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철학자의 서재]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칸트를 읽기 위해선 다른 건 필요 없고 엉덩이 근육과 인내가 필요하다. 둘 다 갖지 못한 나 같은 자는 그냥 포기하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좋은 책이 나와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백종현 선생님의 칸트 3대 비판서 특강이 책 한권으로 나온 것. 요즘은 공부를 하지 않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3대 비판서라 함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말한다. 주옥같이 어려운 책들, 우리가 인생 살면서 고민도 안하고 포기하는 책들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을 일단 읽게 되면 없던 욕망이 생긴다. 칸트를 읽어봐야겠다는 무모한 욕망 말이다. 2백페이지 조금 넘는 작은 책이라 정신 바짝 챙기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저 세 비판서는 각각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를 다룬다.

 

칸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정의되는데 문제는 이성과 함께 ‘동물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은 어쩌면 그저 동물성만 있으니 문제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성’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 이성의 한계다.

 

인간 이성은 신에 대해 논할 수 있는가. 신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인데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있는 것은 공간과 시간 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p. 94). 칸트는 신과 영혼 같은 것은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 인간 이성, 인간의 주관이 알 수 있는 것만을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한다. 칸트 이전에는 인간 이성 밖에 대상이 그 자체로 있다고 봤지만 이제 그런 것은 인간이 알 수 없고 우리 감각 지각에 들어오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와 잠자리나 개구리가 보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보는 세계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인간중심적 사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 말해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러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다룬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무엇을 다룰까. 인간 이성이 이렇게 한계가 있다면 이제 인간 이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있는’ 것만을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다면 세상은 참 심심하지 않겠는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실천’이다. 지금이야 장난감이 많지만 나 어릴적만 해도 장난감이 없으면 나뭇가지를 꺾어서 총도 만들고 지팡이도 만들며 놀았다. 하나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실천에는 ‘의지’(p. 140)가 들어간다. 그런데 칸트는 실천 중에는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선’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이다.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당연한 걸 우리가 모두 실천한다면 세상에는 사기도 악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선’을 실천할 인간의 능력을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 ‘악’을 행하는 자는 ‘자유’가 없는 자라는 뜻이 된다. 어릴 때 엄마 주머니에서 잔돈 훔쳐본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들키면 혼날 텐데 하면서 하루 종일 자유롭지 못하고 안절부절 했음을. 기껏해야 떡볶이를 사먹기 위해서였을 텐데 나는 그 대가로 내 자유를 빼앗긴 셈이다. 칸트는 이런 자연적 요인, 감각적 요인(경향성Neigung : inclination)에 지배받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 먹방 프로그램이 많은데 인간의 감각(미각)에만 너무 치중하는 것 같다. 생각해볼 문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은 먹방에만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당연히 이게 중요하다. 그러면 이 자유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해야만 할까.

 

인간은 자기 경향성, 동물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고 이때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의지가 ‘선의지’이다. 칸트에게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오로지 의무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p. 161). 그래서 칸트의 도덕법칙은 명령형이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와 같은 정언명령들이 그렇다. 이러한 도덕적 행위들의 원리를 ‘인간 존엄성의 원칙’이라 한다(p. 173).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만 대우해야 하며 존엄한 존재는 교환도 안 되고 바꿀 수도 없다(p. 175). 그런데 우리 현대 사회는 인간조차 노동력 상품으로, 자신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자꾸만 전락시키고 있다.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발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희망한다. 이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문제를 다룬 것이 <판단력비판>이다. 칸트는 판단력이 이론이성(<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실천이성비판>)을 잇는 다리라고 생각했다(p. 234). 인간은 이성과 의지 둘 다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 이 둘을 칼로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둘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둘이 판단력에 의해 통일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최고선’이라는 이념에 의해서다. 칸트에게는 자연성, 경향성의 자연 세계가 도덕의 세계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보았고 그 상태가 최고선의 상태라고 보았다. 기독교 성서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지상에 세워진 천국’이 칸트가 희망했던 ‘최고선의 상태’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세계적으로는 난민 문제를 비롯해서, 용산참사도 그렇고 일터에서 안전의 문제로 죽어나가는 젊은 노동자들의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지상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상에 천국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특별히 악하게 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희망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절망만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도 대등한 인격(p. 158)으로 정당하게 대우받으며 인간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 아니다. 각자의 우리는 대체불가능하고 자유로운, ‘대등한’ 인격체이다. 그 옛날, 칸트도 알고 있었던 것을 왜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일까.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일까.

 

얼마 전 모 신문사 사장의 손녀가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칸트가 인간이 대등하다고 말한 지가 1780년대라고 치면 기함(氣陷)할 노릇이다. 칸트가 꿈꾸었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더 좋은 세상에 대해 꿈꾸지 않는다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이라도 칸트를 꺼내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칸트를 읽는다는 것,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 사유’를 하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새로 배워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쉬운 것만 하고 사는 것도 재미없지 않은가. 어려운 것에 도전하고 깨지고 박살나는 살아있는 경험이 고프기도 하다. 새해 <순수이성비판>부터 도전해보려 한다. 무모하고 무한한 도전일지라도.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주디스 버틀러(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9.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上)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젠더의 의미를 둘러싼 현대 페미니즘 논쟁은 이 시대를 이끌다가 다시 특정한 의미의 트러블에 도달했다. 마치 젠더의 불확정성이 결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보여주는 정점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트러블이 있다고 해서 이처럼 부정적인 가치를 수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서문(73-74쪽[한글판])

 

1956년 헝가리와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주디스 버틀러(1956. 2. 24 ~)는 1990년 <젠더 트러블>의 출판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페미니즘에서 정치철학, 윤리학, 퀴어이론, 문학이론에 걸쳐 자신의 작업을 이어간 버틀러는 정체성과 주체성 형성의 문제를 뼈대로 삼아 젠더․섹스․폭력․언어 등에 대한 여러 새로운 논쟁적 입장을 제출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버틀러를 패러디하면 ‘트러블을 일으키는’) 철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녀가 일으킨 트러블이 단지 기존의 관성처럼 받아들이던 법적․언어적 개념들이나 사고형태들만을 뒤흔든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도 불편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현존하는 권력구조 안에서 우리가 정체성을 통해 주체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그 속에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법과 제도의 이차적 결과물이며 나아가 그것들을 구분짓는 경계 역시 문화적역사적 구성물임을 폭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연적․필연적 토대란 없으며 그러한 토대를 상정하는 이론을 ‘실체(혹은 본질)의 형이상학’으로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처럼 ‘여성’ 정체성이 이처럼 언제나 유동적․불확정적이며, 그래서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안에서도 ‘여성’의 의미를 동일하게 고정시킬 수 없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는 무엇이며, 또 그에 맞서 저항하는 토대는 무엇인지를 규정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즉 페미니즘의 안정적 기반을 동일하게 규정할 수 없다면(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운동의 측면에서나 이론의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을 갖게 되는가?

 

  • 섹스/젠더/욕망으로 분할된 인식틀에 대한 비판

 

‘젠더’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이 통용되게 된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1908. 1. 9 ~ 1986. 4. 14)<제2의 성>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선언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즉 ‘여성적인 것’이 생물학적 성과는 달리 문화적․사회적 과정에 의해, 다시 말해 젠더화된 규범을 강제로 부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만들어 진’ 것이라는 비판적 문제의식이 발전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보면 섹스는 생물학적 몸의 차이, 젠더는 문화적․사회적 동일시 양식, 섹슈얼리티는 성적 행위가 유래하는 근원적 욕망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구별짓고 분리시킨 인식론적 틀은 이후 여성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했고 페미니즘의 여러 형태의 이론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몸의 차이에 기초해 여성에게 부과했던 기존의 여러 속성들(예컨대 모성성, 수동성, 감정적임, 연약함 등)이 사회적인 제도나 규범이 낳은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결과 여성으로 하여금 성역할이나 직업선택에서의 고정성을 탈피할 계기를 주며, 나아가 또한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분리될 수 있다면, 이성애에 기초한 정상가족체제의 필연성 역시 허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작업의 독특함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인식(보부아르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여러 페미니스트들을 지배하는 인식) ‘안에서’ ‘그에 맞서는’ 근본적이면서도 내재적인 비판을 전개한다는 점에 있다. 첫째, 보부아르의 생각, 즉 사람은 몸과 그 몸에서 비롯된 ‘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성이 젠더의 필연적․인과적 원인은 아니며 젠더는 신체적 외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설혹 성이 생물학적으로 둘(남자와 여자)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젠더가 둘이어야 할 필연성은 나오지 않으며 섹슈얼리티의 형태 역시 특정한 형태로 한정될 이유는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는 젠더를 논할 때 늘 두 형태(남성성과 여성성)를 상정하곤 하는데 이는 그녀 역시 젠더를 이분법적 틀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젠더가 섹스를 반영하거나 모방하는 관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95) 둘째, 보부아르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99)로서 즉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소여’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염색체와 호르몬의 상태를 통해 우리에게 몸의 차이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시키려 하는 무수한 담론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임산부의 뱃속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그 무수한 담론들은 무엇이며 심지어 이런 성별감별의 담론들은 왜 종종 그 감별조차 실패하곤 하는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보부아르의 주장과 달리 ‘몸’은 늘 담론 안에 감싸여져 있으며, 그 담론들을 통해서야 비로소 어떤 특정한 형태로 생산된다는 점에서 ‘자연적 소여’일 수가 없다. 셋째, 보부아르는 ‘주체’가 언제나 이미 남성적인 것이고 나아가 보편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음을 폭로하면서 이를 여성적 ‘타자’와 구분하는데, 이를 통해 그녀(그리고 여러 페미니스트들)는 추상적인 인간이나 주체의 담론에 늘 도사려 있는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계기를 주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보부아르가 ‘인간’이라고 하는 담론의 장에서 여성의 몸을 “부인되고 멸시당한 체현(embodiment)”(105)으로, 나아가 보편적 규범 바깥에 있는 것으로 전제되는 만큼 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으로 보고, 그 결과 해방의 가능성은 의미화되지 않은(남성적 규범에 물들지 않은) 여성의 몸을 자유의 도구로 이해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에서 보부아르는 은연중에 ‘남성 의미화 對 여성 비의미화’, ‘남성=주체=문화=정신 對 여성=타자=자연=몸’이라고 하는 플라톤과 데카르트 등이 전개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며, 그래서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비판하는 뒷문으로 역설적이게도 이리가레가 말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를 끌어들일 여지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결국 ‘여성성’을 규범적으로 배제된 영역에 영원히 묶이게 만듦으로써 암묵적으로 젠더 위계의 체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페미니즘의 정치의 일체의 해방적 가능성을 스스로 유폐시키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 열린 복합물로서의 젠더와 삶의 박탈

 

버틀러는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분리시키는 인식’이 한편으로는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을 성장시킨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규범(남성성/여성성)의 고착화’, ‘담론 이전의 영역으로의 몸의 실체화․물신화’, ‘여성성의 항구적 타자화 및 배제’ 등의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젠더와 몸뿐 아니라 페미니즘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는 섹스가 (1차적․본질적인) 자연과 관계되고 젠더가 (2차적․인위적인) 문화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섹스는 이미 젠더이며 그런 점에서 섹스와 젠더(나아가 섹슈얼리티)는 모두 문화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는데 그 결과, 그녀의 관점에서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로서] …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114)할 가능성의 영역으로 열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처럼 ‘섹스가 이미 젠더이고 젠더를 열린 복합물’로 이해하게 될 때, 문제는 그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라는 견고한 개념을 통해 확보되는 ‘정체성’(특히 ‘젠더 정체성’)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만일 버틀러의 논의대로 젠더 정체성이 비일관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일정한 자리를 배치받는 ‘인간’으로서의 터전, 아니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 및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위협받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미리 주어진 규범적 이분법, 즉 여성이나 남성으로 고착되지 않는다’로 대변되는 급진적 (탈)젠더정치는 ‘그럼 넌 사회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니 그 안정적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라는 공포스러운 박탈정치를 예고하게 만든다. 버틀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인간으로서 ‘인식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에 내포된 권력관계를 분석할 필요를 제기하면서 프랑스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 이리가레푸코위티그크리스테바의 수용 및 대결

 

버틀러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론으로서 크게 4가지 입장, 즉 타자를 재생산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남성성만이 정체성으로서 존재한다’는 뤼스 이리가레(1930. 5. 3 ~)의 입장,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정체성 범주는 널리 확산된 섹슈얼리티의 규제적 경제체제의 산물’이라는 미셸 푸코(1926. 10. 15 ~ 1984. 6. 25)의 입장, 강제적 이성애 상황에서 ‘정체성은 언제나 여성적’이라는 모니크 위티그(1935. 7. 13 ~ 2003. 1. 3)의 주장, 마지막으로 ‘상징계(아버지 법)에 자리한 남성 정체성의 위치를 기호계(모체에서 비롯된 시적 언어)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던 쥘리아 크리스테바(1941. 6. 24 ~)의 비판적 정신분석학의 입장 등이 있는데, 버틀러는 이 4가지 입장의 정체성 규정과 이론적 의의 및 한계를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결론을 통해 페미니즘 이론 및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첫째, 앞서 언급했던 보부아르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리가레의 성차이론은 한편으로 서구문화의 관습적 재현체계 안에서 여성은 주체모델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점에서 여성들은 보부아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항상 이미 남성적인 주체의 단순한 부정(타자)’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따라서 여성은 주체도 타자도 아닌, 이분법적 대립으로는 재현 및 환원될 수 없는 차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몸 對 남성=이성’을 은연중에 전제하는 보부아르 역시 지배적인 남성성,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둘째, 푸코가 보기에 본질적인 섹스의 문법은 이분법의 각 용어에 인위적인 내적 일관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양성 간의 인위적인 이분법 관계 또한 강요한다. 이처럼 섹슈얼리티를 이분법적 성범주로 규제하는 것은 이성애적․재생산적․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셋째, 보부아르의 연속선상에 있는 위티그가 보기에 성에 대한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녀는 강제적 이성애주의의 전복이 자유로운 인간의 산출이라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열며, 에로스 경제의 확대가 섹스/젠더 그리고 정체성의 허상을 깨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위티그는 여성들에게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섹스’의 허상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제3의 젠더를 세우자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레즈비어니즘을 긍정하는 전략으로 소급된다. 넷째, 크리스테바는 라캉의 ‘아버지 법’이 모든 언어적 의미화 구조(즉 ‘상징계’)를 구성하는 보편원리로 기능하면서 모체에 대한 아동의 근본적 의존과 기원적 리비도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고 보았다. 결국 상징계는 모체와의 기원적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데, 이러한 억압의 결과로 나타나는 ‘주체’는 억압적 법을 전달하는 메신저나 옹호자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면서 기원적인 모성의 몸으로 생겨난 언어차원인 기호계가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다원적 의미와 기호의 비종결성이 지배적인 시적언어를 통해 ‘상징계’ 질서를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입장들에 대한 버틀러의 분석 및 비판은 (지면의 한계상) 거칠지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의 형태로 정리될 수 있다.

 

이리가레 푸코 위티그 크리스테바
규범과 정체성 규정 ․ 남성로고스 중심주의

․ 남성적 성만이 존재하며 여성은 남성적 성과의 차이로서만 기능

․ 이성애 중심주의

․ (남자든 여자든) 성범주는 섹슈얼리티의(이성애)의 규제적 효과

․ 강제적 이성애

․ 남성은 보편적 인간으로 등록되며 따라서 여성만이 성범주로 표시(ex.여의사)

․ 언어적 의미화 구조(상징계)

․ 아버지 법으로서의 상징계와 다원적 의미가 억압되는 母體(및 시적언어)

의의 ․ 여성의 오인 혹은 재현불가 능성으로 인한 ‘하나이지 않은 성‘의 가능성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주체와 타자의 변증법 비판

․ 주체 개념에 전제된 실체 형이상학 및 인간주의 비판

․ 정체성의 기원을 제도․담론․ 실천의 효과로 봄으로써 성범주(섹스)가 역사적으로 특정한 섹슈얼리티 양식을 통해 구성된다는 계보학적 접근의 가능성

․ 금기가 담론을 통한 효과로 작용하며 금기를 권력관계 속에서 읽어내면서도 금기의 생산성을 설정한다는 점

․ 성의 자연성이 허구적임을 폭로하며 섹스가 상상적

구성물이며, 젠더화된 범주로 산출된다는 점을 폭로

․ 섹스의 허구성을 근원적인 언어적 존재론(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을 통해 극복할 가능성

․ 라캉과 정신분석학의 근본적 전제로서의 상징계를 전복할 가능성 제공

․ 모성적 몸에 가해지는 아버지 법의 단성적 의미화 기제를 다원적 의미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

․ 강제적 이성애 체제가 우울증과 비체화를 요청하는 인식적 가능성의 개방

한계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비판을 통해 적을 단일화하는 인식론적 제국주의 설정.

