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죽음 [퍼농유]

우쑵니다.

정치는 쑈라고 하지만 정치는 쇼이어야만 한다는 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겨움을 넘어 역겨울 지경입니다. 애덜의 쇼에는 그래도 천진난만함이라도 있지 이건 뭐 비열함만이 가득합니다. 어찌 헤쳐나가야할지 신의 가호가 아니라 신뢰의 연대와 냉정한 지혜가 있기를 ……. 물리적으로 너무 바쁜 10월입니다. 간단한 글하나 올립니다. 꾸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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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릴 적 고생을 몰랐다. 아버지 덕택이다. 아버지는 2016년 2월 15일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의 “뭣 하러 왔어”라는 무심한 한마디에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변은 알고 있는 듯 모르는 척하는 듯 말할 수 없지만 다시 새벽 병원 응급실에서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 자식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떠나셨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손에 들었던 책이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추상적인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람들의 죽음,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 있는 아버지께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으며 살아 있는 아버지께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병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 그 어딘가에는 이 사회가 철저히 배제해버린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은폐되고 삶은 전시되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음침한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산 자들은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거닐고 있다. 하여 자신은 이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걸을 생각만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런 무심한 말을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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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배 [평이의 궁시렁]

떠나가는 배

정태춘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훗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배야 가는배야 그 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너머로 어둠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 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야 가는 배야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없이 꾸밈없이 홀로 떠나 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 올 뿐
바람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 올 뿐

 


이렇게라도 무언가를 전하려는데.. 그 무서운 저작권이 어찌되는지 몰라 주저하는 저도 참 허접하네요.. 유투브 영상을 이리 공유하는 게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언제든 내려야겠지요? 하지만 정태춘씨는 뭐라 하시지 않을 듯ㅠㅠ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0

빈집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비우고 비운 곳에 있고
있지 않은 곳에 비어 있다.
있는 것은 비어 있고
채워진 것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곳에 채운다.
채울 수 있어 비울 수 있다.
비울 수 있어 채울 수 있다.

비우고 비운 그 곳에 그것이 있고
있지 않은 그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있는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채워진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곳에 그것은 채운다.
채울 수 있어 비울 수 있다.
채울 수 있어 비운다.

2016-9-30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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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살아가면서 나의 공간, 나의 정신에 많은 것을 채우고 살아갑니다.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 것이 보다 더 익숙해지는 삶인 것 같습니다.
여백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비어있지만 비어있음 그 자체가 채워져 있는 것,
그것은 삶의 여유가 되고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많지만 그리 필요하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에 무언가를 채우면 많은 것에 얽매이게 되고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육체적 풍요로 이어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비어있는 허무함을 때로는 견디기 어려워하고 허무 자체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며 살아가기도 하고 비어있기보다 채워지기를 바라고 채우기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음, 때로는 허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삶의 여유와 풍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단상들 2016.9.22

 

단상들

1. 70년대에 리영희가 있었다면 오늘날은 손석희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손석희가 4차례 해고와 5차례 옥살이를 했던 리영희의 아우라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 그의 앵커브리핑은 그 시절 리영희의 언론사 기고문을 접했을 젊은이들이 느꼈을 어떤 것을 우리 시대에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는 단호한 고발과 함께, 우리 시대의 좌절한 청년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2. 최경환이 외압을 해서 채용시킨 인물은 서류점수가 2299등이었는데, 최종 36등으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내게 이 외압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36명을 뽑는 자리에 도대체 몇 명이 지원했길래 ‘2299등’이라는 수치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의 정규직 직원이 되기 위해 도대체 몇 명, 아니 몇천 명을 앞질러야 하는 것일까. 임원도 아니고 ‘노동자’가 되는 것조차 수천 명을 누르고 4차례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냥 해.” 최경환이 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노동자’의 삶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고작 중소기업진흥청 말단 직원이라는 대단하지도 않은 자리에 지인을 꽂아넣는 것이 별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들이 보기엔 ‘머슴’일 뿐인 그 자리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렸다. 오늘날 그 수천 명의 흙수저들은 누가 대변할 수 있을까.

3. 제주도에서 일부 중국인들이 벌인 폭력,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정 해군기지를 반대한 제주도인들, 너희는 당해도 싸다. 너희는 할 말이 없다. 이 무논리의 극치이자 동시에 몹시 잔인한 논리에 대한 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 논리가 왜 틀렸는지를 지적하는 댓글을 입력했다. 얼마 후 다시 들어가보니 나더러 ‘전교조냐? 뷰웅신’이라고 욕을 한 댓글이 다시 베스트에 올라 있었다. 웃음만 나왔다.

