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8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상설 강좌”의 강의록입니다. 이 강의록은 매주 열리는 강좌 진행에 맞추어 본 웹진에 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원고를 게재해 주신 이정호 선생님과 정암학당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플라톤의 <국가> 강해(5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4)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여성의 지위 : 451c-457b)에 대한 해설

 

* 앞서 살폈듯이 여성과 아이들의 공유 문제는 수호자 집단 내에서 벌어질 수호자들의 배우자 공유와 그들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을 올바로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뜬금없이 경비견 사례를 꺼내든다. 처자의 공유가 이상 국가의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임을 논증하기 이전에 우선 수호자 집단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비견 사례를 통해 플라톤이 제안하는 양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기존의 전통적인 견해들과 정면으로 대치될 만큼 아주 파격적이다. 어떤 이는 이 경비견 사례를 성 역할과 관련한 오늘날의 동물행태학적 접근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동물 일반의 사례가 아님을 고려하면 경비견 사례는 다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라 할 것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경비견 비유는 일단 그 자체로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외에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비유대로라면 여성은 출산과 수유 기능 이외에 처음부터 남성과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그에 따라 수호자들의 집단생활에서도 남성 수호자와 동일한 환경 여건에서 동등하게 동일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 그러나 비유와 다르게 실제 사람의 사회적 역할은 개의 역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의 경비견 이야기를 사람과 동물의 행태 및 역할 상의 차이를 간과한 그릇된 인용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물은 가사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정치학> 1264b4) 그러나 이어서 제기된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 그리고 반대 의견을 포함한 대화와 쟁론에 관한 이론적 논의까지 모두 종합하여 평가해보면,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내세우는 양성평등론은 단순한 비유 수준을 넘어 견고한 논변의 형식으로 수호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 및 기술 영역 전반에 걸쳐 하나로 관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출산과 양육과 관련한 생물학적 차이를 근거로 양성 간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차이를 논증하는 것은 쟁론가들이 흔히들 저지르듯 표현상 말꼬리만을 붙잡아 서로 다른 논리적 범주들을 하나로 혼동한데서 비롯된 잘못된 추론이다. 남성은 아이를 잉태하게 하고 여성은 임신 출산하고 일정 기간 수유하는 생물학적 기능은 양성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생물학적 차이들은 사회적 역할 수행에서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인간 종으로서 자연적 본성이 동일한 만큼 각기 감당해야할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늘날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과도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아이의 임신과 출산 이외에 최소한 가사를 돌보는 일도 여성의 고유한 일로 여기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주장은 오히려 후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플라톤이 살아 있다면 오늘날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는 군대 징집 대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처사조차 자연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당한 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 물론 플라톤은 자연적 본성에서건 사회적 역할에서건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일에 따라 남성이 여성보다, 여성이 남성보다 각각 더 잘하는 경우가 분명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런 사례들은 우연적인 경우로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연적 종류(eidos)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여성이 남성보다 요리를 잘한다고들 여기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요리를 잘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으로 할 수 일에서 어떠한 차이도 없다.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여성도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양성 간 차이를 말하자면 다만 힘과 능력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플라톤은 언급한다. 즉 여성은 힘과 능력에서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비록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남성이 생물학적 근육의 힘에서 여성보다 강하다는 게 일반의 상식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힘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차이조차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오래된 관습이 낳은 후천적 결과이며 오히려 소근육과 유연성에서는 여성이 단연 우월하다는 연구도 있다. 문제는 그것 외에 일의 수행 능력에서까지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보면 비록 플라톤 주장의 혁명성을 충분히 인정할 지라도 그 역시 분명 그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할 것이다.

* 그러나 양성 간 힘의 차이에 대한 그의 부차적 언급을 시대적 한계로 비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서조차 여성의 지위는 여러 측면에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른바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발달 수준이 비교적 높다고 평가되는 서구 선진국에서도 여성의 선거권과 정치참여는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경우만 해도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여성의 사회참여는 물론 자유롭게 집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이슬람 사회에서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정치적 기본권은 물론 최소한의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2,500년 전 아테네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은 축제를 제외하고는 집안에만 갇혀 아이들의 양육과 가사 역할만 맡았고 외부에서 생필품을 구하는 것조차 남성 가족 내지 남성 노예들이 대신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 대상조차 부친이 결정했으며 출산 기계라고 불릴 정도로 결혼에 따른 성생활은 주로 아이 출산을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졌고 쾌락을 위한 남성들의 성적 대상은 창녀들이나 동성 소년들이 대신했다. 게다가 상속할 권한이 생겼어도 여성은 그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과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성차별과 관련한 이러한 뿌리 깊은 사회적 관습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놀랍게도 여성에게 남성과 마찬가지로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통치자로서 권력의 수장까지 될 수 있는 동등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고, 장차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어린아이 때부터 남성과 동등한 양육과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말로 세우는 이상 국가론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지만 그가 과거 100년도 아닌 2,500년 전 인물임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선구적이고 혁명적이었는지 가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이다. 최소한 이 점만 고려해도 플라톤을 오늘날 최소한 페미니즘의 고대적 선구로 평가하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현대 여성주의자들은 물론 플라톤에 대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이 그의 양성평등론을 평가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20세기 인류가 겪은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스탈리즘의 참혹상을 비판하면서 크로스만(R. Crossman), 포퍼(K. Popper), 아렌트(H. Arendt)를 비롯한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이 그 전체주의적 발상의 배후에 플라톤이 있다고 맹렬하게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비판과 공격은 오늘날까지도 지식인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긴 오늘날 여성의 개인적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을 내세우는 페미니스트라면 어느 누구라도 이른바 전체주의의 사상적 뿌리로 낙인찍힌 플라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내세운다는 게 쉽게 용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래서였을까? 플라톤 연구자로서 명망이 높은 앤너스(J. Annas)조차 그의 양성평등론이 여성의 권리를 인권의 차원에서 권리 그 자체로 확보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다만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양성 구분 없이 인력을 총동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플라톤은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없으며 인간 평등함과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다만 여성을 단지 거대한 미개척 자원으로 본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와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분명 여성의 지위에 관한 혁명적인 생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대상, 즉 수호자로서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 여성들은 그저 당대의 일상적인 열악한 여성의 지위 속에 방치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의 제안은 그토록 끔찍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불행과 굴욕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또 수호자 계급에 여성이 참여하는 일이 과연 자기 의사에 기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들은 수호자의 역할이 매우 거칠고 힘든 일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수호자의 역할과 지위를 여성들 스스로 원한 것이기보다는 실제적으로는 권력 있는 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여된 측면이 강하다고 의심한다. (J. Annas(1981) 181-185쪽 참고)

*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나 집단 공동체의 이익이 그 사회의 가장 큰 목표였음에도 그것을 위해 여성 일반을 자원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장차 왕이 될 수도 있는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한 경우는 19세기 이전까지 아예 없었다. 게다가 플라톤의 주장이 양성 평등에 관한 기초적인 발상은 물론 성차별을 자연적 삶 자체로 당연시했던 근 2,500년 전에 제기된 것임을 함께 고려하면, 근세 이후에야 간신히 남성 부르주아 시민들을 대상으로 확립된 인권 개념으로 플라톤을 평가하는 시도들 자체가 이미 비판의 적절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거친 일이라고 여성들 모두가 기피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의심 자체가 이미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은 여성을 수호자 계급에 참여시키면서 여성 모두에 대해 그 자격을 열어 두지 않는다. 플라톤은 남성 수호자의 선발 과정이 그러하듯이 이곳에서도 여성 수호자를 선발함에 있어 이른바 수호 역할에 뛰어난 여성들과 그러한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우열을 가린다. 지혜를 사랑하는 여자와 지혜를 싫어하는 여자가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자가 있고 기개가 없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456a) 그러나 이것은 남성 수호자 선발과정이 그 자체로 남성 차별이 아니듯이 이 또한 여성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뛰어남 또한 수호 역할과 관련되어 있을 뿐 모든 측면을 다 포함하지도 않는다. 수호자는 결코 생산 기술에서 생산자 보다 뛰어나지 않다. 오늘날에도 적정 자격을 위한 선발 과정에는 그와 관련한 뛰어남을 기준으로 우열이 비교되고 그것을 토대로 선발하는 것을 정당한 절차로 모두 받아들인다.

* 이밖에도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하여 비평가들이 크게 의심하는 사안이 또 있다. 그것은 경비견의 비유에서 보듯이 플라톤이 여성의 역할 가운데 오로지 수호자의 역할에만 관심이 있고 수호 이외에 여성이 맡을 수 있는 다른 역할에 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거나 아예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있다는 의심이다. 경비견의 비유는 개가 주인을 위해 주인에게만 복종하고 봉사하듯이 사람 또한 나라를 위해 나라에만 복종하고 봉사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의 근거로 비평가들은 여성 수호자에 대한 그의 언급 대부분이 싸움과 운동 훈련에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452a-b, 453a, 458d, 466c-d, 467a, 468d-e) 설사 플라톤의 제안을 양성평등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저 여성의 남성화를 통한 평등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가 플라톤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마치 공연을 재연하는 것처럼 남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와 똑같은 과정과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임을 고려하면 그 의심은 사회적 역할 중 수호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추어 다소 과민하게 제시된 비판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이루어진 앞서 이상국가론에는 단지 수호자 역할만 갖는 사람들만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들의 역할 즉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른바 여성 공연으로 표현되는 이곳의 논의가 앞서 이상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전개된 남성 공연에 상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곳에서도 여성으로서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 또한 당연히 함께 포함되고 고려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 실제로 플라톤은 대화와 쟁론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논의 대상을 ‘표현 자체가 아닌 종류에 따라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경우’, 시가와 기술, 체육과 전쟁 등 어떤 역할이건 간에 양성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일관되게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를 언급하면서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급에 속하는 구두장이와 의사, 목수 등의 역할을 인용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여자 의사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454d)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양성의 사회적 역할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일반론적 논증에 기초한 플라톤의 일관된 주장을 굳이 수호자 역할에만 한정해서 좁게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플라톤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비록 이곳에서는 수호자의 역할이 주제가 되는 한, 양성의 동일한 역할에 대한 논의가 수호의 역할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플라톤의 생각은 양성의 본성과 능력에 대한 일반론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성의 기준에 관한 455b-c의 논의는 양성의 사회적 역할을 논할 때 양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인지, 그 기준을 정함에 있어 이치에 따른 논거가 얼마나 핵심을 차지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말 그대로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여성들은 자연적 본성상kata physin 남성들과 동류syngeneus인 것이다.(456b)

* 그런데 오늘날 새롭게 전개되는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양성 간의 근본 차이가 과연 플라톤의 주장대로 출산과 수유 단계까지의 양육 정도뿐인지 아니면 그 밖에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모종의 본질적인 성차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다양하고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논쟁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현대 생물학과 생리심리학에서도 눈에 보이는 양성 간의 신체적 차이 외에 유전자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된 여성성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성징들이 따로 존재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모종의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지 많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일련의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출산과 양육 기능 이외에 성역할과 관련한 양성의 독특한 특성들과 정체성이 각기 고유하게 존재하며 그에 따라 진정한 양성의 평등은 오히려 양성의 그러한 근본적 차이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생겨났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진정한 의미에서 양성평등론이 아니다. 그들은 플라톤이 성별 간 일방적이고도 무차별적인 평등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 양성 간 고유하게 실재하는 생물학적, 문화적 차이들과 정체성을 원천적으로 무시 또는 제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양성 간 불일치는 해결할 수 없다는 분리주의의 관점에서 오히려 성, 출산, 육아등과 같은 여성의 신체적 고유 능력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가부장제를 타파하고 여성 고유의 문화 영역을 구축하는 적극적인 토대로 삼기도 한다.

* 그러나 지난 2,500년 동안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이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를 통해 성차별을 극복하는 근거로 수용되었던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역사 속 수많은 선구적인 주장들이 운명처럼 겪어 왔듯이 그들 주장 또한 전도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인류 역사 이래 양성 간 차이는 거의 대부분 남성의 우위를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 차별의 근거로만 이용되어 왔고 그 위세 또한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하물며 일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은 양성 간 차이와 정체성에 기초하여 전통적 여성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양성 평등을 내세우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어처구니없게도 양성 간 차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근거로 악용하기까지 한다. 일부 보수적인 플라톤 비평가들(L. Strauss 등)이 양성 간 근본 차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끌어들여 플라톤의 접근방식을 오히려 자연 법칙에 반하는 것이며 적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적극 비판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단을 보여준다.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지난하고도 먼 가시밭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세계사적 진보는 늘 그 가시밭길을 딛고 헤쳐 가며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

* 아무려나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내지 여성성의 범위가 현대 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더 크게 확대되건 아니건 또는 설령 생물학적 차이 말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양성 간 문화적 차이가 있건 없건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차이일지라도 양성이 사회적 삶을 영위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들과 관련하여 그 차이들이 결코 양성간의 차별이나 불평등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양성 간 동일함은 동일함대로 차이는 차이대로 정당하고 균형 있게 받아들여져 그것이 양성의 자유로운 의지와 행위를 저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권리를 고양하고 담보하는 적극적인 근거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오늘날 페미니즘의 출발 역시 이러한 자각을 토대로 생물학적 차이가 결코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명제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미 2,500년 전 제기된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어쨌거나 그 이후 제기된 전통적인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그 어떤 주장보다도 그 명제에 가장 충실하게 일치하고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이상의 다각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 사이에서 플라톤 주장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일관되게 지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양성평등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이 대화편 전체를 통해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곳 <국가>만 보더라도 여자들을 ‘속 좁은 사람’(469d), 또는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다수의 미천한 사람들’로(431b-c) 표현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정해진 삶을 잘 영위하지 못했을 경우 두 번째 탄생에서 여자로 바뀌게 된다.’(<티마이오스> 42b, 90e-91a)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사려가 깊다’(<크라튈로스> 392b)는 표현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이 이것을 근거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이중적이며 변덕스럽기 그지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제안한 양성평등론이 그 자신도 조심스러워하고 대화 참여자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대화편들 전체에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왜 일관성을 갖기 힘들었는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당대 아테네인들이라면 모두가 반대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마침내 <국가>에서 여러 가지 근거들을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전까지는 굳이 많은 설명이 요구되는 견해를 불쑥 내놓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대화 국면에서는 그냥 소극적으로 일상의 견해들을 따라 언급을 해오다가 비로소 <국가>에 와서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비로소 여성에 대한 파격적인 수준의 속생각을 적극적으로 털어놓게 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플라톤의 여성에 대한 <국가>의 견해가 과연 그토록 조심하고 경계했어야할 정도로 파격적인가에 대해서는 당대 아테네 대중은 차치하고 지성을 대표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여성관을 들여다보더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테면 소포클레스는 ‘여자에게는 침묵이 곧 품위kosmos’(<Ajax> 193)라고 말하고 있는가하면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은 선한 행동을 할 줄 모르며 오히려 모든 악을 고안해내는데 가장 뛰어나다’(<Medea> 406)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플라톤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용감함의 수준에 있어 ‘용감한 여자라고 해 봐야 비겁한 남자’의 수준일 뿐이고 품위의 수준에서도 ‘여자가 남자만큼 품위 있다고 해도 그저 수다스러운 여자’정도라고 말하고 있다.(<정치학> 1277b25)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조차 과부가 된 전몰자의 아내에게 짧은 충고를 전하면서 ‘덕에 대해서건 결함에 대해서건 남자들 사이에서 소문나는 일이 아주 적다면 그것으로 큰 명예’(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5)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포클레스 등 여타 당대 유명 저작가들의 문헌들 여러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인습들 자체가 역설적으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대화편 전체에서 왜 일관되게 표출되기 힘들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일정 부분 설명해줌과 동시에 오히려 그것들은 그 인습의 견고함에 반비례해서 <국가>에서 제안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는가를 다시금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보다 적극적인 근거가 된다.

*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의 이상국가론을 토대로 차선의 현실국가론을 펼친 것이라고 평가되는 <법률>을 통해 양성 평등에 관한 <국가>의 주장들을 일정하게 이어 가고 있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아테네인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기본적으로 ‘여자들을 위한 것이 무질서한 상태로 그냥 간과될 경우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이 관행을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 나아가 모든 관행을 여자와 남자가 공유하도록 조직하는 것이 나라의 행복을 위해 좋다.’(781b)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인 역할과 관련해서도 ‘여자도 관직에 나갈 수 있고 군역도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부과할 수 있되 관직에 진출하는 연령은 남자가 30세 이상, 여자는 40세 이상인 반면에 군역은 여자의 경우 아이를 낳은 후에만 부과하되 50세까지로 제한해야 한다.’(<법률> 785b)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법률>에서도 양성의 동등한 역할에 있어 전쟁과 관련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인용을 보면 양성 평등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가 교육 및 사회 분야 전체에 두루 걸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인용하자면 그곳에서 주인공 아테네인은 ‘그리스에서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한 뜻으로 같은 일을 수행하지 못해, 동일한 지출과 수고로 2배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과 아이는 아버지의 반대와 무관하게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하며’(804e-805a) ‘전술적 기동과 전투대형 갖추기, 무장 기술 등을 양성 시민 모두가 똑같이 익혀야 한다.’(814a-c)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제안이 실현될 수 있는 한, 여성은 교육과 그 밖의 다른 일에 남성과 함께 최대한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지니는 열기가 식는 일은 없을 것’(805c)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가히 2,500년 전에, 여성에 대한 기존의 그릇된 관습을 타파하기 위한 그 자신만의 길고도 힘든 숙고 과정을 거쳐 <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원칙의 형태로 제안된 이후 <법률>에서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정책적인 대안으로 실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하겠다.

*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의 공유 문제에 대한 대화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에 답변하면서 우선 수호 역할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들의 동일함을 논증한 후, 그것이 자신이 제시할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kyma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 그것을 토대로 이제 두 번째 파도로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본격적 다루기 시작한다. <끝>

* 다음 회 : 3. 두 번째 파도 : 처자의 공유, 전쟁에 관한 일(457c-471c)


 

플라톤의 <국가> 강해 (5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3)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도입부(449a-451c)

 

* 제4권의 끝은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지만, 그 논의는 제5권이 아니라 제8권에 가서 이어진다. 대화 상대자들이 논의 진행을 끊고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고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5권에서 7권까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펼쳐진 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만 형식상의 일탈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나름의 문학적 플롯에 따라 플라톤이 주도면밀하게 사전 계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는 말로 나라를 수립하는 차원에서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 계급으로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기본 틀과 그들의 기본 덕목을 논의했다. 그러나 정작 이상 국가를 다스리는 핵심적인 중추로서 통치자 계급과 관련해서는 그 선발 과정 이외에 그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역할과 위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을 통해 담보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미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국가가 다름 아닌 철학 위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나라의 통치자 또한 최고 수준의 훈련과 교육을 받은 철학자들로 구성되어야 이상국가의 이상과 목표가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그런데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철학과 철학자들의 위상이란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를 신을 모독하고 청년들을 오도한다는 이유로 사형에 내몰 정도로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지식인 사회의 중심은 전통적인 시인들과 신흥 소피스트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시인들이 기반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과 소피스트들의 궤변적 수사술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시대와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객관적 인식과 논리에 기반한 철학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아테네가 직면한 정치적 현실 또한 철학과 철학자들의 정의로운 통치와 참여를 통해 극복되어야 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러한 구상은 당대의 지적 풍토에서 결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으로서는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기본 틀 이상의 정치 체제의 기본 위상과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애초 설정한 논의 계획을 일시 유보하고 철학의 위상은 물론 철학자들이 어떤 교육 과정을 통해 어떤 능력을 갖추었기에 통치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를 근본적으로 먼저 밝힐 필요가 있었다.

*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논의 구도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제5권을 시작하면서 앞서 소크라테스가 건국신화에서 제시한 처자공유 및 양육과 교육에 관한 내용에 대해 대화 상대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형식으로 계획된 논의 전개를 중단시키고 양성평등과 처자공유, 철인정치의 가능성 등의 파격적인 주제로 앞으로 다루어질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들에 불을 당긴 후, 논의 방향을 아예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의로 완전히 틀어 버린다. 이러한 논의 구도의 전환은 형식적으로는 논의의 일탈로 보이지만 플라톤이 염두에 둔 이상 국가가 다름 아닌 철학 통치자들에 의해 그 온전함이 구현되는 나라임이 확인되면서, 내용적으로는 기본 틀만을 다룬 지금까지의 이상 국가론을 더욱 심화하고 확장하는 획기적인 전기가 된다. 게다가 논의의 목적상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이 심도 있게 다루어지면서 그 부분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는 물론 주제적으로도 형이상학과 인식론, 윤리학과 정치철학 등 철학적 탐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플라톤 연구자들은 형식상 일탈로 보이는 제5-7권을 오히려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자 철학적 논쟁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철학사를 통해 <국가>와 관련한 의미 있는 수많은 철학적 논쟁들이 이곳에 담긴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테면 양성의 평등, 좋음의 이데아,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철학의 위상, 수학 및 기하학과 천문학의 기초, 변증술 등 플라톤 철학의 핵심 주제가 모두 이곳에 담겨 있다.

 

*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갖는 이러한 성격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5권 도입부의 논의 내용을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449a-451b]

1) 소크라테스는 논의 계획에 따라 이제 나라경영διοίκησις과 관련해서나 개인들의 영혼의 성격 형성τρόπου κατασκευή과 관련해서 네 가지 나쁜 유형εἶδος의 정치체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449a) 그러나 이때 아데이만토스는 폴레마르코스가 그의 겉옷ἱμάτιον을 잡아당기며 건네는 말을 듣고 이내 목소리를 높여 소크라테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가 결코 작지 않은 주제 즉, 여인들이나 아이들과 관련해서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κοινὰ τὰ φίλων이 되리라는 게 누구에게나 명백하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424a)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ἐκκλέπτειν는 것이다.(449b-c) 그러니 나쁜 정치체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처자공유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말한 그 공유의 방식ὁ τρόπος τῆς κοινωνίας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야기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글라우콘과 트라쉬마코스 등 대화자 전원이 그에 동의를 표한다.(449c-450a)

2)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는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는데 자네들이 지금 얼마나 큰 논의의 벌집을 건드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당황해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가 이 사람들이 논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황금을 캐려고χρυσοχοήσοντας 여기에 온 것으로 생각하냐고 반문하고 그것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적정한μέτριος 정도의 논의를 언급하자 다시 또 글라우콘이 나서 그러한 종류의 논의를 듣는 데 적정한 정도란, 지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평생 전부가 될 것임을 내세워 제기된 처자공유와 아이들의 양육τροφή 및 교육에 관한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말씀해 줄 것을 재차 촉구한다.(450a-c)

3)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한 설명이 실현 가능성은 물론 그것이 최선인지도 의심스러운데다 설명할 경우 그것이 소원이나 비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며 다시 한번 그 문제를 다루길 주저한다.ὄκνος 이에 글라우콘은 재차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진리ἀληθεία를 알고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자신감을 가지고 할 만한 안전한 일이지만 확신이 없는 채로 찾고 있는 중ζητοῦντα에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섭고 위험한φοβερόν καὶ σφαλερόν 일이라고 말한다.(450c-451a)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본의 아니게 훌륭하고 좋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의 아니게 살인자φονεύς가 되는 것이 더 작은 죄ἁμάρτημα라고 생각함에도 ‘글라우콘이 잘도 나를 북돋는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된다 해도 방면해드릴 테니 용기를 내서 말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한다.(45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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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b 트라쉬마코스 : 트라쉬마코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후에도 두 번 정도(498c-d, 590d)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을 펼친 후에 직접 대화에 끼어든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 450b ‘황금을 캔다’ : 이 말은 아테네인들에게 전해지는 고사에 기초하여 생긴 격언에서 따온 말로 의미상으로는 ‘제 할 일은 게을리한 채 어리석게도 별 이익도 가망도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을 빗댄 말이다. (J. Adam note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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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애초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마치 제1권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그렇게 해석되듯이 제5권-제7권의 내용도 별도의 목적으로 작성되었다가 이곳에 삽입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제5권 서두를 읽다가 앞서 그려진 424a의 장면을 잘 음미해보면 제5권 서두의 논의 전환이 훗날 삽입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플라톤에 의해 하나로 계획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424a로 되돌아가면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양육을 훌륭하게 받아 절도 있는 수호자가 되면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이라는 속담대로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는 것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간파하게 될 것이라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대화 참여자들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파격적인 언급에 아무런 이의 없이 순순히 동의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제5권 서두에 와서야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의아하게 여긴 그대로 제5권에 가서 대화 참여자들 역시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하도록 만들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었다. 즉 플라톤은 424a에서 미리 그와 같은 의아한 장면을 복선으로 깔아 독자들에게 의아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대화 참여자들로 하여금 내내 궁금증을 간직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게 만드는 배경으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 제5-7권의 핵심 주제가 철학과 철학자 왕이라는 점도 이 부분이 나중 <국가>에 삽입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국가>의 주제인 개인과 나라의 행복과 정의와 관련해서 그 행복과 정의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철학과 철학자 왕이고 그 내용이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 또한 제5-7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5-7권은 플라톤이 처음부터 <국가>의 전체 구도 안에서 따로 집중해서 다루려 하는 의도에서 편제된 <국가>의 핵심 부분인 것이다.