․ 하지만 ‘식민화’는 남성성으로부터만 비롯되지 않으며, 인종, 계급, 이성애중심주의와 교차하면서 작동.

․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대한 해석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동성애적 인식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

․ 바르뱅의 쾌락을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로 이해할 때 드러나는 이상적 해방관 및 그에 따른 섹스와 정체성의 낭만화

․ 모든 발화에서 흠없는 매끈한 정체성을 요구

․ 대안으로 설정되는 ‘전세계적 레즈비언화’가 지닌 도전적 제국주의의 위험성

․ 레즈비어니즘이 가진 이성애 질서와의 근본적 단절 따라서 이성애내에서의 재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됨.

․ 의미 이전과 이후의 설정

․ 기호계의 시적언어를 통해 전복하고자 하는 아버지 법의 상징적 의미화에 의존

․ 문화에 앞서는 모성을 설정함으로 인한 모체의 자연주의화

․ 모성본능의 목적론 설정

 

  • 주디스 버틀러 (上)편은 여기까지 입니다 –
  • (下)편도 기대해주세요 🙂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㉑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12(350d~352c): ‘부정의는 강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

 

[350d]

* 소크라테스의 논박으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이곳에서의 그의 모습은 문답의 귀결에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마지못해 동의하는 장면은 앞에서도 수차례 나오지만 이곳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는 ‘질질 끌려가다가 가까스로 그것도 엄청나게 땀까지 뻘뻘 흘리다가ἑλκόμενος καὶ μόγις, μετὰ ἱδρῶτος θαυμαστοῦ ὅσου’ 동의하고 있다.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ἐρυθριῶντα 모습은 소크라테스도 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모멸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교만하고 뻔뻔한 자일수록 그가 느끼는 수치의 강도 또한 그만큼 큰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봐 줄 기세 없이 트라쉬마코스를 몰아세운다. 그는 첫 번째 논제에 대한 논박은 그렇게 해결 본 것으로 치고οὕτω κείσθω 곧바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가 더 강하다ἰσχυρὸν εἶναι τὴν ἀδικίαν’라는 주장을 검토하려 한다.

 

[350e]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불만을 터트리지만 기세는 꺾여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말을 하려 하면 어차피 ‘대중 연설’δημηγορεῖν을 할 거라고 여길 터이니 내가 내 식으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해 주던가 아니면 당신 좋을 대로 질문이나 하라‘고 말한다.

* 앞서 살폈듯이 검토 방식에 관한 논의에서 연설에 의한 방식은 아예 배제된 데다가 그 논의에 개입조차 못할 정도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한 반박에 크게 위축되어 있다. 여기서도 입으로는 자신도 할 말이 있고 또 말을 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는 하고 있지만 이미 트라쉬마코스는 주눅이 든 상태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이자 연설가임을 자부하는 그가 그것을 드러낼 리가 없다. 그런데 반박할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싫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통상의 경우가 그러하듯 비아냥거리는 일이다.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면 자기는 노파γραῦς의 이야기를 들어주듯 좋다εἶεν거나 아니라고만 대답하겠노라고 빈정거리듯 말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강자에 빌붙어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지식인들이 남들 앞에서 자기를 변명할 때 늘어놓는 부정직하고 비겁한 태도를 그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문답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래도 대답만은 솔직히 하라고 당부하는 것은 두 번째 논제 역시 자신의 검토 방식에 따라 논의를 이끌고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문답에 주도권을 잃은 트라쉬마코스는 그저 소크라테스 마음에 드는 말이나 해주겠다고 다시 빈정거리고 소크라테스는 바로 두 번째 논박을 시작한다.

 

[351a]

* 소크라테스는 먼저 ‘부정의가 보다 강하다’는 주장을 논박하려는 것은 부정의와 비교하여 정의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ὁποῖόν τι τυγχάνει ὂν 충분하게 논의해 보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즉 정의가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이라면 지혜와 덕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351b]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최선의 나라로 여기고 있는, 즉 가장 부정의한 나라가 과연 강한지를 묻는다. 이 물음에는 정의를 갖추고 있지 않은 부정의한 나라가 강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담고 있다. 역시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내 그것을 부정하고 그 나라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부정의를 갖추고 있어 그런 것임을 재차 주장한다.

* 여기서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가장 부정의한 나라 즉 ‘다른 나라들을 부당하게 굴복하게 하여 예속화를 시도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많은 나라를 휘하에 속국화해서 갖고 있는 나라’πόλιν ἄδικον εἶναι καὶ ἄλλας πόλεις ἐπιχειρεῖν δουλοῦσθαι ἀδίκως καὶ καταδεδουλῶσθαι, πολλὰς δὲ καὶ ὑφ᾽ ἑαυτῇ ἔχειν δουλωσαμένην는 분명 페리클레스 이후 부당하게 다른 폴리스들을 예속화하고 스스로를 제국화한 아테네를 가리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국가>를 집필하던 기원전 375년경은 물론 <국가>의 대화시기로 상정되고 있는 기원전 410년 전후는 아테네 제국이 쇠망기에 접어든 시기이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가 결코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없고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 같은 민족 형제 나라들을 부당하게 침탈하고 학살까지 서슴지 않는 아테네 제국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351c]

* 소크라테스는 앞서 그가 당부한(350e) 대로 트라쉬마코스가 속내 그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한 후, 흥미롭게도 나라와 군대στρατόπεδον는 물론 하물며 강도단λῃστὰς이나 도둑κλέπτας의 무리까지 예로 들어, 어떤 집단이 ‘부정의하게 공동으로κοινῇ 뭔가를 도모할 경우에 만약 그들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른다면’εἰ ἀδικοῖεν ἀλλήλους 과연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πρᾶξαι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수행해낼 수 없을 거라 대답한다.

 

[351d]

*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기들끼리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동의를 얻는다.

* 이로써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면서 서로에게 부정의한 짓을 저지를 경우 서로 간에 ‘대립과 증오, 다툼’ ἢ στρατόπεδον ἢ λῃστὰς ἢ κλέπτας을 초래하여 결국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그르치며, 반대로 합심과 우애를ὁμόνοιαν καὶ φιλίαν 다하면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이 서로에게서 확인된다. 이로써 351a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으로서 정의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란 ‘합심과 우애’를 담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정의로운 사람은 합심과 우애를 이루는 능력이 있으므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해냄으로써 그 단체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증오와 불화만 일으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가 추구하는 일을 그르쳐 그 단체나 개인을 약화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부정의의 기능ἔργον이 그런 것이라면 자유민들 사이에서건 노예들 사이에서건ἐν ἐλευθέροις τε καὶ δούλοις 서로를 증오하고 대립하게 만들고μισεῖν καὶ στασιάζειν 그들로 하여금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언급 또한 5세기말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에 빠진 아테네를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을 두고 부정의가 마치 고유한 기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할 필요는 없다. 고유한 기능은 덕을 갖고 있지만 부정의는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부정의가 일으키는 어떤 나쁜 작용을 말한다.

 

[351e]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두 사람 사이에서도 생겨 그들끼리는 물론 정의로운 사람과도 적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런 여러 사람들의 경우 말고 개인 한 사람 안에서 부정의가 생길 경우ἑνὶ ἐγγένηται ἀδικία에도 부정의가 조금도 힘δύναμιν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도 그에 동의를 표한다.

 

[352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앞의 논의를 토대로 집단ἔθνος과 개인εἷς의 경우로 나누어, 부정의가 그곳 각각에 깃들 경우 어떤 힘을 갖는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우선 나라, 씨족, 군대 같은 단체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δύναμις이란 1) 대립과 불화τὸ στασιάζειν καὶ διαφέρεσθαι를 통해 뭔가를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각기 스스로에 대해서,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ἑαυτῷ τε καὶ τῷ ἐναντίῳ παντὶ καὶ τῷ δικαίῳ 그리고 정의로운 것에 대해서 적ἐχθρὸν이 되게 만든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이란 본성상 1) 자기 자신에 갈등과 불화στασιάζοντα καὶ οὐχ ὁμονοοῦντα를 일으켜 아무것도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이 되게 만든다.

*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갖는 힘을 설명하면서 위와 같이 집단의 내부와 개인의 내면을 각각 동일한 차원에서 대응시키고 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글 말미에서 따로 살피기로 한다.

 

[352b]

*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준다는 주장을 편 후 ‘한데 보시오. 신들θεόι도 어쨌든 정의롭다’고 말하고 그에 따라 정의로운 자는 신들에 대해 친구φίλος가 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냥 ‘정의롭다’라고 말한 것이라면 몰라도 정의를 합심과 우애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묘사한 직후에 언급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은 결코 합심과 우애의 신들이라 단정하기 힘들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소크라테스 나름의 새로운 신관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에게 신들 모두는 <티마이오스>에서 강조하고 있듯 우주와 인간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창조한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 수호자들에 대한 시가 교육을 통해 신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 이런 점에서도 짧은 언급이지만 이 또한 앞으로 펼쳐질 주장에 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 트라쉬마코스는 논의가 이렇게 마무리되어가자 아예 자기는 반론을 펴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논의를 마음대로 즐기라’εὐωχοῦ τοῦ λόγου θαρρῶν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금처럼 남은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처럼 대답하여 ‘이 향응을 흡족하게’τῆς ἑστιάσεως ἀποπλήρωσον 해달라고 말한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352b-c)

1) 정의로운 사람들이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으로서σοφώτεροι καὶ ἀμείνους더 유능하게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δυνατώτεροι πράττειν이다.

2) 부정의한 사람들이란 서로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들οὐδὲ πράττειν μετ᾽ ἀλλήλων οἷοί 이다.

3) 이들이 부정의한 사람들인 채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효과적으로, 열심을 다해ἐρρωμένως, ῥώννυμι의 분사형) 해내는 것으로 우리가 말할 경우에, 그것은 전혀 진실ἀληθὲς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전적으로 부정의한 자들이었다면, 이들은 서로 삼가는ἀπέχω 일도 없었을 것인즉 이들 사이에는 그마나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352c]

* 그런데 위 3)의 언급과 그 이후 이어지는 소크라테의 말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3)의 내용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부정의한 사람들로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임에도, 이어지는 후반부 언급에서는 뭔가 서로 삼가기도 하고 그나마 어떤 형태의 정의도 깃들어 있어 뭔가를 해내기도 하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일치와 문장전후의 문맥을 고려하면 ‘그것은 전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οὐ παντάπασιν ἀληθὲς λέγομεν라는 역문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역문의 경우 παντάπασιν(altogether, wholly)을 ‘전혀’로 옮겨 앞의 내용을 전면부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내용상 ‘전면적으로’ 옮겨 앞의 내용을 부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판단된다. 상당수의 영역본(G.M.A. Grube, P. Shorey)도 그 부분을 부분 부정으로 번역하고 있다.(what we say(our statement) is not altogether true) 여기서 말한 부정의한 자들의 경우 철두철미하게 부정의한 자들이 아니라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한 자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하여 그 부분을 다시 풀어서 옮겨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때 부정의한 사람들도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내는 경우가 있다고 말을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전면적으로 부정의한 사람들이었다면 서로에게 삼가기는커녕 공격적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을 해냈다고 한다면 그나마 그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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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의 두 번째 논제 즉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보다 강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논제와 관련해서도 음미해보아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태도에 관해서이다.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과 관련한 논쟁에서는 물론, ‘부정의는 정의보다 낫다’와 관련한 두 번째 논쟁에서도 예외 없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파 당한다. 그것도 문답 하나하나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논쟁이라는 점에서 거의 완벽한 수준의 논박이다. 보통의 경우 논쟁의 귀결이 이 정도라면 한 쪽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여전히 부정의가 이익을 가져다주고 지혜와 덕은 물론 힘까지 갖춘 것임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논파를 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그와 문답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와 관련한 첫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태도를 바꾸는 등 태도를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결국 논리에서 밀리자 목욕탕에서 물을 붓듯 자기 속내를 쏟아냈을 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가 문답의 방식으로 논파는 되어도 설득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실제로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첫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트라쉬마코스가 쏟아낸 마지막 항변을 분수령으로 문답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확인한 후 크게 분노하여 그를 강력하게 반박한 후, 두 번째 논쟁에서는 아예 그를 제쳐두고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다. 그런 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서 자신이 훨씬 중요하다 생각하는 논제를 자신의 주도하에 두 번째 논쟁의 화두로 내세운 후,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끌어들여 문답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두 번째 논쟁 역시 문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두 번째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트라쉬마코스는 형식적으로 문답에 참여할 뿐 이미 문답을 나눌 의지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들여 문답을 이어가게 하고 있을까? 혹시 플라톤이 의도하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 국면은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논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논박의 결과조차 인정하지 않는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실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그들을 원천적으로 압도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앞으로 플라톤이 내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속성을 일부나마 미리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두 번째 논쟁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덕과 지혜, 합심과 우애의 힘 그리고 더 잘 살게 해주는 것 즉 행복은 앞으로 <국가> 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펼치게 될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갖추고 있는 핵심적인 덕목들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 역시 <국가> 본론에 대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부여한 제1권이 갖는 함축이라 판단된다. 제1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함축과 관련해서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모든 논쟁이 마무리된 후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의 논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다루게 될 것이다.

2) * 게다가 이곳에서 플라톤이 정의가 갖는 힘을 논하면서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앞으로 <국가> 본론에서 펼칠 플라톤의 계획의 일단을 미리 드러내는 것으로서 나름의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덕과 지혜로서 정의가 갖는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며 집단은 물론 개인의 경우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합심과 우애를 이야기하면서 집단의 경우를 예시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집단이나 단체는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합심과 우애가 중요하게 문제되는 영역으로 개인의 내적 영역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는 서로 다른 여러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가능한 주장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그러한 전제를 아무런 설명 없이 당연한 것으로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심적 갈등을 경험하고 그에 따라 우리 안에 소박한 수준에서 이를테면 하얀 마음, 검은 마음 즉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다는 등 서로 다른 욕망의 요소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기독교 역시 우리 안에 신의 형상(Imago Dei)은 물론 영성 상실에 따른 원죄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은 신의 은총에 의해 극복되어야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선과 악, 죄와 은총은 서로 대립적인 것들로서 우리 안에서 서로 합심과 우애를 나눌 대상들은 아니다. 이에 비해 플라톤이 말하는, 개인의 내적 영역에서 서로 다른 것들은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것들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나라와 우리 안에 서로 다른 계층과 욕망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합심하고 우애가 있어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개인을 끌어들이고 아무런 전제도 없이 개인 내면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끼리의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국가> 2권 이후에 펼쳐질 영혼 3분설의 내용을 미리 선취하여 예고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나라 또는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여럿들이 서로 적대적인 것인지 그래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제거 혹은 변모되어야 마땅한지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 의존적인 것이어서 그대로의 모습을 갖는 것이되 다만 관계를 잘 맺어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 마땅한지의 문제는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대립해 왔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타도하거나 심판해야할 죄악 또는 계급이 존재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의이지만, 플라톤이나 프로이트는 관계맺음의 원리와 목표는 다르지만 그것들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실재하는 현실 조건들이다. 부정의와 정신의 분열은 그것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 서로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무지와 일탈의 소산들이다.

