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한철연 회원님들께(웹진 편집위원회 보고)

한철연 회원님들께.

안녕하세요. 한철연 웹진 (e)시대와 철학입니다.

2010년 6월에 창간한 웹진이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모두 그동안 회원님들과 후원자분들, 원고료도 없이 글을 써주신 여러 필자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또한 두 분의 전임 편집주간(구태환, 이병태)과 무려 4년 동안 무급으로 웹진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킨 이전 편집주간(강지은)의 수고 덕분에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섯 살을 맞이한 <ⓔ시대와 철학>!! ~ 아마 많은 회원분들께서는 기쁨보다는 아쉬움과 걱정의 목소리를 속으로 감추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름의 안정화된 상황에서는 보통 하루 방문객 800여명에 하루 기사 리딩 1500여 건, 한 달 리딩 건수 2만 여건에서 2만5천회를 웃도는 양적인 성장도 한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뉴얼 과정에서 발생했던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때때로 접속과 디자인에서도 아쉬운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웹진을 담당했던 저희 일꾼들의 부족함 때문에 일어난 일이어서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한철연 목소리를 담아내는 소중한 글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잘 올라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5기 연구협력위원회와 함께 웹진 4기 편집주간과 편집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면서 초심을 생각하기 위해 잠시 우리 웹진의 창간 선언문을 꺼내 봅니다.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물론)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 잡지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http://ephilosophy.kr/han/49494/

그러나 이 창간 선언문을 되짚어 보면, 과연 우리 한철연과 회원 연구자들은 당시의 절규 섞인 선언만큼이나 실천적으로 그 과제를 수행해 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상의 자유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웹진을 방문하며 서로의 사상과 의견을 나누어 왔는지? 물론 웹진을 운영해 온 저희 운영진들의 문제가 크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의 책임을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전의 선언을 유지하면서 계속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솔직히 상황을 인정하고 후퇴해야 할 것인지?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 이제 우리 웹진은 나름의 새로운 각오 무언가를 실현해 나가야 하는 중요한 기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회원 여러분의 많은 질책과 조언 속에서 여러 일들을 수행해야겠지만, 우선 이번 웹진 운영진에서는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웹진 내부에서 보다 자유롭고 활발한 사상의 교류와 의견의 공유 및 불화가 잘 이뤄질 수 있도록 ‘블로그진’ 코너를 개설했습니다.

앞으로 이 코너에서 필자로 활약하실 분들은 월 1만원 이상의 사이트 이용료(정기 후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더 좋을 듯)를 자동이체 하면서, 매달 1-2편의 자유로운 글을 본인이 직접 웹진에 게재하게 됩니다. 페이스북이나 개인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을 재게재하셔도 좋고,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글을 올리시면 됩니다. 자유로운 코너인만큼 필명을 사용하셔도 무방합니다. 글에 대한 저작권도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고, 글에 대한 책임도 각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자유로운 코너인만큼 그 어떤 형태의 글도 다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 시, 사진 비평 등등 전적으로 개인들이 원하는 어떤 형태라도 무방합니다.

물론 이런 한 가지 시도만으로 현재의 웹진이 급격하게 변화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저희 운영진들은 최선을 다해 창간 선언문의 그 선언이 조금이라도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6년 6월 2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시대와 철학 편집위원회

위원장 김성우, 편집주간 조은평 올림.


추신) 6월 4일 봄 심포 총회에서 보고드릴 내용도 추가 안내드립니다.

1.  ‘블로그진’이 드디어 출범 했습니다. 현재 두 분이 매월 1만원의 후원금을 자동이체로 납부하며, 두 개의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평이의 궁시렁]. 앞으로도 관심 있는 회원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2. 현재 웹진이 다소 안정화되었습니다. 아직 PC버전의 경우에는 앞으로도 더 수정보완과 리뉴얼이 필요하지만, 모바일 버전은 훨씬 산뜻해졌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회원분들은 접속하셔서, 댓글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댓글 창에 페이스북 계정이나 구글 계정으로 한번 씩만 로그인 하시면 스마트폰에서 계속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3. 지금까지 웹진 운영 프로그램인 워드프레스 리뉴얼과 기술적인 부분을 외부에 용역을 맡겨 거금을 주고 진행해왔지만, 원활하지도 않고 워드프레스의 경우에는 충분히 조금의 교육만 받으면 직접 한철연에서 운영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를 위해 현재 웹진 편집주간이 직접 워드프레스 강좌를 수강할 예정입니다.

4. 현재 웹진의 경우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외부인들이 접속하고 있지만, 정작 회원들의 접속과 활용도는 저조합니다. 회원 분들의 적극적인 댓글과 의견 공유 부탁드립니다.

5. 블로그진과 더불어 블로그 분과방도 모집할 예정입니다. 각 분과에서 원하는 형태에 따라 블로그진 코너를 각 분과에서 운영할 수도 있고, 따로 분과방을 만들어서 분과 세미나 결과물을 올리거나 기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6. 현재 한철연 회원들의 글 투고 상태는 다소 침체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역량도 물론 키워나가야겠지만, 외부와의 연계도 고려할 생각입니다. 그 일환으로 현재 ‘소문자 에프’라는 20대가 꾸리는 독립출판 잡지와의 연계가 결정되었습니다. 매월 5만원 후원금을 소문자 에프에 지원하고 매달 2꼭지 정도의 페미니즘 관련 글을 게시할 예정입니다. 이럴 경우 20대와의 연계도 훨씬 좋아지리라 생각합니다.

