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55)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 두 번째 파도(1) : 처자의 공유(457b-461d)
[457b-461d]
* 양성의 평등한 역할과 관련한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에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헤쳐 나가야 할 파도로서 이른바 처자의 공유 즉 수호자 집단에서 배우자 공유의 문제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수호자φύλαξ들과 여성수호자φυλακίς들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가능하고δυνατά 이롭다ὠφέλιμα는 점에서 우리의 주장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 후 바로 처자의 공유 문제를 꺼내든다.(457b-c) 처자를 공유한다는 것은 ‘여자들 모두가 이 남자들 모두에게 공유되어서κοινός 어떤 여자도 어떤 남자와 사적으로ἰδίᾳ 함께 살지 않으며 아이들도 공유되어서 어떤 부모도 자식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어떤 아이도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457d)
* 이에 글라우콘은 그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에 대해 의심을 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겠지만 이로움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가장 크게 좋은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 것임은 논쟁ἀμφισβήτησις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57d)
* 그럼에도 글라우콘은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 많은 논쟁이 불가피하니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에 대해 논의해주길 요구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이로움에 관한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가능성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유익함도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457e) 다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허락만 한다면 게으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의 잔치를 벌이곤 하듯이 지금은 그것들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서, 그것들의 구체적인 방책이 무엇이고 그것의 실제 운용이 나라와 수호자들에게 어떤 근거에서 가장 이득이 되는지를συμφορώτατ᾽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458a-b)
* 글라우콘이 그것을 허용하자 소크라테스는 우선 배우자 공유의 문제가 통치자에 의해 어떻게 법제화되고 실제로 운용되는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남자들을 선발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능한 한 그들과 본성이 같은ὁμοφυής 여자들을 선발하여 주거와 식사를 공동으로 하고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단련이나 그 밖의 양육을 받으면서 함께 지내게 한다.(458c) 그렇게 어울리다 보면 이들은 타고난 필연성 즉 성적인 필연성ἐρωτικός ἀνάγκη에 의해 서로의 교합μίξις으로 이끌리게 된다.(458d)
2) 그런데 행복한 이들의 나라에서는ἐν εὐδαιμόνων πόλει 이 서로의 교합이 무질서하면 경건한ὅσιος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짝짓기γάμος는 최대한 신성한ἱερός 짝짓기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이로운 짝짓기가 신성한 짝짓기이다.(458e)
3) 가장 이로운 짝짓기는 동물들의 경우에서 제일 나은 새끼를 얻으려고 할 때 그리 하듯이 인간 종τὸ τῶν ἀνθρώπων γένος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한창때ἐξ ἀκμαζόντων 혈통 좋은 자들끼리 짝짓기를 해야 최고의ἄκρον 통치자들을 얻는다.(459a-b)
4)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의사가 환자를 위해 약 처방을 할 때 그러하듯이 통치자들이 과감하게 처방을 해야 하는데 그 처방은 곧 거짓ψεῦδος과 속임수ἀπάτη이다. 즉 통치자들은 피통치자들의 이로움을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많이 써야 한다. 짝짓기와 아이 낳기παιδοποιία의 영역에서 그것은 ‘옳음’τὸ ὀρθὸν이고 그 크기 또한 특히 작지 않다.(459c) 왜냐하면 가장 뛰어난 남자와 여자들끼리 최대한 자주 관계를 갖게 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막아서 우수한 자손들을 낳아 무리ποίμνιον가 가능한 한 최고의 상태가 되고 수호자 집단ἀγέλη τῶν φυλάκων 또한 가능한 한 가장 내분이 없는ἀστασίαστος 상태가 되게 하려면 이 모든 일이 통치자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459d-e)
5) 그리고 이러한 속임수는 축제나 제의 몇을 법으로 정해서 거기에서 신랑νυμφίος과 신부νύμφη들이 만나도록 하되 짝이 맺어질 때마다 그 못난 사람들이 통치자가 아니라 운τύχη을 탓하도록 교묘한κομψός 제비뽑기κλῆρος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460a) 그리고 이때 그렇게 맺어지는 짝짓기에 어울리는 찬가들도 지어야 하고 짝짓기의 수가 얼마가 되게 할지도 정해져야 한다. 전쟁이나 질병이나 그런 모든 것들을 잘 고려해서 가능한 한 남자들의 수를 동일하게 유지하도록 하고,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나라가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전쟁이나 그 밖의 영역에서 뛰어난 이들에게는 특전γέρας과 상ἆθλον 특히 여자들과 잠자리συγκοίμησις를 같이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ἐξουσία를 아낌없이 주어 이런 자들로부터 씨를 받아σπείρωνται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기르고 양육하는 관리들ἀρχαὶ을 두어야 한다.(460b)