* 그럼에도 아데이만토스 등 대화 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와 요청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나칠 정도로 방어적이고 신중하다. 자신의 대답이 진리가 아니라 소원이나 비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는 말도 하고 하물며 그 자신 확신도 없는 말로 본의 아니게 좋은 사람들을 속이느니 차라리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되는 것이 더 작은 죄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곧이 들일 필요는 없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내놓을 답변들은 모두 <국가>의 핵심을 차지할 정도로 오랫동안 플라톤 스스로 숙고와 성찰을 거듭해서 내놓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후 본격적으로 토해내는 주장 또한 놀랄 만큼 확신에 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왜 여기 시작 단계에서 소크라테스를 그토록 조심스러워하고 주저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 내용들이 <국가>의 중심 주제이자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양성평등과 처자공유 및 정치체제에서 철학과 철학자 왕의 위상에 관한 문제는 당대 아테네의 지적 풍토에서는 감히 꺼내 들기도, 설득력을 지니기도 힘든 주제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에서 양성평등이란 입에 꺼내기조차 힘든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당대 아테네에서는 지식인 세계에서 위세를 떨쳤던 전통적인 신화와 시인들과 달리 철학과 철학자란 크게 주목을 끌거나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제들을 자신의 핵심 주장으로 제기하려는 플라톤으로서는 다각적으로 저작 기법상의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자신이 불쑥 그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주변 대화 참여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태도 또한 시종일관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장면 또한 플라톤의 치밀한 의도 아래에서 그려진 것으로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대답을 극력 촉구하는 글라우콘을 향해 농담조로 ‘잘도 나를 북돋는다’(451b)고 반문하는 것 역시 이 국면이 플라톤의 의중을 담아내기 위한 아이러니임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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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 양성에서 동일한 직무와 동일한 교육 451c-457b)

 

[451c-457b]

1)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대화 참가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남성 공연δρᾶμα을 완전히 다 마치고 나서 여성 공연을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남성들을 무리의 수호자로 세우려 했던 앞서의 과정과 상응하는 방식으로 처자공유 방식을 논의하되 우선 여성들과 아이들을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451c) 우선 소크라테스는 수컷 경비견φυλάκων κυνῶν들과 암컷 경비견들의 비유를 들어 암컷들이 새끼를 낳고 기르는 것 때문에 경비나 사냥 같은 일은 수컷이 하고 암컷은 집을 지켜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단지 힘 차이를 빼면 두 경비견이 하는 일은 동일하므로 하는 일 모두를 공동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비유에 기초하여 그러한 동물을 동일한 일’ἐπὶ τὰ αὐτὰ에 쓰려면 그 동물에게 ‘동일한 양육과 교육을’τὴν αὐτὴν τροφήν τε καὶ παιδείαν 부여해야 하듯이 여성γυνή들도 남성ἀνήρ들과 같이 동일한 일에 쓰려고 한다면 여성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가르쳐야διδακτέον 하고 시가와 신체단련 기술은 물론 전쟁 임무도 부여하는 등 동일한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51d-e)

2) 이를테면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레슬링 도장παλαίστρα에서 ‘옷을 벗고 신체단련을 하는’γυμναζομένας 것이 관습상 우스울지라도 그리고 하다못해 몸에 주름이 잡혀서 보기 좋지 않은 노인네들이 신체 단련장에서 볼 수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두고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농담σκῶμμα을 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452a-c) 그리스인들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크레타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벗고 신체 단련하는 것을 보고 희화화했지만 막상 신체단련을 해보니까 벗어버리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았듯이 논변λόγος을 통해 가장 좋은 것이 밝혀지면 눈ὀφθαλμός으로 우습다고 여겨진 것은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쁜 것τὸ κακόν이 아닌 다른 어떤 것ἄλλην τινὰ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좋은 것 말고 다른 것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진지해하는 사람은 다 멍청하다.(452d-e)

3)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성φύσις상 여성이 남성과 모든 일을 공동으로 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대쪽 사람들 편에 서서 우리 자신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토론해 볼 것을 제안하고 우선 그쪽 편에 서서 이렇게 반론을 제시한다. 즉 i) 각 사람이 본성에 맞는 자기의 일 한 가지를 해야 한다‘δεῖν κατὰ φύσιν ἕκαστον ἕνα ἓν τὸ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고 당신들 자신이 동의했다. ii) 그런데 여성과 남성의 본성이 완전히 차이 난다. iii) 그렇다면 일도 자신의 본성에 따라 각자에게 다른 일을 맡기는 것이 적절하다. vi) 그러므로 그들이 동일한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가당착τἀναντία이다.(453a-b)

4)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반박에 대한 탈출구를 요구하는 글라우톤 등에게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즉 그렇게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화διάλεκτος가 아닌 쟁론ἔρις을 벌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의 대상을 종류εἶδος에 따라 나누어 고찰하지는 못하고 표현 자체αὐτὸ τὸ ὄνομα에 매달려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이러한 반박술에 휘말릴 경우 우리는 표현에 얽매여서 동일한 본성이 동일한 일의 수행을 맡아야 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용맹스럽고 쟁론적으로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대머리인 사람들φαλακροὶ과 머리가 긴 사람들κομῆται이 반대되는 본성이 아니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냐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서 그들의 본성이 반대된다는 데 우리가 동의하면, 대머리인 사람들이 구두장이σκυτοτόμος 일을 하면 머리가 긴 사람들은 못하게 하고 역으로 머리가 긴 사람들이 구두장이 일을 하면 대머리인 사람들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라는 것이다.(453c-454b) 요컨대 동일한 본성과 다른 본성을 모든 측면에다 다 갖다 붙여서 적용하면 안 되며 다만 수행할 일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본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란 이를테면 의사ἰατρός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의사 일에 적성이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을 서로 연관시키는 경우이다. 이 경우 의사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 목수τέκτων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연관시킬 경우 그것은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진 것끼리 연결 짓는 것이다.(454c-d)

5) 남성들과 여성들의 경우도 어떤 기술이나 다른 어떤 수행할 일과 관련해서 한쪽이 더 뛰어난 것으로 드러나면 본성상 양자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단지 여성은 아이를 낳고 남성은 아이를 배게 한다는 차이만으로는 어떤 기술이나 수행하는 일과 관련한 논의에서 여성과 남성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수호자들과 그들의 여성들이 동일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반박되지 않는다.(454e) 나라 경영διοίκησις과 관련해서 여성이 고유하게 수행할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455a) 어떤 것에 적성τὸν εὐφυῆ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적성이 없다고 할 때 기준이란 i) 한 사람은 그것을 쉽게 배우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경우 ii) 한 사람은 조금 배워도 그 배운 것으로부터 스스로 아주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은 많이 배우고 익히고 나서도 배운 바를 유지하지도 못하는 경우 iii) 한 사람에게서는 몸에 속한 것들이 생각을 충분히 잘 섬기는데μελέτης, 다른 사람에게서는 그것들이 생각에 저항하는ἐναντιοῖτο 경우이다.(455b-c)

6) 물론 사람들이 익히는 일들 중에 여성이 잘 한다고 여겨지고 그래서 거기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못하면 정말로 웃기는 일들 이를테면, 뜨개질이나 빵 굽는 일, 채소 삶는 일 따위가 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을 훨씬 능가κρατεῖται하긴 하지만 많은 여성이 많은 남성보다 더 뛰어난βελτίων 영역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일 중 어떤 것도 따로 여성에 속한 것도 따로 남성에게 속한 것도 없으며 그와 관련한 본성들은 양성 모두에 비슷한 방식으로 흩어져 있어서, 비록 모든 일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긴ἀσθενής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수행할 일들 모두에 본성에 따라서 공히 참여할 수 있다.(455d)

7) 다만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본성상 의사 일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으며, 또 시가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듯이 신체단련과 전쟁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전쟁과 어울리지 않고 신체단련을 좋아하지 않는 여성이 있다.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여성과 지혜를 싫어하는 여성이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성이 있고 기개가 없는 여성이 있다.(455e-456a) 이렇듯 수호라는 목적에 비추어볼 때도 더 약하거나 더 강하다는 점만 빼면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성들도 선발해서 그러한 남성들과 함께 거주하고 함께 수호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하고 본성상 그런 남성들과 동류συγγενής이기 때문이다.(456a-b)

8) 결국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여성 수호자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부여하는 것이 본성에 어긋나지 않다는 데에 우리가 동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세운 것도 아니고 단순한 소원εὐχή 같은 것을 법으로 세운 것도 아니며 본성에 맞게 법을 세운 것이다.

9)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동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남성 수호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수호자로 두는 경우도 과연 최선일지가 동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즉 우리가 수립한 나라에서 앞서 말한 양육과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구두장이 기술을 교육받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나은 사람이듯이 여성의 경우도 같은 양육과 교육을 받은 여성이 여성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ς 나은ἀμείνων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수호자가 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렇듯 가능한 한 뛰어난 여성들과 남성들이 생기는 것보다 나라에 더 나은 일이 없으며 시가와 신체단련이 우리가 설명한 대로 이루어지는 한 그 일은 성취될 수가 있다.(456c-e) 요컨대 우리는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것’οὐ μόνον ἄρα δυνατὸν ἀλλὰ καὶ ἄριστον을 나라의 법으로 정한 것이다.

10) 그러므로 여성 수호자들은 의복 대신에 덕ἀρετὴ을 몸에 두른 것이므로 옷은 벗어야 하고 전쟁과 그 밖의 나라 수호 일을 함께해야 하며 다른 일은 하지 말아야 하되, 다만 여성이 더 약하니까 그런 일 중에 더 가벼운 일을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부과해야 한다. 최선βέλτιστος의 것을 위해서 옷을 벗고 신체단련을 하는 여성들에 대해 웃는 남성은 자신이 무엇을 두고 웃는 것인지도 또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전혀 모르는 자이다. 실로 ‘이로운 것은 아름답고 해로운 것은 추하다’τὸ μὲν ὠφέλιμον καλόν, τὸ δὲ βλαβερὸν αἰσχρόν.

11)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수호자φύλαξ들과 여성수호자φυλακίς들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 과정을 우리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κῦμα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맞이할 파도들 중 첫 번째 파도를 이제 넘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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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451c 남성 공연과 여성 공연의 비유는 이후에 언급되는 여성 수호자에 관한 내용이 앞서 언급한 남성 수호자에 관한 내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표현된 ‘처자의 공유’라는 말 또한 남녀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수호자 계급에서 ‘배우자와 아이들의 공유’가 될 것이다.

* 2)에서 452d-e : 이 부분에서 노인들의 경우는 스파르타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나이 들어서까지 전사로서 레슬링 훈련을 계속했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편견에 기초한 관습들은 객관적인 경험들과 이치에 맞는 논변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좋고 나쁨은 오직 이치에 기초해서만 판정되어야 한다. 눈으로 보면 여성 수호자들 역시 옷을 벗고 있지만, 이치에 기초해보면 그들은 다만 덕을 두르고 있는 것이다.

* 2) 452d ‘나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 모든 것들이 좋은 것 나쁜 것들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소피스트들은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늘 중간의 것들 무규정적인 것들이 있다. 무규정적인 것들은 다만 정도 차이만 가질 뿐 서로 다른 것들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고 나쁜 것으로 여기거나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 3)의 i)- iv)는 대화가 아닌 쟁론에 기초한 반박이다. 이러한 반박술은 논의 대상을 종류에 따라 나누어 고찰하지 않고 종류상 서로 다른 본성의 것임에도 표현 자체에 매달려 그것을 동일한 본성으로 여겨 모든 측면에다 다 갖다 붙여서 적용하는 경우이다. 오늘날 오류론에 입각해서 보면 생물학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논점 일탈의 오류 내지 유추의 오류이자 특정한 사례를 기준으로 모든 사례가 그렇다고 일반화하는 부당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오류들은 쟁론을 일삼던 당대 소피스트들의 궤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오류들이다. 이곳 논의에서 쟁론이 아닌 대화로 평가될 수 있는 경우는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는 쟁론과 대화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 6)에서 뜨개질이나 빵 굽는 일, 채소 삶는 일은 소크라테스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나누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다만 우연적 요소에 불과하다. 플라톤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 짓는 본질적인 요소는 적성이다. 그리고 적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5)의 i) – iii)에 기초해야 하며 그 기준에 기초하는 한 남성과 여성의 적성은 동일하다.

* 9)에서 456c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것’ : 남녀의 평등과 차이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는 전혀 경직되어 있지 않고 유연하다. 양성의 역할을 비교하면서 예외적인 경우가 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의 진리에 부합하는 본질적인 경우인지 우연적인 경우인지를 가려,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흔들림 없이 견지한다. 여성 수호자가 가능한 것도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세우는 법과 기준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kata physin) ‘가능한 것들이자 최선의 것들’이다. 이것은 인류 지성사를 통해 양성평등의 자연법적 기초가 플라톤에 의해 처음으로 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끝>

* 다음 회 : 2.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 451c-457b)에 대한 세부 해설


 

플라톤의 <국가> 강해 (5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2)

 

  1.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441c-444a]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정의를 마무리하면서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τὰ αὐτὰ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ἴσα τὸν ἀριθμόν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그가 말하는 개인의 정의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가 지혜로웠던 방식으로 나라를 지혜롭게 했던 것에 의해서, 개인ἰδιώτης 역시 지혜롭다σοφός.(441c) 그리고 개개인을 용기 있게 하는 그것에 의해서, 그리고 개개인이 용기 있는 방식으로, 나라 역시 용기 있다. 절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개인 또한 나라가 정의로웠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의롭다.(441d)

2) 나라의 세 부류들 각 부류가 자기 것을 함으로써 나라가 정의롭듯이 개인도 ‘자기 안에 있는 것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게 되면’ἕκαστον τῶν ἐν αὐτῷ πράττῃ, 그런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자 자신의 것을 하는 사람이다.(441d) 그러므로 이성 부분λογιστικόν이 다스리고 기개 부분θυμοειδής은 그 부분에 순종하고 그것의 동맹군σύμμαχος이 되는 것이 적절하다ἐπιθυμητικόν.(441e)

3)우리가 말했던 대로(411e-412a)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ῆ의 혼합κρᾶσις이 그것들을 조화롭게σύμφωνος 만든다. 그 한 부분은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배움으로 고조시키며ἐπιτείνουσα 키우고, 다른 하나는 화음ἁρμονίᾳ과 장단ῥυθμός으로 풀어주고ἀνιεῖσα 달래서παραμυθουμένη 길들인다ἡμεροῦσα.(441e-442a)

4) 이성적 부분은 본성적으로 돈에 대해 가장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 부분ἐπιθυμητικόν을 제어하고,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져 자신의 것을 하지 않고 부적절하게도 다른 둘을 노예로 삼아 다스리고καταδουλώσα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는 일ἀνάτρεψις이 없도록 감시한다τηρήσετον.(442a)

5) 이성 부분은 숙고를 하고 기개 부분은 다스리는 부분을 따르며 숙고된 바를 용기를 가지고 이행하며 싸운다. 개인을 용기 있다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부분μέρος 때문이다(442b). 이성이 지시한 대로 기개 부분은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한다.(442c)

6) 개인의 경우 지혜롭다는 것은 이성 부분이 세 부분 각각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ὅλῳ τῷ κοινῷ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441c)

7) 개인이 절제 있다고 부르는 것은 영혼 각 부분들의 우애φιλίᾳ와 화합 συμφωνίᾳ 즉 이성 부분이 다스려야 한다는 데 대해 다스림을 받는 두 부분과 다스리는 부분이 믿음을 같이 하고 그것을 거슬러 내분στάσις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이다.(442c-d)

8) 개인이 정의로운 것도 나라가 정의로운 것과 같은 방식이다.(442d) 아래와 같은 일상의 사례들을 적용해보더라도 그렇다. 나라와 본성이 유사하게 태어나고 유사하도록 양육된 사람은 재화를 떼어먹거나 신전 약탈ἱεροσυλία이나 도둑질κλοπή, 또는 사적으로는ἰδίᾳ 동료들을 공적으로는δημοσίᾳ 나라를 배신하는 것 같은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442e-a) 게다가 그것은 간통μοιχεία이나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442a)

9)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그의 안에 있는 부분들 각각이 다스림과 다스림을 받음과 관련하여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이와 같은 사람들과 나라들을 만들어내는 힘δύναμις이다. (443b) 이로써 정의의 어떤 단초ἀρχή와 원형τύπος에 발을 들여 놓은 것ἐμβεβηκέναι 같다는 꿈(433a)이 완전히 이루어졌다κινδυνεύομεν.

10) 그런데 그것은 사실 정의의 어떤 영상εἴδωλόν이었다. 본성상 신발 만드는 것이 적성인 사람은 신발 만드는 일σκυτοτομική을 목수인 자는 목수 일τεκτονικἡ을 하는 것 그런 어떤 것이 정의이기는 하지만, 사실 정의는 외적인 행위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된 것πρᾶξις τῶν αὑτοῦ περὶ τὴν ἐντός이다.(443c-d)

11) 이처럼 개인의 정의는 영혼 안에 있는 부류들이 서로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가다듬고θέμενον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ἄρξαντα 조율하여συναρμόσαντα 자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것, 즉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νεάτη, 상현음ὑπάτη, 중현음μέση들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 조화ἁρμονία를 이루는 것이다.(443c)

12) 그리고 설사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들ἄλλα ἄττα μεταξὺ이 있더라도, 정의로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한 데 묶고 여럿으로부터 전적으로 하나를 이루어 절제와 조화를 이룬다.(443e)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어떤 행동을 할 때이든 이 모든 경우에 이 상태를 보존하고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다.(443e) 이 행위를 관장하는ἐπιστατοῦσαν 앎ἐπιστήμη이 지혜σοφία인 반면, 이 상태를 그때그때 와해λύη시킬 수도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이 행위를 관장하는 믿음δόξα은 무지ἀμαθία이다.(443e-444a) 이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로운 나라,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ηὑρηκέναι.(44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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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1)과 2)(441c-442a)와 앞서의 논의(434c-441c)에 한정해서 나라의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에 상응하는 개인 영혼의 이성적 부분, 기개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성격을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이성적 부분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한다.(439c-d)

영혼을 다스린다.(441e) 숙고를 한다.(442b) 욕구 부분을 제어하고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져 다른 둘을 노예로 삼아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지 못하도록 감시한다.(442a)

2) 기개적 부분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낸다.(440b)

이성 부분에 순종하며 숙고된 바를 용기를 가지고 이행하며 싸운다.(442b)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에 대한 이성의 지시를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전한다.(442c)

3) 욕구적 부분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하는 것, 일종의 만족과 쾌락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다.(439c-d)

욕구들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 즉 마실 것에 대한 욕구와 먹을 것에 대한 욕구이다.(437d-e)

본성적으로 돈에 대해 가장 만족할 줄 모른다.(442a)

* 나라에 있는 덕들과 동일한 덕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고 수적으로도 같다는 언급(441c)과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덕을 갖고 있다는 이곳 1)과 2)의 언급만(441c-442a)을 토대로 나라와 개인 간의 유비적 관계를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a) 나라의 덕목과 상응하는 개인의 덕목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가 되면 그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영혼을 다스리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441d)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가 되면 그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이 이성적 부분을 보조하고 순종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441d)

모든 나라 구성원들이 절제로써 믿음을 같이 하면 절제 있는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각 부분이 절제로써 이성 부분을 믿고 따르면 그 사람들은 다 절제 있는 사람이 된다.(441d)

모든 나라 구성원들이 통치자의 지배에 따라 각자 자신의 것, 자신에 속한 것을 할 때 정의로운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각 부분이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각각 자신의 것을 할 때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441e)

  1. b) 지혜로운 개인

개인의 경우 지혜롭다는 것은 이성 부분이 세 부분 각각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441c)

c). 용기 있는 개인

개인을 용기 있다고 부르는 것은 이성이 지시한 대로 기개 부분은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하기 때문이다.(442c-d)

  1. d) 절제 있는 절제

개인이 절제 있다고 부르는 것은 영혼 각 부분들의 우애와 화합 즉 이성 부분이 다스려야 한다는 데 대해 다스림을 받는 부분과 다스리는 부분이 믿음을 같이 하고 그 믿음을 거슬러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이다.(442c-d)

  1. e) 정의로운 개인

외적인 행위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 그것은 사실 정의의 어떤 영상eidōlon이다. 정의는 그렇게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443c-d)

영혼 안에 있는 부류들이 서로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가다듬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조율하여 자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것, 즉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 상현음, 중현음들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443d)

  1. f) 정의로운 행위

정의로운 행위들의 원인은 영혼의 부분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나라의 계층 내지 영혼의 부분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게 만드는 힘dynamis이다.(443b)

어떤 행동을 할 때 영혼의 절제와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며 그 행위를 관장하는 앎이 지혜인 반면 이 상태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이 행위를 관장하는 믿음은 무지이다.(444a)

* 위의 글 3)(441e-442a)에서 ‘그 한 부분’과 ‘다른 하나’는 각기 시가와 신체단련을 가리키는데 실제 이어지는 그 역할에 대한 설명은 모두 시가의 역할이라는 지적이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러나 신체 단련도 결국 ‘영혼을 위해 있는 것’(410c)이고 ‘시가와 신체 단련의 혼합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영혼에 적용된 상태’가 ‘가장 시가에 능한’ 상태(412a)임을 고려하면 신체 단련도 마치 율동처럼 화음과 장단이라는 시가적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글 4)는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질 경우 나머지 부분들을 노예로 삼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욕구 부분은 능동적으로 지배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이성 부분이 병이 들었어도 욕구 부분은 이성 부분에 따른다. 다만 그때 이성 부분은 병이 든 상태이므로 욕구 부분을 제어하는 쪽이 아니라 반대로 그 욕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상태는 곧 이어서(444b) 언급되듯이 부정의한 영혼의 상태이다.

* 위의 글 8)은 당대 아테네에서 정의롭지 못한 행위들의 대표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부모 봉양 등 동양의 전통 윤리와도 별 차이가 없다는 것도 흥미롭다.

* 위의 글 9) : 플라톤에서 정의를 비롯한 지혜, 용기, 절제 등 제반 덕들은 앎인 동시에 실천을 담보하는 힘 즉 실행 능력이다.

* 위의 글 10)에서 플라톤은 외적인 정의로운 행위들을 정의의 어떤 영상eidōlon으로 언급한다. 이 영상이 의미하는 것은 통상 플라톤의 보편적인 정의(定義)가 통상 구체적 사례들이 아니라 본질 차원에서 규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상과 그림자라는 관계에서 그림자 내지 구체적 사례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언급의 초점은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라기보다는 개인의 정의를 외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규정하지 않고 영혼의 내적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로 보자면 전자 즉 외적 행위는 정의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후자 즉 영혼의 내적 상태가 정의의 실상이라 하겠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 윤리학의 고유성이 드러난다. 개인에게 있어 정의와 선은 외적인 행위 이전에 내면의 영혼 상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플라톤의 입장은 도덕 심리학의 혁명적 선구이자 오늘날 덕의 윤리학의 뿌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글 11)에서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 상현음, 중현음 : 그리스 음악의 화음체계에서 음계의 구성은 4개음으로 이루어져 완전4도가 되는 테트라코드(tetrqachord) 2개가 이어져 만들어진다. 이중 가운데 위치한 음을 중현음(mesē), 가장 낮은 음을 하현음(hypatē), 가장 높은 음을 상현음(neatē 또는 nētē)이라고 불렀다.

* 위의 글 12)에서 ‘설사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들이 있더라도’ : 세 가지 기본음을 나라와 영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경우, 이 표현은 나라와 개인 영혼의 세 계층들 사이에도 어떤 다른 계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기본음은 화음의 기본음이고 하나의 음악에 그 밖의 음들도 수없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똑같이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 표현의 강조점은 정의는 어떠한 다양성의 경우라도 하나를 이루어 절제와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 위의 글 12)에서 앎epistēmē과 믿음doxa, 지혜sophia와 무지amathia가 대비되고 있는데 특히 <국가>에서 앎과 믿음이 동시에 대비되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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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플라톤은 덕들과 관련하여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숫자로 유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언급은 앞서 언급한 내용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명 상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우선 앞서 나라의 덕을 논하던 부분에서는(427d-445c) 분명 지혜의 덕은 통치자의 고유한 덕으로, 용기의 덕은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 절제의 덕은 모든 계층 공통의 덕으로 그리고 그러한 덕들을 서로 조화롭게 만드는 덕은 정의로 각기 언급되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통치자는 지혜, 용기, 절제의 덕 모두를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의 덕을,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갖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곳 개인의 덕을 논하는 부분에 와서는 나라가 갖고 있는 덕들과 동일한 것이 같은 수로 개인에게도 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개인 역시 나라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4개 덕을 갖고 있듯이 개인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4개 덕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르게 언급하고 있을까? 그것은 앞서 통치자의 덕들에 대한 논의 부분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발생적인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다. 즉, 플라톤은 통치자의 출현에 맞추어 통치자의 덕을 언급하면서 논의 순서에서 통치자가 아직 철학자라는 점이 살펴지기 이전임을 고려하여 일단 그렇게 한정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라의 부분들과 개인 영혼의 부분들이 어떻게 유비적으로 상응하는지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일단 나라의 세 계층과 영혼의 세 부분이 서로 상응하는 것이라면 통치자 계층은 이성 부분, 수호자 계층은 기개 부분, 생산자 계층은 욕구 부분에 서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상응한다고 해서 통치자 계층의 영혼은 이성 부분만 있고, 수호자 계층의 영혼은 기개 부분만 있으며, 생산자 계층의 영혼은 욕구 부분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 자신 모든 사람의 영혼은 누구나 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영혼 3분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그 누구든 그들의 영혼은 모두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똑같이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와 개인 간의 유비는 실제로 어떤 관계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일까?

* 설명을 위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경우를 살펴보자. 플라톤에 따르면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모두 그들 자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장 잘 발휘했을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들 자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장 잘 발휘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 내부의 영혼들이 그들 고유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도록 최상의 조건으로 조직화되었다는 것 즉 서로 최상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통치자의 영혼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 최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이성 부분의 주도하에 통치에 관한 지혜가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고, 수호자의 영혼은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수호에 관한 용기가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며, 생산자의 영혼은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각자 욕구와 소질에 맞는 생산 기술 능력이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모두는 각각 가장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를 이루되 통치자는 이성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수호자는 기개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생산자는 생산력으로서 욕구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나머지 부분들과 조화를 구현하면서 각기 정의로운 개인이 되고 그러한 개인들이 정의로운 나라의 정의로운 시민이 되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의 상태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내적 능력 즉 덕을 최대한 발휘하여 구현한 상태라면 그들 계층 각각은 그리고 그들의 내적 영혼의 부분들 각각은 공히 지혜와 용기와 절제 그리고 정의의 덕을 구유한 것이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영혼을 간직한 개인 역시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라는 4개 덕을 갖춘 개인이 되는 것이다. 다만 서로 간에 차이가 있다면 통치자는 나랏일 전체를 다스리는 지혜의 덕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고, 수호자는 통치자를 도와 나라를 수호하는 용기의 덕이 통치자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사람이며, 생산자는 통치자와 수호자와 더불어 공히 뛰어난 절제의 덕을 바탕으로 최소한 각자의 기술 영역에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은 모두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을 갖추고 있고 또 모두가 정의의 덕을 통해 각자의 일을 최선으로 수행하면서 계층 간 영혼의 부분들 간의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과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최고의 클래식 성악가와 트로트 가수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각자 자기가 가장 잘하는 영역에서 최상의 조화로운 음악을 구현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음과 소리의 성격 내지 그것들의 조화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 이렇듯 정의로운 나라의 개인들은 모두 자신의 고유한 역할 수행을 통해 정의로운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두 정의로운 사람이고 나아가 각자 나름대로 최상의 영혼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행복하며 그 행복감의 크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적성과 소질에 따라 구현된 최상의 조화인 한, 서로의 역할에 대한 질투나 선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랏일을 기준해서 보면 그들의 역할이 갖는 중요도의 차이만큼 그들의 조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 질 수 있다. 이를테면 통치자이자 철학자의 경우 오랜 동안의 철학 교육을 이수해온 데다가 나랏일에서 가장 중차대하다고 여겨지는 통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인 만큼, 그들의 영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을 동반한 가장 고매하고 품격 있는 수준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의 앎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정의로운 나라는 분업에 기초한 협동적 공동체로서, 통치자의 앎뿐만이 아니라 수호자, 생산자 모두의 앎이 최소한 각기 자기 기술 영역에서 만큼은 최고의 앎의 상태로 조화롭게 결합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인간 본성의 다양성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른 적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인간 본성론과 관련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국가>에서도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랏일과 관련한 역할을 기준으로 크게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구분한 것도 그러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론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장이 그러하다 해도 생산자 계층을 제외한 통치자, 수호자 계층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을 고려하면, 본성을 세 그룹 정도로 구분하는 것만으로 과연 자신이 내세우는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까 의심이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세 그룹 중 생산자 계층이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이 정작 인간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적성과 소질들을 거론할 때 인용하는 사례들을 보면 통치 기술과 전투 기술뿐만이 아니라 농사기술, 제화술, 의술, 조타술, 목공술 등 생산자들이 갖는 다종다양한 기술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각기 다른 자연적 본성에 따라 사회 계층을 크게 세 계층으로 구분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세부적으로는 이상 국가 구성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들 또한 내적으로 서로 다른 본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플라톤은 생산자들 각자의 실질적인 욕망 또한 비록 그들 욕망이 대부분 돈으로 충족된다.(442a)는 점에서 돈을 좋아 하는 부류로 단순화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질적 욕구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종다양한 적성들과 소질들 즉 각기 다른 다양한 욕망들을 갖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오늘날 어린 시절 우리들 모두 장래 희망하는 직업이 다종다양하게 서로 달랐다가 성장하면서 당대의 외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거의가 비슷한 직군들을 선망하게 됨을 되돌아보면 플라톤의 견해가 오히려 자연적 본성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들의 이와 같은 다양하고 고유한 욕망에 기초하여 분업적 사회 공동체에서 각자 그에 걸맞는 고유한 역할을 최선으로 수행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 각자의 적성과 소질에 합당한 양육과 교육을 설계하고 그것의 이행을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국가는 말 그대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이상적인 나라인 것이다.

