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6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의사소통적 이성 이론
『인식과 관심』은 근대적 지식 형식의 기초를 인식하고자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시도였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하버마스가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제시했던 사회적 지식에 관한 역사 맥락적 분석에서 완전히 벗어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틀어 전념하고자 했던 기획으로 이동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저작이었다. 새로운 기획은 의사소통적 이성 이론인데, 그것은 분화된 인간 지식과 행위의 실제적 토대를 이루는 “미시논리적” 수준과 사회적 근대성을 발생시킨 “거시논리적” 수준 모두를 포괄한다. 근대성은 이러한 토대를 구현하는 실천들이 새로운 제도들과 다양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이룩된다.
비판사회이론의 명확한 개념화라는 작업에 있어서 『인식과 관심』의 인간학적 지향을 승인하는 것은 적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언어학, 특히 언어행위이론의 한 분야인 화용론이라는 인접 분과학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는 합리성 이론의 원천을 [언어행위라는] 사회적으로 뿌리내린 일련의 보편적 능력들 속에서 발견하기 위한 시도였다. 언어를 의미 목록으로 여기기보다는 상호주체적 체계이자 조정 행위로 간주하던 하버마스는 어떻게 언어가 실제로 행위 조정에 활용되는지 탐구하였다. 즉 화자와 청자들이 서로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이룩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핵심적 능력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것이다 (CES를 볼 것).
이런 발상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현대 언어학과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이었다. 하버마스는 모든 자연 언어들의 저변에는 보편적인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언어행위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인 화용론적으로 불가피한 기술과 능력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없이는 행위 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라는 화자와 “너”라는 청자의 위치를 자유롭게 번갈아 가며 변환시킴으로써 인칭대명사의 체계 내에서 부여되는 위치를 확정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능력은 올바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발언의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데에 필요하며, 상호주관적인 언어 행위의 대칭적이면서 호혜적인 요구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특히 참이라고 주장되거나 정당화된 발언들의 실천적이면서 사회적인 차원을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보편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초기 저작이래 지속되어왔던 철학과 재구성적 과학들 사이의 밀접한 협업 관계를 대표작인 『의사소통행위이론 (1981 [1984/1987])』에서 마침내 완성된 형태로 주장할 수 있었다. “자리 지키는 자이자 해석자로서의 철학”이라는 논문은 이러한 입장을 요약적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 저작에서 하버마스는 보편적 언어 능력들을 분석하면서 사회적으로 구현된 합리성 이론을 발전시킨다. 이 이론은 성인 화자와 청자들이 집단적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자기 및 상대방에게 부여해야만 하는 언어 능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버마스는 보편적 언어 능력을 재구성하기 위해 여러 학문 분야를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는 언어학과 행위 및 논의 이론, 발달심리학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이론들과 이에 연관된 인지적이고도 도덕적인 학습 과정에 대한 이론적 연구방법들, (인간의 의사소통을 자연 언어에 숙달되는 것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행위로 분석하는) 언어행위이론 그리고 경험적 근거를 지닌 자연적 논의 이론들까지 섭렵하였다.
『의사소통행위이론』 역시 여러 사회학 분야들의 역사, 구조 그리고 목표에 대한 심오하고도 일관된 문제로 구성되어있다. 거기에는 막스 베버의 합리성으로서의 근대화 이론,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에밀 뒤르켐의 세속화 및 집단 의식 변형이론 그리고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 이론에 대한 깊이있는 해독이 망라되어 있다. 이처럼 놀랍게도 다양한 지식들을 묶어내게 되면 그 이론은 중심점이나 안내자 없는 상태로 머무르게 되어 이론 기획 전체가 전복될 위험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서의 철학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하버마스의 입장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이러한 접근 방법은 궁극적으로는 심오한 철학적 시도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은 근대적 주체와 사회적 삶에 대한 근대적 형식들의 바로 그 구조 안에 존재하는 합리적 행위의 잠재력을 찾아내고, 식별하고, 정교화하려는 목적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는 언어 능력에 관해 보편 화용론이 작업하던 세부 사항을 통하거나, 해석 사회학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방법론적 논쟁을 통하는 등의 모든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럼으로써 이런 [근대사회의 합리적] 잠재력에 대한 주요 위협들을 식별해내고, 이러한 위협들에 대응할 수있는 방법을 나타내 보여준다.
