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서 ‘교육용’ 전기 요금이었구나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와, 요즘 진짜 공부 많이 한다. 유전자조작식품(GMO), 청년수당,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둥지 내몰림), 사드(THAAD)에 전기 누진제까지. 가만있어 보자.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맞다. 2005년엔 황우석 박사 덕분에 ‘줄기세포’ 전문가가 되더니 2008년엔 MB(이명박) 덕분에 광우병 지식인으로 거듭나고… 다시 공부 시즌이 돌아왔다. 무더운 여름 정부가 우리에게 또 다시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오늘은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전기 누진제 얘기를 해보겠다. 펄펄 끓는 ‘가마솥’ 더위가 이어지면서 학교에서도 전기 요금 폭탄을 우려해야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매우 의아했다. 학교에 공급되는 전기 요금 체계엔 또 무슨 꼼수가 숨어 있기에 저런 뉴스가 나오는 걸까. 요즘, 주택용/산업용 전기는 언론에서 뭇매를 맞고 있어 자주 접하던 차에 교육용 전기는 또 뭔가 싶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주택용, 산업용, 일반용(상가), 기타로 구분하여 요금을 부과하는데 교육용/농업용/가로등이 기타 항목에 포함된다고 한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전기엔 누진제가 적용되진 않지만 교육용 전기의 독특한 요금 구조 탓에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폭염에 괴로워해도 학교 재정이 어려우면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를 그냥 참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때 필자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아, 이래서 교육용이구나”. 학교에 공급하는 전기를 ‘교육용’이란 딱지를 붙여 별도로 취급하는 이유는, 애초부터 고비용의 요금 구조로 설계함으로써 ‘참는 게 미덕’임을 가르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워도 참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교육용 전기 요금을 고비용으로 설계한 이유였던 것이다.

 

학교 밖에서의 교육이라고 다를까. 우리 주변에는 <참는 게 미덕이다>를 떠올리게 해주는 사례들이 즐비하다.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희롱 예방 교육에서 강연자가 “성희롱을 당하면 78.4%가 참고 넘어간다. 이게 미덕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섬마을에서 학부형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자 교사도 참는 게 미덕이다. 교수가 되고 싶은 대학원생은 지도 교수의 성희롱은 물론 논문 가로채기를 당해도 꾹 참아야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는 서열에 따라 순번대로 임신을 해야 한다. 신입 간호사는 임신을 하고 싶어도 참는 게 미덕이다. 한편 일터에서의 노동자 역시 회사 측의 부당한 요구와 강압에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검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자고 일어나면 귀에서 흘러나온 피에 베개가 젖을 정도로 상사로부터 폭언·폭력에 시달려도 참는 게 미덕이다. OECD 최하위권의 노조 조직률 12.3%(2015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최저임금조차 못 받고 퇴직금마저 떼여도 참는 게 미덕이다. 팥빙수 장사가 잘 되어 상가 임대료가 오르면 임차인인 자영업자는 억울해도 참고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게 다 미덕이다.

 

사드가 들어와도, 핵발전소가 세워져도 참는 게 미덕이다. 허술한 공권력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도 징징대면 안 된다.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자식을 잃어도 정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고 울음을 그치는 게 미덕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악악’대며 시위를 하면 안 된다. 정부에서 1인당 5,000만 원씩 준다고 할 때 얼른 받아 챙기고 입 다무는 게 미덕이다. 정부가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에 제동을 걸어 청년의 삶까지 직권 취소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노인들 역시 죽을 만큼 힘들어도 참고 뙤약볕 아래서 폐지를 주워 하루 1만 원이라도 건지는 게 미덕이다. 혹여 기업이 만든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를 흡입하여 폐 손상으로 평생 산소통을 달고 살아간다 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덕이 여기서 멈출 순 없다. 횡단보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금연을 요청했다가 뺨을 맞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어도 참고 마시는 게 미덕이며, 아랫집 혹은 윗집으로부터 담배 연기가 스며들어도 참고 사는 게 미덕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겨울 내내 난방비가 한 푼도 나오지 않도록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리하여 설사 내가 부당하게 요금 폭탄을 뒤집어쓰더라도, 이를 발설하지 않고 참는 게 미덕이다. 교육부 공직자로부터 공개적으로 개·돼지 취급을 받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왈왈” 또는 “꿀꿀”대며 짖는 것도 잠시일 뿐 너무 더워서 짖을 힘도 없다. 더워도, 배고파도, 몸이 아파도, 모욕을 당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이제 똥·오줌도 참는 게 미덕이라는 말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참, 이미 병원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간호사들이 화장실도 제 때 못 간다고 하니 지금 현실에 비추어 봐도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이렇게 학교 안팎에서 <참는 게 미덕이다>라는 가르침을 교과서를 벗어나 현장 위주의 실습 교육으로 제공해주시니 우리나라가 교육 강국의 반열에 오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우리나라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수차례 언급하지 않았던가. 문득 궁금해진다. 누가 국가 차원에서 이런 식의 대국민 교육을 조직적으로 기획할 수 있을지. 필자는 이른바 ‘민중 개·돼지’ 발언의 주인공인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씨가 그 정점에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감히 누가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겠다는 금기어를 발설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국정원도 못하는 일이다. 대통령도 못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컨트롤타워는 국정원이 아니라 교육부임이 틀림없다. 국정원 위에 교육부 있다. 이런 교육부에게 아직 교육 컨텐츠가 남아 있을까. 물론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교육해줄 내용은 ‘민영화(民營化)’가 아닐까 싶다. 전기·가스·수도·철도와 같은 공공부문의 사영화(私營化) 또는 영리화(營利化) 말이다. 그렇다면 대장정의 교육이 막을 내린 후엔 무엇이 이어질까. 정책기획관 출신 나향욱씨는 어디서 또 무엇을 기획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민영화 교육을 마지막으로 교육 강국으로서의 찬란했던 영광을 뒤로 하고 축산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지난 7월 8일 이후 우리는 개·돼지로 살고 있다는 점을 벌써 잊었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면서

저 개가 내 말을 알아들으면 얼마나 편할까얼마나 좋을까

당신의 글자는 위정자와 지배층에 그렇게 이용될지도 모른다.

무릇 백성은 어리석어 보이나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했어.

허나, 그 말은 어쩌면 오히려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혜가 없는 산이나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헌데,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속게 될 것이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처럼.

–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 최종회, 세종과 독대하는 정기준(윤제문 분)의 최후의 대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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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리스(sexless) [퍼농유]

우쑵니다.

 

더위 먹은 김에 공자 빼갈 먹는 소리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일할 의욕을 잃고서 몽롱한 정신에 인터넷을 들락거리다가 어떤 기사를 보고 불현 듯 일어난 생각입니다. 잠못 이루는 열대야가 만들어낸 난삽한 생각들입니다.

 

섹스리스(sexless)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성인 부부 35.1%는 한 달에 1번 이하의 관계를 맺는 섹스리스 부부라고 합니다. 상당히 높죠. 세계 평균 20%, 미국 평균 6%에 비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일본은 44%. 1등입니다. 우리나라는 2등.

어쩌면 이런 통계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설문지 답변을 솔직하게 쓸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만 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점은 부부 사이에 섹스리스가 상당히 높은 수치를 차지하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현대는 리스(Lease)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정수기 리스, 자동차 리스부터 사무실과 집까지 리스해서 쓰는 일은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입니다. 유용하면서도 깔끔하죠. 귀찮은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섹스리스 시대에 ‘섹스 리스(Sex Lease)’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 중년들의 진정한 사랑은 불륜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더군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실용적 사랑은 불륜이 아니라 리스가 대세를 이룰지도 모릅니다.

궁금한 것은 섹스리스의 원인이었습니다. 주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이더군요. 첫째 피로감.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와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만사가 귀찮다는 것입죠. 만성피로로 찌들게 만드는 피로 사회는 인간 행복의 본능까지도 저하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목할 만한 원인은 두 번째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더군요. “가족까리는 키스하는 거 아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가족이라는 친밀감이 깊어지면 성적인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친밀감이란 친하고 가깝게 지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잘 아는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친밀감과 성적인 매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부부는 의리로 삽니다.

일반적인 생각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생각과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더군요. 인터넷에서 본 기사입니다. 이스라엘 헤르츨리야의 복합 센터의 심리학 교수 구리트 번바움은 친밀함이 깊으면 성적인 욕구가 더 강할 수 있다고 오히려 반대로 주장하더군요. 실험을 통해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친밀함이 커져도 성적 욕구는 솟아나며, 규정하기 힘든 묘한 감각인 성적 욕구를 장기간에 걸쳐 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응성을 높이는 것이다.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이 번바움의 결론에 따른다면 섹스 리스의 원인은 부부관계의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섹스리스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죠.

왜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아 물론 다른 사회 정치적 분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친밀함의 깊이와 섹스는 반비례한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죠.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결혼한 뒤에 몇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내는 이제 더 깊이 알아야할 상대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상이다. 알 필요가 없다. 왜? 모두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친밀성은 깊어지지 않는다. 친밀성이 깊어지지 않으니 섹스는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가 아닐까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무시가 친밀성이 깊어지지 못하게 가로막고 그것 때문에 섹스에 대한 흥미는 감소한다. 결국 더 친밀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섹스는 불가능하다.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섹스리스를 ‘섹스 리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남편 혹은 아내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을 먼저 버릴 것. 남편 혹은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남편 혹은 아내 그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겸허히 경청할 것. 경청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설렌다면 “그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물론 함정은 있습니다. 실행하기 힘든 일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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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논리는 비난 섹스리스의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트 때문입죠.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이라는 감정들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름답지만 비루하며, 기이하지만 적나라하죠.

이 책의 구성은 특이합니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우연적으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우연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연적 배열들로부터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해 나가는 연대기이며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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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고 바르트는 구조주의자라고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했고 바르트는 주체를 해체합니다. 문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대립적 입장에 서 있습니다.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마치 주체의 죽음처럼 느껴집니다.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사르트르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기능이나 저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수동적으로 의미를 경청하고 음미하는 독자의 능력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담긴 텍스트를 강조했습니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미를 해독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 즐김)의 대상이 됩니다.

섹스리스를 사랑과 관련시킬 때 드는 의문이란 이런 겁니다. 타자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증가할까? 아니면 감소할까? 바르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멋진 생각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불투명함이 명백함으로 전환되는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불투명함이 명백함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논리는 역으로 타자에 대한 명백한 앎은 사랑을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거나 친밀한 사람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착각입죠. 이러한 착각과 오만에 근거하여 나는 너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너의 이런 속성 때문에 놀라우며, 너의 의도가 이런 것이기에 화가 나고, 너의 생각이 이렇기에 짜증이 난다고 투덜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과연 타자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앎에 근거하여 상대를 함부로 대하고 평가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치 어떤 작품을 읽고서 이 작품의 쓴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적 태도는 온당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잘 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를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문제는 잘 알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입니다. 그래서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된”다고 하는 말은 고정된 이미지로서의 외관을 통해서 실체를 규정하려는 주체의 오만한 노력들이 파기될 때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주체의 자기도취가 이르는 결말은 타자에 대한 지배 아니면 싫증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숙한 사랑의 지혜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그대로’라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

 

사랑하는 상대는 이제 주이상스(jouissance)의 텍스트가 됩니다. 바르트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향유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타자는 어떤 저자의 하나의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 무한히 음미되어야할 텍스트인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의미가 정의되어 고정되어야할 명증함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경청하며 음미되어야할 모호함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설렘의 흥분을 가지고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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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의 역설에는 놓쳐버린 역설이 또 있지 않을까요. 독자의 탄생을 위해서 저자를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주이상스를 위해 주체는 죽었습니다. 결국 그는 ‘소유의 의지’를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타자를 소유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려는 것입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려는 순간 저자와 사랑의 주체는 죽은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비소유의 의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격렬하고도 메마른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메마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의 환상, 그 상상계가 메마르게 되기 때문에 주체는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소유의 의지에 대한 상념이 상상계의 체계와 단절되기 위해서는 내가 언어 밖의 어디엔가로,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해야만 한다.”