 

[444a-445d]

* 소크라테스는 이상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에 대한 논의의 대장정을 모두 마무리 한다. 그러나 애초 논의 목적으로 상정된 부정의한 나라 및 개인들과 비교해보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그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우선 부정의ἀδικία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살펴보려 한다.(444a) 이에 관해 이곳에서 그가 펼친 논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부정의란 이 세 부분들의 내분στασις이며 참견πολυπραγμοσύνη이고, 남의 일에 대한 간섭ἀλλοτριοπραγμοσύνη이며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ἐπανάστασις이다.(444b)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하는 것δουλεύειν이 적합한 그런 성향φύσις의 부분이 영혼 안에서 벌이는 반란이다. 부정의는 영혼 안의 부분들의 혼란ταραχή과 방황πλάνη이며 방종ἀκολασία이고 비겁δειλία이며 무지ἀμαθία 즉 일체의 악덕κακία이다.(444b)

2) 그렇다면 부정의한 행위와 정의로운 행위가 무엇인지도 명확하다. 이것들이 영혼 안에서 하는 작용은 건강한 것들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이 몸 안에서 하는 작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 건강한 것들은 건강ὑγίεια을 생기게 하고,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병νόσος을 생기게 한다.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 역시 정의를 생기게 하고, 부정의한 일은 하는 것은 부정의를 생기게 한다.(444c)

3) 건강을 생기게 함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본성에 맞게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도록 확립하는 것인 반면, 병을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확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의를 생기게 함은 영혼 안에 있는 것들을 본성에 맞게κατὰ φύσιν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게 확립하는 것인 반면, 부정의를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παρὰ φύσιν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445d)

4) 덕ἀρετὴ은 일종의 영혼의 건강이고 아름다움이며 좋은 상태’ἀρετὴ ὑγίειά τέ τις ἂν εἴη καὶκάλλος καὶ εὐεξία ψυχῆς인 반면, ‘악덕은 질병이며 추함이고 허약함’κακία νόσος τε καὶ αἶσχος καὶ ἀσθένεια이다. 아름다운 활동τὰ καλ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은 또한 덕ἀρετῆ의 획득κτῆσις으로 이끌고 추한 활동τὰ αἰσχρὰ은 악덕 κακία의 획득으로 이끈다.(444e)

5)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의롭게 행하는 것, 아름다운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인 것이 이득이 되는지λυσιτελεῖ 아니면 부정의한 사람인 것이 이득이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445a)

6) 글라우콘은 그 두 가지 각각이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왔던 그런 것들임이 드러난 마당에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더라도 우리가 여기까지 왔으니 기운을 잃지 말고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445b)

7) 덕은 한 가지ἓν 유형이지만 악덕은 무한하며 ἄπειρα 그중 기억해 둘 만한 것들(악덕)은 네 유형이다.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몇 종류τρόπος이든 영혼의 종류도 그만큼이 있다.(445c) 이에 따라 정치체제가 다섯πέντε 종류이듯, 영혼도 다섯 종류이다.(445d)”

8)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왔던 정치체제는 한 종류이지만 이름은 둘이 붙을 수 있다. 다스리는 사람들 사이에 특출한 사람이 한 사람이면 왕정βασιλεία이라 부르고 여러 사람인 경우에는 최선자(最善者)정체ἀριστοκρατία라 부른다. 이것은 모두 한 유형ἓν εἶδος이다. 다스리는 사람이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온 양육τροφῇ과 교육τροφῇ을 실행하는 경우에는 나라의 중요한 법을 흔드는 일은 없다.(44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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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의 글 1)에서 ‘부정의란 ..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 : 부정의에 대한 이곳에서의 언급은 앞서 (442a) ‘욕구 부분이 다른 부분들을 노예로 삼는다.’는 말과 하나로 연관된다. 이곳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러한 상태를 ‘종노릇하기에 적합한 그런 성향의 부분이 영혼 안에서 벌이는 반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내용상 이성이 욕구의 도구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행위와 동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쨌거나 이성이다. 인간 행위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욕구의 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병이 들어 본래 모습을 상실하고 스스로 잘못된 방향인지도 모른 채 아니 그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 양 착각하고 능동적으로 욕구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 이른바 도구적 이성, 계산적 이성으로 전락한 것이다. 욕구의 측면에서 보면 욕구에 이성이 지배된 것으로 보이지만 애당초 욕구는 지배라는 의도적 목적을 가질 수 없는 그 자체로 맹목적인 힘이다. 플라톤에게서 구조상 영혼과 동일한 나라의 경우에도 반란은 생산자 계층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자 계층을 이용한 선동적 정치가들 내지 타락한 통치계층에 의해 저질러진다. 요컨대 부정의는 이렇게 이성이 병이 들었을 때 그 병든 이성이 능동적으로 초래하는 결과들 즉, 영혼 안의 부분들의 혼란과 방황이며 방종이고 비겁이며 무지, 즉 일체의 악덕이다. 20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재현되고 있다. 이성이 폭압적 권력을 비판하기는커녕 반대로 권력을 정당화하는 능동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이다. 일례로 나치 권력에 빌붙어 플라톤의 이름으로 나치즘을 극력 정당화한 프리데만(H. Friedemann)과 싱게르(K, Singer)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게오르그(S. Georg) 학파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플라톤을 폭압적 전체주의의 이론적 배후로 낙인찍히게 만든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이정호, ‘플라톤의 정치철학’,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 2017 참고)

* 위의 글 3), 4)에서 플라톤은 덕으로서 정의를 자연적 본성에 따른 영혼의 건강이자 좋은 상태로, 악덕으로서 부정의는 자연적 본성에 거스르는 질병으로 규정한다. 플라톤은 제2권 서두에서(357b-c) ‘좋은 것’을 아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i) 그 자체로 좋은 것 ii) 그 자체로도 좋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에서도 좋은 것 iii)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번째 것의 대표적인 경우로 건강을 들고 있다. 여기서 플라톤이 정의를 ‘건강’과 ‘아름다움’ 이자 ‘좋은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정의를 그 자체 때문에도 좋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즉 완전하고 영원한 조화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에 뿌리를 둔 객관적 원리이자 본성적 선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몸이 건강하면 편하고 몸이 질병에 걸렸을 경우 직각적으로 아프고 불편하다는 것을 안다. 플라톤이 보기에 부정의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질병에 걸리거나 몸이 다쳤음에도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미 그 자체로 터무니도 없고 가당치도 않은 것, 즉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한, 어떤 경우에서든 영혼의 조화 즉 마음의 평화를 이루어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건강이 그러하듯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서 사람들의 견해에 의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규정될 수 있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아직 증명된 것은 아니다. 제2권 서두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개의 논의 단계를 상정하였다. 우선 그것을 보다 잘 살핀다는 명분으로 대문자 비유를 통해 사람을 나라로 확대시켰고 그런 연후 정의로운 나라를 세워 그 나라가 어떤 덕들을 갖추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원래 논의 목적대로 나라에 대한 논의에서 개인 영혼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 개인에서도 나라와 같이 정의가 성립하고 나라의 덕과 동일한 덕이 개인의 영혼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함을 논증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그러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부정의한 나라와 부정의한 개인과 비교하여 그 중 어떤 나라와 개인이 그 자체로 좋고 결과에서도 이득이 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미 기본적인 결론을 내놓은 상태일지라도 글라우콘에게 그 둘을 비교하는 논의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이미 지금까지의 논의만 보더라도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다 드러난 마당에 그 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대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그러한 논의를 이어가려한다. 그리고 그 첫 단계로 정의로운 사람을 살필 때 사람을 나라로 확대해서 고찰했듯이 이곳에서도 부정의한 사람을 살핌에 앞서 우선 부정의한 나라 즉 부정의한 정치체제들부터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체제와 상반된 네 가지 유형의 부정의한 정치체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에 착수하게 된다.

* 위의 글 8), 9)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정치체제의 종류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체제로서 왕정 내지 최선자 정체를 포함하여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 등 다섯 가지 정치체제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여기서 이른바 왕정과 최선자 정체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사실 지난 강해(44)에서 플라톤의 철인왕정이 1인왕의 지배체제인가 다수 왕들에 대한 지배체제인가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철인왕의 숫자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핵심은 그 왕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몇 사람이건 어떤 양육과 교육을 받았는가 즉 그들이 과연 진정한 철학자인가 아닌 가에 있다. 다만 지난 번 강해에서 플라톤의 철인왕 정치체제를 일인 왕정이 아니라 실제로는 다수 철인왕의 정치체제 즉 최선자 정체라고 집중해서 강조한 것은 오늘날 플라톤의 철인왕정에 대한 인식이 이른바 일인 독재체제로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설사 통치자의 수를 문제 삼는다고 해도 <국가>나 <법률> 모두 통치 행위 주체를 표현할 경우 하나같이 복수의 통치자들로 표현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어쨌거나 핵심은 통치자의 수가 아니라 그가 철학자인가 아닌가 이다. <정치가>에서 한 사람의 철인왕정을 최상의 정치체제로 설정한 것 역시 정치가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통치자의 숫자를 정치체제 분류의 한 기준으로 삼은데 따라 제시된 것일 뿐 그곳에서도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올바른 정치가 즉 왕은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 최선자 정체의 그리스 원어 ‘aristokratia’는 보통 ‘귀족정’을 나타낸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은 철인왕정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정치체제를 내세우면서도 기존의 정치체제와 비교했을 때 그나마 자신의 정치체제가 일종의 ‘복수의 뛰어난 귀족 엘리트들에 의한 정치체제’에 가깝다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aristokratia’는 플라톤도 알고 있었을 통상의 귀족정과는 전혀 다른 그가 고유하게 제창한 정체제제 즉 말 그대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치체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통상의 귀족정과 구분하고 플라톤의 취지도 살려 그것을 원어의 말뜻 그대로 ‘최선자 정체’로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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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국가> 제4권의 논의가 끝을 맺는다. 이른바 이상 국가의 기본적인 얼개가 소개된 것이다. 그리고 분량 면에서도 <국가>가 크게 다섯 부분 즉 제1권, 제2권에서 제4권, 제5권에서 제7권, 제8권에서 9권, 제10권으로 구분된다면 전체 내용 중 5분의 2를 살핀 셈이다. 그런데 제4권의 끝부분이 보여주듯이 우리 모두 제5권에서는 당연히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논의가 다루어질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그 논의는 제5권이 아니라 제8권에 가서 이어진다. 대화상대자들이 논의 진행을 끊고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원래의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제5,6,7권에서 펼쳐진 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형식만 일탈일 뿐 실제로는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문학적 플롯에 따라 이상국가론을 철학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뒷받침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통상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난해한 철학적 주제로 평가되는 좋음의 이데아나 변증술의 문제를 비롯해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의 철학적 기초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곳이다. 더욱 힘을 내서 새로운 기운으로 제5권의 논의를 이어가기로 하자. – 제4권 끝-

* 다음 주제 :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실현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필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후 강해는 대략 한 달 간격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1.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1) 영혼의 세 부분(434c-441c)

 

[435b-439d]

* 소크라테스는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즉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라는 특성εἶδος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로운 나라를 닮았다면 개인의 경우도 자신의 영혼 안에 이와 동일한 부류εἶδος의 것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영혼 안에도 과연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를 살피기 시작한다.(435c)

*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처음에 사소한φαῦλος 문제라고 말을 했다가 글라우콘이 ‘아름다운 것들은 어렵다’χαλεπὰ τὰ καλά라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의 말에 수긍한다.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앞서 고찰했던 것 정도만큼의 방법으로 그 문제를 다루겠다고 말한다.(435d)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이 부분의 논의는 다소 장황할 정도로 441c까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의의 전개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에 있는 것과 똑같은 특성εἶδος과 성품ἦθος이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 각 나라는 서로 다른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의 특성과 성품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우리 지역의 경우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특성이 있고(435e) 페니키아 사람들과 이집트 지역 사람들의 경우에는 재물을 사랑하는 특성이 있다.

2) 하지만 우리가 이것들 각각을 동일한 것으로 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 가지가 있어서 각기 다른 것으로 각기 다른 것을 행하는지 어려운 문제이다.(436a)

3)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ὅτι ταὐτὸν τἀναντία ποιεῖν ἢ πάσχειν κατὰ ταὐτόν γε καὶ πρὸς ταὐτὸν οὐκ ἐθελήσει ἅμα 혹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다.(436b) 동일한 것이 동일한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436c) 팽이στρόβιλος가 동일한 곳에 그 끝을 고정하고 회전할 때, 전체가 정지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운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436d)그것들은 자신 속에 수직축과 원둘레를 가지고 있어서, 수직인 측면에서는 정지해 있는 것이고 원둘레의 측면에서는 둥글게 움직이는 것이다. 동일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436e)

4)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무언가를 얻기를 갈망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끌어당기는 것과 밀쳐내는 것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서로 반대되는ἐναντίος 것들이듯이, 욕구 일반ὅλως τὰς ἐπιθυμίας과 욕구하지 않음, 원함τὸ ἐθέλειν과 원치 않음, 바람τὸ βούλεσθαι과 바라지 않음, 영혼의 갈망과 밀쳐냄, 영혼의 끌어당김과 몰아냄 등 모두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437b-c)

5) 욕구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하나는 마실 것에 대한τὴν ποτοῦ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한τὴν ἐδωδῆς 욕구이다. 목마름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마실 것에 대한 욕구가 아니다. 목말라함 그 자체 αὐτὸ τὸ διψῆν는 그것의 본래 대상인 마실 거리 자체 αὐτοῦ πώματος 외의 다른 것에 대한 욕구가 결코 아니며, 배고파함τὸ πεινῆν과 먹을거리 βρώματος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욕구 자체는 그것의 본래 대상만을 대상으로 하고αὐτή γε ἡ ἐπιθυμία ἑκάστη αὐτοῦ μόνον ἑκάστου οὗ πέφυκεν, 특정한 종류의 이러저러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는 추가된 것들이 있을 때이다.(437d-e)

6)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τὰ μὲν ποιὰ ἄττα ποιοῦ τινός ἐστιν 반면,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τὰ δ᾽ αὐτὰ ἕκαστα αὐτοῦ ἑκάστου μόνον” (438a-b)

7) 앎ἐπιστήμη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다. 어떤 앎, 즉 어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앎이 집 짓는 일에 관련되었을 때, 그것은 건축술이라고 불린다.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것 역시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다.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이다. (438c-d)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것들의 경우에,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은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과 관련된 것이고 αὐτὰ μὲν μόνα αὐτῶν μόνων ἐστίν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것들과 관련된 것τῶν δὲ ποιῶν τινων ποιὰ ἄττα.이다. 예컨대 건강한 것과 병든 것과 관련되는 경우에 그 앎도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 되어 더 이상 단순히 앎이라고 부르지 않고 특정한 종류의 어떤 대상이 추가되어 의술이라고 부른다.(438e)

8) 목마름 자체는 많거나 적은, 좋거나 나쁜, 한마디로 말해 특정한 종류의 어떤 마실 거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439a) 그러므로 목말라하는 사람의 영혼은 그가 목말라 하는 한에서, 마시는 일 말고는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만약 무엇인가가 목말라 하는 영혼을 반대 방향으로 당긴다면, 목말라 하며 짐승처럼 그것을 마시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영혼 안에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439b)

9) 그런데 사람들이 목말라하면서도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들의 영혼 안에는 마시라고 시키는 것ὁ κελεύοντος도 있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τὸ κωλῦον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막는 것은 계산λογισμός으로부터 일어나고 반면에 데려가고 끌고 가는 것들은 그가 겪고 있는 일과 질병들에 의해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으로 계산하는 것’ τὸ ᾧ λογίζεται은 영혼 안에 있는 이성적인 것λογιστικόν이라 부르고, ‘그것으로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들뜨는 것’은 일종의 채워짐과 즐거움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것ἐπιθυμητικόν이라 부른다. 이것들은 영혼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유형εἶδος이다.(439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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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사소한paulos 문제라고 했다가 글라우콘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 말에 수긍한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504a-b에도 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다시 언급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길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수준의 길이 아니라 최대한 실재에 다가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적절한’(metriōs) 길임을 밝히고 있다. 즉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사소한’으로 번역된 paulos는 ‘쉽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이 말한 ‘어렵다’chalepa라는 말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그 문제를 사소하다고 한 까닭은 현재 논의 단계에서는 아직 실재에 관한 적절한 접근 방법으로서 변증술이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기존의 논의 방식과 수준에 따라 쉽게 다루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생각을 모른 채 자신의 수준에서 그 문제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원래 그 문제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그의 말에 수긍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선택한 기존의 논의 방법은 통상 소크라테스가 ‘그것이 무엇이냐?’ti esti의 문제를 다룰 때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대중들이 갖는 일상의 특수한 사례들이나 관념들이 갖는 한계들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도 논의는 욕구의 특정한 종류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욕구 자체로 다가간다.

* 1)에서 특성eidos : eidos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서 ‘형상’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곳의 eidos를 형상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이전이고 실제로 플라톤도 지금까지 이 말을 철학적인 전문 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사전적 의미(부류, 특성, 종류, 형태)로 사용해왔다는 점에서(부류-357c, 358a, 363e, 392a, 402c, 435c. 특성-432b,d, 435d. 종류-376e, 400a, 406c, 427a. 형태-397c, 433a) 여기서도 일단 ‘특성’으로 옮긴 것이다. 플라톤은 5권 476a에 가서 비로소 이 eidos를 그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용어로서 ‘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2)에서 ‘이것들’ : 사본에 따라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이 다르거나 애매하다. 스토바이오스의 수정제안을 받아들인 아담의 텍스트를 따르는 경우 ‘이것들’은 앞 문장에서 각 지역 사람들의 특성에 따른 행위들을 가리키거나 뒤에 나오는 ‘배우고 화내고 영양 섭취 등을 하는 행위들’을 가리킨다.(J. Adam 436a note 참고)

* 3)에서 ‘어려운 문제’ : 신체의 기능들은 서로 다른 신체의 부위들이 있어 그것들이 각기 고유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기능들은 과연 영혼 전체로 그 기능들을 수행하는 것인지 영혼도 신체의 부위처럼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 그 부분별로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립의 원리’를 토대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영혼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부분들 각기 서로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다.

* 3)에서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 : 소크라테스의 이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확립한 사고의 모순율(<형이상학> 1005b19)의 선구적인 언급으로서 무모순의 원리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언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언급 자체를 모순율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명제로 표명된 진술들에 적용되는 원리이지만 여기서 ‘반대되는 것들’로 언급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면 명제라기보다는 행위나 실재(entity)를 가리키고 모순 관계는 물론 반대 관계에 있는 것들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이 원리를 모순율(principle of contradiction)과 구분하여 ‘대립의 원리’(principle of opposition)라고 부른다.

* 3)에서 ‘동일한 것에 따라’kata tauton라는 말과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pros tauton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 논란이 있다. 모순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에는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라는 표현은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 말을 ‘동일한 것에 따라’와 중복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담은 ‘동일한 것에 따라’는 대립자의 원리가 적용되는 대상의 부분들과 관련된 기준이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는 적용되는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과 관계되는 기준이라고 주장한다.(J. Adam. note 참고)

* 6)에서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반면에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은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여러 사례를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말이다. 이를테면 ‘목마름’의 경우 특정 종류의 것들은 ‘뜨거운 것에 대한 목마름’, ‘많이 목마름’ 등 특정 정도나 특정 종류의 목마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차가운 것에 대한 목마름’, ‘적게 목마름’ 등으로 추가될 수 있다. 특정 종류의 목마름이 다양한 만큼 그 목마름의 대상으로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목마름’은 모든 사람의 욕구가 하나같이 ‘이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으로 똑같다는 점에서 결단코 다양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로운 것’ 역시 ‘더 큰 이로운 것’ ‘보다 작게 이로운 것’ 등으로 정도에 따라 다르게 추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목마름의 고유한 본래 대상은 이러 저러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이 아니라 ‘마실 거리 자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요컨대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되어 있다. ‘배고파함’과 ‘먹을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욕구를 특정 종류들이 아닌 ‘그 자체’로만 규정하려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대립의 원리’를 통해 또 다른 ‘그 자체’로서 반대의 욕구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비로소 영혼 안에 그 욕구와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7)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라고 말한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 종류의 대상에 대한 앎으로서 특정 기술이다. 그렇다면 특정 앎의 대상이 아닌 앎 자체의 고유한 대상으로서 그 대상 자체는 무엇일까? 아직까지 그것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나중에 그 대상 자체는 특정한 종류의 앎들을 앎으로서 규정해 주는 총체적인 앎의 본질로서 ‘형상’으로 드러난다.

* 8)에서 드디어 앞서 언급한 ‘대립의 원리’가 ‘목마름 자체가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적용되고 그것은 영혼의 부류들과 관련하여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지는가가 드러난다. 즉 영혼의 한 부류로서 목마름이라는 욕구는 그 욕구 이외에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영혼 안에 무엇인가가 짐승처럼 끌고 가는 그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우리들 모두는 비록 목이 말라 무엇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가득해도 만약에 그것을 마셨을 때 병이 나거나 죽는다면 분명 그것을 마시기를 주저하고 거부한다. 이것은 마시라고 시키는 것, 즉 목마름이라는 욕구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 즉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이 우리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자신의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혼 안에는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란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하는 영혼의 또 다른 어떤 부류로서 이른바 ‘이성적인 것’이다. 결국, 영혼 안에는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 이외에 그것과 구분되는 ‘이성적인 것’ 이 하나의 유형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439e-441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제3의 유형으로서 ‘기개적인 것’이 영혼 안에 따로 있음을 논증하고 그 특성에 관해 논의한다.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그런데 기개θύμος와 관련되며 ‘그것으로 우리가 분노하는 것’τὸ ᾧ θυμούμεθα이 있다. 이것은 앞의 것들 중 어느 한 유형과 본성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다른 세 번째 유형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분노의 예로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의 경우를 든다. 레온티오스는 사형집행인 옆에 있는 시체들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동시에 그러는 자신을 역겨워하면서 갈등하다(439e) 욕구에 지배된 자신에 대해 분노를 터트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 분노는 욕구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이고, 때때로 욕구적인 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πολεμεῖ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440a)

2)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λοιδοροῦντά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θυμούμενον,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이기라도 하듯 그의 기개는 이성의 동맹군이 된다.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는데도 그에 반대하여 기개가 욕구들과 결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440b)

3) 자신이 부정의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로 인해 굶주림이나 추위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품위 있는γενναῖος 사람일수록 분노는 덜하다. 반대로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부아가 끓고ζεῖ 사나워져서χαλεπαίνει 그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편과 동맹을 맺고συμμαχεῖ 갖은 힘든 일을 겪어도 그런 일들을 견디면서 이겨낼 것이고, 뜻을 이루거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아니면 목동νομεύς에 의해 개κύων들이 진정되듯 자신 곁에 있는 이성λόγος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정될 때까지 고귀하게γενναῖος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개들이 양치기ποιμήν에게 순종하듯이 보조자ἐπίκουρος들이 나라의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다. (440c-d)

4) 기개적인 것θυμοειδής과 관련해서 좀 전에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욕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영혼 안에 내분στάσις이 일어났을 때, 이성적인 것을 편들어 무기를 든다. 이것은 이성적인 것과도 다르고 욕구적인 것인 것과도 다른 제 삼의 것τρίτος이다. 나라가 돈벌이하는 집단χρηματιστικόν, 보조하는 집단 ἐπικουρητικόν, 숙고하는 집단βουλευτικόν, 이렇게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듯이 영혼에서도 이 기개적인 것이 나쁜 양육으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 한, 본래 이성적인 것을 보조하는 것으로 따로 있다. 이것은 욕구적인 것과도 이성 부분과도 다른 어떤 것이다. 그건 아이들παίδιον과 짐승들θηρίον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날 때부터 화θύμος로 가득 차 있지만, 계산 능력λογισμός은 제가 보기에 어떤 아이들은 결코 갖추지 못하고 대개의 아이들은 늦게서야 어느 땐가 갖추게 된다. 호메로스(<오뒷세이아> 20.17)도 서로 다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꾸짖는 상황, 즉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에 대해 계산을 한 부분이 비이성적으로 분노하는 부분을 꾸짖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440e-441b)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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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분노하는 것’ : 영혼의 부분에는 욕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이외에 제삼의 유형으로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 또한 대립의 원리에 의해 발견된다. 즉 기개적인 것은 레온티오스의 경우가 보여주듯 욕구적인 것의 발생을 막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욕구적인 것들에 분노하여 그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점에서 욕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욕구적인 것은 반성이나 주저함이 없이 그대로 그 욕구를 표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이성적이지만 기개적인 것은 비록 계산능력은 없어도 그러한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들과 싸우고 분노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의 동맹군이 된다.

* 레온티오스의 경우 그가 시체에서 성기를 보고 싶은 자신의 욕구에 분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레온티오스의 경우이건 호메로스가 묘사하고 있는 경우이건 그것들 모두는 기개적인 것이 인간의 본원적 자존심 내지 나름의 명예 의식과 깊숙이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들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지적 수준이나 성격적 특성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름의 자존심과 명예 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손상될 경우 예외 없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만큼 그것은 개인의 행위 동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2)에서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다’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인 것, 즉 영혼의 이성 부분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기개와 욕구는 이성의 통제를 받아들인다. 물론 기개와 욕구에 이성이 끌려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조차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함에도 기개와 욕구가 그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성 자체가 교육과 양육의 잘못으로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결코 기개가 욕구에 결탁하거나 욕구의 힘에 이성이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일시적인 내분, 즉 심리적 갈등은 있어도 이내 조절 통제된다.

* 3)에서 ‘분노는 덜하다’ ; 사람들은 때때로 부정의한 짓을 하다가 고통을 치른다. 그러나 품위 있는 사람일수록 그 고통을 정당하다 여겨 덜 분노한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누구나 하나같이 분노를 터트리며 정의로운 편과 동맹을 이루어 어떠한 고통도 잘 견디며 이겨낸다.

* 4)에서 ‘그건 아이들과 짐승들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 아이들과 짐승들의 경우에도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들과 동물들의 경우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빼앗기는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내거나 크게 울부짖는다.

*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은 이곳뿐만 아니라 581a-b에서 추가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그곳에서 기개적인 부분은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으로 언급된다. 이와 관련한 기개적인 것에 대한 추가적인 해설은 그 부분을 다룰 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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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서 살핀 영혼의 세 부분과 관련하여 종합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1) 인간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었다. 호메로스도 이미 노오스(noos)와 튀모스(thmos)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조차 그 마음의 작용을 이른바 영혼psychē으로 부르진 않았다. 호메로스 시절에 psychē라는 말은 다만 사람이 죽었을 때 몸에서 빠져나가 저승에서 그림자 비슷한 것으로 머무는 것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일리아스> 22.362) 물론 그때도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프쉬케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노오스, 튀모스, 메노스(menos) 등이 사용되었고 마음의 작용을 담당하는 주체도 횡경막이나 허파를 의미하는 phrenes이나 심장을 뜻하는 ker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이전 시절에는 인간의 마음 작용 자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침내 이전까지 단편적으로 논의되었던 인간의 마음 작용 일체에 대한 논의가 플라톤에 의해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져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성찰되기 시작했고 이후 영혼의 문제는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서양의 정신사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2) 그런데 플라톤이 마음의 작용 일체를 영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천착해 들어갔지만,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의한 것은 <국가>가 처음이다. 초기 대화편들에서도 영혼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그것의 부분들에 대한 논의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파이돈>에 와서 <국가>와 비슷한 종류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영혼과 신체의 대립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신체를 ‘신체적 욕구’로 표현하기도 한다.(66c) 플라톤이 당시 신체 자체도 욕구를 지닌다고 여겨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와 그곳의 논의를 함께 비교해보면 이 신체적 욕구는 내용상 <국가>에 나오는 영혼의 욕구 부분과 크게 차이가 없다. <국가>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혼의 세 부분이 최소한 영혼에 관한 이전 논의들의 발전적 결과들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플라톤 자신 사상적 원숙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다양한 마음 작용과 욕구의 특성들 일체를 신체가 아닌 영혼의 작용들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

3) 영혼의 세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최종적인 영혼의 상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영혼은 그러한 부분들의 유기적 복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영혼의 작용은 오늘날 뇌의 물질적 생리화학적인 작용의 종합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최소한 서로 다른 마음의 작용과 특성들이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플라톤의 발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 이곳에서 영혼의 부분들은 각기 계산하고 사유하는 기능, 화를 내는 기능, 욕구하는 기능 등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플라톤에게 영혼의 기능으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지각과 인식의 기능이다. 이러한 지각과 인식이 영혼 안에서 어떤 부분들의 어떤 상호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는 추후 살피게 되겠지만, 영혼의 이성 부분은 단순히 어떤 주어진 것에 대한 계산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사유와 인식 기능 전반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중에 가면 그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 욕구임이 밝혀진다.

