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㉜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서론 강해에서 <국가>의 목차를 언급하며 살폈듯이 우리는 권수를 기준으로 제1권을 <국가>의 서론, 그 이후 제2권부터 9권까지를 본론, 제10권을 에필로그로 나누고, 본론의 첫째 부분을 제2권에서 제4권까지, 둘째 부분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셋째 부분을 제8권에서 제9권까지로 구분하여 <국가>를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권수를 고려하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제1권부터 호사스런 나라에서 수호자가 등장하는 바로 앞 374e까지를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에 앞서 진행된 서론적 논의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다만 소소하게는 위의 견해와 같되 수호자의 성향까지를 서론적 논의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강해는 <국가>의 서론적 논의(제1권부터 제2권 357a-374e까지)를 모두 마무리한 셈이다.

* 이에 따라 이제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작에 앞서 소크라테스가 문자의 비유를 내세워 논의를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하고 나라의 발전에 따른 계층들의 발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미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과 개인의 영혼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정의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그것들의 유기적 연관성을 토대로 전개될 것임을 일러 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살필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의 첫 부분 또한 그러한 구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나라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나라의 구성 요소로 생산자 계층, 수호자 계층(통치자 계층 포함)을 등장시킨 후 → 수호자의 교육 이념을 통해 그 세 계층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고 → 그 다음 단계로 개인의 영혼 또한 나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이성, 기개, 욕구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밝힌 후 → 그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도 나라의 정의와 동일하게 영혼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게 될 위와 같은 논의 내용들을 강해 서론에서 제시한 목차를 기준으로 좀 더 세부적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제2권 375a-제4권 끝)

 

  1. 본론 1,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나라의 기원(357a-374e)
  2.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3.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

{376e-383c(제2권 끝), 제3권 386a -392c}

* 신은 선하다(376e-380c)

* 신은 단순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380d-392c)

1-2-1-2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392c-398b)

1-2-1-3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1-3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 신화(412b-415d)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권 419a-421c)

1-3-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1-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1 혼의 세 부분(434c-441c)

2-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제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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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 <국가>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강해를 이어가자.

 

  1.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2.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374e]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τὸ τῶνφυλάκων ἔργον이 가장 중요하고μέγιστον 그만큼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σχολῆ를 요구하는 한편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τέχνη과 관심ἐπιμελεία을 요하는 것임을 밝힌 후 곧바로 수호자들에 적합한 성향φύσις들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그러한 일에 착수하는 것은 사안의 성격상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며 주춤 거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375a-b]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가문 좋은 젊은이의 성향과 지키는 일의 관점에서φυλακὴν 혈통 좋은 강아지σκύλαξ의 성향은 서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φύλαξ나 강아지 모두 감각αἴσθησις에 있어서는 예민해야ὀξύν 하고 감지된 것을 추적하는데 날렵해야ἐλαφρός 하며 붙잡고 싸워야 할 때는 힘이 세야만ἰσχυρὸν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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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kyōn라고 해도 상관없음에도 젊은이에 맞추어 새끼 강아지로 표현한 것은 강아지의 원어 skylaks와 수호자의 원어 pylaks의 말미가 같다는 것을 고려한 말놀이일 수도 있다. 개kyōn는 개를 나타내는 명칭 그대로 아테네에서 이른바 퀴니코스kynikos 학파(the cynics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내리고 있는 개의 함축과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개의 함축이 거의 상반될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흥미를 끈다. 플라톤의 개는 나라를 책임지는 수호자에 비유되고 있지만 견유학파의 개는 오히려 나랏일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375b]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개이든 그 밖의 어떤 동물이든 맹렬하지θυμοειδὴς 못한 것이 어찌 용맹한가ἀνδρεῖος를 반문하고 격정θυμός이야말로 그것이 일게 되었을 때 마음ψυχὴ 이 모든 것에 대해 겁이 없고ἄφοβός 꺾이지 않는다ἀήττητος고 말한다. 즉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성향은 신체적으로는τοῦ σώματος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하는데 날렵하고 힘세어야 하고 심적으로는τῆς ψυχῆς, 격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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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는 동물에 대해 쓰일 때는 맹렬함의 의미를 갖지만 사람에게 쓰일 때는 기본적으로 격정, 분노의 의미를 갖되 생각이 깃든 분노 즉 의분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감정적 격분과는 달리 이지적 측면 즉 자존심에서 우러나오는 기개의 성격을 갖는다. to thymoeidēs는 이후 플라톤에 의해 개인의 영혼에서 ‘기개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된다.

 

[375c-e]

* 그런데 이러한 성향들은 수호자 서로 간에 그리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거칠어ἄγριος 서로와 스스로를 파멸할 수도διολέσαι 있으므로 친근한 사람에게는 온순해야하고 적들에 대해서만 거칠어야 한다. 다시 말해 수호자는 온순하면서도 대담한 성품 ἅμα πρᾷον καὶ μεγαλόθυμον ἦθος 즉 서로 대립적인ἐναντίος 온유한πρᾶος 성향과 격정적인θυμοειδής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대립적인 성향을 함께 갖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앞서 수호자에 비유한 혈통 좋은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두개의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고 있는 수호자를 찾는 일은 ‘자연에 어긋나는 게 아니’οὐ παρὰ φύσιν라고 말한다.

 

[ 376a-c]

* 그런데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되 친한 사람의 모습과 적의 모습을 식별καταμαθεῖν하여 그 앎과 모름에 의해 친근한 것과 낮선 것을 구별한다는 점에서 개의 천성의 상태는 영리하고κομψός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배움을 좋아한다φιλομαθὲς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움을 좋아하는 것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나라의 훌륭하디 훌륭한καλὸς κἀγαθὸς 수호자가 될 사람은 의당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정적이며θυμοειδὴς 날래며 굳세야ταχὺς καὶ ἰσχυρὸς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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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음미할 것이 있다.

 

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필요한 계층들이 생겨나고 마침내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대문자에 해당하는 정의로운 나라를 살필 준비가 갖추어진다. 장차 드러나겠지만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들은 소문자에 해당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의 세 부분들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기본적으로 수호자 계층에만 집중되어 있다.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에 수호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기층 생산 계층이 지성의 지배로 표징되는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 자리를 차지하기란 처음부터 난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논의를 시작하면서 수호자의 성향부터 꺼내든 것 역시 수호자 계층 또한 분업과 전문화 원칙에 따라 무엇보다도 타고난 적성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호자의 성향을 다루는 이 부분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상응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들의 부분이 어떤 것들인지가 거의 명시적이다시피 드러나 있다. 수호자의 성향 자체가 수호자의 내적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수호자의 성향에 관한 서두 부분은 나중에 펼쳐질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 대한 예비적 암시이자 나라의 계층들과 개인의 내적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아예 미리부터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실제로 수호자의 성향을 강아지에 빗대어 신체적으로는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에 날렵하고 싸울 때 힘이 세야 하고, 심적으로는 맹렬해야(격정적이어야)하며 동시에 아는 사람과 낯선 사람을 식별함에 있어서는 지혜롭고 영리해야 한다는 언급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장차 개인의 내적 영혼들을 나타내는 말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거나 거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선 ‘격정적’이라는 말 thymoeidēs는 나중 영혼의 ‘격정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와 표현부터 그대로 일치하고, 식별하고 헤아리는 능력 역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logistikon(명사형 logos)와 내용적으로 일치하며, 감각을 뜻하는 aisthēsis나 신체적 능력을 나타내는 ischus라는 말 역시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epithymētikon(명사형 epithymia)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말이다.(440e 참고) 특히나 개의 능력과 관련하여 친한 사람과 적을 구별하는 능력과 연관해 사용하는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os’라는 말과 ‘배움을 좋아하는’philomathes라는 말은 수호자의 성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향을 나타냄과 동시에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성적인 부분이 갖는 성격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렇듯 이곳에서의 수호자의 성향은 장차 언급될 영혼 3분설에서 언급되는 영혼의 내적 부분들과 그대로 일치한다. 물론 영혼 3분설이 사람 일반에 적용되는 한, 수호자뿐만 아니라 생산자 또한 이성적 부분, 격정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영혼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차츰 밝혀지겠지만 그것들 세 부분의 결합 방식에 따라 그들 각각의 전체적인 성향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갖게 된다. 마치 장기판의 장기 알들은 모두 똑같지만 장기판의 형세는 두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3) 소크라테스는 온순함과 대담함, 온유와 격정이라는 대립적 성향을 함께 갖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훌륭한 수호자란 불가능하다고 운을 뗀 후, 곧바로 개의 경우를 들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또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간단히 판정해낸다. 그러나 여기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자문자답을 곱씹어보면 이 부분은 그렇게 간단하게 읽고 넘어갈 곳이 아님을 이내 직감하게 된다. 물론 상식적 수준에서 나라를 지키는 수호자 즉 전사가 하는 일이 아군과 적을 식별하고 그에 따라 정반대의 태도로 임하는 것이 당연한 한, 그 말에 달리 주목할 만한 의미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수호자 가운데 통치자가 선발되고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정치 행위임을 고려하면 이 문맥은 한층 중요한 의미로 다가 올 수 있다. 즉 그 말은, 나라에 늘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 모두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인 한, 수호자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즉 통치의 핵심은 그러한 대립적인 것들 중 하나를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간의 공존과 조화를 도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로 수직으로 교차하는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하나의 옷감으로 만들어 내는 직조술을 정치가의 기술로 언급하고 있는 <정치가>의 내용(281a-283b)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4) 그러나 이 문맥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가 그 동안 씨름해왔던 존재론적인 고민들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만치 않은 의미와 논쟁거리를 안겨준다. 우선 플라톤 이전 시기까지 그리스 지성계를 지배해왔던 엘레아주의적 사고에서 보면 대립자들이 함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하다. 엘레아주의자 말대로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는 한, 오로지 부동의 일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런 식의 접근은 현실을 공간적 사고에만 가두어 두는 것으로서 시공간 속에서 만상이 엉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엄연한 실재로 우리 앞에 현존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원자론자들처럼 운동하는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 허공kenos이라는 없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운동을 그저 원자atom들의 물리적 충돌로만 설명하려는 것 또한 혼돈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구제하는 방안이 될 수 없다. 이에 플라톤은 대립적인 것들이 함께 엉켜 변화무쌍하게 운동을 거듭하는 것이 현실의 진상(眞相)인 한, 그것을 정당화하는 존재론을 제시하고 그 현실의 변화에 인간이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내야했다. 그것이야말로 존재론적으로 현실을 해명하는 참된 길이며 동시에 모멸의 현실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넘어서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마땅히 가야할 길이다. 요컨대 만물의 근본 원인으로 존재to on와 생성to aei gignomenon이 있다하더라도 현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로 환원될 수 없고 그렇다고 없는 것으로 해체되지도 않는 제3의 것이다. 현실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 속에는 이른바 존재적 성격과 생성적 성격이 무한히 관계 맺으며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그 현실의 단적인 국면이 드러나는 곳이 곧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어떠한 능동자poioun의 개입이 없는 한 현실은 무규정적apeiron 욕망이 지배하면서 사회적 관계는 해체되고 개인은 불행의식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 무규정적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불행한 현실은 어떻게든 다양한 욕망이 함께 공존하는 방향, 즉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운동하되 지향과 목적telos을 가져야 한다.

5) 그러나 운동은 해체를 의미할 뿐이라는 종래의 사고로는 그러한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운동하되 그 지향의 끝 즉 자기동일성을 동시에 담보해내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부동의 형상을 넘어 그 힘을 생명체의 자기 운동에서 발견한다. 생명체야말로 운동을 통해 오히려 자기 동일성을 보전하고 그 스스로의 합목적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생명체에게 운동의 정지는 자기동일성의 상실이며 해체일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형상의 초월성을 인정하되 자기 운동을 통해 오히려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보전하고 다(多polla)의 영원한 조화와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agahthon)의 실재 또한 진실로 통찰한 연후, 완벽한 생명체로서 그 우주의 내적 생명력으로서 ‘우주 영혼’을, 현상세계와 인간의 욕망을 우주적 질서로 견인하는 지고의 근거이자 힘으로 천착해낸다. 그리고 플라톤은 다행스럽게도 신들이 현실의 생명체를 만들면서 인간을 가장 자신의 영혼과 닮게 했다고 믿었다.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우주 영혼을 본 그대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혼돈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철학자들이다. 그러므로 우주 영혼을 본으로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철학자의 현실 개입이야말로 현실을 구제하는 최선의 방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곧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지적 실천이자 최선의 정치이다.

6) 이처럼 플라톤은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생성을 넘어 현실을 구제하기를 열망했고 그에 따라 자기동일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존재론을 마침내 우주에 대한 성찰로부터 천착해냈다. 우주는 끝없이 자기 운동을 지속하면서도 결코 해체되지 않으며 수많은 대립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질서 속에서 완벽하게 조화시키고 있는 유일한 실재이자 가장 선하고 완벽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주 영혼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의 영혼을 존재론적으로 해명하고 그 영혼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현한 철학자를 통해서 혼돈의 현실이 변혁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플라톤이 그야말로 전래의 엘레아적 일자에 버금가는 존재론적 지위를 우주적 생명력의 기초로서 우주 영혼에 부여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자의 영혼은 우주 영혼을 본으로 삼아 물질의 필연성에 끝없이 반역하고 거스르는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향해 가장 능동적으로 가장 적확하고도 분명하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모든 부분들과 모든 차이들과 모든 대립자들을 하나의 살아있는 질서로 용융해내는 지고의 영혼, 즉 우주 영혼의 최상의 모상이었던 것이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 수호자의 성향에 대한 논의에 이어 수호자의 교육론이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35쪽에 이를 정도로(376c-412b) 상당히 길게 펼쳐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의로운 국가를 구축하려는 그의 언급의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수호자 교육론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며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수호자 교육론의 대부분이 시가교육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다. 이 시가 교육에 관한 내용은 매우 중대하고 독립적인 주제를 이루므로 다음 시간에 다루기로 한다.

 

<공지> 정암학당 강해가 여름 방학을 맞아 일시 휴강함에 따라 본 웹진 강해는 잠시 쉬었다가 8월 15일 경에 다시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억과 기억들』(현기영, 전상국, 문순태, 임철우, 이순원, 통일인문학연구단) [철학자의 서재]

♦ 아래 글은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제78집(2019. 6)에 게재된 서평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철학자의 서재]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통일인문학』 편집위원회 측에 감사드립니다.

 

『기억과 기억들』

현기영, 전상국, 문순태, 임철우, 이순원, 통일인문학연구단, 『기억과 기억들』, 씽크스마트, 2017.

진보성(청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나는 요즘 들어 아주 오래지 않은 옛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거나 기억들이 뒤섞여버리는 일을 가끔 경험한다.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여러 일들을 맞이하게 되고 현실에서 감당해야할 최신정보들을 선별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한다. 개인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망각은 기억해 두어야할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염려되지만 곧 복구가 가능하다. 그리고 과거의 실수나 안 좋았던 일은 자꾸 떠올리지 않아야 사는데 편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함께 기억해야 할 것들이 사라지거나 왜곡되면 다시 복구하기 힘들다.

그 기억은 틀림없이 고통스러운 기억임에 분명하겠지만 살아가기 위한 인간 본성의 망각이 아니라 강요되고 의도된 망각이기 때문에 당사자의 상처는 아물지 않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할 수 없게 하고 본질을 흐린다. 가까이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과정에서 우리가 본 것은 기억되어야할 것들이 망각의 장치들 앞에서 위태롭게 표류하던 장면이다. 아이들과 가족을 잃은 부모·형제들은 졸지에 좌파 빨갱이가 되었고 아직도 진실은 저 심해에 묻혀 있다. 누구는 이제 지겨우니 그만 잊자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참사의 진실은 공적으로 기록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망각하면 이로울 한 개인의 슬픔이 아니다.

『기억과 기억들』은 우리 역사에서 적대적인 “분단의 논리에 따라 삭제되고 망각된 기억을 복원하여 분단의 역사를 좀 더 객관화된 시각”(10쪽)으로 보려는 의도로, “타자의 상처에 공감하는 시선으로 분단의 역사를 ‘재-맥락화’하려는 작업”(10쪽)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분단의 역사에서 출발하여 이후 민중 저항의 역사까지 적대적인 분단 역사의 유산들은 4·3제주와 5·18광주에서 국가폭력으로 자행된 만행의 기억을 왜곡시켰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앞서 말한 세월호 참사와 그 진상 규명 과정에서 목도한 이른바 서북청년단재건위원회와 같은 과거 남북분단갈등의 망령은 분단의 논리가 현대에도 여전히 타인의 상처를 폭력과 사실 왜곡으로 짓이길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분단문학’을 주목했고 한국의 대표적 작가 다섯 명의 구술을 통해 그들의 사유와 집필의 생생한 배경들을 담았다. 이들 작가 역시 우리와 같은 현실을 사는 사람들이기에 지금 여기에서 그들의 말을 담아낸다는 것은 소설의 서사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진실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다. 다섯 작가는 현기영, 전상국, 문순태, 임철우, 이순원이다. 이들은 모두 분단문학 작가들로 지칭될 수 있지만 인터뷰를 통해 소설의 서사 안 문제의식은 한 시기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 다섯 작가와 인터뷰 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일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 현기영 작가

제주에서 태어난 현기영 작가는 1978년 <순이 삼촌>을 발표하면서 4·3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어린 시절 4·3을 겪었던 기억이 작품을 집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비록 그 기억이 아주 조금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증언과 자료를 더해져 구성되었다. 작가는 권력이 강요한 망각의 늪에서 4·3에 대한 집단 기억을 건져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제주에서의 4·3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은 국가와 지배계층이 저지른 범죄였지만 기록에서 삭제되었고 왜곡당하거나 부정되었다. 국가폭력에 의해 발생한 참극이지만 국가는 기억하고픈 것만 기억하게 하고 학살의 기억은 망각하게 강요했다. 그리고 4·3을 금기로 묶었다. 국가는 국민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작가는 전쟁과 죽음에 반대하면서 평화와 인권을 외치는 제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광지로 대표되는 제주의 표상이 제주의 아픔 또한 드러내어 제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방법도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4·3의 트라우마에서 작가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금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군사정권 하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현기영 작가는 4·3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트라우마의 치유는 사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다. 영화 <밀양>에서 본 것처럼 사과는 회개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과는 레비나스의 주장처럼 얼굴을 마주보고 ‘타인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는 진실성이 있어야 하고 진실성은 4·3의 만행을 자행한 자들의 진심어린 사과로 증명된다. 국민에 대한 국방부의 공식적인 사죄가 진심의 출발이다.

 

  1. 전상국 작가

전상국 작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 6·25전쟁을 객관화하려 했다고 한다. 이른바 빨갱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 실제 빨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봤지만 그 실체는 오히려 친근한 이웃이었다. 이념은 경험하지 않은 실체를 적대적으로 만들어서 서로 자신이 피해자고 상대가 가해자라고 강변하게 만든다. 사실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말이다. 남과 북은 오랫동안 이념으로 나뉜 나와 타자를 적대시하면서 결국 서로가 서로를 더욱 타자화 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과거 전쟁의 상처를 돌보지 못해 상처는 아물어 들지 않으면서 현재의 삶까지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이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던 젊은 세대들은 여기에 공감하지 못하니 남과 북의 정서적 차이는 좁혀질 수가 없다.

전상국 작가는 분단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남북 교류는 이어지지만 이는 오히려 이분법의 구도 아래서 서로를 더욱 심하게 이질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현재 진행형이다.