 

무기력하고 메마른 사랑이란 또 다른 사랑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긍정적 역설을 말했지만, 또 동시에 타자의 불투명함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사랑을 창조할 수 있는 저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역설에 빠지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를 강화시켰다면 바르트는 주체를 무화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주체의 능력이 강화될 때 사랑은 투쟁이 되고 밀당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능력이 무화될 때 사랑은 식은 재가 되고 관조가 됩니다.

바르트는 도가(道家)적 사유와 근접해 있습니다. 바르트는 분명 노자(老子)의 논리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주희(朱熹)는 노불(老佛)에 대해서 비판적이죠. 죽은 재와 마른 나무와 같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항시 권모술수적인 측면으로 흐른다고 비판하죠.

바르트도 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 ‘그대로’ 혹은 ‘비소유의 의지’라는 사랑의 방식이 빠질 수 있는 사기술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비소유의 의지가 어떤 전략적인 생각이라면(마침내!)?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그를 정복하려 한다면(물론 은밀하게?) 그를 보다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진다면?”

 

전략적으로 주체를 무화시킨다면? 그것은 사기술이죠.

아랑드롱

아! 죄송합니다. 더운데 피곤하게 해드렸군요. 쿨럭~

세줄 요약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잘 안다고 오만 떨지 말 것.

상대를 그 자체 그대로 경청할 것.

그러나 사기 치지는 말 것.

이상입니다.

 

 

오딧세이적 주체, 오이디푸스적 주체, 사드적 주체: 영화 ‘아가씨’와 주체의 담론들 [나인당케의 단상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상이한 형태의 주체들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들의 관계의 형태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 관계들이 전복되며, 하나의 주체가 다른 형태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즉 주체의 고양 과정 역시 보여준다. 즉 영화 곳곳에는 주체의 위치변경과 고양을 암시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씨>는 한 편의 성장드라마이자, 계몽주의 시기에 연원을 두고 있는 ‘교양(Bildung)소설’의 현대적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주체의 고양의 귀결이 주인공이 속한 하나의 세계(한 평생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집)의 붕괴와 성공한 탈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극대화된다.

 

여러 가지로 <아가씨>의 전편과 같은 느낌을 주는 <친절한 금자씨> 역시 이러한 주체의 고양을 화두로 던진다. 그런데 금자의 변신이 배신과 감옥생활 속에서 얻은 스스로의 깨우침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복수라는 달성해야 할 분명한 목적에 의한 것이라면, <아가씨>에서 두 여성의 각성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즉, 주체의 각성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물음은 주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물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은 금자가 자신의 딸 앞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즉 내러티브의 결과로 도달한 지점이다. 그러나 <아가씨>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전도가 그 자체로 사건을 촉발시킨다.

 

이 점은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물로 대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소통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고찰 속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해 보자. 오딧세이적 계략의 두 주체는 어떻게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하는가?

 

오딧세이적 주체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신화 속 오딧세이의 모험과 귀향 과정을 “주체의 근원사”로 파악하여, 그 안에서 근대적 주체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 중에서도 아도르노가 작성한 오딧세우스에 대한 보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목적(이타카로의 귀향)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지략을 도구적 합리성으로 사용하는 근대적 부르주아 주체의 원형이다.

 

02691_D잘 알려진 시레네의 노랫소리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오딧세우스는 부하 병사들이 시레네의 유혹을 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은 뒤 자신은 배의 돗대에 몸을 묶어 이 유혹을 통과한다. 키르케의 유혹과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과정에서도 오딧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한다. 자신의 지략을 통해 상대를 물리치고 목적을 달성하는 주체의 모습 속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부르주아적 차가움(bürgerliche Kälte)”의 원형을 발견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근대적 주체의 유아론적인 태도 속에는 먹잇감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려는 맹수의 냉혹함이 내포해 있다. 이타카에 도달한 오딧세우스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던 구혼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물론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이 과정을 모험담이자 영웅담으로 미화한다. 부르주아적 주체의 영웅담을 ‘기업가 신화’로 포장해 미화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눈에 간계를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근대 부르주아 주체의 냉혹함의 원형일 뿐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모두 이루고 싶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상대를 희생시키려는 계략의 주체였다. 숙희는 히데코를 백작과 결혼시킨 뒤 정신병원에 보내 그녀의 재산 중 일부를 가로채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목표가 있었다. 히데코는 거꾸로, 그러한 숙희를 속여 자기 대신 병원에 가두고, 자신은 숙희의 이름을 빌려 이모부 코우즈키의 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했다. 둘은 모두 백작이라는 고리의 매듭과 공모하여 서로를 희생시키고자 했던 오딧세우스적 계략의 주체들이었던 것이다.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하도록 앞장서는 숙희의 모습과, 숙희의 어리숙함을 확인한 뒤 안도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그러한 계산적 주체의 냉혹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략적 태도의 반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아가씨와 하녀. 서로 양 극을 이루는 두 주체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찍 부모를 잃고 외톨이로 살아가는 히데코를 씻기고 입혀서 아름다운 공주로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낀 숙희는 히데코의 어머니가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히데코에게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소문난 미인이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난 엄마만 못하다는데…’ 하고 하소연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전설적인 소매치기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소문으로만 기억하는 숙희 자신의 모습의 투영이다. 모든 지각은 투사 과정이라고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말한다. 히데코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숙희의 마음은 그러나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동일성원칙의 주체와는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는 미메시스적 주체의 모습에 가깝다.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봐’라는 히데코에 말에 ‘어머니는 아가씨에게 널 낳고 죽으니 괜찮다고 하실 거에요’라고 말해주는 숙희. 이 말은 그 자신이 여두목에게 직접 들은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말로 상대를 위로하는 숙희와, 그러한 위로의 말로 상처를 달래는 히데코의 동병상련은 이 두 주체가 서로를 희생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느끼는 계기가 된다. ‘넌 내가 불쌍하니? 난 네가 불쌍해’ 하고 자살을 시도하던 히데코는 말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연민하는 관계는 불행하다. 그러한 관계는 연민하는 자와 연민을 받는 자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각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이뤄지는 아픔의 공유는 둘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든다. 연대는 그러한 수평적 관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두 주체는 이제 여성적 연대를 이룬다. 계략을 통한 주체에서 연대하는 주체로 고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대의 계기는 상대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공감이다. 그러나 두 주체의 관계는 공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두 여성은 자신들이 각기 다른 남성적 주체들 – 이모부와 백작 – 의 또 다른 희생물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이제 이 상호 연대는 또 다른 주체들에 대한 대항의 관계로 전화된다. 고통받는 자들의 연대는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다른 주체들의 지배에 대한 거부의 원천이다. 이 또 다른 주체들, 그들은 극도의 거세컴플렉스를 지배본능으로 전화시킨 남성들이다.

 

오이디푸스적 주체

 

IngresOdipusAndSphinx잘 잘려져 있듯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유아가 겪는 최초의 성애가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근친적인 성격을 가지며, 아이는 어머니를 소유한 아버지의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 위협을 느끼고, 이 관계를 내면화함으로써, 즉 아버지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오이디푸스기를 극복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그의 근원적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다는 결여감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내면화된 아버지의 권위(초자아Überich)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이드Es)을 희생시켜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이디푸스를 극복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남자 아이는 처음에는 여자들도 자신과 같은 남근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다른 여자아이의 성기에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아이는 자신의 남근도 거세될 수 있다는 공포를 겪는다. 아버지의 지배질서는 이러한 거세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체험된다. 이는 아이가 그토록 쉽게 원초적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규범을 받아들이는 이유로 설명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동시에 거세위협을 겪는 주체이며, 그러한 위협 앞에 자신을 희생시킨 주체다. 이 위협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아이는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즉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다면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속에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게 된다. 남성적 리비도가 지배본능과 결합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여자 아이는 자신에게는 없는 남근을 남자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뒤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세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남근선망에 빠진다. 즉 남자가 되고 싶고, 남근을 갖고 싶다는 불가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여아는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자각한다. 이는 여자 아이가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나는 이유로 설명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신경증의 발병은 이 두 콤플렉스, 즉 거세콤플렉스와 남근선망의 극복과 관련되어 있다.

 

왼 손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오른 손에도 구멍이 뚫리는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고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순간 백작의 입에서 발화된 말은 “자지를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실제로 히데코의 이모부가 그의 성기를 거세시키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남근을 지키고 죽는 것이 다행이라는 그의 말 속에서 백작은 극단적인 거세콤플렉스를 겪는 오이디푸스적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의 이전작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혀를 희생시킴으로써 남근을 지킨 인물이다. 누나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이유진이 그에게 ‘이유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자신의 누나를 (상상) 임신시켰다고 분개하자, 오대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스스로 절단한다. 이처럼 누나를 임신시킨 ‘상징적’ 남근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제적 남근을 지킬 수 있었고, 딸인 미도와의 근친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작과 오대수는 모두 남근을 지키려는 남성 주체들의 거세공포를 재현한다.

 

백작의 거세공포는 거꾸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남근이 갖는 ‘권위’에 집착하게 만든다. 숙희를 협박할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성기에 강제로 접촉시킨다. 이것은 자신의 말에 ‘남근’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근에 맹세하건데’ 나의 말은 장난이 아니라는 위협이다. 그는 여성의 남근선망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숙희는 그의 위협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X대가리’를 치우라고 함으로써 이 남근의 권위를 조롱해버린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 역시 남근의 형상을 자신의 권위의 지표로 삼는다. 남근의 권위를 상징하는 뱀의 형상은 넘어서는 안 될 금기를 지시한다. 이 비밀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 도망쳐서도 안 된다. 뱀 조각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지칭한다. 뱀은 그의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음란한 독서회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히데코와 함께 도주하는 날, 숙희는 히데코가 강제로 낭독해야 했던 책들을 내다버리고 이 뱀 조각을 잘라버린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들이 만들어 놓은 남근의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남근선망은 없다’는 것을 반항적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두 여성은 남성의 고환을 상징하는 방울들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유희를 나눈다. 권위와 금기를 상징했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남근은 이제 남성들의 질서에서 벗어난 두 여성들의 유희의 대상이 된다. 남근은 선망의 대상이기를 중단하고, 그 권위적 역할은 상대화되며 가치저하된다. 이제 두 여성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를 극복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거듭난다. 오이디푸스의 (누이이자) 딸인 안티고네는 테베의 새로운 왕 크레온이 내린 금기, 즉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도, 장례를 치러주지도 말라는 명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매장한다. 지배자의 금기를 어긴 안티고네의 행위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이항대립이라는 사고를 낳았다. 인간의 법은 죽은 자에 대한 원한으로 그의 시신 매장을 금지했지만, 신이 내린 법은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실정법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계명을 뜻한다.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는 죽음을 자초한다. 히데코와 숙희는 남근의 권위가 부여하는 법을 어김으로써 신의 법을 실행에 옮긴 안티고네의 후예들임을 드러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귀족 집안의 상속녀 히데코의 삶을 망치는 것은 동시에 그녀를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좁은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남근이 부여한 금기와 질서에 순응해 왔던 삶을 붕괴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붕괴는 기존의 주체가 새로운 주체로, 즉 자기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주체로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한한 욕망을 즐기는 사드적 주체 말이다.

