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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7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결박된 수감자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갑자기 강제된다.’ 이것은 일상의 타성적 앎과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끌려 새로운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상황을 보여준다. 교육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그것의 당위적 성격을 행위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이것만큼 근사한 말도 없어 보인다. 교육은 ‘고개를 돌려 걸어가 빛을 보도록’ 즉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반성적 태도의 전환을 요구하고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강제를 기꺼이 감내한다.

g) 그리고 새로운 배움의 과정은 자신이 보고 알았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실제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 누군가가 지금 보는 것이 더 참된 것에 가깝다고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다그쳐 묻고 대답을 요구한다면 당장에는 전에 본 것이 더 참된 것으로 여겨져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h) 게다가 지금 모형들을 비추는 불빛 자체까지 보도록 강제될 경우, 그는 눈이 아픈 데에다 역광으로 되레 지금 보고 있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아, 전에 보았던 것들이 더 명확한 것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왔던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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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답법적 논박술 이른바 엘렝코스elenchos는 기존에 일상적 상식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나 판단이 갖는 오류를 집요할 정도의 문답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교육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곳곳에는 이러한 엘렝코스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난문aporia에 빠지거나 오류로 판명될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자기를 기만했다고 화를 내며 이전의 생각으로 돌아가 막무가내 고집을 피우거나 아예 대화 자체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국가> 제1권만 해도 문답의 첫 상대로 나오는 케팔로스 노인은 자신의 주장이 궁지에 몰리자 아들 폴레마르코스에게 대화를 맡기고 제사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고 또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철저하게 논파되었음에도 되레 흥분하며 처음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고집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이들과 달리 폴레마르코스처럼 그리고 이곳 풀려난 수감자처럼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논박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배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처럼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의 테아이테토스처럼 소크라테스의 동반자가 되어 소크라테스의 의도에 따라 문답에 충실하게 부응하면서 진실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 비유에서 나오는 장면은 아니지만,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누군가에 이끌려 동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설 만큼 본성상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순수함의 정도와 크기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성향을 기반으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는 오름길이 너무 힘들어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포기하거나 옛날의 타성이 몸에 배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모형들을 움직여가며 수감자들의 생각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정하는 사람들이 갖은 권력이 부러워 그들에 영합하여 그들의 일부가 되어 버릴 수도 있고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모형들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일을 떠맡기도 할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논박술은 논박을 통해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지 자체를 위축시키거나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힘들지만 새롭게 진실로 다가가는 계기와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한 이른바 산파술maieutikē적 성격을 갖고 있다.(<테아이테토스> 148e-151d, 161a) 이른바 철학의 출발로서 ‘놀람’thaumazein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후 새롭게 다가온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로부터 촉발된 앎을 향한 호기심 어린 기대와 열망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듯 자기반성을 통해 C2상태에 들어선 그 누군가는 점차 불빛에도 익숙해지고 본성에 맞추어 배움도 하나둘 잘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에 보았던 것들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의 그림자들에 불과하고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그것들의 원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앎은 본질적으로 동굴 속 불빛 아래에서 깨달은 앎인 한, 아직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벽면에 비춘 그림자의 원본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굴 바깥에 실재하는 실물들의 모형들 즉 그것들의 모상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굴 속 불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이른바 감각적 가시적 의견에 불과하고 동굴 바깥 태양의 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실재적 가지적 앎을 모사한 정도의 낮은 단계의 앎이다. 이에 따라 동굴 속 불빛 아래 눈부심을 통한 모상에서 원본에로의 상승은 동굴 바깥 세계 태양 빛 아래 실물들과 인간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루어지고 종국적으로 빛의 원천인 태양을 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 앎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대상이자 목표에 이르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동굴 속 즉 믿음의 세계에서도 앎을 향한 깨달음 내지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전환이 가능한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을 어둠에서 불빛 쪽으로 돌리는 태도의 전환periagōgē은 나중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듯(517c) 눈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실로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정도의 전환은 당연히 동굴 바깥 즉 가지적 앎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태도의 전환은 한발 한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작고도 수많은 지적 결단과 선택들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과 선택들 또한 전에 갖고 있었던 것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전진하는 것인 한, 그 또한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일종의 태도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지적인 앎을 향한 태도의 전환은 이처럼 가시적 세계에서 믿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즉 동굴 속에서 고개를 돌려 빛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곧이어서(518d) 확인해주고 있듯이 태도의 전환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영혼의 덕aretē이란 이런 작은 규모의 태도 전환들이 쌓이고 쌓여 몸에 밸 정도로 습관ethos화되고 단련askēsis이 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림자에서 모형으로, 모형에서 실물의 그림자로, 실물의 그림자에서 실물로, 실물에서 진정한 실재로의 상승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진정한 혁명이나 해탈이 그러하듯이 정의 자체 진실 자체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 다짐과 분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그리고 영혼의 오름길에 들어선 이들의 지적 결단과 선택들은 본성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굴 바깥을 보고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보이는 그 누군가의 이끌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비유 상 누군가를 이끄는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온 철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굴 속에서도 이미 지성nous이 들어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학 교육이 믿음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그 믿음을 넘어서게 하는 지성의 훈련이라면 이렇게 철학의 인도를 받는 그 누군가의 영혼은 그 훈련을 통해 ‘믿음’을 넘어 ‘사고’를 거쳐 ‘형상적 앎’에 이를 정도로 점차 순수함이 더해지고 그만큼 더 강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설사 그가 아직 동굴 속에 있을지라도 최소한 등정anodos을 감행하고 있는 한, 본성에 맞게 이미 그는 그 지성의 인도를 감내하고 수용하는 앎을 갖추고 있다. 굳이 이 앎의 단계를 앞서 살핀 이상 국가에서 찾는다면 나라의 구성원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앎 즉 철학자왕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앎으로서 절제sophrosynē의 덕aretē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바탕이 없으면 동굴로부터의 탈출 즉 철학의 지배 자체가 불가능하다. 철학 교육은 그 길고 지난한 교육과정을 통해 소수의 철학자 왕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본성을 일깨우고 그에 맞는 그들의 탁월함aretē 또한 길러낸다. 이상 국가는 그와 같은 다양한 탁월함의 공존과 조화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동굴 속 불빛에 점차 익숙해진 그 누군가는 그것에 비친 모형들도 충분히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들이 옛날 자기가 본 벽면 그림자들의 원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를 이끌고 가는 사람은 그 모형들 역시 동굴 바깥 실재하는 것들의 모사에 불과한 것임을 깨우쳐 주면서 다시 그를 부추겨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로 그를 인도한다. 지금까지의 길도 쉽지 않은 오름길이지만 ‘거칠고trachys 가파른anantēs’이란 표현이 여기서만 쓰일 정도로 C3 단계의 오름길은 동굴 바깥에 이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동굴 속 오름길 중 가장 험난하고 가파른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굴은 벽면에서 입구까지 똑같은 경사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불빛을 지나면서 위로 꺾여 경사의 정도가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오름길에는 C2 단계의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고 동굴 입구에 이르기까지 다만 동굴 밖 멀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만 드리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오르는 사람은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지만 그를 이끄는 사람은 가파른 길을 다 오를 때까지 그만큼 더 그를 강압함에 따라 그는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j) 그리고 이곳에서는 앞에서 본 모형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질 않아 뭔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동굴 입구까지 도달했음에도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 지금까지 기대했던 참된 것은 차치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또다시 놀람과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누군가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차츰 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으로 동굴 바깥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보고 다음으로 물 같은 것에 비친 인간들의 영상들을 접하면서 비로소 동굴 바깥 실재 세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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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3의 상태를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면 추론적 사고 단계에 상응한다. 그리고 C3 단계의 오름길이 앞의 길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단계가 이전 단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전의 단계는 감각적 경험이 중시되는 가시적 세계이고 이후의 단계는 감각이 탈각되고 추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물 공간이 아니라 논리적 공간에서 추론적 사고가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에서 추론적 사고 단계는 가지적인 세계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511d) 이 점을 고려하면 C3의 동굴 속 위치는 끝에 가서 실물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굴 바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동굴 속 불빛 즉 감각의 세계를 떠나 입구에 이르기까지 가파르고 험난한 추론적 사고의 길 즉 오름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C3의 위치는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중간 즉 경계인 동굴 입구 위아래로 걸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여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선분의 비유에서는 추론적 사고가 상대적으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과 달리 이곳 C3 단계는 가장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 역시 비유 간 취지와 성격이 각기 다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C3 단계의 철학적 특징보다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 막바지 어려움이 강조되고 철학적으로는 동굴 바깥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비추는 실재 세계와 그로부터 다시 어둠 속 동굴로 귀환하는 여정이 가장 큰 비중을 갖고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선분의 비유 상 수학적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동굴 바깥 실물들과 인간들의 그림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C1의 대상과 C2의 대상 간의 관계 역시 상상(L1)과 확신(L2)의 관계가 그렇듯이, C3와 C4의 대상 또한 둘 다 가지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이지만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에 있는 것들임을 보여준다.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사람은 그림자들과 영상들을 본 후 차츰 익숙해지면서 동굴 바깥 실물들과 바깥 세계에 사는 인간들 ‘자체’auto를 본다. 그 실물들과 인간들 자체를 보았다는 것은 ‘형상’eidos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깥쪽 실물들은 원천적으로 동굴 속 모형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 곧 원본 즉 형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경우 수감자들과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이끌고 오는 사람들 모두 인간의 모형일 뿐이고 바깥쪽 사람들만이 인간의 원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또한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자체라는 비유 자체가 현상과 본질, 믿음과 형상의 대비를 함축하는 한, 비록 보기에는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동굴 속에 있는 사람과 동굴 바깥 또는 동굴 바깥을 이미 경험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굴 바깥으로 나와, 사람들과 자신이 햇빛 아래에서 같은 사람임을 깨달은 순간 그 누군가는 이미 이전의 자신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들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물들과의 관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타자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앎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는 동굴 바깥 세계를 밝게 비추는 빛의 원천, 태양을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 자체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하늘 위 태양을 보았다가는 눈이 멀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선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부터 구경하고 낮에도 희미한 윤곽일지라도 구름 속 안개 속 태양의 모습을 보는데도 열성을 기울여야 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궁극의 깨달음은 마지막 단계에서 관조를 통해 통으로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열성어린 고행의 오름길이 보여주듯이 단계마다 작고도 수많은 깨달음들이 하나하나 점진적으로 쌓여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l) 그러한 열성 어린 마음가짐과 준비 끝에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 위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그것도 잠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잠깐일지라도 태양이 인간과 동식물을 비롯한 이 존재세계를 낳고 기르는 지고의 실재임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과 그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그는 태양이야말로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자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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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의 단계인 L4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따로 언급되지 않지만 그것에 상응하는 이곳 C4에서는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L4와 C4가 상응 관계상 아주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C4에도 이미 태양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C5를 따로 구분하여 그곳에 태양을 위치시킨 것 또한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굴의 비유에서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까지 추가되어 있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C5를 따로 독립시켜 구분한 것이다. 아무려나 이 구분들은 플라톤이 설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구분한 것임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두기로 하자.

