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천 하룻밤 이야기]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류종렬(한철연 회원)

산다, 뭘 하며 살지: 삶과 함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2025 09 23 추분(秋分): 지구 온난화일까, 거의 추분 나흘 전까지 밤에도 20도를 넘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삶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 중의 하나가 학문이다. 그 학문의 체계화에는 철학이 있다. 철학은 한편으로 문제 해결에서 개인들 각각 편하게 살기 위한 방식도 있고, 다른 한편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들 사이의 몫을 내놓는다.

이 문제라는 것을 화두라고 부를 수 있다. 화두 또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푸는 데는 일상적으로 눈으로 보고 또는 귀로 들어서 따라 하기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살아온 과정에 느낀 심정성이란 것도 있다. 지자들은 후자의 심정성이 인간 종으로서 당연히 있다고 느끼고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않거나, 중경과 선후에 따라 뒷전으로 밀쳐둔다. 그런데 첫째의 지식에 관하여 눈과 귀는 개인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영향과 결과를 미친다고 여긴다. 게다가 이것을 잘 아는 자는 자기 이익을 챙기기 쉽다고 여긴다. 지자의 길은 현자의 길보다 중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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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할배들이 모인 사랑방 이야기에서 천문 지리를 통달해야 세상에 나가는 것이고(출세간, 出世間), 그렇지 않은 경우에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들 했다. 한 해의 길이와 한 달의 길이 사이에서 기준이 다른 것들, 원의 길이와 원의 지름 사이의 비례, 하도와 낙서니,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임) 등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무엇인가 신기한 이야기를 잘 알아야 출세간 하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농사를 짓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절후(해의 길이, 양력)라고 하면서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음력(달의 크기, 음력)으로 하는 것에까지 다른 점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한다. 어떤 현상 또는 사실들이 풀이 방법이나 추리 방식에 따라 달라서 서로 사맞디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랑방에서 한쪽과 다른 쪽 사이 견해가 서로 다를 때,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 쪽으로 결정 나는 것 같은데, 실재로는 답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선 정한 선후와 중경을 따르는 것 같다.

중등 시절인가, 중국 백만 대군이 백두산에서 오줌을 누면 우리나라가 떠내려간다든지, 중국인구가 몇 억이 모여 한꺼번에 뛰어서 구르면 지구가 흔들거린다고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 중국이 무섭구나 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 물리학을 배우면서, 이 걱정은 사라졌다. 백두산 꼭대기에 백 만 대군이 같은 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이고, 억대의 인구가 한자리에 모일 수도 없고 그들이 한자리에서 뛰어 구르지 않고 흩어져서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 정답은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와 지지점을 주면, 지구를 들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철학사들을 읽으면서 서양 중세에도 이런 걱정을 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바늘 꼭대기 천사가 얼마나 앉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선승들이 들었으면, 점에서 위치와 크기가 없는 데 점에 무한한 상징들이 앉을 수 있지. 원이 무한히 줄어들면 점이 되고, 줄어서 무한히 작아지면 그 점이 없어질까? 점이 무한히 크다고 생각하면 점은 둥근 우주가 되는 것인가? 상상작용은 지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허구와 미신을 낳는다는 소(小)소크라테스 학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중세 유명론에서 상상작용의 상징이 실재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우주의 무한성은 아직도 허구일 것 같다. 우주의 크기가 눈의 관찰을 넘어서 빛으로, 그리고 빛이 오는 거리를 350억 광년거리라고 측정(추정?)한다고 하지만, 그 과학적 측정이 상상작용만큼이나 허구(fiction)으로 보이는데, 실재라면서 천문학의 기술을 믿는 이들은 비허구(non-fiction)라고 한다. 인간 종은 지구라는 삶의 터전위에서 문제거리가 중하고 먼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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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이래로 실재하는 사물들에 대해 수를 세는 노력은 있어왔다고 한다. 기록 상으로는 구석기 말기에 뼈나 나무 위에 빗금친 기호(le signe)들을 숫자를 세는 표기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숫자로서 기호가 표시된 것은 신석기 시대에 공동체가 형성되고 난 뒤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 숫자의 기호가 수를 셈하는 산술로서 상징이 되는 데는 인류에게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쨌든 고대 수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개수를 세는 방식이 먼저였고, 그리고 셈법을 간소화하고 정확하게 하는 방식에서 산술학에서 말하는 수의 용어가 성립했다고 한다. 산술학에서 수는, 사과 한 개, 두 개; 대추 한 개 두 개의 한, 두와 다르다는 점이다. 한, 두는 수의 1, 2와 다르다는 것을 학술적으로 논의한 것은 그리스 철학사에서 퓌타고라스학파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이전에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숫자와 수의 구별이 있었다고, 고대 문헌적 자료를 통해 해명하였다. 그런데 수학자들이 수의 셈에서 10진법과 하늘의 운행에서 나왔다고 여기는 60진법 사이에서 전자가 후자로 발전하는 또는 달리 생각하는 방법이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를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두 개에서 2라는 추상의 상징을 생각해낸 과정을 분명하게 밝힐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사과 한 개와 배 한 개를, 두 개라고 하는 실재적인 것과 2라는 추상의 수는 별개인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실재적인 것은 현실적으로 바구니에 담는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개수의 둘은 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숫자에서 나온 것이다. 상징의 2는 사과와 배가 없이도, 그리고 바구니가 없어도, 생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수학 역사가들이 말하듯이 수와 숫자는 다르고, 셈법과 산술학은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이런 사유방식의 차이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졌을 것이고, 문헌적 체계로서 플라톤 먼저고 그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라파엘(1483-1520)이 그린 “아테네 학당”의 그림은, 플라톤의 하늘, 아리스토텔레스 땅, 즉 하늘과 땅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천문지리의 이야기는 서양에서도 이어져 왔다.

셈법의 하나, 둘, 셋, 다섯, 열, 스물 등은 대상과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셋 또는 다섯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라고 하면, 딱 떨어지는 셈법이 없다. 문제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현자 또는 지자일진데, 긴 세월에 걸쳐서 풀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셈법과 달리 산술학이 편리하고 유용하다는 것은 점점 알아채고 있었다. 현실적인 것, 기호적인 것,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현자들이 차히를 알았음에도 하나로 설명하는 체계를 만들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지자들은 분할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 범위 속에서 이렇게 저 범위 속에서는 저렇게, 다른 범위 속에서 달리 체계를 만들어야 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후세 철학자들이 차히의 발생과 원인을 생각하기보다, 차이들 사이의 범주(항목들)와 체계를 만드는 작업의 노력을 학문의 길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스 아테네 철학이후 2천 5백여년 동안에 차이의 범주들을 기준으로 삼아 구성론(le constitution)과 구축론(construction)이 있었고, 그럼에도 잘 설명이 안 되지만 차히의 발생에서 조성론(composition)이 있다는 것도 끼여 있었다. 아마도 현대수학들의 논의에서 수학 역사가들이 단위 형성에 관한한 논리주의, 형식주의, 직관주의라는 방법론의 방향을 설명하는 것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생성론이란 방법이 있다면 이는 자연주의 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과 한 개와 대추 한 개를 현실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수의 실재적인 것과 개수의 현실적인 것은 다르다. 그런데 1+1= 2라고 할 때 두 개의 2는 1의 동등성이 실재하는 것을 여긴다. 게다가 2를 분할하면 동등한 1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럼에도 고대에서는 그 1이라는 단위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플라톤주의에서 이데아론의 실재론이고, 유일 신앙에서 하늘나라에서 부활의 대상이 실재론이고, 나아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의 규범과 헤겔의 절대지 등도 실재론이고 현상학에서 선험적 현상도 실재론이라 한다. 이에 비해 프랑스 철학사가들이 19세기말에 칸트와 헤겔의 영향으로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인식 대상의 관념이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 허구(une fiction)이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시기에 산술학과 논리학의 대등을 논하는 것도, 관념론의 사유 논리와 같은 계열의 체계화로서, 사유에는 하나의 통일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중세 보편논쟁에서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전칭긍정명제가 실재하지 않은 추리에 의한 귀결이라고 여기고 착각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S가 P이다에서 모든 S가 보편이니 절대니 하는 것은 하나의 신이 전체이면서 보편이라는 독단(le dogme, 억측)일 뿐이라고 한다. 그 1(하나)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vox, la voix)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유명론의 학문이 퍼져나가자, 신학은 다시 범주보다 체계를 세웠다고 하지만, 즉 아퀴나스가 보편논쟁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이에 대립하는 학자들은 그 신학자들의 독사(le doxa) 정도로 여겼다. 독단은 인간의 삶의 편안과 안녕을 위해 기호의 편의를 현실적으로 적용함에서 합리적인 부분만을 경계삼아 유용성과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고, 개인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부추기고, 집단적 오성(지성, 이성)인 것처럼 위장(포장)한 것이리라.

수학사는 흥미 있게도 하나라는 숫자는 범주와 체계 속의 단위(1)와도 다르고, 추상하여 1이라는 것과도 전혀 다르다고 한다. 게다가 1(추상)은 원주의 길이를 무한히 작게 잘라서 나온다고 여기는 점과도 다르다. 어쩌면 실재성이란 단위를 설정하기 이전에 아페이론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방황하는 흐름이고, 경계가 없는 덩어리이고, 게다가 무어라고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실재적인 것이며, 세상의 여러 다양한 것들 생성하게 하는 자연 또는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단위는 우주를 단위로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흐르고 변한다. 프랑스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브랑슈비끄(1869년–1944)가 원시 문화에서 숫자의 성립과 개념작업을 생각하면서, 원인(아이티아)과 범주(카테고리)는 서로 다른 길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사유였을 것이다. – 아마도 발생과 현상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재성은 발생에 있으며, 현상은 현질적이지만 실재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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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론이 하나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주장에 대한 허구라는 이야기에 대해, 근세철학에서 데카르트 이후로는 유명론의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정수에서 무한이 절대적 무한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데카르트가 말한다. 마치 신이 모든 무한을 포함하는 무한성인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데카르트의 좌표 상으로 무한히 길이를 연장(l’étendue)하면 무한이 있고, 그 무한은 실재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이 무한성을 이해하는 인간의 사유가 타당(정당)하다고 하였고, 무한의 사유가 당연히 인정된다고 여겼다. 신은 무한하다. 무한성은 실재한다. 여기에 논리학이 끼어들면 무한한 전체(전칭긍정 명제의 주어)를 알면 그에 속하는 부분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이후 200여년 만에 그 무한이 인간의 사고가 만든 무한이라는 것을 비유클리트 기하학이 제시할 것이고, 다른 무한을 증명할 것이다. 이런 여러 무한들도 모두 실재성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칸토어 이후에는 무한의 종류들도 많아졌다. 그러면 우리가 사유하는 무한들 말고도, 모두를 체계 속에 넣어서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 무한, 그런 무한이 있을까? 아직 무한성이 비결정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실재성은 흐름 또는 생성(자연)이라는 이법이 성립한다. 흐름을 마름질하는 방식에 따라 상상작용은 흐르는 덩어리를 달리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등이 주장하는 하나의 원리(정의)가 다른 것(원인 생성)들의 잣대가 되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천문학이 우주전체에, 진화론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등 종의 다양성에도, 통일장이 극미립자의 역학에서도 공리와 정의처럼 먼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각 학문은 한계 안에서 정합적이고 그에 맞는 대상(이미지작용)에 규약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전체에 통일성(l’unité)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통일성 속에 있다고 여긴다. 이 통일성이 단위가 아닌가? 그 단위가 고정되고 불변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단위가 흐르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성하는 중인 덩어리를 임의적으로 잘라 범주를 정한 것이 아닌가?.

수학의 범주와 체계화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고, 각 진행의 방식에 따라 세계 또는 자연을 구성, 구축, 조성, 생성 등에서 이유와 방식들은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중이다. 수학의 문제를 푸는 방식은 50가지가 넘는다는 오일러의 발언은 경계(페라스)를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수학들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그 보다 더 많은 방식이 심리(프쉬케) 또는 영혼을 다루는 방식에도 있을 것이다. 요즘 급부상하는 AI가 이미지를 습득하고 다른 방식은 영혼(두뇌)을 다루는 새로운 한 방식일 것이다.

셈법에서 산술학, 측지술에서 기하학, 복리 이자계산에서 지수와 로그함수, 실재성의 무작위 재단하는 방식에 따라 부정방정식과 대수학, 우연이라기보다 우발적 사건들의 발생에 대한 주사위놀이와 같은 계산에서 확률론과 통계학, 기후 변화와 지진 활동의 발생에서 복잡계이론, 집합론과 파라독사 이후 무한계 등에 이르기까지 수학들(Les mathématiques)의 발전과 확장이 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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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사유 방식의 천차만별의 차히들의 등장(생성)만큼이나 영혼학(프쉬케학, 심리학)의 영역(분과)들이 생겨났다. 여기서 상층의 정신과 생명체의 영혼 사이에서 새로이 응용할 용어로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영국의 마음(the mind)과 어원을 같이 하는 심정성(la mentalité)의 용어를 수용한다. 정신과 영혼 사이에서 데카르트이후 “빛들세기”에서 정신은 추상과 보편을 실재성으로 삼는데 비해, 영혼은 자연과 발생을 실재성으로 삼는 차히를 드러낸다. 이로서 화학이 구화학(al-chimie)에서 벗어나고, 생물학이 보편과 추상과 별개로 실재성의 학문임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정신주의자들은 자연의 생성과 생명의 진화에는 법칙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학문이 아니라 우발성의 개연성에 머문다고 보았다. 생명은 원래 아자르(hasard)이고, 신의 활동도 아자르라고 하게 되면서 정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원리와 법칙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이 또는 무슨 통일성이 절대와 완전으로부터 자연과 생명에 적용가능한가? 이런 물음은 신이 생명에 대해 무엇을 적용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추상의 산물로 여기는 신은 생명과 자연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놓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에서는 신의 권능과 역할이 있는가? 사회와 공동체는 인간 활동의 영역이다. 이제야 인민 주권이란 말을 실감하는 시대이다.

정신의 실재성, 관념의 실재성을 믿는 이들은 신의 권능과 역할이 자연과 생명에게는 유보하더라도 인간 사회와 국가의 체계는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신앙이 국가와 국민이라는 일반화의 정립이 실재성이라고 하고, 국가의 기능과 국민의 역할을 실재성이라 한다. 이런 우화적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전통과 풍습 속에서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추상성과 보편성을 반박하듯이, 일반화에서 대상화를 이룬 개념들이 실재성이라는 것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반화의 대상들을 현실적으로 대응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셈에서 개수(nombre)와 거리에서 길이(étendue)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이런 사물들과 거리들이 실재하는 것인가에 대해 논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즉 추상관념들은 실재성이 아니지만, 추상관념이 적용하는 일반 대상들로서 개념들이 실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화의 두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추상관념이 개념화에서 개수는 세는 것과 같은 일반화가 있고, 다른 하나는 더미 또는 여럿에서 일반화를 합의하는 방식이 있다고 한다. 전자에서 대상은 개수를 세는 수학과 물리학의 편리에서 오는 것인데 비해, 후자에서는 공동체에서 훌륭한 일, 장한 일의 일반화이다. 플라톤주의와 논리주의는 전자의 일반화가 먼저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19세기말 20세기초 심리학의 발달과 언어학의 발달은 전혀 다른 길을, 후자의 길을 보여주었다. – 맑스의 가치, 니체의 가치, 심정성의 가치는 후자의 길에 가깝다 – 앞에서 언급한 셈칙과 산술학 그리고 기하학의 발달과정의 언급에서 일반화는 현실적 대상에서부터였다고 했다. 수학에서 일반화는 언어의 용어 성립에서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언어학자가 아니라 일부 입말학자는 공동체의 삶에서 명사가 동사보다 먼저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명사에서 동사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명사는 고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들 일체이다. 소크라테스는 대상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로서 살아간 과정과 행위의 일체를 말한다. 그 명사로서 용어는 과정의 일체로서, 그의 삶의 일반화에 대한 용어로서 일반화라는 것이다. 사자가 먼저이고 용맹하다는 다음이며, 날래다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용어 성립에서 명사, 성질(특성) 형용사, 동사로서 규정하고 다른 것과 경계를 그었다는 것이다. – 이 가설은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나온다.

일반화에서 전자의 일반화에는 관념 또는 추상의 상징이 실재성이라는 이론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후자의 일반화는 삶의 과정에 대한 표현과 합의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신석기 시대의 종족들의 공동체에서 언어가 문법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이야기에 암시를 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화용론에 있을 것이다. 작업장에서 벽돌 장인이 “벽돌”이라고 외치면, 벽돌을 쌓는 것인지 던지는 것인지는 같이 작업하는 동료와 약속 또는 합의에서 이루어진 활동에서 용어이라는 것이다.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의 용어로서 먼저 등장한 것은 삶의 터전의 합의와 조성에서 있을 것이다.

단어와 대상, 문자와 그림의 연관으로 보았던 비트겐슈타인이 1차 대전이 끝나고, 왜 고향 땅으로 돌아가 유치원 애들을 가르치면서 언어 형성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이 시기에 인류학과 입말학(언어학)은 논리학의 구조와 틀(체계)과 달리 생성하는 용어와 개념을 다루는 방식을 고민했다. 앵글로색슨이 인식의 우선으로 용어와 개념이 먼저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그것들이 먼저 있는 것이라고 실재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지만, 프랑스 쪽에서 언어학은 논리학과 달리 입말이라는 점을 보았다. 중세 말기의 개념이 기호와 목소리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추상은 실재성이 아니라고 하였듯이, 20세기의 언어학에서 그 입말은 소리와 이미지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벩송은 사유의 재료들이 이미지들로 되어있다고 보았던 심리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언어는 몸짓, 행동, 말씨 등을 포함한다. 그 언어의 실행에서 논리가 먼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비해 논리학과 수학과 별개로 입말이 있고, 입말의 일반화가 있다. 소쉬르가 설명하는 입말의 경우에, 실재하는 대상으로서 소나무가 있고, 이 소나무와 별개로 현실적으로 청각 이미지(ㄴ, ㅏ, ㅁ, ㅜ)가 있으며, 이것을 듣는 이는 머리 속에 그리는 소나무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청각이미지와 상상이미지는 각각의 개인이 갖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카나다의 꼬마가 나무를 단풍나무로, 프랑스 파리의 꼬마가 떡갈나무로, 강원도 인제에 사는 꼬마가 미시령의 소나무를 생각(이미지를 그리며 상상)하는 것은, 그 꼬마들의 삶의 터전의 사유이다. 청각이미지를 시니피앙(기표), 사유(상상) 이미지를 시니피에(기의)라고 한다. 이 두 가지는 대상의 실재성과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들이라고 소쉬르는 못 박았다. 그런데 이 두 이미지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는 그 각각들이 살아온 과정의 이미지들을 일반화 한 것이다. ‘부산’은 우리나라 사람의 청각이미지이고 ‘푸산’은 미국인들의 청각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아는(상상하는 사유하는) 한반도 남쪽 항구의 부산에 대한 서술은 다르다. 그러면 진실은 부산을 죽 살아온 사람의 이미지 작업들의 일체일 것이다. 살고 있는 이 부산의 일반화가 먼저이고, 살지 않았던 사람들 각각의 대상 이미지는 나중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보태어 보자, 이런 과정의 일반화에는 삶의 추억들의 일반화를 포함하며(추억이미지), 길게는 한반도 역사를 포함하는 일반화의 기억도 있을 것이다(기억이미지).

심리학과 입말의 결합에서 부산이라는 덩어리를 잘 표현하는 것은 추억들을 포함하는 기억을 잘 살리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런 부산의 대상화가 실재성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의 실재성의 과정의 일체를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비해 부산의 이야기를 듣거나 또는 한두 번 체류하여 아는 부산의 이야기는 일반화도 아니고 개념을 사용한 설명의 편리일 뿐이다. 게다가 ‘푸산’이라고 하는 개념화는 이 발화자의 자신의 삶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으면서 개념의 일반화를 빌려온 것이다. 종교의 신학에서 하늘나라, 천국, 극락 등의 개념은 어떤 실재성의 일반화 용어에서 빌려왔을까를 생각해 보라. 실재성은 시간의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을 합의 또는 평결에 의해 일반화에서 오는 것이 먼저이다.

이런 관점을 철학사에 비추어보자. 이오니아학파의 자연과 엘레아학파의 존재 사이에 어느 것이 실재를 드러낸 것인가? 사람들은 존재가 실재이고 자연은 변화하기 때문에 가상 또는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 현대철학 사가는 이런 사람들을 플라톤주의, 논리주의, 유일신앙주의에 포획된 사람이라 한다. 실재성은 지구 형성과정을 포함하는 자연의 변화가 실재성이고, 그 시대에 맞는 일반화라는 것을 만든 것은 인간이 인간의 편리(유용)와 탐욕(이기심)에 맞추어 규정하고 정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19세기말 20세기초에 심리학과 인류학의 발달과 더불어 이미지 실현(상상작업, l’imagination)으로 나타난다.

