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당케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오딧세이적 주체, 오이디푸스적 주체, 사드적 주체: 영화 ‘아가씨’와 주체의 담론들 [나인당케의 단상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상이한 형태의 주체들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들의 관계의 형태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 관계들이 전복되며, 하나의 주체가 다른 형태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즉 주체의 고양 과정 역시 보여준다. 즉 영화 곳곳에는 주체의 위치변경과 고양을 암시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씨>는 한 편의 성장드라마이자, 계몽주의 시기에 연원을 두고 있는 ‘교양(Bildung)소설’의 현대적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주체의 고양의 귀결이 주인공이 속한 하나의 세계(한 평생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집)의 붕괴와 성공한 탈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극대화된다.

 

여러 가지로 <아가씨>의 전편과 같은 느낌을 주는 <친절한 금자씨> 역시 이러한 주체의 고양을 화두로 던진다. 그런데 금자의 변신이 배신과 감옥생활 속에서 얻은 스스로의 깨우침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복수라는 달성해야 할 분명한 목적에 의한 것이라면, <아가씨>에서 두 여성의 각성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즉, 주체의 각성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물음은 주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물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은 금자가 자신의 딸 앞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즉 내러티브의 결과로 도달한 지점이다. 그러나 <아가씨>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전도가 그 자체로 사건을 촉발시킨다.

 

이 점은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물로 대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소통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고찰 속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해 보자. 오딧세이적 계략의 두 주체는 어떻게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하는가?

 

오딧세이적 주체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신화 속 오딧세이의 모험과 귀향 과정을 “주체의 근원사”로 파악하여, 그 안에서 근대적 주체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 중에서도 아도르노가 작성한 오딧세우스에 대한 보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목적(이타카로의 귀향)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지략을 도구적 합리성으로 사용하는 근대적 부르주아 주체의 원형이다.

 

02691_D잘 알려진 시레네의 노랫소리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오딧세우스는 부하 병사들이 시레네의 유혹을 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은 뒤 자신은 배의 돗대에 몸을 묶어 이 유혹을 통과한다. 키르케의 유혹과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과정에서도 오딧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한다. 자신의 지략을 통해 상대를 물리치고 목적을 달성하는 주체의 모습 속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부르주아적 차가움(bürgerliche Kälte)”의 원형을 발견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근대적 주체의 유아론적인 태도 속에는 먹잇감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려는 맹수의 냉혹함이 내포해 있다. 이타카에 도달한 오딧세우스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던 구혼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물론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이 과정을 모험담이자 영웅담으로 미화한다. 부르주아적 주체의 영웅담을 ‘기업가 신화’로 포장해 미화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눈에 간계를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근대 부르주아 주체의 냉혹함의 원형일 뿐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모두 이루고 싶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상대를 희생시키려는 계략의 주체였다. 숙희는 히데코를 백작과 결혼시킨 뒤 정신병원에 보내 그녀의 재산 중 일부를 가로채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목표가 있었다. 히데코는 거꾸로, 그러한 숙희를 속여 자기 대신 병원에 가두고, 자신은 숙희의 이름을 빌려 이모부 코우즈키의 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했다. 둘은 모두 백작이라는 고리의 매듭과 공모하여 서로를 희생시키고자 했던 오딧세우스적 계략의 주체들이었던 것이다.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하도록 앞장서는 숙희의 모습과, 숙희의 어리숙함을 확인한 뒤 안도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그러한 계산적 주체의 냉혹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략적 태도의 반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아가씨와 하녀. 서로 양 극을 이루는 두 주체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찍 부모를 잃고 외톨이로 살아가는 히데코를 씻기고 입혀서 아름다운 공주로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낀 숙희는 히데코의 어머니가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히데코에게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소문난 미인이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난 엄마만 못하다는데…’ 하고 하소연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전설적인 소매치기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소문으로만 기억하는 숙희 자신의 모습의 투영이다. 모든 지각은 투사 과정이라고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말한다. 히데코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숙희의 마음은 그러나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동일성원칙의 주체와는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는 미메시스적 주체의 모습에 가깝다.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봐’라는 히데코에 말에 ‘어머니는 아가씨에게 널 낳고 죽으니 괜찮다고 하실 거에요’라고 말해주는 숙희. 이 말은 그 자신이 여두목에게 직접 들은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말로 상대를 위로하는 숙희와, 그러한 위로의 말로 상처를 달래는 히데코의 동병상련은 이 두 주체가 서로를 희생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느끼는 계기가 된다. ‘넌 내가 불쌍하니? 난 네가 불쌍해’ 하고 자살을 시도하던 히데코는 말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연민하는 관계는 불행하다. 그러한 관계는 연민하는 자와 연민을 받는 자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각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이뤄지는 아픔의 공유는 둘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든다. 연대는 그러한 수평적 관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두 주체는 이제 여성적 연대를 이룬다. 계략을 통한 주체에서 연대하는 주체로 고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대의 계기는 상대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공감이다. 그러나 두 주체의 관계는 공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두 여성은 자신들이 각기 다른 남성적 주체들 – 이모부와 백작 – 의 또 다른 희생물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이제 이 상호 연대는 또 다른 주체들에 대한 대항의 관계로 전화된다. 고통받는 자들의 연대는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다른 주체들의 지배에 대한 거부의 원천이다. 이 또 다른 주체들, 그들은 극도의 거세컴플렉스를 지배본능으로 전화시킨 남성들이다.

