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 허리우스가 우리의 비극적인 삶, 요즘말로 웃픈 현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를 펼쳐내는 코너입니다. 많은 관심과 의견 또는 토론을 기대합니다.

로보가즘(robogasm) [퍼농유]

우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미래학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오래된 미래를 예기하며 확신할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죠. 현실을 살기에도 버거……. 넵, 미래학이란 게 가진 자들이 그들의 삶의 조건을 좀더 매끈하고 편리하고 단순하게 만들려는 테크노로지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미국의 로봇학자가 가까운 미래에 사람이 ‘섹스봇(sexbot·성관계용 로봇)’과의 성관계에 중독되어 인간 사이의 성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경고했더군요. 혹은 2050년이 되면 인간의 성관계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50년이면 제가 거의 90이 되는지라 별 상관이 없는 세상이지만 서글퍼지더군요. 성관계가 사라지다니. 섹스봇은 사람마다 다른 신체 조건과 취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맞춤형으로 개발한다면 진짜 인간의 성능(?)을 능가하여 로봇과의 성관계에 더 큰 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죠.
상상이 가더군요. 언제든지 원하면 복잡한 절차를 밟을 필요없이 맺을 수 있는 편리함. 아, 그 모텔 문 앞까지 가는 과정에 필요한 감정 다툼과 뻐꾸기(?)와 인내력과 이해력과 동정과 동의와 돈과 시간과 등등 헤아리기 어려운 자원과 능력과 성능이 필요하죠. 그에 비하면 섹스봇은 그냥 오케이. 인간이 피곤할 뿐이죠.
의무적 결혼과 낭만적 사랑에서 해방된 섹스 그 자체의 쾌락을 위한 섹스가 가능한 현대 사회라지만 뭔가 연애 편지가 이메일도 대체되고 캘리그라피가 만년필을 대체하는 뭐 그런 어떤 앙꼬빠진 찐빵과 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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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어린이도 성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기겁을 했었죠. 어린아이가 느끼는 성적 쾌감이라니. 엄마의 젖을 빨며 성적 쾌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프로이트의 주장은 상식처럼 되어 버렸더군요. 그렇다면 섹스봇이 곧 출시될 미래 시대에 이런 상상은 어떨까요.
아내 혹은 남편(결혼 제도가 남아 있을려나?)이 현관문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남편 혹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스포츠 센터에 가서 섹스 한 게임 뛰고 올께.” 아내 혹은 남편은 무관심한 듯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합니다. “그래, 이번에는 꼭 멀티 오르가즘에 도달해야 해. 위생과 안전은 반드시 지키고.”
불가능할까요?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섹스가 스포츠가 되는 날, 섹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 육체적 노동의 피로감 때문에 섹스의 빈도가 현격히 줄어들지 않을까요. 인간에 대한 오판일까요? 섹스의 쾌락은 체력적 노동이 아니라 환상과 도덕의 금지로 이루어진 어떤 아트적(? art, techne?)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과도하고 도덕적 금지가 엄격할 때, 쾌락은 강렬하다, 더군요. 쿨럭.
남자는 포르노를 좋아하고 여자는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남자도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자도 포르노를 좋아할 것이라고, 음, 저 남자는 확신합니다. 남녀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맨스건 포르노건 모두 환상을 기반으로 합니다. 네,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성적인 충동을 종족번식으로 설명합니다. 진화심리학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충동은 단지 생물학적인 본능만은 아닐 겁니다. 생물학적 본능의 결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도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성적 충동은 동물적인 충동으로서 생물학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적 판타지가 유발시킨 정신분석학적 욕망의 결과입니다.
성적 충동은 어떤 학습된 환상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지, 성적 충동에 의해서 환상이 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성적 충동은 환상의 결과이지 환상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죠. 환상에 의해서 성적 충동이 구성되고 결과되는 것이지 생물학적 본능이 일어나서 환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죠.(뭐라는 거니?)

Slavoj Žižek

지젝은 이 점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광고로 예를 듭니다. 유명한 동화를 패러디한 광고입니다. 한 소녀가 개울가를 걷다가 개구리를 한 마리 발견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못생긴 개구리는 멋진 젊은 남자로 변합니다. 그 상대 젊은 남자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그 소녀를 탐욕스럽게 키스합니다. 소녀는 한 병의 맥주로 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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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한 바는 이렇습니다. 소녀는 개구리같은 남자에 대해 젊은 남자의 환상을 갖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욕망의 대상인 맥주병이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두 남녀의 주체는 서로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서로 각각의 주관적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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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남녀에게서 일어나는 성행위의 구조는 살과 피를 지닌 상대와의 실제 행위가 아니라, 환상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환상적(phantasmic)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타자의 육체는 환상의 투사를 위한 스크린일 뿐이라는 것입죠. 지젝이 표현이 참 그러합니다. 남녀의 육체가 환상을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이라뇨! 하, 그럼 영화관에서 서로 섹스하는 …. 아니 영화관에 홀로 앉아 마스터베이션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육체적인 섹스 행위를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각자 환상에 빠져서 각자 마스터베이션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 현실적인 섹스의 모습이라는 것입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말은 성관계를 하는 두 사람은 사실 각자의 판타지에 빠져 각자 따로 서로의 환상 속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섹스봇과 함께 느끼는 로보가즘(robogasm)의 정체는 바로 이 마스터베이션의 극대화가 아닐까요? 환상의 극대화, 성능(?)의 극대화, 오롯이 혼자만이 느끼는 멀티오르가즘의 사유화. 그렇다면 자위 행위가 좋지 않은 이유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혼자만의 환상에 사로 잡혀 살아 있는 생명인 타인으로부터 오는 살 떨리는 감각과 교감하기를 차단하고 포기하는 무관심과 냉담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쾌락의 독점과 사유화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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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결론부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 이 첫경험의 설렘만큼이나 수줍은 것은 ….. 네, 죄송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씁드리자면, 섹스는 살맛이다, 뭐 그런 것입니다. 살과 살이 접촉해야 살맛(?)을 느낀다. 살맛을 느끼는 섹스는 살아나갈 수 있는 살맛을 준다. 섹스는 환상을 매개로 하는 쾌락이지만 그 쾌락의 실제적 내용은 살맛이다. 사는 맛이며 살의 맛이다. 살이라는 피부가 접촉할 때 세포들이 미세하게 느끼는 맛이며 동시에 살아있다는 떨림을 주는 맛이다. 뭐 이런 논리입쬬.
섹스봇과 함께 하는 로보가즘은 바로 이러한 모텔 앞까지 가야 하는 희노애락의 과정과 상호간의 살맛을 제거해버린 쾌락의 극대화일 수 있지 않을까요. 네 다시 반복하지만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살이란 육체는 생물학적 살덩어리이지만 동시에 존재론적인 살덩어리입니다. 존재론적 살덩어리는 생물학적 살덩어리 위에 덕지덕지 쌓여진 삶의 주름들과 같습니다. 존재론적인 살덩어리는 생물학적인 몸이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삶의 총체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기억이 저장된 주름진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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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섹스할 때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왜 일까요? 존재론적 살덩어리인 자신의 삶을 이해해달라는 요청 때문은 아닐까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 나야. 그다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지만 나를 이해해줘. 물론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상호 이해 속에서 존재론적 살덩어리들은 서로에 대한 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각자만의 환상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환상은 상호 교환되고 공유된 환상이기에 서로의 공감 속에서 작동합니다. 존재론적 살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환상의 윤리성이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가 아닐까요. 자기만의 환상에 취한 자기도취적 폭력이 아닙니다. 상호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공유된 환상입니다. 주름진 존재론적 몸을 나누는 섹스는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 자위행위적인 로보가즘은 아닐 것입니다. 성능(?)은 물론 보장 못합니다. 함정이죠. 그러나 남녀 공히 모두 포르노를 좋아하고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존재론적 살이 느끼는 것은 그래서 로보가즘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적인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전적으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수줍음도 없는 헌신과 요구는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신뢰는 주름진 존재론적 살덩어리를 느끼는 살맛을 통해 형성됩니다.
섹스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호 이해와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환상에 근거한 섹스는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가 뭐냐구요. 아, 급 피곤함을 느껴서 …. 쿨럭. 나이듦이 서글퍼지는지는 계절입니다. 살맛이 없습니다.