하버마스의 지적 영향
하버마스가 철학과 사회 영역에 끼친 가장 의미있고도 지속적인 영향은 물론 추산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개략적으로는 소개할 수 있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는 하버마스의 철학 및 정치이론을 다룬 저작들은 2차대전 이후 반세기와 21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 서양철학의 변형의 와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 영향은 다음과 같은 세 측면으로 부각된다.
학제적 협력
첫째, 위에서 논의했듯이, 하버마스는 철학에 융합적 학제적 백과사전적으로 광범위하게 접근하면서 철학적 활동의 기존 모델(때때로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풍자되었는데)에 사려깊은 대안을 제시하였다. 철학 활동의 기존 모델은 고독하고도 자아 성찰적인 철학자가 내적 의식의 심연에서 심오한 진리를 불러내는 이미지로 그려졌는데, 이와같은 철학적 활동 방식은 2차대전 이후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 하버마스의 철학 저작은 방법론적 고립이라는 이런 이미지를 완전히 등지고 있다. 이제 철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성과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가 오가는 대화의 한 당사자로서 참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철학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전문적 기술 용어로 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견을 공적 토론에 적합하도록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데 도움을 제공하는 통역사로서의 책임이거나 필요하다면 그런 공적 토론의 장에서 심판관으로서의 책임을 맡는 일에 그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은 대중적이다. 아마도 [하버마스의] 이런 철학적 모델은 장구한 세월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역사학이나 제도의 기나긴 역사를 다루는 사회학과 다르다. 이 철학 모델은 자연에 대한 그리고 학문적 혹은 과학적 탐구의 한계에 대한 고도의 자기 성찰성과 자기 인식의 문제를 끈덕지게 다룬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해 독점적으로 접근하게끔 하는 원칙과 방법을 모두 단념했다. 진리에 대한 독점적 태도는 여타 관련 학문에서도 결핍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철학의 본질과 목적을 축소시키는 관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철학에게 과학의 시대에서도 적합성을 유지하도록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는 방도이기도 하다.
이성의 복권
둘째,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성의 복권으로 대표된다. [앞서 보았듯이] 하버마스는 “자리하는 자 및 번역자로서의 철학”이라는 글에서 이제까지 철학은 여타 학문들이 [자기 영역에서 발견한 사실을] 정당하게 인식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학문들이 다양한 인간 문화의 영역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최종적 판단을 내려주는 역할을 맡아왔다고 허세를 부렸는데 그러한 허세를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이 말이 “합리성의 수호자”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포기하여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주체와 이른바 이성적 중핵의 불확정성에 대한 영미 분석적 인식론, 언어철학, 논리학 및 유럽 대륙의 ‘포스트모던’ 이론들의 궤적과는 다르게, 하버마스의 담론이론은 인간이 시도해왔던 모험의 중심에는 이성이 있어야 한다는 고대 철학의 주장을 유보 없이 받아들인다. 나아가 하버마스가 방어하려던 이성이라는 것은 인류의 기본적인 역량이자 재능이다. 우리는 이성이 인간사를 의식적으로 규제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성이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강제적 규범이나 주장들의 원천으로서 간주될 수 있으려면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또한 이성은 토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자연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즉 인간 이성 및 보편적 주장의 원천으로서의 그것의 지위는 자연적 혹은 사회적 진화의 우연한 과정 속에서 얻은 자연적 결과물로 여겨질 수 없다. 이성이 사회적 개인적 규범들의 정당화 요구에 관한 인식가능한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저 성공 전략이나 타산에나 관련된 합리적 계산 능력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궁극적으로 이성은 규범적인 것이다.