* 여기까지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수감자가 본성에 맞게 풀려나 누군가에 이끌려 힘들고 가파른 오름길을 지나 동굴 바깥에 이르러 실물들의 그림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태양을 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러한 여정은 직접적으로는 무교육 상태에서 교육 상태로 발전 전환하는 과정 다시 말해 배움의 가장 아래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교육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마치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그리고 있듯 어떤 인도자에 이끌려 아름다움을 보도록 강제되어 몸의 아름다움에서 부터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영혼의 아름다움, 앎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럿을 거쳐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 단일한 형상에 이르는 모습(210a-212a)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제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들의 갈등 양상과 그 극복 과정과 관련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수감되어 결박된 상태는 현실 정치 일반에서 자주 목격되는 정치 지배 권력의 대중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관철된 상태를 보여주고 ‘일어나 고개를 돌리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그 정치적 억압이 갖는 부당함에 눈을 뜬 후 각성된 비판적 문제의식과 용기로 궐기하는 모습을, 그리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때론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불안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바깥에까지 이르는 것은 온갖 불리한 여건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여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일깨워주듯 개인 차원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현대 사회에는 무의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비합리적 초자아의 지배를 도덕의 이름으로 평생을 참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개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들도 어떤 계기로 자신이 욕망하는 존재임에 눈을 뜨고 정신 분석가들의 진단과 충고에 이끌릴 경우, 그는 점차 자신을 견고하게 에워싸고 있던 온갖 자책과 위선, 죄의식과 심리적 장애를 이겨내고 자신의 원천적인 욕망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 욕망의 주체로서 진정한 자아를 되찾곤 한다.

