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은 이곳뿐만 아니라 581a-b에서 추가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그곳에서 기개적인 부분은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으로 언급된다. 이와 관련한 기개적인 것에 대한 추가적인 해설은 그 부분을 다룰 때로 미룬다.

—————————————-

* 이상에서 살핀 영혼의 세 부분과 관련하여 종합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1) 인간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었다. 호메로스도 이미 노오스(noos)와 튀모스(thmos)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조차 그 마음의 작용을 이른바 영혼psychē으로 부르진 않았다. 호메로스 시절에 psychē라는 말은 다만 사람이 죽었을 때 몸에서 빠져나가 저승에서 그림자 비슷한 것으로 머무는 것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일리아스> 22.362) 물론 그때도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프쉬케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노오스, 튀모스, 메노스(menos) 등이 사용되었고 마음의 작용을 담당하는 주체도 횡경막이나 허파를 의미하는 phrenes이나 심장을 뜻하는 ker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이전 시절에는 인간의 마음 작용 자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침내 이전까지 단편적으로 논의되었던 인간의 마음 작용 일체에 대한 논의가 플라톤에 의해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져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성찰되기 시작했고 이후 영혼의 문제는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서양의 정신사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2) 그런데 플라톤이 마음의 작용 일체를 영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천착해 들어갔지만,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의한 것은 <국가>가 처음이다. 초기 대화편들에서도 영혼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그것의 부분들에 대한 논의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파이돈>에 와서 <국가>와 비슷한 종류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영혼과 신체의 대립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신체를 ‘신체적 욕구’로 표현하기도 한다.(66c) 플라톤이 당시 신체 자체도 욕구를 지닌다고 여겨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와 그곳의 논의를 함께 비교해보면 이 신체적 욕구는 내용상 <국가>에 나오는 영혼의 욕구 부분과 크게 차이가 없다. <국가>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혼의 세 부분이 최소한 영혼에 관한 이전 논의들의 발전적 결과들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플라톤 자신 사상적 원숙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다양한 마음 작용과 욕구의 특성들 일체를 신체가 아닌 영혼의 작용들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

3) 영혼의 세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최종적인 영혼의 상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영혼은 그러한 부분들의 유기적 복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영혼의 작용은 오늘날 뇌의 물질적 생리화학적인 작용의 종합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최소한 서로 다른 마음의 작용과 특성들이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플라톤의 발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 이곳에서 영혼의 부분들은 각기 계산하고 사유하는 기능, 화를 내는 기능, 욕구하는 기능 등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플라톤에게 영혼의 기능으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지각과 인식의 기능이다. 이러한 지각과 인식이 영혼 안에서 어떤 부분들의 어떤 상호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는 추후 살피게 되겠지만, 영혼의 이성 부분은 단순히 어떤 주어진 것에 대한 계산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사유와 인식 기능 전반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중에 가면 그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 욕구임이 밝혀진다.

5) 플라톤은 9권 580d에서 실제로 다음에 다룰 ‘기개적인 것’까지 모두를 욕구에 포함하여 욕구 또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목말라하며 마시라고 욕구를 부추기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시 그러한 욕구를 막으려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다. 그러니까 욕구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의 한 부류로서 ‘욕구적인 것’으로서 욕구가 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 안에는 각기 고유한 어떤 것을 바라고 원하는 ‘이성적인 것’으로서 욕구와 ‘기개적인 것’으로서 욕구도 함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곳에서 플라톤은 그것들 각각이 욕구인 한, 각각은 자신만의 특유한 즐거움도 하나씩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이성적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철학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욕구인 것이다. 이성은 단순히 주어진 것을 계산하고 지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는 이념이 있는 것이다.(580d-581e)

6)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인다.’는 말을 뜯어보면 영혼의 계산하는 부분과 화를 내는 부분, 욕구하는 부분이 서로 갈등도 하면서 행동의 동기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혼의 각 부분은 인간의 행위 동기의 원천이 된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인간의 행위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신체는 행위 동기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감각 자료를 제공하지만, 그것을 지각하고 행위의 동기로 촉발케 하는 것은 영혼이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영혼의 욕구 부분이나 기개 부분의 경우 분명 행위의 동기를 촉발하지만, 그곳에서 촉발된 동기들 자체가 곧바로 특정 행위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영혼의 부분들이 촉발한 동기들을 이성 부분이 모두 종합하여 자신의 욕구를 기준으로 계산한 연후에야 비로소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요컨대 영혼은 인간 행위 동기의 원천이되 그 동기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건강하면 아무런 흔들림 없이 다른 영혼의 부분에서 촉발된 동기들을 자기 주도로 통제하여 행위로써 표출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다른 동기들에 압도되어 이끌려가거나 반대로 그 동기들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7) 이점에서도 흔히들 ‘욕구적인 것’이 부도덕한 행위의 근본 동기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욕구적인 것’은 먹는 것, 마시는 것, 돈벌이 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 아니듯이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생산자 집단을 돈벌이 하는 집단으로 부르는 것 역시 폄하가 아니라 다만 생산자들이 고유하게 욕구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대부분 돈을 통해서 충족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581a 참고) 이렇듯 ‘욕구적인 것’은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맹목적으로 직진하듯 제 욕구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것은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할 경우 나라를 이롭게 하거나 도덕적인 행위를 생산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이성적인 것’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도구적 이성, 즉 도구적 계산능력으로 전락하여 욕구적인 것의 무분별한 표출을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더욱 악화시키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행위가 도덕과 부도덕이냐 하는 것은 ‘욕구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영혼의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8) 플라톤 철학에서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는 한, 욕구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거스르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이성을 정념이나 욕망의 노예로 파악하는 흄(D. Hume)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은 플라톤이 보기에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구조로 변질된 상태를 욕망의 자연적 상태로 착각하고 있는 단견일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플라톤 철학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다. 이렇듯 플라톤은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이성적 자아를 확립한 최초의 사상가이자 가장 강력한 주창자로 꼽힌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우주적 이성을 본질로 한 플라톤의 이성적 자아는 데카르트 이후 선한 우주의 소멸과 함께 오늘날 무도한 자본의 이성으로 전락하여 이른바 도구적 이성이 인간과 우주를 난도질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우주적 연대를 복원하는 길이 현대 사회의 뿌리 깊은 비참성을 극복하는 길이라면, 개인주의적 미시담론과 욕망론에 갇혀 플라톤을 고루하고도 순진한 이성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현대인들의 관념 속에 마치 진실인 양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간 욕망구조의 등질적 획일성을 감연히 깨부수는 것에 미래 철학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선한 우주와 인간 본성의 근원적 다양성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공동체적 연대와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위한 토대이자 동시에 플라톤 정치철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9) 플라톤에게 영혼의 세 부분의 기능은 나라의 세 부류의 역할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그 관점에서 앞의 경우는 나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 나라를 부정의하게 만드는 것은 생산자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교육과 양육에 실패한 통치자들의 잘못 때문이다.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제대로 역할을 하므로 설사 생산자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은 교정 할 수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이상 국가에서 생산자는 정치 역할을 모두 통치자에게 절제라는 믿음으로 위임했기 때문에 설사 교정 사항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돌아가며 통치를 맡는 통치자들의 몫이다. 물론 플라톤에 따르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면 이상 국가도 타락할 수 있다. 그런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이 금전욕으로 변질되어 생산자 욕구를 침해하게 되고 그에 따라 생산자들 역시 통치자와 수호자들에 대한 의심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물질적 금전욕으로 획일화되면서 배타적 이기심을 기초로 한 민주정이 출범하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정이 되면 생산자들 즉 대중들도 정치에 대한 욕구를 갖고 참여하게 되고 대중들의 뜻대로 그것이 선동에 의해서건 아니건 그들이 원하는 통치 권력이 세워지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분석한다.2