전상국 작가가 자신의 글쓰기를 무당의 굿판에 비유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살풀이의 시작은 원한과 증오를 풀어내고 화해를 도모하는 노력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명 <지뢰밭>처럼 분단으로 생긴 우리 마음속 지뢰 때문에 우리는 역사의 비극을 터놓고 서로의 상처에 난 아픔을 공감할 기회를 만들기 쉽지 않다고 작가는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근원적 정서에 호소하며 남과 북이 공감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길 원한다. 통일에 대한 접근도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처럼 경제론적인 시각이나 맹목적인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고 서로의 차이와 가치를 먼저 인정할 것을 주문한다. 바로 공통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1. 문순태 작가

6·25전쟁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문순태 작가는 집안사람들을 따라 백아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생활을 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비극을 체감했다. 특히 이념에 무감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자기 안의 고통과 슬픔은 배가되었다. 가슴에 한 맺힌 그 기억이 지금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되었다. 작가는 한이 상대에게 복수해서 해소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키우는 어떤 의지이고 생명력이라고 한다. 일종의 무병을 푸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예술창작이나 운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한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고 혼자 푸는 것도 아니다. 민중의 한은 큰 물결이 되고, 그 물결이 역사를 움직이기도 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이 그 중 하나라는 것이다. 결국 해한, 한을 푼다는 것은 모두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치유는 화해로 완성된다.

문순태 작가의 화해는 빨갱이라는 허물이 씌워진 원한의 발원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고향에서 고향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밥도 먹고 옛날 얘기도 하는 것, 얼굴 맞대고 지난 갈등을 없애는 것, 이것이 화해의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하던 전통적 공동체 문화 속 나눔의 가치는 소중하고 복원되어야 할 것들이다. 분단 과정의 갈등과 상처는 지금 남북관계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 사이의 작은 군집 사이에 남아서 아물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5·18의 기억 역시 분단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 5·18이 상품화 되면서 그 기억의 파편들은 사라지고 오히려 부정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래서 작가는 분단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큰 담론보다는 쉽게 망각되어 버리는 개인의 역사에 주목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기록되지 않은 삶의 역사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파괴된 공동체의 가치가 복원되고 크고 작은 상처의 치유가 가능하다.

 

  1. 임철우 작가

임철우 작가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 완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완도에 진입했다던 나주부대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학살의 기억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당사자였던 것이다. 작가는 이후 연좌제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의 삶 속에 분단과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작가에게 그 기억의 연장은 5·18이었다. <봄날>에서 작가는 5·18발발 처음 3일의 기억을 또렷이 옮기면서 간첩, 용공분자, 또는 양아치들의 폭동이라고 알려졌던 조작된 정보를 바로잡는데 힘썼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자기가 쓰고 있는 이야기들이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고 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의 삶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했던 존재들이고 기억 속에서 또 다른 ‘우리’ 혹은 ‘나’로 태어나기에 소설의 이야기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임철우 작가는 우리가 공유해야할 일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현실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진정 위로하고 공감을 통해 치유의 길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상징이 소설 속에서 해원을 도와주는 무당의 역할로 표현되었다면 현실에서는 문학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1. 이순원 작가

강원도 강릉이 고향인 이순원 작가는 <그대, 양진을 아는가>·<잃어버린 시간>에서 기막힌 분단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수복지구 양양을 무대로 일정시기의 기록이나 기억이 폭력적으로 사라진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쓰는 소설은 역사가 증언하지 못한 것을 증언하는 기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증언이다. 소설 속에 보이는 이 곳 사람들의 모습은 침묵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우클릭으로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선명히 하는 삶을 선택한다. 작가는 수복지구라는 특정한 공간이 연좌제와 같은 이념에 의해 발 묶인 곳이었음을 옛 기억을 통해 회상하고 이 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분단의 망령을 보면서 세월이 지나도 이념에 관한 사회의 변화가 지지부진한 것이 특정 시기나 공간의 문제만은 아님을 알린다.

작가들이 남북문제에 대해 자기를 검열하는 것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이다. 소설 속 수위 조절은 곧 자기의 이념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작가는 이런 분단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길은 원산에서 잡은 옛 추억 속 털게를 속초에서 먹는 것처럼 단순히 경제교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동질적인 정서가 있어서 그런 식으로 조금씩 서로 스며드는 방식의 문화교류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교각만 남은 끊어진 철길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일까, 이순원 작가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DMZ를 쭉 가로지르는 종단 트레킹 길을 만들고 싶어 한다. 금강산까지 트레킹하는 꿈을 꾸는 이 길은 그가 지금까지 소설로 다루었던 가족, 고향, 도시, 전쟁, 군대, 5·18 등 전방위적 문제들이 해소되는 길이기도 하다.

 

다섯 작가들의 인터뷰는 소설에서 다 말하지 못한, 혹은 소설이 담고 있었던 다양한 방면으로 이야기가 연계되는 맥을 보여준다. 『기억과 기억들』 서문의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이 “통일과 분단 그리고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적 과제들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12쪽)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들의 소설 속 배경이 되었던 우리 현대사의 다양한 사건과 문제의 원인에는 남북 분단의 갈등과 상처가 있었고 이념문제를 포함한 현시대의 여러 사회적 갈등의 근저에는 해결되지 않은 분단의 모순적 상황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지금의 문제는 더욱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같은 선상에서 연계하여 고민해야할 과거의 유산으로 남북의 통일과 분단극복은 우리 역사에서 발생한 시대 모순의 가장 근저에 위치한 쉽지 않은 과제이다. 더 나아가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정립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분단문학 작품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통합 서사의 사회적 확산을 염두에 두고 이를 생산해내는 방법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획”(11쪽)된 것이 『기억과 기억들』이다.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6·25, 4·3, 5·18등 우리 현대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한 작가들의 경험을 구술로 풀어내 담았기에 현대사의 많은 문제적 지점들에 기억의 고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생생히 확인했다. 또 각각의 작가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얻은 체험으로 기억을 구성했지만 그 연결 지점 역시 서로 교차하고 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우리의 기억은 ‘나’의 기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이 되고, 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기억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역사이다. 강요된 망각과 왜곡된 기억, 조작된 기록 아래 분단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은 분단의 논리와 이념에 의해 규정된 적대적 타자를 영원히 적대시할 수밖에 없다. 그 적대적인 모습은 우리 내부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타자의 상처에 공감하고 원한을 풀어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계속 소설을 쓰는 것이고 『기억과 기억들』은 그들의 문학적 외침을 재가공하여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연대와 평화 그리고 정의와 인권의 가치로 채워진 ‘통합 서사’를 사회적 기억으로 바꾸어 가는 일”(10쪽)은 지금 우리 현실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담아내주길 기대한다.

『길 위의 우리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의 서재]

♦ 아래 글은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제76집(2018. 12)에 게재된 서평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철학자의 서재]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통일인문학』 편집위원회 측에 감사드립니다.

 

『길 위의 우리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길 위의 우리철학』, 메멘토, 2018.

 

김재현(전 경남대 철학과 교수)

 

1.  답사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길 위의 우리철학』이란 책을 읽고 무척 기뻤다. 철학연구자들이 최초로 역사학자들의 유적답사처럼 발품을 팔아서 서술했으므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어 재미있었고 우리(철학)사상의 현실감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현대철학분과 소속 12명의 연구자들이 한국근대지성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길과 장소를 탐방하여 쓴 것으로 ‘최시형부터 안호상까지 근대지성 13인의 발자취를 따라’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글쓴이들은 “앞서 간 사상가나 지식인들이 ‘사상’과 ‘실천’을 아로새긴 ‘길’을 먼저 찾아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보려고”(6)했으며 이들이 “걸어간 길을 되밟아 보는 여정 속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고개를 드는 물음을 정리하고 그것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7쪽)고 말한다. 필자들의 이런 의도가 어느 정도 실현됐는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여러 인물들이 간 길을 크게 5개(5부)의 이정표로 나누는데 ‘낮은 데서 찾은 진리’라는 길에서는 최시형 방정환, 장일순을 ‘경계를 넘어선 큰 마음’에서는 여운형과 한용운을 다루고 ‘역사와 교육에서 희망을 보다’에서는 박은식, 안창호, 신채호를 ‘펜과 칼을 함께 들다’에서는 나철, 박치우 ‘타협과 저항 사이’에서 신남철, 현상윤, 안호상을소개한다. “근대 지성인들과 함께 걸어갈 열세가지 길에는 우리철학사상이 걸어온 단절과 모방, 비판과 창조, 저항과 굴종이 모두 담겼다”(10) 이처럼 여러 필자들이 우리 철학사상의 흔적을 찾아 간 인물과 장소는 매우 다양한데 우선 이들이 간 길을 책의 순서에 따라 찾아가 보자.

 

2. 구태환은 해월 최시형(1827-1898)의 기념비가 있는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최시형이 도피생활을 하며 숨어 지내던 원주의 동학교도인 원진여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조선시대 좌포도청이 있던 단성사 자리터도 찾아가는데 최시형이 이곳에서 재판받고 처형된 곳이다. 또한 피맛골과 낙원상가 부근의 국밥집도 찾고, 한양성 내의 시신을 내보내던(따라서 최시형의 시신이 나갔던) 시구문이라는 별칭이 있는 광희문도 찾는다. 이러한 탐방을 거친 후에 묻고 나름대로 답한다 ‘최시형이 꿈꾸던 세상이 왔나?’ “모든 사람이 한울님인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 흐르는 민중의 자각과 저항의 물결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울님, 사회의 주인임을 깨달아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최시형의 벗이고, 한울님이다”(31)

김세리는 33세로 요절한 소파 방정환(1899-1931)을 만나기 위해 그의 동상이 있는 어린이대공원을 찾는다. 그리고 어린이 날이 시작되고 선포된 천도교 광장, 생가터가 있는 세종문화회관 뒤편, 묘소가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찾으며 소파의 삶과 사상을 소개한다. 필자는 “방정환이 어린이에게서 미래를 보았듯 우리도 어린이에게서 미래를 보고 어떤 미래를 제시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47)라고 말한다.

구태환은 장일순(1928-1994)의 체취와 다양한 일화를 만날 수 있는 원주역에 가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옛집인 원주 봉산동과 밝음신협 건물을 찾아가는데 이 건물 4층에 그의 서화가 전시되어 있는 무위당 기념관이 있다. 한 인물의 삶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공간과 장소, 건물을 찾아가면서 그의 삶과 사상을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인데 장일순 편에서 이런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난다.

유현상은 여운형(1886-1947)이 1947년에 7월 19일 암살당한 현장인 혜화동 로타리를 찾아 서거지 표석을 확인한 후, 경기도 양평의 남한강변에 있는 그의 생가와 기념관을 찾는다. 이곳 가까이에는 다산 기념관도 있다. 기념관을 보면서 여운형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고 해방 정국에서 좌우파의 극한 대립과 독립운동 세력들의 갈등 속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여운형과 현실에 대해 안타까와 한다. 그리고 4.19 민주묘소에서 도선사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묘소에 찾아가 남북합작 노력이 무산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송인재는 한용운(1879-1944)이 만년을 보낸 서울 성북동 북정마을의 심우장을 찾는다. 심우장은 만해가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는 한옥이다. 심우장 가는 길에 ‘님의 침묵’을 새긴 비석과 만해동상이 있다. 그리고 1918년 [유심]을 발행한 장소인 계동에 있던 유심사를 찾고 3.1운동 때 만해를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태화관 터도 찾는다. 이 터에 있는 태화빌딩 입구에는 ‘삼일독립선언 유적지’라는 표석 만 남아있다. 다행히 서울시가 내년인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선언기념 광장을 만들기로 했다. 탑골공원, 천도교중앙대교당을 포함해 이 일대에 독립운동을 기리는 공간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만해가 투옥됐던 서대문 형무소도 찾는다. 서대문형무소는 안창호를 포함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장일순, 리영희, 김근태 등 민주화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다.

이 지는 박은식(1859-1925)을 만나기 위해 1898년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종로구 종로 1가 사거리와 보신각 주변을 찾는다. 박은식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했고 이 활동이 그가 개혁사상가로 전환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있던 자리(서울시 종로고 수송동 85)와 교육운동가로서 참여한 서북학회터도 찾는다. 이 곳에 있던 서북학회회관은 1985년 건국대학교 교내로 이전해 복원되었다. 마지막으로 한성사범학교 교관이던 박은식의 흉상이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구 한성사범학교) 역사관을 찾는다.

배기호는 서울 강남 도산로에 있는 도산공원을 찾아 기념관을 자세히 살피면서 도산 안창호(1878-1938)의 삶과 민족운동과 사상에 대해 소개한다. 필자는 흥사단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는데, 서울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흥사단 본부를 탐방하지 않은 것이 아쉬

움으로 남는다.

진보성은 충북 청주에 있는 신채호(1880-1936) 사당과 묘소와 기념관을 찾아 어린 시절과 성균관 입교하기 전까지 신기선과의 만남과 영향 등에 대해 소개한다. 신채호는 19살 되던 해 성균관에 입교한다. 그는 개화자강론에 관심보이고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서대문에 있던 독립회관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필자는 독립관터 표석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 신채호가 논설위원으로 활동한 <황성신문>이 있던 지금의 종각 부근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터도 찾는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1910년 칭따오로 떠나기 직전까지 살던 삼청동 옛집터도 방문한다.

김정철은 일제하 민족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1863-1916)을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의 사직단 가까이 있는 단군을 모시는 사당인 단군성전을 찾는다. 대종교는 본래 단군교라 불렸는데 나철이 단군교를 되살리고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는데 앞장섰다. 필자는 민간 신앙 속의 단군을 찾기 위해 인왕산 중턱에 있는 국사당을 간다. 이 국사당은 본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는데 일제가 신사인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옮기게 했다. 또한 전남 보성군 벌교의 금곡에 있는 나철 생가를 찾아가 그가 어떤 계기로 대종교를 이끌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1909년에 대종교의 거듭남을 선언한 지금 감사원 부근에 있는 취운정터 표석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대종교의 총본사가 있는 홍은동에 찾아가 나철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독자에게 다시 던진다.

조배준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 박헌영의 측근으로서 월북하여 빨치산으로 죽은 박치우(1909-1949)를 만나기 위해 태백산국립공원을 찾는다. 박치우가 1949년 11월 20일 태백산 골짜기에서 빨치산으로 남하하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치우가 해방 직후 중국에서 돌아와 1946년 3월에 창간한 <현대일보>의 사무실이 있던 옛터를 찾는다. 박치우는 “지금 여기에서 ‘나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과제”라고 밝히고 이를 실천한 철학자로서 “‘우리 철학’을 고민하는 후학들에게 작은 이정표로 남았다”(233)

이병태는 대학로 안에 있는 경성제국대학 옛터를 찾아 신남철(1907-1958?)을 생각한다. 신남철은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조교생활도 하고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에 암울한 상황에서 사상적 방황을 하면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과 함께 조선학술원 위원으로,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활동했다. 미군정의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정치활동도 하다가 좌절되자 1948년에 월북한다. 신남철은 김일성 대학 철학과 교수를 했지만 북한에서도 그의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신남철은 장소를 찾지 못한 지식인이었고, 실제로 그 어떤 장소에도 귀속되지 못했다”(255)

윤태양은 현상윤(1893-?)을 만나기 위해 탑골공원을 찾는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이 민족대표 33인만이 아니라 선언을 준비한 사람까지 포함해 48명인데, 중앙학교 교사였던 현상윤이 3.1 운동을 준비한 사람으로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중앙학교

(현 중앙고등학교)와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를 찾아 현상윤의 행적을 소개한다.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를 1932년에 인수하고 1946년에 현상윤을 교장으로 초빙하는데 그해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승격되고 현상윤은 고려대 초대 총장이 된다. 그리고 1948년부터 고려대에서 한국사상사를 강의하면서 한국사람이 한글로 쓴 최초의 근대적 한국사상사인 [조선유학사]를 1949년에 간행한다. 현상윤은 일제말의 친일적인 행적과 글들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는데 『조선유학사』에 대한 평가를 포함해 그가 남긴 공과 죄는 분명히 평가되고 알려져야 할 것이다.

박민철은 ‘국민교육헌장’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안호상(1902-1999)을 찾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국민교육헌장비’를 방문한다. 그리고 일제시대 그가 근무했던 보성전문학교를 찾고, 안호상과 이승만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자유총연맹’이 있는 서울 남산의 자유센터를 찾는다. 마지막으로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를 찾아간다. “안호상에게 이승만이 자신의 철학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정치적 상징이었다면, 이승만에게 안호상은 통치 이념을 세련되게 꾸미고 보완해 줄 이데올로그였다”(286-287)

 

3. 이 책은 한국 근대지성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구체적인 길과 장소, 건물, 유적비, 표석 등을 탐방하면서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스토리텔링한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서평자가 여정을 따라 같이 읽어보니 대부분의 필자들이 이런 과제를 잘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책 끝부분에 있는 추천답사코스 안내도는 친절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이 코스를 따라 답사하고 싶은 마음을 생기게 한다. 이 점에서 여러 필자들의 노고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해방 후 친일파의 집권에 따른 역사의식의 부재 때문에 잊혔던 또는 망각했던 한국근현대사의 인물들의 삶과 사상의 흔적을 복원하여 이들에게 적절한 장소를 찾아주고 한국현대사 속에 위치를 지정해주는 것이 후대 연구자들의 과제이자 역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길 위의 인문학’(7)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철학계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이루어낸 바람직한 성과라 생각한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언급된 인물들 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필자들이 여러 명이고 개별적으로 서술하다 보니 이 인물들의 시대적 상호연관성이나 영향관계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것 같다. 사회역사적, 사상적 연관관계를 더 자세히 해명하면서 구체적

장소를 추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동학이 천도교와 대종교에 미친 영향과 함께 최시형, 나철, 신채호, 현상윤, 장일순 등의 사상적 계보에 대한 정밀한 추적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에서 찾아가지 않았던 유길준, 서재필, 함석헌 등 여러 사상가들을 포함해 한국근현대 사상사에서 다룰만한 인물들에 대한 후속 연구와 함께, 지역적으로도 북한을 포함해 동아시아적 차원, 더 나아가 글로벌한 차원에서 탐방을 진행하여 『길 위의 우리철학』 2권, 3권 등이

계속 나오길 기대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㉛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373a]

* 이후 소크라테스는 호사스런 나라를 ‘염증(부어오른) 상태의 나라’φλεγμαίνουσας πόλις로 다시 명명한 후 그 나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나라에서 염증 상태의 나라로 변하는 원인은 다름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τισιν 건강한 나라에서 주어진 것들과 그곳에서의 생활 방식δίαιτα이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기οὐκ ἐξαρκέσε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의식주 전반에 걸쳐 사치스런 것들이 추가된다.

* 소크라테스가 열거하고 있는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침상κλίνη과 식탁τράπεζα 및 기타 가구σκευή들, 요리ὄψον와 향유μύρον 및 향료θυμιάματα , 기녀ἑταίρα와 생과자πέμμα, 기타 필수적이 아닌 것들οὐκέτι τἀναγκαῖα 즉 회화ζωγραφία와 자수ποικιλία, 황금χρυσός과 상아ἐλέφαντα 등 그와 같은 유의 온갖 것들.

 

[373b-d]

* 이런 것들이 추가되면서 앞의 나라는 규모ὄγκος와 수πλῆθος에서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게 되어 건강한 나라는 더 이상 적합하지가 않게οὐκέτι ἱκανή 된다. 그리하여 필요불가결한τοῦ ἀναγκαίου 것을 넘어서는 직능의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모든 부류의 사냥꾼θηρευτής과 모방가μιμητής들이 생겨나는데 모방가들 중 일부는 형태와 색채σχήματά τε καὶ χρώματα에 관여하는 사람들(조각가와 미술가)이고 일부는 시가μουσική에 관여하며 이를 돕는 시인ποιητής, 음송인ῥαψῳδός, 배우ὑποκριτής, 합창 가무단원χορευτής, 연출가ἐργόλαβος들이다. 그리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기구σκευή들 즉 여성들의 꾸밈κόσμον과 관련한 다양한 소품(장신구)들παντοδαπῶν을 포함해 더 많은 봉사자(시종)διάκονος들, 이를테면 가복παιδαγωγός(가정교사), 유모τίτθη(건강 관련 시종), 보모τροφός(음식 시중 시종), 시녀κομμώτρια(의복 관련 시종), 이발사κουρεύς, 일반 요리사ὀψοποιός, 고기 요리사μάγειρος(푸주한)가 생겨나고 육류 공급을 위해 앞서 말한 사냥꾼 이외에 양돈가συβώτης 및 온갖 종류의 가축βόσκημα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건강한 나라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살게 되면 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어서 의사ἰατρός들이 많이 생겨난다.