아마도 제주도인들이 당해도 싸다고 말한 사람도, 나에게 조롱섞인 욕설을 단 사람도, 최경환이 낙방시킨 수천 명의 지원자들과 같은 운명을 공유할 수많은 흙수저들. 그들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좌절된 욕구를 (아마도 일베같은 곳에서 배웠을) 공격적 발언을 통해 해소하며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무기력감과 분노, 좌절을 그나마 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댓글을 단 사람에게 분노할 힘마저 없었다. 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이게 우리의 현 주소구나.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구나. 우리 시대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4. 최순실 게이트. 현 정권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정권을 공격할 호재가 생겨서 내심 기쁠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그렇지 않다. 가히 건국 이래 최대 친인척 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호사가들이 한 두마디 술자리 안주거리로 떠들어댈, 2대에 걸친 희대의 4각관계(최태원, 정윤회, 최순실, 박근혜)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품고 야권이 이 일로 정쟁을 벌이는 사이, 세월호 특별법 연장도, 각종 민생법안들도 이 정쟁에 밀려 통과가 늦춰질 게 분명하다. 소위 ‘현실정치’의 논리, ‘우선순위’의 논리다. 틀린 말은 물론 아니다.

비판할 게 너무나 많아서(정말로 그렇다), 부패가 너무나 많아서(정말이지 너무나 많다) 그 많은 사안들을 가지고 정쟁을 하느라 아무런 구체적 ‘정책’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무능한 국회. 언제까지 이 광경을 봐야할까. 언제쯤 한국 국회가 ‘친인척 비리 폭로’를 넘어서 ‘정치’를 논할 날이 올까.

정치의 부재다. 그리고 고통받는 자들은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처우가 개선되고 사회가 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들의 생존방법을 익혀나간다. 타인에게 공격적 충동을 투사하기. 학번, 출신학교, (특목고뿐 아니라 이제는 심지어 영어유치원 출신인지까지), 거주지역 등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위와 아래를 철저하게 따져서 권위 앞에 굴종하고 약한 자를 짓밟기. 고통당한 자들을 조롱하기. 그것이 세월호 유가족이든, 관광객에게 폭력을 당한 제주도민이든.

우리의 이 시대정신에 ‘역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치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정치철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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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저 너머에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Mulder, Where are you?” (멀더, 어디에요?)

“Scully, The Truth is Out There.” (스컬리,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요.)

 

30대 이상은 위 대사를 모를 리 없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The X-Files>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우리나라에서는 KBS가 수입하여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안방에 날라다 주었다. <The X-Files>는 FBI 수사관인 멀더(데이비드 듀코브니)와 스컬리(질리언 앤더슨)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미해결 사건 등을 추적하는 X-File이라는 부서에서 겪는 일을 줄거리로 하는 TV 시리즈물로, 전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매회 오프닝에 스산한 배경음악과 함께 화면에 나타나는 문구이자, 남자 주인공 멀더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마주할 때마다 되뇐 말이 바로 ‘The Truth is Out There(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다.