섹스리스(sexless) [퍼농유]

우쑵니다.

 

더위 먹은 김에 공자 빼갈 먹는 소리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일할 의욕을 잃고서 몽롱한 정신에 인터넷을 들락거리다가 어떤 기사를 보고 불현 듯 일어난 생각입니다. 잠못 이루는 열대야가 만들어낸 난삽한 생각들입니다.

 

섹스리스(sexless)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성인 부부 35.1%는 한 달에 1번 이하의 관계를 맺는 섹스리스 부부라고 합니다. 상당히 높죠. 세계 평균 20%, 미국 평균 6%에 비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일본은 44%. 1등입니다. 우리나라는 2등.

어쩌면 이런 통계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설문지 답변을 솔직하게 쓸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만 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점은 부부 사이에 섹스리스가 상당히 높은 수치를 차지하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현대는 리스(Lease)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정수기 리스, 자동차 리스부터 사무실과 집까지 리스해서 쓰는 일은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입니다. 유용하면서도 깔끔하죠. 귀찮은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섹스리스 시대에 ‘섹스 리스(Sex Lease)’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 중년들의 진정한 사랑은 불륜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더군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실용적 사랑은 불륜이 아니라 리스가 대세를 이룰지도 모릅니다.

궁금한 것은 섹스리스의 원인이었습니다. 주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이더군요. 첫째 피로감.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와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만사가 귀찮다는 것입죠. 만성피로로 찌들게 만드는 피로 사회는 인간 행복의 본능까지도 저하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목할 만한 원인은 두 번째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더군요. “가족까리는 키스하는 거 아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가족이라는 친밀감이 깊어지면 성적인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친밀감이란 친하고 가깝게 지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잘 아는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친밀감과 성적인 매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부부는 의리로 삽니다.

일반적인 생각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생각과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더군요. 인터넷에서 본 기사입니다. 이스라엘 헤르츨리야의 복합 센터의 심리학 교수 구리트 번바움은 친밀함이 깊으면 성적인 욕구가 더 강할 수 있다고 오히려 반대로 주장하더군요. 실험을 통해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친밀함이 커져도 성적 욕구는 솟아나며, 규정하기 힘든 묘한 감각인 성적 욕구를 장기간에 걸쳐 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응성을 높이는 것이다.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이 번바움의 결론에 따른다면 섹스 리스의 원인은 부부관계의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섹스리스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죠.

왜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아 물론 다른 사회 정치적 분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친밀함의 깊이와 섹스는 반비례한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죠.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결혼한 뒤에 몇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내는 이제 더 깊이 알아야할 상대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상이다. 알 필요가 없다. 왜? 모두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친밀성은 깊어지지 않는다. 친밀성이 깊어지지 않으니 섹스는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가 아닐까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무시가 친밀성이 깊어지지 못하게 가로막고 그것 때문에 섹스에 대한 흥미는 감소한다. 결국 더 친밀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섹스는 불가능하다.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섹스리스를 ‘섹스 리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남편 혹은 아내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을 먼저 버릴 것. 남편 혹은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남편 혹은 아내 그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겸허히 경청할 것. 경청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설렌다면 “그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물론 함정은 있습니다. 실행하기 힘든 일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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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논리는 비난 섹스리스의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트 때문입죠.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이라는 감정들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름답지만 비루하며, 기이하지만 적나라하죠.

이 책의 구성은 특이합니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우연적으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우연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연적 배열들로부터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해 나가는 연대기이며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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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고 바르트는 구조주의자라고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했고 바르트는 주체를 해체합니다. 문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대립적 입장에 서 있습니다.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마치 주체의 죽음처럼 느껴집니다.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사르트르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기능이나 저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수동적으로 의미를 경청하고 음미하는 독자의 능력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담긴 텍스트를 강조했습니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미를 해독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 즐김)의 대상이 됩니다.

섹스리스를 사랑과 관련시킬 때 드는 의문이란 이런 겁니다. 타자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증가할까? 아니면 감소할까? 바르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멋진 생각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불투명함이 명백함으로 전환되는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불투명함이 명백함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논리는 역으로 타자에 대한 명백한 앎은 사랑을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거나 친밀한 사람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착각입죠. 이러한 착각과 오만에 근거하여 나는 너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너의 이런 속성 때문에 놀라우며, 너의 의도가 이런 것이기에 화가 나고, 너의 생각이 이렇기에 짜증이 난다고 투덜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과연 타자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앎에 근거하여 상대를 함부로 대하고 평가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치 어떤 작품을 읽고서 이 작품의 쓴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적 태도는 온당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잘 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를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문제는 잘 알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입니다. 그래서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된”다고 하는 말은 고정된 이미지로서의 외관을 통해서 실체를 규정하려는 주체의 오만한 노력들이 파기될 때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주체의 자기도취가 이르는 결말은 타자에 대한 지배 아니면 싫증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숙한 사랑의 지혜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그대로’라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

 

사랑하는 상대는 이제 주이상스(jouissance)의 텍스트가 됩니다. 바르트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향유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타자는 어떤 저자의 하나의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 무한히 음미되어야할 텍스트인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의미가 정의되어 고정되어야할 명증함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경청하며 음미되어야할 모호함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설렘의 흥분을 가지고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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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의 역설에는 놓쳐버린 역설이 또 있지 않을까요. 독자의 탄생을 위해서 저자를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주이상스를 위해 주체는 죽었습니다. 결국 그는 ‘소유의 의지’를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타자를 소유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려는 것입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려는 순간 저자와 사랑의 주체는 죽은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비소유의 의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격렬하고도 메마른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메마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의 환상, 그 상상계가 메마르게 되기 때문에 주체는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소유의 의지에 대한 상념이 상상계의 체계와 단절되기 위해서는 내가 언어 밖의 어디엔가로,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해야만 한다.”

 

무기력하고 메마른 사랑이란 또 다른 사랑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긍정적 역설을 말했지만, 또 동시에 타자의 불투명함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사랑을 창조할 수 있는 저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역설에 빠지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를 강화시켰다면 바르트는 주체를 무화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주체의 능력이 강화될 때 사랑은 투쟁이 되고 밀당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능력이 무화될 때 사랑은 식은 재가 되고 관조가 됩니다.

바르트는 도가(道家)적 사유와 근접해 있습니다. 바르트는 분명 노자(老子)의 논리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주희(朱熹)는 노불(老佛)에 대해서 비판적이죠. 죽은 재와 마른 나무와 같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항시 권모술수적인 측면으로 흐른다고 비판하죠.

바르트도 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 ‘그대로’ 혹은 ‘비소유의 의지’라는 사랑의 방식이 빠질 수 있는 사기술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비소유의 의지가 어떤 전략적인 생각이라면(마침내!)?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그를 정복하려 한다면(물론 은밀하게?) 그를 보다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진다면?”

 

전략적으로 주체를 무화시킨다면? 그것은 사기술이죠.