10) 현대인들은 이렇게 맞이한 민주정을 최선의 정체로 여기지만 플라톤은 민주정이 초래한 물질적 욕망의 획일화 자체가 또다시 기득권자들의 이권 증대의 토대로 이용되면서 종국적으로 민주정을 참주정체로 전락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당대 민주정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근본 이유는 민중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욕망의 획일화가 참주정의 모태인지도 모른 채 물질적 욕망을 모두의 자연적 본성인 양 부추겨 온 민주정의 선동가들과 시인들, 즉 당대 지식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물질적 욕망은 원래부터 대중들, 즉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대중들도 이제 생존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서 본래의 다원적 욕망구조는 이렇게 지배 엘리트들과 기득권자들의 타락을 기점으로 획일화된 물질적 욕망구조로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분석하고 천착한 당대의 정치적 현실상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의 분석과 성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최소한 우리는 플라톤이 평생에 걸쳐 비판하고 공격했던 핵심적인 대상이 왜 대중이 아니라 타락한 지식인들 즉 타락한 지배 엘리트들이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1) 정치적 책임은 정치적 권한을 가진 자의 몫이다. 그런데 이제 민주정체에서는 대중이 정치적 권한을 가졌으므로 책임 또한 대중이 가져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정의 타락 원인도 대중에게 돌려져야 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민주정 하에서 대중들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는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래서 플라톤도 당연히 민주정 아래 대중들의 무지를 비판한다. 그러나 대화편을 보면 아테네인들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공격은 기본적으로 대중보다는 지배 엘리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민주정에서조차 실제로 그 체제를 이끄는 주체가 대중이 아니라 선동정치가로 대표되는 지식인들과 기득권자들이라는 것을 궤 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대중들의 정치적 역할과 능력을 원천적으로 폄하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가 지니는 현실적 한계라는 점에서 플라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현실을 돌아보면 플라톤의 진단이 설득력을 얻는 징후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플라톤으로서는, 당대 아테네 민주정이 선동정치가들에게 장악되어있는 한, 정치체제 중 가장 참혹하고 폭력적인 참주정으로 전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통해 실천적인 정치인을 배출함과 동시에 당대 현실을 극복하는 장기적인 정치철학적 프로젝트로 당대의 시대적 조건에서 현실적으로 철학 교육의 수용에 가장 빠르고 유효한 소수 뛰어난 자들을 뽑아 오랜 기간 혹독한 수준의 철학 교육을 통해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담보하는 철인왕정을 꿈꾼 것이다. 그는 격동의 시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결국 고도의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갖춘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한,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평생의 사색을 담아 이상국가론을 펼치게 된 것이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오늘날의 시대 조건에서 보면 극히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의 정치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정치의 지성화와 자연의 본성으로서 욕망구조의 이질적 다양화라는 이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정치철학적 화두이자 푯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번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이 다시 태어나 오늘날 민주주의 현실에서는 철학자왕은 가히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대신 시민 대중들의 지성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대중에 대한 철학 교육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일로매진했을 것이다. 이미 기득권으로 찌들대로 찌든 지배 엘리트들을 각성시키기보다는 대중을 철학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 내지 변혁에 이르는 훨씬 더 가까운 지름길인 것이다.

 

* 441c에서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는 말은 나라에 있는 덕들 즉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개인의 영혼에서도 그에 상응하여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동일하게 있으며 그 세 부분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는 한,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 모두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에 상관없이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 또한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이상 국가 수립의 마지막 주제로서 마침내 개인의 주요 덕목들을 다루면서 정의로운 개인이 부정의한 개인보다 행복한지 다시 또 한 번 따져 묻는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5월 월례발표회 “고대 중국의 비극적 세계관과 인간의 조건 -맹자의 명론을 중심으로-” 영상(발표:오주연)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도 한철연 월례발표회는 학문후속세대 발표로 진행합니다.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오주연 회원의 발표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5월 월례발표회

주제 : 고대 중국의 비극적 세계관과 인간의 조건- 맹자의 명론을 중심으로 –
발표자 : 오주연(건국대학교)
토론자 : 박영미(한양대학교)
일시 : 2023년 6월 15일 오후 7시 – 9시
방식 : 온라인 줌(zoom)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gnZlWP-Z-N4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㊿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2) 절제, 정의(430d-434c)

 

[430d-432a]

* 나라에서 알아보아야 할 덕으로서 절제σωφροσύνη와 모든 탐구의 목적이 되는 정의δικαιοσύνη가 남아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는 우선 절제부터 살피기로 한다.(430d) 소크라테스가 절제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순서대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절제는 앞의 것들보다는 일종의 화합συμφωνίᾳ과 조화ἁρμονίᾳ를 더 닮았다. 절제는 일종의 질서κόσμος이며 어떤 즐거움ἡδονή과 욕구ἐπιθυμία들의 제어ἐγκράτεια이다.

2) 사람들은 이 제어를 ‘자신보다 강하다’κρείττω αὑτοῦ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보다 강한 내가 보다 약한 나를 이기는 것으로 (430e)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τὸ βέλτιον이 ‘더 못한 부분’τὸ χεῖρον을 제어하는 것이다.

3) ‘자기 자신보다 약하다’ἥττω ἑαυτοῦ라는 표현은 나쁜 양육과 어떤 교제ὁμιλία 때문에 ‘더 못한 다수’χείρονος πλῆθος에 의해 ‘더 나은 소수’σμικρότερον τὸ βέλτιον의 부분이 지배되는κρατηθῇ 경우이며(431a)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방탕하다고ἀκόλαστος 부른다.

4) 요컨대 새로운 나라가 절제 있고 자신보다 강한 나라라면 그 나라는 나라에서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다스리는 나라이다.(431b)

5) 나라에는 자신들에게서 다종다양한 많은 욕구들과 쾌락ἡδονή과 고통λύπη들이 발견되는 사람들로서 아이들παισί과 여자γυνή와 가내 노예οἰκέτης 그리고 자유인ὁ ἐλεύθερος들 중 다수의 평범한φαῦλος 사람들이 있다.(431b)

6) 그리고 나라에는 또 지성νόος과 올바른 믿음ὀρθῆ δόξα을 동반하고 추론λογισμός에 의해 인도되는 단순하고도ἁπλός 균형 잡힌μέτριος 욕구들을,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431c)

7) 절제 있는 나라는 전자에 해당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들이 상대적으로 더 적은 수의 더 훌륭한ἐπιεικής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들과 그들의 현명함φρόνησις에 의해서 지배되는 나라이다.(431d)

8) 이처럼 절제 있는 나라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다스리는ἄρχουσ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ἀρχομένοις 자들이 똑같은 믿음δόξα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431e)

9) 그러므로 절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양쪽에 다 있다.(431e) 용기와 지혜는 제각기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 있지만, 절제는 나라 전체에 걸쳐 있으면서 현명함을 기준으로하든 완력ἰσχυρός을 기준으로 하든, 수πλῆθος든 재물χρῆμα이든 그밖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하든,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가장 강한 자들, 그리고 중간이 되는 자들이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하므로 일종의 조화와 닮았다.(432a)

10) 그러므로 절제는 ‘생각의 일치’ὁμόνοι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옮다. 즉 나라에서든 한 사람에서든 더 못한 것과 더 나은 것 중 어느 쪽이 다스려야 하는가를 두고 양쪽이 ‘본성에 맞는 화합을’κατὰ φύσιν συμφωνίαν 이루는 것이 절제이다(432a)

————————–

* 위의 글 3)에서 ‘자기 자신보다 강하다’는 표현은 <법률> 626e에서도 여기와 같은 방식으로 나라에 비슷하게 적용되어 있다.