2016년 8월 26일, 검찰 출두를 앞둔 롯데 그룹 부회장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수사 기관과 이를 감추고 싶은 또는 감추어야만 하는 자 간의 대결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일단락된 모습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했던가. 그의 죽음으로 진실도 함께 묻혔다. 언론에서는 스스로 몸을 던진 망인을 두고 ‘충신(忠臣)이다. 의리 있다’는 식으로 치켜세우는 분위기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한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 하나만큼은 정말 깍듯하다’는 생각을 한다. 진실을 묻어두고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행동을 미덕 또는 충성으로 여기는 사회, 또 그런 사람에게 뒤늦게 최대한 예우를 해주는 사회, 이것이 그 옛날 우리가 배운 동방예의지국의 실체인가 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 위에 서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누군가의 목숨까지 제물로 바쳐가며 지켜져야 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계속 지켜질 수는 있는 것일까. 또 누구를 위한 진실일까 등등. 위와 같은 언론의 태도로 보아 부회장이 당당하게 검찰에 출두해서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거짓말 못하는 기계처럼 양심선언이라도 했다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실제 사례가 있으니 굳이 위 사건을 가지고 가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05년 노회찬 의원이 들추어낸 이른바 ‘삼성 X파일’과 2007년 김용철 변호사(당시 삼성 법무팀장)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안기부(현 국정원) 도청 녹취록 ‘X파일’에 등장하는 ‘삼성 떡값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죄로 기소된 노회찬 의원은 2013년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는 이후 빵집(뚜레쥬르)을 운영하기도 했다.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했으며 이들의 비위 행위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만 집단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그래, 이것이 바로 동방예의지국에서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예의 없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여정이다. 과연 어떤 진실이기에 그들은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면 그래서 필사적으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면 그런 진실 위에 쌓아온 성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들이 만들어 온 ‘진실’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지금 자신의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면 이런 모순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저 너머에 있는 바다에서 올라오지 않는 이유도 동방예의지국의 고유한 분위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파헤치거나 누설하려는 자들이 예의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현상은 세월호 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식을 잃어도 참는 게 미덕이고 입 다물고 가만있는 게 예의다. 덕성도 예의도 없으니 ‘진실한’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만약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론에서는 유족들을 유공자 수준으로 끌어올려 일제히 찬사를 보낼 것임이 분명하다. 이번 롯데 사태에서 보았듯이 진실을 저 너머에 고이 묻어준 대가로, 통 큰 결단으로 사회를 살렸다면서. 2010년 천안함 사건의 진실도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2013년 1월에 제기된 18대 대선 부정 개표 소송을 떠안은 대법원도 진실 앞에서 머뭇거린다. 2014년 소위 ‘성완종 리스트’ 의혹도 흐지부지되어 몸통들은 처벌받지 않고 덮였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그 어떤 진실도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기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건국절 논란도 이러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대한민국의 시작을 1948년으로 정하겠다는 건 무엇을 위함일까. 또 누구를 위함일까. 1948년 이전 한반도에는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 뿌려졌기에 이를 모조리 거둬들이려는 것일까. 1948년을 나라의 기점으로 주장하며 진실을 수거하려는 자들은 일각에서 일제강점기에 항일과 친일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조짐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차단하려 한다. 1948년 이전 이 땅에 자신과 조상들의 행적에 관해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두 팔 걷어붙이고 막으려는 것이다. 롯데와 삼성이 보여주듯, 세월호와 천안함에서 보듯. 여기에 딴죽을 걸면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매를 맞고, 진실을 수호한 자는 영광을 얻는다. 여기서 진실이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그들이 사실은 늑대였다는 점이다. 가해자이면서 가증스럽게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그들의 진실이란 그런 것. 전 국민이 알면 경천동지할, 그래서 지우고 싶은 이 ‘진실’ 위에 시멘트 반죽을 붓고 한 층이라도 더 올리려는 그들의 시도는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진실 앞에서 침묵을 강요받는 모습은 저 멀리 재벌권력이나 정치권력에서 보듯 대규모의 조직적 차원으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장삼이사인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다를 바 없다. 대학 강사가 학교 측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를 폭로하면 학교 측은 물론이요 동료·선후배 강사들까지 손가락질하며 그를 내친다. 내부 문제를 밖에 알려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분란을 일으킨 죄로 핀잔을 듣고 왕따를 당한다. 웃기지 않은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준 동료 강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성원 전체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는데도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를 욕하고 발로 차는 모습이. 그러면서 학교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치 쥐새끼가 고양이 생각하는 것 같다. 쥐가 고양이에게 예의를 갖추는 이러한 모습은 동방예의지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고 진실을 폭로하는 쥐는 가혹한 뒤탈을 감수해야만 한다. 노회찬 의원이나 김용철 변호사, 세월호 유족처럼. 혹은 예의를 갖추고 진실을 지켰다는 공로로 자자손손 명예를 독차지할 수 있는 여정을 택할 수도 있다. 롯데그룹 부회장처럼. 이도 저도 싫다면 살아 있는 머리에 진실을 가둔 채 입 다물고 사회가 강요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면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진실’로 무장한 길을 걷다보면 우연히 ‘진실’과 마주하기도 한다. 진실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거리 곳곳에서 갑자기 땅이 꺼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며 어느 날 백화점이 붕괴되고 한강다리가 끊기기도 한다. 자신을 녹색으로 드러낸 4대강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모두 스스로 민낯을 드러내며 대국민 사기극임을 커밍아웃한다. 다른 쪽에서는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진솔한 현실에 기초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상상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강남의 10억 원짜리 집과 아무도 살지 않는 10원짜리 집은 무엇이 다른가. 그 집이 10억이라는 건 진실인가. 지진이 나서 무너지는 꼴을 봐야 그제야 깨닫는다. 10억짜리 집이나 10원짜리 집이나 다 같은 시멘트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음을. 먹고 자고 싸는 데 불편함이 없으면 다 같은 집이라는 사실을. 경매에서 1억 2천만 원에 낙찰된 900g의 송로버섯은 정말 1억 2천만 원인가. 전쟁이 발발해 먹을 게 귀해지면 땅콩 한 알도 1억 2천만 원의 값어치를 할 것이다.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는, 발 딛고 서 있는 진실이란 고작 이와 같은 것이다. 지키면 지킬수록 모래성처럼 점점 약해진다. 이런 걸 지키겠다고 이 난리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사회,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온 사회요, 진실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진실을 수호해보지만 종국엔 무너지면서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다. 부조리와 몰상식, 비합리와 오류로 가득한 볼품없는 그 민낯 말이다. 이처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동시에 우리 바로 곁에 있기도 하다. 진실은 아무 데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국의 한 고속도로가 차량 정체로 꽉 막힌 적이 있었다. 교통경찰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결국 맨 앞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시범 운행 중인 무인차가 한 대 있었으니… 범인은 무인차였다. 무인차가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킨 탓에 고속도로가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던 것. 그렇다면 그동안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여태 사람차가 속도를 위반해서 달렸기 때문이다. 무인차가 ‘저 너머에 있던 진실’을 고속도로로 끌고 와 스스로 예의 없는 공익제보자가 된 것. 인정에 손발이 묶인 사람이 못 하는 양심선언을 인공지능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낸다. 이렇듯 뭔가 일이 터져야 그간 꾹꾹 눌려왔던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아무리 애써도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 주변만을 맴돌던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진실’을 들춰내 보여준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인간 세상의 토대가 되어 온 온갖 추한 ‘진실’을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할지 모른다. 양심선언은 인공지능의 태생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이와 같은 양심선언은 추한 진실과의 조우를 통해 인간인 나 자신을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동안 규정 속도를 위반한 운전자 각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저 너머로 진실을 던져보지만 동시에 내 안에 동일한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듯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듯 보이지만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