 

사드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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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즈키의 비밀 장서관에서 열리는 낭독회에서는 사드를 흉내낸 일본인 작가의 포르노 소설이 낭독된다. 코우즈키는 실제로 사드의 <소돔 120일>에 등장하는 사악한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욕정을 실행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살인을 하고 음모를 벌는 사드의 인물들과, 아내를 버리고 새로 맞은 일본인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조카를 자신의 욕망에 동원하는, 그리고 관음증적인 성적 도착에 탐닉하는 코우즈키는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얻으려 하는, 악덕의 관능을 예찬하는 사드적 인물이다. 그의 대저택과 비밀장서관은 <소돔 120일>에서 6개월 간 향락과 폭력의 잔치가 벌어진 블랑지스 공장의 대저택을 연상시킨다.

 

<소돔 120일>은 사드가 12년간의 감옥 생활중 쓴 책으로, 이 책에서 묘사된 악덕과 폭력, 광기, 온갖 종류의 도착적 성행위들은 악덕을 지지하고 도덕에 분개했던 작가 사드의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아 그가 풀려난 뒤, 그는 좀 더 절제되고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는다. 그의 성과 정치에 대한 관점이 집약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규방철학>에서 사드는 프랑스혁명이 몰고 온 악습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작업이 일상을 구속하는 구 시대의 성도덕에 대한 폐지와 해방으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생땅쥬 부인의 별장 규방에서 벌어지는 향락은 이제 새로운 시대 리베르탱이 지녀야 할 철학적 입장을 배우고 그것을 몸소 구현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을 맡는다. 구 시대가 강요하는 성도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라는 돌망세와 쌩땅쥬 부인의 가르침은 새 시대의 리베르탱들에게 전달하는 사드의 호소였다. “한 마디로, 성교하고 성교해라. 바로 그것이 네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네가 가진 힘과 의지 말고는 네 쾌락에 구속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 시대의 도덕은 성과 욕망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욕망이 제기하는 충동과 그 흐름이 곧 도덕이 되는 것이다. 이 도덕은 인간이 종교의 허울을 쓰고 만들어낸 관습이 아니다. 새로운 도덕, 즉 향유하라는 도덕은 자연이 우리에게 욕망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현할 신체적 에너지를 줌으로써 명령한 우리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즉 자연이 부여한 목적이 바로 입법의 원리가 된다.

 

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히데코는 <규방철학>에서 모친의 강요로 수녀원에 가야 했던 소녀 으제니를 닮아 있다. 돌망세와 생땅쥬 부인의 교육을 받는 학생 으제니는 넘쳐나는 호기심과 놀라운 습득력으로 그들의 스승들을 들뜨게 만든다. 히데코는 숙희의 제자가 되어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법을,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에게 내맡기고 탈주를 실행하는 히데코는 자신의 충동 외에 그 어떤 도덕적 규칙에도 순응하지 말라는 사드의 계명에 충실한 사드적 주체다. 즉 <아가씨>에는 두 가지 사드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는 <소돔 120일>의 사드적 주체인 코우즈키이고, 다른 하나는 <규방철학>의 사드적 주체인 히데코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사드적 주체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드는 도덕적 판단에 무관심했던 인물이고, 누가 ‘진정한’ 주체냐는 식의 물음에는 하품을 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어떤 욕망의 주체를 긍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오딧세이적 계략의 주체에서 연대하는 미메시스적 주체로, 오이디푸스적 남근선망을 거부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으제니의 모범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드적 주체에 도달한 어떤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주체의 담론에 대한 영화로 이해될 수 있다.

 

도덕적 해이 vs. 도둑적 해이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맴맴맴매~엠~

매미들이 목청이 터져라 울어댄다. 낮에도 밤에도 아침에 눈을 떠도 울고 있다. 매미들은 잠도 안자나. 어제 울던 그 놈들이 아직도 울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내가 알게 뭐냐, 지들도 사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데. 하긴 그럴 만도 하다. 7년을 땅 속에서 보내고 올라온 매미에게 지상에서 허락된 시간은 단 2주. 그들에겐 오직 짝짓기만 있을 뿐. 사람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

그래도 그렇지. 연일 이어지는 불볕더위에 매미까지 종일 울어대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뭐 어쩌겠는가. 자연이 언제 사람 사정 봐가면서 돌아가더냐. 화산 폭발도 지진 발생도 제멋대로 예측불허다. 쓰나미도 사람 봐가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다 쓸어버린다. 고3 수험생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매미가 조용조용 눈치 보며 울지 않는 것처럼. 자연은 이렇게 무심하다.

그런데 우리 곁에 자연 말고도 무심한 자들이 또 있다. 우리에게 유심(有心)하겠노라 약속한 자들, 즉 공직자들이 그들이다. 공직자들이 우리에게 무심한 것도 그냥 넘겨야 할까. 지들끼리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박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마치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며 짝을 구하는 과정과 같다고 치부하며 관심을 꺼도 될까. 하루에 38분 꼴로 한 명씩 자살을 하든 말든, 175만 명의 노인들이 뙤약볕 아래서 1kg에 46원하는 폐지를 주워 연명하든 말든, 배가 뒤집혀서 학생들이 죽든 말든, 중동에서 이상한 바이러스가 국내로 들어와서 곳곳을 들쑤시든 말든, 산업 현장에서 연간 2,000명의 노동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든 말든, 검사/간호사가 일터에서 폭언·폭력에 시달리든 말든, 그로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에 자살을 하든 말든, 밤낮을 가리지 않는 빚 독촉으로 사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든 말든… 공공을 돌보는 일을 업으로 삼는 공직자들은 마치 자신이 자연인 양 무심하다.

그런데 얼마 전, 평소엔 이처럼 무심한 정부가 청년들의 취업을 지원하기 위해 시행하는 서울시의 정책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최근(2016년 8월) 서울시가 청년수당을 지급하자 기다렸다는 듯 보건복지부가 시정 명령에 이어 직권 취소 처분을 내린 것인데, ‘식물’ 정부가 명민한 촉으로 동물적 감각을 발휘하며 우리를 놀라게 했다. 여기서 직권 취소란, 쉽게 말해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청년수당 사업은 무효이고 이미 지급한 수당은 다시 환수하라는 의미다. 정부는 서울시의 청년수당 사업을 두고 ‘무분별한 현금 살포다’, ‘지급받은 돈으로 술을 마시는 등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 ‘국민이 낸 세금이 허투루 쓰일 수 있다’, ‘돈의 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아 애초부터 수긍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서울시가 돈 있다고 함부로 할 문제는 아니다’ 등의 이유를 들며 악착같이 달라붙어 흠집을 내고 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아차!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청년들을 포함한 온 국민의 삶에 무심한 정부’,라는 그간 나의 생각은 맥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임을 깨달았다. 청년들에게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깊은 우려를 해온 정부를 자의적으로 매도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꼼꼼하고 세심한 지적을 하는 유심(有心)한 정부를 무심하다고만 간주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나도 이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정부를 향한 유심한 마음을 담아 진지한 관심과 애정을 표하고자 한다. 나의 자의적 판단은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정부 그대들이 제시한 논리에만 입각하여.
‘도덕적 해이’ 운운하며 청년들이 지급받은 수당을 술 마시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는데,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대들이 속한 집단의 ‘도덕적 해이’, 아니 ‘도둑적 해이’를 걱정한다. 아무렴 6개월 동안 월 50만 원씩 받는 사람이 낭비하는 세금 액수가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너희 도둑놈들이 헤쳐 먹는 세금과 비교가 될까. 서울시에서 지급하는 청년수당 90억 원 전액이 음주에 쓰인다 해도 자원외교 비리 22조 원을 비롯한 수십조 원에 이르는 고관대작들의 그간 도둑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다른 한편으로, 구직 청년이 6개월간 받는 수당으로 혹시 술을 마시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평생 세금으로 꼬박꼬박 월급을 타가는 부장 판사가 술을 처마시고 명백한 불법 행위인 성매매를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묻고 싶다.

돈 있다고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니 한번 물어보자, 개**놈아. 지방정부가 청년들에게 현금을 살포한다 한들 중앙정부가 구제금융이란 명목으로 부실 은행과 기업에 꽂아주는 수십조 원의 대규모 현금 살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법인에게 주면 현금 지원, 사람에게 주면 현금 살포인가. 나아가 현금 살포는 안 되고 현물 살포는 허용되는 것인지도 묻고 싶다. 우리가 낸 세금에서 나온 물대포 살포로 납세자를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건 권장할 일이고, 청년들에게 지하철을 타거나 도시락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라며 현금을 살포하는 건 함부로 해선 안 될 짓으로서 지양해야 할 일인지.

그리고 돈의 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산을 편성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하시니 나도 한 마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그대들에게 월급이 지급되는데, 그 월급의 사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렇게 말하는 그대들은 납세자에게 사용처를 제시하고 월급을 받아가고 있는가.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설마 술을 마신다거나 성매매를 할 목적으로 강남의 오피스텔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대들의 말마따나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니 앞으론 현직 판사를 포함한 모든 공직자들은 매월 예상 음주와 성매매 횟수를 포함하여 자신이 받아가는 월급의 사용처를 납세자에게 제출해 주길 바란다.

그대들의 말이 다 맞다. ‘무분별한 현금 살포로 인한 도덕적 해이’, ‘돈의 용처가 명확하지 않아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사업’ 전적으로 공감하고 수긍한다. 담뱃세를 올린 첫 해인 작년(2015년)에 2014년 대비 3.6조 원이 추가로 걷혔다고 한다. 올해엔 2014년 대비 6조 원이 국고로 더 들어올 것으로 전망한단다. 우리가 이렇게 돈을 갖다 바치는데 어찌하여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빚만 늘어갈까. 도대체 우리가 낸 세금이 어디에 쓰이길래.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정부의 입장 표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부를 향해 무분별한 현금 살포를 한 탓에 이를 집행하거나 국가 행정을 돌보는 공직자들의 ‘도둑적 해이’가 심화한 것이라는 자성 아닌 자성이 내부로부터 흘러나온 것. 그대들이 내세운 논리가 맞는다면 조세 행정 역시 거둬들인 돈의 용처가 명확하지 않아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사업이다. 돈 있다고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그대들의 주장처럼 돈 있다고 함부로 세금을 납부할 일이 아니다. 세금을 거둬 수중에 돈을 쥐고 있는 자들이 그 돈을 어디에 쓸 줄 알고 우리가 감히 세금을 낼 수 있겠나. 그대들이 징수한 세금의 용처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니 우린 이제 납세의 의무로부터 자유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그대들이 카메라 앞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다. 공무원인 그대들이 자발적으로 방송을 비롯한 각종 언론을 통해 세금 납부, 즉 그대들을 향한 우리들의 현금 살포 행위에 사실상 정당성이 없다는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하며 커밍아웃을 해주셨다. 때마침 사법부에 몸담고 계신 판사께서도 온몸으로 나서 행정부의 발표와 보조를 맞춰 주시니 한층 호소력이 있었다. 무심한 줄로만 알았는데 남몰래 뒤에서 이런 세심한 배려를 해주시다니.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그대들을 보니 7년간 어두운 땅 속에 있다가 한여름에 양지로 올라와 잠시 머물다 가는 매미가 생각난다. 맴맴맴매~엠~.

사진출처 : www.flickr.com 참여연대.