* 위의 글 5)에서 여자γυνή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나중에 여성도 수호자로서 철학적 지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견해와 상충된다. 이것도 다만 그러한 주장이 워낙에 파격적인 주장인데다 아직 제기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일단 여기서는 시대 통념에 따라 언급된 것이라 하겠다.

* 위의 글 6)에서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이라는 표현이 비로소 나오는데 이전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용기가 믿음이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은 바로 이 올바른 믿음을 가리킨다.

* 위의 글 7)에서 보듯 소크라테스는 현명함(phronēsis)을 지혜(sophia)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

* 절제로 옮긴 그리스어 sōphrosynē는 앞서 언급한 대로 지혜, 용기, 정의와 더불어 4주덕의 하나로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에서 분별과 사려를 갖춘 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 모종의 겸양과 염치, 자기 절제를 표현할 때 사용되어온 개념이다. 그리고 그 말이 군사용어로 쓰일 때는 중갑보병들이 방패와 창을 들고 전투 대형을 이룰 때 대오를 무너트리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하지 않도록 자신의 자리를 부단히 살펴 가며 지켜내려는 정신 상태 즉 자신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치열한 자기 인식과 실천을 의미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카르미데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도 그리고 여기에서 절제를 일종의 질서이자 즐거움과 욕구에 대한 제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절제에 대한 그러한 전통적인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389d 포함) 그러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절제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에서 출발하되 절제를 그가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에 걸맞은 덕목으로 새롭게 정립하려 한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자기 제어로서 절제를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것’으로 정립한 후 그것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즉 절제 있는 나라란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듣는 순간 벌써 거북함부터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 말은 지적 수준이 낮은 다수의 대중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서 그 분수에 맞게 지적 수준이 높은 소수의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인 양 들리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분수를 알라는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절제의 의미와 매우 상통하는 말이다. 다만 그 우리말이 통상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꾸짖거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책망할 때 쓴다는 점에서 거북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사회적 계층 어느 한쪽의 덕이 아니라 나라 구성원 모두의 덕이라고 말한다. 절제 있는 나라는 일방의 순종이 아니라 쌍방의 덕에 기초한 쌍방의 일치된 생각에 따라 세워진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우리말로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은 다수 대중뿐만이 아니라 소수 통치자에게도 함께 요구되는 덕목이다. 소수 통치자들도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통치자는 나랏일 전체를 잘 아는 능력은 있으나 여느 장인들처럼 집도 구두도 못 만들고 농사도 지을 줄 몰라 스스로 먹을 것, 입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통치자는 어떤 재산도 가질 수 없어 언감생심 시민의 재산을 탐하거나 빼앗아도 안 되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도 연애나 결혼조차 참아야 하고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꾸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역시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나랏일 전체를 알기 힘들고 외적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능력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나랏일 전체를 알고 외적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고 공익에만 힘쓰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지배를 맡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통치자나 시민들은 서로 자기의 분수를 아는 한,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사실을 똑같이 알아차린다. 절제를 일치된 생각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 그리고 ‘보다 낫다’와 ‘보다 높다’라는 우열의 차이도 모든 분야 어느 일방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열의 차이들은 지적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완력과 수, 재물, 일반 기술 등 모든 기준에 적용되어 경우에 따라 나은 자와 못한 자가 다르게 나타난다. 지적 능력과 완력은 소수 지배자들이 우월하지만 수와 재물에서는 시민 대중이 통치자들보다 우월하고 일반 기술 또한 뛰어나다. 그리고 그것들은 두 집단 상호간의 시기와 침탈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부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가장 강한 자들, 그리고 중간이 되는 자들이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조화와 닮았다. 물론 소수 통치자들의 권력이 갖는 막강한 위력을 고려하면 분명 이들의 관계는 위계적이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계적 구조를 불평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그러한 위계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면 정의로운 나라에서 위계는 다만 역할의 차이일 뿐 위계가 곧 차별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역할 상 중요한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소수의 통치자이건 다수의 평범한 시민이건 자신의 천성과 욕구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면서 그 역할의 성취를 통해 모두가 각자 행복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그들 모두는 차별 없이 동등하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는 서로 자기의 분수를 알고 충분히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만한 이유를 가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 좋다는 것에 합의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치된 생각으로 순전히 역할 분담의 차원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화합이자 조화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 요컨대 자기 제어로서 절제는 개인의 경우에는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것’이고 절제 있는 나라란 ‘나라 각 계층이 자기 제어를 통해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서로 일치된 견해 즉 똑같은 믿음을 지니는 나라’이다. 그리고 절제는 나라의 계층 내지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 제어를 통해 갖게 되는 똑같은 믿음이자 일치된 견해라는 점에서 특정 계층이나 개인에게 속한 덕이 아니라 모든 계층 모든 개인에 다 걸쳐있는 덕이다.

* 이처럼 정의로운 나라는 절제라는 앎을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나라이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근대 이후의 확고한 경험과 그러한 경험에 기초해서 확립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의 나라 사람들의 절제에 대한 믿음은 가히 무지할 정도로 소박하고 낙관적이다. 오늘날 권력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다. 20세기 이래 플라톤에게 가해진 수많은 비난에 여전히 설득력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절제 있는 나라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기 그지없다. 그 나라는 나라의 구성원들을 좀 더 나은 사람과 그보다 못한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차별하고 있으며 그것을 근거로 다수 평범한 대중들에 대한 소수 엘리트의 정치적 지배와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하고 있다. 모두가 절제를 통해 같은 믿음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정작 이곳에서는 지배자의 절제 내용은 거론되지 않고 반대로 다수 평범한 피지배자들인 대중에게 이성적 능력이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배자에 대한 의존과 존경을 절제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특히 통치자와 보조자로 구성되는 수호자 계층이 기본적으로 전사라는 점에서 보면 절제 있는 나라란 소수 엘리트 통치자들과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대중의 욕구가 강제로 통제되는 일종의 군사 독재국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배타적 이기심을 가진 개인들이 상호간의 안전과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성립된 사회계약론적 국가론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얼마나 무망(無望)하고 참담한 것인지에 대한 뼈저린 체험에서 비롯된 일종의 개인들의 배타적 이기심과 의심에 기초해서 성립된 체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지배자 계급과 피지배자 계급의 화합과 조화는 사회관계 자체가 개인적 이해관계의 총화인 한, 터무니없는 공상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형이상학적인 괴물에 불과하다.