7) 이때 뛰어난 자들의 자식들은 그들이 받아서 양육소σηκός로 데려가 나라의 어떤 구역μέρος에 따로 떨어져 거주하는 보육인τροφός들 손에 맡기고 못난 자들의 자식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의 자식이라도 불구인ἀνάπηρος 경우에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ἀπόρρητος 은밀한ἄδηλος 장소에 적절하게 감추어κατακρύψουσιν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엄마들이 젖이 불면 양육소로 데리고 가되 자기 자식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고 그 밖에 힘든 일은 유모나 보모에게 넘겨주도록 해서 엄마들을 돌보게 해야 한다.(460c-d)
8) 여자는 20살부터 시작해서 40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고, 남자는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한창때 25세를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 55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460e)
9) 만약 이와 달리 이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이 공동체τὸ κοινὸν를 위한 출산에 끼어들어 몰래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그러한 제사θυσία와 기원εὐχή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무절제ἀκράτεια를 수반한 어둠σκότος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다.(461a) 그리고 아직 아이 낳는 시기에 있는 남자라도 통치자의 주선을 거치지 않고 적령기의 여자와 관계를 가지면 동일한 법이 적용된다. 그가 나라에 신성하지 않고 공인되지 못한 서출νόθος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461b)
10) 그러나 그 여자들과 남자들이 아이 낳을 적령기를 벗어나면 자식이나 손자, 부모뻘 되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들이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해도 되되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태아나 아기가 생긴다면 그런 아이에게 양육이 없을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461c)
11) 이 경우 짝짓기가 이루어진 후 열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달에 태어난 자식들은 누구든 그들 모두의 아들이나 딸이고 그들은 아버지가 되고 마찬가지로 얘들의 자식들은 손자 손녀가 되고 그들은 다시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자식을 생산하던 시기에 태어난 자식들은 모두 형제와 자매라고 불러야 한다. 이들끼리 교합은 금지되며 다만 남매지간의 경우는 제비뽑기가 그렇게 나오고 퓌티아 사제가 승인할 경우 동침이 허락된다.(46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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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교합’μίξις 2)에서 ‘짝짓기’γάμος란 말은 각각 ‘성교’와 ‘결혼’으로도 옮길 수 있는 말이다. 이들의 짝짓기는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축제와 제의를 동반하는 신성한 결혼 의례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 4)에서 거짓과 속임수가 ‘크기가 작지 않은 옳음’인 이유는 장차 수호자가 될 우수한 자손들을 출산할 수 있는 방책이자 무엇보다도 그들의 내분을 막을 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내분을 막고 결속을 이루는 것은 나라의 ‘최대선’τὸ 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이다.(462a) 곧이어 밝혀지겠지만 처자 공유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이로움 또한 나라의 내분을 막고 결속을 이루는데 있다.
* 5)에서 ‘한 나라가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나라의 인구를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곳은 수호자 집단과 관련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다소 어색하다. 수호자 집단은 전체 인구 비중에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423c에서 나라 전체의 크기와 관련해서 이미 같은 말을 했음을 고려하면 아마도 생산자 계층의 인구수도 당연히 통제 대상임을 전제하고 한 말일 것이다. 우수한 수호자들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언급도 앞의 언급과 다소 상충하지만, 이 말은 기본적으로 전체 인구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생학적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 6)에서 ‘아이를 기르고 양육하는 관리들ἀρχαὶ’ : 여성의 역할에서 가사 노동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계급사회에서 특권 여성이 노예들에게 고생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에 따라 육아 및 가사 노동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가사 노동은 별도의 관리들 즉 분업에 따른 전문적인 직업군에게 위탁된다. 여성의 사회참여에 따라, 가사 노동이 분리되고 또 그에 따라서 가사 노동이 일정한 직업군으로 전문화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양태와 일정 부분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의 가사 노동은 공적 노동으로 그 대가가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비록 소수 집단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여성과 가사 노동의 분리가 제도적으로 관철된 최초의 사회이기도 하다.