 

—————————–

 

* 호사스런 나라가 규모와 수에서 한층 더 커진다고 했을 때 규모와 수가 가리키는 것은 의식주에 있어 필수적인 것 이상의 것들과 그것들을 제공하는 직능의 수는 물론 그런 것들의 확장에 수반하는 인구의 증가까지 포함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규모와 수의 증가는 이미 호사스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욕구가 더 이상 생존 욕구에만 만족하지 않고 사치스런 욕구에서부터 문화적 욕구에로까지 확대되었음 보여준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맛을 추구하고 고기 요리까지 탐닉하며 자수와 회화는 물론 치장 도구까지 욕구하고 있는 양상은 이미 인간의 욕구가 동물적 욕구를 넘어 사치욕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고 특히 시가μουσική 관련한 욕구의 증대는 이른바 인간의 고유 욕망으로서 문화 예술에 대한 욕망이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보모와 유모는 물론 아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의 출현 또한 본능적 돌봄 이상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음을 나타낸다.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문명 생활에 대한 욕구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 호사스런 나라에 ‘돼지 치는 사람’συβώτης이 등장하는 것 또한 이 나라에 생존을 위한 식욕 이상의 고급 요리 등 식탐과 미식에 대한 욕망도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사실 기원전 5세기 만해도 아테네 사람들 대부분은 주로 채식을 했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고기 요리는 특수 신분이나 즐겼을 법한 고급 요리로 그려진 것이다. 실제로 아테네에서 소와 양은 기본적으로 식량이나 양모 등을 얻기 위해 사육되었던 까닭에 소고기와 양고기가 일상의 식탁에 오르는 일은 그 자체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는 순전히 식용을 위해서 사육된 동물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상류 계층의 고기 수요는 주로 돼지고기였을 것이다. 호사스런 나라에 이르면 사냥술도 이제 더 이상 양이나 가축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기술만이 아니라 식탐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술로도 활용된다.

* 미술가와 조각가 그리고 시인들을 모두 모방가μιμητής로 부르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의 예술의 목표가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사실적인 모사와 모방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사실주의 회화들조차 단순 모사 즉 복제가 아닌 작자 자신의 정신이 창조적으로 반영된 모종의 개념적 추상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기서 소개되는 자연에 대한 회화적 모사는 저자의 창조적 관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결핍을 안고 있는 그럴듯한 복제물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되고 있다. 플라톤에게 예술가의 모방은 최소한 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진상과 거리가 먼 가상을 추구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 시가(詩歌μουσική, mousikē)는 오늘날 music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말을 음악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349d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말 자체가 원래 음악, 예술, 학문의 여신인 뮤즈μουσαι에서 나왔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가는 이른바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등과 같은 문학적 시가를 비롯해서 그에 수반하여 이루어지는 음악과 연극, 춤 등 일체의 예술 분야 전반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같은 시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의 지침을 제시하는 경전에 준하는 이야기이자 노래였던 까닭에 mousikē에 능하다는 것은 예술 능력은 물론 품위 있는 시민으로서의 교양과 식견을 두루 갖추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mousikē는 ‘학예’라는 말로도 번역되고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μουσικός(mousikos) 또한 단순히 음악 관련 전문가만이 아니라 예술인과 지식인의 뜻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 플라톤이 통치자를 언급하며 가장 많이 비유적으로 인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의사이다. 통치자는 나라의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체적 질병이 문제여서 말 그대로 의사가 필요하다.

 

2-7. 전쟁의 기원과 수호자 계층의 발생(373d-374d)

 

[373d]

*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나라가 어떻게 호사스런 나라로 변화하는지를 자세하게 이상과 같이 살펴본 후에 이제 이러한 나라에서 왜 전쟁πόλεμος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나라에서는 식량 수요가 크게 늘어나 결국에는 식량을 생산할 영토χώρα가 모자라게 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목축하고 경작하기에 넉넉한 땅을 가지려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경우 이러한 땅을 가지는 방법은 영토를 확장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웃나라 사람들의 땅을 일부분 떼어내야ἀποτμητέον 할 것이고, 이웃나라 사람들 역시 그들대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τὸν τῶν ἀναγκαίων ὅρον를 벗어나 ’재화(돈)의 끝없는 소유에’ἐπὶ χρημάτων κτῆσιν ἄπειρον 자신들을 내맡겨 버릴 때는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 한다. 이런 연유로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소크라테스가 발견한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이다.

 

[373e]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면서 전쟁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지εἰ ἀγαθὸν ἐργάζεται 나쁜κακὸν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μηδέν γέ πω λέγωμεν 다만 최소한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 만큼은 발견했다고 말하기로 하자고 언급한 후, ‘나라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나쁜 일들이 생기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다’ἐξ ὧν μάλιστα ταῖς πόλεσιν καὶ 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κακὰ γίγνεται, ὅταν γίγνηται라고 단언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틀림없는 말씀이라고 동의를 표한다.

 

[374a]

*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이제 이 나라에는 소규모가 아니고οὔ τι σμικρῷ 나라의 모든 재산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들에τοῖς ἐπιοῦσιν 대항해서 싸울 전체 군대만큼의ὅλῳ στρατοπέδῳ 확대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들로써 충분한지 못한지οὐχ ἱκανοί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미 앞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듯이 ‘한 사람이 여러 기술 분야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ἀδύνατον ἕνα πολλὰς καλῶς ἐργάζεσθαι τέχνας.고 말한 후, 전쟁과 관련한 겨룸ἀγωνία 또한 하나의 전문 기술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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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373d-374a)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음미해볼 것이 있다..

1) 호사스런 나라의 규모와 수가 크게 확대되면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욕구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영토 확장욕과 필수적인 것 이상에 대한 욕구 증대로 인한 재화의 소유욕이다. 물론 텍스트는 목축과 경작을 위한 영토 확장욕은 이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망으로 기술하고 재화에 따른 소유욕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욕망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욕망들 모두가 전쟁의 원인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전쟁의 원인은 목축과 경작을 위한 보다 넓은 땅과 호사스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화 즉 땅에 대한 욕망과 돈에 대한 욕망이다. 373e에서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단서는 그런 것들’이라는 말에서 ‘그런 것들’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돈의 소유욕에 자신을 내맡기게 되는 경우를 소크라테스는 호사스런 나라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라가 호사스런 단계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욕망이 모두 화폐가치로 환원될 정도로 질적인 차이가 무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소비와 사치가 미덕으로 추앙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적성과 소질에 따른 다양한 욕망은커녕 모든 욕망들이 화폐가치로 환원되어 서열화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다양성은 다만 그러한 서열의 상승을 위한 수단의 다양성에 불과한 것으로 질적으로는 이미 획일화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전쟁의 원인으로 재화에 대한 욕망이 제시되고 그에 따라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고 종국에는 철인정치가 내세워진 것도 근본적으로 재화에 대한 탐욕이 초래하는 그러한 파행적 종말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2) 박종현 역본은 이 부분을 앞서 인용하였듯이 ‘나라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나쁜 일들이 생기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다’ἐξ ὧν μάλιστα ταῖς πόλεσιν καὶ 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κακὰ γίγνεται, ὅταν γίγνηται로 옮기고 있다. 이 번역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쁜 일들이 생기게 하는 단서로만 풀이되어 있고 그 나쁜 일들에 전쟁이 포함되는지 여부를 열어 놓고 있다. 이는 아마 ‘그런 것들’이 가리키는 것을 ‘전쟁과 그와 같은 부류의 일들’(war and the like)로 해석하는 일부 주석가(Schneider, Stallbaum)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 연구가들은 위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을 바로 앞의 문장에 나오는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과 연결시킨다. 그러한 한, ‘그런 것들’은 영토와 재화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 문장을 앞에 나오는 문장과 연결시켜 다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나라에 있어서 개인적으로나 또는 공적으로나 정작 나쁜 일이 생길 경우에 이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들인데 전쟁 또한 그러한 것들로부터 생기는 것일세.’

3)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전쟁이 나쁜 결과를τι κακὸν 가져오는지 좋은 결과를ἀγαθὸν 가져오는지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μηδέν γέ πω λέγωμεν’는 말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는 언급은 나중에 말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데 기대와 달리 <국가>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말의 의미를 그냥 전쟁에서 이기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패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상투적이고 피상적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최초의 나라가 호사스런 나라가 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욕구 증대는 결국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현실 경험을 통해 결과적으로 수호자 계층을 비롯해서 철학과 문명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은 나쁘기도 하지만 선을 결과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Adam 주석 참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어처구니가 없다. 부정의 때문에 철학 통치자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부정의를 좋은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4) 필자 생각으로는 그 말은 평생 동안 플라톤 자신이 경험하고 목도한 아테네 전쟁들에 대한 평가, 무엇보다도 페리클레스가 제국주의를 내세운 이후 아테네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들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가 벌인 패권주의적 전쟁 덕분에 사회 경제적 성장은 물론 문학과 철학 예술 분야에서 다른 폴리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문화적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는 같은 민족인 이웃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와 착취의 기반으로서 이후 스파르타 등 이웃 나라의 반발을 초래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야기되면서 종국에는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385년 전후 역시 아테네의 번영은커녕 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테네의 국력이 크게 쇠잔해진 시기였다. 평생 동안 아테네의 이와 같은 흥망성쇠를 지켜보면서 플라톤은, 페리클레스와 그 후계자들이 벌인 패권주의적 전쟁이 비록 사회 경제적, 문화적 풍요는 가져다주었기는 하지만 결국은 아테네를 멸망에 이끈 결정적 원인이 되었음을 뼈저리게 통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메넥세노스>를 비롯한 여러 대화편에서 틈틈이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와 침략 전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아테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켜세울 법한 기원전 5세기 그 영광스러운 시절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담고 있는 것이라 판단된다.

5) 플라톤은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구의 증대가 결국은 이웃 나라 사람들의 땅을 떼어내려는 전쟁, 즉 침략 전쟁의 배경이 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흥미롭게도 정작 그 때문에 새롭게 생기는 군대를 침략자가 아니라 반대로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수호자 즉 방어를 위한 군대로 묘사하고 있다. 호사스런 나라가 땅을 떼어내기 위해 벌이는 침략 전쟁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전후 맥락상 어색한 일이다. 왜냐하면 드러난 문맥만 보면 호사스런 나라는 욕구가 증대해도 어떤 영토도 침략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형국으로 읽혀질 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맥을 플라톤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플라톤의 속내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호사스러운 나라에 이르면 그 증대된 욕구로 말미암아 전쟁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게 불가피하다. 그러나 설사 그럴 지경에 직면했을지라도 플라톤은 어떻게든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통해 그 욕구를 해결해서는 안 되며, 다만 전쟁을 해야 한다면 이웃 나라가 침략할 경우 방어를 위한 전쟁에 한해 허락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을 편들어 이 문맥에서 그러한 함축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럴 경우 호사스런 나라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침략 전쟁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의 문제가 플라톤에게 남는다. 물론 여기서 그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전후 문맥들을 종합적으로 살펴가며 생각을 기울이면 우리는 플라톤이 호사스런 나라의 등장을 불가피한 현실로 인정하고 전쟁 욕구도 상존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해결책을 전쟁에서 찾기 보다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을 통해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망들과 직능들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그 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사실 호사스런 나라가 직면하는 문제들이 비록 전쟁 욕구를 촉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그들 내부의 욕망들을 규모와 수, 종류와 형태의 측면에서 서로 조율하고 조화시키는 이른바 정치적인 해결 방식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의 나라에 이어 호사스런 나라를 등장시키고 전쟁에 대한 욕구와 그에 대처하는 군대의 필요까지 끌어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단지 전쟁관련 전문가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관련 전문가도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수호자 계층의 등장이 이루어진 후 나중에 가면 수호를 위한 최고의 직능으로서 정치를 담당할 통치자 계층의 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이들 통치자가 나라를 정의롭게 다스리는 한, 최소한 침략 전쟁은 없으며 전쟁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나라를 수호하는 방어 전쟁만 있을 뿐이다.

6) 그리고 욕구의 증대가 초래하는 과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에는 뭔가가 생략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이웃 나라와의 전쟁의 원인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그가 구상한 논의 전체 틀에서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 포석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곧바로 이웃 나라에 대한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에는 과정상 뭔가 간과되어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가 372e-a에서 보듯이 어떤 일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 이전에 내부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이 심해지면 이른바 내전도 일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런 내부의 갈등이나 내란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 있지 않다. 굳이 그것이 생략된 이유를 찾아본다면 내란이나 내분, 분쟁 등으로 번역되는 stasis라는 말 자체가 이른바 전쟁을 의미하는 polemos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전쟁의 발생 배경을 언급하는 단계에서 그것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나 다툼도 호사스런 나라가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인 한, 호사스런 나라에는 전쟁에 대한 욕구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치에 대한 욕구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 전체를 보면 내분이나 내란의 문제는 플라톤에 의해 현실 국가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서 이곳저곳에서 수도 없이 반복해서 거론되고 있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은 종종 내부의 분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촉발되기도 한다. 아테네 역시 그랬다. 그런 점에서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전쟁에 대한 욕구에는 그러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군인만이 아니라 통치자에 대한 요구도 포함하고 있다는 추정은 이후의 플라톤의 논의 전개와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7) 최초의 나라가 호사스런 나라로 발전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욕구의 증대가 전쟁을 촉발시킨다는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앞서도 살폈듯이 이곳 논의 단계의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최초의 나라에서의 생산자 계층의 성립 단계에 후속해서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수호자 계층의 성립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애초부터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 즉 작은 글씨인 개인의 영혼들을 나라라는 큰 글씨를 통해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인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나라에서의 생산자 계층에 대한 설명에 이어, 그 상위 부분인 기개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나라에서의 수호자 계층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에서 등장하는 수호자 계층에 이어 장차 통치자 계층의 등장과정에 대한 설명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 역시 전체적인 논의 구조상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8) 이곳에서(375e) 군대의 등장을 ‘소규모가 아니라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울 전체군대만큼의 확대’라는 표현 또한 이곳에서 요구되는 직능의 확대가 단지 전쟁 발발에 따른 특정 전쟁 기술들이 일부 추가되는 수준이 아니라 침략자 전체에 대항할 만한 규모 즉 생산자 계층의 규모에 상응할 만한 새로운 계층의 등장임을 보여준다. 즉 호사스런 나라에서 전쟁의 발발을 배경으로 요구되는 전쟁 관련 기술은 생산자 계층에서의 특정 직능과 동급 수준의 직군이 아니다. 생산자 계층에 농부와 제화공, 벽돌공, 무역상 등이 내부 세부 직군으로 소속되어 있듯이 전쟁 관련 기술 또한 이를테면 각기 다른 기술을 가진 중무장 보병, 기마병, 해병, 노수 등 전투 형태별 기술은 물론 장비별로도 각기 다른 기술을 가진 세부 기술들이 그 내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전체 군대만큼의 확대’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특정 직능 수준의 군인이나 군대의 확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략자와 싸울 전체 기술들과 직군들을 총망라한 모든 군대만큼의 확대 즉 계층 차원에서의 확대임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전체 틀을 염두에 두고 순서에 따라 생산자 계층에 이어 수호자 계층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9) ‘그들로써 충분하지 못한가요?’라는 글라우콘의 물음은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따로 군대라는 별도의 전문적인 직군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인으로서 일반 시민들 모두가 군인으로 나서 싸우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미 앞에서(370c)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기술 분야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음을 환기시킨다. 사실 이러한 언급은 생산자 계층의 구성에서도 확인되었듯이 플라톤의 분업과 전문가 주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글라우콘의 질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것이라는 플라톤 비판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요 근거로 종종 인용된다. 왜냐하면 스파르타야 말로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언급한 대로 직업적인 군인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군인이고 생산 관련 일은 그러한 군인들이 틈날 때에 종사하던 이른바 전사들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분명 그러한 나라를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에서 생산자 계층과 군인 계층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고 군인 계층조차 전술과 무기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전문적인 직군들로 구분하고 있다.

 

[374b-c]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전쟁과 관련된 겨룸ἀγωνία 역시 기술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러한 ‘전쟁 관련 기술’πολεμικῆ이 제화 기술 등 일반 기술보다 더 신경을 써야하는κήδεσθαι 일임을 밝힌다. 그리고 최초의 나라에서 여러 전문 기술자들에게 각각이 적성에 따라 한 가지 일을 맡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σχολὴ로이 대하고 오직 그 일에만 종사하게 한 것은 각자 자기 일을 적기καῖρος에 훌륭하게καλῶς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재확인 한다. 그런 연후 그는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 할 가장 중대한πλεῖστος 일인 만큼 전쟁 관련 기술 역시 철저하게 분업과 전문가 원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쟁과 전쟁 무기와 관련한 기술들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예시한다. 즉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이 방패ἀσπίς 등 전쟁 무기πολεμικῶν ὅπλον나 장비들ὀργάνων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고 해서 그날로 중무장 병기 사용술ὁπλιτικός이나 다른 형태의 전투μάχη에서 유능한 전사ἀγωνιστής가 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도구든 그 각각에 대한 지식ἐπιστήμη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충분한 연습을τὴν μελέτην ἱκανὴν 하지 않을 경우 아무런 쓸모χρήσιμος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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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룸(경쟁)의 원어 ἀγωνία(agōnia)는 오늘날 번뇌를 뜻하는 영어 agony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경쟁이 곧 번뇌임은 그제나 오늘날에서나 불변의 진실이 아닐 수 없다.

* 박종현이 옮긴 ‘제화 기술이 전술보다도 더 신경을 써야만 되는 것인가?’라는 역문에서 ‘전술’이라는 말은 ‘전쟁 관련 기술’이란 말로 고치는 것이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그 말의 원어 πολεμικῆ(polemikē)는 전쟁 관련 기술 일반을 총칭하는 말로서, 생산자들의 기술이 제화 기술, 농업 기술 등 범주 상 하위 기술들을 포괄하고 있듯이 polemikē 역시 중장비 병기 사용술, 해전술, 기마술 등 범주 상 하위 기술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전쟁관련 기술을 총칭하는 그 말을 생산 기술의 어떤 하나인 제화 기술과 동급수준에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그 말 자체로 전쟁 관련 기술이 나라의 존망과 관련된 기술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범주 차원에서도 당연히 훨씬 많이 신경을 써야할 계층 차원의 기술임을 의도적으로 담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전술’이란 역어가 전쟁관련 기술의 하나인 전술(tactic)의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 말의 원래 뜻과 어울리지 않는다.

* ‘다른 형태의 전투’는 중장비장갑보병 및 기마병 등이 수행하는 육상 전투 형태들 그리고 삼단노선을 이용한 해상전투 형태를 망라해서 표현한 말이다.

* 지식과 연습에 대한 언급은 기술의 탁월성이 선천적인 적성만이 아니라 후천적인 연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기술은 앎이자 지식이되 단순한 앎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앎이다.

 

[374d]

* 전쟁을 수행하는 기술은 그에 적성이 맞는 사람이 따로 있으며, 게다가 무엇보다도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할 가장 중대한πλεῖστος 일인 만큼(374c) 이 나라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곧 수호자φύλαξ들이다.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들이 나라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μέγιστον 것인 만큼 다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가 요구되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요한다고 말한다.