* 플라톤의 나라뿐만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부와 권력 및 교육 수준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 두 나라 모두 그러한 차이들이 어떤 형태로건 불합리한 차별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나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플라톤은 우선 문제 영역마다 뛰어난 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정치 영역에서도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랏일이 갖는 규모의 크기와 중대성 그리고 공적인 특성상 그 정치 전문가는 고도의 전문성과 더불어 높은 도덕성이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일반 시민 대중들은 원천적으로 그 전문가에 포함될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뛰어난 자질과 소양을 갖춘 자들만이 정치가 즉 정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러한 정치가를 길러내기 위한 최소 30년 이상 장기간의 교육과 훈련, 공동생활 및 사적 소유의 금지 프로그램을 제도적으로 구축하고 그 혹독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만을 통치자로 선발하여 그들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층과 신분에 따라 부와 권력 및 교육 수준의 차이가 존재하고 영역과 사람에 따라 전문적인 문제 해결 능력도 분명 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정치적 문제 영역에서는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평가할만한 전문가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신분이나 출신, 학력과 경력을 내세워 능력 있는 정치 전문가로 자처하는 자들이 더 큰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경험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는 부와 권력 및 교육 그리고 전문 영역에 상관없이 모두의 참여가 보장된 선거를 통해 다수가 선택한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들을 통해 제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각성을 통해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발전과 진보를 이룩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다수 시민 대중들의 선택으로 정치적으로 참담하고 어두운 격변의 세월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선한 권력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시행착오를 통한 확실한 개선을 믿었으나 착오가 초래한 비극의 크기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나치 정권을 선택하고 광기 어린 지지를 보내며 유태인 학살에 침묵했던 사람들도 20세기 초 서구 유럽 민주주의 시대를 살던 시민 대중들이었고, 오늘날 소수 지배 엘리트들과 자본이 생산한 가치와 담론들을 마치 자신들의 가치 및 정치의식의 반영인 양 무비판으로 환호하며 반대 세력을 무차별 혐오하는 사람들도 현대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 대중들이다. 하물며 서구 유럽은 물론 선진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에서조차 인종주의와 배타적 국수주의로 무장한 극우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류 세력으로 나날이 득세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에는 그 수정을 위한 견제와 비판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촛불 혁명을 통한 정치적 변혁이 그것도 역사상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공적인 무혈혁명의 형태로 구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그러한 수정과 비판의 체계가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나라의 2016년 촛불 혁명도 그렇고 10여 년 전 튀니지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이른바 재스민 혁명 등 수많은 시민 저항 운동들 역시 얼마 안 돼 다시 반동화 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정치·사회적 변화를 담보하는 토대로서 교육조차 소수 기득권자에 의해 견고한 신분 재생산의 기지로 장악되어 있어 전망은 더욱 어둡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자본이 지배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자 형식 민주주의로 비판하는 까닭도 그곳에 있다. 소수 지배 권력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선택한 비판과 의심의 체계로서 민주주의 또한 전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절망감 이상으로 오늘날 큰 난관에 봉착해 있다. 게다가 그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황금처럼 보일 정도로 21세기 대명천지를 사는 오늘날에조차 플라톤 시대 참주정체처럼 정치적 의사결정 자체를 독점하고 시민들의 비판을 폭력으로 억누르며 폭압적인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들도 여전히 허다하다.

* 21세기가 당면한 이 모든 한계가 원천적으로 근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잉태한 왜곡된 국제질서와 냉전적 패권주의 그리고 그 이후 세계 경제를 주도해온 서구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이념의 하나로서 플라톤의 공동체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정치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플라톤은 당대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아테네의 제국주의 및 패권주의를 시종일관 비판하면서,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으로 획일화된 인간의 욕망 구조 자체가 변화되지 않는 한, 인간적 삶의 구현과 나라 간 평화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결국 좌절하고 마는 것임을 이미 2,500년 전부터 경고해왔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오늘날 다시 태어나 철학자 왕들의 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신 이른바 집단지성을 통한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연대를 목도한다면, 당연히 그는 변혁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교육을 통한 철학자 시민 계급의 등장과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일지도 모른다. 희망은 여전히 지성에 있다. 문명적 위기에 둘러싸인 혼돈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진보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망을 끊임없이 불태우는 일군의 깨어있는 시민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날 플라톤 정치철학의 의의는 다름 아니라 인간적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대중의 반성적 자기 인식을 통한 정치의 지성화’에 있다할 것이다.

 

 

[432b-434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정의를 살핀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정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우리 자신이 어떤 식으론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발 앞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그걸 보지 않고 어디 먼 데를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이다.(432b-432e)

*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처음에 나라를 세웠을 때부터 시종일관 관철해야 하는 것으로 정했으며 정의는 ‘그것 아니면 그것의 한 형태’ἤτοι τούτου τι εἶδος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εἰς ὃ αὐτοῦ ἡ φύσις ἐπιτηδειοτάτη πεφυκυῖα εἴη에 전념해야 한다.ἐπιτηδεύειν는 것이었음을 환기케 한 후에(433a) 정의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정의는 다른 많은 사람한테서 듣기도 했고, 우리 스스로도 자주 언급했듯이 정의는 ‘자신의 것을 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τὸ τὰ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 καὶ μὴ πολυπραγμονεῖν이다.(433a)

2) 정의는 지혜, 용기, 현명함이 나라에 생겨날 수 있게 하는 힘δύναμις이자 그것들이 보전σωτηρία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433b). ‘자신의 것을 함’τὸ τὰ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의 구현이 정의라고 함도 그 때문이다.(433b)

3)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가운데 어느 것이 나라를 좋게 만드는데 가장 기여하는 것인지는 가려내기 힘들다. 요컨대 정의는 나라의 덕과 관련하여 나라의 지혜와 절제와 용기에 필적한다.ἐνάμιλλος(433d)

4) 재판δίκη할 때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하는 것’ἕκαστοι μήτ᾽ ἔχωσι τἀλλότρια μήτε τῶν αὑτῶν στέρωνται이 재판의 목표이듯이 정의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행함’ἡ τοῦ οἰκείου τε καὶ ἑαυτοῦ ἕξις τε καὶ πρᾶξις이다(433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가 나라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을 경우 생기는 위험즉 부정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를테면 목수가 구두장이가 서로 도구와 지위를 바꾸거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한다면 그 정도는 나라에 큰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장인이거나 무슨 다른 돈벌이하는 사람이 어떤 것에 고무되어 다른 계층 내지 부류에 들어가려 들거나, 전사 중에 한 사람이 자격이 안 되는데도 숙고하는 수호자 부류에 들어가려 하거나 이들이 서로의 도구와 지위를 바꾸는 경우, 또는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는 경우 이들의 변화μεταβολὴ와 참견πολυπραγμοσύνη은 나라에 파멸ὄλεθρος을 가져온다.(434a-b) 요컨대 세 부류 상호간의 참견과 변화는 나라에 가장 큰 해악βλάβη이며, 아울러 그건 최대의 악행 κακουργία 즉 부정의ἀδικία이다.(434c) 그리고 반대로 돈벌이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부류, 보조하는ἐπικουρικός 부류, 수호하는φυλακικός 부류가 자신에게 속한 일을 하는 것, 즉 이들 각각이 나라에서 자신의 것을 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나라를 정의롭게 하는 것이다.

—————————-

* 1)에서 ‘우리 스스로도 자주 언급했듯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지금까지 정의를 그렇게 정의한 부분은 없다. ‘다른 많은 사람들한테서 듣기도 했다.’는 말도 433c에서 그렇듯이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의를 언급하는 것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