5) 플라톤은 9권 580d에서 실제로 다음에 다룰 ‘기개적인 것’까지 모두를 욕구에 포함하여 욕구 또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목말라하며 마시라고 욕구를 부추기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시 그러한 욕구를 막으려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다. 그러니까 욕구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의 한 부류로서 ‘욕구적인 것’으로서 욕구가 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 안에는 각기 고유한 어떤 것을 바라고 원하는 ‘이성적인 것’으로서 욕구와 ‘기개적인 것’으로서 욕구도 함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곳에서 플라톤은 그것들 각각이 욕구인 한, 각각은 자신만의 특유한 즐거움도 하나씩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이성적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철학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욕구인 것이다. 이성은 단순히 주어진 것을 계산하고 지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는 이념이 있는 것이다.(580d-581e)

6)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인다.’는 말을 뜯어보면 영혼의 계산하는 부분과 화를 내는 부분, 욕구하는 부분이 서로 갈등도 하면서 행동의 동기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혼의 각 부분은 인간의 행위 동기의 원천이 된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인간의 행위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신체는 행위 동기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감각 자료를 제공하지만, 그것을 지각하고 행위의 동기로 촉발케 하는 것은 영혼이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영혼의 욕구 부분이나 기개 부분의 경우 분명 행위의 동기를 촉발하지만, 그곳에서 촉발된 동기들 자체가 곧바로 특정 행위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영혼의 부분들이 촉발한 동기들을 이성 부분이 모두 종합하여 자신의 욕구를 기준으로 계산한 연후에야 비로소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요컨대 영혼은 인간 행위 동기의 원천이되 그 동기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건강하면 아무런 흔들림 없이 다른 영혼의 부분에서 촉발된 동기들을 자기 주도로 통제하여 행위로써 표출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다른 동기들에 압도되어 이끌려가거나 반대로 그 동기들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7) 이점에서도 흔히들 ‘욕구적인 것’이 부도덕한 행위의 근본 동기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욕구적인 것’은 먹는 것, 마시는 것, 돈벌이 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 아니듯이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생산자 집단을 돈벌이 하는 집단으로 부르는 것 역시 폄하가 아니라 다만 생산자들이 고유하게 욕구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대부분 돈을 통해서 충족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581a 참고) 이렇듯 ‘욕구적인 것’은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맹목적으로 직진하듯 제 욕구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것은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할 경우 나라를 이롭게 하거나 도덕적인 행위를 생산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이성적인 것’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도구적 이성, 즉 도구적 계산능력으로 전락하여 욕구적인 것의 무분별한 표출을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더욱 악화시키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행위가 도덕과 부도덕이냐 하는 것은 ‘욕구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영혼의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8) 플라톤 철학에서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는 한, 욕구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거스르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이성을 정념이나 욕망의 노예로 파악하는 흄(D. Hume)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은 플라톤이 보기에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구조로 변질된 상태를 욕망의 자연적 상태로 착각하고 있는 단견일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플라톤 철학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다. 이렇듯 플라톤은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이성적 자아를 확립한 최초의 사상가이자 가장 강력한 주창자로 꼽힌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우주적 이성을 본질로 한 플라톤의 이성적 자아는 데카르트 이후 선한 우주의 소멸과 함께 오늘날 무도한 자본의 이성으로 전락하여 이른바 도구적 이성이 인간과 우주를 난도질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우주적 연대를 복원하는 길이 현대 사회의 뿌리 깊은 비참성을 극복하는 길이라면, 개인주의적 미시담론과 욕망론에 갇혀 플라톤을 고루하고도 순진한 이성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현대인들의 관념 속에 마치 진실인 양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간 욕망구조의 등질적 획일성을 감연히 깨부수는 것에 미래 철학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선한 우주와 인간 본성의 근원적 다양성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공동체적 연대와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위한 토대이자 동시에 플라톤 정치철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9) 플라톤에게 영혼의 세 부분의 기능은 나라의 세 부류의 역할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그 관점에서 앞의 경우는 나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 나라를 부정의하게 만드는 것은 생산자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교육과 양육에 실패한 통치자들의 잘못 때문이다.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제대로 역할을 하므로 설사 생산자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은 교정 할 수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이상 국가에서 생산자는 정치 역할을 모두 통치자에게 절제라는 믿음으로 위임했기 때문에 설사 교정 사항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돌아가며 통치를 맡는 통치자들의 몫이다. 물론 플라톤에 따르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면 이상 국가도 타락할 수 있다. 그런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이 금전욕으로 변질되어 생산자 욕구를 침해하게 되고 그에 따라 생산자들 역시 통치자와 수호자들에 대한 의심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물질적 금전욕으로 획일화되면서 배타적 이기심을 기초로 한 민주정이 출범하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정이 되면 생산자들 즉 대중들도 정치에 대한 욕구를 갖고 참여하게 되고 대중들의 뜻대로 그것이 선동에 의해서건 아니건 그들이 원하는 통치 권력이 세워지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분석한다.2

10) 현대인들은 이렇게 맞이한 민주정을 최선의 정체로 여기지만 플라톤은 민주정이 초래한 물질적 욕망의 획일화 자체가 또다시 기득권자들의 이권 증대의 토대로 이용되면서 종국적으로 민주정을 참주정체로 전락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당대 민주정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근본 이유는 민중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욕망의 획일화가 참주정의 모태인지도 모른 채 물질적 욕망을 모두의 자연적 본성인 양 부추겨 온 민주정의 선동가들과 시인들, 즉 당대 지식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물질적 욕망은 원래부터 대중들, 즉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대중들도 이제 생존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서 본래의 다원적 욕망구조는 이렇게 지배 엘리트들과 기득권자들의 타락을 기점으로 획일화된 물질적 욕망구조로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분석하고 천착한 당대의 정치적 현실상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의 분석과 성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최소한 우리는 플라톤이 평생에 걸쳐 비판하고 공격했던 핵심적인 대상이 왜 대중이 아니라 타락한 지식인들 즉 타락한 지배 엘리트들이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1) 정치적 책임은 정치적 권한을 가진 자의 몫이다. 그런데 이제 민주정체에서는 대중이 정치적 권한을 가졌으므로 책임 또한 대중이 가져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정의 타락 원인도 대중에게 돌려져야 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민주정 하에서 대중들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는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래서 플라톤도 당연히 민주정 아래 대중들의 무지를 비판한다. 그러나 대화편을 보면 아테네인들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공격은 기본적으로 대중보다는 지배 엘리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민주정에서조차 실제로 그 체제를 이끄는 주체가 대중이 아니라 선동정치가로 대표되는 지식인들과 기득권자들이라는 것을 궤 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대중들의 정치적 역할과 능력을 원천적으로 폄하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가 지니는 현실적 한계라는 점에서 플라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현실을 돌아보면 플라톤의 진단이 설득력을 얻는 징후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플라톤으로서는, 당대 아테네 민주정이 선동정치가들에게 장악되어있는 한, 정치체제 중 가장 참혹하고 폭력적인 참주정으로 전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통해 실천적인 정치인을 배출함과 동시에 당대 현실을 극복하는 장기적인 정치철학적 프로젝트로 당대의 시대적 조건에서 현실적으로 철학 교육의 수용에 가장 빠르고 유효한 소수 뛰어난 자들을 뽑아 오랜 기간 혹독한 수준의 철학 교육을 통해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담보하는 철인왕정을 꿈꾼 것이다. 그는 격동의 시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결국 고도의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갖춘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한,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평생의 사색을 담아 이상국가론을 펼치게 된 것이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오늘날의 시대 조건에서 보면 극히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의 정치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정치의 지성화와 자연의 본성으로서 욕망구조의 이질적 다양화라는 이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정치철학적 화두이자 푯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번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이 다시 태어나 오늘날 민주주의 현실에서는 철학자왕은 가히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대신 시민 대중들의 지성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대중에 대한 철학 교육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일로매진했을 것이다. 이미 기득권으로 찌들대로 찌든 지배 엘리트들을 각성시키기보다는 대중을 철학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 내지 변혁에 이르는 훨씬 더 가까운 지름길인 것이다.

 

* 441c에서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는 말은 나라에 있는 덕들 즉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개인의 영혼에서도 그에 상응하여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동일하게 있으며 그 세 부분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는 한,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 모두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에 상관없이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 또한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이상 국가 수립의 마지막 주제로서 마침내 개인의 주요 덕목들을 다루면서 정의로운 개인이 부정의한 개인보다 행복한지 다시 또 한 번 따져 묻는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㊿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2) 절제, 정의(430d-434c)

 

[430d-432a]

* 나라에서 알아보아야 할 덕으로서 절제σωφροσύνη와 모든 탐구의 목적이 되는 정의δικαιοσύνη가 남아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는 우선 절제부터 살피기로 한다.(430d) 소크라테스가 절제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순서대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절제는 앞의 것들보다는 일종의 화합συμφωνίᾳ과 조화ἁρμονίᾳ를 더 닮았다. 절제는 일종의 질서κόσμος이며 어떤 즐거움ἡδονή과 욕구ἐπιθυμία들의 제어ἐγκράτεια이다.

2) 사람들은 이 제어를 ‘자신보다 강하다’κρείττω αὑτοῦ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보다 강한 내가 보다 약한 나를 이기는 것으로 (430e)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τὸ βέλτιον이 ‘더 못한 부분’τὸ χεῖρον을 제어하는 것이다.

3) ‘자기 자신보다 약하다’ἥττω ἑαυτοῦ라는 표현은 나쁜 양육과 어떤 교제ὁμιλία 때문에 ‘더 못한 다수’χείρονος πλῆθος에 의해 ‘더 나은 소수’σμικρότερον τὸ βέλτιον의 부분이 지배되는κρατηθῇ 경우이며(431a)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방탕하다고ἀκόλαστος 부른다.

4) 요컨대 새로운 나라가 절제 있고 자신보다 강한 나라라면 그 나라는 나라에서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다스리는 나라이다.(431b)

5) 나라에는 자신들에게서 다종다양한 많은 욕구들과 쾌락ἡδονή과 고통λύπη들이 발견되는 사람들로서 아이들παισί과 여자γυνή와 가내 노예οἰκέτης 그리고 자유인ὁ ἐλεύθερος들 중 다수의 평범한φαῦλος 사람들이 있다.(431b)

6) 그리고 나라에는 또 지성νόος과 올바른 믿음ὀρθῆ δόξα을 동반하고 추론λογισμός에 의해 인도되는 단순하고도ἁπλός 균형 잡힌μέτριος 욕구들을,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431c)

7) 절제 있는 나라는 전자에 해당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들이 상대적으로 더 적은 수의 더 훌륭한ἐπιεικής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들과 그들의 현명함φρόνησις에 의해서 지배되는 나라이다.(431d)

8) 이처럼 절제 있는 나라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다스리는ἄρχουσ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ἀρχομένοις 자들이 똑같은 믿음δόξα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431e)

9) 그러므로 절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양쪽에 다 있다.(431e) 용기와 지혜는 제각기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 있지만, 절제는 나라 전체에 걸쳐 있으면서 현명함을 기준으로하든 완력ἰσχυρός을 기준으로 하든, 수πλῆθος든 재물χρῆμα이든 그밖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하든,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가장 강한 자들, 그리고 중간이 되는 자들이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하므로 일종의 조화와 닮았다.(432a)

10) 그러므로 절제는 ‘생각의 일치’ὁμόνοι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옮다. 즉 나라에서든 한 사람에서든 더 못한 것과 더 나은 것 중 어느 쪽이 다스려야 하는가를 두고 양쪽이 ‘본성에 맞는 화합을’κατὰ φύσιν συμφωνίαν 이루는 것이 절제이다(43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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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3)에서 ‘자기 자신보다 강하다’는 표현은 <법률> 626e에서도 여기와 같은 방식으로 나라에 비슷하게 적용되어 있다.

* 위의 글 5)에서 여자γυνή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나중에 여성도 수호자로서 철학적 지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견해와 상충된다. 이것도 다만 그러한 주장이 워낙에 파격적인 주장인데다 아직 제기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일단 여기서는 시대 통념에 따라 언급된 것이라 하겠다.

* 위의 글 6)에서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이라는 표현이 비로소 나오는데 이전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용기가 믿음이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은 바로 이 올바른 믿음을 가리킨다.

* 위의 글 7)에서 보듯 소크라테스는 현명함(phronēsis)을 지혜(sophia)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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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제로 옮긴 그리스어 sōphrosynē는 앞서 언급한 대로 지혜, 용기, 정의와 더불어 4주덕의 하나로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에서 분별과 사려를 갖춘 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 모종의 겸양과 염치, 자기 절제를 표현할 때 사용되어온 개념이다. 그리고 그 말이 군사용어로 쓰일 때는 중갑보병들이 방패와 창을 들고 전투 대형을 이룰 때 대오를 무너트리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하지 않도록 자신의 자리를 부단히 살펴 가며 지켜내려는 정신 상태 즉 자신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치열한 자기 인식과 실천을 의미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카르미데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도 그리고 여기에서 절제를 일종의 질서이자 즐거움과 욕구에 대한 제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절제에 대한 그러한 전통적인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389d 포함) 그러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절제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에서 출발하되 절제를 그가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에 걸맞은 덕목으로 새롭게 정립하려 한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자기 제어로서 절제를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것’으로 정립한 후 그것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즉 절제 있는 나라란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듣는 순간 벌써 거북함부터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 말은 지적 수준이 낮은 다수의 대중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서 그 분수에 맞게 지적 수준이 높은 소수의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인 양 들리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분수를 알라는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절제의 의미와 매우 상통하는 말이다. 다만 그 우리말이 통상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꾸짖거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책망할 때 쓴다는 점에서 거북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사회적 계층 어느 한쪽의 덕이 아니라 나라 구성원 모두의 덕이라고 말한다. 절제 있는 나라는 일방의 순종이 아니라 쌍방의 덕에 기초한 쌍방의 일치된 생각에 따라 세워진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우리말로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은 다수 대중뿐만이 아니라 소수 통치자에게도 함께 요구되는 덕목이다. 소수 통치자들도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통치자는 나랏일 전체를 잘 아는 능력은 있으나 여느 장인들처럼 집도 구두도 못 만들고 농사도 지을 줄 몰라 스스로 먹을 것, 입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통치자는 어떤 재산도 가질 수 없어 언감생심 시민의 재산을 탐하거나 빼앗아도 안 되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도 연애나 결혼조차 참아야 하고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꾸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역시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나랏일 전체를 알기 힘들고 외적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능력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나랏일 전체를 알고 외적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고 공익에만 힘쓰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지배를 맡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통치자나 시민들은 서로 자기의 분수를 아는 한,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사실을 똑같이 알아차린다. 절제를 일치된 생각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 그리고 ‘보다 낫다’와 ‘보다 높다’라는 우열의 차이도 모든 분야 어느 일방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열의 차이들은 지적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완력과 수, 재물, 일반 기술 등 모든 기준에 적용되어 경우에 따라 나은 자와 못한 자가 다르게 나타난다. 지적 능력과 완력은 소수 지배자들이 우월하지만 수와 재물에서는 시민 대중이 통치자들보다 우월하고 일반 기술 또한 뛰어나다. 그리고 그것들은 두 집단 상호간의 시기와 침탈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부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가장 강한 자들, 그리고 중간이 되는 자들이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조화와 닮았다. 물론 소수 통치자들의 권력이 갖는 막강한 위력을 고려하면 분명 이들의 관계는 위계적이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계적 구조를 불평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그러한 위계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면 정의로운 나라에서 위계는 다만 역할의 차이일 뿐 위계가 곧 차별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역할 상 중요한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소수의 통치자이건 다수의 평범한 시민이건 자신의 천성과 욕구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면서 그 역할의 성취를 통해 모두가 각자 행복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그들 모두는 차별 없이 동등하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는 서로 자기의 분수를 알고 충분히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만한 이유를 가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 좋다는 것에 합의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치된 생각으로 순전히 역할 분담의 차원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화합이자 조화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 요컨대 자기 제어로서 절제는 개인의 경우에는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것’이고 절제 있는 나라란 ‘나라 각 계층이 자기 제어를 통해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서로 일치된 견해 즉 똑같은 믿음을 지니는 나라’이다. 그리고 절제는 나라의 계층 내지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 제어를 통해 갖게 되는 똑같은 믿음이자 일치된 견해라는 점에서 특정 계층이나 개인에게 속한 덕이 아니라 모든 계층 모든 개인에 다 걸쳐있는 덕이다.

* 이처럼 정의로운 나라는 절제라는 앎을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나라이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근대 이후의 확고한 경험과 그러한 경험에 기초해서 확립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의 나라 사람들의 절제에 대한 믿음은 가히 무지할 정도로 소박하고 낙관적이다. 오늘날 권력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다. 20세기 이래 플라톤에게 가해진 수많은 비난에 여전히 설득력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절제 있는 나라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기 그지없다. 그 나라는 나라의 구성원들을 좀 더 나은 사람과 그보다 못한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차별하고 있으며 그것을 근거로 다수 평범한 대중들에 대한 소수 엘리트의 정치적 지배와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하고 있다. 모두가 절제를 통해 같은 믿음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정작 이곳에서는 지배자의 절제 내용은 거론되지 않고 반대로 다수 평범한 피지배자들인 대중에게 이성적 능력이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배자에 대한 의존과 존경을 절제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특히 통치자와 보조자로 구성되는 수호자 계층이 기본적으로 전사라는 점에서 보면 절제 있는 나라란 소수 엘리트 통치자들과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대중의 욕구가 강제로 통제되는 일종의 군사 독재국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배타적 이기심을 가진 개인들이 상호간의 안전과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성립된 사회계약론적 국가론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얼마나 무망(無望)하고 참담한 것인지에 대한 뼈저린 체험에서 비롯된 일종의 개인들의 배타적 이기심과 의심에 기초해서 성립된 체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지배자 계급과 피지배자 계급의 화합과 조화는 사회관계 자체가 개인적 이해관계의 총화인 한, 터무니없는 공상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형이상학적인 괴물에 불과하다.

* 플라톤의 나라뿐만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부와 권력 및 교육 수준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 두 나라 모두 그러한 차이들이 어떤 형태로건 불합리한 차별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나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플라톤은 우선 문제 영역마다 뛰어난 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정치 영역에서도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랏일이 갖는 규모의 크기와 중대성 그리고 공적인 특성상 그 정치 전문가는 고도의 전문성과 더불어 높은 도덕성이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일반 시민 대중들은 원천적으로 그 전문가에 포함될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뛰어난 자질과 소양을 갖춘 자들만이 정치가 즉 정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러한 정치가를 길러내기 위한 최소 30년 이상 장기간의 교육과 훈련, 공동생활 및 사적 소유의 금지 프로그램을 제도적으로 구축하고 그 혹독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만을 통치자로 선발하여 그들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층과 신분에 따라 부와 권력 및 교육 수준의 차이가 존재하고 영역과 사람에 따라 전문적인 문제 해결 능력도 분명 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정치적 문제 영역에서는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평가할만한 전문가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신분이나 출신, 학력과 경력을 내세워 능력 있는 정치 전문가로 자처하는 자들이 더 큰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경험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는 부와 권력 및 교육 그리고 전문 영역에 상관없이 모두의 참여가 보장된 선거를 통해 다수가 선택한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들을 통해 제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각성을 통해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발전과 진보를 이룩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다수 시민 대중들의 선택으로 정치적으로 참담하고 어두운 격변의 세월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선한 권력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시행착오를 통한 확실한 개선을 믿었으나 착오가 초래한 비극의 크기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나치 정권을 선택하고 광기 어린 지지를 보내며 유태인 학살에 침묵했던 사람들도 20세기 초 서구 유럽 민주주의 시대를 살던 시민 대중들이었고, 오늘날 소수 지배 엘리트들과 자본이 생산한 가치와 담론들을 마치 자신들의 가치 및 정치의식의 반영인 양 무비판으로 환호하며 반대 세력을 무차별 혐오하는 사람들도 현대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 대중들이다. 하물며 서구 유럽은 물론 선진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에서조차 인종주의와 배타적 국수주의로 무장한 극우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류 세력으로 나날이 득세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에는 그 수정을 위한 견제와 비판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촛불 혁명을 통한 정치적 변혁이 그것도 역사상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공적인 무혈혁명의 형태로 구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그러한 수정과 비판의 체계가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나라의 2016년 촛불 혁명도 그렇고 10여 년 전 튀니지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이른바 재스민 혁명 등 수많은 시민 저항 운동들 역시 얼마 안 돼 다시 반동화 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정치·사회적 변화를 담보하는 토대로서 교육조차 소수 기득권자에 의해 견고한 신분 재생산의 기지로 장악되어 있어 전망은 더욱 어둡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자본이 지배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자 형식 민주주의로 비판하는 까닭도 그곳에 있다. 소수 지배 권력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선택한 비판과 의심의 체계로서 민주주의 또한 전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절망감 이상으로 오늘날 큰 난관에 봉착해 있다. 게다가 그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황금처럼 보일 정도로 21세기 대명천지를 사는 오늘날에조차 플라톤 시대 참주정체처럼 정치적 의사결정 자체를 독점하고 시민들의 비판을 폭력으로 억누르며 폭압적인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들도 여전히 허다하다.

* 21세기가 당면한 이 모든 한계가 원천적으로 근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잉태한 왜곡된 국제질서와 냉전적 패권주의 그리고 그 이후 세계 경제를 주도해온 서구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이념의 하나로서 플라톤의 공동체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정치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플라톤은 당대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아테네의 제국주의 및 패권주의를 시종일관 비판하면서,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으로 획일화된 인간의 욕망 구조 자체가 변화되지 않는 한, 인간적 삶의 구현과 나라 간 평화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결국 좌절하고 마는 것임을 이미 2,500년 전부터 경고해왔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오늘날 다시 태어나 철학자 왕들의 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신 이른바 집단지성을 통한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연대를 목도한다면, 당연히 그는 변혁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교육을 통한 철학자 시민 계급의 등장과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일지도 모른다. 희망은 여전히 지성에 있다. 문명적 위기에 둘러싸인 혼돈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진보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망을 끊임없이 불태우는 일군의 깨어있는 시민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날 플라톤 정치철학의 의의는 다름 아니라 인간적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대중의 반성적 자기 인식을 통한 정치의 지성화’에 있다할 것이다.

 

 

[432b-434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정의를 살핀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정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우리 자신이 어떤 식으론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발 앞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그걸 보지 않고 어디 먼 데를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이다.(432b-432e)

*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처음에 나라를 세웠을 때부터 시종일관 관철해야 하는 것으로 정했으며 정의는 ‘그것 아니면 그것의 한 형태’ἤτοι τούτου τι εἶδος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εἰς ὃ αὐτοῦ ἡ φύσις ἐπιτηδειοτάτη πεφυκυῖα εἴη에 전념해야 한다.ἐπιτηδεύειν는 것이었음을 환기케 한 후에(433a) 정의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정의는 다른 많은 사람한테서 듣기도 했고, 우리 스스로도 자주 언급했듯이 정의는 ‘자신의 것을 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τὸ τὰ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 καὶ μὴ πολυπραγμονεῖν이다.(433a)

2) 정의는 지혜, 용기, 현명함이 나라에 생겨날 수 있게 하는 힘δύναμις이자 그것들이 보전σωτηρία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433b). ‘자신의 것을 함’τὸ τὰ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의 구현이 정의라고 함도 그 때문이다.(433b)

3)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가운데 어느 것이 나라를 좋게 만드는데 가장 기여하는 것인지는 가려내기 힘들다. 요컨대 정의는 나라의 덕과 관련하여 나라의 지혜와 절제와 용기에 필적한다.ἐνάμιλλος(433d)

4) 재판δίκη할 때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하는 것’ἕκαστοι μήτ᾽ ἔχωσι τἀλλότρια μήτε τῶν αὑτῶν στέρωνται이 재판의 목표이듯이 정의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행함’ἡ τοῦ οἰκείου τε καὶ ἑαυτοῦ ἕξις τε καὶ πρᾶξις이다(433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가 나라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을 경우 생기는 위험즉 부정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를테면 목수가 구두장이가 서로 도구와 지위를 바꾸거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한다면 그 정도는 나라에 큰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장인이거나 무슨 다른 돈벌이하는 사람이 어떤 것에 고무되어 다른 계층 내지 부류에 들어가려 들거나, 전사 중에 한 사람이 자격이 안 되는데도 숙고하는 수호자 부류에 들어가려 하거나 이들이 서로의 도구와 지위를 바꾸는 경우, 또는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는 경우 이들의 변화μεταβολὴ와 참견πολυπραγμοσύνη은 나라에 파멸ὄλεθρος을 가져온다.(434a-b) 요컨대 세 부류 상호간의 참견과 변화는 나라에 가장 큰 해악βλάβη이며, 아울러 그건 최대의 악행 κακουργία 즉 부정의ἀδικία이다.(434c) 그리고 반대로 돈벌이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부류, 보조하는ἐπικουρικός 부류, 수호하는φυλακικός 부류가 자신에게 속한 일을 하는 것, 즉 이들 각각이 나라에서 자신의 것을 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나라를 정의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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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우리 스스로도 자주 언급했듯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지금까지 정의를 그렇게 정의한 부분은 없다. ‘다른 많은 사람들한테서 듣기도 했다.’는 말도 433c에서 그렇듯이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의를 언급하는 것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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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소크라테스는 탐구의 최종 목적인 정의를 살핀다. 그런데 그는 정의가 처음에 나라를 세울 때 정했던 분업의 원칙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분업의 원칙은 여기서도 다시 언급되고 있듯이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이러한 분업의 원칙의 한 형태로서 규정한 후 우리가 이미 각 논의 단계에서 수차 언급한 대로 정의를 ‘자신의 것을 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지혜, 용기, 현명함이 나라에 생겨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그것이 온전하게 유지 보전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언급한다. 즉 정의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 일을 수행하는 것이 갖는 정당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줌으로써 통치자는 통치자답게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고, 수호자는 수호자답게 용기로써 나라를 수호할 수 있게 해주며, 통치자들과 수호자들 그리고 생산자들 모두 나라의 구성원들답게 절제로써 서로 화합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정의는 공동체로서 나라 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공적 책임감이자 동시에 영혼의 보살핌을 통해 개인들 각자가 누리는 자부심의 토대인 것이다. 이처럼 정의의 덕을 바탕으로 나라의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 역할에 맞게 지혜와 용기, 절제의 덕을 구현해 가는 나라 그 나라가 곧 정의로운 나라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이렇게 정의의 덕이 지혜, 용기, 절제를 각기 그것답게 뒷받침해주고 조화롭게 묶어주는 바탕이 되는 덕임에도 그러한 덕들 모두가 하나같이 나라 전체를 관통하고 결속하여 나라를 좋게 만드는 한, 어느 것이 선한 나라에 가장 기여하는 것인지 가려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 네 가지 덕들은 모두 서로에게 필적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통치자와 수호자 그리고 생산자 모두는 계층 차원에선 개인 차원에서건 자신의 덕과 영혼의 조화를 통해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경우 역할 상의 중요도는 있을지라도 그들 모두가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정의로운 사람임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비록 장수 한 사람이 병사 한 명보다 중요하고 통치자 한 사람이 장수 한 명보다 중요하지만, 그들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최선으로 수행하는 한, 그것이 결과하는 행복과 고통의 정도는 모두 동일하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개인들의 역량 차이에서 비롯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고유 역할의 일을 수행하는 한, 계층 간 개인 간 소질과 욕망의 차이 말고 그들 서로에 대한 차별이나 선망도 없으며 모두가 다 좋은 나라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하나같이 서로 평등하다.

* 어떤 주석가들(G. Ferrari 등)은 정의가 분업의 원칙의 한 형태라는 말에 주목하여 정의가 분업의 원칙과 달리 위계의 구조를 갖는다고 주장한다.(김영균(2008), <국가, 훌륭한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 149-150쪽 참고) 정의로운 나라를 성립시키는 역할 가운데 통치자의 역할이 갖는 중대성과 강제성을 고려하면 그들과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단순히 횡적인 분업적 동반자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라는 통치자를 정점으로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력적 위계구조를 유지할 때 단순한 분업적 상호 협동체를 넘어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맥을 정확히 들여다보면 정의는 ‘그것(분업의 원칙)이거나 그것의 한 형태(ētoi toutou ti eidos)’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정의와 분업의 원칙간의 차이보다는 동일함에 방점이 있는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의로운 나라에서 통치 역할의 중요도와 강제성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역할들 간의 차이를 위계적 차이로까지 차별해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배와 피지배라는 말 자체는 위계와 강제의 의미를 분명 포함하지만, 실제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보면 그들은 똑같이 정의의 덕을 통해 위계적 명령일지라도 자발적으로 그것을 수용하여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기초한 분업의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수행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은 위계적 권위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니는 정의의 덕을 토대로 상호 동등한 합의에 따라 지배자는 지배자답게 피지배자는 피지배자답게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자발적으로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지배와 피지배는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구분되어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이론적으로는 단지 통치 구조상 지시와 수행이 지니는 역할 상의 차이일 뿐 그 과정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누리는 자부심과 행복감의 차별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차별이 난무한 오늘날 사회 현실에서 보면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은 그야말로 환상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고 어떻게든 그러한 방향으로 변혁이 이끌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가히 그 희망을 견인하는 이상적인 푯대이자 꺼지지 않는 횃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상주의는 그렇게 난관의 벽 앞에서조차 변혁의 열망을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개입을 추동하면서 그 시행착오를 통해 실천적 변혁의 방안을 끊임없이 천착하게 만든다.

* 우리는 통상 정의를 논할 때 재판정에서 정의를 떠올린다. 재판정에서 정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재판정에서 정의는 개인의 권리 및 경제적인 소유의 배타적 보장 즉 기본적으로 소유권과 관련한 정의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소유권의 방어적 보장에 더해 자신의 내적 소신과 고유한 역할에 대한 적극적 실천을 추가한다. 즉 정의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그것의 행함’인 것이다(433e) 이것은 플라톤의 정의가 소유권의 배타적 보장을 넘어 타인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위한 영혼의 자기 돌봄이자 적극적인 도덕적 실천임을 의미한다.

* 절제가 ‘자기에게 속한 것을 행함’(<카르미데스> 161b)이자 자기 제어를 통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즉 자기 자신이 해야 할 바에 대한 앎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기서 ‘각자 자신의 것을 함’,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행함’으로 언급된 정의의 뜻과 거의 유사하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절제와 정의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J. Adam 430d note 참고) 그러나 절제가 자제와 신중함 등 다소 반성적인 앎의 성격을 지니는 것에 비해 정의는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인지하고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적극적인 앎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정의는 재판 등의 영역에서 법률적 기준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지만, 절제는 다분히 내면적 반성과 염치 등에 연관되어 있다. <카르미데스>에서 소년 카르미데스가 절제를 부끄러움(aidōs)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그것을 보여준다.(160e) 게다가 정의는 절제의 덕을 포괄하지만, 절제가 정의를 포괄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 소크라테스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서로 필적한 것임을 설명하는 국면에서(433c) 지금까지 다루어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1) 지혜 : 다스리는 자들의 현명함과 수호의 능력 2) 용기 : 어떤 것들이 무서운 것이고 어떤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적법한 믿음의 보전 3) 절제 :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사이의 ‘일치된 믿음’ὁμοδοξία 4) 정의 : 각자가 자신의 것을 행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 이 중 지혜는 통치자의 덕목이고 용기는 수호자의 덕목이고 절제는 생산자는 물론 통치자, 수호자 모두가 공히 갖고 있어야 할 덕목이다. 그런데 통치자는 수호자 가운데에서 뽑힌 자들이므로 당연히 용기를 덕목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지혜, 용기, 절제의 덕목 모두를 지니는 사람이고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를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당 논의 단계에서 각 계층이 갖는 주요 덕목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실제로 각 계층은 통치자들의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일정 정도 지혜, 용기, 절제를 모두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개인의 영혼을 다룰 때 누구를 막론하고 개인들은 영혼의 세 부분 즉 ‘이성’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을 갖고 있다고 언급하면서(영혼 3분설)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441c)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의 덕들이 개인의 영혼 부분들에도 있고 수적으로도 같다는 것은 나라의 세 계층 역시 개인의 세 영혼 부분처럼 지혜, 용기, 절제를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나라를 다루면서 지혜와 용기의 덕을 통치자와 수호자에 한정한 것은 논의 단계상 철학자로서 통치자와 수호자의 전모가 아직 드러나기 이전에 그냥 나랏일 전체를 다루는 정치가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데 따른 것이다. 용기의 경우는 시민적 용기로서 절제와 더불어 시민들도 갖고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으나 지혜의 경우 역시, 나랏일 전체에 대한 지혜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 일과 관련한 전체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 시민들도 일정 정도 지니는 것이다.