* 성서에는 늙은 나이에 간신히 자식을 가진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는 몇 줄도 안 되는 그 짧은 내용(<창세기> 22장 1-19절)을 신 앞에 홀로 선 인간의 실존적 삶의 정황으로 파악하고 아브라함의 그 심적 고뇌를 철저히 음미하고 세세하게 풀어내 <공포와 전율>(Furcht und Zittern)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는 과정은 종교와 관련한 상황이라는 차이만 제외하면 동굴의 비유 속 그 누군가의 여정과 크게 닮아있다. 그 내용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자식 하나를 얻어 행복에 잠겨 있었지만,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신에 순종해야 하는 믿음에 따라 아내 사라도 모르게 홀로 어린 자식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오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은 물론 왜 제사에 쓸 제물은 없냐는 이삭의 물음에 가슴 찢어지는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또 나중 자식을 제물로 바친 후 돌아와 주변으로부터 쏟아질 차가운 시선과 비난 그것도 자식을 죽인 아버지 천륜을 어긴 자라는 최악의 도덕적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지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 모두가 신의 명령에 반하는 세속적 인간적 집착임을 깨닫고 산 위에 올라 오롯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슴에 안고 신의 명령대로 어린 자식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험을 이겨내고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그 모든 세상 욕망 일체를 내던지는 그 결단의 순간 그에게 멈추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 후 그에게 신앙의 선조라는 명예와 함께 장차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 모래만큼 자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세상의 축복까지 내려진다.

* 이렇듯 동굴의 비유 전 과정은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어떤 영역 어떤 형태이건 정치적 억압과 해방, 종교적 죄와 구원, 미망과 해탈, 개인의 심적 장애와 극복, 비판적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중대 전환 등과 관련한 주제들에 두루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동굴의 비유가 단순히 그 주제들과 관련하여 앎과 무지, 빛과 어둠, 타락과 구원, 동굴의 바깥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플라톤을 경직된 이원론의 원조라 부르는 통속적 이해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듯이 그가 존재와 무(無) 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고 나면 금방 풀리는 곡해에 불과하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굴의 비유는 단순히 동굴 속과 바깥만 이 아니라 결박에서 풀려난 사람이 오름길에서는 물론 다시 동굴로 귀환하는 내림 길에서 온갖 난관들을 이겨내는 과정 즉 동굴 속과 바깥 사이metaxy에서 분투하는 과정 역시 역동적인 방식으로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진지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명백성과 관련한 4가지 단계에 상응하는 학문들의 위계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다. 벽면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영상과 모방을 소재로 한 미술과 시가술의 영역을, 모형과 인공물들이 존재하는 단계는 제작과 관련한 일반 전문 기술 즉 경험과학의 영역을, 실물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수학과 기하학, 산술의 영역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실물과 인간들은 물론 태양이 그것을 비추는 단계는 철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영역의 위계적 상승은 그것을 모두 배제하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상상과 확신 그리고 사고가 각기 자기의 단계를 참의 단계로 여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지만, 형상이라는 지식을 정점으로 그것으로부터 기초를 제공받고 그 등급에 비례하여 명백성을 드러내면서 삶에 필요한 기술 수준의 앎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온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 그러나 동굴의 비유가 위와 같이 정치와 종교, 개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함축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 역시 기본적으로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그러하듯이 인간 역사에 나타난 여타의 다양한 철학 사상들과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한 문제의식과 목표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들 모두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처방에서 제각각이다. 특히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해방과 탈출, 구원과 실재 세계로서 동굴 밖 세계, 즉 단일하고도 지고의 지위를 갖는 실재로서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모든 것들의 근본 원인이 되고 이해의 궁극 근거가 되는 플라톤의 세계는 범신론적 종교는 물론 상대주의 또는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내세우는 모든 철학 사상들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이 동굴의 비유를 매개로 그러한 철학 사상들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진실을 향한 투쟁과 실천은 포기되어선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철학적 지향을 갖든 치열하고도 냉철한 자기반성과 비판을 통해 집요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실천 자체가 보다 ‘좋은’agathos 삶과 세상에 대한 믿음pistis과 희망elpis, 그 구현을 위한 지혜sophia와 용기andreia를 끊임없이 북돋고 견인한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서구 지성사에서 위대한 사상들이 공유하고 있는 진실을 향한 그와 같은 여정이 철학적인 깊이와 체계를 갖고 처음으로 음미되고 성찰된 것은 2500년 전 플라톤에 서부터였다는 것도 의미 있게 되새겨 볼 일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그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이제 각고의 노력 끝에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에 도달했음에 행복해하지만 다른 한편 지금도 동굴 속에서 결박 상태에 있을 동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동굴 속에서 본성에 맞게 태도의 전환을 감행했던 것처럼 그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회원동정] 김정철 회원 <제6회 주역학술상> 수상(2025년 2월 14일) [한철연 소식]

한철연 연구협력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정철 회원(숭실대 기독교문화연구원)이 지난 2025년 2월 14일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에서 거행된 2024년 한국주역학회(회장 이선경) 하반기 학술대회에서 <제6회 주역학술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수상 논문은 “『홍범황극내편보해(洪範皇極內篇補解)』의 판본과 이순(李純)의 상수역학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홍범황극내편보해』를 중심으로 –”입니다. 동양철학연구회에서 발간하는 『동양철학연구』 제115집(2023년 08월 28일)에 게재되었습니다.

<주역학술상>은 한국주역학회에서 제정하고 백야학술장학재단 호전학술상위원회에서 출연한 재원으로 매년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주역학술상 심의위원회 심사에서 김정철 선생님의 논문이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어 수상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학술상 수상에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후속 연구가 기대됩니다.

아래, 김정철 선생님의 수상 논문과 수상 사진 및 해당 자료를 올립니다~

 

논문 다운로드 : 홍범황극내편보해의_판본과 이순(李純)의_상수역학, 김정철 2023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8회|6. 다시 강의실로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8회

6. 다시 강의실로 (3)

 

강의가 다소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학생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강의 시간도 끝날 때 쯤이라 그 정도에서 마칠 수 있었다. 이 날은 원주에서 선생들 끼리 회식이 있다. 서울에서 멀리 출강하는 강사들을 위해 철학과의 과장 교수가 한 턱을 사는 날이다. 술을 마시고 뒤늦게 버스 편을 이용해서 올라가는 선생도 있고, 차를 몰고 내려 오는 선생은 음주는 하지 않고 올라간다. 이때 그이의 차에 편승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술자리는 즐겁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고, 술 한 잔 들이키면서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도 즐겁다.

 

“L 선생, 요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그렇게 공부하는 게 재밌어요? 논문 열심히 쓴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선배 교수가 덕담 수준으로 말을 건넨다.

“별 말씀을요. 뒤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를 따라 잡느라고 애를 많이 쓸 뿐이지요.”