* 드디어 소크라테스는 탐구의 최종 목적인 정의를 살핀다. 그런데 그는 정의가 처음에 나라를 세울 때 정했던 분업의 원칙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분업의 원칙은 여기서도 다시 언급되고 있듯이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이러한 분업의 원칙의 한 형태로서 규정한 후 우리가 이미 각 논의 단계에서 수차 언급한 대로 정의를 ‘자신의 것을 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지혜, 용기, 현명함이 나라에 생겨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그것이 온전하게 유지 보전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언급한다. 즉 정의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 일을 수행하는 것이 갖는 정당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줌으로써 통치자는 통치자답게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고, 수호자는 수호자답게 용기로써 나라를 수호할 수 있게 해주며, 통치자들과 수호자들 그리고 생산자들 모두 나라의 구성원들답게 절제로써 서로 화합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정의는 공동체로서 나라 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공적 책임감이자 동시에 영혼의 보살핌을 통해 개인들 각자가 누리는 자부심의 토대인 것이다. 이처럼 정의의 덕을 바탕으로 나라의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 역할에 맞게 지혜와 용기, 절제의 덕을 구현해 가는 나라 그 나라가 곧 정의로운 나라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이렇게 정의의 덕이 지혜, 용기, 절제를 각기 그것답게 뒷받침해주고 조화롭게 묶어주는 바탕이 되는 덕임에도 그러한 덕들 모두가 하나같이 나라 전체를 관통하고 결속하여 나라를 좋게 만드는 한, 어느 것이 선한 나라에 가장 기여하는 것인지 가려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 네 가지 덕들은 모두 서로에게 필적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통치자와 수호자 그리고 생산자 모두는 계층 차원에선 개인 차원에서건 자신의 덕과 영혼의 조화를 통해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경우 역할 상의 중요도는 있을지라도 그들 모두가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정의로운 사람임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비록 장수 한 사람이 병사 한 명보다 중요하고 통치자 한 사람이 장수 한 명보다 중요하지만, 그들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최선으로 수행하는 한, 그것이 결과하는 행복과 고통의 정도는 모두 동일하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개인들의 역량 차이에서 비롯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고유 역할의 일을 수행하는 한, 계층 간 개인 간 소질과 욕망의 차이 말고 그들 서로에 대한 차별이나 선망도 없으며 모두가 다 좋은 나라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하나같이 서로 평등하다.

* 어떤 주석가들(G. Ferrari 등)은 정의가 분업의 원칙의 한 형태라는 말에 주목하여 정의가 분업의 원칙과 달리 위계의 구조를 갖는다고 주장한다.(김영균(2008), <국가, 훌륭한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 149-150쪽 참고) 정의로운 나라를 성립시키는 역할 가운데 통치자의 역할이 갖는 중대성과 강제성을 고려하면 그들과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단순히 횡적인 분업적 동반자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라는 통치자를 정점으로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력적 위계구조를 유지할 때 단순한 분업적 상호 협동체를 넘어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맥을 정확히 들여다보면 정의는 ‘그것(분업의 원칙)이거나 그것의 한 형태(ētoi toutou ti eidos)’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정의와 분업의 원칙간의 차이보다는 동일함에 방점이 있는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의로운 나라에서 통치 역할의 중요도와 강제성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역할들 간의 차이를 위계적 차이로까지 차별해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배와 피지배라는 말 자체는 위계와 강제의 의미를 분명 포함하지만, 실제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보면 그들은 똑같이 정의의 덕을 통해 위계적 명령일지라도 자발적으로 그것을 수용하여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기초한 분업의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수행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은 위계적 권위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니는 정의의 덕을 토대로 상호 동등한 합의에 따라 지배자는 지배자답게 피지배자는 피지배자답게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자발적으로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지배와 피지배는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구분되어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이론적으로는 단지 통치 구조상 지시와 수행이 지니는 역할 상의 차이일 뿐 그 과정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누리는 자부심과 행복감의 차별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차별이 난무한 오늘날 사회 현실에서 보면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은 그야말로 환상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고 어떻게든 그러한 방향으로 변혁이 이끌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가히 그 희망을 견인하는 이상적인 푯대이자 꺼지지 않는 횃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상주의는 그렇게 난관의 벽 앞에서조차 변혁의 열망을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개입을 추동하면서 그 시행착오를 통해 실천적 변혁의 방안을 끊임없이 천착하게 만든다.

* 우리는 통상 정의를 논할 때 재판정에서 정의를 떠올린다. 재판정에서 정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재판정에서 정의는 개인의 권리 및 경제적인 소유의 배타적 보장 즉 기본적으로 소유권과 관련한 정의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소유권의 방어적 보장에 더해 자신의 내적 소신과 고유한 역할에 대한 적극적 실천을 추가한다. 즉 정의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그것의 행함’인 것이다(433e) 이것은 플라톤의 정의가 소유권의 배타적 보장을 넘어 타인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위한 영혼의 자기 돌봄이자 적극적인 도덕적 실천임을 의미한다.

* 절제가 ‘자기에게 속한 것을 행함’(<카르미데스> 161b)이자 자기 제어를 통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즉 자기 자신이 해야 할 바에 대한 앎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기서 ‘각자 자신의 것을 함’,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행함’으로 언급된 정의의 뜻과 거의 유사하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절제와 정의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J. Adam 430d note 참고) 그러나 절제가 자제와 신중함 등 다소 반성적인 앎의 성격을 지니는 것에 비해 정의는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인지하고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적극적인 앎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정의는 재판 등의 영역에서 법률적 기준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지만, 절제는 다분히 내면적 반성과 염치 등에 연관되어 있다. <카르미데스>에서 소년 카르미데스가 절제를 부끄러움(aidōs)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그것을 보여준다.(160e) 게다가 정의는 절제의 덕을 포괄하지만, 절제가 정의를 포괄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 소크라테스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서로 필적한 것임을 설명하는 국면에서(433c) 지금까지 다루어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1) 지혜 : 다스리는 자들의 현명함과 수호의 능력 2) 용기 : 어떤 것들이 무서운 것이고 어떤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적법한 믿음의 보전 3) 절제 :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사이의 ‘일치된 믿음’ὁμοδοξία 4) 정의 : 각자가 자신의 것을 행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 이 중 지혜는 통치자의 덕목이고 용기는 수호자의 덕목이고 절제는 생산자는 물론 통치자, 수호자 모두가 공히 갖고 있어야 할 덕목이다. 그런데 통치자는 수호자 가운데에서 뽑힌 자들이므로 당연히 용기를 덕목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지혜, 용기, 절제의 덕목 모두를 지니는 사람이고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를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당 논의 단계에서 각 계층이 갖는 주요 덕목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실제로 각 계층은 통치자들의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일정 정도 지혜, 용기, 절제를 모두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개인의 영혼을 다룰 때 누구를 막론하고 개인들은 영혼의 세 부분 즉 ‘이성’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을 갖고 있다고 언급하면서(영혼 3분설)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441c)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의 덕들이 개인의 영혼 부분들에도 있고 수적으로도 같다는 것은 나라의 세 계층 역시 개인의 세 영혼 부분처럼 지혜, 용기, 절제를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나라를 다루면서 지혜와 용기의 덕을 통치자와 수호자에 한정한 것은 논의 단계상 철학자로서 통치자와 수호자의 전모가 아직 드러나기 이전에 그냥 나랏일 전체를 다루는 정치가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데 따른 것이다. 용기의 경우는 시민적 용기로서 절제와 더불어 시민들도 갖고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으나 지혜의 경우 역시, 나랏일 전체에 대한 지혜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 일과 관련한 전체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 시민들도 일정 정도 지니는 것이다.