 

[374e]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업무에도 그에 걸 맞는 적성이 요구되는 만큼 나라의 수호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고 어떠한 성향들이 적합한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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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에서 매우 중대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수호자’라는 말이 이곳에서 처음 나온다.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전쟁을 촉발하게 되면서 생산자 계층에 이어 마침내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러한 수호자 계층이 수행하는 일ἔργον은 단순히 어떤 특정 기술과 비교될 수 없는 나라의 수호와 관련된 기술 내지 일 전반에 걸쳐 있다. 그러한 한, 수호자의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 만큼 다른 일에 대해 최대한 한가로운 태도와 그 자체로 최대의 기술과 관심이 요구되는 일이다.

* 수호자 계층은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전사들)stratiōtai과 통치자들archontes이 될 사람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플라톤의 국가 구성을 거론하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통치자 계층은 이 수호자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따로 선발된 사람들이고 전사 계층은 그 나머지 사람들이다. 실제로 <국가> 제3권 414b, 제4권 428b에 가면 수호자 계층이 두 부류로 나누어져 각기 다른 이름들로 불리어진다. 통치자들로 선발된 사람들은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eleis), ‘완전한 수호자들teleoi phlakes’, ‘참된 수호자들alēthino phylakes’로 불리어지고 나머지 사람들 즉 전사들은 ‘보조자들’epikouroi 또는 ‘협력자들’boēthoi로 불린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구성되고 이른바 수호자 계층이란 그곳에서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 이후에는 수호자들의 성향 내지 적성들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제2권 처음부터 여기(374e)까지를 <국가>를 구성하는 큰 단락들 가운데 하나로 구획 짓고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연구자들은 앞서 생산자 계층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적성과 성향을 같이 언급했듯이 다음에 이루어지는 수호자들의 성향에 관한 논의까지(376c)를 하나의 큰 단락으로 묶고 이후의 내용부터 수호자의 교육을 다루는 새로운 단락으로 구획 짓기도 한다.

* 우리의 강해는 제2권 강해 서두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자의 구분에 따르고 있다. 그래서 실제 학당 강의는 이후의 내용까지 일부 다루었지만 위의 단락 구분을 고려하여 이번 웹진 강해록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4. 무역상, 소매상, 임금 노동자 등 서비스업과 화폐의 발생(371a-371e)

 

* 앞서 문자의 비유가 보여주듯 최초의 나라가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하면 최초의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기 성향에 있어서 서로가 다르게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일을 한다’(370b)는 플라톤의 언급은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것은 적성에 따른 분업을 정당화하는 중대한 전제로서 장차 정의로운 나라의 속성을 규정하는 핵심 토대가 된다. 플라톤에게 인간은 소피스트들의 생각과 달리 결코 이기심을 본성으로 갖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그에 따라 서로 필요에 따라 의존하고 협동하지 않으면 안 될 사회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적성 또한 서로 다르게 가지고 태어나 기꺼이 서로의 필요에 부응하는 자질 또한 갖추고 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생각은 단지 당대 아테네가 패권주의를 지향한 이래 상업화되고 개인주의화되면서 마치 이기심이 자연적 본성인 양 왜곡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의로운 국가는 근본으로 되돌아가 협동적 존재로서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토대로 새롭게 다시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371a-b]

* 상대국과의 거래 즉 수입εἰσάγειν 및 수출ἐξάγειν이 요구되는 한, 나라는 상대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종류의 것들도 필요한 만큼 생산해야 한다. 이에 따라 더 많은 농부들과 장인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각 종류의 물건들의 수입과 수출을 도와 줄 심부름꾼διάκονος 즉 무역상ἔμπορος도 필요하고 해상 운송에 정통한 사람τῶν ἐπιστημόνων τῆς περὶ τὴν θάλατταν도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 때문에 협력 관계κοινωνία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으므로 나라 안에서도 물건들을 서로 팔고 사는 일이 필요하여 시장과 교환을 위한 표σύμβολον로서 화폐νόμισμα가 생겨난다.

 

[371c-e]

* 그리하여 시장ἀγορά에서 생산물의 유통을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생산물을 교환해줄 심부름꾼으로서 소매상πρᾶσιν διακονοῦντας이 나타나고 짐 운반 등 체력의 사용을 파는 사람들οἳ δὴ πωλοῦντες τὴν τῆς ἰσχύος χρείαν 즉 체력 사용의 대가로서 임금μισθός을 받는 임금노동자(고용인)μισθωτοί도 생겨난다. 소크라테스는 소매상을 ‘제대로 다스려지는 나라들의 경우 대개 신체적으로 가장 허약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 데에는 무용한 사람들’πόλεσι σχεδόν τι οἱ ἀσθενέστατοι τὰ σώματα καὶ ἀχρεῖοί τι ἄλλο ἔργον πράττειν로 묘사하고 있고(371c) 임금노동자는 ‘지적인 일에서 동반자 관계에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는’τὰ μὲν τῆς διανοίας μὴ πάνυ ἀξιοκοινώνητοι ὦσιν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371e)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농부와 건축공, 직물공, 제화공, 목부 그리고 무역상과 소매상, 임금노동자를 최초 국가의 정원(구성원)πλήρωμα πόλεώς 즉 최소한도의 필요에 따른 국가로 언급하고 그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하는 만큼 ‘완전 하리 만치 성장한 나라’ἡ πόλις, ὥστ᾽ εἶναι τελέα라고 말한다.(37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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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무역상ἔμπορος은 수출입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이고, ‘해상 운송에 정통한 사람’은 선박으로 사람과 화물을 운반하는 해운업자ναύκληρος이다.

* 보통 화폐νόμισμα가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 가치의 교환, 가치의 척도, 가치의 저장 기능을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화폐가 처음에 교환을 위한 물표로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이후 화폐는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언제라도 필요한 물건과 바꿀 수 있는 가격 즉 가치의 저장 기능을 갖게 되었고 시장에서도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상점과 상인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화폐는 거래 물건들의 경제적 가치를 표시하는 척도가 되었다. 특히 화폐가 가치의 저장 기능을 갖게 된 이후 화폐는 교환 수단을 넘어서 장차 높은 가격으로 되팔기 위한 매점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화폐 자체가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이 되면서 화폐의 소유욕의 증대에 비례하여 차입의 욕구 또한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돈으로 돈을 버는 직종 즉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의 유통과 판매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금융업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화폐의 발생을 통해 사용가치를 갖는 구체적 물건들이 화폐로 추상화되고 가격으로 일원화되면서 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우위가 초래된 것이다. 게다가 금융의 발달에 따른 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절대적 우위는 생산자 계층에 대한 관리 계층의 우위는 물론 인간의 욕망을 부에 대한 욕망으로 일원화함으로써 금전만능주의를 탄생시켰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대로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수단에 거꾸로 종속되는 이른바 소외(Entfremdung)가 발생한 것이다.

* 아테네 당대에만 해도 이미 은행이 존재했고 개인들 간의 금용 거래는 물론 고리채 또한 성행했다. 플라톤은 이미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여기서 화폐의 기능을 교환 기능으로 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단지 일반론 차원에서 최초국가 단계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언급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화폐의 사적 소유욕의 증대와 고리채 등 금융을 통한 부의 축적이 일상화된 당대 아테네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서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아테네 당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재물의 사적 소유가 금지되고 있다. 재물의 소유와 축적은 오직 생산자계층에게만 허용되고 있고 통치자 계층에게는 최소 필수품 이외의 어떠한 소유도 허락되지 않는다. 권력과 부를 함께 갖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권력은 순수하게 시민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자신의 덕이자 행복으로 여기는 자의 몫이다.

* 플라톤이 소매상을 ‘가장 허약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데 무용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고 해서 플라톤이 소매상이나 허약한 사람을 폄하하고 있다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곳에서는 최초국가에서 소매상도 나라 안에서 서로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고 그 또한 그 일을 맡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면 그 일은 태생적으로건 후천적으로건 신체가 약한 사람들이 맞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무용하기로 말하면 철학자들 역시 농사나 소매상 등 생산이나 유통 관련 일에서는 무용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플라톤이 소매상을 ‘그 일을 눈여겨보고 스스로 떠맡는 사람εἰσὶν οἳ τοῦτο ὁρῶντες ἑαυτοὺς ἐπὶ τὴν διακονίαν τάττουσιν ταύτην(371c)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소매상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일이 아니라 필요와 적성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선택된 것임을 뒷받침해준다. 체력의 사용을 파고 사는 사람들 즉 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묘사 또한 소매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성과 소질에 따라 그 일을 스스로 떠맡는 사람들이며 그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소한도의 필요에 따라 최초의 나라의 정원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소매상과 임금 노동자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은 그들에 대한 폄하를 포함하고 있다기보다는 신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의 차이가 현실적으로 현존하고 그러한 사정이나 여건이 달리 변화할 가능성이 거의 힘들다면, 그들의 사정과 적성에 따라 그들에게도 서로가 필요한 사회적 역할이 주어질 수 있고 주어져야 함을 언급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여기에 나오는 임금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예속되어 강제로 노동하는 노예와 달리 최소한 이들은 그 일을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 일에 대한 대가도 받고 있다. 실제로 완전하리만치 성장한 이곳 최초의 국가의 정원에는 노예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에 근거해서 플라톤이 그리는 정의로운 국가에 아예 노예 자체가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비록 노예가 맡은 일의 대부분이 체력을 쓰는 일이지만 시민 가운데에도 체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임금 노동자가 바로 그 시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사람이 아닌 마소로 여겼고 플라톤 역시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노예의 존재는 이미 정의로운 국가에서도 당연한 존재로 전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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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최초 나라의 정원(구성원)πλήρωμα πόλεώς을 보면 결국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나라는 농부, 직물공, 건축공, 목부 외에 무역상과 해운업자 그리고 소매상과 임금 노동자로 구성된 나라이다. 이들 모두는 직접 생산과 유통을 도와주는 이른바 물적 기반을 마련해주는 심부름꾼들로서 장차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크게 생산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아직 정치가나 지식인, 철학자가 없는 이와 같은 최초 국가를 ‘완전하리 만치 성장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이쯤에서 우리는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 요구에 대한 답변을 시작하면서 문자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확대시키고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는 한 마디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개인과 나라 안에서 어떤 힘(dynamis)으로 작용하기에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고 낫다는 것인지’를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하는 어떤 힘이란 개인의 경우 영혼들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라는 것이 이미 언급된 바 있다.(358b) 사실 그것은 장차 개인의 정의를 설명하는 키워드로서 영혼 3분설에 따른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 기개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임을 예고하는 것이자 소크라테스가 답변을 시작하면서 다룰 대상이 다름 아닌 개인의 영혼임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살피되 그것을 보다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같은 성격을 갖는 나라를 들여다보고 그 다음에 다시 개인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물론 이러한 제안은 장차 개인과 나라를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살피려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일단 이 제안이 개인의 영혼들을 보다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한 방편으로 끌어들여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나라에 대한 고찰이 내용적으로 개인의 영혼들에 대응해서 제시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개인 영혼의 세 부분은 나중에 드러나듯이 나라의 세 계층 즉 통치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과 그대로 대응된다. 이와 같은 논의 구도상의 전후 맥락을 염두에 두고 최초국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살필 경우, 결국 소크라테스가 그 최초의 국가를 생산자들로 구성된 나라로 구성하고 그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은 이 최초의 나라가 결국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생산자 계층의 성립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최초 국가에 이어 사치스런 나라가 소개되고 그 사치스런 나라에서 수호자 계층이 나오고 장차 그곳에서 다시 통치자 계층이 등장하게 되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최초의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나라의 기원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정의로운 나라의 세 계층이라는 전체 구도를 염두에 두고 그 가운데 우선 생산자 계층의 성립과정부터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기획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최초의 나라가 장차 사치스런 나라로 계속 변화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이 최초의 나라를 ‘완전하리만치 성장한 나라’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전체 논의 구도에서 우선 일차적으로 생산자 계층에 관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최초국가에 대한 기술을 통해 부정의가 생기기 직전 단계까지 즉 필요에 있어서 최소한도의 수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장차 드러날 정의로운 국가를 구성하는 3계층 가운데 물적 기반의 토대를 이루는 생산자 계층의 성립 단계를 우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371e]

* 이러한 나라를 수립한 후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이 나라 안 어디에 정의와 부정의가 있으며,ποῦ οὖν ἄν ποτε ἐν αὐτῇ εἴη ἥ τε δικαιοσύνη καὶ ἡ ἀδικία; 그 각각은 우리가 이제껏 검토해온 것들(주민들 또는 기능들)중 어느 것과 더불어 생겨났을까”καὶ τίνι ἅμα ἐγγενομένη ὧν ἐσκέμμεθα;를 묻는다.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사람들 상호간의 어떤 필요” χρείᾳ τινὶ τῇ πρὸς ἀλλήλους에 의해서 그 각각이 생겼다고 답을 한다. 즉 위의 나라는 사람들 상호간의 필수적인 필요χρείᾳ에 입각하여 수립된 나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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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최초의 나라는 앞서 우리가 살핀 전체 논의 구도상 첫 단계의 완결일 뿐 종결은 아니다. 실제로 최초의 나라는 그 상태 그대로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변화를 맞이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경우, 순진무구하게 생존의 욕구만 충족되면 불만이나 고민도 없는 어린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없고 점차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욕구 또한 다양화되고 증대되면서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와도 같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소크라테스가 완전하리만큼 성장한 최초의 나라를 언급한 후에 느닷없이 글라우콘에게 이 나라 안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고 무엇 때문에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지를 묻고 그 원인이 ‘필요’chreia임을 재차 확인하고 있는 장면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최초의 나라는 완결되었지만 최초의 나라를 성립시켰던 필요는 완결을 넘어 계속 나라의 변화를 낳는 근본 원인임이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재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의 대화는 최초의 나라는 일단 마무리되었지만 그 다음의 단계 즉 정의와 함께 부정의가 발생하는 단계가 계속 이어질 것이며 그 원인은 하나같이 ‘필요’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5. 건강한 나라, 참된 나라 그리고 돼지들의 나라(372a-372d)

 

[372a]

*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나라가 완전하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필요의 확대에 따라 등장하게 될 나라를 다루기 전에,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성립한 최초 나라의 모습 즉 서로에게 필요를 제공할 준비가 된 최초의 나라의 사람들οἱ οὕτω παρεσκευασμένοι이 어떤 방식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먼저 고찰한다.πρῶτον οὖν σκεψώμεθα τίνα τρόπον διαιτήσονται.

 

[372b-c]

*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묘사를 요약하면 이와 같다. “그들 모두 좋은 자리에 누워 충분하게 먹고 마시면서 신들을 찬송하며ὑμνοῦντες τοὺς θεούς 서로들 즐겁게 교제하고ἡδέως συνόντες ἀλλήλοις, 가난이나 전쟁πενίαν ἢ πόλεμον을 ‘유념하여’εὐλαβούμενοι. 재력 이상으로ὑπὲρ τὴν οὐσίαν 자식을 낳지도 않으면서 건강과 함께 평화로움 속에서ἐν εἰρήνῃ μετὰ ὑγιείας 일생을 보내다가 아마도 늙은이로서 고령에 죽으면서 그와 같은 또 다른 인생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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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먹거리들 즉 주식인 보리 가루ἄλφιτον와 밀가루ἄλευρον[372b] 그리고 부식(요리ὄψον)으로서 소금ἅλας과 올리브ἐλαία, 치즈τυρός, 삶은 구근βολβός과 채소λάχανον 요리, 그리고 후식τράγημα으로서 무화과σῦκον와 콩류ἐρέβινθος(완두콩) καὶ κύαμος(콩), 포도주οἶνος, 도금양μύρτη(방향성의 상록 관목, 아프로디테의 신목)의 열매μύρτον나 도토리φηγός 등(372c)은 당시 그리스의 일반 가정의 식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주목할 점은 그리스가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고 그에 따라 실제로 그리스인들 모두 반도에 정착한 이래 문어와 조개류 등 많은 어류들을 섭취했음에도. 플라톤이 서술하고 있는 식품에는 육류는 물론 어떠한 어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제1권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338c 강해 참고) 그리스인들은 육류는 즐겨 먹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스런 나라에서는 육류의 수요가 생겨난다.(373c 참고)

* ‘요리’의 원어 ὄψον(opson)은 기본적으로 익힌 주식에 곁들여 먹는 부식을 뜻하지만 익힌 음식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어떤 사람은 이것을 좁은 의미에서 육류와 어류 음식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글라우콘이 앞에서 ‘요리도 없이 잔칫상을 받게 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은 플라톤이 언급한 음식들에서 육류나 어류 등 고급 먹거리가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을 듣고 이어지는 설명이 그에 대한 보완 설명이라고 본다면 글라우콘이 빠졌다고 지적한 것은 그 내용으로 보아 육류나 어류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부식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세부 묘사들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최소한 의식주에 있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만족스러운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줌과 동시에 비록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이 생각하고 있는 자연적 정의 즉 정의의 원초적 상태가 무엇인지를 함께 보여준다. 그들이 유일하게 조심하는εὐλαβούμενοι 것은 가난이나 전쟁이지만 그것조차 말 그대로 ‘조심’ 또는 ‘유념’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타락이전의 삶 즉 에덴동산의 삶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요컨대 그 요체는 건강과 평화이다. 건강은 말 그대로 신체적인 강건함이요 평화는 나라 사이에서건 개인 사이에서건 그리고 개인의 내면에서건 갈등과 분열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사실 최초 국가의 사람들처럼 최소한도의 필요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의 경우, 인생을 살아가며 목표하는 것으로서 이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어 이런 나라를 일컬어 ‘건강한 나라’라고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유기체로서 이 나라가 갖고 있는 신체적 건강 때문일 것이고 나아가 ‘참된 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 또한 이 나라가 보전하고 있는 자연적 정의 즉 분열과 갈등이 없는 평화의 상태 때문일 지도 모른다.

 

[372d]

* 그러나 글라우콘은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해 그렇게 수립된 나라는 “돼지들의 나라ὑῶν πόλις”라고 폄하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최초 나라 사람들의 생활은 주로 먹고 사는 일인데 그것은 돼지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으며 소크라테스가 그런 식으로 돼지의 나라를 수립하려했다면 과연 그런 것들만으로 돼지들을 살찌울 수 있겠느냐 그 밖에 다른 것들도 주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반문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를 되묻고 글라우콘은 ‘흔히 하는 대로ἅπερ νομίζεται 그들이 불편을 감수할 사람들τοὺς μέλλοντας μὴ ταλαιπωρεῖσθαι이 아닌 한, 그들은 땅바닥 돗자리 위가 아닌 침상에 누워 식탁에 차려진 식사도 하고 요즘 사람들이 먹는 요리와 후식 즉 좀 더 고급스런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반문을 호사스런 나라가 어떻게 성립되는가 하는 것도 고찰해보자라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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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글라우콘에게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원인을 묻고 그 답이 ‘필요’chreia라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372a)과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가 세우려는 나라가 돼지들의 나라인 한, 그가 말한 것들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논의 구도상 최초의 나라에서 호사스런 나라로 이행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한 최초의 나라는 돼지들의 나라와 진배없으며 그에 따라 마치 돼지가 일정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필요를 추가해서 더 안락한 삶을 욕구하듯이 최초의 나라는 결코 그것으로 완결되지 않고 욕구가 증대하여 종국에는 사치스런 욕구까지 발생하여 결국 다른 나라로 불가불 변화하게 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유기체의 성장이 필연이듯 사람의 욕구는 결코 일정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늘 필요를 생산하며 그에 따라 욕구 또한 필연적으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최소한 인간의 욕구는 어떻든 간에 일단 다양한 형태로 확대된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아가 만약 그 증대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서로의 갈등은 물론 전쟁까지 초래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즉 최초의 나라가 사치스런 나라로 변모하고 그에 따라 갈등과 다툼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인 것이다.