 

서울에서 내려오는 강사들의 수업 시간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한 꺼번에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오늘은 그래도 많아서 5명이나 참석했다. 개중에는 독일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지 얼마 안 되는 선생이 있었고, 또 한국 철학을 하는 후배도 있었다. 이 선생은 퇴계의 철학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퇴계의 정신을 따라 작시(作詩)도 잘 했다. 그는 술자리에서 자기가 지은 시라고 하면서 낭독도 하곤 했다. 작시를 특별히 어렵게 하지 않고, 소재도 주변의 일상에서 찾은 것들이라 이해하기도 어렵지가 않았다. 그가 시 한 수를 뽑고 나서 바로 노래도 한 곡 부른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 오른다. 여기 저기서 장단 맞추는 젓가락 두들기는 소리도 난다. 서울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졌던 분위기가 소도시인 이곳에서 다시 기억을 일깨운다. 다들 같은 대학의 철학과 선후배로 이루어져 있어서 술 몇 잔 들어가면 그냥 형 동생 하는 사이다.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든 이런 끈끈한 분위기가 술자리를 매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날 늦게 까지 술 자리를 이어가다가 거진 밤 10시 쯤 돼서 헤어졌다. 나는 마침 서울로 귀환하는 후배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는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단련된 운전 솜씨가 대단해서 나는 믿고 잠시 눈 좀 붙였다. 그런데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말한다. “형, 집에 다왔어요.” 벌써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한 것이다. 덕분에 아주 편하게 왔다.

지방의 소도시로 출강하는 수업은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즐겁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1주일에 한 번씩 여행을 다니는 기분을 즐겼다. 서울에서 여러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이렇게 한 번 씩 서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소수의 학생들을 상대로 전공 강의를 하는 것도 좋았다. 학자는 어떤 경우든 논문을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전공 강의가 도움이 된다. 전임과 시간 강사의 차이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전임은 우수한 학생들을 데리고 학부 전공이나 대학원 수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반면 강사들은 그저 피상적인 교양 과목만 담당하는 것에 있다. 전임은 강의를 논문 쓰기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반면, 시간 강사들은 교양 과목 수업 준비만 하다가 허송세월 보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런 강사들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학위 논문을 쓰는 학생들의 멘토로 이어주면 어떨까라는 제안도 해보았지만 아쉬울 것 없는 전임들은 그저 귓전으로 들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천 하룻밤 이야기]

변역(變易): 맑스 말대로 이 쿠데타가 희극일까?

2025 02 18, 우수(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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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이 풀린다고 하는데, 한강이 얼지 않아서 강물이 풀린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지난 12월 3일 얼어붙었던 터전이 입춘에는 봄바람과 더불어 풀릴 것인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김건희와 함께)은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며 계엄령을 발동했다. 바로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의결했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도록 계엄은 끝이 난 것 같지 않다. 게다가 그 계엄의 시행은 잘 짜여진 실행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광범위한 실행을 모의했다는 정도를 넘어서 사실 증거가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모골이 송연하다고 한다.

내란을 일으키려 시도하며 계엄을 실행한 세력은 광복공간에서 일제부역자들이 이승만과 더불어 하는 짓을 반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중이 대체할 방법이 없이 당했던 시절과 달리, 누리소통의 시대에 각성한 인민이 잘 대처하고 있다. 세월은 흐른다. 70년 전 입말의 소통이 거의 없던 시절과 달리 70여 년 동안 입말이 풍부해졌고, 인민이 누리 소통을 통해 자발적으로 문화 창달과 홍익인간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 있다. 20세기 철기시대의 전성기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미국 제국의 반쯤 식민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한문도, 일어도, 영어도 아닌 우리 입말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이로 부터 79년이 지나, 규소시대의 흐름의 한 중간에 와 있는 것 같다. 이 시대에 누리 소통이 빛의 발산처럼 널리 빠르게 확장되고 전달되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 젊은이가 천지인(天地人)의 문자로 입말로 세상을 바꿀 것이다.

*

세계사에서 서양은 천5백 여 년의 크리스트교라는 종교시대를 거쳐서, 350여 년의 합리주의시대, 그리고 인간의 각성과 더불어 실증주의시대에서 부르주와의 등장에 이어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를 열었고, 식민지 수탈의 제국주의시대에 소비에트가 성립했으며, 미국이라는 제국시대의 시작에 동양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용화세계를 만들려고 천년의 불교시대를 거쳤으나, 고려 말에 중생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사찰(寺刹)의 토지소유를 개혁하려다가 고려왕조가 무너졌다. 조선조 500년의 유학(儒學)시대를 거쳐 가는 마지막 100여 년에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생각하는 선각자들이 실증적 학문인 실학(實學)과 민중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을 지닌 노론이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광복에는 일제 부일자들이 미국 제국에 빌붙어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수법을 쓰면서 600여 년의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자들의 기득권이 유지되었다.

동서양이 비슷한 위도 상에서 역사를 이어가는 나라들에서, 문명사적으로 종교시대를 거쳐서, 학문적 논리의 시대를 지나, 대중과 민중, 인민과 프롤레타리아 시대로 변역하고 있었다. 사실은 각 시대마다 동일성을 유지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각각은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변역의 과정에서 상층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항상 권력과 돈(재화)을 차지하였다. 21세기 윤석열 집단도 권력과 돈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저항하는 세력과 더불어 인민이 그를 파면하려 한다. 18세기 말 이래로 인민주권과 인민 최종심금은 역사 속에 한 찰나처럼 여기지지만, 전 지구상의 인류의 기억 속에 지층의 두께처럼 내재해 있다.

*

조선시대의 변역은 지배세력의 일방통행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으로부터 지지받는 새 왕조의 지위를 만들기 위해 우리 입말을 문자로 쓰는 과학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 입말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뒷방의 글로 밀려났다. 조선 왕조 안에서 상부로부터 개조와 개혁의 노력들이 있었다. 연산군 시대에서부터 시작했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상부의 세력은 부동이었다. 훈구파들이 사림파 김종직 학파를 제거하는 모오사화와 기묘사화를, 그리고 중종 시절에 수구파들이 개혁파인 조광조의 일파를 제거 하는 기묘사회를 일으킨 역사에서도 있었다.

조광조 이후에 유학자들은 은둔지사로서 자신들의 안위를 보존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고들 한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서, 두 차례의 외국(일본과 청나라)의 침입에 의해 피해해진 강토에, 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사라진 나라인 명나라를 존중한다면서, 사대주의로서 유학 중에서도 신유학의 주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삼아서, 이에 반하는 글을 쓰는 자를 통제하기 위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기괴한 사상 통제의 지침을 만들었다.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난적으로, 요즘 표현으로 빨갱이 사냥을 한 것이다.