젠장,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필자 또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렸을 적 가게에서 쥐포, 껌, 사탕 등을 훔친 적이 있다. 몇 번 있다. 당시엔 CCTV가 없던 시절이라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다. 당시에 누가 이를 알고 가게 주인에게 이른다고 했다면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물어뜯어서라도. 마치 롯데처럼, 삼성처럼, 정부처럼, 학교의 비정규직 강사들처럼, 황우석 박사처럼. 진실이 밝혀지면 무너지는 나의 모습과 대면해야 하니까. 나 역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개인, 이러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인 사회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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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가즘(robogasm) [퍼농유]

우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미래학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오래된 미래를 예기하며 확신할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죠. 현실을 살기에도 버거……. 넵, 미래학이란 게 가진 자들이 그들의 삶의 조건을 좀더 매끈하고 편리하고 단순하게 만들려는 테크노로지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미국의 로봇학자가 가까운 미래에 사람이 ‘섹스봇(sexbot·성관계용 로봇)’과의 성관계에 중독되어 인간 사이의 성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경고했더군요. 혹은 2050년이 되면 인간의 성관계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50년이면 제가 거의 90이 되는지라 별 상관이 없는 세상이지만 서글퍼지더군요. 성관계가 사라지다니. 섹스봇은 사람마다 다른 신체 조건과 취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맞춤형으로 개발한다면 진짜 인간의 성능(?)을 능가하여 로봇과의 성관계에 더 큰 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죠.
상상이 가더군요. 언제든지 원하면 복잡한 절차를 밟을 필요없이 맺을 수 있는 편리함. 아, 그 모텔 문 앞까지 가는 과정에 필요한 감정 다툼과 뻐꾸기(?)와 인내력과 이해력과 동정과 동의와 돈과 시간과 등등 헤아리기 어려운 자원과 능력과 성능이 필요하죠. 그에 비하면 섹스봇은 그냥 오케이. 인간이 피곤할 뿐이죠.
의무적 결혼과 낭만적 사랑에서 해방된 섹스 그 자체의 쾌락을 위한 섹스가 가능한 현대 사회라지만 뭔가 연애 편지가 이메일도 대체되고 캘리그라피가 만년필을 대체하는 뭐 그런 어떤 앙꼬빠진 찐빵과 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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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어린이도 성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기겁을 했었죠. 어린아이가 느끼는 성적 쾌감이라니. 엄마의 젖을 빨며 성적 쾌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프로이트의 주장은 상식처럼 되어 버렸더군요. 그렇다면 섹스봇이 곧 출시될 미래 시대에 이런 상상은 어떨까요.
아내 혹은 남편(결혼 제도가 남아 있을려나?)이 현관문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남편 혹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스포츠 센터에 가서 섹스 한 게임 뛰고 올께.” 아내 혹은 남편은 무관심한 듯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합니다. “그래, 이번에는 꼭 멀티 오르가즘에 도달해야 해. 위생과 안전은 반드시 지키고.”
불가능할까요?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섹스가 스포츠가 되는 날, 섹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 육체적 노동의 피로감 때문에 섹스의 빈도가 현격히 줄어들지 않을까요. 인간에 대한 오판일까요? 섹스의 쾌락은 체력적 노동이 아니라 환상과 도덕의 금지로 이루어진 어떤 아트적(? art, techne?)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과도하고 도덕적 금지가 엄격할 때, 쾌락은 강렬하다, 더군요. 쿨럭.
남자는 포르노를 좋아하고 여자는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남자도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자도 포르노를 좋아할 것이라고, 음, 저 남자는 확신합니다. 남녀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맨스건 포르노건 모두 환상을 기반으로 합니다. 네,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성적인 충동을 종족번식으로 설명합니다. 진화심리학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충동은 단지 생물학적인 본능만은 아닐 겁니다. 생물학적 본능의 결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도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성적 충동은 동물적인 충동으로서 생물학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적 판타지가 유발시킨 정신분석학적 욕망의 결과입니다.
성적 충동은 어떤 학습된 환상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지, 성적 충동에 의해서 환상이 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성적 충동은 환상의 결과이지 환상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죠. 환상에 의해서 성적 충동이 구성되고 결과되는 것이지 생물학적 본능이 일어나서 환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죠.(뭐라는 거니?)