* 여기서 인간의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확대되는 것이 필연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욕망의 증대가 제한된 가치 총량을 넘어설 때는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지만 인간의 가치에 대한 관념이 결코 일원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가치의 총량이란 말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정신적 가치 내지 서로 다른 가치에 대한 욕망은 따로 총량이 없다. 일부 물질적 가치 영역에서 갈등과 다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나 행태를 뒷받침하는 일반적 근거로 확대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인간 욕구의 증대에 따른 나라 내지 사회 계층의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찾고 있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최초의 나라는 시민들의 욕구 증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호사스런 나라로 변모하고 호사스런 나라는 호사를 추구하는 시민들의 욕구 증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최고 단계인 자기 정화가 가능한 이상 국가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 결국 글라우콘의 냉소적 태도는 이러한 나라는 자신들이 듣고자 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문제되는 현실의 나라도 아니고 부정의를 정화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나라도 아님을 내비친 것이다. 사실 최초의 나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비록 건강과 평화 상태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나라나 개인이 질병과 분열을 적극적으로 이겨내고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의식주 등 필수적인 욕구에 만족한 채 살아가는 돼지 같은 삶이 가져다주는 건강과 평화이다. 그에 따라 이 나라에는 타자에 대한 긴장도 고민도 문제도 없으며 그런 까닭에 아직 정부도 정치도 철학도 없다. 물론 최초의 나라에는 비록 각자가 서로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여 수행하는 상태 즉 자연적인 정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지속해서 증대하고 그에 따라 나라가 규모나 수에서 확대 되고 필요가 충족되지 않음에 따라 필연적으로 다툼과 갈등이 생기고 그로부터 부정의가 발생하며 그에 따라 그에 대한 대책 또한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다시 말해 부정의를 다스리고 정의를 보전하기 위한 장치가 새롭게 요구되면서 그 일을 맡을 심부름꾼으로서 수호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결국 철학과 정치·문명은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위와 같은 현실 국가에서 요구되는 불가피한 필요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런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

* 앞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통치자 계층, 수호자(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면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의 형성 단계상 초기 단계의 국가 즉 생산자 계층으로만 구성되는 국가이다. 나라를 구성하면서 이처럼 생산자 계층의 나라를 최초의 나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 수립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할 요소가 다름 아닌 의식주라는 물적 기반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 또한 유기체인 한,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그 다음 정치도 철학도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적 토대라는 하부구조 없이 정신과 문화 등 상부구조는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토대와 상부구조가 모두 성립한 이후에 어느 것이 구조 전체를 지배하고 구조의 보전과 지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의 문제는 별개의 논점을 구성하는 것이라 해도, 플라톤 역시 물적 조건 내지 생산자 계층의 역할이 나라 자체의 성립을 위한 일차적이고도 필수적인 기반인 것만은 결코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 그리고 이 나라는 비록 생물학적 자기 보전 자체에 만족하는 이른바 돼지들의 나라이긴 할지라도 이 나라를 구성하는 생산자 계층들 사이에는 협동적 삶이 유지되고 있고 그에 따라 고민과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일단 플라톤은 부정의의 원인을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특성과 연계시키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국가>에서 정의를 다루면서 왜 수호자 계층만을 주로 다루고 생산자 계층은 크게 다루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플라톤은 부정의를 바로 잡는 주체에서 생산자 계층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비판했던 민주정의 중심 세력으로서 민중이 기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은 여전히 생산자 계층을 불신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중에 대한 불신은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역할 자체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 고유 영역을 넘어서 정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서 온 것이다.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물적 토대로서 생산자 계층의 역할과 협동적 삶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뢰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층이 자기 고유 역할을 넘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원인을 생산자 계층에서 찾지 않고 그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게 만든 지배 계층의 탐욕적 욕망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 정치체제의 타락과정을 설명하면서 민주정 치하에서 기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인 대중이 드러낸 욕망의 왜곡이 생산자 자신 때문이 아니라 통치자 계층의 그릇된 욕망과 잘못된 정치행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부정의의 근원은 소수의 지배계층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발생하는 모든 해악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이 아닌 지배 계층의 탐욕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통치가 소수의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까닭에 소수 권력 계층의 지성화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열망하게 되었고 그 방책을 구축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는 오히려 권력의 지성화가 소수 기득권 계층이 아니라 시민의 지성화, 다중 집단의 지성화를 통해 달성되어야 하고 달성될 수 있으며 달성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플라톤 정치 철학의 핵심이 양적 차원에서 소수 권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 지성에 의한 권력의 지배 즉 권력의 지성화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민중의 지성화를 위한 철학적 원리로도 여전히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이 생산자들로 구성된 최초 나라를 건강과 평화가 담보된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플라톤이 생산자 계층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생산자 계층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전체 논의 구도를 염두에 두고 정의와 부정의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려는 차원에서 부정의가 발생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 논의 구도 하에서 최초의 나라를 넘어서, 즉 물적 토대로서 생산자들로 구성되는 단계를 넘어서 문명과 문화적 욕구의 단계에 들어와야, 비로소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것임을 말해주기 위한 포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 젤러(E. Zeller)는 ‘돼지의 나라’라는 글라우콘의 언급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견유학파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는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기원전 445?-365?)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안티스테네스는 플라톤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실천적인 면모에 주목하여 강건한 정신과 몸으로 소박한 삶에 자족하는 삶을 이상으로 여긴 사람이다. 즉 글라우콘의 냉소는 그와 같은 잘못된 이상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최초 나라의 모습은 안티스테네스가 꿈꾸는 그러한 삶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담과 헨켈(Stud zur Gesch, Lehre vom Staat, 8 f.)등은 이러한 젤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최초의 국가는 다만 이상 국가의 성립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첫 단계로 그려진 것으로서 일부 아이러니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곳에서 언급된 필요와 분업, 협동의 원리는 이후에도 수정되고 대체되면서 논의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최초의 국가는 아직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산자 계층의 삶에 대한 불쾌함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최초 나라의 편안한 삶(εὐχερὴς βίος Pol. 266 C)을 돼지의 삶에 비교한 것은 나름 적절하다. 다만 소크라테스와 달리 글라우콘이 냉소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 최초의 나라가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답변을 통해 기대하고 있었던 현실 국가와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기개θυμοειδής를 크게 중시하는 글라우콘으로서는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물질적 욕구ἐπθυμμα 이상으로 상승하지 않는 나라의 삶을 경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아담 주석 참고)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372e]

* 이처럼 글라우콘의 냉소를 접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구가 그러한 나라만이 아니라 호사스런 나라도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고찰해보자는 요구로 받아들인다.[372e] 즉 글라우콘이 원하는 나라는 그러한 현실에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나라가 아니라, 늘 정의와 부정의가 문제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요구나 관심사도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는 현실에서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 나라 즉 ‘호사스런 나라’τρυφῶσας πόλις인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보기에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는 앞서 서술한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인 것 같지만 글라우콘이 정 그러한 나라를 살피기를 원한다면 ‘호사스런 나라’를 살피는 것도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말한다. 정의와 부정의가 어떻게 해서 나라들에 있어서 생겨나는지를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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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앞서도 간단히 살폈듯이 소크라테스가 필수적인 필요에 입각한 나라를 먼저 말한 것은 장차 부정의가 문제되면서 수호자 계층이 요구되는 현실 국가를 끌어들이기 이전에 그 첫 단계로서 생산자 계층의 성립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최초국가와 호사스런 나라의 모습을 보다 대조적으로 잘 드러내기 위한 밑 작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른바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를 먼저 두고 그 다음에 호사스런 나라를 살펴야 정의와 부정의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다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깨끗한 흰 백지 위에 뭔가를 그려 넣어야 더 분명하게 보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최초의 나라를 ‘참된 나라’, ‘건강한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두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어떤 이는 이곳 최초의 나라가 자연적 적성과 서로의 필요에 따라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일을 맡아 수행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장차 밝혀지겠지만 자연적 본성에 따라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잘 수행해내는 것이 플라톤의 정의인데 이 나라는 이미 그러한 정의가 자연적으로 구현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건강한 나라’라는 표현은 몰라도 ‘참된 나라’라는 표현은 일종의 아이러니로 해석한다. 참된 나라는 종국적으로 철학을 통해 부정의가 극복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나라를 말하는데 이 최초의 나라는 철학적 사유는커녕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만족을 드러내는 일차원적인 인간들로만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앞서 소개하였듯이 안티스테네스 같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필수적인 욕구에 만족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라고 부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러한 나라야말로 실제로 그가 꿈꾸었던 이상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안티스테네스와 달리, 그저 생산자 계층만이 존재하는, 실제 현실과 거리가 먼 그런 나라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과 욕구가 이글거리고 서로 부딪치는 현실 그 조건 위에서 그것들 모두가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꿈꾸고 있다.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은 사실 공허한 일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현실 조건에서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본(paradeigma)으로 제시될 수 있는 현실의 조건 위에 선 이상국가인 것이다. 오히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건강한 나라, 돼지들의 나라는 어쩌면 루소(J. Rousseau)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쳤을 때 그가 염두에 둔 최초 자연 상태의 인간 사회,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향, 또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이상적인 과소(寡少)국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㉙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2. 나라의 기원: 자족하지 못함, 서로의 필요에서 생긴다(369a-369c)

 

* 문자의 비유는 이미 국가가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란 다만 이기적 개인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개인이 사회에 빚진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국가는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처럼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화된 전체로서 각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보전의 기초로서 생명의 유지를 위한 내적인 통일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즉 사회는 단순히 분리되어 고립된 단위들로 간주되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 사회는 부분들의 속성들의 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이익의 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익 즉 공동체 자체의 이익을 갖는다. 이것이 곧 독립적인 개인들의 이익의 단순한 통합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이익 내지 공공의 이익이다. 그러나 이 공공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 공공의 이익 또한 개인들의 이익이되 개인 모두가 공유하는 이익이다. 유기체의 경우 기관들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몸 전체의 건강이 담보되고 몸 전체의 건강이 담보되어야 각 기능의 온전성도 담보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국가 또한 각 개인 또는 계층들이 서로의 유기적 의존성을 토대로 본성에 따라 자기들 고유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국가 공동체의 행복이 구현된다. 그리고 공동체의 행복이 담보되어야 각 개인들과 계층 또한 자신들의 본성에 맞는 욕망의 구현이 담보될 수 있다. 이처럼 플라톤은 논의 방법론과 관련한 논의에서부터 이미 단순한 논의 방법론을 넘어 그가 펼칠 정의로운 국가의 기본 성격까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곧 이어 펼쳐지는 나라의 기원에 관한 주장 역시 이러한 국가의 유기체적 성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369b]

*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를 수립시키는 기원ἀρχὴ부터 언급한다. 즉 나라의 기원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ἐπειδὴ τυγχάνει ἡμῶν ἕκαστος οὐκ αὐτάρκης, ἀλλὰ πολλῶν ὢν ἐνδεής이라고 말한다.

 

[369c]

* 이런 경위를 통해 각자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이하게 되어 동반자κοινωνός 및 협력자βοηθός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공동생활체συνοικίᾳ에다 ‘나라’πόλις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이론상으로 수립되는 나라는 필요χρείᾳ로부터 그 수립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369d]

*그에 따라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πρώτη γε καὶ μεγίστη으로 생존을 위한 음식물τροφή, 둘째는 주거οἴκησις, 셋째는 의복ἐσθής 및 그와 같은 유의 것들이 필요하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농부ὁ γεωργός, 집짓는 사람ὁ οἰκοδόμος, 직물을 짜는 사람ὁ ὑφάντης 그밖에 제화공ὁ σκυτότομος이나 신체와 관련되는 것을 보살피는 사람ἤ τιν᾽ τῶν περὶ τὸ σῶμα θεραπευτήν 즉 최소 다섯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최소한도의 나라, 최소 필요국ἥ ἀναγκαιοτάτη πόλις은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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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이야기는 겉보기에는 나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로부터 나라체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법률> 3권 서두부분(676a~)의 내용과도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이야기가 나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서술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어왔다. 우선 역사적 서술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 최소한도 국가에서 호사스런 나라로의 변화가 규모의 증대에 기초하고 있고 규모의 증대는 인구의 증가 등 시간적 흐름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게다가 나라가 개인을 설명하기 위한 큰 문자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나라의 변화는 소문자인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성장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최초의 국가와 그 이후의 국가의 변화는 생존만 충족되면 더 이상을 바라지 않는 어린 아이의 욕망 단계를 넘어 점차 욕구가 확대되고 사치심이 생겨나면서 그에 따라 타자의 욕망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성인들의 욕망 단계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곳 이야기는 겉으로는 역사적 서술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차 논하게 될 현실의 국가가 어떤 배경에서 정의와 더불어 부정의가 함께 생겨나는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적 설명에 강조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생명체에서 질병의 이유를 밝히려면 질병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질병이 생기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처럼, 장차 현실의 나라에서 부정의가 생기는 이유를 밝히려면 부정의가 생기기 이전의 최소한도의 국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질병이 생기는 것은 성장 때문이 아니라 생명체라는 사실 때문이므로 이곳 이야기는 나라와 개인들의 기원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진술이 아니라 개인과 나라의 요구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소한도의 나라가 최초의 나라라면 이 나라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된다는 서술 자체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최초에는 가족이 있었을 텐데 한 가족을 나라로 보기도 힘들거니와 가족의 구성원에는 일을 하지 못하는 유아도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나라가 최소한 한 가족 이상으로 구성되는 한, 다섯 사람은 넘었을 것이다. 설사 일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다 해도 가족 단위에서 서로 다른 일을 전문으로 했다고 보기도 힘들거니와 무엇보다도 농사라는 일 자체가 원시시대 수렵채취 시기 이후에 나타난 것임을 고려하면 이미 이곳 이야기는 나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기술과 거리가 멀다.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실제 나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아니며 다섯이란 숫자 또한 최초의 나라를 구성하는 최소한도의 사회적 기능들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주장 가운데 어떤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단적으로 가려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인과적 설명에는 보편적 사실에 대한 일반적 설명도 있지만 시간적 선후를 갖는 특수한 사실에 대한 인과적 설명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에서 역사적 변화 과정을 그린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이곳 이외에 또 있다. 정의로운 국가가 타락하여 참주정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제8-9권의 내용이 그것이다. 앞선 강해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토인비(A. Toynbee)는 이 내용을 기초로 플라톤의 역사관을 쇠퇴사관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의 쇠락을 개인 영혼의 타락과 병행해서 설명된 것에서도 시사되듯이 그것은 정치체제의 변화와 개인의 욕망 간의 상호 유기적 연관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역동적인 체제 변동론 내지 도덕 심리학으로서 무엇보다도 그 변화의 방향이 쇠퇴와 진보 내지 회복 양쪽 방향에 다 열려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고찰이라기보다는 부정의와 불행의 근본 원인과 양상에 대한 일종의 반성적 고찰이라 할 것이다.

* 그런데 나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나라의 기원이 개인들 각자가 자족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근본적으로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삶의 보전을 위해 상호 협동적이며 의존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나라 또한 그에 따라 본질적으로 그러한 개인들의 본성에 기초하여 상호 호혜적인 협동체 즉 공동체의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장차 플라톤의 국가 구성 원리의 핵심적인 기초를 구성한다. 즉 플라톤은 앞서 글라우콘이 나라의 기원으로서 주장한 사회계약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콘은 강자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지배 능력이 없는 다수의 약자들이 소수의 강자들로부터 최소한의 안전과 공존을 담보하기 위해 서로 약정을 맺은 데서 나라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는 본성적으로 상호 협동적인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배타적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그것을 관철할 힘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자기 보전을 위해 상호 약정을 맺어 성립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들 모두 만약 자기에게 힘이 생기면 언제라도 이러한 약정을 몰래 어기거나 뒤집으려 한다는 사실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글라우콘의 이러한 견해는 자연 상태로부터의 최초 국가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참주를 비롯해 사회적 강자의 전횡을 막아내고 어느 정도 대중의 연대가 가능하게 된 기원전 4세기 당대 아테네의 현실을 배경으로 어떻게 민주정이 나타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소피스트들이 당대 아테네 민주정을 배경으로 득세했음을 고려하면 나라의 기원에 대한 이곳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러한 당대 아테네인들의 이기적 욕구와 맞물려 등장한 포퓰리즘적 민주정과 그것에 기생하고 있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비판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 <법률> (676a~680e)에서도 플라톤은 나라 체제의 기원을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프로타고라스> 322b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나라의 기원을 야생의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모여 살게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야생의 사나운 동물들을 폭력적인 사회적인 강자로서 참주에 비교한다면 나라의 기원에 관한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와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대변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 등 소피스트들의 견해는 크게 다르지 않다.

* 플라톤이 그리는 최초의 국가는 마치 질병이 없는 건강한 몸과 같다. 소크라테스가 후에(372e) 이 나라를 ‘건강한ὑγιής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평생 동안 몸에 질병이 전무할 리 없다. 질병이 없는 몸은 현실의 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국가는 현실에서 상존하는 국가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러한 국가가 우리가 추구할 이상국가도 아니다, 질병이 없는 상태로 상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국가는 질병이 있되 그것을 잘 억제하고 대응하여 최대한 건강을 유지하는 나라이다. 다만 질병을 달고 사는 현실의 몸을 설명하려면 건강한 몸에서 어떻게 질병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듯이, 장차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고 있는 현실국가를 논의하려면 나라에서 부정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시원적 배경과 원인을 살펴야 하므로 사회적 갈등 이전 상태의 나라 즉 최소한도의 국가, 최초의 국가가 제기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흔히들 우리가 말하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위와 같은 최초의 국가도 아니고 아예 실현 자체가 불가능한 상상의 나라는 더욱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의로운 국가는 현실의 조건 위에서 최선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최선의 나라를 의미한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에는 이상국가라는 말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라는 표현만 나온다.