* 7)에서 ‘못난 자들의 자식과 불구자’ : 불구로 태어난 아기들을 유기하는 것(apothesis)은 당대 아테네의 일상화된 관습이었다. 그러나 영아유기는 이유를 불문하고 용납해서는 안 될 반인권적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못난 아이들’의 경우 어떻게 했는지는 여기서 불분명하다. 다만 <국가>의 주장을 요약하고 있다는 <티마이오스> 19a의 내용에 따르면 ‘못난 자들의 자식들은 도시의 다른 영역으로 은밀하게 분산하여 키우되 아이들이 자라나는 동안 항상 그들을 지켜보면서 가치 있는 아이들은 다시 올려보내고 거꾸로 우수한 자들의 자손도 열등해질 경우 아래로 내려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도시의 다른 영역’ 또는 ‘아래’가 의미하는 것은 앞서 건국 신화 부분에서도 살폈듯이 생산자 계층 또는 그들의 생활 영역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이상 국가에서는 불구가 아닌 한 이른바 못난 아이들도 양육과 교육의 결과에 따라 우수해질 경우 다시 수호자가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나라의 분업적 구성원의 하나로 그에 적합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 11)의 내용은 처자의 공유가 분명 가족의 해체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가족의 공동체적 확장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곧이어 처자 공유의 이로움을 다루면서 이기적 가족주의의 해체가 가져다주는 장점을 공동체의 확장 차원에서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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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상국가에서 법으로 정해야 할 처자 공유란 그 내용이 ‘남성 수호자들과 여성 수호자들 모두가 서로 배우자가 되고 태어난 아이들 또한 그들 모두의 자식으로 공유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양성의 평등에 관한 첫 번째 문제처럼 가능성과 유익성의 측면에서 두 번째 문제 즉 처자 공유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지만 글라우콘은 가능성은 물론 유익성도 의심스럽다며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유익성과 관련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장 크게 좋은 것’이어서 그 문제는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가능성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이로움마저 논쟁거리가 된다는 말에 가능성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처자 공유의 유익성에 대한 논의부터 꺼내든다. 이로써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두 번째 파도는 크게는 처자공유의 문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처자 공유에 어떤 이로움이 있는가의 문제로 구체화 되고,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는 이상적인 정치체제 자체의 가능성의 문제로 슬그머니 확대되면서(472b) 소크라테스가 해명해야 할 세 번째 파도를 구성하게 된다. 첫 번 째 파도보다 두 번째 파도가 그리고 두 번째 파도보다 세 번째 파도가 더 큰 난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면 처자 공유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이러한 서두적 논의는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비롯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기하는 정치체제 전반의 실현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그 어느 문제보다도 궁극적으로 플라톤이 해명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처자 공유의 유익함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글라우콘에게 ‘게으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의 잔치를 벌이곤 하듯이’ 일단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마음껏 이야기하겠다고 요청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이 장면은 논거가 비교적 분명한 유익함을 전면에 세워 처자 공유 주장의 정당성을 우선 확보해두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유익성에 반비례하여 그 가능성의 문제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것은 처자 공유의 이로움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분명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야 함에도 소크라테스가 엉뚱한 주제를 끌고 들어와 이리저리 그 논의를 미루면서 시간을 끄는 장면(466e-471)에서도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 제법 지루하다고 할 정도로 길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 장면은 결국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의도적인 논의 지연을 알아차린 글라우콘의 항의를 접하고서야 끝이 나고 그제에서야 비로소 세 번째 파도인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러한 장면 구성들은 모두 처자 공유의 문제가 유익함에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지만, 그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어렵고 난감한 주제인지를 플라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이 또한 처자 공유 문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플라톤 나름의 긴장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인 것이다.