정조가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실학자들과 더불어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로 이어진 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후에 다시 이익집단인 노론의 지배로 돌아갔다. 19세기 중반부터 우리나라가 세계사와 마주칠 때 젊은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극우집단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와 손을 잡고 나라를 팔아 넘겼다. 이런 과정에서 백성은 가난과 탐관오리의 착취 속에서 살아갔다. 백성이 서로 “니르고자 할배 있어도” 백성들 사이에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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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일요일에 광주에서 탄핵반대 집회를 한다고 전국에서 교회들이 많은 버스를 동원해서 집회를 하였는데, 이는 광복 후 우리역사에서 뒤바뀐 국면을 연출한 사건이 있었다. 얼핏 해방공간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信託統治誤報事件)을 떠올렸다. 소련이 반대하고 미국이 찬성했다는데,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난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잘못된 보도를 내보낸 사건이다. 오보는 행방정국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민족의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공간에서 세상은 달리 흘러갔다.

이런 시기에,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하고 혼란에 빠졌다. 스스로 소통할 수 있는 입말도 갖추어지지 않는 시기에, 미국을 등에 업은 기독교 세력이 서북청년단을 만들어서 일제부역세력들과 더불어, 반민족처벌특별위원회를 해산시켰고, 제주도 도민을 학살하였다. 이때 민중은 이들에게 저항할 여론을 집결시키지 못했다. 인민이 자주적으로 의사를 결집시키고 퍼뜨릴 도구가 없었다. 부역자들과 기독교세력이 함께 반민족처벌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갔다. 냉전의 부산물인 우리나라 남북 전쟁은 삶의 터전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중생이, 백성이, 민중이, 인민이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사유에서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촛불시위에 다음으로 찬란한 불빛시위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치며 축제를 벌였다. 이 둘째의 탄핵 심판에서 인민이 최종심급임을 의심하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히 검찰독재 세력도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속사정을 모르는 근거 없는 낭만주의라고 한다. 나도 저 독재세력이 조선조에서부터 훈구파, 수구파, 모화파, 부일파, 숭미파로 이어져온 역사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백성의 입말보다 상부의 언어와 용어로서 지배해 왔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민중 또는 인민이 자각하고 소통하는 도구를 가졌으며, 스스로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몇 가지 점에서 이들 극우파들이 인민에 의해 밀려난다고 생각한다.

*

하나는 사람들이 코로나의 방어를 슬기롭게 거친 우리나라는 지구상의 중요한 나라로서 지위를 가져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DNA라든지 바이러스의 면역체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질병대처의 방식에서 각 나라가 우리방식을 모방하거나 부러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 속에 생물학적 질병과 위험에도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세계 정상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고나니 선진국의 대열에 서있다고 했듯이, 우리는 어떤 국면에서 세계의 중요국가와 나란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각이 자주(自主)를 부추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류 문화도 중요하다. 대중음악에서,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연주자들에서, 그리고 식생활에서 우리방식이 다른 나라들에게 일반화하여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계에서 지위 상승에 스포츠도 빠질 수 없다. 그럼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노벨 문학상에 우리의 젊은 세대의 기수인 한강 작가가 올랐다. 나로서는 어떤 문화적 양태보다 우리글이 세계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말하자면 우리 입말이 문자로서 알려진 것이다. 이번 계엄에 대해 근거없는 낙관주의라고 할 때, 나는 우리 입말과 문자가 인민의 소통기구가 되었기에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오고 최종심급은 인민의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우리말을 입말 쓴지 79년 만에, 그리고 87년 항쟁이래로 우리글을 가로쓰기 신문이 나온 이래 38년이 지나서 인민의 시대를 열었고, 우리글로 세계문학사에 한 시대를 열었다. 자치에서 자주로 한 단계를 올라섰다고 해도 좋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누리소통(SNS)은, 권력의 지배방식과 전혀 다르게, 널리 공유되고 있다. 지식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은 도서관(문자, 음악, 영상)에서 라고 하지만, 인공지능(AI)의 속도와 확장은 코로나 이후 5년 사이에 지금까지의 문명사에서 만들어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하였다. 그 거대한 양에 짓눌릴 것 같지만, 어느 시대에도 부정확한 사례들이 넘쳐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화되고 정리되어 갔다는 것이 인류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극우파들의 가짜뉴스와 짜깁기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 유투버와 텔레그램 등이 성행한다고 젊은이들이 모두가 그 속에 함몰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든지 탐욕과 오만이 겉보기에 화려하게 보여도, 내공을 쌓으며 노력하여 얻는 성과와 작은 좋은 일들을 쌓아가는 선량들이 이 세상을 환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근거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라니깐.

이러한 세상의 변화에 늙은이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방식에 대해 진솔하게 마주하고 노력한다. 늙은이들의 괜스런 걱정은 늙은이 자신들의 걱정이며 젊은이에게 전가할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자치와 자주를, 태어나면서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젊은이는 자신들이 살아갈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변화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게다가 5년 정도 사이에 비약적인 소통의 발전에서 젊은이가 스스로 노력하며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철기시대에 보편적 동일성의 요구가, 지금으로 보면 탐욕과 오만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다. 규소시대 다양한 삶의 양식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자율성이 이미 몸에 밴 채로 움직이고 새로운 생산을 하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겪지 않았어도, 윤석열의 쿠데타가 젊은이 자신들이 살아갈 삶에서 걸림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촛불시위와 다른 불빛시위가 그들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문화이며, “다만세”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젊은이들이 달리 생각하는 가운데, “틀딱”과 성조기부대들이 역사 속에서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입틀막”이나 “입벌구”라는 용어가 윤석열과 김건희같은 이들이 방식으로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근거 없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진실이다. 바로, 천지인(ㅣ,ㅡ, ㆍ)의 삼글표를 기본으로 하는 젊은이가, 크리스트교의 삼신앙이든 철학에서 삼위격이든 간에 지나간 것에 비해, 현실에서 소통의 삼글표가 자율성을 발현하는 도구임에 틀림없기에, 즐겁고 유쾌하게 다음 열릴 시대를 기대할 수 있다.