3) * 이곳의 논의 내용에서 의미 있게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소크라테스가 흥미롭게도 ‘기본적으로 부정의하지만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는 상태’ 즉 ‘어중간한 상태의 못된 자들’τὰ ἄδικα 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352c) 사실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첫 번째 논쟁에서 정의와 부정의를 구분할 때도, 그리고 또 두 번째 논쟁의 첫 번째 논제에서 지혜와 무지를 구분할 때도 각각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와 그 결핍태로서의 부정의, 결코 능가할 수 없는 객관적 진리로서의 지혜 자체와 그 결핍태로서의 무지를 2분법의 잣대로 엄격하게 나누어 설명해왔다. 이에 따라 정의와 부정의, 지혜σοφία와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덕ἀρετῆ과 악덕κακί은 서로 대립되는 양극단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구분은 두 번째 논쟁, 두 번째 논제에 들어오면서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들도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면 그 일을 조금도 수행해내지 못하지만,(351c) 만약에 그들이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다’(351d)고 말하면서부터 뭔가 달라지고 있다. 즉 ‘집단 전체는 비록 정의롭지 못한 일을 도모해도 집단 구성원들끼리는 정의로운 일을 한결 더 잘 해내는 상태’ 즉 한 집단에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존재하는 다시 말해 전적으로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부정의한 것도 아닌 것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논제를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은 마치 의도적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이러한 내용을 더욱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논제를 제시한 처음 의도대로 힘에 있어 정의의 우위를 설명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면 정의로운 집단과 부정의한 집단, 정의로운 개인과 부정의한 개인만 비교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왜 강도나 도둑 같은 집단까지 끌어들여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혹시 이것마저도 앞서와 같이 앞으로 <국가>에서 다룰 논의를 위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제1권에 부여한 예고이자 함축이 아닐까? 사실 앞서 1)에서도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거침없고 무분별할 정도의 탐욕적 속내를 확인한 이후,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통해 그의 반론 의지를 잠재운 데에다,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으로 자신의 핵심 관심사와 관련한 두 번째 논제를 꺼내들어 자신의 주도하에 논쟁을 이끌고 있다. 그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이곳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이미 논박과 논파의 단계를 넘어 그들을 압도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의 차원에서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정의와 일의 수행 능력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 사실 우리들은 보통 현실 생활에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말할 때 특정 사람과 그룹을 칼같이 나누어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롭다거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 않거니와, 개인적으로도 자기를 언제나 정의롭다거나 언제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정의와 부정의를 혼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현실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와 어중간한 부정의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완전한 정의와 그 반대로서의 완벽한 수준의 철저한 부정의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정의와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는 분명 존재하되 플라톤은 이제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듯이(351b-d)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일을 공동으로 도모하지만 구성원들끼리는 합심과 우애가 있어 한결 더 일을 잘 해내는 경우도 그러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이고, 또 극단적으로 참주가 자신은 철저히 부정의하지만 시민들을 완전히 속여 시민들 모두 참주를 정의로운 자로 착각한 채 서로 합심과 우애를 다해 참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경우도 그러한 다양한 현실 양태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극복하려는 것, 압도하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그와 같은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들이다. 플라톤 철학을 현실 구제론이라 부르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물론 그럼에도 지금까지 수행된 완전한 정의와 그 결핍태를 나누는 이분법은 여전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부정의한 현실일수록 부정의를 정의로부터 분리하고 구분하기 위한 확고한 정의의 기준과 푯대는 언제든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라와 개인 차원에서 완벽한 정의의 실체를 완벽하게 구축해내는 일과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여 현실의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실질적이고 실천적으로 구현해내는 일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정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각 인간에게서 어떻게 현상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고, 이제 그것을 위해서는 그 어중간한 상태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과 이해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에 대한 언급은 실로 소크라테스의 냉철하고도 균형 있는 현실 인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이것 역시 예비적인 수준에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정치철학의 일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리고 그것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서 살피게 되겠지만 존재론적으로도 존재(to on)와 무(無)(mē on) 그 중간에 있는 무규정적 존재(apeiron)에 대한 플라톤의 숙고와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무규정적인 존재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관점에서 부동의 일자(一者, hen)를 주장하는 자들과 존재자 일체를 무 혹은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생성(gignōmenon)으로 환원하려는 자들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그러한 비판은 곧 무규정자에 대한 인식으로서 현실 인식을 사변에 예속시키는 것으로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되 현실의 무규정성이 허무주의로 방치되지 않고 역동적인 선과 아름다움(agathos kai kallos)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존재를 인식하는 능력이자 그곳에로의 부단한 운동력으로서 우주 영혼과 인간 영혼의 내적 본질을 직시하고 그것을 구명하여 현실의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을 구현해내는 일을 그 자신의 철학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 존재론의 핵심과제 내지 관심사는 형상(Idea)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무규정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에 있다할 것이다. 즉 철학의 관제는 존재와 무(無)사이에 있으면서 어떠한 단절도 받아들이지 않는 연속과 관계맺음 그 자체로서 무규정자를 어떻게 차별화하고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는 현실 존재자들이 형상적 존재로부터 어떤 거리를 두고 어떤 수준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인식해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무규정자의 온전한 관계에 대한 인식이자 그 인식이 곧 실천을 필연적으로 담보하는 한, 그것으로 진리 존재로 육박해 들어가는 불굴의 정신이자 지적 실천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5) * 아무려나 두 번째 논쟁에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강하다는 주장은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진다는 것에 기초하여 논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경우들을 보면 오히려 부정의가 정의보다 강하고 그에 따라 부정의가 정의를 이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역사에서도 부정의한 군주나 독재자가 엄혹한 군기를 내세워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사들을 향해 패배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여 그것에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워 정의로운 군대를 무찌르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트라쉬마코스도 이곳에서 가장 부정의한 자 즉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보다 강하다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는 그가 참주인 한, 시민을 통제하고 예속화시키는 힘과 권력이 있어 법률도 자기 이익에 맞추어 자기 마음대로 제정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시민적 의무 차원의 정의감 때문이건 법률 위반이 가져다주는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건 법률을 준수한다. 즉 그들로서는 정의로운 일을 한다. 이런 나라는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참주들의 억압에 의해 대립과 갈등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고 때로는 참주의 명령에 따라 일치단결하여 나라가 목표로 하는 일을 해낼 수도 있다. 개인들 역시 스스로를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자부하며 내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일상의 착하고 선량하며 나라의 법률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아무런 갈등이나 거리낌 없이 하물며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독재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행태를 목도하고 있다.

* 이 밖에도 부정의한 나라나 개인이 정의로운 나라나 개인을 압도하고 지배한 역사적 증거들은 넘치고도 남는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서조차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덕과 지혜와 상관없이 합심과 우애를 ‘집단을 강하게 만드는 조직 원리’로 생각하는 깡패집단의 논리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근대정치 사상사에서 마치 상식이라도 되는 양 국가 및 권력을 정당화하는 당연하고도 적극적 근거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즘은 시민의 동의나 도덕과 상관없이 전제 군주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통치 권력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표로 주장하고 있고, 또 홉스주의 또한 개인들은 모두 오로지 이기적인 자기 보전욕구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안전한 삶의 보전을 위해 강력한 통제 권력을 자발적으로 원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민들은 상호 계약의 형식으로 강권 국가를 수립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정의는 그러한 폭력성과 비참성을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다만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책이라는 소극적 원리로 여겨져 ‘정의는 곧 개인들의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 내지 부정의에 대한 응징’이라는 근대 이후의 정의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리하여 현대의 권력가들은 고대의 참주 못지않게 부역 지식인들의 주도면밀하고도 충성스런 지원을 받아가며 보다 강력한 통제와 착취 기술은 물론 정의의 평판까지 얻게 해주는 고차원의 기술을 치열하게 연마하고 발전시켜가면서 더더욱 강고한 권력을 구축해가고 있다.

* 정의만이 합심과 우애를 발생시키고 일도 잘 수행해냄으로써 나라와 개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서 말과 명분에서만 우위를 점할 뿐 순진한 사람들의 소망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의를 덕과 지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합심과 우애의 근원이자 공동체와 개인을 강하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내뱉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를 통해 삶의 진실과 역사의 진보를 일구어 온 사람들에게 이러한 패배주의적 냉소와 그럴듯한 담론들 모두는 권력에 빌붙어 기득권에 안주하는 지식 판매상들이 주구장창 늘어놓는 비겁한 자기변명이자 거짓 구호일 뿐이다. 현실 기득권자들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치의 상대성과 중립을 미명으로 현실 권력을 정당화하고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호도하는 작태를 거듭하며 안존을 도모해왔으나 장구한 인류의 역사는 그들의 권력과 영화, 부와 명예, 거짓과 위선이야말로 한 순간의 거품과도 같은 것이자 그 자신은 물론 그들의 자손들 모두에게 영원한 수치이자 멍에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2400여 년 전 이미 그러한 불의와 거짓과 탐욕에 맞서 지성으로 고양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합심과 우애어린 협동과 나눔이 경쟁과 대립, 증오와 차별보다 강함을 역설하며 우리들 모두에게 ‘순진한 사람들의 희망과 당위가 어때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고상한 순진성γενναία εὐήθεια이면 어때서!’, ‘그래서 그게 혼이 아닌 몸의 손해이고 죽음이라면 어때서!’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 이미 오래 전 그렇게 외치며 기득권자들이 건넨 독배를 들이켰지만 누구도 그를 결코 패배자라 부르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본성적으로 선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태어나 그것의 구현을 욕구할 수밖에 없는 우주적 존재이다.

* 선과 정의, 진실과 자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철학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전파하고 그것의 구현을 향한 힘과 희망을 키워가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 철학적 실천의 본질이자 근원이다. 철학은 그 자체로 불의에 대한 절망과 패배의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힘이자 그 절망과 어둠을 뚫고 나갈 빛에 대한 열망이자 사랑이다. 그 열망과 사랑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들을 불의에 대적하는 전장에로 다가서게 한다. 입장의 상대화는 다만 그런 입장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힘으로 아니 강고한 힘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철학과 진실과 정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걸 직시하게 해주는 것 정도로 유효할 따름이다. 요컨대 철학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두 입장이 서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그 싸움에 의해 인간의 삶과 행복이 보전되느냐 유린되느냐가 걸려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우리의 철학은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판가름하고 결심하고 실천하게 하는 영원한 토대이자 보루이다. 우리가 진정 철학을 하는 한, 철학은 왜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직관적으로 깨닫게 하고 분연히 일어서게 한다. 억압과 거짓과 독단에 순응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로 가짜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적 정신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영원히 서 있어야할 지고의 당파성이자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당파성이다. 우리의 공부와 사색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우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근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순한 텍스트 내용에 대한 이론적 사색에 머물러 플라톤 사상의 우열여부만을 논하지 말고 그것의 실천적 전략도 함께 모색하고 정치투쟁도 감행해가면서 그의 철학과 사상을 더욱 심화 발전시켜 역사와 현실에서 그 우위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해야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믿음에 기초한 열망과 당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신영복 선생이 이야기 했듯이 친분과 혈연 등 사적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불의한 권력과 싸우는 입장의 같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요체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 말했지만 이미 플라톤 철학은 그 자체로 이미 정의와 진리를 향한 지적인 긴장과 분투의 철학이다. 플라톤의 열망 이상의 정열이 우리 안에서 불같이 끝까지 타오를 수 있도록 플라톤을 읽는 우리 또한 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국가> 강해는 학술임과 동시에 격정을 동반하는 다짐이기도 한 것이다. 철학은 무지와 탐욕에 휘둘려 가며 현실에 안주하는 자에게는 하염없이 시대착오적이고 불온한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⑳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47e]

*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박이 마무리되자 소크라테스는 그 주장보다도 ‘부정의한 사람의 삶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보다도 더 낫다κρείττω는 주장이 훨씬 더 중요한 논쟁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앞서(344d-e)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관한 토론에서 ‘어떤 삶의 방식βίου διαγωγή이 각 개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치적 강자와 권력지상주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그가 정의라는 주제를 통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 삶이 시민들 각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가의 문제 즉 시민 각 개인들의 삶의 방식과 행복에 관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물론 시민들 모두 폴리스적 존재라는 점에서 개인의 삶의 방식과 정치적 삶의 방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플라톤의 <국가>는 전편에 걸쳐서 시종일관 정의 문제를 그 통일적 연관 하에서 유기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앞서의 논쟁 또한 그러한 구도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짧은 말 한마디에는 앞으로 <국가>가 다루게 될 핵심 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중대한 함축이 담겨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최소한 <국가>에서 플라톤이 펼치는 주요 관심사가 오늘날 흔히들 생각하듯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각 개인들의 행복과 이익에 대한 관심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체제에 관한 논의 또한 그것의 구현 조건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임을 미리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제2권에서 소문자와 대문자의 비유를 통해 정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국가 차원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4-10(348a~349a): 소크라테스 검토방식을 재정비하고 트라쉬마코스에게 정의와 부정의를 각기 덕과 악덕에 연관시켜 묻자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이고 부정의야말로 덕과 지혜라고 답한다.

 

[348a]

* <국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논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트라쉬마코스가 논의에 끼어들어 불쑥 던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벌어진 정의와 권력, 권력과 이익에 관한 논쟁(338c-347a)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살폈듯이 ‘부정의한 사람의 삶이 과연 정의로운 사람의 삶 보다 나은가?’ 즉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관한 논쟁(338b-354a)이다. 앞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뒤의 논쟁은 비록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 찬양론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정의로운 삶의 방식의 우위를 논증하기 위해 논쟁의 적극적인 방편이자 화두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문답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만큼 내용 또한 제2권 이후에서 다루어질 내용을 일정 부분 암시 또는 선취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두 번 째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던진 문제와 앞으로 전개할 문답의 방식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를 제쳐두고 글라우콘과 상의하고 있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삶의 방식이라는 보다 적극적 주제를 내세워 자신의 주도하에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확실하게 논파하려는 기세로 글라우콘을 우군으로 끌어들여 함께 검토 방식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정의로운 사람의 삶과 부정의한 사람의 삶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진실ἀληθής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이 더 유익하며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οὐ πείθομαι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 앞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아무리 부정의를 제한 없이 저지를 수 있다 해도 결코 부정의가 정의보다 더 이득이 된다고 결코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니라고 자못 비장하게 언급하고 있다.(345b)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그러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 결코 자기 혼자만이 아님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릇된 주장을 논파함에 있어 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연한 의지로 함께 연대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국가> 전체에 걸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과 연대하여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348b]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트라쉬마코스를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아래의 두 가지 검토방식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 어떤 방식이 좋을지를 묻는다. 하나는 토론 양쪽이 번갈아가며 각기 유리한 주장과 반론을 제기하고 그 후 판관들이 평결하는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제껏 해왔듯 서로 합의를 보아가면서 고찰하는 방식ὥσπερ ἄρτι ἀνομολογούμενοι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σκοπῶμεν 즉 우리 자신들이 재판관들δικασταὶ인 동시에 변론인들ῥήτορες이 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검토방식 중 앞의 것은 이른바 당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재판 절차에 따른 방식이다. 즉 원고가 먼저 연설을 통해 고발 이유를 밝히면 피고가 그에 대한 반론을 펼치고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공방을 펼치고 나면 그것을 지켜보던 재판관들이 판정을 내리되 형벌이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사건의 경우에는 다수결에 의해 판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나중의 검토 방식은 논의 당사자들은 물론 그것에 더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토론에 가세해 모두가 판관들이자 변론인들이 되어 서로 합의를 통해 서로가 납득을 하는 보다 강화된 문답법적 검토방식이다. 사실 이 방식들은 일정부분 장단점이 있다. 전자의 방식은 법률에 따른 재판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어떤 형식이건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인 반면에, 당사자들의 납득 여부에 상관없이 일반 대중으로 구성되는 재판관들에 의해 판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 능력이 중대 관건이 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은 토론자들의 합의하에 검토가 진행되므로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검토 방식이기는 하지만, 서로 자기주장만 펼치고 감정까지 내세워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 자체가 불가능한 방식이다. 따라서 이 후자의 검토방식이 가능하려면 검토에 참여한 사람들이 냉철한 이성에 따라 토론의 규칙을 지키고 그에 따라 귀결되는 결론은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제안된 두 가지 검토방식 가운데 글라우콘이 마음에 든다고 답한 방식은 두 번째 방식 즉 지금까지 해온 문답 방식에 토론자들이 더해지는 방식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적 방식을 보다 강화한 방식이다. 사실 위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경우는 문답법에 기초한 후자의 방식을 선호할 것이고 트라쉬마코스의 경우 연설가인 자신에게 유리한 전자의 경우를 선호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에게 전자의 방식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검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재판정에서는 당사자들의 납득 여부와 상관없이 양쪽 연설을 들은 재판관들의 판단에 따라 판정이 내려질 뿐만 아니라 판정방식 또한 저마다의 주장을 통해 ’좋은 점들을 세어보고 재어 보는 것’ἀριθμεῖν δεήσει τἀγαθὰ καὶ μετρεῖν’ 즉 양적 계산에 따른 다수결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이러한 다수결이었다. 이 부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재판 과정 전체가 연설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던 당대 민주정 치하의 재판 절차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을 담고 있다. 진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연설에 휘둘리는 대중들이 재판관이 되어선 안 되며 어디까지나 주장 자체의 정당함을 냉철하게 분별해낼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재판관들인 동시에 변론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테네 재판 방식에 대한 위와 같은 견해는 앎과 분별에 있어 철학자의 배타적 우월성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오늘날 플라톤을 반민주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로 규정짓는 주된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세계가 대체로 그러했듯이 아테네 당대에도 교육은 기본적으로 소수 귀족들이나 양반 계급이 갖는 특권이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엘리트주의는 계급적 편향이라기보다는 무지에 대한 지성의 지배를 지지하고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에서처럼 충분한 교양을 갖춘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도 실천적인 정치참여와 그것을 통해 그들이 구현하는 집단 지성의 힘을 플라톤이 직접 경험하였다고 가정한다면 플라톤은 결코 단지 대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폄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폄하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중 자체가 아니라 무지였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는 서로 합의를 보아가면서 고찰하는 주체를 우리들σκοπῶμε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348b) 이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앞으로의 검토 방식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등 참관인들을 포함한 보다 강화된 문답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이후 곧바로 실제 논의와 검토 과정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이 347e에서도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검토 주체를 우리σκεψόμεθα라고 말했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역시 앞으로 제2권 이후에서 진행될 본격적인 검토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제2권 서두에서부터 이미 확인할 수 있듯이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검토에 참여하고 있고, 그 이후에도 ‘우리 자신이 판관들인 동시에 변론인’δικασταὶ καὶ ῥήτορες이라는 표현 그대로 온 힘을 기울여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한 판관의 역할을 물론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변론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48c]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과 검토방식에 대한 대화가 마무리되자 이제 자신이 던진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화두로 꺼내들어 본격적으로 트라쉬마코스와 문답을 재개한다. 사실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자신의 현실론이 논파된 이후(346d) 위축된 듯 입을 다문 채 지금까지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고 검토 방식과 관련해서도 아무런 의견도 내놓고 있지 않다. 자신의 기본 주장이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반론에 의해 논박된 것에 따른 위축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적 문답방식에 대한 냉소와 거부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려나 이제 트라쉬마코스는 앞서와 달리 소크라테스의 주도하에 그가 택한 검토방식에 따라 그가 던진 문제에 대해 자신이 대답을 해야 하는 수세적인 지위에 처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의해 다시 문답에 참여한 이후(348b)에는 거의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수동적으로 대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 트라쉬마코스와 문답을 재개하면서 우선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돌아가 트라쉬마코스에게 여전히 ‘완벽한 부정의가 완벽한 정의보다도 더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는지’τὴν τελέαν ἀδικίαν τελέας οὔσης δικαιοσύνης λυσιτελεστέραν φῂς εἶναι;’를 확인하듯 묻는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당연히 그렇게 주장하고 이미 그 이유도 밝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348c]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부정의와 정의 중 하나는 훌륭함(덕, ἀρετὴ)으로 다른 하나는 나쁨(악덕,κακία)으로 일컬을 수 있다면 자기는 정의가 훌륭함(덕)이라고 일컫겠노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기는 여전히 부정의가 득이 되고λυσιτελεῖν 정의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와 정반대οὐναντίον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348d]