* 정의와 더불어 간단하나마 부정의에 대한 언급도 주어진다. 부정의는 부나 자기들의 수나 완력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에 고무되어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저버리고 다른 부류의 역할에 참견하거나 그 부류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나라에 가장 큰 해악을 미치는 행태는 통치자들이 자연적 성향을 거슬러 다른 부류 특히 돈을 좋아하는 부류의 욕망으로 변질되어 권력을 그들 부류의 재산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정의로운 나라의 기초인 서로 다른 욕망의 조화와 공존을 무너뜨려 서로에 대한 침탈과 배타적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종국에는 나라의 구성원 모두의 욕망을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으로 변질시켜 나라의 파멸을 초래한다. 이 파멸의 종착지가 곧 참주가 지배하는 가장 부정의하고 참담한 정치체제인 참주정이다. 플라톤은 제8권에 가서 이러한 부정의한 행태가 어떤 변질의 과정을 거쳐 참주정에 이르는가를 마치 현실의 정치사를 추적하듯 아주 실감 나도록 구체적으로 분석해 들어간다. 이것은 플라톤의 국가론이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라 치열하고도 냉철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이루어진 일종의 비판적 이념임을 보여준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 정의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어서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또 맞지 않으면 다시 나라로 돌아가 살펴보고 그렇게 서로 그 둘을 번갈아 살펴보고 서로 문지르다 보면 나무들을 문질러 불씨를 얻듯이 마침내 정의가 환히 드러나 우리 자신들 사이에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434e-435a) 이렇듯 정의에 관한 종합적이고도 최종적인 정의(定義)는 우리가 이어서 다루게 될 개인의 정의에 대한 논의까지 마무리된 다음에야 가능하다.  -끝-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다음에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㊾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지혜와 용기

 

[427d-428b]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네의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한 후에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고 행복하게 될 사람은 그중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427d-e)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가 올바르게ὀρθῶς 세워진다면, 완벽하게τελέως 좋은ἀγαθός 나라이며 그에 따라 그 나라는 지혜롭고σοφός 용감하며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정의로운δικαία 나라라고 말한다.(428a) 그리고 이 가운데 무엇을 찾아내면ἐζητοῦμεν 나머지는 아직 못 찾은 것이지만 맨 먼저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알아보았을ἔγνωμεν 경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ἐγνωρίσαμεν 그것 또한 우리가 찾고 있던 것τό ζητούμενον을 알아본ἐγνώριστο 셈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정의를 찾는 방법은 바로 정의를 찾아서 알아보거나 나머지 셋을 찾아서 알아보면 된다는 것이다. 아데이만토스가 이 말들 각각에 다 동의를 표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후자의 방법을 택해 나머지 셋 가운데 하나인 지혜σοφία를 찾아 알아보기 시작한다.(428b)

————————–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과정(375a-434c)에서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 통치자의 생활 방식과 임무 등 나라의 기본 틀을 언급한 다음에 이제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과연 정의로운 나라인지 그리고 그러한 나라야말로 행복한 나라인지를 살핀다. 그것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지금까지 세워진 정의로운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자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정의를 찾는 방식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J. Annas(1981) An intriduction to Plato’s Republic. p.109-111 참고) 우선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지면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왜 그 나라가 완벽한지 따로 설명이 없다. 둘째 그 나라가 완벽하게 좋은 나라임을 근거로 바로 그 나라가 우리가 이제 찾고자 하는 정의를 포함 지혜, 용기, 절제 등 4가지 덕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의아스럽다. 왜냐하면, 이 말은 완벽하게 좋은 나라는 당연히 4가지 덕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그 전제의 근거 또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소크라테스는 그 4가지 덕 중 정의를 바로 찾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나머지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 정의를 알아본 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세 가지 덕을 아는 것만으로 정의라는 덕까지 알 수 있는 것인지 그 근거 또한 불분명하다. 정의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세 가지 덕을 찾아 알면 당연히 알 수 있다는 것일까?

*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당연하듯 동의하고 있다. 물론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수준에서 동의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아데이만토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앞서 다루어진 내용에서건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에서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첫째 의문과 관련해서는 앞서 다룬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 보인다. 앞서 이 나라는 자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기의 소질과 적성에 따라 서로 분업적으로 의존하여 자족을 실현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애초 의도대로 올바르게 나라가 잘 세워지면 애초 목적대로 모두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족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 애초 자족할 수 없는 결핍된 삶에서 상호 협동적 공동체를 통해 자족적인 삶이 가능해졌다면 소크라테스로선 그 나라를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문제와 관련해서도 앞선 설명들에 의지해서 일정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 앞서 논의에서(412d-414b) 우리는 이곳의 덕목들과 그 특징들이 일종의 총론적 서론의 형식으로 예비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살핀 바 있다.(강해45 참고) 소크라테스는 그곳에서(412d) 이미 현명(phronimos)함을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서 제시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를 갖추고 있다.(433b) 그리고 그곳에서(413b-e)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서, 강제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갖추어진 능력과 어떤 환락의 상황에서도 홀리지 않고 의젓함을 유지하는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력들이 각기 용기와 절제의 덕임을 간취하는 것은 전후 문맥상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위와 같이 앞에서 논의된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이유를 아예 다른 곳에서 끌어와 설명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플라톤이 국가의 덕으로 새로 발견한 덕목들이 아니라, 그리스 사회에서 좋은 삶의 토대로서 4가지 기본 덕목들, 이른바 4주덕(四柱德, the cardinal virtues)으로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들은 사주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별다른 이의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 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로 플라톤 대화편은 물론 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와 핀다르(Pindar)의 네 가지 덕(tessares aretai), 크세노파네스의 <회상>(III 9 1-15, IV 6 1-12), 아이스퀼로스의 <9월> 등 여러 곳을 제시한다.(J. Adam note 참고) 실제로 플라톤은 여러 대화편을 통해 비록 이곳과 그대로 일치하지 않지만 이러한 덕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프로타고라스> 329c, <라케스> 199c, <메넥세노스> 78d, <고르기아스> 507b, <파이돈> 69c, <법률> Laws 631c에서 절제, 정의, 용기 및 슬기로움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데 앞서 인용했듯이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이다. 다만 경건(hosioēs)은 포함되지 않거나 정의와 같은 것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미 사주덕이 대화자들 모두에게 따로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친숙한 덕목들이었음을 보여준다.(J. Adam. note 참고) 다시 말해 그들 모두에게는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한다면 그 사주덕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덕목들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이곳에서 사주덕과 관련하여 일단 전통적인 관념에서 출발하되 이제 새롭게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기존의 관념과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사주덕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셋째 의문에 대한 이해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혜, 용기, 절제의 의미를 찾아 안다고 해서 아직 살피지도 않은 정의까지 그 내용적 의미를 찾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과 하나가 포함된 4개의 과일 중 3개의 다른 과일을 찾는 것으로 사과를 찾는 단순 귀류법과도 거리가 있다. 찾는 것은 정의의 정재(Dasein)가 아니라 상재(Sosein) 즉 내포이다. 이렇듯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판단해도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했을까? 여러 주석가들이 이에 대한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J. Adam note 참고) 사실 그리 신통치는 않다. 굳이 앞서 논의된 내용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아래와 같은 설명 정도이다.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미 제2권(370b – 374c)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은 각자 나라와 관련된 일 중에서 자기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고 그 천성과 소질에 따라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를 임명한 바 있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란 다름 아니라 구성원들 모두 자신의 고유한 덕을 기초로 각기 자신의 역할을 하는 나라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의 고유한 덕들로부터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라는 정의의 덕을 추론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433a에서 정의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앞서 제2권의 내용을 정의를 규정하는 바탕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다만 문제는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중대한 덕목임에도 그것이 정의로 규정되는 것은 이후의 논의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에 바로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논의에 대한 혜안을 가졌으면 모를까 여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428c-429a]

* 소크라테스는 우선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κατάδηλος 것은 지혜이고 그 지혜는 이상한ἄτοπον 뭔가가 있다고 말한다. 아데이만토스가 그 이유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한다. 먼저 그는 이 나라는 진정으로τῷ ὄντι 지혜로운 나라인데 그 까닭은 숙고εὔβουλος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숙고를 잘하는 것은 무지ἀμαθίᾳ 때문이 아니라 앎 때문이므로 숙고를 잘함은 일종의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앎은 목수τέκτων나 농부들이 아는 앎들이 아니다. 그런 앎은 목공이나 농사에 대한 최선의 상태를 숙고하는 것이지만 그 숙고로 인해 나라가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에 능하다고만 불릴 뿐이다.(428c) 요컨대 지혜는 일종의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ὁμιλοῖ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이다. 그리고 그 앎은 수호하는 앎이고 완벽한τέλειος 수호자로서 통치자들에게 있는 앎이다. 그리고 통치자들의 그러한 앎을 통해 나라는 숙고를 잘하는 나라, 진정으로 지혜로운 나라라고 불린다.(428d) 그리고 그러한 앎을 가지고 있는 수호자들은 자연적 성향에 따라 수가 가장 작은σμικροτάτῳ 집단ἔθνος이자 가장 작은 부분μέρος이고 그 집단에 있는 앎 때문에 전체가 지혜롭다.(429a) 요컨대 이 앎은 앎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지혜라 불러 마땅한 앎이고 본성상κατά φύσιν 가장 수가 적은 통치자들이 그 앎에 참여하기에 적합한 이 부류γένος들이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넷 중에서 하나를 찾아냈고 그것이 나라의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찾아냈다고 말한다.