*

유일신앙자들이 여섯 먹은 꼬마처럼 자연을 자동인형처럼 철없이 탐욕과 놀이의 도구로서 대하다가, 자연에 자치가 있다는 합리주의시대,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자연에 자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자연이 자율성이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이런 자율성의 사유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에 가깝다면, DNA에 이르러 이제 자발성의 발현의 시대라고 깨닫는다. 이 자연의 자발성을 견디지 못해,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교회가 구시대의 서북청년단과 백골부대 같은 무리들을 동원하고 있고, 인터넷 속에서 신천지의 댓글부대와 명태균의 여론조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양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젊은이의 시대이다. 마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적으로처럼, 인민 속에서 인민과 더불어 인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벩송은 말한다. 삶이 먼저이고 사유한다(철학한다)는 다음이다. 서양철학사가 이상한 사고와 결합하여 신이 먼저고, 다음에 사유하고, 그리고 산다로 만든 시대가 끝났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의한 자연의 방식으로 사는 삶은 노력이고, 어느 생명체나 자기 강도(내공)를 높이고 있다. 이 강도를 우리는 내공이라 부른다. 열여덟까지 일반화의 방식을 가르친 대로 배웠고, 노력과 내공은 열아홉에서 서른여덟까지 자치를 통한 자율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돌아보며 노력하고 내공을 쌓는 이들을 만나러, 자연을 통한 지식의 광장으로(AI와 DeepSeek가 아니라) 떠나는 다양한 여행도 필요하다.

이 쿠데타가 희극이 되는 것은 낭만주의가 아니라, 젊은이의 내공과 노력에 있다.

이 세상은 젊은이에게 달려 있다.

(4:12, 58MLH) (4:29, 58MLH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서평|글: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칠순의 아버지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빠르게 몸의 기능들을 잃어갔다. 아침 산책을 나서지 못할 만큼 걸음걸이는 불안정했고, 자식들에게 생일 축하 카드를 써줄 수 없을 만큼 손떨림이 심했다. 식탁에서는 최상위 포식자로서 쾌락을 누리기는커녕 음식을 흘리며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병이 깊어지던 시절의 아버지는 증상의 일부로서 얼굴 근육이 굳어갔지만 많이 놀라고 슬프고 상처 입은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돌이킬 수 없는 끝을 향해 가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의 정신적 공황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문화의 관행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환자로 치료에 임하고 가부장답게 징징대지 않고 씩씩한 척 연기하며 몰락을 향해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를 읽으면서 아버지의 투병 과정과 죽음 직전의 순간들이 되살아났다. 질병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간의 삶 속에서 추방된 ‘타자’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질병을 말할 언어를 갖지 못했으므로 가족에게 자신의 병을 말하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간의 거리를 허물지 못했다.

의료사회학자인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는 분류하자면 학술서에 해당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프고 죽고’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온전한 사유를 가로막는 근대 의학(“모더니스트 의학”)과 인간에 대한 전능성의 신화를 기반으로 한 주체 철학을 학자로서 넘어서고자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심장병과 고환암 선고를 받고 투병했던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어 일반적인 학술서와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다. 아픈 사람의 좌절과 고독에 공감하며 아픈 사람들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증후군을 겪고 있는 주디스 자루쉬스의 말을 인용해 저자는 “심각한 질병은 심각한 질병은 그 질병에 걸린 사람의 인생을 안내해 오던 “목적지와 지도”를 잃게 만든다. 아픈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배워야만 한다.”(50)고 침통함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아픈 사람은 더 이상 지금까지의 지도로 살 수 없으므로 다른 방식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명료한 진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제 욕망을 내려놓고, 소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껴보자는 식의 뻔하고 기만적인 조언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언제나 치료의 객체, 즉 대상의 자리에 머물기를 요구받으며 자신의 질병을 낯선 것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당신의 질병을 새롭게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질병과 이야기를 연결시켜, 아픈 몸에 대해 말하고 이를 통해 질병과 더불어 살며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자고 말한다.

아픈 몸이 말하도록 하자고 저자는 설득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것인데도 우리는 질병에 대해 정교하고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대부분의 아픈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언어나 대안이 없기 때문에 막연히 좋아지기를 바라며 의학에 자신을 맡기고,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좀처럼 사유하지 않는다. 근대의학의 권위와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 혹은 전능한 인간의 환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질병에 관해 말하고, 그것과 화해할 틈조차 박탈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렇듯 자신의 질병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억눌릴 때, 아픈 사람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노출되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기회와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근대 의학과 주체중심주의에 의해 입이 틀어 막혔던 아픈 사람이 인간의 취약성을 폭로하고, 아픈 사람을 병리화, 타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질병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픈 사람이야말로 이야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애수」는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삶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늙은 마부는 아들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을 몰며, 손님에게 아들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마부가 죽은 아들을 애도하고, 아들의 상실이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수용해 가는 방식이다. 이 소설은 마부가 자신의 슬픔을 들어줄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신처럼 늙은 말에게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됨으로써 고통은 이야기와 청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픈 사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의사와 회복에 대한 낙관만이 아니라 자신을 사로잡는 고통, 즉 질병을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들어줄 사람인 것이다. 아픈 사람은 질병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생애를 구성하는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 이야기가 치유와 회복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아픈 사람들을 식민화하고, 더 지독한 암흑과 절망 속으로 던져 버릴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아서 프랭크는 자신이 암 환자였던 경험을 토대로 아픈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질병에 대한 서사 유형을 복원, 혼돈, 탐구 등 세 가지로 나누고 그 특징과 의의 및 한계를 분석한다. 복원의 서사는 질병이 없던 이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에 바탕을 둔 것으로 투병기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유형이다. 저자는 복원 서사를 제도 의학과 병원 너머의 더 강력한 이해관계 집단들이 질병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모든 고통에는 치료약이 있다는 모더니스트 기대”가 투영된 이 서사는 환자가 의학의 권위에 순응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환자에게서 필멸의 현실과 책임을 박탈한다. ‘혼돈’은 질병의 좌절과 공포에 노출되어 앞으로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절망에 파 먹힌 이의 이야기 유형이다. 혼돈 서사는 “비(非)-자아-이야기”(222)로 고통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간 순서의 감각도 없고 고통에서 목적을 발견하는 자아도 없기 때문에 글쓰기에는 서사성이 결여되어 있고 구멍도 많다. 혼돈 서사의 주체는 자신을 삶의 근본적인 우연성에 통제 없이 휩쓸린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며, 수치심과 절망에 압도되어 타인에게 지원이나 위안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혼돈의 서사는 아픈 사람들을 절망에 가두고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극복이 필요한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탐구’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만의 질병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가능성을 열어놓는 서사 유형이다. 탐구 서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질병이라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앞으로 아픈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써나가야 하는가’다. 저자는 올리버 색스나 오드리 로드의 투병기를 탐구 서사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비록 질병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중단이지만, 질병을 통해 우리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고 또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한 인격의 변화나 자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암에 걸린 오드리 로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프고 유방을 도려낸 여성들과 연대함으로써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소수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었다. 사라 아메드의 말처럼 불행이나 고통은 단순히 우리의 주체 역량을 갉아먹기에 부정되거나 회피해야 할 나쁜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현장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집중을 촉구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윤리적 정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출판·독서 시장에서는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질병 경험을 고백하는 1인칭 자기 서사들이 문화적, 미학적 우세종이 되고 있다. 그간 의학은 진단과 설명의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질병을 사회와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아픈 사람을 의학의 권위를 증명할 수단으로 객체화, 상품화해 왔다. 물론 정확한 진단과 치료는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의학의 진보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질병 경험은 질병이 한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학적 서사로는 해명될 수 없는 경험을 삶 속으로 통합해낼 수 있는 당사자들의 질병에 대한 말하기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 또한 질병이 단순히 자기관리의 실패나 삶의 중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면 당사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하고 해석 주체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하며, 당사자의 이야기는 정상을 자처하는 이들의 자기 확신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가 공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는 시의적절하고도 긴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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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몸을이야기하기-보도자료-fin