 

2-3. 최소한도의 나라와 분업의 발생(369e-371a)

 

[369e-370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의 나라에서 분업이 생기는 배경을 설명한다. 즉 나라에서 한 사람은 자신의 일ἔργον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으로 제공해야한다ἕνα ἕκαστον τούτων δεῖ τὸ αὑτοῦ ἔργον ἅπασι κοινὸν κατατιθέναι는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는 나머지 네 사람의 식량을 함께 생산하여 그것을 그들과 나누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일을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370b-c]

*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πρῶτον , 사람은 각자 성향에 있어서 다르게 태어나서ἡμῶν φύεται ἕκαστος οὐ πάνυ ὅμοιος ἑκάστῳ, ἀλλὰ διαφέρων τὴν φύσιν 일 또한 저 마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일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둘째πότερον, 각각의 것이 더 많이πλείω, 더 훌륭하게κάλλιον, 그리고 더 쉽게ῥᾷον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κατὰ φύσιν 적기에ἐν καιρῷ 하되, 다른 일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이기 때문이다σχολὴν τῶν ἄλλων ἄγων, πράττ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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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 수행하는 일들의 기능적 고유성과 전문성,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이 부분은 나라의 기원을 개인의 비자족성, 상호 호혜적 의존의 필요성에서 구하는 앞서의 주장과 더불어 장차 제시될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 원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그러한 주장의 필연성은 이미 플라톤이 큰 글씨 작은 글씨 비유에서 나라를 유기체인 개인의 확대로 보고 있는 것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유기체로서 개인을 구성하는 부분들은 모두 하나 같이 서로 태생적으로 다르고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최선으로서 자신의 건강한 보전을 위해 유기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적기(適期)καῖρος(kairos)와 한가함에 대한 설명 또한 분업의 효율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잘 수행한다는 것은 파종과 양육과 추수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적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언제든 그 적기에 임할 수 있도록 그것을 방해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 있어야 한다. 즉 적기를 놓치게 하는 일로부터 손을 뗄 수 있는 한가로움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부의 일은 자연의 순환에 바탕하고 매년 반복되는 일이므로 어느 정도 적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의사와 같이 병을 치료하는 경우에는 적기를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적기를 예측하기 힘든 일일수록 적기를 놓치지 않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환자가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넋 놓고 다른 일에 부름을 당하거나 그곳에 매달린다면 제대로 질병을 치료할 수 없고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의사는 치료를 위한 것 이외의 어떤 일로 부터도 한가로움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농부나 의사 모두 한가로운 사람은 아니다. 농부는 농한기를 맞이하더라도 지난 농사일을 뒤돌아보면서 시행착오와 경험을 정리 기록하는 등 내년 농사를 준비해야 하고 의사 역시 환자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에는 보다 효율적인 치료술 연마에 힘써야 한다. 다만 이곳에서 말하는 한가로움σχολή(scholē)은 ‘그것을 저해하는 일로부터 손을 뗀다’, ‘그곳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가로움이다. 이른바 지식인이 한가로움의 뜻을 가진 scholar로 불리게 된 연유도 이것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원래 지식인 계급은 왕이나 사제, 귀족 등 권력자가 나랏일이나 자신의 일을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어 일부 지능이 높은 사람을 불러들여 다른 일에 시간을 쓰지 말고 머리로 자신을 돕는 일에만 신경 쓰라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식인은 머리 쓰는 일 이외에는 한가함을 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일단은 고역스런 육체적 노동에서 벗어나 한가함을 누린다는 점에서 scholar로 불리어졌을지도 모른다. 시원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지식인 계급이 본질적으로 권력자들의 참모 역할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아무려나 지식인은 공동체적 삶의 보전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만을 고하는 참된 심부름꾼이자 정직한 충신일 수도 있지만 언제라도 권력이나 기득권에 빌붙어 권력의 아류이자 부역자로 전락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이곳에서 언급되는 분업은 이른바 마르크스(K. Marx)가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업과 다르다. 우선, 플라톤의 분업은 본성에 따른 것으로서 자기 삶과 공동체의 적극적 보전의 방책이다. 즉 분업의 효율성은 자기와 공동체의 이익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업은 생산의 효율을 통한 자본의 확대 즉 자본가의 이익 창출을 위해 자본가가 계획한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의 욕망에 거슬러 불가피한 임노동 조건에 따라 강제된 단순 반복적인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효율성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온전하게 노동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즉 분업은 자본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착취의 방책이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분업은 단순히 분업이 지향하는 경제적 효율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 따른 욕망을 구현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기와 공동체의 건강한 보전에 기여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원리 이전에 도덕의 원리이자 건강한 사회관계의 원리이다. 아무려나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 한다’는 원칙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초한 것으로서 장차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 원리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원칙은 정치라는 중대사에 따로 전문성을 두지 않고 시민이라면 아무나 간여할 수 있었던 당대 아테네 민주정의 비전문성과 반공공성을 공격하는 기본 근거가 된다. 이 원칙은 <법률> 846d-847b에서도 재차 강조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역시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전문가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만은 전문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플라톤의 비판에 열려 있다. 플라톤에게는 정치의 민주화 이전에 정치의 질적 토대로서 정치의 지성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치의 지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참주정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민주정 역시 당시 아테네 현실이 보여주듯이 포퓰리즘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향φύσις(physis)이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 인간 영혼의 본성을 의미하며 제2권에서 제4권까지 핵심용어를 구성한다. 이것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되고 고유한 개인성이다. 물론 그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전제이지만 최소한 플라톤에게는 그것은 피폐한 현실을 넘어서는 근본 바탕이자 힘이며 앞으로 건설할 정의로운 국가의 기초로 선언되고 유포되어 소피스트적 담론을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구이자 사람이라면 마땅히 받아 들여야 할 진실인 것이다.

 

[370d-e]

* 그런데 농부는 쟁기나 괭이 그 밖에 농사와 관련되는 다른 도구ὄργανον들이 필요한데 스스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에 더 많은 시민이 필요하다. 나머지 일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따라 목공τέκτων, 대장장이χαλκεύς, 목동βουκόλος과 목부νομεύς 등 이런 부류의 많은 장인들δημιουργοί이 작은 나라πολίχνιον의 동반자들이 되어 나라는 커진다. 게다가 쟁기질을 위한 소βοῦς, 제화공을 위한 가죽δέρμα과 양모ἔριον 그리고 건축 재료 등의 이용과 운반을 위한 짐승ὑποζύγιον들도 필요하다. 나아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을 다른 나라로부터 조달 받고 그런 것을 조달해주는κομιοῦσιν 사람도 필요하다. 이른바 유통을 담당하는 무역상ἔμπορος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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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법률>이 세우려는 바람직한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에 수출할 정도의 잉여를 생산하는 것 자체를 지향하고 최대한 자급자족을 강조한다. 그곳에 세워지는 나라는 가까이에 이웃 나라가 없다.(<법률> 704a-705b)

*‘상대방 나라에 빈손으로 가면 빈손으로 온다’는 말 또한 상호 호혜적 의존성을 내포하는 본성의 연장선상에서 언급된 말이다. 이 말에는 외국과의 모든 거래는 물물 거래이고 외환 거래는 없으며 화폐는 국내에서만 유통되었다는 당대 역사적 사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 이제 최초국가에서의 필요가 제조업을 넘어서 상업 및 유통 등을 비롯한 서비스업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바로 이어 화폐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 [철학자의 서재]

책 읽어주는 시간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긺,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arte, 2017.

1957년 스푸트니크가 지구 밖으로 쏘아올려졌다. 이제 인간이 지구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지금이야 별일이 아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인간이 신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p. 18)이나 마찬가지였다. 철학자로서 한나 아렌트에게 이 문제는 어쩌면 ‘인간의 조건’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으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은 노동, 작업, 활동이라는 세 가지 조건에 의해 세계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미래에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존재하지 않거나 변경될 것이다. 일단 아렌트는 이 세 가지 조건이 무엇인지 그 성격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아렌트에게 ‘노동은 생물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이고 ‘작업’은 인간이 공작물을 만들어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생물학적 삶은 끝나도 이 세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행위로 보았다. 그리고 ‘활동이란 이 공작물을 이용하면서 ‘정치체’를 만들어 유지해가는 것이다. ‘정치체’ 안에 사람들이 존재했던 증거가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p. 43).

 

여기서 ‘활동’은 하나의 목적을 갖지 않는다. 아렌트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목적 지향성을 비판한다. 목적은 그 목적을 향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렌트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항상 자유를 향한 ‘활동’을 중시(p. 59)한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맺는 ‘활동’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없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다.

 

인간의 조건으로서 노동, 작업, 활동 중 타자의 존재, 복수성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은 ‘활동’ 뿐이다(p. 82). 아렌트는 이 복수성을 균질화하면 대중사회가 되고 그것은 결국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다고 본다(p. 99). 아렌트에 의하면 대중사회의 대중은 똑같이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아 그저 떠내려가는 것일 뿐, 자발적으로 ‘활동’하려고 하지 않는다(p. 132). 근대는 공적 영역의 ‘활동’이 의미를 잃고 모든 인간 행위를 ‘노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p. 182).

 

노동만을 중시하게 된, 근대인이 지향하는 ‘부’는 자기를 재생산하려는 생명을 중시하는 것일 뿐 시민에게 아이덴티티를 부여함으로써 서사를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세계’를 짓밟고 부서뜨린다는 게 아렌트의 진단이다(p. 204). 근대인은 ‘사적’인 일에 집중하면서 ‘공통세계’로부터 소외되었다(p. 209).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 본질이라 했지만 아렌트는 노동을 통한 생명의 무한 증식과, 부는 인간을 공통세계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p. 218). 기술이 진보하고 노동이 기계화되는 시대에는 더욱 인간이 자발성을 발휘할 여지는 줄어든다(p. 219).

 

기계에 의해 노력할 여지가 없어지면 이제 인간은 그저 생명과정으로 회귀해갈 것이며 소비 욕구만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소비의 가속화에 의해 진행되는 상품사회에서 사물은 내구성을 잃게 되고 점점 공통세계는 해체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요 논지이다(p. 229).

 

상품 사회는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p. 297).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지배적이라고 비판했던 마르크스에 대해 아렌트는 마르크스가 ‘공적 영역’을 거부한 것은 아니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p. 307). 아렌트는 노동보다 ‘언론’과 ‘활동’을 인간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p. 333).

 

언론과 활동은 사회를 전제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정치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활동과 언론의 의미를 공동체 안에서 전승해 가는 역할을 맡는 것은 예술작품이다(p. 368). 아렌트는 노동은 창조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노동하는 인간은 세계에서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지며 고독한 대중이 될 뿐이다. 이것을 아렌트는 ‘세계 소외’라 부른다(p. 442). 뿐만 아니라 기계화, 자동화는 세계의 해체를 촉진하고 있다. 기술과 과학의 세계는 개개의 가설이나 명제가 어디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치 않고 체계와의 정합성이 있냐, 만이 중요할 뿐이다(p. 459). 수학과 과학의 세계에서는 ‘공통세계’가 나올 리가 없다(p. 465). 근대의 합리성, 즉 과학과 수학의 세계는 세계와의 접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기 안에 틀어박힐 수 밖에 없었고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만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로 축소되었다(p. 485). 이런 존재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공리주의에서 ‘행복’이라 말하는 것은 각 개체의 생명이 촉진되고 인간의 생명력이 촉진되고 번식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함을 뜻한다. 활동이나 작업 등 인간의 고유의 능력은 더 이상 상관이 없다(p. 497). 근대는 이렇게 생명과 노동을 중시하면서 사물을 만드는 능력은 쇠퇴해 예술가에게만 한정되어 있다(p. 502).

 

한나 아렌트의 근대성 비판은 지금 보아도 유의미한 것 같다. <인간의 조건>을 실제로 읽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이 책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오늘날의 대중 사회를 분석한 <전체주의의 기원>도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쓴이,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㉘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 나라의 기원과 발달(368a-374d)

 

[368a]

*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반론과 요구를 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들을 ‘그 어르신의 자제들’이라 부르며 그들의 자질φύσις을 칭송한다. 그리고 글라우콘을 사랑하는 사람이 메가라 전투에서 그들이 세운 수훈을 칭송하며 지었다는 시의 첫 구절도 인용한다. 그처럼 훌륭하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대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ἄμεινον는 것에 설복당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로 아주 비범한θεῖος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이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다름 아닌 그들의 생활방식τρόπος 때문임도 함께 밝힌다.

 

[368b-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과연 정의를 제대로 구조βοηθεῖν해낼 것인지 당혹스럽고 또 걱정이 된다고 말한다. 자신은 트라쉬마코스를 상대로 말로써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아직 숨을 쉬고 있고 말도 할 수 있는 자로서ἔτι ἐμπνέοντα καὶ δυνάμενον φθέγγεσθαι 그것을 포기하고ἀπαγορεύειν 정의를 구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믿음ὅσιον이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τὸ δεδιός을 안겨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정의를 구원ἐπικουρεῖν하는 것이 상책κράτιστον 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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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가리켜 ‘그 어르신의 자제들’ὦ παῖδες ἐκείνου τοῦ ἀνδρός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어르신’을 트라쉬마코스로 보는 주장도 있다.(J. Adam 각주 참고) <필레보스> 36b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필레보스로부터 논의의 권한 일체를 이어받은 프로타르코스를 두고 그와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폴레마르코스가 부친의 논의를 이어받듯 아데이만토스 형제 역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마치 자식처럼 이어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논의를 이어받은 것과 폴레마르코스나 프로타르코스가 논의를 이어 받은 것은 동기와 사정이 전혀 다르고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칭찬 또한 짓궂은 말투가 아니라 진지함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그 표현은 바로 뒤에 나오는 ‘아리스톤의 아들’παῖδες Ἀρίστωνος에 대응되는 것으로 그 어르신 또한 그들의 부친 아리스톤Ἀρίστον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 플라톤의 어머니 페리크티오네Periktionē는 솔론의 가계를 잇는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이고 아버지 아리스톤은 자진해서 목숨을 바쳐, 헤라클레스 형제들의 아테네 침공 계획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 전설의 인물이자 아테네의 마지막 왕이었던 코드로스(Kodros, 기원전 1089 ~ 기원전 1068년)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시를 지었다는 이른바 ‘글라우콘을 사랑하는 사람’ἐραστής이 글라우콘의 외삼촌인 크리티아스Kritias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동성애 관계에서 성인 남성을 가리키는 말 erastēs를 옮긴 것이다. 그의 상대인 소년 애인은 paidika라 불린다. 글라우콘도 관습대로 소년시절 소년 애인 역할을 한 것이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는 기원전424년과 기원전 409년에 일어난 전투가 대표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언급된 메가라 전투가 그 가운데 어느 시기의 전투인지는 불확실하다. 서두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의 대화상정시기를 기원전 410년경으로 추정한 초기 연구자들의 주장이 오늘날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기원전 420년 전후, 또는 멀게는 기원전 430년 이전까지도 상정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언급된 메가라 전투가 최소한 기원전 409년에 벌어진 전투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고 기원전 424년 전투로 보는 것도 어려움이 따른다. 만약 <국가>의 대화상정시기가 기원전 430년 이전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시대착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생 글라우콘이 기원전 424년 전투에 참여했다면 최소한 18살이 넘어 탄생연도가 기원전 442년 이전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상정할 경우 기원전 427년에 태어난 동생 플라톤과 형들의 나이가 최소한 15살 이상 크게 벌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이 부분의 언급은 시기와 상관없으며 다만 플라톤이 형들을 <국가>에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면서 미화의 일환으로 언급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일부 연구자들은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는 위의 두 전투뿐만이 아니라 간단없이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언급된 전투를 굳이 위 두 시기의 전쟁 가운데 하나로 국한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려나 이곳의 메가라 전투 시기는 케팔로스와 프로타고라스, 프로디코스의 생존, 다몬, 소크라테스의 추정 연령대, 트라쉬마코스의 전성기,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의 투리오이 이주와 귀환 시기 등과 더불어 대화상정시기를 추정하는 주요 요소들이기는 하나 이들 요소들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까닭에 대화 상정시기를 추정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다.

*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비범한(신적인)θεῖος 사람들로 평가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앞서 366c에서 정의가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두 부류 즉 ‘하늘이 내린 성품θεῖος φύσις’을 가진 자와 ‘지혜를 얻은 자’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생활방식τρόπος은 이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을 뒷받침 해준다. 절도 있고 훌륭한 생활방식의 중요성은 앞서 케팔로스도 주장하고 있다.(329d)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생활방식은 하늘이 내린 성품에 기반한 것인데 비해 케팔로스가 내세우는 생활방식은 부(富)에 기반을 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자신이 행할 일을 ‘정의를 구조βοηθεῖν하는 일’로 표현하고 있다. 구조의 원어 boēthein은 구조(rescue)라는 뜻과 도움(help)의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구조의 의미가 더 적절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물론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실감나게 전해주는 당대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은 그야말로 정의가 나락에 빠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의의 우위에 대한 제1권에서의 자신의 논증이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는(358b)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제1권에서의 논의가 갖는 불완전성과 한계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백은 일시 그를 당혹하게ἀπορῶ 만들었지만 그러한 당혹감은 오히려 정의의 구조를 향한 새로운 다짐과 불퇴전의 각오로 이끄는 발판이자 도화선이 된다. ‘아직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결코 정의를 구조하는 일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를 구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두려운 일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선언은 부정의한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는 삶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변명하는 우리들의 비겁한 마음에 준엄한 칼날을 겨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숨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정의를 구원하라. 정의에 눈을 감고 안주하는 것이 상책(가장 강력한 방책)κράτιστον이 아니라 비난받고 있는κακηγορουμένῃ 정의를 구원ἐπικουρεῖν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삶과 행복을 위한 가장 막강한 방책이다.’

 

 

2-1. 나라와 개인의 유비(368c-369a)

 

[368c]

*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에 앞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여 제시한다. ‘모든 방법을 다해 정의를 구조할 것. 논의를 포기하지 말고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무엇이며τί ἐστιν ἑκάτερον 이들 둘의 이득ὠφελία과 관련된 진실τἀληθὲς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검토해 줄 것’

 

[368d]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탐구 과제를 보다 잘 탐구ζήτησις하기 위한 방법을 먼저 제안한다. 왜냐하면 착수하려는 탐구 과제가 눈이 나쁜 자가 아니라 예리하게 보는 사람의 것τὸ ζήτημα οὐ φαῦλον ἀλλ᾽ ὀξὺ βλέποντος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능하지도 않고οὐ δεινοί, 그다지 시력도 좋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같은 글자일 경우 큰 글씨를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작은 글씨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듯이 먼저 큰 글씨부터 보자고 제안한다. 즉 누군가가 그다지 시력이 나쁜 μὴ πάνυ ὀξὺ βλέπουσιν 사람들더러 먼 거리에서 작은 글씨γράμματα σμικρὰ로 적혀있는 것을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 그것과 똑같은 글씨들τὰ αὐτὰ γράμματα이 어딘가 ‘큰 곳에 더 큰 글씨로’μείζω τε καὶ ἐν μείζονι 적혀있다면 먼저 그 큰 글씨를 읽고 난 후 그것들이 작은 글씨와 같은지 아닌지를 살피게 된다면 아주 천행ἕρμαιον이라는 것이다.

 

[368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에 관한 탐구에서 그런 유사점τί τοιοῦτον이 있는 그 큰 곳을 발견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 큰 곳이 다름 아닌 나라πόλις임을 밝힌다. 즉 정의에는 ‘개인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 ἀνδρὸς ἑνός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 ὅλης πόλεως도 있다는 것이다.