* 소크라테스의 견해와 정반대라면 정의는 악덕, 부정의는 덕으로 일컬어야 하지만, 트라쉬마코스는 악덕이란 말 대신에 아주 고상한 순진성(아주 고매한 선의πάνυ γενναίας εὐήθεια)으로, 덕이란 말 대신에 훌륭한 판단εὐβουλία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한다.

* εὐήθεια는 좋게는 정직함, 순박함의 뜻을 갖고 있지만 나쁘게는 단순함, 우둔함의 뜻도 갖고 있다. εὐβουλία는 사리분별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전후사정과 이해관계를 잘 따져 대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람은 순진하고 아둔한 사람이고 부정의한 사람이야말로 세상 이해관계에도 밝고 그 유불리에 따라 처신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가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φρόνιμοί καὶ ἀγαθοὶ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바로 이어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속내를 드러낸다. 즉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완벽하게τελέως 부정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라와 부족을 자신들 밑에 종속시킬 수 있는 사람’οἵ πόλεις τε καὶ ἔθνη δυνάμενοι ἀνθρώπων ὑφ᾽ ἑαυτοὺς ποιεῖσθαι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하는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소매치기 같은 수준의 부정의한 자가 아니라 다름 아닌 통치자 수준에서 부정의한 자 요컨대 참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트라쉬마코스는 논의 주제가 삶의 방식으로 전환되었음에도 그야말로 조금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부정의 찬양론을 토대로 정치 권력지상주의에 강고하게 매달려 있다.

 

[348e]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이러한 주장을 의아해하면서ἐθαύμασα 그가 말한 훌륭함과 분별의 문제를 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의 문제로 연결시켜 트라쉬마코스에게 ‘혹시 그렇다면 그 자신 부정의를 덕과 지혜 부류μέρει로, 정의를 그 반대 부류로 간주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 물음 역시 앞으로 전개할 소크라테스의 논박 전략의 일환으로 던져진 것임에도 트라쉬마코스는 ‘전적으로 그렇게 간주한다’πάνυ οὕτω τίθημι고 동의를 표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한결 더 다루기 어려워(더 까다로워,στερεώτερον)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길게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우리말 역문으로는 금방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내용을 좀 풀어서 말하자면 아래와 같은 내용일 것이다. 즉 ‘트라쉬마코스가 부정의가 득이 된다λυσιτελεῖν 고 간주하더라도 남들이 그러하듯 실제 속으로는 악덕이고 수치스러운 것αἰσχρὸν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세간의 통념과도 상통하는 것이라 그런 통념에 따라κατὰ τὰ νομιζόμενα 이렇다 저렇다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겠지만, 트라쉬마코스 당신은 통념과도 다르게 그것을 수치스럽기는커녕 아름답고 강력한καλὸν καὶ ἰσχυρὸν 것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하물며 우리들의 생각과는 아예 정반대로 겉으로나 속으로나 부정의를 감히τολμᾶν 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니δῆλος 그러한 대담하고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은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강고하고도 뻔뻔하게 일상의 통념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아집에만 매달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에서나 오늘날 그 어느 사회나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세간의 보통 사람이 아니라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혹은 사회 지도층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없애는 것은 신의 몫이고 우리들이 할 일은 지금의 소크라테스처럼 그들의 주장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치열한 논리와 실천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349a]

*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적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더 없이 정확하게 알아맞힌다ἀληθέστατα μαντεύῃ고 말한다. ‘알아맞힌다’의 원어μαντεύῃ의 원형동사 μαντεύομαι는 ‘신이 속내까지 다 들여다 볼 정도로 알아맞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라쉬마코스가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하고 있음λέγειν ἅπερ διανοῇ을 알게 된 이상, 그 주장을 논의를 통해τῷ λόγῳ 끝까지 검토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기 말과 생각이 일치되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냐, 어찌되었건 자기가 한 ‘말(주장)에 대해 논박하려는 것 아니냐’οὐ τὸν λόγον ἐλέγχεις;라고 묻고 소크라테스는 그야 상관없다οὐδέν고 말한다.

* 소크라테스는 앞서(346a) 트라쉬마코스에게 어떤 형태로든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게 대답하지 말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앞서의 요구를 트라쉬마코스가 최소한 충족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의 속내는 변함이 없는데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말만 가지고 논박하는데 대해 불만을 품고 소크라테스의 그 말에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반문에 대해 상관없다고 말하고 바로 뒤이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속내는 속내대로, 말은 말 대로 모두 논박할 수 있으므로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결론을 위해서 지금처럼 진실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대로 대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정의와 덕과 부정의와 악덕과 관련한 기본적인 견해를 확인한 후 이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첫 번째 논쟁에 이어 두 번째 논쟁 즉 ‘과연 부정의한 사람의 삶의 방식은 정의로운 사람의 삶의 방식보다 나은가?“에 대한 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제1권의 끝까지 이어지는 이 두 번째 논쟁 부분은 아래와 같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지혜와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49b-350c) 2) 힘과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50d-352c) 3) 덕과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52d-354a)

 

4-11(349b~350c): 소크라테스 능가개념을 토대로 정의가 덕과 지혜임을 밝히다.

 

[349b]

*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워낙 대담하고 의아스러운 것이어서 그것이 정말 그의 생각 그대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예비적인 대화가 마무리 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부정의가 덕과 지혜라는 앞서의 대답을 검토하기 위해 ‘정의로운 사람은 뭔가에서건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한다고 여기는지’ὁ δίκαιος τοῦ δικαίου δοκεῖ τί σοι ἂν ἐθέλειν πλέον ἔχειν; 대답해달라고 말한다. 이 물음은 장차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한 시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질문이다. 특히 ’능가하고‘πλέον ἔχειν’라는 말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 트라쉬마코스는 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능가하고’의 의미를 일상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대답을 이어간다.

* πλέον ἔχειν(pleon echein)은 ‘더 많이 차지한다’, ‘능가한다’, ‘넘어선다’의 의미를 갖는다. 위의 말은 이후부터 350c까지 그것의 명사적 표현인 ‘능가함’, ‘넘어섬’πλεονεκτεῖν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트라쉬마코스로선 이제까지 주장해왔듯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보다 뭔가를 더 많이 갖는 사람이고 더 강한 사람이므로, ‘능가’라는 말은 부정의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정의로운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예의나 찾고ἀστεῖος 순진하기 그지없는εὐήθης 정의로운 사람이 상대가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간에 그 누구를 능가하거나 넘어서려 한다는 것은 트라쉬마코스로서는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당연히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올바른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고‘ἀξιοῖ πλεονεκτεῖν 그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할까 하지 않을까’를 묻는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겠지만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묻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도 않고 그러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부정의한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할 자격도 있고 능가하고 싶어하며 그것을 정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이라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는 ‘그야 그렇겠죠’ ἀλλ᾽ οὕτως, ἔφη, ἔχει. 즉 ‘그런 생각이야 가지고 있겠죠.’라고 답한다.

* 요컨대 이 논의국면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1) ‘정의로운 자는 정의로운 자를 능가하려하지 않는다.’ 2)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한 사람을 능가할 자격도 있고 능가하려는 의지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로운 것이라 여긴다’

 

[349c]

*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의 경우는 어떠한 가에 대해서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아래와 같은 점을 동의 받는다. 1) 부정의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이건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할 자격이 있고 능가하려 한다. 2) 부정의한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것을 얻으려 경쟁한다.’ ἁμιλλήσεται ὡς ἁπάντων πλεῖστον αὐτὸς λάβῃ.

*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로부터 확인한 부정의한 사람의 태도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태도로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넌 어떤 사람도 넘어설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다. 네가 가질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최대의 것을 얻기 위해 과감히 무한 경쟁에 뛰어 들어라’

 

[349d]

* 이로써 검토를 위한 테제가 정리 확인되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바탕으로 앞에서(348d)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한 것 즉, ‘부정의한 사람은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다’φρόνιμοί καὶ ἀγαθοὶ라는 주장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시가에 능한 사람μουσικὸν 과 시가를 모르는 사람ἄμουσον 가운데 어느 쪽을 분별력 있는 사람τὸν φρόνιμον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 시가(詩歌μουσική, mousikē)는 music의 어원으로 종종 음악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 의미는 말부터가 음악, 예술, 학문의 여신인 뮤즈μουσαι에서 나왔듯이 이를테면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등과 같은 시가를 비롯해서 음악과 연극, 춤 등 일체의 조화와 관련한 예술 영역은 물론 학문적 지식 내지 교양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문자시대 이전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정보는 구술로 전승되었고 그러한 구술은 노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노래를 의미하는 시가가 μουσική라는 이름으로 지식의 뜻도 가지고 있고 종종 학예(學藝)로 번역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이에 따라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같은 시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의 지침을 제시하는 경전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μουσική에 능하다는 것은 곧 지적 능력과 교양을 두루 갖추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μουσικός(mousikos)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대 동양에서 군자가 갖추어야할 교양으로서 여섯 가지 기예(技藝) 즉 육예(六藝)에 음악(樂)은 물론 예(禮), 사(射, 궁술), 어(御, 말 타는 기술), 서(書), 수(數)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349e]

*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가 시가에 능한 사람이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의술에 능한 사람ἰατρικόν도 그와 마찬가지로 분별력 있는 사람인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받는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시가에 능한 사람이 리라를 조율할 때 다른 시가의 능한 사람을 능가하려고 하거나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 트라쉬마코스의 대답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가에 능한 사람이 조율 능력에 능하다 해도 시가가 능한 사람끼리도 능력차이가 있고 그런 이유로 능한 사람끼리도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자기가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트라쉬마코스는 앞에서 부정의한 자는 강한 자로서 모든 것을 능가하려 하고 경쟁도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 와서 시가에 능한 사람이 시가에 능한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 하지도 능가할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50a]

* 능가개념을 검토의 시금석으로 삼아 펼쳐지는 소크라테스의 이 논박은 350c까지 이어진다.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어가며 전개되는 그 논박의 진행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온갖 지식ἐπιστήμη 및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와 관련해서도 전문적 지식이 있는 사람τίς ἐπιστήμων은 다른 전문가가 행하거나 말하는 바를 능가하지 않는다. 반면에 전문지식이 없는 자는 다른 전문지식이 없는 자를 능가하려 한다.

 

[350b]

2) 그런데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ὁ σοφὸς ἀγαθός;이다. 이들은 같은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고 한다. 반면에 못되고 무지한 자ὁ κακός τε καὶ ἀμαθὴς는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반대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고 한다.

3) 부정의한 자도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같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고 한다. 반면에 정의로운 사람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같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한다.

 

[350c]

4)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지혜롭고 훌륭한 ἀγαθός τε καὶ σοφός 사람, 부정의한 사람=못되고 무지한 자τῷ κακῷ καὶ ἀμαθεῖ.’라는 결론이 나온다.

* 이로써 348e에서 부정의를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의 부류로 간주했던 트라쉬마코스의 생각은 그 자신의 동의하에 진행된 논의 과정을 통해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논박이 이루어진 것이다.

* 350c에서 ‘정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ἀγαθός τε καὶ σοφός 사람, 부정의한 사람은 못되고 무지한 자τῷ κακῷ καὶ ἀμαθεῖ.’라는 결론은 350d에서 ‘정의는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고 부정의는 악덕κακία과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라는 말로 서로 합의된 것으로 표명된다. 이러한 논의 과정 전체에 기초하여 정의와 부정의 부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정의의 부류 = 덕ἀρετῆ, 지혜σοφία, 훌륭함ἀγαθόν, 지식 ἐπιστήμη, 유식μαθὴ

부정의의 부류 = 악덕κακία,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 무식 ἀμαθ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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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능가πλεονεκτεῖν라는 개념을 끌어들인 그의 의도와 그가 생각하는 능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보통 ‘ 능가’라는 말을 ‘뛰어난 자가 경쟁에서 상대를 능가한다’할 때처럼 상대를 ‘이긴다’, ‘넘어선다’의 의미로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겐 앞에서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 등에 관해서도 그랬듯이 어떤 기술이 그 기술인 한에 있어서는 기술이 이루는 최고의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즉 그 기술의 전문가는 그 최고의 것을 달성하는 사람이다. 전문가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술에 능한 사람은 산술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정답을 내놓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정답을 내놓는 사람이 다른 정답을 내놓는 사람을 능가할 필요도 없고 따로 자기가 더 산술 자격이 있다고 말할 것도 없다. 의술의 경우도 전문가라면 질병에 딱 맞는 처방을 내놓는 사람이다. 다른 의사도 그가 전문가인 한 똑같은 처방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능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 능한 사람이 리라 조율에 있어 다른 시가에 능한 사람을 능가하려하지 않고 또는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끼리도 수준 차이, 능력의 정도차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만약 해당 기술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는 사람은 이미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무언가를 할 줄 안다, 안다는 것은 완전하게 할 줄 한다, 완전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앎ἐπιστήμη은 능력δύναμισ과 탁월함ἀρετῆ을 포함한다. 이론과 실천, 지행합일이 진정한 앎인 것이다.