사진출처 : www.flickr.com – 참여연대

2016. 08. 08. [나인당케의 단상들]

단상1

우리 시대는 ‘신념에 가득 찬 투사’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닐 것이다. ‘신념’에 가득 찬 투사는 결국은 자신의 신념의 노예가 되어 아주 쉽게 근본주의자가 되곤 한다. 다른 한 편, 우리 시대에 ‘투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도처에서 우리는 여전히 투사들을 보고 있다. 오늘날 투사가 없다는 식의 푸념은 현실을 보지 않는 자세이거나, ‘내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투사가 아니야’라는 식의 자기위안인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다만 이해하는 것이다.

단상 2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밤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많은 수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태도인지 모른다. 이것은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과 확신은 상대주의와 동전의 앞 뒷면이다. 진리는 열려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오히려 진리에 대한 열정을 요구한다.

단상 3

오늘은 제2롯데월드에 처음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그 드높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본은 우뚝 솟은 거대한 남근의 형상을 하고 낮은 곳에 사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우러러보라고 요구한다. (벤야민의 말투를 한 번 따라해보자면: 하늘을 향해 지어진 성경 속의 바벨탑이 무너진 뒤, 인간은 공통의 언어를 상실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서울의 바벨탑은 그 자체로 현대인들의 소통불가능성을 알레고리적으로 체현한다.) 나는 그 모습에 분노스러웠지만, 5층의 전망 좋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는 길에는 잠실대로 인근에 아무 곳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경찰과 구청의 행정처리에 감격하며 또 분노했다. 저 거대하게 솟은 남근과 자본의 지배 앞에서 나는 고작 담배 한 개피를 어디서 피워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사회는 이렇게 개인을 통제하는가. 그물처럼 조직화된 ‘관리되는 사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단상 4

독일에서 귀국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밤에 제 시간에 잠이 든 적이 없다. 늘 피곤하면서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새벽이 깊어서야 잠이 드는데, 타지에서도, 고향에서도 언제나 아늑함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하는 삶이 우습게 느껴진다. 루카치가 100년 전에 기가 막힌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선험적 고향상실을 경험한다는 것. 즉 고향상실은 경험에 앞서서, 구체적 경험을 근거짓는다는 것.

단상 5

다시,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진리란 허공 어디엔가가 아니라 이러한 일그러진 삶의 미시적 형태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지 말고 이해하라. 그래야 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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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을까? [퍼농유]

우쑵니다.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이 무더위를 시원하게 해드릴 소식이라도 전해드려야 하건만 지난번에 이어 다시 홍보질입니다. 넵넵 ~~~ 더워 죽겠는데 더욱 짜증나게 하시겠지만 이 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방구석 컴퓨터 앞에서 이러고 있는 저는 오죽 갑갑하겠습니까. 정말 울고 싶어지는 한 여름 밤입니다. 막걸리라도 한통 마시고 ……. 쿨럭. 혜량하여 주십시요.

 

 

왜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을까? – 맹호연(孟浩然) 춘효(春曉)

 

1

봄잠에 새벽이 온 걸 깨닫지 못하니(春眠不覺曉)

곳곳에 새 우는 소리다(處處聞啼鳥)

밤에 온 비바람 소리에(夜來風雨聲)

꽃은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花落知多少)

 

맹호연(孟浩然)의 ‘춘효(春曉)’다. ‘봄날 새벽’은 기이하다. 늦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봄날 새벽의 청신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늦잠에서 깨어 듣는 요란한 새 소리 때문에 봄날 새벽의 서글픔이 더욱 깊다. 어쩌라, 서글퍼한다고 비바람이 멈추는 것도 아니다.

새벽이 온지 왜 몰랐을까? 어쩌면 새벽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잠결에 비바람 소리는 또 어떻게 들었던 것일까? 그 모진 비바람에 꽃이 지고 있다. 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일까? 천만에 이것은 전원시가 아니다.

물론 맹호연은 전원시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묘사하는 전원은 한적하거나 밝지 못하다. 오히려 세상을 한탄하거나 울적하여 분위기가 밝지 않다. 그래서 청신한 새벽에 느끼는 울적함은 애처로움의 미학이다.

육유(陸游)라는 시인은 촉(蜀) 땅으로 들어가던 중 스스로 자문하였다.

 

이 몸은 시인이나 되라는 걸까?(此身合是詩人未?)

가랑비 속 나귀 타고 검문을 지났으니(細雨騎驢過劍門)

 

육유의 이 표현은 자신이 일개 시인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다. 주목해야할 것은 ‘나귀를 탄다’는 표현이다. 나귀를 타는 것이 왜 시인을 상징하게 되었을까? 맹호연 때문이다. “못 보았는가,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시 읊는 것을. 눈썹은 찌푸리고 어깨는 불쑥 솟은 산 같은 모습을.”(又不見, 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 소동파가 맹호연을 묘사한 이 말 때문에 눈 속에서 나귀를 탄 시인의 이미지는 고착되었다.

기려도김명국

당연히 그림의 소재로 널리 이용되었다. 맹호연의 초상은 아니, 시인의 초상은 나귀를 타고 눈 속을 걷는 것으로 묘사된다. 나귀를 타는 모습을 그린 기려도(騎驢圖)는 너무 많아서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선조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기려도와 함덕윤 기려도가 인상적이다.

기려도함윤덕

눈을 밟고 매화를 찾는다는 ‘답설심매’(踏雪尋梅)나 파교에서 매화를 찾는다는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이미지도 모두 맹호연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답설심매’와 ‘파교심매’도 마찬가지로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가 유명하다.

파교심매심사정

맹호연의 ‘춘효’와 관련하여 내가 주목하는 그림이 있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그림이다. 1915년에 백악과 경복궁의 실경을 그린 작품이다.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전해진다. 여름과 가을 풍경을 그린 것인데 제목이 왜 봄날 새벽을 뜻하는 ‘백악춘효’일까?

백악춘효

심전은 ‘백악춘효’에서 백악산과 경복궁을 실제에 가깝게 묘사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1915년 당시 경복궁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경복궁은 일제의 탄압 아래 파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파괴되는 경복궁 모습은 몰락하는 조선 왕조의 모습과도 같았다.

쓰러져 가는 조선왕조를 보며 심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심전 안중식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이왕직의 요청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백악춘효’를 완성한다. 조선왕조의 봄날이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렸던 것은 아닐까? 심전은 분명 맹호연의 이 시를 의식했을 것이다. 어젯밤 모진 비바람에 또 얼마나 많은 꽃들이 떨어졌을까? 봄날 새벽은 언제 오려나.

 

2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근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의 ‘낙화’이다. 맹호연의 ‘춘효’를 읽을 때면 항상 함께 떠오르는 시다. 맹호연은 모진 비바람에 지고만 꽃잎을 근심하지만, 조지훈은 꽃이 졌다고 해서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고 한다. 꽃은 질 수밖에 없는 때가 오면 지게 마련이다. 어쩌란 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일한 가신이었던 박지원은 2003년 교도소 가는 길에서 시를 읊었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 나는 의아해했다. 아니, 정치인이 교도소에 가면서 이런 시 구절을 읊다니. 낭만적이라서 놀랐던 것은 아니다. 그가 내뱉은 시 구절에는 묘한 상징적 대비가 있었다.

박지원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비바람은 누구겠는가? 박해하는 사람들이다. 꽃은 누군가? 박해를 받는 자신이 아닐까? 자신은 부당한 비바람에 의해서 비록 박해를 받지만 아름다운 꽃이기에 탓하지는 않겠다는 대범한 자신의 마음을 이 시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맹호연의 시를 봄날 한가함과 청신함을 노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함께 덧없이 지고 만 꽃의 허무함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을 읽어낸다. 탐미적이면서 허무한 서글픔이 배어 있는 달관적인 태도다.

그러나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꽃과 바람을 생각한다면 맹호연의 시는 그렇게 한가하지만은 않다. 바람은 부당한 소인배들의 세력이 벌이는 횡포이고 꽃은 그 횡포에 억울하게 당한 군자들이 아닌가? 맹호연은 꽃이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라고 근심하고 있다. 정의는 또 얼마나 부당한 세력들에게 박해를 받았던가.

<주역>에는 바로 소인들의 세력이 군자를 박해하는 상황을 상징하는 괘가 있다. 스물세 번째 괘인 박(剝䷖)괘이다. 산지박(山地剝)으로 읽는다. 괘의 모습이 산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위에 있고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괘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다섯 개의 음(陰⚋)효와 하나의 양(陽⚊)효로 이루어졌다. 음이 아래에서부터 생겨나서 점차로 자라 극성한 형세로 발전하여 하나의 양을 몰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소멸이며 박멸이다. 빼앗긴다는 뜻이 있다. 모진 비바람에 꽃잎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하나만이 남아 있다.

이 마지막을 상징하는 효가 박괘의 가장 위에 있는 양효이다. 이 마지막 여섯 번째 효의 말은 이렇다.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그의 집을 없앤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여기에 유명한 말이 나온다.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인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 ‘석과불식’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했다. 신영복은 석과(碩果)를 씨과실로 푼다. 그는 ‘석과불식’을 “씨과실을 먹지 않는다”고 풀면서 희망을 읽었다.

석과불식1

옛날 사람들은 과일을 딸 때 모두 다 따지 않았다. 몇 알은 반드시 남겨 새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까치밥이라 한다. 씨과실은 상징적으로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있는 초겨울의 감나무를 상상하면 좋다.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가 ‘희망’을 상징한다.

씨과실은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씨를 남긴다. 가장 크고 탐스런 씨과실은 단 하나 남았더라도 희망이다.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을 피우기 때문이다. 스물세 번째 박괘 다음 괘는 무슨 괘일까? 스물네 번째 괘는 복(復䷗)괘이다. 지뢰복(地雷復)이라고 읽는다.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위에 있고 우레를 상징하는 진(震☳)괘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땅 아래에서 우레와 같은 양(陽)의 기운이 올라온다. 복괘를 자세히 보면 제일 아래에서 양(陽)효 하나가 여러 음(陰)들의 세력을 뚫고 올라오고 있다. 생명의 소생을 상징하는 괘다. 박괘를 이어 복괘로 이어지는 과정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다. 반드시 씨를 남기고 소생한다. 다시 빛이 솟아오르는 광복(光復)이다.

심전 안중식이 1915년 ‘백악춘효’를 그렸을 때 조선의 광복을 희망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봄날의 새벽 광복은 1945년에 왔다.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은 단지 희망만이 아니다. 희망을 꿈꾼다고 해서 반드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희망의 근거다. 희망은 단지 환상적인 허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괘의 ‘석과불식’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먹히지 않았을까?

 

3

맹호연은 지고만 꽃잎을 서글퍼했지만 조지훈은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고 했다. 탓할 수 없다고 해서 체념하고 포기해야한다는 말일까? 박괘에 달린 괘의 말은 이렇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멈추는 것은 소멸되어 빼앗기는 모습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군자는 자라나고 줄어들고 가득차고 텅 비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것이 하늘의 운행이기 때문이다.(順而止之, 觀象也. 君子尙消息盈虛. 天行也.)

 

불의한 세력의 비바람에 의해서 박해를 받는 고난의 시대에 그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는 것은 자포자기적 체념은 아니다. 힘겨워하고 두려워하면서 혼자 괴로워하는 일도 아니다. 분노하고 한탄하고 저주하는 일도 아니다. 무모하게 저항하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자조하는 것도 아니다. 냉정을 되찾는 일이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멈추”는 일이다.