* 사실 첫 번째 파도인 양성평등의 문제의 경우는 아테네 사회현실에서는 힘들었을지라도 최소한 시대 현실에 따라 가능할 수 있고 그 자체로 발전적 변화로 평가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파도인 처자 공유의 문제(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가 아닌 전적인 배우자 상호 공유)는 아테네 사회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어떤 사회에서 현존했었던 적도 없을 정도로 어느 시대 그 누구에게도 그 자체로 실현 가능성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특히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중시되는 오늘날의 경우 그것은 용납 여부는커녕 아예 말조차 꺼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처자 공유의 문제는 그 자신도 비록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 구상 자체만으로도 오늘날 수많은 비평가의 혹독한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 이상국가의 제반 구상을 여러 측면에서 해명하고 옹호하려는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최소한 이 처자 공유의 문제만큼은 누구도 예외 없이 가장 크고 심각한 난관이자 어떻든 피하고 싶은 곤혹스러운 주제로 받아들여 진다. 플라톤 저명한 주석가 앤너스도 해당 논의 부분에서 처자 공유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 방식으로 일거에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아예 도외시하고 있다. (J. Annas(1981) 181-184쪽 참고)
* 플라톤의 처자 공유 문제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아래와 같이 다각적인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플라톤은 하등동물에 대한 유비에서도 보듯이 동물의 품종 개량에 기울이는 것과 동일한 관심을 수호자 집단의 우생학적 개선에도 적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물의 품종 개량이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이, 인간의 우생학적 개량 역시 인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처자의 공유가 국가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 의사와 무관하게 권력 집단에 의해 특정 계층에게 강제의 형식으로 요구된다는 점에서 그의 구상에는 전체주의 내지 국가주의적 이념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2) 게다가 비록 통치계급에 한정되긴 할지라도 결혼과 출산 및 양육이 철저히 국가 소수 권력자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기초한 정교한 제도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개인의 인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 또는 사적 영역에서의 행복 추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다. 사실 개인 간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성적 욕구는 통제할 수 없는 본능으로 플라톤도 인정하고 있다. 정교한 속임수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것이 조작된 것임이 드러날 경우 그 불만족이 초래하는 위험의 크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그 속임수가 ‘크게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459c) 당사자보다도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이 그들의 행복에 충분히 더 부응할 정도로 지고의 지혜를 갖고 있으며 또 그들에 의해서만 그 지혜의 구현이 담보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지고의 지혜가 과연 존재하는지 검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에 의해 그것이 구현될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어디에도 없다. 정반대로 그러한 믿음은 실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폭압과 불행을 초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구상은 최소한 형식에서 나치가 국가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자행한 우생학에 기초한 폭력적 인종주의와 구조적으로 차이가 없다.
3) 실제 역사적인 사례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설사 대의명분이 선하다 해도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이라는 말처럼, 인간의 주체적 욕망과 개개인의 특수한 정황 그리고 비합리적 감성을 배제한 채, 오직 소수 권력의 독단과 형식적인 정치 이성에 기초해 정치적 실천 방안이 수립될 경우 그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수준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충분히 경험하고 확인했다. 처자의 공유 문제는 플라톤의 이성주의가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려 없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고 정당화할 경우, 얼마나 참담하고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처자 공유가 우리에게 안겨다 주는 엄청난 당혹감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용납 여부와 무관하게 비록 어렵긴 하지만 구상 차원에서나마 플라톤이 그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일정 부분 존재했음을 살피는 것 또한 <국가>의 이상적 구상 전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 일단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1) 우선 플라톤이 살던 아테네 당대에는 결혼 당사자들에게 ‘개인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관념 자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념은 근대 개인주의가 확립된 이후에 생긴 것일 뿐 고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고대 아테네 남성들에게 결혼은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에서 그저 출산을 위한 짝짓기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고 성적인 욕망은 이른바 창녀로 불리는 여성들과의 성매매나 소년애를 통해 충족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혼 또는 결혼 상대조차 당사자가 아닌 부친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 결정의 배경에는 최대한 명문 집안 내지 가문과의 혈연 동맹을 통한 이권 확보에 대한 고려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국가>에서는 그 가부장적 권력이 소수의 국가 권력으로 대치되고 결혼이 소규모 가문 수준의 구성이 아니라 나라를 수호하는 공동체 수준의 구성과 처자의 전면적인 공유로까지 크게 확대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혼 당사자들 모두 기본적으로 후계의 생산 말고는 ‘개인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결혼과 관련한 이러한 고려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집안 어른이나 부친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정혼(定婚) 관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처자의 공유 차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논평이나 비판을 가하지 않고 다만 처자 공유라는 공동체적 가족의 확장이 플라톤의 기대와 달리 결코 혈연적 애착의 증대로 귀결되지 않음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 i-vi)