추상관념은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은 중세 유명론이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편리를 위한 언어와 논리의 과학적 규정이 실재성과 연관이 없다는 것은 소쉬르의 입말에서 설명한다. 그럼에도 현실성이 실재성이라고 또는 신실재론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은 현실에 드러난 현상의 실재성이 역사와 과정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추상과 논리에 인습을 인정하며 유용성과 실용성의 이익에 우선하는 현실에서, 제국의 논리와 명령체계에 포획된 현실에서, 안주하는 것이다. 극우들이 국민주권과 최종심금을 무시하고 그들만의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인민주권에 저항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역사적 과정에 자기들의 관념과 개념의 정당성을 위하여, 이익과 착취를 위하여, 전쟁과 공포를 조장했을 뿐이다. 역사에서 그 자유와 인권을 인민이 극우(왕권, 교권, 제국권)에게 저항, 항쟁, 혁명하면서 겨우 찾아가는 중이다. 실재성은 삶의 터전에 과정에 있다. 보편과 절대의 체계로부터 인권이든 자유는 없었다. 말뿐이다. 낙수효과는 없었다. 이런 관념과 개념으로부터 현실성에 맞는 실재성을 도출하는 것은, 논리적 착각이며, 일반화의 허구이다. 이 허구의 극한에 유일신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오니아학파의 세계(코스모스) 이래로 “하나”는 실재하는 덩어리, 즉 아페이론이다. 이것은 변화중인 자연이며, 지속하는 우주이다.

(7:04, 58T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천 하룻밤 이야기]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2025 08 23. 처서(處暑), 고추잠자리가 높이 나는데 더위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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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렬(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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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에서 아이러니(l’ironie)가 세 종류 있다고 들뢰즈가 제시했다. <고대의 상식을 통하여 소크라테스 아이러니, 근대의 합리주의의 양식에 의한 아이러니, 그리고 나를 개입시켜 시대의 활동을 서술(표현)하는 낭만주의의 아이러니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는 자의식의 확장으로서 지혜의 추구가 하나의 길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Συμπόσιον, 심포지온)』의 자의식의 발현에서 욕망의 끝이 답이 없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라 한다. 이는 의식의 상승에서 아이러니이다. 근대에서 자의식은 자연의 총체성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를 보증해주는 신도 있다고 하였으나, 이 신은 신학의 신이 아니라 이론적 신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식의 발현이 무한을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칸트에서 이상은 형이상학(자연학의 배후)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낭만주의에 이르러서 이런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당연히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고, 이런 자아가 자유롭다고 하며 자연 속에서 방랑성 또는 노마드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 그 방랑성은 왜 있는가? 자연에서가 아니라 인간에서 방랑성의 근원과 이유는 무엇인가? 상승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고 총체성의 통일성도 아닌, 자아의 자유(방랑성)의 기원을 찾으려 했으나, 의식의 내재성은 규정할 수 없는 무차별성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이다.

무차별성 속에서 자아의 성립은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신 없는 자아, 범아 없는 자아, 자연 없는 자아는 성립할 것인가? 고대와 중세를 거쳐서 근대성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개체성 또는 이것임이 없는 인간은 고독자일까? 도덕감과 종교심이 있다고 하는 이들은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 있다고 한다. 그 양식이 무엇인지 대상화하기 어렵지만, 인간의 자연에는 일반화가 있다. 이 기원 또는 원인의 탐구는 인간의 발생적 기원에 관한 논의로 넘어갈 것이고, 생명의 기원을 탐색하면서 생물학과 심리학이 길을 열 것이다. 그럼에도 개체로서 인간은 단독자임에 분명하다. 19세기에 단독자, 유일자의 대상화로서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을 다루는 태도 사이의 차이가 등장할 것이다. 생물학의 발전과 진화론의 등장으로 기나긴 생명현상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을 안다. 그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류에서도 인간 종에서도 아니고, 개체(불가분)로서 자연 속에서 한 인간(이것임)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듯이 자기 대신에 죽을 수 있는 자가 없듯이, 생명체로서 인간은 단일성이고 특이자이며, 별건의 노마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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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생산력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자연이 생산과 창조를 한다. 자연의 생산성은 이오니아학파의 사유였을 것이다. 페르샤의 침공을 막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동맹은 각각의 도시가 스스로 자립한다는 생각을 해냈을 것이고, 자립의 도시를 아테네에서 풀어보려고 여겼던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현자들은 아테네로 모였을 것이다. 그 시기의 화두는 고르기아스의 카이로스(때에 맞게)였을 것이다. 이 때를 알아보려고, 세상에서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풀어내는 이들을 찾아 나선 이를 소크라테스라 생각해 보자. 인간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우주 속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풀어보려고 한 이는 플라톤일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의 배후: 메타피지카』라는 논저를 쓰면서, 자연을 공간에서 숫자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도와 체제를 유지하려는 참주제, 국가, 제국주의 등에서 유지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가르칠 때는 이미 그의 제자인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참주(대왕)로서 아테네를 식민화하였고, 그리고 동방으로 정복전쟁을 나갈 때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국주의에 젖어 있었던 어용철학자는 아닐까? 물론 알렉산드로스의 측근이었던 그의 조카가 처형당하고 난 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에 틈이 생겼다고 한다. 정치편이든 윤리학들이든 권력 속에서 저술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추론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아테네에서 반 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가 소크라테스처럼 인민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인민과 더불어 철학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핑계로 도망갔다고도 한다. 그는 도망가면서 “아테네가 철학에게 두 번이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테네를 떠났다고 한다. 1930년대 비엔나에서 프로이트는 나찌의 위협을 피해 영국으로 떠났다. 이 과정에서도 솔직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말했지만, 인민 속에서 인민과 흐르면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도 시대의 변화에서 흥미롭게 살았던 이들이 있다.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종족이란 단위가 와해되는 시기에 사키야족의 싯달다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당나라와 전쟁의 대립적 구도 속에서 해동삼국의 다툼에서 인민 속에서 불교를 통한 고통과 불행을 해소하려는 노력했던 원효도 있었다.

인민 속에서 인민의 흐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소유이며, 무자아이며, 무국적인 것은 그래도 유효한 것 같다. 그럼에도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 공동체를 인정하고도 도망치지 않은 현자는 소크라테스와 예수일 것이다. 같이 산다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함께 하는 것이리라. 벩송이 도덕적 영웅과 같은 이를 소크라테스와 예수로 꼽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로 또는 체제로 체계로 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두 사람이다. 그리고 목숨을 내놓고, 타인과 타자를 향해 문을 열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자 했다. 사적 이익을 챙기는 쪽에서 경계를 긋고, 뺏길 것이 있다고 여기는 한에서 타인이 적이 된다. 뺏기기 전에 빼앗는 것이 전쟁이며, 모든 것을 빼앗을 때 최고의 잉여이익을 챙기는 것이라는 것을 안 것도 이기적 사고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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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孤) 또는 ‘홀로’는 이기적 삶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도 있었다. 퀴니코스학파의 유랑(노마드)에서, 불교의 승단(비구/니집단)에서, 카파도키아의 지하에서, 사막의 천막에서, 초원의 포라에서도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왔다가 간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도 설득할 노력도 하지 않고서 느끼고 살았을 것이다. 이런 수행과 닮은 노마드의 삶에서 누가 시켜서도 스스로 하고 싶어서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의 섭리와 숙명에 대한 화두가 떠나지 않은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해안에서 근무하던 군대생활에서 방위병과 함께 밤 보초를 섰는데, 동국대 불교전공 석사와 함께 몇 달을 함께 했다. 그 방위병은 추운 겨울에 난로를 쬐기 위해 나에게 선문답의 화제를 내어주었다. 나는 보초에서 이틀에 한 번씩 선문답의 화제를 받았다. 한 삼개월 정도에서 그는 어느 날 “각자(覺者)는 떠난다”는 화두를 주었는데, 그때에 싯달다가 이런 화두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벩송에서도 깨달은 자는 정지해 있지 않고 지속(운동)하는 자라는 것에 붙여보기도 했다. 그런데 들뢰즈의 여러 글을 읽으면서 노마드가 각자(覺者)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개인은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되어야 깨닫는다는 수련도 실천도 있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가 노마드라는 규정에 다른 하나를 보태어, 1988년 대담에서 <토인비(Toynbee, 1889-1975)의 구절에 감명을 받는다. 즉 “노마드들은 꿈적이지 않는 자들이고, 이들은 떠나지는 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노마드들이 된다.”>고 한다. 떠나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지. 노마드 의식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흐르고 있는 의식이기에 자아도 범아도 아닌 의식일 것이다. 노마드가 고(孤)일까, 고(孤)라고 고정시키는 것이 페라스를 규정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아페이론이 노마드일 것이다.

‘혼자서’라는 용어를 즐기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그러하다. 그의 아테네는 그 영광을 잃었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처한 도시국가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사유를 할 수 있었다. 정지해 있는 듯 하면서 움직이는 사유를 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고(孤)를 즐겼을 것이다. 어쩌면 (먹거리와 잠자리가 해결된 귀족 계급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말하듯이 여가(σχολή, 스콜레)가 있어야 학문을 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학교와 스콜라철학은 이 그리스어와 연관이 있다. ‘혼자서’라는 용어 속에는 어쩌면 “혼자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구의 사용을 우선으로 여기는 지자든,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하다고 여기는 현자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았으리라. 지자는 터전 또는 사회에서 행할 수 있는 일들을 눈살미로 배울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도구의 사용에는 눈살미가 중요하다. 다른 한편 공동체에서 그럴듯한 삶은 시간 속에서 여러 난제들을 해결해온 이야기를 배울 것이다. 현자는 꼬마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듯이, 입문자(도제)들에게 알 듯 모를 듯 화제들을 제시하였을 것이고, 입에서 입으로 흐르고 있었으리라. 인더스 문명의 브라만의 교육은 암송이었다고 하고, 그리스의 전통에서 호메로스 전통과 시인들의 신화의 이야기는 연극장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을 더 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나중에 문자화는 공통적이고 체계적인 전달을 가져왔을 것이다.

먹거리와 잠자리의 해결에서 유한계급의 지식 체계와 확장은 그 지식 안에서 즐거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즐거움이 행복과 동일하지 않지만,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일 수 있다. 식주(食住)의 해결이 민중과 백성에게도 일반화하여 이루어질 때는 생산력의 발달에서일 것이다.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산업화와 같은 궤도 위에 있을 것이다. 의복은 제도 속에서 치장이라 여기면, 의(衣, 옷과 모자, 신발과 장신구)등은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은 식주이다. 식주의 해결이 긴 노동분업에 의해 이루어진 체제에서 고통과 비참도 어느 정도 해소되어 갈 때, 고(孤)라는 개체성 또는 인격의 특이성은 표출된다. 특이성이란 류와 종의 차원에서 인간이나 최고류의 신 등과 연관 없이도 문제거리로 제기되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화두가 되기 시작한 시절에, 특이성(개인, 유일자)이 실질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대혁명과 더불어 산업화에서 나온 것이라고들 한다.

자연이 신에게서 벗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며, 자연의 섭리를 터득하는 시기를 근대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근대성에서 자기의식은 특이자로서 개인(그 누구, 즉 조국, 최강욱)이다. 그는 논리상으로 최고류, 류, 종, 종차의 지위를 거쳐 가며 특이자라는 지위를 갖는다고들 한다. 그는 혼자서 살 수 있는가? 공공의 토대위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의 이익의 전유와 확장으로 살아가는가? 이 즈음에서 공동체나, 공산주의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김건희의 목걸이와 시계에 대한 이야기는 의(衣)의 표시를 드러낸 것이리라. 그 표시는 권력이며, 이 권력 지배방식은 제국의 하수인이라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는 인민의 삶에서 먹거리와 잠자리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빌게이츠가 하루에 수십억을 벌고, 그의 집 입구에서 집까지 들어가는데 수 킬로가 된다고 하더라도, 먹거리와 잠자리는 민중의 기본, 공공성의 문제이다. 공공성이 없는 사적 소유에 대한 무제한 편취 또는 자본축적이 왜 문제가 되지 않는지를 문제 삼지 않고서, 개인의 파편화와 개인의 인격화를 문제 삼는 것은 허구이고 또는 전도된 사고에서 오는 것이다. 전도된 사고에서 최고류에서부터 연역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이 자본과 제국의 제국은 신앙처럼 믿고 있다. 이 사고는 무기와 전쟁의 공포로서 사적 소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들의 논의이다. 윤석열 어게인을 말하는 극우들은 이들의 꼭두각시이다.

경계 없는 우주(아페이론)에서 사유를 출발한다는 것은 홀로 길을 나서는 것과 같다. 세상(우주)에서 생명체는 개체로서 혼자이라고 느끼는 동물은, 진화론적 발전 과정에서 아마도 인간이 처음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홀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학문에서 먼저(선후)이고 화두로서 중할(중경)것이다. 숙명의 받아들이는 겸손의 철학이 오래 전에 제기되었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흐름에 맞게 질박하게 살면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소통을 팔방으로 그리고 어제와 아제를 연결하는 사유를 해야 할 것이다. 각자는 이 세상에 아자르(hasard)로 왔으며, 필연적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이 자연의 섭리 속에서, 세상(코스모스) 속에서 깨달은 자가 먼저 길을 나서는 것이다.

인간이 생태계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을 훼손 또는 파괴하지 말자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말로서 떠드는 것이 일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변역(變易)하는 일이 나, 너, 우리의 일이다. 곧 떠난다는 것을 자각하며, 그래도 이 터전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도 혼자이다. ‘혼자’를 세상과 멀리 둘 수도 가까이 둘 수 없다는 점에서, 자아는 공(空)이며, 범아 속에서도 어디에도 없으며, 그리고 어느 시점에도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아니다’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삶이 색(色)이며, 말하자면 그렇다는 정도이다. 이 세상에 색칠을 한다? 또는 주사위 놀이를 한다? 그럼에도 자연의 섭리 속에서 혼자서라도, 우리의 터전을 아름답게,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세상으로 만들려 노력하며 강도를 높이려 한다. (4:20, 58S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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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은 1911년 5월 29일 영국 버밍험 대학에서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을 강연했는데, “우리는 어디서 와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라는 화두를 제시하였다. 사람들은 이 제목이 고갱(Gauguin, 1848-1903)이 1897년 그린 제목임을 안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나는 죽기 전의 나의 모든 에너지를 이 작품에 쏟았었다”고 “1898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폴 고갱의 유서”에서 쓰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고 세상을 떠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그림에서 오른쪽에서부터 어린애, 청년, 노년을 그려 삶의 과정을 표현하였고, 그 각 생의 현장에서 주변의 연관들을 표현했다고들 한다. 그림은 삶의 과정을 한꺼번에 보여줄려고 하는 우주론적인 사고이고,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합과 같다는 발상이다.

위 물음을 제시한 벩송의 사유는 우주발생론적이다. 그는 철학이 실증과학처럼 진보할 것이라 한다. 원시적 생명, 즉 단세포에서부터 사유하자는 것이고, 생명은 기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20세기 초) 쯤에서 인류는 생명이 기나긴 역사의 과정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을 겨우 자각한다. 뀌리의 방사능 동위 원소의 발견이후 긴 시간을 지나서야, 오랜 지층에서 한 꽃가루가 몇 억년 전이라는 것도 계산하게 되었다.

세계는 기적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누군가가 마법의 막대기를 사용하지도 않고 말로서 있으라고 해서 창조된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안다. 실증과학의 발달로 의식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들(만들어진 것들)의 선들(lignes de faits)”을 따라 추적해 볼 수 있다. 그 의식은 생명인 한에서 우선 기억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미래에 예상참여하려 한다. 그러면서 의식은 자기를 확장시키면서 세분화(가지치기)하여 왔다. 의식은 생명과 공연적(coextensive)이라 한다.

이 우주의 섭리에서 이 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한 생명체로서 인간은 스스로 떠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터전에서 삶을 중요시하는 것도 인간이다. 여기에서 벩송은 그의 첫 작품에서부터 도덕감과 종교심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보태어 아름답다는 감정을 보태었다. 이런 세 가지는 지성(또는 속 좁은 이성)이 계산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으며, 규정할 수도 없고, 나아가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인간에 대한 연민, 아름다운 감정, 공통 삶에서 장하고 훌륭함 등은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 풀어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깨달은 자들이 행하는 것이리라. (58SLJ)

도덕감과 종교심은 열려진 소통일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삶에서 도구의 발전과 생산력을 증가시켜 왔다. 그리고 소통의 방식도 다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소리와 문자에서 오랫동안 각 시대마다 소통과 정보의 체계화를 위해 백과전서들을 만들어왔다. 이런 지적 노력과 소통의 확장은 인간들 사이의 신뢰와 조화로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런 정의가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아직은 없었다.

철의 시대에서 기술발달의 속도와 달리, 규소의 시대에서 기술과 소통의 발달은 엄청나서 세기의 구분도 세대의 구분도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현 시점 여기에서 삶의 터전을 잘 만드는 것은 절실한 작업이다. 그 만치 인간들 사이의 신뢰 또는 경제적으로 신용이라 부를 수 있는 덕목도 소중하다. 사회활동에서도 제도의 조직적 연결과 달리 인간적 연결망이 생겨난다. 게다가 터전에서 삶의 양식을 바꾸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솟아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광복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일제 부역자들의 잔재를 제거하지 못했던 것들을, 윤석열 집단의 반란에 대한 제압을 통해 밀정들을 제거하려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광장에서 응원봉처럼 이들의 누리소통의 빛들의 퍼짐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제도 속에서 사실들의 문자화로 기록과 등록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이 처서(處暑)이다. 정청래가 백로와 추분을 지나 한로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최강욱이 힘을 보태고, 추미애가 법사위원들을 추스르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문자화의 길이 현 정부의 일일 진데, 조국혁신당의 조국이 한 걸음 더 나가야 할 것이다. 진보당과 더불어 인민의 입말을 통한 누리 소통과 학습열락(學習悅樂)을 통하여 공화정을 세우리라. 인민 주권의 강도(τόνος 토노스)를 다져가야 할 것이다. (4:31, 58SLJMA) (5:32, 58S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이항 대립의 세뇌와 자연에서 교육 [천 하룻밤 이야기]

이항 대립의 세뇌와 자연에서 교육

2025 07 22 대서(大暑) – 소서에 무척 더웠으니 대서에는 좀 덜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한 나라에서 상반된 견해들과 여러 견해들을 통합하여 일정한 방향을 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정당은 자기의 방향을 가지고 나간다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선언한 무리들의 모임이다. 한 모임 안에서 공통적 담론을 가지고 있듯이, 다른 모임(정당, 시민단체)에서는 다른 공통적 담론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19세기 후반 이래로 상업자유주의자(약탈과 수탈을 일삼는 liberaliste)와 사회자유주의자(프롤레타리아 지도, 인민주권, libertaire) 사이에 대립은 서로 담을 쌓아 놓듯이 배제하고 배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민자유주의자들(리베르떼르)은 스스로 공적인 일들을 중히 여기고, 인민들의 삶의 터전(인프라)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고 하면서, 잉여노동을 착취하여 상품을 팔아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타문화를 짓밟는 상품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한다. 이러한 대비는 마치 인도주의자(l‘humanitaire)가 인문주의자(l‘humaniste)를 경멸하는 것과 같다. 인도주의자들은 자연 속에서 인간이 활동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루소주의자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인문주의자들은 오랜 유일신앙에 세뇌되어 인간의 영혼은 하늘나라(소천)로 간다고 믿는다.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 평등하게 돌아간다고 할 때, 신 없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 돌아간다고 말하기 이전에 삶의 터전에서 공공을 우선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껏 일하고, 어릴 때나 늙어서나 노동력이 없을 때는 필요에 따라 인도주의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런 인도주의자의 구호, “각자는 역량에 따라 각각은 필요에 따라”라는 구호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로 퍼져나가서 맑스가 말년에 이 구호를 중히 여겼다.

사회에서 상반된 담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정치 경제적 사건들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과 항쟁에서 기득권의 반동은 거세었고,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반동들은 인민의 발현과 자유를 억압하고 새로운 제국주의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세계사를 읽는 방식이다. 철학사에서 보면, 참주제(또는 황제제)에 대한 인민의 저항은 수천년 동안 있어왔다. 아마도 신석기 이래로 이런 저항에서 어쩌다가 간신히 아테네에서 민주제라는 것을 실험했다고 본다. 이런 데모스(인민)의 저항, 또는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인민의 저항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벩송도 기득권의 저항(반동)에 대한 저항이 도덕감의 발현이라 보았다. 기득권은 이익에 눈이 멀어 도덕감이 없다. 그 도덕감이란 연민이며,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산다는 데 공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도덕감이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사에서 단지 “빛들세기(les Lumiere)”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민의 저항에 대한 반동은 거세었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은 담론의 상층(주류)을 형성하며, 형식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를 구하는 지식, 사회의 제도를 공고히 하여 반동의 지위를 구축하는 국가주의, 그리고 철학적 전통에서 자연의 배후를 가르쳐주는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을 하나의 통합으로 구축하려 하였다.