형이상학 산책26 -규정과 양상, 소금과 락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형이상학 산책26 -규정과 양상, 소금과 락스

1)

논리학 2장 현존 장은 세 절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그리고 양자의 통일성으로 실재성은 그 가운데 1절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들의 핵심에는 감각적 성질이 있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빨간색이나 단맛 등이다.

1절의 내용은 단일한 감각적 성질이 지닌 논리적 범주의 분석이다. 2절에 이르면 새로운 논리적 범주가 등장한다. ‘규정’과 ‘양상’, ‘내재존재’와 ‘한계’, ‘당위’와 ‘제한’ 등의 범주다. 3절에 이르면 질적인 무한성의 범주가 등장한다. 앞에서 1절의 내용을 파악하였으니 이제 2절로 들어가기로 하자.

2절에 이르면 너무나 유사한 범주가 난무하여 그것들을 가려내는 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더구나 1판과 2판의 내용이 상당히 달라 그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다.¹이 미로에 들어가려면 아드리아네의 실꾸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현상학에서 경험적 인식의 발전이다.

주1: 앞에서도 말했듯이 1판에서는 내재 존재와 한계가 먼저, 규정과 양상이 나중에 나온다. 2판에서는 규정과 양상이 먼저, 내재 존재와 한계가 나중에 나온다. 필자가 보기에 2판은 헤겔 자신이 수정한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2판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1절과 2절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1절의 마지막은 ‘실재성’인데, 2절의 출발점은 ‘어떤 것’이다. 그게 그거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결정적 단절, 또는 비약이 있다. ‘실재성’은 단일한 감각적 성질이다. ‘어떤 것’은 앞으로 개별적 사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인데, 그 핵심은 여러 감각적 성질의 교차적 관계에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사용한 예를 끌어들이자면 소금과 같은 것이다. 소금은 짜고, 희며, 입방체다. 소금은 이 세 가지 감각적 성질이 교차하여 이루어진다.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성질의 교차는 지각의 단계에서 출발점이 되니, 논리학에서 1절에서 2절로 나가는 것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에서 지각으로 이행하는 것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실재성에서 어떤 것으로 나가는 데 인식 경험의 발전이 매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구체적 예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 소금에서 짜고, 희며, 입방체라는 감각적 성질은 처음 보면 서로 동등하다. 경험이 발전하면, 여기서 우연성과 필연성이 구분된다. 흰색은 소금의 우연성이지만 짠맛이나 입방체는 소금의 필연성이다. 그러나 인식 경험에 있어서 일단 처음에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소금에서 발견되는 감각적 성질이며, 이것들은 소금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소금은 이 세 가지 성질이 서로 교차하는 것이니, 바로 이처럼 하나의 성질이 아니라 여러 성질이 교차하여 성립하는 것이 어떤 것이다.

아직 이 어떤 것 즉 소금은 감각적 성질이 그 속에서 단순히 공존하는 것인지(그 경우 소금은 그릇과 같은 매체가 될 것이다) 아니면 이 감각적 성질이 서로 부정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개별자로서 소금(이 경우 헤겔은 사물이라 한다)을 이루는 것인지는 판단되지 않았다. 어떤 것에서 처음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 속에 여러 감각적 성질을 발견한다는 사실뿐이다.

이처럼 여러 감각적 성질이 교차하는 어떤 것이 출현하면서, 이제 하나의 판단 형식이 출현한다. 그게 바로 ‘이것은 흰색이고’, ‘이것은 짠맛이며’, ‘이것은 입방체’라는 개별 판단들이다. 이는 질적 판단에 속하며, 긍정 판단에 속한다. 그 이전에 실재성 즉 ‘감각적 성질’은 그저 술어일 뿐이며, 아직 구체적인 판단 형식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술어가 주어에 대해 정립되고, 이를 통해 판단 형식이 출현한다.

이렇게 어떤 것 속에서 아직 서로 동등하게 발견되는 감각적 성질을 논리적 범주로서 ‘규정성[Bestimmtheit]’이라 한다. 규정성은 실재성과 다르지 않지만, 사용되는 맥락에서 다를 뿐이다. 실재성은 어떤 감각적 성질을 하나의 술어로서만 볼 때를 지칭한다. 반면 규정성은 이미 다른 여러 규정과 함께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감각적 성질을 규정성이라 한 것이다.

하나의 규정성은 혼자 있는 법이 없다. 여러 규정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공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규정성[Bestimmtheit]은 다른 규정성 때문에 규정된[bestimmt] 것이다. 즉 흰색은 짠맛이 아니며 입방체가 아니다.

굳이 규정성을 타자에 비추어서 보지 않고, 추상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실재성이라는 범주에 해당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재성 역시 부정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실재성은 이미 어떤 개념 틀 안에서 다른 것에 대립하는 부정성이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색깔의 틀 내에서 파란색이 아니다. 그러나 규정성은 이런 개념 틀 밖에서 다른 규정성과 대립하는 부정성을 갖는다. 여기서는 어떤 것을 전제로 한다. 그 어떤 것이 지닌 다른 성질에 비추어 그런 성질이 아닌 것이 규정성이다.

앞에서 현존[질]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이 대타 존재는 다른 감각적 질과의 차이를 의미한다고 했다. 즉 빨간색은 단맛과 다르며, 둥근 것과 다르다. 그러면 규정성은 질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여기서 차이가 있다. 규정성이라고 할 때는 어떤 것 안에서 다른 규정성과 구별된 것을 말한다. 즉 소금에서 흰색은 짠맛이나 입방체와 구별되는 것이다. 반면 현존[질]에서 대타 존재는 어떤 것이 아직 출현하기 이전 상태이므로 모든 다른 성질과 구별되는 성질이라는 의미이다.