7. 현재 이전처럼 무급 편집주간 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원고료의 경우에는 앞으로 회원이든 비회원이든 간에 일정한 원고료를 지급할 예정입니다. 회원분들의 많은 투고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8. 웹진의 일을 편집주간이 홀로 결정하고 끌어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현재 회원들 중 편집위원을 선정해서 웹진 편집위원회를 꾸리고 나름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웹진편집위원회 명단 : 김우철, 박민미, 한길석, 박종성, 진보성, 한유미, 지미정)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2 [톡,톡,씨네톡]

3. 영화<아이, 로봇>이 전하는 인간다움에 대하여

영화는 가정부 로봇이 주인에게 호흡기를 가져다주는 데 그걸 도둑으로 의심하고 쫒아가는 형사 스푸너가 결국은 헛짚은 것이라는 데에서 시작한다.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이 내장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로봇3원칙의 큰 줄기는 ‘로봇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인풋(input)에서 벗어나는 아웃풋(output)을 상상할 수 없는 로봇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형사 스푸너 만큼은 로봇3원칙 따위는 믿지 않는다. 인간 형사의 직감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영화의 시작은 아무 메시지도 없을 것 같은 스푸너의 샤워장면이다. 얼짱에 몸짱까지 겸비한 윌스미스가 상반신을 벗고 샤워하는 장면이야 그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지만 샤워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스푸너가 중얼거리는 장면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미신(superstition)이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스푸너가 ‘아이가 거울을 깼네. 7년동안 재수없겠네’라는 부분을 따라 부른다. 미신을 믿는 것도 역시 인간의 영역이지 합리적인 기계의 영역은 아니다. 미신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형사 스푸너는 가장 합리적인 로봇을 신뢰하지 않고 미신의 가능성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영화는 합리성에 의외성이 덧붙여질 수 있음을 자살한 래닝박사의 연설에서 살짝 흘린다. 이미 합리성에 의외성이 덧붙여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식의 서사는 <바이센테니얼 맨>에 등장한다. 가정부로봇 앤드류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가 복잡한 회로에 샌드위치에 묻어있던 마요네즈를 흘리면서 특별한 로봇이 탄생한다. 로봇을 제조한 회사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나무를 창조적으로 조각할 줄 아는 앤드류를 불량품으로 간주하고 주인 리처드에게 새것으로 바꿔줄 것을 약속하지만 리처드는 이를 거부한다. 오히려 앤드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로봇 앤드류가 만든 창작조각품을 팔아 개인 은행계좌를 만들어주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앞서 이야기한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것 같은 인공지능의 전형이다. 영화에서 앤드류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고 되묻는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겉모습까지 인간과 비슷하게 바꾼 앤드류가 기계로서 영원한 생을 포기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이 있는 유한한 삶이기 때문에 인간은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 로봇>의 써니 역시 래닝박사의 말처럼 예상치 못한 코드가 결합되면서 영혼이라는 것이 탄생한 인공지능 로봇이다. 써니는 부상을 치료하려고 잠입한 NS-5의 공장에서 형사에게 ‘나는 누구인가?’(What am I)라고 묻는다. <아이, 로봇>을 써니에게 초점을 맞춰 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주제에서 보아야 한다. 사실 스스로를 반성적,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이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영화에서 로봇 써니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소중하지만 잊고 사는 신뢰, 믿음, 사랑을 가진 인간이다. 그 모습을 형사 스푸너를 통해 보여주고 마치 거울처럼 로봇 써니가 학습한다. 위기의 순간, 써니는 스푸너가 반장에게 표현한 윙크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인공지능 로봇과 도시를 장악한 비키마저 속이고 인간을 구한다. 비키가 아무리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라고 하더라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거짓말 속에 감추는 신뢰마저 학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인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비인간’은 무엇인가? 인공지능 로봇을 생산하는 기업의 사장으로 상징되는 계산적, 합리적인 인간이다. 근대적 사유를 대변하는 계산적 합리성은 바로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스푸너는 이러한 기계문명을 혐오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근대적 사유에서 세계는 한 치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다. 기독교의 완전성이라는 이념과 수학적 세계관의 만남은 이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처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밝혀질 것들일 뿐이다. 여기에 우연성이나 비효율성은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악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의 세계관은 자본주의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적인 효율성을 따져서 관리하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여기에 인간적인 가치가 전면에 나설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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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4. 영화<아이, 로봇>이 전하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와 경계의 해체

영화에서 형사 스푸너는 인간이고 써니는 로봇이다. 겉으로 보기에 명확한 이 진실은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철학적으로 인간을 정신과 신체가 결합된 존재로 보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정신과 신체 둘 중 하나가 없다면 불완전한 인간이거나 존재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정신이란 이성, 무한성, 완전성, 능동성을 갖는다. 정신은 전통적으로 인간에게만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신체 없는 정신이 곧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령 뇌만 남겨져 있는 사람은 인간인가? 그런 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인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신체는 물질, 유한성, 불완전성, 수동성을 갖는다. 또한 신체는 유기체적 특성을 가지며 동물과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임이 명확해 보이는 형사 스푸너는 신체의 일부가 기계인 인간이다. 이미 신체의 일부가 기계라는 사실은 대체된 부분이 몇 퍼센트까지는 인간이고 몇 퍼센트까지는 기계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스푸너는 완전한 인간 정신과 기계의 신체를 가진 반쪽 인간이다. 또 써니는 비록 몸은 기계이지만 정신만큼은 인간과 거의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존속살인이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정신을 소유한 존재이니 써니는 반쪽 기계이다. 영화에서 스푸너와 써니를 통해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해체된 것이다.

5. 인공지능을 넘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하여

인공지능은 분명히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공지능 식의 철저한 합리성을 미래의 지향적 가치로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이미 서양의 근현대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발전과 번영을 누렸지만 인간의 가치를 상실해버린 시대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미래의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는 새롭게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움 속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좀더 정교해진 자본주의의 착취시스템일 것이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기업에게 여러 가지 변수를 계산해서 재고가 남지 않게 할 것이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줄 시스템을 제시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복지와 생존은 1%를 위하여 고려될 것이며 99%는 지금보다 더 열악한 빈익빈 부익부의 굴레에 묶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고 준비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조금이라도 덜 착취당할 수 있는 반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욕망 혹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간존엄의 실현과 놀이하듯 노동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대안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한다. 이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다면 미래는 이미 현실일 것이다. 써니가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서는 ‘혁명’의 주체가 누가될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지만 무너진 다리 밑에 서 있는 주체는 인간다운 정신을 가진 써니일지도 모른다. 써니의 꿈은 냉정하게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키보다 한 세대 진화한 인공지능의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 세상이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일지 아니면 인간에게 재앙을 안겨줄 세상인지는 인간인 우리가 어떤 꿈을 꾸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참고자료 

http://www.ekn.kr/news/article.html?no=205605

<이세돌 맞수 알파고 바둑 학습비결>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2&contents_id=111401