이런 세 패거리로부터 사라져가는 듯했던 종교와 도덕의 배후학으로 도덕형이상학(도덕 배후학)을 논리 체계방식으로 새로이 구성하고 구축하였다. 자연배후학이 유일신앙(국가주의)과 황제제(참주제)의 배경이 되었듯이, 이런 도덕배후학은 제국주의와 제국의 형성의 토대로서 자임하였다. 이런 상반된 담론이 같은 평면위에 놓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그럼에도 유일신항의 변증법은 하나의 평면위에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1848년 공산주의 선언문 이래도 두 담론은 같은 평면위에 놓고서 다루는 것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항목 대 항목의 대립은 지구상을 어지럽게 하였다. 냉전시대를 거쳐서 제국의 시대인 지금도.

적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항목 대 항목이라는 이항 대립을 다루는 방식은 구시대의 산물로 밀려나는 듯하였다. 왜냐하면 수학과 미시물리학은 이원적 대립이 무의미(파라독사)임을 알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사도 다항들의 관계이며, 그 상황과 사건들 속의 개인도 다양체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본 자연배후학(메타피직)이 아니라 자연이 자기 생성과 자기 전개를 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생성론(자연 되기론, 우주발생론)이 담론으로 퍼져가는 듯하였다. 그럼에도 제국은 악의축과 배제의 담론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추가령지구대 이남에서 다른 담론을 전개하는 이들을 마치 개돼지취급하거나, 또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를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계엄을 하겠다고 하니, 인민의 저항에 대한 저항은 거세고도 지칠 줄을 모른다. 왜 그럴까?

학문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가 없는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탄하면서, “자네들 열심히 공부하게”라는 박홍규 선생님은 여전하게 아직도 멀었어 ‘열심히 공부하게’ 하실 것같다.

서양학문사에서 논리학이 중요 지위를 차지하는 한에서 자연은 대상이었다. 인간의 인식과 지식 체계가 대상에서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일부에서부터도, 타문화에서 공자도, 노자도, 싯달다도 자연은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의 일부이며 또는 우리를 낳은 진솔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도구로 삼는 학문들이 상위를 차지한 것은, 인간의 도덕감과 신앙심보다 이기심과 탐욕을 상위에 올려놓은 유일신앙자와 참주제 옹호자들이었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학문적으로 틀을 세우려고 한 이는 그 자신의 의도와 달리 플라톤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플라톤은 대립된 두 항목 사이를 다루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두 항목 사이에 상호 연대성과 상호연관을 주목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럼에도 이 두 항들 사이의 경계가 분명해야 학문들이 성립한다고 여긴 것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그리고 세월이 지나 이를 과도하게 한쪽을 경계 밖으로 몰아, 무 또는 악 또는 악마로 취급하는 방식으로 담론을 전개한 것이 유일신앙자들이었다. 플라톤의 진솔한 의도와 달리, 상층의 주류세력이 인민을 지배하려는 방식으로 담론을 분할하여 지배체계로 만든 것은, 플라톤을 곡해한 플라톤주의자들이라 한다.

이항 대립의 담론이 아니라 다항연관의 담론이라고 여긴 플라톤은 다항들 사이에서는 어느 것이 더 맞다 틀리다는 것을 따지기보다, 서로들 간에 공감을 통한 공평한 조화를 바랐다. 그에게서 정의(la justice)는 계산이라기보다 조화이다. 그런데 그의 제자에 이르면 양적 계산에 의한 몫에 맞는 분할의 평균을 정의로 여긴다. 이런 평균적 정의는 편의와 유용성이 있다고 하는 근대에서 통용되었고, 제국주의 시대에 선진 국가와 식민지 영토 사이에 평균화 방식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리베랄리스트 지식분자는 이항 대립을 통일시킬 변증법이란 담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최고 수준에서 변증법이 세계의 평준화(통합화)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나아가 공상으로 날개를 펼쳤다. 제국이 지배하는 지구는 오지 않았다. 이제 그 날개에 인위적 정보체계의 디지털을 이용하여, 인공지능이 공상에서 망상으로 치닫게 하는 파라노이아의 길을 걷고 있는 형편이다. 제국이 세계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이항 대립에서 다른 편을 배제하고 무화시키고 있으면서도, 배제하는 편이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고함을 치고 담론장은 열려있다고 해도, 배제 된 쪽에서는 공감도 감흥도 없다. ‘나 이외’에는 이라는 배중율의 전제를 버리지 않은 유일신앙에 매여있는 한, 자기 동일성에 빠져있는 불변의 동일률을 신앙으로 삼는 파라노이아에 불과하다. 벩송이 말하기를 한 신부가 담론을 하는데 성당 안에서 웃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지역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학문에서 제시한 담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 담론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사유하는 자이다. 이들 사이의 대립이 실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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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연결성이 있다고 믿고 해결하려하였다. 그것은 영원과 시간 사이의 해결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과 시간의 논리적 구별과 대응관계보다, 시간 속에서 살다가 죽어서 영원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하고 설득력 있다고 여긴다. 이는 마치 꼬마애가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믿고 지내는 것과 같다. 영원으로 간다는 것이 자연이 아니고, 유일신이 되면서 하늘과 땅 사이의 연관의 설명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 많은 담론들로 증명하려 하였다. 신앙자는 단순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복잡한 것은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도, 뭐 그리 많은 담론을 만들었던가!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이 또는 얼마나 다양한 천사들이 산자들에게 목소리와 말씀을 전해야 영원한 하늘의 이야기를 믿겠는가? 그 많은 이야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영원 속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떤 담론에도 없다는 것도 안다. 무려 천년이 지나서야, 영원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영원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라고 물으면서 솔직하게 그게 말 뿐이지 라고 한다. 그 믿음은 인간이 말하는 목소리를 기호화하여 대상화하고 그 대상화를 실재성으로 믿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단지 이름뿐인 천국과 천사와 악마를 믿고 자시고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담론을 형성한 것이 유명론이다. 이 이후로 더 이상 보편자의 실재성을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항 대립자들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보편”이라 용어를 쓰고 일반화가 넓어지면 보편이라 주장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보편은 상대성에 의해서 이미 우주가 하나이다. 자연은 자기 발생적이고 변화하는 하나이지만, 자연을 대상으로 여기고 조작가능하고, 지속가능하게 쓸모 있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면서, 대상으로서 자연이 보편이라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천만에. 사회와 연관해서도 미국에서 보편화가 러시아에서도 중국에서도 보편인지 묻지 않듯이, 그리고 남녘에서 보편이 북녘에서도 보편인지도 묻지 않고, 남녘의 보편이 북녘의 보편이어야 한다고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세뇌된 자들에게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까? [그럼에도 착한 도덕형이상학론자들은 보편이 변증법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벩송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

이 부분의 일반화를 세계와 우주의 보편화로 환원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를 벩송은 착각하는 자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보편화 주장자들은 망상에 사로 잡혀있다고 해야 한다. 학문에서 반역이란 생성의 변역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변역을 반역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있다. 반역은 망상을 진리체계로 여기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다. 김건희-윤석열의 빨갱이 타령은 망상이듯이, 리박스쿨에서 이승만, 박정희의 정당성을 복원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로 이어지는 계열의 담론이 망상의 담론장이라고 하면, 이들을 믿는 신앙자들은 펄쩍 뛰면서 아스팔트로 나가서 성조기와 다윗기와 더불어 태극기를 흔들 것이다. 인민의 반역, 인민을 반역으로 몰려고 덤벼든다.며칠 전 인천공항에서 ‘윤어게인’을 주장하는 이들이 미국인 모스탄 교수의 입국에서 환호를 하는 장면은 아스팔트부대와 같았다. 담론의 장에서 대립된 두 항을 다룬다는 것이 배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음양처럼 서로 대립되지만 상호조보관계이며, 밤낮과 계절처럼 순환관계이고, 남녀처럼 서로 상보관계이며, 교류전기의 0과1처럼 교대관계로서 원활해야 빛(전기)도 정보(디지털)도 창조하는 것과 같다.

이항 대립으로 하나의 절대와 완성자를 주장하는 신앙이 세뇌시킨 오랜 역사에서, 프랑스철학은 18세기(빛들세기)에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앵글로색슨 철학은 상층이 이 대립을 즐기면서 부를 축적하며, 세계에 전쟁을 통해 공포를 심으며, 상위를 유지하고자 하는데 봉사하고 있다. 21세기에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미합중국이라는 제국일 것이다.

이런 공론의 장이 있다고 여기는 철학자들로서 롤즈와 샌델의 정의가 배타적인 논리위에 있는지를 알려면, 이들의 논리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칸트가 자연형이상학을 뉴턴의 천문학과 갈릴레이 물리학 이후로 우주의 상대성 위에 세우는 선천적 종합판단은 가능하였지만, 자아, 세계, 이상의 인식을 상대성을 두게 되면 이분화에서 상층이 인민을 지배하는 데 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니 인간이 논리로 판단(심판)하는 생활에도 (도덕)형이상학을 자연형이상학처럼 세워야 했다. 도덕감과 신앙심도 자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앙의 규범과 정언명법아래에 세워야 한다. 이 도덕형이상학에서는 루소이래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없어지고, 지고지순의 하늘의 별로 돌아간다는 플라톤주의의 선의 이데아로, 그리고 경건한 신앙주의로 돌아갔다. 이런 맥락을 이어 앵글로색슨의 도덕론은 엄격한 명법주의에서 국가와 천륜을 동일시하는 논리로 윤리학의 전형을 이루고자 한다. 롤즈, 센델, 하버마스는 같은 담론장의 놀이터의 노는 것은 자기가 잘하는 운동 경기에서만 노는 어느 운동선수와 같다.

이항 대립에서 승자를 찾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이를 이용하여 배중률을 가장 잘 사용한 이들이 유일신앙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언제나 자기주장의 완전, 보편을 말하기 위해 전쟁을, 그리고 그 진리를 증거하기를 주장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게 만들면서, 죽는 자에게 천국으로 유혹하는데, 이를 세뇌라고 부른다. 이런 사적이익 추구자들이 인민의 도덕감에 동의를 구하고자 자신을 기복신앙으로 포장하며 신앙심이 깊다고 한다. 그 신앙심이 세뇌된 것으로 탐만치에 빠진 것이다. 이를 표현과 이미지로 구출해주는 것도 불교 성직자, 카톨릭 성직자, 기독교 성직자들이다. 왜 이들이 피에 젖은 권력자들에게 기도를 해 주겠는가. 이들 성직자들의 움직임도 인민을 세뇌시키는 한 방식이며, 잠시 지나가는 방식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런 세뇌를 깨닫게 하는 것이 지속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어떻게,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감옥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플라톤은 슬픔보다 더 큰 상실감이 있지 않았을까? 당대의 여러 담론들 여러 갈래였을 것이며, 용어상으로는 시대가 지나서 성립되었겠지만, 다양한 담론의 논의 방식들이 생겨났으리라 : 논쟁술(sophistique), 논박술(éristique), 대화술(dialogue)과 산파술(la maïeutique), 논리학의 변증술(dialectique, Τοπικά)과 해석론(l’interpretation, Ἑρμηνείας)」, (법정의) 변론술(apologique), 웅변술(rhétorique, 수사학), (종교의 옹호로서) 호교론자(apologiste, le apologétique), 연설가(l’orateur) 등이 있었을 것이고, 중세에는 정해진 원리와 교리의 일반화(보편화가 아니라)로서 설교가들(les prédicateurs)들과 평결론자들(les sententiaires)도 있었다.

플라톤은 교육의 필수성을 느꼈을 것이고, 폴리테이아편에서 국가 안에서 개인의 교육에 대해 쓰면서 어린이에게 음악과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우주와 터전의 연대에 대한 교육으로 티마이오스편에서 우주 발생론을 전개하였고, 그리고 시민으로서 도시국가에 살아야 하는 방식으로 법률편을 썼을 것이다. 이 거대한 체계의 기본은 어쩌면 아페이론으로부터 생성(함)과 발생(되기), 그리고 과정에서 노력과 강도를 실행한 이들에 있을 것이다. 이런 길을 모색한 이는 플라톤과 달리 퀴니코스-스토아의 계보였다. 교육도 이중화의 계열이 중요할 것 같다. “빛들세기(18세기)”에 대학에서 설교와 평결을 가르칠 때, 곧 등장하게 될 제3신분으로서 대학바깥의 인물들인 볼테르, 흄, 루소, 디드로, 엘베시우스 등은 인간과 제도가 자연(물질)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자연형이상학이란 말을 쓰지 않았지만 도덕감과 신앙심은 자연형이상학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소가 에밀도 쓰고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도 썼다. 플라톤 이래로 새로운 교육은 종교 없는 교육의 필요성이었다.

“빛들세기” 자연에서 빛이 퍼져나가듯이 의식은 퍼져 나간다. 왜 이들이 계몽이라는 표현대신에 빛들이라고 했겠는가? 16세기부터 외방(중국)에서 전해온 문화에 충격을 받았던 프랑스에서 말브랑쉬(Malebranche, 1638-1715)[일흔일곱]는 유일신이 없어도 우수한 도덕감과 신앙심을 가진 거대한 나라(중국)가 있다는 데 놀랐고, 독일에서는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일흔다섯]도 놀랐다. 그럼에도 자기 나라에 사는 애국자들이라, 맑스와 레닌처럼 세계사로 편입되는 시기는 아니었기에 유일신앙 속에서 사유할 수 밖에 없었다. 21세기에는 교육이 전지구라는 일반성 위에 성립하고 활동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방식이어야 할 것 같다. 프랑스가 1871년 프러시아에서 패하고 거대한 전쟁 패배 비용을 갚으면서도, 루소의 사유를 따라, 자연에서 인민의 성장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1883년에 모든 어린이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교육, 교육은 무상이어야 한다는 무상교육,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에서 종교의 탈피, 세속화 교육을 실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세뇌에서 벗어나는 여러 방식들 중에, 일반교육, 무상교육, 그리고 모든 교육제도에서 사적 재단 또는 종교 재단의 철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세뇌는 어린이에게서 부터이다. 윤구병이 그렇게 강조했던 어린이 철학 교육은 세뇌의 탈피와 자연 순환과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 벩송이 말하듯이 자연(우주)이 보살(신)들을 만드는 기계라고 하듯이 자연으로부터 도덕감과 신앙심의 생성하고 창안하여, 자연형이상학의 진솔한 모습을 만드는 것이리라.

(5:28, 58RMB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존버’ 대 ‘난가’ [천 하룻밤 이야기]

‘존버’ 대 ‘난가’

2025년 5월 21일 소만(小滿):

비가 오고 모내기를 하는 절후 소만인데, 예전에는 논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생산도구의 발달로 논길에는 뛰엄뛰엄 모심기 기계들이 있다. 새참은 택배로 하는가? 잘 네모진 논들을 가로 세로 지르는 논길에는 오토바이가 지나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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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옛 이야기 속에는 신선(神仙)이 살았다고 하고, 그 하늘에서부터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환인(桓因)에서부터 맑고 상쾌한 아침의 햇살을 받는 나무들이 잘 자라는 곳에 터전을 잡은 단군(檀君)도 있었다. 이런 선도(仙道) 또는 샤먼의 이야기는 오래 즐겁고 평온하게 살아가려는 욕망(탐욕이 아니다)을 표현하였으리라. 그러다가 마을 공동체가 모여서 도시를 형성하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체계화하면서, 제도를 전승하는 방식에서 입말의 소통을 넘어서 문자를 필요로 해서 중국의 문자를 받아들였고, 그러다가 불교라는 문화가 들어와 천년을 지내면서, 이 땅을 안양정토 또는 불국토를 만든다고 하면서, 불교는 백성들의 고통과 불안에 치유와 위로를 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세계는 언제나 변전하였다. 토지 소유의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여기는 변역(變易)은 삶의 태도를 바꾸었다. 차(茶)를 마시는 문화에서 누룽지의 숭늉을 마시는 문화로 이행으로는 불교에서 유교로 전향을 설명해 주지 못하지만, 학문의 변화와 삶의 양식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맑스라면 생산도구의 변화와 이 도구를 전유(소유)하는 방식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토지를 절(사 寺)의 소유에서 왕조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선후(先後)든 중경(重輕)이든 유학을 토대로 하는 지배층의 담론으로 넘어갔다고 할 것이다.

유교의 전래에서 주자학 또는 신유학은 불교에서 공과 색의 선문답(변증법적 논변)에 대항하여, 선진유학에다가 태극이 무극이라는 담론으로부터, 음양(陰陽)과는 다르지만 이기(理氣)를 중심 논의로 전개하였다. 이런 이원론은 서양의 근세에서 영혼과 신체(정신과 물질)와 유비적으로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담론을 생산하였다. 이런 담론의 대조 또는 유비는 하늘과 땅의 이원화를 대상화하여 다루는 방식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둥글고 자전하는 지구 위에서 인간들이 산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리고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연에서 여러 종들 중의 하나의 종임을 알게 되었다. 점점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물자의 소통이 늘어나고, 서양의 선교사들이나 동양의 군자들 사이에서 소통으로 세계가 하나임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통의 초기, 17세기에 서양의 학자들이 놀란 것이 있다. 유일신 또는 신학이 없이도, 높은 도덕심과 국가체제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유일신이 없음에도 백성들이 훌륭한 덕성을 지신 도덕적 삶을 살아가며, 지식인들이 체제 유지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신학적 사유에서 타종교와 문화를 알지도 못하면서 비하시키는 경향은 오만과 치졸함이 섞여있었다. 동양에서는 자연에 대해 격물치지(格物致知)한다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신 앞에서 평등과 달리, 동양에서 하늘아래 평천하를 이루기 위해 군자들과 학식 있는 선비들은 사적 탐욕을 벗어나 공화(화이부동)를 실행하려 한다는 점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서양은 기술발달과 도구의 무기화로, 타 지역의 지배를 통한 부의 축적을 신의 착한 부름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들의 탐욕과 오만은 지구상에서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며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수탈과 약탈이 신의 부름일까? 지금도 그들이 행한 전쟁은 그들만의 신의 축복이겠는가? 동양의 도덕과 지식의 습득시기에 서양이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탐욕(욕망이 아니다)의 서양인들은 식민지지배를 보다 확장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교묘한 조합을 시도하였다. 이런 패거리의 내밀한 결탁(음모)은 19세기 말에 종교의 교리, 국가의 폭력, 지식의 독단, 이 셋을 결합하여 세 패거리(카르텔)의 야합을 이루었다. 이들이 행한 야합 또는 음모에는 벩송이 말하는 선전제미해결(악순환)의 오류를 감추고 있었다. 이 은폐에는 절대자 또는 완전성에 이르는 변증법이 있다고 선전했었다. 이 변증법에는 백성과 인민이 없다. 이런 전도된 사상을 뒤엎어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독재)를 변증법으로 설명한 이는 맑스였다.

이들은 식민지 약탈과 강압은 기술 문명(문화가 아니다)을 전유하면서 도구를 무기화하였다. 패거리들이 무기를 가지고 식민지에 협박과 공포를 심으며, 패거리들의 재화의 획득을 혈안이 되어 욕망의 충족이라 가르치지만, 욕망이 아니나 탐욕과 도적질의 미화였다. 19세기말 제국주의와 20세기 후반의 제국은 국제질서라는 이름으로 전쟁의 위협으로 여전히 도적질을 실행했었다. 물론 이런 약탈에 대해 저항과 항쟁을 통한 세계사적 혁명은 20세기 전반에 소련과 중국을 낳았다.