“소멸되어 빼앗기는 모습을 관찰했다.”는 말은 그래서 비바람의 박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자라나고 줄어들고 가득차고 텅 비는 과정”을 파악하여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세의 부득이함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이렇게 냉정하게 현실을 이해하면서 희망을 품는 씨과실은 어떤 비바람이 올지라도 먹히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눈물 흘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이해하라.”고 했다. 비바람에 꽃이 졌다고 해서 징징거리고 있을 수는 없다.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있는 겨울날 나무들의 신세를 직시하는 일이다. 어쩌다 이 가혹한 겨울이 왔던 것일까? 어쩌다 단 하나의 감만이 남아 비바람을 견디고 있을까?

Spinoza

이렇게 되어버린 시세와 형세의 원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꽃잎이 졌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요, 비바람을 탓할 필요도 없다. 자초한 일이라고 자학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때가 되면 꽃은 지게 마련이지만 꽃이 질 수밖에 없는 형세의 원인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먼저 이해하라. 이해한다는 말은 언더스탠드(understand)이다. 언더스탠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언더(under)에 스탠드(stand)해야 한다. 사람들의 언더는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을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에 선다면 서글퍼하기를 멈추고 냉정하게 이해해야한다. 언더에 스탠드하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언더에 스탠드할 일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한다. 하지만 먼저 사람들에게 가기 전에 자신의 무의식 아래에 깔려있는 편견과 오만과 증오 등의 썩어빠진 엘리트 근성들을 먼저 이해해야하리라. 그것을 먼저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호연에게는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함께 덧없이 지고 만 꽃의 허무함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있다. 인생을 달관한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달관한다고 해서 봄은 오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이 모진 겨울을 넘기면 다시 봄이 오겠지라는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도 봄은 오지 않는다.

희망은 기다림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넋 놓고 기다리는 무기력이 아니다. 희망은 냉정한 자기 이해와 현실 인식에서 솟아오르는 부득이함이다. 이 부득이함은 어찌할 수 없기에 할 수밖에 없는 힘과 의지로 충만하다. 이 힘과 의지 때문에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기다림은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씨앗을 땅에 일구는 일이다. 씨앗을 땅에 심기 위해서는 더렵혀진 땅을 새롭게 일구는 작업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꽃이 졌다고 해서 서글퍼하는 일도 사치인지도 모른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8

고래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작은 물고기의 소리는
고래의 한 숨에 흩어지고

물고기의 뜨겁던 여름이
내 가슴에 떨어져
파랗게 익어간다.

작은 깃털의 숨소리에
고래는 떨고 있어

나는 계속 바람의 노래를 불러야겠다.

2016-7-31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7-31 고래 (1)


작가노트

비어있는 공간의 작은 깃털은 작은 물고기도 되고 사람의 코가 되기도 하고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포획하는 고래가 되기도 하고 사람의 입이 되기도 합니다.
작은 물고기와 큰 물고기의 관계는 우리 삶의 한 형태로 보여집니다.
수 없이 쏟아내는 세상의 언어는 이 둘의 관계처럼 먹고 먹히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입과도 같습니다.
입은 따뜻한 사랑을 만드는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차갑게 박히는 유리조각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지금의 사회의 국민인 사람들과 나라를 운영하는 정치인의 관계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화합이 아닌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듯해 이 세상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여름과도 같습니다.
내 가슴에 작은 소리의 열매는 익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바람의 노래를 부르면 언젠가는 빨갛게 익어
작은 물고기와 큰 물고기 합해져 조화를 이루는 얼굴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의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 – 영화 <곡성>과 악에 대한 성찰 [톡,톡,씨네톡]

한상원(한철연 회원)

 

영화 <곡성>은 곳곳에서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부활한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성흔을 보여주는 예수를 다룬 서두의 복음서 인용이 그렇고, 영화 말미에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내 곁에 있으면 모두가 살아나고 악마들이 질 것이라고 알려주는 무명(천우희)의 대사가 그렇다. 후자는 닭이 울기 전에 세 차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양자는 모두 믿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를 믿지 않았고, 그가 끌려갔을 때 그와의 관계를 부인하였다. 영화에서 주인공 종구(곽도원)의 믿음이 흔들린 순간,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곡성>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다룬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곡성>은 그보다 더욱 깊은 문제를 제기한다. 믿어라. 왜 믿지 못하는가. 무엇을? 신의 존재를? 아니다. <곡성>이 믿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악의 존재, 세계의 악이다.

그 메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영화의 종결부다. 한 편에서 종구가 수호신 무명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교차편집을 통해 동시간적으로 양이삼 부제(김도윤)는 악마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만난다. 죽은 외지인은 3일만에 부활한 채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메시아의 모습과 마찬가지다. 낫을 들고 악마를 벌하러 간 부제는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외지인이 다시 묻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부제는 말한다. 악마다. 왜 말을 못 하는가. 외지인이 말한다. 자네가 이미 말했잖나.

이 대사는 요한 수난 복음에 나오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상기시킨다. 나약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빌라도는 예수에게 추궁한다. 그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는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하고 답한다. (요한 18,37) 나를 임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여라, 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도 나약한 인간 빌라도는 그를 스스로 처단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그의 처분권을 이양한다. 믿음이 약한 부제는 마치 빌라도가 예수를 끝내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외지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외지인이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를 살려주고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외지인으로 넘어간다. 그는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부제가 왜 믿지 못하는지 추궁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몸에 난 성흔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내 몸을 만져보아라. 수난당한 뒤 부활한 그리스도를 완벽히 재현해내면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나약한 부제를 조롱한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가장 논란이 많은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건,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냐고 우리에게 묻는 (신이 아닌) 악마의 목소리가 외지인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것이었다. 너희 인간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은 나, 즉 악마의 존재 역시 부인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계는 악하지 않다고 말한다. 보아라. 나는 악하고, 너희가 나의 존재를 부인하는 동안 너희는 악에 의해 지배당한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은 절대적인 것이고 시초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 반면, 악은 선의 결핍으로, 선이 부재한 곳에 자리잡은 어둠으로 정의내렸다. 악은 따라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악을 창조하지 않았다. 악은 신이 창조한 선의 빛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자라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헤겔은 선 역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은 그것의 대립물인 악의 부정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악은 선을 규정하는 데 불가피한 요소다. 만일 우리가 헤겔의 논의를 확대해본다면, 악에 대한 존재 증명은 동시에 선의 존재에 대한 증명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선과 악이 상호 대립하지만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념쌍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대해서는 인색해 왔던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세계에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비정한 세계,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선’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가 공감할 사실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는 만큼이나 ‘악’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아우슈비츠와 대학살, 거대한 살육전쟁 등을 악으로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거대한 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가? 세계에 악은 세계에서 소멸했는가? 세계는 더 이상 악의 지배를 받지 않는가? 악은 종교인들이 현대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규제할 때 사용하는 보수적인 슬로건에 불과한가? 오히려 한나 아렌트가 말한대로, 악은 ‘평범성’의 모습을 띄고, 우리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악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악마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영화 <곡성>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전지전능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희생물로 바쳐질 자들의 옷을 입고 쪼그려 앉아서는 우리에게 돌맹이를 던지며 주의를 끄는 미약한 메시아가 우리에게 하려던 말 역시 악이 존재한다는 것, 악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죽은 듯 숨어 있다가도 부활을 기다리는 악이, 자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약한 인간에게 ‘성흔’을 보여주며 존재를 과시할 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악에 대한 믿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악의 존재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그러한 악으로부터 현혹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과 악에 대한 교리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태초에 신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했으나 선이 모자란 자리에 악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은 악이며, 부재하는 선은 바로 그 악에 대한 대항으로서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악이 존재한다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이 현재를 넘어설 수 있는 ‘각성’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 영화 세편이 모두 극악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세 편을 통해 계속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요.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은 이유없이 벌어지고 행해지지 않게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악에 대한 성찰은 선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쪼그려 앉아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 메시아와 손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이전에 악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악의 존재를 믿는 자만이 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다. 선은 미약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어느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 힘으로 악과 부딪힘으로써. 미약한 선의 꺼질듯한 촛불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곡성 공식 포스터 사진출처 : 프레시안

영화 곡성 공식 포스터 – 사진출처 : 프레시안

우리 모두의 삶과 플라톤의 ‘동굴’ [평이의 궁시렁]

‘우리 모두는 스스로 세상과 이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똑같은 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모두의 지적인 능력도 때론 망각되거나 왜곡되면서, 그 어떤 외부의 상황과 조건에 눌려 변형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 [국가] 7권에서 제시하는 ‘동굴’ 이야기는 바로 이런 외부의 조건에 대한 재미난 비유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동굴에 갇혀 동굴의 벽면에 비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를 보며 자라온 죄수들에 대한 이야기. 그 동굴 속에서 죄수들은 동굴 밖의 세계에 찬란히 진리의 태양(플라톤에게는 ‘좋음의 이데아’)이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동굴 입구에서 타오르는 횃불에 의해 생겨나는 현란한 그림자의 세계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과 사회, 세계에 대해 판단하고 토론하며 산다.

아마 이 비유를 들으면, 당연히 여러 영화의 이미지들이 떠오를 것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주입받으며 알처럼 매달려 사육되는 미래세계를 다룬 영화 <매트릭스>부터, 생방송 세트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방송을 위해 사육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트루먼 쇼>까지.

그런데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지 영화 속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우리도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속하게 된 수많은 외부적인 조건에 휘말려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 심지어 욕망까지도 좌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때로는 ‘한국’이나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 강한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국가가 제공한 다양한 감정과 자부심에 휘둘려 한때 우리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들의 젊음을 그 자랑스럽다 여긴 국가에 헌신하지 않았던가? 또한 지금도 ‘남성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 맞춰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동시에 비슷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태어나 엇비슷한 상황 속에 휘말려 나름의 시대적인 동굴 속에서 세상과 사회에 대해 판단하며 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결코 세상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며 살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생각이나 관념 더 나아가 그런 제도들’까지도 지칭하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지적인 능력을 늘 그렇게 굴절시킨다. 누구보다도, 어느 시대보다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사실상 여전히 우리 외부의 그 어떤 동굴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노예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 외부의 미디어 환경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이 조금이라도 왜곡되고 굴절된다면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일부 보수 언론 매체에 사로잡힌 보수적인 어른들, 또 매순간 자극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러한 영향력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진리의 태양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사실 그렇다. 오늘날 현대 철학의 지형은 더 이상 그 어떤 명확한 진리의 세계도 확인할 수 없고, 때로는 그런 진리를 내세우는 일이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무언가 진리를 내세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은 마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처럼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우리 현대인들이 이런 진리 추구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지금의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기만 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희망은 그저 헛된 이데올로기였기에,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체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늘 자신의 시대에서, 스스로가 갇혀 있는 시대의 ‘동굴’을 감지하면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을 꿈꾸려는 지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갇혀 있는 ‘동굴’의 실상을 몸소 경험하며 나름의 괴로움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인 괴로움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면, 이로부터 시작해 ‘동굴’로부터 탈출하려는 우리들의 지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우리가 함께 속해 있는 ‘동굴’의 상황을 몸소 느끼며 경험한다. 때때로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외로움, 삶의 고통과 고뇌, 물질적인 고민과 절망 때문에 늘 혼자 안으로만 썩어 문드러지는 내 모습을 본다. 그럼에도 이런 나의 모든 괴로움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꺼라 생각하며 다시 딛고 일어선다. 아마도 이런 우리의 모습이 서로 만남과 실천을 이루어낼 때, 조금이나 동굴이라는 상황은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사진출처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멋진 학생.