—————————–

* 소크라테스는 지혜(sophia)를 ‘숙고를 잘하는 앎’으로 규정한다. ‘숙고’로 옮긴 그리스어 εὔβουλος(euboulos)는 ‘take counsel, deliberate, determine or resolve after deliberation’의 뜻을 가진 동사 βουλεύω(bouleuō)에서 나온 말로서 ‘뭔가를 결정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 나랏일 전체에 관한 최고 의결기구인 평의회(boulē βουλή)도 이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목공이나 농부도 숙고한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자처럼 나라 전체에 관한 것을 숙고하지 않고 자기 일에 한정해 숙고하므로 지혜라고 하지 않는다. 지혜는 ‘숙고를 잘하는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인 것이다. 요컨대 이곳에서 지혜는 나랏일 전체를 숙고하는 정치적 통치 능력으로서 총체적 앎이다. 그리고 유념할 것은 이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인 까닭은 이 나라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로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지혜로운 자가 통치하지 않는 한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에게 있어 숙고를 통한 총체적인 앎으로서 지혜는 여기에서처럼 나랏일 즉 통치 영역에만 한정된 앎이 아니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지혜는 원천적으로 총체적 앎의 극치로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앎에 이르기까지 사물과 사태에 관한 총체적인 앎 그 자체를 의미한다.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으로 불리는 것도 이미 철학적 앎의 기저에 총체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곳에서는 논의 계획과 순서에서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를 논하기 이전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일단 지혜를 나랏일과 관련한 통치자의 총체적인 숙고 능력, 즉 통치자만 유일하게 갖는 덕으로 한정하여 말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에서 통치자는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아니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제6권과 7권에서 다룬다.

* 그런데 나라에 필요한 부분적 역할을 나름의 수준에서 숙고하여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을 수 있어도 나라라는 공동체 전체의 선을 숙고하고 그에 필요한 역할과 기능을 총체적으로 숙고하는 앎으로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나라 안에서 소수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가장 작은 집단(ethnos), 부분(meros), 부류(genos)라고 부른다. 물론 이들의 수를 정확히 계산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지난 강해(강해 46)에서도 살폈듯이 아무리 수호자까지 포함하여 크게 잡아도 1.5%에서 3% 정도로 추정될 만큼 극히 소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혜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말(428c)은 이렇듯 소수의 지혜 있는 자가 나머지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 누누이 살폈듯이 통치자들은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소수의 특권 계급과 전혀 거리가 멀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여느 특권 계급처럼 사유 재산은커녕 가족도 꾸리지 못하고 통치권력 또한 여럿이 돌아가며 수행하며 기간 또한 한시적이다. 그에 비해 나머지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있고 결혼으로 가족도 꾸릴 수 있고 평생을 자기 일에 종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통치자 혼자 전제 권력을 종신토록 휘두르고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도 가족도 가질 수 없는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권력자들은 시민들과 달리 어떠한 재산도 주택도 가질 수 없으며, 일정한 지역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고된 훈련을 수행해야 하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자기 가족으로 여기면서, 오직 시민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서로 돌아가며 한시적으로 나랏일을 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을 특권층이라고 선망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의 대화자들마저도 이미 그런 사람들이 어찌 행복할 수 있냐고 반문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 권력자들의 횡포와 부정부패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그들 권력자에게 선망이 아닌 연민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나라에서는 권력자들이 그렇게 갇혀 지내면서 아예 재산조차 가질 수가 없네!’라고.

*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설명하면서 숙고의 대상에 이 나라와 이 나라 시민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현대의 정치적 현실에 적용할 때 일단 2000년이라는 시대적 격차가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지만, 일반적인 주제에서조차 그 어려움이 뒤따르는데 그 대표적인 영역이 곧 국제관계에 대한 정치철학적 이해 영역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관심사의 경우 비록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내전을 막는 게 근본 목표로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대책의 대부분은 국내 문제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대화편 전체에서 타국과 관련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교역 문제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현대의 대부분 국가에서 이른바 세계화와 지구화가 국민국가 차원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정치철학 영역에서도 가히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문제에 대한 접근은커녕 해결을 위해 어떠한 방책도 구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분명 플라톤 정치철학의 현대적 적용은 여러모로 근본적인 제한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구체적으로 국제문제를 다루는 부분들은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통치의 중대사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듯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보여주고 있는 국제관계의 기본 원칙만은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다.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가 국가 간 갈등과 나라 간 빈부의 차이, 그로 인한 전쟁 발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 플라톤은 이미 그에 대한 원칙적인 대답을 대화편 전체 내용을 통해 내놓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나 <법률>을 통해 서로 다른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정치철학의 근본 목표이자 원칙임을 하나같이 견지하고 있고 그에 따라 타자와의 차별과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서 물질적 욕망에로의 획일화를 극력 비판하고 있다. 특히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연설을 다루는 <메넥세노스>는 전쟁을 해야 한다면 오로지 방어 전쟁에 국한할 것을 강조하면서 타국에 대한 침략적 지배를 통해 관철된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메넥세노스>(2021) 이정호 옮김, 아카넷 참고. 이 점에서도 알렉산더의 등장은 고대 그리스의 종말을 상징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기본적으로 나라 안은 물론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반패권주의 및 반제국주의에 기초한 평화와 공존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나라에서 가난을 가장 나쁜 최대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한 나라에서건 여러 많은 나라에서건 빈부의 양극화를 없애는 것이 정치가들이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역할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국제적 현실은 어떠할까?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대부분 나라는 하나같이 무한경쟁과 노동의 유연성을 내세워 분배와 복지보다 나라 전체의 총량적 경제 성장에 매달리고 있다. 특히 강대국들의 경우,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AI, 챗 GPT 등 첨단 지식정보산업에 마치 미래의 사활이 걸린 듯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 그들은 모두 그것들이 초래할 수 있는 인간 지성의 왜곡과 노동의 소외, 환경의 파괴, 빈부의 세계적 양극화에는 눈을 감은 채, 오직 효율지상주의를 통한 패권주의적 우위를 달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그러한 문명적 위기에 대한 총체적 비판은커녕 누가 먼저 그러한 전환에 발맞추어 살아남을 것인가 각론적 해결 방안에 대해서만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각자도생하여 살아남을 것인가가 지적 성찰의 주제가 된 세상이다. 2000년 전 삶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숙고 능력으로서 플라톤의 지혜와 현실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429b-430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같은 방식으로 용기ἀνδρεῖα와 그 용기가 나라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찾아서 알아본다. 우선 용기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에 복무하는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에게 있다. 즉 나라가 비겁한 나라인지 용기 있는 나라인지는 순전히 그들에 의해 결정된다.(429b)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입법가가 교육을 통해 알려 준 그런 류의 무서운δεῖνος 것들에 대한 믿음δόξα(doxa)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할σώσει 수 있는 힘δύναμις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29c)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힘을 용기라고 부르고 그런 의미에서 용기는 일종의 보전σωτηρία이라고 말한다. 즉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λύπη이나 즐거움ἡδονή, 또는 욕구ἐπιθυμία나 공포φόβος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429d)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보전을 염색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염색공βαφεύς은 염색하고βάπτω 싶을 때면, 먼저 그 다양한 색깔의 모직 중에서 본래 흰색만을 가진 모직을 고르고, 그다음에는 최대한도로 색깔을 받아들이도록 적지 않은 공을 들여 미리 준비하고 나서, 그런 상태가 되어야 염색을 한다는 것이다.(429e) 그래야만 모직이 단단히 착색되어 세제를 쓰든 안 쓰든 세탁을 해도 광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을 뽑아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ῇ으로 교육하는 것도 염색의 예에서 보듯 그들이 우리의 설득을 가장 훌륭하게 받아들여, 적합한 자연적 성향과 양육을 갖춤으로써 무서운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다른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단단히 갖게 하여 강력한 세척력을 지닌 어떤 쾌락이나 고통과 두려움, 욕망도 그들에게서 그 믿음을 씻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용기는 무서운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올바르고 적법한 믿음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전하는 힘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른 믿음일지라도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긴 믿음을 짐승들과 노예들의 믿음에 비유하며 소크라테스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430a-b)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용기를 다만 시민적πολιτικός 용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원할 경우 나중에 다시 더 잘 살펴보겠지만 여기에서는 정의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430c)