아랑드롱

아! 죄송합니다. 더운데 피곤하게 해드렸군요. 쿨럭~

세줄 요약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잘 안다고 오만 떨지 말 것.

상대를 그 자체 그대로 경청할 것.

그러나 사기 치지는 말 것.

이상입니다.

 

 

왜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을까? [퍼농유]

우쑵니다.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이 무더위를 시원하게 해드릴 소식이라도 전해드려야 하건만 지난번에 이어 다시 홍보질입니다. 넵넵 ~~~ 더워 죽겠는데 더욱 짜증나게 하시겠지만 이 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방구석 컴퓨터 앞에서 이러고 있는 저는 오죽 갑갑하겠습니까. 정말 울고 싶어지는 한 여름 밤입니다. 막걸리라도 한통 마시고 ……. 쿨럭. 혜량하여 주십시요.

 

 

왜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을까? – 맹호연(孟浩然) 춘효(春曉)

 

1

봄잠에 새벽이 온 걸 깨닫지 못하니(春眠不覺曉)

곳곳에 새 우는 소리다(處處聞啼鳥)

밤에 온 비바람 소리에(夜來風雨聲)

꽃은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花落知多少)

 

맹호연(孟浩然)의 ‘춘효(春曉)’다. ‘봄날 새벽’은 기이하다. 늦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봄날 새벽의 청신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늦잠에서 깨어 듣는 요란한 새 소리 때문에 봄날 새벽의 서글픔이 더욱 깊다. 어쩌라, 서글퍼한다고 비바람이 멈추는 것도 아니다.

새벽이 온지 왜 몰랐을까? 어쩌면 새벽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잠결에 비바람 소리는 또 어떻게 들었던 것일까? 그 모진 비바람에 꽃이 지고 있다. 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일까? 천만에 이것은 전원시가 아니다.

물론 맹호연은 전원시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묘사하는 전원은 한적하거나 밝지 못하다. 오히려 세상을 한탄하거나 울적하여 분위기가 밝지 않다. 그래서 청신한 새벽에 느끼는 울적함은 애처로움의 미학이다.

육유(陸游)라는 시인은 촉(蜀) 땅으로 들어가던 중 스스로 자문하였다.

 

이 몸은 시인이나 되라는 걸까?(此身合是詩人未?)

가랑비 속 나귀 타고 검문을 지났으니(細雨騎驢過劍門)

 

육유의 이 표현은 자신이 일개 시인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다. 주목해야할 것은 ‘나귀를 탄다’는 표현이다. 나귀를 타는 것이 왜 시인을 상징하게 되었을까? 맹호연 때문이다. “못 보았는가,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시 읊는 것을. 눈썹은 찌푸리고 어깨는 불쑥 솟은 산 같은 모습을.”(又不見, 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 소동파가 맹호연을 묘사한 이 말 때문에 눈 속에서 나귀를 탄 시인의 이미지는 고착되었다.

기려도김명국

당연히 그림의 소재로 널리 이용되었다. 맹호연의 초상은 아니, 시인의 초상은 나귀를 타고 눈 속을 걷는 것으로 묘사된다. 나귀를 타는 모습을 그린 기려도(騎驢圖)는 너무 많아서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선조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기려도와 함덕윤 기려도가 인상적이다.

기려도함윤덕

눈을 밟고 매화를 찾는다는 ‘답설심매’(踏雪尋梅)나 파교에서 매화를 찾는다는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이미지도 모두 맹호연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답설심매’와 ‘파교심매’도 마찬가지로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가 유명하다.

파교심매심사정

맹호연의 ‘춘효’와 관련하여 내가 주목하는 그림이 있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그림이다. 1915년에 백악과 경복궁의 실경을 그린 작품이다.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전해진다. 여름과 가을 풍경을 그린 것인데 제목이 왜 봄날 새벽을 뜻하는 ‘백악춘효’일까?

백악춘효

심전은 ‘백악춘효’에서 백악산과 경복궁을 실제에 가깝게 묘사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1915년 당시 경복궁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경복궁은 일제의 탄압 아래 파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파괴되는 경복궁 모습은 몰락하는 조선 왕조의 모습과도 같았다.

쓰러져 가는 조선왕조를 보며 심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심전 안중식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이왕직의 요청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백악춘효’를 완성한다. 조선왕조의 봄날이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렸던 것은 아닐까? 심전은 분명 맹호연의 이 시를 의식했을 것이다. 어젯밤 모진 비바람에 또 얼마나 많은 꽃들이 떨어졌을까? 봄날 새벽은 언제 오려나.

 

2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근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의 ‘낙화’이다. 맹호연의 ‘춘효’를 읽을 때면 항상 함께 떠오르는 시다. 맹호연은 모진 비바람에 지고만 꽃잎을 근심하지만, 조지훈은 꽃이 졌다고 해서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고 한다. 꽃은 질 수밖에 없는 때가 오면 지게 마련이다. 어쩌란 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일한 가신이었던 박지원은 2003년 교도소 가는 길에서 시를 읊었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 나는 의아해했다. 아니, 정치인이 교도소에 가면서 이런 시 구절을 읊다니. 낭만적이라서 놀랐던 것은 아니다. 그가 내뱉은 시 구절에는 묘한 상징적 대비가 있었다.

박지원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비바람은 누구겠는가? 박해하는 사람들이다. 꽃은 누군가? 박해를 받는 자신이 아닐까? 자신은 부당한 비바람에 의해서 비록 박해를 받지만 아름다운 꽃이기에 탓하지는 않겠다는 대범한 자신의 마음을 이 시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맹호연의 시를 봄날 한가함과 청신함을 노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함께 덧없이 지고 만 꽃의 허무함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을 읽어낸다. 탐미적이면서 허무한 서글픔이 배어 있는 달관적인 태도다.

그러나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꽃과 바람을 생각한다면 맹호연의 시는 그렇게 한가하지만은 않다. 바람은 부당한 소인배들의 세력이 벌이는 횡포이고 꽃은 그 횡포에 억울하게 당한 군자들이 아닌가? 맹호연은 꽃이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라고 근심하고 있다. 정의는 또 얼마나 부당한 세력들에게 박해를 받았던가.

<주역>에는 바로 소인들의 세력이 군자를 박해하는 상황을 상징하는 괘가 있다. 스물세 번째 괘인 박(剝䷖)괘이다. 산지박(山地剝)으로 읽는다. 괘의 모습이 산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위에 있고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괘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다섯 개의 음(陰⚋)효와 하나의 양(陽⚊)효로 이루어졌다. 음이 아래에서부터 생겨나서 점차로 자라 극성한 형세로 발전하여 하나의 양을 몰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소멸이며 박멸이다. 빼앗긴다는 뜻이 있다. 모진 비바람에 꽃잎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하나만이 남아 있다.

이 마지막을 상징하는 효가 박괘의 가장 위에 있는 양효이다. 이 마지막 여섯 번째 효의 말은 이렇다.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그의 집을 없앤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여기에 유명한 말이 나온다.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인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 ‘석과불식’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했다. 신영복은 석과(碩果)를 씨과실로 푼다. 그는 ‘석과불식’을 “씨과실을 먹지 않는다”고 풀면서 희망을 읽었다.

석과불식1

옛날 사람들은 과일을 딸 때 모두 다 따지 않았다. 몇 알은 반드시 남겨 새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까치밥이라 한다. 씨과실은 상징적으로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있는 초겨울의 감나무를 상상하면 좋다.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가 ‘희망’을 상징한다.