Slavoj Žižek

지젝은 이 점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광고로 예를 듭니다. 유명한 동화를 패러디한 광고입니다. 한 소녀가 개울가를 걷다가 개구리를 한 마리 발견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못생긴 개구리는 멋진 젊은 남자로 변합니다. 그 상대 젊은 남자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그 소녀를 탐욕스럽게 키스합니다. 소녀는 한 병의 맥주로 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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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한 바는 이렇습니다. 소녀는 개구리같은 남자에 대해 젊은 남자의 환상을 갖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욕망의 대상인 맥주병이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두 남녀의 주체는 서로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서로 각각의 주관적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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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남녀에게서 일어나는 성행위의 구조는 살과 피를 지닌 상대와의 실제 행위가 아니라, 환상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환상적(phantasmic)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타자의 육체는 환상의 투사를 위한 스크린일 뿐이라는 것입죠. 지젝이 표현이 참 그러합니다. 남녀의 육체가 환상을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이라뇨! 하, 그럼 영화관에서 서로 섹스하는 …. 아니 영화관에 홀로 앉아 마스터베이션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육체적인 섹스 행위를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각자 환상에 빠져서 각자 마스터베이션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 현실적인 섹스의 모습이라는 것입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말은 성관계를 하는 두 사람은 사실 각자의 판타지에 빠져 각자 따로 서로의 환상 속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섹스봇과 함께 느끼는 로보가즘(robogasm)의 정체는 바로 이 마스터베이션의 극대화가 아닐까요? 환상의 극대화, 성능(?)의 극대화, 오롯이 혼자만이 느끼는 멀티오르가즘의 사유화. 그렇다면 자위 행위가 좋지 않은 이유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혼자만의 환상에 사로 잡혀 살아 있는 생명인 타인으로부터 오는 살 떨리는 감각과 교감하기를 차단하고 포기하는 무관심과 냉담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쾌락의 독점과 사유화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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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결론부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 이 첫경험의 설렘만큼이나 수줍은 것은 ….. 네, 죄송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씁드리자면, 섹스는 살맛이다, 뭐 그런 것입니다. 살과 살이 접촉해야 살맛(?)을 느낀다. 살맛을 느끼는 섹스는 살아나갈 수 있는 살맛을 준다. 섹스는 환상을 매개로 하는 쾌락이지만 그 쾌락의 실제적 내용은 살맛이다. 사는 맛이며 살의 맛이다. 살이라는 피부가 접촉할 때 세포들이 미세하게 느끼는 맛이며 동시에 살아있다는 떨림을 주는 맛이다. 뭐 이런 논리입쬬.
섹스봇과 함께 하는 로보가즘은 바로 이러한 모텔 앞까지 가야 하는 희노애락의 과정과 상호간의 살맛을 제거해버린 쾌락의 극대화일 수 있지 않을까요. 네 다시 반복하지만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살이란 육체는 생물학적 살덩어리이지만 동시에 존재론적인 살덩어리입니다. 존재론적 살덩어리는 생물학적 살덩어리 위에 덕지덕지 쌓여진 삶의 주름들과 같습니다. 존재론적인 살덩어리는 생물학적인 몸이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삶의 총체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기억이 저장된 주름진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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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섹스할 때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왜 일까요? 존재론적 살덩어리인 자신의 삶을 이해해달라는 요청 때문은 아닐까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 나야. 그다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지만 나를 이해해줘. 물론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상호 이해 속에서 존재론적 살덩어리들은 서로에 대한 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각자만의 환상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환상은 상호 교환되고 공유된 환상이기에 서로의 공감 속에서 작동합니다. 존재론적 살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환상의 윤리성이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가 아닐까요. 자기만의 환상에 취한 자기도취적 폭력이 아닙니다. 상호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공유된 환상입니다. 주름진 존재론적 몸을 나누는 섹스는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 자위행위적인 로보가즘은 아닐 것입니다. 성능(?)은 물론 보장 못합니다. 함정이죠. 그러나 남녀 공히 모두 포르노를 좋아하고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존재론적 살이 느끼는 것은 그래서 로보가즘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적인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전적으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수줍음도 없는 헌신과 요구는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신뢰는 주름진 존재론적 살덩어리를 느끼는 살맛을 통해 형성됩니다.
섹스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호 이해와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환상에 근거한 섹스는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가 뭐냐구요. 아, 급 피곤함을 느껴서 …. 쿨럭. 나이듦이 서글퍼지는지는 계절입니다. 살맛이 없습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9

자유의 갈망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소리없이 떨어지는 나태는 속박에 이른다.
저 문틈 사이로 들리는 갈망하는 자유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은 것에 대한 열망은
한 낮에 흐드러져 반짝이는 섬광같다.
점점점 떠오르는 흰 점과 가는 선들은
회오리를 일으켜 빛으로 퍼져 나간다.
그 곳에는 반쯤 가려져 보이지 않는
마침표가 서성인다.
숨을 거두기 위한 추적은 계속된다.
빛으로 일어나라. 소년이여!
열망 가운데 갈망하는 자유의 날개가 있다.

2016-8-30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8-30 자유의 갈망 copy


작업노트

어떤 생은 한번의 선택으로 인해 실타래처럼 엉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저항하지 않고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고 살았던  긴 시간이 흘러

정신과 육체는 반복되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고

잠수함에 갇힌 육체가 정신을 붙잡아 가둡니다.

어떤 한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몸의 현상은 정신을 구속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몸은

정신을 구속합니다.

창문을 열고 나가면 눈앞에는 반짝이는 섬광이 아른거리고

전선처럼 정신은 엉켜있어 세계는 어지럽습니다.

반쯤 가려진 시야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삶의 한가운데 버려진 것처럼 불안합니다.

한 생의 삶이 자유의 날개를 달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합니다. 

[한철연] 2016년 9월 월례발표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입니다.

세상을 삶아 먹을 듯했던 여름의 기세가 하루 아침에 꺾이고 거짓말처럼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학술 활동에 탄력 붙으시길 바랍니다.