* 정의와 더불어 간단하나마 부정의에 대한 언급도 주어진다. 부정의는 부나 자기들의 수나 완력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에 고무되어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저버리고 다른 부류의 역할에 참견하거나 그 부류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나라에 가장 큰 해악을 미치는 행태는 통치자들이 자연적 성향을 거슬러 다른 부류 특히 돈을 좋아하는 부류의 욕망으로 변질되어 권력을 그들 부류의 재산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정의로운 나라의 기초인 서로 다른 욕망의 조화와 공존을 무너뜨려 서로에 대한 침탈과 배타적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종국에는 나라의 구성원 모두의 욕망을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으로 변질시켜 나라의 파멸을 초래한다. 이 파멸의 종착지가 곧 참주가 지배하는 가장 부정의하고 참담한 정치체제인 참주정이다. 플라톤은 제8권에 가서 이러한 부정의한 행태가 어떤 변질의 과정을 거쳐 참주정에 이르는가를 마치 현실의 정치사를 추적하듯 아주 실감 나도록 구체적으로 분석해 들어간다. 이것은 플라톤의 국가론이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라 치열하고도 냉철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이루어진 일종의 비판적 이념임을 보여준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 정의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어서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또 맞지 않으면 다시 나라로 돌아가 살펴보고 그렇게 서로 그 둘을 번갈아 살펴보고 서로 문지르다 보면 나무들을 문질러 불씨를 얻듯이 마침내 정의가 환히 드러나 우리 자신들 사이에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434e-435a) 이렇듯 정의에 관한 종합적이고도 최종적인 정의(定義)는 우리가 이어서 다루게 될 개인의 정의에 대한 논의까지 마무리된 다음에야 가능하다.  -끝-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다음에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㊾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지혜와 용기

 

[427d-428b]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네의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한 후에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고 행복하게 될 사람은 그중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427d-e)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가 올바르게ὀρθῶς 세워진다면, 완벽하게τελέως 좋은ἀγαθός 나라이며 그에 따라 그 나라는 지혜롭고σοφός 용감하며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정의로운δικαία 나라라고 말한다.(428a) 그리고 이 가운데 무엇을 찾아내면ἐζητοῦμεν 나머지는 아직 못 찾은 것이지만 맨 먼저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알아보았을ἔγνωμεν 경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ἐγνωρίσαμεν 그것 또한 우리가 찾고 있던 것τό ζητούμενον을 알아본ἐγνώριστο 셈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정의를 찾는 방법은 바로 정의를 찾아서 알아보거나 나머지 셋을 찾아서 알아보면 된다는 것이다. 아데이만토스가 이 말들 각각에 다 동의를 표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후자의 방법을 택해 나머지 셋 가운데 하나인 지혜σοφία를 찾아 알아보기 시작한다.(42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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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과정(375a-434c)에서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 통치자의 생활 방식과 임무 등 나라의 기본 틀을 언급한 다음에 이제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과연 정의로운 나라인지 그리고 그러한 나라야말로 행복한 나라인지를 살핀다. 그것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지금까지 세워진 정의로운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자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정의를 찾는 방식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J. Annas(1981) An intriduction to Plato’s Republic. p.109-111 참고) 우선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지면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왜 그 나라가 완벽한지 따로 설명이 없다. 둘째 그 나라가 완벽하게 좋은 나라임을 근거로 바로 그 나라가 우리가 이제 찾고자 하는 정의를 포함 지혜, 용기, 절제 등 4가지 덕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의아스럽다. 왜냐하면, 이 말은 완벽하게 좋은 나라는 당연히 4가지 덕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그 전제의 근거 또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소크라테스는 그 4가지 덕 중 정의를 바로 찾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나머지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 정의를 알아본 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세 가지 덕을 아는 것만으로 정의라는 덕까지 알 수 있는 것인지 그 근거 또한 불분명하다. 정의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세 가지 덕을 찾아 알면 당연히 알 수 있다는 것일까?

*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당연하듯 동의하고 있다. 물론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수준에서 동의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아데이만토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앞서 다루어진 내용에서건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에서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첫째 의문과 관련해서는 앞서 다룬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 보인다. 앞서 이 나라는 자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기의 소질과 적성에 따라 서로 분업적으로 의존하여 자족을 실현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애초 의도대로 올바르게 나라가 잘 세워지면 애초 목적대로 모두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족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 애초 자족할 수 없는 결핍된 삶에서 상호 협동적 공동체를 통해 자족적인 삶이 가능해졌다면 소크라테스로선 그 나라를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문제와 관련해서도 앞선 설명들에 의지해서 일정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 앞서 논의에서(412d-414b) 우리는 이곳의 덕목들과 그 특징들이 일종의 총론적 서론의 형식으로 예비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살핀 바 있다.(강해45 참고) 소크라테스는 그곳에서(412d) 이미 현명(phronimos)함을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서 제시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를 갖추고 있다.(433b) 그리고 그곳에서(413b-e)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서, 강제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갖추어진 능력과 어떤 환락의 상황에서도 홀리지 않고 의젓함을 유지하는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력들이 각기 용기와 절제의 덕임을 간취하는 것은 전후 문맥상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위와 같이 앞에서 논의된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이유를 아예 다른 곳에서 끌어와 설명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플라톤이 국가의 덕으로 새로 발견한 덕목들이 아니라, 그리스 사회에서 좋은 삶의 토대로서 4가지 기본 덕목들, 이른바 4주덕(四柱德, the cardinal virtues)으로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들은 사주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별다른 이의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 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로 플라톤 대화편은 물론 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와 핀다르(Pindar)의 네 가지 덕(tessares aretai), 크세노파네스의 <회상>(III 9 1-15, IV 6 1-12), 아이스퀼로스의 <9월> 등 여러 곳을 제시한다.(J. Adam note 참고) 실제로 플라톤은 여러 대화편을 통해 비록 이곳과 그대로 일치하지 않지만 이러한 덕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프로타고라스> 329c, <라케스> 199c, <메넥세노스> 78d, <고르기아스> 507b, <파이돈> 69c, <법률> Laws 631c에서 절제, 정의, 용기 및 슬기로움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데 앞서 인용했듯이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이다. 다만 경건(hosioēs)은 포함되지 않거나 정의와 같은 것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미 사주덕이 대화자들 모두에게 따로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친숙한 덕목들이었음을 보여준다.(J. Adam. note 참고) 다시 말해 그들 모두에게는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한다면 그 사주덕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덕목들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이곳에서 사주덕과 관련하여 일단 전통적인 관념에서 출발하되 이제 새롭게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기존의 관념과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사주덕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셋째 의문에 대한 이해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혜, 용기, 절제의 의미를 찾아 안다고 해서 아직 살피지도 않은 정의까지 그 내용적 의미를 찾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과 하나가 포함된 4개의 과일 중 3개의 다른 과일을 찾는 것으로 사과를 찾는 단순 귀류법과도 거리가 있다. 찾는 것은 정의의 정재(Dasein)가 아니라 상재(Sosein) 즉 내포이다. 이렇듯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판단해도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했을까? 여러 주석가들이 이에 대한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J. Adam note 참고) 사실 그리 신통치는 않다. 굳이 앞서 논의된 내용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아래와 같은 설명 정도이다.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미 제2권(370b – 374c)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은 각자 나라와 관련된 일 중에서 자기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고 그 천성과 소질에 따라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를 임명한 바 있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란 다름 아니라 구성원들 모두 자신의 고유한 덕을 기초로 각기 자신의 역할을 하는 나라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의 고유한 덕들로부터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라는 정의의 덕을 추론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433a에서 정의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앞서 제2권의 내용을 정의를 규정하는 바탕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다만 문제는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중대한 덕목임에도 그것이 정의로 규정되는 것은 이후의 논의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에 바로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논의에 대한 혜안을 가졌으면 모를까 여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428c-429a]

* 소크라테스는 우선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κατάδηλος 것은 지혜이고 그 지혜는 이상한ἄτοπον 뭔가가 있다고 말한다. 아데이만토스가 그 이유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한다. 먼저 그는 이 나라는 진정으로τῷ ὄντι 지혜로운 나라인데 그 까닭은 숙고εὔβουλος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숙고를 잘하는 것은 무지ἀμαθίᾳ 때문이 아니라 앎 때문이므로 숙고를 잘함은 일종의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앎은 목수τέκτων나 농부들이 아는 앎들이 아니다. 그런 앎은 목공이나 농사에 대한 최선의 상태를 숙고하는 것이지만 그 숙고로 인해 나라가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에 능하다고만 불릴 뿐이다.(428c) 요컨대 지혜는 일종의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ὁμιλοῖ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이다. 그리고 그 앎은 수호하는 앎이고 완벽한τέλειος 수호자로서 통치자들에게 있는 앎이다. 그리고 통치자들의 그러한 앎을 통해 나라는 숙고를 잘하는 나라, 진정으로 지혜로운 나라라고 불린다.(428d) 그리고 그러한 앎을 가지고 있는 수호자들은 자연적 성향에 따라 수가 가장 작은σμικροτάτῳ 집단ἔθνος이자 가장 작은 부분μέρος이고 그 집단에 있는 앎 때문에 전체가 지혜롭다.(429a) 요컨대 이 앎은 앎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지혜라 불러 마땅한 앎이고 본성상κατά φύσιν 가장 수가 적은 통치자들이 그 앎에 참여하기에 적합한 이 부류γένος들이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넷 중에서 하나를 찾아냈고 그것이 나라의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찾아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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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지혜(sophia)를 ‘숙고를 잘하는 앎’으로 규정한다. ‘숙고’로 옮긴 그리스어 εὔβουλος(euboulos)는 ‘take counsel, deliberate, determine or resolve after deliberation’의 뜻을 가진 동사 βουλεύω(bouleuō)에서 나온 말로서 ‘뭔가를 결정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 나랏일 전체에 관한 최고 의결기구인 평의회(boulē βουλή)도 이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목공이나 농부도 숙고한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자처럼 나라 전체에 관한 것을 숙고하지 않고 자기 일에 한정해 숙고하므로 지혜라고 하지 않는다. 지혜는 ‘숙고를 잘하는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인 것이다. 요컨대 이곳에서 지혜는 나랏일 전체를 숙고하는 정치적 통치 능력으로서 총체적 앎이다. 그리고 유념할 것은 이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인 까닭은 이 나라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로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지혜로운 자가 통치하지 않는 한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에게 있어 숙고를 통한 총체적인 앎으로서 지혜는 여기에서처럼 나랏일 즉 통치 영역에만 한정된 앎이 아니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지혜는 원천적으로 총체적 앎의 극치로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앎에 이르기까지 사물과 사태에 관한 총체적인 앎 그 자체를 의미한다.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으로 불리는 것도 이미 철학적 앎의 기저에 총체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곳에서는 논의 계획과 순서에서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를 논하기 이전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일단 지혜를 나랏일과 관련한 통치자의 총체적인 숙고 능력, 즉 통치자만 유일하게 갖는 덕으로 한정하여 말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에서 통치자는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아니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제6권과 7권에서 다룬다.

* 그런데 나라에 필요한 부분적 역할을 나름의 수준에서 숙고하여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을 수 있어도 나라라는 공동체 전체의 선을 숙고하고 그에 필요한 역할과 기능을 총체적으로 숙고하는 앎으로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나라 안에서 소수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가장 작은 집단(ethnos), 부분(meros), 부류(genos)라고 부른다. 물론 이들의 수를 정확히 계산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지난 강해(강해 46)에서도 살폈듯이 아무리 수호자까지 포함하여 크게 잡아도 1.5%에서 3% 정도로 추정될 만큼 극히 소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혜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말(428c)은 이렇듯 소수의 지혜 있는 자가 나머지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 누누이 살폈듯이 통치자들은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소수의 특권 계급과 전혀 거리가 멀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여느 특권 계급처럼 사유 재산은커녕 가족도 꾸리지 못하고 통치권력 또한 여럿이 돌아가며 수행하며 기간 또한 한시적이다. 그에 비해 나머지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있고 결혼으로 가족도 꾸릴 수 있고 평생을 자기 일에 종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통치자 혼자 전제 권력을 종신토록 휘두르고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도 가족도 가질 수 없는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권력자들은 시민들과 달리 어떠한 재산도 주택도 가질 수 없으며, 일정한 지역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고된 훈련을 수행해야 하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자기 가족으로 여기면서, 오직 시민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서로 돌아가며 한시적으로 나랏일을 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을 특권층이라고 선망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의 대화자들마저도 이미 그런 사람들이 어찌 행복할 수 있냐고 반문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 권력자들의 횡포와 부정부패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그들 권력자에게 선망이 아닌 연민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나라에서는 권력자들이 그렇게 갇혀 지내면서 아예 재산조차 가질 수가 없네!’라고.

*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설명하면서 숙고의 대상에 이 나라와 이 나라 시민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현대의 정치적 현실에 적용할 때 일단 2000년이라는 시대적 격차가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지만, 일반적인 주제에서조차 그 어려움이 뒤따르는데 그 대표적인 영역이 곧 국제관계에 대한 정치철학적 이해 영역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관심사의 경우 비록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내전을 막는 게 근본 목표로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대책의 대부분은 국내 문제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대화편 전체에서 타국과 관련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교역 문제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현대의 대부분 국가에서 이른바 세계화와 지구화가 국민국가 차원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정치철학 영역에서도 가히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문제에 대한 접근은커녕 해결을 위해 어떠한 방책도 구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분명 플라톤 정치철학의 현대적 적용은 여러모로 근본적인 제한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구체적으로 국제문제를 다루는 부분들은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통치의 중대사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듯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보여주고 있는 국제관계의 기본 원칙만은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다.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가 국가 간 갈등과 나라 간 빈부의 차이, 그로 인한 전쟁 발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 플라톤은 이미 그에 대한 원칙적인 대답을 대화편 전체 내용을 통해 내놓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나 <법률>을 통해 서로 다른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정치철학의 근본 목표이자 원칙임을 하나같이 견지하고 있고 그에 따라 타자와의 차별과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서 물질적 욕망에로의 획일화를 극력 비판하고 있다. 특히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연설을 다루는 <메넥세노스>는 전쟁을 해야 한다면 오로지 방어 전쟁에 국한할 것을 강조하면서 타국에 대한 침략적 지배를 통해 관철된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메넥세노스>(2021) 이정호 옮김, 아카넷 참고. 이 점에서도 알렉산더의 등장은 고대 그리스의 종말을 상징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기본적으로 나라 안은 물론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반패권주의 및 반제국주의에 기초한 평화와 공존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나라에서 가난을 가장 나쁜 최대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한 나라에서건 여러 많은 나라에서건 빈부의 양극화를 없애는 것이 정치가들이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역할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국제적 현실은 어떠할까?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대부분 나라는 하나같이 무한경쟁과 노동의 유연성을 내세워 분배와 복지보다 나라 전체의 총량적 경제 성장에 매달리고 있다. 특히 강대국들의 경우,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AI, 챗 GPT 등 첨단 지식정보산업에 마치 미래의 사활이 걸린 듯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 그들은 모두 그것들이 초래할 수 있는 인간 지성의 왜곡과 노동의 소외, 환경의 파괴, 빈부의 세계적 양극화에는 눈을 감은 채, 오직 효율지상주의를 통한 패권주의적 우위를 달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그러한 문명적 위기에 대한 총체적 비판은커녕 누가 먼저 그러한 전환에 발맞추어 살아남을 것인가 각론적 해결 방안에 대해서만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각자도생하여 살아남을 것인가가 지적 성찰의 주제가 된 세상이다. 2000년 전 삶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숙고 능력으로서 플라톤의 지혜와 현실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429b-430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같은 방식으로 용기ἀνδρεῖα와 그 용기가 나라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찾아서 알아본다. 우선 용기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에 복무하는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에게 있다. 즉 나라가 비겁한 나라인지 용기 있는 나라인지는 순전히 그들에 의해 결정된다.(429b)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입법가가 교육을 통해 알려 준 그런 류의 무서운δεῖνος 것들에 대한 믿음δόξα(doxa)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할σώσει 수 있는 힘δύναμις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29c)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힘을 용기라고 부르고 그런 의미에서 용기는 일종의 보전σωτηρία이라고 말한다. 즉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λύπη이나 즐거움ἡδονή, 또는 욕구ἐπιθυμία나 공포φόβος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429d)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보전을 염색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염색공βαφεύς은 염색하고βάπτω 싶을 때면, 먼저 그 다양한 색깔의 모직 중에서 본래 흰색만을 가진 모직을 고르고, 그다음에는 최대한도로 색깔을 받아들이도록 적지 않은 공을 들여 미리 준비하고 나서, 그런 상태가 되어야 염색을 한다는 것이다.(429e) 그래야만 모직이 단단히 착색되어 세제를 쓰든 안 쓰든 세탁을 해도 광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을 뽑아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ῇ으로 교육하는 것도 염색의 예에서 보듯 그들이 우리의 설득을 가장 훌륭하게 받아들여, 적합한 자연적 성향과 양육을 갖춤으로써 무서운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다른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단단히 갖게 하여 강력한 세척력을 지닌 어떤 쾌락이나 고통과 두려움, 욕망도 그들에게서 그 믿음을 씻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용기는 무서운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올바르고 적법한 믿음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전하는 힘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른 믿음일지라도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긴 믿음을 짐승들과 노예들의 믿음에 비유하며 소크라테스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430a-b)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용기를 다만 시민적πολιτικός 용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원할 경우 나중에 다시 더 잘 살펴보겠지만 여기에서는 정의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43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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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덕으로 지혜에 이어 용기(andreia)를 찾아 살핀다. 그에 의하면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앞서(413b-e) 통치자들의 선발 조건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이곳에서 말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이나 즐거움 또는 욕구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무서운 것들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δόξα(doxa)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신앙이나 신뢰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어떤 ‘생각(a notion, true or false)’ 내지 ‘견해(opinion) 즉 넓은 의미에서 모종의 앎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앎은 고도의 철학적 인지 단계에서 획득되는 참된 앎으로서 앎(epistēme)이 아니라 다만 그보다 낮은 인지 단계, 이를테면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서건 혹은 일정 수준의 추론을 통해서건 인지자 스스로 참이라고 믿고 있는 일종의 자기 확신으로서 앎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믿음은 진정한 앎과 비교하여 어떤 경우 그에 근접하여 올바른 믿음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못된 확신 즉 거짓된 믿음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플라톤이 말하는 믿음(doxa)의 정확한 의미와 인식론적 위계는 선분의 비유(509c-513e)를 다룰 때 따로 자세히 다룬다] 그런데 이곳에서 용기와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는 믿음은 오랜 기간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비록 고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앎에는 미치지 못하나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바른 믿음’(orthē doxa)으로서 건강한 앎이자 능력인 것이다.(J. Adam note 참고)

* 소크라테스도 언급하고 있듯이 무지한 노예도 용감하고 오늘날 깡패들이나 조폭들도 싸울 때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다. 이들 모두도 그럴 수 있는 믿음 즉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주인이나 두목으로부터 생계도 보장받고 지위와 금전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모두 신분적 예속이나 조건에 기초해 있으므로 신분이 달라지거나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뒤바뀌거나 배반할 수 있는 조건부 생각이자 유동적인 믿음이다. 동물도 살기 위해 본능으로 용감하지만, 더 강한 것 앞에서는 바로 꼬리를 내리거나 도주한다. 충성스러운 개조차 먹이를 주는 주인이 바뀌면 바뀐 주인을 따른다. 그 믿음을 보전하는 힘은 일시적이고 본능적이어서 강렬한 듯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용기는 이와 달리 오랫동안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올바른 믿음이자 그 믿음 자체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보전하는 일관된 힘이자 능력으로서 덕이다. 특히 시가 교육과 신체단련 교육은 어떠한 경우도 탈색이 되지 않는 잘 염색된 모직물처럼 그러한 믿음을 자신에게 적합한 자연적 성향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다.

* 그리고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일 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나라의 수호자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로 나서지 않거나 그런 사람을 수호자로 임명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코 용기 있는 나라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수호자로 나서지 않는 그 개인 역시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앎은 곧 실천인 것이다.

* 이렇듯 용기는 단순히 용맹한 행위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의미 이전에 그 행위를 가능케 하는 굳세고 올바른 믿음 즉 내적인 앎이다. 현명한 사람은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의연하게 거짓과 탐욕을 멀리하지만, 어리석고 무지한 자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의 용기와 무지한 자의 만용을 가르는 것은 진정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즉 ‘진정한 가치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능력 곧 힘이자 덕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용기를 덕이자 믿음으로 말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용기를 힘이자 능력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 용기는 ‘올바른 믿음의 보전’이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은 올바르다는 점에서 앎에 근접해있지만 믿음인 한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epistēme)에는 못 미친다.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의 용기를 ‘시민적 용기’(politikē andreia)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중에(500d) 언급되는 시민적 덕(politikē aretē), 평민적 덕(dēmotikē aretē)도 이곳에서 언급되는 시민적 용기 수준의 덕을 가리킨다. 요컨대 시민적 용기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에는 못 미치지만(<라케스> 195a, 196e ff., <프로타고라스> 349d)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관여되어 있으므로(제6권 506a 참조) 믿음이되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훈련을 통해서 생길 수 있는 것’(<파이돈> 82a-b) 즉 오랜 기간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신념이자 확신이다. 요컨대 수호자들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올바른 믿음을 확고하게 내면화하고 있어서 어떠한 상황에도 그 믿음을 흔들리지 않고 보전한다. 그리고 이 올바른 믿음은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통해 진정한 앎으로서 상승할 수 있다. 다만 현 단계 수호자의 경우 믿음을 앎으로 상승시키는 철학적 성찰의 능력은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수호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군인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시민적 용기는 수호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앎으로서, 시민들에게는 최선의 교육 목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덕으로서 용기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시민적 용기로 불렀을 것이다. 시민들은 최선의 시민적 용기를 갖고 수호자를 따르고 견고하고 올바른 믿음을 지니는 수호자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를 지닌 통치자를 따라 나라를 지킨다. 종국적으로 지혜는 물론 용기와 절제의 덕 모두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마친 수호자 중의 수호자 즉 철학자 왕을 통해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이자 덕으로서 구현된다.

* 플라톤이 <국가>에서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청소년기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거론하고 20세에 이르면 수호자를 선발 임명하고 그 후 고도의 철학 교육과 현장 실습 단계를 거쳐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이 되는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발생론적인 단계와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지혜에 관한 논의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통치자의 덕과 앎을 논의하기는 하되 좋음의 이데아를 본 ‘철학자 왕으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단계까지는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시민적 용기로 제한하면서 여기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430c) 앞에서 언급된 교육과 양육의 목표는 나라의 덕을 다루는 현 단계로서는 ‘올바른 믿음’ 정도 수준의 앎이다. 그러나 나중에(6권-7권) 철학자로서 통치자가 다루어질 즈음에 이르면 지혜, 용기는 물론 절제, 정의 모두 통치자가 갖추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앎이자 덕임이 밝혀진다. <국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맞이하는 난관의 대부분이 ‘철학자 왕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을 다루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끝-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427d-434c) (2) 절제와 정의. 다음에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㊽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3 수호자들의 임무 3(423d- 427c)

 

[423d-427c]

* 소크라테스는 앞서 말한 임무들이 쉽고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의 크고 충분한ἱκανόν 하나가 있다고 말한 후 그것이 다름 아니라 교육παιδεία과 양육τροφή임을 밝힌다. 만약 수호자들이 교육과 양육을 잘 받아 균형 잡힌μέτριος 사람들이 되면 앞서 말한 정도의 임무들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미뤄두고 있는 문제 즉 부인을 취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문제들까지도 쉽게 간파할διόψονται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423d-e)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최대한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κοινά τά φίλων’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에 동의를 표한다. 게다가 그는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일단 잘 출발하면 발전적인 순환κύκλος을 이룬다고 말한다. 즉, 유용한χρηστός 양육과 교육이 보존되면σῳζομένη 그것이 좋은 본성φύσις을 만들어 내고 자손의 출산과 관련해서도 한층 더 낫게 된다는 것이다. (424a)

* 요컨대 나라를 돌보는 자ἐπιμελητής들은 교육과 양육을 고수하여ἀνθεκτέον 어떤 경우에도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ή과 시가μουσική에 급진적인 변화νεωτερίζειν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424b) 노래ᾆσμα가 아니라 노래 방식τρόπος만 새로 고쳤다고 칭송해서도 안 된다. 시가의 형식εἶδος이나 방식τρόπος의 변화는 가장 중대한 나라의 법νόμος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불법이 쉽게 끼어들지 않도록 시가에 수호자들의 초소φυλακτήριον를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424c) 그것은 조금씩 성품ἦθος과 행실ἐπιτήδευμα에서 계약συμβόλαιον으로, 법률과 정치 체제로 이행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기τελευτῶσα 때문이다.(424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이들이 준법적인ἔννομος 놀이를 잘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시가를 통해 훌륭한 법질서εὐνομία를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경우 그들 자신의 성장은 물론 나라에서 잘못된 것도 바로잡고 이전 사람들이 망쳐놓았던 사소해 보이는 일상 예법들도 모두 찾아낸다는 것이다.(424e-425a)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것들을 법제화νομοθετεῖν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아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잡게 되면 닮은 것τό ὅμοιον은 언제나 닮은 것을 불러내어 좋은 것이 됐든 그 반대되는 것이 됐든 하나의 전적이고도τέλειος 강력한νεανικός 어떤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25c) 시장과 관련한 세칙들 이를테면 계약 폭언과 폭행과 서면고소αἰκία, 재판관들의 임명과 관련한 일들, 세금의 징수나 납부 등 시장이나 도시를 감독하거나 항구세와 관련된 일들도 굳이 법제화 할 필요가 없다.(425d) 아데이만토스가 말한 대로 아름답고 뛰어난 사람들은 법제화해야 하는 것들 대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425e) 이에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에게 신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법을 보전σωτηρία해 주는 경우 그렇다고 말해준다.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렇지 못한 경우 그들은 마치 최선의 것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평생 이런 유의 많은 법규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고쳐가며 산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그런 사람들은 병이 들었으면서도 무절제ἀκολασία한 탓에 몹쓸 생활습관δίαιτα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 거라고 말한다.(426a)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병을 더 키우면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치료약φάρμακον을 조언해 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번번이 그것으로 건강해지리라는 기대를 지니는 멋진χαρίεις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래와 같은 진실 즉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성적 쾌락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그만두기 전에는 그 어떤 처방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오히려 누구보다도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26b)

*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게 성을 내는 것은 멋진 게 아니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런 아데이만토스의 생각을 받아 주면서도 짓궂게도 한술 더 떠서 그런 일을 저지르는 나라와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과연 그들이 앞의 사람들과 같은지 그리고 과연 그들은 칭송받을 만한 사람들인지를 묻는다.(426b) 즉,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를 흔들면κινεῖν 사형에 처해질 터이니ἀποθανουμένους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πολίταις 공표하는 나라들이 있다면 그 나라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인지를 물은 후에, 그렇게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도 시민들이 즐거워하도록 보살피고θεραπεύῃ, 아첨하며 환심을 사는 것은 물론 그들의 의향을 미리 알아 만족시키는 데 능란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자 큰일에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고 힐난한다.(426c)

* 이에 대해서도 아데이만토스는 정색을 하고 그런 사람들 모두 앞서 말한 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는 자들로 어떤 식으로도 칭송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다시 힐난하는 말투로 그런 나라들을 보살필 의향과 열의를 지닌πρόθυμος 자들의 용기와 너그러움εὐχέρεια이 가상하다고 말하고 측정할 줄μετρεῖν 모르는 자가 마찬가지로 측정할 줄 모르는 자에게 키를 알려주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426d)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또다시 반대를 표명하자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은 짓들을 하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멋진 사람들χαριέστατοι이라고 다시 비아냥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휘드라의 목을 자르고 있는 꼴인지 모른 채 계약상의 사기κακούργημα 등 이러저러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매번 뭔가 끝πέρας을 볼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세세한 것까지 모두 법으로 제정하고 또 고친다는 것이다.(426e)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입법가는 세세한 규범이나 규칙 등에 골몰할πραγματεύεσθαι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것이 무용지물ἀνωφελής이며 아무것도 이루는 게 없고πλέον οὐδέν,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것 중 일부는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일부는 이전의 관행ἐπιτήδευμα들에서 저절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427a)

* 이후 소크라테스는 다만 나머지 입법사항으로서 법령νομοθέτημα들 중에서도 가장 중대하고도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으뜸가는 법령으로서 신전 건립과 제의θυσία를 비롯한 신들과 신령δαίμων들과 영웅ἥρως들 및 저승에 있는 이들 관련한 법령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에 관한 해석은 전적으로 대지의 중심에 있는 배꼽ὀμφαλός에 앉아 이런 것들에 대해 해석해 주는 조상 전래의 해석자ἐξηγητής에게 맡긴다. 이로써 말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이 일단 마무리 된다. (42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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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4a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koina ta philōn은 그리스의 속담으로 <국가>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소유와 결혼 그리고 자식들 문제까지 이 말을 적용해서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도 그 말에 찬성을 표한다. 그렇다고 아데이만토스가 여기서부터 벌써 처자 공유를 동의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차마 그것까지 공유한다는 말씀일까 긴가민가하면서 단지 그 속담에만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449c에 가서야 아데이만토스는 이 말이 처자와 자식까지 공유하는 것임을 알고 이의를 제기한다. 이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이자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까지 표현하려는 플라톤 나름의 문학적 장치이다.