씨과실은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씨를 남긴다. 가장 크고 탐스런 씨과실은 단 하나 남았더라도 희망이다.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을 피우기 때문이다. 스물세 번째 박괘 다음 괘는 무슨 괘일까? 스물네 번째 괘는 복(復䷗)괘이다. 지뢰복(地雷復)이라고 읽는다.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위에 있고 우레를 상징하는 진(震☳)괘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땅 아래에서 우레와 같은 양(陽)의 기운이 올라온다. 복괘를 자세히 보면 제일 아래에서 양(陽)효 하나가 여러 음(陰)들의 세력을 뚫고 올라오고 있다. 생명의 소생을 상징하는 괘다. 박괘를 이어 복괘로 이어지는 과정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다. 반드시 씨를 남기고 소생한다. 다시 빛이 솟아오르는 광복(光復)이다.

심전 안중식이 1915년 ‘백악춘효’를 그렸을 때 조선의 광복을 희망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봄날의 새벽 광복은 1945년에 왔다.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은 단지 희망만이 아니다. 희망을 꿈꾼다고 해서 반드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희망의 근거다. 희망은 단지 환상적인 허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괘의 ‘석과불식’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먹히지 않았을까?

 

3

맹호연은 지고만 꽃잎을 서글퍼했지만 조지훈은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고 했다. 탓할 수 없다고 해서 체념하고 포기해야한다는 말일까? 박괘에 달린 괘의 말은 이렇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멈추는 것은 소멸되어 빼앗기는 모습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군자는 자라나고 줄어들고 가득차고 텅 비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것이 하늘의 운행이기 때문이다.(順而止之, 觀象也. 君子尙消息盈虛. 天行也.)

 

불의한 세력의 비바람에 의해서 박해를 받는 고난의 시대에 그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는 것은 자포자기적 체념은 아니다. 힘겨워하고 두려워하면서 혼자 괴로워하는 일도 아니다. 분노하고 한탄하고 저주하는 일도 아니다. 무모하게 저항하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자조하는 것도 아니다. 냉정을 되찾는 일이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멈추”는 일이다.

“소멸되어 빼앗기는 모습을 관찰했다.”는 말은 그래서 비바람의 박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자라나고 줄어들고 가득차고 텅 비는 과정”을 파악하여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세의 부득이함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이렇게 냉정하게 현실을 이해하면서 희망을 품는 씨과실은 어떤 비바람이 올지라도 먹히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눈물 흘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이해하라.”고 했다. 비바람에 꽃이 졌다고 해서 징징거리고 있을 수는 없다.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있는 겨울날 나무들의 신세를 직시하는 일이다. 어쩌다 이 가혹한 겨울이 왔던 것일까? 어쩌다 단 하나의 감만이 남아 비바람을 견디고 있을까?

Spinoza

이렇게 되어버린 시세와 형세의 원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꽃잎이 졌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요, 비바람을 탓할 필요도 없다. 자초한 일이라고 자학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때가 되면 꽃은 지게 마련이지만 꽃이 질 수밖에 없는 형세의 원인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먼저 이해하라. 이해한다는 말은 언더스탠드(understand)이다. 언더스탠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언더(under)에 스탠드(stand)해야 한다. 사람들의 언더는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을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에 선다면 서글퍼하기를 멈추고 냉정하게 이해해야한다. 언더에 스탠드하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언더에 스탠드할 일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한다. 하지만 먼저 사람들에게 가기 전에 자신의 무의식 아래에 깔려있는 편견과 오만과 증오 등의 썩어빠진 엘리트 근성들을 먼저 이해해야하리라. 그것을 먼저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호연에게는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함께 덧없이 지고 만 꽃의 허무함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있다. 인생을 달관한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달관한다고 해서 봄은 오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이 모진 겨울을 넘기면 다시 봄이 오겠지라는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도 봄은 오지 않는다.

희망은 기다림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넋 놓고 기다리는 무기력이 아니다. 희망은 냉정한 자기 이해와 현실 인식에서 솟아오르는 부득이함이다. 이 부득이함은 어찌할 수 없기에 할 수밖에 없는 힘과 의지로 충만하다. 이 힘과 의지 때문에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기다림은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씨앗을 땅에 일구는 일이다. 씨앗을 땅에 심기 위해서는 더렵혀진 땅을 새롭게 일구는 작업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꽃이 졌다고 해서 서글퍼하는 일도 사치인지도 모른다.

왜 물기 머금은 꽃들은 금관성을 압도했을까? [퍼농유]

우쑵니다.

예전에  여기서 ‘고전은 숨쉰다.’라는 코너에 연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역>에 관한 글이었죠. 그때 시적 상상력으로 주역을 읽어보겠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전에 한문에 대한 부족감을 절실히 느끼고 늦은 나이에 고전번역원을 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장재한 선생님으로부터 ‘당시’를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를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담담하고 심심했고 어떤 것은 전혀 재미가 없었고 또 유명하다는 시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장재한 선생님께서는 그리 자세히 설명은 해주시지 않았지만 간단하게 툭툭 던지시는 말들이 있었죠. 그때 유종원의 강설을 읽으면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주역>의 복괘가 생각난다는 간단한 코멘트를 하셨습니다. 졸린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주역의 복괘라니. 그때부터 당시를 읽을 때면 고전들이 얽혀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생각보다 당시에는 고전들의 흔적이 많았습니다. 얘기가 길어지는군요.

요점은 이겁니다. 제가 이번 2016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공모한 우수콘텐츠 사업에 응모하여 당첨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질하고 싶었던 것입죠. 쿨럭. 제목은 <시적 상상력으로 읽는 주역>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당시를 읽으면서 얻은 작은 흔적들입니다. 예전에 시대와 철학 ‘고전은 숨쉰다’라는 코너에 필자로 섭외해주었던  박영미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많은 선전과 홍보와 입소문을 염치없이 부탁드립니다. 11월 달쯤 글항아리에서 발간될 예정입니다. 이 가운데 몇 꼭지 맛이라도 …….. 보시라고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올려봅니다.

염치 없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꾸뻑.

 

호우시절1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夜喜雨)’를 가지고 썰을 풀었습니다.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허진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었죠. 호우시절이라고 ….

호우시절2

 

왜 물기 머금은 꽃들은 금관성을 압도했을까? 두보(杜甫) ‘춘야희우(春夜喜雨)’

 

1

좋은 비 때와 절기를 알아(好雨知時節)

봄을 맞아 생기를 준다.(當春乃發生)

바람결을 따라 몰래 밤에 찾아 들어(隨風潛入夜)

만물을 적시네, 가늘어 소리도 없이.(潤物細無聲)

들길에는 구름이 온통 컴컴한데(野徑雲俱黑)

강위의 배 등불만 반짝거린다.(江船火燭明)

동틀 무렵 보리라 그 붉게 젖은 곳에서(曉看紅濕處)

물기 흠뻑 머금은 꽃들이 금관성을 압도하는 장관을.(花重錦官城)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는다(語不驚人, 雖死不休)”던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夜喜雨)’이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시성(詩聖)이라 칭한다. 이 시의 첫 구절만큼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 문장은 없다. 호우시절(好雨時節)이라는 말로 유명한 구절이다.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의미다.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가 만물을 생기 있게 만들어주니, 농민들이 기뻐한다. 농민들의 마음을 묘사한 시라고 본다. 때맞춰 내린 비에 금관성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날 것이니, 아름다운 장관이다. 자연의 경치를 묘사한 정원시라고 보기도 한다.

고작 정원시일까? 천만에 천하의 두보가 누구던가? 그는 나라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자신의 갈등과 비애를 묘사하지 않았던가? 백성을 착취하는 위정자들을 폭로했고 전쟁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에 동정했다.