————————————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덕으로 지혜에 이어 용기(andreia)를 찾아 살핀다. 그에 의하면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앞서(413b-e) 통치자들의 선발 조건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이곳에서 말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이나 즐거움 또는 욕구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무서운 것들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δόξα(doxa)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신앙이나 신뢰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어떤 ‘생각(a notion, true or false)’ 내지 ‘견해(opinion) 즉 넓은 의미에서 모종의 앎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앎은 고도의 철학적 인지 단계에서 획득되는 참된 앎으로서 앎(epistēme)이 아니라 다만 그보다 낮은 인지 단계, 이를테면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서건 혹은 일정 수준의 추론을 통해서건 인지자 스스로 참이라고 믿고 있는 일종의 자기 확신으로서 앎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믿음은 진정한 앎과 비교하여 어떤 경우 그에 근접하여 올바른 믿음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못된 확신 즉 거짓된 믿음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플라톤이 말하는 믿음(doxa)의 정확한 의미와 인식론적 위계는 선분의 비유(509c-513e)를 다룰 때 따로 자세히 다룬다] 그런데 이곳에서 용기와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는 믿음은 오랜 기간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비록 고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앎에는 미치지 못하나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바른 믿음’(orthē doxa)으로서 건강한 앎이자 능력인 것이다.(J. Adam note 참고)

* 소크라테스도 언급하고 있듯이 무지한 노예도 용감하고 오늘날 깡패들이나 조폭들도 싸울 때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다. 이들 모두도 그럴 수 있는 믿음 즉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주인이나 두목으로부터 생계도 보장받고 지위와 금전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모두 신분적 예속이나 조건에 기초해 있으므로 신분이 달라지거나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뒤바뀌거나 배반할 수 있는 조건부 생각이자 유동적인 믿음이다. 동물도 살기 위해 본능으로 용감하지만, 더 강한 것 앞에서는 바로 꼬리를 내리거나 도주한다. 충성스러운 개조차 먹이를 주는 주인이 바뀌면 바뀐 주인을 따른다. 그 믿음을 보전하는 힘은 일시적이고 본능적이어서 강렬한 듯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용기는 이와 달리 오랫동안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올바른 믿음이자 그 믿음 자체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보전하는 일관된 힘이자 능력으로서 덕이다. 특히 시가 교육과 신체단련 교육은 어떠한 경우도 탈색이 되지 않는 잘 염색된 모직물처럼 그러한 믿음을 자신에게 적합한 자연적 성향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다.

* 그리고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일 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나라의 수호자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로 나서지 않거나 그런 사람을 수호자로 임명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코 용기 있는 나라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수호자로 나서지 않는 그 개인 역시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앎은 곧 실천인 것이다.

* 이렇듯 용기는 단순히 용맹한 행위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의미 이전에 그 행위를 가능케 하는 굳세고 올바른 믿음 즉 내적인 앎이다. 현명한 사람은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의연하게 거짓과 탐욕을 멀리하지만, 어리석고 무지한 자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의 용기와 무지한 자의 만용을 가르는 것은 진정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즉 ‘진정한 가치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능력 곧 힘이자 덕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용기를 덕이자 믿음으로 말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용기를 힘이자 능력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 용기는 ‘올바른 믿음의 보전’이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은 올바르다는 점에서 앎에 근접해있지만 믿음인 한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epistēme)에는 못 미친다.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의 용기를 ‘시민적 용기’(politikē andreia)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중에(500d) 언급되는 시민적 덕(politikē aretē), 평민적 덕(dēmotikē aretē)도 이곳에서 언급되는 시민적 용기 수준의 덕을 가리킨다. 요컨대 시민적 용기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에는 못 미치지만(<라케스> 195a, 196e ff., <프로타고라스> 349d)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관여되어 있으므로(제6권 506a 참조) 믿음이되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훈련을 통해서 생길 수 있는 것’(<파이돈> 82a-b) 즉 오랜 기간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신념이자 확신이다. 요컨대 수호자들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올바른 믿음을 확고하게 내면화하고 있어서 어떠한 상황에도 그 믿음을 흔들리지 않고 보전한다. 그리고 이 올바른 믿음은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통해 진정한 앎으로서 상승할 수 있다. 다만 현 단계 수호자의 경우 믿음을 앎으로 상승시키는 철학적 성찰의 능력은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수호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군인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시민적 용기는 수호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앎으로서, 시민들에게는 최선의 교육 목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덕으로서 용기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시민적 용기로 불렀을 것이다. 시민들은 최선의 시민적 용기를 갖고 수호자를 따르고 견고하고 올바른 믿음을 지니는 수호자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를 지닌 통치자를 따라 나라를 지킨다. 종국적으로 지혜는 물론 용기와 절제의 덕 모두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마친 수호자 중의 수호자 즉 철학자 왕을 통해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이자 덕으로서 구현된다.

* 플라톤이 <국가>에서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청소년기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거론하고 20세에 이르면 수호자를 선발 임명하고 그 후 고도의 철학 교육과 현장 실습 단계를 거쳐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이 되는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발생론적인 단계와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지혜에 관한 논의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통치자의 덕과 앎을 논의하기는 하되 좋음의 이데아를 본 ‘철학자 왕으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단계까지는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시민적 용기로 제한하면서 여기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430c) 앞에서 언급된 교육과 양육의 목표는 나라의 덕을 다루는 현 단계로서는 ‘올바른 믿음’ 정도 수준의 앎이다. 그러나 나중에(6권-7권) 철학자로서 통치자가 다루어질 즈음에 이르면 지혜, 용기는 물론 절제, 정의 모두 통치자가 갖추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앎이자 덕임이 밝혀진다. <국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맞이하는 난관의 대부분이 ‘철학자 왕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을 다루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끝-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427d-434c) (2) 절제와 정의.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