* 425b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예법들’은 구체적으로 연장자 앞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적절하게 말을 삼가는 것, 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부모를 모시는 것θεραπεία, 머리와 옷과 신발을 단정히 하는 것을 비롯한 전체적인 몸가짐과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것들 등이다. 흥미롭게도 이것들 모두는 동양의 전통 예법들과도 별 차이가 없다.

* 425d ‘법제화할 것이 없다.’ : 여기 나오는 사안들 대부분은 플라톤의 <법률>에서 다시 언급된다. 계약에 대한 것은 913a 이하와 920d 이하, 폭언에 대한 것은 934e 이하, 폭행에 대한 것은 879b 이하, 서면 고소에 대한 것은 949c 이하, 재판관의 선임에 대한 것은 767a 이하와 956b 이하, 도시감독관과 시장감독관에 대한 것은 763c 이하 참고. 한편 항구세와 관련해서는 <법률>에서 수출품이나 수입품에는 세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다.(847b) <국가>에서는 이러한 세칙은 법제화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가 <법률>에 가서 법제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법률>의 국가가 <국가>의 국가와 비교하여 실천적 현실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가 나라의 본을 다루고 <법률>이 나라의 실물을 다루는 한 그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 426c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를 흔들면κινεῖν 사형에 처해질 테니ἀποθανουμένους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πολίταις 공표하는 나라들’ : ‘흔들면’으로 옮긴 κινεῖν은 의미 상 비판을 물론 체제를 변동하려는 시도까지 포함한다. 이 나라들은 426b에서 비유한 대로 시민들의 근본적인 개혁 요구와 비판을 거부하고 오히려 과도한 탄압을 일삼는 정치체제들을 가리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목도했던 당대 아테네 민주정과 30인 과두정 그리고 시칠리아의 참주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정체들 모두 반대파는 물론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다. 아테네 민주정은 실정에 대한 개혁 없이 반대파에 과도하게 예민하여 소크라테스마저 반체제로 몰아 사형에 처했고 30인 과두정도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는 사람들조차 사형에 처했다. 제1권에 등장하는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도 30인 참주들에 의해 처형 되었다.

* 426d ‘그런 나라들을 보살필θεραπεύειν 의향과 열의를 지닌 자들의 용기와 너그러움εὐχέρεια’ : 이 말은 잘못된 나라에서 어리석은 정치가들이 갖는 만용에 가까운 권력욕과 그들의 섣부르고 무모한 태도를 의미한다. ‘너그러움’의 원어 εὐχέρεια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의미한다. 좋은 의미로는 대범함의 의미도 가지지만 여기에서는 경계해야 할 일임에도 제 욕심에 못 이겨 섣불리 나서는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무모함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엄격해야 함에도 무작정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자들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 부분에서 아데이만토스와 주거니 받거니 그야말로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치자와 대중들의 잘못된 양태에 관해 물을 때마다 아데이만토스가 시종일관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음에도 마치 못 믿겠다는 듯이 힐난조로 계속 되물어 본다. 이것은 아데이만토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몰아 놓은 당대 아테네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행태들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분노를 아데이만토스를 상대로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드러내 보이려는 플라톤 나름의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를 제자나 동료가 아니라 당대 아테네 지식인이자 시민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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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호자들의 임무로서 나라의 규모와 영토 관련 업무는 물론, 적성과 소질에 따라 구성원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임무 또한 절대 쉽지 않은 임무들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임무 모두를 쉬운 임무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임무보다도 교육과 양육 관련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음이 여기서 밝혀진다.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양육을 큰 것 하나 정도가 아니라 충분한 것 하나로 표현할 정도이다.

*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375a-434c)을 크게 나누면 (I) 그 나라의 중추로서 수호자와 통치자들이 어떤 성향으로(375a-376c) 어떻게 교육되고(376c-412b) 임명되며(412b-415d) 어떤 생활방식(415d-421c)과 임무(421c-427c)가 부여되는지 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틀과 직무 등에 관한 주제가 먼저 다루어지고(375a-427c) (II) 그 후 그러한 기본 틀과 직무를 갖춘 나라가 어떻게 정의로운 나라일 수밖에 없는지 그 나라의 내적 특성과 덕목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427d-434c) 이 가운데 이 나라의 기본 틀과 직무를 다루는 부분(I)이 스테파누스 쪽 수 분량으로 총 42쪽 분량인데 흥미롭게도 이 가운데 교육이 차지하는 부분이 36쪽에 이른다. 게다가 <국가>의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6권과 7권에서도 변증술 등 보다 진전된 수준의 교육 과정이 근 40쪽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교육의 문제를 얼마나 중대한 과제로 여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플라톤 주석가들이 <국가>를 주제 구분상 정치론이라기보다는 교육론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 플라톤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이데아론을 떠올릴 것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최상의 위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이 기본적으로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철학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데아는 존재론의 위계상 최상의 가치이자 목표일 수는 있어도 정작 플라톤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그러한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인간 능력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였다. 플라톤 철학의 주제가 내용상 영혼론이자 교육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인간적 삶의 본질인 양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 비참성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우주적 본성에 의지하여 반드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우주적 본성은 교육을 통해 고양된 영혼으로 각성되면서 비로소 삶의 근원적 비참성을 극복하는 적극적 능력으로 현전한다. 사회 또한 고양된 영혼의 지배를 관철하는 정치를 통해 해체의 위기에서 벗어나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로 진보한다.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정치 체제가 일단 출발을 잘 하게 되면 교육과 양육이 보존되고 그것이 보존되면 좋은 본성을 낳고 그것은 또 자손의 출산도 낫게 만들어 선순환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의 전망과 관련하여 플라톤 자신 나름의 확신과 낙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확신과 낙관 역시 교육과 양육이 견고하게 잘 자리 잡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만큼 교육과 양육의 제도적 정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교육과 양육의 방책을 온전하게 수립하고 잘 보전하는 것은 수호자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수호자들은 그 보전의 과정에서 교육과 양육을 그르치는 것이 있다면 마치 돌다리도 두드려가듯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일상에서 시민들이 부르는 노래 방식의 변화마저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초가 되어 노래도 바뀌고 그에 따라 시가에도 변화가 생기면 시가 교육 자체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실 노래 방식의 변화가 시가 교육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는 생각 정도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노래의 변화가 시가 교육의 변화는 물론 결국에 가면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를 감시하는 초소를 세우겠다는 언급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자행된 문화 검열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과장과 기우의 수준을 넘어 가히 신경증적 반응으로까지 비추어진다. 요즘 시절로 보자면 어떤 인기 가수가 아리랑 정도의 국민가요를 나름 편곡해서 다르게 부르는 경우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꼴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음악 또는 대중문화의 변화 및 발전에 대한 플라톤의 신경증적 거부 의식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 자신의 수구적 경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비난한다.

* 그러나 시가 교육을 다룬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에서 시가가 차지하는 위상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 이러한 의구심은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시가 교육을 다루면서(376e-403c) 시가 즉 mousikē가 단순히 음악이나 특정 문화 양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뮤즈(mousa) 여신이 관장하는 제반 지적, 예술적 행위 및 성과 일반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리스인들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신화적 세계관 그리고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것임을 확인한 바 있다. 문맥에 따라 mousikē를 학예(學藝)라고 번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컨대 시가 교육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와 공동체가 추구해온 가치관과 세계관은 물론 일상의 생활 방식의 요체들을 전수하고 준법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일종의 시민 교육이자 종교 교육인 것이다. 이에 따라 시가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시민 모두에게 예외 없이 의무적으로 부여되며 이후에도 연극과 예술 공연을 비롯한 정례적인 행사들을 통해 늘 마음에 되새기고 학습해야 할 이른바 평생 교육의 과제로 주어진다. 사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노래는 시가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노래 방식은 또 노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그 노래 방식의 변화에조차 민감함은 시가 자체가 갖는 중요성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노래는 아테네 시민들의 일상 영역인 연극 공연 등을 통해 감각에 직접적이고도 빈번하게 작용하는 것인 만큼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여파가 작지 않았을 것이다. 노래가 가져다주는 이러한 여파에 대한 우려는 <법률> 700c-701d에서도 구체적으로 다시 피력된다. 노래는 이러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개인의 성품과 행실에도 영향을 미치고 법률과 정치 체제까지 뒤집어 버린다는 것이다.

* 아무려나 시가에 대해 플라톤이 왜 그토록 예민하게 여기는지 일정 부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 체제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의 면모로 비추어진다. 물론 보수주의 자체가 비난거리는 아니다. 플라톤 생각대로 가장 바람직한 정치 체제가 있다면 그것은 굳이 바꿀 필요도 없고 굳이 새로운 것을 찾을 이유도 없다. 그것이 그 자체로 늘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아무리 걱정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변화는 작건 크건 늘 일어나고 변화의 욕구가 크게 쌓이면 어떤 경우 정반대의 방향으로 급격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 만큼 반대로 우리는 플라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만약 플라톤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정의로운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하거나 또 그래서 결국 부정의한 정치 체제로 바뀌었을 경우 플라톤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여기에도 있다. 이곳에서(426c)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민들이 잘못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의 질서와 체제를 바꾸려 하는 경우 사형에 처하겠다고 포고하는 나라들을 단호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플라톤 역시 최소한,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는 경우 시민들이 그것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필연지사이자 마땅한 일이며 권력자들은 그것을 폭압적인 방식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편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황이 나온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온의 친척들에게 잘못된 권력자들에 대해 용기 있게 쓴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승 소크라테스마저 죽음에 몰아넣은 자들의 폭력성과 어리석음이 떠올랐을까? 다만 그랬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거나 아예 공염불일 게 분명하다면 조언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편지> 330d-331d 참고) 사실 <국가>는 이런 나라들에 대해 철저히 절망한 나머지 그러한 나라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구상 하에서 기획된 것이다. 플라톤은 백지상태에서 이상적이기 만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타락해버린 돼지들의 나라를 정화하는 변혁의 차원에서 나라를 세우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임무에 관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수호자들이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까지 법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세세한 관습까지 법제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425b)이다. 왜냐하면, 닮은 것은 언제나 닮은 것을 불러내므로 굳이 그에 따른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하자면, 뛰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경우 법제화 이전에 잘못될 만한 일을 쉽게 간파하여 미연에 방지할 것이기 때문에 법제화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고, 또 반대로 어리석은 자가 나라를 잘못 다스릴 경우에는 아무리 법제화를 해 봐야 자신은 물론 누구도 온갖 법 기술을 동원하여 탈법을 도모할 것이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것이다. 전자는 그야말로 입법의 궁극 목적은 법이 필요 없게 하는 것이라는 금언에 일치하는 경우라 할 것이고 후자는 아무리 법률이 세분되어도 입법자가 무도한 자인 한 또 다른 법 제정과 법 기술만 양산할 뿐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라 할 것이다. 이른바 전자의 나라는 그야말로 치자의 뛰어난 능력에 기초한 이상적인 덕치의 나라이고, 후자의 나라는 참주와 같은 치자의 폭압적 강제력에 기초한 극단적인 법치의 나라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427a) 진정한 입법가는 어떤 것을 법제화하고 어떤 것은 관행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지 잘 분별해낼 수 있으므로 세세한 규범이나 규칙 등에 골몰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치자들은 마치 온갖 것을 법으로 다 다스릴 수 있다고 믿고 온갖 세세한 것까지 다 법으로 제정하고 또 수정하는 것에 기를 쓰고 매달린다.

* 이곳에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는 어리석은 나라의 여러 사례는 제8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타락한 민주정과 참주정의 나라의 양태들과도 일치된다는 점에서 이곳 또한 그에 대한 예비적 서론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법 제정의 원칙으로서 나라의 최대선과 최대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462a)이 없이 무작정 법률에만 의지하는 어리석은 치자들의 행태들에 대한 플라톤의 힐난은 그야말로 적나라하고 단호하다. 병이 들었으면서도 무절제한 탓에 몹쓸 생활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성적 쾌락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 이들 모두는 아예 근본을 치유할 능력(덕과 원칙에 기초한 통치 능력)도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아 마치 휘드라의 목을 자르듯이 그저 끝없이 그때그때 즉물적인 대증치료를 반복하면서(법률 제정과 수정의 악순환) 자신의 병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여기서 반체제 인사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협박을 하면서도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 능란하고 그런 역할에 열의를 가진 정치가들과 그런 자들을 뛰어난 사람이자 큰일에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는 대중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이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무도한 참주들과 선동정치가들 그리고 그에 환호하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참주와 선동정치가들은 진실과 자신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는 자들이어서 대중들의 갈채에 눈이 멀어 마치 자기들 생각과 의견이 옳은 양 맹목적인 확신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홀려 갈채를 보내는 대중들 또한 진실과 자신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이들의 양태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사적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반정부 민주화 세력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른바 3S 정책(Sports, Screen, Sex 정책 : 프로 스포츠의 출범, 컬러 티브이의 확대. 통금해제, 심야 주점과 성매매, 성인 영화와 황색 잡지의 보급, 올림픽의 유치 등)을 수립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최대한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유도하였고 하물며 국민 위무책이라는 명분으로 5·18 광주 학살 희생자 1주기 즈음해 연예인을 총동원하여 국풍 81이라는 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비감하게도 어처구니없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플라톤의 말마따나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아무 통치 능력도 없는 자가 기득권자들의 부추김에 눈이 돌아 권력을 잡은 후 강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는 한없이 아첨하면서 반대파들과 약자들에 대해서는 갖은 공권력과 법적 수단을 동원해 탄압하는 작태를 우리는 지난 1년 내내 목도하고 있다.

* 그런데 이곳 정의로운 나라의 법제화 수준은 위의 대비 차원에서 언급한 극단적인 두 나라 중 순수할 정도의 덕치의 나라와 비교하여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이곳 수호자들은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때마다 법제화를 시도하고 있는 데다(380c, 383c, 403b, 409e, 410a, 417b) 나중에 가서도(484b-c) 법률 및 관행들의 수호를 아예 수호자들의 임명 조건으로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실물을 염두에 두고 본(本)으로서 그려진 최선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상 국가는 올바른 정치에 의해 정의로운 삶이 담보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인치와 법치가 균형을 이루되 가능한 한, 법제화를 최소화하는 경우라 할 것이고, 반대로 참주들과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잘못 다스려지는 참주정이나 민주정의 국가는 권력가들이나 시민이나 가릴 것 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다툼을 일삼는다는 점에서 나날이 법적 강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법률도 더욱 세분화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다른 정체의 나라 간 차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근대 이후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들을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수차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정치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 본성이나 욕망구조의 근원적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모든 정치적 구상마다 그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나 욕망구조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르고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어떤 개인도 혼자 자족(autokratia)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근본 전제로 두고 출발한다. 그러므로 자족을 이루기 위해서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서로 자기가 잘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아 서로 분업적으로 협동하고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나라의 기원이며 이러한 나라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며 자족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다. 즉 정치가의 기본 역할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협동적 공동체를 수호하고 유지 보전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어떤 사회적 역할이 특별하거나 다른 것에 우월하지 않다. 그 역할들 모두 고유한 적성과 소질에 따라 정해지고 그에 따라 추구하고 좋아하는 가치들 또한 고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타자에 대한 질투나 경쟁 없이 자기 소질에 따라 분업적인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으며, 나라의 관리 역할을 맡는 통치자 또한 본성상 물욕이 없는데다 제도적으로도 사적 소유가 아예 금지되어 있어 그들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 또한 자연스럽다. 요컨대 나라 구성원들은 서로 욕망구조가 이질적이고 다양함에 따라 상호 의존적 협동적 사회관계를 통해 자족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의 역할은 시민들 각자 자신의 다양한 소질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잘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보살핌(epimeleia)의 영역으로 규정된다.

*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는 위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뿐만이 아니라 부정의한 현실 국가들까지 모두 살피고 들여다본다. 제8권에서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가 타락할 경우 어떠한 과정을 밟는지 치밀하게 분석한다. 이상 국가는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는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구조가 변질되고 권력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치를 불신하고 마침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된다. 각자도생과 배타적 의심과 경쟁이 마치 자연의 본성에서 기원한 것인 양 당연한 일상의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치 체제의 변동과 관련한 이러한 플라톤의 분석은 역사적 현실, 특히 근대 이후 사회적 현실을 설명하는데도 상당 부분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마침내 신자유주의의 지배로 전일화된 현대 사회는 무한 경쟁 속에서 국가 간 계층 간 부익부 빈익빈을 고착 수준으로 심화시키고 있고 그에 따라 가난과 불평등, 부당한 차별을 불가피한 사회적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자는 강자대로 약자는 약자대로 무한결핍에 시달리면서 정치의 목적으로서 자족적 삶은 단지 개인의 심리적 자기만족이나 종교적 믿음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정치·사회적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이미 나라는 수없이 많은 나라와 개인들로 분열되고 그러한 개인들의 내적 영혼까지 분열된 것이다.

* 사실 플라톤도 비록 이상 국가를 가장 이상적 정체로 내세우기는 했으나 욕망이 이기적으로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다수결이 최선이며 그에 따라 그러한 상태에서는 민주정이 최선의 정치적 선택임을 인정하고 있다. 당대 아테네 민주정을 붕괴시키고 그 대신 급진적 과두정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던 30인 참주들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처럼 보였다고 플라톤이 말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구성원들의 욕망구조가 우주적 자연의 본성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바뀌기 전에는 그 어떤 종류의 제도적 변혁도 성공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길은 어디에서 주어질까? 단순히 이상 국가만을 들여다보면 그 길은 하염없이 멀고 방책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 8권에서 탁월하게 진단하고 성찰한 이상 국가의 타락 과정과 <법률>의 방책들을 함께 들여다보면 그 회복의 단서가 발견될 수 있다. 앞으로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은 정치 권력의 부패와 그로 인한 빈부의 양극화의 근원을 시종일관 교육의 부재에 따른 욕망구조의 왜곡, 즉 본성의 물질적 획일화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극복의 출발 또한 근본적으로 획일화된 욕망구조를 바꾸는 데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 또한 그러한 변혁을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플라톤이 변혁의 주체로 내세운 철학자 왕은 정치철학적으로 다만 권력과 지성의 결합에 기초한 정치의 지성화의 다른 말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기획을 우리의 변혁 열망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정치가와 시민들의 지적 각성에 기초한 교육체제의 개혁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과제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욕망구조와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을 향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중간 목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빈부의 격차 없이 모두가 자신들 고유의 욕망을 구현하면서 행복하게 공존하는 하나의 나라가 최종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 모두 각성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와 조직적인 저항 그리고 진지하고도 뜨거운 연대가 없으면 어떠한 진전도 담보할 수 없다.

*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틀을 만드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나머지 입법사항으로서 신전 건립과 제의를 비롯한 신들과 신령들, 영웅들 및 저승에 있는 이들 관련한 법령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 또한 적성과 소질에 따른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이고 수호자들이 적극적으로 챙겨야 할 고유 업무는 아니다. 이로써 말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은 일단 마무리되고 어떻게 그런 나라가 왜 정의로운 나라이자 행복한 나라인지 그 나라가 포함하고 있는 덕목들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에 대한 논의가 다음 주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㊼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㊼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 427c)

 

4권 [419b-421c]

* 소크라테스가 사유재산 금지를 비롯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한 언급을 마치자 아데이만토스가 끼어들어 누군가가 그런 생활 방식이 수호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뭐라고 변론할ἀπολογήσῃ 것인가를 묻는다. 그들은 나라가 자신의 것인데 이 나라 덕택에 누리는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처럼 땅과 집, 살림살이, 금화 은화도 소유하지 못하고 신들에게 제물도 못 드리고 손님 대접도 못해 마치 용병으로 고용된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ι μισθωτοὶ같다는 것이다.(419a)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한술 더 떠 수호자들은 끼니 정도만 제공되고 여행도 못하며 애첩ἑταίραa들에게 선물도 못 주며 돈도 제대로 못 쓴다고 말하면서 그런 고발 거리로 말하자면 그밖에도 허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τὸν αὐτὸν οἶμον πορευόμενοι 위의 의구심들과 달리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하다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ι해도 전혀 놀랄θαυμαστός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하면서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 취지가 우리 안의 어떤 한 집단ἔθνος이 특별히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나라 전체 ὅλη ἡ πόλις가 최대한 행복해지는 데 있음을 환기 시킨다.(420a-b)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정의가 가장 잘 발견될 수 있고 가장 나쁘게 세워진 나라에서는 부정의가 가장 잘 발견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가 오랫동안 탐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판정을 내릴 수 있음이 재확인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은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빚어내는 중이고 그 반대되는 나라도 이어서 살펴볼 것이라 말한다.(420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앞에서와 같은 고발 거리는 마치 생명체ζῷον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눈ὀφθαλμός을 검정으로 칠했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각 부분에 적합한 것들τὰ προσήκοντα을 배당해서 전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요컨대 그런 비난들은 수호자에게 부적합한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을 수호자들에게 부여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420c-d) 우리도 농부γεωργός들에게 금장식을 두르고 즐거움 삼아 땅을 갈게 하거나 도공κεραμεύς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며 진수성찬을 즐기면서 만들고 싶은 만큼만 도자기를 만들 줄 알지만(420d) 그러한 경우 농부는 농부가 아니고 도공은 도공이 아니듯 나라 구성원들 그 누구도 제 역할σχῆμα을 못한다.(420e)

*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구두 수선공이 아니면서 그런 체하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만, 수호자들인 체하는 사람들의 경우라면 그들은 나라 전체를 철저히 파괴한다. 나라를 잘 경영οἰκεῖν하고 행복하게 할 기회 역시 수호자들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421a)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 나라에 해를 가장 안 끼치는 진정한 수호자들φύλακας ὡς ἀληθῶς을 만들고 있음에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나라가 아닌 다른 걸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수호자들을 임명할 때는 수호자들 사이가 아니라 나라 전체에 행복이 생길지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로 하여 자신들의 일에 대해 가능한 한 최고의 장인δημιουργός들일 수 있도록 강제하고ἀναγκαστέον 설득해야πειστέον 한다.(421b) 다른 모든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라가 모두 다 함께 성장하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히면 그때 가서 각 집단이 자연적 성향 ἡ φύσις에 맞는 행복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놔두어도 될지 살펴봐야 한다.(42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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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파누스 쪽수가 419a에서 420a로 건너뛴 것은 스테파누스 플라톤 전집 원본 체제로 419쪽 b-e부분은 4권과 관련한 주석 등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본문은 다음 쪽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쪽수의 건너뜀은 권이 달라질 때마다 나타난다.

* 애첩ἑταίραa(420a) : 뷔데판 불어 역본에서는 ἑταίρα를 여행 동반자로 번역하고 주석에다 부유한 아테네인들이 여행 중에 애첩을 동반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 419a에서 ‘다른 사람들’οἱ ἄλλοι이 가리키는 대상을 이상 국가 내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권력자들로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있다.(J. Adam 등) 물론 이상국가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테이만토스가 그냥 당대 아테네 부유층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제1권에서 아테네 거류 외인이자 부유층 노인 케팔로스는 손님도 대접하고 집안에 제단도 갖추고 제물도 바칠 정도로 풍족하다.

*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τὸν αὐτὸν οἶμον πορευόμενοι(420a)에서 같은 노선이란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선 또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노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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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권은 사유재산 금지를 비롯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제5권에서도 4권 말미에 제기된 소크라테스의 과격한 제안들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다. 제4권 말미에 제기된 제안들이 남녀평등 및 처자 공유 등 훨씬 과격한 제안들임을 고려하면 제4권의 서두 역시 제5권 서두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될 의구심과 반론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의 성격을 갖는다.

* 아데이만토스의 의구심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 의구심들과 달리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하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며 나라를 세우는 취지는 어떤 한 집단이 아닌 나라 전체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의구심에 대한 변론 대신 그와 정반대의 결론부터 내놓는다. 다만 변론의 단서가 하나 있다.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 노선이 다름 아니라 애초 논의의 출발점이 그랬듯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은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과 달리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선임을 환기시킨다. 그에 따라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고찰도 이어질 것이라고 예고한다.(420c)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 가서 가장 부정의하고 불행한 나라와 개인들의 경우를 끌어들여 실제 현실에서 우리들이 부딪치는 현실적 정의와 행복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 검토하고 그것을 토대로 최종적인 판정을 내린다.

* 수호자들이 남들 보기에 가혹한 생활 여건 속에서도 왜 행복한 사람들인지 그리고 수호자들은 왜 나라를 지키는 힘든 임무들을 기꺼이 감당해야 하고 또 감당하는지는 <국가>의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면서 앞으로 보다 자세하게 논의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예비적 서론의 성격을 갖는 이 부분에서도 비유를 통해서나마 그 기본 원칙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즉 인간은 생명체로서 여러 신체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신체 기관들은 각기 고유하고도 다른 기능들을 가진다. 각기 고유하고도 다른 기능들이 있다 함은 각기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걸맞은 고유한 특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고유성과 무관한 어떤 것을 그저 남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에 획일적으로 적용할 경우 오히려 그 고유성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나라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개인들은 태어날 때 각기 서로 다른 천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나므로 사람들 모두 각기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정의롭고 좋은 나라가 되려면 구성원들 모두가 행복해야 하므로 각기 자신의 천성과 소질에 맞는 역할이 부여되어야 하고 그 역할을 보다 잘 해낼 수 있도록 나라는 그들에게 그에 걸맞은 교육과 양육을 끊임없이 베풀어야 하고 그러한 역할의 부여와 교육과 양육의 과정들이 과연 적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천성 또한 가능성이지 필연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요컨대 이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태생적인 요인과 그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욕망의 구조가 서로 상이하다. 어떤 이들은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나라 지키는 일을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뭔가를 만들기를 좋아하며 어떤 이들은 장사를 좋아한다. 사실 이러한 플라톤의 본성론은 사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태생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오늘날 획일적인 인간관이 훨씬 낯설고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적성과 소질보다는 부와 출세 욕망에 기울도록 순치되면서 오늘날 인간의 욕망은 이기적인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어 마치 그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한 시대의 사회적 변화가 초래한 획일화된 욕망을 마치 태생적인 본성인 양 고착시킨 근대인들과 다르게 아테네의 물질적 이기주의를 다만 당대의 사회적 격변이 초래한 자연적 본성의 왜곡과 타락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전복하는 사회적 변혁과 일관된 교육을 통해 인간 본래의 자연적 본성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획일적인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며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고 갈등하는 사회적 현실에 저항하며 그와 전혀 다른 우주적 자연에 걸맞은 정치 사회적 변혁 즉 태생적으로 서로 다른 욕망들의 조화와 공존이 관철되는 사회적 변혁을 꿈꾸었고 그에 따른 기본 원칙과 실천적 전략으로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어쨌거나 정의와 행복이 일치하는 나라를 보다 완전하게 뒷받침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논의 노선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런데 미리 유념해두어야 할 것은 종국에 가서 정의와 행복이 일치하는 나라와 개인이 확립되고 논증되었다고 하더라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다만 본(本, paradeigma)으로서 확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472c-d) 즉 그러한 정의로운 나라의 구현이 수호자들의 목표로 설정되어도 본이 반드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구현 능력으로서 영혼의 수준이 늘 변수로 개입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도 완벽한 수준의 교육이 담보되지 않는 한, 수호자들이 실제 현실에서 자기들의 책무를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수행하기를 힘들어하고 언제든지 그것을 거부하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플라톤이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로 하여 자신들의 일에 대해 가능한 한 최고의 장인(dēmiourgos)들일 수 있도록 강제하고 설득해야 한다.’(421c)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제와 설득은 자발성의 한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되 그 자체로는 대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섞여 있다. 교육과 훈련이 최상의 단계로 이루어져 최고의 장인이 되면 거의 자발적인 수준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늘 교육과 훈련의 방향과 반대로 될 가능성이 늘 함께 있다. 강제는 나쁘게 될 가능성에 대한 대처 방안이고 설득은 더 좋게 될 가능성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함께 공존한다. 이렇듯 플라톤에게 나라와 개인에 있어 지적 훈련은 존재론적으로 늘 가변적인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그 자체로 긴장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모두 다 함께 성장하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혀도 각 집단이 과연 자연적 성향에 맞는 행복에 참여하는지 늘 지켜보아야 한다.(421c) 이점에서도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존재론 그리고 교육론은 하나로 만난다.