9월 월례 발표회를 공지합니다. 9월에는 남기호 선생님께서 헤겔 관련 연구 논문을 발표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한철연에서 헤겔과 함께 즐겨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회원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10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도 기대하실만 자리일 것입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9월 월례회 공지

*일시 : 9월 23일(금), 오후 6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발표자 및 논문 제목: 남기호 선생님(제주대)

: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 헤겔의 『철학백과요강』(1827) 예비개념을 중심으로>

*논평자: 이정은 선생님 (연세대)

 

<논문 개요>

본 발표는 『철학백과요강』 재판 예비개념 부분에서 전개된 헤겔의 변증법을 객관적 사유의 구조로서 분석한다.

헤겔에게 논리적인 것이란 존재와 직접적으로 매개된 객관적 사유규정들이다.

먼저 칸트 이전의 순진한 형이상학에서 객관적 사유규정은 대립 의식 없이 직접적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사유규정은 유한한 것으로서 다른 객관적 사유규정과 대립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 다음으로 순진한 경험론과 비판 철학은 객관적 사유규정들을 자신들의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매개된 것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타자와 대립된 매개는 제약된 유한성을 의미한다.

끝으로 형이상학화하는 경험론 내지 직접지의 철학은 이러한 매개 자체에 대립하는 무한한 직접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유한자와 분리된 공허한 비약으로 귀착한다.

이에 반해 매개 자체의 지양을 통해 설정되는 직접성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객관적 사유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객관적 사고의 세 발전 입장들은 각각 논리적인 것의 추상적 오성적 측면, 변증법적 부정적-이성적 측면, 사변적 긍정적-이성적 측면에 해당한다.

본 발표는 이렇게 칸트 이전 볼프 형이상학, 칸트의 비판철학 그리고 야코비의 직접지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헤겔 변증법의 기본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논의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직접적 규정의 매개와 이 매개 자체의 지양을 통한 직접성의 무한한 긍정적 규정 가능성의 관점에서

헤겔의 객관적 사유의 변증법은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 10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예고

일시 : 10월 21일 (금) 오후 6시

진행 : 유민석 선생님(서울시립대)

주제: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

유민석 선생님은 버틀러의 <혐오 발언>의 역자이십니다.

근래 대한민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현상이 각종 혐오 발언과 페미니즘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자리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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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교육용’ 전기 요금이었구나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와, 요즘 진짜 공부 많이 한다. 유전자조작식품(GMO), 청년수당,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둥지 내몰림), 사드(THAAD)에 전기 누진제까지. 가만있어 보자.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맞다. 2005년엔 황우석 박사 덕분에 ‘줄기세포’ 전문가가 되더니 2008년엔 MB(이명박) 덕분에 광우병 지식인으로 거듭나고… 다시 공부 시즌이 돌아왔다. 무더운 여름 정부가 우리에게 또 다시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오늘은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전기 누진제 얘기를 해보겠다. 펄펄 끓는 ‘가마솥’ 더위가 이어지면서 학교에서도 전기 요금 폭탄을 우려해야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매우 의아했다. 학교에 공급되는 전기 요금 체계엔 또 무슨 꼼수가 숨어 있기에 저런 뉴스가 나오는 걸까. 요즘, 주택용/산업용 전기는 언론에서 뭇매를 맞고 있어 자주 접하던 차에 교육용 전기는 또 뭔가 싶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주택용, 산업용, 일반용(상가), 기타로 구분하여 요금을 부과하는데 교육용/농업용/가로등이 기타 항목에 포함된다고 한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전기엔 누진제가 적용되진 않지만 교육용 전기의 독특한 요금 구조 탓에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폭염에 괴로워해도 학교 재정이 어려우면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를 그냥 참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때 필자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아, 이래서 교육용이구나”. 학교에 공급하는 전기를 ‘교육용’이란 딱지를 붙여 별도로 취급하는 이유는, 애초부터 고비용의 요금 구조로 설계함으로써 ‘참는 게 미덕’임을 가르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워도 참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교육용 전기 요금을 고비용으로 설계한 이유였던 것이다.

 

학교 밖에서의 교육이라고 다를까. 우리 주변에는 <참는 게 미덕이다>를 떠올리게 해주는 사례들이 즐비하다.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희롱 예방 교육에서 강연자가 “성희롱을 당하면 78.4%가 참고 넘어간다. 이게 미덕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섬마을에서 학부형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자 교사도 참는 게 미덕이다. 교수가 되고 싶은 대학원생은 지도 교수의 성희롱은 물론 논문 가로채기를 당해도 꾹 참아야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는 서열에 따라 순번대로 임신을 해야 한다. 신입 간호사는 임신을 하고 싶어도 참는 게 미덕이다. 한편 일터에서의 노동자 역시 회사 측의 부당한 요구와 강압에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검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자고 일어나면 귀에서 흘러나온 피에 베개가 젖을 정도로 상사로부터 폭언·폭력에 시달려도 참는 게 미덕이다. OECD 최하위권의 노조 조직률 12.3%(2015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최저임금조차 못 받고 퇴직금마저 떼여도 참는 게 미덕이다. 팥빙수 장사가 잘 되어 상가 임대료가 오르면 임차인인 자영업자는 억울해도 참고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게 다 미덕이다.