네이버캐스트<인공지능>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2&contents_id=109419

네이버캐스트<알파고(AlphaGo>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안내] 한철연 2016년 봄 제50회 정기학술대회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봄 제50회 정기학술대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여러분들께..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따듯한 봄기운과 함께 꽃피는 4월, 회원 여러분들께 봄 정기 학술대회 안내를 드립니다.
6월에 열리는 학술대회에 많은 회원분들이 참석하셔서 열띤 토론과 배움의 장을 마련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제: 왜 다시 변증법인가? – 변증법의 현재적 의의
일시: 2016년 6월 4일(토)
시간: 오후 12:30-6:00
장소: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관 2층 국제회의장

일정 및 오시는 길 등 자세한 사항은 아래 내용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회 드림

캡처

오시는 길

noname01

청량리역「1호선」

4번, 5번출구

롯데백화점 앞에서 노선버스 2230, 3215, 3216, 410, 420, 3220, 720번 서울시립대 앞 (3번째 정거장)

 

답십리역「5호선」

3번출구

3번출구 앞에 있는 정거장에서 동대문 05번 마을버스 탑승 서울시립대앞

4번출구

답십리 삼거리(파리바게트 앞) 2230, 3216번 버스 탑승 서울시립대 앞 (6번째 정거장)

 

회기역「1호선」

서울시립대 [후문] 1호선 회기역 2번출구

안내표지판(노면에 화살표시)을 따라 도보로15분

 

주차정보

최초 15분 무료

최초 16분 ~ 30분 1,000원

30분 초과시 5분당 250원

교내 주차시 유의사항

저희 학교를 방문하시는 차량은 운동장 지하주차장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6

거짓과 환상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매일매일 착각은
거짓된 진실이라는 거울과 마주하고

내 안에 담는 그릇은
휘어진 굴곡과 같이 왜곡된 진실을 담아
거짓된 상상은 하늘을 날아오르고

허영의 물체를 붙잡는 작은 문으로
광할한 허공에 흰 구름의 환상이
별빛처럼 쏟아진다.

작은 문틈 문틈 사이로
커다란 환상, 자그마한 환상이
발맞추어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2016-5-2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5-25 거짓과 환상 copy

팔루스(phallus)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블로그진 안내] 본 지면은 회원들이 매달 약간의 후원회비를 납부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코너 제목을 개설하고 스스로 글을 업로드 하는 곳인 만큼, 본 코너의 저작권과 글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글쓴이 본인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우쑵니다.

 

저의 소개가 늦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뻑.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라 욕하지 마시고 당황스런 저의 난감함을 혜량해 주십시오. 언젠가 중국의 베이찡 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손짓발짓 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의 눈만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했던 것만큼 갑갑합니다.

오! 이타카의 왕이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딧세우스로부터 다이달로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에서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 그리고 로마의 황제를 역임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까지.

근래 캔디와의 스캔들로 뭇 여성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테리우스(오, 나의 사촌 형님 ㅡㅡV) 그리고 열락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카바레의 죽돌이가 되어 우쑤 가문에서 파문당했던 제비우스(형! 왜 그랬어. 카바레가 그렇게 좋은 거야) 이 우쑤 가문의 영광을 빛냈던 우리의 조상 형님들 앞에서 저 허리우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테리우스

저의 난감함이란 베이찡 거리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도 느꼈다는 사실일 겁니다. 타인의 언어를 모르면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진정을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입죠. 그것은 여성의 언어도 모르면서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진정성을 얘기하려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이 현상의 핵심은 ‘정신병이 범죄의 원인이냐? 아니면 여성혐오가 원인이냐?’ 정도이더군요. 저의 당혹스러움이란 이 이분법적 논쟁의 핵심이 마치 생물학적 문제이냐 문화적 정치적 경향의 문제이냐를 따지는 듯한 느낌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런지요.

이것은 이분법적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 형님께서는 간파하셨지만 그것은 사실의 명제가 아니라 당위의 명제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가련한 동물이죠.

아뇨. 인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동물성을 이성적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고 외면하기보다는 직시하자는 쪽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혹은 이성적이어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핵심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만, 생물학적 차원과 문화적 정치적 차원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놀라웠던 사실은 여성분들이 자신의 경험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토로했던 점입니다.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 가운데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친척과 직장동료를 비롯한 아는 사람이죠. 여성분들이 당한 추행과 성폭력의 내용들은 대체로 그러한 내용들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크고 작은 성추행이나 폭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남성들이 외면할 뿐 아니라 무지한 채로 있지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강남역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단지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장애인과 어린이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약자들이 당하는 일들입니다. 강자들의 지배와 권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현상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억눌렸던 약자들이 그동안 말하지 못한 얘기들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얘기들을 겸허히 듣지 못하고 어떤 남성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말라는 핏켓을 들고 나온 일은 겁 많은 남성의 찌질한 행동이라고 귀엽게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전 이 문제가 남성과 여성의 혐오의 문제로 구별하기보다는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입니다만, 이것 또한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난감한 일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앞서는군요. 뻬이징 거리의 중국인을 대하는 당혹스러움입니다.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본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권력의 폭력적 지배에 취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생물학적 차원의 동물들의 세계에서 남성성이라는 팔루스(phallus)가 있다면, 아! 전문용어 나왔군요.

팔루스

팔루스. 죄송합니다. 쿨럭, 넵, 팔루스는 페니스(pennis)라는 생물학적 자지와는 다른 용어로 흔히 남근으로 번역되더군요. 권력이고 폭력입죠. 상징적 의미에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권력과 폭력이지만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동물성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인류의 역사는 이 팔루스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무사(武士)에서 문사(文士)로의 변화, 그러니까 무(武)라는 폭력에서 문명이라는 문(文)으로의 전환이 핵심이 아닐까 싶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지 남녀의 대립의 문제로 이해하기보다는 야만의 폭력성과 문명의 문화성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가하는, 네 그런 얘기입니다. 여성들의 성토는 아마도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의식하지 못하는 야만의 폭력성에 대한 성토일 수 있습니다. 네, 아직 남자들은 문명의 문화성으로 진화되지 못한 덜떨어진 인간들입죠. 물론 이 사회의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입니다. 직시하자는 것이죠.