 

[421c-423d]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문제 제기에 답한 후 그 문제와 형제가 되는 문제를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후 다른 장인들을 망치고 나쁘게 만드는 것들로서 부πλοῦτος와 가난πενία을 제시한다.(421d) 왜냐하면 부는 장인들로 하여 기술에 관심을 덜 기울이게 하여 게으르고 나태하게 만들고, 가난은 기술에 필요한 장비나 다른 어떤 것을 갖출 수가 없게 하여 일도 더 형편없게πονηρός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이나 그가 가르치는 다른 사람들을 더 나쁜 장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421e) 즉 가난과 부는 기술의 결과물τά ἔργα은 물론 그 자신도 더 나빠지게χείρων 만든다. 결국 수호자들 몰래 나라로 기어서 들어가지 않도록 어떻게든 지켜야 할 것들 즉 부와 가난이 찾아진 셈이다. 부는 사치τρυφή와 게으름ἀργία과 변혁νεωτερισμός을 불러일으키고 가난은 변혁은 물론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기량저하κακουργία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422a)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나라가 재물χρήματα을 갖지 않고 크고 부유한 나라를 상대로 어떻게 전쟁을 치를 수 있는지를 묻는다.(422b)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나라 하나를 상대로는 더 어렵지만, 두 나라를 상대로는 더 쉬울 것이라고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는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은 전쟁의 선수ἀθλητής로서 가장 훌륭하게 훈련된 한 명의 권투선수πύκτης가 권투를 모르는 부유하고 살찐 두 명을 이길 수 있듯이 아무리 수가 더 많다고 하더라고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한다.(422c) 게다가 설사 부자들이 권투기술에 대한 앎ἐπιστήμῃ과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 수호자들보다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전투 기술은 갖고 있지 못하므로 수호자들은 자신들보다 두세 배 많은 사람과도 쉽게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422c-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두 나라 가운데 한 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이 나라에서는 소유가 금지되어 소용이 없는 금화와 은화를 주는 조건으로 연합 전쟁을 제안할 경우 그 나라는 다부지고 날렵한 개들과 싸우기보다 개들과 한편이 되어 허약한 양떼와 싸우기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422d)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게 해서 만약 다른 나라들의 재물이 한 나라에 집결된다면 그로 인해 부유하지 않은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 되진 않을까 재차 의문을 표한다.(422d)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나라도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니 속 편한 사람이라고 힐난하고 그런 나라들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 말처럼 각기 ‘수많은 나라들’πάμπολλαι이지 ‘나라’πόλις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나라들은 어떤 경우이든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나라 즉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를 가지고 있고(423e) 이 두 나라 각각 안에도 아주 많은 나라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라들을 하나μία로 보지 말고 여럿으로 보고 대응하여 한쪽 편에 다른 편의 재물과 권력을 주거나 그 사람들 자체까지 주면 언제나 동맹군은 많이, 적은 적게 갖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식으로 절제 있게 나라가 운영될 경우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οἱ προπολεμοῦντες이 천χίλιο명만 있더라도 그 나라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하나인 나라이며(423a) 이런 나라는 그리스 사람Ἕλλην들 사이에서도 이민족βάρβαρος들 사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영토와 관련한 가장 훌륭한 기준ὅρος을 제시한다. 즉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선까지만 키워야 하며 이에 따라 수호자들에게도(423b)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작은 나라 또는 큰 나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다만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게 되게끔 수호하라고 임무πρόσταγμα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임무는 그들에게 쉬운 임무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쉽기로 말하면 앞서 말한 임무 즉 수호자들의 태생과 계층 이동과 관련한 임무(415b)가 그보다 훨씬 쉬운φαῦλος ἴσως 임무라고 말한 후 그 말의 취지가 다른 시민들도 ‘각자가 저마다 자신이 타고난 본성에 맞게 한 가지 일을 맡아야 한다.’πρὸς ὅ τις πέφυκεν, πρὸς τοῦτο ἕνα πρὸς ἓν ἕκαστον ἔργον δεῖ κομίζειν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다시 또 환기한다. 즉 시민들이 자기의 일 하나에 전념함으로써ἐπιτηδεύων 각자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온 나라가 여럿이 아니라 한 나라ἡ πόλις μία로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423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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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혁νεωτερισμός(422a)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급진적 변혁의 시도(to attempt anything new, make a violent change) 즉 혁명에 준하는 일종의 정치·사회적 변혁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부와 가난은 나라와 기술의 결과물은 물론 자기 자신도 나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 말은 부와 가난은 개인 차원에서도 영혼의 변화 그것도 변혁에 가까운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적도(適度) 이상의 부와 가난은 사람을 돌게 만든다.

*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422a)은 자유ελευθερία라는 말에 부정어 ἀν이 붙은 것으로 말 그대로 자유민답지 못함, 노예근성, 옹색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 권투의 비유(422c)는 이중적이다. 선수의 비유는 전문성과 비전문성을 대립시킨 것이고 기술의 비유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과 여러 사람의 통솔과 관련된 기술을 대립시킨 것이다.

*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οἱ προπολεμοῦντες이 천χίλιο명만 있더라도’(423a) 이 구절은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으나 이상국가에서 수호자 집단의 머릿수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적정 규모의 인구를 <법률>의 신생 국가 마그네시아의 인구( 총5040세대 즉 가족이나 노예를 포함해서 약 최소 3-4만명 정도)로 추산해도 수호자들의 수는 전체 인구에서 4%를 넘지 않는다. 참고로 당대 아테네의 인구는 25-3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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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국가>에서 수호자들의 임무를 단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수호자의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수호는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막는 것과 내부에서 생기는 내분이나 내란을 막는 것으로 나뉜다. 그런데 플라톤에게 이 두 가지 임무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단 하나 즉 나라의 분열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자의 임무 즉 내분을 막으면 자연스럽게 외부로부터의 침입도 막을 수 있다. 분열은 나라를 수호하는 데 가장 나쁜 요인이다. 이것은 적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적군을 분열시키고 동맹군을 만드는 것이 나라 수호의 최선의 전략이 된다. 요컨대 나라를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수호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그런데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것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가 다름 아닌 부와 가난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평화 시에 수호자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전술과 전략의 개발과 전투력의 증강 이전에 나라 안에서 부의 편중과 그로 인하여 생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적대적 대립을 막는 것 즉 부와 가난의 양극화를 막는 것이다.

* 수호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분열을 막는 것이고 그 분열의 근본 원인이 부와 가난이라 함은 뒤집어 말해 플라톤 역시 그의 경험과 인식 속에서 나라의 존망을 해치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이 다름 아닌 경제적 모순이라는 사실을 이미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을 통해 생산 관계의 모순을 사회 변동의 근본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생각과 일정 부분 닿아 있다. 다만 플라톤은 그 모순을 미리 해소하려는 입장이고 마르크스는 그 모순을 역사 과정의 필연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변혁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정치체제 변동과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경제적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두 사람 간에 차이가 없다. 그만큼 플라톤에게도 경제적 문제는 정치의 지상과제였다.

* 다른 나라의 재물이 한 나라에 집결하였을 경우 그 부유한 나라를 적국으로 두었을 때 대처 방안도 결국 부와 가난의 문제가 답변의 관건을 구성한다. 한 마디로 플라톤은 다른 나라의 재물을 가져다 부유해진 나라는 ‘한 나라’(mia polis)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 또는 그 이상의 나라들로 분열된 ‘수많은 나라들’(panpollai)이므로 그 나라 역시 분열책에 의해 제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절제 있게 운영되는 나라야 말로 비록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이 천명만 있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하나인 나라이다.(423a)

* 여기서 다른 나라의 재물을 갖다가 부유해진 나라는 다름 아닌 당대 제국주의 아테네를 가리킬 것이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단합하여 부유한 나라 페르시아를 물리쳤지만, 그 후 아테네 동맹이란 이름으로 다른 폴리스들의 재물을 모아 강대한 제국으로서 부를 누렸다. 그러나 아테네는 같은 그리스 민족인 스파르타와 분열하여 오랜 기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빈부의 양극화가 초래한 내분에 시달리면서 결국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다른 나라를 상대로 싸울 때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대비책은 일종의 두 나라 사이를 분열시키는 대책으로 한 나라를 금과 은으로 유인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복잡한 국제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한 나라의 안보 관련 전략치고는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나라의 안보를 담보하는 가장 큰 방책의 하나가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고 그 동맹 여부를 결정하는 큰 요소가 경제적 이익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전략의 대원칙에서는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상 국가에서 동맹을 위한 경제적 유인책으로서 금과 은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금과 은이 이상 국가에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수호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소용 가치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상 국가에서 통치자나 개인 모두 금과 은의 소유가 금지될지언정 이상 국가 또한 국유재산으로서 금과 은의 축적을 중시하는 나라 즉 국부까지 소홀히 하지는 않는 나라라 할 것이다.

* 그러함에도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들에 대한 플라톤의 시선은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일단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가 아니라 부자의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어 있고 그 두 개의 나라는 또 더 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부유하면서도 분열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기본 관점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들의 경험 속에서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를테면 오늘날 북구 유럽 등 복지 국가들은 부유하면서도 나름 안정적인 통합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이 왜 그런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플라톤 견해의 배경에는 인간 본성과 욕망구조의 변화와 관련한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입장이 자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인간 본성론은 수차 언급했지만, 태생적으로 다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상 국가의 목표는 구성원들로 하여 그 다양한 소질과 욕망에 따라 역할을 수행케 하고 그에 따른 자신만의 고유한 성취와 행복감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은 제8권에서 그러한 본래의 자연적 욕망구조가 현실 국가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타락되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그 타락의 과정을 쉽게 요약하자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이기적 물질적 욕망에 물 들은 권력자들이 권력을 부의 축적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부의 부당한 착취와 편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애초 다양한 소질과 욕망을 갖고 서로 공존하던 사람들마저 각자도생하게 되고 결국 모든 사람의 욕망이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왜곡되고 획일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욕망으로 서로 다른 가치를 성취하며 각기 고유한 행복감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하면서 권력자들에 대한 의심은 물론 이웃들까지 부의 획득을 위한 경쟁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결국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조화와 공존 대신 구성원들 모두에 대한 구성원들 모두의 경쟁적 싸움과 배타적 의심의 체제로서 민주정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민주정 하에서 이기적 경쟁과 불신 그로 인한 누명과 소송이 일상화되면서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 부익부 빈익빈이 초래되고, 그에 따른 민중들의 변혁 욕구와 선동정치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참혹한 참주정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러한 분석의 배경에는 그가 겪은 당대 아테네 제국주의의 폐해가 자리 잡고 있지만 프롬(E. Fromm)도 시사하고 있듯이 오늘날 현대 파시즘의 등장 배경과 관련해서도 탁월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의 세계사적 현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형식 민주주의가 찰떡같이 결탁하여 견고하게 똬리를 튼 이래 나라와 개인들 모두 부의 축적을 지상의 가치인 양 목매고 있고 그 결과 나라들 사이는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극단적인 수준의 빈부 양극화가 이미 고착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북구의 복지국가마저 강대국들의 위협에 둘러싸여 분배보다는 총량적 성장을 위한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고 효율 지상주의와 거대 자본이 결합한 정보 산업의 급속한 발달은 그에 비례하여 기존의 국가 간 개인 간 양극화의 골을 가히 불가해의 수준으로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부유한 나라는 있어도 분열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는 플라톤의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면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빈부 양극화 문제를 플라톤은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 다시 말해 이상 국가의 수호자들은 자신들의 핵심 임무인 부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어떤 구체적인 임무들을 수행해야 할까? 우선 소크라테스는 분열되지 않은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영토와 관련하여 매우 절제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선까지만 키워야 하고 이에 따라 수호자들에게도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작은 나라 또는 큰 나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다만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가 되도록 수호하라고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423b) 요컨대 아테네 제국이 수행했던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을 중지하고 부국강병의 책무는 나라의 방어와 시민의 안정적 삶에 충분할 정도만 목표로 삼아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나라를 어찌 나치 제국과 연관시킬 수 있을까?) 아무려나 플라톤의 이러한 제안 역시 오늘날 패권주의가 판치는 현실에서 보면 순진할 수밖에 없으나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 그렇듯이 그것이 갖는 정치철학적 함의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어 앞으로 정치적 변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추동하는 정치적 대의로 시대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다.

* 참고로 빈부 격차의 해결 방안과 관련하여 <국가>가 이러한 대원칙을 표방했다면 <법률>은 빈부의 격차를 막기 위한 이보다 훨씬 더 세부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크레테 원주민과 이주민으로 세워지는 새 나라는 기존에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 때문에 재산들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 시민들은 재산에 따라 4개 등급으로 구분되지만 최초 집과 토지는 공평하게 분배되며 재산의 경우 또한 비록 최하위 등급일지라도 최소한 가난함의 한계로 설정된 기준 이상의 기본 재산이 할당된다. 물론 이 등급은 재산의 변화에 따라 바뀌지만 아무리 부를 늘리거나 이미 최상위 등급으로 있다 해도 최하위 등급에게 부여된 기본 할당 재산의 4배를 넘게 소유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행운에 의해 그 이상의 초과분을 획득했을 경우 초과분의 절반은 세금으로 나라에 바쳐야 하고 기타 세금은 모두 공적 장부에 등록된 소유 재산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부과된다.(<법률> 744c-745a)

* 이렇듯 오늘날 우연적 행운에 의해 발생한 이익 중 일부를 중과세 제도를 통해 우연적 불운에 의해 초래된 손실에 벌충해 주는 복지 제도 또한 플라톤에서 기원한 것이다. 오늘날 정례 수익이나 연봉에서 최하 등급과 최고 등급의 차이가 10배 정도도 아니고 100배를 넘는 경우도 허다하고 상류층 5%의 재산 총액이 나머지 계층 95% 사람들의 재산 총액과 맞먹는다는 것을 만약 플라톤이 안다면 크게 충격을 받을 것이고 게다가 그러함에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기절까지도 했을 것이다.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재산으로 환산하는 반인권적 작태가 이미 일상화된 오늘날이기는 하지만 특수한 경우의 상여도 아니고 평균적인 급여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100배가 넘는다는 것은 한 인간이 평균적인 능력에서 100배 이상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그 또한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이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기득권적 권력과 자본의 억압구조 또한 무서울 정도로 견고하다.

* 나라의 규모와 영토 관련 임무보다는 비교적 쉬운 임무이지만 그래도 수호자들이 수행할 가장 중대한 임무는 앞서 말한 대로 구성원들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소질과 적성에 맞게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맡아 일하게 하여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공리주의와도 크게 다르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토대로 다다익선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소수자의 희생과 불행을 불가피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자기 욕망을 구현하고 구현한 만큼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이곳 플라톤의 말 그대로 ‘시민들이 자기 일 하나에 전념함으로써 각자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온 나라가 여럿이 아니라 한 나라로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423c-d) 지장보살이 지옥에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극락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 결코 한 사람이라도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261a17~1261b15에서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 즉 ‘나라의 하나 됨’에 주목하여 플라톤이 나라가 갖는 개별적 다수성(plēthos) 내지 다양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총화단결을 외치는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으로는 타당하지만,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욕망과 소질을 가진 구성원들의 조화와 공존을 바탕으로 하나의 나라를 구축하려는 플라톤에 대한 비판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경험적으로 드러난 개별적 사회 현상들과 제도 및 체제에 크게 주목한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해석들은 개인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을 토대로 나라 구성원 전체의 조화를 해명하려는 플라톤의 영혼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끝- (1-3-3 수호자들의 임무(423e- 427c)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㊻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2 수호자들의 생활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15d-416b]

*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한 후 그곳에서 거론된 수호자들이 통치자들의 지도하에ἡγουμένων 어떤 곳에 진을 치고στρατοπεδεύσασθα 어떤 방식으로 생활해야 하는지를 간략히 언급한다. 우선 수호자들이 진을 쳐야 할 곳은 법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내부자들을 최대한 통제하고κατέχω 외부 적들의 침입을 가장 잘 막아낼 수 있는ἀπαμύνω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돈벌이 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사람들이 아닌 군인στρατιωτικός들에게 적합한 숙소οἴκησις로서 혹한과 혹서에 충분히 버틸만해야 한다.(415d-e)

* 돈벌이하는 사람들과 군인들은 다르다. 양치기ποιμήν들에게는 양 떼의 보조자인 개κύων들이 제멋대로이거나ἀκολασία 배고픔 또는 다른 나쁜 습성으로 인해 개들이 가축πρόβατον들에게 못된 짓을 하려 드는 것은 늑대λύκος를 닮은 개를 키우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끔찍하고δεινός 부끄러운αἰσχρός 일이다.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ς이 시민πολίτης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σύμμαχος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δεσπότης을 닮아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φυλακτέον 정말로 훌륭하게 교육을 받아 스스로도 최대의 경계심εὐλάβει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416a-b)

* 이에 글라우콘은 ‘수호자들이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꼭 그렇다는 것은 단언할 수διισχυρίζεσθαι 없지만, 수호자들이 자신들끼리는 물론 자신들이 수호하는 사람들에게 온순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을 갖추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416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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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바른 교육ὀρθῆ παιδεία(416c)은 단순한 앎을 넘어서 실천을 수반하는 능력의 함양까지 포함하는 교육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우리말 ‘운전을 할 줄 안다’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냥 머릿속에서만 간직하는 그런 수준의 앎을 위한 교육은 아직 제대로 된 올바른 교육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교육의 구체적 내용은 나중 7권에서 다루어진다. 그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교육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의 교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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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기술되고 있는 생활 방식은 통치자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통치자 자신들을 포함한 수호자들 전체의 생활방식이다.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 여러 가지 생활방식 역시 나라의 수립단계에서 대략의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서 5권 이후에 가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된다. 우선 수호자들은 모두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그들이 공동생활하게 될 거처의 요건부터 언급된다. 진을 쳐야 한다는 말이 시사하고 있듯이 그들의 거처는 말 그대로 병영이자 군사 요새이다. 안으로는 내부자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들의 거처가 이러한 까닭은 이들이 돈벌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힘을 가진 군인들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본분은 양치기를 보조하는 개의 역할과 같다. 여기서 통치자들은 양치기들로, 수호자들 즉 군인들은 개로 비유되고 양떼와 가축들은 시민들로 늑대는 참주로 비유된다. 무엇보다도 개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또는 기타 나쁜 습성으로 양 떼들 즉 시민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민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호적인 동맹군들 즉 통치자들을 닮기는커녕 사나운 주인 즉 참주 같은 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수호자들이 참주 같은 자들을 닮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다해 감시해야 하고 스스로도 경계심을 갖도록 정말로 훌륭한 교육을 해야 한다.

*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우선 수호자들이 머물 거처의 요건 으로서 법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가 언급되고 있고 둘째로 나쁜 습성들로 시민들을 해치지 않도록 수호자들에 대한 다각적인 감시가 언급되어 있으며 셋째로 수호자들끼리는 물론 시민들에게 온순하게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필수 조건임은 단언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수호자들이 천성적으로 훌륭하게 태어났고 그 후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고 스스로에 대한 경계심을 보전하더라도 언제든지 다른 길로 비껴나 나쁜 습성을 가질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란을 일으켜 참주 같은 사람까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내부자들이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언급은 그러한 내란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일부 수호자들은 무절제나 굶주림, 나쁜 습성이 생겨 공동생활에서 이탈할 수도 있으므로 처음부터 공동생활의 거처 또한 외부의 적에 대한 고려는 물론 그러한 내부자들에 대한 통제의 적합성까지도 함께 고려되었던 것이다.

* 이 점은 플라톤 역시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지 않았거나 처음부터 이기적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수호자들이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이기적 본성을 드러냈다는 데에 방점이 있지 않고 인간이 나쁜 영향을 받으면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데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플라톤에게 인간의 본성은 건국신화에도 보이듯이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각기 다르며 그에 따라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달라 천성적으로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 돈을 좋아하거나 뭔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뉜다. 다만 건국신화가 동시에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나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선대와 다른 천성을 갖고 태어날 수도 있고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다른 소질과 욕망으로 변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특히 이기적인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들은 매우 공격적이어서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은 물론 이미 교육을 받은 어른들까지도 스스로의 천성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플라톤은 천성이 훌륭한 사람들조차 어느 순간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변질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순수해도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한, 본성이 훼손되는 위기에 늘 둘러싸여 있다. 이에 따라 극단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후천적인 영향에 휩쓸려 영혼의 가장 저급한 물질적 욕구 부분의 지배를 받게 될 경우, 본래의 본성을 상실한 채 결과적으로 모두가 물질적 욕망을 가진 이기적인 인간으로 획일화될 수도 있다.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을 사회관계의 외화로서 규정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서 다양한 소질과 본성들이 공존하고 있는 이상국가가 타락하여 인간 모두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면 그때는 다다익선이 최선이 되어 정치체제 또한 다수결에 따른 민주정이 도래하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 분별력을 상실한 채 선동정치가들에 이용되면서 결국에는 참주정을 초래하는 근본 바탕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분별 있는 인간이라면 모두 끊임없이 치열하게 올바른 배움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서 이성적 영혼의 지배력을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의 지배가 확립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인간은 거꾸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회복하면서 궁극에는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본래의 이상적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의 국가 수립 자체가 그러한 거대한 프로젝트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내적으로 본래의 이타적 본성을 잃지 않도록 이성적 영혼의 힘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되 외적으로도 인간의 본래의 천성과 자연적 소질의 다양성을 변질시키는 위협들에 대한 대처 수단도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거처의 요건들은 그러한 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적절한 방어책으로 제시된 것이고 올바른 교육은 자신의 천성적인 소질과 고유한 욕망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본성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성장 발전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다.

* 물론 글라우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단언διισχυρίζεσθαι이 시사하고 있듯이 교육이 이러한 성장과 발전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내외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상존하고 인간의 본성에도 그것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수호자의 부정적 양태들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의 발로라고 보는 관점들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을 마치 인간 본성의 본질적 측면인 양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부차적인 측면에 대한 분별력 있는 이해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유한 천성과 욕망을 어떻게든 해체되지 않도록 최대한 버텨내려는 인간 영혼의 본질적 측면, 즉 인간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에게 수호자들은 비록 부정적인 영향을 겪을 수는 있을 지라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지성과 명예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천성과 욕망을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배양하고 보전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수호자들은 통치를 통해 여타의 욕망을 가진 다른 계층 사람들과 조화를 도모하면서 이상적인 국가를 이끌어가기를 욕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민들을 온순하게 대할 수 있도록 배움을 통해 늘 지적인 긴장 상태에서 최대한 경계심을 유지함과 동시에 올바른 교육과 실천을 통해 영혼의 이성 부분을 지속해서 배양하고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 이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의 존재론과도 연결된다. 존재론의 기저에는 절대적 모순으로서 존재와 무가 자리한다. 존재는 자체적 존재로서 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에 따라 타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존재 세계는 자체적 존재로서 각기 일자의 속성을 갖는 이데아들의 세계이다. 이데아들은 무에 둘러싸여 있어 각기 일자이자 자체 존재로서 변화를 겪지도 운동도 하지 않는 영원불변 부동의 존재 세계이다. 우주는 그러한 이데아들이 우주 영혼의 상태로 관여되어 있어 영혼의 운동으로서 끊임없이 원운동을 하면서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완벽하게 구현하는 생명체이자 결코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우주의 일부로서 우주와 같이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순수성이 우주 영혼과 달라 영혼에 있어 일정 부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되 타자성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타자와 관계 맺음을 겪으며 변화의 위기에 직면하면서 결국 신체는 사멸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존재자들 또한 인간의 사고가 갖는 모순율에 의해 인간의 개념적 사고 속에서만 형식적 자기 동일성을 가질 뿐 실제로는 물질적 무규정성(apeiron)에 따라 끊임없이 관계 맺음을 겪으며 생성 소멸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 무규정성에 연원하는 해체와 소멸의 위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데아에 관여된 영혼의 힘으로 그 해체와 소멸을 거슬러 우주와 같은 조화와 공존의 삶을 갈망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서로 다른 인간들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원초적 모델이자 현실 구제론의 이론적 토대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우주 영혼과 달리 물질적 무규정성을 완벽히 지배할 수 없기에 각기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에 따라 일정 정도 우주적 삶에 다가갈 수도 있고 반대로 내적 조화를 상실하여 짐승 같은 이기적인 삶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인간의 삶은 가능성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신체의 죽음 이외에 운명적이거나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다. 목적론이나 운명론 내지 결정론은 플라톤과 거리가 멀다. 다만 인간은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우주적 삶을 향한 적극적인 가능성으로서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훌륭함을 가르는 기준은 각 개인에 있어 특히 수호자들에 있어 영혼의 자기 고양의 능력(dynamis)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능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여럿 들 간의 조화와 공존을 파괴하고 경쟁에서 이겨 자기만이 우뚝 서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능력이고, 반대로 플라톤이 강조하는 능력은 자기다움을 최대한 발휘하되 자기와 다른 타자들과 조화와 공존을 능히 관철하는 공동체적 삶의 능력으로서 포용적이고 이타적인 능력이다.

[416C-417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τις νοῦν이라면 이 교육에 더해 가능한 한 가장 뛰어난 수호자들이 되는 데 지장도 주지도 않고 다른 시민들에게 못된 짓도 유발하지 않을 여건으로서 숙소 및 다른 재산οὐσία들도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수호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거주하며 생활해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416c-d)

* 1) 수호자들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사적인 재산’ἴδιος οὐσία을 소유해서는κτάομαι 안 된다. 2)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떠한 숙소나 곳간ταμιεῖον도 있어서는 안 된다. 3) 전사들한테 필요한 만큼의 적합한 것ἐπιτήδειος들은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로서 일 년간 쓰기에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를 다른 시민들한테서 받는다. 4) 수호자들은 숙영하는 사람들처럼 공동식사συσσιτία를 일상으로 하며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416d-e)

* 이런 연후에 소크라테스는 특히 수호자들은 금화나 은화를 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들은 이미 영혼 안에 신들로부터 받은 금화χρυσός를 언제나 갖고 있어서 별도로 인간적인ἀνθρώπειος 금화와 은화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신적인θεῖος 금화의 소유κτῆσις를 사멸하는 불경한 금화의 소유와 섞어서 오염시키는 것은 전혀 경건하지 못하다ἀνόσιο.(416e-417a)

* 그럼에도 만약 수호자들이 땅과 집과 화폐를 소유한다면 그들은 수호자가 아니라 가정관리자와 농부가 될 것이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동맹군이 아니라 적대적인 주인이 되어 미워하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며, 계략을 꾸미기도 하고 계략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평생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ἔξωθεν 적들보다도 내부의ἔνδον 적을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며, 그때는 이미 그들 자신도 나라도 파멸ὄλεθρος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417a-b)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숙소와 생활 방식에 대한 이러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사항들이 법으로 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4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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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식사συσσιτία(416e)는 스파르타의 상위 계급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ai)의 생활방식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제도는 스파르타인들의 내적 결속과 공동체 정신을 위해 기원전 8세기 뤼쿠르고스 체제에서 확립된 이래 기원전 5세기 멸망기까지 지속했다. 스파르티아타이에 속하는 남성들은 만 7세 이후 우리가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 부르는 일종의 집단적 군사 교육으로서 아고게(agōgē)를 받아야 했다.

* 수호자들은 시민들로부터 생활필수품 정도만 보급을 받았다. 그것을 수호에 대한 ‘보수’μισθός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의 활동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고 나름의 역할에 합당한 대우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 국가에서 각 계층의 욕구 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나름의 소질에 기초한 인정 욕구는 동일하며 그러한 소질을 잘 성취하여 얻게 되는 행복감 또한 동일하다. 수호자들은 비록 재산에서는 생활필수품 정도만 소유하지만, 그들은 다른 계층과 달리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명예라는 특전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공평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수호자들의 공동생활과 사유 재산의 금지는 매우 과격해 보이지만 실제 동서양 역사 전체를 보면 오늘날까지도 가톨릭과 불교 수도자 전통에서 그와 비슷한 생활방식이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고, 하물며 중동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교일치 차원에까지 급진화 되어 종교 수도자들이 정치 지도자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정치 수도자 집단을 구성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이 정치 권력의 편중과 관련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 그대로 논의되기는 매우 힘들겠지만, 그 구상의 대원칙만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단순 매도할 수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정치 권력자들과 재력의 결탁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플라톤의 구상은 시대 현실에 부합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채택되면서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 여기서는 수호자들의 계층이동에 있어 하향 이동만 언급되어 있어나 상향 이동도 함께 열려 있다.(415c)

* 권력자들인 수호자들의 거처와 생활 방식에 대한 내용이 모두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는 언급 또한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단지 인치에만 의존하는 정치체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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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수호자들을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거처의 요건을 언급한 후에 곧바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으로서 가히 과격하다고 할 정도로 사유 재산의 금지를 선언한다. 수호자들에게는 땅과 집, 화폐의 소유는 물론 사적 공간도 금지되며 금화나 은화들을 손에 쥐거나 손대는 것, 한 지붕 아래에 두는 것, 그것들로 된 것을 몸에 두르거나 그것들로 된 것으로 마시는 것까지 모두 금지된다. 이에 글라우콘도 크게 놀라 그러한 정도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과연 수호자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지 의심을 표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도 시민 모두의 행복을 지향하는 원칙의 차원에서 제시된다. 그러나 나중에 5권에 가서 이러한 의심에 더해 처자 공유와 가족 해체에 대한 추가적인 의심들이 더해지면서 소크라테스는 더 힘들고 복잡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명과 논쟁이 펼쳐진다. 이런 점에서도 이 부분 역시 그 구체적 난관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유 재산의 금지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사유 재산의 금지 선언에 대한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의 몇 가지 평가들에 대해서만 간략히 다뤄보고자 한다.