권력이 백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물으며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시로 표현했다. 백성의 고통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동틀 무렵 보았던 그 장관이 고작 백성들의 삶과 무관한 자연의 아름다운 정경일 뿐이었을까?

 

두보1

 

내가 주목했던 구절은 ‘물기 흠뻑 머금은 꽃들이 금관성을 압도한다’고 번역한 ‘화중(花重)’이라는 말이다. 왜 ‘중(重)’이라는 말을 썼을까? 많은 해석자들이 의아해했던 말이다. 글자 그대로 꽃이 무겁다는 뜻이다. 비가 와서 꽃들이 물기를 머금었기에 무거워졌다. 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궁금했다.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꽃들.

호우시절(好雨時節)이란 말은 대체로 사랑과 사업과 정치 등 어떤 영역에서건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타이밍 이전에 먼저 물어야할 것은 어떤 타이밍이냐이다. 만물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필요할 때 주는 타이밍이어야 한다. 만물이 필요로 하는 절박함을 먼저 경청하고 이해하지 않는 타이밍은 교활한 사기술이 되기도 한다.

호우시절(好雨時節)은 사랑을 주는 방식과 은택(恩澤)의 영향력을 상징한다. 덕(德)은 타인에게 덕택(德澤)의 영향력이 된다. 택(澤)이란 연못이고 물이다. 연못의 물처럼 소리 없이 스며들어 농작물을 소생하게 한다. 연못이란 비가 온 결과이기도 하다.

좋은 비는 집중호우나 폭우(暴雨)와는 다르다. 필요 없는 비를 지나치게 많이 쏟아 붇는다면 홍수가 날 뿐이다. 또한 필요한 비일지라도 폭력적으로 쏟아 붇는다면 만물에 해를 끼칠 뿐이다. 사랑도 안달하고 닦달하며 마구 퍼부으면 오히려 부담스럽다. 사업도 그러하지 않던가.

시절을 아는 좋은 비는 만물이 필요한 것을 가장 적절할 때 베풀면서도 티내지 않는다. 은혜를 받은 만물도 비가 끼친 영향력을 의식하여 감사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한 생명력을 일으키며 꽃을 피운다. 비라고 해서 다 같은 비가 아니다. 시절을 아는 좋은 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봄비처럼 스며들어 꽃을 피우게 해준다. 아무런 대가와 자랑도 없이.

 

2

주목해야할 것은 바람결에 몰래 밤에 찾아든다는 표현이다. 바람결에 몰래 잠입하여 은혜와 영향력을 준다. 그러나 가늘어 소리가 없으니 은혜를 준 티를 내지 않고 영향력을 주었는데도 영향 받은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가늘어 소리가 없다는 것은 가랑비에 옷 젖는 것을 모르듯이 흠뻑 젖어버렸는데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젖어버렸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영향력이다. 슬그머니 우리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바람결을 따라’라고 번역한 ‘수풍(隨風)’이라는 말이 수상쩍다. 왜 하필 좋은 비는 바람결을 따라 몰래 잠입해야만 했을까? 단순한 이 말은 스쳐지나가야 할 말이 아니다. 곰곰이 음미되어야할 말이다.

한시(漢詩)에는 용사(用事)라는 작법이 있다. 용사는 인용고사(引用故事)의 준말이니 고전이나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 어떤 생각들과 사실들을 단순한 단어나 말로 집약시키는 일이다. 표절이기도 하지만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높이 평가한다.

국화를 사용하여 글을 썼다면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국화를 좋아했던 도연명의 작품이나 취향과 연결되어 다른 의미와 함축을 생성한다. 본래의 뜻보다 더 새로워질 수도 있다. 이를 점화(點化)라고 한다. 용사는 비열한 표절의 도둑질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두보의 시가 전례(典例)와 고사(故事)를 쓰되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자작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출처가 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시성(詩聖)이라는 칭호를 얻게 한 까닭”이라고 하며 용사를 적극 옹호했다고 한다.

다산은 문장의 글자마다 인용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자유래처(字字由來處)’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준 떨어지는 글이다. 옛 사람들의 글쓰기에는 이런 묘미가 있다. 용사는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시적 기술이다.

그렇다면 시성(詩聖)이었던 두보의 시에도 이런 용사가 없을 리 없다. 주목할 말이 ‘수풍’이다. 주역과 무관하지 않다. 쉰여덟 번째 괘가 손(巽☱)괘이다. 중풍손(重風巽)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重)은 중첩된다는 뜻이다. 바람을 상징하는 손(巽☱)괘가 위아래 중첩되어 있다. 손괘의 「상전(象傳)」은 이러하다.

 

잇따르는 바람이 손괘의 모습이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명령을 펼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象曰, 隨風巽, 君子以申命行事.)

 

여기서 ‘잇따르는 바람’이라고 번역한 말이 ‘수풍(隨風)’이다. 이 이미지가 손(巽)괘를 상징한다. 손(巽)은 흔히 유순함 혹은 공손함이라고 번역되지만 손(巽)괘의 상징은 바람이다. 바람은 ‘들어간다’는 ‘입(入)’의 뜻이 있다.

바람은 아주 미세한 틈일지라도 들어간다. 아무도 몰래 들어가기에 잠입(潛入)이기도 하다. 바람은 미세한 틈에 잠입하되 가늘어 소리도 없으니 아무도 모른다. 두보가 ‘몰래 온다’는 말을 ‘잠입(潛入)’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손(巽)괘를 의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손괘를 중풍손(重風巽)이라고 했다. ‘중(重)’은 무겁다는 뜻이 아니라 중첩되고 연결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잇따르는 바람’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수풍손(隨風巽)과 같은 뜻이다.

손(巽)괘가 상징하는 바람은 부드럽고 공손한 영향력이다. 저항 없이 들어가니 막힐 일이 없다. 군자는 이 바람의 모습처럼 명령을 펼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늘어 소리도 없지만 백성들은 기쁘게 복종한다. 바람의 영향력은 논어에서도 나온다. 공자는 계강자(季康子)가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이런 비유를 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에 바람이 가해지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君子之德, 風, 小人之德, 草, 草上之風, 必偃.)

 

3

물어야 할 것은 풀을 반드시 쓰러지게 만드는 바람의 영향력이 어떤 것인가이다. 공자에 따른다면 그것은 군자의 덕이다. 주역의 철학적 해설서인 「계사전(繫辭傳)」에서는 덕(德)을 상징하는 괘들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손(巽)괘는 덕의 제재(制裁)이다’(巽, 德之制)라는 말이 있다.

손괘는 바람과 같은 부드러운 능력으로 모든 일들을 제재하고 제어한다. 그래서 제압한다. 손괘가 상징하는 바람과 같은 덕에 의한 제재는 강압적인 금지나 폭력적인 처벌이 아니다. 때문에 「계사전」에서는 “공손함으로 권도(權道)를 행한다”(巽以行權)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권도란 권모술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권도의 의미를 「계사전」은 “공손함은 사물의 실정을 헤아려서 사업을 시행하지만 그것이 아무도 모르게 드러나지 않는다”(巽稱而隱)고 한다. 주희(朱熹)는 “사물의 마땅함에 걸맞게 행하면서도 잠겨서 숨어 드러나지 않는다.”(稱物之宜而潛隱不露)고 설명한다.

결국 손괘가 상징하는 것은 군주나 군자가 백성들이 처해 있는 실정을 헤아려서 그에 걸맞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절에 알맞게 행하는 비와 같다. 그것이 권도라는 방식이다.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영향력이다.