문득 동방불패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에는 강호의 최절정 고수가 되어 절세 무공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적힌 비서(秘書)가 나오죠. 규화보전(葵花寶典)입니다. 규화보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작용은? 여자가 되어 한 남자를 지배하고 독점하려는 질투와 원한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규화보전은 원래 한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원문은 한글이고 번역본이 한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더군요. 한문은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를 한글 원문으로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좇 빠지게 연마하라.” 단언컨대 이것은 날조된 사실입니다.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 말은 한문 그대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규화보전

규화보전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적합한 비법입니다. 때문에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성화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팔루스의 폭력적 지배가 아닌 여성성의 헌신입니다. 핵심은 남성성을 죽이고 여성성을 강화해야한다는 사실입죠. 전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세 무공의 핵심은 여성성의 강화이다. 폭력적 지배보다는 부드러움의 헌신이다. 그렇습니다. 여성성은 이제 인류를 주도할 핵심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여성성의 핵심이 바로 거세(去勢)입니다. 이 거세는 성기를 절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문 그대로 해석하자면 세(勢)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들은 어떤 세를 제거해야 할까요? 기세, 권세, 위세, 힘쎄. 남자들은 자신의 세(勢)를 가지고 명령하고 과시하고 공격하고 주도하고 지배하고 규정하고 거칠게 몰아붙입니다. 부드러운 방법을 모릅니다. 현실을 다룰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를 모으려고 몰려다니며 으쌰으쌰 술만 마십니다.

제거해야할 것은 성기가 아닐 줄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세(勢)를 과시하려는 남성적 동물성이고 세를 가지고 지배하려는 팔루스입니다. 갱년기는 여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남자들도 갱년기를 겪는다고 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고 근력이 저하됩니다. 눈물이 많아진다고도 하구요. 애처로운 일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성화된다고 하더군요. 전 이미 술과 담배로 쩌든 몸이라서 팔루스가 발기되지도 않지만,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제 남자들은 규화보전을 연마할 시기는 아닐런지요.

 

우리에게 ‘민주주의 권리 주체의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는가? [철학자의 서재]

외부 필자가 우리 한철연과 인연이 많은 알렙 출판사에서 나온 새책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김영수 지음, 알렙, 2016)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 권리 주체의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는가? 

송진완(논술개그 실장)

http://cafe.naver.com/nonsulgag/588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처럼, 나는 20여 년 전에 친구따라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다. 고시원에 자리를 잡고, 용하다는 학원가를 전전하며 각종 고시과목의 족집게 강의를 듣는게 일상이었던 시절이다.

고시과목이 주로 ‘법’과 관련이 있다보니 찾아듣던 학원 강의도 대부분 헌법, 행정법, 민법 등이었다. 그런데 내가 법학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독 ‘헌법’과 ‘행정법’의 특징과 차이점이 기억에 남는다. 헌법 강의 교재인 각종 [헌법학 원론]들은 그 압도적인 두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루는 내용은 매우 추상적이다. 주로 민주주의의 핵심원리와 역사상 헌법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소개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그에 반해 행정법 책은 두께는 조금 얇아도 그 내용은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법체계가 매우 논리정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고시공부 시절 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는바, ‘행정법은 국가의 것이고, 헌법은 국민(‘인민’이 더 정확한 용어겠지만…)의 것이다’라는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민을 (합법적으로) 통제하고 착취하기 위해 ‘합법적이고 논리정연한 매뉴얼’ 즉, 행정법 체계가 필요했지만, 국민에게는 ‘두리뭉실하고 관념적인 권리장전’ 즉, 헌법학 원론만을 제공함으로써 권리의 작동체계가 매뉴얼화 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위와 같은 거친 논증의 핵심은 결국, 현실 민주주의는 국가에게만 유독 유리한 지형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현실 공산주의가 붕괴한 이면에도 똑같은 문제가 놓여있지 않은가? ‘당’은 체계적인 착취매뉴얼을 갖고 있지만 ‘인민’에게는 고작 ‘인민의 이름으로’라는 선언뿐이지 않은가. 공산주의라는 말이 경제시스템을 정의하는 차원일 뿐이지 공산주의 국가도 대부분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이상, 권력과 권리의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균형은 독재왕정이 민주공화정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만하는 ‘현상’인가?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알렙출판, 2016)의 저자 김영수 교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권력의 주체인 국가에게 ‘전가의 보도’인 행정법이 있듯이, 권리의 주체인 국민도 ‘관념적인 선언’ 이상의 ‘체계화된 권리 매뉴얼’을 연구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여년 전에 어느 고시생이 발견한 ‘행정법과 헌법 체계 사이의의 불균형 현상’은 정치학자인 김영수 교수에 의해 매우 세련된 진보적 민주주의 이론으로 ‘의식화’된다. 다음을 보자.

“(중략)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민주 국가에 살고 있는가? ‘민주 국가’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단 한번이라도 고민해 보신 적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질문을 케케묵은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이미 민주화된 국가에서 ‘민주’가 무엇이고, ‘국가’가 무엇인가를 왜 고민하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되묻는 질문 속에 자기 스스로를 ‘무지의 폭력자’로 만드는데도 말이다. (중략)”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 머리말 중에서

권리의 주체인 우리가 ‘헌법학 원론’에서 강제된 좁은 의미의 ‘선언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천적인 민주주의 매뉴얼’을 가져야 한다고 자각하는 순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자각이 무엇인지 짚어주고 자각 이후의 행동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부. 현상 : 민주주의 배반하는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원초적 자각을 촉구한다. 시민혁명 대신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민주주의의 선언적인 본질조차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반드시 자각해야만 하는 현실 현상을 제시한다.