사진출처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멋진 학생.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 플라톤의 동굴과 연결한 발표문 중 캡쳐.

지하 대학생의 며칠 [피켓2030]

이번 [피켓2030]에서는 특별히 소설 한편을 올립니다. ‘문과여서 죄송하다’말이 ‘문송’이라는 신조어로 굳어질 정도로 험난한 이 시절에, 철학과를 졸업하고도 감히 작가를 꿈꾸는 한 작가 지망생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일면을 잘 드러내주는 글인 것 같아 전편을 모두 올립니다. 스크롤의 압박을 느끼시겠지만 그래도 읽어보시면 정말 잼납니다.ㅎㅎ


지하 대학생의 며칠

정승우(작가 지망생)

 

바닥까지 왔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어느 정도 지난 지금, 분명 나는 그 때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있다. 눈을 뜨는 새로운 아침마다 더 깊은 밑바닥을 맛본다. 이제 좀 그만 일어나자. 침대에서 일어나자는 게 아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 이정도면 죽어도 되잖아. 하지만 이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하고 눈을 뜨면 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먹고 살아야한다. 일을 해야 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 돼야한다. 빌어먹을. 귀찮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사실 엄청 아프지는 않다. 이것도 내성이 생겨선지, 예전 같았으면 머리가 아프다며 침대에서 마구 뒹굴었을 것이다. 이젠, ‘아프다’ 한 마디 하고 말아버린다. 익숙해진 걸까. 뭐가 뭔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다지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다. 대신, 몸에 힘이 너무 없어 움직일 수가 없다. 이렇게 인간이 힘이 없어도 될까 생각을 하다가 마치 내가 한 마리의 벌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온 몸을 최대한 오므리고 벽에다 붙는다. 벌레라면, 벌레의 마땅한 모습을 해야지. 최하의 인간이 된 것 같다.

해는 모습을 감췄다.

여기, 반 이상 땅으로 들어가 있는 조그만 한 칸의 방은 자연의 순환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 아니 자신의 속성만을 끊임없이 고수한다. 어두움.

어두움으로 가득한 이 한 편의 지하세계는 그 이름에 걸맞게 죽음을 데려오려 한다. 여기에 갇힌 나는 이곳 밖의 사람들 보다 더 빨리 죽어간다.

이 어두움의 공간 속에서 내 몸의 열은 슬며시 빠져나가버리고 다시 그 열을 채워줄 해는 이곳에 닿을 수 없기에, 나에게 남은 것은 그저 빠져나감들 뿐이다. 열기의 빠져나감, 욕망의 빠져나감, 생명의 빠져나감. 

나는 이 어두운 구석에 눕혀져 이 한마디만을 되풀이한다. “살려주세요.”

어젯밤, 술을 마시고 들어와 노트에 끄적댄 글이다. 뭐, 이런 걸 썼지. 하긴, 반-지하 방에서 2년 정도 살다보면 어둠이 지긋지긋해지기 마련이다. 지금 시계가 한시쯤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 방은 아직도 컴컴하다. 작은 창문이 하나 있으나, 그것이 왜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빛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곳으로 환풍이 되는 것 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밖에 볼 만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창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반대쪽 똑같은 반-지하 방의 창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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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마, 일어나 봐라. 뭐 좀 먹자.”

친구 한 녀석이 침대 밑에서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이 친구는 일주일에 두 번은 이렇게 내 방에서 뻗어있다. 불을 켜야지. 녀석이 새우잠을 자고 있다. 아까 내가 벌레 모양을 한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최하의 인간이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안도감.

“용건아, 좀 일어나라 인마.”

그제야 친구는 눈을 뜨고, 우리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자다 일어난 꼴 그대로 내 방을 나온다. 밖에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 쬐고 있다. 동굴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 같은 기분. 왠지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백반 집에 들어가서 제육볶음 하나와 순두부찌개 하나를 시켜 노나 먹는다. 참 맛있다. 평생의 끼니를 이것으로 충당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두 개를 먹는 데에 만천원이라는 돈밖에 들지가 않는다. 정말 평생 동안 이것만 먹는다고 해보자. 돈을 많이 안 벌어도 되겠네.

“야, 어제 나 술 먹고 뭐 안 했냐?” 용건이 매일 하는 질문을 어김없이 한다.

“뭐, 별 거 없었지. 늘 하던 대로.”

“또, 술 먹고 난리쳤어 그럼?”

“뭐, 늘 하는 정도로”

“술 그만 마시자, 이제”

“늘 그래야지.”

이정도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다. 시답잖은 편이지. 용건이 계산을 한다. 일종의, 하룻밤을 내 방에서 묵은 대가다. 나는 장사꾼이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지만, 기분이 좋다. 용돈을 타 쓰는 이에게 밥 한 끼 값이 굳는다는 건 꽤나 큰 기쁨이다. 아, 세시 수업을 가야하는데. 뭐, 가야지. 우리는 다시 내 방에 들러, 가방만 든 채 나온다. 씻는 거야, 늘 보는 애들이니 이렇게 하루쯤 씻지 않아도 큰 무리는 없다. 무엇보다 그 친구들에겐 씻지 않은 내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하니, 더욱더 큰 무리가 없다고 봐야지.

문과대로 가는 길에 용건은 학교 호수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한다. 정말 예쁘지 않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지만, 나는 귀찮아 대답을 넘겨버렸다. 처음엔 꼬박 대답을 해주었지만, 똑같은 물음을 계속해대니 나도 별수가 없다. 이번이 몇 번짼지. 여러 해를 봐온 호수인데, 용건은 매일 술을 마시며 호수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매일 호수가 예쁠 수 있는 거겠지. 어쩌면, 그게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똑같은 것을 보고서 매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아름다운 것을 찾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러면 귀찮을 일이 없지. 아. 나도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모든 걸 다 까먹어버렸으면. 그럼 모든 걸 다 아름다워 할 수 있을 텐데. 나이가 들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늘어나고,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주변 모든 것들이 아침 알람처럼 짜증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박쥐는 전혀 나쁜 놈이 아니야. 오히려 나쁜 놈들은, 싸움을 일으킨 놈들이지. 만약에 싸움을 일으킨 놈이 새들의 두목이랑 육지 동물의 두목 그 둘이라면, 그 두 놈이 나쁜 놈들이야. 우선, 싸우면 안 돼. 굳이 왜 싸워. 다투는 건 이 세상에서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그 두 놈이 싸움을 일으켰으면 그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거지, 왜 모두를 싸우게 만드느냔 말이야. 뭐, 그 둘이 싸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쳐. 그러면 새들, 육지 동물들 안의 어느 무리끼리 서로 시비가 붙었었겠지. 그러니까 싸움이 났을 거 아니야. 이 때도 똑같아. 자기들끼리 싸웠으면 자기네들끼리 싸워야지. 왜 모두 싸움을 하게 해. 일단, 이게 난 맘에 안 들어. 물론, 이건 그냥 푸념 식으로 하는 이야기고, 이제 중요한 걸 말해줄게. 들어봐. 박쥐는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태어나 보니 육지 동물과 새의 모습 중간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전쟁이 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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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헛소리 하네 인마.”
“헛소리가 아니고, 들어보라고. 그러니까, 박쥐는 폭력을 당했어. 전쟁 중에 박쥐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겠지. ‘너는 어느 편이야?’ 박쥐에게 그 물음은 이런 것과 똑같아. ‘너는 어느 편이 될 거야? 너는 어떤 유(類)가 될 거야? 어서 정해. 그리고 잘 정해야 할 거야. 어떤 유가 되냐에 따라 너는 우리의 적이 될 테니까.’ 박쥐는 그냥 자기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을 거야. 이편, 저편이 아니라 그냥 박쥐로 말이야. 그런데 육지 동물과 새들은 전쟁 중이라는 그 상황에서 서로 이기기 위해 박쥐에게 강요를 한 거지. ‘너는 우리가 되어라.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끝이다.’ 박쥐는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열이 나게 이야기를 하고, 토를 하러 갔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셨다.


또 다시 눈을 떴고, 역시 내 방 침대에 나는 벌레처럼 누워있다. 오늘 있는 일 교시 수업을 한 번 더 빠지면 나는 F를 받게 된다. 그리고 눈을 뜬 지금은 12시 무렵이다. 수업은 이미 끝났을 것이고, 이제 나는 그 수업에서 F를 받겠지. 분명, 어제 용건에게 이 말을 하며 일찍 방에 들어가자고 했었지만, 당연한 결과다. 방은 여전히 컴컴하고, 이 녀석은 역시 새우잠을 자고 있다. 한편으론, 고맙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으면, 무리지어 다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다.
첫째, 무리 지어 다니면 생각을 할 겨를이 별로 없다. 그러니 고민이 없어지므로 아니, 고민을 할 시간이 없으므로 인생이 편해진다.
둘째, 무리지어 다니면 알게 된다. 나만 이런 등신이 아니구나. 인생이 편해진다.
제기랄. 그래도 나는 인생이 편하지가 않다. 이놈저놈 몰려다니는 데도 쓸데없는 생각이 끊임이 없다. 그래, 용건이 저렇게 자고 있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곧, 또다시 오만가지 생각이 들겠지. 니체가 틀렸다. 그래, 모든 걸 알 순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역시 제육볶음과 순두부찌개를 먹었고, 역시 용건이 계산을 했다. 그리곤 각자 집으로 갔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켜고, 노래를 들었다. 이 음악 저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딱히 내키는 것은 없다. 소리는 계속 흘러나온다. 그것은 내 귀로 들어오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소리가 음악이 되기 위해선 그것이 단순하게 일정한 음률을 지니는 것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 소리는, 지금 냉장고에서 세어 나오는 소음과 별 다를 것이 없다. 나의 집중은 그것에 가있지 않다. 내겐 둘 다 똑같이 윙윙 거릴 뿐이다.
밤이 되자 또다시 친구들의 연락이 왔다. 물론, 술을 마시자는 연락이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오늘은 방에서 쉴까,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이 술이나 마실까. 그리고 나는 역시 술이나 마신다. 술자리에 도착하니 친구 두 놈과 여자애 하나가 있다. 나는 모르는 앤데.
“야, 왜 이렇게 오는 데 오래 걸려.”
“빨리 온 거니까 조용해라.”
“얘는 올해 신입생이야.”
“안녕하세요, 철학과 신입생 신나리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이름 말해줘야지 인마.”
“이제 보지도 못 할 텐데, 됐어. 저는 그냥 4학년이에요.”