그럼에도 패거리들은 지배의 논리를 버리지 않았고, 더욱 견고한 제국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자신들의 삿된(메샹, mechant) 생각을 은폐하고, – 미군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둔하면서 신식민지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수법은 여전하다 – 기술문명의 이식에 서투른(mauvais) 민중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방식으로, 식민지에 독재자를 심으며, 잉여 착취와 자원 수탈을 자행했다. 마치 중세의 마남 사냥을 하듯이, 그들은 식민지 민중을 억압하면서 이에 대해 저항과 항거를, 거꾸로 마치 항쟁자를 음모자처럼 말하는 것도 이 패거리들이었다. 이들은 반역이니 역적이니 하면서, 악순환의 잘못을 민중에게 넘겼다. 루소의 말대로 인민은 선량하게 태어났으나 사회와 제도의 감옥에서 살게 만들었다고 하듯이, 태어나면서 제국의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제국의 세계화는 두 가지 점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이루어지 않았다. 하나는 생명계에서 유전자와 그 변이들은 과학의 발달로 질병 없고 고통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지구상에 질병과 비참은 여전하다. 다른 하나는 기술의 무기화를 통해 제국이 주도권을 가질 것만 같았지만 규소의 시대에 누리소통은 지배와 피지배의 방식을 바꾸어 문화의 다양성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과거가 현재를 살리거나, 죽은 자가 산자를 영향을 주는 것을 넘어서, 기나긴 자기 터전에서 생명과 영혼의 생성 과정을 잊는 자 또는 무시하는 자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잃고서 세계와 합일하는 것이 유일신앙자들의 망상이다. 자기를 잃지 않고서 세계영혼 속에서 자아의 영혼을 ‘존버’하면서 함양하는 것이 루소가 말하는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고 계약을 맺어 합의를 통한 일반의지로 실행하는 것이다. 일반의지 속에 개별의지는 자기를 잊지 않으면서 일반의지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규소의 시대가 다양체의 흐름으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

광복 후에 독립운동가들의 집안은 피폐하고, 일제에 호의호식하던 일제 부역자(부일자)들이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국의 식민지를 자처하는 숭미자로 변하였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치와 자주를 실행하려는 개혁가들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만들었으나, 매국적이고 매판적으로 사적이익만을 챙기는 자들이 반민특위를 무산시켰다. 이번 계엄세력에게는 특별조사법을 만들어 꼭 신상필벌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이 80여년동안 상층을 구성하여 대중을 지배하였으나, 대중은 스스로 자치와 자주를 이루기에는 교육과 학습, 의식화의 과정이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우리 입말로 소통하고 우리 문자로 전승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내공을 쌓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저항과 항거, 항쟁과 광장시위를 하면서. 지금도 부일자와 숭미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으리라.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로, “범이 없는 골에 여우들이 설친다”고 하는 할배들은 일제 잔재가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걱정했다. 할배들은 일제의 부역자들이 이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듯이 숭미자들이 미국으로 넘겨주는 것을 걱정했다. 그 과정에서 범들의 후예는 몰락하여 개장수와 각설이가 되고, 제국주의 좀비가 제국의 주구(走狗)가 되어, 범 없는 골이 여우가 왕질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이 ‘왕’자를 들고 나온 것은 그 패거리(음모자)들의 일부가 표면으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공화국을 만들려는 대중과 인민의 저항은 수면 아래로 잠시 감춰져 있다가도 이어지면서, 적들의 심장을 향한 항쟁은 불쑥불쑥 솟아나왔다. 이 요상한 세력들은, 인민의 저항을 반체제, 반민주로라고 지 멋대로 규정하고, 마남사냥과 반국가주의로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의 상층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전승의 이야기에서 “곰과 범”의 이야기에서, 왜 우리의 민담과 설화 속에서 범이 남아있는데 비해, 곰을 이야기는 사라졌는가. 문화의 전승은 백성의 입말에서 이어져 왔을 것이고,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범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1894 동학혁명으로, 그리고 1895년부터 공공연하게 우리 입말이 문자로 등장하였다. 마치 범이 독립운동을 하려 만주로 떠나고 난 자리에 여우와 원숭이가 설치듯이, 일제에서 조선어조차 말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광복후 입말과 문자화는 그 당시에는 지식인의 것이었으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대중화를 이어지면서, 공화국의 헌법에서 지적하듯이 국민 주권자이며, 인민주권 사상은 점점 대중화를 되어갔다. 1987년 이래 입말의 문자화와 가로쓰기가 전개되었고, 인민은 스스로 자치와 자주의 길을 찾아가면서, 인민이 존나 버티면서 기본심급이면서 최종심금이라고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법원도 최종판단의 결재를 인민에게 받아야 한다. 인민의 권리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감옥에 보내었고, 탈옥 중인 윤석열도 곧 감옥으로 보낼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에서, 원주를 구성하는 모든 점들은 그 점이 하나하나가 중심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21세기에는 그 점이 트래픽(접합)의 다양체이다. 한반도가 다른 어느 터전들과 마찬가지로 고유성이 있고, 자치와 자주를 넘어서 자율성과 자발성이 분출되었다. 입말과 그 문자의 독특성은 새로운 문화의 전승과 확산으로 이어졌다. 사회의 도덕성은 인민의 것이며, 사회의 제도화가 인민의 것이라는 것라고 문자화하면서 제헌 헌법이래로 공화정을 추구해 왔었다. 그럼에도 매국적이고 제국의 주구의 지배에서는 공화가 아니었다.

정당정치는 상층은 자기들의 잘못(mal) 또는 삿된(méchant) 것을 감추고자하였고, 이를 드러내고 저항하는 세력에게 반국가, 반체제 또는 빨갱이로 몰았다. 제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며 나무라는 방식은, 세 패거리들으 좀비들이 실행했던 방식을 그대로 이 터전의 인민들에게 강제하고 위협하였다. 군비, 검비, 법비, 재비 등이 이참에 드러났다. 국민은 굴복하지 않았고 20세기 후반 내내 저항과 항쟁이 있었듯이, 21세기에 촛불시위와 응원봉 빛축제와 키세스 시위는 새로운 문화의 창달이었다. 이런 운동과 분출은 한류라는 문화의 세계화에서, 스포츠에서도, 대중음악에서도, 영화에서도, 게다가 문학에서도 전 세계 대중들에게 감응과 공감을 불러왔다. 범이 내려왔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터전에서 누리소통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순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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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첫 사반세기에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의 터전에서 삶의 양식과 문화가 갑자기 세계 속에 있은 것이 아니라, 별종, 덕후, 존버들이 스토아 표현으로 노력(포노스) 내공(토노스)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출이 된 것은 단지 5년 사이이다.

하나는 코로나로 전 세계가 우왕좌왕하던 시기에 우리 문제인 정부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병에 대처하여 우리나라가 자연스럽게 세계사에서 주목을 받았다. 역병은 공간의 구별이 아니라,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 하듯이, 공간자체가 운동하고 흐른다는 것을 알게 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해도, 살아가는 보통사람은 이 터전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기며 습관적으로 산다. 그 습관의 방식에 젖어서, 어쩌면 세 패거리들이 대중 의식을 포획하고 포로로 삼고서, 노예 상태로 만드는 세뇌의 방식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를 대중들도 깨닫기 시작했다. 혼밥, 혼술, 혼일, 혼발신과 혼소통 등은 산다는 것이, 한 리좀이 다른 리좀들과 여러 방식으로 접속하는 가운데, 덩어리(트래픽)를 만들고 살아간다는 것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리좀의 덩어리가 운동하고 있고, 기나긴 과거의 노력을 통한 ‘존버’의 특성이다. .

다른 하나는 여러 번 말했지만 철의 시대를 지나 규소의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코로나 2년에 혼밥 혼술, 혼일, 혼소통(일인 유투버) 들로 누리소통 공간은 각각이 지구상의 한 점이 되었다. 이 점들 각각은 다방향으로 확장되고, 또한 접속의 덩어리는 리좀 덩어리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이 도구로서 소통 방식에서, 방송과 신문과 다른 방식으로 쌍방이 정보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제국은 정보 또는 명령의 전달이라는 일방통행을 넘어서, 선전제의 해결 없이 담론과 판단을 강제하면서 지배하려 하였다. 그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다양체의 활동은 제국의 통제가 바랐던 대로 일방통행이 될 수 없었다. 일방통행인 양식이 광기라는 것을 알아챈 것도 한 몫을 하였다. 제국이 광기라는 것이다.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 류(인류)와 인간 종(인종)에 의한 구별은 논리학의 류와 종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 개인 또는 개체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뭔가 이탈하고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이탈을 도착자로, 저항을 분열자(별종들)로, 항쟁을 악마 또는 빨갱이로 몰아가면, 세 패거리는 절대성과 완전성이라는 요상한 용어를 들먹이며 민중 또는 인민을 배제하거나, 포로를 만들지 못하면 제거하려 하고, 포섭되지 않은 자들을 개돼지 취급하기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패거리의 습관적 사고에는 탐만치가 가득 차 있으면서, 습관의 조건반사처럼 민중을 세뇌시켜 요상한 사건들을 만들었다. ‘국민의 힘’에서 서울의 강남구에 태영호를 내세우든 김정은을 내세우든 극우 꼴꽁들은 묻지마 투표를 하며 지지하였다. 이런 패거리 사고의 세뇌가 영남에서는 부지깽이를 내세우든 똥작대기를 꽂든 지지한다고 한다. 모든 사물이 ‘부타야!’라는 선승에게 부지깽이와 똥작대기도 부처이지라고 하듯이, 선거에서 우리 편에 투표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또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같은 단어 부지깽이라는 용어가 선승에게는 노력과 각성의 지표가 되는가 하면, 강남과 영남에서 하나님과 같은 신주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개선하고 개혁하여 통일로 나가는 운동은 여전히 있다. 요즘은 영세중립국으로 나가자고 하기도 한다. 생명체의 소통 방식은 아직도 해결해야할 부분이, 코로나 해결보다 무한정하게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디지털의 세계는 누리소통의 확장이 기하급수적을 넘어서 불교의 숫자처럼 4제곱승으로 비약하고 있다. – 3제곱은 공간인데 4제곱승으로 확장은 무엇일까? 어쩌면 누리소통의 공간이 4제곱승일 것이다. – 이 비약의 미래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신선만이, 붓타만이, 신만이 안다고 하면, 그것은 부정형(4승의 형상은 아무도 모른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누리 소통의 확장과 다양체의 흐름을 아무도 모르는 차원의 무한의 다양체가 펼쳐지고 있다. 이런 세계와 문화의 창달에서 입말과 문자(이미지 포함)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는 방식은 젊은이의 사유와 놀이(게임)에 달려있다. 이 젊은이는 “난가”라고 하며 기다는 것이 아니라, 노력(포노스)와 내공(토노스)의 과정을 겪으면서 잘못(mal)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투름(mauvais)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학습하면서 벗과 즐거이 유쾌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 존버(덕후, 별종)를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언제나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 사유하는 것이다.

코로나와 같은 생명체의 변이와 확장 속에서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제국이 없는 세계 속에서 또는 세 패거리가 없는 터전에서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젊은이는 오래 깊이 사유할 수 밖에 없다. 열여덟에서 서른여덞 정도까지. 우리의 기나긴 과정에서 서투르고 착오와 오류도 있었지만, 우리가 창안해낸 입말과 문자화가 있으며, 누리소통을 통하여 문화의 창달로 널리 인류뿐만이 아니라 생명계도 전지구도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넓혀간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까. 이런 임무에서 또한 우리 터전으로부터 지작할 수 있는 우리 입말과 우리 문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하고 통쾌한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불평등 해소와 통일은 여러분의 덕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별종들이 제국주의와 제국에 저항하고 항쟁하였듯이, 존버와 덕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통일은 도구의 무기화에서가 아니라, 도구를 널리 이롭게 사용하는 누리 소통에서 다양체의 발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도구가 인민들 각각의 손바닥에 놓여있다, 쳇지피티의 문자화나 인공지능(AI)의 지식화와 달리 덕후들과 존버들의 창안과 생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생명학과 디지털의 발전은 철의 시대의 2천5백년의 과정을 거의 한 세기만에 이룰 것이라 한다. 생명과학의 정보축적 만큼이나 디지털 사용의 확장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우리의 자발성에 의한 입말과 문자화, 남북의 소통은 곧 이어질 것이다.

(4:11, 58PMA) (5:24, 58P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천 하룻밤 이야기]

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2025년 4월 20일 곡우(穀雨), 비가 올라오더니 빌라 밑 처마에 제비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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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의 뜻이 하늘이라 했었다. 공동체에서 각각이 고유 권리로서 사회권과 자연권이 있다는 이야기는 유일신앙의 첫 화두인 하늘이 무한하다는 하는 브루노의 무한 개념이 열리고 난 뒤이다. 하늘이 열리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망원경을 통해 하늘에 뚜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껑위에 옥황상제나 유일신, 선녀나 천사가 머물고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나라 이야기가 하늘에 대해 경외심을 심었던 것은 여섯 살 꼬마에게 삶에서 도덕과 은덕을 가르치는 도덕론이었다. 서양사에서 하늘과 땅 다음으로 ‘인간이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인간이 황제의 신민도 아니고 신앙의 예속자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종속하다는 뜻이 바뀌어 인간이 주체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들어선다. 화두는 하늘과 땅에서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근대의 시작인 셈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하늘의 완전성과 땅의 불완전성의 대비는 고대로부터 요즘의 AI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화두로 남아있다. 하늘의 무한성도 땅의 개연성도 인간의 오성 또는 지성이 만든 체계이거나 배치에 따른 질서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가 만든 원리와 공리를 알고, 법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를 안전하고 원활하게 이끌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 안전과 편리를 기준으로 도덕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구의 발달에서 인간이 눈과 귀로 익히는 것 이상으로 순서에 맞게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도덕교육을 넘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의 최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1750년대 증기기관과 1830년대 모터의 발명이후 배, 자동차 등에서 도구를 다루는 것은 과정의 순서와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 공동체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면 질서를 따라야 한다. 이런 배치와 질서의 존중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는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그런데 삶의 터전이 넓어지고, 같은 배치와 질서 속에서 있지 않은 공동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도 통일적인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 그 통일성의 기원과 원천은 언제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편리와 선후 문제에 앞서 있어야 하는 화두가 다시 불려 나온다. 절차와 순서들은 선문답들로서 파라독사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멋이 중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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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기 지금 하나의 사물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이외에 다른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법칙과 질서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터전에서도 동일한 질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동일한 질서는 무엇인가? 이 질서 이외에 다른 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은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 여긴다. 동일성에 벗어나는 것은 이탈자 또는 반대자로 생각한다. 동일성 속에 산다는 것이 통일성 속에 사는 것이고, 하나의 법칙과 질서로 사는 것이다. 이 법칙과 질서는 어디서 오는가? 하나의 원리와 공리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원리와 공리는 어디서 오는가? 이것을 신앙자들은 신에게서 온다고 믿었다. 적어도 크리스토스를 내세우기 이전에는 현자들은 논리의 원리와 기하학의 공리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원리와 공리가 매우 정합적이고 체계적이라 이를 잘 아는 것이, 천체의 운행에도 지구 위에서 삶의 이동에서도 잘(bien) 실행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 원리와 공리가 누가 만들었는지를 모르지만 두 가지 방향에서 인간들 사이에 전승되었다. 땅위의 10진법과 하늘의 60진법을 은연중체 체계화 세웠듯이, 터전에서 인간이 서로 소통하면서 말하는 데도 언어(입말)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원리와 공리에 걸 맞는 논리의 법칙이 동일률의 규칙이다. 이 동일률의 성립은 자연(땅)에도 하늘(신)에도 성립하는 통일성을 갖추었다고 여겼다. 말로 표현하여 하늘(신)은 하늘(신)이고, 땅은 땅이다, ‘사람은 사람이다’를 부정하는 이는 없다. 이것은 하나는 맞다 이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하는 경우에, 동일률에 맞으면 맞고, 아니면 틀렸다고 한다. 동일률이라는 것이 먼저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은 항상 같이 있어왔다. 하나를 질서 또는 순서로 정하게 되면, 다른 질서는 틀린(다른, 맞지 않은, 나쁜) 질서인 것처럼 여긴다. 게다가 공동체에서 달리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에 입말의 논리학이 성립하는 시기에 동일률과 더불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는 논리도 생긴다. 간단히 A는 A아닌 것이 아니다(A=~A)이다.

배중률의 편리는 공동체 안에서 편가르기를 한다. 이런 편가르기는 터전(땅)의 논리에서 이곳은 내꺼 라는 소유의 방식에서 온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삶에서 터전과 하늘은 공유의 것인데, 이런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경계를 만든다. 농경이나 목축에서 토지와 하늘(기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들 덕분에(음덕으로 은총으로) 생산된 것은 생산하는 자의 소유가 된다. 그 시대에 생산자는 그 덕분에게 감사한다. 생산물을 수확하면 첫물의 곡식으로, 첫물의 새끼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자연(하늘과 땅)의 덕분임을 감사한다. 이 생산물을 전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는 전유의 생각은 단지 “덕분”에게만 감사하고, 주변의 이외에 사람들에게 나눈다는 것을 배제하는 방식이 도래한다. 사적 소유의 생각에서 배제의 방식이, 즉 이로서 배중률이 생활 속에서 젖어든다. 이를 좀 더 사유의 외골수로(공상으로)가면, 나 이외에 다른 이를 믿지 말라 이며, 더욱 추상화의 길로(망상으로)가면 나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가 나온다. 배중률이 사유규칙으로 나오기 전에 이 ‘나이외’라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회의 사적 소유가 생기고, 도적질 하지 말하는 규약은 어느 초기 공동체에도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너도 노동하고 노력해서 먹고 살려고 해야지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당연히 개인이 노동력이 있을 경우인데, 어린 시절과 늙은 시절에 노동력이 없는 경우를 생각하여, 가족과 씨족 공동체 안에서 능력있을 때 일하며 노동력없는 이들을 먹여 살리고, 스스로 노동력 없을 때 도움을 받아서 산다. 사적 소유가 없는 작은 공동체에서 남의 것을 훔친다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도와서 살아가고 또한 삶의 과정 전체에서 노동과 필요가 상부상조로 배치되고 분배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배중률은 언어 소통에서, 이 말투와 판단(명제)은 맞기에 이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저 말투와 저 판단은 논리적 과정에서 위반되기에 행동을 하거나 함께 일하게 되면 어긋나거나 질서 파괴가 이루어 질 수 있기에 수정 또는 교정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배중률이 공동체 삶의 확장에서 하늘과 땅을 소유할 수 없듯이, 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소유 없는 공동체와 달리, 공동체가 확장되고 생산력(분업)도 생산량도 많아지면서 자연의 위험에 대비하고 외부의 적들에 공격에 대응한 군사들도 필요하게 되면서 공동체 안에서 체계를 갖추고, 이를 총괄하는 우두머리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동체의 체계는 중한 것과 먼저인 것(중경과 선후)에 따라 실행하는 방식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중경과 선후를 공동체에서는 평의를 거쳐서 평결을 내리고 합의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급박한 천재지변과 또는 외적의 급습에 대비하는 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의 필요에 따라 배치의 질서가 위계적 질서로 가는 것이 편리하고 안정적이라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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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상부상조 하는 방식으로 함께 산다는 점에서, 또한 타인의 또는 기술의 전승의 덕분으로 산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이기심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냈다. 이런 공동체의 사유에 말 그대로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를 걸쳐서 몸에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기시대의 도구발달은 전혀 다른 공동체 상황을 만들었다. 동일생산물의 다량제작이라는 거푸집의 발달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금속들을 다룬다는 것은 생산력 뿐만 아니라 도구/무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도구의 소유를 개인의 능력으로 착가하는 이들이 배중률을 심는다. 나 이외 다른 이를 믿지 않는다. 이 이기심은 자기와 달리 생각하고 다른 발명과 창안을 배제한다. 이런 관계들 두 질서 사이에 모순이라고 하며 모순률을 들이 민다. 그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승된 지식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 자기의 것으로 여긴다. 이 배제를 믿게 만든 신앙이 유일신앙이다. 다른 질서가 있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스스로 체계와 통치에서 상층에 있다고 여긴다. 인간위에 인간, 인간 밑에 인간을 만드는 사고가 고착되어간다. 그럼에도 모순을 해소하고 변증법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어 간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공동체에서는 배중률이라는 것이 착각과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우주라는 세계에서 자연의 발생은 언제나 여러 갈래였고, 각각의 길들은 터전에서 여러 삶의 방식들을 표현한다.

질서는 하나의 질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질서가 있다. 한 질서에 비해 다른 질서가 배제되거나 모순된다고 하면서 자기 동일성만이 진리이고 덕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속에 탐욕과 오만이 스며들어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들을 만들어가면서, 타인의 삶과도 함께하면서 배치와 배열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회이고 국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일률과 배중률에 세뇌된 상층은 다른 질서를 나쁜 것으로 또는 악마로 몰아갔다. 이런 놀이에서 가장 나쁜 사례가 브루노를 산채로 화형 시킨 것이다. 이 치졸한 부류는 1889년에도 브루노를 단죄하였으며, 반성과 사과는 없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화두는 여전히 유일 신앙자들에게는 배중률에 속한다. 인간의 스스로 아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동일률과 배중률이 삶에서 필요인가 또는 다른 인간을 도구로서 개돼지 취급의 지식인가? 인간이 자연과 하늘의 이법을 정립할 것인가는 선문답처럼 남아있다. 나 이외 다른 것(똥짝대기)을 믿지 말하는 화두는 불교에서 이미 오래 전에 불성이 똥짝대기에도 있다고 여겼고, 그리고 서양사상사에서 12세기에 유명론에 의해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으며, 의식과 인식의 주인이 신이 아니라 인간일 수 있다는 이신론이 등장하기도 하였고, 인민이 주체화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시대에서는 유일신앙의 화두를 아편쯤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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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배우는 하나 더하기 하나, 한 점과 다른 점을 잇는 가장 바른 선은 하나다 라고 하는 상식은 오관을 통한 지식이다. 오관을 넘어서 의식이 다루는 지식은 근대 이래로 여러 갈래이다. 동일률과 배중률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은 상층의 원리와 공리가 지구(터전)에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 그 믿음은 그리스어로 플라톤이 쓴 피스티스(억측)이었으며, 번역 상으로 견해이며, 영미 철학에서 믿음이라 한다. 이런 믿음은 더 이상 묻지 않은 선천성으로 진리는 통일성을 갖고 동일률에 근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였다. 경험론의 믿음에는 삶의 공동체에서 감정과 감화가 있고도 한다. 이 시대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 서양이 중국을 알면서 놀란 사실이 있다. 종교개혁이후로 카톨릭이 자신의 내부에서 불화와 반대에 부딪히면서 이방지역(다른 문화지역)에 종교전파를 위해 군대식으로 만든 제수이트들이 중국의 문화를 보았다. 그들이 놀란 것은 유일신앙 없이도 도덕과 사회를 잘 건설하였던 역사와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구 안에서 문화들이 통일성을 갖는가? 서구는 원리와 공리의 학문이 전지구적이라는 문명을 들이대며, 다양한 문화에 대해 문명의 통일성이란 측면에서 서구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전지구적으로 유일신앙 밑에다가 식민지들을 만들어 가려했다. 이 탐욕과 오만에는 철학사적으로 사적 소유의 인정과 위계질서에서 공동체의 질서 위에 유일신앙의 질서가 있다고 한다. 이 무지몽매한 질서가 하나이며, 다른 질서는 모순이며 배제이며, 불온세력이라며 악마화하고, 자신들의 망상을 감추려 빨갱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20세기에 두 번의 전쟁에서 유일신앙에 반대하여 생긴 소비에트와 중국에 대해 우월권을 행사하기 위해, 미국의 패권 제국이 20세기 후반 내내 해왔던 수법이다. 21세기에 뭔가 달라지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을 미국이 굴복시키려고 하다가, 제국주의 붕괴처럼 미국의 제국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부상조로서 터전을 가꾸어가는 방식(공유질서)과 하나의 질서 아래 다른 문화를 배척하고 한 문명 속에 굴종시키려는 방식(패권질서) 사이에 차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배제의 원리로서 윤석열이 계엄을 하듯이,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고 한다. 달리 사유하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는 윤석열에 항쟁하는 반정권세력인 셈이다. 다양성은 전지구적으로 퍼지고 있다.