* 플라톤의 이런 사상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면 ‘무엇이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무엇이 그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 고유의 것이 존재하고, 그 무엇과 다른 무엇 사이에는 그것들 서로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선, 한계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그 경계선을 peras라고 부른다. 즉 어떤 것의 peras는 그 어떤 것의 내적 규정이다. 그것들 서로에는 모순율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은 그 무엇인 한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그 경계를 넘을 경우 그것은 이미 그 무엇이 아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경우처럼 인간 행위나 기술의 경우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행위나 기술의 경우도 그것이 어떤 행위이고 어떤 기술인 한, 그것을 그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경계가 있고 그것의 완전성, 최선의 상태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가 있고 그 척도에 충족한 상태로서 최고의 상태 즉 적도(適度metrion)가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그러한 적도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일반의 가치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행위 특히 도덕적 행위에는 넘어서는 안 될 당위의 척도, 한도가 있다는 도덕 객관주의의 입장인 것이다. 플라톤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한, 그의 주장대로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기술에서건 행위에서건 이러한 한도를 정확히 하고 그 한도를 지키는 사람인 반면에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하려는 사람은 정해진 한도나 고유의 몫도, 분수도 모르고 제멋대로 행하는 무지한 자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논의 국면 서두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능가 개념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 어쨌거나 이곳에서 시가에 능한 자가 리라 조율에 있어 시가에 능한 다른 자를 능가하려 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하려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아직도 엄밀론을 견지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몰라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부정의한 사람은 모든 것을 능가하려 하고 경쟁하려 한다는 점에 그가 동의했을 때(349c) 그는 분명 행위나 기술의 한도나 척도 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논박이 성공했다는 것이 그가 논증 과정에서 제시한 생각들 자체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논박은 행위나 기술의 최고의 상태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진실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성립할 수 있는 논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능가라는 시금석 또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성립하는 시금석이고 논리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시금석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대로 만약 행위나 기능, 기술의 최고상태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전제하면, 당연히 그것을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을 능가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 대전제의 정당성은 논증되고 있지 않다. 설사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실제로 완전하게 인식하거나 완전하게 행위나 기술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지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그 완전성, 그 적도성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도 없다. 척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과연 그것이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척도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수학과 기하학의 경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척도가 있고 답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수학과 기하학 문제도 있을 뿐만 아니라 수학과 기하학 자체도 일정하게 전제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하물며 도덕적 정치적 행위의 경우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플라톤은 그러한 완전한 앎, 완전한 형상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변증술dialektikē의 능력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갖는 철학자가 실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실제 존재하여 완전한 진리를 한 치의 오차나 실수 없이 모든 국면에서 체득하거나 또 설사 체득했다고 하더라도 그 체득된 것이 과연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인지를 확인 검증하기도 실로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진리를 완전히 체득해낸 완전한 의미의 철학자나 지자의 존재는 현실의 무지와 결핍을 진리로 견인해내기 위한 하나의 지향이자 최선의 목표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의 지는 진리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이 필연적으로 추동하는 지적 긴장과 열망 그 자체인 것이다.

* 완전한 진리의 존재 여부가 이성적 검증 너머의 것이라고 해서 그것에 대한 믿음이나 지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결단코 아니다. 비록 어떤 것이 완전하지 않다거나 설혹 그것이 갖는 가치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 보다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가치의 우열마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의 상대화와 등치화는 다른 것이다. 철학은 독단과 아집에 대한 비판적 거부는 물론 다양한 생각과 가치들의 우열의 기준과 근거를 찾아내기 위한 끈질긴 숙고와 천착의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전개되는 소크라테스의 논박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일방적인 주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논거와 상대방의 동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 이성적 바탕위에서 상대의 주장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태도야말로 시대를 불문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지식인들의 올바른 태도라 할 것이다. 게다가 제1권에서 이루어지는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다만 상대방의 주장이 갖는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일단 논박 그 차원에서 분명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논증하지 않은 채 전제되고 있는 행위나 기술과 관련한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생각과 사상 또한 앞으로 보다 정치하게 전개되는 그의 주장을 통해 보다 명료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특히나 그런 과정에서 드러나게 될 그의 사상을 그가 살던 역사적 현실과 관련시켜 즉 시대정신의 살펴볼 경우, 우리는 그가 얼마나 그 시대와 역사, 삶의 진실을 고민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고뇌를 바탕으로 얼마나 뛰어난 철학적 성찰과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치열한 사색과 실천적 모색 그것이야말로 철학 사상이 사상으로서 갖는 진정한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의 사상이 그 어떤 다른 사상보다도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이 당대의 시대정신으로서만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그가 제시한 진정한 앎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삶의 진실 특히 정치와 도덕과 관련한 진실은 현실과 역사,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인사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인사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시혜적이지 않는가! 마치 무슨 은혜라도 받으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회보장은 국가,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주는 것, 시혜,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의무, 책무이다.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이유로 오래 전부터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 대신에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라는 말로 새해 인사를 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과연 ‘나는 나인가’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잠시 신문 기사를 상기해 보자. “지난 1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내년 8월 1일부터 시행되는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대학과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강사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온 문제다. (<교수신문> 946호, 2018년 12월 3일 자 참조)”

 

모순과 이율배반

 

위 신문에 나오는 강사법과 관련된 상반된 주장을 정리해 보자. 먼저 대학의 주장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 주장에 대항해서(contra/Wider) 강사들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diction/spruch). 권리 대 권리의 충돌, 곧 모순(contradiction/Widerspruch)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상품교환이라는 틀 속에서 노동력의 구매자(학교)와 판매자(강사)는 각각 주장과 주장, 옳음과 옳음, 각각의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주장, 곧 권리(nomos)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주장, 곧 권리(nomos)는 상품교환의 규칙 속에서 이율배반(Antinomie)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관계는 적대관계(Antagonismus)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습을 칼 맑스는 자본의 일반정식(M-C-M′)에서 ‘평균 노동일’을 둘러싼 구매자의 권리와 판매자의 권리의 충돌로 드러나는 모순과 이율배반을 밝히고 있다. 노동력을 구매한 학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리는 방향을 취할 것이고 노동력을 판매한 강사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려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잘못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했다가는 다시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교환 틀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말하자면 강사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 것은 착취로 나타날 것이고 대학의 입장에서 구매한 노동력의 지출은 잉여가치로 간주될 것이다. 같은 사건이 착취와 잉여가치라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맑스가 잉여가치를 착취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상품교환의 규칙 또한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맑스는 이러한 이율배반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권리와 권리의 충돌, 그 모순을 재판하는, 혹은 판단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이성(logos)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논리(logos)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의 일반정식(M-C-M′)에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는 자본은 허위이고 가상이라는 점이다. 맑스가 변증법(Dialektik)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가상과 허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가상의 이면에는 노동력의 지출을 둘러싼 투쟁이 있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적대관계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강사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의 문제를 모순, 이율배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순의 해소는 ‘힘’이라는 맑스의 견해와 지난 3일 부산대 시간강사 파업 17일 만에 ‘고용안정’ 합의안을 도출하였다는 기사는 공명하고 있다. 한 쪽의 힘이 커지면 다른 쪽의 힘은 작아진다. 이것이 모순이다.

 

역설과 비판

 

그런데 우리는 강사법을 둘러싼 모습 속에서 역설(paradox)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사법과 관련하여 대학의 견해(doxa)는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반대방향, 다른 방향(para)의 견해, 이를테면 강사들의 견해인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역설(paradox)이다. 다시 말해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이고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저해’이고 ‘교육의 질 향상’이다. 한 쪽의 견해가 커지면 다른 쪽의 견해도 커진다.

이 역설을 통한 비판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위기(crisis)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다. 18세기 유행어였던 ‘비판’(criticism, critique, Kritik)의 어원은 그리스어 krino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구별하다(differentiate), 선택하다(select), 판단하다(judge), 결정하다(decide)”이다. 우리의 삶의 위기에 대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비판과 위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며, 어떠한 비판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여’,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비판은 삶을 교정하는 비판임과 동시에 삶을 넘어서는 이행으로서의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맑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를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는 바로 그러한 시간성과 역사성 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스가 역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교정’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역설을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가치의 거울에 비친 강사들의 삶

 

일찍이 맑스는 가치형태에 대한 연구에서 등가형태에 대한 착각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설탕 한 봉지의 무게가 추에만 있는 고유한 성격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설탕 한 봉지의 무게는 설탕 한 봉지와 추와의 사회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관계인가에 따라 설탕 한 봉지의 가치가 변화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강사들, 곧 비정규직의 삶의 가치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강사법을 둘러싼 힘의 관계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상품 세계의 한 시민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면서 상품으로서의 우리들의 가치는 등가형태인 ‘가치의 거울’, ‘대상성’, ‘가치영혼’, ‘유령적 대상성’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나의 가치로 마주하고 있는 ‘대상성’이 자연적 속성과 상관없듯이, 강사들은 그 자신의 자연적 속성으로 비정규직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비정규직이다.”라는 것은 ‘나=비정규직’인데, 이는 내가 비정규직의 유전자를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가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강사들이 일반적 가치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맑스의 비유로 말하자면, “개인 A가 개인 B에게 왕으로 섬김을 받으려면 B의 눈에 왕이 A의 몸으로 나타나야”한다. 이것은 B의 포기, 굴복이다. 달리 말하면 상품-가치-일반적 등가형태는 시민-주권-군주(정부)의 모습과 유사하다. 상품의 가치 표상이 일반적 등가형태이듯 시민의 주권 표상은 군주(정부)이다. 이 관계에서 시민의 주권 표상이 곧 군주라는 것은 군주에 시민이 복종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강사법과 관련된 권리들의 충돌 속에서, 강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강사들은 상품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나마 ‘상품 강사들’은 능동적이다. 반면에 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강사들)가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인정받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명확히 수동적이다.

베드로가 바울을 통해서 자신을 마주했듯,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나의 결단인가, 아니면 비정규직이라는 단일한 등가형태로 우리네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나의 굴복인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의 글귀가 떠오른다.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선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니체와 악순환』을 읽는 한 가지 방법 – 니체와 광기 ‘사이’ [철학자의 서재]

 

『니체와 악순환』을 읽는 한 가지 방법

니체와 광기 ‘사이’

 

니체는 도덕과 의식, 동일성에 반대하고 비도덕, 의식 이전의 충동이나 무의식, 비동일성을 중시한다. 우선, 책을 좀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도덕이란 결정적 한 번으로 채택된 관습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장치일 뿐이다(p. 22). 우리는 이런 도덕에 맞서 쉼 없는 성찰, 반성에서 나오는 근원적 요구들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충동’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우리는 충동을 억압하고 의식이 만들어낸 온갖 억압 장치에 따라 자신을 억압하고 산다. 교육과정을 통해 인간은 이렇게 문명화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우리는 교육받고 문명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동일한 ‘하나의 주체’(인격체)로 구성한다. 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자기 동일성은 실재일까. 니체에 의하면 그것은 만들어진 동일성일 뿐이다. 니체는 모든 동일성을 부정한다. 니체는 광기에 사로잡히면서 스스로 니체 자신이길 그만두었다(p. 297). 동일성의 부재, 이것이 니체를 광기로 이끌었을까.

‘만들어진 동일성’ 그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충동’이다. 충동은 인간의 삶을 위해 개인화되었으므로 오로지 탈개인화되기만을 갈망한다(p. 51). 한 인간은, 인격은 ‘결정적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다시 표현되는 영원회귀의 체험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체험은 악순환이고 목적과 방향도 없다(p. 54). 니체는 이러한 영원회귀의 체험을 긍정한다.

니체는 주체도 객체도 의지도 목적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p. 66). 우리의 토대에는 카오스와 충동, 무의식만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니체에게 이러한 우리의 조건은 부정적인 게 아니다. 의식과 이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우리는 카오스와 충동에서 무한히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 그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충동이라는 힘의 의지(p. 74)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것은 ‘주체’라는 일체성이 아니라 ‘충동의 투쟁’이라고 말한다(p. 78).

‘나’라는 동일성은 영원회귀가 계시할 때 파괴된다(p. 89). 영원회귀는 하나의 동일성, 정체성을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기, 망각하고 무한히 창조하기를 시도하는(p. 100)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너 자신이기를 그치고 다양한 개인들 모두가 되어야 한다(p. 102). 위버멘쉬는 이러한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의 의미이자 목적에 다른 아니다(p. 103). 영원회귀는 충동이고 창조이며 영속적 동일성의 말소(p. 104)이다. 영원회귀의 힘은 끊임없는 변화하며 균형을 파괴한다. 그래서 니체에게는 개인도 없고 종도 없으며 동일성도 없다(p. 130).

그래서 니체의 영원회귀의 세계에는 교환가능한 것도 없고 우연만 있으며 황홀한 비밀스런 체험이다(p. 131). 초인이 아니고서야 동일성의 초극, ‘모두가 되는’ 경험을 아무나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비밀로 남아 있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상에 영원회귀를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불가능성 앞에서 니체가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영원회귀라는 현기증 앞에서 말이다.

우리의 시각에서 영원회귀는 악순환이고 부조리하다. 그것은 카오스이고 비동일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균형의 파괴이며 초과하는 힘이고 이는 우리를 개인 이상의 존재로 끌어올린다(p. 157). 이 힘은 모든 것을 교환의 원리로 대체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맞설 수 있게 할지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위험이다. 그리고 영원회귀는, 창조는 위험상태를 유발해야 한다(p. 172).

이 위험은 현실원칙의 중지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위험이다. 현실원칙을 중지하는 유희에 자신을 거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충동의 강도들의 조건들을 자신의 고유한 형상들 안에 복원한다(p. 177). 예술의 충동은 하나의 ‘환영’을 창조한다. 그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실존에 목적을 주는 어떤 존재, 모든 의지의 자유이다(p. 192). 이때의 ‘환영’은 재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을 넘어서고 ‘초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 질서의 통념이나 지배적 규범 체계와 관습들을 전복시키는 미지의 가능성이며 시인 김수영은 바로 이곳에서만 시의 존재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예술적)환영 그리고 충동, 영원회귀는 평균 이상이길 원하고 영원한 낯섦(p. 220)이길 원한다. 광기에 빠져서 니체는 이 환영 속에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같은 세인들에게 니체의 이러한 사상은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니체가 본 진실, 현실의 균열, 틈, 부조리, 현실의 상처를 애써 회피하고 눈감는 것은 안일한 태도일지 모른다. 그것들은 증상으로 우리에게 언제든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에, 충동에, 정서에 호소해야할 지 모른다. 이성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놀이와 우연의 세계, 영원회귀의 세계, 자유의 세계로 도피해야할 지 모른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어야 할지도 모른다. 결정적 한번으로 삶이 결정되어 꼼짝도 못하는 삶이 아니라 유동하는 삶을 갈망하게 될 지 모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성과 정신이 아니라 느낌으로 정서로 어떤 것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이나 예술가에게 빠져 허우적 거릴수도 있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어떤식으로든 ‘책임’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고 예술을 만나고 하는 일은 적당히 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광기에 빠져서 해야 하는 것일까. 니체는 영리하지 못하게 정말 광기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되는 것일까. 라캉은 자신의 박사논문 <개인의 형성에서 가족 콤플렉스>에서 법의 판결이, 그러니까, 상징계의 법과 금지가 개인의 정신병적 정체성 혼돈을 정지시키는지를 증명했다.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위에 의존하는 주체를 만드는 일, 그것은 법의 역할이었다. 법이라는 동일성을 해체하고(법이든 주체이든 해체하고) 기존의 관습과 상식을 깨려고 했던 니체에게는 ‘법’과 ‘아버지’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니체에게, 우리에게 항상 되돌아오는 문제는 상징계의 법이고 아버지다. 여기에 대응하고 저항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광기와 정상 사이, 정상과 정상 ‘사이’를 방황하고 유동하는 것, 그 ‘사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니체와 라캉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닐까. 다른 건 모르겠고 한동안 그 ‘사이’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며 즐길 수는 있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끝나지 않아도 좋다. 좋은 놀잇감이다. 이 책, 쉬운 책은 아니지만 새해를 맞이하여 일독을 권한다.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한길석(한철연 회원, 가톨릭대)

 

나는 2008년 박사 학위를 수료한 상태로 지방의 모 국립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박사 학위 소유자가 아니면 강단에 설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선배들의 배려로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립대학의 강사료는 사립대학의 그것보다 훨씬 후하다. 더구나 당시에는 정부에서 강사들의 생계 안정을 위해 국립대 강사료를 시간당 10만원 수준까지 인상한다는 정책 목표를 추진하고 있었던 덕에 나의 주머니 사정은 타 강사들에 비해 조금 나았다. 그래도 한 해 수입은 2천 만 원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북 지역에 있는 대학에 출강할 때는 9시 강의에 맞추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첫 차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그날 강의를 마치면 다음날 강의를 위해 값이 헐한 모텔에서 하룻밤 묵고 또 아침 첫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강의료의 일부는 늘상 약값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지만 생계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늘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곤 했다. 방학 동안에는 아무런 수입이 없어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편한 마음으로 학문에 전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든 맞게 마련이다. 한 학기가 지날 때마다 담당 강좌 시수가 줄어들더니 2012년이 되자 내가 출강하던 모든 대학에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박사 논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자 했지만, 불현 듯 눈앞이 캄캄해 지는 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학기동안 손가락만 빨고 지내다가 선배들의 주선으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수도권의 모 대학에 출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박사 논문을 마치고 전임교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생계 걱정은 다소 접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늘 두렵고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통증을 달고 살았다.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고 결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강의를 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문에 대한 사명감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연이은 강사들의 자살 소식에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외롭고 춥고 비참한 시절이었다.