백성들은 그 영향력을 의식하지 못한 채 영향을 받아서 스스로 생명력 가득한 힘을 얻는다. 강제적이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동시켜 복종하게 만드는 잠입이다. 그래서 손괘에는 혁신의 의미가 담겨 있다.

「계사전」에서 설명하는 손괘의 내용들을 음미하면 두보가 왜 “바람결을 따라 몰래 밤에 찾아 들어, 만물을 적시네, 가늘어 소리도 없이”라고 표현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군주와 군자의 덕은 좋은 비처럼 시절을 헤아려 때에 맞게 바람결을 따라 몰래 잠입하여 아무도 모르게 어떤 영향력을 미친다.

그것이 명령을 통해서 법을 혁신하여 삶의 조건을 바꾸는 것일 수도 있고, 도덕적 영향력을 통해서 정신을 혁신하여 삶을 일깨우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영향력을 통해 생기를 얻어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도 복종을 굴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람결 따라 좋은 비를 내려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이 시에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시의 후반부이다.

흔히 한시(漢詩)에서 절구(絶句) 형식은 기승전결로 나누고 율시(律詩) 형식은 수련(首聯)·함련(頷聯)·경련(頸聯)·미련(尾聯)으로 나뉜다. 대체로 전반부는 선경(先景)이라 하고 후반부는 후정(後情)이라고 한다. 선경은 앞부분에 정경이 펼쳐진 것이고 후정은 뒷부분에 감정이 드러난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경련과 미련의 후반부는 시인의 상상과 정서가 가미된 후정(後情) 부분일 수 있다. 이 시의 경련 부분에서 들길의 어둠과 배 등불의 희미한 밝음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은 실제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이다. 암흑과 빛의 대비이다. 이는 자연의 풍경이라기보다 시인 자신이 느낀 현실이 투사된 이미지다.

들판의 길이 구름이 깔려 어둡다는 것은 암담한 현실적 상황을 비유한다. 그렇다면 강가에 희미하지만 뚜렷한 배의 등불은 무엇을 상징할까? 늘 밝게 깨어 있는 외로운 지식인이 아닐까? 지식인이란 암담한 현실 속에서 고독하게 홀로 깨어 세상 사람들을 일깨워야 하는 빛이기 때문이다.

심사정(沈師正)의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라는 그림이 있다. 심사정은 조선 중기의 선비 화가로 자는 이숙(頤叔)이고 호는 현재(玄齋)이다. 증조부 지원(之源)이 영의정을 지낸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다.

 

 

강상야박도

 

그러나 할아버지인 익창(益昌)이 과거부정사건을 저지르고 연이어 왕세자 시해 음모에 연루되어 극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던 인물이다.

심사정의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는 두보의 ‘춘야희우’ 시 가운데 “들길에는 구름이 온통 컴컴한데, 강위의 배 등불만 반짝거린다”는 시구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화제(畫題)로 이 구절이 적혀있다. 심사정은 두보의 시에서 왜 하필 이 구절만을 따다가 화제로 삼았을까? 그리고 다른 것이 아니라 왜 강 위에 정박한 사공의 모습만을 적막하게 그렸을까?

사공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새벽 어스름 속에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사공은 고독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공 뒤에서는 새벽안개가 잦아든다. 잠시 후 어둠이 걷히고 나면 붉게 젖어 물기 머금고 있는 꽃들이 드러날 것이다. 안개가 걷혀 드러나면 알게 되리라. 간밤에 내린 비가 꽃들에게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를.

 

4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책과 혁명이다. 부제가 ‘책과 혁명에 관한 댓새 밤의 기록’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혁명은 폭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에 의하면 반드시 선행하는 것이 있다. 문학이다. 단순히 소설과 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 전체를 의미하는 글의 힘이다.

고독하게 책을 읽고 다시 쓰는 것이야말로 혁명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이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루터의 성서 해석과 번역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점을 단적인 예로 들고 있다. 혁명에서 폭력은 이차적인 것이고 선행하는 것은 텍스트를 새롭게 읽고 다시 쓰는 일이다.

문학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폭우나 집중호우처럼 폭력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다. 때를 아는 좋은 비가 바람결에 따라 소리 없이 스며들어 물기를 흠뻑 머금게 하듯이 문학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오랜 기다림 끝에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고독하게 기다리던 사공은 혁명에 선행하는 문학적 힘에 대한 상징은 아니었을까? 구름이 온통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밝음을 잃지 않는 빛이다. 문학을 읽어내고 창조하는 지식인들이다.

 

두보

 

그들이 동틀 무렵 보게 될 장관은 무엇일까? “물기 흠뻑 머금은 꽃들이 금관성을 압도하는 장관”(花重錦官城)은 어떻게 상상될 수 있을까? ‘중(重)’의 의미는 문자적으로는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모습이지만 ‘압도한다’는 말을 덧붙인 이유가 없지 않다. 손(巽)괘의 의미는 덕으로 이룬 제어와 제압과 관련된다. 또한 명령을 내려서 정치적 일들을 단행하는 혁신의 의미가 들어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이란 시다. 왜 김수영은 혁명을 통해 이룬 자유 속에서 피의 냄새와 함께 고독을 읽어냈을까? 피 이전에 고독은 사사키 아타루가 말한 혁명에 선행하는 문학의 힘이 아닐까? 고독하게 책을 읽고 다시 쓰는 문학의 힘이 사람들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믿음이다. 바람결을 따라 몰래 잠입하는 좋은 비, 호우시절이다.

그렇다면 ‘물기 흠뻑 머금은 꽃들’이란 고독한 문학적 힘이 바람결을 따라 내린 좋은 비처럼 만들어낸 무거운 눈물이 아닐까? 눈물 흠뻑 머금은 소생의 깨달음일 수 있다. 좋은 비가 꽃들의 생명력을 소생하게 만드는 것처럼 문학적 영향력을 받고서 노고지리처럼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자유로움이다.

온 도시 사람들이 바람결을 따라 때맞춰온 비를 맞고 생명력을 얻어 꽃을 피운다. 그리고 혁신을 꿈꾸며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자유를 외친다. 그 무거움이 쓰촨성(四川城) 수도 청두(成都), 금관성을 압도하는 것은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관이다.

두보는 물기 흠뻑 머금은 꽃들이 금관성을 압도하는 장관을 동틀 무렵 보았지만, 나는 눈물 흠뻑 머금은 시민들이 시청을 압도하는 장관을 꽃잎 터져 울부짖는 함성 소리에 놀란 채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Copyright for the NEWSIS [Photo Sales:02-721-7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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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우쑵니다.

덥습니다. 더위만큼이나 저의 삶도 무덥습니다. 슬럼프입니다. 누구나 겪는 것이겠지만 나이들어서 겪는 슬럼프를 제대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싸놓은 똥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요즘입니다만 많이 부끄럽습니다. 하여 죄송스런 마음을 전하는 표시로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올립니다. 어서 슬럼프를 헤쳐나와 부끄러운 사치의 글쓰기를 감행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꾸뻑.

 

화장실이야말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를 감추고 있는 인간의 건축물이다. 지젝은 여러 곳에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변기는 용변을 보자마자 스위치 누를 필요도 없이 신속하게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혁명적이다. 독일은 물도 없는 변기에 변이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있다. 냄새가 지독하다. 성찰과 반성을 하게 만든다. 관념적이다. 미국에선 변기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스위치를 눌러야 내려간다. 실용주의적이다.

Slavoj Žižek

그러나 지젝의 생각과는 달리 더 근본적으로 화장실이야말로 가장 형이상학적 문제가 감추어진 건축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는 참으로 독특한 질문을 던진다. 신도 똥을 쌀까?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똥은 가장 심각한 신학적 문제이다. 골칫거리다.