여전히 문화의 다양성을 만든 것은 지구라는 터전이 통일성이라기보다 다양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가 먼저가 아니라, 자연과 생태계가 먼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찍이 벩송은 한 질서의 규정과는 다른 질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 질서가 다른 질서들을 거짓 또는 나쁜 질서라고 보는 것이, 벩송의 부드러운 어법으로 유일신앙이 정태적 종교로서 착각이라고 한 것이다. 착각은 자기 탐욕과 오만한 자식 그리고 배중률의 신에 예속되어 망상에 빠지는 것이고, 그 망상을 피스티스 또는 신앙으로 받아들여 착란에 빠진다. 이러한 일들은 지구에서 밀농사를 짓는 문화과 쌀농사를 짓는 문화의 차이에서만이 아니고, 날씨에서 더운 열대 그리고 온대와 난대 사이에서 문화의 차히는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우선이라는 것이 생태계의 섭리이다. 벩송이 말한다. 사는 것이 먼저이고(primum vivere) 그리고 철학적으로 사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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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말했지만, 유일신앙의 권세, 국가주의의 권력, 앵글로색슨 철학의 권위의 세 패거리를 만들어 세상사를 지배하려하며, 로마제국이 식민지들 다스리듯이, 제국을 형성하려 했다. 그게 쉽지 않아서,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금본위를 그 다음 기축통화로,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지역 전쟁으로 그리고 21세기에는 무역으로 지배하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제국이 여전히 자연에서 인간이 주체로서, 패권으로서 하늘과 땅을 인간의 지배하에 둘 수 있다는 신앙에 갖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그런 오만한 인간중심주의 신앙과 차히를 생성하고 발산하고 있다. 신앙에 체계화든, 사회의 조직화든, 지식의 통일화이든, 인간이 만든 것이지 신의 계시나 은총이 아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터전에 맞게, 사건들의 연관에 평의와 평결에 의해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하게 타자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 주체화이다. 아직 인간의 우주 안에서 지구의 터전에서 주체화가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중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체화는 지구의 터전에 따라 다르다. 어쩌면 20세기에 소련과 중국을 통하여 실험과정을 겪으면서, 미국 패권의 제국과 다른(차히)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성립에서, 이기심을 주장하는 문명의 도구 사용에 대한 지식이 49퍼센트쯤, 상부상조와 더불어 자연의 섭리와 함께 생태계를 따르면서 살아가는 의식이 51퍼센트가 되어 갈 것 같다. 이런 사회의 건설에서 전자의 카르텔에 젖어서 김건희와 윤석열 집단은 자기들만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망상과 착란에 젖었다. 인민은 그렇지 않다고 광장에서 불빛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소수의 분파적 지식 인간이 아니라, 인민이 주체화를 만든다. 상층이 아무리 인민을 개돼지 취급한다고 해도, 인민이 합의하는 평의와 평결은 인민의 최종심급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단지 국회, 정부, 사법의 고위직위자들이 자신들이 판단과 심판이 최종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의 누리소통은 인민의 최종판결 없이는 어떠한 질서, 법칙, 원리, 공리도 현상화에서 사건들에 그들의 뜻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체화는 우선 같은 입말을 쓰는 8천만의 방식에서 공통감각으로서 상식과 생명의식으로서 공통 감정과 공감이 세 패거리의 야합보다 먼저 기본으로 깔려 있다(밑에 있는 것이 실체 sub-stance 라는 개념이다)는 것이다.

패거리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들의 지배가 당연하고 필연적이라고 여기며, 불온세력이니 중국추종자니, 반국가적 빨갱이니 하면서 배중률에 의한 자기 동일성에 논의 또는 문답을 하면서도, 그 말을 하는 그네들이 파라독사에 빠졌다는 것을 젊은이들은 잘 안다. 젊은이는 과거의 어떤 시대와 달리 상층의 지배 사고와 차히나는 주체화 과정의 흐름에서 트래픽 덩어리의 연관들을 보고 있다. 젊은 세대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달리 사유하고 문명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의 차히를 생산하고 창안하는 시대 속에 있다. 과거에는 상층이 인민에 반란이란 표현을 섰지만, 거꾸로 누리소통 시대에는 김건희와 윤석열이 반란세력이라는 것을 안다.

세계사에서 공동체사회를 만들려는 국가들이 반세계적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과 공포를 만드는 미국 제국의 패권이 반세계적이라는 것을 안다. 일부사상가들은 18세기를 계몽의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층이 백성과 대중을 교화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프랑스 18세기는 “빛들 시대”라고 하는데, 빛은 중심에서 밖으로 무한히 다양하게 발산한다. 그 세기의 사상가들은 탈종교의 시대였으며, 계몽이 아니라 인민이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시기였다. 게다가 그 시대에 똑같은 단어(pitié)가, 상층은 민중에게 동정을 배푼다고 하였고, 빛들의 사상가들은 인민이 인민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고 한다. 동정과 연민의 용어 사용의 변화가 있듯이, 인간이 사회를 조직화하면서 위계를 모방 속에 사는 백성들은 서로간에 전쟁으로 보았던 홉스 같은 사회권(자연권)을 주장하는가 하면, 루소는 인민들 사이에 연민이 있어서 자연권을 지니고 그 권리를 국가권력에 양도하지 않고서, 권력이 인민의 의사에 벗어나면 언제든지 그를 소환하거나 파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화국은 동정이 연민으로 사회권이 자연권으로, 반란이 항쟁(발현)으로, 같은 입말이라도 사용방식이 바뀌는 시절에 대혁명이 도래했으며, 국가권력인 왕을, 교회권력인 일부 성직자를 단두대에 보내면서 공화국을 세워보았고, 반동들에 의해 왕정으로 되돌아갔더라도 인민의 의식화와 주체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공화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민의 저항에 대해 권력의 반란이라는 12월 3일 이후, 사법권에서도 반란수괴를 파면시키는 4월4일을 거쳤다. 동학혁명으로 한글이 전면에 나온 1895년 이래로 그리고 1987년 가로쓰기와 순 우리말쓰기는 인민의 주체화 과정이었다. 젊은이들의 손바닥에 놓인, 부처님 손바닥처럼, 누리소통의 도구 속에서 입말만이 아니라 그림과 노래까지도 리좀이 흐르고 있다. 고착적이고 고정된 유일신앙의 사고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새로운 소통도구와 입말이 그 소임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는 새로이 조직화(3.3.3,3)의 발현과 창안과 흐름으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 것이다. 영웅, 호걸, 성인, 군자가 세상을 만드는 시대가 아니라, 인민이 주체화로 등장하면서 스스로 인물과 덕후 만들기(생성, 되기)의 시대에 있다. 이 만들기에는 노력과 내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노력과 내공을 이루려는 젊은이들 조직을 창안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자발성으로 주체화를 이루는 시대가 왔다.

삶이 먼저이며, 혁명은 여전히 흐른다. 흐름에서 즐겁게 잘 흐르는 트래픽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 젊은이의 멋있는 삶이 될 것이다.

(5:28, 58OLI) (6:06, 58O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리좀은 흐른다 [천 하룻밤 이야기]

리좀은 흐른다.
2025 03 20 춘분(春分): 책력의 기준이 춘분이라 한다. 동지가 기준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명은 공간의 표면 상에서 흐름과 시간의 심층 에서 흐름이 있고, 이로써 생명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어서 온갖 말과 문장으로, 그리고 학술적 체계로 서술해 보려고 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자연의 흐름을 탐구해야 한다는 그리스의 자연주의자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의식의 인연연기를 깨달으려 했던 불교가 있다. 이 둘은 소위 말하는 불가지 또는 화두로서 다루었다. 이에 비해 유가에서는 제도 속의 삶에서 안빈낙도 할 수 있는 평천하를 생각하였고, 이들과 달리 로마의 압제 속에서 인민의 비천한(miserable) 삶을 공동체의 삶에서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 인도주의)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예수 공동체도 있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인민의 삶에는 신 또는 신들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서로 서로 암묵적 합의와 계약을 통하여 인민의 삶 속에서 일반화된 덕목 또는 도덕이 있었다. 왜 상층은 인민의 덕목 위에다 신의 완전성, 황제의 절대성을 놓으려 했던가? 싯달다가 보기에는 그들에게는 그들의 탐욕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는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민중의 무지에 분노하는 오만함이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 이를 일깨운 이들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비극시인들과 희극작가들이었다.

유가에서든 도가에서든 평천하에서 사적 이익을 탐내는 자들과 이 재산으로 백성을 부리는 자들이 평천하보다 개인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소인배 같은 사고라 하였고, 이를 정화하고자 인의(仁義)든 무위자연(無爲自然)이든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서로 다를 지라도 공동화할 수 있는 공화(共和)를 내세웠다. 현자들은 논리적 사고가 허구이자 이름뿐이라 하였고, 최상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아도 사람 사는 세상은 물 흐르듯이 흐른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탐만치에 빠진 자들이 끊임없이 민중, 백성, 인민을 노예처럼 대하면서 맑스 표현대로 잉여생산을 사유화하였고, 요즘 표현으로 임자 없는 돈(백성의 생산)을 먼저 먹는 놈이 주인이라고 하면서 탐욕과 오만의 극치를 이룬다. 이 탐욕을 욕망이라 부르는 지자들이 권력에 포획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중생을 권력과 권세에게 받치고, 지자는 자신들의 권위를 누리려는 시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권세, 권력, 권위에 젖은 자들이 계엄령이든 개몽령이든 자신들의 부귀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눈 내리는 가운데 눈보숭이처럼 밤을 새워 지낸 젊은이들이 다른 행동으로 실천한다. 이런 삶의 노력을 들뢰즈가 리좀의 흐름이라 했다. 생명의 흐름이, 즉 리좀의 연결망은 공간에서 그리고 시간에서 흐른다. 입말의 흐름인, 누리소통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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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 철학사에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있을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이오니아학파 이래로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이런 종류들이 네 가지라 한다. 시간, 공간, 이데아(관념), 아톰(원자). 앞의 두 가지는 서양학문에서 두고두고 토대로서 다룸으로서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리고 종교이든 첫째 화두로서 남아있다. 그리고 뒤의 두 가지는 개별학문의 발달로서 인간들의 사회와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두 용어를 정교화하고 개념화하면서 인간이 무엇을 지향(욕망)하는지에 연관이 있다.

서구와 동양에서 각각은 천년이 넘게 종교의 시대, 그리고 오백여년을 넘게 인간의 지위에 대해 현자들이 논의하던 가운데,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현자들의 삶의 태도가 인민과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지침이 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삶의 터전에서 도구의 공유화(공산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현자든 지자든, 공동체주의자든 사적이익 추구자든 하늘과 땅, 공기와 물이 사적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시대의 변역과정에서 기계 생산물의 사적소유를 이론화하는 자들에게, 공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당하였다. 그럴까? 그 사적 소유를 주장하고, 체제를 만들고,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체계를 정립한 것에는 유일신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상이 자연 속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모든 소유가 신의 것이라는 착각과 환상, 심하게는 망상에 빠졌다.

이들 유일자 신앙자들은 권력의 체제와 싸움에서 상위를 차지하려고 천년을 싸웠다. 이들이 전쟁에 동조하기도 하였고, 심하게는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이름을 전쟁을 조직하고 독려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직적 지배가 잘 안 될 때는 길고 긴 시대를 마남사냥도 서슴치 않았다. 이 마남사냥을 지휘하는 신학체계를 신앙이란 이름으로 자연과 지식에 대해 상위의 우월권을 설득하기도 하고, 공포와 위협으로 지배와 명령권을 꾸며내어 거꾸로 민중의 어리석음에 분노하고 화낸다. 윤석열이 격노하고, 이어서 김건희가 한동훈을 죽이겠다고 하거나, 그리고 이재명을 총으로 쏘고 죽겠다고 분노하는 것도 이런 유일자 신앙에 세뇌된 탐만치의 산물이다. 탐욕, 오만, 그리고 치졸함에 빠진 자들을 싯달다가 마구미라고 하지 않았던가.

서구 19세기에 탐욕의 권력으로 세워진 근대 산업국가의 통치자로서 국가의 통치권자가 어느 세기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으며, 게다가 선거를 통하여 체제를 통한 합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에 처했다. 서구에서, 특히 빅토리아왕조(1901년)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1918)의 무너짐은 이십세기 초이다. 수구파들은 또다시, 국가주의가 아닌 제국주의 또는 자본의 제국을 건설하려했다. 인민을 공포에 밀어 넣는 전쟁을 서슴치 않았다. 유일자 신앙은 이 전쟁에 은연중에 동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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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민주화의 과정은 인민의 삶의 흐름 속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입말이 공공화 되면서부터 4.19를 거치면서 조봉암과 인혁당의 건설에서, 그리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던 인혁당 재건에서 남민전을 거쳐왔다. 그리고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민주항쟁에서도 흐름은 지속되었지만, 인민들이 서로 소통이 되기에는 규소시대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누리 소통이 전지구적으로 소통되는 시대는 코로나19의 전지구화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마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시절이라 한다. 하나는 대중과 소통하는 연극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고라 광장의 민회가 있었다. 전자에서 비극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경계하였고, 희극은 사회의 고착화에 각성하게 하였다. 후자에서 아테네 철학은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에 의해 인민의 자각을 일깨웠으나, 데모스의 정치(데모크라시)라는 장치를 겨우 마련했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으로 멸망하였다. 그 민주의 흐름은 잠수하였다가,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들이 로마에서 솟아나며, 민회와 원로원이란 제도로서 공화제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시저 이후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황제제로 바뀐다. 이 황제제와 더불어 이 제도를 본뜬 교회의 교황제는 서로 권력 다툼으로 중세를 이어갔다. 러셀이 철학사에서 말하듯이 그래도 중세의 민주화 방식은 밀라노 교구에서 있었으며, 성직자를 교인들이 선출해야 한다고 했단다. 그러나 교황청은 왕권에 대한 우월성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교권과 왕권의 다툼은 영국에서 교황청을 벗어나 성공회를 만들면서, 유럽사는 다른 국면을 만들었다. 왕권이 따로 존속하는 가운데, 영국 권력들 간의 싸움에서 크롬웰이 등장하는 의회파와 왕권파의 투쟁에서, 의회파의 승리하면서, 인민의 이름을 빌어 권리장전(1688)을 만든다. 그럼에도 인민이 아니라 상부의 두 권력 사이, 세습귀족들과 신흥시민들 사이에서 권력의 쟁탈인데, 백성은 여전히 권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인민의 입말과 문자의 전파되기 200여년 만에, 인민의 의사 반영이 솟아난다. 여기에서 카톨릭 신부였던 시에이에스(Sieyès, 1748-1836)는 혁명전야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1789)을 쓰면서, 귀족과 성직자가 아닌 새로운 신분으로서 인민(부르주아)의 등장을 알렸다.

이 인민이 자치와 자주, 그리고 세기를 거치면서 자율성을 행사하기 위해, 19세기에 여러 번 혁명들을 일으키며, 공동체 사회를 만들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공산사회를 주장하기도 한다. 인민의 성장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종교 없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였다(프랑스에서 1882년 교육선언). 서구에서 평등사회 구현의 교육이 무상, 보통, 무종교라는 것을 실행하기에는 그래도 길이 멀었다. 그런데 우리의 동학의 성립이 1860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세계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세기를 지나면서 우리에게서 인민의 성장은 독립운동을 통해 계속되었다. 그 다음으로 계엄에 저항했던 열사들이 있었고, 그리고 광주에서 인민항쟁이 있었다. 그러나 1945년 이래로 입말과 문자화가 우리방식이라 하더라도, 인민의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구권력들은 마구미의 손을 여전히 펼치면서 마남사냥과 같은 빨갱이 사냥으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뒷편에는 마남사냥에 동조하는 유일신앙의 세력들과 앵글로색슨 철학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의 오랜 전통과 단절하게 하여, 제국을 형성하려는 자들에게 세뇌당하여 돈을 숭배하는 유일신앙에 빠져있는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학문에서 일차대전의 승전국 일본과 이차대전의 승전국 미국으로부터 과학의 진리를 수용해야 한다는 외세 의존적 지식인들이 지배하였다.

이들에 저항하여 인민은 촛불을 들었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켰다. 한번은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을 실세로 하는 박근혜를 탄핵하였다. 한번은 비극 다른 한번은 희극일까? 실권자로서 김건희의 농단 속에서 눈먼 장님의 윤석열을 탄핵하려는 중이다. 이 기득 세력의 저항은 거세다. 벩송이 인민이 수행하는 ‘저항의 저항’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수구의 저항에 대항하는 항쟁과 혁명의 저항은 간헐적이었다. 인민의 등장은 느리고 가늘어 보이지만 지속하고 있다. 우화적이고 허구적인 수구 저항을 이겨내는 인민의 저항은 자연(본성)의 자발성에서 나온다. 박근혜의 탄핵은 쉬웠다. 윤석열의 탄핵은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끝난 지 한 달지났는 데도 기득권의 저항, 즉 반동은 거세다. 인민의 노력과 내공이 필요하다.

이번에 기득권 패거리의 거센 저항(반동)을 맞이했지만, 이들 셋 다 인민의 최종심급으로 이겨낼 것이라는 점에서 희극으로 끝날 것이라 낙관 하지만, 그 대가는 여러 가지로 치루어, 값비싼 수업료로를 지불해야 할 것 같다. 혁명이라면 짧은 시간에 정리할 수 있지만, 기득권의 법률 하에서 절차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필요하지만 낙관적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희극이 사회의 고착성을 벗어나기 위한 추억들의 방편이듯이, 우리에게서는 과거의 매국을 일삼은 극우파와 탐만치에 빠진 수구파의 고착성을 뿌리 뽑는 과정일 것이다.
인민은 누리소통을 통해서, 마치 리좀이 퍼져나가듯이, 인민의 의지가 펼쳐나간다. 루소가 말하듯이, 인민의 의지를 권력자에서 양도하지 않고, 계약을 통해 위임하지만 권력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민권은 기본심급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내란 수괴의 탄핵을 인용하게 되는 것은 인민이 최종심급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권자가 최종심급을 일시 헌법재판소에 위임한 것이지, 그들이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양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익히며, 내공을 쌓고 있는 중이다.

여기 현실에서는, 수구파들과 민주파들의 대립 속에서, 프랑스 혁명보다 더 잘 소통하는 연결망을 갖는 인민권이 등장하는 과정일 것이다. 21세기 규소의 시대, 누리소통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여러 리좀들이 아무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연결망을 짜고 있다. 새로운 공화국은 인민에 의한 계약의 사회가 등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의 저항과 반동도 넓이를 더하고 있다. 김건희-윤석열과 극우 집단의 계엄이 얼마나 큰 공포와 위협을 하려했는지는 수거자 명단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전 모의들이 드러났고, 또한 그들의 조직망이 점점 밝혀지는 가운데, 그저께 뉴스에서 등장한 종이관 1천개와 영현백 3천개를 준비하려고 또는 사들였다는 이야기는 윤석열 계엄집단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며, 인민에게 공포를 자아내게 한다..