어느 결에 강사법이 제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제2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많은 강사들이 강사법 제정을 반대하는 역설적 상황이 몇 해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진통 끝에 강사법이 통과되었다. 교육부에서는 관련 예산을 편성하면서 강사법의 실행에 대학들이 협조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대학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대량 해고가 필연적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면서 어느덧 강사 해고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현실인 양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사 대량해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다. 대량해고에 대한 예상은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극을 전망하는 것이다. 불길한 예언의 쓸모는 들어맞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게 함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사실은 이러하다. 강사법이 마련되었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방학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강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명령하고 있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증적이고 강제적인 힘이다. 일단 법으로 제정된 이상 강사들을 쉽게 내치지는 못한다. 아무런 무기도 없던 강사들에게 드디어 의지해 볼만한 합법적 무기가 생긴 것이다. 이제 강사들이 할 일은 변변찮음을 탓하며 힘들게 마련된 무기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익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이 무기를 들고 대학에 맞서고 있다. 부산대에서는 강사들이 파업에 나섰으며, 고려대에서는 강사법을 핑계로 추진하려 했던 대학 구조조정 방안을 무산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정치적 실천 운동과 함께 할 때 법의 효력이 구현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사례다.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 없이는 만들어지지도 강제력을 집행하지도 못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불가피한 현실인 양 여기는 어리석음은 일어나지 않은 비극의 힘을 과대하게 키울 뿐이다. 할 일은 한 가지다. 강사법이 명령하는 바를 대학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정치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운동의 조직적 실천은 2019년 5월에 마련될 시행령에서 강사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시킬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시행령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애써 마련한 강사법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강사들은 학내에 강사법의 관철을 위한 정치적 실천 거점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파리 목숨에 불과한 강사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런 운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대량해고가 불을 보듯 뻔하다면 강사법 관철을 위한 운동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정치적 실천 활동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강사 이외의 구성원들과의 연대에 힘 써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과 전임교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밥 그릇 지키기’로 폄하될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이슈를 강사들의 고용 안정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고 전임교원들의 근무 여건을 악화시키는 일방적 대학 구조조정 방안에 대한 비판으로 넓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조정 방안을 감행하게 하는 대학의 지배 및 경영 구조의 개혁에 관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사법은 아직 불행한 현실을 몰고 오지 않았다. 대량해고는 엄포에 불과하다. 대학이 대량해고의 소문을 흘리는 이유는 강사들에게 대학에 저항할 합법적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도구는 쓰면 쓸수록 손에 익는 법이다. 강사들이 할 일은 강사법이라는 도구를 손에 익도록 활용하여 그것이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다.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 이 글은 필자의 2018년 가을 학단협 연합 심포지엄 발표문의 일부입니다. 필자의 동의로 게재함을 밝힙니다.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시간강사 문제에 대한 내부의 시선 교원으로서의 지위 획득과 시간강사로서의 처우 개선 사이에서

 

여름 방학부터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딸아이가 건강보험에서 떨어져 나가 직장 건강보험 가입대상이 되었다. 1년 일하면 퇴직금도 준다고 한다. 기가 막힌다. 이른바 4대 보험 가입자가 된 것이다. 지난 추석에는 의기양양하게 선물 세트도 받아왔다. 20년 이상 시간 강사 경력 동안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처우를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어느 시간강사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에 대한 처우보다 대학의 시간강사 처지가 더 열악하다고 강변한 현실을 딸과의 비교를 통해서 실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의 시간강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후 몇몇 분들의 헌신적이고 끈기 있는 투쟁 덕분에 국회에서 시간강사법 제정에 이르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획득은 흔들릴 수 없는 전략적 목표이다. 그렇기에 그간의 성과가 매우 소중하다. 일각의 주장대로 부족한 점은 추후 개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보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강사법은 몇 년째 유예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마도 이번 년도에는 실시가 확정되어 내년부터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듯도 하다.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어떤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일일이 살펴 따질 생각은 없다. 전략적 목표가 같다면 전술적인 방법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경험한 부당함의 내용에 따라 시급한 현안에 대한 방점도 다른 곳에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가벼이 여겨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목표 수립에만 매달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노무현 정권 초반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공청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당시 필자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한 목표는 장기적으로 추진하더라도 강사료 현실화라고 하는 문제부터 압박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취급되었다. 교원지위만 확보되면 그에 따르는 처우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지에 강사료 현실화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하면 강사료가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세월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나마 국공립대의 경우에만 강사료가 대폭 올랐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강사료는 한 번 정해지면 최소 5,6년은 동결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이슈가 되었던 반값 등록금 문제는 강사료 인상을 방해하는 대교협의 또 다른 명분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필자가 십 수 년 전의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그 때 필자가 했던 주장이 옳지 않았느냐 하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강사법이 제정되고 유예를 반복한 마당에 지금이라도 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 주변의 후배들 중에는 강사료 소득만으로는 연간 소득 2,000만 원 이하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비단 철학 전공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확인해 봐야 정확한 추계를 할 수 있겠지만 시간강사들의 수입을 연간 500만 원 정도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림잡아 3,500억 원의 예산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전국의 강사 수를 대략 7만 명으로 고려한 수치이다. 이를 정부와 전국의 400여개 대학이 공동으로 부담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 후속세대 관련 지원 예산 등을 통합 관리하고 정부의 고용 안전 자금 예산과 유사한 방식의 지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일자리 안정을 위한 정부 예산이 민간 기업에도 지원이 되는데 공공적 성격이 강한 대학의 일자리에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인지 그 원칙에 대한 문제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영업자도 지원하고, 유치원도 지원하고, 중소기업에도 지원하는 데 시간강사는 이등 국민이라 지원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앞서 언급한 공청회에 참석한 당시 교육부 관계자의 언급은 이러한 방식의 문제 해결 가능성을 비추기도 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에서는 국립대학 기준 시간당 강사료 100,000원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사립대의 경우도 강사료를 현실화하는 방식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법률 제정이 필요한 요구에 대해서는 속도를 조절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보장에 대한 요구 역시 그 때도 느긋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교육부 당국자의 발언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공청회 자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관료의 발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리한 모든 것은 일단 챙기고 봐야 전술적 목표도 전략적 목표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강사료 올려주었다고 해서 교원 지위 보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시간강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대학들은 ‘대학교육협의회’를 중심으로 담합에 가까운 대응을 보여 왔다. 비정년트랙이라는 제도를 만드는가 하면, 겸임교수, 연구교수, 강의전담교수, 초빙교수 등의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의 비정년 강의자를 양성해 왔다. 여기에는 어김없이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사장의 논리가 좋다면 시장의 논리 안에서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강사료 현실화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너무 추상적이다. 일반적인 노동 시장에서 비정규직이 요구하는 기준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하지만 이는 시장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 상품 이용의 측면에서 단기 임대 재화는 시간당 이용료가 더 비싸게 책정된다. 카메라 한 대를 몇 년간 렌트해서 이용할 바에는 아예 구매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 상품 역시 단기 사용 노동에 대해서는 시간당 보수를 더 책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장의 원리에 맞다. 따라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기준은 불합리하다. 오히려 비정규직 우대임금이라고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강사료 현실화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현재 전임교수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에서 강의에 대한 수고에 해당하는 금액만 따져 봐도 현재의 강사료보다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강사료의 현실화는 무엇보다 대학의 강사들도 생활인이고 자식을 교육시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실존을 인정하면 당연하게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자신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자기 자식의 대학 진학에 앞서서는 등록금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의 강사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강사들은 금융 이용에서도 많은 제한을 받는다. 하기야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봐야 갚을 처지도 못될 수도 있긴 하다. 대학의 강사는 더 이상 전임교원으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직업 활동을 강사로서 마치게 된다. 그것도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이… 어쩌면 학위기는 운전면허증보다도 자부심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2018년 현재 강사료는 국립대의 경우도 10만원이 못되고, 사립대의 경우는 더더욱 빈약하다. 강사료 현실화 없는 교원지위 보장은 자칫 속빈 강정이 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대학들은 강사료 인상 없이 방학 중에도 급여를 지급한다는 명목 하에 8개월분의 강사료를 12로 나누어 지급하는 술책을 실시하거나 획책 중이다. 국가는 대학의 강사들을 이등 국민으로 생각하고 대학은 강사들을 원숭이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학이 강사를 고용하는 경제적 부담이 클수록 안정적인 교원으로서의 전환을 더욱 재촉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말고 그들

 

개정된 고등 교육법, 이른바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많은 대학들은 강사 수를 줄이기 위한 각종 편법을 강구하고 있다. 강사법 시행에 따른 대학의 재정 부담 가중을 부풀리면서 대규모 강의를 늘리고, 전임교수들의 강의 시수를 늘이고, 졸업 이수 학점을 줄이는 방식 등으로 강사 수를 줄이려고 한다는 사실은 대학 스스로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대학의 그러한 술책에 동조하고 동의하는 대학 구성원들 역시 대학의 본령은 망각하고 자신들의 직장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대학이 그러한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자 한다면 먼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우리들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에게 하루 빨리 학업을 중단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권고해야만 그나마 양심적이라는 평가를 들을만할 것이다.

대학의 졸렬한 대응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강사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대학들에 대해서 교육부는 단호한 방침과 의지를 가지고 불이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학에 지원되는 재정의 불이익을 주고 교육부가 주관하거나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서 지원하는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는 방침을 마련하면 된다. 그로인한 불이익의 크기는 강사법의 취지를 무력화해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게 설계하면 대학은 강사법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교육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교육부는 학문 생태계 파괴의 궁극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사법을 무력화하는 시도는 학문 후속세대의 단절을 야기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 후속세대 문제는 비단 시간 강사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앞으로는 현재 학위 과정에 있거나 박사 수료 후 현직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후학들의 문제는 더 심각해질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강사법이 실시 적용되면 교원 지위를 획득하게 될 강사들의 경우는 1년 단위로 계약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년간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이후의 후학들이 그나마 강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강사라는 신분으로 버틸 수 있던 연구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미래는 더욱 비관적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과거 전임 교수들이 강사 문제에 무관심했듯이 교원이 된 강사들이 무관심해도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한다. 힘은 없다. 전임 교수들도 그랬다. 하지만 강사 문제 해결을 수십 년 동안 방해한 사람들은 전임 교수에서 총장이 되고, 이사장이 되고, 교육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힘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힘이 있어도 못한다. 진정한 학문 후속 세대는 우리가 아니다. 현재의 강사들은 학문 후속세대가 아니라 대개는 중견 연구자들이다. 이 글에서도 학문 후속세대 하면 시간 강사들을 먼저 떠올리는 방식으로 다루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진정한 의미의 학문후속세대들은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첫 맛도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니고 그들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8(345e~346e):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345d) 참된 의미에서의hōs alētōs 통치자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된 의미에서의hōs alētōs 통치자 즉 현실 통치자(343b)가 서로 정반대이다. 소크라테스는 통치는 자기 이익과 무관하므로 참된 통치자는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한다고 말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그런 경우라면 누구도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와 반대로 통치는 철저히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현실 통치자는 누구나 다 통치를 기피하지 않고 자진해서 맡는다고 생각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일반 다스림을 맡는 사람들이 보수를 요구하는 경우를 들어 현실 통치자들의 이익은 통치술 자체와는 무관하고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임을 밝힌다. 그러니까 통치술이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은 의술이나 조타술 등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지 자기 이익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자들의 이익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346b]

* 이에 소크라테스는 보수 획득술μισθωτικὴ을 끌어들인다. 즉 보수 획득술도 하나의 기술이자 능력δύναμις으로서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에게 그 기술 특유의 이익을τήν ὠφελίαν ἑκάστης τῆς τέχνης ἰδίαν 제공한다고 말한다. 즉 의술이 의술로 불리면서 특유의 이익으로 건강을 제공하고 조타술이 조타술로 불리면서 특유의 이익으로 항해의 안전을 제공하듯이 보수 획득술도 보수 획득술로 불리면서 그 특유의 이익으로서 보수τὸ μισθὸν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346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의사나 선장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무슨 이익을 얻든 그것이 공통된κοινῇ 것이라면 그들은 무엇인가 동일한 것을 공통되게 추가로 이용함으로써προσχρώμενοι 이득을 얻게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곧 전문가들이 보수를 받아서 이득을 보는 것은 공통적으로 보수 획득술이라는 추가적인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46d]

* 요컨대 각자의 전문적인 기술은 대상의 이익을 도모하고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보수 획득술은 별도의 기술이다. 이를테면 건축술은 집을 만드는 반면에 이에 부수되는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한다. 이처럼 전문 기술에 보수 획득술이 추가되지 않으면 전문가는 그 기술로 자기 이익을 얻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346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전문가가 무상으로 일을 할 때는 이득을 주지 못하나요?ἆρ᾽ οὖν οὐδ᾽ ὠφελεῖ τότε, ὅταν προῖκα ἐργάζηται;’라고 묻고 트라쉬마코스는 그럴 때도 대상에 이익을 준다고 대답한다. 무상 즉 자기 이익을 빼고도 기술이 대상에게 온전하게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기술의 이익은 모두 대상의 이익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런 논의를 토대로 어떤 다스림ἀρχὴ도 자기가 아니라 그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며παρασκευάζει 지시를 내린다ἐπιτάττει는 것 즉 약자의 이익을 생각하지σκοποῦσα 강자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δῆλον해졌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다스리는 일을 맡는 사람들이 왜 자진해서 맡으려 않고μηδένα ἐθέλειν ἑκόντα ἄρχειν 왜 보수를 요구하는지를 앞에서와 마찬가지로의 논리 즉 통치자들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τὸ βέλτιστον이 아니라 오로지 대상만을 위해 최선의 것을 한다는 점을 근거로 다시 한 번 부연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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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론을 포기하고 현실론으로 돌아가 양치기 기술을 예로 들어 통치술이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이처럼 또다시 논박을 당한다. 그 논박의 기초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보수 획득술μισθωτικὴ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보수 획득술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쟁점이 있다. 그 점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1) * 우선 보수 획득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기술과 이익에 관한 기존의 입장과 부딪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모든 기술은 자기 이익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대상에게 최선의 이익을 제공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보수 획득술도 기술로서 대상에게 최선의 이익으로서 보수를 제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수 획득술이 최고의 것을 제공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요컨대 보수 획득술이 제공하는 최선의 이익 즉 보수는 자기의 이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모든 기술은 자기 이익과 무관하다는 그 자신의 말과 모순된다. 설사 보수 획득술의 대상을 ‘보수의 획득을 잘 하게 하는 것’ 즉 보수 획득이라는 기능의 향상으로 규정하여 일단 개념상 자기 이익과 분리시킨다 해도 보수 자체가 자기 이익을 뜻하는 한 그 또한 ‘자기 이익의 획득을 잘 하게 하는 것’이 되어 결국 자기모순을 피할 수가 없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른 전문 기술들이 대상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전문 기술자의 이득과 관계된 것임을 (346c-d)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그러한 언급은 기술 일반에 대한 앞의 언급과 일관되지는 않지만, 다른 기술들과 달리 보수 획득술은 기술의 대상 자체가 자기 자신인데다 보수라는 말 자체가 자기 이익을 의미하는 한, 내용상 불일치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기 이익과 관련해서는 보수 획득술이 다른 기술과 차이가 있음을 미리부터 밝히고 들어간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기술에 관한 이전의 언급과 모순되는 말을 한 것만은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설사 그 점을 인정한다하더라도 보수 획득술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과 우리가 문제 삼는 트라쉬마코스적 통치술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술을 통해 추구하는 자기 이익은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빼앗아 얻은, 자기 몫 이상의 이익 즉 부도덕한 자기 이익’이다. 그런데 보수 획득술이 가져다주는 자기 이익은 탐욕과 강탈에 의한 이익도 아니고 자기 몫 이상의 것(pleonexia)도 아니며 다만 기술 전문가로서 자신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이자 보수로서 자기 이익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제공받아 마땅한 그 자신의 몫인 것이다. 이런 몫은 생존 자체를 위한 것이므로 생명체로서 당연히 추구해야할 일이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까지 부도덕한 이기주의의 범주에 넣는다면 생명체의 행위 가운데 부도덕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자기모순을 지적하면서 보수 획득술이 대상으로 하는 자기 이익과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통치술을 통한 자기 이익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자기 이익 각각은 말 만 동일하지 내포하는 내용은 전혀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자기 사랑이자 당위이지만 하나는 타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자기의 이익만을 노리는 탐욕으로서 부도덕한 것이다.