 

오이디푸스적 주체

 

IngresOdipusAndSphinx잘 잘려져 있듯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유아가 겪는 최초의 성애가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근친적인 성격을 가지며, 아이는 어머니를 소유한 아버지의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 위협을 느끼고, 이 관계를 내면화함으로써, 즉 아버지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오이디푸스기를 극복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그의 근원적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다는 결여감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내면화된 아버지의 권위(초자아Überich)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이드Es)을 희생시켜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이디푸스를 극복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남자 아이는 처음에는 여자들도 자신과 같은 남근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다른 여자아이의 성기에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아이는 자신의 남근도 거세될 수 있다는 공포를 겪는다. 아버지의 지배질서는 이러한 거세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체험된다. 이는 아이가 그토록 쉽게 원초적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규범을 받아들이는 이유로 설명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동시에 거세위협을 겪는 주체이며, 그러한 위협 앞에 자신을 희생시킨 주체다. 이 위협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아이는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즉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다면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속에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게 된다. 남성적 리비도가 지배본능과 결합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여자 아이는 자신에게는 없는 남근을 남자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뒤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세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남근선망에 빠진다. 즉 남자가 되고 싶고, 남근을 갖고 싶다는 불가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여아는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자각한다. 이는 여자 아이가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나는 이유로 설명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신경증의 발병은 이 두 콤플렉스, 즉 거세콤플렉스와 남근선망의 극복과 관련되어 있다.

 

왼 손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오른 손에도 구멍이 뚫리는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고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순간 백작의 입에서 발화된 말은 “자지를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실제로 히데코의 이모부가 그의 성기를 거세시키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남근을 지키고 죽는 것이 다행이라는 그의 말 속에서 백작은 극단적인 거세콤플렉스를 겪는 오이디푸스적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의 이전작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혀를 희생시킴으로써 남근을 지킨 인물이다. 누나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이유진이 그에게 ‘이유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자신의 누나를 (상상) 임신시켰다고 분개하자, 오대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스스로 절단한다. 이처럼 누나를 임신시킨 ‘상징적’ 남근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제적 남근을 지킬 수 있었고, 딸인 미도와의 근친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작과 오대수는 모두 남근을 지키려는 남성 주체들의 거세공포를 재현한다.