유일신앙자들이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마남사냥을 하였듯이, 김건희와 윤석열은 폭력과 계엄령으로 인민을 말살(Genocide)하려고 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을 획책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영국의 시민전쟁, 프랑스의 대혁명과 같이, 우리터전의 21세기 새로운 제3신분의 혁명이 일어날 것 같다. 이 규소시대 혁명은 앞의 혁명들과 달리 입말과 문자로 인격의 층위에 리좀의 연결망이 새로이 각인하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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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시대의 도래는 21세에 엉뚱하게도 코로나19에서부터 전지구적 소통으로 열려 있었다. 이런 난제들 극복했던 경험을 가지고, 게다가 오랜 우리 문화와 새로운 누리소통을 결합할 줄 아는 우리가 세계사에 새로운 희극을 쓰고 있는 중이리라. 고착된 사회는 변화하고, 착각과 착오에 세뇌당한 기득권의 밀정과 수구파의 탐만치는 젊은 세대에 의해, 혁명이 아니더라도, 생물학적으로 밀려나고 있는 중이다. 공포를 심고 협박하는 이들에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밀어낼 리좀망을 연결하고 자발적 생성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세 의존의 지식인에게서 벗어나는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탐욕(탐만치)의 마군들을 퇴치하는 데는, 잉여생산을 제3신분화 또는 인민화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상부상조하며 자치와 자주, 우리들 스스로 교육과 의료를 무상화하는 제도를 만들 자율성과 자발성을 실현할 노력과 내공을, 80여년을 쌓아온 지층 속에 그리고 그 위에 리좀의 그물망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가야 할 리좀의 그물망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연결하는 노마드처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소통의 흐름에서 트래픽으로 매듭들의 각각에서 만들어지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혁명이 이루어지는 중일 것이다. 그 혁명은 언제나 하늘에서 일어나는 번개와 같다. 그 번개는 동일한 적이 없어도 계속하여 일어난다.

여기서 노벨 수상자 한강의 수상문을 상기하자. 그 수상자는 수상문의 제목이 “빛과 실”이었다. 세상은 빛의 세계이다. 그 속에서 이 땅과 인민들 속에 반만년을 면면(綿綿)히 이어온 실처럼 있다. 젊은이는 그 목화 꽃의 부플음이 면면히 이어지는 과정처럼, 리좀의 흐름처럼, 우리 이야기를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작은 선함과 작은 상부상조가 또 작은 노력이 긴 시간의 두께에서 내공으로 이루어진다. 돈과 권력, 권세, 권위 패거리 배에서 벗어나 진솔한 벗과 동지를 만들면서 상쾌하고 통쾌하게 극우파와 수구파를 넘어서길 바란다.

혁명은 번개와 같이 일어나고, 하늘은 여전히 비, 구름, 바람으로 변전하며 이어가듯이, 터전에서 인민들은 여전히 자신들 삶을 변역(變易) 속에서 이어가며 펼쳐간다. 리좀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만, 때에 맞게 제대로 연결망을 면면히 이어간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코로나19 이래로 다른 연결망으로써 리좀의 누리통신이 생겨났다. 그 누리소통은, 남태령의 밤샘의 그 눈 속에서 21세기에 새로운 조직화를 열었다. 공화는 인민들의 누리 소통에서 쌍방소통과 실시간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물론 전지구적으로는 전파이용이 가능한 지역이라는 점이 아직도 난점이지만 점점 더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극우들처럼, 망상의 파라노이아, 그리고 나만이라고 생각하는 “난가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자아의 각성이고, 나의 성립은 우리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불교가 소자아의 성립의 명상과 돈수에서도, 사대부중이 함께 보살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소아가 보살이 되었다고 한들, 그게 진솔한 자아의 성립이 아니라고 하며, 대승과 용화세계를 강조했던 우리의 선승들도 생각해보자. 유교가 구태라고 하기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평천하(平天下)에까지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성현들에게서도 리좀의 그물망을 더 잘 짤 수 있음을 생각해보자.

자아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터전에서 지금 수구들의 난동 같은 탄핵반대 속에도 있음을 명심하자. 이들의 탐만치를 극복하며, 벩송 표현처럼 저항의 저항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내공을 쌓아가자.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젊은이가 자율성과 자발성으로 새로이 나올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생 쥐스트는 스물셋에 대혁명에 참여했고, 스물다섯에 공안위원회를 맡았다. 규소의 시대 공자 말로 서른에, 천문학적으로 서른 여덞에, 플라톤이 말하는 마흔에 자발성의 사회를 만들 수 있게 실천의 노력과 과정의 내공을 쌓으면서 말이다.

리좀은 흐른다. 규소의 시대에 누리소통의 프래픽이 흐른다. 혁명도 흐른다.

(3:26, 58NLI) (4:04, 58NLJ) (5:20, 58N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천 하룻밤 이야기]

변역(變易):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2025 02 18, 우수(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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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이 풀린다고 하는데, 한강이 얼지 않아서 강물이 풀린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지난 12월 3일 얼어붙었던 터전이 입춘에는 봄바람과 더불어 풀릴 것인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김건희와 함께)은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며 계엄령을 발동했다. 바로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의결했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도록 계엄은 끝이 난 것 같지 않다. 게다가 그 계엄의 시행은 잘 짜여진 실행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광범위한 실행을 모의했다는 정도를 넘어서 사실 증거가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모골이 송연하다고 한다.

내란을 일으키려 시도하며 계엄을 실행한 세력은 광복공간에서 일제부역자들이 이승만과 더불어 하는 짓을 반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중이 대체할 방법이 없이 당했던 시절과 달리, 누리소통의 시대에 각성한 인민이 잘 대처하고 있다. 세월은 흐른다. 70년 전 입말의 소통이 거의 없던 시절과 달리 70여 년 동안 입말이 풍부해졌고, 인민이 누리 소통을 통해 자발적으로 문화 창달과 홍익인간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 있다. 20세기 철기시대의 전성기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미국 제국의 반쯤 식민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한문도, 일어도, 영어도 아닌 우리 입말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이로 부터 79년이 지나, 규소시대의 흐름의 한 중간에 와 있는 것 같다. 이 시대에 누리 소통이 빛의 발산처럼 널리 빠르게 확장되고 전달되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 젊은이가 천지인(天地人)의 문자로 입말로 세상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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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서양은 천5백 여 년의 크리스트교라는 종교시대를 거쳐서, 350여 년의 합리주의시대, 그리고 인간의 각성과 더불어 실증주의시대에서 부르주와의 등장에 이어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를 열었고, 식민지 수탈의 제국주의시대에 소비에트가 성립했으며, 미국이라는 제국시대의 시작에 동양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용화세계를 만들려고 천년의 불교시대를 거쳤으나, 고려 말에 중생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사찰(寺刹)의 토지소유를 개혁하려다가 고려왕조가 무너졌다. 조선조 500년의 유학(儒學)시대를 거쳐 가는 마지막 100여 년에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생각하는 선각자들이 실증적 학문인 실학(實學)과 민중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을 지닌 노론이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광복에는 일제 부일자들이 미국 제국에 빌붙어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수법을 쓰면서 600여 년의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자들의 기득권이 유지되었다.

동서양이 비슷한 위도 상에서 역사를 이어가는 나라들에서, 문명사적으로 종교시대를 거쳐서, 학문적 논리의 시대를 지나, 대중과 민중, 인민과 프롤레타리아 시대로 변역하고 있었다. 사실은 각 시대마다 동일성을 유지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각각은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변역의 과정에서 상층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항상 권력과 돈(재화)을 차지하였다. 21세기 윤석열 집단도 권력과 돈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저항하는 세력과 더불어 인민이 그를 파면하려 한다. 18세기 말 이래로 인민주권과 인민 최종심금은 역사 속에 한 찰나처럼 여기지지만, 전 지구상의 인류의 기억 속에 지층의 두께처럼 내재해 있다.

*

조선시대의 변역은 지배세력의 일방통행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으로부터 지지받는 새 왕조의 지위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입말을 문자로 쓰는 과학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 입말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뒷방의 글로 밀려났다. 조선 왕조 안에서 상부로부터 개조와 개혁의 노력들이 있었다. 연산군 시대에서부터 시작했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상부의 세력은 부동이었다. 훈구파들이 사림파 김종직 학파를 제거하는 모오사화와 기묘사화를, 그리고 중종 시절에 수구파들이 개혁파인 조광조의 일파를 제거 하는 기묘사회를 일으킨 역사에서도 있었다.

조광조 이후에 유학자들은 은둔지사로서 자신들의 안위를 보존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고들 한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서, 두 차례의 외국(일본과 청나라)의 침입에 의해 피해해진 강토에, 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사라진 나라인 명나라를 존중한다면서, 사대주의로서 유학 중에서도 신유학의 주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삼아서, 이에 반하는 글을 쓰는 자를 통제하기 위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기괴한 사상 통제의 지침을 만들었다.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난적으로, 요즘 표현으로 빨갱이 사냥을 한 것이다.

정조가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실학자들과 더불어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로 이어진 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후에 다시 이익집단인 노론의 지배로 돌아갔다. 19세기 중반부터 우리나라가 세계사와 마주칠 때 젊은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극우집단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와 손을 잡고 나라를 팔아 넘겼다. 이런 과정에서 백성은 가난과 탐관오리의 착취 속에서 살아갔다. 백성이 서로 “니르고자 할배 있어도” 백성들 사이에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

그제 일요일에 광주에서 탄핵반대 집회를 한다고 전국에서 교회들이 많은 버스를 동원해서 집회를 하였는데, 이는 광복 후 우리역사에서 뒤바뀐 국면을 연출한 사건이 있었다. 얼핏 해방공간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信託統治誤報事件)을 떠올렸다. 소련이 반대하고 미국이 찬성했다는데,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난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잘못된 보도를 내보낸 사건이다. 오보는 행방정국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민족의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공간에서 세상은 달리 흘러갔다.

이런 시기에,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하고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 소통할 수 있는 입말도 갖추어지지 않는 시기에, 미국을 등에 업은 기독교 세력이 서북청년단을 만들어서 일제부역세력들과 더불어, 반민족처벌특별위원회를 해산시켰고, 제주도 도민을 학살하였다. 이때 민중은 이들에게 저항할 여론을 집결시키지 못했다. 인민이 자주적으로 의사를 결집시키고 퍼뜨릴 도구가 없었다. 부역자들과 기독교세력이 함께 반민족처벌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갔다. 냉전의 부산물인 우리나라 남북 전쟁은 삶의 터전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중생이, 백성이, 민중이, 인민이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사유에서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촛불시위에 다음으로 찬란한 불빛시위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치며 축제를 벌였다. 이 둘째의 탄핵 심판에서 인민이 최종심급임을 의심하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히 검찰독재 세력도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속사정을 모르는 근거 없는 낭만주의라고 한다. 나도 저 독재세력이 조선조에서부터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 부일파, 숭미파로 이어져온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백성의 입말보다 상부의 언어와 용어로서 지배해 왔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민중 또는 인민이 자각하고 소통하는 도구를 가졌으며, 스스로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몇 가지 점에서 이들 극우파들이 인민에 의해 밀려난다고 생각한다.

*

하나는 사람들이 코로나의 방어를 슬기롭게 거친 우리나라는 지구상의 중요한 나라로서 지위를 가져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DNA라든지 바이러스의 면역체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질병대처의 방식에서 각 나라가 우리방식을 모방하거나 부러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 속에 생물학적 질병과 위험에도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세계 정상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고나니 선진국의 대열에 서있다고 했듯이,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 세계의 중요국가와 나란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각이 자주(自主)를 부추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류 문화도 중요하다. 대중음악에서,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연주자들에서, 그리고 식생활에서 우리방식이 다른 나라들에게 일반화하여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계에서 지위 상승에 스포츠도 빠질 수 없다. 그럼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노벨 문학상에 우리의 젊은 세대의 기수인 한강 작가가 올랐다. 나로서는 어떤 문화적 양태보다 우리글이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말하자면 우리 입말이 문자로서 알려진 것이다. 이번 계엄에 대해 근거없는 낙관주의라고 할 때, 나는 우리 입말과 문자가 인민의 소통기구가 되었기에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오고 최종심급은 인민의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우리말을 입말 쓴지 79년 만에, 그리고 87년 항쟁이래로 우리글을 가로쓰기 신문이 나온 이래 38년이 지나서 인민의 시대를 열었고, 우리글로 세계문학사에 한 시대를 열었다. 자치에서 자주로 한 단계를 올라섰다고 해도 좋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누리소통(SNS)은, 권력의 지배방식과 전혀 다르게, 널리 공유되고 있다. 지식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은 도서관(문자, 음악, 영상)에서 라고 하지만, 인공지능(AI)의 속도와 확장은 코로나 이후 5년 사이에 지금까지의 문명사에서 만들어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하였다. 그 거대한 양에 짓눌릴 것 같지만, 어느 시대에도 부정확한 사례들이 넘쳐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화되고 정리되어 갔다는 것이 인류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극우파들의 가짜뉴스와 짜깁기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 유투버와 텔레그램 등이 성행한다고 젊은이들이 모두가 그 속에 함몰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든지 탐욕과 오만이 겉보기에 화려하게 보여도, 내공을 쌓으며 노력하여 얻는 성과와 작은 좋은 일들을 쌓아가는 선량들이 이 세상을 환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근거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라니깐.

이러한 세상의 변화에 늙은이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방식에 대해 진솔하게 마주하고 노력한다. 늙은이들의 괜스런 걱정은 늙은이 자신들의 걱정이며 젊은이에게 전가할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자치와 자주를, 태어나면서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젊은이는 자신들이 살아갈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변화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게다가 5년 정도 사이에 비약적인 소통의 발전에서 젊은이가 스스로 노력하며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철기시대에 보편적 동일성의 요구가, 지금으로 보면 탐욕과 오만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다. 규소시대 다양한 삶의 양식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자율성이 이미 몸에 밴 채로 움직이고 새로운 생산을 하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겪지 않았어도, 윤석열의 쿠데타가 젊은이 자신들이 살아갈 삶에서 걸림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촛불시위와 다른 불빛시위가 그들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문화이며, “다만세”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젊은이들이 달리 생각하는 가운데, “틀딱”과 성조기부대들이 역사 속에서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입틀막”이나 “입벌구”라는 용어가 윤석열과 김건희같은 이들이 방식으로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근거 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다. 바로, 천지인(ㅣ,ㅡ, ㆍ)의 삼글표를 기본으로 하는 젊은이가, 크리스트교의 삼신앙이든 철학에서 삼위격이든 간에 지나간 것에 비해, 현실에서 소통의 삼글표가 자율성을 발현하는 도구임에 틀림없기에, 즐겁고 유쾌하게 다음 열릴 시대를 기대할 수 있다.

*

유일신앙자들이 여섯 먹은 꼬마처럼 자연을 자동인형처럼 철없이 탐욕과 놀이의 도구로서 대하다가, 자연에 자치가 있다는 합리주의시대,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자연에 자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자연이 자율성이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이런 자율성의 사유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에 가깝다면, DNA에 이르러 이제 자발성의 발현의 시대라고 깨닫는다. 이 자연의 자발성을 견디지 못해,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교회가 구시대의 서북청년단과 백골부대 같은 무리들을 동원하고 있고, 인터넷 속에서 신천지의 댓글부대와 명태균의 여론조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양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젊은이의 시대이다. 마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적으로처럼, 인민 속에서 인민과 더불어 인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벩송은 말한다. 삶이 먼저이고 사유한다(철학한다)는 다음이다. 서양철학사가 이상한 사고와 결합하여 신이 먼저고, 다음에 사유하고, 그리고 산다로 만든 시대가 끝났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의한 자연의 방식으로 사는 삶은 노력이고, 어느 생명체나 자기 강도(내공)를 높이고 있다. 이 강도를 우리는 내공이라 부른다. 열여덟까지 일반화의 방식을 가르친 대로 배웠고, 노력과 내공은 열아홉에서 서른여덟까지 자치를 통한 자율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돌아보며 노력하고 내공을 쌓는 이들을 만나러, 자연을 통한 지식의 광장으로(AI와 DeepSeek가 아니라) 떠나는 다양한 여행도 필요하다.

이 쿠데타가 희극이 되는 것은 낭만주의가 아니라, 젊은이의 내공과 노력에 있다.

이 세상은 젊은이에게 달려 있다.

(4:12, 58MLH) (4:29, 58MLH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의식의 발현: 역사는 때에 맞게(카이로스) 변역(變易)한다 – 수괴 체포와 식민지 연관에서 자각 [천 하룻밤 이야기]

의식의 발현: 역사는 때에 맞게(카이로스) 변역(變易)한다.

– 수괴 체포와 식민지 연관에서 자각.

– 2025. 01. 20. 대한(大寒): 소한 추위에 밀린 대한

지난 달 동지 이후에, 그 다음 한 달 후 절후인 대한에 이르기까지, 일부 사람들은 쿠데타와 계엄의 이야기가 점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와 같다고들 한다. 그리고 역사적 전개과정을 마치 연극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드라마든 연극이든 현상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내밀한 특성들과 그 사유의 뿌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도 한다. 윤석열이 등장인물이면, 이 각본과 대사는 누가 작성하였고, 연출자는 누구일까?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드라마 같은 이야기 있다고 한다. 드라마라기보다 긴 과정에서 크게 보아, 우리의 역사나 서구의 역사에서 비슷한 상사구조 같은 것이 있다. 서유럽도 기원전 역사의 문헌이 자체적으로 없고 외부에 있으며, 우리나라도 김부식의 짤라버린 역사서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원후의 역사에서 천년의 불교시대, 500년 유교시대가 있듯이, 서유럽에서도 1,500여 년의 크리스트교시대, 다음으로 오성의 합리화시대 300년이 있다. 유럽이 실증의 시대로 진행하면서 구시대의 두 가지, 종교시대와 형이상학시대를 벗어나려고 하였고, 그 이후로 상부는 유럽을 벗어나 부의 획득을 위해 전지구적으로, 칼과 방패로 무장한 로마의 식민지 개척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총과 대포의 무력으로 전지구적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영정조 시대에 몰락한 남인들이 실학이란 이름으로 실증학문에 관심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실증주의가 발현했지만, 서구의 식민지 확장이 중국과 일본을 압박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밀려왔을 때, 우리나라는 로마의 식민지경영보다 훨씬 더 강압적인 제국주의 식민지약탈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에게 배운 것을 대행해서, 일제 식민지와 광복이후 미국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을 주구(走狗)로서 소두목으로 앞세워 소련과 중국에 대립하게 하였고, 그 와중에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와 제국의 세력들이, 이승만, 박정희, 전투환, 이명박을 관리하더니, 이들 모습을 통합 모습으로 21세기에 윤석열의 쿠데타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사에서 기원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하고, 로마 제국이 지중해 주변뿐만 아니라, 유럽의 서부(프랑스와 스페인), 북아프리카(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포함), 중동지역(현 터어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라크 등)을 깊숙이 장악하였다. 식민지 정책에서 그리스 식민지 개척과 로마의 식민지 지배가 다르다. 그리스 식민지 정책은 그리스인들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그 지역의 상부로 정착하면서 그리스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이상)의 공유로서 다자의 평등과 자유를 누릴려고 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중앙집권 시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몰락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지중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참여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통치하면서, 이 장군이 파라오를 대신하면서, 통치를 위한 세 부류의 학자들을 궁정에 불러들여, 통치의 난제들에 대해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학문의 3계보는 소크라테스 좌파라 불릴만한 퀴니코스와 스토아가 한 축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서 로도스 섬으로 떠난 학자들과 달리 아테네에 남은 소요학파 학자들 중에서,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과학에서 해결책을 내려 했던 이들이 당대에 성행했던 의학의 히포크라테스학파와 함께, 민생의 삶을 해결하는 한 축을 형성했다. 그리고 나일강의 전통에서 측량술을 기하학으로, 천체의 운동에서 책력의 만들었던 오랜 이집트 신관들이 수학적 전통을 유지했던 것이 또 다른 한 축이 있다. 이 세 부류의 통합적 결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성립이라 한다. 제국의 체제를 확립하면서 정책의 실현에서 이 세 부류들은 상부로서 인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이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앞에서, 제도와 인간의 관계와 달리 자연과 인간이라든지, 신(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그래도 여전히 탐구하는 노력은 있어왔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장군이 세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왕조가, 공화정의 로마에서 제국의 로마로 바뀌는 시절에, 지중해와 중동의 패권을 로마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달랐다. 그리스 식민지처럼 새로운 도시 개척이 아니라, 이미 성립된 도시들이 로마에 복속(예속)하지 않으면, 무참히 말살하였다. 로마는 공화정 시절에도 카르타고라는 도시 자체를 몰살시켰듯이, 로마의 제국은 저항하는 나라들을, 특히 이스라엘을 저항자들을 완전히 몰살시키려했다.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로마의 정복을 통한 식민지 확보는,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듯이, 개척에서 생산력의 증가에 의한 이익의 확대와 달리, 식민지 지배의 생산양식에서 생산에 참여 없이도 잉여의 착취를 하였다. 이런 정복을 통한 잉여착취는 앵글로색슨 철학에 깊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전지구적 교역하기 시작한 1,600년 전후에 네덜란드 상인은 세계 지역들과 상호호혜 무역을 하려고 한데 비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1588년) 영국이 해상권을 지배하면서 식민지 정책은 개척이 아니라 착취와 약탈이었다. 이런 약탈 경제에 의한 부의 확충을 아담 스미스가 눈치 채고, 국가의 부는 상업을 통한 자유경제체제라고 보았다. 물론 아담 스미스의 중요한 업적은 단일체제 내에서도 노동의 분업의 과정을 통한 잉여이익의 창출을 밝힌 점이다. 그럼에도 그의 경제학은 국가 또는 공동체의 총생산의 노동과 분배보다, 국가 경제에서 교환을 통한 이익의 증대를 보았다. 중상주의에 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개척과 착취를 정당화하였고, 께네의 중농주의와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총과 대포의 식민지 확장은 세계사를 영국이 주류인 것으로 되었다.