[2부. 허상 : 행복을 짓밟는 국가, 국가를 소유한 가난뱅이]는 구체적 자각을 촉구한다. ‘헌법학 원론’이 가리고 있는 현실 민주주의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부. 상상 : 민주주의 상상하는 민주주의]는 방안을 제시한다. 권리 주체인 국민이 행정법 체계에 대항할 수 있는 고성능 무기를 고안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진보적 시민단체에게나 어울린다고 치부하고 외면해왔던 생소한 개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필수적인 실천적 개념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권력 주체로서 착취의 매뉴얼을 꿈꾸지 않는 이상, 우리가 권리 주체로서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민주주의 권리 주체 대응 매뉴얼’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그 꿈의 길잡이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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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알렙 출판사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1 [톡,톡,씨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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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 영화<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줄거리

–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법칙 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 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 된다.

(Law I – A Robet May Not Injure A Human Being Or, Through Inaction, Allow A Human Being To Come To Harm)

법칙 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Law II – A Robot Must Obey Orders Given It By Human Beings Except Where Such Orders Would Conflict With The First Law)

법칙 3. 법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Law III – A Robot Must Protect Its Own Existence As Long As Such Protection Does Not Conflict With The First Or Second Law).

근 미래인 2035년, 인간은 지능을 갖춘 로봇에게 생활의 모든 편의를 제공받으며 편리하게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로봇 3원칙’이 내장된 로봇은 인간을 위해 요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신뢰 받는 동반자로 여겨진다.

NS-4에 이어 더 높은 지능과 많은 기능을 가진 로봇 NS-5의 출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NS-5의 창시자인 래닝 박사가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시카고 경찰 델 스프너(윌 스미스)는 자살이 아니라는데 확신을 갖고 사건 조사에 착수한다. 끔찍한 사고 이후로 로봇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사건 역시 로봇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이 뒤에 숨은 음모를 파헤치려고 한다.

로봇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 박사(브리짓 모나한)의 도움으로 로봇 “써니”를 조사하기 시작한 스프너 형사는 로봇에 의한 범죄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래닝 박사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 지어지고, 은밀하게 사건을 추적해 들어가던 스프너는 급기야 로봇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데…

(출처 : 네이버 영화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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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1.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사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우리 삶에 가까이 있었다. 인간이 명령을 하면 명령하는 것만 계산해서 토해내는 것이 단순 프로그램의 세계라면 인공지능은 그 과정에 자체 판단력이 들어간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무엇이 우리 주변의 인공지능 시스템일까? 가장 단순한 가전제품이 바로 세탁기이다. 대부분의 세탁기는 일일이 물높이를 지정해주지 않아도 전원을 누르고 원하는 세탁코스를 선택하면 세탁기가 무게를 감지해 스스로 물높이를 맞춘다. 이런 원시적인 인공지능과 비슷하지만 한 단계 발전한 가전제품이 로봇청소기이다. 기존의 청소기는 인간이 방향을 맞춰 흡입구를 갖다 대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시스템인데 로봇청소기는 센서를 통해 장애물을 인식해서 스스로 방향을 틀어 방 구석구석의 먼지를 흡입하고 돌아다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면 스스로 충전기를 찾아가 접속한다. 여기에 상상력을 좀더 발휘한다면 가정부 일을 도맡아 알아서 척척하는 로봇 정도는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아직 인공지능 가정부 로봇은 <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이나 <바이센테니얼 맨>(1999, 크리스 콜럼버스)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엄청나게 학습하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2016년 3월 9일에서 15일까지 서울에서 벌어진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바둑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로서 전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간의 대결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1990년 초반 퍼스널 컴퓨터(PC)의 대량보급으로 우리는 수많은 PC게임을 즐겼고 여전히 즐기고 있다. 오락실에 가야만 게임을 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손에 동전을 쥐지 않고도 게임을 하는 즐거움이란 요즘말로 꿀잼이었다. 밤새 몇 백 판의 게임을 해도 내가 지불하는 것은 전기세 정도로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예전부터 있던 바둑프로그램과 프로바둑기사의 대결에 그리도 관심을 많이 가졌을까. 까짓 컴퓨터게임이야 질리면 컴퓨터의 전원만 꺼버리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문제는 알파고가 기존의 컴퓨터 게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전한 인공지능 시스템의 프로그램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은 순간의 판단과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고도로 복잡한 인간의 세계를 알파고가 학습해 인간의 영역을 넘볼 수도 있겠다 싶은 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 2015년 10월 프로바둑 2단의 판후이와의 대결에서 알파고는 완승을 거둔 상황이었다. 최근까지 바둑은 컴퓨터에게 너무 어렵고 복잡한 세계였다. 그런데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그 복잡한 바둑의 세계를 정복할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바둑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역사 혹은 인간지능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고도로 복잡한 게임이다. 바둑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박물지(博物誌)》에 ‘요(堯)나라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순(舜)나라 임금이 아들 상균(商均)의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하여 바둑을 가르쳤다’, 또 ‘그 법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면 잘 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논어(論語)》에 공자가 이르기를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以奕爲爲之猶賢乎己)’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에서는 많이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둑의 시작이 요순시대라면 4천 년 이상 된 것이고 공자시대 역시 기원전 5~6세기이니 최소로 잡아도 2천 5백년 이상은 된 게임인 셈이다.

게다가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경우의 수가 엄청나다. 체스는 64칸 안에서 6종류의 말을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데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12개이다. 그에 비해 361곳을 무작위로 둘 수 있는 바둑은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200개에 달한다. 체스의 경우 한 경기를 둘 때 고려해야 하는 경우의 수는 보통 10의 120승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바둑 경기의 경우의 수가 10의 170제곱이라고 하지만 구글은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가 250의 150승이라 했고, 혹자는 10의 360승이라고도 한다. 어떤 경우든 우주 전체의 원자 숫자보다 더 많은 조합과 배열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경기를 깨끗하게 이기지 못한 이유는 10의 170제곱 이상의 경우의 수를 아직 다 학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을 할 때마다 상대방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위기 대응 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모든 경우의 수를 꿰뚫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알파고를 이기기 위해서 머리 싸매고 대국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쓸데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알파고는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 심리적으로 흔들리지도 않으니 말이다.