 

사드가 들어와도, 핵발전소가 세워져도 참는 게 미덕이다. 허술한 공권력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도 징징대면 안 된다.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자식을 잃어도 정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고 울음을 그치는 게 미덕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악악’대며 시위를 하면 안 된다. 정부에서 1인당 5,000만 원씩 준다고 할 때 얼른 받아 챙기고 입 다무는 게 미덕이다. 정부가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에 제동을 걸어 청년의 삶까지 직권 취소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노인들 역시 죽을 만큼 힘들어도 참고 뙤약볕 아래서 폐지를 주워 하루 1만 원이라도 건지는 게 미덕이다. 혹여 기업이 만든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를 흡입하여 폐 손상으로 평생 산소통을 달고 살아간다 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덕이 여기서 멈출 순 없다. 횡단보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금연을 요청했다가 뺨을 맞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어도 참고 마시는 게 미덕이며, 아랫집 혹은 윗집으로부터 담배 연기가 스며들어도 참고 사는 게 미덕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겨울 내내 난방비가 한 푼도 나오지 않도록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리하여 설사 내가 부당하게 요금 폭탄을 뒤집어쓰더라도, 이를 발설하지 않고 참는 게 미덕이다. 교육부 공직자로부터 공개적으로 개·돼지 취급을 받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왈왈” 또는 “꿀꿀”대며 짖는 것도 잠시일 뿐 너무 더워서 짖을 힘도 없다. 더워도, 배고파도, 몸이 아파도, 모욕을 당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이제 똥·오줌도 참는 게 미덕이라는 말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참, 이미 병원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간호사들이 화장실도 제 때 못 간다고 하니 지금 현실에 비추어 봐도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이렇게 학교 안팎에서 <참는 게 미덕이다>라는 가르침을 교과서를 벗어나 현장 위주의 실습 교육으로 제공해주시니 우리나라가 교육 강국의 반열에 오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우리나라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수차례 언급하지 않았던가. 문득 궁금해진다. 누가 국가 차원에서 이런 식의 대국민 교육을 조직적으로 기획할 수 있을지. 필자는 이른바 ‘민중 개·돼지’ 발언의 주인공인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씨가 그 정점에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감히 누가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겠다는 금기어를 발설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국정원도 못하는 일이다. 대통령도 못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컨트롤타워는 국정원이 아니라 교육부임이 틀림없다. 국정원 위에 교육부 있다. 이런 교육부에게 아직 교육 컨텐츠가 남아 있을까. 물론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교육해줄 내용은 ‘민영화(民營化)’가 아닐까 싶다. 전기·가스·수도·철도와 같은 공공부문의 사영화(私營化) 또는 영리화(營利化) 말이다. 그렇다면 대장정의 교육이 막을 내린 후엔 무엇이 이어질까. 정책기획관 출신 나향욱씨는 어디서 또 무엇을 기획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민영화 교육을 마지막으로 교육 강국으로서의 찬란했던 영광을 뒤로 하고 축산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지난 7월 8일 이후 우리는 개·돼지로 살고 있다는 점을 벌써 잊었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면서

저 개가 내 말을 알아들으면 얼마나 편할까얼마나 좋을까

당신의 글자는 위정자와 지배층에 그렇게 이용될지도 모른다.

무릇 백성은 어리석어 보이나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했어.

허나, 그 말은 어쩌면 오히려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혜가 없는 산이나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헌데,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속게 될 것이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처럼.

–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 최종회, 세종과 독대하는 정기준(윤제문 분)의 최후의 대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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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리스(sexless) [퍼농유]

우쑵니다.

 

더위 먹은 김에 공자 빼갈 먹는 소리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일할 의욕을 잃고서 몽롱한 정신에 인터넷을 들락거리다가 어떤 기사를 보고 불현 듯 일어난 생각입니다. 잠못 이루는 열대야가 만들어낸 난삽한 생각들입니다.

 

섹스리스(sexless)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성인 부부 35.1%는 한 달에 1번 이하의 관계를 맺는 섹스리스 부부라고 합니다. 상당히 높죠. 세계 평균 20%, 미국 평균 6%에 비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일본은 44%. 1등입니다. 우리나라는 2등.

어쩌면 이런 통계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설문지 답변을 솔직하게 쓸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만 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점은 부부 사이에 섹스리스가 상당히 높은 수치를 차지하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현대는 리스(Lease)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정수기 리스, 자동차 리스부터 사무실과 집까지 리스해서 쓰는 일은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입니다. 유용하면서도 깔끔하죠. 귀찮은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섹스리스 시대에 ‘섹스 리스(Sex Lease)’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 중년들의 진정한 사랑은 불륜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더군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실용적 사랑은 불륜이 아니라 리스가 대세를 이룰지도 모릅니다.

궁금한 것은 섹스리스의 원인이었습니다. 주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이더군요. 첫째 피로감.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와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만사가 귀찮다는 것입죠. 만성피로로 찌들게 만드는 피로 사회는 인간 행복의 본능까지도 저하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목할 만한 원인은 두 번째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더군요. “가족까리는 키스하는 거 아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가족이라는 친밀감이 깊어지면 성적인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친밀감이란 친하고 가깝게 지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잘 아는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친밀감과 성적인 매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부부는 의리로 삽니다.