 

백작의 거세공포는 거꾸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남근이 갖는 ‘권위’에 집착하게 만든다. 숙희를 협박할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성기에 강제로 접촉시킨다. 이것은 자신의 말에 ‘남근’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근에 맹세하건데’ 나의 말은 장난이 아니라는 위협이다. 그는 여성의 남근선망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숙희는 그의 위협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X대가리’를 치우라고 함으로써 이 남근의 권위를 조롱해버린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 역시 남근의 형상을 자신의 권위의 지표로 삼는다. 남근의 권위를 상징하는 뱀의 형상은 넘어서는 안 될 금기를 지시한다. 이 비밀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 도망쳐서도 안 된다. 뱀 조각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지칭한다. 뱀은 그의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음란한 독서회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히데코와 함께 도주하는 날, 숙희는 히데코가 강제로 낭독해야 했던 책들을 내다버리고 이 뱀 조각을 잘라버린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들이 만들어 놓은 남근의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남근선망은 없다’는 것을 반항적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두 여성은 남성의 고환을 상징하는 방울들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유희를 나눈다. 권위와 금기를 상징했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남근은 이제 남성들의 질서에서 벗어난 두 여성들의 유희의 대상이 된다. 남근은 선망의 대상이기를 중단하고, 그 권위적 역할은 상대화되며 가치저하된다. 이제 두 여성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를 극복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거듭난다. 오이디푸스의 (누이이자) 딸인 안티고네는 테베의 새로운 왕 크레온이 내린 금기, 즉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도, 장례를 치러주지도 말라는 명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매장한다. 지배자의 금기를 어긴 안티고네의 행위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이항대립이라는 사고를 낳았다. 인간의 법은 죽은 자에 대한 원한으로 그의 시신 매장을 금지했지만, 신이 내린 법은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실정법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계명을 뜻한다.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는 죽음을 자초한다. 히데코와 숙희는 남근의 권위가 부여하는 법을 어김으로써 신의 법을 실행에 옮긴 안티고네의 후예들임을 드러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귀족 집안의 상속녀 히데코의 삶을 망치는 것은 동시에 그녀를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좁은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남근이 부여한 금기와 질서에 순응해 왔던 삶을 붕괴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붕괴는 기존의 주체가 새로운 주체로, 즉 자기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주체로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한한 욕망을 즐기는 사드적 주체 말이다.

 

사드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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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즈키의 비밀 장서관에서 열리는 낭독회에서는 사드를 흉내낸 일본인 작가의 포르노 소설이 낭독된다. 코우즈키는 실제로 사드의 <소돔 120일>에 등장하는 사악한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욕정을 실행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살인을 하고 음모를 벌는 사드의 인물들과, 아내를 버리고 새로 맞은 일본인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조카를 자신의 욕망에 동원하는, 그리고 관음증적인 성적 도착에 탐닉하는 코우즈키는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얻으려 하는, 악덕의 관능을 예찬하는 사드적 인물이다. 그의 대저택과 비밀장서관은 <소돔 120일>에서 6개월 간 향락과 폭력의 잔치가 벌어진 블랑지스 공장의 대저택을 연상시킨다.

 

<소돔 120일>은 사드가 12년간의 감옥 생활중 쓴 책으로, 이 책에서 묘사된 악덕과 폭력, 광기, 온갖 종류의 도착적 성행위들은 악덕을 지지하고 도덕에 분개했던 작가 사드의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아 그가 풀려난 뒤, 그는 좀 더 절제되고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는다. 그의 성과 정치에 대한 관점이 집약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규방철학>에서 사드는 프랑스혁명이 몰고 온 악습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작업이 일상을 구속하는 구 시대의 성도덕에 대한 폐지와 해방으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생땅쥬 부인의 별장 규방에서 벌어지는 향락은 이제 새로운 시대 리베르탱이 지녀야 할 철학적 입장을 배우고 그것을 몸소 구현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을 맡는다. 구 시대가 강요하는 성도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라는 돌망세와 쌩땅쥬 부인의 가르침은 새 시대의 리베르탱들에게 전달하는 사드의 호소였다. “한 마디로, 성교하고 성교해라. 바로 그것이 네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네가 가진 힘과 의지 말고는 네 쾌락에 구속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 시대의 도덕은 성과 욕망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욕망이 제기하는 충동과 그 흐름이 곧 도덕이 되는 것이다. 이 도덕은 인간이 종교의 허울을 쓰고 만들어낸 관습이 아니다. 새로운 도덕, 즉 향유하라는 도덕은 자연이 우리에게 욕망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현할 신체적 에너지를 줌으로써 명령한 우리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즉 자연이 부여한 목적이 바로 입법의 원리가 된다.