일학년 여자애가 잠깐 화장실에 갔다.
“야 저렇게 어린애를 네가 어떻게 아냐?”
“일학년 수업 안 들은 거 있어서 들으러 갔다가 예뻐서 봐뒀지. 예쁘지 않아?”
“몰라 인마. 진현아, 넌 근데 요즘 뭐하냐?”
“취업준비하지 뭐. 넌 돈 벌 준비 안 해? 그러다 쫄딱 굶는다. 돈을 벌어야 나중에 행복하게 산다. 형님 말씀 들어라.”
“아, 뭐 어떻게 되겠지. 야, 너도 취업준비 하고 있냐?”
“난 휴학해서 아직 3학년이잖아. 내년부터 하던가 해야지.”
재미없는 이야기들. 나는 술이나 마신다. 이 얘기도 별로, 저 얘기도 별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나는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정말 나는 필름이 끊겼고, 눈을 떠보니 내 방 침대였다. 분명 턱을 괴고 소주잔을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눈을 한 번 깜빡이니 방인 거지? 핸드폰을 보니 정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있다. 어젯밤에 전화한 거네.
“야, 나 어제 잘 들어갔냐?”
“그럼, 아주 잘 들어갔지. 내가 여자 있을 때 너 부르나 봐”
“왜 내가 뭐 했는데?”
“나리가 어제 너 부축해서 데려다준다고, 둘이 같이 간 거 기억 안 나?”
“몰라, 기억 안 나. 근데 걔가 왜 날 데려다줬는데”
“네 방이랑 같은 방향이라고 뭐 그러더라고. 하여튼, 허튼 짓 했기만 해봐라. 죽일 거다 내가.”
“아 몰라, 헛소리 할 거면 끊어.”
여자에 눈이 먼 놈, 나는 욕을 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뭐 그렇다 해도, 관심도 없는 애에게 내가 뭘 했을까봐 저렇게 유난인 걸까. 그 때, 메시지 하나가 왔다. 모르는 번호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 어제 같이 자리에 있었던 신나리에요. 속은 괜찮으세요?’
사진 두 개가 첨부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멋있는 말 같아서 찍었어요. 다음에 밥 사줘요, 오빠’
사진을 보니, 내 수첩을 찍은 것이었다.

숨김없음. 계속해서 밖으로 밀고 나가는 힘. 그게 긍정이다.

책임의 문제가 거대한 공포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 때 그 순간은, 얼마나 많은 일들이 판단된 것들 혹은 예측된 것들의 범위를 벗어난 일들과 연관되어 있는 지를 보여준다. 우주적 차원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은 행위들이 발생하게 되는 질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한낱 일종의 자신감이자, 자만이다.

이딴 게 멋있다니. 술에 취해 언젠지도 모르고 썼던 말들이다. 그런데, 얘는 내 번호를 어떻게 안 거지? 또 수첩은 허락도 없이 봤네. 기분이 불쾌했다. 한 마디 할까했지만, 됐다. 그 아이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것으로 그냥 넘긴다.


숙취에 오늘 하루를 멍하게만 보내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이었다. 뭐, 여긴 언제나 밤이지. 아니, 밤이라기 보단 언제나 어둠이다. 밤은 아름다운 것이잖은가. 내 방은 아름답지가 않다. 생각해보면, 밤이 아름다운 건 낮이 있기 때문이다. 또 낮이 값진 것은 밤이 있기 때문이고. 그런데 내 방은 그런 반대편이 없다는 거야. 여긴 그냥 어둠밖에 없어. 이것밖에 없는데, 아름답고 아니고 할 게 없는 거지. 내 방은 아름다운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저 어두움, 무(無)다. 갑자기 파르메니데스가 생각난다.
‘ex nihilo nihil fit’
‘무에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덜컥 겁이 나, 방 안에 켤 수 있는 모든 불을 켰다. 그런다고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정말로 지금 나한테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무다. 어둠 속에서 지낸 2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서서히 어둠이 돼버렸다.

아,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시간은 흐르고 여기 이 땅은 해를 맞이하여 불을 켜지만 우주는 언제나 어둠인 것을, 대체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끝없는 어둠의 자궁 속에 희미한 빛을 집어넣어준 것은 사정을 위해 들어온 남근이었거늘, 나는 이 어둠의 끝을 위해 아니, 한 순간의 짧은 이 어둠의 잊힘을 위해 어떤 천박한 것을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 끝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탯줄이 잘리며 한 존재가 드디어 자궁 속을 벗어나듯, 이 목숨을 잘라 이 우주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야, 나는 이 어둠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시간을 보니 새벽 7시다. 머리맡에는 수첩이 있고 저런 글이 쓰여 있다. 또, 헛소리나 적어놨구나. 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써놓은 메모를 연극 톤으로 읊어본다. 팔을 이렇게 하늘로 들고,
“아!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됐다, 집어치우자.
하늘로 뻗었던 팔은 그 상태 그대로다. 잠깐만. 나는 세상의 신비 중 하나를 알고 있다. 누운 상태에서 팔을 하늘로 뻗어 누워 있는 몸과 정확히 수직인 상태로 만든다면, 아무리 팔을 오래 들고 있다고 해도 아프지가 않다. 이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안다. 이것은 확실하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니체보다 낫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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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 방에서 아침을 대충 챙겨먹으려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글 같은 건 취업을 하고 나서도 쓸 수 있으니, 직장 구할 생각을 좀 해보라고 한다. 글 같은 거라. 글을 쓰는 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다. 그리고 글을 읽는다는 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 이 세계의 내용들이 쓰이지만, 글이 써지는 순간 글은 이 세계와 분리돼 하나의 세계가 된다. 다만, 그것들은 이 세계와 공통의 언어란 것으로 연결돼 있다. 근데 어떻게, 이 방대한 일을 돈을 벌면서 부업으로 할 수 있단 거지? 물론, 나는 게으르다. 그래, 부지런한 누군가는 다 해내겠지. 핑계를 대는 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워왔다. 대개, 부모님 말씀 중엔 틀린 게 없지. 아니다. 부모님 말씀은 대개 틀리지 않다고 말하기보다는, 대개 충고는 틀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여기서 잠깐, 나는 세상의 신비를 하나 더 알고 있다. 그건 이것이다. 이 세상 어떤 충고도 사실 틀릴 수가 없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지. 왜냐하면, 이 세상 어떤 충고도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바보라도 남의 충고 따위를 따를, 그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전화가 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아침을 차려 먹었다. 스팸을 굽고 반숙으로 계란 후라이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하얀 밥. 사람들은 흔히 밥을 먹기 위해 반찬으로 스팸과 계란을 먹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스팸과 계란을 맛있게 먹기 위해 밥이 필요한 것이다. 스팸의 짠 맛을 흰 쌀이 중화시키며, 그것을 보다 맛나게 한다. 계란 후라이의 경우는 스팸과 조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와 같다. 밥은 주식이라기 보단 서포터 단연, 최고의 서포터다.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에는 거꾸로 된 것들이 꽤 있다. 밥을 먹기 위해 돈을 버는 것임에도, 돈을 벌기 위해 밥을 굶는다던가. 친구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임에도, 어느새 술을 마시기 위해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던가. 살기 위해 행복하려는 것임에도, 행복하기 위해 산다던가. 아니면, 존재하고 난 뒤 형상이 드러나는 것임에도, 형상이 있고 존재가 등장한, 아 몰라. 생각을 그만둔다.


나는 대충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행정관 앞에서 조그마한 집회가 있다. 최근, 문과계열의 전공을 통폐합 하려는 학교의 움직임 때문이다. 예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이지만, 최근에 몇 개의 과가 급작스럽게 통폐합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금 대두됐다. 때문에 sns 상에서도 수많은 글들이 올라온다. 이럴 때가 되면 다들 하는 말들이 있다. ‘무엇이 올바른가. 대학교의 올바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대학을 다니나. 지금 대학이 행하고 있는 것이 대학의 존재 목적과 상응하는 것인가.’ 내 성격이 모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뭔가 그런 것들이 아니꼽다. 그곳에 가면 아마 진현도 있을 거고 정수도 있겠지.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과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방을 나왔다. 역시 해는 밝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태어남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엔,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해결 방법은 모든 걸 갈아엎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복잡하면 할수록 더 그렇다. 창세기 6장7절이 떠오른다. 문제로 가득 찬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신을 보면서, 뭔가 어긋났을 땐 ‘역시 새로 시작하는 게 최고인가’ 하는 생각을 이전에 한 적이 있다. 꼬인 것을 하나하나 풀기보다는 그냥 잘라버리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뭐가 그렇게 문제인 걸까. 잡생각을 하면서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는데, 폐휴지를 주우시는 아저씨가 옆을 지나갔다. 이틀에 한 번은 보는 아저씨다. 누가 보아도 거지꼴을 하고 있는 이 아저씨는 항상 입으로 무언가 중얼중얼 거리며 수레를 끄신다. 불쑥, 저 아저씨도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까 궁금하다.
행정관 앞에는 역시 진현과 정수가 있었다. 그들은 제일 앞줄에 서서 열심히 대학의 올바른 나아감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정수 옆에는 그 때 만난 신입생 여자애가 있었다. 순간 그 애가 내가 있는 쪽을 쳐다봤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불편한 마주침은 하고 싶지 않다. 행정관 앞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 같다. 대단하다. 이 광경이 대단한 것인지,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광경이 대단한 것인가? 확실히 이런 풍경은 낯설다. 8,90년대 대학에서야 이런 모습이 흔했겠지만, 간혹 교수님들이나 어른들이 자랑하듯 그 때의 모습을 툭 내뱉기도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어떤 하나의 일을 꾸린다는 게 예삿일이 아니니, 이 만큼의 인원이 뱉어내는 어떤 힘 비스무리한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지는 역시 모르겠다. 정수가 그 여자애 어깨에 손을 걸치는 모습이 보인다.
“형, 왜 이제 와.”
“야 깜짝이야. 뭐, 이정도면 빨리 온 거 아니냐?” 병환이 갑자기 나타나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놀라 대답했다.
“우린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이러고 있었어.”
“얌마, 지금도 아침이긴 해.”
“아무튼, 빨리 나 따라와. 앞으로 가야지.”
“어, 어.”
병환은 사람으로 가득 차 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곳을 손을 비집으며 들어가 앞으로 나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주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보니, 한 명의 투사 같았다. 굳이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도 안 하는 것 같아, 나는 그 뒤를 따르는 척 하다가 몰래 옆으로 빠져 나왔다. 이곳이 뭔가 답답했다. 집회가 다 끝나고 저녁쯤이 되면 술을 마시자고 또 연락이 오겠지. 그 때, 사람들 얼굴이나 보던가 해야겠다. 지금은 그냥 방에 다시 들어가 쉬고 싶다.