2)* 둘째는 보수 획득술이 과연 기술 일반론적 관점에서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쟁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보수 획득술 역시 기술로서의 능력을 갖고 대상에 대해 자기 특유의 이득 즉 보수를 제공하는 하나의 기술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346b-c) 그런데 기술 일반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술은 그 기술 고유의 기능을 활동을 통해 발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은 모종의 활동이다. 소크라테스가 지금까지 언급했던 기술들 역시 모종의 활동으로서 각기 고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술들에 비해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보수 획득술이라는 기술은 그것이 갖는 고유한 활동이 없다. 실제로 전문 기술자들은 자기 전문 기술 활동을 하면서 혹은 기술 활동을 마친 후에 보수의 획득을 위해 별도의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고유한 활동이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도 보수 획득술은 기술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기술들은 기술사용에 따르는 가치 즉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사용 활동이 없으므로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모든 기술들은 바로 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역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술은 사용가치 뿐만 아니라 그것에 자동으로 부수되는 교환가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보수란 이러한 기술 용역에 대한 대가로서 주어지는 기술의 교환가치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수는 보수 획득술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문 기술이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를 갖게 됨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수되는 것으로서 별도의 독립적인 기술적 활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요컨대 보수 획득술이란 기술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수 획득술을 마치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의 기술인 양 언급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도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보수 획득술을 일단 다른 기술들처럼 기술이라고 부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수 획득술을 다른 기술들과 분명하게 차별을 두고 있다. 우선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소크라테스는 다른 전문 기술들이 대상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전문 기술자 자신의 이득과 관계된 것임을 (346c-d) 미리 밝히고 있고, 또 보수 획득술은 독자적인 기술이 아니라 각기 다른 기술들이 공통으로κοινῇ 가지고 있는 기술이자, 각 기술이 추가로 이용하는προσχρώμενοι 기술(346c) 즉 일반적인 전문 기술들에 부수되는ἑπομένη 기술(346d)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도 그 자신 보수 획득술이 독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부차적으로 따라 붙는 부수적인 기술 즉 예외적인 기술임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독자적인 활동은 없지만 의존하는 보수의 획득이 모태 기술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수 획득술도 기술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장 또한 일정부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도 있어 보인다. 즉 보수 획득술은 비록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활동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모태가 되는 기술 활동에 의존하고 있고 그 활동 과정을 통해 보수가 획득된다는 점에서 의존의 형식으로 모태 기술 활동에 포함되어 있거나 모태 기술의 활동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 일반론의 입장에서도 보수 획득술 역시 의존적이지만 모종의 활동으로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보수 획득술은 일반 전문 기술과 달리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보수 획득술이 전적으로 기술이 아니라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기술의 활동이 사용가치 뿐만이 아니라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도 가지고 있고 보수 획득술도 의존적이나마 모종의 활동이자 기술임을 인정한다고 하면, 보수 획득술은 사용가치 대신 교환가치를 특유의 이익으로 발생시키는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에서 언급된 보수 획득술을 지금까지 말해온 기술들과 아주 똑같은 차원에서 비교하여 자기모순으로 비판하고 기술의 범주에서 배제하기 보다는, 소크라테스 자신 ‘기술론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다만 트라쉬마코스의 통치술의 잘못된 이해를 드러내려고 대상 쪽의 이익이 아닌 기술 쪽의 이익을 도모하는 예외적인 기술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있는 이해가 아닐까 싶다.

3) 어찌되었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은 입장에 따라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을 고대 아테네가 아닌 오늘날의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서 보면 나름 독립적인 기술로서 고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여지도 없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인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능력과 기술을 잘 알리고 틈틈이 스펙도 쌓아야 하고 이미지 관리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능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경쟁에서도 밀리고 취업도 어려워져 보수획득도 실패한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겨 취업을 한 경우에도 자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멈출 수 없다. 실적도 올려야 하고 임금협상 능력도 길러야 하고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조활동도 해야 한다. 현대를 자기 PR의 시대, 이미지 시대, 광고의 시대, 마케팅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위와 관련한 활동 모두가 자기 일에 대한 보수의 획득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술을 가칭 자기 마케팅 기술이라고 부른다면 분명 그 기술은 분명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과 다름이 없다. 게다가 그 기술은 고유한 활동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수적인 기술이 아닌 독립된 기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양치기의 경우도 현대 노동자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긴 하더라도 다른 양치기 보다 자기가 더 잘 인정받으려고 주인에게 더 잘 보여 양치기 일을 계속 맡으려고 양치기 기술 이외에 자기를 잘 알리려는 모종의 활동들을 했을 것이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는 동기가 낳은 지나친 발상일까?

4) 그리고 통치술이 자기 이익과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논거들 중 일부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통치를 맡고서 별도로 보수를 요구한다는 점을 들어 통치술과 자기 이익과의 무관성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은커녕 오히려 코웃음을 치게 만들 수도 있다.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서 보면 소크라테스가 최고의 권력을 갖는 통치자와 일반 관리들을 같은 다스림 차원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란 일반 행정 차원의 권력 정도라서 따로 자신의 수고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겠지만,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의 경우는 통치를 맡는 순간부터 그 자리 자체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특권과 이익은 물론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보수는 그냥 푼돈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 역시 소크라테스의 말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이 지금과 같은 일반 관리직 정도가 아니라 그야 말로 최고 통치자가 누리는 권력이라면 전혀 생각과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그러한 권력이 자신에게 주어질 수만 있다면 보수를 요구하기는커녕 자기의 보수를 뇌물로 다 바쳐서라도 통치를 맡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내세우기 위한 논변을 위한 논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설득력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반 사람들에게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의 허황된 꿈 정도로만 들릴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의 세력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들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순결성을 내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부정의한 현실을 변혁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담론과 힘을 길러,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대중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마음과 열망에 불을 지르고 희망을 갖게 하여 함께 변혁을 이룰 세력으로 연대하고 함께 성장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 민중에게까지 코웃음이 될 만한 주장으로는 어떤 변혁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자기 한계까지 엿보이는 이런 주장들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드러내놓고 검토하고 살피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탐욕의 실체를, 그리고 또 현실에서 그것을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본성과 태도를 그리고 자신의 미흡한 태도마저 그 일체를 반성적으로 객관화하여 최대한 샅샅이 있는 그대로 살피고 드러내려 한 것은 아닐까? 그러한 방식으로 앞으로 그들의 탐욕이 철두철미한 그 만큼 그에 맞서 그 철두철미함 이상으로 철저히 변혁해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면 제1권에서 노정되는 논쟁점들은 소소한 것들이건 아니건 그 모두 정의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한 조건들의 세밀한 탐색이자 그것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온갖 용도의 고임돌이자 디딤돌이자 받침돌들이라 할 것이다.

 

4-9(347a~.347e) : 통치자에게 보수는 강제나 벌이다.

 

[347a]

* 소크라테스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통치기술 자체가 대상 쪽 이익에 관계되고 자기 이득과는 무관하므로 아무도 자진해서 통치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그것이야 말로 관직을 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μισθός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라고 말을 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 보상의 예로 돈ἀργύριον과 명예τιμή를 들면서 흥미롭게도 누가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보상이 벌ζημία(벌금, 벌칙, 손실이라는 뜻도 있다)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이 논의에 끼어들어 보상의 부류에ἐν μισθοῦ μέρει 벌이 포함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의 주제는 최선의 인간들이 받는 보상에 관한 문제로 넘어 간다.

 

[347b]

* 앞서도 언급했듯이(345e-346e) 참된 통치자는 통치를 자진해서 맡으려 하지 않고 기피한다. 그 참된 통치자들은 여기서 ‘최선의 인간들’τῶν βελτίστων, ‘가장 훌륭한 사람들’οἱ ἐπιεικέστατοι(ἐπιεικής, ‘적합한’, ‘능력 있는’의 뜻도 있다) ‘훌륭한 사람들’οἱ ἀγαθοὶ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통치를 기피하던 이 사람들이 통치를 맡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보상μισθὸν(앞에서는 ’보수‘로 옮겼다)’때문이라고 말한다. 전 시간 이야기 했듯이 참된 통치자들이 통치를 기피하는 이유는 통치가 자기 이익과 무관하기 때문이었음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치를 하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보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단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통치자들은 통치에 대한 보수를 요구한다’는 앞서의 언급(346e)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그것을 벌이나 강제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글라우콘도 의아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밝히는 그 이유는 이러하다. 우선 통상 통치를 맡으려는 사람들은 보상으로서 명예나 금전을 원한다. 그런 인간들은 명예에 대한 사랑과 금전에 대한 사랑τὸ φιλότιμόν τε καὶ φιλάργυρον을 추구한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에게 명예나 금전은 수치스러운 것ὄνειδος이다. 즉 그들에게 그것은 통치를 하게 만드는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를 기피하게 만드는 나쁜 것들인 셈이다. 게다가 그들은 드러내놓고φανερῶς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고용인들μισθωτοὶ로 불리기를 바라지도 않고 통치를 구실로 몰래λάθρᾳ 보상을 취하는 도둑들κλέπται로 불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훌륭한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어떤 오해조차도 받지 않으려는 결벽 수준의 자기 반성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고용인으로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고용인들에 대한 고대인들의 계급적 비하를 일정부분 반영하고는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통치 업무에 대한 통치자로서의 주인 의식과 주체적 자발성을 강조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시민이 주권자고 통치자는 주권자의 고용인 역할을 하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통치자와 관리들은 거꾸로 고용인으로 불리길 자처해야 하고 나아가 그 점을 시민을 위한 통치자의 기본자세로서 마음속에 깊이 명심해야할 것이다.

 

[347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와 금전이라는 보상 자체가 훌륭한 사람들에게는 창피한 일이라서 훌륭한 사람들로 하여금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려면 그들에게 강제ἀνάγκη나 벌ζημία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강제 당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μὴ ἀνάγκην περιμένειν 자진해서 통치하려고 나서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αἰσχρὸν νενομίσθαι도 그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러한 강제나 벌로서 최대의 벌τῆς ζημίας μεγίστη은 ‘스스로 통치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τῆς δὲ ζημίας μεγίστη τὸ ὑπὸ πονηροτέρου ἄρχεσθαι, ἐὰν μὴ αὐτὸς ἐθέλῃ ἄρχει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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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사람들은 강제 당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통치하려 나서는 것을 창피한 일로 생각한다. 명예나 금전에 대한 사랑으로 통치에 나서는 것은 보상은 커녕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의한 현실에 신음하는 시민들을 위해 어떻게든 빨리 통치에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단지 자기 자존심 때문에 강제를 기다렸다가 그제에서야 통치에 나선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시간 순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정의로운 사람들인 한, 그들이 느끼는 수치감에는 이미 부정의한 통치자들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짐으로써 시민들이 불이익을 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에 대한 수치와 두려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수치와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벌로서라도 통치를 맡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서 강제가 있기 전에 자진해서 통치를 맡지 않는다는 말 역시 강제가 주어진 연후에야 통치를 맡는다는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들이 자진이 아닌 강제로 통치를 맡게 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선후관계를 말할 뿐이다. 굳이 시간적으로 보자면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들 보다 못한 사람들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순간 수치심을 느끼고 그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즉시 자기가 싫어하는 통치를 벌로라도 받아서 통치에 나서는 것이다. 즉 수치심이 발생하고 통치가 벌로서 주어지는 강제의 시점과 그것을 맡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통치에 임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동시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통치를 강제하는 것이 누구인지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것은 부정의한 통치일 수도 있고, 그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요구일 수도 있고 그러한 현실을 목도한 통치자들 자신일 수도 있고 그것들 전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맡을 수밖에 없는 메카니즘을 굳이 정리해서 말하자면 일단 통치가 벌로서 주어진다는 점에서 강제이지만 그 벌을 통해 수치심의 면제라는 혜택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보상이 주어지며 동시에 통치를 벌로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그들이 자각하고 그에 따라 자진해서 통치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통치 참여는 그들의 자발성이자 자유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훌륭한 사람들은 비록 통치는 싫지만 불의한 현실이라면 늘 그렇게 통치자로 강제당하기를 자진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347d]

* 그리고 이런 사정을 거쳐 결국 강제에 의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맡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들은 무슨 좋은 일이나 안락 때문에서가 아니라οὐδ᾽ ὡς εὐπαθήσοντες 통치를 맡아하는 수고를 다른 동료에게 떠맡기는 것ἐπιτρέψαι이 싫어서 자기부터 나서서 통치에 임하려 한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πόλις ἀνδρῶν ἀγαθῶν가 되었을 경우에는 마치 오늘날 현실 통치자들이 통치를 맡으려고 싸우는 것과는 정반대로 서로 통치를 맡지 않으려고 싸운다고 한다.

* 위의 두 상황은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에 임하게 되는 각기 다른 배경을 보여준다. 하나는 불의한 현실에서 참된 통치자의 수고가 크게 요구되는 상황을, 다른 하나는 통치가 잘 되어 통치자가 크게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을 보여준다. 전자의 상황에서는 체질상 통치를 싫어하는 다른 동료들을 생각해서 자기가 먼저 나선다는 것이고 후자의 상황에서는 어차피 참된 통치자ἀληθινὸς ἄρχων가 본성상πέφυκε 오직 피지배자의 이익을 생각하며 통치를 잘할 것이 명백한 이상, 수치스러운 일도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통치 또한 수고로움으로까지 여겨질 일도 아니므로 그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에 전념하려고 서로 나서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상황은 우리가 맞이하는 일상적인 현실의 경우이고 후자의 상황은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된 경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무려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강제는 결과적으로 수치를 면하는 혜택을 훌륭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 강제는 앞서(347a)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소극적이나마 ‘최선의 인간들이 받는 보상’이 되는 것이다. 사실 철학자에게 수치심은 너무도 큰 치명적인 손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손실을 면하게 되는 것은 역으로 그에게 큰 이득이 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명예나 금전에 기초한 유인과 그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호응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와 정반대이다. 그것은 ‘네가 통치자로 나서지 않으면 너는 수치감 속에 살아야 할 거야’라고 하는 손실 회피에 기초한 강권과 그것을 의식한데 따른 부득이하지만 다른 한편 적극적인 수용의 결과일 뿐이다. 철학자가 요구하는 보상과 다른 한편 두렵고 수치스러운 강제와 벌ἀνάγκη καὶ ζημία이 연계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통치자가 되는 벌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에게 보수는 곧 철학자로서 그 자신의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의 보전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식견이 있는(지각 또는 분별이 있는) 이ὁ γιγνώσκων라면 누구나 다 남을 이롭도록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을 택할 걸세.’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을 돕는 노고를 하지 말고 남한테 의지하여 자기 이익이나 챙길 것’을 권하는 말 같이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말을 바로 앞 상황과 연결 지어 아래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라 상황이 태평천하일 때는 식견이 있는 사람(훌륭한 사람)이라면ὁ γιγνώσκων 누구나 남(시민들)을 위해서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동료 수호자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철학을 공부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 그러나 이 부분은 트라쉬마코스가 양치기 예를 들어가며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돌아와 ‘정의는 남에게 즉 강자에게 좋은 것이며 자기 즉 피지배자에게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343b,c) 이래 둘 사이에서 펼쳐진 논의들에 대한 마무리임을 고려하면 아래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의 말대로 정의는 남 즉 강자의 이익이고 자기 즉 피지배자의 손해라면 식견 있는 사람들 그 누가 남 좋은 일 그러니까 강자 좋은 일을 위해 생고생을 하겠느냐. 소크라테스 말대로 우리 피지배자들의 이익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런 통치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들이 이롭게 되는 쪽이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최소한 분별 있는 사람들이라면 트라쉬마코스 주장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자신들에게 더 유익하고 합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347e]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점에 대해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트라쉬마코스와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τοῦτο μὲν οὖν ἔγωγε οὐδαμῇ συγχωρῶ ὡς τὸ δίκαιόν ἐστι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다시 또 우리가 검토하게 될 것’τοῦτο μὲν δὴ καὶ εἰς αὖθις σκεψόμεθα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344d 이후 기술론에 입각하여 전개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즉 기술론적 논박은 여기에서 일단락된다.