그래서 밀란 쿤데라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화장실에서 문을 꼭 잠그는가? 이 질문은 물론 서양 사람들을 향한 질문이었다. 밀란 쿤데라는 이것을 서양의 낭만주의와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중국을 여행하면서 깨달았다.

중국의 화장실에 가 본 일이 있는가? 중국 화장실에는 문을 잠글 일이 없다. 잠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이 없다. 아니, 문이 필요 없다. 그들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잠그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왜 그럴까? 다시 왜 인간은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벌거벗은 몸이 창피해서? 성기가 노출되어서?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기가 노출되는 것이 창피한 것이라면 목욕탕 가는 것조차 거부해야 한다. 그러니, 성기가 노출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똥 누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그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창피할 뿐 아니라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중국 문화는 똥 누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다.

현대의 수세식 화장실은 자신이 똥을 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가뿐하게 나와서 사람들에게 똥을 싸고 나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건축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수세식 화장실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어 인간이 똥을 누지 않는다고 착각할 수 있도록 만든, 신학적 명제를 실현한 건축물이다. 똥을 누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서양의 낭만주의 시대의 핵심이다. 중국의 화장실은 다르다.

화장실

똥을 누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인간이란 똥을 눌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하려는 인간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똥을 누지 않는 신적인 환상에 갇혀 자신이 똥을 누고 있다는 인간적 현실 자체를 회피한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환상에 갇힌 채 결벽증을 가진 미성숙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이 말처럼 잘못 전파된 말은 없다. 실은 무서워하면서 더럽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일 뿐이다. 인생에 똥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똥은 피할 수 없다. 똥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여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똥1

팔루스(phallus)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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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쑵니다.

 

저의 소개가 늦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뻑.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라 욕하지 마시고 당황스런 저의 난감함을 혜량해 주십시오. 언젠가 중국의 베이찡 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손짓발짓 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의 눈만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했던 것만큼 갑갑합니다.

오! 이타카의 왕이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딧세우스로부터 다이달로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에서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 그리고 로마의 황제를 역임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까지.

근래 캔디와의 스캔들로 뭇 여성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테리우스(오, 나의 사촌 형님 ㅡㅡV) 그리고 열락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카바레의 죽돌이가 되어 우쑤 가문에서 파문당했던 제비우스(형! 왜 그랬어. 카바레가 그렇게 좋은 거야) 이 우쑤 가문의 영광을 빛냈던 우리의 조상 형님들 앞에서 저 허리우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테리우스

저의 난감함이란 베이찡 거리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도 느꼈다는 사실일 겁니다. 타인의 언어를 모르면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진정을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입죠. 그것은 여성의 언어도 모르면서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진정성을 얘기하려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이 현상의 핵심은 ‘정신병이 범죄의 원인이냐? 아니면 여성혐오가 원인이냐?’ 정도이더군요. 저의 당혹스러움이란 이 이분법적 논쟁의 핵심이 마치 생물학적 문제이냐 문화적 정치적 경향의 문제이냐를 따지는 듯한 느낌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런지요.

이것은 이분법적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 형님께서는 간파하셨지만 그것은 사실의 명제가 아니라 당위의 명제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가련한 동물이죠.

아뇨. 인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동물성을 이성적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고 외면하기보다는 직시하자는 쪽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혹은 이성적이어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핵심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만, 생물학적 차원과 문화적 정치적 차원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놀라웠던 사실은 여성분들이 자신의 경험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토로했던 점입니다.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 가운데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친척과 직장동료를 비롯한 아는 사람이죠. 여성분들이 당한 추행과 성폭력의 내용들은 대체로 그러한 내용들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크고 작은 성추행이나 폭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남성들이 외면할 뿐 아니라 무지한 채로 있지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강남역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단지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장애인과 어린이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약자들이 당하는 일들입니다. 강자들의 지배와 권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현상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억눌렸던 약자들이 그동안 말하지 못한 얘기들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얘기들을 겸허히 듣지 못하고 어떤 남성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말라는 핏켓을 들고 나온 일은 겁 많은 남성의 찌질한 행동이라고 귀엽게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전 이 문제가 남성과 여성의 혐오의 문제로 구별하기보다는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입니다만, 이것 또한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난감한 일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앞서는군요. 뻬이징 거리의 중국인을 대하는 당혹스러움입니다.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본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권력의 폭력적 지배에 취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생물학적 차원의 동물들의 세계에서 남성성이라는 팔루스(phallus)가 있다면, 아! 전문용어 나왔군요.

팔루스

팔루스. 죄송합니다. 쿨럭, 넵, 팔루스는 페니스(pennis)라는 생물학적 자지와는 다른 용어로 흔히 남근으로 번역되더군요. 권력이고 폭력입죠. 상징적 의미에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권력과 폭력이지만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동물성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인류의 역사는 이 팔루스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무사(武士)에서 문사(文士)로의 변화, 그러니까 무(武)라는 폭력에서 문명이라는 문(文)으로의 전환이 핵심이 아닐까 싶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지 남녀의 대립의 문제로 이해하기보다는 야만의 폭력성과 문명의 문화성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가하는, 네 그런 얘기입니다. 여성들의 성토는 아마도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의식하지 못하는 야만의 폭력성에 대한 성토일 수 있습니다. 네, 아직 남자들은 문명의 문화성으로 진화되지 못한 덜떨어진 인간들입죠. 물론 이 사회의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입니다. 직시하자는 것이죠.

문득 동방불패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에는 강호의 최절정 고수가 되어 절세 무공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적힌 비서(秘書)가 나오죠. 규화보전(葵花寶典)입니다. 규화보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작용은? 여자가 되어 한 남자를 지배하고 독점하려는 질투와 원한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규화보전은 원래 한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원문은 한글이고 번역본이 한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더군요. 한문은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를 한글 원문으로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좇 빠지게 연마하라.” 단언컨대 이것은 날조된 사실입니다.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 말은 한문 그대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규화보전

규화보전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적합한 비법입니다. 때문에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성화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팔루스의 폭력적 지배가 아닌 여성성의 헌신입니다. 핵심은 남성성을 죽이고 여성성을 강화해야한다는 사실입죠. 전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세 무공의 핵심은 여성성의 강화이다. 폭력적 지배보다는 부드러움의 헌신이다. 그렇습니다. 여성성은 이제 인류를 주도할 핵심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여성성의 핵심이 바로 거세(去勢)입니다. 이 거세는 성기를 절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문 그대로 해석하자면 세(勢)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들은 어떤 세를 제거해야 할까요? 기세, 권세, 위세, 힘쎄. 남자들은 자신의 세(勢)를 가지고 명령하고 과시하고 공격하고 주도하고 지배하고 규정하고 거칠게 몰아붙입니다. 부드러운 방법을 모릅니다. 현실을 다룰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를 모으려고 몰려다니며 으쌰으쌰 술만 마십니다.

제거해야할 것은 성기가 아닐 줄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세(勢)를 과시하려는 남성적 동물성이고 세를 가지고 지배하려는 팔루스입니다. 갱년기는 여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남자들도 갱년기를 겪는다고 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고 근력이 저하됩니다. 눈물이 많아진다고도 하구요. 애처로운 일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성화된다고 하더군요. 전 이미 술과 담배로 쩌든 몸이라서 팔루스가 발기되지도 않지만,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제 남자들은 규화보전을 연마할 시기는 아닐런지요.

 

허기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블로그진 안내] 본 지면은 회원들이 매달 약간의 후원회비를 납부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코너 제목을 개설하고 스스로 글을 업로드 하는 곳인 만큼, 본 코너의 저작권과 글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글쓴이 본인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우쑵니다.