방에 들어가는 길에, 폐휴지 줍는 아저씨를 또 마주쳤다. 그 아저씨는 역시 허공에다 혼자 중얼거리며 수레를 끌고 있었고 나 혼자서 아저씨를 바라봤다.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편안함. 몸의 편안함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편안함. 어둠이 좋은 게 하나 있긴 하군. 이 안에 있으면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무엇이 있다 해도 느낄 수가 없지. 불을 켠다는 건 한편으로 위험해.
밤이 됐나보다. 시간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 병환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후문으로 와, 형”
“응”
쉽게 대답을 해버렸다. 휴, 나가야지 뭐.
대략 10명쯤 있었다. 모두가 마구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나도 얼른 자리에 앉았고 꽤나 마셨다. 술자리는 곧 2차로, 다시 곧 3차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런 건 쉽사리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농담인 것 같다. 농담들이 난무한다. 웃음들이 퍼지고, 나는 그 소음 속에서 멍하니 소주잔을 바라봤다. 순간,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 신입생 여자애가 대각선 위치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엔 정수가 딱 달라붙어있다. 나는 또다시 얼른 눈을 돌렸다. 둘은 언제 온 거지.
“네가 뭘 아냐.” 갑자기 과열된 언성이 들렸다.
옆 테이블을 보니, 교성이형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누구한테 그러는 거야. 나는 고개를 앞으로 살짝 뺐다. 대상은 2학년 남자애였다.
“네가 그 책을 읽으면 이해를 할 수 있냐고. 이해도 못 할 거 읽어서 뭐하게 인마. 때려치워라 그냥.”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읽는 거죠.”
“조금? 읽어서 교수님정도로 이해도 못 할 거면, 쓸모없는 거 아니야?
저 형이 술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농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농담이 정작 있어야할 때는 대개 자리에 없다. 모두가 교성이형 눈치만 보고 있다. 낮에만 해도 투사가 돼서 학교에 맞서 소리 지르던 인물들인데, 밤이 되면 그 기운들이 빼앗겨 버리는 건지 아니면 해가 그런 기운들을 잠시 줬던 것뿐인지. 모두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정작 지금이야말로 투사가 필요한 때인데 말이다.
“그만해요, 형. 이해 못 한다고 책을 읽으면 안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입을 뗐다.
“뭐라고 인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내 생각엔 형 생각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이 새끼가.”
형이 애들을 밀치며 나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물론, 말리는 이들이 있었다.
“둘 다 그만해 좀.”
“뭘 그만해. 저 새끼가 지금 말을 싸가지 없이 하는데.”
“형이 헛소리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야, 너도 형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잠깐의 소란. 오래가진 않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꽤나 어색해졌고 술자리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 자리는 교성이형이 계산을 하기로 했었고, 모두들 형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나서 각자의 집으로 갔다. 나는 형이 계산을 하는 동안,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갔다. 그 2학년 남자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형을 기다렸다. 내 눈엔 다들 멍청해보였다.
다음날,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자가 와 있었다. 단체 문자 한 통과 몇몇 애들의 문자였다. 오늘도 집회가 있다며, 얼른 나오라는 내용들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투사들이 되신 건가. 올바름을 물으며 행정관 앞에서 열심히 싸움을 하겠지. 역시,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단, 집합이 대단한 걸까?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어떻게 대단한 것이 될 수 있지? 처음부터 그곳에 대단한 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계속 누워있다. 옆으로 눕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쿵. 순간, 어떤 추락이 느껴졌다. 실제로 내 몸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내 몸은 단지 옆으로 돌려졌을 뿐. 하지만, 난 분명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뭐지. 내 밑바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 몸이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다.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겠지. 이 추락은 언제 끝이 날까. 잠깐만. 내 추락은 언제 시작 된 거지? 그리고 왜? 그래. 내가 궁금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왜 추락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이 물음의 끝엔 내 추락이 언제 끝나는지에 대한 답이 자연스럽게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추락하는가.
추락은 부정이다. 내가 아래로 떨어질수록, 나는 더욱 더 나를 부정한다. 또한, 내가 나를 부정할수록 나는 더욱 더 아래로 떨어진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지? 4학년. 곧 졸업. 취업준비는 해놓지 않았고. 이전에 글을 써본 적도 없다. 잘생기지도 않았고, 부모님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천재도 아니고. 겨우, 서울권 대학에 들어와 다녔다. 고등학교 때를 생각해보자. 물론, 대학에 가기 위해 꽤나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밤을 새가면서 한 적도 있고. 아니, 나는 더 밤을 샜어야 해. 중학교 때를 보자. 그 때, 왜 그렇게 나는 멍청한 생활들을 했을까. 퍽 하면 친구들과 놀이터에 앉아,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하며 이상한 이야기나 해댔다. 학원은 빠지기 일쑤였고. 초등학교 때는? 기억도 안 나네. 그냥 놀았다. 왜 그땐, 미래를 생각하지 못 했을까. 누군간 분명 그 때부터 훗날을 생각했겠지. 그럼 유치원 때는? 아기 때는? 시발. 나는 그냥 그렇게 살아왔던 거지. 내가 추락하게 된 건 내 잘못이다.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부모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나. 나는 늘 부족했다. 그렇다면, 내 추락의 위기는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고, 그 위기가 지금 드러난 것뿐이다. 홍수야 일어나라. 아니, 잠깐만. 아기 때는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었을까. 어떻게 내가 갓난아기시절을 보내왔기에 내가 이렇게밖에 성장하지 못한 건가. 홍수야 일어나라.
이 위대한 생각을 하는 중에, 갑자기 배가 고팠다. 쳇.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어. 그래, 배나 채워야지. 나는 제육볶음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역시 해가 높이 떠있다. 골목을 나오니 폐휴지 줍는 아저씨가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빵조각을 뜯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아니, 내 추락이 끝나는 지점이 된다면,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람이 되어있을까? 고개를 절며 나는 얼른 밥집으로 들어갔다. 제육볶음을 주문하는데, 아차. 큰 일 났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남았지? 핸드폰으로 확인을 해보니 2천 원가량이 남아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는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육볶음은 빵 쪼가리 보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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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론, 술을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아직 채 술이 다 깨지도 않은 것 같지만,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마실 날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지. 근데, 사주냐?’ 답장을 보냈다.
‘이 등신이. 과방으로 와.’ 답장이 왔다.
등신이라, 날 정확히 봤군. 나는 픽 웃었다.
용건을 만나러 가기 위해 과방으로 출발했다. 해가 참 쨍쨍했다. 반-지하방에서 나온 사람에게, 그 정도의 해는 꽤나 부담스럽다. 해가 아무리 쨍쨍하면 뭐하리. 결국 나의 방으로는 조금도 들어오지 못 하는 것을. 갑자기 궁금했다. 우리에겐 밝음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어두움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어둠이 본래 깔려 있고, 빛이 들어와 그곳을 밝히는 걸까? 아니면 빛이 본래 깔려 있고, 어둠이 들어와 그곳을 덮어버리는 걸까?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병환과 마주쳤다.
“어, 형! 어디 가는 거야. 어젠 잘 들어갔어?”
“그렇지 뭐. 지금 용건이나 만나려고. 너는 어디 가냐?”
“형 또 술 마시게? 정신 좀 차려. 허구한 날 술만 마셔 무슨. 난 행정관 앞에 가는 중이지. 형도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나랑 같이 거기나 가자. 좋은 일 좀 해.”
“너나 많이 해라. 난 간다.”
병환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갈 곳 있는 이의 걸음은 저렇게나 빠르다. 저 친구의 눈엔 난 항상 쓸데없는 것을 하는 사람인가보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기분이 조금 언짢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과방에 들어서니,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신입생들은 소파에 앉아 자기네들끼리 속닥속닥 거리고 있었고, 몇몇 고학번들은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두르고 있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과방에는 그 때 만난 신입생 여자애도 있었다. 나는 조금 불편했다. 용건은 날더러 과방으로 오라고 해놓고서는 정작 본인이 없었다. 아직 오는 중인가보다 생각하며, 나는 의자에 앉았다. 아는 애들도 없고 할 것도 없어, 나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때, 또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신입생 여자애가 어제 술집에서처럼 날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옆에 여자애에게 귓속말을 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기분이 불쾌해져 과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 끝에서 용건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어제 넌 왜 안 왔냐?” 나는 삼겹살을 구으며 용건에게 물었다.
“그런 술자리 불편하다고 했잖아. 가면, 정치얘기만 아주 주구장창 해대.”
“안 그래도, 거기서 술 마시다가 교성이형이랑 싸웠다.”
“들었어. 애들이 안 좋게 말하던데.”
“누구를?”
“너.”
“아, 등신들.”
“됐어, 술이나 마셔 인마.”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삼겹살을 한 점 먹는다. 결코, 소주를 마시기 전에 삼겹살을 먹지 않으며, 소주를 먹고 삼겹살을 먹어도 결코 한 점 이상을 먹지 않는다. 그게 딱 나에게 적절하다. 그런데, 용건 이 놈도 나와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우리 둘이서 술을 마시면 안주가 많이 남는다. 한참 전에 불판 위에 놓인 삼겹살은 이미 새까맣다. 우리는 고기가 그렇게 타도록 내버려둔다. 타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우리 입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소주의 양은 정해져 있고 삼겹살은 그에 비해 넘친다.
정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용건에게 말하고 우리가 있는 곳을 정수에게 말해줬다. 정수는 금방 왔다.
“너 어제 왜 그랬어?”
“오자마자 그 소리냐.”
“어제 좀 심했어, 너.”
“심하긴 뭘 심해.”
“이번엔 둘이 싸우기라도 하려고? 정수야 술이나 받아.”
정수는 고기를 왜 태우고 있냐고 우리를 나무라며, 고기를 더 시켰다. 배가 고팠던 건지, 정수는 잘도 먹었다. 술병이 생각보다 늘어났다.
“너 근데 나리한테는 왜 그랬어?”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리한테 다 들었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둘이 나 모르는 소리 할래?”
“나도 무슨 소린지 몰라.”
“네가 나리한테 밥 사준다고 그러면서 껄떡댔다며.”
“걔가 그랬어?”

“어쨌든, 일들 잘 책임져서 풀어. 사람들이 너 못난 놈이란다.”
기분이 이상했다. 화는 딱히 나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요.’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그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참,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요.
우리는 처음 있던 자리에서 끝까지 술을 마셨고, 그 고깃집에서 나왔을 땐 모두 만취한 상태였다. 용건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날따라 용건이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해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학교호수를 따라 잠시 걸었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호수가 아름다워 보이네. 웬일일까. 어쩌면, 용건이 호수를 늘 예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이 호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호수지만, 오늘 아름답다.


나는 목이 말라 도중에 잠에서 깼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물은 다 마시고 없었다. 아. 나는 옷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편의점은 내 방 바로 근처에 있다. 새벽 공기가 꽤 차다. 나는 물을 사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살겠다. 이 때 마시는 물만한 물이 없지.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으로 들어섰다. 새벽부터 폐휴지 줍는 아저씨가 가로등 근처에 계셨다. 가로등은 환했다. 그 아저씨는 가로등 쪽으로 걸어왔고, 이젠 가로등을 등진 채로 서 있다. 술이 덜 깨선지, 가로등의 불빛이 그 아저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예전에 봤던 예수 그림이 떠올랐다. 불현 듯 생각이 들었다. ‘저 분에게는 지금의 당신 삶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시 자려고 누웠을 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가로등 앞에 선 폐휴지 아저씨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아저씨는 뭘까. 추락의 끝에 신이 된 건가? 나는 뭘까? ‘못난 놈.’ 오늘 내가 들은 내 모습이다. 나는 왜 못난 놈인 거지? 내가 그렇게 불릴만한 일을 했어? 내가 한 거라곤 잘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온 연락을 무시한 것, 술에 취해서 이상한 소릴 하는 형에게 대꾸한 것 그리고 현재를 잊고 미래만 바라는 정의로, 뭉쳐 있는 곳에 가는 걸 거부한 것뿐인데. 대체 내가 왜 못난 놈인 거지. 나는 내가 닥친 상황에서 마땅히 할 만한 것을 했을 뿐인 걸.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연락이 오면 무조건 대꾸를 하고, 형이 말하면 무조건 가만히 있어야 하며 함성이 있는 곳엔 무조건 가야하는 건가? 무조건?
그 때 나는 알았다. 추락은 없었구나. 나는 지금도,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시절도 그리고 갓난아기 시절에도, 그 어떤 때에도 잘못 행한 것 없이 충만했다. 나는 추락하지 않았구나. 아니지, 이렇게 말해야 할 거야. ‘나는 나를 추락시킨 적이 없었구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그 주위에서 끊임없이 내비치는 어떤 유형, 틀.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가해지는 비난과 부정. 그것들이 나를 추락하는 인간으로 꾸며낸 것뿐이구나.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의무가 없는 곳에 굳이 부정이 있을 필요가 없지. 그랬었구나. 그랬구나. 그렇구나. 이게 내 모습일 뿐이구나.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나다. 당신들에게 말해야지. 미래의 내 모습을 기대하지 말아달라고. ‘미래의 나는 만날 수 없어요.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은 현재의 나입니다.’
나는 수첩을 찾아 펜을 들었다. 그리곤 이내 잠들었다.

나는 홍수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