* ‘그 점에 대해 다시 또 우리가 검토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고가 <국가>편 아니면 다른 대화편 어디에서 과연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J. Adam. 347e note 참고. 박종현 선생과 천병희 선생은 공히 Adam의 견해에 따라 이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스쳐가는 말 또는 상투적인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앞에 트라쉬마코스와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결론적 발언의 직접적인 근거가 앞의 논의 전체에 대한 식견 있는 사람들의 판정임을 고려하면 달리 해석할 여지도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누가 보더라도 그 자신이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통치가 강자만을 위한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입장보다는 통치가 시민을 위한 이익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바보가 아닌 한 자기 이익을 위한 통치를 바라지 누가 남이자 강자만을 위한 통치를 바라겠는가? 이 점에서도 식견 있는 사람들의 판정에 기초해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판정에 이어 아래와 같이 물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선생! 우리들은 당신의 말하는 통치 쪽을 선택할 것이오. 그런데 그런 통치가 가능하기나 한 것이오.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우리가 그 쪽을 선택한 것인데 그런 것이 옳다는 주장만 했지 가능하다는 근거는 아직 제시하지 않으셨잖아요. 이제 그 점을 말해 주셔야죠.’ 소크라테스 역시 바보가 아닌 한, 식견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요구를 할 것이라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해보게 될 걸세’라는 말은 결코 상투적인 말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식견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궁금해 할 수 있는 문제들을 소크라테스 역시 당연히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점’의 내용은 다름 아니라 ‘정의로운 통치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라고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실제로도 그에 관한 문제가 <제2권> 이후에서 검토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347d)에서 말한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πόλις ἀνδρῶν ἀγαθῶν(정의로운 나라와 관련한 표현으로서 처음 나오는 말이다) 즉 ‘정의로운 국가에 관한 논의’를 예고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이 부분은 이러한 예고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1권’은 결코 <국가>와 별개로 따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서론으로서 처음부터 계획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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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이루어진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기술론적 논박은 우리들에게 정치의 이념은 물론이고 기술과 기술문명이 지향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톤은 앞으로 <국가>의 논의를 통해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한 조건 탐색에 심혈을 기울이고 우리 또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접하게 되겠지만 그의 기술론적 입장이 갖는 낙관성은 낙관적인 그 만큼 현실에서 늘 도전과 난관에 직면한다. 앞으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 도전과 관련한 몇 가지 상념을 함께 나누어 보기로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기술론적 논박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기술은 대상의 결함을 채워주는 것, 대상에게 최선의 것, 최선의 이익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이 점은 엄밀론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트라쉬마코스도 어쨌거나 동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술 일반론의 관점에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술은 기술의 대상의 결함을 채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결함이 무엇인지는 미리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앞서도 살폈듯이(342b-c 강해) 그것은 기술을 행사하는 자의 기술자체의 본질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에 기초한 기대와 욕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기술은 그런 기준 하에서 결정된 부족부분, 결핍을 채우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실제 따져 봐야할 문제는 기술을 수행하는 자가 그 기술의 본질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그 기술을 통해 기대하고 욕망하는 것 즉 동기와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가 될 것이다. 사실 통치술의 경우만 해도 그것의 결함과 부족함, 바람직함과 그렇지 않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플라톤의 생각대로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기준 자체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오히려 실제 현실을 보면 기술의 결함 여부는 기술을 수행하는 자가 그 기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그 기술에 거는 욕망과 기대의 충족 여부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통치술의 경우도 마키아벨리나, 스탈린이 생각하듯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대상이 되는 국민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그 기술의 본질로 규정할 경우, 그리고 플라톤의 말대로 기술은 대상의 결함을 최선으로 채워주는 것이라 규정할 경우, 그 기술의 최선은 대상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관철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이라고 다 좋은 기술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자라고 해서 다 선한 기술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기술에는 기만의 기술도 있고 독재의 기술도 있고 하물며 학살의 기술도 있으며 같은 기술일지라도 악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참주가 가장 부정의한 자로서 자기이익을 극대화시키고 게다가 가장 정의롭다는 평판까지 누리는 자라면, 참주 또한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 기술자이다. 그리고 참주가 참주인 한, 최대의 통제와 착취를 자신의 통치 기술의 본질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에게는 시민이 자기 통제 하에 있지 않거나 그가 아직 빼앗지 못한 뭔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들 모두를 자기의 통치술이 해결해야할 결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참주의 입장에서 대상에게서 그 결함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국민을 완전히 자기 밑에 종속시키고(348d) 국민이 누리고 있는 그것을 완전히 탈취해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참주들이 수없이 존재해왔고 그들의 그러한 통치 기술의 발명과 완전성을 위해 이른바 수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었다. 비감스럽게도 그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 이렇게 보면 통치술과 기술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인 생각은 어찌 보면 하나의 입장이고 세계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악과 부정의한 현실이 엄연히 위력을 발휘하고 또 자본 주도의 기술문명이 현재 진행형인 한, 그것은 플라톤적 세계관의 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플라톤의 낙관론적 기술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플라톤의 노력과 열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차대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단하고도 힘든 삶의 현실들을 감당하며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세계관의 문제는 단순히 상대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선과 정의를 관철하는 나라와 영혼을 향한 전면적인 선택과 결단과 실천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철학은 선과 정의의 문제를 절대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들 모두를 상대화하여 대립되는 가치 그 모두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형식적 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철학은 권력과 탐욕, 부조리와 이기심이 자기 증식하듯 뿌리를 내려 마치 그 자체로 삶과 역사의 진실인 양 으스대며 우리 앞에 서 있는 이기주의적 세계관에 결연히 맞서 불타협의 정신으로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공동체적 세계관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왜 우리가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으로 찌든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거부하고 서로 다른 욕망들의 공존과 조화를 꿈꾸는 플라톤의 정의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의 기술론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를 통해 그의 치밀한 논리뿐만 아니라 트라쉬마코스적 세계관에 대한 그의 치열한 분노와 적대감 그리고 그것을 깨부수고 말겠다는 의지의 간절함 또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 철학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국가>를 읽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공부하는 목적 또한 정의로운 나라와 혼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세계관의 구축과 내재화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늘 마주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적 세계관과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와 투쟁 그리고 그들에 대한 압도적인 승리에 있다고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금도 외치고 있다. ‘타협하지 말라! 그 뿌리를 뽑아라!’


<공지 사항> 2018년 12월 26일과 2019년 1월 2일은 연말연시를 고려하여 학당 강의를 일시 휴강하기로 함에 따라 이곳에 연재되는 강의록도 잠시 쉬었다가 2018년 1월 중순에 다시 연재할 예정입니다.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인형의 집에서 노라와 반역자인 유일자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은 그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에서 아버지나 남편의 인형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노라의 이야기를 한다. 왜 갑자기 슈티르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입센을 언급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입센의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의 모습이 ‘유일자’의 모습, 곧 나다움의 추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남편의 인형인 노라는 슈티르너가 말하는 노라의 ‘체내화’(Verleiblichung/incorporation)라고 할 수 있다.(407)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화(Heiligung)에 대한 반역으로 탈신성화 혹은 신성 모독(Entheiligung)을 주장했다. 신성모독은 곧 나다움을 찾아가는 길의 첫걸음이다. 그렇다면 입센은 이 희곡에서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가출을 선택하는 ‘노라’를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자아 각성과 자아실현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염상섭은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를 차용한다. 그의 문학에서 노라를 자아 각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노라는 슈티르너가 주장하는 자의식, 자기중심적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염상섭의 초기 문학에서 그는 “가네코 우마지의 자연주의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개성’이라는 개념에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반역자’라는 개념을 접합하여, 개성의 자각을 사회의 억압기제에 대한 ‘반역’으로 변형시키면서 정치 미학적 색채를 가미한다.… 주인공 이인화는 냉소적 이성의 소유자로 지성과 행동이 분열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는 동경에서 경성으로 여행하는 동안 제국 일본의 다양한 억압기제를 확인하고, ‘자기 반역’을 통한 주체 재정립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이인화는 정자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세계사적 전환기에 반역자로 거듭나야 함을 역설한다.”(민족문학사연구 / 52권, 권철호)

이를 통해 우리에게 그동안 너무나 시,공간적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유일자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까운 시간과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혁명인가 반역인가!

 

먼저 다시금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자아로서의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들(verwerte) 때, 내가 나 자신의 가치(Wert)를 나에게 줄 때, 그리고 내 자신의 값(Preis)을 스스로 만들 때, 그때에만 집단 빈곤은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저항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을 때, 자신의 가치를 만들지 못할 때, 그러한 경우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불만으로 시작하는 것은 반역이다. 그는 우선 슈티르너는 ‘혁명과 반역’(Revolution und Empörung)을 구분하다. 그리고 혁명은 상황의 전복,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 혹은 단순한 위치의 전복이며, 따라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행위라고 말하고, 반역은 불가피한 결과로서 실질적인 환경의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환경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만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단순한 위치의 전복’을 경험했는가? 우리의 역사에서 몇 번의 혁명이 있었고 그 혁명을 속에서는 우리는 어떤 존재였고, 지금은 또한 어떠한가? 우리는 여전히 그것에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슈티르너는 “반역(Empörung)이라는 말을 그 말의 어원학상의 의미와 관련하여 선택한 것이고, 또한 형법에서 금기시된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주석 96) ‘empor’는 부사로 “위로, 높이”라는 뜻이고 분리동사의 전철로, ‘위로·높이’의 뜻이다. 동사 ‘empören’은 ‘올리다, 누구에게 반항하다’라는 뜻이다. ‘개’라는 말과 연결되는 견유(犬儒)학파의 디오게네스(키니코스학파의 디오게네스를 슈티르너도 인용한 바 있다)의 기념비에 새겨진 개처럼 낮은 것을 높이고 높은 것은 낮추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보았듯이, 기존에 높은 것은 고정관점, 위계질서 등인데, 슈티르너는 바로 이것을 낮추고자 겸손하지 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관심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지금 개처럼 낮은 것은 바로 우리 개개인들, 유일자들, 노동하며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유일자를 무(無) 위에 놓는다는 것은 유일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므로, 지금 현실에서 개처럼 낮은 유일자를 ‘높게’(empor) 하는 것이 유일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은 이윤, 자유로운 경쟁을 주창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개개인들의 가치를 추구하여 나다움을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슈티르너는 반역의 의미를 다시금 유일자의 철학이 추구하는 나다움으로 연결시킨다. 제도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계하는 유일자의 모습을 그는 나다움을 찾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나다움이라는 표현은 자기 소유자임을 뜻하고 있다. 그리하여

 

“반역은 무장봉기(Schilderhebung)가 아니라 제도(Einrichtungen)로부터 야기되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일어서는 개인의 어떤 반항(Erhebung), 어떤 번영(Emporkommen)이다. 혁명은 새로운 제도를 목표로 한다. 반역은 더 이상 우리를 설계하도록(einrichten) 내버려두는(lassen)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354)

 

위 문장에서 ‘제도’(Einrichtungen)와 ‘설계하다’(einrichten)라는 단어로 언어유희를 하고 있다. “반역은 더 이상 우리를 설계하도록(einrichten) 내버려두는(lassen)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앞 문장은 설계하는 것을 ‘내버려두는(lassen)’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장을 거꾸로 읽으면 삶을 설계하는 것은 나 자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슈티르너는 반역을 “현존하는 것(Bestehende)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곧 “나의 목표는 기존질서의 전복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나의 고양(Erhebung)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에게 그리고 나의 나다움(Eigenheit)에 어떤 자기중심적인 나다움(Eigenheit)이라는 올바로 상태”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는 계속하여 나다움을 주장한다. “반역(Empörung)은 기운을 차리는 것을 요구하거나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emporzurichten)을 요구한다.”(같은 곳) “가난한 사람들이 –반항하고(empören), 떨쳐 일어나고(emporbringen), 일어설 때(erheben), 그들은 단지 자유롭게 되고 소유자가 될 것이다.”(288)

결론적으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보다 반역이고, 반역은 반항(Erhebung)이고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 곧 번영(Emporkommen)이다. 그래서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282) 다시 말해 자신의 번영(Emporkommen)을 위한 반항(Erhebung)이고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하는 것이다. 나아가 나다움이라는 소유자가 되는 것은 반항하고(empören), 떨쳐 일어나고(emporbringen), 일어설 때(erheben) 가능한 것이다.

 

 

반역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

 

익숙한 가치를 다르게 평가할 줄 알 때, 그때야 비로소 반역은 가능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재치와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슈티르너가 주장했듯이, 신성한 것은 낯설고 친숙한 것이다. 신성한 것은 두 대립적 규정이 통일되어 있다. 따라서 신성한 것은 운동이고 모순으로 이해된다. 이로부터 가치체계가 소리 없이 굳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때, 반역은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데카르트)라는 테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변주되었다. “나는 의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셸링)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카뮈) 그렇다면 슈티르너에게는 어떻게 변주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슈티르너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그를 익살꾸러기 광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분노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온갖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 얽힌 그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고 충고하고 도덕적 영향력을 고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해보자. “너나 잘 하세요” 대립으로 드러난 경멸!

 

 

경멸받지 말고 나를 경멸하는 것에 대해 경멸하라!

 

니체는 국가, 시대, 계급, 문화의 한계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구토감이 초인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는데(프리드리히 니체, 박성현 옮김,『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심볼리쿠스, 2012, 19쪽 주석 참조),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도 모든 신성한 것들, 곧 국가, 민족, 자유, 도덕 등등에 대해 신성모독과 경멸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와 그리스도 시대는 대립적인 목표를 끝까지 추구한다. 그런데 전자는 실재를 이상화하려하고(idealisieren), 후자는 이상을 실현하려하며, 전자는 ‘신성한 정신’을 얻으려고 애쓰고, 후자는 ‘거룩한 육체’를 얻으려고 애쓴다. 따라서 전자는 실재에 대한 둔감으로, 곧 ‘세계경멸’(Weltverachtung)로 종결한다. 그러나 후자는 이상(Idealen)의 벗어던짐으로, 곧 ‘정신의 경멸’(Geistesverachtung)로 끝나게 될 것이다.”(407)

 

그는 ‘세계경멸’과 ‘정신의 경멸’을 넘어서는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375)을 주장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니체가 말하는 ‘건너가기’라고 할 수 있다. 곧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이다.(『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21) 이렇게 보면, ‘자기극복’은 ‘내려가기’와 같은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려는 행위를 ‘내려가기’(Untergang)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미덕을 존중하는 사람을 저는 사랑합니다. 미덕은 내려가기를 감행하겠다는 의지이며 초인에 대한 갈망을 담고 날아가는 화살이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22) 니체에게 이 단어는 반복되는 말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슈티르너에게 이 단어를 변증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대립된 두 개의 규정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방법을 변증법이라고 한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추상적인 것(민중,인류)과 구체적인 것(나)은 대립된 것이다.

 

“민중과 인류의 가라앉음(Untergang)은 나를 떠오름(Aufgange)으로 초대할 것이다.”(238)

 

나다움의 가라앉음은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 없음(의기소침Mutlosigkeit)에 의해 -겸손(Demut)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344) 결국 나의 가라앉음은 인류의 떠오름이고 그것은 겸손이라는 나의 단념과 나의 자기부정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나의 떠오름, 나다움의 떠오름을 위해서는 겸손을 벗어나야 한다. 자기극복은 나의 떠오름이고 세계극복(Weltüberwindung)(25)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맑스의 파악으로 본다면, 자본의 잉여가치 창출의 떠오름은 나의 가라앉음이다. 유일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유일자=비인간적 인간이다. 유일자=나다움이다. 따라서 유일자의 ‘부정’은 인간이고 인간다움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꾸로 인간다움의 ‘부정’은 나다움이다. 따라서 유일자는 나다움의 긍정을 위하여 인간다움을 부정해야 한다. 유일자는 상이한 사람이다. 유일자의 부정은 인간이다. 그래서 상이한 사람들의 부정은 인간이다. 다시 말해 비동일성의 부정은 인간이다. 곧 비동일성의 부정은 동일성이다. 결국 인간은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 칼 맑스가 물신숭배를 비판하는 것과 형식적으로 공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적인 노동이 다양한 노동과 교환된다는 것, 곧 추상적 인간노동의 대상화, 다시 말해 교환가치 속에서 상이한 노동과의 동일성은 비동일성의 추상성이기 때문이다.

유일자를 비동일성이라고 이해한다면, 비동일성의 부정, 곧 자기극복의 모습은 유일자의 또 다른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경건하지 않음’(Unehrerbietigkeit)과 ‘뻔뻔스러움’(Frechheit)을 유일자의 태도로 제시하는데, 다시 말해 신성한 것에 맞서는 유일자의 태도는 조롱(Spott), 욕설(Schmähung), 경멸(Verachtung), 의심(Bezweiflung) 등등 이다. 경멸의 내용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경멸받고 있는 것, 경멸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서 거꾸로 경멸받지 않아야 하는 것, 경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니체는 ‘거대한 경멸’의 대상으로 행복, 미덕, 이성, 정의, 연민 등을 거론한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일자의 태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경멸하고 있다는 것, 그것 자체를 무(無)로 되돌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훨씬 더 신성한 것에 대한 근원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님, 무관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린이 같은 사람의 태도는 대상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 곧 주체가 대상과 여전히 관계 맺고 주체가 그 대상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과는 근원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음’이다. 신성함은 신성함에 대한 선포로 성립된다. 그러므로 신성모독은 신성함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가능하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