* 우선 오늘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수호자들에 대한 사유 재산의 금지 는 앞서 수호자들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근원적 이기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영향으로부터 수호자들의 타고난 이타적 본성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재산의 사적 소유는 외부의 나쁜 영향들 가운데에서 가장 심대하고 심각한 위험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나라가 맞이하는 가장 큰 위해로서 외적의 침입 이상으로 내부의 분열을 꼽고 있다. 특히 나라의 권력층과 부유층들의 사적 소유에 대한 욕망이 그 분열과 내란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사적 소유가 인정되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언급도 그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417b) 그리고 내부의 분열은 나라는 물론 개인의 파멸도 포함하고 있다.(417b) 그래서 나라의 수호자들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나라를 분열시키는 일이 없는’(464c) 사람들이어야 하고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464d) 해야만 한다.

* 사유재산권의 금지에 관한 플라톤의 주장은 20세기 공산주의의 등장과 함께 그의 이상 국가를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공산주의의 선구적 모델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특히 사유재산을 보편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자연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자들에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가장 경계해야 할 정치체제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데는 최소한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결정적으로는 사유재산의 금지가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 가운데 수호자 계층에만 한정되어 있을 뿐 정작 생산자 계층에게는 사유 재산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수호자 계층은 계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가 가장 작은 최소 집단에 불과하지만(428e), 이상 국가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집단은 나머지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생산자 계층이다. 덧붙여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생산 및 제작, 유통과 관련한 경제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사적인 계약은 물론 과세의 규칙과 항만의 조례 등 시장 상거래의 세칙 또한 존재한다.(425c-d) 나아가 토지와 생산 시설 및 수익, 경영의 권리를 포함한 생산 수단 역시 사적 소유가 가능하고 노예조차 부분적으로 사유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다. 물론 경제 정책은 일종의 통치와 관련한 업무로서 수호자 계층에 의해 결정되지만, 플라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경제 정책은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빈부의 격차를 조정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수호자들의 주요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의 수호를 위한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 빈부 격차의 조정은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정부의 주요 업무로 인식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경제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헌법(제 119조 2항)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져다 준 적도(適度) 이상의 국부의 창출 및 영토의 확장은 반대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강대한 나라가 되기 위한 국부의 창출 자체를 제한하는 조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423a-c 참고) 플라톤 역시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규모의 함선 제작이 은광의 발견과 그것의 수출을 통한 국부의 증대에 있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수호자들에 대한 사적 소유의 금지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의 금지 대상이 이상 국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수호자라는 최소 집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수호자 집단이 이상 국가 전체 인구 비중에서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을 차지하는지는 정확히 추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비록 나라의 방위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수가 천 명뿐일지라도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423a)과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 당대의 인구가 최소 21만 명에서 30만 명(V. Ehrenberg)이었음을 고려하면 수호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0.5%에서 1% 정도에 불과하다.(참고로 아테네 전체 인구 중 30-35%가 노예였고 아테네 경제가 기본적으로 노예 노동에 의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상 국가에도 노예가 있다. 플라톤 역시 노예 노동이 일상화된 시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러나 이상 국가에서는 아테네와 달리 노예를 최대한 이방인 전쟁 포로들에 한정하려 했다.(469c)) 그리고 아테네에서 귀족이나 부유층으로 구성된 중갑 보병(hoplites)의 수가 3만 명의 전체 병사들(이 가운데는 경보병 및 함대 노수병들은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 3000명 정도이고(A. Andrews) 그들만이 공적 목록에 전사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을 근거 삼아 그들을 수호자 계층의 수로 추정한다 해도 그 비중 또한 1.5%에서 3%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이 수치들은 순전히 추정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수호자 계층의 사적 소유의 금지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20세기 소련 공산주의를 비롯한 전체주의 및 독재 국가들 대부분이 결국에는 권력층의 사리사욕 때문에 멸망했음을 고려하면 권력층의 사적 소유를 법적으로 아예 봉쇄하고 있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그러한 나라들과 연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는 권력이 수호자들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수호자들의 권력의 합목적성이 시민이 이익에 한정되어 있고 복수의 철학자들이 돌아가며 통치하는 데다[<법률>에서는 권력을 견제하는 사정관들이 최상위 권력자들의 하나로 위치하고 최고 통치기구인 야간위원회에 위원으로 포함되어 있다.(945e947c. 961a)] 수호자들에게는 명예 이외에 어떠한 사적 소유나 이익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 권력을 철저히 사적 소유의 수단으로 삼은 현대의 전체주의 독재자들과도 원천적으로 구별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굳이 말한다면 계급 차이 자체를 배격하는 공산주의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역할 간의 조화와 공존을 통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의 선구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 그런데 사적 소유가 분열의 원인이 된다면 이상 국가에서 사적 소유가 가능한 생산자 계층은 내적으로 분열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의 내란 대부분은 생산자 계층 내부의 분열에 기인하기보다는 권력자들이 부유층과 결탁하여 시민의 부를 착취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지려는 권력자들의 욕구 때문에 내분이 생겼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내란의 여지는 평생 올바른 교육으로 단련된 철인 통치자들의 이성적 조화 능력을 통해 사전에 해소될 수 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경험적 사실을 아는 현대인에게 플라톤의 구상은 여전히 현실성 없는 시대착오적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톤 역시 현대를 사는 우리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절대 권력의 피폐상을 경험했으며 대화편 곳곳에서 그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켈리아에서 참주정의 적나라한 실체를 몸소 경험한 것을 비롯해 아테네에서도 오죽하면 30인 참주정을 겪으며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 같은 정치체제로까지 보인다고 고백했을까.(<편지들> 324d) 이점에서도 권력과 재력의 분리는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를 기초 지우는 대원칙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오로지 정치와 지성의 결합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플라톤은 어떠한 이론적 실천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철인 통치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지고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멸망해 가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현실 정치 참여 대신 골방에 처박혀 거의 집착이라 할 정도의 이상을 향한 그의 집요함은 아마도 그 자신이 겪은 정치적 참혹상에 대한 세계사적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마치 그가 미래를 내다보기나 한 것처럼 그의 원대한 이상은 서구 정치철학사를 관통하여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참혹한 정치적 절망을 겪은 사람들에게 결코 꺼질 수 없는 횃불로 되살아나 결코 꺾일 수 없는 희망의 푯대로 우리들의 열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 실천을 추동하고 있다. 정치적 이상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변혁을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제3권 끝, 이어서 제4권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427c)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㊺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 통치자와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412b-427c)

   1-3-1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 (2), 건국신화(414c-415d)

 

[412d-414b]

* 통치자들은 연장자이며 수호자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어야 하고 그에 따라 슬기롭고 유능하며 나라에 유익한 것에 평생 열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을 통치자들로 선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들이 ‘전 연령대에 걸쳐’ἐν ἁπάσαις ταῖς ἡλικίαις 그러한 신념δόγμα을 수호하는지φυλακικοί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홀려서든 강요를 받아서든 나라에 가장 좋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소신δόξα을 잊거나ἐπιλανθάνομα 내팽개치는ἐκβάλλουσιν 일이 없는지도 지켜보아야 한다.(412e) 소신이 염두διανοία에서 사라지는 경우는 자발적인ἑκούσιος 경우와 마지못한ἀεκούσιος 경우로 나뉜다. 그런데 잘못된 소신은 나쁜 것이어서 자발적으로 버리겠지만ἐξίημι, 진실한 소신은 좋은ἀγαθός 것이고 좋은 것은 누구나 빼앗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뭔가에 홀리거나 마지못해ἀκουσίως 버리게 된다.(413a)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진실한 소신을 앗기는 경우를 크게 도둑맞는κλαπέντες 경우, 홀리는γοητευθέντες 경우, 강제에 의한βιασθέντες 경우로 나누어 설명한다. 도둑을 맞는 경우는 말λόγος로 설득되어 소신이 바뀌는 경우와 시간이 흘러 자신도 모르게 잊어버리는 경우이다. 그리고 강제에 의한 경우는 고통ὀδύνη이나 슬픔ἀλγηδών 때문에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홀리는 경우는 쾌락ἡδονή으로 넋을 잃거나κηληθέντες 공포φόβος로 뭔가에 두려움을 느껴δείσαντες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이다.(413b-c)

*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이런 경우에 수호자들이 빠져드는지 아닌지를 여러 가지 시험ἅμιλλα을 통해 잘 살펴본 후 나라에 가장 좋은 것을 행하려는 신념δόγμα을 늘 명심하여 좀처럼 속지 않고 어떤 공포나 고통에도 휘둘리지 않는 사람을 가장 훌륭한 수호자로 뽑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시험은 이러하다. 우선 수호자가 가져야 할 신념을 가장 잘 잊어버리게 되거나 가장 잘 속게 될 그런 일들 하도록 지정하여 시험한다. 또한, 갖가지 힘든 일과 고통 그리고 경합ἀγών을 그들에게 부과하여 시험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홀리는 경우에 대한 시험으로 공포의 대상들 속에 몰아넣거나 환락 속에 옮겨 놓아 지켜본다. 그리고 이러한 시험들을 황금을 불 속에서 시험하는 것보다 더 많이 치르게 한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며 모든 상황에서 자기가 배운 시가μουσικῆ의 훌륭한 수호자이자 장단εὔρυθμος과 화음εὐάρμοστον이 잘 맞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나라에 가장 유용한χρησιμώτατος 사람이다.(413e)

* 이처럼 ‘어려서나 젊어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그때마다 시험을 받아 입증된 사람을’τὸν ἀεὶ ἔν τε παισὶ καὶ νεανίσκοις καὶ ἐν ἀνδράσι βασανιζόμενον나라의 통치자요 수호자로 임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예τιμή는 물론 가장 큰 특전μέγιστα γέρα을 누려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제해야 한다.(413e-414a)

* 소크라테스는 이상과 같이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ἐκλογή과 임명κατάστασις에 관한 사항을 마무리하면서 그것을 ‘자세하지는 않은 대략의 설명’ὡς ἐν τύπῳ, μὴ δι᾽ ἀκριβείας, εἰρῆσθαι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임명된 통치자를 수호자 가운데 진정으로 ‘완벽한 수호자’φύλακας παντελεῖς로 따로 구분하고 지금까지 수호자로 불렀던 그 나머지 수호자들을 그 통치자들의 신념을 지지하는 보조자ἐπίκουροι요 조력자βοηθοι로 부른다. (413e-4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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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신념δόγμα은 뭔가 분석하거나 따지기 이전에 태도를 결정할 정도로 이미 확고하게 원칙으로 자리 잡은 생각들이고 소신δόξα은 그러한 신념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 또는 그 신념에 부합하는 좀 더 구체적인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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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논의 계획에 따라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여기서 처음으로 최상위 계층으로서 통치자 계층의 등장을 알림과 동시에 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과 자격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훌륭한 통치자들을 선발하고 임명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혹독한 시험 과정이 언급된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주목해야 할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을 선발하기 위한 과정이 ‘전 연령대에 걸쳐’(413a), ‘어려서나 젊어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그때마다’(413e)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려서부터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기초 교육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통치자들을 선발하기까지 젊은 시절은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아주 오랜 기간 수호자들 사이에서 단계 단계마다 선발 과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통치자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통치자들의 선발과 임명 과정은 그 중대성만큼이나 자세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그에 관한 내용은 의외로 간략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스스로도 통치자의 선발과 임명에 관한 자신의 언급들을 ‘자세하지는 않은 대략의 설명’(414a)이라고 토까지 달고 있다. 이것은 이 부분이 일단 논의 계획상 통치자들을 최상층으로 하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를 드러내는데 우선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통치자들의 선발과 임명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장차 자세하게 다루어질 것임을 암시 또는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제7권에 가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수호자들의 철학 교육과정을 논하면서 그 선발 단계를 구체적인 연령까지 언급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그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해당 부분에서 살피겠지만 참고로 그 개요만 미리 간단히 언급해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통치자들로 선발된다.(540b) 누가 통치자들을 선발하는지는 여전히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최소한 ‘최선자들의 정체’를 구성하는 ‘최선자들’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선발되는지 잘 드러나 있다.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임명에 관해 간략히 언급한 후에 통치자들을 ‘완벽한 수호자들’이라고 언급하는 방식으로 통치자 계층의 등장을 알린다. 그리고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통치자의 선발과 임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 수호자들로 불리었던 젊은이들은 이제부터 그 통치자들의 신념을 위한 보조자들이자 조력자들로 불러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수호자 계층은 비로소 통치자 계층과 조력자 계층 즉 군인 계층으로 분화되고 나라 전체의 기본구조가 통치자 계층, 군인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이루어졌음이 선언된다.

* 요컨대 이 부분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부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그 나라의 기본구조가 통치자 계층을 비롯해 세 계층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그러한 계층들에 상응하는 덕목들과 특징들을 예비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총론적 서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쓰이는 말들과 표현들 그리고 예시된 상황들은 앞으로 개념적으로 드러나게 될 4개의 덕목과 각기 내용상 서로 조응을 이룬다. 소크라테스가 설명하고 있는 그러한 위험들과 그것의 극복을 위한 시험들은 아래와 같다. 우선 소신을 앗기는 위험한 경우들로 크게 1. 도둑맞는 경우, 2. 강제에 의한 경우, 3. 홀리는 경우로 나누고, 내용상 그 경우들은 순서에 따라 각기 1) 말로 설득되어 소신이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 잊어버리는 경우, 2) 고통이나 슬픔 때문에 소신을 바꾸는 경우 3) 쾌락이나 공포 때문에 소신을 고쳐 갖게 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시험도 이에 상응하여 아래와 같이 제시된다. 1의 경우는 신념을 가장 잘 잊게 하거나 속게 만드는 시험을 부과하고 2의 경우는 갖가지 힘든 일과 고통 그리고 경합을 부과한다. 3의 경우는 공포나 환락의 상황을 부과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부여된 상황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이겨낸 사람들을 나라에 가장 유용한 통치자와 수호자로 임명하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예와 특전을 부여한다.

*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예시하고 있는 이와 같은 설명들 가운데 1과 1)은 나중에 명시적으로 드러날 영혼의 각 부분 중 주로 이성 부분과 관련된 상황들이고 2와 2)는 기개 부분, 3과 3)은 욕구 부분과 관련된 상황들임을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다. 그리고 나중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영혼의 각 부분은 그 역할과 기능이 고유하기는 하지만 다른 부분들과 상호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최종적인 결과로서 그 개인 전체 영혼의 상태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상호작용 전체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주체는 영혼의 각 부분 가운데 이성 부분이다.

* 이 부분에서 고통과 슬픔, 공포와 쾌락 등 인간의 희로애락과 관련한 감정 내지는 심리 상태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들 역시 모두 영혼 각 부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영혼의 상태이다. 즉 신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주어진 상황 및 사태에 대한 영혼 각 부분의 대응과 그 대응들의 상호 유기적인 작용의 결과들이다. 요컨대 인간의 제반 심리 상태는 몸에서 생긴 감각적 사태들에 대한 영혼 각 부분의 유기적인 대응 및 관계 양상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나는 영혼 전체의 상태들이다. 이를테면 신체적 고통을 겪거나 쾌락에 빠지는 것은 일차로 몸에서 생긴 감각적 자극에 대해 영혼의 욕구 부분이 기피 또는 애착 욕구를 증대시킴으로써 영혼 전체의 부조화가 야기된 상태이다. 그러나 그 부조화는 이성 부분에 의해 즉시 통제되고 조화의 회복은 영혼 전체의 조화를 관장하는 이성 부분의 힘으로 결정된다. 이성 부분의 통제력이 약해 조화를 회복하지 못하면 상태는 악화되고 통제력을 발휘하면 그 발휘하는 힘의 크기만큼 최선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몸의 건강 상태도 변수가 될 수 있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몸을 다치거나 쇠약하면 그만큼 회복이 어려울 수 있다.

* 우리는 흔히 육체적으로 쾌락에 빠지거나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을 영혼의 세 부분 가운데 욕구 부분 탓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욕구 부분의 과잉이나 결핍 또는, 좋거나 나쁜 상태는 조화를 구현하는데 일정 부분 영향은 줄 수 있을 테지만 궁극적으로 행위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영혼 전체의 조화를 관장하는 영혼의 이성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병들어 있으면 욕구 부분의 과잉이나 결핍을 조정할 수 없거나 아예 반대로 영악한 도구적 이성이 되어 악화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 부분이 건강하면 기개 부분의 힘도 빌어 욕구 부분이 과잉 또는 결핍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조정하여 부조화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은 오감의 기능과 식욕과 성욕 등 본능적 욕구를 가진다. 그러한 기능과 욕구 자체는 도덕과 무관하다. 문제는 감각과 본능에 조응하여 발생하는 그 다양한 욕구들을 이성 부분이 얼마나 상황과 적도에 맞게 조정 하느냐 못 하느냐이다. 당연히 조정의 목표는 다른 영혼의 부분들과의 조화이고 그 조화의 방식과 수준은 천성과 교육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의 수준에 따라 도덕적인 차이도 드러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사고나 행동 양태는 영혼의 상태 특히 이성 부분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방식과 어떤 수준으로 조화를 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욕망하는 대로 살아라!”라는 요즈음 욕망론자들의 권고조차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의 욕구 부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부분이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성은 오히려 오로지 욕구 부분의 크기만을 증대시키는 고도화된 도구적 계산 능력, 즉 병든 영혼의 다른 이름이다. 어떠한 입장이건 그만큼 이성이 중요한 것이다. 다만 플라톤에게 ‘가장 훌륭한 삶’이란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간의 조화를 통해 몸과 영혼 모두 특히 영혼의 이성 부분의 건강을 꾀하고 철학 교육을 통해 그 이성 부분의 힘을 극대화하여 최상의 가치로서 ‘좋음 자체’를 인식하고 그 상태를 흔들림 없이 보전하는 것이다.

* 우리는 종종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말의 의미를 곡해하여 철학자들이란 영혼만을 위해 아예 차라리 자살할 것을 권하는 자들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물론 영혼은 몸과 떨어져도 살아 있고 그만큼 순수하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나 철학이 현실에서 추구하는 ‘좋은 삶’이란 영혼은 물론 몸의 건강까지 포함하는 것이므로 살아 있는 몸의 존재를 필수적 상수로 이미 전제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은 현실 도피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현실 구제론이자 생존의 존재론이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이 몸의 보전 즉 생존을 경시한다고 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 신체적 감각을 비판하는 경우도 신체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감각이 이성과 비교하여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 현실에서 참된 삶은 말 그대로 몸이 없으면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소소하게는 일상에서 먹는 즐거움은 물론 영혼의 조화와 관련된 좋은 음악을 듣거나 좋은 가르침이 담긴 말을 듣는 것도 일단 몸의 감각을 통해서이다. 그만큼 몸은 영혼과 더불어 삶을 담보하는 하나의 축으로 매우 소중한 것이다. 게다가 나라의 수호자들이 시가 교육에만 치우쳐 체육 교육을 게을리하면 몸의 상태가 나빠지고 몸이 나빠지면 결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몸을 다치거나 상하면 그것을 회복하려는 영혼도 힘들고 그만큼 생존도 힘들다. 가장 나쁜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병들어서 영혼 내부의 관계는 물론 몸의 건강도 악화시켜 개인은 물론 나라까지 불행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 재판에서 선고 형량으로 주어지는 몸에 대한 고통은 일반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겠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당사자가 영혼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전하고 있냐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핍박으로 겪는 고통은 이성이 잘 감내하여 영혼의 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이겨낼 수도 있지만, 그 핍박을 못 견디는 사람은 그만큼 영혼의 관계가 부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의 크기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이 땅에서 철학 함의 목표는 영혼들의 조화를 통해 영혼과 몸의 건강을 함께 보전하는 것이지 몸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이미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물론 불가피하게 스스로 몸의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는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어 차라리 몸의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몸과 영혼 하나만의 선택이 강요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몸의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경우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몸을 경시하는 사람으로 보기는 힘들다. 전자는 살고 싶지만 더는 살기가 힘들어 죽는 것이고 후자는 그야말로 영혼의 저질화 내지 훼손(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몸의 죽음 중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몸의 죽음을 선택한 경우이다. 이른바 철학의 연습으로 인식될 만한 죽음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 불가피한 선택 상황에서 지성의 힘으로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감행한 죽음의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에 감행된 좋은 삶의 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

* 아무려나 몸과 영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위와 같은 해석들은 기본적으로 몸 내지 신체 기관들을 영혼이 사용하는 도구로 파악하고 있는 <국가>와 <알키비아데스 I> 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파이돈>, <파이드로스> 등을 끌어들여 함께 비교하면 일정 부분 이견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최소한 <국가>가 플라톤의 영혼론의 핵심이자 가장 발전적인 내용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이견이 없다. 이와 관련한 내용들은 나중 영혼의 세 부분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플라톤의 심신이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좀 더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414b-415d>

*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의 선발과 임명에 관한 언급에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이상 국가 구성원들을 설득하여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고상한γενναῖος 거짓말 즉 건국 신화에 관한 언급을 아주 조심스럽게 주저하며 꺼내어 든다. 건국 신화는 앞선 시대에 여러 사례가 있었긴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있지도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아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414b-c)

* 그러자 글라우콘은 두려워 말고 말해주기를 청하고 소크라테스는 내가 무슨 배짱으로 어떤 표현을 써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아래와 같이 이른바 건국 신화로 일컬어지는 고상한 거짓말을 옛날 설화μῦθος를 빌어 풀어낸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414d – 415d) “당신들이 수호자들이 되기 위해 실제 겪은 앞에서의 양육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 땅γῆ속에서 형성되고 양육되었던 일들에 비하면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고 이미 땅인 어머니가 땅속에서 그들 자신은 물론 무기와 장비까지 다 만들어 당신들을 땅 위로 올려보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어머니와 유모에 대하듯이 국토χώρα를 수호하고 다른 시민들 역시 땅에서 태어난 형제들로 생각해야 한다. 신ὁ θεὸς은 당신들 중에서 다스리기 충분한 사람들의 경우 황금χρυσός을 섞어 빚어냈고 반면에 보조자들은 은ἄργυρος을 그리고 농부와 다른 장인들은 철σίδηρος과 청동χαλκός을 섞어 빚어냈다. 그런데 당신들은 대개 자신과 닮은 자손들을 낳지만 때로는 황금으로 된 사람에게서 은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고 은으로 된 사람으로부터 황금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신은 통치자들에게 가장 뛰어난 수호자가 될 자손을 염두에 두고 자손들의 영혼에 그중 무엇이 섞였는지를 열성적으로 지켜보라 명령했고 그에 따라 자손 중 청동이나 철이 섞여서 태어나면 그들의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만큼의 존중τιμή을 해줘서 장인들이나 농부들로 살게 하고 또한 장인이나 농부들에게서 금이나 은이 섞인 아이가 출생하면 그 역시 존중하여 수호자나 보조자로 상승시키라ἀνάξουσι 했다. 그리고 끝으로 철로 되거나 청동으로 된 수호자가 나라를 수호하게 되는 때에는 나라가 망하리라는 신탁이 있었다.”

* 이에 글라우콘은 후대 사람들은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당대 사람들에게 설득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 소크라테스는 다만 이 이야기는 최소한 나라와 서로에게 관심을 쏟게κήδεσθαι 하는 데 좋을 것 같아 한 말이며 어쨌든 설득 여부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맡기겠다고 말한 후 다시 통치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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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구조와 수호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관한 사항을 개략적으로 언급한 후에 고상한 거짓말이라는 명분으로 일종의 건국 신화를 꺼내어 든다. 지금의 논의가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는 시작 단계에서 일종의 총론적 서론으로 펼쳐지는 것임을 고려하면 당대 그리스 나라들이 그래 왔듯이 나라를 수립하면서 건국 신화를 내건다는 것은 그리 어색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고상한 거짓말 역시 이미 앞에서(382c-d, 389b-c) 그 필요성이 제시된 만큼 새롭게 다시 문제 삼을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여기서 건국 신화를 꺼내어 든 것은 아래와 같은 배경 때문일 것이다. 즉, 새롭게 수립될 나라에서도 앞서 시가 교육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나라 구성원들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유대를 위해 일종의 종교 교육이 필요하고 그러한 종교 교육의 출발점으로서 새로운 건국 신화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건국 신화는 아래와 같이 앞으로 전개될 분업적 공동체로서 정의로운 국가의 기본구조를 설화적인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우선 신화는 나라의 모든 계층이 같은 어머니 즉 땅의 자손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정의로운 나라에서 모두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사람들인 만큼 서로 하나같은 유대감과 충성심으로 하나의 나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신화는 신들이 사람들 각각에 황금, 은, 철이나 동을 섞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고 언급한다. 이것 역시 앞으로 수립될 정의로운 나라가 천성에 따라 세 계층으로 구성되고 그들의 역할 또한 기본적으로 천성적인 차이들을 갖고 있음을 미리 강조해두려는 것이다. 동시에 신화는 때로는 황금으로 된 사람에게서 은으로 된 자손이, 은으로 된 사람으로부터 황금으로 된 자손이 태어나기도 한다고 언급한다. 게다가 그러한 경우 그들의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만큼의 존중을 해줘서 장인들이나 농부들로 살게 하거나 수호자나 보조자로 상승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리고 끝으로 신탁의 이름으로 철로 되거나 청동으로 된 수호자가 나라를 수호하게 되는 때에는 나라가 망하리라는 실로 엄중한 경고가 제시된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가 그토록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앞에서 유익한 거짓말을 정당화할 때와 다르게 아주 주저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하물며 무슨 배짱으로 어떤 표현을 써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한다.(414d)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왜 이토록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일까? 필자가 짐작하는 그 배경과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앞에서 살핀 고상한 거짓말들의 사례들(382c)은 다 나름의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었고 옛날의 설화 경우에도 진실을 알지 못하는 탓에 허구를 가능한 진실과 같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유익함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382d) 2) 그러나 지금 말하려는 고상한 거짓말로서 건국 신화는 있지도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 당장은 그 유익성도 증명할 수 없어 옛날 설화처럼 설득력이 있기 힘들다. 3) 그러나 옛날부터 페니키아를 비롯해(414c) 많은 나라에 건국 신화가 있는 데다가 아테네도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설화를 바탕으로 시가 교육을 해 왔듯이(377d) 정의로운 나라에도 시가 교육의 기초가 될 만한 건국 설화가 필요하다. 4) 신화는 여전히 시민들에게 가장 친숙한 정보 전달 방식인 데다 건국 신화 또한 옛날 설화처럼 언젠가 후손들에게 유익한 허구로 받아들여 지는 날이 올 것이다.(415d) 5) 그리고 지금도 최소한 나라와 서로에게 더 많이 관심을 쏟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415d) 요컨대 건국 신화는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 단계에서 나라의 구조와 정신의 요체를 밝힌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고 장차 시가 교육의 토대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당장은 옛날 설화들과 달리 사실 기술에 있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어 소크라테스는 건국 신화를 내놓는 것에 그토록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저와 조심스러움은 역설적으로 앞으로 보다 더 자세하고 많은 논변을 통해 고상한 거짓말로서 건국 신화의 진실성과 유익성을 보다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의지와 계획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암시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지금은 세상 사람들 생각에 맡기겠다고 말하면서도(415d) 행간 곳곳에서 설득의 방도와 의지를 반복해서 묻거나 피력하고 있는 것도(414c, 414e, 415c) 그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나중 5권 이후 7권에 가서 이른바 격랑 속 파도κῦμα들로 불릴 정도의 수많은 난관을 마주하며 건국 신화의 내용은 물론 정의로운 나라의 정당성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논변들을 전개한다.

* 아무려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건국 신화는 장차 자세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표피적으로만 보면 왕권신수설과 세습군주정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사회 신분이 공고화된 봉건사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태생적 또는 생물학적 차이를 그대로 사회적 차별로 연결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의 고전적 발상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이러한 플라톤의 의도를 허구적 슬로건을 내세워 나치의 이념을 주입하려 했던 괴벨스의 프로퍼갠더와 연결해 플라톤을 혹세무민의 고대적 뿌리라고 극렬하게 비난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부분은 플라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 그러나 앞으로 보다 자세하게 밝혀지겠지만 정작 건국 신화에서 태어날 때 섞여 있다는 황금, 은, 철이나 동은 단순히 천성적으로 정해진 세습적 신분상의 차별과 위계를 의미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분업공동체에서 나라의 구성원들이 나누어 가져야 할 역할들의 차이와 위계를 의미한다. 이들 역할의 종류와 차이는 천성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건국 신화는 태어날 때부터 선대의 천성과 다르게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후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그 소질과 능력이 다시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 모두 태생에 의해서건 그 후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서건 소질과 능력이 다르게 판정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른 계층으로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구성원들 모두는 자질과 능력에 따라 단계마다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 게다가 그 위계의 변동이 상승이건 하강이건 자신이 소질에 따라 그 계층에 귀속되는 한,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은 행복감의 크기에서 차이가 없다. 군대에서 사령관 한 사람의 역할이 병사 한 사람의 역할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역할 상의 위계는 중요도에서 분명 차이가 있지만, 개인들 각각의 차원에서 서로를 선망하거나 폄훼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정의로운 나라에서 각자는 각자의 소질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할 때 비로소 가장 자기답고 행복하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이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건국 신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앞으로 설득력 있는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414c) 끝.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21c)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