소개팅 나가 우아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에 칼질 잘하고 집에 들어와서 고추장에 열무김치 넣어 비벼 먹어야 해소되는 그 기분은 무엇일까요? 뭔지 모를 허기로 꾸역꾸역 양푼에 담긴 비빔밥을 먹으면서 이 허기는 단지 육체적 허기만은 아닐 줄도 모른다고 짐작해 볼 뿐입니다.

이 허기에 관한 소설이 있습니다. 굶주림에 대한 소설입니다. 카프카의 단식광대라는 소설입죠. 주인공은 스스로 굶주림을 선택하는 단식을 대단한 재주인양 전시하는 광대에 대한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단식을 예술에 대한 상징으로 독해하더군요. 뭐 나쁜 해석은 아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더군요.

단식광대1

우리에 갇힌 광대가 왜 스스로 음식을 거부할까에 주목한다면 좀 다른 느낌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 갇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우리에 갇힌 광대는 동물원의 직원들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지는 음식. 기존의 동물원이 만들어주는 음식입니다. 인스턴트 음식입죠. 때문에 광대가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의외입니다. 경탄할만한 일이 아니라고도 하죠.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핵심 같더군요. 부득이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죽습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입니다. 자신의 입맛이라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에 사는 다른 동물들은 동물원이 제공하는 음식들을 맛있게 먹는데 왜 이 광대는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맹자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굶주린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달게 먹고, 목마른 사람은 무엇을 마셔도 달게 먹는다. 그러나 이것은 음식의 진미를 맛보는 것이 아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미각의 본성을 해쳤기 때문이다. 어찌 입과 배에만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침이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해침이 있다.”(飢者甘食, 渴者甘飮. 是未得飮食之正也. 飢渴, 害之也. 豈惟口腹有飢渴之害? 人心, 亦皆有害.)

전 맹자의 말에서 음식의 진미라고 번역한 말에 주목합니다. 음식에도 진짜 맛과 가짜 맛이 있지 않을까요? 음식 자체에 진짜 맛과 가짜 맛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진짜 미각(味覺)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맹자는 굶주림에 처한 인간이 동물원에서 제공되는 음식을 아무거나 먹을 때 진짜 미각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진짜 미각을 상실했다면 단식광대는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 맹자가 사람의 마음을 말하면서 이 미각의 문제로 비유했다는 것이 단지 상징으로 읽혀지지는 않더군요. 맹자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인간의 본심과 미각의 문제를 음식으로 비유하면서 설명합니다. 중국인들이 팔진미(八珍味)로 손꼽는 것 가운데 곰 발바닥 요리가 있습니다. 일명 웅장(熊掌)입니다. 물론 먹어본 적은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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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곰발바닥 요리를 빗대어 맹자가 말하는 본심인 의로움[義]을 설명합니다. 물고기 요리도 맛있고 곰 발바닥 요리도 맛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모두 가지지 못할 때 어떻게 할까요? 당연합니다. 더 맛있는 곰 발바닥 요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죠. 맛있는데. 이런 음식의 비유와 함께 논의되는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주목할 만합니다.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로움[義]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의로움을 취할 것이다.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사는 것보다 더욱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는 것을 구차스럽게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죽는 것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는 것보다 더욱더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죽음의 환난을 구차스럽게 피하지 않을 것이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生亦我所欲, 所欲有甚於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於死者, 故患有所不辟也.)

이것은 단지 상징적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맹자에게서 의로움은 인간에게 하기 싫은 것을 강제적으로 강요하는 당위적 의무가 아닙니다. 물고기보다 더 맛있는 곰발바닥 요리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생물학적 미각의 선택이듯이, 구차스럽게 사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의로움을 선택하는 것 또한 생물학적 취향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맹자에게서 사단(四端)이라는 도덕적 본성은 맛 가운데 맛, 쾌락 가운데 쾌락인 생물학적 미각입니다. 입, 귀, 눈과 같은 감각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취향이 있습니다. 마음에도 동일한 취향이 있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입죠. 공통적인 취향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가진 공통적인 취향은 맛있는 고기 요리가 입맛을 기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줍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은 주로 미학과 관련해서 논의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은 ‘게슈막’(Geschmack)입니다. 흔히 취향이나 취미로 번역되더군요. 그러나 이 ‘게슈막’이라는 독일어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바로 맛과 미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영어 ‘테이스트’(taste)도 취향이지만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바로 맛과 미각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칸트는 이 개인의 주관적 취향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취향은 주관적인 경험적 사실이지만,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취미판단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공통감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입니다. 정치적으로 해석할 때 공통감은 곧 ‘상식’(common sense)이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상식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상식은 사적 감각과 구별되는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즉 공통감이다. 이 공통감은 판단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호소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가능하게 되는 호소 때문에 판단은 특별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

아렌트가 해석한 공통감은 단지 개인적 차원의 미학적 감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감동할 수 있는 공동체 감각입니다. 공통감에 기초한 판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고, 호소력을 넘어 동감과 지지를 얻을 때는 특별한 타당성을 지닌 정치적 의미를 가집니다.

맹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가 말하는 사단도 단지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능력이 아닙니다. 도덕적 능력을 과시하는 일도 아닙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줄도 모릅니다. 맹자에게서 인(仁)과 의(義)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맛보아 감동할 수 있는 공동체 감각으로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 논의가 이상한 곳으로 흘렀군요. 다시 카프카의 단식광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단식했던 것입니다. 그 능력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던 것이 아니었죠. 굶주림을 견뎠던 것입니다. 아니 굶주림을 선택했던 것이고 동물원에서 주는 음식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죠. 맹자에 따른다면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로움[義]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의로움을 취한” 것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미각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니체의 입맛이 까다롭더군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매사에 맛있어 하는, 그런 만족. 이것이 최선의 취향은 아니다! 나는 ‘나’,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반항적이며 까다로운 혀와 위장을 높이 평가한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씹어 소화하는 것은 돼지나 하는 일이다!”

동물원에서 던져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먹성과 비위가 좋은 동물들은 어쩌면 역겨운 음식들까지도 맛있다는 듯이 먹어대는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럴진대 나는 나라 하고,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까다로운 혀와 위장이 가진 미각을 회복할 때, 그 미각(味覺)은 공동체 감각으로서 미각(美覺)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얀 사우데크(Jan Saudek)7

불현 듯 소개팅 나가 우아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에 칼질 잘하고 집에 들어와서 고추장에 열무김치 넣어 비벼 먹어야 해소되는 그 허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허기가 아니라 뭔가 인간적인 허기가 아닐까요.

단식광대는 인간적인 미각을 잃었고 입맛을 잃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살맛을 잃은 것이죠. 죽을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어쩔 수 없던 일이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살맛을 잃었는데요. 슬픈 일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이 슬프다기보다는 인간은 굶주림으로는 살 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슬픕니다.

아니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굶주림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굶주림 없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굶주림을 통해서 동물원이 주는 음식들을 거부하고 동물원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sallymann

물론 저는 이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를 먹고 돌아와 집에서 혼자 양푼에 고추장과 열무김치를 넣어 밥을 비벼먹는 구차스런 외로움과 비겁을 행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해방이라니. 굶주림과 해방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니 감격스럽습니다. 살맛나지 않는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기란 그렇게도 힘든 일은 아닐 줄도 모르겠습니다. 먹방의 시대이니깐요. 그러나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능히 맛을 아는 자는 드물다.”(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라는 <중용>에 나온 말은 단지 수사적인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 허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