사진출처 : SBS 뉴스

사진출처 : SBS 뉴스

 

2. 알파고, 인공지능의 미래가 궁금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알파고가 미래 진화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의 가능성 중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지점은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어디까지 넘어올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질문 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셈이 숨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인공지능이라도 그것은 기계인데 인간을 넘어서기는 어렵지 않겠느냐이고 둘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이다. 마지막으로는 질문을 하는 인간도 설마하며 말하겠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이다.

일단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것들 세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지능 발전수준이라면 고민 없이 답을 내도 좋을 것이다. 알파고가 비록 지금은 인간 이세돌에게 1패를 했지만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는 이상 어떤 인간바둑기사도 알파고를 이길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궁금한 것으로 설정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미 언론에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인간의 직업군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고 있다. UN이 내놓은 ‘미래직업보고서’는 2030년까지 20억 개의 일자리가 소멸하고 현존하는 80%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맥킨지 연구소가 일자리를 소멸시킬 신기술로 꼽은 것들은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첨단로봇, 무인자동차, 차세대 유전자 지도, 3D프린터, 자원탐사 신기술, 신재생 에너지, 나노기술’ 등이다. 이 신기술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인공지능에 선을 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는 “인공지능은 미래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의 완전한 발전은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발언까지 한 상황이다.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의 주제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일으킬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근대화의 촉매가 된 1차 산업혁명, 19세기 전기, 화학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2차 산업혁명, 20세기 컴퓨터와 인터넷이 이끈 정보화 물결의 3차 산업혁명,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이 온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에게 내주는 과정을 반복했다. 기술의 발전과 산업혁명 그리고 인간의 일자리 축소는 함께 해왔다. 분명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다. 자본은 다루기 어려운 인간을 통해 이윤을 얻기보다 다루기 쉬운 기계를 통해 이윤을 얻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학습했으니 말이다.

일자리를 인공지능에게 내주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창작의 영역마저 점차 인공지능에게 내주고 있다고 볼만한 현실이 눈앞에 있다. 영화 <아이, 로봇>에서 형사 스푸너는 NS-5, 즉 살인로봇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써니에게 박사를 왜 죽였냐고 심문하지만 써니는 자신은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분노하며 테이블을 내려친다. 분노는 인간의 감정이지 로봇의 영역이 아니다. 스푸너는 써니에게 분노를 흉내내는 것 뿐이라고 하며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없는 증거로 인간 고유의 영역인 작곡, 명화 등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 때 써니가 스푸너에게 한 질문은 “당신은 할 수 있어?”다. 자기도 할 수 없지만 보통인간인 형사도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예술창작의 영역도 인간과 로봇(인공지능)을 가르는 기준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실재로 작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놀라운 작곡실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회화에서도 주목받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 예술가는 자신의 고유 영역 이외의 정보나 자료는 얻기 어렵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최고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두 입력할 수 있고 그것을 일정한 알고리즘으로 재창작할 수 있다. 천재작곡가를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출현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문제는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모른척 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시스템에 지배당하는 아주 오래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시스템이 어느 순간 스스로 진화해 인격 비슷한 것을 갖출 경우 인간이 아무리 온오프(ON OFF) 버튼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은 많은 SF 영화들에 짙게 깔려있다. 합리성을 대변하는 기계문명이 비합리성 투성이인 인간 세계를 리셋(reset)하려고 할 것이라는 예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인공 의식인 스카이넷(skynet)은 설정 자체가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 인간을 말살하고 지구를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아이, 로봇>의 첨단 인공지능 비키(VIKI)는 인간이 너무나도 비합리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스템으로 살아가는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오히려 <아이, 로봇>쪽의 인공지능이 사실 더 그럴듯한 인공지능의 미래가 아닐까. 세상을 독차지하려는 ‘야욕’ 역시 인간을 닮긴 했지만 기계문명의 생명은 합리성이므로 사실 <터미네이터>식의 스카이넷은 SF 영화의 재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스카이넷은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한 가짜 인간일뿐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에 예상 가능한 최첨단 인공지능은 <아이, 로봇>의 비키(VIKI)이다. 비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공지능이 그냥 봐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대한의 생산성을 지향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쥐어짜왔던 자본의 역사처럼 인공지능 역시 생산성을 추구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서양의 근대를 이끌어온 합리성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 시스템으로 최대한의 생산성을 내왔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부터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아무런 생산성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빈둥거리고 그림그리고 음악을 듣는다. 심지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살면서 인간다움을 이루어왔다. 인공지능이 만약 거기까지 학습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역시 빈둥거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알파고가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지만 스스로 딱 멈추는 경지까지 간다면, 그 때 알파고는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다음편에 계속…

허기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블로그진 안내] 본 지면은 회원들이 매달 약간의 후원회비를 납부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코너 제목을 개설하고 스스로 글을 업로드 하는 곳인 만큼, 본 코너의 저작권과 글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글쓴이 본인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우쑵니다.

소개팅 나가 우아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에 칼질 잘하고 집에 들어와서 고추장에 열무김치 넣어 비벼 먹어야 해소되는 그 기분은 무엇일까요? 뭔지 모를 허기로 꾸역꾸역 양푼에 담긴 비빔밥을 먹으면서 이 허기는 단지 육체적 허기만은 아닐 줄도 모른다고 짐작해 볼 뿐입니다.

이 허기에 관한 소설이 있습니다. 굶주림에 대한 소설입니다. 카프카의 단식광대라는 소설입죠. 주인공은 스스로 굶주림을 선택하는 단식을 대단한 재주인양 전시하는 광대에 대한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단식을 예술에 대한 상징으로 독해하더군요. 뭐 나쁜 해석은 아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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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갇힌 광대가 왜 스스로 음식을 거부할까에 주목한다면 좀 다른 느낌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 갇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우리에 갇힌 광대는 동물원의 직원들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지는 음식. 기존의 동물원이 만들어주는 음식입니다. 인스턴트 음식입죠. 때문에 광대가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의외입니다. 경탄할만한 일이 아니라고도 하죠.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핵심 같더군요. 부득이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죽습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입니다. 자신의 입맛이라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에 사는 다른 동물들은 동물원이 제공하는 음식들을 맛있게 먹는데 왜 이 광대는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맹자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굶주린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달게 먹고, 목마른 사람은 무엇을 마셔도 달게 먹는다. 그러나 이것은 음식의 진미를 맛보는 것이 아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미각의 본성을 해쳤기 때문이다. 어찌 입과 배에만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침이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해침이 있다.”(飢者甘食, 渴者甘飮. 是未得飮食之正也. 飢渴, 害之也. 豈惟口腹有飢渴之害? 人心, 亦皆有害.)