3)

‘질(대타 존재)’, ‘실재성’, ‘규정성’은 모두 동일한 감각적 성질을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다. 이런 맥락의 차이를 헤겔은 몰라도 우리 일반 사람은 구별하기 힘들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유사한 개념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규정성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즉 규정[Bestimmung]과 양상[Beschaffenheit]이다.

규정성[Bestimmtheit]나 규정[Bestimmung]은 용어 자체가 비슷하니 헷갈리기에 십상이다. 규정성에는 수동성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리고 규정은 일상적으로 어떤 것의 본질, 본분, 사명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차이가 짐작될 것이다. “철학자로서 나의 사명, 본분은?” 할 때는 ‘규정성’이 아니라 ‘규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식론에서는 규정 대신에 속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같은 것을 지칭하지만, 전자는 논리적 범주고 후자는 인식론적 개념이라는 차이가 있다.

양상[Beschaffenheit]은 어떤 모습을 지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라틴어로는 ‘modus’, 즉 언어에서 형용사나 부사 등에 해당하는 용어가 지닌 의미를 말한다. 보통 ‘양태’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우리 말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모습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딱 좋은데, 왠지 어감이 안 맞는다. 양태라는 말보다 양상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도 많이 쓰므로 앞으로 양상이라는 말로 번역하겠다.

경험이 발전하게 되면 이렇게 서로 교차하는 감각적 성질 가운데 우연성과 필연성이 구분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금에 있어서 짠맛은 필연성이고 흰색은 우연성이다. 어떤 것이 지닌 필연성은 어떤 것의 규정이 되며, 반면 우연성은 그것의 양상이 된다. 이렇게 구분해 보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는 구분이다.

규정과 양상이라는 논리적 범주는 어떤 것 속에서 여러 규정성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처음에 그것들 사이에 자격의 차이가 없으면 모두 다 똑같은 규정성인데, 어떤 것과 관련되는 자격에서 필연성과 우연성의 차이가 나타나면, 그 차이를 고려하여 어떤 규정성은 규정이 되고 어떤 규정성은 양상이 된다. 그러면 헤겔은 규정과 양상이라는 논리적 범주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보도록 하자.

“질이 단순한 어떤 것[etwas]에서 그 자체적인 것을 그 본질에서 어떤 것의 다른 계기인 ‘그 자신의 표면에 존재하는 것[an ihm sein]’과 합일하는 것일 때, 이러한 질은 그 어떤 것의 규정이라 불릴 수 있다.”(논리학 2판, GW21, 110)

“규정은 그 자체적 존재로서 긍정적인 규정성을 말한다. 이때 어떤 것은 현존하는 가운데 타자 즉 자기를 규정하게 될 타자와 뒤얽혀 있는 것에 대립하여 그 자체 존재에 적합하게 머무르며, 자기를 자기와의 동일성 속에서 유지하며, 이 동일성을 자신의 대타 존재 속에서 성립하도록 만든다.”(논리학 2판, GW21, 110-111)

“어떤 것은 외적 영향을 받아서 외적 관계에 사로잡히면 이런저런 양상[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외적인 관계에 양상이 의존하고 있으며,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은 어떤 우연한 것으로 나타난다. 어떤 것의 질은 이 외면성에 희생되면서 양상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논리학 2판, GW21, 111)

위의 구절에서 어떤 것이 가진 규정성 가운데 어떤 것의 자기 동일성, 또는 그 자체 존재에 속하는 것이 규정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즉 예를 들어 소금이라면 모두 지닌 일반성 즉 짠맛이 소금의 규정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소금이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소금의 본분, 사명이 곧 짠맛이라는 말이다.

반면 이 어떤 것에는 또 다른 규정성이 있는데, 그것은 이 어떤 것의 표면에[an ihm sein] 존재하는 것이다. 독일어 전치사 ‘an’은 어떤 것의 표면을 말한다. 표면에 있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이니 곧 그것이 지닌 양상이다. 표면에 있는 것은 다른 것과 부딪히면서 다른 것과 관계하여 구별되는 것이니 곧 대타 존재다.

이 대타 존재는 외면적인 것이기에 외적인 영향 아래서 늘 변화하는 것이니 우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상은 예를 들어 소금에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소금에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 않기도 하는 성질을 말한다.

4)

사실 필연성과 우연성 즉 규정과 양상의 구별은 상대적이다. 규정이든 양상이든 독자적으로 보면 감각적 성질로서 한편으로는 그 자체 존재와 다른 한편에는 대타 존재를 가지고 있다. 즉 일반성이면서 다른 성질과 구별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든 규정이 될 수도 있고, 양상이 될 수도 있다. 그 점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와 같이 타자를 자기 내에서 포괄하는 규정성은 그 자체 존재와 통합되면서, 타자 존재를 그 자체 존재 또는 규정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를 통해 규정은 양상으로 격하된다. 거꾸로 양상으로서 대타 존재는 고립되고 독자적으로 정립된다면, 타자 자체이며 그 자신에서 타자이며 자기 자신의 타자인 것으로 그 자체에서 된다. 그 결과 대타 존재는 자기 관계하는 현존이며 어떤 규정성을 지닌 그 자체 존재 즉 규정이다.”(논리학 2판, GW21, 112)

그러나 이는 가능성일 뿐이며 실제로 어떤 규정성이 규정이 되는가 아니면 양상이 되는가는 비교하는 맥락에 달려 있다. 앞에서 소금을 보자. 소금은 요리라는 관계에서는 소금의 일반성은 짠맛이다. 짠맛을 내는 소금 대체재 역시 짠맛 때문에 흔히 소금이라 한다. 이런 경우 짠맛은 소금의 규정이며, 소금의 성분은 우연적이다.

그러나 다른 관계에서 보자. 필자는 언젠가 소독제로 쓰는 락스의 성분이 소금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소독제라는 관계에서 본다면 소금의 짠맛은 우연적일 뿐이다. 락스를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짜지는 않을 거다. 소금 말고도 유사한 성분이 락스 재료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은 어떤 관계에서(주로 실용적 관계에서 그리고 주관적으로) 규정되는데 이 경우 개연적인 정도의 필연성이면 충분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런 필연성은 우연성에 속한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규정과 양상은 그 비교의 관계에 따라 서로 전복되는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 규정은 다른 관계에서 양상이 되고 어떤 관계에서 양상은 다른 관계에서는 규정이 된다.

“단순한 중심은 규정성 자체다. 규정이나 양상은 공통으로 그 중심의 동일성에 속한다. 그러나 규정은 독자적으로 양상으로 이행하고 양상 역시 규정으로 이행한다.”(논리학 2판, GW21, 112)