2) 그리고 우생학에 기초한 플라톤의 구상은 – 특히 나치 인종주의의 야만성과 연계되면서 – 그야말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그려진 폭력적 동물 사육과 품종 개량에 버금가는 위험천만한 발상으로, 아예 언급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비판받고 있지만, 우생학적 관념 자체는 오늘날 인간의 건강한 삶과 복지를 위한 의제로 현대과학 전반에 걸쳐 다각적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죄악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가족계획과 관련한 안전하고 효과 높은 피임약의 개발, 결혼 당사자들의 건강진단서 교환, 우수하고 건강한 정자를 확보하기 위한 정자은행의 노력, 태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등은 모두 일정 부분 개인들의 우생학적 고려, 또는 유전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최근 급속하게 발전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와 줄기세포 연구 분야를 들여다보면 인간 유전학에 기초한 기술과학의 발전 차원에서 질병의 치료와 삶의 복지를 위한 우생학적인 관점이 유의미하게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그러나 그러한 유전공학적 시도가 확장 발전하는 현대적 상황 자체가 갖는 위험 또한 상존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래의 생물학적 생태적 자연 상태를 인위적으로 수정 조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오용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추동하는 배후에는 자연의 생태적 환경을 거스르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생학적 고려와 그에 따른 유전공학의 발전이 오늘날 불가피한 현실로 상존하는 한, 그것을 추동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이성적인 통제와 관리가 필연적으로 다시 요구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우생학적 구상에 대한 주된 비판 근거로서 자리 잡고 있었던 인간의 자연적 욕망에 대한 이성적 개입과 통제가 이제는 거꾸로 왜곡된 인간 욕망을 바로 잡는 철학적 기초로 다시 소환되는 것이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어떻게 왜 발생했고 그것이 과연 인간과 자연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성적으로 따져 묻고 그것에 대해 어떠한 지향을 지니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이성적으로 모색하고 그에 맞추어 이성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플라톤 이성주의의 핵심적이고도 일관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4) 다만 문제는 그것을 따져 묻고 모색하며 실천하는 플라톤 이성주의의 실천 주체가 최소한 정치영역에서만은 이른바 소수 철학자 집단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곳에서도 우생학적 판단과 실행은 오로지 그들 소수에 의해서만 기획되고 통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플라톤의 왕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비참함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역사적 경험을 안겨 준 나치와 스탈린의 독재정과 연계되면서, 시민 대중과 개인들의 권익이 아닌 국가 전체와 소수 권력층의 이익만을 위한 이른바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적 폭압체제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의 진전에 따라 오늘날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균형 있게 바라보고 비평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을 제외하면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이 비록 왕정의 구조는 갖고 있으나 그 체제를 시민 대중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국가전체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전체주의적 폭압체제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 강해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아니라 철학자왕 자신들을 포함하여 각기 다양한 본성의 계발을 통해 행복을 획득하는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이른바 공동체주의에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일관되게 피력해 왔다. 플라톤 <국가>의 고전적인 주석가인 네틀쉽도 이 부분에 주해를 달면서 플라톤의 철학자왕정이 지향하는 개체성과 공동체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추상 속의 개인, 문자 그대로 모든 타인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개인들의 공동체가 아닌 그런 공동체란 없으며,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의해서 공유되지 않는, 그들이 살고 있지 않는, 그런 공동의 삶이나 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개체성이란, 그 참다운 의미에서 보면, 이 공동의 삶이나 이익에 참여함으로써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적 봉사에 헌신하는 공복(公僕)이란 그 봉사 때문에 개인이 되기를 중단한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 이익적인 구두쇠가 자신의 일에 ‘자기 자신’을 최대한 집어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정도로 공동의 이익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던져 넣을 때, 그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개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개체성은 더욱 위대한 것으로 살아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플라톤이 보고 있었던 것은 개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통하여 개체성을 가능한 최상의 정도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R. L Nettleship(1925) Lectures on the Republic of Plato. <플라톤의 국가론 강의> 김안중, 홍윤경 역, 교육과학사 2010. 182쪽)
* 아무려나 일부 집단의 처자 공유가 구상으로라도 일정 부분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주장의 강도와는 다르게 그것의 현실적 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세 번째 파도에서 그 가능성의 문제를 슬그머니 이상 국가 일반의 실현 가능성의 문제로 전환하고 있는 데다 그마저 꼭 그것의 실현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다만 본(本)으로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 걸음 물러서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실제로 <국가>의 이상적 구상이 실물로서 현실화된 것이라 평가되는 <법률>에서 첫 번째 파도인 남녀평등은 일정 부분 구체적인 제도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 처자 공유의 문제는 전체를 통틀어 아예 한마디 언급조차 안 하고 있다.
* 그럼에도 플라톤은 이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에 대해서만은 아주 구체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언급하려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처자의 공유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비록 의심스러울지라도 만약 그것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법제화된다면 그것이 나라에 가져다주는 이로움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최소한 자신이 왜 처자의 공유 문제를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매우 중대한 과제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철학적 정당성의 일단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는 현실적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이성적 사고 차원에서 그가 내세우는 처자의 공유가 과연 어떤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요컨대 이 부분은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 자체에 관한 논의라기보다는, 다만 그러한 구상을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철학적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는데 방점이 있다. 특히 이 부분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해설은 다음 강해에서 다루기로 한다. -끝-
* 다음 주제 : 2. 두 번째 파도(II), 처자 공유의 궁극적 목적 : 나라의 결속, 고통과 기쁨의 공유[461e-46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