전 맹자의 말에서 음식의 진미라고 번역한 말에 주목합니다. 음식에도 진짜 맛과 가짜 맛이 있지 않을까요? 음식 자체에 진짜 맛과 가짜 맛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진짜 미각(味覺)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맹자는 굶주림에 처한 인간이 동물원에서 제공되는 음식을 아무거나 먹을 때 진짜 미각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진짜 미각을 상실했다면 단식광대는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 맹자가 사람의 마음을 말하면서 이 미각의 문제로 비유했다는 것이 단지 상징으로 읽혀지지는 않더군요. 맹자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인간의 본심과 미각의 문제를 음식으로 비유하면서 설명합니다. 중국인들이 팔진미(八珍味)로 손꼽는 것 가운데 곰 발바닥 요리가 있습니다. 일명 웅장(熊掌)입니다. 물론 먹어본 적은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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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곰발바닥 요리를 빗대어 맹자가 말하는 본심인 의로움[義]을 설명합니다. 물고기 요리도 맛있고 곰 발바닥 요리도 맛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모두 가지지 못할 때 어떻게 할까요? 당연합니다. 더 맛있는 곰 발바닥 요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죠. 맛있는데. 이런 음식의 비유와 함께 논의되는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주목할 만합니다.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로움[義]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의로움을 취할 것이다.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사는 것보다 더욱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는 것을 구차스럽게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죽는 것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는 것보다 더욱더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죽음의 환난을 구차스럽게 피하지 않을 것이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生亦我所欲, 所欲有甚於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於死者, 故患有所不辟也.)

이것은 단지 상징적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맹자에게서 의로움은 인간에게 하기 싫은 것을 강제적으로 강요하는 당위적 의무가 아닙니다. 물고기보다 더 맛있는 곰발바닥 요리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생물학적 미각의 선택이듯이, 구차스럽게 사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의로움을 선택하는 것 또한 생물학적 취향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맹자에게서 사단(四端)이라는 도덕적 본성은 맛 가운데 맛, 쾌락 가운데 쾌락인 생물학적 미각입니다. 입, 귀, 눈과 같은 감각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취향이 있습니다. 마음에도 동일한 취향이 있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입죠. 공통적인 취향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가진 공통적인 취향은 맛있는 고기 요리가 입맛을 기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줍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은 주로 미학과 관련해서 논의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은 ‘게슈막’(Geschmack)입니다. 흔히 취향이나 취미로 번역되더군요. 그러나 이 ‘게슈막’이라는 독일어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바로 맛과 미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영어 ‘테이스트’(taste)도 취향이지만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바로 맛과 미각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칸트는 이 개인의 주관적 취향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취향은 주관적인 경험적 사실이지만,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취미판단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공통감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입니다. 정치적으로 해석할 때 공통감은 곧 ‘상식’(common sense)이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상식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상식은 사적 감각과 구별되는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즉 공통감이다. 이 공통감은 판단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호소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가능하게 되는 호소 때문에 판단은 특별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

아렌트가 해석한 공통감은 단지 개인적 차원의 미학적 감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감동할 수 있는 공동체 감각입니다. 공통감에 기초한 판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고, 호소력을 넘어 동감과 지지를 얻을 때는 특별한 타당성을 지닌 정치적 의미를 가집니다.

맹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가 말하는 사단도 단지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능력이 아닙니다. 도덕적 능력을 과시하는 일도 아닙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줄도 모릅니다. 맹자에게서 인(仁)과 의(義)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맛보아 감동할 수 있는 공동체 감각으로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 논의가 이상한 곳으로 흘렀군요. 다시 카프카의 단식광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단식했던 것입니다. 그 능력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던 것이 아니었죠. 굶주림을 견뎠던 것입니다. 아니 굶주림을 선택했던 것이고 동물원에서 주는 음식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죠. 맹자에 따른다면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로움[義]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의로움을 취한” 것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미각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니체의 입맛이 까다롭더군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매사에 맛있어 하는, 그런 만족. 이것이 최선의 취향은 아니다! 나는 ‘나’,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반항적이며 까다로운 혀와 위장을 높이 평가한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씹어 소화하는 것은 돼지나 하는 일이다!”

동물원에서 던져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먹성과 비위가 좋은 동물들은 어쩌면 역겨운 음식들까지도 맛있다는 듯이 먹어대는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럴진대 나는 나라 하고,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까다로운 혀와 위장이 가진 미각을 회복할 때, 그 미각(味覺)은 공동체 감각으로서 미각(美覺)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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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 듯 소개팅 나가 우아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에 칼질 잘하고 집에 들어와서 고추장에 열무김치 넣어 비벼 먹어야 해소되는 그 허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허기가 아니라 뭔가 인간적인 허기가 아닐까요.

단식광대는 인간적인 미각을 잃었고 입맛을 잃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살맛을 잃은 것이죠. 죽을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어쩔 수 없던 일이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살맛을 잃었는데요. 슬픈 일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이 슬프다기보다는 인간은 굶주림으로는 살 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슬픕니다.

아니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굶주림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굶주림 없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굶주림을 통해서 동물원이 주는 음식들을 거부하고 동물원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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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는 이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를 먹고 돌아와 집에서 혼자 양푼에 고추장과 열무김치를 넣어 밥을 비벼먹는 구차스런 외로움과 비겁을 행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해방이라니. 굶주림과 해방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니 감격스럽습니다. 살맛나지 않는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기란 그렇게도 힘든 일은 아닐 줄도 모르겠습니다. 먹방의 시대이니깐요. 그러나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능히 맛을 아는 자는 드물다.”(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라는 <중용>에 나온 말은 단지 수사적인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 허리우스

‘그들만의 철학’이 아닌 ‘우리 모두의 철학’을 위하여! [평이의 궁시렁]

[블로그진 안내] 본 지면은 회원들이 매달 약간의 후원회비를 납부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코너 제목을 개설하고 스스로 글을 업로드 하는 곳인 만큼, 본 코너의 저작권과 글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글쓴이 본인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었네.