유럽이 중심이 되어 20세기에 두 번의 식민지 세계전쟁을 거치면서, 부의 축적을 이룬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성립했듯이, 미국이라는 제국은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와 전쟁을 일으키며 잉여의 착취라는 체제를 유지하였다. 제국은 한 세기 동안에 차례로 일어난 자본과 금융의 위기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소비에트와 중국이라는 대립적 국가들의 성립과 더불어 제3세계는 자주와 자립의 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세계는 철기문화에서 규소문화 시대로 변화하면서 인도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들이 자기 위상을 만들면서 세계는 다원화되어 가고 있다.

철학과 학문의 발달은 인간이 즐겁고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노력의 결실들이다. 이런 노력들은 학문이전에 있어왔다. 그런데 로마의 제국은 달랐다. 악랄한 착취에서 식민지 인민의 삶은 비참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철학사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해소하는 노력과 학설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 식민지에서 지성의 노력은 인간의 기초적 어려움에 대한 해소로서, 자연학과 도덕론, 나아가 정치학이나 국가체제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제국화 되면서, 그리고 식민지 총독으로 나가서 식민지의 수탈의 재산과 명성(?)으로 로마로 돌아와 황제에 오르는 방식이 생겨나면서, 식민지 착취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제 속에서도 식민지 수탈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항쟁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는 20세기가 지난 후, 마치 미국이 전쟁을 통해 세계를 다스리는 경찰을 자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로마가 무너지고(476년), 동로마가 오스만 투르그에 의해 멸망(1453년)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방식이 유지했던 것은 황제와 유일신앙의 지도자(주교들)의 담합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로마의 교황은 다르다고 할 것이지만, 서유럽은 제국은 없고, 군소 왕국들의 분화, 즉 봉건시대였다.

국가권력에 종교권세가 결합한 것은 둘 사이에 이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야합 또는 카르텔이 드러난 것은, 고대 이래로 권력과 권세가 한 사람(황제, 참주)에 있어서, 둘 사이의 갈등관계 또는 이질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이질 관계의 봉합이라 부를 수 있는 상부가 성립하기에는 철학적 배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겉보기에는 철학학파들 사이의 진리 논쟁 또는 각 학파들 사이에 학문적 위상 정립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말하자면 분화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학문의 분화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있었던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학문 또는 철학의 분화는 자연을 다루는 이오니아학파와, 존재를 사유하는 엘레아학파 사이에 있었다. 이 다음에는 소크라테스의 후계자들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퀴니코스를 이은 스토아의 대립에서 갈래가 일어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에피쿠르소의 정원학파도 나왔다. 이런 분화가 이루진 것은 천문과 기상학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해가 상식에 준하였기에, 이미 기원전에도 몇몇 학자들이 지구의 둘레 지구의 자연을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말기에는 시각적 관찰의 학문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이론에 동조하였고, 게다가 권력과 권세는 이런 정태적 지식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권력과 권세와 맞물려 지식의 권의의 문제는 알렉산드리아의 말기에 학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학파들에 별 주목하지 않고,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레스학문의 복원, 셈계의 유일신앙의 성립으로 나누고 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부분 철학사는 신플라톤주의라고 말하지만, 이오니아 이래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사이에서 체계적 학설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표자는 플로티노스(204-270)이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우주 영혼이라는 생성하고 변화하는 체계를 받아들여 플라톤주의 다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관을 통한 상식이 이 우주발생론을 지탱해 주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이 제기된 유일신앙자들과 부딪히면서, 세계영혼의 신학이 크리스트교의 반박으로 이방종교(이교도)로 몰렸다. 그 몰락은 크리스트교인의 사주를 받은 군중이 여성 수학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로 인정했던 히파티아(370-415)를 대로에서 갈갈이 찢어 죽였고, 529년에 아테네의 학당들이 폐쇄되면서 중세의 암흑기로 그늘 속에서 면면히 이어갔다.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대등하게 발전한 것은 로도스 섬에서 소아시아 연안의 카리아 지방에 아프로디지아스라는 도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계승자들이 어어진다. 그 대표자는 알렉산드로스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50경)이다. 소요학파의 특징처럼 논리학을 기본으로 사물들과 대상들을 경험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유효했다. 이들의 논리학의 최고류 용어는 개념적으로 절대자 또는 신과 대등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그리고 사물의 대상이든 사유의 대상이든 정태적인 현상에서부터 변화를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도 흥미있게 받아들였다. 이들의 학설이 유일신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크리스트의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시기에,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논쟁과 대립에서, 플라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성립하듯이, 새로운 신학 특히 신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유대-크리스트교 쪽에서 신학과 유대 전통의 역사를 개입시켜, 예수를 드라마의 인물로 만들고자 하였다.

예수-크리스트의 전통은 유대-메시아(크리스트) 전통과 다르다. 전자는 이방종교에 물들었다가 삶에서 비참을 벗어나는 방식에서 그리스철학보다 비유로 설명된 스토아-크리스트교의 설교에 매력을 느꼈다. 이는 유대-크리스트(메시아) 전통처럼 태초의 신(야훼, 유일신이든)에서 보다, 하늘에서 울려오는 신의 말씀 또는 로고스가 진리이다. 그리고 아가페(무상보시)가 세상의 비참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예수-크리스트가 구원과 부활에 의한 삼신론이 성립하기 전에(324년), 자연의 이법과 학문의 이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위계처럼, 절대적인 부동의 원리와 그 원리의 경험적 연결을 찾으려 했다. 이런 전승에는 오리게네스(185경-253경)가 있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법의 해결에서 진리보다, 또한 숙명의 해결할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운명의 논리 전개에서 저세상의 안녕을 통해 삶의 안정과 구원을 찾으려 했다. 이방종교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저세상의 문제 해결을 예수의 속죄에서 찾는다는 알레고리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슷한 시기였다. 플라톤주의자라 불리는(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학파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의 개념이 들어있는데) 플로티노스(204-270)의 우주발생론적 설명,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 속하는 알렉산드로스 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50경)의 논리적이고 정태적 세계구축, 그리고 신을 통한 완성된 세계와 구원을 주장하는 오리게네스(185경-253경) 등이 담론을 전개하였다. 이들 중에서 로마 제국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점점 더 제국과 같은 체계를 형성하는 쪽은 셋째 예수-크리스트교 쪽이었다. 물론 이런 체계의 완성에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 때 와서였다.

학문적으로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나름의 체계와 대상을 다루는 방식을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자는 다자의 공존을 말하고자 하고, 후자는 종과 류 위에 하나의 최고류를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자의 단위의 하나(un)이거나 류와 종에서 각각의 단위로서 하나(un)는, 입말로서 표현하는데 같은 하나이다. 그럼에도 전자에서는 유일한 선의 이데아로서 일자(l’Un)를, 후자에서 완전자이며 절대자로서 일자(l’Un)를 말하는데, 용어로서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크리스트의 체계에서도 일자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둘을 알레고리로서 통합된 방식으로 유대-크리스트교를 만들면서, 유일신의 일자(l’Un)를 설명한다. 이로서 신학의 일자는 최고선이자 불멸자와 같다.

그런데 이방종교에서 이데아의 일자는 미래에 만들어야 할 세상이지, 과거에 만들어진 천국과 같은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크리스트교의 일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율과 모순율 수용하면서, 과거의 일자인 신을 알레고리의 첫 근거로 세웠다. 하나의 신이 있고, 다른 신을 믿는 것을 배격하여, 하나의 신으로 돌아가는 배중률(A 아닌 것이 아니고 A이다)을 받아들인다. 나 이외의 신들이 아닌 신이 진리의 신이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조의 멸망과 로마 제국에 성립에서 신학의 알레고리는 황제제에 맞는 배중률이었다. 예수-크리스트를 공동체 신앙(믿음, 독사)의 대상 밀어내고, 신학이론으로서 유대-크리스트교에서 세계사 변천의 진리로서 신앙(파라독사)을 구사하여 중세 천년을 이어온다. 이 배중율에 따라 교리(파라독사)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온갖 나쁜 짓의 신호탄이 히파티아의 광장에서 공개적 살해였다, 마남사냥은 이를 이어받은 한 방식이었고, 중남미의 식민지에서도, 우리나라에서 한경직에서부터 전광훈에 이르기까지 배중율에 의한, 자기 이외에 다른 신앙을 악이라는 진리의식의 세뇌는, 권력과 결탁하여 많은 백성을 살해해왔다.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세계사에서 황제제(참주제)에 반대의 첫 시도자는 소크라테스라고 한다. 다이몬들을 믿는 그는 민주제도의 성립을 바랐다. 그럼에도 고발 내용 중의 하나로서 전래의 신앙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사약을 받았다. 하나의 신이든 여러 신이든 신으로부터 믿음에서, 어느 하나가 독사이면 다른 신을 말하는 것이 파라독사이듯이, 거꾸로 유대-크리스트 신앙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이다.

학문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자연의 이법과 그 실증의 사실들을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고대와 중세는 실증적으로 연구가 거의 불가능했다. 르네상스이래로 망원경이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들었고, 이어서 현미경은 눈에 보이지 않은 대상들을 말할 수 없다고 했던 시대를 넘어서 맨눈에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점점 넓어져 갔다. 사물의 변화라기보다 사물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영혼)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증기기관과 원동기(모터)의 발달은 생산양식을 바꾸어 놓았고 편리와 안녕은 상부만이 아니라 대중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럼에 소유는 소수의 것이었다. 생산양식의 변화는 또 다시 인민의 사유를 변혁하였다.

20세기 중반에 DNA와 디지털의 발견과 발명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21세기의 인민들의 누리소통은 의식의 민중화를 넘어서 다양체의 길을 열었다. 알레고리에 의한 유대-크리스트교, 미국 제국, 동일율의 논리체계, 이 3자의 야합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종말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이제 이 3자의 야합으로 최고 존재로서 일자가 돈(자본)이라 한다.

세뇌되고 전승된 권세, 권력, 지식이 2천5백 년 전부터 아니 4천 년 전부터이라지만, 인류는 수백만 년 전부터 노력하며 내공을 키워왔다. 자연의 이법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혜의 탐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규소의 시대에 와서야 다자의 공존과 같은 다양체의 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일제에 부딪혀 우금치를 넘지 못했던 시절의 아픔을 날려버리며, 우리 젊은 여성들이 농민과 남태령을 넘었으며, 12.3에는 여남, 소노, 천귀없이 함께 여의도에서 불의에 항거하였고, 추운 밤 눈 내리는 도로위에서 눈사람이 될 정도에서도 새로운 공화국의 밝힐 빛을 발하였다. 내란 수괴 윤석열은 어제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제7공화국이 밝아 오리라. 한 가지만 바란다면 다음 선거부터 다양체의 바탕이 될 결선투표제를 실행하기 바란다. 배중률에 빠져 내편 찍지 않았기에 통일성(l’unite, l’un)이 안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자의 공존에서, 결선투표로 가면서 당연히 연대와 계약이 이루어 질 것이다. 루소의 자연권 사상에서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은 합의 계약이 민주제의 기본이라 했다.

세상은 45억 년 전부터도 변역(變易)하고 있다. 벩송이 “저항에 대한 저항”이 열린 도덕사회, 역동적 종교를 만든다고 했다. 극우의 기획과 저항(반동)에 대하여, 이 시대 인민의 저항, 즉 리베르떼르(libertaire)와 휴마니떼르(humanitaire)의 저항의 역사는 지속되었고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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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다극시대의 젊은이들에게 – 제7공화정 시대의 주인, 다양체. [천 하룻밤 이야기]

동지(冬至): 다극시대의 젊은이들에게

– 제7공화정의 시대의 주인, 다양체.

 

인간이 지적 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삼천 년 전 이전 시대, 즉 기원전 천년 이전 시대 정도로 잡는다. 나일강,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황허강과 장강(양쯔강) 등으로 4대문명을 이야기한다. 이런 토지 시대의 이야기는, 신화 또는 전승으로 알려지는데, 이 시대에 쓰는 입말은 사라지고 각각에 따른 기호들이 남아있다. 이 기호들이 어느 정도 체계를 갖는 시절이 기원전 오륙백 년의 시대라 한다. 그리고 입말과 기호가 상응하는 체계를 만들어지고, 그리고 기원전 삼사백 년에는 체계가 만들어지는 데, 기하학과 논리학이라 한다.

실제로 정교할 정도의 체계를 갖추었던 기하학과 논리학이, 현실의 사물들과 사건들에게 적용에 맞는 부분들보다 맞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맞는 부분으로 체계를 세우고 조직화를 이루어 공동체보다 더 확대된 도시국가 또는 황제국가를 만드는 재미와 이권(이익)에 매몰된 부류들이 상층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백성과 노예들은 어쩔 수 없이 사물들과 사건들의 성립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세상은 한시적으로 살다가 간다는 것을 알지만 달리 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달리 산다는 것은 죽음이며, 이를 벗어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무서움과 두려움(공포)이라는 것도 안다. 묵묵히 이런 굴종 속에 살다가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이런 부류들은 성(城) 밖으로,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여기서 한 가지 성 안은 정상이고 성 밖은 비정상일까? 성 안은 성 밖에서 생산과 유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성안의 지배를 위한 권력을 구성하였다. 그럼에도 성 밖을 제도의 여분으로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동심원적 테두리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 성 밖의 이탈자(뻬르베르)를 동심원적 구조 속에 묶는 것은 기하학적 사고이고, 이 동심원적 사고의 지배방식을 확장하는 것은 언어(논리학)라 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인류의 인식의 한계이지만, 오관[視(시)·聽(청)·嗅(후)·味(미)·觸(촉)]의 인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단일성을 또는 통일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이를 생명체로서 단일성의 유지하는 것으로 생리학(퓌지올로지카)이, 세계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으로 천체학(코스몰로지)이 동형구조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상상했고, 이 동형구조는 동심원처럼 되어 있다고 여겨서 체계화가 일정한 정합성, 대응성을 유지하면서, 나도 우리도 서로 이해와 설득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몸(신체)과 세계(천체) 사이의 연관 또는 연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들도 관계와 조성(composition)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고, 안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인식에서 몸들의 조직화와 비슷하게 또는 동상구조로서 도시국가, 황제(참주)국가의 제도가 이루어진다고 여기며, 제도와 체제의 조직화를 생각하는 것도 생리적 조직학(퓌지올로지카)의 확장으로 여겼다. 신체의 조직화(유기체화), 사회의 조직화(체제), 우주의 조직화(우주론), 이 셋은 우선은 기하학적 동일성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기호의 동일성, 또 하나는 하늘의 별들의 동일 운행에서, 같은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것들이 모방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의 도구는 당연히 5관의 통합을 이룬 의식이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섯 의식의 통합으로서 여섯째 의식은, 새로운 규칙, 법칙 등을 다루어 일반성을 만들어 낸다고 여겼다. 물론 기하학의 공리와 공준에 의한 정의를 정리하였듯이, 논리학에서는 항목(개념)을 정의하고 전제와 귀결 사이의 추론의 법칙에 맞는 인식이 성립한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에서 진리의 성립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런 오관이 하나로 통일되는지를 실증적으로 탐구하기보다, 삶에서 일반화를 통해서 보면 성인이 되어서 당연히 오관의 통합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3천년전 이전의 사람들이 5관을 통해 당연시 여긴 항목들이 수의 단위가 성립하고 그리고 배치하여(공간화), 가축의 수나 도시 인구를 셈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서야 수학들(산술학과 기하학)과 논리학처럼 추리의 순서를 갖추고 체계화 정합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을까? 학문의 진리를 논하는 사람들이 가끔 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인류가 살아온 기나긴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 대립항이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또는 상부상조와 상호협약이 체계를 만들까?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는 인류가 입말을 형성할 때, 일반화에서 체계와 지배의 언어로서 명사가 먼저일까? 또는 사람들의 삶의 상부상조에서 동사가 먼저 일까?라고 물어볼 수 있다. 벩송(Bergson)은 흥미롭게도 명사(이름)가 일반화에서 먼저이고, 명사의 움직임 방식에서는 동사가 다음으로 성립한다고 한다.

 

우리가 상식(sens commun)의 시대, 양식(bon sens)의 시대, 다양성(multiplicité, 발산)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서양철학사의 변천과정을 설명하는 한 방식이다. 상식의 시대에 중요점은 사람들이 간과하지만, 고대 그리스이래로 ‘산다’, ‘착하다’, ‘장하다’, ‘훌륭타’에 대한 막연한 합의와 일반화가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양식의 시대는 데카르트 이래로 물체(신체)를 사유의 방법과 어느 정도 상응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의미(sens, 방향)를 잘 닦아서, 추론의 길을 열면, 세상의 편리와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17세기의 데카르트 시대에도 물체의 운동에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리고 18세기의 “빛의 세기”에는 삶(의식)의 의미(방향)은 사회제도와 지식체계처럼 의미가 하나가 아니라, 빛의 발산처럼 여러 방향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오죽 했으면 유일신앙의 종교가 빛의 발산처럼 다양한 프로테스탄트가 생겼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다양한 방향의 길들의 전제로서,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들은 신의 방향을 생각했을 것이고, 자연주의자 또는 유물론자는 자연의 이법을 아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상식에서 양식의 시대로 이행에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착하다’, ‘훌륭타’에 대해 공통감각은 토대로서 유지되고 있었다. 17세기 18세기 철학자가 인간의 자연(인성)을 말할 때도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착하다’와 ‘훌륭타’의 공통감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 자연에서 생명은 또 다른 방향이라는 것을 알린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이런 다양한 길들은 서양철학사에서 여러 과학들이 자기 방향과 범위에서 학문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루소의 정치경제학 제기에서 맑스(Marx)의 정치경제학 정립, 공산주의의 제기는 인식의 방식에서, 이항대립의 관계를 봉상스(양식)의 방향을 전도된 방향으로 보고, 앞뒤 상하를 뒤집어 놓았다. 그럼에도 같은 시기의 인류학과 언어학은 방향을 뒤집는 것이라 하기보다는 다방향의 문제제기를 하였으나, 산업사회의 편리와 풍요는 다방향의 성립보다, 제도 속에서 민중과 인민의 뒤집기(혁명)에 두려움으로 상층의 강화의 길로 갔다. 이 길이 봉상스와 같은 궤도에서 국가주의에 이어 제국주의를 형성하였다. 제국주의가 식민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피식민지의 착취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런 시기에 생산력의 발달로, 벩송의 표현으로 원동기(모터)의 발명 이래로, 인간의 손이 기계에서 떨어져 나와 잠시라도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맛보았다. 이로서 자유의 문제가 과거와 달리 인민에게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상층이 봉상스에서 ‘훌륭타’와 ‘잘 안다’를 결합하여, 국가제도를 체계에 맞게 위계제도를 굳건히 하고, ‘훌륭타’와 ‘잘 안다’는 산업사회에도 적합하며, 상층은 부를 누리고 위계의 상위를 당연하다고 여겼다. 상식의 시대에서는, 중국에서 평천하(平天下)든, 불교에서 안양정토(安養淨土, 불국토), 유럽에서 신 앞에 평등이든, 삶의 터전에서 사람들 사이의 위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사회에서 역할을 차이정도가 있을 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봉상스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상층은, 계급의 형성을 체계와 체제에 대입하여, 현상의 인식을 바탕으로 권력과 권세를 백성과 대중에게 강요하였다. 여기에 지식의 권위가 봉상스의 방향과 일치를 내세우며 통일성을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지식의 통일성에 의한 정합성은 세계의 단일성도 당연히 여겼다.

맑스의 공산사회의 제기에 이어서, 레닌은 제국주의가 백성과 대중을 피식민지의 노예로 삼으려는 전략이라고 반대하였다. 산업의 발달에서 상층은 하늘 길, 땅 길, 물 길의 도구를 지배하여, 도구를 무기화 하면서 제국주의를 강화하였을 때, 유럽의 국가들은 국가들 사이의 상층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대항하여 식민지 제국주의의 대립각에서 소비에트 연방이 등장했다. 그리고 상층주의자들은 소련을 악마화하고, 소련이 피식민지 신생국가들의 지원을 막았다. 상층은 새로운 질서의 재편을 도모하는 가운데, 또다시 후발 제국주의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 20세기 초 소련의 등장이래로, 중후반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였다.