이성의 복권과 관련된 이 두 번째 주장은 [철학은 자리하는 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는] 첫 번째 주장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첫 번째 주장은 철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 내 인접 학문과 협력적 상호작용에 나서는 탈신화적 실천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사실 하버마스적 철학의 기획에서 발견되는 독특성은 이 둘[이성에 대한 겸손한 태도와 이성이 인간적 사유와 행위에 있어서 여전히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입장] 간의 조화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기존 특성과 자율성에서 연유하는 역할과 방법을 가치 절하할 것을 요구하는 [겸손한] 입장은 이성의 중심적 위치를 복권하려는 입장과 조화될 수 있다. 만일 하버마스의 작업이 ‘주체 철학’ 및 ‘의식철학’과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에서라면 말이다. ‘주체 철학’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이성을 자율적 주체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입장을 거부하고, 이성이란 단지 상호주관적 상호작용과정에서 도출되는 특성일 뿐이라는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다. ‘의식철학’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철학적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본래적 토론장은 자기 성찰적 정신이 수행하는 내적 삶이라고 여겼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있어서 상호작용은 사회 속에서 주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언어를 매개로 한 것인데, 이런 상호작용은 주체들의 [내적] 자기 관계 과정 속에서 도출된 것으로 간주되며 그에 따라서 패턴화한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상호작용, 즉 상호인격적 의사소통을 하면서 근거들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끌어진다는 것을 요점으로 삼는다. 이런 류의 협동적 의사소통이 성공하려면 관련 담론 절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합의를 지향해야만 한다. 만일 담론 참여자들이 합당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이 담론 절차에 관련된 모든 참여자들은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평등, 호혜성, 솔직함 혹은 비기만성 그리고 공정성의 규칙을 채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은 궁극적으로는 정당화가 가능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조건들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 올바름, 정치적 정의 그리고 법적 공정성과 같은 ‘실생활에서 유통되는(downstream)’ 규범적 주장들을 위한 토대로 기능한다.
하버마스의 저 유명한 ‘담론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규범은 때로는 올바를 수도 있고 그른 것일 수도 있는 행위 계획인데, 이 규범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위에서 언급된 조건들에 의해 조성된 담론 절차 속에서 합의해 낼 수 있을 때에만 정당화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론원칙은 합당성(reasonableness)이 정당성(rightness)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담론원칙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지니고 있는 직관을 철학적 용어로 정련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수행할 수 있고 기꺼이 하기도 하는,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어떤 행위 요구지만 잘 실행되지는 않는 요구이기도 하다. 즉 굳이 전문적 자질이 없어도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올바른 사회에서라면 그들의 정치 체계 내에 될 수 있는 한 정말로 많이 제도화하도록 권고하는 그런 요구인 것이다. 지배는 결국에 가서는 사회의 합리적 잠재력을 좌절시킨다. 그것이 사람들이 서로 강요하는 바 없이 협력 행위를 하도록 하는 기본적 자유를 부정하는 정치 체제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든,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자원들을 말라붙게 하여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은 훨씬 음흉한 형태든 상관없이 그러하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는 하버마스의 거대한 연구주제는 이성과 민주주의의 내적 연관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계몽 기획에 이바지하려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는 그저 정치적 권위(political authority)를 지닌 수많은 그럴싸한 경쟁적 정치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우연에 의해 잠깐 ‘현재 선호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대안들과 비교해 볼 때 합당한 것이라 할 만 하다. 하버마스는 민주적 삶의 합당성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헌신하였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그는 이러한 입장을 모든 적대자들에 맞서 방어해왔다. 이 적대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은 아마도 ‘포스트 모던’ 이론가들로서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버마스는 그들이 이성을 통해 민주적 삶을 강건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방어하리라는 약조를 포기해 버렸다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PDM).