일반적인 생각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생각과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더군요. 인터넷에서 본 기사입니다. 이스라엘 헤르츨리야의 복합 센터의 심리학 교수 구리트 번바움은 친밀함이 깊으면 성적인 욕구가 더 강할 수 있다고 오히려 반대로 주장하더군요. 실험을 통해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친밀함이 커져도 성적 욕구는 솟아나며, 규정하기 힘든 묘한 감각인 성적 욕구를 장기간에 걸쳐 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응성을 높이는 것이다.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이 번바움의 결론에 따른다면 섹스 리스의 원인은 부부관계의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섹스리스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죠.

왜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아 물론 다른 사회 정치적 분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친밀함의 깊이와 섹스는 반비례한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죠.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결혼한 뒤에 몇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내는 이제 더 깊이 알아야할 상대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상이다. 알 필요가 없다. 왜? 모두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친밀성은 깊어지지 않는다. 친밀성이 깊어지지 않으니 섹스는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가 아닐까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무시가 친밀성이 깊어지지 못하게 가로막고 그것 때문에 섹스에 대한 흥미는 감소한다. 결국 더 친밀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섹스는 불가능하다.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섹스리스를 ‘섹스 리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남편 혹은 아내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을 먼저 버릴 것. 남편 혹은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남편 혹은 아내 그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겸허히 경청할 것. 경청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설렌다면 “그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물론 함정은 있습니다. 실행하기 힘든 일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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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논리는 비난 섹스리스의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트 때문입죠.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이라는 감정들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름답지만 비루하며, 기이하지만 적나라하죠.

이 책의 구성은 특이합니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우연적으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우연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연적 배열들로부터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해 나가는 연대기이며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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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고 바르트는 구조주의자라고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했고 바르트는 주체를 해체합니다. 문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대립적 입장에 서 있습니다.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마치 주체의 죽음처럼 느껴집니다.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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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기능이나 저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수동적으로 의미를 경청하고 음미하는 독자의 능력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담긴 텍스트를 강조했습니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미를 해독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 즐김)의 대상이 됩니다.

섹스리스를 사랑과 관련시킬 때 드는 의문이란 이런 겁니다. 타자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증가할까? 아니면 감소할까? 바르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멋진 생각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불투명함이 명백함으로 전환되는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불투명함이 명백함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논리는 역으로 타자에 대한 명백한 앎은 사랑을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거나 친밀한 사람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착각입죠. 이러한 착각과 오만에 근거하여 나는 너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너의 이런 속성 때문에 놀라우며, 너의 의도가 이런 것이기에 화가 나고, 너의 생각이 이렇기에 짜증이 난다고 투덜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과연 타자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앎에 근거하여 상대를 함부로 대하고 평가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치 어떤 작품을 읽고서 이 작품의 쓴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적 태도는 온당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잘 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를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문제는 잘 알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입니다. 그래서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된”다고 하는 말은 고정된 이미지로서의 외관을 통해서 실체를 규정하려는 주체의 오만한 노력들이 파기될 때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주체의 자기도취가 이르는 결말은 타자에 대한 지배 아니면 싫증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숙한 사랑의 지혜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그대로’라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

 

사랑하는 상대는 이제 주이상스(jouissance)의 텍스트가 됩니다. 바르트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향유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타자는 어떤 저자의 하나의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 무한히 음미되어야할 텍스트인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의미가 정의되어 고정되어야할 명증함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경청하며 음미되어야할 모호함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설렘의 흥분을 가지고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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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의 역설에는 놓쳐버린 역설이 또 있지 않을까요. 독자의 탄생을 위해서 저자를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주이상스를 위해 주체는 죽었습니다. 결국 그는 ‘소유의 의지’를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타자를 소유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려는 것입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려는 순간 저자와 사랑의 주체는 죽은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비소유의 의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격렬하고도 메마른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메마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의 환상, 그 상상계가 메마르게 되기 때문에 주체는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소유의 의지에 대한 상념이 상상계의 체계와 단절되기 위해서는 내가 언어 밖의 어디엔가로,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해야만 한다.”

 

무기력하고 메마른 사랑이란 또 다른 사랑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긍정적 역설을 말했지만, 또 동시에 타자의 불투명함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사랑을 창조할 수 있는 저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역설에 빠지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를 강화시켰다면 바르트는 주체를 무화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주체의 능력이 강화될 때 사랑은 투쟁이 되고 밀당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능력이 무화될 때 사랑은 식은 재가 되고 관조가 됩니다.

바르트는 도가(道家)적 사유와 근접해 있습니다. 바르트는 분명 노자(老子)의 논리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주희(朱熹)는 노불(老佛)에 대해서 비판적이죠. 죽은 재와 마른 나무와 같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항시 권모술수적인 측면으로 흐른다고 비판하죠.

바르트도 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 ‘그대로’ 혹은 ‘비소유의 의지’라는 사랑의 방식이 빠질 수 있는 사기술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비소유의 의지가 어떤 전략적인 생각이라면(마침내!)?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그를 정복하려 한다면(물론 은밀하게?) 그를 보다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진다면?”

 

전략적으로 주체를 무화시킨다면? 그것은 사기술이죠.

아랑드롱

아! 죄송합니다. 더운데 피곤하게 해드렸군요. 쿨럭~

세줄 요약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잘 안다고 오만 떨지 말 것.

상대를 그 자체 그대로 경청할 것.

그러나 사기 치지는 말 것.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