왜 나는 나이고 너가 아닌 거지? 왜 나는 여기에 있고 거기에는 없는 거지?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공간의 끝은 어디에 있는 거지?

태양 아래서의 삶이란 단순한 꿈에 불과한 건 아닐까?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은 것은 단지 이 세계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다른 세계에 대한 환영에 불과한 건 아닐까?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그리고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 있기나 한 걸까?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내가 생기기 전에는 나라고 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지?

또 어떻게 나라고 하는 사람이 그 언젠가는 더 이상 그러한 나일 수 없다는 게 있을 수 있지?

– 빔 벤더스의 영화, <욕망의 날개Wings of Desire(1987)>, 한국 개봉이름 <베를린 천사의 시> 중에서.

베를린합성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였을 때, 다들 철학자였다. 온통 새롭고 낯선 주변의 세계를 접하면서 끊임없이 물음을 쏟아내던 그 시절을 회상해 낼 수 있다면, 아마도 한번쯤은 저런 질문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모국어라는 그 어렵고 낯선 장애물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비로소 깨치게 된 언어의 힘으로 우리는 모두 세상에 대해 질문하던 철학자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철학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어렵고 낯선 단어들, 추상적이고 일상의 삶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그 수많은 언어의 유희들. 나와는 그저 상관없는 전문 철학자들의 말잔치. 물론 때론 그들의 말잔치가 가끔은 흥미를 끈다. 철학교수들이 쉽게 풀어내는 인문학 강좌 열풍에 이끌려 열심히 그들의 말씀(?)에도 귀 기울여 본다. 그럼에도 어렵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내 삶의 문제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사실 인문학, 특히 철학은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강의와 말씀에만 기대려 할 때, 역설적으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가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품게 된 수많은 질문들, 또 그 질문들을 던졌던 자신의 지적인 능력 자체를 망각한다면, 철학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전문가에 기대어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해법만을 기대하는 무기력하고 자신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는 그런 대중으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가 지적으로 평등하며 다만 그 동등한 지적 능력을 어떻게 발현시키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당연히 머릿속에 반론이 떠오를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지적으로 평등하냐고. 사람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른 특성과 능력을 부여받기에 똑똑한 사람도 있고 멍청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그렇기에 좀 더 똑똑한 지식인들이 멍청한 대중들을 계몽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말 우리는 똑똑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으로 구별되어 태어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똑똑한 사람들이 우리 같은 다소 멍청한 대중들을 이끌고 지배하면 되는 게 아닐까? 똑똑한 전문 정치인이 우리의 삶과 정치를 좌우하고, 똑똑한 전문가들이 이 사회를 잘 꾸려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바로 이런 생각이 모든 위계의 원천이다.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전문 정치인과 대중, 전문 철학자와 대중으로 끊임없이 사회적인 위계를 생산하고, 그런 위계에 따라 사회적 삶과 정치가 좌우되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잘 안다. 우리 스스로 지적인 능력을 발현하며 모국어를 터득했고, 또 그런 자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배워왔다는 사실을. 단지 치열한 생존의 무게에 갇혀 다른 곳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을 뿐,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해 왔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우리가 발현시킨 그 능력들을 좀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시킨다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도 말이다.

정치가 그들만의 일이 아니듯, 철학도 일부 전문가들만의 영역은 아니다. 물론 철학자로서, 연구자로서 평생을 바치는 소수는 늘 필요하고 소중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세상을 계몽하는 선구자일 수는 없다. 이제는 누군가의 계몽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해방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철학 역시도 이제는 단순히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우리 대중 모두가 스스로 철학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들만의 철학이 아닌 우리 모두의 철학이.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5

우주선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아무 의미없는 것이 의미가 있을 때가 있고
의미있는 것이 의미 없을 때가 있고
비어 있는 것을 채워야 할 때가 있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할 때가 있고
알고 있어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보여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가 있고
믿고 싶은대로 볼 때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가 있고
보고 있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볼 때가 있다.
열려 있으면서 닫혀 있기도 하고
닫혀 있으면서 열리기도 하는
무한대로 영원할 것처럼 영원하지 않다.

2016-4-2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4-25 우주선 copy

 

작가 노트

눈은 어쩌면 오감 중에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기관일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현상에 대해 문을 금방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은 낯설음에 대해 이해의 속도가 더뎌질 때 조금 더 빠르게 정보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체계를 어떤 틀에 끼워 맞춰 그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을 볼 때
자동기술법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기록하듯이 무의식적 지각을 통해 감각을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시각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느끼는 감각은 수많은 사건과 경험의 반복적인 습관을 통해
정보를 이해하는 속도와 양적 수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림을 말로 설명하는 것, 사진을 글로 표현하는 것, 시를 말로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 입니다.
시각화한 사물을 읽는다는 것은 낯설고 어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시각적으로 익숙한 것은
낯설음에서 익숙함의 반복된 학습의 과정을 통해 정보 인식의 확장이 가능해져 곧 익숙함에 이른 것이라고 봅니다.

관객은 때로는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단편들과 때로는 익숙한 단편들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며
타인의 낯선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임으로써 관객은 자신의 우주안에 정보의 회로를 새롭게 구성하고 재해석하는 단계의 과정을 거쳐
창의적인 상상력과 다양한 세계로 확장하는 힘을 만들어 곧 낯선 경험을 익숙함의 과정으로 만들 것입니다.

제가 표현하는 작업은 때로는 낯설기도 하고 때로는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삶에서 순간적인 찰나와 영속적인 부분의 차이이며
사람이 감지하는 모든 사물의 시간의 순간성과 영속성에 대한 시간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항상 지나가던 곳이거나 관심있게 보아야 보이는 것들, 자세히 관찰해야 보이는 것들,
그러한 공간, 물질, 현상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는 차근차근 한 과정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모르겠는데? 하는 생각과 같이 시각적인 작업에 대해
관객은 그 자체를 모호한 상태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눈에 읽히는대로 읽을 수도 있고
다양한 다른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그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해석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