이성을 이렇게 의사소통적이면서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개념으로 회복시키는 입장은 기존 철학이 지니고 있었던 야망을 위해 입증의 토대를 세우는 것을 열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이, 오늘날의 철학과 사유에 영향을 끼친 하버마스의 핵심 요소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상호주관적 이성의 본성을 다시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 시대에서는 지지하기 어려운 전체론(holism)을 재생하려는 실질적이고 배타적이며 궁극적으로는 교활한 노력과, 합리성 담론을 전적으로 단념하는 풍조(이러한 풍조는 현대적 삶의 형식으로서의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를 정당화하는 손쉬운 냉소주의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항해해 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탈형이상학적 사유
이것[탈형이상학적 사유]은 하버마스의 철학적 영향에 있어서 세 번째 및 마지막 측면으로 소개될만한 것이다. 수십년 간 하버마스는 자기의 철학적 기획을 ‘탈형이상학적(PMT)’이라고 일관되게 규정해왔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하버마스의 모든 사유에 있어서 중심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결여되어 있다. 이 용어는 특별한 철학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저술하는 방법을 위한 넓은 차원의 정신 혹은 전제(postulate)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우선 칸트적 주장을 수반한다. 즉 영혼불멸,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존재, 도덕적 의지의 자유의 사실 등의 철학적 형이상학의 전통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며 그러한 문제들은 인간의 끊임없는 관심사임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들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탐구는 우리 인간이 확정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조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이 무엇인지 인식하고자 하는 관심은 결국에는 인간의 인식 가능성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특정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하게는 탈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하버마스의 관점은 변화한 근대세계 안에서의 변화한 철학적 역할과 관련된다. 롤스의 ‘비이상주의적 non-ideal’ 정치이론 작업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게 하버마스는 근대 사회의 현실이 복잡성, 다원주의 그리고 다양성을 향해 극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게끔 전개되고 있다고 논평한다. 이러한 전개양상은 철학이 정당하게 해명하고자 할 수 있는 문제 설정에 있어서 강력한 제한을 두게끔 한다. 롤스가 근대 민주사회에서는 전체론적 가치 합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가치다원주의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듯이, 하버마스 역시 근대성에 대한 ‘탈중심화된’ 자기 이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근대사회는 삶과 가치와 좋음의 이상과 연관된 기본적 지향에 대한 폭넓은 합의를 강제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다원주의의 조건과 좋은 삶에 대한 관념에 대한 갈등 아래서, 근대적 생활형식의 합리성은 오직 갈등을 규제하고 사회적 연대를 산출해내는 합당한 절차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으며, 이러한 합당한 절차들은 민주적 자기지배의 실천과 근대 민주 시민들이 지닌 관용적이고 겸손한 태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의사소통 합리성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근대사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철학이 근대사회적 실존의 합리성을 인식하고 다듬으며, 혹시 가능하다면, 증진시키기는 일을 다시 맡아 보기 위해서는 초월적 지식과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를 획득하려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이 임무는 비록 기존의 것에 비해 훨씬 보잘 것 없지만 여전히 중대한 임무다.
공적 지식인이자 조언자
하버마스가 2차대전 이후 끼친 광범위한 영향에 대한 논의는 철학 이외의 다른 두 영역에 대한 언급 없이는 끝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하버마스는 철학자로서 이론화했던 ‘정치적 공영역’에 공적 지식인으로 관여하면서 괄목할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독일이나 세계 독자들을 대상으로 국제적 사안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열렸던 회담이나 토론에 하버마스가 참가하지 않은 적은 거의 드물었다.
하버마스가 참여했던 논쟁이 몇 개나 되고 어느 범위까지였는지 세세히 밝히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몇몇 부분을 부각시켜보기만 해도 그 영향력은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1950년대 하버마스는 새로운 독일연방공화국이 민주적 지배의 요구를 그저 관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위해 갖춰야할 정치문화의 이행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핵심적 목소리를 냈다. 교육과정 개혁 문제부터 서독의 국제 협약, 모든 국내 정치적 사안, 전후 배상 및 기념 사업에 관한 정책에 이르기까지 하버마스는 일관되게 열린 사회를 요구해 왔다. 냉전이 종식될 때 하버마스는 독일 통일이 자기 반성적인 토의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소리 높였고, 통일 이후로는 유럽 연합 내 독일의 역할과 유럽연합의 정치적 통합과 확장의 중요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논평자로 활약해왔다(DW). 근래에 하버마스는 유전자 기술의 도덕적 정치적 측면에 대한 논쟁과 서유럽의 ‘세속적’ 사회 내 공적 삶에 있어서 종교 및 종교적 가치의 역할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여러 개입 과정을 통틀어 보자면, 하버마스의 작업은 공적 철학자이자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통합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탈형이상학적인 민주적 세계에서는 좋은 근거들만이 유일하게 궁극적 보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지난 반세기 동안 하버마스는 활동적 철학자로 활약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분포된 후배 학자들의 지적 성장을 촉진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버마스의 이전 제자들은 독일에서는 악셀 호네트, 하우케 브룬트호르스트, 라이너 포르스트, 그리고 미국에서는 토마스 매카시, 세일러 벤하비브, 낸시 프레이저와 같은 이들인데, 사실 이들이 비판이론 ‘3세대’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