 

[369a] 그러므로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고 그런 다음 작은 것과 큰 것의 유사성ὁμοιότητα 을 검토하면서 개인의 정의를 검토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고 훌륭한 말씀καλῶς λέγειν인 것 같다고 동의를 표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살펴보게 될 나라를 ‘이론상으로 수립되고 있는 한 나라’ γιγνομένην πόλιν λόγῳ라고 부르고 그 나라를 관찰하게 되면θεασαίμεθα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γιγνομένην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36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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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수행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요구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해결해야할 과제들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간명하게 정리한 내용은 그 자체로 그들 요구의 핵심은 물론 장차 <국가>가 다룰 기본 주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내용적으로 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1) 모든 방법을 다해 정의를 구조할 것 2) 논의를 포기하지 말 것. 3) 그 각각(정의와 부정의)가 무엇인지 밝힐 것 4) 정의와 부정의의 이익과 관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검토할 것.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과제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수행에 임하는 태도와 수행해야할 과제의 내용이다. 아무리 태도가 훌륭해도 내용이 부적절하면 무의미하고, 아무리 내용이 적절해도 태도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부실을 면치 못할 것이다. 1)과 2)는 과제 수행에 임하는 태도로서 적극적인 의미에서건 반성적인 의미에서건 소크라테스에 의해 여러 차례 표명된 바가 있다.(348a-b, 352d, 354b, 368b-c 등) 앞에서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다짐은 과제 수행자가 가질 수 있는 태도의 극한치를 보여준다. 그 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 특히 3)과 4)는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수행해야할 핵심 과제로서 그 표현부터 매우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기는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의 대상에 부정의를 포함시키고 있다. 전기 대화편 이래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은 사태를 우연적인 속성의 차원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의 측면에서 엄밀하게 규정해줄 것을 요구하거나 물을 때 쓰는 표현이다. 글라우콘 역시 자기가 말하는 것은 정의의 본질적 규정이 아니라 정의가 갖는 여러 우연적 속성들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그 자신이 언급하는 것은 정의의 ‘어떤 것’hoion einai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358c) 그 대신 ‘그것이 무엇인지’ti esti라는 표현은 소크라테스에게 엄밀한 의미의 규정 내지 본질을 물을 때 쓰고 있다.(358b) 소크라테스도 제1권을 마무리하며 그간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논의를 이끌어 왔다고 후회하면서(354c) 그 말을 정의에만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은 엄밀한 의미 규정을 자체로 내포하는 실재적 대상에 대해 그것의 정의 내지 규정을 물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부정의를 비판할 때마다 부정의가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는 무규정적 비실재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아예 ti esti의 물음 대상에 포함시키지도 않았고 하물며 그러한 결함 하나에 기초하여 부정의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자체를 부정하곤 했다. 그런데 글라우콘은 이제 제2권에 들어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직격탄을 날린 후에(358b)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의 규정차원에서 정의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나 쓰던 ti esti를 놀랍게도 부정의에 대해서 물을 때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358b) 그리고 이런 연후 아데이만토스도 그에 이어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혼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물을 때마다 매번(366e, 367b, 367e, 368c)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부정의도 정의와 마찬가지로 실체적인 힘을 갖고 현존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앞선 강해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듯이, 부정의가 근본적으로 형상적 실재성을 가질 수 없는 비존재라는 것에 기초하여 논리적 규정차원에서 그 결핍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방식만으로는 결코 현존하는 부정의의 힘을 제거하거나 혁파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 형제들 모두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제 정의의 결핍으로서 부정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부정의가 현실에서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영향력의 실체적 현존을 인정한 연후에 그것도 함께 규명되고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역시 글라우콘의 요구를 받는 형식으로 직접 부정의에 대해서도 ti esti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ti esti는 형상적 실재성을 가진 대상에 대한 정의(定義) 차원의 물음을 넘어 비록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나 현실에서 엄연히 실재하는 힘으로 현존하는 한, 그것들에 대한 실질적인 구별과 구분, 이해를 확보하고 그 성격을 최대한 실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물음으로 확대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 정의와 부정의의 이익과 관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검토할 것이라는 요구 또한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 정의가 어떤 좋은 것에 속하는 것인지를 묻는 글라우콘에게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도 좋은 것이지만 결과로도 좋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정의가 그 결과 때문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인지에 방점을 두고 대답해주기를 요구한다.(367c) 그러나 여전히 정의가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임이 밝혀져야 한다. 즉 정의는 현실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 점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사이다. 4)의 요구는 제1권 마지막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진 이익과 행복과 관련하여 정의가 갖는 우위를 이제 본격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다루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론은 이른바 오늘날 윤리학적 기준에 따른 동기주의 내지 법칙주의 또는 결과주의 그 둘의 성격을 모두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을 함께 통일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그 구분 어디에도 선택적으로 귀속될 수는 없다할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를 간명하게 정리한 후에 그들의 요구대로 정의와 부정의가 각각 무엇이고 어떤 힘을 갖는 것인지를 보다 잘 탐구하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탐구 과제가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잘 검토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그 정도의 유능함을 갖추지 못한 터라 우리 수준에서 해당 과제를 잘 검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이때 제시되는 것이 잘 알려진 소문자·대문자 비유이다. 즉, 시력이 나쁜 사람이 어딘가 같은 글씨로 큰 글씨가 있을 경우 그것을 본 다음에 나중에 작은 글씨를 보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듯이 큰 글씨에 해당하는 것부터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 여기서 ‘탐구 과제가 눈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예리하게 보는 사람의 것’이라는 역문은 원어 paulon(쉬운, 사소한, 낮은 수준의)을 ‘예리한’oksy에 대비시켜 옮긴 것이지만 그와 달리 ‘일거리’τὸ ζήτημα를 수식하는 말로 해석하면 ‘쉬운 과제가 아니라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거리’로 옮길 수도 있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작은 글씨 즉 ‘개인’ἑνός에 대응되는 큰 글씨가 다름 아닌 ‘나라’πόλις라고 말하고 그 둘의 유사성을 검토해보면서 애초의 과제인 ‘개인의 정의’를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다. 1) 개인은 개체인데 반해 나라는 집합체이다. 2) 개인은 유기체인데 반해 나라는 비유기체이다. 3) 개인과 나라는 오늘날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그렇듯이 서로 대립적이다. 요컨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단순하게 대응 확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아데이만토스 형제는 위와 같은 그의 제안에 이의는 고사하고 훌륭한 말씀이라고 호응한다. 어쨌거나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의아하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안과 아데이만토스의 호응 모두가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착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그곳에 숨겨진 플라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점과 관련하여 일단 최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방식으로 간단히 음미해보기로 하자

*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일단 겉으로는 개인과 나라는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1대1로 대응된다는 생각을 담고 것으로 들린다. 도대체 개인은 개체이고 나라는 집합체인데 어떻게 1대1로 대응한다는 것일까? 1대1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대응된다면 개인이 모인 그 개인들의 집단과 나라가 대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개인과 나라의 유사성은 모든 면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탐구하려는 과제는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의 혼속에서 어떤 힘을 갖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개인과 나라에서 서로 비교해가며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은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과 나라 각각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관련한 유사성이다. 이미 제1권에서도 비록 단편적이나마 개인과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작용하는 방식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다루어지고 있다. 즉 개인은 물론 나라이건 씨족이건 군대이건 정의가 그 안에 깃들어 있으면 우애와 협동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며 부정의가 깃들어 있으면 대립과 불화를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351e-352a). 그런데 우애와 협동, 대립과 불화는 복수의 것 즉 여럿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어떻게 개인에게서 그런 작용이 일어나는지 제1권에서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서 우리는 제2권 이후에 펼쳐질 개인 영혼의 3분설이 그곳에 전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 플라톤은 앞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개인은 3가지 서로 다른 영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모종의 집합체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 또한 서로 다른 계층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유사성을 갖고 있는 집합체인 것이다. 결국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개인과 나라가 서로 크기만 다를 뿐 1대1로 대응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의와 부정의가 혼들의 집합체로서 개인 내부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계층들의 집합체로서 나라 내부에서 작용하는 방식의 유사성인 것이다. 요컨대 개인은 생명체로서는 개체이지만 혼의 구성에 있어서는 나라와 마찬가지로 집합체인 것이다. 이러한 개인 내부에서의 관계방식과 나라 내부에서의 관계 방식 사이의 대응은 이미 본 강해 서두부분에서도 살폈듯이 politeia라는 말 자체가 개인이 자신의 혼들을 다스리는 개인의 삶의 방식이자 동시에 나라가 나라의 계층들을 다스리는 나라의 정치 운영 방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그 주장은 일단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모종의 같은 집합체라고 하더라도 생명체로서 개인들의 혼이 갖는 집합적 성격과 비생명체로서 나라의 계층들이 갖는 집합적 성격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그 자체로 생명의 보전을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협동하는 그야말로 생명체이지만 후자의 경우 생물학적 생명체가 아니므로 서로 다른 계층들이 그 자체로 협동적이고 의존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배타적이고 대립적이다. 그래서 일부 메타윤리학자들은 이것은 사상가 개인의 소망과 당위를 사실과 자연으로 여기는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비판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판이 갖는 타당성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개인주의적 국가관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이곳에서도 글라우콘은 정의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사회계약설적 국가관을 내세우고 있다.(358e-359b) 글라우콘에 따르면 개인들은 개인 내부의 영혼들이 그러하듯 서로 의존적이고 협동적이지 않다. 그들이 모여 약정을 맺고 법률을 만드는 이유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다. 개인들은 모여 살면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기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서로에게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국 약정을 맺고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생각에는 당대 아테네 현실은 물론 당대 주류 지식인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의 국가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왜 유기체인 개인과 나라를 내적 관계 맺음의 방식에서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사실 이곳은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의 정의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우선 탐구 방식과 관련한 제안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제안에는 단순히 탐구 방식의 효율성 차원의 내용만 담겨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탐구방식을 위한 제언 자체에서부터 이미 글라우콘의 생각을 뿌리 채 부정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 플라톤의 제안이 갖는 문제점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에 앞서 도대체 플라톤은 왜 당대의 주류 지식인들의 생각에 거슬러서까지 유기체인 개인과 비유기체인 나라를 1대1로 대응시켰는가를 들여다보았는지에 대해 우선 숙고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탐구 방식과 관련한 제안에는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소피스트 부류의 사회계약설적 국가관과는 정반대의 국가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플라톤은 나라 또한 생명체인 개인과 동일하게 당연히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될 중차대한 진실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즉 나라와 법률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개인들이 관습과 타성에 따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약정을 맺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협동적 본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국가는 이러한 개인의 자연적 본성에 입각하여 그러한 본성을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국가의 구성원들 모두 그러한 국가의 기능을 유기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내적인 협동심과 우애 또한 갖추고 있다. 그러한 한, 각자의 행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계층 구성 내지 공동체의 성립은 그 자체로 본성에 일치하는 자연적 욕구의 발현이다. 혹자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이 그의 사상 자체가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비난을 한다.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에서는 개인 보다 나라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모든 개인의 행복 또한 나라의 보전과 안녕에 의해 좌우되며 그에 따라 어떤 경우에서건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는 것은 개인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와 개인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에만 기초하더라도 플라톤의 생각은 위와 같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와 거리가 멀다. 우선 나라와 국가가 유기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둘의 의존성은 선후상하가 없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성격을 개인과 나라로 분리하여 생각하더라도 그들 간의 예속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라가 행복하려면 각 계층들이 계층 스스로의 욕망에 부응하여 자신들의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방식으로 그들 서로 완벽한 협동과 조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 즉 나라가 행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각 계층들의 욕망 구현과 그것을 통한 행복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층들의 욕망 구현은 그 계층을 구성한 개인들의 욕망 구현 즉 각 개인의 내면에서 영혼들 간의 조화가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내적 영혼의 조화는 그 자체로 이미 그 개인의 평화와 행복이다. 결국 나라가 행복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조건이자 전제는 결국 개인이 구현하는 개인들 각자의 내적 평화와 행복이다. 이들이 불행하면 개인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고 개인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면 계층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고 계층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면 나라의 행복은 담보될 수 없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개인이 희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생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그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하며 그 어떤 강제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 나라의 통치자들 또한 스스로의 본성과 기능에 역행하여 자기만의 권력과 부를 누리면 이미 그 개인 자체가 행복감을 느낄 수 없으며 그 자체로 그 자신은 물론 다른 계층들과 개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다른 계층들은 상처나 위협에 대한 자기 방어 능력 내지 복원력이 그렇듯이 그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자구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그들 각자가 건강할수록 그러한 부정의한 권력을 축출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그 만큼 빨라진다.

* 물론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고 현실에서 그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그 반대의 경우가 다반사이다. 플라톤 역시 그러한 정의로운 개인과 나라를 구축해내는 것이 당대 아테네 현실 자체가 보여주듯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고 설사 그러한 능력이 자신의 생각대로 인간에게 본성으로 구유되어 있더라도 그것의 발현이 필연적으로 담보되는 것도 아님을 익히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어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한 나라를 관찰하게 된다면 이 나라의 정의는 물론 부정의 역시 생겨나게 되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즉 그는 지금부터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탐구하되 그저 이상적인 관점에서 낭만적으로 선언하듯 정의를 논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시시때때로 언급하고 있듯이 이제 정의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의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수도 없이 도사리고 장애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부정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래야만 당대 소피스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들이 얼마나 단견에 불과한 것이며 종래는 개인과 나라 모두를 불행과 파국에 빠트리는 것인지가 실질적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려면 부정의와 그것이 갖는 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가 앞으로 펼칠 국가론은 말 그대로 가장 바람직한 상태의 이상적인 ‘정의론’인 동시에 현실에서 늘 정의를 위협하고 강력한 힘으로 그 쇠락과 변질의 힘으로 작용하는 가장 피폐한 ‘부정의론’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과 나라가 유기체라는 진실은 본질적으로 이미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들의 본성적이고도 자발적인 협동성을 전제하므로 그 자체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실천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전제하더라도 유기체는 언제라도 질병에 걸릴 수 있는 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그 질병의 실체와 극복 방안 또한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건강을 보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부정의가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 언급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이 이루어진 후에 제8권에서 제9권에 걸쳐 정의로운 나라가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위협들과 타락의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분석한다.

* 혹자는 이 부분에서 장차 수립될 정의로운 나라에서 어떻게 부정의가 생겨나는 것일까? 부정의가 생겨나는 나라라면 그것은 이미 그것으로 그 나라가 아직 정의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부터 거론 되는 정의는 형상으로서 정의가 아니라 현실에서 가장 형상에 가까운 상태로 구현된 정의이므로 그것은 다른 한편 늘 부정의로 변할 가능성에 열려 있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본질적으로는 무규정적인(apeiron) 것이되 그 무규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자기 동일적인 것(tauthon) 즉 형상 쪽과 닮은(homoion) 상태가 이른바 앞으로 각각 논의될 대상 가운데 하나로 정의이고, 그 무규정 상태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타자적인 것(heteron), 즉 형상 쪽과 가장 닮지 않은(anhomoion) 상태가 역시 앞으로 각각 논의될 대상 가운데 다른 하나인 부정의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도 언제든 부정의로 변질될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고 부정의 또한 언제든지 정의로 회복되고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8권에 실린 나라의 쇠락과정을 플라톤의 쇠퇴사관으로 해석하는 토인비(A. Toynbee)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의 정의론은 결코 필연을 담보하는 낭만적 이상론이나 결정론의 체계가 아니며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언제든 쇠락할 수도,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가능성의 체계인 것이다. 다만 완전하게 열린 비결정론과 차이가 있다면 플라톤은 그 열린 가능성에서 우리가 지향하고 다가 가야할 목적이 무엇이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는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홍규 선생이 플라톤의 이론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목적론과 구분하여 ‘동적인 목적론’으로 부르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일 것이다.(박홍규 <희랍철학논고> 121쪽 참고) 인간은 동적 목적론에 기초하는 한, 끊임없이 결핍에서 충만으로 곧 선을 지향하고 그곳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과 행동이 없거나 참된 지식 대신 무지가 행위를 인도할 경우 인간은 결코 목적으로서 선에 도달하지 못한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행동력과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철학은 해체와 무질서, 부정의에 저항하는 끊임없는 지적 노력과 교육, 실천적 연마가 수반되지 않으면 다다르기 힘든 긴장의 체계, 치열한 지적 긴장의 체계, 끊임없는 분투의 체계이다. 플라톤에게 운명론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이정호, ‘박홍규의 존재론적 사유에 담긴 플라톤의 정치철학’, <박홍규의 형이상학> pp.137-142 참고)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㉗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E. 아데이만토스의 결론[366b-367a]

 

[366b]

* 아데이만토스는 보완을 마무리하며 더 이상 무슨 근거로 최대의 부정의보다 정의를 선택할 것인지 반문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최정상의 사람ἄκρων들이 말하듯 부정의를 기품으로 기만해가면서 최대의 부정의를 저지를 수만 있다면 그는 생시에도 죽어서도 신들 앞에서든 인간들 앞에서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πράξομεν κατὰ νοῦν이라고 말한 후 이 모든 언급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366c-367a]

1) 영혼ψυχῆ이나 육체σῶμα 또는 금전χρῆμα이나 가문γένος에서 남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정의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

2) 설사 우리가 말한 것들이 거짓이고 정의가 가장 좋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부정의한 자들에 대해 상당한 이해심συγγνώμη을 가질 것이며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다οὐκ ὀργίζεται.[366c]

3) 신과도 같은 본성을 타고나거나θείᾳ φύσει 또는 부정의가 뭔지 알게 되어서ἐπιστήμην λαβὼν 부정의를 멀리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도 자발적으로ἑκών 정의롭게 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366d]

4) 다만 용기부족ἀνανδρία, 노령γῆρας, 무력함ἀσθένεια 때문에 부정의를 저지를 수 없는 사람만이 부정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누가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그가 가장 먼저, 가능한 한 가장 최대한으로 부정의를 저지른다.[366d]

5) 우리의 이 모든 언급의 원인은 정의의 칭송자들ὅσοι ἐπαινέται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평판δόξα이나 명예 τιμή또는 그로부터 주어지는 혜택δωρεά과 무관하게 부정의를 비난하거나 정의를 칭송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366e]

6) 정의 부정의 각각이 그것을 지닌 자의 영혼에서 그 자체의 힘으로τῇ αὑτοῦ δυνάμει 무엇을 하는지 신들도 인간들도 주목하지 않았다. 시를 통해서든 사사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든 혼이 부정의하면 나쁜 것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인 반면 정의는 가장 좋은 것임을 논변으로τῷ λόγῳ 충분하게 피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66e]

7) 여러분들이 이 점을 주장하고 젊은이νέος들을 젊은 시절부터 설득해왔다면ἐπείθετε 젊은이들이 부정의를 행하지 않을까 서로 경계할φυλάσσω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부정의를 저질러 가장 나쁜 것과 동거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각자가 스스로 각자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수호자)φύλαξ가 되었을 것이다.[36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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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생에서 죄를 지으면 죽은 다음일지라도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관념은 역설적으로 선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악이 응징되지도 않는 이승에서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리라. 법칙주의적 도덕론을 대표하는 칸트(I. Kant) 조차 선과 행복의 일치 즉 최고선의 필연성을 담보하기 위해 혼의 불멸과 신적 자유를 요청(Postulat)하고 있다. 아무리 선의지가 보상과 무관한 정언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일지라도 최소한 선과 행복의 일치는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진실로서 함께 담보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승이건 저승이건 인과응보의 가능성 그 자체가 부정되고 있을 정도로 정의나 정의로운 신이 자리할 곳이 없다. 부정의한 자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제 뜻대로 산다. 신은 다만 시인들이 일러주듯 오히려 사람들 특히 강자들의 서원과 공물에 지배되는 인위적 관습의 산물일 뿐이다. 아데이만토스의 이러한 언급은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구원과 의지의 마지막 보루인 종교의 영역마저 얼마나 심각하게 물신주의에 젖어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1)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강자 4)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약자이다. 그런데 아테이만토스는 의아스럽게도 설령 어떤 이가 앞서의 언급들이 모두 거짓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고 정의가 최선임을 알고 있다 해도 그들에 대해 상당한 이해심을 가지고 있고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의가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 라면 오히려 그는 부정의한 사람을 꾸짖고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이유가 3)에서 해명된다. 그 어떤 이는 정의가 최선임을 알고 있고 증명도 할 수 있지만 이미 그는 당대의 현실에서 강자가 정의로운 사람일 수 있는 경우는 기대하기 힘들 만큼 거의 희박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가 말하는 ‘천성적으로 신과도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정의가 최선임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이란 극히 소수이며 그 자체로 극히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일상에서 그저 시류에 따라 기득권적 관성에 따라 별 반성 없이 부정의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강자들에게 예외적인 경우를 들어 그들의 부정의를 탓한들 그들이 받아들일 리도 없고 이해할 리도 없다. 물론 약자들은 강자들과 달리 정의를 찬양하고 부정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하는 것도 정의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도 힘을 갖게 되면 누구보다도 맨 먼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정의를 저지른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의 아데이만토스의 언급은 강자이건 약자이건 간에 정의가 최선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이미 아테네에서는 낙타가 바늘구명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데이만토스는 이렇게 된 현실과 관련하여 강자와 약자들을 탓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에게 정의가 그 자체로 최선이며 부정의가 최악임을 일깨워주지 못한 정의의 칭송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즉 정의의 칭송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부정의를 비난하거나 정의를 칭송함에 있어 평판이나 명예 또는 그로부터 주어지는 혜택과 무관하게 정의를 칭송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정의 부정의 각각이 그것을 지닌 자의 영혼에서 그 자체의 힘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토대로 정의와 부정의를 찬양하거나 비난해야 마땅함에도 인간은 물론 신들조차 시를 통해서든 사사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든 누구도 그 점을 논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정의의 칭송자들이 정의가 최선임을 젊은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논변으로 충분하게 피력하고 설득해왔다면 젊은이들이 부정의를 행하지 않을까 서로 경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부정의를 저질러 가장 나쁜 것과 동거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각자가 스스로 각자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아데이만토스의 언급은 장차 펼쳐질 바람직한 정의론의 구축이 타인들의 부정의에 대한 배타적 의심과 배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내면에서 정의 자체가 드러내는 힘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토대로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한 감시자가 되어 부정의를 늘 스스로 경계하면서 그 정의의 온전한 힘을 길러내고 함양하는데 있음을 미리 보여준다. 즉 정의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배타적 공존이 아니라 사회협동체의 일원으로서 시민 각자의 내적 반성을 토대로 타자에 대한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선의를 구현하는 공동체적 공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경계한다’, ‘자신에 대한 감시자’라는 표현에서 ‘경계한다’φυλάσσω와 ‘감시자’φύλαξ라는 표현은 나중 수호자를 나타내는 말 φύλαξ(pylax)와 뿌리가 같거나 같은 말이다. 정의는 타자를 배타적으로 경계하고 타자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진정으로 이기는 자만이 적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진정한 수호자이자 자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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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는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마침내 소크라테스에게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아데이만토스의 요구는 곧 이어 살펴보겠지만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문제제기가 종국적으로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정의론을 펼침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대답해야할 핵심 과제,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제시하려는 정의론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1-3-2. 아데이만토스의 요구(367a-e)