상식의 시대에는 장하다 ‘훌륭타’라는 주제가 현실의 표면에 있었다. 봉상스 시대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추론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여겼고, 국가주의를 넘어서 식민지 지배의 제국주의로 확대 강화하면서, 하나의 길이 정당하다는 강조의 길은 인간이 인간의 지배라는 광기(folie)로 들어섰다. 두 번의 전쟁은 광기의 극한으로, 유럽 우월주의 또는 유일신앙 지배를 봉상스로 착각하는 편집증의 망상에 이르렀다. 세계사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체제가 자기 방향을 찾는 동안에,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재편된 미국은 두 나라를 악마화 하였다. 즉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유럽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로, 소련과 중국은 사회와 인간의 상부상조를 도모하는 사회주의로 재편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소련이 러시아로 바뀌었지만 기본토대로서 사익보다 공공성 우선이 여전하다고들 한다. 제국은 이들과 소통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식민지 대중들에게, 특히 남녘에서는 여전히 이들 두 나라의 사상을 악마화 또는 빨갱이로 마남(魔男)사냥을 강제하고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 벩송의 표현으로, 인민의 자유 실현은 간헐적이지만 지속하고 있다고 하고, 들뢰즈는 혁명은 간헐적이지만 폭발적이라고 한다. 어느 시절에서든지 평등과 자유의 의식은, 상식의 시대에 ‘훌륭타’는 봉상스에 가려 표면 밑에 있는 것 같지만, 20세기 두 차례나 솟아난다.

유럽 중심주의의 두 전쟁 동안에 세계지도와 인구지도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평면을 비교하면 사회주의 평면이 더 크다고 한다. 산업화에서 맑스와 레닌 다음으로, 어느 사람이 세계사에 빛을 던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즉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표면의 균열과 변화의 조짐은 다른 두 학문의 영역에서 나왔다. 하나는 1953년에 반도체의 부분이며, 정보기술(IT)이라 부르는 영역의 발명과 확장이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생명과 연관된 DNA의 나선구조의 발견이다. 세계사는 표면 위에 사상의 다른 영토화를 제시하고 있다. 푸꼬(Foucault)의 용어로 보면, 세계의 표면에서 배치와 배열이 달라지고 있다.

상식, 양식, 20세기는 벩송의 표현으로 고등양식의 시대에 들어섰다. 인식은 표면의 현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포함하여 현재와 미래에 예상 참여하는 덩어리가 현존(현전)한다. 이런 과거-현재-예참의 재인식은 갑자기 도래한 것이 아니다.

상식의 시대에는 과거의 상상의 영역에서 원인에 대한 추구로서 공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상식이전의 의식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즉 내재의식이 있다. 이런 의식을 양심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5식(5관) 이전에 기억(1식)을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인정한 것은 인류학과 고고학의 발달이었다. 기억의 현존을 실증하면서, 마치 지층의 단면들을 잘라놓은 것 같은, (과거와 현재의) 의식의 현존, 그 다음(예참)과 더불어 긴 덩어리(지속)를 이어가는 토대는 자연이지 신도 원리도 공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상식이 양식의 토대가 아니라, 상식은 오관과 더불어 의식을 형성하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이다. ‘훌륭타’는 공감하는 의식, 착하다는 실행하는 실천은 양식의 방향과 다른 방향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의미는 마치 언어에서 파라독사의 해결이 있었듯이, DNA의 구조와 독해 방식은 코로나19에 발생과 극복에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과학의 발달이 없었다면, 14세기 흑사병(페스트?)의 피폐 이상으로 인류 전체를 위협했을 것이다. 생명의 영역은 사적 이익과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조직화(유기체화)로서 다양체는 수학과 물리학의 연관을 넘어서는(도피안)의 영역으로 사유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질병 역학관계의 해결이 안정을 가져왔다고 여긴다. 자연은 자치, 자율을 넘어서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사유하지 못하는 유일신앙자들이 사적 이익으로 역학관계를 유지하며, 무기의 지배와 더불어 백신제작의 독점등과 같은 제국이라는 공상을 확장할 수 있다고 여긴다.

반도체, 즉 전류가 흐르지 않은 간격이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현상이 있다. 들뢰즈가 규소의 시대라고 하였다. 맑스의 표현을 빌면, 생산력 발달과 생산된 물질들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다. 철을 중심으로 다룬 근 3천년의 시대에서 규소를 다루는 시대로 넘어가는 의식의 변화는 다양체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철학 분야에서는 문명의 시대에서 문화의 시대로 전환 중이라 한다.

식민지 쟁탈의 제국주의가 지나가고, 화폐의 지폐로서 제국을 형성했던 미국도 현재로서는 단일화폐를 통한 지배체제가 와해되고 있다. 블록체인의 기술은 우선은 제국 하에서 비트 코인이 대리(표상)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정보기술의 시대에서 의식의 확장은 18세기의 “빛의 세기”처럼 봉상스의 방향과 다른 방향을, 차히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차히의 생성은, 21세기에 지구상에서 국가들 사이의 다극체를 열었고 한다. 1953년 이래로 꾸준히 계속된 지식 소통의 연결은 다극체의 형성 이전에 이미 다양체들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며 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유의 갈래에서 이중성이 있었다. 이오니아의 자연과 엘레아의 존재의 대비였고, 알렉산드리아의 자연조직학(푸지올로지카)의 이중성도 있었다. 르네상스에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의 천체의 구조에 대해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나왔고, 같은 해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의 인체의 구조에 대해 『인체 해부학 대계』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17세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이원성의 논리전개, 18세기 자연권의 등장, 19세기에 사회학과 정치경제학만큼이나 의학(두뇌생리학)과 심리학의 정립이 있었다. 20세기에 미국과 유럽(일본 포함) 대 러시아와 중국(쿠바와 베트남 포함)의 대립구도가 있고, 21세기에 국가 간의 다극화시대 이상으로, 전지구적으로 누리소통(SNS)의 다양체화를 실행되고 있다. 소통의 도구로서 화폐의 지위가 어떻게 설정될 것인지가 문제로 남아있다.

 

우리 젊은이는 다극체의 시대에 러시아, 중국, 인도, 미국, 일본을 어느 쪽도 악마화 하거나 먼저 판단을 하지 말고, 역사의 과정에 대한 통찰과 통감(統監), 상호 비교할 수 있는 대조의 노력, 그리고 각각이 지향하는 여러 방향들에 대한 터전(토지, 영토), 등에 대한 탐색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마찬가지로 다양체의 시대에 얼마나 다양한 발신자들(블로거, 카페, 유튜버, 신문, 방송)과 젊은이 자신이 이들 매체들과 접속을 통한 연결방식(배치와 배열)에서, 푸꼬가 말하는 주체화가 성립할 것이다. 주체화는 자아의 위상 정립에 있다. 한 개인의 인격을 판단할 때, 그의 친구들과 읽는 책을 보면, 그 인품을 판별할 수 있다. 말하자면 김어준 겸공, 최욱의 매불쇼, 유시민의 민들레 등에서 접속에 의한 연결망과 태극기부대, 전광훈, 천공 등과 연결망의 연결은 전혀 다른 자아의 형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기술 정보 시대에 접속망에서 트래픽에 따는 도표가 그 사람의 인품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 만큼이나 러시아, 중국, 프랑스의 문화를 읽는 것과 미국, 영국, 일본을 읽는 것과 대비에서도 트래픽처럼 드러날 것이다. 전자에 연결방식이 많다면 ‘훌륭타’와 공공의 이익에 연관이 많고, 후자에 연결망이 많다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빠질 것이다. 르네상스에서 철기시대 마지막까지는 공적이익과 공산화를 악마화 하는 교육을 받았더라도, 그럼에도 다극화 시대, 누리 소통의 시대의 젊은이들은 70여년의 규소의 시대의 선두로서 ‘장하다’와 ‘훌륭타’로서 노력과 내공을 쌓기를 바란다.

철의 시대에 사는 늙이(노인)들은 생물학적으로 이제 곧 간다. 이제 규소 시대에는 젊이(청년)들이 살아갈 시대이다. 젊이는 자기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를 그리고 자아를 접속방식의 변화를 통해서, – 지도 그리기의 일종인 트래픽이 말해준다 – 달리 접속하기를 통해서 푸꼬가 말하는 지도 제작보다 더 유쾌하고 즐겁게 세계(세상) 지도 그리기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마지막 달력에서 12.3 계엄령의 발표와 해제, 14일 반란 수괴로서 윤석열의 탄핵안 가결 등으로 한 줄로 표현할 수 없는 유기체들 사이에 새로운 조직화가 그려지는 숨가쁜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여의도 국회 의사당 앞에서 젊은이들 대거 참여하였다. 다극화 시대, 다양체 시대의 주역은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이다. “산자의 따르라”를 부르는 세대와 동시에 “다만세(다시 만난 세계)”를 부는 세대가 어우르고 있다. 과거-현재-예참을 내재하는 젊은이가 노래와 율동으로 추운 나날을 건강하고 힘차게 이끌고 가고 있다.

새로운 지도 만들기, 7공화정을 이끌 젊은이 만세! 혁명 만세!

(4:41, 57WLI) (5:22, 57W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경탄할 나라에서 모험들 [천 하룻밤 이야기]

소설(小雪): 경탄할 나라에서 모험들

– {# 앨리스가 경탄할 나라에서 겪은 모험(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 2024 11 22. 소설(小雪): 산간에서 눈이 오는 것을 대비해야…

  누구나 배워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행복, 열락(悅樂), 즐김, 고요, 소박함을 추구 하고 산다. 탐욕의 쾌락, 지식과 독단의 오만, 하나의 방식을 다른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치졸함, 탐만치가 독약이라고 고타마 싯달다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 인류는 익히 알고 있다. 실증과학의 발달 이전에, 문자화가 우선이고 우월이라고 느꼈다. 그러함에서 세계와 자연의 변화에서, 인민이 노력과 내공을 통해 삶의 터전을 바꾸어 간다고 알게 된 것은 250여 년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긴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느리지만, 세대들의 사이에서는 경과의 흐름은 점점 빨라, 세기의 구분에서 세대의 구분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과 비슷한 시기에, 실증과 비슷한 실학이라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자연과 인민 속에서 그 보다 상부와 문자에 의존하여, 입말로 표현된 문자화로 이루지 못하고, 이제 겨우 백성들 속에서 나랏 말씀을 79년째 공용화하고 있다. 아직도 이루어야 가야할 내공(토노스 τόνος)이 더 필요하다. 삶은 노력(포노스, πόνος)이 먼저이다.

   오래 전에 미국 영화에서, 한 백화점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실재 인물로 설정하여 돈을 버는 것을 두고, 이 백화점의 상업주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누군가 산타가 실재 인물이 아니라는 소송을 걸었다. 변호를 맡은 인물이나 이에 동의하는 이들은 당연히 산타가 실재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영화는 변호인이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진행되었는데, 그 변호인의 여섯 살 아들이 아버지에게 산타가 실재하지 않으면, 누가 나의 착한 행동에 선물을 주었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산타가 너에게 선물했다고 선언한다. 이로서 재판에서 변호사가 지고 백화점이 이겼다.

   우리나라 극우 정부들이 인민을 대하는 방식은, 이익집단의 사적이익에 대한 문제제기를 마치 산타의 현존의 문제로 바꾸듯이, 문제거리를 여럿으로 잘라서 그 중에 작은 잘못을 끄집어내어, 법률적으로 문제를 규정하여 자기의 이익의 착취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 같다. 꼬리 자르기라는 표현은 사건들의 비교도 아니고 사실들의 대조도 아니며, 게다가 실증적이지도 않다. 역사적으로 왜 이런 사태들이 지속되고, 성명서를 내야 하는가. 우리 입말과 문자의 학문적 전통이 아직 층위가 얇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노력이 모자란다.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이런 자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박홍규(1919~1994)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 그러나 학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가까운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의 학문적 전통의 층위가 얇아진 이유가 노정되어 있어 매우 안타깝다. 조선 초기에 평천하의 이상을 지녔던 사림파의 전통이 이익집단의 사장파들에 의해 제거되고서 오랫동안 다시 회복되지 못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유배와 낙향하는 선비들의 학풍인 실학이 등장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가 침탈하면서 사장파의 후신인 노론이 일본에 투항하고 미국에 포획되어 상층의 층위를 만들고 말았다 —

   서양 철학사는 흥미롭다. 우선 서양은 이오니아학파(자연주의)와 엘레아학파(관념주의)의 대립에서부터 아테네 시절에 민주정이라는 제도를 맛보았다. 게다가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가상성이 언젠가 실현되리라고 여기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사유’가 실재한다고 믿는 아테네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에 이방인 출신이 퀴니코스 학파에게 배운 스토아학자인 제논의 후배들은 현실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찰나(le moment)처럼 이미 만들어진 사건이 누구도 고칠 수 없고, 그 있었던 사건으로 실재한다고 한다. 다른 한편 현재의 순간(un instant)은 끊임없이 지속하며 현존하면서도, 마치 신체처럼 변형하며(몸의 크기), 변질하며(피부의 색깔변화), 변화하며(먹고 자고), 살아가면서도 하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재성이 있다고 한다. 전자들의 이상적이고 추상적 사유가 서양 학문발달사에 추동력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후자들의 사유에서, 아테네의 영원과 시간의 용어 규정과 달리, 영원(찰나)과 시간(순간)의 구별에서는 현실의 삶은 사건들 속에 이중성(또는 다중성)이 있고, 그 이중성 안에는 여러 관계들과 이와 더불어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연관들과 연대들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투로서는 후자들의 삶이 현실적이고 진솔한 삶이라고 하면서도, 전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고, 그리고 판단하고 심판하려고 든다. 전자의 플라톤주의와 후자의 스토아주의 사이의 차이다.

   다시 플라톤주의의 이상(공상)을 잇는 주지주의자들은 이상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고, 하늘나라에다가 영원을 심었다. 이에 비해 스토아주의 합리(이법)주의는 현실에서 변하는 실재성을 현실이라 두고, 불변하는 찰나들이야말로 영원하고, 순간은 삶의 태도와 행실에 따라 달리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서 또 다른 하나가 있다. 삶은 행실에 따라 다르지만, 그 행실이 자연 자체에서 또는 자연에게 인간이 관여하는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있다. 게다가 거꾸로 인간의 행실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의 연속, 즉 드라마 같은 장면(국면)들로 연결된 이야기들 또는 판단들로 된 기록들이 있다. 이처럼 역사는 다른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인간이 현상 속에서, 또는 현실 속에서, 또는 이야기의 역사 속에서 산다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많은 관점들과 국면들을 표출하였다.

   장면들의 연속으로 이야기들의 끝이 거의 다 권선징악으로 흐르는 것은 여전히 주지주의자들의 이상이 그래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를 설정하길 잘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삶에서 노력과 내공을 쌓은 일을 하면서 평생(환갑, 요즘 표현 80평생)을 착하게 살면서 섭리(φρένες, 프레네스)에 맞게, 진솔하게 살았다고 자족하는 이들이 있다. 이 삶의 순간의 지속은 한 덩어리이고, 마치 개미 쳇바퀴였다고 하더라도, 자연으로 돌아간다(한줌의 재, 한줌의 흙)는 소박한 생각에 미치면, 평생을 착하게 살아가게 하는 하늘나라를 설정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한평생이 짧지만, 역사의 과정 속에서 삶의 우여곡절은 마치 타산지석처럼 다음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기도 한다.

   하늘나라든, 순간의 지속이든, 둘 다 삶의 현장(상황, 터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유의 방식이 영원을 생각하는 관점이 뒤바뀐 것으로 보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구나가 이 터전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도덕성에 관심이 내재해 있다. 이 관점을 먼 미래에 두던지, 현실에 두던지 간에, 경건, 돈수(頓修), 행복, 즐김(열락) 등은 하나의 최선(온선)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온선에 이르는 방식, 방향, 노력, 내공은 각 개인에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온갖 변증술(소피스트), 논변술(플라톤), 변론술(종교옹호가), 수사학(연설가, 교육자), 반박술(변호인), 산파술(소크라테스) 등을 만들고 활용하였다. 그러한 이야기가 전승되어 온갖 논의, 토론, 담론, 서설, 강연 등이 있다는 것은, 그 만치 많은 사건들의 경우의 수들이 많아져서, 이 사건들을 분할하여 이항 대립으로 설명하기에는 이에 벗어나는 항목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항 대립을 하나로 통일(통합)하는 변증법이라는 것 자체가, 지식 체계와 사회 체제를 성립하게 하는 원리(규칙, 공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인데 비해, 현실에서는 다른 경우의 수들이, 갈래들이 많아진다. 인간은 적어도 기원후 천년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은 종교의 시대였다. 한 쪽은 유일신앙으로 다른 쪽으로 동양은 불교의 시대였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그러하다.

여기서 통합과 통일에 이르는 방식을 안으로 들여다보면, 수 세기의 과정들에서 서적을 쌓은 두께만큼이나 또는 마치 지층과 같은 층위만큼이나 사건들이 쌓여 있다. 기록 문헌이 있기에 사건들마다 검토해 보는 노력이 생긴다. 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동양의 통감(通鑑, 비추어보기)이란 용어나, 서양어로 사변(speculation, 거울 비추기)이란 용어가 이런 과정에서 나온다.

   주지주의와 스토아주의의 학파들이 관여했던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서, 전개된 철학적 사유는 사건들 속에서, 어쩌면 세계주의(코스모폴리트, 세계시민주의) 속에서 사건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제국과 같은 참주제(황제제)에서 인간은 순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개인은 사건들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의 유지가 절실했으리라. 이에 사건의 드라마로서 유일신앙이 개인에게 개입했다고들 한다. 너희 (각자)에게 천국이 있다고, 바울은 크리스토스 속에 있다고 바꾸었지만 말이다. 이상도 자연도 밀려났지만, 수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의 삶의 관계와 연관의 다양성에서, 사건들의 이야기(드라마)들은 여전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 사건들의 연쇄에는 원인과 귀결이 규정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이고 특히 주사위 놀이처럼 아자르(hasard)라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건들이 이어지는 계속들을 시대의 과정들로 생각하고, 또는 마치 지층의 두께들처럼 서로 다른 층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적 규정과 이법적 조성(composition)과 달리, 자연의 층위도 그리고 역사의 단계들도, 연속과 지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층들 위에 층을 쌓는 단절들의 두께이다. 이 불연속적 층들의 두께가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인간에서도 마찬가지의 두께와 층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 생리학(physiologie, 자연조직학)에 대한 발상에서 왔다.

기나긴 세월 동안에 쌓인 층들의 이야기를 한 줄로 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빛이 무한 방향으로 발산한다는 것도 안다. 빛을 통해 거울에 비추기에서, 수많은 방향으로 발산하는 빛살들 사이의 대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들 한다. 통감의 시대에서 대조의 역할이 들어섰다.

  개별 학문들이 자리를 잡아야 대조의 방식이 보다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이 자기 방식으로 층위와 영역(영토화)을 이루어 가면서, 대조에는 항들의 분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우주론적 사고), 발생의 분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다시 생각해 낸다(우주발생론적 사유). 사실 유일신앙은 이즈음에 거의 망조가 들었는데, 이 종교는 인간을 겁박하고 위협하면서 자기의 현존을 이어갔다. 이 현존 방식을 신학적 생리학(신앙자들의 조직학)이라 할 수 있고, 이를 성립시킨 것이 로마의 군대조직처럼 상명하복의 제수이트들이었을 것이고, 이들이 아메리카 장악에서 얼마나 많은 제노시드(인종학살)를 행했던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역사의 조직화는 천문학의 조직화, 인체의 조직화와 함께 더불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역사의 드라마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인지 규명하기를 추구한다.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 연대와 사건들의 대조에 이어서 학자들은 자연을 두고 ‘자동적’이라고 이해하는 태도를 바꾸어 ‘자발성’의 의미로 이해하면서 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발전을 탐구하고 탐색한다.

   드라마는 왕실과 성직자들에서 또는 국가권력과 사대부들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백성, 대중, 인민 속에서도 있어왔다. 이들은 삶의 터전에 있었고, 저들은 이익과 지위의 보존에 있었을 뿐이다. 동양에서도 항상 백성이 하늘이라 하고, 수운 최재우가 인민을 하늘처럼 모시라고 시천주(侍天主)라고 하였듯이, 서양에서도 인간이 자연에서부터 또는 빛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러고 나서 새로운 계층인 제3신분도 등장했다. 다음에는 프롤레타리아도 등장한다. 이런 인민의 등장이 의식의 주체화인 셈이다. 삶의 터전에서 공감성이 먼저 있고, 그리고 일반화와 개념화는 나중이다.

  이 글을 여기까지 다시 고쳐 쓰고 있을 때까지도, 자랑스러운 서울대 동문으로 윤석열을 선정한 적이 있었던 그 학교에서, 이 영향은 아니겠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은 나오지 않았다. 참고로 예전에 내가 만났던 서울대 출신 교수들 중에서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는 교수들과 인정하지 않는 교수들 사이의 경계가 1971학번이었다. 지금 이들이 정년으로 모두 퇴직했는데도 여전히 서울대 교수들이 극우집단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세대의 경계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지배 아래 있는 앵글로색슨 철학이 주류이기 때문이리라. 바깥과 비교하는 통감과 대조의 방식을 넘어서, 인민 속에서 새로운 생성이 도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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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