 

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히데코는 <규방철학>에서 모친의 강요로 수녀원에 가야 했던 소녀 으제니를 닮아 있다. 돌망세와 생땅쥬 부인의 교육을 받는 학생 으제니는 넘쳐나는 호기심과 놀라운 습득력으로 그들의 스승들을 들뜨게 만든다. 히데코는 숙희의 제자가 되어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법을,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에게 내맡기고 탈주를 실행하는 히데코는 자신의 충동 외에 그 어떤 도덕적 규칙에도 순응하지 말라는 사드의 계명에 충실한 사드적 주체다. 즉 <아가씨>에는 두 가지 사드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는 <소돔 120일>의 사드적 주체인 코우즈키이고, 다른 하나는 <규방철학>의 사드적 주체인 히데코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사드적 주체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드는 도덕적 판단에 무관심했던 인물이고, 누가 ‘진정한’ 주체냐는 식의 물음에는 하품을 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어떤 욕망의 주체를 긍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오딧세이적 계략의 주체에서 연대하는 미메시스적 주체로, 오이디푸스적 남근선망을 거부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으제니의 모범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드적 주체에 도달한 어떤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주체의 담론에 대한 영화로 이해될 수 있다.

 

2016. 08. 08. [나인당케의 단상들]

단상1

우리 시대는 ‘신념에 가득 찬 투사’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닐 것이다. ‘신념’에 가득 찬 투사는 결국은 자신의 신념의 노예가 되어 아주 쉽게 근본주의자가 되곤 한다. 다른 한 편, 우리 시대에 ‘투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도처에서 우리는 여전히 투사들을 보고 있다. 오늘날 투사가 없다는 식의 푸념은 현실을 보지 않는 자세이거나, ‘내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투사가 아니야’라는 식의 자기위안인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다만 이해하는 것이다.

단상 2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밤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많은 수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태도인지 모른다. 이것은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과 확신은 상대주의와 동전의 앞 뒷면이다. 진리는 열려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오히려 진리에 대한 열정을 요구한다.

단상 3

오늘은 제2롯데월드에 처음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그 드높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본은 우뚝 솟은 거대한 남근의 형상을 하고 낮은 곳에 사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우러러보라고 요구한다. (벤야민의 말투를 한 번 따라해보자면: 하늘을 향해 지어진 성경 속의 바벨탑이 무너진 뒤, 인간은 공통의 언어를 상실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서울의 바벨탑은 그 자체로 현대인들의 소통불가능성을 알레고리적으로 체현한다.) 나는 그 모습에 분노스러웠지만, 5층의 전망 좋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는 길에는 잠실대로 인근에 아무 곳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경찰과 구청의 행정처리에 감격하며 또 분노했다. 저 거대하게 솟은 남근과 자본의 지배 앞에서 나는 고작 담배 한 개피를 어디서 피워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사회는 이렇게 개인을 통제하는가. 그물처럼 조직화된 ‘관리되는 사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단상 4

독일에서 귀국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밤에 제 시간에 잠이 든 적이 없다. 늘 피곤하면서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새벽이 깊어서야 잠이 드는데, 타지에서도, 고향에서도 언제나 아늑함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하는 삶이 우습게 느껴진다. 루카치가 100년 전에 기가 막힌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선험적 고향상실을 경험한다는 것. 즉 고향상실은 경험에 앞서서, 구체적 경험을 근거짓는다는 것.

단상 5

다시,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진리란 허공 어디엔가가 아니라 이러한 일그러진 삶의 미시적 형태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지 말고 이해하라. 그래야 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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