 

*아테이만토스가 끝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1. a)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만 밝힐 것이 아니라 이들 각각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자체로αὐτὴ δι᾽ αὑτὴν 무슨 작용ποιοῦσα을 하기에 한쪽은 나쁜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좋은 것인지를 밝혀 줄 것.[367b]
  2. b) 글라우콘이 요청했듯이 평판은 배제해 줄 것. 정의와 부정의 양쪽 각각에서 진짜 평판τὰς ἀληθεῖς δόξας은 제거하지 않고, 그 각각에 거짓된 평판τὰς ψευδεῖς δόξας을 덧붙인다면,εἰ γὰρ μὴ ἀφαιρήσεις ἑκατέρωθεν τὰς ἀληθεῖς, τὰς δὲ ψευδεῖς προσθήσεις,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τὸ δοκεῖν을 찬양하고, 부정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을 비난하는 것으로 것이라고 그대로 들키지 않고 부정의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367b]
  3. c) 동시에 그것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 (자기가 저지르는) 부정의는 자신의 이익, (강자가 행하는) 부정의는 는 약자의 불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과 같이 하는 것이라 단언하겠다.[367c]
  4. d) 그러니 정의가 가장 좋은 것, 즉 결과 때문에도 가치가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 자체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 평판이 아니라 그 자체의 본성으로 인해 좋은 것이라는 점을 찬양해 줄 것.[367d]
  5. e) 정의는 그 자체로 그것을 지닌 자를 이롭게 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보상이나 평판 따위에 대해 칭찬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 정의와 부정의에 관한 어떤 내용의 평판이건 하지 말 것. 소크라테스께서 이 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이다.[367d]
  6. f) 정의가 부정의보다 더 낫다는 주장만 밝히지 말고 신들이나 남들에게 발각되건 말건 간에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 쪽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나쁜 것인지도 밝혀 줄 것.[36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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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철학적으로 생각해보아할 것들이 있다.

1) 우선 위에서 a)는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요컨대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사람의 혼 안에서 그 자체로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쪽은 나쁜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좋은 것인지를 밝혀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정의와 부정의가 혼 안에서 그 자체로 갖는 힘이 무엇인지’가 그의 요구의 핵심 키워드이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의 이러한 요구는 이미 이전의 언급에서도 틈틈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플라톤이 앞으로 펼칠 정의론의 요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중차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특히 ‘그 자체’αὐτὴ란 말은 간단없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다.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로부터 ‘그 자체 때문δι᾽ αὑτ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이란 답을 끌어낸 후 곧바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혼 안에서 어떤 힘을 갖는지(358b)를 듣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한 단락 지나가서도 다시 같은 표현을 써서 정의가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찬양받는 것을 듣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358d) 그리고 아데이만토스 역시 정의를 그 자체로 다루지 않은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글라우콘이 위에서 한 말과 똑같이 ‘그 각각이 그걸 지니고 있는 자와 혼 안에서 있으면서 그 자체의 힘으로τῇ αὑτοῦ δυνάμει 무엇을 하는지’ 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366e) 마침내 문제제기를 마무리하는 이곳 마지막 부분에서도 단적이고도 결론적인 요구로서 테제의 형식(위 요약문 a)으로 앞서 말한 똑같은 요구를 반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367b) 그것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부연설명이 주어진 후(367 c~d) 언급 끝부분에서도 다시 한 번 그 테제가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요청되고 있다.(위 요약문 f). 367e) 이처럼 이례적일 정도로 동일 내용을 수차례 반복해서 요청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펼칠 정의론의 방향과 요체는 물론 <국가>의 논의 계획과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이곳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만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혼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보여 달라고 마치 자신의 의견인 언급하고 있지만(367b) 사실 뒤돌아보면 소크라테스 자신 이미 제1권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그 스스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개인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이건 씨족이건 군대건 간에 그 집단 안에 깃들어 있을 경우 어떤 힘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미 묻고 있다.(351a~352a) 물론 그곳에서는 ‘혼 안에서’라는 말 대신 ‘개인 안에서’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전후 문맥상 그러한 힘과 기능이 혼의 기능임이 충분히 암시되고 있고(352d) 마무리 즈음에 가면 마침내 그것이 혼의 덕ἀρετή ψυχῆς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353e)

2) 이전 강해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 대해 계속 ‘그 자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사실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αὐτὴ라는 말을 엄밀한 의미의 기술 즉 형상적인 것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을 뿐(342a) 아데이만토스의 요구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맥에서는(351e~352a)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그 자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 자체’라는 말은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 사용한 말이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문제제기가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을 드러내기 위한 사전 포석의 의미를 갖고 있고 그 포석이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제2권에 와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냥 흘려보내기 힘든 모종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잠시 후(368c) 소크라테스 또한 비록 그들의 요구를 받아 다시 정리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엄밀한 규정 차원의 것을 언급할 때 쓰던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을 정의는 물론 부정의에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분명 이곳에서 언급되는 정의와 부정의는 개인과 나라에 깃들어 있는 현실의 정의와 부정의로서 이미 형상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부정의는 정의의 결핍으로서 원천적으로 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둘에 ‘그 자체’라는 말은 사용한 것은 부정의에 대한 제1권에서의 엄밀론적 비판이 단지 논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데 따른 반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정의에 대한 혁파와 정의의 수립 내지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진실은 단순히 부정의가 엄밀한 지혜도 덕도 아니라는 비판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과 나라 안에서 실제 어떤 힘을 갖느냐를 실질적으로 비교해서 그것을 토대로 정의의 우위성을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단지 부정의를 정의의 결핍이라는 소극적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작용력을 갖는 적극적인 현실태이자 모종의 실체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주의 통치가 참된 기술도 아니고 참된 앎도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허위이자 비존재라고 해서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는 막강하고도 주도면밀할 정도의 힘과 기술력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앞으로 펼쳐질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에 새롭게 부응하기 위해 그 둘 각각에 ‘그 자체’라는 말을 사용하여 실체적 현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현실에서의 실질적 비교우위를 논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3) 물론 이것이 정의의 형상성과 실체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견지하고 있었던 기존 입장의 후퇴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정의는 원천적으로 정의의 결핍이며 억견의 소산이며 그런 의미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도 앎도 아니며 어떤 이유에서든 존재론적으로 실재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부정의가 그처럼 원천적으로 억견이자 허위일 수밖에 없는 가장 치명적인 근거는 단지 그것이 형상적 일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데서 주어진다기보다는 그것이 실재성의 조건으로서 가장 일차적인 선(좋은 것 to agathon)을 결핍하고 있다는데서 주어진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있어 진리성과 존재성 여부를 가르는 지고의 기준은 선성의 존재 여부이다. 선성을 제외한 채 엘레아적인 일자성만을 기준으로 현실의 부정의를 들여다 볼 경우 부정의는 그저 무규정적인 비존재일 뿐 그것이 갖고 있는 현실적 작용력의 현존성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이제 그것이 갖는 힘의 현존성을 분간해내야 하고 그 무규정적인 힘들의 분간을 위한 존재론적 토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와 참주를 사물과 거울에 비친 상으로 비유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상이 사물과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 상을 사물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 상은 실재가 아니고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들은 보통 그 거울에 비친 상이 실제 사물이 아니라는 근거를 그것이 실재성을 결여한 허상이라는 데서 찾는다. 그러나 그 상이 실재성을 결여한 것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근거로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거울상이 허상이기 이전에 이미 철저하게 사물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역상이라는 점이다. 즉 그 거울상은 사물의 모습과 일대일 대응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방향이 정반대인 것이다. 굳이 이러한 비유를 드는 이유는 앞에서 거울상이 허상이기도 하지만 역상이기도 하듯이 이른바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주의 지혜를 무지이자 결핍이라는 이유로 칼같이 부정하기 보다는 일단 사물의 모습을 일대일로 하나하나 대응하는 형식으로 전부 가지고 있되 방향만 정반대인 것 즉 참주 역시 철학자의 지혜에 대응되는 모종의 지혜를 가지고 있되 다만 그 지혜의 방향이 정반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주의 지혜와 철학자의 지혜는 모든 면에서 서로 동일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방향만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굳이 비유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이 방향에 해당하는 것이 곧 선성(to agathon)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참주의 지혜가 참된 기술이 아니고 참된 앎과 힘이 아닌 근거는 그것이 실재성을 결여한 허상과도 같은 것이기 이전에 실재와 정반대의 역상이라는 점 즉 원천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선성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가 정의의 결핍으로서 허위라는 것도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실재성의 결핍에서 구해지기 이전에 결정적으로는 선의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포착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정의는 내지 이른바 참주의 지혜는 선을 결핍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실재성을 갖는 것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작용력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단 철학자와 모든 면에서 일대일로 서로 대응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현실에서도 참주는 철학자 왕과 마찬가지로 모두 통치에 있어 막강한 기술과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참주는 선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자와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구별되고 그 기술과 힘 또한 정반대의 목적을 지향한다. 플라톤에게 그 만큼 선성은 실재성을 가르는 중차대한 지고의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도 선성은 이미 형상 일반의 실재성의 기초로서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서 있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선(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고차적이며 그 이데아들의 내적 통일성의 근거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 세계는 물론이고 그것의 모사물로서 우주 역시 이미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선성이 곧 존재성의 최고 가치이자 그의 철학의 대전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전히 참된 앎이 곧 가장 훌륭한 상태로서 덕이며 덕이 곧 앎이다.(353e) 다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이러한 배경과 구도 위에서 현실의 정의와 부정의 그것들 각각에 그 자체라는 말을 붙여 그것들이 갖는 현실에서의 실체적 힘들의 현존을 인정한 것이고 나아가 철학자와 참주가 각기 가지고 있는 힘을 실질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부정의에도 모종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 토대가 마련되어야만 실질적인 작용력에 기초한 정의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5)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이 요구에는 또 하나 의미 있게 주목해야할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그들이 새로운 정의론을 요구하면서 정의의 문제를 개인의 내면 차원 즉 혼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는 제1권에서도 암시되었듯이(351e) 바로 이어서 문자의 비유를 통해 나라와 집단의 정의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그것들의 유기성이 주도면밀하게 고찰된다. 그러나 어쨌거나 출발은 개인의 정의이고 나라의 정의는 개인의 정의를 보다 잘 살피기 위한 방편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정의론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행복과 관련하여 정의로운 개인이 갖는 부정의한 개인에 대한 우위성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오늘날 일단의 정치철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의 정의론을 개인이 무화된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것이 얼마나 왜곡된 접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 * 위 b)의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린다. 해석이 갈리는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진짜 평판과 가짜 평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둘러싼 이견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진짜 평판을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올바른 평판 즉 진실한 의미의 평판’으로, 거짓된 평판을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평판’으로 해석하는 경우부터 살펴보자. 이 경우 ‘진짜 평판을 제거하는 것’이 나쁘지 ‘진짜 평판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한다면, 전체 문장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나쁜 태도를 가리키는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 뒤의 귀결절과 내용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로 앞에 나온 글라우콘의 요청 내용을 360e~361d에서 행해진 요청 내용으로 해석한다. 그곳에서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제대로 대비시켜 보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하다는 평판을 받고, 부정의한 사람은 완벽하게 부정의해서 정의롭다는 평판을 받는 경우를 상정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곳에서의 요청이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서 진짜 평판을 제거하고 그것들에 거짓된 평판을 덧붙인 상태 즉 전도된 정반대의 현실 상황을 상정한 상태에서(361c) 그것을 논파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원문에서 μὴ(mē)라는 부정어가 수식하는 말을 ‘덧불인다’προσθήσεις에 걸어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역본에서도 천병희 역본이 그러하다. 즉 천병희 역본은 박종현 역본과 다르게 ‘각각(정의와 부정의)에서 진짜 평판을 제거하고 가짜 평판을 덧붙이지 않는 한,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로 옮기고 있다. 요컨대 가짜 평판이 덧붙여진 정반대의 현실 상황을 상정한 상태에서 그 가짜 평판을 논파를 해야 제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논증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입장과 달리 진자 평판과 가짜 평판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진짜 평판이란 ‘현실 세계에서 현존하는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실제 평판’을 가리키며 가짜 평판은 그러한 현실에서 실재하는 평판과 거리가 먼 ‘소크라테스가 내세우는 평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평판(doxa)이란 이미 그 자체로 진실과 거리가 있는 것이므로 진짜 평판의 의미를 진정한 평판이라는 의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앞의 글라우콘의 요청도 358에서 제기되고 있는 글라우콘의 요청 즉 보수나 평판 차원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의 우위성을 논증해달라는 요청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들은 μὴ(mē)라는 부정어가 수식하는 말을 앞의 입장과 달리 제거하다ἀφαιρήσεις에 걸어 번역하고 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박종현 역본은 그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종현 역문을 원문과 비교해가며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들 양쪽 각각(정의와 부정의)에서 진짜 평판은 제거하지 않고, 그 각각에 거짓된 평판을 덧붙인다면,εἰ γὰρ μὴ ἀφαιρήσεις ἑκατέρωθεν τὰς ἀληθεῖς, τὰς δὲ ψευδεῖς προσθήσεις’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τὸ δοκεῖν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위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해자가 보기에는 후자의 입장이 이어지는 문맥과 보다 더 자연스럽게 상통하고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무리가 적다고 판단된다.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앞서 요약문 d), e), f)에 담긴 내용 또한 이제 더 이상 평판 따위를 거론하면서 정의의 우위를 논하지 말고 정의와 부정의 그 자체가 갖는 현실에서의 작용력을 가지고 논해달라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b)의 내용을 이후의 내용과 연관시켜 풀어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글라우콘이 요청했듯이 평판 따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배제하십시오. 만약 선생님께서 이들 양쪽에서 현존하는 평판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선생님이 생각하는 현실과 거리가 먼 평판만 그 각각에다 덧붙이신다면 그것은 평판을 평판으로 맞대응하는 잘못된 대응으로 그 또한 실재 정의에 대한 진정한 찬양이 아니라 그저 그런 듯이 보이는 정의의 평판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평판만 가지고 주장하는 트라쉬마코스의 입장과 다를 게 없습니다. 보상이나 평판 따위에 대해 칭찬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플라톤 자신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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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강화하여 그를 대신하여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이 수행한 소크라테스 주장에 대한 반론과 요구는 이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이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으로서 새로운 차원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정의론이 시작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을 리뷰하는 시간 [철학자의 서재]

『데리다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을 리뷰하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상운 옮긺, 『데리다를 읽는 시간』, arte, 2018.

 

데리다는 읽히지가 않아서 포기하게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은 강의록으로 데리다의 생각을 알기 쉽게 풀어 놓았다.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와 <죽음을 주다>를 강독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겨냥한 쟁점들이 재미있다.

 

예를 들면 데리다에게 하이데거가 독일 민족의 정신이라든가 대학의 정신 같은 것이 있다고 실체적으로 상정한 뒤 그것으로부터 자기주장을 내뱉는다는 이미지(p. 96)로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데리다에게는 그런 실체란 없으며 그것은 항상 ‘이미’ 오염되어 있고 시간에 따라 ‘변형’되며 왜곡되기도 한다. 또 데리다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던 하이데거가 인간/동물/비생물로 세계를 구분하고 인간을 특권화 하는 것이 결국 ‘인간중심주의’아니냐고 비판하고 있다(p. 121).

 

데리다는 아도르노의 관점을 끌어들여 하이데거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회귀해야 할 ‘정신’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환상이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한다. 아도르노의 눈에 횔덜린은 고향으로의 회귀 불가능성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이데거는 한사코 무리하게 고향으로의 회귀 이야기로 만들어 독일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다(p. 154). 1, 2강은 이런 내용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의 ‘정신’이 모든 것을 통합한다면 데리다에게 그런 것은 환상이며 있는 것은 ‘차이화’이며 ‘차연’이다(p. 167). 데리다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의미가 확정된 것처럼 보여도 시간의 경과 속에서 그 의미는 미묘한 차이와 비정합성이 생겨나 불안정하게 된다. 이것을 데리다는 ‘차연’이라 부른다(p. 167).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항상 ‘대체보충’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어떤 순간의 감정적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나 예술의 힘을 빌리게 되는데 그것들이 ‘오리지널’을 대리보충해 주기 때문이다(p. 187).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점을 놓친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기원, 근원, 정신적인 것을 찾는 하이데거가 현재 상황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다. 그는 하이데거를 겨냥해 이렇게 말한다. 홀로코스트를 막으려면 본래의 근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통 기독교적 발상은 ‘철학의 죽음’일 뿐이다(p. 232).

 

3, 4강에서 데리다는 근원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5강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 역시 비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가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고 본다(p. 322).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가 주체를 압도할 경우 주체가 무력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p. 323). 데리다가 보기에 ‘책임’의 본질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결정 근거가 없는 ‘결정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느 쪽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 348). 이 때 어떤 신비,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책임져야 할 때, 인간의 이성, 합리성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근대의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데리다가 말하는 것 아니냐고 보고 있다.

 

의미가 계속 변동하고 ‘차이화’ 하고 있기 때문에 고정된 확실한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보는 데리다의 입장에서는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는 파편화된 것, 균열, 틈, 공백의, 나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기 때문에 애매모호하거나 ‘신비’한 것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예술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예술을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면 설명이 잘 안 되는 지점이 있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도 같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근대의 합리적 이성은 등가교환의 원리를 고안했고 이와 함께 이성적 인간, 계산하는 인간이 생성됐다(p. 449)고 본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서양의 기독교는 이런 대칭성을 중단하고 천상의 이코노미를 명령했는데 그것은 기브 앤 테이크 식의 경제가 아닐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무한 책임, 무조건적 책임 같은 것일텐데 이것이 데리다의 윤리인 것 같다. 6강까진 이런 논의들이 이어져 있다.

 

마지막 7강은 ‘에크리튀르’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구어가 먼저 있고 나중에 문자가 생겼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데리다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기호적으로든 문자적으로든 오염되어 있다. 기호나 문자 체계가 없으면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의 지각이 이미 기호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p. 488). 유아는 어른들의 말을 제대로 재현할 수 없고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말을 할 수 있게 된다(p. 493). 이러한 과정, 에크리튀르의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고 지각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데리다는 파롤이 ‘에크리튀르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p. 512).

 

거칠고 두서없이 리뷰해보았지만 데리다를 읽기 전에 입문서로 읽기 좋은 책이다. 학생도 교양으로 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글쓴이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